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필립 샌즈 지음, 정철승.황문주 옮김 / 더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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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_23 


"1914년 9월부터 1944년 7월 사이 리비우를 통치하는 세력이 여덟 번 바뀌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 로드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 및 아우슈비츠와 차토르 공국'이라는 긴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바로 그 '아우슈비츠'이다).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폴란드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독일로 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을 거쳐 마침내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레온 할아버지가 어릴 때 걸어 다녔던 갈리치아 왕국의 도로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마지막 날, 한스 프랑크가 600호 법정에 들어서게 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및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용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유대인 사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폴란드인들도 사라졌다. 리비우의 그 도로들은 20세기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축소판이며 문화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유혈 분쟁의 중심지였다."(30)


Part I 레온(LEON) _37 


"1914년, 비엔나에 도착한 레온의 가족은 '동유대인Ostjuden(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이민'으로 알려진, 갈리치아에서 비엔나로 이주한 수만 명의 이민자들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엄청난 수의 유대인 난민이 새로운 집을 찾아 비엔나로 왔던 것이다. 요제프 로트는 북부 기차역을 '그들 모두가 도착하는 곳'이라고 하고, 그 우뚝 솟은 홀은 '고향의 냄새'로 가득 찼다고 썼다. 비엔나의 새로운 거주자들은 레오폴드슈타트와 브리기테나우 등의 유대인 구역으로 이동하였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고 삶이 고단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많은 수의 난민이 동쪽으로부터 이주해 왔다. 게다가 반유대주의의 확산과 함께 국수주의자들이 반이민자 감정을 부추기는 형국으로 발전하자 정치권은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18년 8월에 결성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상대 당에 합병되었다. 그 당의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카리스마 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56-9)


"1933년 1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 독일 국회의사당인 라이히츠탁은 불에 타 사라지고 독일연방 선거에서 나치가 더 많은 표를 획득했다." "4개월이 지난 1933년 5월 13일 토요일, 새로운 독일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3발기인 독일 정부 비행기가 레온의 상점에서 멀지 않은 아스페른 비행장에 내렸다. 여기에는 새롭게 임명된 바이에른 주 법무장관이며 히틀러의 전 법률고문이자 친구인 한스 프랑크 박사가 이끄는 일곱 명의 나치 장관들이 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스트리아 총리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을 비합법화 한다는 조치들을 발표하였다. 그 때문에 돌푸스는 프랑크의 방문 1년 남짓 후인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들의 리더는 변호사인 오토 폰 베히터였다. 그는 10년 후 렘베르크의 나치 총독이 되었으며, 무장친위대 갈리치아 사단을 창설한 인물이다."(64-6)


"1938년 3월 12일 아침,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비엔나로 행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에 따른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은 독일로부터의 오스트리아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비엔나에 도착한 히틀러의 옆에는 새롭게 임명된 비엔나 총독, 아르투어 자잉스잉크바르트가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망명지 독일로부터 막 돌아온 오토 폰 베히터가 있었다. 며칠 만에 국민투표로 합병이 비준되었고, 오스트리아 전역에 독일법이 적용되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151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비엔나에서 독일 뮌헨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유대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도로바닥을 닦도록 학대하였으며,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유대인의 자산과 부동산, 사업 등록을 의무화하였다. 그리고 이는 레온과 매형인 막스가 운영하는 주류상점의 종말을 뜻했다."(71-2)


"나는 1944년 8월, 파리가 미군에 의해 자유를 되찾기 전 어렵던 시기에 (비엔나를 탈출한) 레온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아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거주 유대인 연합UGIF 소식지인 〈뷜땅〉Bulletin은 명령위반에 따른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과 강제 점령한 파리에서의 삶을 찍은 사진들을 게재함으로써 나치 규제의 플랫폼 역할을 하였다. 초기의 한 명령은 오후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유대인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1942년 2월). 한 달 뒤 유대인의 채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이 발표되었다. 1942년 5월부터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 왼쪽에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달아야 했다(레온이 일했던 품격 있는 19세기 빌딩의 UGIF 본부 사무실에서 제공). 7월에는 유대인들이 극장이나 다른 공연장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0월부터 유대인들은 매일 한 시간씩만 쇼핑이 가능하고 전화 소유가 금지되었으며, 지하철의 마지막 칸에만 탑승할 수 있었다. 1943년 8월에는 특별 신분증이 발급되었다."(98-9)


Part II 라우터파하트(LAUTERPACHT) _111 


"라우터파하트의 삶은 렘베르크에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간의 유혈충돌을 촉발시킨 스물세 살의 '붉은 왕자' 빌헬름 대공이 비밀리에 내린 결정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다. 레온이 비엔나로 떠난 지 5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빌헬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중 폴란드 부대를 렘베르크에서 축출시키고, 그들을 대신하여 우크라이나 사단 중 두 연대를 배치하였다. 11월 1일, 우크라이나군은 리비우의 지배권을 획득하고 이곳을 새로운 나라인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선포한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 간의 심각한 전투가 이어졌고, 유대인은 그 사이에 끼어 패자를 선택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11월 11일,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한 날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종전협정이 이루어졌다. 리비우는 로보프로 바뀌면서 약탈과 살인이 만연했다."(125-6)


"그동안 굳건했던 권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폴란드 또는 우크라이나 국가가 가시화되자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촉발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어 여러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집단 정체성과 자치권에 대한 여러 이슈들은 민족주의의 발생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가의 부상과 함께 법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법으로 소수민족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가? 특별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만한 국제 규범이 없었다. 오래되었든 신생이든 간에 각각의 국가는 영토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취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다수가 소수를 대하는 법에 대해서 국제법은 몇 가지 제한을 둘 뿐 개인은 권리가 없었다. 라우터파하트의 지적인 성장은 이 같은 중요한 시기와 맞물려 이루어졌다."(127-8)


"전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폴란드의 국제연맹 회원 자격을 '소수민족과 약소국민을 평등하게 취급한다'는 약속과 연계시키는 특별 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 흑인, 남부 아일랜드인,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 카탈로니아인 등 다른 집단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주어질 것을 우려하여 영국은 그 제안에 반대했다. 영국은 국가가 원하는 대로 국민을 취급할 권리인 주권의 침해 또는 국제기구에 의한 감시를 반대하였다. 영국은 더욱 많은 '불의와 압제'가 벌어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을 고수했다. 새로운 폴란드 정부 역시 이것을 내정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제93조는 폴란드로 하여금 민족, 언어 또는 종교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여겨지는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두 번째 조약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권리는 모두가 아닌 일부 집단에게 주어졌고,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은 자국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131-2)


"1919년 라우터파하트는 프로이트, 클림트, 말러의 도시인 비엔나의 서부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제국의 종말로 인한 트라우마와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는 사회민주주의자 시장이 이끄는 도시, 갈리치아에서 넘어온 난민이 넘쳐나고 인플레이션과 가난이 만연한 '붉은 빈'에 도착했다. 러시아 혁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안을,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선사했다. 오스트리아는 무릎을 꿇었고 제국은 해체되었다. 예속과 굴욕의 격앙된 민족주의 감정이 느껴졌다. 라우터파하트와 레온 같은 젊은 동유럽 유대인이 갈리치아로부터 유입되면서 만만한 표적이 되었다." "라우터파하트는 법과대학에 등록했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저명한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모델로 삼았던 오스트리아의 혁신적인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시민의 요청에 따라 헌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헌법재판소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135-6)


"1921년 켈젠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라우터파하트는 개별 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유럽의 새로운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에서처럼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는 다른 모델이다. 라우터파하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 그리고 국가적 강제력과 국제적 강제력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법률질서의 중심에 개인이 놓여 있었다. 반대로 법은 군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룬, 국제법의 동떨어진 보수적인 세계에서는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제93조와 나의 외할아버지 레온이 1938년 폴란드 국적을 잃게 만든 폴란드 소수민족보호조약은 일부 국가의 일부 소수민족을 보호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은 보호하지 못했다."(136-7)


"헤이그에 위치한 최초의 상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열망하며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2년에 설립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법의 여러 법원法源 중에서 조약과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반원칙인 관습법을 주로 적용했다. 그런데, 그런 관습법은 보다 잘 완비된 국내법 체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라우터파하트는 국내법과 국제법 사이의 이러한 연계성은 소위 '주권의 항구성과 불가양도성'을 한층 더 제한할 수 있는 원칙을 발전시킬 '혁명적인' 가능성을 제공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삶을 통해 형성된 실용적이고 본능적인 성향과 렘베르크에서 받은 법학교육으로 인해 라우터파하트는 주권을 제한할 가능성을 믿었다. 이것은 작가나 평화주의자의 열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국제 진보에 기여하겠다는 철저하고 굳게 뿌리박힌 사상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덜 소외되고 덜 엘리트적이며 외부적인 영향에 보다 더 개방적인 국제법을 원했다."(144)


"1945년 7월, 국제 형사법원 창설 과정에서 라우터파하트는 '침략행위'라는 단어 대신 '전쟁범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제안하며 전쟁법 위반은 전쟁범죄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러시아와 미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는, 아직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법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개별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인도人道에 반反하는 죄罪'라고 칭하는 것이 어떨까?" "이 같은 용어는 국제법의 보호 범위를 확장할 것이었다. 이 용어의 사용으로 전쟁 시작 전에 독일 국민 중 유대인과 다른 소수민족에 대해 독일이 자행한 행위 또한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1938년 11월 레온이 독일제국에서 추방당한 일과 1939년 9월 이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자행된 조치 등이 포함된다. 더 이상 국가는 자국민들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게 된 것이다."(185-6)


Part III 노리치의 미스 틸니(MISS TILNEY OF NORWICH) _191 


"〈유대인을 먼저.〉 미스 틸니는 서리 채플의 목사 데이비드 팬톤이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새벽〉에 쓴 글에 큰 영향을 받아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유대인과의 전투를 통해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제목의 히틀러 연설에 대한 〈타임스〉의 1933년 7월 25일자 기사(크리클우드의 라우터파하트가 읽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사) 이후 팬톤이 쓴 글을 본 것이 틀림없다. 팬톤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적 분노를 비이성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전혀 종교에 기반하지 않은 순전히 민족적, 광신적 증오라고 비판하였다. 팬톤은 히틀러의 시각은 개별 유대인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썼다. 이 글은 튀니지 제르바 섬에 살고 있는 미스 틸니에게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년 후인 1934년 봄, 그녀는 프랑스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 프랑스로 옮겨왔다." "1939년 1월, 레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침례교 교회에서 (유대인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203-4)


"7월 15일, 〈신뢰와 노역〉은 미스 틸니가 파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주일 후,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비엔나의 서부역으로 갔다. 그녀는 첫 돌이 막 지난 갓난아기(나의 어머니)를 자신의 손에 믿고 맡기는 리타를 만났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리타와 함께 레온의 누나인 로라도 11살 된 헤르타를 데리고 역으로 나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르타도 미스 틸니와 함께 파리로 갈 예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로라는 헤르타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헤어지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정은 이해가 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년 후인 1941년 10월, 어린 헤르타는 어머니와 함께 리츠만슈타트에 있는 게토로 강제이주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헤르타와 로라는 학살당했다. 미스 틸니는 아이 하나만 데리고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했다. 파리 동부역에서 그녀는 레온을 만났다. 그녀는 이름과 주소를 종이쪽지에 적어 레온에게 주었고, 그들은 각자 파리의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205-6)


Part IV 렘킨(LEMKIN) _221 


"1918년 7월, 전 세계적으로 인플루엔자가 유행했고, 많은 사망자 가운데 렘킨의 남동생 사무엘도 포함되었다. 그가 열여덟이 되던 해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렘킨은 집단의 파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핵심 포인트는 뉴스에 나왔던 1915년 여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었다. 〈12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했으며,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모겐소는 1918년의 로보프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역사상 최대의 범죄'라고 표현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이 사건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며, 프랑스에서 사용했다가 이슬람교의 민감성을 감안하여 수정한 용어인 '인류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다. 〈국가가 살해당했으며 범죄를 자행한 사람들은 풀려났다.〉 렘킨은 이렇게 적으며 오스만 제국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가장 잔인한 범죄자라고 규정했다."(229)


"1921년 6월 베를린에서 '아주 생생하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피고인은 독일 수도에서 전 오스만 제국 정부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암살한 젊은 아르메니아인 소호몬 텔리리안이었다." "텔리리안의 변호사는 집단 정체성 카드를 꺼내 피고인이 '인내심이 많은 아르메니아 대가족'을 위해 복수한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렘베르크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만약 텔리리안이 '내면의 혼돈' 때문에 자유의지 없이 행동했다면 석방하라고 요청한다. 배심원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무죄'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엄청난 소동을 낳았다." "당시 주권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치권을 의미했다. 렘킨은 주권이란 외교정책 또는 학교나 도로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등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국가가 '수백 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렘킨은 만약 주권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행위를 방지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234-6)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던 렘킨은 적절한 형법이 실제로 잔학행위를 금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에는 소수민족보호조약이 적절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잔학행위─집단학살─를 예방하고, 반달리즘─문화유산에 대한 공격─을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닌데,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전 세계적으로 어느 국가의 법원에서도 재판해야 한다는 '보편적 사법권' 관념을 주창한 루마니아의 학자 베스파시안 V. 펠라의 견해를 기반으로 하였다." "1934년 폴란드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1919년 소수민족보호조약을 파기했다. 외무부 장관 벡은 국제연맹에 폴란드가 소수민족을 박해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취급을 원한다고 밝혔다. 다른 국가들이 자국의 소수민족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면 폴란드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독일 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도하였고, 렘킨은 검사직을 그만두었다."(248-9)


"렘킨의 타고난 호기심은 독일 점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독일 나치의 법률이 정확하게 어떻게 실행되었는가? 독일인들은 여러 가지 결정을 서면으로 하는 등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문서로 더 큰 계획에 대한 단서를 남긴다. 때문에 그것은 독일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이어질 수 있다." "렘킨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결정적인 조치'를 계속 추적했다. 첫 번째 조치는 '국적박탈'로, 유대인과 국가 간의 연결고리를 단절시켜 개인을 무국적자로 만듦으로써 법의 보호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비인간화'로, 목표한 민족의 기본적인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두 단계의 패턴은 유럽 전역에 적용되었다. 세 번째 조치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렘킨은 1941년 초부터 점진적인 단계로 진행된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을 위한 법령을 가려냈다. 개별적으로 각각의 법령은 악의가 없어 보이지만 함께 적용되고 국경을 초월하여 실행되면 큰 목적이 드러났다."(259-61)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렘킨은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변론과 증거를 통해 미국인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에 제안서를 보냈고, 조지 핀치는 제안서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그렇게 출판된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 제9장에서 렘킨은 '잔학행위'와 '반달리즘'을 버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데, 그리스 단어 'genos'(종족 또는 민족)와 라틴어인 'cide'(살인)를 결합한 단어이다. 그는 이 장의 표제를 '제노사이드Genocide'로 정했다." "제노사이드는 직접적으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국가적 집단의 일원으로서 당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렘킨은 9장에 적었다. 〈새로운 관념은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설명도 없이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선택한 단어는 점령한 영토를 생물학적으로 영구히 바꾸려는 독일의 원대한 계획에 반대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276-9)


Part V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THE MAN IN A BOW TIE) _293 


Part VI 한스 프랑크(FRANK) _315 


"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24년에 졸업한 프랑크는 개업 변호사로 일하며 뮌헨공과대학교 법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인하고 기회주의적이지만 지적이거나 야심가는 아니었던 그는 1927년 10월 베를린 재판에서 나치 피고인들을 변호할 변호사를 찾는다는 〈퓔키셔 베오바흐터〉 신문의 광고를 본 순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프랑크는 지원했고 합격하여 마침내 고위급 정치 재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나치의 법률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수십 건의 재판에서 나치 정당을 변호한다." "프랑크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법정을 미디어 전략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합법적 수단으로 정치 권력을 얻으려 할 뿐이라는 주장, 즉 사실상 〈합법성의 선서〉를 공개적으로 공약했다. 프랑크의 스타일은 유연했지만 히틀러는 변호사나 법적인 사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관심은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319-20)


"1939년 10월 25일,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직을 수락하였다. 초기의 인터뷰에서 프랑크는 폴란드가 이제 '식민지'이고 폴란드 국민들은 '위대한 독일제국의 노예'라고 말했다. 프랑크는 국왕처럼 굴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그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고 했다. 폴란드는 국민이 권리를 가지는 입헌국이 아니며,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는 없었다. 바르샤바는 짧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프랑크는 재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 다수는 렘킨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들고 다녔던 가방에 들어간 것이었다. 프랑크의 명령은 넓은 영토와 야생동물(보호대상)에서 유대인(비보호대상)까지 많은 것을 대상으로 했다." "프랑크는 생사에 대한 완벽한 결정권을 가졌으며, 1935년 베를린 회의에서 밝힌 생각, 즉 그의 총독령에서 '국민의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기준이고 그러므로 개인은 주권자인 총통의 생각에 예속된다는 것을 실행하려고 하였다."(327-30)


"프랑크는 〈뉴욕타임스〉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943년 초, 그는 공식 회의에서 〈1등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고 발표했다. 이 표현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유대인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프랑크는 내각에 이렇게 말했다. 이 표현은 박수갈채를 이끌어냈고, 그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발견되든 사라질 것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독일제국의 단합과 무결성이 지속될 것이다." "3월에 크라쿠프 게토는 SS 소위 아몬 괴트의 효율적인 지휘 덕분에 1주일 안에 비워질 것이다. 5월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반란이 진압되었고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는 최종 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는 친위대 중장 위르겐 스투루프에 의해 진행되었고, 그는 세부사항에 대한 보고서를 자랑스럽게 히믈러에게 제출했다. 이로 인해 바르샤바 인구가 백만 명 줄었다."(374-5)


Part VII 혼자 서 있는 아이 (THE CHILD WHO STANDS ALONE) _393 


Part VIII 뉘른베르크(NUREMBERG) _407 


"1945년 11월 20일, 제프리 로랜스 재판장이 재판을 개시했다. 그는 〈본 재판은 세계 법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재판입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공소장을 읽기 전에 간단한 소개를 했다. 4개 연합국의 검사들은 각각의 공소사실을 하나씩 낭독하였다. 미국 검사들이 첫 번째 공소사실인 국제범죄를 공모했다는 점을 낭독하였다. 바통은 영국 검사들에게 넘겨져 둥근 얼굴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 경이 두 번째 공소사실인 평화에 반하는 범죄에 관해 낭독하였다. 세 번째 공소사실은 프랑스 검사들에게 할당된 '제노사이드' 혐의를 포함한 전쟁범죄였다. 프랑크는 이 용어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며, 어떻게 이 용어가 여기까지 와서 피에르 무니 검사가 이 법정에서 사용하게 되었을까 궁금했을 것이다. 네 번째인 마지막 공소사실은 소비에트 검사가 낭독한 '인도에 반하는 죄'였다. 프랑크에게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새로운 죄목으로, 이 공개 법정에서 처음으로 사용되는 용어였다."(413)


"재판 이틀째 날, 재판장은 미국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에게 검사측이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라고 말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재판을 시작하는 영광은 엄청난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잭슨은 단어 하나, 하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했다. 그는 승리자의 자비와 패배자의 책임, 비난받고 처벌되어야 할 계획적이고 사악하고 파괴적인 잘못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며, 이런 일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승리에 도취되고 부상에 고통 받는 위대한 4개국이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포한 적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것은 권력은 이성에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재판은 명확하지 않은 법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야 하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하찮은 범죄의 처벌'을 위한 것도 분명 아니라고 강조했다."(422-4)


"라우터파하트는 피고인들이 국제법 하에서 국가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국가에 충성하여 범죄를 자행한 개인 역시 유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쇼크로스는 법정에서 국가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며, 개인의 경우에 비해 더욱 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범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괴링, 스피어와 프랑크가 그의 눈에 보였다. 쇼크로스의 법리적 주장의 핵심은 라우터파하트의 것이었다.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영국 법무장관인 쇼크로스는 재판 이전과 재판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자주 반복될 명확한 어구를 사용하여 선언하였다. 〈국가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이다.〉 국가의 행동은 국가라는 무형 인격 뒤에 숨어 면책을 구할 수 없는 정치인들의 행동이다. 이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관념을 아우르고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와 근본적인 인간의 의무를 새로운 국제적 질서의 핵심에 두는 급진적인 표현이었다."(430)


Part IX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소녀(THE GIRL WHO CHOSE NOTTO REMEMBER) _463 


Part X 판결(JUDGEMENT) _479 


"렘킨은 전쟁 이전인 1933년부터 줄곧 자행된 모든 집단학살에 '제노사이드' 죄목을 적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논고문 초안에는 아예 빠져 있었던) 이 단어를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제노사이드'는 가중처벌이 가능한 '인도에 반하는 죄'이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자행되었을 때에만 해당된다. 이러한 제한은 1945년 8월 뉘른베르크 헌장 정의 조항에 있는, 악명 높은 세미콜론으로 인한 제6조 ⓒ항의 해석론이었다. 쇼크로스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요건'이라고 강조하며, 한 손으로 가져왔던 제노사이드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전체 의미에서 제한을 둠으로써 한발 물러섰다. 이 표현을 읽으며 나는 1939년 9월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를 재판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였다. 이로써 1938년 11월 이전의, 레온과 같은 개인과 다른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궁핍화와 추방, 재산몰수, 축출, 구금, 살인 등은 이 재판의 사법권을 벗어나는 일이 되었다."(50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로부터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소급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말살, 노예화, 핍박과 같은 모든 전쟁범죄 행위들이 대부분의 국가법에 의해서도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독일법으로는 합법이라는 사실은 전혀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쟁은 폭군들이 피통치자들에게 잔학행위를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쟁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이 허용되었다면 그랬을 때만 정당하고 합법적이다. 국제법상 어떻게 '사법절차에 의한 개입'이 불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쇼크로스는 좀 더 나아갔다. 그는 개인이 아닌 국가만이 국제법 아래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피고인들의 논리를 반박했다. 국제법에는 그런 원칙이 없으므로 국가를 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국가 뒤에 숨을 수 없다. 〈개인은 반드시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509-10)


"판결 첫째 날인 9월 30일은 전체적인 사실관계와 법리 판시에 집중했다. 각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두 번째 날 발표될 것이었다.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재판부는 작은 섹션으로 나누었다. 인위적이긴 했지만 재판부의 권한으로 법률가들이 편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재판부는 신속하게 기관들의 문제를 처리하였다. 나치 수뇌부, 게슈타포, SD(비밀경찰), 그리고 SS(친위대)는 그에 속한 50만 명의 장병들과 함께 책임이 인정되었다. 이로 인해 범죄자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SA(돌격대), 독일제국 각료와 독일군의 일반직원과 고위급 장서들은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법적 타협 행위였다. 재판부는 다음으로 예비음모, 폭력 행위 및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판결하였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판결의 중심에 섰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제법의 일부로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추상적 실체가 아닌 인간이 저지른 국제범죄에 대해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주요 표현을 채택했다."(532-3)


"이튿날 로렌스 재판장이 정확히 오전 9시 30분에 스물한 명의 피고인들 각각에 대한 판결 선고를 위해 법정에 입장하였다." "열 두 명의 피고인들은 항소권 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 중에는 교수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프랑크, 로젠베르크, 자이스잉크바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물 한 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세 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독일제국은행의 전 회장 얄마르 샤흐트는 침략전쟁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부총통 역할을 했던 프란츠 폰 파펜도 같은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괴벨의 선전부의 중요하지 않은 직원이며 공석인 상사의 직무를 애매하게 대행하던 한스 프리체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잔학행위를 하도록 선동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몇 명은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제노사이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진 피고인은 없었다. 그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535-8, 542)


에필로그 _547


"재판이 끝나고 몇 주 후, 뉴욕 북부에서 유엔 총회가 열렸다. 1946년 12월 11일 총회의 의제에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두 개가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된 것이었다. 국제인권장전 제정을 위한 길을 다지기 위하여 총회는 인도에 반하는 죄를 포함하여 뉘른베르크 헌장에서 인정한 국제법의 원칙이 국제법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유엔 총회는 결의안 95호를 통해 라우터파하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에 개인의 위치매김을 명확히 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는 그 다음으로 결의안 96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뉘르베르크에서 재판부가 판결한 내용을 넘어셨다 제노사이드가 전체 인간집단의 존재의 권리를 부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총회는 재판부의 판결을 넘어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 범죄임을 선언하였다. 판사들이 발을 들여놓기 꺼리던 영역까지 각국 정부는 렘킨의 연구를 반영한 규정을 법제화하였다."(547)


"허쉬 라우터파하트는 뉘른베르크 판결 선고 다음날에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그의 저서, 《국제인권장전》은 제노사이드 조약이 채택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 영감을 주었다. 선언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라우터파하트는 이것이 좀 더 강제력이 있는 것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길 희망했다. 이것은 1950년에 체결된 〈유럽인권조약〉으로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검사였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가 개인이 제소할 수 있는 최초의 국제인권재판소의 창설을 조약에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지역적, 세계적 인권조약이 뒤따랐지만 아직까지 렘킨의 제노사이드 조약에 준하는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조약은 없다. 1955년, 라우터파하트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영국 판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60년에 사망하였으며, 케임브리지에 묻혔다."(548-9)


"국가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며 국제범죄의 처벌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국제형사재판소라는 발상이 실현되기까지 50번의 여름이 지났다. 1998년 7월, 과거 유고슬로비아와 르완다에서의 잔학행위가 촉매가 되어 마침내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해 여름 150개국 이상이 로마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규정을 제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나는 동료와 함께 협상의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조약의 전문, 즉 서론에 해당하는 소개글을 작성하는 초창기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였다. 드러나지 않게 일하면서 우리는 '국제범죄의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하여 형사재판 관할을 가질 각국의 의무'라는 간단한 한 문장을 조약 전문에 삽입시켰다. 해로울 게 없어 보였는지 그 문장은 협상 과정에서 살아 남아 국제법에서 국가들이 그러한 의무를 승인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처벌하는 권한을 갖는 새로운 국제재판소가 마침내 창설되었다."(549-50)


"제노사이드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가해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피해집단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 또한 강화시킨다. 집단에 초점을 맞춘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그들' 또는 '우리'라는 의식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 정체성이라는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바로잡으려는 바로 그 상황을 부지불식간에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맞서게 대치시킴으로써 화해의 가능성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제노사이드 범죄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형사소추를 왜곡할 것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제노사이드의 피해자라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검사에게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게는 제노사이드 피해자라고 인정받는 것이 역사적으로 빈발해온 분쟁의 해결에 기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소시키는 결과와 무관하게 단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될 뿐이다."(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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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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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패배에 대한 두려움 


"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할 때, 정당은 패배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 정당이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생계가 어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며, 권력을 넘겨주는 정당과 그 지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선거는 종종 많은 것이 걸린 전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이 걸린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두려워할 때, 정당은 어떻게든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패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정당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게 만든다.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7-9)


2장 독재의 평범성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충직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라고 부른 사람들은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패배를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고, 정적을 물리치거나 유권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민주주의 암살자에게는 언제나 공범이 있다. 그 공범은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하는 정치 내부자들이다. 린츠는 이들을 가리켜 〈표면적으로 충직한semi-loyal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62-3)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정장과 넥타이 차림의 주류 정치인이며,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살해당했을 때에도, 살해 도구에서 그들의 지문이 발견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즉,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독재 세력과 협력할 때, 노골적인 독재 세력은 훨씬 더 위험해진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63-4)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정치인들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거부할 때,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고, 힘을 잃고, 포기한다." "그러나 주류 정당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지지할 때, 이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따른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 민주주의 붕괴를 주도하는 많은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 찬 경력지상주의자다.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이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그게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5-6)


3장 이 땅에서 벌어진 일 


"백인 반동주의자들은 (재건 시대에) 등장한 다인종 민주주의에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테러 행위로 응수했다. 흑인 시민이 남부 지역 대부분의 주에서 다수, 혹은 다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잔혹한 무력〉이 필요했다." "사실 1870년대에 민주당이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활용했던 테러와 부정행위 전술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남부 전역에 걸쳐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1888~1908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주 헌법과 선거법을 뜯어고쳤다." "1890년, 미시시피주 헌법제정의회는 인두세와 비밀 투표, 그리고 읽고 쓰기 능력 시험을 받아들였다. 남부의 많은 주가 이후 10년 동안 이러한 〈독창적인 고안품〉을 받아들였다." "남부 지역 민주당은 대규모 투표권 박탈을 통해 다인종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길을 잃게 만들었다."(117, 123, 125, 127)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와 관련해서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방 사법부였다. 그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길레스 대 해리스(1903)' 소송이었다." "'길레스 대 해리스' 소송은 과거에 노예였던, 그리고 앨라배마 유색시민투표권연합의 대표가 된 경비원인 길레스가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카운티 기록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투표권 소송이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작성한 대법관은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판사였다. 홈스는 그 소송이 앨라배마주의 유권자 등록 제도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만약 법원이 길레스의 손을 들어주고 다른 유권자들을 등록 명부에 추가한다면 앨라배마주의 부정행위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잉글랜드 귀족가문의 후손인 홈스는 법원이 그들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결국 대법원은 투표권 박탈이 이뤄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결정했다."(127-9)


"연방이 투표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부 지역의 민주주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흑인 투표율은 1880년 61퍼센트에서 1912년 상상조차 힘든 2퍼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민 다수를 차지한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흑인 시민의 1퍼센트, 혹은 2퍼센트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1876년에 유명한 조지아주 정치인 로버트 툼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번 총회가 열린다면 '국민'이 통치하고 흑인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바로잡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소망(남부 지역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소망)은 한 세기 만에 현실이 되었다. 이후 남부 지역에서는 한 세기에 걸쳐 독재 시대가 이어졌다. 흑인 선거권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경쟁이 무너졌고, 남부 전역은 일당 지배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테네시주를 제외한 이전 남부연합의 모든 주에서 70년 넘게 권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다섯 개 주에서는 '한 세기 넘게' 이어졌다."(133-4)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 


"21세기 초 공화당 정치인들은 선거 패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 지지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나라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미국 역사에 걸쳐 백인 기독교인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인종적 수직체계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백인 미국인은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는 곧 〈백인 시민에게는, 볼 수 있지만 그 아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유리 바닥〉이었다. W. E. B. 듀보이스는 이러한 특권을 백인으로 살아가는 〈심리적 임금psychological wag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더 이상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고, 한때 굳건했던 인종적 수직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 내에서 보장된 지위와 더불어 성장한 사람은 그러한 지위를 빼앗겼을 때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많은 백인 미국인은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느꼈다."(165-6)


"이러한 느낌은 오바마의 당선으로 한층 더 증폭되었다. 정치학자 마이클 테슬러는 연구를 통해 (정치적으로 온건한)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미국인의 정치적 태도를 뚜렷하게 급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모든 미국인은 그들의 나라가 다인종 민주주의의 평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악관에서 일하는 모습이 매일 TV 화면에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더 이상 인구 통계적으로나 정치적 차원에서 새로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백인 미국인은 그들이 자라난 나라가 그들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은 주로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학자 필립 고르스키는 이를 〈(백인) 기독교인이 미국을 건국했지만 이제 박해받는 (민족적) 소수가 되어가는 위기에 봉착했다〉라는 믿음으로 설명했다. 〈백인 기독교인〉은 이제 종교 집단이라기보다 민족 집단, 혹은 정치 집단에 더 가깝게 되었다."(167)


"트럼프의 성공은 백인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가 공화당 내에서 승리의 공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의 스타일과 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 반면 트럼프 열차에 탑승하기를 거부한 공화당 정치인은 은퇴하거나, 아니면 예비선거에서 패했다. 2020년에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던 어떤 계파도 공화당 내에 머물러 있지 못했고, 트럼프의 극단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많은 트럼프 지지자는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을 믿었다. 이 이론은 미국의 엘리트 집단이 〈토착〉 백인 집단을 쫓아내기 위해 이민자를 동원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2021년 미국 기업연구소가 후원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 중 56퍼센트가 〈전통적인 미국적 삶의 방식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172-5)


5장 족쇄를 찬 다수 


"민주주의자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야당의 권리가 다수결주의 범위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에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사실 다수에게 상당한 정도의 발언권을 부여하지 않는 정치 시스템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반다수결주의에는 이러한 위험이 따른다. 다시 말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설계된 규칙은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심지어 다수를 '지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은 〈다수의 독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소수의 독재라고 하는 위험한 현상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영역을 다수결주의의 범위 너머에 놓아두는 작업이 중요한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영역은 '다수결주의의 범위 안에' 그대로 남아 있도록 만드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보다 상위의 개념이지만, 다수의 지배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209-10)


"특히 두 영역만큼은 다수결주의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거, 그리고 의회의 의사 결정을 말한다. 첫째, 누가 공직을 차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자가 더 적은 표를 얻은 자를 이겨야 한다. 어떤 자유민주주의 이론도 이와 다른 결과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후보자나 정당이 다수의 의지를 거슬러 권력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둘째, 선거에서 이긴 자가 통치해야 한다. 의회 다수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지 않는 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의회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일반적이고 합법적인 입법 과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도록 허용하는 압도적 다수 규칙은 옹호하기 힘들다. (무제한) 상원 필리버스터와 같은 압도적 다수 규칙은 정치적 소수에게 강력한 무기인 거부권을 선사한다. 그러한 거부권이 시민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에 대한 보호의 차원을 넘어설 때, 의회 소수는 그들의 의지를 다수에게 강요할 수 있다."(210)


"또한 반다수결주의에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다. 헌법은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세대는 필연적으로 미래 세대의 손을 묶게 된다. 법률 이론가들은 이를 일컬어 '죽은 손의 문제problem of the dead hand'라 부른다." "수정의 장벽이 너무 높을 때, 오늘날 다수는 사회적 요구와 지배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법률의 〈강철 우리〉 속에 갇혀버릴 위험이 크다." "사법부는 이러한 문제에 취약하다. 특히 판사의 신분을 임기제한이나 정년과 같은 조건 없이 강력하게 보장할 때, 더욱 그렇다. 사법심사Judicial review(법원이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의 적법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제도)는 판사들에게, 그리고 일부는 수십 년 전에 임명된 판사들에게 오늘날 다수가 만든 법률과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핵심적인 반다수결주의 제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지나치게 만연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213-6)


6장 소수의 독재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선거인단 제도다. 이 제도는 보통선거를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시킨다. 첫째, 거의 모든 주(메인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는 승자 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 표를 할당한다. 이러한 방식은 전국적인 보통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선거인단 제도의 두 번째 왜곡인 작은 주 편향은 명백하게도 공화당에게 어드밴티지를 선사했다.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수는 의회 대표의 수, 즉 하원 의원에다가 상원 의원을 합한 수와 동일하다. 그런데 상원에서는 인구 밀도가 낮은 주들이 과잉대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은 총 538표 중 20표 정도가 시골 지역에 편향되어 있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다."(253-6)


"소수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그리고 당파적 편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두 번째 기둥은 상원 제도다. 미국 전체 인구에서 20퍼센트 미만을 차지하는 인구수가 낮은 주들만으로도 상원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11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들만으로도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가로막을 수 있는 충분한 상원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세 번째 기둥은 대법원이다. 선거인단과 상원의 특성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에서 패한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고, 미국 전체 인구의 소수를 대표하는 상원 다수가 이를 승인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네 번째 기둥은 헌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그리고 인위적인 다수를 '만들어내고' 때로 더 적은 표를 얻은 정당이 의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하는 선거 제도다." "많은 주 의회가 권력을 쥔 정당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거구를 재구획함으로써 유권자를 의도적으로 분할했다."(256-9, 262)


"1980년에 태어나서 1998년, 혹은 2000년에 처음으로 투표한 미국인을 떠올려보자. 그가 성인이 된 이후로 민주당은 상원 선출을 위한 6년 단위의 보통선거에서, 그리고 한 번을 제외한 모든 대선의 보통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 대통령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 그리고 공화당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 체제에서 성인기의 삶 대부분을 살아가고 있다. 소수의 지배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패자가 승리하도록 허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또한 국민의 삶과 밀접한 공공 정책에 교묘하게 영향을 미친다. 여론은 절대 완벽하게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당파적 소수가 과잉대표권을 행사하도록 제도가 허용할 때, 여론은 외면과 억압을 받는다. 〈다수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원 의원이나 판사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여론과 동떨어진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266-7)


"정치 세계는 두 세기가 넘도록 경쟁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다. 정치 이론가와 실무자 모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했던 반민주적인 이념을 물리치기 위한 원칙을 종종 언급한다. 밀은 널리 알려진 표현을 통해 진실이 거짓에 승리를 거두려면 〈대립하는 의견 사이의 충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집》 10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할 때, 다수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사악한 입장을 물리친다는 공화국 원칙이 우리를 구제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선거 제도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게 과잉대표를 허용할 때, 그래서 정당들이 '유권자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유권자의 생각에 반응해야 할 압박이 줄어든다. 그럴 때 정당들은 급진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일이 21세기 초 공화당에서 일어났다. 공화당은 경쟁해야 할 동기를 무디게 만드는 〈헌법적 보호 장치〉의 수혜자가 되었다."(280-1)


"대법원은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의회에서 소수의 독재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형태 중 하나로 드러난, 위스콘신주의 악명 높은 선거구 지도는 2016년 연방 법원에 의해 허물어졌다. 하지만 2018년 닐 고서치가 대법관으로 있는 연방대법원이 그 판결을 뒤집으면서(실제로 절차적 문제를 이유로 판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선거구 지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년 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브렛 캐버노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상황에서 연방대법원은 5 대 4의 다수 의견으로 주의 당파적 게리맨더링 사건을 심판할 권한이 대법원에는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 존 로버츠는 다수 의견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파적 게리맨더링 주장은 연방대법원의 권한을 넘어선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반다수결주의 상원에 의해 구성된 반다수결주의 대법원이 주 차원에서 소수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282-3)


7장 표준 이하의 민주주의, 미국 


"미국은 예외적인 국가다. 이제 다른 어떤 민주주의 국가보다 소수의 지배에 더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미국을 앞질러나갈 수 있었을까?"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가장 수정이 힘든 헌법이다. 도널드 러츠가 헌법 수정 절차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해 31개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봤을 때, 미국은 난이도 지수에서 최고점을 차지하면서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한 국가(호주와 스위스)를 큰 폭으로 따돌렸다.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2/3의 승인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3/4에 달하는 주들의 비준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준의 헌법 수정률을 보인다. 미국 상원의 발표에 따르면, 헌법을 수정하기 위한 시도가 11,848번 있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사례가 27번에 불과하다. 재건 시대 이후로 미국 헌법이 수정된 것은 20번에 불과하며, 가장 최근 사례는 30년도 더 된 1992년이었다."(314-5)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하는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다. 선거인단 제도를 규정하는 헌법 조항은 가장 빈번한 개혁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지난 225년에 걸쳐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시도는 700회를 넘었다. 20세기 중 이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세 번의 〈아슬아슬한〉 대선(1960년과 1968년, 1976년)이 있었고, 여기서 보통선거의 승자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1969년 9월에 하원은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338 대 70으로 통과시켰다. 이는 헌법 수정에 필요한 2/3 찬성 요건을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 그 법안이 상원으로 넘어갈 무렵, 갤럽 설문조사 결과는 미국인 81퍼센트가 개혁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과거의 많은 시도에서 그랬듯이 개혁안은 상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개혁안은 표결에 이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315, 318-9)


"또 한 번의 진지했던, 그러나 다시 실패로 끝난 헌법 개혁 시도는 1970년대에 있었다. 그것은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ERA으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상황은 비준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닉슨과 포드, 카터 대통령 모두 ERA를 지지했고,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1972년과 1976년에 찬성의 뜻을 밝혔다. 여론 또한 분명하게 비준의 편을 들었다. 1974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74퍼센트가 ERA를 지지했고, 1970년대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들에서는 전반적으로 2 대 1로 비준에 대한 찬성의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흐름은 이어지지 못했다. 1973년 이후로 5개 주가 추가로 ERA를 비준함으로써 1977년 기준으로 총 35개 주가 비준을 마쳤다. 미국 전체 비준까지 3개 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원이 비준 마감 시한을 1982년으로 연장했음에도 추가 비준은 나오지 않았다. 비준을 하지 않은 주들 15개 중 10개 주는 남부에 있었다. 과연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320-1)


8장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다


"1930년대의 유럽에서 비롯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한 가지 전략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적인 연합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물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봉쇄는 단기 전략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한가운데에는 경쟁이 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장기적인 연합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잡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유권자는 이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경험에 따르면, 〈대연정〉이 오랫동안 이어질 때 유권자들은 그들을 배타적이고 불법적인 공모 연합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주류 정당 간의 연합이 지나치게 길어질 때, 〈기득권 세력〉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포퓰리스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봉쇄 전략을 통해 반민주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력을 반드시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327-9)


"다음으로 전제주의자를 대적하는 두 번째 전략 역시 1930년대 유럽이 트라우마를 겪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정부의 권한과 법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반민주 세력을 '축출하고',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독이 처음 사용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경험을 한 독일의 전후 헌법 설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가 내부의 전제적 위협에 직면해서 무력하게 서 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동가, 혹은 〈반헌법적인〉 연설과 집단 및 정당을 '금지하고 제한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봉쇄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배제 전략에도 뜻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쉽게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고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에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전제주의의 급박한 위협에 직면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330-2)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던져준 기본 원칙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 원칙이란 극단주의 소수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거를 통한 경쟁이라는 것이다. 매디슨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악의적인〉 정치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가 선거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위해 미국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20세기 초 미국의 개혁가 제인 애덤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332-3, 341)


"우리의 여러 개혁안이 가까운 미래에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 주류 집단이 아이디어를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판단할 때, 정치인들이 아이디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을 때, 신문사 편집자가 아이디어를 외면할 때,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아이디어를 설명하지 않을 때, 학자들이 순진하다거나 현실 감각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야심 찬 아이디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때,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다. 어떤 개혁도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 제도 변화의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가 말한 〈때를 맞이한 아이디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라는 표현을 종종 거론하곤 한다. 그러한 때도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놓아야만 찾아온다."(342-5)


"그러나 의제의 공론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지속적인 사회적 운동, 즉 활동을 통해 논의의 흐름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힘의 균형점을 옮기는 광범위한 시민 연합을 통해 이뤄진다. 국민 청원과 방문 캠페인, 집회, 행진, 파업, 피켓 시위, 연좌 농성, 보이콧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는 사회 운동이 여론과 언론 보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실제로 미국에서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향한 많은 중요한 진보는 당시에는 개혁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린든 존슨 시절에 이뤄졌다. 이들 중 누구도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결국에 스스로 뒤집었던 기존 체제가 만들어낸 인물이었다."(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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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걸작 논픽션 19
대니얼 임머바르 지음, 김현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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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로고 지도 이면의 사실들


# 로고 지도logo map. 알래스카와 하와이(더 나아가 푸에르토리코, 사모아, 괌 등까지)를 제외하고 미국 영토를 떠올리는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


1941년 12월 7일, 일본 군용기가 오아후섬의 해군기지에 나타났다. 미국 국민의 뇌리에 굳건히 박힌 이 진주만 공격은 말 그대로 공격이었다. 일본군 폭격기는 타격하고 후퇴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핀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최초 공습이 시작된 후 계속해서 더 많은 공습과 침략, 정복이 뒤따랐다. 미국 국적의 1600만 필리핀인들은 하와이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겪게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주만’으로 잘 알려진 사건은 사실상 태평양 전역의 미국과 영국 점령지를 기습적으로 타격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하루 만에 일본군은 미국 영토인 하와이와 필리핀, 괌, 미드웨이섬, 웨이크섬을 공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홍콩을 공격하고 타이를 침략했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진주만’(일본이 침략에 실패한 몇 안 되는 표적 중 하나)이라는 명칭이 정말 그 운명적인 날에 발생한 사건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10-1)


루스벨트는 왜 필리핀의 중요도를 격하시켰을까?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려 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하와이와 관련해 전달받은 내용을 적당히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와이 인구는 백인의 비율이 필리핀에 비해 비교적 높긴 했지만, 여전히 주민 4분의 3이 아시아인 또는 태평양 도서 출신이었다. 루스벨트는 확실히 이런 점 때문에 대중이 하와이를 외국으로 인식할까봐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설 당일 아침 그는 연설문을 한 번 더 수정했다. 일본군의 비행중대가 ‘오아후섬’이 아닌 ‘미국령 오아후섬’을 폭격했다고 바꾼 것이다. 오아후섬 폭격으로 ‘미 해군과 육군 병력’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많은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미국령 섬에서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루스벨트가 강조하려던 내용이다. 필리핀이 외국으로 격하됐다면, 하와이는 ‘미국’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12-3)


미국이라는 제국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스스로 제국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무시해왔다는 점이다. 미 제국주의의 규모가 유감없이 드러났던 1898년 이후의 짧은 기간을 제하면 제국주의 역사의 상당 부분은 은밀히 전개돼왔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은 스스로를 제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제국주의 항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히틀러의 천년제국인 라이히와 일본제국에서 소비에트연방의 ‘사악한 제국’에 이르는 여러 제국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타지 세계에서도 미국은 제국에 맞섰다. 로고 지도는 자국의 일부를 배제하고 기술되므로, 본토인들은 자국 역사를 불완전한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미국의 해외 영토는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수많은 발명을 이뤄냈고 대통령을 일으켜 세워 ‘미국인’의 진정한 의미를 정의하는 데 일조했다. 그 영토들을 역사에 포함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판타지가 아닌 실제 미국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4-5)


제1부 식민지 제국


1. 대니얼 분의 몰락과 부상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대니얼 분과 같은 개척자들을 노골적인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국가의 ‘쓰레기’(벤저민 프랭클린), ‘육식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는’(헥터 세인트 존 데 크레브쾨르) ‘백인 야만인’(존 제이)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후 ‘모든 권위에 도전하려는 노상강도 떼가 서부 지역에 정착하거나 이 지역을 뒤덮는 상황’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깊은 문제가 연루되어 있었다. 애팔래치아 서쪽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은 미국이 유일한 나라는 아니었다. 견고한 정치적 조직체를 구성한 북미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북미 지도를 그려왔고, 18세기 후반 백인과의 싸움에서도 그 영토를 지켰다. 대니얼 분은 바로 이처럼 예민한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는 백인 정착민들을 서부로 이끌면서 인디언 영토를 침략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싸움에 끼어들 손쉬운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개입은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30)


워싱턴이 개척자들을 짜증스러워했다고 해서 확장을 반대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가 된 것은 잠깐이었다. 미국 영토는 광대했지만 정부는 약했다. 산맥을 넘어가 무단으로 토지를 점유한 자들을 통치하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불가피하게 시작된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러자 워싱턴은 정착 과정이 엘리트의 통제하에 ‘촘촘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해야 변경 지역이 분과 같은 떠돌이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지 않고 문명의 진보를 위한 최전선으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고자 변경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정치적 범주를 만들었다. 즉 영토territory였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대서양에 위치한 주들의 경우 절대로 미국 서부 경계를 이루는 미시시피강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서부 토지는 주 정부가 아닌 연방정부가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큰 의미의 국가의 영토로서 관리된다는 것을 뜻했다. 31-2)


제퍼슨과 워싱턴이 스스로 ‘촘촘히’라고 표현했다시피 인구가 증가하더라도 백인들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정착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럽 인구가 과거에 더디게 증가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를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1749년에 그는 필라델피아 인구조사를 비롯해 보스턴, 뉴저지 및 매사추세츠의 인구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충격적일 정도로 정확했다. 그 어떤 근거 이상으로 강력했다. 식민지 인구가 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25년마다 인구가 2배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인 토머스 맬서스는 식량 공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는데, 이는 상당 부분 프랭클린의 북미 인구통계(맬서스는 ‘역사상 거의 유례없는 가파른 인구 증가’를 가리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34-5)


백인 인구의 증가는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에 비견될 만했으며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국가의 이상을 깨버렸다. 처음 수십 년간 지배적이었던 위대한 제퍼슨식 시스템은 반半식민 상태에 있던 서부 거주민과 함께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대니얼 분과 같은 사람이 아주 많아진 것이다. 정부는 1830년대가 되자 무단 거주자 기소를 포기하고 그 대신 그들이 토지를 구입하도록 했다. 1860년대에는 공유지를 ‘자영농지homestead’로 무상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당 토지에 거주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시민에게 돌아갔다. 대규모 백인 인구가 거주하는 영토는 곧 주로 승격됐다. 금광꾼이 몰려들었던 캘리포니아는 2년 후 군사정부에서 주 지위로 격상됐다. 문화도 바뀌었다. ‘노상강도’ 또는 문명의 변방에 선 ‘백인 야만인’이라고 멸시당하는 대신, 정착민들은 개척자pioneer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더 이상 상습적 범법자가 아니라 역동적인 국가의 자랑스러운 기수로 칭송받게 된 것이다. 36-7)


2. 인디언 거주지


인디언 세력의 주축은 체로키족이었다. 체로키족은 그 수가 17세기와 18세기에 많게는 절반 가까이 줄었으나, 19세기 초반에 다시 늘기 시작했다. 체로키족은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공화국 내에 그들만의 영역을 개척해갔다. 그들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노예를 사들였으며 수도를 건설했다. 세쿼이아라는 은 세공인이 음절문자 체계를 고안하면서 체로키어로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부족 신문인 『체로키 피닉스』가 영어와 체로키어로 발행되면서 곧 인기를 얻었다. 1827년 체로키족은 미국 헌법을 본떠 헌법을 채택했다. 유권자들은 부유한 혼혈 기독교인 쿠위스구위Koo-wi-s-gu-wi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체로키 공화국 초창기에 그들의 토지 소유권은 대체로 존중받았다. 워싱턴 행정부는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여, ‘문명화된’ 체로키족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인다는 가능성을 수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처럼 취약한 성과가 백인의 토지 소유욕에 맞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38-9)


이와 더불어 남부의 목화 재배 열풍이 시작되고 체로키족 영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체로키족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1828년 조지아주는 체로키 헌법에 무효를 선고하고 체로키족의 토지를 요구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인디언 거주지는 ‘용인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체로키족은 조지아주의 직권에 따르거나 서쪽 영토로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법원은 조지아주의 조치가 위헌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상위 법원의 판결은 무단 거주자들의 맹공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다. 합의에 따라 2000여 명이 자발적으로 떠났다. 그러나 1만6000명쯤 되는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7000명의 민병대와 지원병을 보내 총검을 앞세워 그들을 체포하고 투옥시켰다. 철창에 갇힌 체로키 인디언들은 다시 오늘날 오클라호마에 해당되는 곳으로 강제 이주됐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여정을 ‘울면서 지나온 길Nunna daul Isunyi’이라 불렀다. 39-40)


3. 해조분에 대해 항상 궁금했으나 묻기 어려웠던 모든 것


1857년, 개즈든 매입이 비준된(1854)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카리브해와 태평양 연안의 작은 섬들을 합병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경에는 100여 개 섬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그 섬들에는 원주민도 없었고 전략적인 가치도 없었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비도 내리지 않는 바위섬인 경우가 많았다.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에는 누구나 간절히 바랐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반인들 사이에서 새똥으로 알려진 ‘백금’이었다. 해조분은 흔히 페루 연안의 친차 제도에 서식하는 가마우지, 얼가니새 및 펠리칸에게서 나오는 질산이 풍부한 똥으로 생각됐다. 게다가 친차 제도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해조분은 몇백 피트 높이로 쌓였고 햇볕을 받아 말랐기 때문에 섬에는 몇 세기 동안 석회화된 새똥이 그대로 암석화되었던 것이다. 1840년대에 페루산 해조분을 실은 선박이 처음으로 들어왔고, 해조분은 곧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47, 49-50)


# 개즈든 매입(Gadsden Purchase).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남부와 뉴멕시코주에 해당하는 76,800 제곱킬로미터 지역을 1853년, 멕시코로부터 미국이 구입한 사건을 가리킨다.


해조분 채굴은 19세기에 이뤄졌던 노동들 중에서도 거의 최악의 노동이었다. 등골이 휠 정도로 힘들고 석탄 채굴 시 폐 손상과 같은 피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뜨겁고 건조한 데다 악취와 역병이 도는 섬에 고립돼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배사 인산염 상사는 볼티모어의 흑인들을 일꾼으로 활용했는데, 1889년 감독관과 일꾼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가 이내 폭력 사태로 번졌다. 백인 관리자들이 도끼와 면도칼, 곤봉, 돌멩이, 못쓰게 된 권총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싸우던 일꾼들을 향해 발포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5명의 백인 관리자가 목숨을 잃었다. 다섯 구에 달하는 백인 시체와 신문 지면을 채운 살아남은 관리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다소 과잉된 반응의 ‘검은 학살자들’이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피고인들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볼티모어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기금을 모아 막강한 법률팀을 고용했다. 그중에는 메릴랜드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최초의 흑인 변호사 E. J. 워링도 있었다. 53-4)


재판에서는 최후 수단인 정당방위가 최종 쟁점으로 떠올랐다. 변호사들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미국 관할권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이티 역시 나배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어떤 미국 관리도 그곳에 상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리고 해조분 제도법의 이상한 표현을 파고들었다. 해당 제도가 미국령에 ‘부속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짚은 것이다. 부속되다니?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인가? 피고인 측은 나배사를 외국 영토로 보았다. 이는 폭동을 일으킨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한 것 이상이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적법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곧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검사 측 손을 들어주며, 미국 법의 적용 범위에는 ‘명백히’ 나배사도 포함된다고 판결을 확인해줬다. 그러나 피고 측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나배사가 미국의 영토라면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55)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역시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는 폭도들이 ‘미국 영토 내에서’ 일하던 ‘미국 시민’임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또한 나배사 인산염 상사가 미국의 일부를 법이 아닌 회사 규정으로 다스려지는 자체 세력권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해리슨 대통령은 조사를 위해 USS 키어세이지 군함을 보냈다. 키어세이지호 장교들은 나배사가 ‘재소자 시설’처럼 운영되고 있으나 감옥의 ‘편의 시설과 청결함’은 없다고 보고했고, 이에 해리슨은 폭동을 일으킨 이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는 주동자들의 사형선고를 감형해주고 이 문제를 연두교서에서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미국 관할권 내에서 정부 관리나 재판소의 도움으로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까지 모호했던 원칙을 대통령이 확실하게 못 박아 말한 셈이었다. 즉 새똥이 널려 있는 바위와 섬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간에 그곳은 결국 미국의 일부였다. 55-6)


4.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최고의 날


1890년에 발표된 머핸의 장황한 논문인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나 강력한 시사점을 담고 있었다. 머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한 국가는 자체 기지를 가질 필요가 없다. 실제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방국에서 빌리면 된다. 그러나 이는 평시에만 가능했다. 그리고 개척 종식의 시대에는 강대국 간의 평화 유지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원거리에서 생산된 농작물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 이론가인 머핸은 목적지보다 해상로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바다를 ‘훌륭한 고속도로’로 구상하고 미국이 이를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사실상 해상로를 지키고 물자를 공급하는 데는 그 경로상의 지점들, 즉 안전한 항구만 있으면 된다. 머핸이 인정했듯이, 적군의 공습이 있을 때 한 지점이라도 사수하려면 그 주변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지가 본격적으로 식민지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62-3)


당시 해군부 차관보였던 루스벨트가 보기에 그 책은 해군의 고전 이상이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역동적인 국가를 위한 각본이었다. 미국은 제국을 빼앗아야 한다. 기존 제국들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전쟁을 환영할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는 1897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어디인지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떠오르는 제국들 사이에서 확연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제국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기다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98년 2월 15일, 원인 불명의 폭발로 아바나 연안에 배치된 메인호에 있던 262명이 사망했다. 2월 25일 오후, 루스벨트는 모든 중대장에게 배에 석탄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고 예비 탄약 보급품을 징발했으며 기지 사령관들에게 전쟁 가능성을 알리고 양 의원에 무제한 해군 신병 모집을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특히 아시아 전대를 이끄는 듀이 준장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필리핀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63-5)


그 전쟁은 대개 미국-스페인 전쟁이라 불리며 1898년에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한 명칭은 스페인-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미국 전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실상 후발 주자였고, 스페인 제국을 거의 몰락시켜버린 장기간의 유혈 충돌이 끝나갈 무렵 한 차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다. 쿠바에 상륙(다이키리 해변에서 쿠바군이 스페인 군대를 무찌른 덕에 가능했다)한 직후 루스벨트는 쿠바인들을 보고는 ‘중대한 전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완전히 넝마 상태’라고 생각했다. 널리 공유되던 그런 판단은 큰 영향을 미쳤다. 쿠바인들이 전쟁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미군 지휘관들은 그들에게서 평화를 앗아가는 것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필리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스페인 군대는 비밀 협약을 맺어 마닐라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척하기로 했다. 단 스페인이 마닐라를 미군에게만 이양하고 필리핀인들은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69-70)


5. 제국의 속성


윌리엄 매킨리에게 모든 일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면서 필리핀 군도 전체가 예상치 못하게 매킨리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필리핀을 스페인에 다시 넘겨야 하나? 아니면 팔아야 할까?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낫나? “나는 매일 밤 자정까지 백악관 안에서 서성였다.” 매킨리는 성직자들에게 “여러분, 저는 전능하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빛으로 인도해달라고 숱한 밤 기도했음을 당당히 고백합니다”라고 했다. 매킨리에게는 어떤 선택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민지를 스페인에 반환하는 것은 ‘겁쟁이’처럼 보일 테고, 다른 나라에 이를 넘기는 것은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그는 필리핀인들에게 자치능력이 없다고 봤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필리핀을 차지한 뒤 “필리핀인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안겨주고 문명인으로 만들어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다. 주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베푸는 것이다”. 72)


그러나 법적으로는 해결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는 1901년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수정헌법 제4조에 따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국적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영토도 포함되었는가? 정부는 미국United States이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주장했다. 그 명칭은 미국 관할권 하의 모든 지역을 지칭할 수 있으나 협의의 개념으로 주 연합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헌법이 가리키는 ‘미국United States’은 그런 협의의 개념이며 그 주들만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토는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헌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United States’에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환기시키면서 보충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문구를 통해 논거를 명확히 표현했다. 푸에르토리코는 “국내라는 맥락에서는 외국인데, 이는 해당 섬이 미국에 편입되지 않은 데다 점령지로서 미국의 부속물appurtenant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1-3)


1901년 판결은 통칭 도서 판례Insular Cases로 알려져 있다. (짐 크로법이 합헌이라고 명시한) 플레시 판례와 마찬가지로 도서 판례의 쟁점은 인종이었다. 다수 의견에는 헌법의 틀 내에서 ‘야만인’과 ‘이방의 인종’에 관한 것을 포함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한 대법관은 그렇게 하면 ‘미국의 제도가 망가져’ ‘정부 구조 전체’가 ‘전복’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보충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대법원은 플레시 판례를 뒤집고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시설은 법에 따라 평등을 보장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도서 판례는 이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보장받는 수정헌법 제4조에 따른 시민권이 편입되지 않은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지역들에서는 투쟁을 거친 후에야 뒤늦게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법정 시민권’으로 자리 잡게 됐는데, 헌법이 아닌 법령으로 보호되며, 따라서 무효가 될 수도 있는 권리였다. 83-4)


푸에르토리코인들은 1917년에 시민이 되었으며,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인들은 1927년에, 그리고 괌 주민들은 1950년에 시민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법정 시민권이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도 있었다. 필리핀인들은 47년간의 미국 통치하에서도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미국령 사모아인들은 1900년 이후로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만 ‘미국 국적자’일 뿐이다. 그들은 입대가 허용되며 많은 수가 군복무 중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민이 아니다. 도서 판례의 중요성은 법의 영역을 넘어선다. 미국 영토 중 ‘편입’된 부분과 ‘편입되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는 이런 판례들은 미국의 일부 지역이 진정한 미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법으로 확정지었다. 일부 영토는, 즉 백인 정착민들로 채워진 영토는 주 지위를 기대해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법원장이 표현했듯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그림자처럼 무기한으로 모호한 중간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무기한’ 상태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84)


6. 자유의 함성을 내지르다


정복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똑같다. 지도자를 무너뜨리면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얻었으나 필리핀군과의 싸움에 돌입하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핀 남쪽으로 갈수록 루손과는 상황은 다소 동떨어져 보였다. 아기날도의 항복은 이론상으로는 필리핀 공화국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세력 범위를 남쪽으로 넓혀 필리핀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사마르까지 확장을 꾀하다가 필리핀 저항 세력이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01년 5월, 아서 맥아더 장군(더 잘 알려진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는 ‘과감한 조치’를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사마르를 ‘깨끗하게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교역을 중단시키고 농작물을 태워버리고 민간인을 이주시키고 게릴라에 맞서 험준한 지형을 넘어다니는 ‘하이킹’에 나서는 것이었다. 94)


극도로 가혹한 전술이 밝혀지면서 ‘유감’을 표명하긴 했으나 그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미국의 공공사업 활동은 저항군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한편, 고문·방화 및 식량 몰수를 통해 저항 세력을 혹독하게 응징했다. 1902년 공화당 의원 한 사람은 “필리핀은 군화에 짓밟히고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말했다. “미군들은 포로도 남기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필리핀을 간단히 쓸어버린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필리핀인을 잡기만 하면 죽여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목숨을 잃은 대다수 필리핀인은 광적인 ‘하이커’들의 손에 죽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전쟁이 사마르 전역에서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확실히 총격과 방화로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긴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흔히 그랬듯이 대부분의 전쟁 피해자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이러한 재해가 한순간에 급속히 확산됐다.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 각기병, 우역, 결핵, 천연두, 선페스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던 것이다. 96-7)


민다나오, 팔라완, 바실란 및 술루 군도의 섬들을 가리키는 ‘모로랜드’는 필리핀에서 인구 밀도가 낮아 전체 인구 순위의 끝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이는 다른 나라였다. 주민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가 아닌 무슬림(이른바 ‘모로인’)이었고 술탄과 다투 통치 방식을 따랐다. 이슬람법을 따르고 일부다처제였으며 노예제도 유지됐다. 러프 라이더스 시절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오랜 전우였던 레너드 우드 장군이 1903년 모로주의 총독이 되었다. 우드는 ‘확실한 교훈’을 기대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수십 번씩 쓸데없이 반복’되는 양상이었다. 이는 우드가 바라 마지않던 싸움이었다.  모로주는 1913년에 민정이 실시되면서 14년간의 계엄령이 종료됐다. 사실 육군의 첫 12명의 참모총장은 모두 필리핀전쟁에 참전했다. 1899년 교전 발생 시부터 1913년 모로랜드의 군정 종식에 이르기까지, 필리핀전쟁은 아프간전쟁 다음으로 미국이 최장기로 참전한 전쟁이다. 98, 100-2)


# 다투. 필리핀 군도의 원주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일컫는 말


7. 배타적 집단의 외부


쿠바식 모델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03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재정이 붕괴됐다. 대통령인 카를로스 모랄레스는 미국의 도미니카 합병을 환영한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다. 그런 제안을 내놓은 것은 두 번째였다. 10여 년 전이라면 루스벨트는 모랄레스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필리핀전쟁 때문에 지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배가 불룩한 보아뱀이 고슴도치의 엉덩이까지 홀랑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그 땅을 합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대신 루스벨트는 쿠바 스타일의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정부가 도미니카공화국 재정에 대한 임시 통제권을 가지며(따라서 미국 은행에 채무 상환을 보장), 그 대가로 모랄레스 정부를 반군 세력과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미국의 이익은 보호받고 도미니카공화국은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카리브해 국가들과 차례로 그런 계약을 맺었다. 미국은 재정과 무역을 좌지우지하게 됐지만 형식적으로 주권은 손대지 않았다. 108)


남부 출신인 우드로 윌슨이 제국 추세에 역행하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식민지인들에 대한 윌슨의 동정은 확실히 남북전쟁 후,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북부가 ‘정복당한 속국’(이전 남부 연합 소속 주들)을 다뤘던 방식에 분노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윌슨이 남부 출신이라는 점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윌슨은 일부 주변 사람들처럼 유색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아이’ 같은 존재로, 자치 이전에 ‘교육’이 필요한 존재로 봤다. 그는 아이들이 총기를 다룰 준비가 되기도 전에 힘을 얻는 건 최악의 상황이라고 봤다. 그는 이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이 남북전쟁 직후 공직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윌슨은 그런 상황을 ‘남부 백인이 검둥이의 발아래’ 놓이는 것이라고 썼다. 이는 대재앙이며 ‘문명의 진정한 전복’이라는 것이었다. 미 흑인의 때이른 정계 진출은 전쟁 그 자체보다도 더 ‘비할 데 없이 깊고 되돌리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10)


윌슨은 작은 나라와 그들의 민족자결권을 위해 말했으나 그런 발언은 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헝가리 등 남부 유럽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푸에르토리코는 계획에 없었다. 1917년 미국 정부는 푸에르토리코 바로 옆의 카리브해 군도 중 작은 섬들로 이뤄진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사들였다. 이 식민지가 바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서, 1900년 이후 합병된 최초의 유인 영토였다. 제국은 살아남았고 모든 승전국의 식민지는 그대로 유지됐다. 위임통치는 명백히 인종적 계급에 따라 정해졌고 중동 국가들의 영토는 최상위(독립의 과도기 단계인 ‘클래스 A’)에, 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 영토는 그 아래(‘클래스 B와 C’)에 놓였다. 일본 대표는 국제연맹 협약에 최소한 인종적 평등에 관한 문구를 삽입하라고 요구했다. 이 제안은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대표는 그런 논지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그러나 윌슨은 이를 저지하며 인종 평등의 원칙을 그대로 두는 것조차 거부했다. 113-4)


8. 화이트 시티


“자본과 세심한 계획만 있다면 알아서 굴러간다.” 대니얼 버넘은 시카고에 화이트 시티를 세운 해에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게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계획은 ‘알아서 굴러가지’ 않았다. 세심한 관리가 요구됐던 것이다. 도시란 기괴할 정도로 복잡하기에 도시계획에는 세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시카고 계획은 구상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그룹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수행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400명의 저명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이 계획의 시행을 담당했다. 반면 필리핀은 달랐다. 설득할 유권자도 없었다. 버넘은 도착할 때까지 필리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체류 기간은 6주에 불과했다. 버넘은 총 6개월간 계획에 몰두했는데, 그 기간에 여행과 관광도 하면서 바기오에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시켰다. 시카고에서라면 버넘이 그토록 서둘러 일을 끝낼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닐라에서는 가능했다. 119-20)


버넘과 같은 사람들에게 식민지란 본국에서 계획에 차질을 불러오는 저항에 부딪힐 걱정 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터였다. 본토인들은 땅을 몰수하고 세금을 전용하고 산꼭대기에 낙원을 짓기 위해 일꾼들의 목숨을 희생시켜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필리핀인들은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버넘의 도시계획 한가운데에 따로 분리된 공간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낸 세금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식민 지배자의 눈에 가치 있는 존재임을 어필해 조금이나마 존중을 받는 것뿐이었다. 건축 분야에서는 윌리엄 파슨스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버넘의 계획을 실행한 후안 아레야노가 본보기라 할 수 있었다. 아레야노가 마닐라에 돌아오자마자 처음으로 받은 중요한 의뢰는 버넘이 루네타 주변 지역에 계획한 의사당 건축이었다. 의사당 건물의 상징성으로 마닐라라는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이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이다. 125-7)


9. 국경없는의사회


프리츠 하버가 1915년 이프르에서 염소가스를 방출한 이후 화학전의 위협이 감돌았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가스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군대는 그와 상관없이 화학전에 대비했다. 독가스를 제조하고 테스트까지 했다. 화학전 부대의 의료 지원팀을 이끄는 사람은 코닐리어스 로즈였다. 의료 지원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승인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고위급 의사였다. 화학전 부대의 기록을 검토해봐도 그가 실험을 주저하거나 망설였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열정적으로 실험을 주도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가스실로 보내도록 했으며 그들에게 어떤 가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화학물질로 인한 화상에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 등 실험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로즈는 “화학전에서 독가스를 비롯한 사전 공작에 맞서 싸운” 데 대해 공로훈장을 받았다. 140-1)


로즈에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과학자들은 전쟁 초기부터 로즈가 주로 다루던 화학물질인 겨자 작용제가 림프 조직과 골수를 표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림프종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전쟁 중에 알게 된 사실을 활용해 이 문제를 다시 다루기로 했다. 로즈는 화학전 부대에서 그와 함께 겨자 작용제를 연구했던 프로그램 관리자 거의 전원을 채용했다. 이번에는 신약 개발이라는 명목이었다. 맨해튼 메모리얼 병원과 슬론 케터링 연구소 두 곳의 이사장을 나란히 맡은 로즈는 대규모 연구실과 함께 풍부한 자금도 확보한 상태였다. 게다가 병원은 실험 단계의 치료법에 기꺼이 동의할 만한 불치병 환자들로 가득했다. 로즈는 암과 싸우기 위해 각종 화학물질을 실험하면서 이른바 ‘전력을 다해 전면 공격’에 나섰다. 『사이언스』는 그를 당대 ‘미국 의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그는 1949년에 『타임』 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141-2)


10. 미국이라는 요새


미국 영토 거주자들에게 제국이란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본토에서 제국의 존재는 시야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렸다. 영국이 거대하게 우뚝 솟은 웅장한 건물을 점령지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면, 미국은 식민지 수도에 단 하나의 식민지 건물도 짓지 않았다. 식민지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학교도 짓지 않았다. 미국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육·해군 및 내무부 산하의 급조된 관료주의 체계에 따라 해외 영토를 관리했던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유럽 식민지를 감독했던 전문 행정관과 달리 해외 영토에 파견된 이들은 자기가 배치된 곳에 대해 잘 몰랐고, 보직 순환이 빨랐던 것이다. 본토의 무신경함은 늘 이들 영토에 부담으로 다가왔으나, 1930년경에 이는 노골적인 위협으로 발전했다. ‘요새화된 미국Fortress America’이 적대적인 세력에 맞서 방어벽을 세우자 이후 10년간 경제적 파탄과 군사적 위험이 이어졌다. 식민지들은 보호는 커녕 오히려 본토를 둘러싼 장벽이 높아지자 외부의 감시를 받게 됐다.143-4)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무역에 문을 닫아걸자 주요 국가들은 내수 생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수란 식민지가 포함된 개념이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는 아시아의 식민지로부터 고무와 같은 열대작물을 여전히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거대 제국을 거느리지 않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산업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물자 조달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은 특수한 상황에 있었다. 식민지를 보유하긴 했지만, 식민지가 생명줄은 아니었다. 오히려 잠재적 위협에 가까웠다. 일례로 식민지에서 생산된 설탕은 본토의 사탕수수와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과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본토 농부들은 자신들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국경 자체가 달라질 상황이었다. 필리핀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장벽 밖으로 쫓겨날 참이었다. 146-7)


본토는 필리핀에 그리 의존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수십 년간의 미국 통치 후 필리핀은 미국 본토에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 1930년경에는 필리핀의 대미 교역이 전체의 약 5분의 4에 달했다. 게다가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저항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소규모 원주민 부대를 창설했으나 필리핀은 외세의 침입을 격퇴할 대외군을 창설할 수 없었다. 갑자기 미군의 보호와 본토 시장에 무관세로 상품을 수출하던 길이 동시에 막혀버리자 대혼란이 일어났다. 미 하원에서 필리핀 독립을 승인하는 법안이 순조롭게 통과되자, 필리핀 의회는 1934년 5월 1일, 미국의 필리핀 점령 36주년이 되는 날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비준했다. 강대국이 최대 식민지를 폭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독립시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가까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현재의 인도네시아)는 300년간 네덜란드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 10분의 1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있던 필리핀은 독립을 앞두게 됐다. 148-9)


11. 전쟁 국가


교전 지역의 삶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외출할 때는 방독면을 들고 다녀야 했다. 엄격한 통금을 지켜야 하는 삶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전 조치들은 침략에 대비한 것만이 아니었다. 군대는 하와이 주민 자체에 대해서도 극도의 경계 조치를 주장했다. 해군장관이 보기에 하와이는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일본계여서 인구 구성이 의심스러운 ‘적국’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지문 날인과 최대 규모의 백신 접종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하와이 주민들은 신분증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했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체포될 수 있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총 외에도 육군은 법 시행을 위한 군정재판소 체제를 수립했다. 그들이 시행한 정의는 성급했고 무자비했다. 하와이 군정재판소에서 (배심원도 변호사도 없이) 재판받은 수만 명의 피고인은 강도, 폭행, 사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결근, 통금 위반, 교통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60-2)


그렇다고 하와이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별로 없다. 복역 대신 헌혈하거나, 벌금을 내는 대신 전시 채권을 구입하라고 피고에게 명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식으로 육군은 하와이 주민들에게 애국적인 행위에 가담하도록 강제했으나, 본토인들은 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와이의 계엄령은 3년 여간 지속됐는데, 이는 일본이 하와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간보다 2년 반 정도 더 길었다. 하와이의 군사령관은 지배권 포기를 계속해서 거부했다. 내무장관은 이를 “미국의 하와이 ‘점령 영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계엄령이 해제된 것은 잇달아 법적 이의가 제기되면서 일반에 해당 사안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본토가 관심을 가진 드문 경우였다. 대법원은 하와이의 계엄령은 불법이며 그곳의 시민들은 본토 시민들과 동일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런 판결은 계엄령뿐 아니라 전쟁 자체가 완전히 종식된 1946년에 가서야 내려졌다. 163)


일본은 필리핀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래스카로 넘어갔다. 1942년 6월, 일본은 더치 하버를 폭격했고 알류샨 열도의 아가투, 아투, 키스카섬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1년 넘게 이 섬들을 점령한 후 아투의 몇 안 되는 인구(42명)를 전쟁 포로로 삼아 일본으로 이송했다. 알래스카 일부를 점령한 것은 중대한 성취였고 선동가들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으로 가져온 유적을 자랑스레 전시했다. 미국 본토인들은 그 사건에 대해 거의 몰랐는데, 이는 공식적인 검열 때문이었다. 알래스카에서는 검열이 의무였고 굉장히 활발히 이뤄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완벽에 가까운 정보 봉쇄였다. 군 당국의 광범위한 해석에 따라 알래스카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통제됐다. 기자들은 알래스카를 ‘가장 조용한 전구戰區’라거나 ‘숨은 전선’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는 잊힌 전쟁이다. 일본군이 알래스카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알류샨 열도의 알류트족 억류 사실을 알면 또 한 번 놀란다. 164-5)


12.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가 있는 법


일본은 식민지 주민들의 원한을 제대로 이해했다. 일제 선동가들은 필리핀인들에게 미국의 기나긴 제국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북미 인디언의 토지를 강탈한 이야기로 시작해 멕시코전쟁과 스페인 식민지 합병 및 필리핀전쟁으로 이어갔고, 일본의 침략에 대해 초토화 정책을 채택한 데까지 나아갔다. 한 일본 언론인은 “미국이 널찍한 대로와 산속 호화 리조트를 짓기 위해 여러분의 세금을 마구 썼다”고 덧붙이며 대니얼 버넘의 시대에 입은 상처에 소금을 마구 비벼댔다. 일본은 다른 것을 약속했다.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식민지를 겪었던 지역에서는 강력하고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일본은 백인 열강들이라면 아시아의 독립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국에서 가장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조차 모든 인종을 동일한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니, 아시아인들이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180-1)


막상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자, 이와 관련된 상황은 기대와 반대로 흘러갔다. 마닐라를 장악한 후 나온 일본의 첫 공식 발표는 위협적이었다. 필리핀인 및 ‘자국 영토 전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적의나 저항도 ‘잿더미’로 화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둘째 주가 되자 군정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17가지 행위를 적시했다. 여기에는 반란, 허위 정보 유포, 군사적 가치(의류 포함)가 있는 모든 것의 훼손, 식량 은닉, 통행 방해, 또는 어떤 식으로든 군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 등이 포함됐다. 이러한 행위를 권유하기만 해도 처형의 근거가 됐다. 필리핀인들은 곧 일본이 필리핀을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약탈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예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1899년을 다시 사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또다시 콜레라가 마닐라를 덮쳤다. 사회적 붕괴와 사람들의 이주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다. 필리핀인들은 또다시 저항했다. 항복한 맥아더 군대의 잔류병들과 새로 결성된 게릴라군들은 일본인들을 공격했다. 181-2)


1944년 10월, 20만 명이 넘는 맥아더 부대가 해변에 상륙하면서 필리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싸우기 전에 퇴로를 차단해버렸다”는 것이 맥아더 선두 사단의 공식적인 기록이었다. 이와부치의 퇴로를 끊어버림으로써 맥아더는 사실상 인구 밀집 도시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라고 부추긴 셈이었다. 맥아더의 병사들은 신중히 대량 학살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도시 전역의 건물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건물에 들어가 하나하나 찾아내 습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건물 전체를 폭격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 보였다. 일본군이 특히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인트라무로스는 결국 맥아더의 승인하에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2월 23일, 미친 듯이 폭격이 계속되던 한 시간 동안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의 밀집 지역으로 1분마다 3톤에 달하는 폭탄이 날아들었다. 건물 안에 있는 일부는 적군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이 민간인들 역시 정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미국인’이었다. 187-90)


제2부 점묘주의 제국


13. 킬로이가 여기 다녀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미국 본토를 군수품을 대량으로 쏟아내는 거인의 심장이라고 생각해보자. 일련의 기지들은 동맥처럼 기능하면서 이러한 군수품을 전선으로 내보낸다. 이들 기지에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선박이 정박하며 부품과 연료·식량이 저장되고, 또 이곳에서 부상자를 치료하고 손상된 물건들을 수리했다. 1940년 당시 루스벨트 행정부는 서반구의 영국령 기지와 50대의 구축함을 교환했다. 미국은 이 기지들을 99년간 조차했다. 그러나 관할권의 범위는 깜짝 놀랄 정도였고, “아마도 영국 정부가 이전에 영국령을 넘긴 그 어떤 경우보다 광범위할 것”이라고 영국 주재 미국 대사는 자랑했다. 전쟁 중에 미국은 2000개의 해외 기지에 무려 3만 개에 달하는 군사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들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낙서로 자신들의 존재를 표시했다. 벽 너머를 들여다보는 만화 캐릭터 얼굴에 “킬로이가 다녀갔다Kiloy Was Here”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실제로 킬로이는 어디에나 있었다. 199-201)


간단히 말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전 지구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국무부 관리들은 지도상의 각 나라, 식민지, 지역, 속령 등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확립하면서(많은 경우 처음으로) 전시 메모를 맹렬한 기세로 쏟아냈다. 외몽골, 북부 부코비나, 중국령 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 자치구), 영국령 보르네오섬, 프랑스령 소말리아, 남부 소말리아 또는 카르파소 남부 루테니아 등 미국의 주요 의제에 등장한 모든 지역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고심하는 모습은 얼굴에 진땀이 흘러내리는 만화 캐릭터가 연상될 정도였다. 미국에서 전쟁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44년에 기자인 존 허시는 “한때 유럽의 침공이 쉴 새 없이 이민자가 미국으로 밀려들어온 방식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이 이민자의 자손들이 쉴 새 없이 유럽으로 몰려가는 식으로 미국의 침공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뿐.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대거 ‘침공’이 이뤄졌다. 202, 204-5) 


14. 미국의 탈식민화


제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적으로 제국에 대한 저항을 촉발시켰다. 반란은 아시아에서 시작됐지만 이내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및 중동으로 퍼져나갔다.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식민지 주민들은 전 세계의 대제국들을 해체시켰다. 1940년에는 전 세계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식민지 상태에 놓였다. 1965년에는 그 수가 50분의 1로 줄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백인 지배 세력이 아시아의 힘에 의해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들은 다년간 라디오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일본의 메시지를 들었다. 1943년에 그들은 버마와 필리핀에서 일본이 식민지들에 명목상이나마 독립을 허락했을 당시 자유 그 자체를 맛봤다. 아시아인들은 생각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전역에 무기가 보급되자, 식민지 시대 전반을 특징지었던 엄격한 군비 통제는 완전히 효력을 잃었다. 210-1)


미국은 억지로 식민지를 보유하려 하기보다는 필리핀을 서둘러 포기했다. 이는 일제 부역자 문제를 남겼다. 루스벨트는 사망 전에, 전쟁 중 일제에 부역한 이들의 권한을 박탈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누가 ‘부역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가리기가 애매했다. 맥아더의 보좌관이었던 마누엘 로하스 주위로 짙게 드리워진 암운이 소용돌이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 중에 로하스는 친일 정부 내각의 인사였다. 그는 일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미 총영사는 “양측을 도우며 신중을 기했다”고 보고했다. 맥아더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로하스는 부역자가 아니오.” 그는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로하스가 “게릴라 운동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1946년, 필리핀 사회의 유력 인사들 중 일부의 지지를 받아 로하스는 독립 국가가 된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부통령은 미국의 필리핀 탈환(마닐라 전투) 기간에 가족을 잃은 엘피디오 키리노였다. 216-7)


필리핀 독립을 묵인하기 위해 미국 지도층은 필리핀인들의 자치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종차별주의적 두려움을 버려야 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식민지 지위를 끝내려면 이와는 다른 종류의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주 지위를 인정하기 위해 본토 정치인들은 백인의 확고한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다. 1948년부터 트루먼은 그런 목표를 활발히 추진했다. 그 영토들에 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시아와 태평양 도서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끼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미국 편입은 국내 정치의 다른 축을 흔들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이 신생 주들이 소속 정당에 얼마나 충성하든 간에, 인종적 구성으로 인해 시민권 운동에 확실히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었다. 이로써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시민권 전쟁의 전선이 열렸다. 마침내 1959년에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각각 49번째 주와 50번째 주로 의회 승인을 받았다. 218-20)


15.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인 걸 아는 미국인은 없다


무뇨스 마린과 알비수는 공통점이 많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본토 명문 대학의 법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무뇨스 마린은 조지타운, 알비수는 하버드). 그들은 대화하면서 정치적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기는 달랐다. 알비수가 ‘미국인을 몰아내는’ 데 골몰해 있었다면 무뇨스 마린의 일차적 관심사는 ‘기아 퇴치’였다. 필리핀이 해방된 1946년에 무뇨스 마린은 공개적으로 독립에 반대하면서, 당 내부에서 독립을 지지한 이들을 숙청했다. 그의 대중민주당PPD은 독립도 주 지위 획득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되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미국 시장 진출 기회를 잃지 않으면서도 푸에르토리코가 자치권을 획득하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탈식민화가 빠르게 이뤄지는 가운데 필리핀이 독립을 쟁취하고 괌은 시민권을 얻었으며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주 지위 획득에 나서자, 본토 정부는 푸에르토리코라는 난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224-5)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기아 문제를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량 생산을 늘리든가 아니면 인구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는 경제 발전을 촉진해 푸에르토리코를 빈곤에서 점차 벗어나도록 지휘했지만 그 역시 두 번째 해법에 솔깃했다. 그는 “인구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사회에서 이는 민감한 문제였다. 산아제한은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알비수는 오히려 인구가 부족하다고 봤으며, 산아제한이 ‘민족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침범’하려는 시도이자 푸에르토리코인의 출산의 자유를 가로막는 행위라고 여겼다. 공개적으로 정부는 산아제한과 무관했다. 하지만 비공개적으로는 의사와 연구자 그리고 제약 회사에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다. 푸에르토리코가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피임약을 실험하기 위한 무대가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26-7)


1947년 무뇨스 마린의 정당은 이민국을 설립했다. 주민들이 섬을 떠나도록 하는 일을 전담하는 국가 기관으로, 매우 희귀한 경우였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떠났다. 1950년에는 푸에르토리코인 7명 중 1명이 푸에르토리코가 아닌 본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55년에는 거의 4명 중 1명에 육박하게 됐다. 알비수는 여전히 독립을 주장했던 반면, 무뇨스 마린은 좀 덜 강압적인 형태의 식민 정책을 추구했다. ‘미국인을 몰아내는 것’과 ‘기아를 몰아내는 것’을 두고 1930년대에 그가 저녁을 먹으며 알비수와 벌였던 토론은 우호적인 논쟁에서 곧 세계관의 근본적인 불화로 비화하게 됐다. 그러나 뉴욕으로 이주의 물결이 거세지자 독립해야 할 명분은 더 약화됐다. 뉴욕에 거주하는 푸에르토리코인의 존재 한 명 한 명이 푸에르토리코를 미국과 더 단단히 묶어버렸다. 1950년 7월 무뇨스 마린의 요청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해 푸에르토리코 헌법제정회의를 요구하는 법에 서명했다. 230-2)


이어진 주민투표는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에게 주 지위를 원하는지 아니면 독립을 원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본토에 대한 기존의 식민지 관계의 범위 내에서 새로운 헌법을 택할 것인지를 물었다. 4대 1로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겠다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새로운 정부는 영어로 ‘연방Commonwealth’이라 불렸으며 스페인어로는 ‘자유연합주’라고 불렸다. 사실상 권한 구조는 변한 것이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 연방정부에 대해 투표권이 없었으나 정부는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미국 의회는 그런 재량권을 활용해 헌법 개정안에 따른 경제적 권리에 대한 법안을 즉시 부결시켰다). 차이가 있다면 무뇨스 마린이 주장한 대로 이제 본토와의 관계는 푸에르토리코 유권자들이 승인한 것이며 따라서 강제에 의한 관계가 아니고 상호 합의에 의한 관계가 된 것이었다. 미국 침공 기념일인 1952년 7월 25일,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연방의 초대 지사로 취임했다. 235)


16. 합성소재의 세계


식민지 작물이라 할 수 있는 고무는 산업 경제의 구석구석 쓰이지 않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 수익성 높은 사업이었다. 1941년 12월 7~8일, 일본은 고무를 비롯한 핵심 원자재 공급 문제를 우려해 중국 너머로 전쟁 범위를 확대했고 자원 매장량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까지 진격했다. 몇 달 만에 일본은 미국 고무 공급의 97퍼센트를 차지한 유럽 식민지를 점령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사실상 고무 공급원이 끊긴 셈이 됐다.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협이었는지 제대로 옮기기는 어렵다. 대대적으로 주목받았던 한 정부 보고서에는 이러한 상황이 “매우 위험하므로 즉각적인 시정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미국은 전방과 후방 모두 붕괴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새로 심은 고무나무는 채취하기까지 최소 6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다른 식물에서 고무를 추출할 수 있을까?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이를 실험(마치 식물학 분야의 맨해튼 프로젝트라 할 만했다)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244)


고무 합성의 비결이 밝혀졌을 때 극적인 대발견의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이는 충분한 자금을 지원받은 화공학자 집단이 이끌어낸 1000여 가지 발견에 힘입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산업적 성취는 과학적 발전만큼이나 놀라웠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에는 51개의 합성고무 공장이 가동되었고, 그것들의 전체 운영비를 합치면 하루에 2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런 공장 한 곳에서만 1250명이 일했고, 2400만 그루의 고무나무와 9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요하는 고무농장을 대체하기에 충분한 합성고무를 만들었다. 1944년 중반의 고무 공급은 정부 요건을 충족했고, 1945년경에는 이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합성고무가 화학자들이 모자 속에서 홱 끄집어낸 유일한 토끼는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은 미국이 전쟁 중에 거의 끊다시피 한 원자재의 수였다. 견사, 삼, 황마, 장뇌, 목화, 양모, 제충국, 구타페르카, 주석, 구리, 동유 등을 차례로 합성 물질로 대체했다. 미국 경제 전반에서 식민지는 화학으로 대체되었다. 247-8)


플라스틱만큼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는 합성소재는 없다. 미군은 더 이상 쉽게 확보할 수 없는 모든 ‘전략’ 물자 대용품으로서 대부분 석유로 만든 플라스틱을 사용하고자 했다. 전시 협력은 가능한 한 플라스틱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합성고무는 천연고무가 사용되는 주요 분야 하나를 대체한 반면, 플라스틱을 미세하게 응용할 수 있는 범위는 무수했다. 투명 플라스틱인 플렉시유리Plexiglas는 비행기 조종석 창문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셀로판지는 식품 저장고의 양철통을 대체할 수 있었다. 플라스틱과 유리를 합성한 유리섬유는 항공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었다. 1930~1950년에 전 세계에서 연간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양은 40배가 늘어났다. 2000년에는 1930년의 규모에 비해 약 3000배로 늘어났다. 각종 원자재를 식민지에서 추출하기보다는 국제 무역을 통해 안전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긴박감이 상당히 줄었다. 국가 보안이 더 이상 원자재에 좌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48-52)


17. 이것은 신이 행하신 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기획자들은 한 당황한 장군이 표현한 “상상 이상의 군수품 요건”에 맞닥뜨렸다. 모든 해외 주둔 군인에게 미국은 하루에 30킬로그램의 군수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전쟁 발발 전에 군수logistics란 전문가 용어였지 일상의 대화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용맹과 리더십, 전술적 정확성을 높이 샀으며 조달과 운송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장에서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는 데 그쳤던 사령관들은 점차 적재량과 재고 수준, 물자 보급로에 관해 자주 언급하게 됐다. 군수 혁신은 속도를 높이는 것 이상이었다. 장거리 운송망을 운영하기 위해 더 이상 대규모 지역이나 지대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지도상의 지점들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밀림의 공터에 있는 비행장 정도만 연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플라스틱과 기타 합성소재처럼 이들 신기술은 식민지를 전혀 필요 없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259-60)


항공기 수가 넘쳐나자 연합군은 이것을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 활용했을 정도다. 장거리 보급로도 항공 운송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거의 4000대에 달하는 B-29 슈퍼포트리스를 생산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톤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항공술과 마찬가지로 무선은 공간을 건너뛰는 기술이었다. 두 개의 트랜스시버만 있으면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땅을 통제할 필요도 없었다. 무선을 통해 멀리 떨어진 지역이 서로 연락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배와 비행기, 트럭, 탱크, 잠수함 그리고 전장에서도 통신이 가능해졌다. 미국이 전 세계에 건설한 멀리 떨어진 수천 개의 기지는 무선 기술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메시지를 내보내면 누구든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암호화 기술에 엄청나게 투자했다. 1만6000명의 암호 통신 사무직원이 전쟁 중에 통신 암호화와 암호 해독에 종사했다. 261, 265-6)


18. 붉은색 팔각형의 제국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부유하고 막강한 데다 화학자와 공학자들 덕분에 식민지 건설 없이도 해외 영토를 좌지우지하는 수단을 보유하게 됐다. 이것 말고도 전쟁 덕분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좀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진행됐다. 바로 표준에 관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표준국에는 가장 신뢰받는 정부 관리 중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상무장관인 허버트 후버였다. 오늘날 후버는 1929년 재임 중에 주식시장 폭락을 겪은 불운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후버는 요령 없는 정치인이자 경제 운용에 서투른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후버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경제 문제의 원인은 자본가의 부정 때문도, 노동자의 조바심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물건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효과가 없는 일에 많은 시간과 돈이 낭비됐던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면 모두가 골고루 혜택을 누리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준화와 간소화를 번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274-7)


표준을 공표하는 제국의 능력은 식민지 정복의 주요 이점이었다. 제국의 표준화란 머나먼 땅에서도 식민 지배자의 관행이 지켜진다는 의미였다. 제국은 새로운 법과 아이디어, 언어, 스포츠, 군사 협정, 패션, 도량형, 예의범절, 화폐, 업계 관행 등을 식민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실제로 식민지 관리들은 이러한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영국의 도량형 체계(피트, 야드, 갤런, 파운드, 톤)가 제국주의 체계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도량형은 영국 제도를 넘어 대영제국 전체에 동일한 단위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보급됐던 것이다. 제국은 사람들까지 표준화시켰다. 필리핀의 간호 업무를 예로 들어보자. 영토 합병 이후 미국 정부는 곧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필리핀이 미국의 최대 외국 간호 인력 공급지가 된 데에는 시장의 역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필리핀이 비교우위를 갖게 된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간호사들이 정확히 미국 표준을 따른 실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279-8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표준 문제는 한층 더 심각했는데, 미국이 유럽에 인력과 자금만 보낸 게 아니라 세계 전역으로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비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분의 나사와 너트, 볼트를 해외로 보내는 데 6억 달러를 썼다. 제조업체들이 그냥 유럽식 표준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유럽이 연합군 전시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경우에만 유럽 표준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유럽은 곧 그 중심적 역할을 잃었다. 프랑스의 함락과 영국에 대한 폭격 사태로 유럽의 공장들은 가동을 멈췄다. 동시에 미국 제조업은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 공장들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할수록 그들의 표준화 작업은 더 정교해졌다. 저명한 두 전문가의 표현에 따르면, 표준화의 목표는 “전체 공정을 거대한 강처럼 순조로운 흐름에 통합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 주도의 표준화를 감안할 때 전후 세계화가 적어도 처음에는 미국에게 유리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81-2)


19. 언어는 바이러스다


언어는 정지 표지판이나 나사산과 마찬가지로 표준에 해당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어떤 개념을 떠올리기 쉽게 혹은 어렵게 만들면서,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동시에 사회를 구성한다. 단일 언어가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 거의 모든 교육받은 권력층이 어느 정도 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버지니아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처럼 단일 언어가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정착지 건설 붐 덕분이었다. 너도나도 정착지 건설에 뛰어들면서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이 방대한 영토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착민들 외에 영어를 국가 공용어로 만드는 데에는 훨씬 더 폭력적인 과정이 동반됐다. 토착언어는 강제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방대했고 부족어를 쓰지 못하게 일일이 감시할 만한 충분한 식민 지배 관리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다른 수단에 의지했다. 무엇보다 식민 당국은 교육을 활용했다. 292-3)


연합군 지도부는 전쟁을 어떤 식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다가 언어에 생각이 미쳤다. 윈스턴 처칠은 하버드에서 1943년에 한 연설에서 “미래의 제국은 의식의 제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정신적 식민화의 핵심은 언어적인 것에 있다고 믿었다. 처칠은 하버드 학생들에게 영어가 전 세계에서 사용된다면 영어 사용자들이 누리게 될 ‘엄청난 편리함’에 대해 상상해보라고 주문했다. 더 이상 영토로 쌓아올린 제국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영어가 맞닥뜨린 과제는 기술적인 차원 이상의 것이었다. 영어 확산의 주요 수단이었던 식민 지배는 눈에 띄게 와해되고 있었다. 탈식민화로 6억 명 이상이 영국과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영어를 사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많은 사람이 영어가 자국에 끼친 해악을 거세게 비난했다. 1949년 유엔 총회는 회원국 국민이 모국어로 초·중등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295, 298-9)


그러면 영어는 어떻게 전 세계에 널리 퍼졌을까? 표준은 다른 종류의 권력과는 작동 방식이 다르다. 정부는 세금을 부과하고 병력을 징집하며 당사자를 구속할 수 있다. 이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표준은 강제하기가 훨씬 어려우며, 언어는 특히나 더 그렇다. 표준은 힘을 반영하지만 실제 압력이 국가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공동체의 압력이 더 크다. 동떨어진 문화들이 가까이에서 마주치면서 공통 언어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는 아무나 선택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언어를 골라야 하고 발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는 언어를 선택해야 했다. 일단 임계치에 다다르면, 그런 선택은 사실상 의무가 되어버렸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제사회는 공통 언어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영어를 선택했고(대표적으로 항공 교통 관제사들), 각국이 영어를 받아들이자 영어는 더욱 추진력을 받으면서 결국 전 세계가 영어에 올라타게 되었다. 301)


20. 권력은 곧 주권이오, 미스터 본드


점점이 흩어진 작은 땅들은(해조분 제도의 하울랜드, 자르비스 섬 같은) 공식적인 제국의 황혼기에 특히 중요하게 취급됐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전 세계를 덮치면서 지도상에서 제국주의 체제가 대부분 쓸려나갔지만 작은 섬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물결을 피해갔다. 대규모 식민지는 자급자족을 꿈꾸며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독립을 실현하려 한 데 반해 작은 식민지는 그럴 수 없었다. 무뇨스 마린이 인정했던 것처럼 독립은 경제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나 괌과 같은 소규모 지역이 무장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실제로 자살 행위가 될 것이었다. 지정학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강대국들은 여전히 지도를 펼쳐놓고 게임을 계속했다. 미국은 제국을 구성하는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대규모 식민지는 처분해버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소규모의 반半 주권지역, 즉 군사기지에 투자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그런 기지가 800여 개에 달하며 그중 중요 기지는 섬에 위치해 있다. 314)


구체적으로 미국은 도서 기지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스완 제도가 좋은 예다. 스완 제도는 카리브해의 고립된 지역의 세 개 섬으로 이뤄진 작은 군도로서, 미국이 점령한 최초의 해조분 제도에 속했다. 해조분이 바닥나버렸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는 그레이트스완섬을 다른 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미 농무부USDA는 구제역이 의심되는 수입 가축의 검열을 위한 장소로 이곳을 활용했다. 1950년대에는 CIA가 그레이트 스완섬에 활주로와 5만 와트의 무선 송신기를 설치했다. 매우 강력한 이 송신기는 남아메리카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육로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영토까지 무선 전파로 포괄할 수 있었다. 1954년 CI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과테말라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무선 방송을 이용해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스완섬의 송신기를 활용해 미국은 이번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을 겨냥해 좀더 안전하고 정교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316-7)


핵무기와 섬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즉 세계 최대의 살상 무기는 인류 문명과 가장 동떨어진 지역에 배치된 것이다. 작은 섬들은 대다수 인구가 사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핵폭탄을 실험하고 저장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가 된다. 미국이 최초의 원자폭탄을 실험할 때 과학자들은 뉴멕시코의 사막을 골랐다. 그러나 미 원자력위원회AEC는 후속 실험 장소로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다. 섬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한 해군 장교는 “우리는 수십 장의 지도를 꺼내 외딴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 섬은 전쟁 말기에 미국이 점령한 미크로네시아 제도에 속해 있었다(이곳은 곧 미국이 감독하는 ‘전략적 신탁통치령’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군은 그곳에서 2개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일본에 떨어뜨린 것보다 성능이 훨씬 강력했다. 이 실험으로 한때는 알려져 있지 않던 환초의 이름이 유명해졌다. 319)


21. 기지 국가


‘점’들은 툴레나 비키니 환초, 스완 제도와 같은 섬이나 외딴 장소에 찍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인구가 극도로 밀집된 지역에 점이 찍히기도 했다. 잉글랜드 북부의 항구 도시인 리버풀을 예로 들어보자. 그 모든 영국 도시 중 하필 리버풀에서 1950년대에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한 활기찬 10대 문화가 싹트게 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리버풀이 유럽 내 최대 미 공군기지가 있는 버턴우드에서 서쪽으로 약 24킬로미터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이 도시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군용기가 착륙하는 곳이었다. 1636개의 건물에는 유럽 최대의 물류 창고와 함께 군의 유일한 유럽전자장비 보정연구소가 있었다. 야구팀, 축구팀, 무선국이 있었고 미국에서 끊임없이 연예인들(밥 호프, 냇 킹 콜, 빙 크로즈비)이 유입됐다. 조지 마틴이 보기에 이는 혁신이었다. 그는 군부대가 “미국 문화와 이들에게 인기 있던 음반을 함께 들여와 리버풀 일상의 주류 문화에 곧바로 연결”한 셈이었다고 기억했다. 325-7)


기지의 영향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기지에 대해 분개감을 표출하기도 하고 기지를 중심으로 삶을 일구어가면서 시위와 참여 사이를 오갔다. 1952년 군정이 끝난 이후에도 20만 명의 미군이 일본 본섬의 2000개 이상의 군시설에 계속 주둔했다. 미 군정이 끝난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18퍼센트만이 일본이 진정한 독립 국가라고 주저 없이 느낀다고 답했다. 일본 기지는 봉쇄된 미국인 거주지인 ‘아메리카 타운’으로 운영됐다. 이들은 자체 사무실과 주거지, 쇼핑센터, 학교, 소방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는 물리적으로 확장되면서 주변 지역을 흡수해, 대형 시설을 짓기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 일본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시피, 기지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술집의 난동과 비행기 추락, 혼잡한 거리에 술 취해 뛰어든 지프를 감내하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았다. 제멋대로 뻗어가는 미군 시설 내에 일본인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냉전 중에 이는 지구상 최대 규모의 꾸준한 수익원 중 하나였다. 328-9)


22. 첨병전


미국이 차지한 지도상의 점들 중에 처음부터 다란만큼 가망 없어 보이는 곳도 드물었다. 사막 한가운데의 빈 공간이었던 다란은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는 전제군주국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석유가 매장돼 있었고, 석유는 세계를 움직이는 원천이었다. 미국 정부는 1945년에 다란에 대규모 공군기지를 임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지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사우디 왕실은 성조기가 메카와 메디나 땅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우려했다. 몹시 노심초사한 나머지 사우디 왕은 다란의 미 영사관이 물리적으로 깃발을 꽂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 대신 성조기가 사우디 땅에 닿지 않도록 건물 측면에 부착되게끔 했다. 해당 장소는 기지가 아닌 ‘비행장’으로 불려야 했다. 정치적 불안이 넘실댔으나 모하메드 빈라덴은 이를 노련하게 헤쳐갔다. 그는 사우디 정부가 선호하는 건축업자가 됐다. 동시에 그는 미국과도 다수의 사업을 진행하며 뉴욕에 지사를 운영했다. 340-1)


빈라덴은 1967년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그를 태우고 비행했던 대부분의 조종사처럼 해당 비행기 조종사도 미 공군 참전 용사였다). 그는 22명의 아내로부터 낳은 54명의 자녀에게 수억 달러에 달하는 건설회사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의 아들 중에는 이익을 얻게 돼 마냥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 사업에 뛰어들어 대규모 방어 및 기반 시설 계약을 따내는 이도 있었다. 그중 아들 오사마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신을 믿지 않는 초강대국(소련)이 무슬림 땅(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는 데 맞서고자 한 오사마 빈라덴은 무자헤딘에 합류했다. 그는 아예 아프간 국경 도시인 페샤와르로 거처를 옮겼다. 빈라덴은 기반시설을 건설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파키스탄에서 무자헤딘의 본거지를 운영했다. 1988년, 그는 성전(지하드)을 지휘하기 위해 소규모 단체를 조직했다. 이는 당연하게도 알카에다 알아스카리야al-Qaeda al-Askariya(‘군기지’라는 뜻)라 불렸다. 또는 줄여서 알카에다(‘기지’)로 통했다. 341-2)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1962년에 철수했던) 다란에 미군이 (다시) 주둔하는 것은 1990년대에도 1950년대와 별 다를 바 없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기지 근처의 사우디인들은 티셔츠를 입고 차량을 운전하는 여군을 보고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그다드의 라디오 방송은 미군이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곳을 더럽힌다며 비난했다. 빈 라덴은 “이 나라를 더러운 발로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미군들이 사는 미국 식민지가 되도록 내버려두다니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며 격분했다. 미국은 “아라비아반도를 이 지역 최대의 육·해·공군 기지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가장 반대를 표명한 것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적했던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었다. 이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 9·11 테러 이후 “왜 저들은 우리를 미워하는가?”라는 질문이 끝없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라덴의 동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불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9·11 테러는 크게 보면 미국의 기지 제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346-9)


미국 정부가 ‘블랙 사이트Black Site’라 불리는 비밀 감옥을 운용한 관타나모만은 미국이 1903년부터 영구 임대한 조차지였다. 쿠바가 ‘최종 권한’을 보유하긴 했으나, 조차권 덕분에 미국은 관타나모만에서 ‘전적인 관할권 및 지배권’을 쥐게 됐다. 이와 유사한 법률 체계가 파나마운하 지대와 오키나와에도 적용됐다. 이것의 장점은 미국 정부가 배타적 지배권을 가진 영토를 얻으면서도 ‘미국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 영토’가 되는 것이라고 미 법률자문실 소속 존 유 변호사와 패트릭 필빈 변호사는 주장한다. 관타나모만은 그 특수한 법적 지위로 볼 때 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어울리는 한 쌍이다. 미국의 두 전초기지이자 거의 기억에서 잊힌 19세기 전쟁의 전리품으로, 미국의 일부가 아니면서 미국의 관할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은 오래전 제국주의 시대의 기이한 흔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지도상의 작은 점들은 점으로 연결된 오늘날 미 제국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355-6)


결론: 지속되는 제국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지속되던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이 종료됐다. 마셜 제도 공화국, 미크로네시아연방, 팔라오공화국은 미국과 ‘자유 연합 협정’을 맺어 주권 국가로 독립하면서도 미군 기지용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됐다. 그러나 (사이판이 속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푸에르토리코와 유사하게 연방에 편입됐다. 1986년, 법령이 통과되면서 3만 명에 달하는 주민이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법의 적용을 받기로 했으나 연방법에 따른 최저임금과 이민법의 상당 부분은 면제됐다. 가장 가까운 직업안정보건청은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동시에 교역상의 이유로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의 일부로 간주됐다. 그런 조건의 결합은 강력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의 노동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환경에서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고 ‘메이드 인 USA’ 상표가 달린 옷을 만들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357-8)


워싱턴에서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로비스트인 잭 에이브러모프의 포트폴리오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포천』 500대 기업을 대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법의 허점을 활용했다. 노동법의 목적상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에 속하지 않았다. 교역상으로는 미국에 속했지만 말이다. 로비 규정의 경우, 이곳은 외국 정부에 해당됐다. 로비스트에게 이는 대성공이었다. 에이브러모프는 촉토인디언미시시피밴드를 대변한 로비활동에도 착수했다. 이들은 도박세 징수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그는 사이판에서와 동일한 전략을 활용해 인디언 부족 정부가 정치인들에게 신고할 필요가 없는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그는 더 많은 인디언 부족을 고객으로 받았다. 잭 에이브러모프가 사이판 문제를 다루면서 알게 된 내용은 부시 행정부의 존 유 변호사가 관타나모 기지 문제를 통해 알게 된 것과 똑같았다. 즉 제국은 여전히 존재하며 변칙적인 합법적 지위를 가진 곳들은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이었다. 358-9)


현재 푸에르토리코, 괌, 미국령 사모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및 북마리아나 제도와 같은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40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의회와 대통령이 임의로 결정하는 사항에 따라야 하지만 의원도 대통령도 투표로 선출할 권리는 없다. 투표권법이 제정된 지 50년 이상이 지났으나 그들은 여전히 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제국은 세계를 연결하는 해외 기지의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거의 독보적으로 영토라는 요소가 들어간다. 영국과 프랑스는 합쳐서 13개 정도의 해외 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9개, 다른 나라들은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미국 이외의 국가가 소유한 해외 기지는 30개 정도 된다. 미국은 이에 반해 약 800개에 달하는 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해외 기지에 출입할 수 있는 협정도 맺고 있다. 수십 개 국가에서 미군 기지를 수용한다.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도 미군 기지에 둘러싸여 있다. 확장된 미국 영토는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가까이에 있다.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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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 - 로마, 미국 그리고 새로운 세계 질서
피터 헤더.존 래플리 지음, 이성민 옮김 / 동아시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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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돈을 따라가 보라


역사가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2015년 파리에서 일어난 바타클랑 학살에 관해 유명한 논평을 했다. 대서양 양쪽의 주요 신문(특히 《선데이 타임스》와 《보스턴 글로브》)에 실린 글에서 그는, 유럽이 ‘쇼핑몰과 스포츠 경기장에서 퇴폐적으로 성장’하는 와중에 ‘조상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유럽의 부를 탐내는 외부인’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5세기 초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은 자신의 방어가 무너지는 것을 허용했다. 퍼거슨은 이것이 바로 ‘문명이 무너지는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그의 말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유명한 걸작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그 책에서는 로마가 로마 국경 내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외부인(기독교인과 야만스러운 고트족, 반달족과 기타 족속들의 이상한 혼합)에 대한 저항을 멈춘 후 서서히 내부로부터 침식했다고 주장한다. 마치 숙주가 침투한 바이러스 때문에 천천히 힘을 잃듯이, 제국은 황금기로부터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지점까지 천천히 퇴락했다. 14)


# 바타클랑 학살. 2015년 11월 13일 파리 일대 여섯 곳에서 폭탄과 총기 난사 테러로 130명이 죽은 사건. 바타클랑 극장에서만 100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범인은 모두 이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기’ 제국이 근본적으로 주변 세계에 촉발한 종류의 변화 때문에 지배의 종말을 맞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경제 발전으로 수명 주기를 시작한다. 제국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제국 핵심으로 향하는 새로운 부의 흐름을 생성하려고 나타나지만, 그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과 일부 주변부(공식적으로 식민지화하지 않았지만 발전하는 핵심과 종속적인 경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들과 사람들)에도 새로운 부를 창출한다. 부의 집중이나 흐름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주체들에게 새로운 정치 권력을 주는 잠재적인 구성 요소다. 주변부의 대규모 경제 발전은 그 즉각적인 결과로서 앞서 생애주기를 시작한 제국의 지배권력에 반기를 드는 정치적 과정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강조하는 것처럼, 제국은 매우 파괴적인 것에서 훨씬 더 창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실행 가능한 조치로 조정 과정에 대응할 수 있다. 현대 서구는 이제 자체 조정 과정을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14-5)


1부 번영의 데자뷔_팍스 로마나와 21세기 이전의 서구


1장 399년의 로마, 1999년의 워싱턴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들어설 즈음 미국은 현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실업률은 역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미국 경제는 미증유의 최대치 성장을 즐기고 있었으며, 주식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씩 상승 중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 시장의 번영과 가치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삶의 실상이었다. 1999년 국정연설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약속은 한계가 없다’고 선언하며 이러한 좋은 시절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물씬 풍겼다. 경제학자들이 그에게 끝없는 성장을 가져올 경제적 안정의 시대인 ‘대大안정기Great Moderation’가 도래했다고 말하자, 그의 행정부는 정부 흑자가 곧 수조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동시에 유럽연합은 침착한 자신감 속에 구소련 블록의 나라 대부분을 서구 민주주의 엘리트 클럽으로 환영할 준비를 했다. 불과 몇 년 후, 낙관론은 증발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는 빠르게 대불황과 대침체로 이어졌다. 18-9)


빌 클린턴이 끝없는 가능성을 찬양하기 (거의 날짜까지 정확히) 1,600년 전, 제국 대변인이 로마 원로원 앞에 서서 로마 세계의 서쪽 절반을 대상으로 연두 연설을 했다. 때는 399년 1월 1일이고 로마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관직이자 천년을 이어온 집정관의 취임식 날이었다. 이들 집정관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도를 지정함으로써 영생을 보장받았다. 올해의 행복한 불멸 후보자는 변호사이자 철학자로 행정 역량을 갖춘 플라비우스 만리우스 테오도루스Flavius Manlius Theodorus였으며, 연설은 새로운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대변자인 시인 클라우디안Claudian은 청중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비위를 맞춘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집회야말로 나에게 우주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10년도 되지 않아 로마시는 (최근에 로마 세계로 들어온) 알라리크라는 고트족 왕이 이끄는 야만족 전사 무리에게 약탈당하게 된다. 19-20)


로마 제국은 엄청나게 큰 나라였다. 거리의 실제 척도는 임의의 측정 단위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 A에서 B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은 현대인이 보는 것보다 20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고 전체 제국은 실제 20배 더 넓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운 크기에도 불구하고, (고고학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시리아 북부의 석회암 언덕뿐만 아니라 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농촌 정착지가 정치적 붕괴 바로 직전인 4세기에 정점을 찍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부 영국, 북부 및 남부 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 그리스, 튀르키예, 중동 등,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농촌 인구밀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체 농업 생산량은 제국 말기에 최대 수준에 도달했다. 또한 로마는 압도적인 농업 경제국이었으므로, 제국 총생산(로마 세계의 경제 총생산량)이 로마 역사를 통틀어 이전 어느 시점보다 4세기에 더 높은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4)


# 에드워드 기번의 4세기 로마의 쇠퇴 점검표와 그에 대한 반론

1. 징벌적 조세로 '버려진 경작지'의 비율이 늘어났다. → 아그리 데세르티Agri Deserti, 즉 ‘버려진 경작지’는 세금을 부가할 가치가 없는 토지를 지칭한다.

2. 상류층의 공공기념물 기부 규모가 줄어들었다. → 속주 지주들의 성공 방정식이 지역 사회에 대한 관대한 기부에서 값비싼 법률 교육으로 바뀌었다.

3. 화폐 가치가 저하되면서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 속주 지주들의 자산은 토지와 귀금속 위주였기 때문에, 화폐 가치 하락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4. 기독교의 부상으로 시민의 호전성이 훼손되었다. → 속주의 상류층들은 기독교 고위직을 빠르게 차지했고, 이들은 주로 국가 공무원의 역할을 했다.


2장 제국과 풍요로움


비록 제국 전체가 황금빛 4세기를 즐기고 있었지만, 그릇 조사를 통해 일부 특정 지역의 쇠퇴가 확인되었다. 영국 북부와 벨기에의 시골 정착지는 3세기에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야만족의 극심한 약탈에서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훨씬 더 혼란스러운 것은 제국의 이탈리아 심장부에서 나온 결과다. 이탈리아는 3세기에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지만, 그곳의 정착지와 농업 생산량은 그리스도 탄생 전후 200년 동안 정점에 달했다가 서기 3세기와 4세기에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꾸준하게 감소했다. 제국의 가장 먼 지역이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 제국의 원래 중심지의 경제가 축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시계를 1,000년 정도 빨리 감아 결과적으로 현대 서구가 부상하는 과정을 분석하면 해답이 나타난다.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특히 장거리 무역을 위해 지중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지주 엘리트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 합쳐져 상인들이 지역 사회의 정치 의제를 지배할 만큼 부유해졌다. 26-7)


그러나 이 초기 이탈리아 핵심 도시가 번영하면서 다른 곳의 개발이 빠르게 촉진되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유럽의 직물을 동양에 팔긴 했지만, 가장 좋은 제품은 저지대 국가에서 왔고 그 국가들은 대부분 양모를 영국에서 수입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무역 연결망을 바탕으로 북유럽 경제가 확대되고 다양화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탈리아 도시 국가가 동방 무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을 보고 다른 유럽 정부도 이에 참여하도록 자극받았다. 동부 지중해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는 대신, 대서양 국가들은 아시아로 향하는 대체 항로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1,000년간 서반구에서 일어난 경제적 발전에는 최대 번영을 누리는 지리적 중심지의 주기적 이동이 중간중간 끼어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새로운 시장, 새로운 제품, 새로운 공급원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를 촉진했고, 이것이 성장의 장소를 원래의 북부 이탈리아 심장부에서 바깥쪽으로 꾸준히 밀어냈다. 27-9)


이제 로마로 돌아가 보면, 현대 서구의 부상은 제국의 원래 이탈리아 심장부가 처음 불가사의하게 쇠퇴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서도 역시 간단한 경제 논리가 경제 지배력이 원래의 제국 중심지에서 벗어나 이동하는 모습 아래 깔려 있다. 로마의 경우, 본질적으로 압도적인 농업 경제를 유지하고 있던 제국 국경 내에서, 산업 생산은 번영의 양상 변화에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기원전 1세기와 서기 1세기에 이탈리아에 기반을 둔 포도주와 올리브유 산업(비록 고고학적으로는 찾을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그릇류도, 그리고 아마도 곡물까지도)은 대량으로 제품을 수출했다. 특히 로마가 새로 획득한 유럽 영토로 제품을 보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팍스 로마나로 만들어진 거시경제적 조건에서 제국 나머지 지역의 농업 자원은 훨씬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개발돼 이러한 초기 이탈리아의 지배력을 잠식했다. 그 이유는 특히 운송 기술이 너무 제한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29-30)


서기 2세기부터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통일체로 남아 있었지만, 외곽 지역에 대한 수도의 통치는 점점 더 제한을 받았다. 제국 말기까지 제국 체계를 하나로 묶은 것은 지배적인 중심지가 아니라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즉, 이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정의된 로마 지배계급 안의 속주 지주들이 공유하는 것으로서, 깊이 있는 문화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공통의 경제적, 법률적 구조에 의해서였다. 전반적으로, 속주 엘리트들은 성공을 위해 제국의 그리스-로마 문화 규범을 전적으로(그리고 값비싸게) 받아들여야 했고, 그 결과 4세기에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의 속주 주민들이 정복자들의 라틴어, 도시, 토가, 그리고 삶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시기는 ‘뒤집힌 제국’ 시대로서, 제국은 국경에 훨씬 더 가까운 새로운 정치 및 경제 중심지에서 운영되었다. 테오도루스가 집정관직을 받았을 때 로마는 훌륭한 교육적, 문화적, 상징적 중심지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35-6)


3장 라인강의 동쪽, 다뉴브강의 북쪽


로마인들은 계속해서 모든 이웃을 야만족이라고 치부했지만, 큰 변화에 탄력이 붙는다. 북유럽 중부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간신히 자급자족하는 수준의 농업 형태는 4세기가 되자 곡물 작물에 훨씬 더 중점을 두는, 좀 더 생산적인 농업 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국경 바로 너머의 넓은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헥타르당 훨씬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다. 이 소규모 농업 혁명은 더 많은 인구, 더 크고 안정적인 정착지, 건전한 잉여 농산물을 가능케 했으며, 그중 일부는 국경에서 현금이나 로마 상품과 교환되었다. 서기 1세기 후반부터 철기 시대 유럽 중부 지역인 이곳에 규모가 크고 영구적인 마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너무 얽혀서, 4세기가 되면 여러 변경 지역에서 로마 동전이 일상적인 교환 수단으로 사용된다. 모든 고고학적 증거는 한결같이 국경을 넘어 비로마 사회로 흘러 들어가 그 안에서 동시에 창출되고 있던 새로운 부에 대한 놀라운 물질적 반영을 던져준다. 40-1)


로마의 속주에 해당하는 현대 지역은 정착민 식민지였다. 이 지역에서 정착민들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폭력, 협상, 질병을 통해), 결국 유럽의 수많은 문화적, 제도적 구조를 도입해 지리적으로 어느 곳에 있든 서부 제국의 확장된 핵심의 일부가 되었다. 북아메리카가 가장 명백한 예이며, 그곳에서 원래 지방 공동체였던 것이 너무나 극적으로 부상해 20세기 초에는 이미 광범위한 서구 제국 내에서 지배적인 경제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같은 대영 제국의 이른바 ‘백인 자치령White Dominions’도 이 범주에 속한다(원래 미국도 그중 하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현재 자치권을 가진 이들 국가의 1인당 GDP는 이미 모국인 대영 제국의 1인당 GDP를 넘어섰다. 20세기가 될 무렵, 이 확장된 제국의 핵심 너머에는 제국의 주변부가 놓여 있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이 주변부의 구성 요소는 제국과의 직접 무역의 상대적 가치에 따라 내부 및 외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45)


# 주변부가 제국 체제에 참여하는 양상은 각각 완전히 통합한 속주, 실질적으로 통합한 내부 주변부, 그리고 훨씬 덜 통합한 외부 주변부이다.


부분적으로 내부 주변부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서구 식민지들,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식민지 내의 특정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인도의 면화, 남아프리카의 금,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차와 커피, 극동의 고무, 카리브해의 설탕 등. 이 모든 것들은 서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요가 많았으며, 이러한 상품 중 상당수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통제를 받는 영토에서 생산되었다. 내부 주변부의 다른 부분들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이곳도 경제 활동의 상당 부분을 제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집중했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경제 통합이 총구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 풍요해질 여러 기회에 매력을 느낀 유럽 이민자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대부분 도시의 상업 및 행정 중심지, 특히 유럽인이 거주하도록 지정한 지역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속주 지위를 얻기 위한 궤도에 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유럽 이민자들은 전체 인구에서 작은 비율을 넘지 못했다. 46)


4장 돈의 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제국, 특히 미국이 반항적인 정부를 다룰 수단은 다양했다. 예를 들어 원조 중단, 무역 협상 방해, 국내의 적에 대한 지원, 지도자에 대한 여행 제재 부과, 은행 계좌 동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그때는 칠레에서처럼 비밀 조치로 좀 더 순응적인 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크나 과테말라의 야코보 아르벤츠처럼 1945년 이후 서구의 패권을 위협하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제국 주변부의 긴 통치자 목록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를 잘 알고 서구에 적대하는 것을 꺼리는 다른 많은 통치자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자이르(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세세 세코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렸고, 심지어 신뢰할 만한 동맹자 또는 대리인 역할을 함으로써 서구의 후원을 극적으로 구애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말기 로마 제국이 자신의 내부 주변부를 통제하는 방법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50)


357년에 크노도마리우스Chnodomarius라는 이름의 야심찬 패왕覇王이 이끄는 알레마니족 연맹의 무장 추종자들이 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 도시 근처에서 제국 서방 카이사르(부제)인 율리아누스의 로마 군대와 맞섰다. 크노도마리우스가 3만 5,000명, 율리아누스가 1만 3,000명을 동원하며 전투를 시작했지만, 알레마니족은 엄청난 패배를 겪는다. 기원전 1세기, 또는 서기 1세기라면 그러한 패배는 관련된 적敵 연맹의 완전한 파괴를 가져왔을 것이다. 기원전 58년, 전前 로마 동맹 수에비 왕 아리오비스투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후 연맹이 완전히 무너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4세기 중반이 되자 스트라스부르 전투와 같은 명백히 파국적인 패배조차도 전혀 알레마니 연맹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연맹은 정치적으로 빠르게 재편성되어 곧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다양한 족장과 부족회의는 훨씬 더 강력한 중앙 지도부를 가진, 소수의 더 크고 내구성이 뛰어난 정치 연맹에 자리를 내주었다. 51-2)


# 부제副帝. 로마 말기 ‘4두정’ 체제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정제正帝’를, 카이사르는 제위후계자인 ‘부제副帝’를 뜻했다.


제국과의 접촉은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추진하는 데 이바지했다. 서기 4세기 무렵, 로마의 유럽 국경선을 따라 고대 게르만어를 주 언어로 쓰는 무리의 모든 분파에서, 좀 더 합의된 정치적 지도력을 나타내는 오래된 어휘가 군사 지휘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새로운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한때 통치자들은 ‘사람들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가졌으나 이제는 모두 ‘전투연합warband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국과의 장기적인 상호작용으로 특정 집단에 더 많은 부와 첨단 군사 기술이 집중되었다. 외교적 보조금, 교역품에 부과하는 통행료, 군 복무 수당, 노예무역으로 인한 이익, 심지어 성공적인 국경 습격으로 얻은 전리품까지. 이 모든 새로운 부는 특히 내부 주변부에서 확고한 군사력이 있는 사람들의 손에 우선해서 들어갔지만, 외부 주변부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또한, 부를 이용해 더 많은 전사를 고용하고 우수한 장비를 사들여 군사적 잠재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52-3)


2부 종말에서 변화로_제국 체제 너머의 새로운 세계 질서


5장 무너지는 세계


지중해 유럽은 비옥하고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으로, 고대에는 값비싸고 복잡한 농업 장비 없이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북유럽은 전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을 제공하지만, 습기가 많고 단단한 토양과 광범위한 해양 자원을 완전히 활용하는 기술적 문제는 더 복잡하다. 샤를마뉴 시대에는 북부의 고전적인 무거운 쟁기인 카루카carruca(최대 여덟 마리의 동물이 끄는 4륜 마차에 장착한 거대한 철제 쟁기)를 이미 사용하는 중이었고, 북부의 생산성이 향상하고 있어서 유럽의 경제력과 인구통계학적 힘의 균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비록 이 모든 것이 로마 제국 덕분인 것은 아니지만,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중심지와 유럽 주변부 사이의 400년에 걸친 상호작용으로 시작한 장기적인 발전 과정의 정점을 대표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는 5세기까지는 성숙하지 못했지만, 지중해에 기반을 둔 로마의 제국 권력에 대항해 세력 균형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68-9)


서기 3세기에 걸쳐 로마에 맞선 동급 초강대국 경쟁자로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출현은 유럽 주변부의 새로운 연맹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역동적이고 지역적인 차원의 반응으로 보아야 한다.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은 나중 7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상실하는 촉매 역할을 하지만, 이미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는 한 요인이 된다.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로마 군대를 서기 3세기 내에 적어도 50퍼센트 이상 확대해야 했다(일부는 두 배로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마 국가는 제한된 세수 중 약 75퍼센트를 군대에 지출했기 때문에 군인 수의 이러한 막대한 증가는 엄청난 재정적 골칫거리를 불러왔으며 세금 징수 총액을 3분의 1 이상 늘려야 했다. 따라서 페르시아가 부상하면서 추가적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로마 체제 내에 남겨진 구조적 유연성(경제적 및 인구학적 자원 측면에서)의 정도가 감소했으며, 이러한 자원을 통일된 방식으로 동원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69-71)


정확하게 원인과 결과의 상호 연결을 재구성하려 할수록, 상대적으로 간단한 실이 로마 제국 붕괴의 서사를 관통한다. 제국과 경쟁하는 신흥 주변부의 능력이 향상하면서, 제국은 페르시아의 위협을 없애고 유럽 지역 국경을 보존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체제 외부에서 온 충격에 취약성이 커졌다. 만일 제국이 발전의 초기 단계였다면 이것을 쉽게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에서 적대적인 동급 경쟁자가 떠오르자 제국 관리를 나눠야 하는 문제가 생겼고, 여기에 더해 동쪽에서 갑자기 훈족이 나타나 결국 제국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 시점에서 제국 중심지는 충성심의 대상을 바꾼 일부 주요 정치적 지지자들의 이익을 더는 챙길 수 없었다. 현대 서구 제국의 커져가는 위기도 동일하게 움직이는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외부 주변부와 그 너머에서 기원한 외부에서 온 충격(대규모 이주 포함), 독단적인 내부 주변부, 동급 초강대국 경쟁, 커지는 내부 정치적 스트레스가 그것이다. 78)


6장 야만족의 침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5년 동안 서구 국가의 1인당 소득은 매년 평균 4~6퍼센트씩 증가했다. 이는 개인의 소득이 10년마다 두 배로 증가했다는 뜻이다. 경제적 불안이 줄어들면서 가족 크기도 그에 따라 줄어들었다. 국가가 개인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면, 노년기에 자신을 돌봐줄 많은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단기적인 도약을 가져온 전후 베이비붐 이후, 서구의 일반적인 출산율의 장기적인 하락이 다시 시작되었다. 서유럽의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대다수 유럽 국가는 세계 경제에 잉여 인구를 공급하는 주요 역할을 상실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자국의 노동 수요를 충족시키려 고군분투했다. 추가 공급의 확실한 원천은 옛 제국주의 주변부의 개발도상국이었다. 로마 땅에서 일어난 과정은 이주자들이 훨씬 더 큰 정치적 연합을 재조직하면서, 실질적으로 이주자 스스로 만든 것이다. 대조적으로, 현대 서구로 향한 이주는 대부분 노동력을 찾는 수혜국이 통제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 85-6)


더욱 근본적으로, 고대와 현대의 경우 이주와 부의 관계가 완전히 다르다. 로마 제국 말기의 조직적인 대규모 이주로 누군가는 큰 손해를 보았다. 이주한 고트족, 반달족, 앵글로색슨족 등은 모두 하나의 주요 자산(땅) 지분을 놓고 경쟁했으며, 지분은 현재 토지 소유주로부터 전부(영국에서처럼), 또는 부분적으로(대륙에서처럼) 빼앗아야만 획득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중앙의 통제에서 너무 많은 재정 기반을 제거해 로마 제국 자체가 붕괴하는 추가 효과를 일으켰다. 대조적으로 현대 경제는 이전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으므로 신규 시민의 부는 기존 시민의 부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물론 이것이 바로 1945년 이후 서구 정부가 실제로 이민을 장려한 이유다. 그들은 기존의 노동력 부족을 감안할 때 이민이 경제와 재정적 기반의 전반적인 규모를 뜻대로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일반적인 연구 결과는 여전히 이민이 전체 경제에 순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86-7)


따라서 1945년 이래 이민자들은 서구 경제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말조차 진화하는 서구의 삶에 이민자들이 미친 총체적 기여의 본질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또 다른 더욱 즉각적인 설명으로는, 이민자들은 이제 서양인의 삶 자체를 유지한다. 1945년 이후 서구에 넘친 전례 없는 번영은 평균 기대 수명을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는 동시에 노동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구의 비율이 감소한다는 경제적 단점도 있다. 영국에서는 나이젤 패라지가 영국 국민의료보험NHS, National Health Service의 비용 상승이 이민자가 유발한 초과 수요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영국 병원의 병동이 외국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그의 말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의료 전문가들이다! 외국에서 훈련받은 의사와 간호사에 의존한 덕분에 많은 공공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의료진 생산 비용의 상당 부분을 다른 나라로 전가해 서구 납세자들은 막대한 돈을 절약했다. 87-8)


7장 힘과 주변부


로마 역사가 제공하는 주요 교훈은 다른 신흥국이 강대국 유지에 도전하고 있는 시대에 초강대국 경쟁자와 벌이는 노골적인 대결은 자신의 출중함을 보존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와 페르시아는 국경, 무역 관계, 의존국 통제를 놓고 다투었다. 두 나라 모두 서로 다른 전능한 신의 지원을 유일하게 받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세계관이 나타났다. 그러나 3세기 말에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정복할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갈등은 일반적으로 짧은 기간 뽐낼 권리를 둘러싼 일련의 다툼으로 국한되었으며, 이는 양쪽 체제의 중요 작동을 공격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둘 다 4세기 후반과 5세기에 유목민 세력의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은 상호 의심에서 긍정적인 협력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500년경 유목민의 위협이 다시 물러나자 두 제국이 모두 과거의 구속을 버리고 훨씬 더 큰 승리를 추구했고, 결국 두 제국 모두 완전히 파산하는 교착상태로 끝났다. 101)


여기서 얻을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유익하다. 중국의 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분명히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현대 무기는 초강대국 간의 갈등이 주요 주인공뿐만 아니라 행성 전체를 파괴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훨씬 더 제한된 형태의 지속적인 대결은 당연히 공동의 접근이 필요한 다양하고 시급한 전 지구적 문제, 특히 오염, 인구, 질병 및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에 직면해 협력의 가능성을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서구 국가들이 세계 주변부에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고 싶다면, 개발도상국을 (필요하다면) 희생해 서구의 위대함을 보존하려는 암묵적인 결정에서 벗어나 그들의 전반적인 번영과 사회 및 정부 구조 두 가지 모두를 강화하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서구의 서술 기법을 바꿔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는 훨씬 더 동등한 조건으로 국제기구나 협상에서 더 넓은 범위의 목소리를 포함하도록 옛 제국 핵심의 작은 클럽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101-4)


좀 더 평등한 조건의 넓은 국제 블록에 많은 국가가 참여한다면, 현대 서구 문명의 훌륭한 산물 중 일부를 새로운 세계 질서에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도 생길 것이다. 비록 서구가 자기들의 발전 비용을 조달하려고 다른 국가의 부를 사용하긴 했지만, 법치,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효율적인 공공 기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언론, 적절하게 책임 있는 정치인 같은 개념은 모든 국가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크게 향상한다. 따라서 서구를 가장 맹렬하게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가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가 나머지 세계에 설교한 대로 항상 실천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종류의 확고한 가치에 빈틈없이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비서구적 관심사의 정당성을 수용하는 데 더 열린 태도를 보이는 것은 특정 서구 유권자 일부에나 잘 통할 서구의 세계 지배 영광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것보다는 떠오르는 주변부 시민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은 호응을 얻을 것이다. 104)


8장 국가의 죽음인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후 상대적 합의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표면에 떠오르게 했다. 신자유주의는 1945년 직후 수십 년간의 경제 역동성을 광범위하게 부활시키기보다는, 서구 사회 내 특정 집단만 점점 번영하는 불균형한 회복을 불러왔다. 지금까지 서구의 거의 모든 사람이 주변부에서 오는 부의 흐름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었던 반면, 세계화에 따라 탄생한 새로운 경제 질서는 주로 서구 사회 내의 특정 하위 집단으로 가는 부의 흐름을 증가시키고 다른 많은 사람의 생산 생계는 약화했다. 전반적인 효과는 최신 세계 경제 조직의 주요 승자와 패자가 이전처럼 다수의 패자가 정치적으로 안전한 거리인 해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같은 국경 내에 나란히 사는 상황이 생긴 것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외주화했던 착취와 궁핍이 이제 서구로 돌아왔다. 이들 저숙련 및 미숙련 노동자들은 과거 자신들이 직접 참여했던 부의 창출 과정이 해외로 옮겨지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110-1)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대부분 서구 세계의 평균 실질 임금은 거의 변동하지 않았지만(예를 들어 미국에서 현재 시간당 실질 임금은 대략 1970년대 중반 수준이다), 인플레이션 감소로 물가는 낮게 유지되었고 부분적으로 구매력 손실을 보상했다. 이때는 또한 중국이 서구 시장에 값싼 제품을 홍수처럼 보내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서구 정부는 덜 부유한 사람들의 신용 접근을 완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가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는 주요 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활용해 대출 담보 한도를 낮췄다. 이러한 조치는 주택 구매 붐을 촉진했고 이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2007~2008년에 마침내 거품이 터지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세계는 경제 불황을 목도했다. 서구 정부들이 앞다퉈 제방의 구멍을 메우려 했지만, 선택한 해결책은 다시 만연한 부채 수준을 증가시키고 크게 봐서 세계화로 발생한 새로운 사회 격차를 강화할 뿐이었다. 111-2)


서구 사회는 주로, 또는 실질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부를 소유함으로써 소득을 얻는 부유한 사람들과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 돼가고 있다. 물론 이는 20세기 전반全般에 걸쳐 서구 사회의 특징이었던 자기 발전과 사회적 이동을 위한 기회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화는 민족국가에 로마 서부를 결국 재정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만든 것과 같은 종류의 세입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 실제로 자본이 해외로 이전된다는 것은 주변부 정부가 전 세계 소득에서 점점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서구 정부는 세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지출을 억제함으로써 투자 경쟁을 해야 했다. 말기 로마 제국은 조세 기반이 침식되자 남은 세금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 대응했다. 그러나 현대 서구 지도자들은 다른 해결책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바로 현대 세계의 기적 같은 발명인 부채다. 그러나 이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114-5)


부채는 한때 내일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오늘 지출하는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지금 물건을 소유하고 내일 갚는 방법이 되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데 정부는 그 대가로 더 적은 것을 제공하므로, 시민들이 세금 준수에 대한 대가를 궁금해하는 시점이 올 수 있다. 그리고 ‘조세윤리’(세금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기꺼이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하는)와 세금 징수 기관(그 자체가 돈이 부족한 정부의 삭감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의 효율성 감소 두 가지가 세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조세망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며(5세기 로마의 지방 엘리트들처럼) 전체 체계가 무너지는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그와 같은 미래(정치적 분열의 증가, 불안정성 증가, 민주주의와 법과 인권 존중의 쇠퇴, 공공 서비스 약화, 생활 수준 저하 등)가 서구에 닥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121)


결론 제국의 죽음인가?


과거에는 국내의 정치적 안정이 위협받을 때 서구 사회의 정부는 주변부로 착취를 외주화해 압력을 완화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선택지가 사라졌다. 착취할 수 있는 것은 동료 시민뿐이다. 따라서 현재 해외로부터 많은 부의 흐름이 없는 상황에서, 서구 국가들이 내부 긴장을 줄이려면 부유한 시민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화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상위 10퍼센트가 새로운 유형으로 기능하는 사회․정치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내놓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회는 가장 취약한 소수의 이익을 위해 모든 사람이 희생해야 했고, 저임금 ‘필수’ 근로자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기여에 대한 커다란 인식을 불러왔다. 그 덕분에 서구의 사회적 결속을 재건하는 데 쓸 수 있는 일종의 정책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작동하려면 서구 사회는 거리에 나가서 손뼉 치는 것 이상의 일이 필요하다. 124)


사회 분열로 향하는 현재의 궤도를 줄이기 위해 재정 계약을 재조정하려면 국제 협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시작하기 좋은 곳은 현재 7조 달러 이상 신흥 재벌의 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조세 피난처의 조세 회피 단속이거나, ‘조세 차익 거래’를 줄일 목적의 국제 조세 조약일 수 있다.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국제 조약과 그린 뉴딜Green New Deal 역시 탄소 배출 악화 경쟁을 방지하고, 젊은 세대에게 좀 더 살기 좋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이를 글로벌 탄소세 제도와 결합하여, 그러한 탄소세 수령액을 일반 대중에게 분배하는 배당 제도와 연계할 경우 더욱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서구 국가들은 연금 제도를 개혁해(예를 들어 지급 수준을 낮추는 방법 대신 은퇴 나이를 연기하는 등으로) 연금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금 제도가 창설되었을 때는 누구도 사람들이 일했던 기간만큼 은퇴 후에도 오래 사는 시대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25)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관점에서 다시는 위대해질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기에는 세계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가 너무 심오한 방식으로 변화했으므로 일부 지도자들은 다시 위대해질 수 있는 척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또한, 현대 서구 제국이 애초에 만들어진 바탕이 된 강압과 착취의 정도에 조금이라도 정직하다면 누구든 그것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주변부의 시민은 자신들의 물질적 진보가 더는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고 환영과 격려를 받는다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면 좀 더 많은 과거 식민지의 수치스러웠던 구성국들이 서구 사회가 결국 내부 갈등을 통해 어떤 경쟁 체제보다 더 많은 시민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합의된 사회정치적 조직 모델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는 생각을 명확히 할 것이다. 이 모델이 제공하는 분야는 경제적 번영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법률적 권리의 측면까지 아우러야 할 것이다.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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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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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망치는 전쟁 


"1780년 찰스턴 함락 이후, 영국군 지휘관들은 남부로 전장을 옮기는 것을 상당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 이후에 더 큰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우선 그들은 국왕파의 지지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실수를 범했다. 설사 영국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군 장군들은 1776년 무어스 크리크 브리지와 찰스턴에서 패배한 뒤 남부 식민지를 등한시함으로써 스스로 기회를 차버렸다. 아치볼드 캠벨이 1779년 1월 서배너를 점령할 때까지 국왕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영국군이 다시 남부로 발길을 돌리기 전 몇 년 동안, 애국파 민병대들은 스스로 캐롤라이나와 조지아의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영국 왕에게 충성하는 분위기를 억제하는 임무를 질서유지 능력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애국파 민병대는 국왕파의 조직적 봉기 시도를 진압했다. 영국 정규군이 도착한 이후로도 국왕파의 의지를 꺾어놓기 위한 애국파의 임무는 계속됐다."(76-7)


"콘월리스는 국왕파의 지지가 없다는 점에 실망했다고 고백했다. 캐롤라이나인은 콘월리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콘월리스나 그의 후임들에게 아메리카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캐롤라이나인은 오히려 영국군의 정보병들을 습격했고, 보급품 수송 행렬을 공격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려는 왕당파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뉴잉글랜드와 중부 식민지처럼, 남부 역시 대륙회의의 것이었다. 남부 민병대는 대다수의 북부 비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대치전에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국왕파 민병대와 싸울 때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유능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그들은 그런 비정규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첫째,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믿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남부에 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모건이 지휘한 대륙군의 '도망치는 전쟁'은 남부 저지대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수단이 되었다."(77-8)


2장 전쟁의 이면 


"18세기 전장은 20세기 전장과 비교하면 병사들 사이에 친밀감이 매우 높았다. 당시 기준으로도 소규모였던 독립 전쟁의 교전에서는 특히 더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머스킷 총으로 적을 죽일 수 있는 사거리는 약 70미터에서 90미터 사이였고, 총검에 의존하는 데다 대포도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으니 근접적이 필수적인 환경이었다. 병사들이 적을 죽이려면 아주 가깝게 접근해야 했다. 이러한 조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18세기 보병 전술에서 가장 바람직한 목표였던 총검 돌격은 병사들의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총검 돌격을 하기 전, 대열에서 공격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때 병사들 사이에서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이 행동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적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조건에서 싸웠다. 동시에 옆에 있는 전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소통했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87-9)


"역설적이게도, 참전한 모든 아메리카인 중에서 민병대원들이 독립의 이상과 목적을 가장 잘 실천했다. 독립이 가져다줄 것으로 보였던 가치를 직접 실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립했고, 적어도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평등을 믿었고, 지휘관인 장교를 스스로 선택하기를 주장하는 등 평등을 실천하기도 했다. 민병대원들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짧게 복무했고, 마음 내킬 때 야영지를 떠났으며, 다른 이에게 지시받는 것을 꺼렸다. 특히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는 상관의 명령을 매우 경멸했다." "예를 들어, 민병대는 전황이 좋았던 카우펜스 전투에서는 아주 잘 싸웠지만, 전황이 나빴던 캠던 전투에서는 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캠던에서 그들은 그린이 말한 것처럼 '통제 불능'이었다. 민병대에게는 전투에서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통제하는 규칙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규 대륙군은 민병대 대다수를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95)


"아메리카의 정규군인 대륙군은 영국군만큼 정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몬머스 법원 전투 이후로는 거의 영국군 못지않게 인상적으로 포화를 견뎌내곤 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인내했다. 패배하고 퇴각하더라도, 다시 함께 뭉쳐서 공격을 시도했다. 이런 자질, 즉 인내와 끈기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다." "대륙군의 심리적, 도덕적 위상은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 직업군인의 중간쯤에 해당됐다. 그들은 1777년부터 3년 혹은 전쟁 기간 내내 복무했고, 긴 복무 기간을 보내며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노련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전장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전투에서 경험을 쌓는다고 위험에 무신경해지지는 않는다. 장기적이고 극단적인 피로로 이미 죽은 몸같아지지 않는 한 말이다. 단, 노련한 부대는 경험 없는 부대보다 더 효율적으로 두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범하게 두려움을 마주했던 것이다."(97-9)


3장 전쟁의 외부 


"영국군 점령 기간 동안 가장 고통받은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의 재산을 더 많이 가진 이들처럼 자주 약탈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식품과 연료를 구하지 못할 일은 없었으나, 영국군이 주둔하는 동안 해당 물품의 가격은 빠르게 치솟았다. 영국군 점령 기간 동안 모든 사회계층의 민간인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영국 왕의 뜻에 충성하는 이들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약탈하는 병사들이 애국파와 국왕파를 가려가며 약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9개월 동안 각종 사업은 번창했다. 국왕파 상인들은 크게 돈을 벌었고, 밀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는 영국 육해군 장교들도 있었다." "돈을 가진 상인이나 영국군 장교들은 전쟁 기간 중에도 다양한 문화활동을 즐겼다. 매주 무도회가 열렸고, 때때로 연극, 연주회, 파티가 한꺼번에 개최되는 '사교 시즌'도 있었다."(173-6)


"비록 사회 구조는 여느 때처럼 남아 있었지만, 사회는 어떤 중요한 면에서 독립 혁명과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례로, 투표권이 부여되는 법적 기준이 예전과 똑같든 또는 더 높아지든, 정치권력은 이제 대중의 요구 사항을 더 많이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각 주의 법률이 '민주주의'를 확립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권력의 이동을 의미했고, 실제로 권력이 이동했다. 사회가 정확히 '민주주의적' 또는 완전히 '아메리카적'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서 훨씬 평등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미국'이라는 신생국이 이전의 나라들과는 다른 성격의 국가라는 인식도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인'들의 이름으로 완수됐다. 독립 선언은 다른 나라에서 그들 자신을 분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카인이 자신의 대의를 '영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큰 사건들은 그들에게 나라와 독립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심어주었다."(183-4)


"내셔널리즘에 관한 감정을 자각한 혁명 세대의 아메리카인들은 그 이전과 이후 세대와는 구분됐다. 1775년 이전부터 아메리카의 권리를 수호한 사람들, 독립 혁명과 전쟁에 앞장선 사람들, 전투에서 싸웠던 사람들, 재산을 기부하고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한 사람들, 이들 모두는 자신의 뚜렷한 행동으로 다른 세대와 구분됐다. 그들은 1776년부터 지속된 위대한 대의를 함께 추구했다.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지향하는 영광스러운 대의를 말이다. 이런 지향의 정확한 본질은 즉시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1783년 평화조약 이후 5년 동안에 그 의미를 규정하는 일에는 큰 진척이 있었다." "전쟁이라는 긴 투쟁에서 독립 전쟁이 대의를 '영광스럽게' 만든 것은 그것의 내용이 위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대한 대의는 많은 사람이 그것이 위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위대할 수 있었다. 많은 아메리카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탓에 위대한 대의는 '공동의 대의'라는 대중적인 문구로 받아들여졌다."(185-6)


4장 요크타운과 파리 


"1781년 7월 말이 되자, 콘월리스는 전 병력을 유지하여 요크타운을 강화하기로 했다. 8월 2일, 그는 휘하 병력을 요크타운에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클린턴과 콘월리스가 혼란과 망설임에 빠져 허우적거릴 동안, 워싱턴은 당면한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8월 19일, 워싱턴은 체서피크만으로 대륙군을 움직였고 프랑스군도 곧 그 뒤를 따랐다. 클린턴에게 이런 움직임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워싱턴은 그의 눈에 모래를 뿌려 현혹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뉴저지를 노리는 것처럼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은 요크타운에 2개의 방어선을 구축했고, 9월 28일 아메리카와 프랑스 연합군 1만 6천 명이 요크타운을 포위했다. 콘월리스는 최후의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10월 17일 워싱턴에게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틀에 걸쳐 항복 조건이 논의됐다. 10월 19일 정오가 되기 얼마 전, 워싱턴은 항복 조건에 동의했고 문서에 서명했다."(218-20, 226, 233)


"요크타운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영국은 뉴욕시,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일부, 캐나다, 핼리팩스, 서인도제도에 여전히 군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강화講和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영국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항복 없이는 강화 이야기를 꺼내지도 말라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지만, 영국 의회는 이미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강화조약은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외교관인 베르젠은 사실 1781년 초 영국과 미합중국이 아메리카에 각자의 영토를 갖는 것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강화에 동의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영국은 뉴욕시와 남북 캐롤라이나 및 조지아의 대부분을 통치할 수 있었다." "영국 역시 아메리카와 합의해 유럽 숙적들과의 전쟁을 끝내고자 했으나 과거의 식민지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영국 내각을 이끄는 셸번 백작은 강화 협상에서 프랑스와 아메리카를 분열시키려 했다. 유럽과 관련된 논의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233-7)


"미합중국의 지위를 영국이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즈월드는 상급자로부터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하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고, 아메리카는 평화조약을 논하려면 영국이 미합중국의 독립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프랭클린은 더 나아가 미합중국에 캐나다까지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늦여름이 되자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협상의 관계자들은 천천히 합의로 나아갔다." "이후 3개월 동안 외교적 지뢰밭에서 양측의 협상이 진행됐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았고, 11월 30일에 아메리카와 영국의 위원들은 평화조약 예비 조항들에 서명했다." "모든 관계자들이 1783년 9월 3일 최종 평화조약 항목들에 동의하고 서명했다. 헨리 클린턴의 후임인 칼턴 장군은 아메리카에서 철군하는 우울한 일을 맡게 되었다. 1783년 말, 여전히 아메리카의 북서부 주둔지들에 남아 있던 영국군 파견대들을 제외하고는 영국군은 더 이상 미합중국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238-9, 242)


5장 헌법의 제정을 향해 


"1783년 3월, 뉴욕주 뉴버그에서 대륙회의의 몇몇 인사에게 사주를 받은 소수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 장교들은 전쟁 보상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봉급이 몇 달째 지급되지 않은 데다 대륙회의에서 연금 지급까지 반대하기 시작하자 장교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워싱턴은 일부 장교들이 군대를 동원해 지역 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다소 늦게 알아차렸지만,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장교들을 직접 만나 타이르기 시작했다. 뉴버그에서 장교들과 대면해 문민정부를 상대로 어떤 군사적인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총사령관이 사심 없는 마음으로 호소하자 뉴버그 군인들은 분노를 가라앉혔다. 쿠데타의 위협이 잦아들면서 민간 정부의 존립을 흔드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워싱턴과 대륙회의의 인사들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불안감이 그해 12월 워싱턴이 직접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아나폴리스로 향하게 된 계기였다."(260-2)


"사실 독립 전쟁이 종결되기 전부터, 대륙회의는 점차 권위와 민중의 신뢰를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륙회의는 군대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쟁에 말려든 모든 정부들이 빠지는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자금을 모을 방법이었다. 정부는 독립 혁명 전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내고 그 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했다. 계획 없이 일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무절제한 화폐 발행이 가져올 결과, 즉 화폐 가치의 급락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대륙회의가 공공 재정을 다시 통제하려면 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야 했다. 1786년까지 9개 주가 대륙회의의 조치를 승인했지만, 나머지 여러 주는 사실상의 거부 의사를 표했다." "결국 대륙회의는 1787년에 예전의 요구 사항을 모두 철회하면서 각 주가 원하는 방식대로 부채를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권을 갖게 된 주들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 1788년에는 최소 7개 주가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다."(280, 284-6)


"1781년 대륙회의의 재무감에 임명된 로버트 모리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들이 생각한 혁명의 목표, 즉 사유재산의 보호와 재력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중앙권력체의 재정권이 증진돼야 한다고 믿었다. 공공 재정을 안정시킴으로써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주권이 13개로 갈라진 국가는 무질서하고 효과적이지 못했다. 군대가 독립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와중에 주 정부가 자기 멋대로 사소한 이익을 위해 골몰하는 상황은 모리스를 불쾌하게 했다." "그는 전쟁 부채를 갚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여겼고, 따라서 부채를 갚기 위한 과세는 대륙회의의 권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는 올바른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는 대부분 성공했지만, 정치적 싸움에서는 자주 패배했다." "대륙회의의 관점에서 보면 공화정의 미래는 실제보다 훨씬 절망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1785년의 대륙회의는 아주 무기력했으며,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288-90)


"아메리카의 활력은 지난 20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지방, 즉 주들에서 나타났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의 교섭 위원들은 1785년 3월에 마운트버넌에서 만나 포토맥강의 탐사를 두고서 오랫동안 지속된 의견 차이를 정리했다. 이 회합에서 도출한 합의는 일련의 타협을 거쳐 나온 현명한 사익 추구의 모델이 되었다. 버지니아는 포토맥강에서 특권을 얻은 대가로 메릴랜드가 체서피크만에서 특권을 갖는 것을 받아들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 회합의 성공을 보고서 각 주가 더 큰 규모로 모이는 주 정부 회의에서도 상호 이익이 명백한 협동 정신을 발휘할 수 있으며, 대륙회의에 통상 규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매디슨은 바로 지금이 통상 규제권과 대륙회의의 과세권을 함께 묶어서 논의해야 지시를 내리라고 제안했다." "마침내 버지니아 하원은 1786년 1월에 주 정부 회의에서 〈통상의 규제에서 단일 체계가 그들의 공익과 영구적인 조화에 어느 정도 필요할지 고려하자고〉 촉구하는 데에 동의했다."(291)


"한편, 이 소식과는 아주 다른 부류의 소식이 거의 동시에 모든 주에 전해졌다. 바로 매사추세츠 중부와 서부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주도자인 대니얼 셰이즈의 이름을 따 셰이즈의 반란이라고 불린 이 봉기는 농부들이 일으켰다. 반란자 대다수는 매사추세츠주의 가혹한 재정정책에 심한 고통을 느껴 봉기에 나선 참전 용사들이었다." "농부들은 지불 능력을 넘어서는 부채와 세금 때문에 재산을 압수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장 봉기에 나섰다. 매사추세츠주는 몇 달에 걸쳐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반란으로 인해 여론이 바뀌고 있었다. 여론은 정체의 개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정체 개혁이 어느 정도로 또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불확실했다. 1787년 2월 21일에 대륙회의는 헌법제정회의의 소집에 찬성하는 결의안을 승인함으로써,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적 흐름에 올라탔다. 헌법제정회의는 1787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292-4)


6장 1780년대 두 번 태어난 사람의 자녀들 


"독립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1770년대, 위기가 닥쳤던 바로 그 순간에 버지니아 농장주들은 자신이 얼마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주 헌법의 틀을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헌법의 초안은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작성된 주 헌법이었고, 다른 지역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5차 버지니아 제헌회의는 1776년 주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6월 12일 버지니아 대표들은 '권리장전'을 공표했고, 6월 29일 주의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다." "'권리장전'은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 인민은 1776년이 주 헌법을 비준하거나 거절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인민이 주 헌법을 거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헌법이 정부 구조를 제외하면 그리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제헌회의가 그런 정부를 고안했는지는 이해할 만한다. 제헌회의가 제시한 새로운 정부 형태는 독립 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행정부 권력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305-7)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같은 사려 깊은 버지니아인은 버지니아가 독립 선언서에 선포된 자유의 한계를 넓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주려고 했다." "여러 측면에서 제퍼슨의 개혁 노력은 실패했다. 1776년 제정된 버지니아주 헌법은 피통치자의 동의를 그다지 효율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 노예제는 거의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았다. 범죄자를 야만스럽게 처벌하는 관행은 계속됐다. 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못했다. 반면 제퍼슨과 그의 친구들이 성공한 분야도 있었다. 권리장전, 한사 상속(특정 혈통만 재산 상속이 가능하다)과 장자 상속제의 폐지, 종교 자유의 확립 법안 등은 놀라운 성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행한 개혁이 독립의 위대한 원칙과 관련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의 공식 교회였던 국교회를 그 위치에서 끌어내리면서,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자유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320-1)


"일부가 '외부인'이라고 불렀던 새로운 사람들이, 독립 이전에 영국에 저항하기 위한 준비를 돕는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인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펜실베이니아에서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1776년 그들이 비공식적인 주 정부를 장악하고, 선출된 의회를 교체하면서 더욱 큰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운동의 내부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고, 다른 애국파들이 영국과의 단절을 선언하기 전 이미 독립을 옹호했다. 토머스 페인은 많은 급진주의자의 멘토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와 가장 깊게 연관된 이들은 농부들, 특히 서부의 농부들과 숙련공, 소규모 자산가들, 공공정책에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려는 야심가들이었다." "1776년의 펜실베이니아주 헌법은 혼합 정부에 관한 어떤 요구도 거절했다. 급진주의자들은 민중의 관심사는 하나의 정부이며, 또 다른 전제 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는 공화정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22-4)


"다른 주들에서 발생한 상원의 문제, 즉 상원이 무엇이냐, 또 누가 대표하느냐 하는 문제는 헌법 입안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1780년 헌법을 제정한 매사추세츠주에서만 자산가가 상원을 차지했다." "상원의 구성에 관해 명확한 의견을 제시한 이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제퍼슨의 의견에 동조했다. 상원은 하원이 무모하게 행동할 때 제동 장치의 역할을 해야 했다. 또한 입법부의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와 비슷한 균형론은 양원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양원은, 곧 유행이 되어버린 표현에 따르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두 바퀴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의 급진주의자들은 양원제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결코 설득되지 않았다. 제헌회의는 그들의 통제 하에 있었고 결국 단원제 입법부가 설립됐다. 급진주의자들은 주 의회가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인민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324-5)


7장 헌법제정회의 


"정치적 이합집산에는 다양한 경제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 일단, 해외 무역과 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펜실베이니아와 매사추세츠의 사업가들, 버지니아와 양 캐롤라이나의 농장주들은 모두 인구비례에 따라 대표를 선출하고 싶어 했다. 특히 버지니아와 펜실베이니아에는 앞으로 개발해야 할 땅이 상당히 많았다. 신생 연방의회가 인구에 비례해 의원을 선출하게 된다면, 이런 미개발지 출신 의원은 그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힘을 실어줄 터였다. 남부 주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바로 노예제였다. 그들은 이 제도를 철폐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모든 작은 주가 서부의 땅을 원했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그 땅을 팔아서 공채를 청산할 생각이었다.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는 연방의회 내 주들 간의 평등성이 필요했다. 큰 주들이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생겨난다면 서부에 관련된 이해관계에서 작은 주들은 밀려나게 되고, 해당 주의 참전 용사들이 보상으로 약속된 땅을 받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340-1)


"양측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설립을 지지할 이유가 있었다. 또한 통상을 규제하기를 바랐고 셰이즈의 반란 같은 농민 봉기를 우려했다. 중앙정부가 있다면 그런 봉기는 미연에 방지하거나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다. 양측은 튼튼한 국가 재정과 채권자들의 보호라는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중앙정부가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탐욕스러운 군주정의 세계에서 공화국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큰 주든 작은 주든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시민이라는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헌법제정회의가 내린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개인적인 성향과 그들이 각 주의 이익을 대표했던 방식이다. 거의 넉 달 동안 헌법제정회의는 주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토의에서 대표들의 이성과 지성이 작용한 것처럼, 그들의 비합리성과 열정, 기회와 우연 등도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342-3)


"교착 상태를 피하려는 소망 덕분에 헌법제정회의에서 가장 골칫거리 문제들 중 하나가 해결됐다. 직접 과세의 대상이 되는 인민에 비례해 하원의 대표를 구성하자는 안이 채택된 것이다(제안자인 거버너 모리스는 나중에 이를 후회했다). 직접 과세는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민으로 간주해 부과됐다. 이런 계산은 비위가 상하는 것이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연방에 남아 있게 하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7월 16일에 상원에서 주들 간의 평등을 권고하는 것을 포함한 전체 안이 승인됐다. 투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의견은 분열됐다. 게리와 칼렙 스트롱은 안을 지지했고 킹과 고럼은 반대했다. 작은 주들의 연합과 노스캐롤라이나의 지지로 전체 안이 성사됐다.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는 반대했다. 분명 찬성했을 터인 뉴욕은 투표할 수 없었다. 랜싱과 예이츠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뒤였기 때문이다."(361-2)


8장 비준: 끝이자 시작 


# 1787년 9월 17일에 제정된 미국 헌법은 9개월 동안 많은 논쟁과 수정 끝에 1788년 6월 21일에 비준됐고, 1789년 3월 4일부터 발효됐다.


"독립 혁명은 거의 30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이 복잡하게 조합된 일련의 과정이기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 어떤 한 단계를 다른 단계보다 더 '혁명적' 또는 더 '보수적'으로 추정하면 모든 단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되자 독립 혁명과 연관된 문제들의 성격이 바뀌었다. 1783년 전에 있었던 일련의 문제는 모두 독립의 성취라는 한 가지 목적과 연결된 것이었다. 그 이후의 시기에는 같은 문제들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했는데, 특히 자유민이 어떻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종전을 전후한 두 시기는 서로 달랐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는 전쟁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리고 전쟁은 고유의 임무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전시의 통치 방식 중 상당수가 평시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했다. 따라서 통치 업무라는 점에서는 전후의 문제가 전시의 문제와 비슷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달랐다."(378-9)


"전쟁이 끝나자 상인, 변호사, 대농大農, 농장주와 같은 세속의 사람들이 연합회의, 주 의회,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열정도 다소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의 미덕에 대해서는 예전처럼 두드러지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통상의 효율성과 정부의 활기가 공화주의 미덕만큼이나 중요했고 미덕을 구성하는 필수 사항이었다. 그들의 비전은 이제 국가를 포함한 거대한 조직들에, 그리고 그 조직들이 발휘할 수 있는 권력에 집중했다. 그 비전은 아마 그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전쟁 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그들의 정부 경험, 특히 대륙회의와 군대에서 겪은 경험을 고려하면 조직의 권력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헌법을 작성했다. 그들은 환멸로 얼룩진 분위기에서 그 일을 해냈다. 아메리카에서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심이 널리 퍼졌지만,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아메리카가 성취한 일을 대견해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379-80)


"헌법 제정자들은 헌법이 미덕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헌법에는 아메리카인들의 삶에 오래 자리 잡아왔으며 독립 혁명 초창기에 명백히 드러난 도덕성이 어느 정도 구현돼 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헌법이 권력을 제한하기 때문이었다. 권력이 자유뿐 아니라 미덕도 위협한다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헌법에는 다수의 폭정을 막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인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이어야 했고,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헌법에 그런 봉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틀을 만들고자 했다. 단 그런 틀은 소수를 강압적으로 희생해 만들어져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헌법은 균형을 이루는 3부를 설치하고 각 부의 권한을 세세하게 열거함으로써 권력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 대표들은 몇 가지 이유로 이런 제한이 효과적이라 보았는데, 그 이유 중 이런 제한을 통해 부정부패와 다수의 방종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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