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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ㅣ 걸작 논픽션 19
대니얼 임머바르 지음, 김현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평점 :
서론: 로고 지도 이면의 사실들
# 로고 지도logo map. 알래스카와 하와이(더 나아가 푸에르토리코, 사모아, 괌 등까지)를 제외하고 미국 영토를 떠올리는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
1941년 12월 7일, 일본 군용기가 오아후섬의 해군기지에 나타났다. 미국 국민의 뇌리에 굳건히 박힌 이 진주만 공격은 말 그대로 공격이었다. 일본군 폭격기는 타격하고 후퇴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핀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최초 공습이 시작된 후 계속해서 더 많은 공습과 침략, 정복이 뒤따랐다. 미국 국적의 1600만 필리핀인들은 하와이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겪게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주만’으로 잘 알려진 사건은 사실상 태평양 전역의 미국과 영국 점령지를 기습적으로 타격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하루 만에 일본군은 미국 영토인 하와이와 필리핀, 괌, 미드웨이섬, 웨이크섬을 공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홍콩을 공격하고 타이를 침략했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진주만’(일본이 침략에 실패한 몇 안 되는 표적 중 하나)이라는 명칭이 정말 그 운명적인 날에 발생한 사건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10-1)
루스벨트는 왜 필리핀의 중요도를 격하시켰을까?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려 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하와이와 관련해 전달받은 내용을 적당히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와이 인구는 백인의 비율이 필리핀에 비해 비교적 높긴 했지만, 여전히 주민 4분의 3이 아시아인 또는 태평양 도서 출신이었다. 루스벨트는 확실히 이런 점 때문에 대중이 하와이를 외국으로 인식할까봐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설 당일 아침 그는 연설문을 한 번 더 수정했다. 일본군의 비행중대가 ‘오아후섬’이 아닌 ‘미국령 오아후섬’을 폭격했다고 바꾼 것이다. 오아후섬 폭격으로 ‘미 해군과 육군 병력’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많은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미국령 섬에서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루스벨트가 강조하려던 내용이다. 필리핀이 외국으로 격하됐다면, 하와이는 ‘미국’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12-3)
미국이라는 제국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스스로 제국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무시해왔다는 점이다. 미 제국주의의 규모가 유감없이 드러났던 1898년 이후의 짧은 기간을 제하면 제국주의 역사의 상당 부분은 은밀히 전개돼왔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은 스스로를 제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제국주의 항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히틀러의 천년제국인 라이히와 일본제국에서 소비에트연방의 ‘사악한 제국’에 이르는 여러 제국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타지 세계에서도 미국은 제국에 맞섰다. 로고 지도는 자국의 일부를 배제하고 기술되므로, 본토인들은 자국 역사를 불완전한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미국의 해외 영토는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수많은 발명을 이뤄냈고 대통령을 일으켜 세워 ‘미국인’의 진정한 의미를 정의하는 데 일조했다. 그 영토들을 역사에 포함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판타지가 아닌 실제 미국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4-5)
제1부 식민지 제국
1. 대니얼 분의 몰락과 부상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대니얼 분과 같은 개척자들을 노골적인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국가의 ‘쓰레기’(벤저민 프랭클린), ‘육식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는’(헥터 세인트 존 데 크레브쾨르) ‘백인 야만인’(존 제이)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후 ‘모든 권위에 도전하려는 노상강도 떼가 서부 지역에 정착하거나 이 지역을 뒤덮는 상황’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깊은 문제가 연루되어 있었다. 애팔래치아 서쪽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은 미국이 유일한 나라는 아니었다. 견고한 정치적 조직체를 구성한 북미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북미 지도를 그려왔고, 18세기 후반 백인과의 싸움에서도 그 영토를 지켰다. 대니얼 분은 바로 이처럼 예민한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는 백인 정착민들을 서부로 이끌면서 인디언 영토를 침략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싸움에 끼어들 손쉬운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개입은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30)
워싱턴이 개척자들을 짜증스러워했다고 해서 확장을 반대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가 된 것은 잠깐이었다. 미국 영토는 광대했지만 정부는 약했다. 산맥을 넘어가 무단으로 토지를 점유한 자들을 통치하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불가피하게 시작된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러자 워싱턴은 정착 과정이 엘리트의 통제하에 ‘촘촘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해야 변경 지역이 분과 같은 떠돌이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지 않고 문명의 진보를 위한 최전선으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고자 변경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정치적 범주를 만들었다. 즉 영토territory였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대서양에 위치한 주들의 경우 절대로 미국 서부 경계를 이루는 미시시피강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서부 토지는 주 정부가 아닌 연방정부가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큰 의미의 국가의 영토로서 관리된다는 것을 뜻했다. 31-2)
제퍼슨과 워싱턴이 스스로 ‘촘촘히’라고 표현했다시피 인구가 증가하더라도 백인들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정착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럽 인구가 과거에 더디게 증가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를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1749년에 그는 필라델피아 인구조사를 비롯해 보스턴, 뉴저지 및 매사추세츠의 인구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충격적일 정도로 정확했다. 그 어떤 근거 이상으로 강력했다. 식민지 인구가 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25년마다 인구가 2배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인 토머스 맬서스는 식량 공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는데, 이는 상당 부분 프랭클린의 북미 인구통계(맬서스는 ‘역사상 거의 유례없는 가파른 인구 증가’를 가리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34-5)
백인 인구의 증가는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에 비견될 만했으며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국가의 이상을 깨버렸다. 처음 수십 년간 지배적이었던 위대한 제퍼슨식 시스템은 반半식민 상태에 있던 서부 거주민과 함께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대니얼 분과 같은 사람이 아주 많아진 것이다. 정부는 1830년대가 되자 무단 거주자 기소를 포기하고 그 대신 그들이 토지를 구입하도록 했다. 1860년대에는 공유지를 ‘자영농지homestead’로 무상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당 토지에 거주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시민에게 돌아갔다. 대규모 백인 인구가 거주하는 영토는 곧 주로 승격됐다. 금광꾼이 몰려들었던 캘리포니아는 2년 후 군사정부에서 주 지위로 격상됐다. 문화도 바뀌었다. ‘노상강도’ 또는 문명의 변방에 선 ‘백인 야만인’이라고 멸시당하는 대신, 정착민들은 개척자pioneer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더 이상 상습적 범법자가 아니라 역동적인 국가의 자랑스러운 기수로 칭송받게 된 것이다. 36-7)
2. 인디언 거주지
인디언 세력의 주축은 체로키족이었다. 체로키족은 그 수가 17세기와 18세기에 많게는 절반 가까이 줄었으나, 19세기 초반에 다시 늘기 시작했다. 체로키족은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공화국 내에 그들만의 영역을 개척해갔다. 그들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노예를 사들였으며 수도를 건설했다. 세쿼이아라는 은 세공인이 음절문자 체계를 고안하면서 체로키어로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부족 신문인 『체로키 피닉스』가 영어와 체로키어로 발행되면서 곧 인기를 얻었다. 1827년 체로키족은 미국 헌법을 본떠 헌법을 채택했다. 유권자들은 부유한 혼혈 기독교인 쿠위스구위Koo-wi-s-gu-wi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체로키 공화국 초창기에 그들의 토지 소유권은 대체로 존중받았다. 워싱턴 행정부는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여, ‘문명화된’ 체로키족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인다는 가능성을 수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처럼 취약한 성과가 백인의 토지 소유욕에 맞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38-9)
이와 더불어 남부의 목화 재배 열풍이 시작되고 체로키족 영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체로키족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1828년 조지아주는 체로키 헌법에 무효를 선고하고 체로키족의 토지를 요구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인디언 거주지는 ‘용인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체로키족은 조지아주의 직권에 따르거나 서쪽 영토로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법원은 조지아주의 조치가 위헌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상위 법원의 판결은 무단 거주자들의 맹공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다. 합의에 따라 2000여 명이 자발적으로 떠났다. 그러나 1만6000명쯤 되는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7000명의 민병대와 지원병을 보내 총검을 앞세워 그들을 체포하고 투옥시켰다. 철창에 갇힌 체로키 인디언들은 다시 오늘날 오클라호마에 해당되는 곳으로 강제 이주됐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여정을 ‘울면서 지나온 길Nunna daul Isunyi’이라 불렀다. 39-40)
3. 해조분에 대해 항상 궁금했으나 묻기 어려웠던 모든 것
1857년, 개즈든 매입이 비준된(1854)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카리브해와 태평양 연안의 작은 섬들을 합병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경에는 100여 개 섬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그 섬들에는 원주민도 없었고 전략적인 가치도 없었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비도 내리지 않는 바위섬인 경우가 많았다.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에는 누구나 간절히 바랐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반인들 사이에서 새똥으로 알려진 ‘백금’이었다. 해조분은 흔히 페루 연안의 친차 제도에 서식하는 가마우지, 얼가니새 및 펠리칸에게서 나오는 질산이 풍부한 똥으로 생각됐다. 게다가 친차 제도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해조분은 몇백 피트 높이로 쌓였고 햇볕을 받아 말랐기 때문에 섬에는 몇 세기 동안 석회화된 새똥이 그대로 암석화되었던 것이다. 1840년대에 페루산 해조분을 실은 선박이 처음으로 들어왔고, 해조분은 곧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47, 49-50)
# 개즈든 매입(Gadsden Purchase).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남부와 뉴멕시코주에 해당하는 76,800 제곱킬로미터 지역을 1853년, 멕시코로부터 미국이 구입한 사건을 가리킨다.
해조분 채굴은 19세기에 이뤄졌던 노동들 중에서도 거의 최악의 노동이었다. 등골이 휠 정도로 힘들고 석탄 채굴 시 폐 손상과 같은 피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뜨겁고 건조한 데다 악취와 역병이 도는 섬에 고립돼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배사 인산염 상사는 볼티모어의 흑인들을 일꾼으로 활용했는데, 1889년 감독관과 일꾼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가 이내 폭력 사태로 번졌다. 백인 관리자들이 도끼와 면도칼, 곤봉, 돌멩이, 못쓰게 된 권총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싸우던 일꾼들을 향해 발포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5명의 백인 관리자가 목숨을 잃었다. 다섯 구에 달하는 백인 시체와 신문 지면을 채운 살아남은 관리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다소 과잉된 반응의 ‘검은 학살자들’이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피고인들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볼티모어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기금을 모아 막강한 법률팀을 고용했다. 그중에는 메릴랜드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최초의 흑인 변호사 E. J. 워링도 있었다. 53-4)
재판에서는 최후 수단인 정당방위가 최종 쟁점으로 떠올랐다. 변호사들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미국 관할권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이티 역시 나배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어떤 미국 관리도 그곳에 상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리고 해조분 제도법의 이상한 표현을 파고들었다. 해당 제도가 미국령에 ‘부속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짚은 것이다. 부속되다니?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인가? 피고인 측은 나배사를 외국 영토로 보았다. 이는 폭동을 일으킨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한 것 이상이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적법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곧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검사 측 손을 들어주며, 미국 법의 적용 범위에는 ‘명백히’ 나배사도 포함된다고 판결을 확인해줬다. 그러나 피고 측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나배사가 미국의 영토라면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55)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역시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는 폭도들이 ‘미국 영토 내에서’ 일하던 ‘미국 시민’임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또한 나배사 인산염 상사가 미국의 일부를 법이 아닌 회사 규정으로 다스려지는 자체 세력권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해리슨 대통령은 조사를 위해 USS 키어세이지 군함을 보냈다. 키어세이지호 장교들은 나배사가 ‘재소자 시설’처럼 운영되고 있으나 감옥의 ‘편의 시설과 청결함’은 없다고 보고했고, 이에 해리슨은 폭동을 일으킨 이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는 주동자들의 사형선고를 감형해주고 이 문제를 연두교서에서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미국 관할권 내에서 정부 관리나 재판소의 도움으로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까지 모호했던 원칙을 대통령이 확실하게 못 박아 말한 셈이었다. 즉 새똥이 널려 있는 바위와 섬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간에 그곳은 결국 미국의 일부였다. 55-6)
4.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최고의 날
1890년에 발표된 머핸의 장황한 논문인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나 강력한 시사점을 담고 있었다. 머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한 국가는 자체 기지를 가질 필요가 없다. 실제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방국에서 빌리면 된다. 그러나 이는 평시에만 가능했다. 그리고 개척 종식의 시대에는 강대국 간의 평화 유지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원거리에서 생산된 농작물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 이론가인 머핸은 목적지보다 해상로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바다를 ‘훌륭한 고속도로’로 구상하고 미국이 이를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사실상 해상로를 지키고 물자를 공급하는 데는 그 경로상의 지점들, 즉 안전한 항구만 있으면 된다. 머핸이 인정했듯이, 적군의 공습이 있을 때 한 지점이라도 사수하려면 그 주변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지가 본격적으로 식민지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62-3)
당시 해군부 차관보였던 루스벨트가 보기에 그 책은 해군의 고전 이상이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역동적인 국가를 위한 각본이었다. 미국은 제국을 빼앗아야 한다. 기존 제국들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전쟁을 환영할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는 1897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어디인지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떠오르는 제국들 사이에서 확연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제국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기다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98년 2월 15일, 원인 불명의 폭발로 아바나 연안에 배치된 메인호에 있던 262명이 사망했다. 2월 25일 오후, 루스벨트는 모든 중대장에게 배에 석탄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고 예비 탄약 보급품을 징발했으며 기지 사령관들에게 전쟁 가능성을 알리고 양 의원에 무제한 해군 신병 모집을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특히 아시아 전대를 이끄는 듀이 준장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필리핀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63-5)
그 전쟁은 대개 미국-스페인 전쟁이라 불리며 1898년에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한 명칭은 스페인-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미국 전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실상 후발 주자였고, 스페인 제국을 거의 몰락시켜버린 장기간의 유혈 충돌이 끝나갈 무렵 한 차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다. 쿠바에 상륙(다이키리 해변에서 쿠바군이 스페인 군대를 무찌른 덕에 가능했다)한 직후 루스벨트는 쿠바인들을 보고는 ‘중대한 전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완전히 넝마 상태’라고 생각했다. 널리 공유되던 그런 판단은 큰 영향을 미쳤다. 쿠바인들이 전쟁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미군 지휘관들은 그들에게서 평화를 앗아가는 것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필리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스페인 군대는 비밀 협약을 맺어 마닐라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척하기로 했다. 단 스페인이 마닐라를 미군에게만 이양하고 필리핀인들은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69-70)
5. 제국의 속성
윌리엄 매킨리에게 모든 일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면서 필리핀 군도 전체가 예상치 못하게 매킨리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필리핀을 스페인에 다시 넘겨야 하나? 아니면 팔아야 할까?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낫나? “나는 매일 밤 자정까지 백악관 안에서 서성였다.” 매킨리는 성직자들에게 “여러분, 저는 전능하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빛으로 인도해달라고 숱한 밤 기도했음을 당당히 고백합니다”라고 했다. 매킨리에게는 어떤 선택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민지를 스페인에 반환하는 것은 ‘겁쟁이’처럼 보일 테고, 다른 나라에 이를 넘기는 것은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그는 필리핀인들에게 자치능력이 없다고 봤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필리핀을 차지한 뒤 “필리핀인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안겨주고 문명인으로 만들어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다. 주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베푸는 것이다”. 72)
그러나 법적으로는 해결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는 1901년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수정헌법 제4조에 따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국적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영토도 포함되었는가? 정부는 미국United States이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주장했다. 그 명칭은 미국 관할권 하의 모든 지역을 지칭할 수 있으나 협의의 개념으로 주 연합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헌법이 가리키는 ‘미국United States’은 그런 협의의 개념이며 그 주들만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토는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헌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United States’에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환기시키면서 보충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문구를 통해 논거를 명확히 표현했다. 푸에르토리코는 “국내라는 맥락에서는 외국인데, 이는 해당 섬이 미국에 편입되지 않은 데다 점령지로서 미국의 부속물appurtenant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1-3)
1901년 판결은 통칭 도서 판례Insular Cases로 알려져 있다. (짐 크로법이 합헌이라고 명시한) 플레시 판례와 마찬가지로 도서 판례의 쟁점은 인종이었다. 다수 의견에는 헌법의 틀 내에서 ‘야만인’과 ‘이방의 인종’에 관한 것을 포함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한 대법관은 그렇게 하면 ‘미국의 제도가 망가져’ ‘정부 구조 전체’가 ‘전복’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보충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대법원은 플레시 판례를 뒤집고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시설은 법에 따라 평등을 보장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도서 판례는 이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보장받는 수정헌법 제4조에 따른 시민권이 편입되지 않은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지역들에서는 투쟁을 거친 후에야 뒤늦게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법정 시민권’으로 자리 잡게 됐는데, 헌법이 아닌 법령으로 보호되며, 따라서 무효가 될 수도 있는 권리였다. 83-4)
푸에르토리코인들은 1917년에 시민이 되었으며,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인들은 1927년에, 그리고 괌 주민들은 1950년에 시민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법정 시민권이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도 있었다. 필리핀인들은 47년간의 미국 통치하에서도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미국령 사모아인들은 1900년 이후로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만 ‘미국 국적자’일 뿐이다. 그들은 입대가 허용되며 많은 수가 군복무 중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민이 아니다. 도서 판례의 중요성은 법의 영역을 넘어선다. 미국 영토 중 ‘편입’된 부분과 ‘편입되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는 이런 판례들은 미국의 일부 지역이 진정한 미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법으로 확정지었다. 일부 영토는, 즉 백인 정착민들로 채워진 영토는 주 지위를 기대해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법원장이 표현했듯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그림자처럼 무기한으로 모호한 중간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무기한’ 상태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84)
6. 자유의 함성을 내지르다
정복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똑같다. 지도자를 무너뜨리면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얻었으나 필리핀군과의 싸움에 돌입하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핀 남쪽으로 갈수록 루손과는 상황은 다소 동떨어져 보였다. 아기날도의 항복은 이론상으로는 필리핀 공화국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세력 범위를 남쪽으로 넓혀 필리핀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사마르까지 확장을 꾀하다가 필리핀 저항 세력이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01년 5월, 아서 맥아더 장군(더 잘 알려진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는 ‘과감한 조치’를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사마르를 ‘깨끗하게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교역을 중단시키고 농작물을 태워버리고 민간인을 이주시키고 게릴라에 맞서 험준한 지형을 넘어다니는 ‘하이킹’에 나서는 것이었다. 94)
극도로 가혹한 전술이 밝혀지면서 ‘유감’을 표명하긴 했으나 그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미국의 공공사업 활동은 저항군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한편, 고문·방화 및 식량 몰수를 통해 저항 세력을 혹독하게 응징했다. 1902년 공화당 의원 한 사람은 “필리핀은 군화에 짓밟히고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말했다. “미군들은 포로도 남기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필리핀을 간단히 쓸어버린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필리핀인을 잡기만 하면 죽여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목숨을 잃은 대다수 필리핀인은 광적인 ‘하이커’들의 손에 죽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전쟁이 사마르 전역에서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확실히 총격과 방화로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긴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흔히 그랬듯이 대부분의 전쟁 피해자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이러한 재해가 한순간에 급속히 확산됐다.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 각기병, 우역, 결핵, 천연두, 선페스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던 것이다. 96-7)
민다나오, 팔라완, 바실란 및 술루 군도의 섬들을 가리키는 ‘모로랜드’는 필리핀에서 인구 밀도가 낮아 전체 인구 순위의 끝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이는 다른 나라였다. 주민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가 아닌 무슬림(이른바 ‘모로인’)이었고 술탄과 다투 통치 방식을 따랐다. 이슬람법을 따르고 일부다처제였으며 노예제도 유지됐다. 러프 라이더스 시절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오랜 전우였던 레너드 우드 장군이 1903년 모로주의 총독이 되었다. 우드는 ‘확실한 교훈’을 기대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수십 번씩 쓸데없이 반복’되는 양상이었다. 이는 우드가 바라 마지않던 싸움이었다. 모로주는 1913년에 민정이 실시되면서 14년간의 계엄령이 종료됐다. 사실 육군의 첫 12명의 참모총장은 모두 필리핀전쟁에 참전했다. 1899년 교전 발생 시부터 1913년 모로랜드의 군정 종식에 이르기까지, 필리핀전쟁은 아프간전쟁 다음으로 미국이 최장기로 참전한 전쟁이다. 98, 100-2)
# 다투. 필리핀 군도의 원주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일컫는 말
7. 배타적 집단의 외부
쿠바식 모델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03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재정이 붕괴됐다. 대통령인 카를로스 모랄레스는 미국의 도미니카 합병을 환영한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다. 그런 제안을 내놓은 것은 두 번째였다. 10여 년 전이라면 루스벨트는 모랄레스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필리핀전쟁 때문에 지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배가 불룩한 보아뱀이 고슴도치의 엉덩이까지 홀랑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그 땅을 합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대신 루스벨트는 쿠바 스타일의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정부가 도미니카공화국 재정에 대한 임시 통제권을 가지며(따라서 미국 은행에 채무 상환을 보장), 그 대가로 모랄레스 정부를 반군 세력과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미국의 이익은 보호받고 도미니카공화국은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카리브해 국가들과 차례로 그런 계약을 맺었다. 미국은 재정과 무역을 좌지우지하게 됐지만 형식적으로 주권은 손대지 않았다. 108)
남부 출신인 우드로 윌슨이 제국 추세에 역행하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식민지인들에 대한 윌슨의 동정은 확실히 남북전쟁 후,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북부가 ‘정복당한 속국’(이전 남부 연합 소속 주들)을 다뤘던 방식에 분노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윌슨이 남부 출신이라는 점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윌슨은 일부 주변 사람들처럼 유색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아이’ 같은 존재로, 자치 이전에 ‘교육’이 필요한 존재로 봤다. 그는 아이들이 총기를 다룰 준비가 되기도 전에 힘을 얻는 건 최악의 상황이라고 봤다. 그는 이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이 남북전쟁 직후 공직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윌슨은 그런 상황을 ‘남부 백인이 검둥이의 발아래’ 놓이는 것이라고 썼다. 이는 대재앙이며 ‘문명의 진정한 전복’이라는 것이었다. 미 흑인의 때이른 정계 진출은 전쟁 그 자체보다도 더 ‘비할 데 없이 깊고 되돌리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10)
윌슨은 작은 나라와 그들의 민족자결권을 위해 말했으나 그런 발언은 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헝가리 등 남부 유럽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푸에르토리코는 계획에 없었다. 1917년 미국 정부는 푸에르토리코 바로 옆의 카리브해 군도 중 작은 섬들로 이뤄진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사들였다. 이 식민지가 바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서, 1900년 이후 합병된 최초의 유인 영토였다. 제국은 살아남았고 모든 승전국의 식민지는 그대로 유지됐다. 위임통치는 명백히 인종적 계급에 따라 정해졌고 중동 국가들의 영토는 최상위(독립의 과도기 단계인 ‘클래스 A’)에, 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 영토는 그 아래(‘클래스 B와 C’)에 놓였다. 일본 대표는 국제연맹 협약에 최소한 인종적 평등에 관한 문구를 삽입하라고 요구했다. 이 제안은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대표는 그런 논지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그러나 윌슨은 이를 저지하며 인종 평등의 원칙을 그대로 두는 것조차 거부했다. 113-4)
8. 화이트 시티
“자본과 세심한 계획만 있다면 알아서 굴러간다.” 대니얼 버넘은 시카고에 화이트 시티를 세운 해에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게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계획은 ‘알아서 굴러가지’ 않았다. 세심한 관리가 요구됐던 것이다. 도시란 기괴할 정도로 복잡하기에 도시계획에는 세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시카고 계획은 구상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그룹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수행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400명의 저명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이 계획의 시행을 담당했다. 반면 필리핀은 달랐다. 설득할 유권자도 없었다. 버넘은 도착할 때까지 필리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체류 기간은 6주에 불과했다. 버넘은 총 6개월간 계획에 몰두했는데, 그 기간에 여행과 관광도 하면서 바기오에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시켰다. 시카고에서라면 버넘이 그토록 서둘러 일을 끝낼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닐라에서는 가능했다. 119-20)
버넘과 같은 사람들에게 식민지란 본국에서 계획에 차질을 불러오는 저항에 부딪힐 걱정 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터였다. 본토인들은 땅을 몰수하고 세금을 전용하고 산꼭대기에 낙원을 짓기 위해 일꾼들의 목숨을 희생시켜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필리핀인들은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버넘의 도시계획 한가운데에 따로 분리된 공간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낸 세금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식민 지배자의 눈에 가치 있는 존재임을 어필해 조금이나마 존중을 받는 것뿐이었다. 건축 분야에서는 윌리엄 파슨스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버넘의 계획을 실행한 후안 아레야노가 본보기라 할 수 있었다. 아레야노가 마닐라에 돌아오자마자 처음으로 받은 중요한 의뢰는 버넘이 루네타 주변 지역에 계획한 의사당 건축이었다. 의사당 건물의 상징성으로 마닐라라는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이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이다. 125-7)
9. 국경없는의사회
프리츠 하버가 1915년 이프르에서 염소가스를 방출한 이후 화학전의 위협이 감돌았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가스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군대는 그와 상관없이 화학전에 대비했다. 독가스를 제조하고 테스트까지 했다. 화학전 부대의 의료 지원팀을 이끄는 사람은 코닐리어스 로즈였다. 의료 지원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승인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고위급 의사였다. 화학전 부대의 기록을 검토해봐도 그가 실험을 주저하거나 망설였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열정적으로 실험을 주도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가스실로 보내도록 했으며 그들에게 어떤 가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화학물질로 인한 화상에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 등 실험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로즈는 “화학전에서 독가스를 비롯한 사전 공작에 맞서 싸운” 데 대해 공로훈장을 받았다. 140-1)
로즈에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과학자들은 전쟁 초기부터 로즈가 주로 다루던 화학물질인 겨자 작용제가 림프 조직과 골수를 표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림프종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전쟁 중에 알게 된 사실을 활용해 이 문제를 다시 다루기로 했다. 로즈는 화학전 부대에서 그와 함께 겨자 작용제를 연구했던 프로그램 관리자 거의 전원을 채용했다. 이번에는 신약 개발이라는 명목이었다. 맨해튼 메모리얼 병원과 슬론 케터링 연구소 두 곳의 이사장을 나란히 맡은 로즈는 대규모 연구실과 함께 풍부한 자금도 확보한 상태였다. 게다가 병원은 실험 단계의 치료법에 기꺼이 동의할 만한 불치병 환자들로 가득했다. 로즈는 암과 싸우기 위해 각종 화학물질을 실험하면서 이른바 ‘전력을 다해 전면 공격’에 나섰다. 『사이언스』는 그를 당대 ‘미국 의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그는 1949년에 『타임』 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141-2)
10. 미국이라는 요새
미국 영토 거주자들에게 제국이란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본토에서 제국의 존재는 시야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렸다. 영국이 거대하게 우뚝 솟은 웅장한 건물을 점령지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면, 미국은 식민지 수도에 단 하나의 식민지 건물도 짓지 않았다. 식민지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학교도 짓지 않았다. 미국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육·해군 및 내무부 산하의 급조된 관료주의 체계에 따라 해외 영토를 관리했던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유럽 식민지를 감독했던 전문 행정관과 달리 해외 영토에 파견된 이들은 자기가 배치된 곳에 대해 잘 몰랐고, 보직 순환이 빨랐던 것이다. 본토의 무신경함은 늘 이들 영토에 부담으로 다가왔으나, 1930년경에 이는 노골적인 위협으로 발전했다. ‘요새화된 미국Fortress America’이 적대적인 세력에 맞서 방어벽을 세우자 이후 10년간 경제적 파탄과 군사적 위험이 이어졌다. 식민지들은 보호는 커녕 오히려 본토를 둘러싼 장벽이 높아지자 외부의 감시를 받게 됐다.143-4)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무역에 문을 닫아걸자 주요 국가들은 내수 생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수란 식민지가 포함된 개념이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는 아시아의 식민지로부터 고무와 같은 열대작물을 여전히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거대 제국을 거느리지 않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산업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물자 조달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은 특수한 상황에 있었다. 식민지를 보유하긴 했지만, 식민지가 생명줄은 아니었다. 오히려 잠재적 위협에 가까웠다. 일례로 식민지에서 생산된 설탕은 본토의 사탕수수와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과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본토 농부들은 자신들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국경 자체가 달라질 상황이었다. 필리핀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장벽 밖으로 쫓겨날 참이었다. 146-7)
본토는 필리핀에 그리 의존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수십 년간의 미국 통치 후 필리핀은 미국 본토에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 1930년경에는 필리핀의 대미 교역이 전체의 약 5분의 4에 달했다. 게다가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저항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소규모 원주민 부대를 창설했으나 필리핀은 외세의 침입을 격퇴할 대외군을 창설할 수 없었다. 갑자기 미군의 보호와 본토 시장에 무관세로 상품을 수출하던 길이 동시에 막혀버리자 대혼란이 일어났다. 미 하원에서 필리핀 독립을 승인하는 법안이 순조롭게 통과되자, 필리핀 의회는 1934년 5월 1일, 미국의 필리핀 점령 36주년이 되는 날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비준했다. 강대국이 최대 식민지를 폭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독립시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가까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현재의 인도네시아)는 300년간 네덜란드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 10분의 1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있던 필리핀은 독립을 앞두게 됐다. 148-9)
11. 전쟁 국가
교전 지역의 삶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외출할 때는 방독면을 들고 다녀야 했다. 엄격한 통금을 지켜야 하는 삶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전 조치들은 침략에 대비한 것만이 아니었다. 군대는 하와이 주민 자체에 대해서도 극도의 경계 조치를 주장했다. 해군장관이 보기에 하와이는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일본계여서 인구 구성이 의심스러운 ‘적국’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지문 날인과 최대 규모의 백신 접종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하와이 주민들은 신분증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했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체포될 수 있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총 외에도 육군은 법 시행을 위한 군정재판소 체제를 수립했다. 그들이 시행한 정의는 성급했고 무자비했다. 하와이 군정재판소에서 (배심원도 변호사도 없이) 재판받은 수만 명의 피고인은 강도, 폭행, 사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결근, 통금 위반, 교통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60-2)
그렇다고 하와이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별로 없다. 복역 대신 헌혈하거나, 벌금을 내는 대신 전시 채권을 구입하라고 피고에게 명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식으로 육군은 하와이 주민들에게 애국적인 행위에 가담하도록 강제했으나, 본토인들은 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와이의 계엄령은 3년 여간 지속됐는데, 이는 일본이 하와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간보다 2년 반 정도 더 길었다. 하와이의 군사령관은 지배권 포기를 계속해서 거부했다. 내무장관은 이를 “미국의 하와이 ‘점령 영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계엄령이 해제된 것은 잇달아 법적 이의가 제기되면서 일반에 해당 사안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본토가 관심을 가진 드문 경우였다. 대법원은 하와이의 계엄령은 불법이며 그곳의 시민들은 본토 시민들과 동일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런 판결은 계엄령뿐 아니라 전쟁 자체가 완전히 종식된 1946년에 가서야 내려졌다. 163)
일본은 필리핀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래스카로 넘어갔다. 1942년 6월, 일본은 더치 하버를 폭격했고 알류샨 열도의 아가투, 아투, 키스카섬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1년 넘게 이 섬들을 점령한 후 아투의 몇 안 되는 인구(42명)를 전쟁 포로로 삼아 일본으로 이송했다. 알래스카 일부를 점령한 것은 중대한 성취였고 선동가들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으로 가져온 유적을 자랑스레 전시했다. 미국 본토인들은 그 사건에 대해 거의 몰랐는데, 이는 공식적인 검열 때문이었다. 알래스카에서는 검열이 의무였고 굉장히 활발히 이뤄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완벽에 가까운 정보 봉쇄였다. 군 당국의 광범위한 해석에 따라 알래스카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통제됐다. 기자들은 알래스카를 ‘가장 조용한 전구戰區’라거나 ‘숨은 전선’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는 잊힌 전쟁이다. 일본군이 알래스카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알류샨 열도의 알류트족 억류 사실을 알면 또 한 번 놀란다. 164-5)
12.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가 있는 법
일본은 식민지 주민들의 원한을 제대로 이해했다. 일제 선동가들은 필리핀인들에게 미국의 기나긴 제국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북미 인디언의 토지를 강탈한 이야기로 시작해 멕시코전쟁과 스페인 식민지 합병 및 필리핀전쟁으로 이어갔고, 일본의 침략에 대해 초토화 정책을 채택한 데까지 나아갔다. 한 일본 언론인은 “미국이 널찍한 대로와 산속 호화 리조트를 짓기 위해 여러분의 세금을 마구 썼다”고 덧붙이며 대니얼 버넘의 시대에 입은 상처에 소금을 마구 비벼댔다. 일본은 다른 것을 약속했다.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식민지를 겪었던 지역에서는 강력하고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일본은 백인 열강들이라면 아시아의 독립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국에서 가장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조차 모든 인종을 동일한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니, 아시아인들이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180-1)
막상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자, 이와 관련된 상황은 기대와 반대로 흘러갔다. 마닐라를 장악한 후 나온 일본의 첫 공식 발표는 위협적이었다. 필리핀인 및 ‘자국 영토 전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적의나 저항도 ‘잿더미’로 화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둘째 주가 되자 군정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17가지 행위를 적시했다. 여기에는 반란, 허위 정보 유포, 군사적 가치(의류 포함)가 있는 모든 것의 훼손, 식량 은닉, 통행 방해, 또는 어떤 식으로든 군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 등이 포함됐다. 이러한 행위를 권유하기만 해도 처형의 근거가 됐다. 필리핀인들은 곧 일본이 필리핀을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약탈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예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1899년을 다시 사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또다시 콜레라가 마닐라를 덮쳤다. 사회적 붕괴와 사람들의 이주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다. 필리핀인들은 또다시 저항했다. 항복한 맥아더 군대의 잔류병들과 새로 결성된 게릴라군들은 일본인들을 공격했다. 181-2)
1944년 10월, 20만 명이 넘는 맥아더 부대가 해변에 상륙하면서 필리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싸우기 전에 퇴로를 차단해버렸다”는 것이 맥아더 선두 사단의 공식적인 기록이었다. 이와부치의 퇴로를 끊어버림으로써 맥아더는 사실상 인구 밀집 도시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라고 부추긴 셈이었다. 맥아더의 병사들은 신중히 대량 학살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도시 전역의 건물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건물에 들어가 하나하나 찾아내 습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건물 전체를 폭격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 보였다. 일본군이 특히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인트라무로스는 결국 맥아더의 승인하에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2월 23일, 미친 듯이 폭격이 계속되던 한 시간 동안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의 밀집 지역으로 1분마다 3톤에 달하는 폭탄이 날아들었다. 건물 안에 있는 일부는 적군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이 민간인들 역시 정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미국인’이었다. 187-90)
제2부 점묘주의 제국
13. 킬로이가 여기 다녀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미국 본토를 군수품을 대량으로 쏟아내는 거인의 심장이라고 생각해보자. 일련의 기지들은 동맥처럼 기능하면서 이러한 군수품을 전선으로 내보낸다. 이들 기지에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선박이 정박하며 부품과 연료·식량이 저장되고, 또 이곳에서 부상자를 치료하고 손상된 물건들을 수리했다. 1940년 당시 루스벨트 행정부는 서반구의 영국령 기지와 50대의 구축함을 교환했다. 미국은 이 기지들을 99년간 조차했다. 그러나 관할권의 범위는 깜짝 놀랄 정도였고, “아마도 영국 정부가 이전에 영국령을 넘긴 그 어떤 경우보다 광범위할 것”이라고 영국 주재 미국 대사는 자랑했다. 전쟁 중에 미국은 2000개의 해외 기지에 무려 3만 개에 달하는 군사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들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낙서로 자신들의 존재를 표시했다. 벽 너머를 들여다보는 만화 캐릭터 얼굴에 “킬로이가 다녀갔다Kiloy Was Here”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실제로 킬로이는 어디에나 있었다. 199-201)
간단히 말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전 지구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국무부 관리들은 지도상의 각 나라, 식민지, 지역, 속령 등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확립하면서(많은 경우 처음으로) 전시 메모를 맹렬한 기세로 쏟아냈다. 외몽골, 북부 부코비나, 중국령 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 자치구), 영국령 보르네오섬, 프랑스령 소말리아, 남부 소말리아 또는 카르파소 남부 루테니아 등 미국의 주요 의제에 등장한 모든 지역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고심하는 모습은 얼굴에 진땀이 흘러내리는 만화 캐릭터가 연상될 정도였다. 미국에서 전쟁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44년에 기자인 존 허시는 “한때 유럽의 침공이 쉴 새 없이 이민자가 미국으로 밀려들어온 방식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이 이민자의 자손들이 쉴 새 없이 유럽으로 몰려가는 식으로 미국의 침공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뿐.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대거 ‘침공’이 이뤄졌다. 202, 204-5)
14. 미국의 탈식민화
제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적으로 제국에 대한 저항을 촉발시켰다. 반란은 아시아에서 시작됐지만 이내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및 중동으로 퍼져나갔다.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식민지 주민들은 전 세계의 대제국들을 해체시켰다. 1940년에는 전 세계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식민지 상태에 놓였다. 1965년에는 그 수가 50분의 1로 줄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백인 지배 세력이 아시아의 힘에 의해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들은 다년간 라디오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일본의 메시지를 들었다. 1943년에 그들은 버마와 필리핀에서 일본이 식민지들에 명목상이나마 독립을 허락했을 당시 자유 그 자체를 맛봤다. 아시아인들은 생각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전역에 무기가 보급되자, 식민지 시대 전반을 특징지었던 엄격한 군비 통제는 완전히 효력을 잃었다. 210-1)
미국은 억지로 식민지를 보유하려 하기보다는 필리핀을 서둘러 포기했다. 이는 일제 부역자 문제를 남겼다. 루스벨트는 사망 전에, 전쟁 중 일제에 부역한 이들의 권한을 박탈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누가 ‘부역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가리기가 애매했다. 맥아더의 보좌관이었던 마누엘 로하스 주위로 짙게 드리워진 암운이 소용돌이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 중에 로하스는 친일 정부 내각의 인사였다. 그는 일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미 총영사는 “양측을 도우며 신중을 기했다”고 보고했다. 맥아더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로하스는 부역자가 아니오.” 그는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로하스가 “게릴라 운동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1946년, 필리핀 사회의 유력 인사들 중 일부의 지지를 받아 로하스는 독립 국가가 된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부통령은 미국의 필리핀 탈환(마닐라 전투) 기간에 가족을 잃은 엘피디오 키리노였다. 216-7)
필리핀 독립을 묵인하기 위해 미국 지도층은 필리핀인들의 자치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종차별주의적 두려움을 버려야 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식민지 지위를 끝내려면 이와는 다른 종류의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주 지위를 인정하기 위해 본토 정치인들은 백인의 확고한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다. 1948년부터 트루먼은 그런 목표를 활발히 추진했다. 그 영토들에 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시아와 태평양 도서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끼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미국 편입은 국내 정치의 다른 축을 흔들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이 신생 주들이 소속 정당에 얼마나 충성하든 간에, 인종적 구성으로 인해 시민권 운동에 확실히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었다. 이로써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시민권 전쟁의 전선이 열렸다. 마침내 1959년에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각각 49번째 주와 50번째 주로 의회 승인을 받았다. 218-20)
15.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인 걸 아는 미국인은 없다
무뇨스 마린과 알비수는 공통점이 많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본토 명문 대학의 법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무뇨스 마린은 조지타운, 알비수는 하버드). 그들은 대화하면서 정치적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기는 달랐다. 알비수가 ‘미국인을 몰아내는’ 데 골몰해 있었다면 무뇨스 마린의 일차적 관심사는 ‘기아 퇴치’였다. 필리핀이 해방된 1946년에 무뇨스 마린은 공개적으로 독립에 반대하면서, 당 내부에서 독립을 지지한 이들을 숙청했다. 그의 대중민주당PPD은 독립도 주 지위 획득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되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미국 시장 진출 기회를 잃지 않으면서도 푸에르토리코가 자치권을 획득하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탈식민화가 빠르게 이뤄지는 가운데 필리핀이 독립을 쟁취하고 괌은 시민권을 얻었으며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주 지위 획득에 나서자, 본토 정부는 푸에르토리코라는 난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224-5)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기아 문제를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량 생산을 늘리든가 아니면 인구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는 경제 발전을 촉진해 푸에르토리코를 빈곤에서 점차 벗어나도록 지휘했지만 그 역시 두 번째 해법에 솔깃했다. 그는 “인구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사회에서 이는 민감한 문제였다. 산아제한은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알비수는 오히려 인구가 부족하다고 봤으며, 산아제한이 ‘민족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침범’하려는 시도이자 푸에르토리코인의 출산의 자유를 가로막는 행위라고 여겼다. 공개적으로 정부는 산아제한과 무관했다. 하지만 비공개적으로는 의사와 연구자 그리고 제약 회사에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다. 푸에르토리코가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피임약을 실험하기 위한 무대가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26-7)
1947년 무뇨스 마린의 정당은 이민국을 설립했다. 주민들이 섬을 떠나도록 하는 일을 전담하는 국가 기관으로, 매우 희귀한 경우였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떠났다. 1950년에는 푸에르토리코인 7명 중 1명이 푸에르토리코가 아닌 본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55년에는 거의 4명 중 1명에 육박하게 됐다. 알비수는 여전히 독립을 주장했던 반면, 무뇨스 마린은 좀 덜 강압적인 형태의 식민 정책을 추구했다. ‘미국인을 몰아내는 것’과 ‘기아를 몰아내는 것’을 두고 1930년대에 그가 저녁을 먹으며 알비수와 벌였던 토론은 우호적인 논쟁에서 곧 세계관의 근본적인 불화로 비화하게 됐다. 그러나 뉴욕으로 이주의 물결이 거세지자 독립해야 할 명분은 더 약화됐다. 뉴욕에 거주하는 푸에르토리코인의 존재 한 명 한 명이 푸에르토리코를 미국과 더 단단히 묶어버렸다. 1950년 7월 무뇨스 마린의 요청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해 푸에르토리코 헌법제정회의를 요구하는 법에 서명했다. 230-2)
이어진 주민투표는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에게 주 지위를 원하는지 아니면 독립을 원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본토에 대한 기존의 식민지 관계의 범위 내에서 새로운 헌법을 택할 것인지를 물었다. 4대 1로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겠다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새로운 정부는 영어로 ‘연방Commonwealth’이라 불렸으며 스페인어로는 ‘자유연합주’라고 불렸다. 사실상 권한 구조는 변한 것이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 연방정부에 대해 투표권이 없었으나 정부는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미국 의회는 그런 재량권을 활용해 헌법 개정안에 따른 경제적 권리에 대한 법안을 즉시 부결시켰다). 차이가 있다면 무뇨스 마린이 주장한 대로 이제 본토와의 관계는 푸에르토리코 유권자들이 승인한 것이며 따라서 강제에 의한 관계가 아니고 상호 합의에 의한 관계가 된 것이었다. 미국 침공 기념일인 1952년 7월 25일,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연방의 초대 지사로 취임했다. 235)
16. 합성소재의 세계
식민지 작물이라 할 수 있는 고무는 산업 경제의 구석구석 쓰이지 않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 수익성 높은 사업이었다. 1941년 12월 7~8일, 일본은 고무를 비롯한 핵심 원자재 공급 문제를 우려해 중국 너머로 전쟁 범위를 확대했고 자원 매장량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까지 진격했다. 몇 달 만에 일본은 미국 고무 공급의 97퍼센트를 차지한 유럽 식민지를 점령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사실상 고무 공급원이 끊긴 셈이 됐다.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협이었는지 제대로 옮기기는 어렵다. 대대적으로 주목받았던 한 정부 보고서에는 이러한 상황이 “매우 위험하므로 즉각적인 시정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미국은 전방과 후방 모두 붕괴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새로 심은 고무나무는 채취하기까지 최소 6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다른 식물에서 고무를 추출할 수 있을까?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이를 실험(마치 식물학 분야의 맨해튼 프로젝트라 할 만했다)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244)
고무 합성의 비결이 밝혀졌을 때 극적인 대발견의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이는 충분한 자금을 지원받은 화공학자 집단이 이끌어낸 1000여 가지 발견에 힘입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산업적 성취는 과학적 발전만큼이나 놀라웠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에는 51개의 합성고무 공장이 가동되었고, 그것들의 전체 운영비를 합치면 하루에 2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런 공장 한 곳에서만 1250명이 일했고, 2400만 그루의 고무나무와 9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요하는 고무농장을 대체하기에 충분한 합성고무를 만들었다. 1944년 중반의 고무 공급은 정부 요건을 충족했고, 1945년경에는 이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합성고무가 화학자들이 모자 속에서 홱 끄집어낸 유일한 토끼는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은 미국이 전쟁 중에 거의 끊다시피 한 원자재의 수였다. 견사, 삼, 황마, 장뇌, 목화, 양모, 제충국, 구타페르카, 주석, 구리, 동유 등을 차례로 합성 물질로 대체했다. 미국 경제 전반에서 식민지는 화학으로 대체되었다. 247-8)
플라스틱만큼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는 합성소재는 없다. 미군은 더 이상 쉽게 확보할 수 없는 모든 ‘전략’ 물자 대용품으로서 대부분 석유로 만든 플라스틱을 사용하고자 했다. 전시 협력은 가능한 한 플라스틱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합성고무는 천연고무가 사용되는 주요 분야 하나를 대체한 반면, 플라스틱을 미세하게 응용할 수 있는 범위는 무수했다. 투명 플라스틱인 플렉시유리Plexiglas는 비행기 조종석 창문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셀로판지는 식품 저장고의 양철통을 대체할 수 있었다. 플라스틱과 유리를 합성한 유리섬유는 항공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었다. 1930~1950년에 전 세계에서 연간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양은 40배가 늘어났다. 2000년에는 1930년의 규모에 비해 약 3000배로 늘어났다. 각종 원자재를 식민지에서 추출하기보다는 국제 무역을 통해 안전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긴박감이 상당히 줄었다. 국가 보안이 더 이상 원자재에 좌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48-52)
17. 이것은 신이 행하신 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기획자들은 한 당황한 장군이 표현한 “상상 이상의 군수품 요건”에 맞닥뜨렸다. 모든 해외 주둔 군인에게 미국은 하루에 30킬로그램의 군수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전쟁 발발 전에 군수logistics란 전문가 용어였지 일상의 대화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용맹과 리더십, 전술적 정확성을 높이 샀으며 조달과 운송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장에서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는 데 그쳤던 사령관들은 점차 적재량과 재고 수준, 물자 보급로에 관해 자주 언급하게 됐다. 군수 혁신은 속도를 높이는 것 이상이었다. 장거리 운송망을 운영하기 위해 더 이상 대규모 지역이나 지대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지도상의 지점들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밀림의 공터에 있는 비행장 정도만 연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플라스틱과 기타 합성소재처럼 이들 신기술은 식민지를 전혀 필요 없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259-60)
항공기 수가 넘쳐나자 연합군은 이것을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 활용했을 정도다. 장거리 보급로도 항공 운송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거의 4000대에 달하는 B-29 슈퍼포트리스를 생산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톤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항공술과 마찬가지로 무선은 공간을 건너뛰는 기술이었다. 두 개의 트랜스시버만 있으면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땅을 통제할 필요도 없었다. 무선을 통해 멀리 떨어진 지역이 서로 연락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배와 비행기, 트럭, 탱크, 잠수함 그리고 전장에서도 통신이 가능해졌다. 미국이 전 세계에 건설한 멀리 떨어진 수천 개의 기지는 무선 기술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메시지를 내보내면 누구든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암호화 기술에 엄청나게 투자했다. 1만6000명의 암호 통신 사무직원이 전쟁 중에 통신 암호화와 암호 해독에 종사했다. 261, 265-6)
18. 붉은색 팔각형의 제국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부유하고 막강한 데다 화학자와 공학자들 덕분에 식민지 건설 없이도 해외 영토를 좌지우지하는 수단을 보유하게 됐다. 이것 말고도 전쟁 덕분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좀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진행됐다. 바로 표준에 관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표준국에는 가장 신뢰받는 정부 관리 중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상무장관인 허버트 후버였다. 오늘날 후버는 1929년 재임 중에 주식시장 폭락을 겪은 불운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후버는 요령 없는 정치인이자 경제 운용에 서투른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후버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경제 문제의 원인은 자본가의 부정 때문도, 노동자의 조바심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물건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효과가 없는 일에 많은 시간과 돈이 낭비됐던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면 모두가 골고루 혜택을 누리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준화와 간소화를 번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274-7)
표준을 공표하는 제국의 능력은 식민지 정복의 주요 이점이었다. 제국의 표준화란 머나먼 땅에서도 식민 지배자의 관행이 지켜진다는 의미였다. 제국은 새로운 법과 아이디어, 언어, 스포츠, 군사 협정, 패션, 도량형, 예의범절, 화폐, 업계 관행 등을 식민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실제로 식민지 관리들은 이러한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영국의 도량형 체계(피트, 야드, 갤런, 파운드, 톤)가 제국주의 체계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도량형은 영국 제도를 넘어 대영제국 전체에 동일한 단위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보급됐던 것이다. 제국은 사람들까지 표준화시켰다. 필리핀의 간호 업무를 예로 들어보자. 영토 합병 이후 미국 정부는 곧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필리핀이 미국의 최대 외국 간호 인력 공급지가 된 데에는 시장의 역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필리핀이 비교우위를 갖게 된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간호사들이 정확히 미국 표준을 따른 실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279-8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표준 문제는 한층 더 심각했는데, 미국이 유럽에 인력과 자금만 보낸 게 아니라 세계 전역으로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비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분의 나사와 너트, 볼트를 해외로 보내는 데 6억 달러를 썼다. 제조업체들이 그냥 유럽식 표준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유럽이 연합군 전시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경우에만 유럽 표준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유럽은 곧 그 중심적 역할을 잃었다. 프랑스의 함락과 영국에 대한 폭격 사태로 유럽의 공장들은 가동을 멈췄다. 동시에 미국 제조업은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 공장들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할수록 그들의 표준화 작업은 더 정교해졌다. 저명한 두 전문가의 표현에 따르면, 표준화의 목표는 “전체 공정을 거대한 강처럼 순조로운 흐름에 통합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 주도의 표준화를 감안할 때 전후 세계화가 적어도 처음에는 미국에게 유리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81-2)
19. 언어는 바이러스다
언어는 정지 표지판이나 나사산과 마찬가지로 표준에 해당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어떤 개념을 떠올리기 쉽게 혹은 어렵게 만들면서,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동시에 사회를 구성한다. 단일 언어가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 거의 모든 교육받은 권력층이 어느 정도 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버지니아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처럼 단일 언어가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정착지 건설 붐 덕분이었다. 너도나도 정착지 건설에 뛰어들면서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이 방대한 영토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착민들 외에 영어를 국가 공용어로 만드는 데에는 훨씬 더 폭력적인 과정이 동반됐다. 토착언어는 강제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방대했고 부족어를 쓰지 못하게 일일이 감시할 만한 충분한 식민 지배 관리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다른 수단에 의지했다. 무엇보다 식민 당국은 교육을 활용했다. 292-3)
연합군 지도부는 전쟁을 어떤 식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다가 언어에 생각이 미쳤다. 윈스턴 처칠은 하버드에서 1943년에 한 연설에서 “미래의 제국은 의식의 제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정신적 식민화의 핵심은 언어적인 것에 있다고 믿었다. 처칠은 하버드 학생들에게 영어가 전 세계에서 사용된다면 영어 사용자들이 누리게 될 ‘엄청난 편리함’에 대해 상상해보라고 주문했다. 더 이상 영토로 쌓아올린 제국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영어가 맞닥뜨린 과제는 기술적인 차원 이상의 것이었다. 영어 확산의 주요 수단이었던 식민 지배는 눈에 띄게 와해되고 있었다. 탈식민화로 6억 명 이상이 영국과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영어를 사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많은 사람이 영어가 자국에 끼친 해악을 거세게 비난했다. 1949년 유엔 총회는 회원국 국민이 모국어로 초·중등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295, 298-9)
그러면 영어는 어떻게 전 세계에 널리 퍼졌을까? 표준은 다른 종류의 권력과는 작동 방식이 다르다. 정부는 세금을 부과하고 병력을 징집하며 당사자를 구속할 수 있다. 이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표준은 강제하기가 훨씬 어려우며, 언어는 특히나 더 그렇다. 표준은 힘을 반영하지만 실제 압력이 국가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공동체의 압력이 더 크다. 동떨어진 문화들이 가까이에서 마주치면서 공통 언어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는 아무나 선택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언어를 골라야 하고 발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는 언어를 선택해야 했다. 일단 임계치에 다다르면, 그런 선택은 사실상 의무가 되어버렸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제사회는 공통 언어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영어를 선택했고(대표적으로 항공 교통 관제사들), 각국이 영어를 받아들이자 영어는 더욱 추진력을 받으면서 결국 전 세계가 영어에 올라타게 되었다. 301)
20. 권력은 곧 주권이오, 미스터 본드
점점이 흩어진 작은 땅들은(해조분 제도의 하울랜드, 자르비스 섬 같은) 공식적인 제국의 황혼기에 특히 중요하게 취급됐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전 세계를 덮치면서 지도상에서 제국주의 체제가 대부분 쓸려나갔지만 작은 섬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물결을 피해갔다. 대규모 식민지는 자급자족을 꿈꾸며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독립을 실현하려 한 데 반해 작은 식민지는 그럴 수 없었다. 무뇨스 마린이 인정했던 것처럼 독립은 경제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나 괌과 같은 소규모 지역이 무장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실제로 자살 행위가 될 것이었다. 지정학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강대국들은 여전히 지도를 펼쳐놓고 게임을 계속했다. 미국은 제국을 구성하는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대규모 식민지는 처분해버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소규모의 반半 주권지역, 즉 군사기지에 투자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그런 기지가 800여 개에 달하며 그중 중요 기지는 섬에 위치해 있다. 314)
구체적으로 미국은 도서 기지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스완 제도가 좋은 예다. 스완 제도는 카리브해의 고립된 지역의 세 개 섬으로 이뤄진 작은 군도로서, 미국이 점령한 최초의 해조분 제도에 속했다. 해조분이 바닥나버렸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는 그레이트스완섬을 다른 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미 농무부USDA는 구제역이 의심되는 수입 가축의 검열을 위한 장소로 이곳을 활용했다. 1950년대에는 CIA가 그레이트 스완섬에 활주로와 5만 와트의 무선 송신기를 설치했다. 매우 강력한 이 송신기는 남아메리카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육로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영토까지 무선 전파로 포괄할 수 있었다. 1954년 CI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과테말라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무선 방송을 이용해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스완섬의 송신기를 활용해 미국은 이번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을 겨냥해 좀더 안전하고 정교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316-7)
핵무기와 섬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즉 세계 최대의 살상 무기는 인류 문명과 가장 동떨어진 지역에 배치된 것이다. 작은 섬들은 대다수 인구가 사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핵폭탄을 실험하고 저장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가 된다. 미국이 최초의 원자폭탄을 실험할 때 과학자들은 뉴멕시코의 사막을 골랐다. 그러나 미 원자력위원회AEC는 후속 실험 장소로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다. 섬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한 해군 장교는 “우리는 수십 장의 지도를 꺼내 외딴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 섬은 전쟁 말기에 미국이 점령한 미크로네시아 제도에 속해 있었다(이곳은 곧 미국이 감독하는 ‘전략적 신탁통치령’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군은 그곳에서 2개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일본에 떨어뜨린 것보다 성능이 훨씬 강력했다. 이 실험으로 한때는 알려져 있지 않던 환초의 이름이 유명해졌다. 319)
21. 기지 국가
‘점’들은 툴레나 비키니 환초, 스완 제도와 같은 섬이나 외딴 장소에 찍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인구가 극도로 밀집된 지역에 점이 찍히기도 했다. 잉글랜드 북부의 항구 도시인 리버풀을 예로 들어보자. 그 모든 영국 도시 중 하필 리버풀에서 1950년대에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한 활기찬 10대 문화가 싹트게 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리버풀이 유럽 내 최대 미 공군기지가 있는 버턴우드에서 서쪽으로 약 24킬로미터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이 도시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군용기가 착륙하는 곳이었다. 1636개의 건물에는 유럽 최대의 물류 창고와 함께 군의 유일한 유럽전자장비 보정연구소가 있었다. 야구팀, 축구팀, 무선국이 있었고 미국에서 끊임없이 연예인들(밥 호프, 냇 킹 콜, 빙 크로즈비)이 유입됐다. 조지 마틴이 보기에 이는 혁신이었다. 그는 군부대가 “미국 문화와 이들에게 인기 있던 음반을 함께 들여와 리버풀 일상의 주류 문화에 곧바로 연결”한 셈이었다고 기억했다. 325-7)
기지의 영향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기지에 대해 분개감을 표출하기도 하고 기지를 중심으로 삶을 일구어가면서 시위와 참여 사이를 오갔다. 1952년 군정이 끝난 이후에도 20만 명의 미군이 일본 본섬의 2000개 이상의 군시설에 계속 주둔했다. 미 군정이 끝난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18퍼센트만이 일본이 진정한 독립 국가라고 주저 없이 느낀다고 답했다. 일본 기지는 봉쇄된 미국인 거주지인 ‘아메리카 타운’으로 운영됐다. 이들은 자체 사무실과 주거지, 쇼핑센터, 학교, 소방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는 물리적으로 확장되면서 주변 지역을 흡수해, 대형 시설을 짓기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 일본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시피, 기지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술집의 난동과 비행기 추락, 혼잡한 거리에 술 취해 뛰어든 지프를 감내하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았다. 제멋대로 뻗어가는 미군 시설 내에 일본인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냉전 중에 이는 지구상 최대 규모의 꾸준한 수익원 중 하나였다. 328-9)
22. 첨병전
미국이 차지한 지도상의 점들 중에 처음부터 다란만큼 가망 없어 보이는 곳도 드물었다. 사막 한가운데의 빈 공간이었던 다란은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는 전제군주국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석유가 매장돼 있었고, 석유는 세계를 움직이는 원천이었다. 미국 정부는 1945년에 다란에 대규모 공군기지를 임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지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사우디 왕실은 성조기가 메카와 메디나 땅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우려했다. 몹시 노심초사한 나머지 사우디 왕은 다란의 미 영사관이 물리적으로 깃발을 꽂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 대신 성조기가 사우디 땅에 닿지 않도록 건물 측면에 부착되게끔 했다. 해당 장소는 기지가 아닌 ‘비행장’으로 불려야 했다. 정치적 불안이 넘실댔으나 모하메드 빈라덴은 이를 노련하게 헤쳐갔다. 그는 사우디 정부가 선호하는 건축업자가 됐다. 동시에 그는 미국과도 다수의 사업을 진행하며 뉴욕에 지사를 운영했다. 340-1)
빈라덴은 1967년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그를 태우고 비행했던 대부분의 조종사처럼 해당 비행기 조종사도 미 공군 참전 용사였다). 그는 22명의 아내로부터 낳은 54명의 자녀에게 수억 달러에 달하는 건설회사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의 아들 중에는 이익을 얻게 돼 마냥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 사업에 뛰어들어 대규모 방어 및 기반 시설 계약을 따내는 이도 있었다. 그중 아들 오사마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신을 믿지 않는 초강대국(소련)이 무슬림 땅(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는 데 맞서고자 한 오사마 빈라덴은 무자헤딘에 합류했다. 그는 아예 아프간 국경 도시인 페샤와르로 거처를 옮겼다. 빈라덴은 기반시설을 건설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파키스탄에서 무자헤딘의 본거지를 운영했다. 1988년, 그는 성전(지하드)을 지휘하기 위해 소규모 단체를 조직했다. 이는 당연하게도 알카에다 알아스카리야al-Qaeda al-Askariya(‘군기지’라는 뜻)라 불렸다. 또는 줄여서 알카에다(‘기지’)로 통했다. 341-2)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1962년에 철수했던) 다란에 미군이 (다시) 주둔하는 것은 1990년대에도 1950년대와 별 다를 바 없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기지 근처의 사우디인들은 티셔츠를 입고 차량을 운전하는 여군을 보고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그다드의 라디오 방송은 미군이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곳을 더럽힌다며 비난했다. 빈 라덴은 “이 나라를 더러운 발로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미군들이 사는 미국 식민지가 되도록 내버려두다니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며 격분했다. 미국은 “아라비아반도를 이 지역 최대의 육·해·공군 기지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가장 반대를 표명한 것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적했던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었다. 이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 9·11 테러 이후 “왜 저들은 우리를 미워하는가?”라는 질문이 끝없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라덴의 동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불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9·11 테러는 크게 보면 미국의 기지 제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346-9)
미국 정부가 ‘블랙 사이트Black Site’라 불리는 비밀 감옥을 운용한 관타나모만은 미국이 1903년부터 영구 임대한 조차지였다. 쿠바가 ‘최종 권한’을 보유하긴 했으나, 조차권 덕분에 미국은 관타나모만에서 ‘전적인 관할권 및 지배권’을 쥐게 됐다. 이와 유사한 법률 체계가 파나마운하 지대와 오키나와에도 적용됐다. 이것의 장점은 미국 정부가 배타적 지배권을 가진 영토를 얻으면서도 ‘미국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 영토’가 되는 것이라고 미 법률자문실 소속 존 유 변호사와 패트릭 필빈 변호사는 주장한다. 관타나모만은 그 특수한 법적 지위로 볼 때 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어울리는 한 쌍이다. 미국의 두 전초기지이자 거의 기억에서 잊힌 19세기 전쟁의 전리품으로, 미국의 일부가 아니면서 미국의 관할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은 오래전 제국주의 시대의 기이한 흔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지도상의 작은 점들은 점으로 연결된 오늘날 미 제국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355-6)
결론: 지속되는 제국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지속되던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이 종료됐다. 마셜 제도 공화국, 미크로네시아연방, 팔라오공화국은 미국과 ‘자유 연합 협정’을 맺어 주권 국가로 독립하면서도 미군 기지용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됐다. 그러나 (사이판이 속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푸에르토리코와 유사하게 연방에 편입됐다. 1986년, 법령이 통과되면서 3만 명에 달하는 주민이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법의 적용을 받기로 했으나 연방법에 따른 최저임금과 이민법의 상당 부분은 면제됐다. 가장 가까운 직업안정보건청은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동시에 교역상의 이유로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의 일부로 간주됐다. 그런 조건의 결합은 강력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의 노동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환경에서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고 ‘메이드 인 USA’ 상표가 달린 옷을 만들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357-8)
워싱턴에서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로비스트인 잭 에이브러모프의 포트폴리오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포천』 500대 기업을 대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법의 허점을 활용했다. 노동법의 목적상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에 속하지 않았다. 교역상으로는 미국에 속했지만 말이다. 로비 규정의 경우, 이곳은 외국 정부에 해당됐다. 로비스트에게 이는 대성공이었다. 에이브러모프는 촉토인디언미시시피밴드를 대변한 로비활동에도 착수했다. 이들은 도박세 징수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그는 사이판에서와 동일한 전략을 활용해 인디언 부족 정부가 정치인들에게 신고할 필요가 없는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그는 더 많은 인디언 부족을 고객으로 받았다. 잭 에이브러모프가 사이판 문제를 다루면서 알게 된 내용은 부시 행정부의 존 유 변호사가 관타나모 기지 문제를 통해 알게 된 것과 똑같았다. 즉 제국은 여전히 존재하며 변칙적인 합법적 지위를 가진 곳들은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이었다. 358-9)
현재 푸에르토리코, 괌, 미국령 사모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및 북마리아나 제도와 같은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40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의회와 대통령이 임의로 결정하는 사항에 따라야 하지만 의원도 대통령도 투표로 선출할 권리는 없다. 투표권법이 제정된 지 50년 이상이 지났으나 그들은 여전히 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제국은 세계를 연결하는 해외 기지의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거의 독보적으로 영토라는 요소가 들어간다. 영국과 프랑스는 합쳐서 13개 정도의 해외 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9개, 다른 나라들은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미국 이외의 국가가 소유한 해외 기지는 30개 정도 된다. 미국은 이에 반해 약 800개에 달하는 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해외 기지에 출입할 수 있는 협정도 맺고 있다. 수십 개 국가에서 미군 기지를 수용한다.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도 미군 기지에 둘러싸여 있다. 확장된 미국 영토는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가까이에 있다. 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