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 - 로마, 미국 그리고 새로운 세계 질서
피터 헤더.존 래플리 지음, 이성민 옮김 / 동아시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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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돈을 따라가 보라


역사가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2015년 파리에서 일어난 바타클랑 학살에 관해 유명한 논평을 했다. 대서양 양쪽의 주요 신문(특히 《선데이 타임스》와 《보스턴 글로브》)에 실린 글에서 그는, 유럽이 ‘쇼핑몰과 스포츠 경기장에서 퇴폐적으로 성장’하는 와중에 ‘조상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유럽의 부를 탐내는 외부인’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5세기 초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은 자신의 방어가 무너지는 것을 허용했다. 퍼거슨은 이것이 바로 ‘문명이 무너지는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그의 말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유명한 걸작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그 책에서는 로마가 로마 국경 내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외부인(기독교인과 야만스러운 고트족, 반달족과 기타 족속들의 이상한 혼합)에 대한 저항을 멈춘 후 서서히 내부로부터 침식했다고 주장한다. 마치 숙주가 침투한 바이러스 때문에 천천히 힘을 잃듯이, 제국은 황금기로부터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지점까지 천천히 퇴락했다. 14)


# 바타클랑 학살. 2015년 11월 13일 파리 일대 여섯 곳에서 폭탄과 총기 난사 테러로 130명이 죽은 사건. 바타클랑 극장에서만 100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범인은 모두 이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기’ 제국이 근본적으로 주변 세계에 촉발한 종류의 변화 때문에 지배의 종말을 맞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경제 발전으로 수명 주기를 시작한다. 제국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제국 핵심으로 향하는 새로운 부의 흐름을 생성하려고 나타나지만, 그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과 일부 주변부(공식적으로 식민지화하지 않았지만 발전하는 핵심과 종속적인 경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들과 사람들)에도 새로운 부를 창출한다. 부의 집중이나 흐름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주체들에게 새로운 정치 권력을 주는 잠재적인 구성 요소다. 주변부의 대규모 경제 발전은 그 즉각적인 결과로서 앞서 생애주기를 시작한 제국의 지배권력에 반기를 드는 정치적 과정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강조하는 것처럼, 제국은 매우 파괴적인 것에서 훨씬 더 창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실행 가능한 조치로 조정 과정에 대응할 수 있다. 현대 서구는 이제 자체 조정 과정을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14-5)


1부 번영의 데자뷔_팍스 로마나와 21세기 이전의 서구


1장 399년의 로마, 1999년의 워싱턴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들어설 즈음 미국은 현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실업률은 역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미국 경제는 미증유의 최대치 성장을 즐기고 있었으며, 주식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씩 상승 중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 시장의 번영과 가치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삶의 실상이었다. 1999년 국정연설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약속은 한계가 없다’고 선언하며 이러한 좋은 시절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물씬 풍겼다. 경제학자들이 그에게 끝없는 성장을 가져올 경제적 안정의 시대인 ‘대大안정기Great Moderation’가 도래했다고 말하자, 그의 행정부는 정부 흑자가 곧 수조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동시에 유럽연합은 침착한 자신감 속에 구소련 블록의 나라 대부분을 서구 민주주의 엘리트 클럽으로 환영할 준비를 했다. 불과 몇 년 후, 낙관론은 증발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는 빠르게 대불황과 대침체로 이어졌다. 18-9)


빌 클린턴이 끝없는 가능성을 찬양하기 (거의 날짜까지 정확히) 1,600년 전, 제국 대변인이 로마 원로원 앞에 서서 로마 세계의 서쪽 절반을 대상으로 연두 연설을 했다. 때는 399년 1월 1일이고 로마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관직이자 천년을 이어온 집정관의 취임식 날이었다. 이들 집정관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도를 지정함으로써 영생을 보장받았다. 올해의 행복한 불멸 후보자는 변호사이자 철학자로 행정 역량을 갖춘 플라비우스 만리우스 테오도루스Flavius Manlius Theodorus였으며, 연설은 새로운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대변자인 시인 클라우디안Claudian은 청중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비위를 맞춘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집회야말로 나에게 우주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10년도 되지 않아 로마시는 (최근에 로마 세계로 들어온) 알라리크라는 고트족 왕이 이끄는 야만족 전사 무리에게 약탈당하게 된다. 19-20)


로마 제국은 엄청나게 큰 나라였다. 거리의 실제 척도는 임의의 측정 단위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 A에서 B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은 현대인이 보는 것보다 20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고 전체 제국은 실제 20배 더 넓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운 크기에도 불구하고, (고고학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시리아 북부의 석회암 언덕뿐만 아니라 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농촌 정착지가 정치적 붕괴 바로 직전인 4세기에 정점을 찍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부 영국, 북부 및 남부 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 그리스, 튀르키예, 중동 등,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농촌 인구밀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체 농업 생산량은 제국 말기에 최대 수준에 도달했다. 또한 로마는 압도적인 농업 경제국이었으므로, 제국 총생산(로마 세계의 경제 총생산량)이 로마 역사를 통틀어 이전 어느 시점보다 4세기에 더 높은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4)


# 에드워드 기번의 4세기 로마의 쇠퇴 점검표와 그에 대한 반론

1. 징벌적 조세로 '버려진 경작지'의 비율이 늘어났다. → 아그리 데세르티Agri Deserti, 즉 ‘버려진 경작지’는 세금을 부가할 가치가 없는 토지를 지칭한다.

2. 상류층의 공공기념물 기부 규모가 줄어들었다. → 속주 지주들의 성공 방정식이 지역 사회에 대한 관대한 기부에서 값비싼 법률 교육으로 바뀌었다.

3. 화폐 가치가 저하되면서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 속주 지주들의 자산은 토지와 귀금속 위주였기 때문에, 화폐 가치 하락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4. 기독교의 부상으로 시민의 호전성이 훼손되었다. → 속주의 상류층들은 기독교 고위직을 빠르게 차지했고, 이들은 주로 국가 공무원의 역할을 했다.


2장 제국과 풍요로움


비록 제국 전체가 황금빛 4세기를 즐기고 있었지만, 그릇 조사를 통해 일부 특정 지역의 쇠퇴가 확인되었다. 영국 북부와 벨기에의 시골 정착지는 3세기에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야만족의 극심한 약탈에서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훨씬 더 혼란스러운 것은 제국의 이탈리아 심장부에서 나온 결과다. 이탈리아는 3세기에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지만, 그곳의 정착지와 농업 생산량은 그리스도 탄생 전후 200년 동안 정점에 달했다가 서기 3세기와 4세기에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꾸준하게 감소했다. 제국의 가장 먼 지역이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 제국의 원래 중심지의 경제가 축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시계를 1,000년 정도 빨리 감아 결과적으로 현대 서구가 부상하는 과정을 분석하면 해답이 나타난다.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특히 장거리 무역을 위해 지중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지주 엘리트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 합쳐져 상인들이 지역 사회의 정치 의제를 지배할 만큼 부유해졌다. 26-7)


그러나 이 초기 이탈리아 핵심 도시가 번영하면서 다른 곳의 개발이 빠르게 촉진되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유럽의 직물을 동양에 팔긴 했지만, 가장 좋은 제품은 저지대 국가에서 왔고 그 국가들은 대부분 양모를 영국에서 수입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무역 연결망을 바탕으로 북유럽 경제가 확대되고 다양화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탈리아 도시 국가가 동방 무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을 보고 다른 유럽 정부도 이에 참여하도록 자극받았다. 동부 지중해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는 대신, 대서양 국가들은 아시아로 향하는 대체 항로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1,000년간 서반구에서 일어난 경제적 발전에는 최대 번영을 누리는 지리적 중심지의 주기적 이동이 중간중간 끼어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새로운 시장, 새로운 제품, 새로운 공급원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를 촉진했고, 이것이 성장의 장소를 원래의 북부 이탈리아 심장부에서 바깥쪽으로 꾸준히 밀어냈다. 27-9)


이제 로마로 돌아가 보면, 현대 서구의 부상은 제국의 원래 이탈리아 심장부가 처음 불가사의하게 쇠퇴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서도 역시 간단한 경제 논리가 경제 지배력이 원래의 제국 중심지에서 벗어나 이동하는 모습 아래 깔려 있다. 로마의 경우, 본질적으로 압도적인 농업 경제를 유지하고 있던 제국 국경 내에서, 산업 생산은 번영의 양상 변화에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기원전 1세기와 서기 1세기에 이탈리아에 기반을 둔 포도주와 올리브유 산업(비록 고고학적으로는 찾을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그릇류도, 그리고 아마도 곡물까지도)은 대량으로 제품을 수출했다. 특히 로마가 새로 획득한 유럽 영토로 제품을 보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팍스 로마나로 만들어진 거시경제적 조건에서 제국 나머지 지역의 농업 자원은 훨씬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개발돼 이러한 초기 이탈리아의 지배력을 잠식했다. 그 이유는 특히 운송 기술이 너무 제한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29-30)


서기 2세기부터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통일체로 남아 있었지만, 외곽 지역에 대한 수도의 통치는 점점 더 제한을 받았다. 제국 말기까지 제국 체계를 하나로 묶은 것은 지배적인 중심지가 아니라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즉, 이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정의된 로마 지배계급 안의 속주 지주들이 공유하는 것으로서, 깊이 있는 문화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공통의 경제적, 법률적 구조에 의해서였다. 전반적으로, 속주 엘리트들은 성공을 위해 제국의 그리스-로마 문화 규범을 전적으로(그리고 값비싸게) 받아들여야 했고, 그 결과 4세기에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의 속주 주민들이 정복자들의 라틴어, 도시, 토가, 그리고 삶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시기는 ‘뒤집힌 제국’ 시대로서, 제국은 국경에 훨씬 더 가까운 새로운 정치 및 경제 중심지에서 운영되었다. 테오도루스가 집정관직을 받았을 때 로마는 훌륭한 교육적, 문화적, 상징적 중심지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35-6)


3장 라인강의 동쪽, 다뉴브강의 북쪽


로마인들은 계속해서 모든 이웃을 야만족이라고 치부했지만, 큰 변화에 탄력이 붙는다. 북유럽 중부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간신히 자급자족하는 수준의 농업 형태는 4세기가 되자 곡물 작물에 훨씬 더 중점을 두는, 좀 더 생산적인 농업 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국경 바로 너머의 넓은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헥타르당 훨씬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다. 이 소규모 농업 혁명은 더 많은 인구, 더 크고 안정적인 정착지, 건전한 잉여 농산물을 가능케 했으며, 그중 일부는 국경에서 현금이나 로마 상품과 교환되었다. 서기 1세기 후반부터 철기 시대 유럽 중부 지역인 이곳에 규모가 크고 영구적인 마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너무 얽혀서, 4세기가 되면 여러 변경 지역에서 로마 동전이 일상적인 교환 수단으로 사용된다. 모든 고고학적 증거는 한결같이 국경을 넘어 비로마 사회로 흘러 들어가 그 안에서 동시에 창출되고 있던 새로운 부에 대한 놀라운 물질적 반영을 던져준다. 40-1)


로마의 속주에 해당하는 현대 지역은 정착민 식민지였다. 이 지역에서 정착민들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폭력, 협상, 질병을 통해), 결국 유럽의 수많은 문화적, 제도적 구조를 도입해 지리적으로 어느 곳에 있든 서부 제국의 확장된 핵심의 일부가 되었다. 북아메리카가 가장 명백한 예이며, 그곳에서 원래 지방 공동체였던 것이 너무나 극적으로 부상해 20세기 초에는 이미 광범위한 서구 제국 내에서 지배적인 경제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같은 대영 제국의 이른바 ‘백인 자치령White Dominions’도 이 범주에 속한다(원래 미국도 그중 하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현재 자치권을 가진 이들 국가의 1인당 GDP는 이미 모국인 대영 제국의 1인당 GDP를 넘어섰다. 20세기가 될 무렵, 이 확장된 제국의 핵심 너머에는 제국의 주변부가 놓여 있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이 주변부의 구성 요소는 제국과의 직접 무역의 상대적 가치에 따라 내부 및 외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45)


# 주변부가 제국 체제에 참여하는 양상은 각각 완전히 통합한 속주, 실질적으로 통합한 내부 주변부, 그리고 훨씬 덜 통합한 외부 주변부이다.


부분적으로 내부 주변부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서구 식민지들,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식민지 내의 특정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인도의 면화, 남아프리카의 금,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차와 커피, 극동의 고무, 카리브해의 설탕 등. 이 모든 것들은 서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요가 많았으며, 이러한 상품 중 상당수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통제를 받는 영토에서 생산되었다. 내부 주변부의 다른 부분들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이곳도 경제 활동의 상당 부분을 제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집중했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경제 통합이 총구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 풍요해질 여러 기회에 매력을 느낀 유럽 이민자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대부분 도시의 상업 및 행정 중심지, 특히 유럽인이 거주하도록 지정한 지역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속주 지위를 얻기 위한 궤도에 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유럽 이민자들은 전체 인구에서 작은 비율을 넘지 못했다. 46)


4장 돈의 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제국, 특히 미국이 반항적인 정부를 다룰 수단은 다양했다. 예를 들어 원조 중단, 무역 협상 방해, 국내의 적에 대한 지원, 지도자에 대한 여행 제재 부과, 은행 계좌 동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그때는 칠레에서처럼 비밀 조치로 좀 더 순응적인 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크나 과테말라의 야코보 아르벤츠처럼 1945년 이후 서구의 패권을 위협하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제국 주변부의 긴 통치자 목록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를 잘 알고 서구에 적대하는 것을 꺼리는 다른 많은 통치자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자이르(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세세 세코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렸고, 심지어 신뢰할 만한 동맹자 또는 대리인 역할을 함으로써 서구의 후원을 극적으로 구애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말기 로마 제국이 자신의 내부 주변부를 통제하는 방법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50)


357년에 크노도마리우스Chnodomarius라는 이름의 야심찬 패왕覇王이 이끄는 알레마니족 연맹의 무장 추종자들이 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 도시 근처에서 제국 서방 카이사르(부제)인 율리아누스의 로마 군대와 맞섰다. 크노도마리우스가 3만 5,000명, 율리아누스가 1만 3,000명을 동원하며 전투를 시작했지만, 알레마니족은 엄청난 패배를 겪는다. 기원전 1세기, 또는 서기 1세기라면 그러한 패배는 관련된 적敵 연맹의 완전한 파괴를 가져왔을 것이다. 기원전 58년, 전前 로마 동맹 수에비 왕 아리오비스투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후 연맹이 완전히 무너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4세기 중반이 되자 스트라스부르 전투와 같은 명백히 파국적인 패배조차도 전혀 알레마니 연맹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연맹은 정치적으로 빠르게 재편성되어 곧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다양한 족장과 부족회의는 훨씬 더 강력한 중앙 지도부를 가진, 소수의 더 크고 내구성이 뛰어난 정치 연맹에 자리를 내주었다. 51-2)


# 부제副帝. 로마 말기 ‘4두정’ 체제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정제正帝’를, 카이사르는 제위후계자인 ‘부제副帝’를 뜻했다.


제국과의 접촉은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추진하는 데 이바지했다. 서기 4세기 무렵, 로마의 유럽 국경선을 따라 고대 게르만어를 주 언어로 쓰는 무리의 모든 분파에서, 좀 더 합의된 정치적 지도력을 나타내는 오래된 어휘가 군사 지휘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새로운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한때 통치자들은 ‘사람들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가졌으나 이제는 모두 ‘전투연합warband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국과의 장기적인 상호작용으로 특정 집단에 더 많은 부와 첨단 군사 기술이 집중되었다. 외교적 보조금, 교역품에 부과하는 통행료, 군 복무 수당, 노예무역으로 인한 이익, 심지어 성공적인 국경 습격으로 얻은 전리품까지. 이 모든 새로운 부는 특히 내부 주변부에서 확고한 군사력이 있는 사람들의 손에 우선해서 들어갔지만, 외부 주변부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또한, 부를 이용해 더 많은 전사를 고용하고 우수한 장비를 사들여 군사적 잠재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52-3)


2부 종말에서 변화로_제국 체제 너머의 새로운 세계 질서


5장 무너지는 세계


지중해 유럽은 비옥하고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으로, 고대에는 값비싸고 복잡한 농업 장비 없이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북유럽은 전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을 제공하지만, 습기가 많고 단단한 토양과 광범위한 해양 자원을 완전히 활용하는 기술적 문제는 더 복잡하다. 샤를마뉴 시대에는 북부의 고전적인 무거운 쟁기인 카루카carruca(최대 여덟 마리의 동물이 끄는 4륜 마차에 장착한 거대한 철제 쟁기)를 이미 사용하는 중이었고, 북부의 생산성이 향상하고 있어서 유럽의 경제력과 인구통계학적 힘의 균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비록 이 모든 것이 로마 제국 덕분인 것은 아니지만,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중심지와 유럽 주변부 사이의 400년에 걸친 상호작용으로 시작한 장기적인 발전 과정의 정점을 대표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는 5세기까지는 성숙하지 못했지만, 지중해에 기반을 둔 로마의 제국 권력에 대항해 세력 균형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68-9)


서기 3세기에 걸쳐 로마에 맞선 동급 초강대국 경쟁자로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출현은 유럽 주변부의 새로운 연맹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역동적이고 지역적인 차원의 반응으로 보아야 한다.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은 나중 7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상실하는 촉매 역할을 하지만, 이미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는 한 요인이 된다.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로마 군대를 서기 3세기 내에 적어도 50퍼센트 이상 확대해야 했다(일부는 두 배로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마 국가는 제한된 세수 중 약 75퍼센트를 군대에 지출했기 때문에 군인 수의 이러한 막대한 증가는 엄청난 재정적 골칫거리를 불러왔으며 세금 징수 총액을 3분의 1 이상 늘려야 했다. 따라서 페르시아가 부상하면서 추가적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로마 체제 내에 남겨진 구조적 유연성(경제적 및 인구학적 자원 측면에서)의 정도가 감소했으며, 이러한 자원을 통일된 방식으로 동원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69-71)


정확하게 원인과 결과의 상호 연결을 재구성하려 할수록, 상대적으로 간단한 실이 로마 제국 붕괴의 서사를 관통한다. 제국과 경쟁하는 신흥 주변부의 능력이 향상하면서, 제국은 페르시아의 위협을 없애고 유럽 지역 국경을 보존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체제 외부에서 온 충격에 취약성이 커졌다. 만일 제국이 발전의 초기 단계였다면 이것을 쉽게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에서 적대적인 동급 경쟁자가 떠오르자 제국 관리를 나눠야 하는 문제가 생겼고, 여기에 더해 동쪽에서 갑자기 훈족이 나타나 결국 제국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 시점에서 제국 중심지는 충성심의 대상을 바꾼 일부 주요 정치적 지지자들의 이익을 더는 챙길 수 없었다. 현대 서구 제국의 커져가는 위기도 동일하게 움직이는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외부 주변부와 그 너머에서 기원한 외부에서 온 충격(대규모 이주 포함), 독단적인 내부 주변부, 동급 초강대국 경쟁, 커지는 내부 정치적 스트레스가 그것이다. 78)


6장 야만족의 침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5년 동안 서구 국가의 1인당 소득은 매년 평균 4~6퍼센트씩 증가했다. 이는 개인의 소득이 10년마다 두 배로 증가했다는 뜻이다. 경제적 불안이 줄어들면서 가족 크기도 그에 따라 줄어들었다. 국가가 개인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면, 노년기에 자신을 돌봐줄 많은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단기적인 도약을 가져온 전후 베이비붐 이후, 서구의 일반적인 출산율의 장기적인 하락이 다시 시작되었다. 서유럽의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대다수 유럽 국가는 세계 경제에 잉여 인구를 공급하는 주요 역할을 상실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자국의 노동 수요를 충족시키려 고군분투했다. 추가 공급의 확실한 원천은 옛 제국주의 주변부의 개발도상국이었다. 로마 땅에서 일어난 과정은 이주자들이 훨씬 더 큰 정치적 연합을 재조직하면서, 실질적으로 이주자 스스로 만든 것이다. 대조적으로, 현대 서구로 향한 이주는 대부분 노동력을 찾는 수혜국이 통제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 85-6)


더욱 근본적으로, 고대와 현대의 경우 이주와 부의 관계가 완전히 다르다. 로마 제국 말기의 조직적인 대규모 이주로 누군가는 큰 손해를 보았다. 이주한 고트족, 반달족, 앵글로색슨족 등은 모두 하나의 주요 자산(땅) 지분을 놓고 경쟁했으며, 지분은 현재 토지 소유주로부터 전부(영국에서처럼), 또는 부분적으로(대륙에서처럼) 빼앗아야만 획득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중앙의 통제에서 너무 많은 재정 기반을 제거해 로마 제국 자체가 붕괴하는 추가 효과를 일으켰다. 대조적으로 현대 경제는 이전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으므로 신규 시민의 부는 기존 시민의 부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물론 이것이 바로 1945년 이후 서구 정부가 실제로 이민을 장려한 이유다. 그들은 기존의 노동력 부족을 감안할 때 이민이 경제와 재정적 기반의 전반적인 규모를 뜻대로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일반적인 연구 결과는 여전히 이민이 전체 경제에 순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86-7)


따라서 1945년 이래 이민자들은 서구 경제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말조차 진화하는 서구의 삶에 이민자들이 미친 총체적 기여의 본질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또 다른 더욱 즉각적인 설명으로는, 이민자들은 이제 서양인의 삶 자체를 유지한다. 1945년 이후 서구에 넘친 전례 없는 번영은 평균 기대 수명을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는 동시에 노동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구의 비율이 감소한다는 경제적 단점도 있다. 영국에서는 나이젤 패라지가 영국 국민의료보험NHS, National Health Service의 비용 상승이 이민자가 유발한 초과 수요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영국 병원의 병동이 외국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그의 말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의료 전문가들이다! 외국에서 훈련받은 의사와 간호사에 의존한 덕분에 많은 공공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의료진 생산 비용의 상당 부분을 다른 나라로 전가해 서구 납세자들은 막대한 돈을 절약했다. 87-8)


7장 힘과 주변부


로마 역사가 제공하는 주요 교훈은 다른 신흥국이 강대국 유지에 도전하고 있는 시대에 초강대국 경쟁자와 벌이는 노골적인 대결은 자신의 출중함을 보존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와 페르시아는 국경, 무역 관계, 의존국 통제를 놓고 다투었다. 두 나라 모두 서로 다른 전능한 신의 지원을 유일하게 받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세계관이 나타났다. 그러나 3세기 말에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정복할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갈등은 일반적으로 짧은 기간 뽐낼 권리를 둘러싼 일련의 다툼으로 국한되었으며, 이는 양쪽 체제의 중요 작동을 공격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둘 다 4세기 후반과 5세기에 유목민 세력의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은 상호 의심에서 긍정적인 협력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500년경 유목민의 위협이 다시 물러나자 두 제국이 모두 과거의 구속을 버리고 훨씬 더 큰 승리를 추구했고, 결국 두 제국 모두 완전히 파산하는 교착상태로 끝났다. 101)


여기서 얻을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유익하다. 중국의 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분명히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현대 무기는 초강대국 간의 갈등이 주요 주인공뿐만 아니라 행성 전체를 파괴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훨씬 더 제한된 형태의 지속적인 대결은 당연히 공동의 접근이 필요한 다양하고 시급한 전 지구적 문제, 특히 오염, 인구, 질병 및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에 직면해 협력의 가능성을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서구 국가들이 세계 주변부에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고 싶다면, 개발도상국을 (필요하다면) 희생해 서구의 위대함을 보존하려는 암묵적인 결정에서 벗어나 그들의 전반적인 번영과 사회 및 정부 구조 두 가지 모두를 강화하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서구의 서술 기법을 바꿔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는 훨씬 더 동등한 조건으로 국제기구나 협상에서 더 넓은 범위의 목소리를 포함하도록 옛 제국 핵심의 작은 클럽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101-4)


좀 더 평등한 조건의 넓은 국제 블록에 많은 국가가 참여한다면, 현대 서구 문명의 훌륭한 산물 중 일부를 새로운 세계 질서에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도 생길 것이다. 비록 서구가 자기들의 발전 비용을 조달하려고 다른 국가의 부를 사용하긴 했지만, 법치,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효율적인 공공 기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언론, 적절하게 책임 있는 정치인 같은 개념은 모든 국가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크게 향상한다. 따라서 서구를 가장 맹렬하게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가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가 나머지 세계에 설교한 대로 항상 실천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종류의 확고한 가치에 빈틈없이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비서구적 관심사의 정당성을 수용하는 데 더 열린 태도를 보이는 것은 특정 서구 유권자 일부에나 잘 통할 서구의 세계 지배 영광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것보다는 떠오르는 주변부 시민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은 호응을 얻을 것이다. 104)


8장 국가의 죽음인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후 상대적 합의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표면에 떠오르게 했다. 신자유주의는 1945년 직후 수십 년간의 경제 역동성을 광범위하게 부활시키기보다는, 서구 사회 내 특정 집단만 점점 번영하는 불균형한 회복을 불러왔다. 지금까지 서구의 거의 모든 사람이 주변부에서 오는 부의 흐름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었던 반면, 세계화에 따라 탄생한 새로운 경제 질서는 주로 서구 사회 내의 특정 하위 집단으로 가는 부의 흐름을 증가시키고 다른 많은 사람의 생산 생계는 약화했다. 전반적인 효과는 최신 세계 경제 조직의 주요 승자와 패자가 이전처럼 다수의 패자가 정치적으로 안전한 거리인 해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같은 국경 내에 나란히 사는 상황이 생긴 것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외주화했던 착취와 궁핍이 이제 서구로 돌아왔다. 이들 저숙련 및 미숙련 노동자들은 과거 자신들이 직접 참여했던 부의 창출 과정이 해외로 옮겨지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110-1)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대부분 서구 세계의 평균 실질 임금은 거의 변동하지 않았지만(예를 들어 미국에서 현재 시간당 실질 임금은 대략 1970년대 중반 수준이다), 인플레이션 감소로 물가는 낮게 유지되었고 부분적으로 구매력 손실을 보상했다. 이때는 또한 중국이 서구 시장에 값싼 제품을 홍수처럼 보내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서구 정부는 덜 부유한 사람들의 신용 접근을 완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가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는 주요 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활용해 대출 담보 한도를 낮췄다. 이러한 조치는 주택 구매 붐을 촉진했고 이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2007~2008년에 마침내 거품이 터지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세계는 경제 불황을 목도했다. 서구 정부들이 앞다퉈 제방의 구멍을 메우려 했지만, 선택한 해결책은 다시 만연한 부채 수준을 증가시키고 크게 봐서 세계화로 발생한 새로운 사회 격차를 강화할 뿐이었다. 111-2)


서구 사회는 주로, 또는 실질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부를 소유함으로써 소득을 얻는 부유한 사람들과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 돼가고 있다. 물론 이는 20세기 전반全般에 걸쳐 서구 사회의 특징이었던 자기 발전과 사회적 이동을 위한 기회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화는 민족국가에 로마 서부를 결국 재정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만든 것과 같은 종류의 세입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 실제로 자본이 해외로 이전된다는 것은 주변부 정부가 전 세계 소득에서 점점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서구 정부는 세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지출을 억제함으로써 투자 경쟁을 해야 했다. 말기 로마 제국은 조세 기반이 침식되자 남은 세금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 대응했다. 그러나 현대 서구 지도자들은 다른 해결책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바로 현대 세계의 기적 같은 발명인 부채다. 그러나 이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114-5)


부채는 한때 내일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오늘 지출하는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지금 물건을 소유하고 내일 갚는 방법이 되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데 정부는 그 대가로 더 적은 것을 제공하므로, 시민들이 세금 준수에 대한 대가를 궁금해하는 시점이 올 수 있다. 그리고 ‘조세윤리’(세금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기꺼이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하는)와 세금 징수 기관(그 자체가 돈이 부족한 정부의 삭감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의 효율성 감소 두 가지가 세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조세망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며(5세기 로마의 지방 엘리트들처럼) 전체 체계가 무너지는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그와 같은 미래(정치적 분열의 증가, 불안정성 증가, 민주주의와 법과 인권 존중의 쇠퇴, 공공 서비스 약화, 생활 수준 저하 등)가 서구에 닥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121)


결론 제국의 죽음인가?


과거에는 국내의 정치적 안정이 위협받을 때 서구 사회의 정부는 주변부로 착취를 외주화해 압력을 완화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선택지가 사라졌다. 착취할 수 있는 것은 동료 시민뿐이다. 따라서 현재 해외로부터 많은 부의 흐름이 없는 상황에서, 서구 국가들이 내부 긴장을 줄이려면 부유한 시민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화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상위 10퍼센트가 새로운 유형으로 기능하는 사회․정치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내놓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회는 가장 취약한 소수의 이익을 위해 모든 사람이 희생해야 했고, 저임금 ‘필수’ 근로자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기여에 대한 커다란 인식을 불러왔다. 그 덕분에 서구의 사회적 결속을 재건하는 데 쓸 수 있는 일종의 정책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작동하려면 서구 사회는 거리에 나가서 손뼉 치는 것 이상의 일이 필요하다. 124)


사회 분열로 향하는 현재의 궤도를 줄이기 위해 재정 계약을 재조정하려면 국제 협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시작하기 좋은 곳은 현재 7조 달러 이상 신흥 재벌의 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조세 피난처의 조세 회피 단속이거나, ‘조세 차익 거래’를 줄일 목적의 국제 조세 조약일 수 있다.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국제 조약과 그린 뉴딜Green New Deal 역시 탄소 배출 악화 경쟁을 방지하고, 젊은 세대에게 좀 더 살기 좋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이를 글로벌 탄소세 제도와 결합하여, 그러한 탄소세 수령액을 일반 대중에게 분배하는 배당 제도와 연계할 경우 더욱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서구 국가들은 연금 제도를 개혁해(예를 들어 지급 수준을 낮추는 방법 대신 은퇴 나이를 연기하는 등으로) 연금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금 제도가 창설되었을 때는 누구도 사람들이 일했던 기간만큼 은퇴 후에도 오래 사는 시대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25)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관점에서 다시는 위대해질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기에는 세계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가 너무 심오한 방식으로 변화했으므로 일부 지도자들은 다시 위대해질 수 있는 척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또한, 현대 서구 제국이 애초에 만들어진 바탕이 된 강압과 착취의 정도에 조금이라도 정직하다면 누구든 그것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주변부의 시민은 자신들의 물질적 진보가 더는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고 환영과 격려를 받는다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면 좀 더 많은 과거 식민지의 수치스러웠던 구성국들이 서구 사회가 결국 내부 갈등을 통해 어떤 경쟁 체제보다 더 많은 시민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합의된 사회정치적 조직 모델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는 생각을 명확히 할 것이다. 이 모델이 제공하는 분야는 경제적 번영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법률적 권리의 측면까지 아우러야 할 것이다.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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