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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들어가며
1장 패배에 대한 두려움
"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할 때, 정당은 패배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 정당이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생계가 어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며, 권력을 넘겨주는 정당과 그 지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선거는 종종 많은 것이 걸린 전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이 걸린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두려워할 때, 정당은 어떻게든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패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정당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게 만든다.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7-9)
2장 독재의 평범성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충직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라고 부른 사람들은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패배를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고, 정적을 물리치거나 유권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민주주의 암살자에게는 언제나 공범이 있다. 그 공범은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하는 정치 내부자들이다. 린츠는 이들을 가리켜 〈표면적으로 충직한semi-loyal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62-3)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정장과 넥타이 차림의 주류 정치인이며,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살해당했을 때에도, 살해 도구에서 그들의 지문이 발견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즉,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독재 세력과 협력할 때, 노골적인 독재 세력은 훨씬 더 위험해진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63-4)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정치인들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거부할 때,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고, 힘을 잃고, 포기한다." "그러나 주류 정당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지지할 때, 이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따른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 민주주의 붕괴를 주도하는 많은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 찬 경력지상주의자다.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이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그게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5-6)
3장 이 땅에서 벌어진 일
"백인 반동주의자들은 (재건 시대에) 등장한 다인종 민주주의에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테러 행위로 응수했다. 흑인 시민이 남부 지역 대부분의 주에서 다수, 혹은 다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잔혹한 무력〉이 필요했다." "사실 1870년대에 민주당이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활용했던 테러와 부정행위 전술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남부 전역에 걸쳐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1888~1908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주 헌법과 선거법을 뜯어고쳤다." "1890년, 미시시피주 헌법제정의회는 인두세와 비밀 투표, 그리고 읽고 쓰기 능력 시험을 받아들였다. 남부의 많은 주가 이후 10년 동안 이러한 〈독창적인 고안품〉을 받아들였다." "남부 지역 민주당은 대규모 투표권 박탈을 통해 다인종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길을 잃게 만들었다."(117, 123, 125, 127)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와 관련해서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방 사법부였다. 그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길레스 대 해리스(1903)' 소송이었다." "'길레스 대 해리스' 소송은 과거에 노예였던, 그리고 앨라배마 유색시민투표권연합의 대표가 된 경비원인 길레스가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카운티 기록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투표권 소송이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작성한 대법관은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판사였다. 홈스는 그 소송이 앨라배마주의 유권자 등록 제도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만약 법원이 길레스의 손을 들어주고 다른 유권자들을 등록 명부에 추가한다면 앨라배마주의 부정행위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잉글랜드 귀족가문의 후손인 홈스는 법원이 그들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결국 대법원은 투표권 박탈이 이뤄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결정했다."(127-9)
"연방이 투표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부 지역의 민주주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흑인 투표율은 1880년 61퍼센트에서 1912년 상상조차 힘든 2퍼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민 다수를 차지한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흑인 시민의 1퍼센트, 혹은 2퍼센트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1876년에 유명한 조지아주 정치인 로버트 툼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번 총회가 열린다면 '국민'이 통치하고 흑인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바로잡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소망(남부 지역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소망)은 한 세기 만에 현실이 되었다. 이후 남부 지역에서는 한 세기에 걸쳐 독재 시대가 이어졌다. 흑인 선거권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경쟁이 무너졌고, 남부 전역은 일당 지배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테네시주를 제외한 이전 남부연합의 모든 주에서 70년 넘게 권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다섯 개 주에서는 '한 세기 넘게' 이어졌다."(133-4)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
"21세기 초 공화당 정치인들은 선거 패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 지지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나라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미국 역사에 걸쳐 백인 기독교인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인종적 수직체계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백인 미국인은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는 곧 〈백인 시민에게는, 볼 수 있지만 그 아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유리 바닥〉이었다. W. E. B. 듀보이스는 이러한 특권을 백인으로 살아가는 〈심리적 임금psychological wag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더 이상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고, 한때 굳건했던 인종적 수직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 내에서 보장된 지위와 더불어 성장한 사람은 그러한 지위를 빼앗겼을 때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많은 백인 미국인은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느꼈다."(165-6)
"이러한 느낌은 오바마의 당선으로 한층 더 증폭되었다. 정치학자 마이클 테슬러는 연구를 통해 (정치적으로 온건한)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미국인의 정치적 태도를 뚜렷하게 급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모든 미국인은 그들의 나라가 다인종 민주주의의 평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악관에서 일하는 모습이 매일 TV 화면에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더 이상 인구 통계적으로나 정치적 차원에서 새로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백인 미국인은 그들이 자라난 나라가 그들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은 주로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학자 필립 고르스키는 이를 〈(백인) 기독교인이 미국을 건국했지만 이제 박해받는 (민족적) 소수가 되어가는 위기에 봉착했다〉라는 믿음으로 설명했다. 〈백인 기독교인〉은 이제 종교 집단이라기보다 민족 집단, 혹은 정치 집단에 더 가깝게 되었다."(167)
"트럼프의 성공은 백인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가 공화당 내에서 승리의 공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의 스타일과 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 반면 트럼프 열차에 탑승하기를 거부한 공화당 정치인은 은퇴하거나, 아니면 예비선거에서 패했다. 2020년에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던 어떤 계파도 공화당 내에 머물러 있지 못했고, 트럼프의 극단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많은 트럼프 지지자는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을 믿었다. 이 이론은 미국의 엘리트 집단이 〈토착〉 백인 집단을 쫓아내기 위해 이민자를 동원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2021년 미국 기업연구소가 후원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 중 56퍼센트가 〈전통적인 미국적 삶의 방식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172-5)
5장 족쇄를 찬 다수
"민주주의자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야당의 권리가 다수결주의 범위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에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사실 다수에게 상당한 정도의 발언권을 부여하지 않는 정치 시스템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반다수결주의에는 이러한 위험이 따른다. 다시 말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설계된 규칙은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심지어 다수를 '지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은 〈다수의 독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소수의 독재라고 하는 위험한 현상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영역을 다수결주의의 범위 너머에 놓아두는 작업이 중요한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영역은 '다수결주의의 범위 안에' 그대로 남아 있도록 만드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보다 상위의 개념이지만, 다수의 지배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209-10)
"특히 두 영역만큼은 다수결주의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거, 그리고 의회의 의사 결정을 말한다. 첫째, 누가 공직을 차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자가 더 적은 표를 얻은 자를 이겨야 한다. 어떤 자유민주주의 이론도 이와 다른 결과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후보자나 정당이 다수의 의지를 거슬러 권력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둘째, 선거에서 이긴 자가 통치해야 한다. 의회 다수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지 않는 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의회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일반적이고 합법적인 입법 과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도록 허용하는 압도적 다수 규칙은 옹호하기 힘들다. (무제한) 상원 필리버스터와 같은 압도적 다수 규칙은 정치적 소수에게 강력한 무기인 거부권을 선사한다. 그러한 거부권이 시민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에 대한 보호의 차원을 넘어설 때, 의회 소수는 그들의 의지를 다수에게 강요할 수 있다."(210)
"또한 반다수결주의에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다. 헌법은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세대는 필연적으로 미래 세대의 손을 묶게 된다. 법률 이론가들은 이를 일컬어 '죽은 손의 문제problem of the dead hand'라 부른다." "수정의 장벽이 너무 높을 때, 오늘날 다수는 사회적 요구와 지배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법률의 〈강철 우리〉 속에 갇혀버릴 위험이 크다." "사법부는 이러한 문제에 취약하다. 특히 판사의 신분을 임기제한이나 정년과 같은 조건 없이 강력하게 보장할 때, 더욱 그렇다. 사법심사Judicial review(법원이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의 적법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제도)는 판사들에게, 그리고 일부는 수십 년 전에 임명된 판사들에게 오늘날 다수가 만든 법률과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핵심적인 반다수결주의 제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지나치게 만연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213-6)
6장 소수의 독재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선거인단 제도다. 이 제도는 보통선거를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시킨다. 첫째, 거의 모든 주(메인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는 승자 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 표를 할당한다. 이러한 방식은 전국적인 보통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선거인단 제도의 두 번째 왜곡인 작은 주 편향은 명백하게도 공화당에게 어드밴티지를 선사했다.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수는 의회 대표의 수, 즉 하원 의원에다가 상원 의원을 합한 수와 동일하다. 그런데 상원에서는 인구 밀도가 낮은 주들이 과잉대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은 총 538표 중 20표 정도가 시골 지역에 편향되어 있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다."(253-6)
"소수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그리고 당파적 편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두 번째 기둥은 상원 제도다. 미국 전체 인구에서 20퍼센트 미만을 차지하는 인구수가 낮은 주들만으로도 상원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11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들만으로도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가로막을 수 있는 충분한 상원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세 번째 기둥은 대법원이다. 선거인단과 상원의 특성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에서 패한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고, 미국 전체 인구의 소수를 대표하는 상원 다수가 이를 승인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네 번째 기둥은 헌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그리고 인위적인 다수를 '만들어내고' 때로 더 적은 표를 얻은 정당이 의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하는 선거 제도다." "많은 주 의회가 권력을 쥔 정당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거구를 재구획함으로써 유권자를 의도적으로 분할했다."(256-9, 262)
"1980년에 태어나서 1998년, 혹은 2000년에 처음으로 투표한 미국인을 떠올려보자. 그가 성인이 된 이후로 민주당은 상원 선출을 위한 6년 단위의 보통선거에서, 그리고 한 번을 제외한 모든 대선의 보통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 대통령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 그리고 공화당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 체제에서 성인기의 삶 대부분을 살아가고 있다. 소수의 지배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패자가 승리하도록 허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또한 국민의 삶과 밀접한 공공 정책에 교묘하게 영향을 미친다. 여론은 절대 완벽하게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당파적 소수가 과잉대표권을 행사하도록 제도가 허용할 때, 여론은 외면과 억압을 받는다. 〈다수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원 의원이나 판사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여론과 동떨어진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266-7)
"정치 세계는 두 세기가 넘도록 경쟁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다. 정치 이론가와 실무자 모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했던 반민주적인 이념을 물리치기 위한 원칙을 종종 언급한다. 밀은 널리 알려진 표현을 통해 진실이 거짓에 승리를 거두려면 〈대립하는 의견 사이의 충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집》 10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할 때, 다수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사악한 입장을 물리친다는 공화국 원칙이 우리를 구제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선거 제도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게 과잉대표를 허용할 때, 그래서 정당들이 '유권자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유권자의 생각에 반응해야 할 압박이 줄어든다. 그럴 때 정당들은 급진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일이 21세기 초 공화당에서 일어났다. 공화당은 경쟁해야 할 동기를 무디게 만드는 〈헌법적 보호 장치〉의 수혜자가 되었다."(280-1)
"대법원은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의회에서 소수의 독재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형태 중 하나로 드러난, 위스콘신주의 악명 높은 선거구 지도는 2016년 연방 법원에 의해 허물어졌다. 하지만 2018년 닐 고서치가 대법관으로 있는 연방대법원이 그 판결을 뒤집으면서(실제로 절차적 문제를 이유로 판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선거구 지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년 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브렛 캐버노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상황에서 연방대법원은 5 대 4의 다수 의견으로 주의 당파적 게리맨더링 사건을 심판할 권한이 대법원에는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 존 로버츠는 다수 의견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파적 게리맨더링 주장은 연방대법원의 권한을 넘어선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반다수결주의 상원에 의해 구성된 반다수결주의 대법원이 주 차원에서 소수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282-3)
7장 표준 이하의 민주주의, 미국
"미국은 예외적인 국가다. 이제 다른 어떤 민주주의 국가보다 소수의 지배에 더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미국을 앞질러나갈 수 있었을까?"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가장 수정이 힘든 헌법이다. 도널드 러츠가 헌법 수정 절차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해 31개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봤을 때, 미국은 난이도 지수에서 최고점을 차지하면서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한 국가(호주와 스위스)를 큰 폭으로 따돌렸다.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2/3의 승인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3/4에 달하는 주들의 비준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준의 헌법 수정률을 보인다. 미국 상원의 발표에 따르면, 헌법을 수정하기 위한 시도가 11,848번 있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사례가 27번에 불과하다. 재건 시대 이후로 미국 헌법이 수정된 것은 20번에 불과하며, 가장 최근 사례는 30년도 더 된 1992년이었다."(314-5)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하는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다. 선거인단 제도를 규정하는 헌법 조항은 가장 빈번한 개혁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지난 225년에 걸쳐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시도는 700회를 넘었다. 20세기 중 이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세 번의 〈아슬아슬한〉 대선(1960년과 1968년, 1976년)이 있었고, 여기서 보통선거의 승자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1969년 9월에 하원은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338 대 70으로 통과시켰다. 이는 헌법 수정에 필요한 2/3 찬성 요건을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 그 법안이 상원으로 넘어갈 무렵, 갤럽 설문조사 결과는 미국인 81퍼센트가 개혁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과거의 많은 시도에서 그랬듯이 개혁안은 상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개혁안은 표결에 이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315, 318-9)
"또 한 번의 진지했던, 그러나 다시 실패로 끝난 헌법 개혁 시도는 1970년대에 있었다. 그것은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ERA으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상황은 비준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닉슨과 포드, 카터 대통령 모두 ERA를 지지했고,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1972년과 1976년에 찬성의 뜻을 밝혔다. 여론 또한 분명하게 비준의 편을 들었다. 1974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74퍼센트가 ERA를 지지했고, 1970년대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들에서는 전반적으로 2 대 1로 비준에 대한 찬성의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흐름은 이어지지 못했다. 1973년 이후로 5개 주가 추가로 ERA를 비준함으로써 1977년 기준으로 총 35개 주가 비준을 마쳤다. 미국 전체 비준까지 3개 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원이 비준 마감 시한을 1982년으로 연장했음에도 추가 비준은 나오지 않았다. 비준을 하지 않은 주들 15개 중 10개 주는 남부에 있었다. 과연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320-1)
8장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다
"1930년대의 유럽에서 비롯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한 가지 전략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적인 연합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물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봉쇄는 단기 전략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한가운데에는 경쟁이 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장기적인 연합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잡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유권자는 이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경험에 따르면, 〈대연정〉이 오랫동안 이어질 때 유권자들은 그들을 배타적이고 불법적인 공모 연합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주류 정당 간의 연합이 지나치게 길어질 때, 〈기득권 세력〉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포퓰리스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봉쇄 전략을 통해 반민주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력을 반드시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327-9)
"다음으로 전제주의자를 대적하는 두 번째 전략 역시 1930년대 유럽이 트라우마를 겪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정부의 권한과 법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반민주 세력을 '축출하고',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독이 처음 사용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경험을 한 독일의 전후 헌법 설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가 내부의 전제적 위협에 직면해서 무력하게 서 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동가, 혹은 〈반헌법적인〉 연설과 집단 및 정당을 '금지하고 제한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봉쇄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배제 전략에도 뜻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쉽게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고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에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전제주의의 급박한 위협에 직면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330-2)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던져준 기본 원칙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 원칙이란 극단주의 소수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거를 통한 경쟁이라는 것이다. 매디슨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악의적인〉 정치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가 선거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위해 미국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20세기 초 미국의 개혁가 제인 애덤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332-3, 341)
"우리의 여러 개혁안이 가까운 미래에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 주류 집단이 아이디어를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판단할 때, 정치인들이 아이디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을 때, 신문사 편집자가 아이디어를 외면할 때,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아이디어를 설명하지 않을 때, 학자들이 순진하다거나 현실 감각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야심 찬 아이디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때,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다. 어떤 개혁도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 제도 변화의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가 말한 〈때를 맞이한 아이디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라는 표현을 종종 거론하곤 한다. 그러한 때도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놓아야만 찾아온다."(342-5)
"그러나 의제의 공론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지속적인 사회적 운동, 즉 활동을 통해 논의의 흐름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힘의 균형점을 옮기는 광범위한 시민 연합을 통해 이뤄진다. 국민 청원과 방문 캠페인, 집회, 행진, 파업, 피켓 시위, 연좌 농성, 보이콧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는 사회 운동이 여론과 언론 보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실제로 미국에서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향한 많은 중요한 진보는 당시에는 개혁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린든 존슨 시절에 이뤄졌다. 이들 중 누구도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결국에 스스로 뒤집었던 기존 체제가 만들어낸 인물이었다."(3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