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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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망치는 전쟁 


"1780년 찰스턴 함락 이후, 영국군 지휘관들은 남부로 전장을 옮기는 것을 상당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 이후에 더 큰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우선 그들은 국왕파의 지지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실수를 범했다. 설사 영국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군 장군들은 1776년 무어스 크리크 브리지와 찰스턴에서 패배한 뒤 남부 식민지를 등한시함으로써 스스로 기회를 차버렸다. 아치볼드 캠벨이 1779년 1월 서배너를 점령할 때까지 국왕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영국군이 다시 남부로 발길을 돌리기 전 몇 년 동안, 애국파 민병대들은 스스로 캐롤라이나와 조지아의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영국 왕에게 충성하는 분위기를 억제하는 임무를 질서유지 능력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애국파 민병대는 국왕파의 조직적 봉기 시도를 진압했다. 영국 정규군이 도착한 이후로도 국왕파의 의지를 꺾어놓기 위한 애국파의 임무는 계속됐다."(76-7)


"콘월리스는 국왕파의 지지가 없다는 점에 실망했다고 고백했다. 캐롤라이나인은 콘월리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콘월리스나 그의 후임들에게 아메리카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캐롤라이나인은 오히려 영국군의 정보병들을 습격했고, 보급품 수송 행렬을 공격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려는 왕당파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뉴잉글랜드와 중부 식민지처럼, 남부 역시 대륙회의의 것이었다. 남부 민병대는 대다수의 북부 비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대치전에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국왕파 민병대와 싸울 때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유능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그들은 그런 비정규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첫째,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믿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남부에 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모건이 지휘한 대륙군의 '도망치는 전쟁'은 남부 저지대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수단이 되었다."(77-8)


2장 전쟁의 이면 


"18세기 전장은 20세기 전장과 비교하면 병사들 사이에 친밀감이 매우 높았다. 당시 기준으로도 소규모였던 독립 전쟁의 교전에서는 특히 더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머스킷 총으로 적을 죽일 수 있는 사거리는 약 70미터에서 90미터 사이였고, 총검에 의존하는 데다 대포도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으니 근접적이 필수적인 환경이었다. 병사들이 적을 죽이려면 아주 가깝게 접근해야 했다. 이러한 조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18세기 보병 전술에서 가장 바람직한 목표였던 총검 돌격은 병사들의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총검 돌격을 하기 전, 대열에서 공격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때 병사들 사이에서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이 행동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적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조건에서 싸웠다. 동시에 옆에 있는 전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소통했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87-9)


"역설적이게도, 참전한 모든 아메리카인 중에서 민병대원들이 독립의 이상과 목적을 가장 잘 실천했다. 독립이 가져다줄 것으로 보였던 가치를 직접 실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립했고, 적어도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평등을 믿었고, 지휘관인 장교를 스스로 선택하기를 주장하는 등 평등을 실천하기도 했다. 민병대원들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짧게 복무했고, 마음 내킬 때 야영지를 떠났으며, 다른 이에게 지시받는 것을 꺼렸다. 특히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는 상관의 명령을 매우 경멸했다." "예를 들어, 민병대는 전황이 좋았던 카우펜스 전투에서는 아주 잘 싸웠지만, 전황이 나빴던 캠던 전투에서는 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캠던에서 그들은 그린이 말한 것처럼 '통제 불능'이었다. 민병대에게는 전투에서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통제하는 규칙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규 대륙군은 민병대 대다수를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95)


"아메리카의 정규군인 대륙군은 영국군만큼 정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몬머스 법원 전투 이후로는 거의 영국군 못지않게 인상적으로 포화를 견뎌내곤 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인내했다. 패배하고 퇴각하더라도, 다시 함께 뭉쳐서 공격을 시도했다. 이런 자질, 즉 인내와 끈기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다." "대륙군의 심리적, 도덕적 위상은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 직업군인의 중간쯤에 해당됐다. 그들은 1777년부터 3년 혹은 전쟁 기간 내내 복무했고, 긴 복무 기간을 보내며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노련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전장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전투에서 경험을 쌓는다고 위험에 무신경해지지는 않는다. 장기적이고 극단적인 피로로 이미 죽은 몸같아지지 않는 한 말이다. 단, 노련한 부대는 경험 없는 부대보다 더 효율적으로 두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범하게 두려움을 마주했던 것이다."(97-9)


3장 전쟁의 외부 


"영국군 점령 기간 동안 가장 고통받은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의 재산을 더 많이 가진 이들처럼 자주 약탈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식품과 연료를 구하지 못할 일은 없었으나, 영국군이 주둔하는 동안 해당 물품의 가격은 빠르게 치솟았다. 영국군 점령 기간 동안 모든 사회계층의 민간인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영국 왕의 뜻에 충성하는 이들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약탈하는 병사들이 애국파와 국왕파를 가려가며 약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9개월 동안 각종 사업은 번창했다. 국왕파 상인들은 크게 돈을 벌었고, 밀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는 영국 육해군 장교들도 있었다." "돈을 가진 상인이나 영국군 장교들은 전쟁 기간 중에도 다양한 문화활동을 즐겼다. 매주 무도회가 열렸고, 때때로 연극, 연주회, 파티가 한꺼번에 개최되는 '사교 시즌'도 있었다."(173-6)


"비록 사회 구조는 여느 때처럼 남아 있었지만, 사회는 어떤 중요한 면에서 독립 혁명과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례로, 투표권이 부여되는 법적 기준이 예전과 똑같든 또는 더 높아지든, 정치권력은 이제 대중의 요구 사항을 더 많이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각 주의 법률이 '민주주의'를 확립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권력의 이동을 의미했고, 실제로 권력이 이동했다. 사회가 정확히 '민주주의적' 또는 완전히 '아메리카적'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서 훨씬 평등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미국'이라는 신생국이 이전의 나라들과는 다른 성격의 국가라는 인식도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인'들의 이름으로 완수됐다. 독립 선언은 다른 나라에서 그들 자신을 분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카인이 자신의 대의를 '영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큰 사건들은 그들에게 나라와 독립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심어주었다."(183-4)


"내셔널리즘에 관한 감정을 자각한 혁명 세대의 아메리카인들은 그 이전과 이후 세대와는 구분됐다. 1775년 이전부터 아메리카의 권리를 수호한 사람들, 독립 혁명과 전쟁에 앞장선 사람들, 전투에서 싸웠던 사람들, 재산을 기부하고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한 사람들, 이들 모두는 자신의 뚜렷한 행동으로 다른 세대와 구분됐다. 그들은 1776년부터 지속된 위대한 대의를 함께 추구했다.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지향하는 영광스러운 대의를 말이다. 이런 지향의 정확한 본질은 즉시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1783년 평화조약 이후 5년 동안에 그 의미를 규정하는 일에는 큰 진척이 있었다." "전쟁이라는 긴 투쟁에서 독립 전쟁이 대의를 '영광스럽게' 만든 것은 그것의 내용이 위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대한 대의는 많은 사람이 그것이 위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위대할 수 있었다. 많은 아메리카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탓에 위대한 대의는 '공동의 대의'라는 대중적인 문구로 받아들여졌다."(185-6)


4장 요크타운과 파리 


"1781년 7월 말이 되자, 콘월리스는 전 병력을 유지하여 요크타운을 강화하기로 했다. 8월 2일, 그는 휘하 병력을 요크타운에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클린턴과 콘월리스가 혼란과 망설임에 빠져 허우적거릴 동안, 워싱턴은 당면한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8월 19일, 워싱턴은 체서피크만으로 대륙군을 움직였고 프랑스군도 곧 그 뒤를 따랐다. 클린턴에게 이런 움직임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워싱턴은 그의 눈에 모래를 뿌려 현혹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뉴저지를 노리는 것처럼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은 요크타운에 2개의 방어선을 구축했고, 9월 28일 아메리카와 프랑스 연합군 1만 6천 명이 요크타운을 포위했다. 콘월리스는 최후의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10월 17일 워싱턴에게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틀에 걸쳐 항복 조건이 논의됐다. 10월 19일 정오가 되기 얼마 전, 워싱턴은 항복 조건에 동의했고 문서에 서명했다."(218-20, 226, 233)


"요크타운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영국은 뉴욕시,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일부, 캐나다, 핼리팩스, 서인도제도에 여전히 군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강화講和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영국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항복 없이는 강화 이야기를 꺼내지도 말라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지만, 영국 의회는 이미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강화조약은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외교관인 베르젠은 사실 1781년 초 영국과 미합중국이 아메리카에 각자의 영토를 갖는 것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강화에 동의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영국은 뉴욕시와 남북 캐롤라이나 및 조지아의 대부분을 통치할 수 있었다." "영국 역시 아메리카와 합의해 유럽 숙적들과의 전쟁을 끝내고자 했으나 과거의 식민지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영국 내각을 이끄는 셸번 백작은 강화 협상에서 프랑스와 아메리카를 분열시키려 했다. 유럽과 관련된 논의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233-7)


"미합중국의 지위를 영국이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즈월드는 상급자로부터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하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고, 아메리카는 평화조약을 논하려면 영국이 미합중국의 독립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프랭클린은 더 나아가 미합중국에 캐나다까지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늦여름이 되자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협상의 관계자들은 천천히 합의로 나아갔다." "이후 3개월 동안 외교적 지뢰밭에서 양측의 협상이 진행됐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았고, 11월 30일에 아메리카와 영국의 위원들은 평화조약 예비 조항들에 서명했다." "모든 관계자들이 1783년 9월 3일 최종 평화조약 항목들에 동의하고 서명했다. 헨리 클린턴의 후임인 칼턴 장군은 아메리카에서 철군하는 우울한 일을 맡게 되었다. 1783년 말, 여전히 아메리카의 북서부 주둔지들에 남아 있던 영국군 파견대들을 제외하고는 영국군은 더 이상 미합중국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238-9, 242)


5장 헌법의 제정을 향해 


"1783년 3월, 뉴욕주 뉴버그에서 대륙회의의 몇몇 인사에게 사주를 받은 소수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 장교들은 전쟁 보상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봉급이 몇 달째 지급되지 않은 데다 대륙회의에서 연금 지급까지 반대하기 시작하자 장교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워싱턴은 일부 장교들이 군대를 동원해 지역 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다소 늦게 알아차렸지만,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장교들을 직접 만나 타이르기 시작했다. 뉴버그에서 장교들과 대면해 문민정부를 상대로 어떤 군사적인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총사령관이 사심 없는 마음으로 호소하자 뉴버그 군인들은 분노를 가라앉혔다. 쿠데타의 위협이 잦아들면서 민간 정부의 존립을 흔드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워싱턴과 대륙회의의 인사들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불안감이 그해 12월 워싱턴이 직접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아나폴리스로 향하게 된 계기였다."(260-2)


"사실 독립 전쟁이 종결되기 전부터, 대륙회의는 점차 권위와 민중의 신뢰를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륙회의는 군대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쟁에 말려든 모든 정부들이 빠지는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자금을 모을 방법이었다. 정부는 독립 혁명 전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내고 그 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했다. 계획 없이 일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무절제한 화폐 발행이 가져올 결과, 즉 화폐 가치의 급락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대륙회의가 공공 재정을 다시 통제하려면 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야 했다. 1786년까지 9개 주가 대륙회의의 조치를 승인했지만, 나머지 여러 주는 사실상의 거부 의사를 표했다." "결국 대륙회의는 1787년에 예전의 요구 사항을 모두 철회하면서 각 주가 원하는 방식대로 부채를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권을 갖게 된 주들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 1788년에는 최소 7개 주가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다."(280, 284-6)


"1781년 대륙회의의 재무감에 임명된 로버트 모리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들이 생각한 혁명의 목표, 즉 사유재산의 보호와 재력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중앙권력체의 재정권이 증진돼야 한다고 믿었다. 공공 재정을 안정시킴으로써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주권이 13개로 갈라진 국가는 무질서하고 효과적이지 못했다. 군대가 독립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와중에 주 정부가 자기 멋대로 사소한 이익을 위해 골몰하는 상황은 모리스를 불쾌하게 했다." "그는 전쟁 부채를 갚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여겼고, 따라서 부채를 갚기 위한 과세는 대륙회의의 권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는 올바른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는 대부분 성공했지만, 정치적 싸움에서는 자주 패배했다." "대륙회의의 관점에서 보면 공화정의 미래는 실제보다 훨씬 절망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1785년의 대륙회의는 아주 무기력했으며,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288-90)


"아메리카의 활력은 지난 20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지방, 즉 주들에서 나타났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의 교섭 위원들은 1785년 3월에 마운트버넌에서 만나 포토맥강의 탐사를 두고서 오랫동안 지속된 의견 차이를 정리했다. 이 회합에서 도출한 합의는 일련의 타협을 거쳐 나온 현명한 사익 추구의 모델이 되었다. 버지니아는 포토맥강에서 특권을 얻은 대가로 메릴랜드가 체서피크만에서 특권을 갖는 것을 받아들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 회합의 성공을 보고서 각 주가 더 큰 규모로 모이는 주 정부 회의에서도 상호 이익이 명백한 협동 정신을 발휘할 수 있으며, 대륙회의에 통상 규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매디슨은 바로 지금이 통상 규제권과 대륙회의의 과세권을 함께 묶어서 논의해야 지시를 내리라고 제안했다." "마침내 버지니아 하원은 1786년 1월에 주 정부 회의에서 〈통상의 규제에서 단일 체계가 그들의 공익과 영구적인 조화에 어느 정도 필요할지 고려하자고〉 촉구하는 데에 동의했다."(291)


"한편, 이 소식과는 아주 다른 부류의 소식이 거의 동시에 모든 주에 전해졌다. 바로 매사추세츠 중부와 서부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주도자인 대니얼 셰이즈의 이름을 따 셰이즈의 반란이라고 불린 이 봉기는 농부들이 일으켰다. 반란자 대다수는 매사추세츠주의 가혹한 재정정책에 심한 고통을 느껴 봉기에 나선 참전 용사들이었다." "농부들은 지불 능력을 넘어서는 부채와 세금 때문에 재산을 압수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장 봉기에 나섰다. 매사추세츠주는 몇 달에 걸쳐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반란으로 인해 여론이 바뀌고 있었다. 여론은 정체의 개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정체 개혁이 어느 정도로 또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불확실했다. 1787년 2월 21일에 대륙회의는 헌법제정회의의 소집에 찬성하는 결의안을 승인함으로써,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적 흐름에 올라탔다. 헌법제정회의는 1787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292-4)


6장 1780년대 두 번 태어난 사람의 자녀들 


"독립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1770년대, 위기가 닥쳤던 바로 그 순간에 버지니아 농장주들은 자신이 얼마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주 헌법의 틀을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헌법의 초안은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작성된 주 헌법이었고, 다른 지역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5차 버지니아 제헌회의는 1776년 주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6월 12일 버지니아 대표들은 '권리장전'을 공표했고, 6월 29일 주의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다." "'권리장전'은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 인민은 1776년이 주 헌법을 비준하거나 거절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인민이 주 헌법을 거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헌법이 정부 구조를 제외하면 그리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제헌회의가 그런 정부를 고안했는지는 이해할 만한다. 제헌회의가 제시한 새로운 정부 형태는 독립 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행정부 권력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305-7)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같은 사려 깊은 버지니아인은 버지니아가 독립 선언서에 선포된 자유의 한계를 넓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주려고 했다." "여러 측면에서 제퍼슨의 개혁 노력은 실패했다. 1776년 제정된 버지니아주 헌법은 피통치자의 동의를 그다지 효율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 노예제는 거의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았다. 범죄자를 야만스럽게 처벌하는 관행은 계속됐다. 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못했다. 반면 제퍼슨과 그의 친구들이 성공한 분야도 있었다. 권리장전, 한사 상속(특정 혈통만 재산 상속이 가능하다)과 장자 상속제의 폐지, 종교 자유의 확립 법안 등은 놀라운 성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행한 개혁이 독립의 위대한 원칙과 관련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의 공식 교회였던 국교회를 그 위치에서 끌어내리면서,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자유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320-1)


"일부가 '외부인'이라고 불렀던 새로운 사람들이, 독립 이전에 영국에 저항하기 위한 준비를 돕는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인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펜실베이니아에서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1776년 그들이 비공식적인 주 정부를 장악하고, 선출된 의회를 교체하면서 더욱 큰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운동의 내부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고, 다른 애국파들이 영국과의 단절을 선언하기 전 이미 독립을 옹호했다. 토머스 페인은 많은 급진주의자의 멘토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와 가장 깊게 연관된 이들은 농부들, 특히 서부의 농부들과 숙련공, 소규모 자산가들, 공공정책에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려는 야심가들이었다." "1776년의 펜실베이니아주 헌법은 혼합 정부에 관한 어떤 요구도 거절했다. 급진주의자들은 민중의 관심사는 하나의 정부이며, 또 다른 전제 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는 공화정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22-4)


"다른 주들에서 발생한 상원의 문제, 즉 상원이 무엇이냐, 또 누가 대표하느냐 하는 문제는 헌법 입안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1780년 헌법을 제정한 매사추세츠주에서만 자산가가 상원을 차지했다." "상원의 구성에 관해 명확한 의견을 제시한 이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제퍼슨의 의견에 동조했다. 상원은 하원이 무모하게 행동할 때 제동 장치의 역할을 해야 했다. 또한 입법부의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와 비슷한 균형론은 양원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양원은, 곧 유행이 되어버린 표현에 따르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두 바퀴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의 급진주의자들은 양원제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결코 설득되지 않았다. 제헌회의는 그들의 통제 하에 있었고 결국 단원제 입법부가 설립됐다. 급진주의자들은 주 의회가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인민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324-5)


7장 헌법제정회의 


"정치적 이합집산에는 다양한 경제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 일단, 해외 무역과 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펜실베이니아와 매사추세츠의 사업가들, 버지니아와 양 캐롤라이나의 농장주들은 모두 인구비례에 따라 대표를 선출하고 싶어 했다. 특히 버지니아와 펜실베이니아에는 앞으로 개발해야 할 땅이 상당히 많았다. 신생 연방의회가 인구에 비례해 의원을 선출하게 된다면, 이런 미개발지 출신 의원은 그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힘을 실어줄 터였다. 남부 주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바로 노예제였다. 그들은 이 제도를 철폐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모든 작은 주가 서부의 땅을 원했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그 땅을 팔아서 공채를 청산할 생각이었다.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는 연방의회 내 주들 간의 평등성이 필요했다. 큰 주들이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생겨난다면 서부에 관련된 이해관계에서 작은 주들은 밀려나게 되고, 해당 주의 참전 용사들이 보상으로 약속된 땅을 받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340-1)


"양측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설립을 지지할 이유가 있었다. 또한 통상을 규제하기를 바랐고 셰이즈의 반란 같은 농민 봉기를 우려했다. 중앙정부가 있다면 그런 봉기는 미연에 방지하거나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다. 양측은 튼튼한 국가 재정과 채권자들의 보호라는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중앙정부가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탐욕스러운 군주정의 세계에서 공화국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큰 주든 작은 주든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시민이라는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헌법제정회의가 내린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개인적인 성향과 그들이 각 주의 이익을 대표했던 방식이다. 거의 넉 달 동안 헌법제정회의는 주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토의에서 대표들의 이성과 지성이 작용한 것처럼, 그들의 비합리성과 열정, 기회와 우연 등도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342-3)


"교착 상태를 피하려는 소망 덕분에 헌법제정회의에서 가장 골칫거리 문제들 중 하나가 해결됐다. 직접 과세의 대상이 되는 인민에 비례해 하원의 대표를 구성하자는 안이 채택된 것이다(제안자인 거버너 모리스는 나중에 이를 후회했다). 직접 과세는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민으로 간주해 부과됐다. 이런 계산은 비위가 상하는 것이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연방에 남아 있게 하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7월 16일에 상원에서 주들 간의 평등을 권고하는 것을 포함한 전체 안이 승인됐다. 투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의견은 분열됐다. 게리와 칼렙 스트롱은 안을 지지했고 킹과 고럼은 반대했다. 작은 주들의 연합과 노스캐롤라이나의 지지로 전체 안이 성사됐다.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는 반대했다. 분명 찬성했을 터인 뉴욕은 투표할 수 없었다. 랜싱과 예이츠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뒤였기 때문이다."(361-2)


8장 비준: 끝이자 시작 


# 1787년 9월 17일에 제정된 미국 헌법은 9개월 동안 많은 논쟁과 수정 끝에 1788년 6월 21일에 비준됐고, 1789년 3월 4일부터 발효됐다.


"독립 혁명은 거의 30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이 복잡하게 조합된 일련의 과정이기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 어떤 한 단계를 다른 단계보다 더 '혁명적' 또는 더 '보수적'으로 추정하면 모든 단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되자 독립 혁명과 연관된 문제들의 성격이 바뀌었다. 1783년 전에 있었던 일련의 문제는 모두 독립의 성취라는 한 가지 목적과 연결된 것이었다. 그 이후의 시기에는 같은 문제들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했는데, 특히 자유민이 어떻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종전을 전후한 두 시기는 서로 달랐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는 전쟁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리고 전쟁은 고유의 임무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전시의 통치 방식 중 상당수가 평시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했다. 따라서 통치 업무라는 점에서는 전후의 문제가 전시의 문제와 비슷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달랐다."(378-9)


"전쟁이 끝나자 상인, 변호사, 대농大農, 농장주와 같은 세속의 사람들이 연합회의, 주 의회,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열정도 다소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의 미덕에 대해서는 예전처럼 두드러지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통상의 효율성과 정부의 활기가 공화주의 미덕만큼이나 중요했고 미덕을 구성하는 필수 사항이었다. 그들의 비전은 이제 국가를 포함한 거대한 조직들에, 그리고 그 조직들이 발휘할 수 있는 권력에 집중했다. 그 비전은 아마 그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전쟁 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그들의 정부 경험, 특히 대륙회의와 군대에서 겪은 경험을 고려하면 조직의 권력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헌법을 작성했다. 그들은 환멸로 얼룩진 분위기에서 그 일을 해냈다. 아메리카에서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심이 널리 퍼졌지만,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아메리카가 성취한 일을 대견해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379-80)


"헌법 제정자들은 헌법이 미덕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헌법에는 아메리카인들의 삶에 오래 자리 잡아왔으며 독립 혁명 초창기에 명백히 드러난 도덕성이 어느 정도 구현돼 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헌법이 권력을 제한하기 때문이었다. 권력이 자유뿐 아니라 미덕도 위협한다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헌법에는 다수의 폭정을 막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인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이어야 했고,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헌법에 그런 봉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틀을 만들고자 했다. 단 그런 틀은 소수를 강압적으로 희생해 만들어져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헌법은 균형을 이루는 3부를 설치하고 각 부의 권한을 세세하게 열거함으로써 권력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 대표들은 몇 가지 이유로 이런 제한이 효과적이라 보았는데, 그 이유 중 이런 제한을 통해 부정부패와 다수의 방종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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