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작심하고 다시, 기자 - 권력의 비리를 감시하고, 추적하고, 고발하는 기자, 장인수의 취재 열전
장인수 지음 / 시월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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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김건희와 디올백 – 최초보도 : 2023년 11월 27일, 서울의소리


권력자, 특히 보수정당이나 검사의 비리와 관련한 특종 보도에 대해 국내 언론은 애써 외면해왔다. 하지만 사건이 크게 불거져 제도권으로 넘어오면 기성 언론들은 그제야 보도하기 시작한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무슨 정당의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전격 압수수색했다’, ‘누구를 소환했다’, ‘정부부처가 조사에 착수했다’와 같은 기사들이 전형적인 출입처 기사의 형태다. 디올백 사건으로 빚어진 윤·한 갈등은 국민의힘이라는 출입처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기자들은 그제야 열심히 받아쓰기 시작했다. 단순 전달 보도이니 쓰기도 쉽고 나도 쓰고 너도 쓰고 다 같이 쓰기 때문에 리스크도 없다. 그래서 출입처 기사는 기자들과 언론사가 열심히 쓴다. 디올백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하는 건 다르다. 취재가 어렵고 단독으로 써야 하니 리스크도 크다. 디올백 사건을 발표해줄 정부 기관도 없으니 출입처 기사가 아니고 따라서 취재 대상도 아니다. 그러니 나도 안 쓰고, 너도 안 쓰고, 다 같이 안 쓴다.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다. 50)


PART 2. MBC와 7시간 녹취록 보도의 진실 - 최초보도: 2022년 1월 16일, MBC


이명수 기자는 2021년 8월 30일 서초동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을 방문해 김건희를 만났다. 그 당시 이 기자는 코바나컨텐츠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했다. 당시 코바나컨텐츠 직원 3명과 윤석열 캠프에서 왔다는 젊은 남녀 2명이 이 기자의 강의를 들었다. 부장은 이 젊은 남녀 2명이 누군지 알아내 현재 윤석열 캠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부장이 제정신이 맞나 싶었다. 김건희가 한 문제적 발언들이 많은데 아무도 관심없는 20대 청년 2명이 누군지를 알아내서 그걸 주요 내용으로 기사를 쓰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부장의 정확한 의도를 몰라 답답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수법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기사 아이템을 본인이 직접 킬하지 않고 의미도 없고 취재가 가능하지도 않은 내용을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기사가 못 나가도록 하는 전략이다. ‘내가 킬한 게 아니라 네가 취재를 못 해서 보도가 안 나간 거야’라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70)


부장은 작성된 기사를 회사 시스템을 통해 송고하지 못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기자들은 기사를 쓰고 회사 기사작성·송고시스템(MBC는 MARS라고 한다)으로 전송한다. 그러면 데스크와 부장이 접속해 기사를 확인하고 수정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송고하는 대신 작성한 기사를 유에스비에 담아 데스크에게 전달했다. 데스크가 수정을 마치자 부장은 데스크 자리로 가서 데스크 컴퓨터에 있는 기사를 고쳤다. 자신의 컴퓨터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부장은 7시간 녹취록 보도 준비 내내 카카오톡으로도 보고받지 않았다. 모든 보고와 지시는 구두로만 이뤄졌고 전자파일은 남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검찰 수사를 대비했던 것 같다. 작성된 기사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어디서 어긋났는지 명확히 알게 됐다. 보도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가 안 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러려면 진작에 킬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80-1)


PART 3. 한동훈과 검언유착 - 최초보도: 2020년 3월 31일, MBC


첫날 보도 직후 KBS 법조팀이 자료를 공유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적극적으로 보도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전해왔다. KBS 같은 큰 언론에서 후속 보도를 해주면 MBC 보도는 더 큰 특종이 된다. 제보자X의 동의를 얻어 대부분의 취재 자료를 KBS에 넘겼다. 한 가지 찜찜한 게 있었다. KBS 법조 기자들이 자료를 친한 검사들에게 넘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KBS는 4월 1일 뉴스9에서 19번째(마지막)에 리포트 하나를 보도했다. 딱 봐도 면피용 보도였다. 아무 보도도 안 했다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한 보도를 보고 찜찜함은 더 커졌다. 하지만 어쩌랴, 자료는 이미 넘긴 것을. 그나마 KBS가 나은 것이었다. 많은 언론이 MBC 보도를 외면했다. 하지만 뒤에선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의 관심사는 이동재·한동훈·이철이었고, MBC 보도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상은 온통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데 지면에는 그 사건 보도가 한 줄도 나오지 않는 기현상. 대한민국에서 가끔 벌어진다. 보도 초반 채널A 사건이 딱 그랬다. 102-3)


검언유착 의혹 보도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건에 연루된 두 명, 이동재와 한동훈 모두 처벌받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자로서 힘이 빠지지 않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보도 이후 벌어진 사회적 파장과 논란은 누가 통제할 수도 없거니와 기자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그러니 분노할 필요도, 힘 빠질 일도 없다. ‘기자의 역할은 보도까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보도를 통해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면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보도가 곧바로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면서 보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김건희의 디올백 수수 사건을 보도했지만, 검찰이 윤석열·김건희를 수사해서 그에 따른 처벌을 내릴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나.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하는 사람’이다. 만약 시청자들이 보도를 보고 분노하거나 집단행동을 해서 정치권이나 정부기관이 움직여 어떤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이 역시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112)


PART 4. 손준성과 고발사주 - 최초보도: 2021년 9월 6일, 뉴스버스


채널A 검언유착 사건에서 이동재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공조는, 드러난 것만 보면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채널A라는 언론사와 검찰 조직이 어떻게 유착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고발사주 사건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처음부터 검찰이 조직적으로 고발장을 작성해 미래통합당에 넘겼다. 보수언론은 그 내용을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보도했다. 검찰과 보수언론 사이에 조직적인 검언유착이 이뤄진 것이다. 고발사주 사건을 통해 검찰과 언론이 어떻게 공생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강력한 두 권력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최소한의 윤리는 고사하고 법도 가볍게 깔아뭉갰다. 총선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미래통합당은 실제 고발을 하진 않았다. 대신 보수단체가 나중에 고발을 진행했다. 검찰은 내가 실제 권언유착을 했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공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동훈과 보수언론은 여전히 검언유착 보도를 권언유착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119-20)


2021년 10월 6일, MBC는 김웅과 조성은의 통화 내용에 윤석열이 언급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오보다. 윤석열 이름 없다’라며 난리 쳤다. 보수언론들도 윤석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MBC는 궁지에 몰렸고 이후 공개될 녹음파일에 ‘윤석열’이 없으면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10월 19일 MBC PD수첩은 통화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김웅. 제가 가면 윤석열이 시켜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보수언론 기자들은 실제로 ‘윤석열’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윤석열과 검찰이 원하니 그렇게 썼을 것이다. MBC 보도를 권언유착이라고 공격하던 기자들은 정말 그렇게 믿었을까? 대한민국 기자들이 그렇게 멍청할 리 없다. 오보를 낸 언론들은 어떠한 사과도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MBC 보도가 나오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어 대지만, MBC 보도가 맞는 걸로 드러나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행동한다. 언론의 이런 행태는 여전하다. 122)


PART 5. TV조선 방정오 대표와 그 딸의 ‘계급질’ - 최초보도: 2018년 11월 16일, MBC


저는 사실 이게 계급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양유업과 비교해보면 거기는 이게 본사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한테 욕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영업사원과 대리점 사장이라는 관계에서 나오는 그 계약관계 갑을 관계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갑질이라고 하는 건데 이거는 그게 아니에요. 이 여자 아이가 기사한테 막 할 수 있는 그 근본적인 우월적 지위가 태생에서 나오는 겁니다. 태생에서. (···)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남양유업 같은 경우는 영업사원이 갑질을 하는 이유가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판매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이 폭언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순수합니다.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멸시와 혐오가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갑질이 끝까지 가면 갑질이 극단화가 되면 결국 그 마지막 단계는 신분제 사회, 계급 사회가 있는 거고 이 사람들은 이미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겁니다. 137)


PART 6. 이시원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 최초보도: 2020년 6월 8일, MBC


군사정권 시절엔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이 필요했다. 민주화 이후 이런 공포정치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정원과 공안 검사들은 간첩을 원한다. 자신들의 승진을 위해서다. 문제는 진짜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승진을 위해 간첩을 만들어낸다는 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우성 씨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밴드 여간첩 사건’도 있다. 대법원은 그녀의 간첩죄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나갔다. 검찰이 작성한 이 사건의 공소장은 가관이다. 간첩이 된 탈북자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았다. “당신은 간첩이냐”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했고 진실 반응이 나왔다. 두 차례 조사가 이뤄졌는데 마찬가지였다. 국정원과 검찰은 북한 보위부 소속 과학자들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신비의 약’을 개발했고 이 간첩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 직전에 이 약 성분이 든 패치를 몸에 붙여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통과했다고 공소장에 적었다. 143-4)


국정원 합동신문센터는 통상 탈북자들이 처음 입소할 때 알몸 조사를 벌인다. 국정원은 이 여성이 ‘신비의 약’을 브래지어에 숨겨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면 브래지어는 왜 조사하지 않았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검찰과 국정원은 답하지 않았다. 한편 국정원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는 불시에 이뤄진다. 검찰 공소장대로라면 이 여성은 2번이나 거짓말 탐지기 조사 시점을 미리 알고 직전에 패치를 붙였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 여성의 남자 친구도 간첩이다. 둘이 함께 지령을 받고 내려왔다는 건데 검찰은 여성은 기소했지만 남자 친구는 기소하지 않았다. 여성은 나중에 자포자기한 나머지 간첩이라고 자백했지만 남자 친구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간첩이 됐다. 검찰과 언론을 바꾸지 못하면 누군가는 제2의 유우성이 될 것이다. 검찰은 조작하고 억울하다고 외쳐도 언론은 외면할 테니까. 이보다 완벽한 빅브라더의 세계가 있을까? 144)


맺음말 저널리스트 그리고 다시 기자 284


12.3 내란 사태를 보며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윤석열-김건희의 비리와 문제점을 찾아내 나름 열심히 보도했다. 디올백 수수, 김건희 7시간 녹취록, 김대남 녹취록, 김건희 처가 문제 등등…. 그런데 윤석열-김건희는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놔두고 지엽적일 수도 있는 이들의 행태와 비리를 찾아내 폭로했던 것은 아닐까? 기자들은 총체적인 비판을 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팩트를 신봉한다. 팩트가 없으면 쓸 기사도 없다. 윤석열-김건희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기자는 그걸 찾아내야 비로소 보도할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이같은 방식의 견제와 감시는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윤석열-김건희 상대로는 부질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윤석열 같은 자가 국가 지도자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기자가 하는 일이다. 건전한 언론이 살아있는 국가에서 윤석열 같은 사람이 최고지도자가 될 수 없다. 우리 언론은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나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을까?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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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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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도입부


어떤 작품이 “문학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의 일부는, 이야기되는 내용이 이야기되는 방식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작품을 뜻합니다. 내용이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와 분리될 수 없는 글이지요. 언어는 현실이나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그것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 작품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에 의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두 가지가 늘 말끔하게 딱 들어맞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들쥐의 일생을 밀턴의 무운시에 맞춰 기술할 수 있겠지요. 혹은 자유에 대한 열망을 몸을 옥죄는 듯한 엄격한 운율에 맞춰 쓸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흥미롭게도 형식과 내용이 반목하게 됩니다. 소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복잡다단한 볼셰비키 혁명사를 농장 동물들에 관한 표면상 단순한 우화 형식으로 그려냈습니다. 이런 경우에 비평가들은 형식과 내용의 긴장 상태에 대해 언급하겠지요. 그들은 이 불일치를 그 작품의 의미의 일부로 간주할 것입니다. 12)


- 시작, 그 중요한 단서에 관하여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의 도입부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해봅시다. 첫 문장의 네 구절은 거의 운율에 맞는 리듬과 균형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삼보격 시행이나 각각 세 개의 강세가 있는 시행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cept for the Marabar Caves 마라바 동굴을 제외하면 / And they are twenty miles off  그 동굴은 이십 마일 떨어져 있다. / The city of Chandrapore  찬드라포르 시는 / Presents nothing extraordinary /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 이 작가는 예리한 감식안을 갖고 있는데, 그 눈은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합니다. 영국인의 전통적 습성에 따라 그는 흥분이나 열광을 거부(그 시는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하지요. “내보이다”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합니다. 이 단어 때문에 찬드라포르 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관객을 위해 꾸며진 곳처럼 여겨집니다. 대체 누구에게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일까요? 물론 관광객이지요. 17-8)


이 화자를 역사적 인물 E. M. 포스터와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인도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방금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발을 내디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갠지스 강이 성스러운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은연중에 찬드라포르 시를 아(亞)대륙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고 있을지 모르지요. 이 화자가 인도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쉽사리 감명을 받지 못하는 듯이, 이 단락에는 약간 넌더리 난 기분이 감돕니다. 어쩌면 이 단락은 인도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곳으로 여기는 낭만적 기대감의 김을 빼려고 작정했는지 모르지요. 이 소설의 제목 『인도로 가는 길』은 서구의 독자에게 그런 기대감을 일으킬 테고, 그런 다음에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런 기대감을 심술궂게 꺾어버리려는 겁니다. 어쩌면 이 단락은 오물과 쓰레기보다는 더 신비로운 것을 기대한 독자에게 미칠 영향을 조용히 음미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19)


이 소설은 부인(否認)으로 시작하고 곧 거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찬드라포르 시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 마라바 동굴은 예외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마라바 동굴은 실로 특별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툭 내던지듯이 덧붙인 종속절에 들어 있으므로, 구문 때문에 결국 이 말의 의미가 축소됩니다. 이 문장은 “마라바 동굴이 예외”라는 점이 아니라 “찬드라포르 시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라바 동굴이 도시보다 매력적이지만, 구문은 정반대를 암시하는 듯이 보이지요. 동굴이 언급되자마자 다음 순간에 휙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동굴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더 강해질 뿐이지요. 마라바 동굴이 실제로 특별한 곳인지와 관련된 이 모호함은 『인도로 가는 길』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 추출되어 그 도입부에 환영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이지요. 독자는 아직 이런 점을 알지 못할 터이므로, 그것은 구조적 아이러니를 이루며 심지어 독자를 골리는 듯합니다. 20)


마라바 동굴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암시된 것처럼 어느 모로 보나 중요한 곳으로 드러납니다. 소설의 중요한 행위가 그곳에서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이 행위는 비(非)행위일 수 있습니다. 동굴에서 과연 무슨 일이든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우니까요. 소설 속에서도 그 문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동굴이란 말 그대로 속이 빈 곳입니다. 따라서 마라바 동굴이 소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은 소설의 핵심에 일종의 공백이나 공허가 존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포스터 당대의 많은 모더니즘 작품처럼 이 소설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작품의 핵심에 실로 어떤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진실을 명확히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도입 문장은 소설 전체의 작은 견본이 됩니다. 그것은 동굴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구문상으로 폄하하는데, 이렇게 깎아내리는 것이 또한 그것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지요. 21)


- 독자에게 처음 보내는 신호들


〈많은 재산을 소유한 독신 남자가 아내를 얻고자 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진실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아이러니의 걸작으로 간주됩니다.. 부유한 남자가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보편적 진리로 제시되고, 그래서 그 말은 기하학 원리처럼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인 듯이 여겨집니다. 그것이 실로 대자연의 엄연한 사실이라면, 미혼 여성들이 부유한 남자의 장차 신붓감으로 중뿔나게 나서더라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부유한 총각들의 욕구에 반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스틴의 빈틈없는 전략적 발언은 젊은 아가씨들과 그들의 뻔뻔스러운 어머니들이 탐욕적이라든가 계층 상승을 꾀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런 일을 하고 있음을 독자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바로 이 부분에 아이러니가 숨어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욕망을 자연 질서의 한 부분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 때 더 편안해한다고 이 문장은 암시합니다. 26-7)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 전설적이라면, 미국 문학에도 똑같이 유명한 도입부가 있습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Call me Ishmael).” 멜빌의 『모비 딕』을 여는 이 간결한 첫 문장은 앞으로 나올 내용의 전조가 될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하고 장황한 문체로 유명하니까요. 이 첫 문장은 또한 약간 아이러니합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를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요. 그런데 그는 왜 독자에게 그렇게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걸까요?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라서? 아니면 그 이름의 상징적 의미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인 하녀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인데 버림받은 추방자이자 방랑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경험 많은 대양의 여행자에게 적합한 가명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화자는 진짜 이름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개방적으로 보이는 그의 태도가 어떤 신비로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걸까요? 27-8)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는 독자에게 건넨 말이고,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모두 그렇듯이, 그것은 작품의 허구성을 폭로합니다. 독자의 존재를 소박하게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소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스마엘”은 실제 이름이라기보다 문학적 이름으로 들리기 때문에, 그 이름은 우리가 허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 이름은 화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 가명이기 때문에 허구적으로 들릴 수 있지요. 어쩌면 그의 진짜 이름은 프레드 웜인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더 이국적인 이름을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그가 실제로 이스마엘이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겠지요. 그런데 그의 진짜 이름이 독자에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멜빌이 그 이름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숨길 수는 없으니까요. 소설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8-9)


- 겉으로 보이는 것과 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낭만주의 이후의 사람들은 감정과 관습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한 감정은 인위적인 사회적 형식을 내던져버리고 가슴에서 직접 우러나오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제인 오스틴에게 진정한 감정이란 공적으로 표현되는 적합한 양식이 있었고, 그 양식은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규제되었습니다. “관습(convention)”은 문자 그대로 “함께 모이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오로지 내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내 감정은, 내 사유 재산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공동의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감정적 행위를 배웁니다. 오스틴에게 예법이란 바나나를 칼과 포크로 먹지 않는 매너뿐 아니라 타인에게 민감하고 정중하게 처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손함이란 포도주 잔에 침을 뱉지 않는 것 따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야비하거나 교만하거나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 잰 체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35-6)


관습이 반드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아닙니다. 관습은 어떤 감정적 반응이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너무 미약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과 관습이 함께 엮여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서로 적대적이라고 믿는가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햄릿과 클로디우스가 벌이는 언쟁의 핵심적 문제입니다. 햄릿은 슬픔과 같은 감정은 사회적 형식을 무시해야 한다고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주장하지만, 반면 클로디우스는 감정과 형식이 그보다 더 친밀한 관계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시는 감정과 형식이 반드시 반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형식은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감정을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이 아침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라는 문제보다 더 절박한 문제로 마음이 옥죄는 상황에서 여러분에게 좋은 아침 시간을 보내라고 말하더라도 가식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기서도 가식의 문제는 없습니다. 36)


- 독자를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선언들


조지 오웰의 『1984』의 첫 문장입니다. 〈사월의 화창하고 차가운 날이었다. 시계가 열세 시를 울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려고 가슴팍에 턱을 붙이고는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미끄러지듯 지났다. 그렇지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진 못했다.〉 이 문장은 다른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 않은 묘사에 “열세 시”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집어넣음으로써 효과를 얻습니다. 그 단어를 통해서 이 장면이 어떤 낯선 문명이나 미래에 설정되어 있음을 암시하지요. 어떤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사월이라 불리는 달이 아직 있고 바람은 여전히 모질게 불 수 있지요.) 변한 것도 있고, 이 문장의 효과는 이처럼 일상적인 것과 낯선 것의 병치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이하게 울리는 시계가 약간 지나치게 작위적(voulu)이라고 느끼겠지요. 시계 묘사가 너무 부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건 공상과학소설이야.”라고 좀 너무 요란하게 선언하는 것이지요. 41)


윈스턴 스미스가 맨션에 들어갈 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그를 따라 들어가 건물에 스며듭니다. 비록 이 소설은 모래의 침투를 (바람은 “지독”하게 불어댑니다.) 불길한 의미로 여기는 듯하지만, 독자는 이 모래 돌풍을 그리 불길하지 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지와 모래는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들은 까닭도 이유도 없는 요소를 대변하고, 총체적이거나 의미심장한 계획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전체주의적 체제의 정반대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바람은 인간의 통제에 반항하는 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은 제멋대로 이쪽저쪽으로 불지요. 그 국가는 적어도 자연만은 그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는 무력으로 압박하여 질서정연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은 뭐든지 불편해하지요. 빅토리 맨션이 먼지를 완전히 내몰 수 없듯이, 그 체제는 우연적 요소를 완전히 쫓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41)


Chapter 2. 인물


오늘날 ‘캐릭터(character)’라는 단어는 문학 속의 인물뿐만 아니라 기호나 문자 혹은 상징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독특한 표시를 만드는 ‘타발 금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런 뜻에서부터 개인의 서명처럼 개인의 각별한 특징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추천서(character reference)라는 단어에서 쓰이듯이 캐릭터라는 말은 한 개인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표시나 초상화, 묘사를 뜻했고, 얼마 후에 개인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지요. 개인을 나타내던 표시가 개인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표시의 독특함은 그 인물의 고유함을 나타내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캐릭터”라는 단어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이라는 비유법의 일례입니다. 우리를 서로 구분해주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톰 소여를 톰 소여로 만드는 것은 그가 헉 핀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입니다. 맥베스 부인을 그녀 본연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맹렬한 의지와 공격적 야심입니다. 46)


- 유형은 인물의 개성을 보존하며 더 넓은 배경을 부여한다


개인의 유형(type)을 정한다는 것은 그들을 어떤 범주 안에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모두는 특유함이라는 동일한 자질을 공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것은 우리 모두가 비범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하지요. 이 말은 곧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만 비범합니다. 한 인간에게만 특이한 자질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로지 한 개인만 성미가 급하거나 앙심이 깊고 혹은 치명적으로 공격적인 세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서로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엄청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휘들을 통해 밝혀집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을 개체화하게 되는 사회적 과정도 공유합니다. 50)


스탕달과 발자크에서부터 톨스토이와 토마스 만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유럽 사실주의 소설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인물과 전후 상황이 밀접하게 엮인 관계를 예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 인물은 복잡한 상호 의존의 관계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막강한 사회적, 역사적 힘에 의해 형성되고, 그들이 어쩌다 자각할 사회적 과정에 의해 빚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런 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실제 상황은 멋지게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몇몇 위인의 배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지요. 사실주의 소설은 개인의 삶을 역사와 공동체, 친족 관계, 제도를 통해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틀 안에 박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기획과 모더니즘 소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빈번히 홀로 고립된 의식을 제시하니까요. 56-7)


모더니즘 작품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통적인 인물 개념을 해체하려 합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어떤 힘을 일부 밝히려는 것이지요. D. H. 로렌스는 성격이나 인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파헤치려는 자아의 심연은 의식적 에고보다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 이후로, 정통적인 정체성 개념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적 삶은 이제 자아라는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니까요. 로렌스가 탐구한 자아는 관념이나 감정, 성격, 도덕적 관점이나 일상적 관계를 넘어선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모호하고, 원시적이고, 심원하며 비개인적 존재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사실주의 작가들이 발을 내디디려 하지 않았던 영역입니다. 로렌스에게 자아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그 나름의 수수께끼 같은 논리가 있고, 그 나름의 유쾌한 방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로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는 셈입니다. 59)


- 시대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인물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에 나오는 수 브라이드헤드는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에서 가장 놀랍도록 독창적으로 묘사된 여성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가 수를 비뚤어진 성미에 바람둥이에다 짜증스럽게도 변덕스러운 여자로 인식하도록 일부러 유혹하는 듯합니다. 그녀가 질투를 하거나 변덕을 부리고, 짜증스럽게도 모순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의 행위에서 많은 부분이 일단 성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그녀가 빅토리아 시대의 정숙한 체하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지요. 그녀는 개화된 젊은 여성으로서 결혼과 성에 관한 대담하게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앙에 관해서는 회의주의적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점은 그녀가 인습에 구애되지 않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성을 경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결혼과 성이 여자의 독립성을 뺏는 덫이라고 간주합니다. 61-2)


수와 주드의 실패는 자연이나 은총, 악의적인 신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실험이 시기상조였던 것이지요. 역사가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평가들이 수를 불감증에다 신경과민인 여자로 간주하기 쉬운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내면에 거의 접근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술에서 그녀는 자기 나름의 권리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주드가 겪는 경험의 한 가지 함수로 존재합니다. 그녀가 몹시 감질나게도 불투명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녀가 주인공 주드의 욕구와 욕망, 망상을 통해 여과되기 때문입니다. 한 비평가가 말했듯이, 그녀는 자기 나름의 주체가 아니라 주드의 비극의 도구로 존재합니다. 주드가 죽은 후 그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이지요. 그 정도로 소설 스스로도 여주인공을 바깥으로 내모는 데 공모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제시할 때는 특히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지요. 63-4)


- 감정 이입 vs. 비판적 이성의 고양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가 그 인물들과 동일시하기를 요청합니다. 사실주의 소설은 우리가 상상을 통해 다른 인간의 경험을 재창조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적 공감을 확장하고 심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해서,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우월한 외적 관점에서 그들을 비난하려는 충동이 줄어들겠지요. 이해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로운 주장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릇된 점도 많이 있지요. 한 가지 잘못된 점을 들자면, 모든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기를 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것을 들자면, 감정이입이 유일한 이해 방식은 아닙니다. 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감정이입은 이해를 도모하는 형식이 전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이 “된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내 능력을 상실하니까요. 누가 뒤에 남아서 이해를 하겠습니까? 65-6)


소포클레스는 독자가 오이디푸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 연극은 우리가 불운한 운명의 주인공에게 동정심을 느끼리라고 가정하지만, 누군가에 대해서 느끼는 것(동정)과 그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감정이입)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히틀러 시대에 글을 쓰면서, 무대 위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우리의 비판 능력이 무뎌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대단히 편리한 방편이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지요. 감정이입은 비판적 이성보다 감정을 고양시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브레히트는 사회적 존재가 모순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이 모순들이 사람들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고 자기 분열된 존재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물이 통합되고 일관성 있다는 개념은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자아 내부의 갈등을 억압한다는 것이지요. 66)


Chapter 3. 서사


전지(全知)한 화자는 작품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육체에서 분리된 목소리에 가깝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인물로서 화자는 작품 자체의 마음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더라도 화자가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삼인칭 전지적 서술은 일종의 메타언어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그런 서술이 서사 안에서 비평이나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의 목소리이므로 문제시할 수 없어 보입니다. 서사가 잠시 중단되고 그 자체에 대해 숙고할 때만 그것에 대해 의문시할 수 있지요. 이른바 서한체 소설, 즉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되는 소설에서는 그런 메타언어 혹은 해설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드라마 형식에서도 그렇지요.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의 말을 듣게 되니까요. 이런 까닭에 희곡의 경우에는 어떤 관점을 옹호하거나 배척하는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71, 75)


- 서사는 주인공과 세계와 은밀히 공모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동물들이 농장을 점령해서 스스로 운영하려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는 이야기이지요. 이 소설 자체는 소비에트 연방 초기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한 알레고리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동물은 농장을 경영할 수 없습니다. 손이 없고 발굽만 있을 때는 수표에 서명하거나 원료 공급자에게 전화하기 어렵지요.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물들의 실험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은 이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야기가 그 조건을 설정한 방식이 그 목적을 입증하는 데 효과적인 것이지요. 이 알레고리는, 물론 좌파인 작가의 의도와는 반대로, 노동자들이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들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함축할 수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이 소설의 제목은 반어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동물”과 “농장”은 당연히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지요. 82)


어떤 서사가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아담은 죽음을 일으키는 사과를 나눠 먹음으로써 이브와 운명을 함께하려고 결정합니다. 아담은 이브에 대한 정절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내맡길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과를 먹을 때는 시의 어조가 뚜렷이 달라집니다. 〈그는 주저 않고 먹었다, / 자신의 더 나은 판단력에 거슬러, 속아서가 아니라 / 어리석게도 여자의 매혹에 압도되어.〉 “어리석게도 여자의 매혹에 압도되어”는 조금 전에 시가 그려낸 아담의 마음 상태를 노골적으로 비틀어버립니다. 아담이 연인 옆에서 자기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사과를 받을 때, 이 시는 갑자기 그에 대한 공감을 내버립니다. 대신 엄격한 재판관의 어조를 띠고는, 아담이 이 사건의 파국적 결과를 충분히 알면서 자기 기만 없이 자유롭게 사과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교리가 드라마를 압도하면서, 신학자 밀턴이 인문주의자 밀턴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지요. 82-3)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한결같은 외침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계속 읽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더라도, 그 충족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말의 기쁨이 너무 일찍 나오면, 긴장의 즐거움이 깨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확언을 갈망하지만, 그것이 연기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호기심을 채울 필요가 있지만, 결말을 알지 못하는 불안감을 즐기기도 하지요. 해결책이 잠정적으로 연기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서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강아지나 에덴동산처럼 그것이 복원되기를 갈구합니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화자는 소설 끝머리에서 커츠가 죽은 후 그의 약혼녀를 만났을 때 그녀를 위로하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 약혼녀를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전통적 독자로 취급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콘래드 자신은 행복한 결말은 거의 없을뿐더러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결말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86-7)


- 질서가 와해된 곳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는 까닭은 초반에 어떤 질서가 와해되었기 때문입니다. 뱀 한 마리가 행복한 정원에 슬쩍 들어서고, 이방인이 마을에 찾아오며, 돈키호테는 훤히 트인 대로에서 돌격하고, 러브레이스는 클래리사에 대한 연정을 품고, 톰 존스는 후원자의 시골 대저택에서 쫓겨나며, 로드 짐은 돌이킬 수 없이 배에서 뛰어내리고, 요제프 K는 죄명도 모르는 범죄로 체포됩니다. 수많은 사실주의 소설의 결말은 이 질서를, 어쩌면 더 풍부한 형태로, 복원하고자 합니다. 원죄는 갈등과 혼란을 빚어내지만, 그런 상태가 결국에는 회복되겠지요. 에덴동산에서의 타락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복된 죄(felix culpa)” 혹은 다행스러운 결함입니다. 원죄가 없으면 이야기도 없을 테니까요. 따라서 독자는 위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독자는 현실에 내재된 논리가 있으며 소설의 임무는 그 논리를 참을성 있게 밝혀내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어마어마한 플롯의 일부입니다. 88)


고전적 사실주의에서는 세계 자체가 이야기로 형성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독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질서 말고는 다른 질서가 없습니다. 독자가 구성하는 질서는 임의적이므로, 소설의 시작과 결말도 그렇습니다. 신이 명한 기원도, 자연스러운 종결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사리에 맞는 중간도 없다는 뜻이지요. 한 사람에게는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키는 대로 어디서나 시작할 수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에 목적과 기원이 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디서 시작하든 간에, 이미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명확히 인식하겠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서 중단하든 간에 그와 상관없이 대단히 많은 것이 지속되겠지요. 그래서 일부 모더니즘 작품은 서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88-9)


역사적으로 말하면, 서사는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옵니다. 스토리텔링은 인류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듯합니다. 우리는 서사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꿈꾸고, 행동한다는 얘기도 때로 들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산물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이한 문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멋진 인물들이 몇 명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플롯을 만들지 못하는 거야.”라는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진부한 은유는 목적과 지속성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은유가 의미를 밝혀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예술 작품이 그렇듯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94-5)


- 서사와 플롯이 항상 공존하지는 않는다


서사와 플롯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의 범죄 스릴러는 거의 다 플롯뿐입니다. 배경 설정이나 대화, 분위기, 상징, 묘사, 숙고, 심층적 성격 묘사 등 서사의 다른 특징들이 가차 없이 제거되어 남은 것은 적나라한 사건의 뼈대뿐입니다. 그렇다면 플롯은 서사의 일부이지만, 그것으로 서사를 완전히 다룰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플롯이라는 단어는 이야기의 의미 있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물들과 사건, 상황이 상호 연관되는 방식을 의미하지요. 플롯은 서사의 논리 혹은 내적 동력을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플롯은 “이야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사물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누군가 우리에게 물어볼 때 우리가 찾아내는 답이 플롯의 요약입니다. 『맥베스』에서 뱅쿼우의 살해는 플롯의 일부이지만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로 시작되는 대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96)


Chapter 4. 해석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제공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대신 독자에게 사실을 “상상”하도록 요청합니다. 사실로부터 상상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그러므로 작품은 진실이면서 동시에 상상일 수 있고,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일 수 있습니다. 런던에서 파리로 가기 위해 넓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은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허구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소설에 의해 “허구화”된 듯이 보이지요. 그것은 그것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이 중요하지 않은 문맥 안에서 작용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작품의 상상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가, 라는 점이지요. 사실에 진실한 것과 인생에 진실한 것은 다릅니다. 『햄릿』에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어떤 덴마크 왕자가 실제로 존재했고 그가 미쳤거나 미친 척했거나 아니면 둘 다였고 여자 친구를 가증스럽게 다루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101-2)


- 문학의 현실과 독자의 현실 사이


어떤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라고 묘사할 때, 어떤 절대적인 방식에서 그 작품이 비사실주의적 문학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작품이 어떤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에 부합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어떤 고대 문화권에서 작성된 글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이 희한하게도 등장인물들의 정강이뼈의 길이에 관심을 쏟는다고 상상해봅시다. 우리는 그 글이 이국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문화권의 역사 기록을 우연히 읽고는, 정강이뼈의 길이가 사회의 어느 계층 조직에 속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음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센타우루스 자리의 알파성에서 지구를 찾아온 방문객이 전쟁과 기근, 종족 근절과 대량학살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서를 본다면 그것을 터무니없는 초현실주의적 텍스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이든, 순전히 사실주의적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105-6)


- 문학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생산한다


우리가 작품의 원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원래 의미가 그 작품이 후에 얻게 될 의미보다 높은 지위에서 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과거의 작품을 그 당대인들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현대 심리분석학적 통찰을 통해서 우리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경험의 노래」를 그 당시에 통용된 지식으로 가능했던 수준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0세기의 폭정을 경험했으므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 풍부해질 수 있지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 대학살 이전과 그 이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어떻든, 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히 상실한 역사적 지식 형태가 있습니다. 『햄릿』이 처음 상연되었을 때 그것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복수의 도덕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우리는 결코 명확히 알 수 없겠지요. 115-6)


문학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라고 간주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작품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의미를 생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의미라도 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의미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소유한 땅 덩어리처럼 오로지 나 혼자 소유한 의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미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 혼자서 “해석학적 현상”이라는 구절이 “메릴 스트립”을 뜻하게 하겠다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언어에 속하고, 언어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의미를 추출합니다. 언어는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이나 한 사회의 가치, 전통, 가설, 제도, 물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언어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적어도 행위의 일부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117-8)


- 유도하기, 강요하기, 자극하기


독자가 끊임없이 추측을 하지 않으면 문학 텍스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픽션의 문장은 과학적 가설과 조금 비슷합니다. 가설을 실험하듯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야 합니다. 반면에,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태도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독자를 옛 친구처럼 붙잡고 늘어지며 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고, 아니면 독자에게 딱딱하고 쌀쌀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작품은 독자가 그 자체와 똑같이 문명화된 가치를 공유하는 박식하고 한가한 사람이라고 가정하면서 독자와 무언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작품은 그것을 집어 드는 사람을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려고 나서서 독자의 판단력을 공격하고 독자의 확신을 낯설게 만들거나 독자의 예절 의식을 침해합니다. 또한 독자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의 사색이 어쩌다 귓결에 들리도록 마지못해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120-1)


- 소설가를 믿지 말고, 이야기를 믿어라


모든 지식은 어느 정도로는 추상화의 과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문학 비평의 경우에 이 말은 작품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그것의 전모를 개괄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업은 쉽지 않은데, 문학 작품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서 전체적으로 펼쳐놓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도 작품의 확고한 실체와 계속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시나 소설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주제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주제란 곧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하는 주된 관심사의 패턴을 뜻하지요. 디킨스는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유산』은 디킨스의 몇몇 후기 작품처럼, 작가의 실제 견해가 작품 속에 드러난 태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예시합니다. 이 소설은 디킨스를 그토록 우상화했던 사교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지하세계에 공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122, 127)


-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라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이미지의 패턴이 그 주제를 심화하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쇠의 이미지인데 수많은 다양한 형태로 불쑥 나타납니다. 가령 매그위치의 족쇄는 올릭이 나중에 조 부인을 폭행하는 데 사용되지요. 핍이 조에게서 훔치는 줄도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시 등장합니다. 무거운 정박용 닻사슬에 묶여 있는 유형선은 “죄수들처럼 차꼬에 채워진” 듯이 보입니다. 조 부인의 결혼반지는 어린 핍을 벌줄 때 그의 얼굴을 긁어 벗겨놓습니다. 매그위치는 핍에게 비유적으로 족쇄를 만들어 씌웁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족쇄이지만요. 핍은 법적으로 도제로 “구속”되어 있고,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대장장이의 삶에 속박되어 있지요.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쇠는 폭력과 감금을 상징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새티스 하우스와 런던 상류사회의 공허한 세계와 대조되는 견고함과 소박함을 갖고 있습니다. 대장간과 범죄자들의 지하세계의 가혹하고 불편한 면뿐만 아니라 진정한 면을 암시합니다. 131)


해석이란 부분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최종적인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사의 흐름에서 뒤로 물러서서 되풀이되는 관념이나 관심사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어떤 유사성이나 대조, 관련성을 주목합니다. 인물을 고립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제와 플롯, 이미지와 상징을 포함하는 패턴의 한 요소로 보고자 합니다. 언어가 분위기와 감정적 상태를 조성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는지 간략히 검토합니다.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서사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기울여 설명합니다. 소설이 그 자체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숙고합니다. 또한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문학 양식(사실주의, 우화, 판타지, 로맨스 등등)을 훑어봅니다. 나는 또한 이 소설의 도덕적 비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비전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언제나 묻고 싶겠지요. 이런 질문은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합니다.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133-4)


- 문학 작품을 읽는 몇 가지 방법


영국의 상류층 남녀의 이름은 노동 계층 동포의 이름보다 더 긴 경향이 있습니다. 음절이 많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풍요를 가리킬 수 있지요. 피요나 포르테스큐-아르부스노트-스마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조 도일이라는 사람과 달리 리버풀의 뒷골목 출신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는 영국의 중상류층 사회에서 꽤 흔한 이름에다 큰 시골 저택을 암시하는 성(그레인저)을 갖고 있는데, 다 합해서 음절이 여섯 개나 되고, 세 명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세련된 인물입니다. 인습적인 중산층 출신인 해리 포터의 이름은 말끔하게 균형 잡힌 네 음절로 되어 있는데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지요. 반면에 하층민 출신의 론 위즐리는 보잘것없이 세 음절뿐입니다. 그의 성(Weasley)은 기만적이거나 부정직한 인간을 뜻하는 “위즐(weasel)”을 연상시킵니다. 족제비는 사실 당당한 동물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론처럼 하층민 출신인 인물에게 편리하게 붙일 수 있는 이름입니다. 139)


Chapter 5. 가치


신고전주의자들의 눈에, 수백만의 인간이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서 찾아낸 진실은 최신의 어떤 관념보다도 존중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눈에 핏발이 선 천재가 새벽 두 시에 퍼뜩 떠올린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류가 공유한 지혜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유사성이 차이점보다 더 주목할 만하고, 공통적인 것이 독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술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체로 과거의 재순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충실성이 현재에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대체로 과거이고, 미래는 이미 지나간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가벼운 변주곡들을 연주하겠지요. 변화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고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물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요. 141-2)


낭만주의자들의 눈에 인간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한 창조적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고, 변화란 대체로 겁내기보다는 환영해야 할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세력을 떨쳐내기만 하면 됩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의 이미지에 따라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예지력입니다. 그것은 시뿐 아니라 정치 혁명에도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이 새롭게 강조됩니다. 가장 소중한 예술 작품이란 전통과 관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은 노예처럼 과거를 모방하지 않고, 풍부하고 낯선 것을 탄생시킵니다. 그렇지만 낭만주의 작가들 역시 그들이 스스로 만들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을 주조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작은 신이라기보다는 벽돌공에 더 가깝지요. 142-3)


모더니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낭만주의의 충동을 물려받았습니다. 모더니즘 예술 작품은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정형화된 듯이 보이는 세계에 항거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것은 이 기성품화된 중고 문명을 넘어선 영역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상투적 인식을 강화하기보다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이지요. 낯섦과 특이성을 추구하면서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 완전히 새롭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겠지요. 가령 진짜 외계인이 팔다리가 많이 달린 난쟁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무릎에 앉아 있는 존재인 경우처럼 말입니다. 작품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가 이미 예술로 분류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에 그 범주를 변형시켜서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만들더라도 말이지요. 혁신적 예술 작품이라도 그것이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것에 관련해서만 혁신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143)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시들기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던 이론은 독창성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혁신을 멀찌감치 뒷전에 밀어놓았지요. 대신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것을 재활용하고, 바꾸고, 풍자하고, 본떠서 다른 것을 만드는 세계를 열렬히 수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복사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딘가에 원본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될 텐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본은 없이 모조품만 있습니다. 태초에 모조품이 있었지요. 혹시 원본처럼 보이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면, 그것도 복사본이거나 모방작 혹은 모조품으로 판명 나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가짜일 수 없으니까요. 모든 것이 가짜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겠지요. 조이스의 표현을 살짝 빌리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결코-변화하지 않고 언제나-변화하는” 문화입니다. 144)


- 소설의 언어: 작위적 기교 vs. 독창적 표현


〈쇠꼬챙이처럼 배싹 마르고, 키는 더 크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오드리 헵번처럼 보조개가 들어가고 턱이 각진, 은은하게 빛나는 모델이 희미한 빛으로 꼬아진 듯한 드레스에 경주용 에그헬멧을 걸치고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걸어 나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토끼 잠들다』의 한 문장은 좀 부주의하게도 반복된 거의 비슷한 단어(“은은하게 빛나는”, “희미한 빛”)를 별도로 치면 대단히 숙련된 글입니다. 지나치게 교묘하고 계획적입니다. 모든 단어를 일일이 까다롭게 선택해서 문지르고 다른 단어들에 말끔하게 끼워 맞추고 그런 다음에 매끄럽게 다듬고 그 위에 마무리로 광택을 낸 듯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흩어지지 않았지요.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단어가 미진한 부분이나 변칙적인 부분 하나 없이 세심하게 배치되어서 지나치게 기교적인 느낌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이 문장은 기교적이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이 문장은 상세한 묘사를 시도하지만, 복잡한 형용사가 너무 많고 절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언어 차원에서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독자는 묘사되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기 어렵지요. 이 언어는 그 자체의 능란한 솜씨에 독자가 주목하고 경탄하게 합니다. 153)


〈그들은 대체로 불편한 기차 여행 후 돌풍이 이는 어느 사월 오후에 도착했다. 그들은 역에서 택시를 타고 콘월의 먼 도로를 따라서 화강암 오두막들과 폐기된 고풍스러운 주석공장을 지나 8마일을 달려갔다. 그 집의 우편주소에 적힌 마을에 이르러 마을을 통과하고 그 높은 둑에서 갑자기 나타난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가다가 절벽가의 탁 트인 목초지에 들어서자, 하늘 높이 구름이 재빨리 흘러가고 바닷새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발치의 풀밭은 바람에 나부끼는 야생화들로 활기차게 흔들리고, 공기 중에 짠 냄새가 배어 있고, 저 밑에서는 대서양이 바위에 부딪쳐 포효하고, 중경에서는 남색 물결이 뒹굴며 흰 포말을 일으키고, 그 너머에 수평선이 잔잔한 호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그 집이 있었다.〉


이와 달리 에벌린 워의 단편소설 「전술 훈련」에서 발췌한 산문은 선명하고 불순물이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말을 억제하고, 과시적이지 않습니다. 가령 “그 집의 우편주소에 적힌 마을”에서부터 “수평선이 잔잔한 호를 이루고 있었다.”까지 꽤 많은 종속절을 통해 한 문장을 이끌어가면서도 긴장감이나 기교를 전혀 느낄 수 없게 하는 솜씨를 의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구문과 풍경이 각각 만들어내는 확장감은 “여기 그 집이 있었다.”는 간결한 문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 짧은 문장은 스토리와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의 중단을 알려주지요. “대체로 불편한 기차 여행”은 유쾌하게 빈정대는 기미를 드러냅니다. “고풍스러운”은 좀 지나친 형용사이지만, 그 행의 균형 잡힌 운율은 대단히 경탄스럽지요. 발췌문 전체에 조용한 가운데 효율적인 분위기가 감돕니다. 신속히 솜씨 좋은 몇 번의 필치로 풍경을 그려내는데, 너무 많은 세부 묘사로 텍스트를 어수선하게 하지 않으면서 생동감이 넘치게 묘사합니다. 154)


〈내 뒤의 운전자는 어깨에 봉을 넣은 옷과 올가미 같은 콧수염 때문에 전시용 마네킹처럼 보였다. 지붕이 접히는 그의 차는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실크 밧줄로 초라한 우리 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광택이 도는 그의 멋진 기계는 우리 차보다 몇 배나 힘이 좋았기에 나는 속도를 내서 그를 따돌리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O lente currite noctis equi! 오, 부드럽게 달려라, 악몽이여! 우리는 긴 비탈길을 올랐고 다시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갔고, 제한 속도에 주의했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아이들을 봐주었고 커브 길의 노란 방패 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곡선들을 더 크게 돌아 재현했다. 우리가 어떻게, 어디를 달리든 간에, 마법에 걸린 사이 공간은 온전히, 정확하게, 신기루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법 융단에 상응하는 도로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나오는 이 문단에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일상적 행위와 그것을 묘사하는 점잖고 격조 높은 언어(“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실크 밧줄”, “광택이 도는 그의 멋진 기계”)는 익살스럽게 괴리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점잔 빼는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우아한 척하거나 지나치게 세련된 문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이 그런 문체를 무리 없이 잘 구사하는 까닭은, 그런 문체가 약간 재미있기도 하고, 풍자적으로 그 자체를 의식하고 있기도 하고, 또한 화자가 중년의 욕정을 느낀 십대의 소녀를 사실상 납치해서 차에 태워가면서 자신이 처한 약간 추접스러운 궁지를 상쇄해보려는 절실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극히 정교하고 약간 점잔 빼는 문학적 언어는 사실 이 소설의 교양 있고 구식 인물인 화자, 험버트 험버트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갈등이 산문 문체에 반영되는 것이지요. 155-6)


- 시의 언어: 감상적 고백 vs. 정제된 상상력


〈풍부한 물줄기가 등심초 꽃에 스며들고, / 무성하게 자란 풀이 여행자의 발을 그물로 잡고, / 젊은 태양의 흐릿하게 신선한 불꽃이 붉게 물든다, / 이파리에서 꽃으로, 꽃에서 열매로. / 열매와 이파리는 황금과 불처럼 타오르고, / 칠현금 너머로 보리피리 소리가 울리고, / 발굽이 박힌 사티로스의 발꿈치가 / 밤나무 밑동의 밤껍질을 짓밟는다.〉


앨저넌 찰스 스윈번의 『캘리던의 애틀랜타』에 나오는 이 시에는 숨 가쁘게 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하나도 아주 선명하게 보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시행은 시각적 흐릿함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서정적이고, 너무나 질릴 정도로 감상적입니다. 모든 것이 음향 효과를 위해 가차 없이 희생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 시는 반복과 두운으로 인해 흐름이 막혀 있고, 그것은 “젊은 태양의 흐릿하게 신선한 불꽃이 붉게 물든다.”에서 부조리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묘사는 대체로 낭랑한 음악적 조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구절은 “시적”인 효과를 의식합니다. 어조는 너무나 열광적이고, 언어는 너무나 단조롭습니다. 흐릿한 광택이 표면에 감돌기는 하지만 그 밑에는 부서지기 쉬운 시행이 존재합니다. 현실의 돌풍이 조금만 일어도 이 부서지기 쉬운 문학 창조물은 땅으로 무너져 내리겠지요. 160)


〈하얀 꽃, / 밀랍, 비취, 줄 없는 마노의 꽃, / 얼음 표면에 / 연선홍색 그림자가 드리운 꽃. / 온 정원에서 그런 꽃이 어디 있지? / 별들이 라일락 이파리 사이로 모여들어 / 너를 바라본다. / 낮게 걸린 달이 너를 은빛으로 환히 비춘다.〉


스윈번의 시를 에이미 로웰의 시 「풍향계가 남쪽을 가리키네」와 대조해봅시다. 여기서 시인의 눈은 그 대상을 한결같이 응시합니다. 이 시행에는 경이로움과 경탄이 울려 퍼지지만 그런 감정은 정밀한 묘사를 위해 억제됩니다. “별들이 라일락 이파리 사이로 모여들어 / 너를 바라본다.”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 약간 허용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상상력이 실제적인 것에 종속됩니다. “낮게 걸린 달이 너를 은빛으로 환히 비춘다.”에서는 마치 달이 꽃에 경의를 표하는 듯이 들리는데, 이것은 상상에 의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진술이기도 합니다. 스윈번의 시는 최면성의 반복적 리듬으로 가득하고 음절이 너무 많은 구절들을 연결한 반면, 로웰의 리듬은 간결하고 억제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언어는 제어되어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그녀는 꽃의 아름다움에 동요되어도 냉정함을 잃지 않습니다. 스윈번의 시행은 열광적으로 내달리는 반면, 로웰은 모든 구절을 따져보고 균형을 맞춥니다.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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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검찰의 심장부에서 - 대검찰청 감찰부장 한동수의 기록
한동수 지음 / 오마이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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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검찰의 심장부에서

—대검 감찰부장의 기록


검찰 출신은 검찰을 나가서도 검찰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일제히 침묵한다. 따라서 법무부나 청와대와 같은 조직에서도 검찰 내부 정보와 조직의 작동원리, 생리 같은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검찰개혁의 지지부진함과 한계를 야기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누군가 검찰의 심장부에 들어가 기록하고 증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검 감찰부는 검찰의 온갖 비위정보가 모이고 징계 감찰을 하는 곳이므로 검찰의 실상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데 적소(謫所)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검찰총장 윤석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나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양승태 대법원장 직권남용 사건에 대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았고, 나도 그랬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적폐청산에 대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법연수원 23기이고, 나는 24기이니 기수 차이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19)


2019년 10월 18일 대검찰청에 부임하던 첫날,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야기한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 번째는 감찰에 착수하기 전에 총장에게 보고하고 총장의 승인을 받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대검찰청 감찰본부 설치 및 운영 규정 제4조 제1항에 따르면, 감찰부장은 감찰개시 사실과 그 결과만을 검찰총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사전 보고와 승인은 규정과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 및 재산등록과 관련해 감찰대상이 되어 정직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 윤 총장이 이 규정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규정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윤 총장은 또 매일 오전 열리는 대검 부장회의에 감찰부장은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역대 감찰부장은 대검 부장회의에 들어오지 않았고, 감찰부장 입장에서도 대검 부장회의에 들어오지 않으면 편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검 부장회의에 참석하길 원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역대 대검 감찰부장은 대검 부장회의에 참석해왔다. 20)


2020년 3월 19일 회식 자리에서 나온 윤 총장의 발언을 기억나는 대로 기록으로 남긴다. 그가 한 말은 검찰조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일제 때 태어났으면 마약판매상이나 독립운동을 하였을 것이다.〉, 〈만일 육사에 갔더라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다. 쿠데타는 김종필처럼 중령이 하는 것인데 검찰에는 부장에 해당한다. 나는 부장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조선일보 사주를 만났다. 조선일보 일가는 평안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고, 반공의식이 아주 투철하다.〉, 〈평안도 출신의 결속력은 아주 대단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같은 평안도 출신인 리영희 기자에 대해 진실을 보도한 기자일 뿐 빨갱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동아일보는 전북 출신인데 전라도 사람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면 더욱 강하게 된다.〉, 〈검찰 역사는 빨갱이 색출의 역사다.〉 나는 윤석열 총장이 검찰에 있을 때나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섰을 때 자주 사용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25-6)


2020년 3월 19일은 이른바 ‘제보자X’로 알려진 지현진 씨가 며칠 후 채널A 본사를 방문해 유시민 관련 제보를 하기로 약속한 날의 며칠 전이었다. 윤 총장은 한동훈 반부패·강력부장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동훈은 점심 또는 저녁 식사 중에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페이스북이나 유시민 씨의 유럽 출국 정보를 수시로 총장에게 전할 정도로 많은 것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김유철 수사정보정책관과 고등학교,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고, 청와대 행정관으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사정보정책관실(수정관실)로부터는 업무상 각종 정보를 보고받는 위치에 있었다. 수정관실은 그 무렵 총선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수시로 수집·정리하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만, 검찰은 업무와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정말 사소한 것까지 상급자에게 보고한다. 그래서 나는 윤석열 총장도 ‘제보자X’의 동태를 그때그때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추론한다. 27)


2020년 당시 차장급이었던 특별감찰단장 황병주는 대검 권순정 대변인과 연수원 29기 동기이고, 카카오톡으로 총장에게 감찰 업무를 수시로 보고하는 등 대검 내 위치가 상당한 편이었다. 그때 그는 감찰부장실에서 확신에 차서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할 것이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운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법무부 차관 등을 만났다면 공무상 비밀 누설로 영장을 쳐야 하는 사안이다.” 윤 총장으로서는 이른바 ‘대호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주와의 만남을 통해 대권에 대한 내심의 야망이 싹트고 있었을 때다. 결국 이날 총장의 호기어린 다수의 말들은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해 검찰개혁 입법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대권을 향한 자신의 입지에 무언가 생기기를 기대하던 차에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쿠데타’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것을 보면, 군대에 의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검찰 수사를 통한 쿠데타를 의식했던 것은 아닐까. 27-8)


충돌의 전초는 한동훈 관련 사건이었다. 내가 감찰부장으로 근무한 지 두 달여 만에 임은정 검사가 감찰제보시스템을 통해 한동훈 검사에 대해서 내부제보를 했다. 한동훈이 자신의 지위를 부정하게 이용해서 처남인 진동균 검사가 법무심의관실에 배치되도록 부당한 인사청탁을 했는지, 그리고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구 모 판사의 소환 시기를 기자에게 알렸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사건의 경위와 검찰의 관행이 어떻든 자신의 처남 인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고, 또한 언론에 수사상황을 알리는 행위 역시 부당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 단장은 이런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남 문제에 대해서는 “인사청탁 사실이 없다”, 수사정보 유출에 대해서는 “오보 대응” 차원의 일이라고 했다. 황 단장은 또 “(감찰을 계속하면) 임은정 검사의 정치행위에 이용된다. 별 사안이 아니다”라며 “지난 금요일(15일)에 한동훈 부장으로부터 어떻게 되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라고 전했다. 29)


충돌의 시작도 한동훈이 관련된 ‘채널A 사건’이었다. 2020년 3월 31일과 4월 1일 MBC는 신라젠 수사와 관련해 채널A 기자가 검사장과의 유착관계를 바탕으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비위를 캐려고 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4월 2일 검찰총장(감찰3과장)을 수신자로 지정해 ‘최근 언론보도 관련, 진상확인 보고 지시’를 내렸다. 총장실로 들어가니 윤 총장은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총장에게 사건을 매일 보고하면 감찰조사에 개입할 여지가 커지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총장실을 나와서 허정수 감찰3과장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려고 7층 감찰부장실로 이동하는데, 구본선 대검 차장이 감찰3과장을 호출했다. 허 과장에 따르면, 총장실에서 총장, 차장, 자신(감찰3과장)이 함께 만났는데 윤 총장은 법무부 장관이 감찰부장에게 감찰을 지시하는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검토할 것을 차장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30-1)


한동훈은 2021년 인사발령으로 대검을 떠나기 직전에 감찰부장인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내 방 탁자 유리 아래에는 모 작가의 판화인 개복치 인쇄 그림이 끼워져 있었다. 바다를 유유히 다니는 개복치는 최대로 성장하면 길이 4미터, 무게 2톤에 이르는 대형 어류다. 그 형상과 움직임이 묘한 평화를 주는 생물인데, 검찰의 바다를 유영하는 나 자신 같기도 했다. 그런데 한동훈이 자신도 개복치를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상했다.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도 아니고, 이미 휴대전화번호도 알고 있는데, 왜 명함을 내밀었을까. 이상했지만 뭔가 앞으로 자신과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낀 이유가 있다. 2010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중앙지검의 어느 특수부 검사가 참고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유수단이었다. 참고인은 그때부터 그 검사와 자신이 특별한 관계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32-3)


정진웅은 한동훈을 수사하다 역으로 기소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이른바 2020년 7월 29일 발생한 ‘한동훈 독직폭행’ 사건이다. 기소 후 불과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나는 윤석열 총장으로부터 정진웅에 대한 직무집행정지를 법무부에 요청하는 공문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정진웅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정진웅에 대한 직무정지는 채널A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진실을 덮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실체적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검찰청법에 따라 검찰총장에게 이의제기서를 제출했다. 일신상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진웅 사건의 부당성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피의자인 한동훈이 검찰총장의 최측근이고,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을 배제하고 수사팀의 독립적 수사를 보장하는 취지의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해 대검 규정에 따라 대검 부장회의에서 이 건을 논의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나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2-4)


윤 총장은 마치 언론사와 약속된 것처럼 직무정지요청 공문 상신을 강행했고, 이는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나는 이 건의 직무에서 배제되었고, 감찰부장 결재란이 빠진 상태로 공문이 작성되어 법무부에 제출되었다. 한동훈이 검찰총장, 서울고검장 등과 사전 교감을 한 상태에서 진정서를 제출할 대상으로 서울고검을 선택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당사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법원을 찾아다니는 포럼쇼핑(forum shopping)과 유사한 행위다. 원래 고검은 항고 사건과 관련된 보완수사를 하는 곳이지 고소고발 사건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므로 진정 사건으로 시작해 수사로 전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찾아낸 것도 기술이고 실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검찰조직 내에 윤석열 검찰총장과 한동훈을 따르는 세력과 힘이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문재인의 검찰’이 아니라 ‘윤석열의 검찰’이었던 것이다. 검찰은 어느 정부의 검찰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늘 검찰의 검찰이었을 뿐이다. 44-5)


심재철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는 2020년 1월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으로 부임했다. 대학 후배라는 이유인지 처음부터 “선배님” 하면서 붙임성 있게 나를 따랐다. 그런 그가 2월 26일 〈주요 사건 재판부 분석〉이라는 6쪽짜리 문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약간 격앙된 상태였는데,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이런 것을 만들었다’, ‘전임 반부패·강력부장인 한동훈에게 주던 것을 나에게도 생각 없이 전달한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당시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중요 사건인 “청와대 및 조국 일가 관련 사건, 사법농단 사건, 국정농단 사건, 국회의원(손혜원) 사건, 세월호 수사팀 관련 사건”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도표 안에 그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 판사들에 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수사정보정책관실은 총장의 귀와 눈이라는 점, 또 반부패·강력부장에게 교부될 정도의 문서라는 점에서 이 문건은 검찰총장 승인하에 작성된 것이 명백했다. 감찰부장 단독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47)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2020년 11월 법무부로부터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조사를 위해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채널A 감찰방해 사건과 감찰개시 사실의 언론유출 등과 관련해 진술을 요청하는 취지였다. 출석 당일이었던 2020년 11월 6일 오전에 자료를 정리하고 출력했다. 오후에는 연가를 내고 친한 신부님, 임은정 검사와 서래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개인 차량을 이용해 법무부로 향했다. 조사를 담당한 이정화 검사는 대전지검에서 법무부 감찰담당관실로 파견돼 윤 총장 감찰사건을 맡은 인물이다. 조사실에서 만나 몇 마디를 나눴는데,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했던 이준호 감찰본부장을 평가하는 대목 등에서 그의 인식 수준과 역량이 느껴졌다. 그래서 박은정 법무부 감찰담당관을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이정화 검사, 박은정 감찰담당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판사사찰’ 문건을 제시했다. 박은정 담당관은 “이 문건은 조사대상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49)


# 이정화 검사는 차후의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 국면에서 감찰조사 내용을 누설하고 박은정 법무부 감찰담당관을 비난하는 등 윤 총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윤석열 징계 국면에서 일부 언론은 심재철과 한동수가 사전에 짜고 ‘판사사찰’ 문제를 제기했다고 공격했다. 오로지 나만의 판단으로 제보한 일인데 언론의 이런 음모론적이고 일방적인 추측 보도는 너무도 부당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일부 검사들과 기자들은 사전에 짜고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이 잦은가 보다. 당시 심재철 법무부 검찰국장은 판사사찰 문건을 내가 제보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 혼자 단독으로 결정하고 내부고발자의 심정으로 제보한 것이다. 법무부 징계기일에 출석했을 당시에 문건의 제공자와 제공받은 시기를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오해를 받더라도 문건 제공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감찰부 업무를 하는 공무원으로서 내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제보하지 않았다면 판사사찰 문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감찰부장이었지만 감찰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으니 내부고발자로서 공익신고를 한 것이다. 50)


2021년 11월 9일 대검 출입기자 10여 명이 김오수 검찰총장실 앞에 몰려왔다. 감찰부장 면담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면서 김 총장을 몸으로 막았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대치했다. 대검 기자단은 같은 날 밤 9시경 대검 감찰부의 입장문을 보이콧하겠다고 결정하고, 관련 보도를 거부했다. 검찰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지나친 행동이었다. 윤석열 총장 시절 대검 대변인이었던 권순정 검사는 고발사주 사건과 관련하여 공수처에 입건된 피의자이자 감찰조사 대상자였다. 대검 감찰부는 2021년 10월 29일 권 검사가 사용하다가 대변인 직원이 보관 중이던 공용 휴대전화를 대변인실로부터 임의 제출받아 디지털 포렌식을 진행했다. KBS, 중앙일보, 헤럴드경제 등은 권순정 전 대변인의 입장을 기반으로 일방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영장없는 압수 과정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한 전직 대변인들에게 압수 사실을 알리지 않은 데다 해당 휴대전화에는 언론사 취재 문의 내용이 기록돼 있어 사실상 언론 검열이라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82-3)


# 수사가 아닌 감찰이므로 영장은 필요 없다. 압수가 아닌 임의 제출이다. 현직 대변인의 휴대폰을 압수하거나 임의 제출받은 것도 아니다. 전직 대변인이 사용하다가 수회 초기화되어 보관 중이던 휴대전화 한 대를 임의 제출받았을 뿐이다. 공영방송인 KBS가 명백히 사실과 다른 오보를 낸 것이다.


사실 언론매체의 이러한 태도는 판사사찰 문건 때와 패턴이 유사하다. 대검 감찰부는 이 행위가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 범죄인지서를 작성하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수사정보정책관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다. 그런데 일부 언론들은 내가 심재철 검찰국장과 사전에 짜고 판사사찰 문건을 문제 삼았다고 보도했다. 조남관 대검 차장에게 범죄 인지와 압수수색영장 청구 등을 보고하지 않았다며 대검 감찰부를 공격했다. 피의자인 윤석열 총장 및 수사정보정책관실을 지휘 감독한 조남관 총장 직무대행에게 범죄인지 및 압수수색영장 청구를 사전 보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 대행은 그러한 언론보도를 등에 업고 2021년 12월 대검 감찰부장에 대해 직무이전 조치를 하고 사건을 서울고검 감찰부로 넘겼다. 내가 감찰 업무를 수행할 때 어떤 언론은 대검 감찰부장을 검찰총장의 ‘상왕’이라고 칭하면서 감찰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4)


2부 검찰의 도그마

—검찰개혁의 과제


감찰부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내가 원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찰청법상 법률로서 감찰부장의 업무상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은정 검사와 같이 내부의 관계망에 얽히지 않고 내·외부의 압박에 굽히지 않는 독립된 검사다. 나는 절차에 따라 이 두 가지 요청을 피력하고 전달했다. 2020년 6월 감찰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규정을 신설하자는 검찰청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국회 법사위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2000년 검찰의 기소권과 공소유지권을 감독하고 검찰 제반업무를 감찰하기 위한 검찰감찰청을 독립기관으로 설치한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우리나라 역시 종래 대검 감찰부가 검찰조직 내에서 검사들의 비위를 축소하고 감싸는 역할에 그치는 부작용을 해소하고, 신속성과 엄정함이라는 감찰 고유의 특성과 강점을 통해 조직 내부의 기강을 유지하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검찰조직은 여전히 감찰의 독립성에 대해 소극적이다. 96-7)


특수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리더들은 수사를 ‘전쟁, 사냥 또는 게임’으로 보는 것 같다. 2013년 당시 윤석열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팀장(여주지청장)은 국정원 직원 체포영장 집행 등과 관련해 ‘표범이 사슴을 사냥하듯’ 신속한 수사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냥식 수사를 경험한 피의자는 여우몰이, 토끼몰이를 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게임은 전략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다. 특수수사를 게임에 대비해보면, 군사가 대치한 상태에서 장수(지휘하는 검사)가 적군의 종심을 가르고 적장(피의자)을 베거나 포획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한동훈 검사는 내가 감찰부장으로 부임하던 첫날 점심자리에서 ‘죄가 될 만한 것은 어떻게든 찾으면 나오게 마련이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능한 검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판사는 자신이 영장을 발부했더라도 증명이 없거나 죄가 안 되면 무죄판결을 선고한다. 수사를 하다가 안 되면 수사를 그만둘 줄도 아는 것이 순리인데, 그와 배치되는 말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98)


표적수사, 하명수사, 인권침해적 강압수사, 높은 무죄율 등으로 비판을 받던 대검 중수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등으로 그 인력과 수사기법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대검 중수부 검사들은 이제 대통령, 법무부 장관 등으로 중앙권력을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검 중수부는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졌다. 2013년 12월 기준으로 한국법조인대관을 검색하면 대검 중수부 재직 경험이 있는 검사로는 대검 중수부장 안대희(전 대법관), 박영수(국정농단 수사 특검), 이인규(노무현 대통령 수사 지휘), 김홍일(현 방송통신위원장), 대검 중수2과장 윤석열(현 대통령), 검찰연구관 한동훈(전 법무부 장관), 이원석(현 검찰총장), 이복현(현 금융감독원장), 이정섭(현 대전고검 검사직무대리) 등이 나온다. 어느 특수부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동훈의 수사 스타일은 피의 사실을 박박 긁어서 중요 범죄는 무죄가 나더라도 사소한 범죄로 기어코 유죄를 받아낸다는 점에서 중수부 시절보다 더욱 잔인해졌다.” 99-100)


검찰에는 오만원짜리 현금이 많이 돈다. 특수활동비다. 기획재정부가 규정한 정부 예산집행지침에 따르면 특수활동비는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 수사, 기타 이에 준하는 국정수행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를 말한다. 국가정보원을 포함하여 검찰청, 법무부, 경찰청, 국방부 등이 쓰는 예산이다. 특활비를 쓰면 ‘집행내용확인서’라는 지출 증빙 자료를 남기게 되어 있다. 검찰총장이 특활비를 현금으로 지급하면 이를 받은 쪽에서 반드시 현금수령증을 작성하는데, 검찰 내부에서는 이를 ‘영수증’이라고 한다. ‘집행내용확인서’에는 특활비 집행 건별로 금액, 수령일자, 집행내용, 수령인의 성명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 ‘영수증’에는 검찰총장 비서관이 이미 날짜, 금액을 적은 것에 수령인의 이름을 적고 서명하는 것이 전부다. 집행내용이 무엇인지는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특활비의 최종 지출자는 자유롭게 현금을 쓰면 되고, 그 지출 내역을 기록하거나 증빙서류를 첨부하는 등 보고의무가 없다. 109-10)


검찰이 사용하는 특활비 등은 매해 수백억 원에 달하는 상당한 액수다. 그런데 본래 목적과 용도대로 집행되지 않고 검찰총장의 전권에 맡겨져 있으며 감시통제가 전혀 없는 사각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활비에서 주된 목적으로 내세우는 정보수집 활동은 사실 대검 감찰부 정보팀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인데, 감찰부 정보팀 수사관에게 배분되는 액수는 특수부, 공안과,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에 지급되는 액수에 비해 현저히 적다. 반면 언론의 관심을 받는 주요 사건의 수사팀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특활비가 내려가는 것으로 안다. 검찰총장의 특활비는 수사에 영향을 미치고, 총장 개인의 ‘인맥관리비’로 쓰이고, ‘통치자금’으로 쓰인다. 일선 검사들에게 특활비를 지급하면 수사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특활비의 본래 취지와 달리 공정한 수사를 해치게 된다. 나 역시 고발사주 사건과 관련하여 수시집행된 특수활동비를 받고 나니 신속하게 성과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12-3)


대검에서 총장 주재 회의를 하면 총장의 보도자료, 메시지가 먼저 준비된 다음 그것을 확인하는 회의일 때가 많았다. 회의가 끝나면 대변인은 대검 기자단 간사에게 곧바로 카톡으로 보내준다. 그러면 그 내용이 각 언론에 보도된다. 자기가 한 수사·지휘, 자신의 언행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면 우쭐해질 수밖에 없다. 칭찬과 비난에 초연하다면 그것은 도인의 경지다. 대검은 일선 청의 수사, 공판, 집행업무를 최정점에서 지휘하는 기관인데, 실제 대검에서 하는 업무의 절반은 언론 대응과 여론 관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변인은 정례적으로 기자들을 만나고, 적당한 정보를 제공한다. 과거에는 검사가 알아내기 힘든 정보를 기자를 통해 수집하도록 하는 등 검사와 기자가 수사를 함께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채널A 사건과 관련해 과거와 달리 검사가 수용자를 마음대로 소환조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되자 중간 매개체로 채널A 이동재 기자를 이용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들은 적도 있다. 115-6)


조직상으로 우리나라 검찰청의 원류는 ‘조선총독부 직속 검사국’이다. 검찰총장, 각급 검찰청의 기관장을 칭하는 검사장은 일본의 ‘검사총장’, ‘검사장’, ‘검사정’에 각각 대응되는 명칭이다. 우리나라 검사들과 일본 검사들의 교류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감찰부장실 계장이 일본 ‘사쿠라(벚꽃)’ 사진이 있는 새해 일본 달력을 내게 주기도 했다. 무슨 달력이냐고 물었더니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일등서기관 오키무라 토시유키(奧村寿行) 검사의 명함을 건네준다. 그 후 2022년 오키무라 검사는 대검 공청회에 지정토론자로 초대받아 검찰개혁의 핵심 의제인 ‘검찰의 직접수사권 축소 입법’에 반대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일본은 영장청구권을 경찰도 가지고 있고, 검찰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없으며 중대범죄만 수사하는 등 법제와 관습이 다른데 그러한 일본의 일개 검사가 왜 한국의 검찰청법 개정 논의에 토론자로 초대받아 왈가불가하고 나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21)


검사동일체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강요하던 것을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 ‘권위주의 정부’가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특히 대검 중수부에 근무하면서 권력과 선배의 말에 절대복종하고 검찰조직에 충성하며 검찰을 나간 선배들을 전관특혜로 ‘잘 모시는’ 검사동일체를 더욱 체질화하는 것 같다. 대검 중수부의 수사기법을 계승한 검사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무라이’와 같은 ‘칼잡이’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밤이 되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과시하듯 드러낸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피의자 ‘출석요구’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일제강점기 조선형사령에 근거한 수사용어인 피의자 ‘소환’을 비롯해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법정에서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증인 단도리’, 특수부 체질에 적합함을 뜻하는 ‘특수 무끼’, 사건의 얼개를 뜻하는 ‘와꾸’, 수사 실패 등 일이 끝났을 때 쓰는 ‘시마이’, 초보자를 말하는 ‘시로또’ 등 일본식 수사용어가 버젓이 검찰업무에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122)


고위직 검사일수록 무속과 친하다. 무속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적어본다.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건물 옆에 조성된 작은 공원 한편에 해치상 조형물이 놓여 있다. 원래는 1999년 5월 1일 법의 날을 맞아 대검 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법률신문 기사에 따르면, 1999년 발생한 옷로비 사건에 검찰총장이 연루되어 구속되자 “해치의 외뿔이 대검 간부들의 집무실을 들이받아 검찰이 수난을 겪는다”라는 검찰 내 여론이 일면서 건물 밖 외진 지금의 자리로 슬쩍 옮겨졌다고 한다. 마치 군대에서 빈총이라도 맞으면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해치의 뿔이 가리키면 해(害)가 되므로, 해치의 뿔이 대법원 쪽으로 향하게 해치상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대검 감찰부의 한 검찰 서기관은 이러한 사연을 들려주면서 검찰 내부에는 그렇게 해치상을 옮기고 해치의 뿔을 대법원 중앙 쪽으로 향하게 하여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123)


3부 어둠 속에서 별은 빛이 난다

—한동수의 생각


윤석열 검찰총장의 장모 최은순 씨 사건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우선 약정서의 진정성립(문서의 작성과 내용이 명의자의 의사대로 이루어져 진정성이 인정됨)을 부인하는 민사판결이 있었다. 이어 서울동부지검, 서울동부지법, 고양지청 등에서 윤 총장 장모에 유리한 구속영장 청구와 판결, 불기소결정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약정서 작성이 강요된 행위라며 진정성립을 부인한 판결이 눈에 들어왔다. 처분문서는 그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처분문서에 기재된 내용대로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민사재판의 확고한 법리다. 나 역시 오래도록 민사재판을 했지만 법원에서 처분문서의 진정성립을 부인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를 따져보니, 백 모 법무사의 증언과 서울동부지검의 수사가 있었다. 그러면서 구속영장 청구, 불기소결정, 공소제기, 형사판결 등의 수사결과가 민사재판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40)


이 사건을 통해 법기술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추론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선행 결정으로 재판을 비롯한 후행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재심 사유에 해당할 수 있는 위증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민사재판 변론종결 후 (판사들에게 죄질이 아주 안 좋은 것으로 평가되는) 변호사법 위반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그 자료를 재판부에 추가 송부서류로 제출한다. 의뢰인은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검사와 증인을 매수한다. 서류를 위조한다.’ 예를 들어, 징역형이 아닌 벌금형을 다루는 약식명령 사건을 대형로펌이 대리하고 있다면, 배후에 금액이 큰 민사사건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민사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검사의 무혐의결정이나 구속영장, 공소제기 결정을 받아내려고 노력할 것이고, 이것이 선행 결정으로 후행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고백하건대 나도 판사로 일하면서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무언가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이라는 예단을 먼저 가졌다. 140)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의 1심과 2심 판결문을 보면 임관혁, 이정호, 신응석, 양석조, 김민아, 엄희준 검사 등이 수사와 기소, 공판에 관여했다. 전부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김우진, 김기수, 김대권 판사이고(서울중앙지방법원 2011. 10. 31), 전부 유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는 정형식, 김관용, 윤정근 판사였다(서울고등법원 2013. 9. 16). 정형식 판사는 재판장으로 2008년 8월 20일 정연주 KBS 사장 해임처분의 집행정지신청 기각, 2008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이력이 있다. 3심인 대법원 전원합의체 13인 대법관 중 8인(양승태, 권순일, 김신, 김창석, 민일영, 고영한, 박상옥, 조희대)은 9억 원 전부를 유죄로 봤고, 5인(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박보영, 김소영)은 1차 3억 원 외에 2, 3차 6억 원에 대해서는 범죄의 증명이 없어 무죄라는 취지의 반대의견을 냈다(대법원 2015. 8. 20). 대법원장은 보통 다수의견에 한 표를 더하는 것이 관행이므로 실질적으로 7대 5라고 할 수 있다. 144)


검찰 수사기록에서 증거서류가 사본 형태로 편철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대로 믿지 말고 원본의 존재 및 원본과의 동일성 및 발견 경위를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원본 자체가 없거나 원본과 다른 내용의 사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결정적인 물증으로 작용한, 경리 직원이 작성한 장부는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이 사건에서 신 모 검사는 ‘공소외 7’을 데려와 검사실에서 한만호 씨와 대면하게 했고, 한만호 씨는 ‘공소외 7’로부터 이 사건은 윗선에서 이미 방향이 정해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듣고 심적으로 무너졌다. 그 후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는 자술서를 썼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거듭되는 인권침해, 허위자백과 그로 인한 오판이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공판중심주의와 전문법칙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도한 반복소환, 규정을 벗어난 사적 편의제공 등 수사비례의 원칙을 어긴 경우에는 더욱더 수사기관의 조서를 믿지 말고 법정에서의 증언을 더 믿으라는 것이다. 147)


# 전문법칙(hearsay rule)은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문증거는 경험자 자신이 법원에 직접 보고하지 않고 다른 형태[진술을 기재한 서류(조서, 진술서, 컴퓨터용 디스크 등 기타 정보저장매체)와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 등]로 법원에 제출하는 증거를 말한다.


형사법의 저명한 권위자인 미국의 리처드 레오(Richard A. Leo) 교수는 미국 수사관들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불편부당하지 않고 오히려 대단히 편파적이고 전략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라고 결론지었다. 피의자 신문실에서는 통상적으로 ‘반복 추궁’과 ‘범행 부인에 대한 공격’(피의자의 말을 막아버리거나 손이나 팔을 들어 방해하거나 피의자를 무시한 채 이야기하는 등), ‘속임수 또는 역할 기만’(피의자의 대변자인 척하는 것), ‘기망’(피의자에게 불리하게 증거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것) 등의 방법이 사용된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훨씬 더 검찰 중심적이고 자백 증거에 의존한다. 수사 과정에서 ‘압박, 거래, 속임수’라는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는 부당한 수사가 개입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통상의 법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허위자백일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수사기관에 의해 유도된 허위자백은 오판을 야기하는 가장 두드러지고 지속적인 원인이므로 재판 과정에서 각별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150-1)


수사검사가 공소제기 후 공판에 직접 관여하는 이른바 직관 제도는 과감히 폐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직관을 지지하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수사한 검사가 사건의 전 과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유죄를 인정하는 데 필요한 주장과 증거자료를 효율적으로 제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판관여 검사가 이미 사건을 잘 알고 있으므로, 불필요한 기일 공전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이유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에 반한다. “무고한 사람 한 명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보다 열 명의 죄인을 풀어주는 것이 더 낫다”는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경구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공판관여 검사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그 검사가 수사검사와 다른 시각에서 충분히 기록을 검토할 시간을 확보해주면 해결될 수 있다. 법률을 개정하여 검사로 하여금 수사권을 갖지 않고 기소 및 공소유지만 담당하도록 하면 공판관여 검사의 수를 확보할 수 있다. 153)


우리나라 검사는 수사와 기소, 영장청구권 등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아주 광범위한 권한과 재량을 가지고 있다. 반면 그 권한과 재량의 일탈, 남용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사전·사후 통제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2021년 10월 14일 ‘간첩증거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 씨를 불법 대북송금 혐의로 뒤늦게 기소한 것이 공소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것이 검찰의 공소권남용을 인정한 첫 사례다. 대법원은 검사의 자의적인 공소권 행사의 의미에 대해 “미필적으로나마 어떤 의도가 있어야 한다”라고 판시해오고 있다. 따라서 검사는 백이면 백 그런 의도가 없다고 부인할 것이고, 검사의 의도를 추단할 수 있는 수사자료 등이 법정에 잘 제출되지도 않는 재판구조에서는 그 증명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실체진실 발견을 위해 노력하는 판사라면 변호사가 검찰 또는 공범과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지, 피의자·피고인의 주장이나 입증계획을 부당하게 중단·변경시켰는지 등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154)


나는 법원 판결이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깊이 실감한 적이 있다. 2020년 제주지검 사무감사를 갔다가 서울로 복귀하는 길에 비공식 일정으로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했다. 이때 관계자 한 분이 “법원의 재심 판결이 유족들의 가슴에 맺힌 트라우마를 씻어준다”라고 말했다. 승용차 안에서 몇 분간 아주 짧게 나눈 대화인데도 그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보이셨고, 내 마음에도 강한 울림을 남겼다. 영구 보존되는 공적인 문서인 판결문에 기재된 “피고인은 무죄”라는 선언은 참으로 목메고 복받치는 치유인 것이다. 그때 법원 판결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법원은 국민의 권리와 형벌을 정하고, 검찰은 형벌을 집행하는 막강한 권력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늘 위협을 받는 존재다. 강제력을 가진 국가권력은 언제라도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그러니 법조인은 최고 규범인 헌법 가치를 준수하고 각자 내면화해야 할 것이다.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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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자유주의 - 어느 사상의 일생
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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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자유주의 관행


자유주의자들의 역사에서 네 가지 이념은 각기 다른 뿌리를 갖고 있다. 첫 번째 이념인 갈등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정은 종교 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경제 변화 및 지적 균열이 견고한 사회를 격변으로 내몰았다는 깨달음에 근거했다. 두 번째 이념인 권력에 대한 불신은 분립해 있지 않은 권한으로는 복잡한 사회를 통치할 수 없다는 근대적 깨달음과 더불어, 권력은 견제되지 않으면 무자비해질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오래된 지혜에 근거했다. 세 번째 이념인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향상되고 정돈되며 개선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열망에서 비롯됐지만,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는 17, 18세기의 종교적 각성과 계몽주의적 열정에서 생겨났다. 네 번째 이념인 시민적 존중―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건, 어떤 존재이건 간에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국가와 사회가 법에 기초해 존중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종교적 인정과 사람들의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의 강조에 근거했다. 16)


# 자유주의의 네 가지 이념 : 갈등, 권력에 대한 저항, 진보, 시민적 존중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곤경에 대한 실천적 대응으로 생겨났다. 이는 과도한 권력에 의지하지 않는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간적 진보라는 윤리적으로 수용 가능한 질서를 제시했다. 그것은 국가든 부든 사회든 우월한 권력에 의해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는 근대적이고 냉정한 사람들에게 특히 설득력을 발휘했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것을,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기획을 동등하게 존중할 것을 제안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 안에서의 도덕적·물질적 갈등을 불가피하게 여겼지만, 그 갈등이 논쟁과 실험과 교류를 통해 결실을 맺기를 바랐다. 네 가지 지도 이념은 자유주의의 익숙한 경쟁적 표어인 “자유” “개인” “권리” “평등”의 근간이자 그것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다만 자유주의의 약속이 어느 정도까지 민주주의적으로 지켜질 수 있는지, 즉 어떤 사람인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지켜질 수 있는지는 여전히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로 남아 있다. 42)


1부 자신감 넘치는 청년기(1830~1880)


1장 1830년대의 역사적 상황: 부단히 변화하는 세계


빌헬름 폰 훔볼트가 태어난 1767년의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구세계의 병폐와 골칫거리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독단적인 절대 군주, 퇴보와 무시와 문맹, 노예제와 불관용, 원하는 바를 말하고 표현하거나 바라는 만큼 돈을 버는 것의 불가능함, 발언권 없음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전에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고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던 기존의 윤리적 권위와 수용된 행동 양식들이 갑자기 부담스럽고 해명을 요하는 것이 되었다. 전에는 자연스럽다거나 없앨 수 없다고 여겨졌던 관행이나 조건에 대해 이제는 많은 사람이 대안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변화를 일으킬 당파도, 저항의 중심도, 진보의 수단도 없었다. 훔볼트의 젊은 시절에는 “liberal”이라는 말이 너그럽거나 통이 크거나 혹은 잘못에 관대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훔볼트가 죽을 무렵(1835년)에는 세상이 달라져 있었고, 놀라운 변화를 받아들이며 이끌기 위해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등장하고 있었다. 46)


1835년의 여름이 끝날 무렵, 한 라인란트 상인은 아들에게, 훔볼트가 베를린에 세운 신생 대학으로 가 진지하게 학문에 매진하라고 닦달했다. 그 청년은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고, 머잖아 그는 역사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9월에는 영국의 해군 함정 비글호가 4년간 지질학 탐사를 수행 중이던 박물학자를 태운 채 갈라파고스 제도에 정박했다. 그 박물학자는 바로 찰스 다윈이었고, 조만간 그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지배 계급의 교체를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경쟁적인 그림으로 포괄적인 자유주의적 점진주의에 도전했다. 다윈주의는―다윈 자신은 아니고―자유주의자들이 정치를 일종의 생물학으로 여기도록 부추겼다. 또한 1835년에 지방 관리로 봉직하던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 여행을 통해 전통, 신분, 특권에 등 돌린 사회를 몸소 체험한 뒤 그 신생국에 대한 어리둥절한 성찰인 『미국의 민주주의』 제1권을 출간했다. 48-9)


2장 선구자들이 보여준 지도 이념: 갈등, 저항, 진보, 존중


훔볼트는 『국가 활동의 한계』(1792)에서 국가가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소극적 복지”)을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부양하는 일(“적극적 복지”)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훔볼트는 정체政體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적합한 정체는 지역마다 달랐다. 어디서나 관건은 “가능한 한 시민들의 특성에 적극적이고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체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시대인이었던 뱅자맹 콩스탕(1767~1830)은 훔볼트의 주된 생각의 보호적이고 소극적인 측면에 동조하며 그것을 확충했다. 『정치의 원리』(1815)에서 콩스탕은 “인간 존재에게는 부득불 개인적이고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 부분은 당연히 사회라는 범위 밖에 놓여 있다”라고 썼다. 둘 다 사람들에게서 고유한 가치를 보긴 했지만, 콩스탕은 그 가치를 근대인들이 더 많은 방법으로 침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된 사적인 것으로 보았고, 훔볼트는 그 가치를 성장을 위해 배양되고 자극되어야 할 잠재력의 싹으로 여겼다. 51-2)


콩스탕이나 훔볼트 모두 선출에 대한 의식을 가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고, 노동자의 친구도 아니었다. 훔볼트의 자유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심각한 간섭이 없는 통치를 기대하는 엘리트의 자유주의였다. 콩스탕은 특권에 반대했고, 재능에 대해 열려 있는 사회를 바랐다. 윤리적으로 말해서,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투표장에서의 엄격한 평등도, 산업 민주주의도 믿지 않았다. 훔볼트와 콩스탕의 세계는 두 사람 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들로 변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훔볼트의 배경이나 콩스탕의 연줄이 없는 사람들이 정부에서의 발언권을 원했다. 경제적으로는, 사장과 노동자들 사이의 계급 투쟁이 시작되었다. 훔볼트와 콩스탕의 뒤를 이은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교훈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시민적 존중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새롭고 제한 없는 방식으로―즉, 민주주의적으로―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59)


프랑수아 기조(1787~1874)는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해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지속적으로 위협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하나의 계급·신념·이해관계가 사회를 지배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상세히 설명했다. 권력은 교묘하고 가변적이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왔다. 정치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끝없는 과정이었다. 기조는 조국을 분열시키고 유럽의 대부분과 등지게 만든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 대해 비판적으로 썼다. 그는 사회들이 조화롭지 않고 갈등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종교적 불화 및 내전에 충격받았던 보댕과 홉스 같은 앞선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절절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갈등과 무질서에 대한 기조의 답은, 보댕이나 홉스의 경우와 달리,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규범에서와 달리, 권력이 아니었다.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정치의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이 기조의 생각이었다. 60)


기조는 왕이든 시민이든 그 누구도 제약 없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조는 최종 결정권을 믿는 좌파와 우파 모두의 약점을 공격했다. 그는 예컨대 루소에게 소중한 생각,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휘하며 우리의 뜻은 철회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지휘를 맡고 있는 것은 우리의 바람들이 아니라 이성과 권리라고 기조는 생각했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바람은 일관되고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적이지 않았고, 정치는 바로 그러한 이들과 함께해야 했다. 동시에 기조는 왕의 절대 권리라는 원리에 목매는 정통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최고 권력의 행사라는 바로 그 주권 개념은 기조가 생각하기엔 폐기되어야 했다. 정치에서 유일한 주권은 법과 정의와 이성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주 중대한 결과로 이어졌다. 모든 권력 행사가 공유되어야 했다. 정부가 선거를 통해 교체될 수 있어야 했다. 언론이 제한받지 않아야 했고, 정치적 모임들이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했다. 66)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단지 투표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문화적 변화라는 큰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확산을 보았다. 사회적으로 위계가 사라지고 있듯이, 의견과 취향에서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결정권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토크빌이 보기엔 그랬다. 그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중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는 진화하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관점과 태도도 진화하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는 과도한 권력의 근대 국가와 과소한 권력의 근대 시민을 어떻게 처리할지였다. 토크빌이 생각하기에 그 둘은 연결되어 있었고, 둘 다 극복되어야 했다. 그가 가장 우려한 점은, 사회가 개입적인 국가, 특히 유익한 동기들을 가진 국가가 부추길 수 있는 계획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들의 원자화된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된 토크빌의 놀라운 그림은 많은 20세기 자유주의자를 매혹했다. 71)


19세기 자유주의 개혁가들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두 가지였지만, 그것들이 항상 같은 충고를 주진 않았다. 그 둘 중 하나는 공공의 이익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 시장이었다. 전자와 관련된 강력한 이론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였고, 후자와 관련된 강력한 이론은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이었다. 공리주의를 따르는 정부를 향한 개혁적 메시지는 사회 개선에 복무하는 개입과 통제였다. 정치경제를 따르는 정부를 향한 개혁적 메시지는 부의 확산, 생산자들의 더 많은 자유, 구매자들의 더 폭넓은 선택에 복무하는 통제 철폐와 비개입이었다. 그 메시지들은 수렴되는 것이었다. 정치경제학의 목표인 더 큰 부는 결국 공동선에 기여했다. 공리주의자들의 목표인 더 좋은 사회는 더 큰 자유와 더 많은 선택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 그 메시지들은 흔히 상충했다. 공동의 이익과 자유 시장이라는 메시지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사실상 이후 줄곧 자유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79-80)


“국가”는 정치사상과 정치적 구호의 활용에서는 깔끔한 용어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장 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이 마주한 것은 하나의 일관되고 강압적인 권력이 아니라, 지역적이면서 중앙적이고, 관습적이면서 법률적이고, 자발적이면서 의무적인, 여러 권위가 중첩된 가변적인 네트워크들이었다. 중앙집중화 압력은 20세기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두 가지 골칫거리―자신의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관료들과 잘못 이해된 집단주의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법적·경제적 힘들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도시들이 성장해 국가의 관할권이 되려 하면서, 경쟁하는 당국들 사이에서 판결이 필요해졌다. 둘째, 기업과 은행들은 큰 국내 시장을 원했다. 그것들은 도로, 수로, 철도 같은 공공시설을 원했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공통의 기준과 집행 가능한 전국적 법률을 동반하는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원했다. 요컨대 상업은 단일한 시장을 원했다. 하지만 단일 시장을 만드는 것은 중앙집중적인 국가를 필요로 했다. 81-2)


존 스튜어트 밀(1806~1873)만큼 자유주의 사상의 상충하는 요소들을 하나로 아우른 사람은 없었다. 밀은 여러 자유주의 계열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중 어디에도 붙잡혀 있지 않았다. 밀의 시대에 중앙 정부는 평화시의 책무가 거의 없고 그런 책무들에 부합하는 수단도 거의 없는 작고 흔히 부패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는 중앙 정부의 근대화와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관련된 밀의 권고 중 마지막 권고들은, 머잖아 주로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하게 될, 전쟁을 하고 성장하는 제국을 관리하며 사회복지를 통해 계급 투쟁을 억제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과 능력을 급속히 키워줄 새로운 강력한 도구들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밀은 20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좋지 않게 보게 한 이유인 경제적 약점들, 예컨대 무임승차, 이익집단의 통제, 엄격한 예산 제약의 부재 등에 대해 일찌감치 알아차린 선견지명이 있었다. 96, 103-4)


밀은 진보가 번영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 둘을 혼동하지는 않았다. 『정치경제학 원리』 제4권에서 그는 경제가 광범위한 부에 다다라 성장을 멈추게 될 때 이루어지는 “정상定常 상태”를 묘사했다. 굉장한 부자도 굉장한 빈자도 없는 균형 잡힌 사회에서는, 물질적 번영 자체는 성장을 멈출지라도, 인간적 번영은 전보다 더 완전하고 더 거리낌 없이 계속 진전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 같은 이상은 자유주의 관행에서 밀이 중요하게 여긴 것 중 많은 부분, 즉 사회 진보, 사회 균형,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높이면서 사람들 자신의 목표를 존중하기 등과 협력했다. 그러나 상업적 진보가 둔화되거나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인구 과잉과 식량난에 몰두한 훗날의 정치경제학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번영이 위축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1930년대의 세계 불황 이후 전후戰後 경제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도면 우리에게 “충분한가?” “과한가?”를 묻기 시작했다. 106)


3장 실행에 옮겨진 자유주의: 네 명의 대표적 정치인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과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1809~1898) 두 사람은 각각 자국의 장수 집권당이었던 미국 공화당과 영국 자유당을 만들고 이끌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자유주의자들을 감동시켜온 호소력 있는 발언들은 이 책에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정치 관행에는 사상적 관점뿐만 아니라 그 사상에 힘을 실어주는 수사도 필요하다. 링컨과 글래드스턴은 서론에서 언급한 자유주의적 감정들, 즉 지배에 대한 반감, 자기가 몸담은 사회에 대한 자부심과 수치심, 부당함에 대한 격분, 노력하고 행동하는 열정, 평온에의 갈망 등을 이끌어냈다. 능숙한 설교자로서 그들은 그런 감정의 더 어둡고 덜 희망적인 측면, 즉 시기와 원망, 소심한 자책, 선택적 분노, 그리고 위험에 대한 과도한 공포와 결부된 신중치 못한 간섭도 이용했다. 두 사람 다 1880~1945년의 자유주의를 앞서 가리켜 보였는데, 링컨은 전쟁국가의 탄생과 관련해, 그리고 장수한 글래드스턴은 대중 정치의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과 관련해서 그랬다. 108)


프랑스에서, 전제적인 제2제정(1852~1870)은 개혁적인 전제 군주와 협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딜레마에 처한 프랑스 자유주의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제2제정은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에겐 많은 점에서 재앙이었다. 놀랍게도 그 밖의 점들에서는 그들에게 유익했지만 말이다. 반자유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프랑스 자유주의자는 공법 교수이자 반노예제 활동가 에두아르 라불레(1811~1883)였다. 『자유주의 정당』(1861)에서 라불레는 자신의 사상을 민주주의적 자유주의로 피력했다. 두 나폴레옹이 보통선거권을 “독재적”으로 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불레는 보통선거권의 장점을 알아보았다. 대중 민주주의는 패배한 소수에게 내일의 다수가 될 희망을 안겨주고 바람직하지 않은 정부의 평화로운 제거라는 소극적인 제재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라불레는 개인의 자유, 사회적 화해, 그리고 파리와 나폴레옹 3세가 임명한 지사들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의 탈집중화를 옹호했다. 115-6)


대표적인 독일 자유주의자 오이겐 리히터(1838~1906)는 비스마르크를 성가시게 하는 진보적 가시 같은 존재였다. 리히터는 권력에 대한 비스마르크 수상의 편의적이고 교묘한 접근을 “사회 독재”라고 비난했다. 독일 최초의 전업 정치인들로 구성된 의회, 1867년에 출범한 의회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고 해외 무역, 규제 없는 시장, 긴축 예산, 시민적 자유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국가 권력과 국가의 세력 강화에 대한 적대감에서 발원한 그 신념은 단지 비스마르크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만이 아니었다. 의회에서 리히터의 동료 자유주의자 대부분은, 다른 원칙들이 독일의 국력과 번영을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불러올 수만 있다면 자유 시장 원칙들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교 우위, 국제적 개방, 작은 정부 같은 요원한 약속에 반대하면서, 그들은 당장 국력과 관세와 막강한 해군을 강조하는 비스마르크를 추종했다. 리히터는 고집스럽게도 신념을 고수했다. 116, 118)


4장 19세기의 유산: 조롱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시민적 존중의 세 가지 약속 중 비침해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과 관련 있었다. 그것은 주로 법적인 것으로서, 국가와 시장과 사회에 일군의 제약을 가해 그것들이 사람들의 프라이버시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시민적 존중의 두 번째 요소인 비방해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으로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과 관련 있었다. 주로 사회적·경제적 성격을 띠는 비방해는 사람들의 능력의 제약 없음과 사람들의 자본의 생산성에 호소했다. 따라서 계획의 자유, 장벽의 제거, 그리고 자유주의자에게는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번영을 가로막는 것으로 비치는 규제의 철폐를 주장했다. 세 번째인 비배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근원적으로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달리 말하면, 그 누구도 인간의 도덕적 공동체에서 배제되지 말아야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비배제의 범위를 제한했지만 점차 그 범위를 열심히 확대했다. 131)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유주의적인 시민적 존중의 내용 대부분이―전체는 아닐지라도―법이나 사회 관행에 새겨져 있었다. 20세기에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이 법의 시각이나 경제 효율의 관점에서 점점 덜 중요해졌고, 결국 공권력은 사람들이 더 많은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배제적인 격분과 분파적인 적의 자체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훔볼트와 밀이 바란 대로 교육이 확산되었지만, 확실하게 독자적인 시민들은 여전히 찾기 힘들었다. 헤겔, 콩스탕, 토크빌이 예견한 대로 사회는 중간 계층을 성장시켰지만 부자와 빈자의 물질적 갈등은 남아 있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점점 더 번영했지만, 동류 의식의 자연적 공급 부족―흄이 언급하고 밀이 해결하려 씨름한―은 그에 보조를 맞춰 회복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상호 수용의 메커니즘은 없다는 것을 자유주의자들은 알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존중이 사람들에게 약속한 국가, 부, 사회의 힘로부터의 보호는 결코 확실하지 않았다. 139)


2부 성숙기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씨름하다(1880~1945)


5장 1880년대의 역사적 상황: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 1880년대의 정부 지출은 국가 생산량의 10 내지 15퍼센트를 차지했다. 1945년경에는 평화 시에 그 수치가 40 내지 50퍼센트 선을 유지했다. 회사와 소비자들은 쉴 새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자기네 편의에 따라 국가를 이용했고, 어려움에 처하면 국가에 의존했고, 국가가 도움이 돼주지 못하면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애덤 스미스가 간파했듯이, 기업은 멋대로 하도록 정부가 기업을 내버려두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기업을 등한시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국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근대 국가도 전쟁을 통해 가장 눈에 띄게 성장했지만, 평화 시의 요인들도 작용했다. 188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기간에 정부는 덜 부패했고, 배타적이거나 수탈적인 사회 중추 세력의 도구로 덜 기능했으며, 더 예측 가능했고, 더 유능했다. 유권자와 기업들이 정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수록 정부는 더욱더 유능해졌고, 정부의 역량이 커질수록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148)


결국 이 모든 일은 국가의 권위가 확립된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소간 통합된 근대 국가가 다소간 통일된 국민을 통솔했다. 분열은 존속했다. 사회적으로 말해서, 독일제국은 낙후된 시골인 동부와 발전하고 산업화된 서부로 분열되었다. 미국 역시 남북의 축을 따라 유사한 분열을 보였고, 여기에 인종 문제가 추가되었다. 영국의 경우, 국가의 권위가 비교적 중앙집중적이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도로 통합되어 있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권위는 가난하고 주로 가톨릭교도로 이루어진 아일랜드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1870년 독일에 패해 부유한 산업 지역인 알자스로렌을 빼앗기긴 했어도 통일성이 있었고, 마침내 안정적인 자유주의 질서를 갖춘 제3공화국(1870~1940)에 진입했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일탈은 언제나 가능했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네 국가 모두 우리가 현재 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그 공통의 정치 관행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148)


6장 자유민주주의를 이끌어낸 타협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고전적 이상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든, 매디슨이나 콩스탕과 마찬가지로, 어떤 규모의 근대 국가에서도 직접적 참여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10』에서 대의민주주의에 찬성하는 소극적인 논거들을 제시했다. 그는 대의에서 대중의 의지의 분산을 보았고, 또한 단일 이해관계나 권력에 의한 모든 지배로부터의 보호를 보았다. 콩스탕은 『고대와 근대의 자유』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제 일을 스스로 하지만 부자들은 집사들을 고용한다”라며 좀더 적극적인 생각을 추가했다. 콩스탕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것이 진보와 번영의 다행스러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행정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근대 행정의 복잡성을 무시한 것이었고, 근대 시민들이 자신들의 “집사들”에 비해 얼마나 적은 발언권을 갖고 있는지를 간과한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거하면 위임은 오히려 방기에 가까워 보였다. 155)


라불레, 밀, 액턴 모두 자유주의자들이 투표에서 대중 민주주의와 화해할 때 채택할 만한 일련의 근거를 전해주었다. 바로 다수자의 비영구성, 다수자에 의해 지배되지 않음, 소수자의 비배제, 평화로운 교체, 시민의 참여, 노동자의 안정, 비정통파의 발언권, 그리고 공정함―일반적으로―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용은 포용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의구심은 여전했다. 영국의 법 사학자 헨리 섬너 메인은 『대중의 통치』(1885)에서 민주주의가 입법의 교착 상태를 초래한다고 불만을 표했다. 또 하나의 우려는 선거권 확대의 재정적 결과였다. 1913년, 영국 정부의 통계 전문가 버나드 맬릿이 그 문제를 적절하게 지적했다. 그는 선거 민주주의에서는 수입이 소수의 좀더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조달되는 반면 지출은 주로 “좀더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에 함축된 바는,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갖는다면, 비과세 대상인 다수의 노동 계급도 자기네 몫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7-8)


프랑스와 독일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대중의 대의代議보다는 엘리트들이 이끄는 관료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독일의 정치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정당론』(1911)에서 “과두제의 철칙” 하나를 제시했다. 좋든 나쁘든, 관료화와 엘리트에 의한 의사 결정은 민주주의적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철칙이었다. 미헬스는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은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는 중요한 문제들에서 권위주의적 해결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고 썼다. 전前 자유주의자 조르주 소렐(1847~1922)은 『진보의 환상』(1908)과 『폭력에 대한 성찰』(1908)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억압적인 가식이라며 혹평했다. 그것은 권력과 활력이라는 진정한 원천을 가리는 가식이었다. 소렐의 이야기는 열띤 반응을 낳으며 20세기의 반자유주의로 이어졌지만, 결국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소렐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타협을 경멸한 전前 자유주의자 미헬스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지지자로 끝을 맺었다. 158-9)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셀레스탱 부글레(1870~1940)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자유주의자들의 윤리적 이상들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보았다. 배타적 증오가 퍼져나가는 만큼 타자들에 대한 따뜻한 수용도 확대되고 있었다. 근대성은 사람들을 고정관념의 권위에서 해방시킨 만큼이나, 편견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초반에 많은 진지한 자유주의자는 근간이 되는 신조도, 통합을 가져오는 동족적 충성도 근대의 사회 질서에는 필요치 않다고 여겼다. 교조적이거나 분파적인 퇴보는 최악의 경우에도 단지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행복한 경로에서의 일시적 이탈로 비칠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동향은 자유주의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불관용을 용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종적·종파적 편견에 대해 국가 권력을 동원해야 하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적 부조화 속에서 시민적 조화를 꿈꿨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는 그런 식으로 되어가고 있지 않았다. 170-1)


7장 근대 국가와 근대 시장의 경제 권력


1880년대에, 자유 시장 자유주의, 혹은 더 적절하게 말해서 기업 자유주의라 부를 만한 일련의 사상이 삼각형을 형성했다. 세 꼭짓점 중 하나는 한계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강화된 시장 경제였다. 또 하나는 계약의 자유라는 원칙으로 압축되는 법적 개인주의였다. 나머지 하나는 비즈니스 출판물로, 이것은 시장 경제를 대중화하고 공론의 무기로 벼려냈다. 두 명의 걸출한 한계주의 주창자는 레옹 발라(1834~1910)와 앨프리드 마셜(1842~1924)이었다. 한계주의 해명은 경제적 선택의 성격을 분명히 했고, 그 선택이 일어나는 곳을 분리했고, 좋은 경제적 선택과 나쁜 경제적 선택을 분별하는 법을 제시했다. 그래서 한계주의자들은 아쉬움이 최소화된 개선 불가능한 한계점을 찾는다는 생각을 신중한 경제적 의사 결정의 한 가지 만능 규칙으로 일반화했다. “자유” 시장에서 제약 없이, 무역이나 거래의 대상이 무엇이든, 한계 편익이 한계 비용과 일치하는 그 지점에서 사람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게 될 것이었다. 177-8)


자유 시장 삼각형을 형성하는 이념 집합체에서 두 번째 꼭짓점은 계약의 자유라는 법적 원칙이었다. 계약의 자유 아래서는 계약 당사자들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합의할 수 있었다. 신의 의지, 다수의 의지, 전통, 공평, 공익 같은 것은 더 이상 끼어들지 않았다. 합의 내용과 관련해 당사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주권자였다. 내용이 합법적이기만 하면, 내용이 관례적인지 공평한지 정당한지 도덕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계약 당사자들의 사회적 배경은 더 이상 개입되지 않았다. 계약은 비인격적인 것이 되었다. 부자인지 빈자인지, 영리한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법원은 유효한 계약의 당사자를 사정을 알고 시장에 들어온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계약의 자유가 정치적 싸움에서 법의 볼모가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노동과 자본이 평등하지 않은 것처럼, 계약 당사자들은 평등하지 않았다. 183)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짓점은 비즈니스 출판물이었다. 한계주의보다 한참 전인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시장 대중화의 생생한 전통이 생겨났고, 19세기 후반의 비즈니스 관련 출판물들은 그런 전통에 의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바스티아(1801~1850)와 영국의 해리엇 마티노(1802~1876)는 재미있는 우화와 친숙한 예화들을 통해 자유 시장 사상을 고취하는 매우 대중적인 책들을 썼다. 태양을 가려 불공정한 경쟁자를 제거해달라는 양초 제조인들의 청원을 다룬 바스티아의 이야기와 인클로저로 부유해진 브룩 마을을 소개한 마티노의 이야기는 시장 관념을 친숙한 말로 전하는 방법의 본보기였다. 상층, 하층, 중간층이 혼합된 마티노의 인물들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대화로 표현된 영국 사회의 핵심 표본을 제공했다. 영국은 1843년에 창간된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주간 경제지라는 것의 발생을 이끌었다. 1862년 프랑스에서 『레코노미스트 프랑세』가 그 뒤를 따랐다. 183-4)


국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와 국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 간의 다툼이 한껏 격화되었을 때 한 위대한 균형자가 그들의 논쟁을 휩쓸어버렸다. 그 균형자는 바로 돈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빈곤한 측과 부유한 측은 공동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해가고 있었다. 좀더 어려운 문제는 그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 부담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 갈등은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 낮은 직접세, 작은 정부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글래드스턴의 방식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높은 관세, 낮은 직접세, 큰 정부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비스마르크와 미국의 대기업 자유주의자들의 방식이었다. 아니면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 높은 직접세, 큰 정부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새로운 자유주의”와 미국 진보당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탱할 수 없는 부채를 쌓이게 하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낮은 관세, 낮은 직접세, 큰 정부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196-7)


8장 손상된 이상, 무너진 꿈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자유주의 세계는 제국주의 세계였다.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유주의자의 마음속에 있는 경쟁적인 두 가지 갈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갈망들은 두 가지 조국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조국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꿈꾸는 질서를 추구할 수 있는 조국이다. 전자는 국가적인 것이고, 후자는 세계적인 또는 보편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적 제국의 예측 불가능하고 즉흥적인 형성 위에서 보편적 조국과 국가적 조국이라는 그 대조적인 꿈들이 떠다녔다. 일단 그 꿈들이 구별되면 19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어색함은 더 분명해진다. 자유주의적 보편주의자에게서는 ‘자유주의적’과 ‘제국적’이 화목하게 공존한다. 자유주의자들을 갈라놓는 강조점은 ‘제국적’과 ‘국가적’ 사이에, 보편적 조국과 국가적 조국 사이에 있다. 200-2)


전쟁은 일탈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서,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환한 낮의 질서에는 끼어들 수 없는 비이성적인 퇴보였다. 사실, 1914년에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믿으려면 70년에 걸친 제국의 폭력을 못 본 체해야 했다. 그러나 식민지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낙후되어 있었고, 간과되기 쉬웠다. 그것은 또한 62만 명이 사망한 미국의 남북전쟁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일단 수립되어 안정화된 진보적인 근대 국가들은 자기네끼리 싸우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로써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는 경쟁적이지만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그림에서 여전히 무장 폭력을 표백할 수 있었다. 그런 나라들은 스스로의 호전적인 정신을 흘려보낼 평화의 수로들을 갖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가치와 계속되는 갈등이 화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안식처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914년에는 믿음을 갖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때문에 그 뒤에 벌어진 일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15)


1914~1918년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자유주의 전쟁국가를 처음으로 온전히 보게 되었다. 자유주의 국가의 그러한 면모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쇠퇴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영원히 되살아났다. 1945년 이후, 자유주의의 시민들은 언제라도 자유민주주의 수호 전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무장 국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반영구적인 경계 상태에서 살았다. 자유주의의 법정, 입법부, 언론, 대중은 이제 안보 국가의 요구들에 대해 그다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크게 보면 평화적인 자유주의 스스로가 불러왔다 할 수 있는 참혹한 전쟁은 자유주의의 골칫거리인 도전받지 않는 국가 권력의 엄청난 팽창에 기여했다. 자유주의 매파는 전쟁을 자유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십자군 전쟁으로 정당화했다. 링컨이 처음에는 국가의 가치를 지키는, 그다음에는 노예 해방의 가치를 지키는 십자군 전쟁으로 전쟁을 정당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225)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과도한 권력에 기대지 않는 안정된 질서를 희망하며, 따라서 그들은 언제 반대가 요구되는지에 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은, 자신이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부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 많은 반대에 우호적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으로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더 적은 반대를 원하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처럼 생각한다. “국민에 의한 정부”라는 마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에서 통치자와 시민들은 우선순위가 다른 상이한 역할을 맡는다. 정부는 시민을 통치한다. 시민은 정부를 통제한다. 정기적인 선거는 가장 가시적인 통제 형태다. 반대―공개적 시위, 양심적 병역 거부, 시민 불복종―또한 필수적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어느 정도의 반대를 원하든 간에, 오늘날 거의 모든 자유주의자는 반대가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231-2)


9장 1930년대~1940년대의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은 질서와 자유의 긴장에 대해서보다는 닫힌 질서와 열린 질서라는 라이벌 질서들의 경쟁에 대해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용어로 이야기했다. 포퍼의 드라마는 자유주의자에 걸맞게 헤라클레이토스와 부단한 변화로 시작되었지만, 닫힌 질서 쪽에는 플라톤과 헤겔과 마르크스가 있었다. 인상적인 서문에서 포퍼는 변화, 불확실성, 삶과 지식의 잠정적이라는 특징을 수용하는 자유주의 지향의 열린 정신, 그리고 동일성, 고정성, 안정성을 갈망하는 반자유주의적인 닫힌 정신으로 세계를 사실상 양분했다. 하이에크의 주장을 이어받아 포퍼는 자유주의의 적들을 공격하는 '부정의 방법'을 수행해나갔다. 자유주의의 적들은 사회 진보를 단계적 개혁을 통한 점진적 개선의 수용으로 보기보다 유토피아로의 도약으로 보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보다 아무래도 집합적으로 더 크고 더 능력 있고 더 가치 있다고 보는 “전체론적” 시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틀렸다. 272)


포퍼는 자유주의의 정신과 실행을 과학의 정신과 실행에 견주고 자유주의의 적들의 정신과 실행은 준과학 또는 유사 과학의 정신과 실행에 견줌으로써, 기술을 중시하는 시대에 자유주의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과학은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진리를 목표로 삼는다고 포퍼는 말했다. 자유주의는 더 나쁜 것에서 더 나은 것으로 진보하지만, 이상적인 확고한 상태에는 이를 수 없었다. 과학은 비판적이고 실험적이었다. 자유주의는 탐구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개방적이었다. 실행으로서의 과학은 검증 가능한 이론들을 제시하면서 발전하며, 그 이론들은 그릇된 것으로 판명나면 폐기된다. 실행으로서의 자유주의는 정책과 제도와 정부를 검증해 그중 작동하지 않는 것들을 개조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진전했다. 포퍼의 이른바 과학의 ‘반증反證주의’에 상응하는 것이 정치의 ‘부정의 방법’인데, 그 기본 원리는 선을 최대화하기보다 악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의민주주의였다. 273-4)


3부 두 번째 기회와 성공(1945~1989)


10장 1945년 이후의 역사적 상황: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작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기간에 민주주의적 자유주의가 어떤 역사적 타협을 통해 출현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기간에는 그 타협의 조건들이 재조정되고 정착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유 시민들을 위해 주장했던 보호와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었다. 마침내 정치적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가졌다. 자유주의자들이 현명하고 교육받은 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프라이버시와 허용이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면서 윤리적 민주주의가 확산되었다. 콩스탕이 훔볼트를 눌러 이긴 것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도 퍼져나갔다. 더 많은 사람이 경제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사회는 피라미드 형태보다는 다이아몬드 형태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맨 꼭대기의 소수의 부자와 맨 아래의 소수의 빈자 사이에 두터운 중간 계층이 끼어들었다. 피셔, 케인스, 하이에크가 각자의 방식으로 구해내고자 했던 그런 종류의 경제 사회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280)


정치에서 자유주의자들을 그들의 경쟁자와 구별시켜주는 사고는 갈등을 결코 끝나지 않는 것,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1945년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의 성공으로 이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그 지론을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싹텄다. 그러나 경제와 관련된 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분쟁은 정부 대 정부 고용인, 어린아이 대 연금생활자, 주주 대 경영인, 부유한 도시 대 가난한 지방, 신기술 대 퇴조하는 산업의 분쟁처럼 다면적이었다. 정치적 갈등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는 “범분야적”이었다. 특히 경제가 나아지고 있을 때, 사람들은 도덕, 충성―머잖아 “정체성”으로 알려지는―, 신념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자체가 형태를 잃어버리고 각각 다른 “자유주의들”로 분열된 것이 아닌지 자유주의자들은 자문했다. 반면, 다른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서사의 단순화를 포기하고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분열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성취를 특징짓는 것으로 비쳤다. 280-1)


11장 새로운 토대: 권리, 민주주의적 법치, 복지


1948년의 인권선언에 대한 정치적 실망은 주로 예기치 않은 과제 변경·추가·확대의 상황에 기인했다. 권리 담론은 권리 주장을 더욱 널리 확산시켰다. 그렇다보니 머잖아 어떤 정치 이슈든 모두 사실상 권리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었다. 불만이 쏟아졌고, 뒷받침해주는 많은 논거가 있었다. 유엔에서 이른바 “권리 인플레이션”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시민적·정치적 인권이라는 1세대는 사회적·경제적 권리라는 2세대를 낳았고, 2세대는 집단과 소수의 권리라는 3세대를 낳았다. 과도한 확대의 문제는 유럽에서의 인권의 “과도한 법제화” 문제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만약 모든 정치적 요구가 인권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게 된다면, 명백한 권력 남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운동이 한없는 요구와 만족할 줄 모르는 바람으로 보일 위험이 있었다. 그것이 염려되는 점이었다. 그런 실망들이 협력해 인권의 재림을 가져왔다. 인권의 재림은 시민운동의 모습으로, 즉 문제 해결에 사람들이 직접 나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89)


비인도적 대우와 권력 남용을 반대하는 핵심 요구들은 도덕적·정치적 힘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1961년 런던에서 정치범들을 위한, 앰네스티라고 불린 캠페인을 시작한 영국 변호사 피터 베넨슨(1921~2005)의 깊은 확신이었다. 베넨슨은 “인도주의 운동은 법전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그런 주장을 비난했다. 하지만 비판자들이 놓친 것은 분노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분노는 특히, 모범적이거나 희생적인 피해자라는 존재를 기리는 데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아는 이들을 움직였다. 같은 해에 시민운동의 새롭지만 좀더 힘든 양상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중심이 된 것은 공산권의 양심수들, 특히 1966년에 투옥된 율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냡스키였다. 그들 옆에는 군비 축소 약속을 지킬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반핵 운동가들이 있었다. 289-91)


케인스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경제적 타협을 대변했다면, 복지 정책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타협에서의 새로운 큰 진전을 대변했다. 영국에서 그 계획을 설계한 사람은 평생 자유당원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였다. 베버리지의 계획은 이제 막 생겨나고 있던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국가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우파에 우호적인) 중립적인 경기장 관리자이자 법적 평등의 옹호자로 보는 관점과 (좌파에 우호적인) 관심과 연대의 활발한 중심지로 보는 관점 모두에 걸쳐 있었다. 국민 복지 정책은 덜 이론적인 방식으로 전반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했고, 영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의 도덕적·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킴으로써 “사회적 건강”을 향상시키려는 더 나은 종류의 자유주의의 항시적 관심에 화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어떤 하나의 합의된 목표나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근거가 없다는 것은 단점이 되었고, 비용이 상승하면서 특히 그랬다. 302-3)


12장 1945년 이후의 자유주의 사상


마이클 오크숏(1901~1990)은 근대적 삶에 대한 거부자였다. 그는 베버리지의 복지국가 이면에 있는 온전한 “새로운 자유주의”의 정신을 거부했다. 정치는 인문학에 속하며, 인문학을 과학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오크숏은 주장했다.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과제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적인 과제가 아니었다. 물질적 결과도 중요하지만, 정직, 자제, 예의 같은 공적인 덕목들도 중요했다. 그의 전기 작가 폴 프랭코는 좋은 의미로 오크숏에게 “반시대적”이라는 니체적 찬사를 보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나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법칙들이란 없었고, 단지 자기가 참여 중인 “대화”에 알맞은 갖가지 근거를 부여하기도 하고 빼기도 할 뿐이었다. 오크숏은 토대에 대한 관심의 결여, 면밀한 분석에 대한 무관심, 폭넓은 종합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고, 이러한 점들 때문에 존 듀이나 리처드 로티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실용주의자들과 동조를 이루었다. 308-9)


아이제이아 벌린(1909~1997)은 범주화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오크숏처럼 그도 사상에 심취했지만 기술적인 철학에는 거리를 두었다. 벌린은 사상들을 의인화하고, 대립되는 짝을 만들어 그 사상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극작가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가 동의하지 않은 사상가들이 특히 그를 매혹시켰다. 계몽주의의 자식이었던 벌린은 반계몽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갈등에 몰두했고, 갈등은 온/오프나 흑/백처럼 둘로 극화하기가 가장 쉬웠다. 글을 쓰는 사람이자 강의하는 사람인 벌린은 깔끔한 대조가 갖는 저항 불가능한 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치사상가들을 하나의 사상을 가진 고슴도치와 여러 사상을 가진 여우로 분류했다. 그는 자유주의의 가장 큰 토템을 소극적 자유(좋은 것)와 적극적 자유(나쁜 것)로 나누었다. 사상가와 정치인은 갈등을 인정해야 하며, 단순화하는 학설이나 어떤 이해관계를 다른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려는 독재적인 시도로 갈등을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벌린은 주장했다. 310)


하이에크의 사상은 항상 질서와 자유 사이의 긴장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알게 될수록 더욱더 민주주의 선택에 따른 질서, 법, 제한들을 강조했다. 경제에 대한 무지는 계획과 중앙의 규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 법이 이해관계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 돈과 자유가 윤리적 쌍둥이인 이유는 “경제에 대한 지배”가 곧 “우리의 목표들 모두에 대한 지배”이기 때문이라는 것, 법 앞의 평등만이 중요할 뿐 결과의 평등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를 독창적으로 끌어들였다. 노조 없는 노동 시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새로운 사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웠다. 독점은 국가만큼이나 강제적일 수 있었다. 벌린의 어떤 암시를 반향하며, 하이에크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자유주의의 적은 전체주의와 삶에 대한 중앙집중적 통제였다.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 정치였고, 이는 자유와 양립할 수 있었다. 317-8)


정치 언어의 사용과 오용에 대해 숙고했던 조지 오웰(1903~1950)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반공산주의자, 토리파 무정부주의자라 칭했다. 글에서는 격정적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지식인들을 조롱한 지식인이자 특권적 사회주의자들을 경멸한 좌파 이튼스쿨 동문이었다. 오웰은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한 점을 인식했는데, 그것은 바로 불변성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정치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혁명가는 잠재적 토리파인데, 모든 것이 사회 형태를 바꿈으로써 고쳐질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변화가 이루어지면, 그들은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오웰은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가 사실상 무제한이라는 신념과 불의에 대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신념을 결합했다. 높은 요구와 낮은 능력으로 인한 오웰의 승산 없는 도덕성은 그를 영국의 실존주의자로 만들었다. 322-3)


알베르 카뮈(1913~1960) 역시 달갑잖고 다루기 힘든 사회에서 거부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카뮈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이후에 보수주의자들이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근대성의 범죄들은 자유 때문인가 아니면 자유의 악용 때문인가? 최초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카뮈는 근대성의 과도함을 자유 자체가 아니라 자유의 악용 탓으로 돌렸다. 과도한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카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는 보편적 의무에 대한 반항을 취했다. 신의 침묵, 자연의 무심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직면했을 때 유일하게 온당한 반응은 반항이라고 카뮈는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반항적임은 우리의 인간성을 규정해주었다. 반항은 불가피하게 사회적이었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관련시켰다. 서구의 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철회의 책인 『실패한 신』(1950)처럼, 카뮈의 책은 스탈린주의의 폐해에 대한 좌파 지식인의 비판 표명을 억제해온 그간의 분위기를 해제하는 것이기도 했다. 324-5)


“유능한 판관들”이 사람들에게 삶의 더 좋은 형태와 더 나쁜 형태를 보여줄 수 있다고 밀이 생각했다면, 존 롤스(1921~2002)는 그 유능한 판관들의 지도적 권위가 이제 사라졌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런 민주주의적 환경에서, 롤스는 공정 지향적인 근대 시민들이 인정하고 참여할 수용 가능한 자유주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원리들로 어떤 것이 있을지 알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지만 공정과 정의의 요구에도 열려 있다고 보았다. “정의로운 사회가 정의로운 시민을 만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라는 오랜 난제에 대해 사실상 그는 “둘 다”라고 주장했다. 롤스는 자신의 사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원천에 의존했는데, 정치적 의무에 대한 사회계약론, 칸트의 보편주의 윤리학, 당시의 사회과학, 합리적 선택 이론, 그리고 특히 자신의 도덕적 직관이 그것이었다. 롤스 체계의 복잡함은 어느 정도는 그 체계의 다양한 부분이 서로 맞물릴 것이라는 희망에 기인했다. 328-9)


권리는 자유주의 사유에서 개념적 마스터키가 되었다. 권리는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권리는 롤스의 사회 지향적 자유주의에 대립해서도,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소환되었다.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1974)에서 정의에 대한 롤스의 원칙들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노직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는 사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정치 시장에서 우파 논객들은 공정한 절차에 대한 롤스의 표면적 관심이 평등한 결과에 대한 평등주의적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직의 비판을 환기했다. 노직은 전후의 복지국가주의적 타협이 느슨해진 1970년대의 경제적 격변에 비추어 글을 쓰고 있었다. 노직에게 평등권은 그 어떤 정부도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고 자유롭게 체결된 계약을 집행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축소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사람들의 반박 불가능한 자연적 자유의 한 가지였다. 337)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사실상 일체의 자유주의에 대한 좀더 전면적인 거부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에 기인한 것이었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1981)에서 자유주의가 도덕성에 대한 잘못된 묘사에 의존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원하게 된 것이 사람들의 가치와 이상을 결정한다고 가정했지만, 실은 가치와 이상이 사람들이 당연히 원해야 하는 바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매킨타이어가 생각하기에는 도덕적 부정합성이 자유주의의 원죄였다. 자유주의자들은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관점들을 파괴하는 장치”라는 치명적 결점을 물려받았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본성에 걸맞은 목적을 찾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을 포기함으로써, 계몽주의는 도덕성과 사회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도덕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음울한 설명은 현대 사유 일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설명과 유사했다. 둘 다 이론의 부정합성과 실천의 붕괴를 강조했다. 339-40)


13장 1950년대~1980년대의 폭넓은 자유주의 정치


“산업혁명의 근본 문제들은 해결되었다. 노동자들이 산업적·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은 『정치적 인간』(1960)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후의 물질적 풍요는 경제적 갈등을 감소시켰고, 새로운 방식으로 시민적 존중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를 침묵시키지는 못했다. 국가의 권력, 시민의 자유, 시민적 존중의 정당한 수단, 심대한 윤리적 불일치의 수용과 관련해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전후에 이어지던 경제 호황이 1973년에 끝나자, 다이아몬드 형태의 사회에서 상층과 중간층에 있는 사람들이 하층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물질적 갈등 자체가 되살아났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변화들은 많은 사람에게 환영할 만한 격변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들은 격변이었다. 그것들은 기대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친숙한 패턴들을 교란시켰다. 그것들은 분노에 찬 반대와 좌절된 희망이 뒤섞인 강력한 반작용을 축적해갔다. 344, 355)


제임스 뷰캐넌(1919~2013)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늑대로서의 국가를 생각해보라고 촉구했다. 뷰캐넌은 정치인과 관료들은 득표나 종신 고용을 위해 자신들을 “팔” 것이고, 따라서 공공재가 과잉 공급될 공산이 크다고 주장했다. 뷰캐넌은 롤스가 그랬듯이 원칙의 문제에 대한 합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하이에크와 달리 뷰캐넌은,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적·윤리적 안정성을 영원히 뒤집어버리기 이전의 분명한 역사적 평온 상태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을 믿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이 믿을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과세와 지출의 헌법적 제한에 대한 뷰캐넌의 사상은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까지 퍼져나갔다. 거기서 공화당원들은 정부 지출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줄이기 위한, 자기 제한적 조례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뷰캐넌의 연구는 미국 대중 전반에서 커지고 있던 반정치적 정서에 학문적 무게를 부여했다. 358-9)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심지어 정부의 유일한 경제적 임무라고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정부에 기대하게 된 다른 임무들은 프리드먼이 생각하기엔 정부에 의해 수행되어 분명 악영향을 미치거나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어 더 좋은 영향을 미치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는 항상 일시적 절충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구적 절충은 없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의 발생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높은 인플레이션은 일자리를 없앤다. 케인스의 교훈에 따르면, 정부는 돈을 더 풀거나 더 지출함으로써 약간의 인플레이션 상승을 대가로 아주 조금의 실업률 하락을 얻을 수 있었다. 프리드먼은 동의하지 않았다. 359-60)


1970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와 미국주의의 결합이 믿음을 주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미국주의 각각이 도전에 직면했다. 좌파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의 오랜 루스벨트-트루먼 연합의 분열을 도왔다. 민주당은 국가와 도시보다 피부색, 민족 집단, 젠더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기 시작했다. 우파에서는 도덕 정치가 과거의 소수파를 지배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핵심 세력으로 만들면서 공화당을 완고하고 협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적 성취에 대한 기술로서든, 어떤 사회적 이상에 대한 기술로서든, 하나의 당파적인 정치적 꼬리표로서든, 미국 정치에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은 전쟁의 깃발이 되었다. 대처는 시장 권력을 해방시키기 위해 국가 권력을 사용하면서 국가를 공격했다. 레이건은 비슷한 목적으로 정부를 운영하기 위해 비슷하게 정부에 맞섰다. 대처가 정부를 이기적이고 못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면, 레이건은 정부를 우스워 보이게 만들었다. 367-8)


프랑스에서 반자유주의적 좌파는 급진 녹색당, 반신자유주의자, 현대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발효시키며 살아남았다. 그중 어느 쪽도 자유주의적 중도주의에 대한 자신만의 일관성 있고 신뢰할 만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 각각은 자유주의의 자기만족에 구멍을 뚫는 날카롭고 효과적인 못과 같았다. 극우파는 생명력을 이어갔는데, 그들은 미국 공화당 우파의 경우와 비슷하게, 거대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맹목적 애국주의 및 오래된 저열한 편견들과 결합시켰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드골주의 우파의 영웅적 저항과 국가적 자부심에 대한 신화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좌파의 미완의 혁명에 대한 전설도 사멸해가고 있었다. 호화로운 퍼레이드가 열린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식에 어떤 정치적 주안점이 있다면, 그것은 압제자를 끌어내리거나 계급 투쟁을 재개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방, 다양성, “차이”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언제나 역사적 사건들의 총체 그 이상이었다. 371)


4부 21세기 자유주의의 꿈과 악몽


14장 자유민주주의를 흔든 20년


트럼프 휘하의 미국 공화당원과 이민배척주의자들에게 꽉 잡힌 영국 보수당원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강경 우파 정치 엘리트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었다. 언제든 대의 정부의 익숙한 규범들을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권력 분립을 못 견뎌한다는 것, 도전을 받으면 재빨리 자신들이 국민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답한다는 것,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국제적 합의에 의해 약속된 오래된 원칙들을 뒤집거나 무시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지지자들이 보기에, 강경 우파의 지도자들은 어려운 시기에 분열된 사회에 방향을 제시했고, 헌법의 규범을 뒤틀거나 무시했던 과거의 독단적이지만 존경받았던 지도자들―예컨대 루스벨트, 처칠, 드골―의 방식으로 공직의 권한을 사용했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트럼프 공화당과 브렉시트 보수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험한 반전으로, 이제 제한 장치나 자기 수정 장치가 파괴된 채 비자유주의적이거나 비민주주의적인 권력 형태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379)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부식제인 포퓰리즘이 진행 중인 상황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 널리 제시되었다. 포퓰리즘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포퓰리즘이 제도적 장치나 민주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자기 정당화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포퓰리즘 자체의 논쟁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포퓰리즘은 엘리트 현상이다. 포퓰리즘은 흔히 인민과 엘리트 사이의 경쟁으로 잘못 소개되지만, 사실 포퓰리즘은 엘리트끼리의 경쟁으로, 한쪽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인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흔히 특정 인종의 국가로 상상되는 어떤 고결한 국가를 부패한 기성 체제와 위협적인 외국인들로부터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부패한 기성 체제와 부자들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이 인민이라는 그 신화적인 존재를 얼마나 소리 높여 대변하든, 흔히 그들은 자신들이 몰아내고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적수들과 같은 배경을 가진 활동가였다. 380-1)


경제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다는 주장은 자유민주주의에 불리한 일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로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사회 갈등은 충분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만 관리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저성장 혹은 제로 성장이 치솟는 물가와 결합된 1970년대에는 경제적 우파가 경제적 좌파와의 논쟁에서 승리했는데, 우파의 논지는 대체로 1970년대의 파괴적인 인플레이션을 1930년대 이후의 통설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그다음에 유럽 전역에서, 경제적 우파의 대안―인플레이션 없는 성장, 낮은 세금, 균형 예산―이 그것의 내부 긴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통설이 되었다. 중국과 인도의 무역 개방과 경제성장에 힘입어, 그 새로운 통설은 저인플레이션과 강력한 성장의 1990년대에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도 좌파 정당들도 그것을 수용해, 이들은 경제의 측면에서 중도 우파 정당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되었다. 386-7)


자유 시장과 작은 정부 통설이 공개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포기된 것은 2008년의 금융위기와 그것의 여파에 이르러서였다.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밀어붙인 결과, 자유 시장 통설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게다가 30년 동안 계속된 복지비 삭감은 위기가 닥쳤을 때 사회적 비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은 없었다. 케인스식이든 하이에크식이든 프리드먼식이든 한 가지 답은 없었다. 정부는 그때그때 조치를 취했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세금이 낮아졌고, 정부는 지출을 늘렸다. 하지만 이미 세금이 낮았기 때문에 재정적 도구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재정 적자에 대한 걱정이 덜한 달러 발행국 미국을 제외하고, 정부들은 곧 다시 지출을 줄였다. 교리는 혼란에 빠지고 통설들은 퇴색했지만, 분명한 것은 경제성장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의 제한 없는 사회적 약속들은 이행되지 못할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387-8)


자유주의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기후 변화의 딜레마와 다르지 않았다. 기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비용을 별로 혹은 전혀 들이지 않고 무대책으로 있다가 나중에 극심한 위기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예방했는데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날 수도 있다. 복지 자본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미래의 은총을 믿고 있다가 은총을 받지 못하면 사회 갈등에 직면하게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면, 사회적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장치와 시장의 은총이 어떻게든 가져다줄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기술적 조치가 성장을 촉진하리라는 데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한 정치적 동의는 거의 없었다. 마술적인 해법을 제쳐놓는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타협에 대한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393)


자유주의자를 몽유병자로 여기는 대단히 비판적인 의심자와 조롱자가 많았다. 국수주의적 열기의 회귀에 직면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럼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이상을 분명히 하는 것, 위축되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 이상들을 고수하는 것, 무엇보다 초점을 흐리는 단순 논리들을 피하는 것이었다. 초점을 흐리는 단순 논리들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3)에 담겨 있는, 윤리적-문화적 갈등이 계급 간 경쟁을 대체했다는 주장이었다. 문명이란, 지정학 내에 설득력 있게 배치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의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2008년 이후 몇 년 동안 계급과 불평등이 기운차게 정치로 돌아온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문화가 정치 갈등의 원인인 계급과 경제를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문명 전쟁은, 그런 전쟁이 도모되고 추진되는 게 아니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420)


둘째, 자유주의가 서구의 여권을 가지고 왔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자유주의가 19세기의 의상을 입고 왔다는 주장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서구가 보기에는 보편주의, 나머지가 보기에는 제국주의”라는 조롱 섞인 주장은 “나머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애매모호했다. 자유주의 가치가 서구적이라거나 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그 “나머지”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별로 없고 발언권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다른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열정적 애착이 없는 자유주의자라는 주장이었다. 브렉시트 캠페인에 동원된 거짓말 중 하나가 바로 국가적 감정에 관한 거짓말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만을 갖고 있고 초국적 애국주의를 느낄 줄은 모른다는 주장은 틀렸다. 국가도, 국가 아래의 하위 집단도 그것들 자체에 대한 누군가의 충성심이나 감정을 요구하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청구권을 갖고 있지 않다. 420-1)


15장 정치의 우선성


이 책에 서술된 자유주의의 역사가 암시했듯이, 보편적 교육과 문화적 진보는 인간의 사리 분별을 보증하지 않는다. 계몽하고 개선하려는 자유주의적 열정은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충동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근대 경제는 저절로 믿음직하게 안정화되지 않는다. 국제 무역과 금융 거래는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거만한 위세는 적대적인 비판자들의 주장과 달리 자유주의의 일부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인지하고 맞서 싸워야 할, 자유주의 덕목들의 습관적 악습이다. 20세기 초에 자유주의자들은 충격적이게도, 자유주의의 평화적 질서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성공이 가능케 한 규모의 전쟁과 야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1세기 초에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자립적이지도 않고 전 세계에 행복하게 확산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교훈들을 하나로 뭉뚱그린다면, 자유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방어되고 보수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교훈이다. 438)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의 가장 큰 약점은 정치적 합의와 정치 참여를 혼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비판은 건강한 자유민주주의가 지속적 성공을 위해서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시민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지속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 자유주의는 합의를 필요로 했다. 자유주의는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자유주의자가 많이 있을 것을―대다수일 것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느 때건 실제로 정치에 관여하는 이들, 즉 정치인, 공무원, 기부자, 활동가, 자원봉사자는 늘 소수다. 자유민주주의는 스스로의 제도들을 계속 보수하고 스스로의 결점들과 싸우기 위해서, 활발한 소수의 적극적 자유주의자와 신뢰할 수 있는 다수의 수동적 지지를 필요로 했다. 그 두 가지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치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가능하다. 441)


“정부가 문제”라는 슬로건보다 사회에 더 큰 해를 끼친 슬로건은 없다. 사람들이 현재 자유주의를 ‘작은 정부’ 교리로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자들 자신도 이에 책임이 있다. 교조적인 ‘자유 시장’ 자유주의는 과도한 국가 권력에 너무 오래 집중함으로써 정치적 난제들을 낳았는데, 오늘날 부의 과잉 집중과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 속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해 있는 것이 바로 그 난제들이다. 주된 경제적 난제는 불평등 자체가 아니며, 불평등으로 인한 어려움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경제적 난제는 성장이 너무 느리고 임금이 너무 낮고 노동 불안정성이 공식적 실업률이 말해주는 것 이상으로 높다는 데서 암시된다. 근본적인 사회적·정치적 난제는 특권의 강화와 특권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인데, 이 두 병폐의 증상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다. 지난 30~40년간의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극명한 결함은 다수가 아닌 소수를 위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력을 함께 운용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444)


이 책은 실제로 시도된 적 있는 알려진 정치 관행들 중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결함이 적다고 가정했지만,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목표는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더 잘 파악하여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더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작가이자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는 자신의 노트에서 동료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되어야만 더 나아질 것이라고 썼다. 이 책 『자유주의: 어느 사상의 일생』은 그런 조언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만약 21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비판자들이 하듯이 자신의 모든 난제를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쌓아 올리고만 있지 않는다면, 만약 그들이 이전의 자유주의자들처럼 저항, 진보, 존중이라는 목표를 새로운 도전에 걸맞게 재고할 수 있다면, 만약 그들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많은 결점을 일부라도 고쳐보려는 정치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희망의 동상 아래 자유주의를 묻어버리기는 아직 너무 이를 것이다. 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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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54
개리 거팅 지음, 전혜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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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과 작업 


"레몽 루셀(1877~1933)은, 푸코가 파리 좌안의 조제 코르티 서점에서 우연히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발견했던 1950년대까지도 도외시되던 주변부 작가이자 '실험주의자'였다. 그는 문학 이론이나 문학 운동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가 아주 중요한 작가라는 과대망상의 감각으로 글을 썼던 사람이다." "푸코는 무엇보다 루셀의 바로 그 주변부성에 매료되었다.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채 '정신병자'로 분류되어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언제나 주류의 기준들에 따라 배제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연민을 느꼈다. 처음에는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부르주아지 혐오에 불과했을지 모를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사회를 정의하는 규범적 배제에 반대하는 강한 개인적 참여[앙가주망]로 발전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가 펼쳤던 감옥 개혁 운동처럼) 우발적 사회 운동도, 또 자신의 글들을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상자'로 여기는 방식도 이러한 참여에서 비롯된 것이다."(19-22)


"그러나 루셀이 인간의 주체성을 배제한 것 역시 푸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선 루셀의 저작들에서 공간적 객체성이 시간적 주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배제를 암시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경험에 대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사물이나 행동에 대한 정교한 기술(記述)을 제공한다. 그의 작품들은 다른 수준에서의 저자의 주체성의 표현도 아니다. 쓰인 말들은 루셀의 사유나 감정보다는 언어 자체의 비인격적 구조들로부터 흘러나온다. 형식적 법칙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는 까닭이다." "언어 안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 그리고 주체성의 절대적 한계와 소거로서의 죽음을 푸코는 명시적으로 연결한다." "루셀의 작업들에 대한 분석에서 분명한 건 푸코가 자기상실에 매료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죽음을 통한 자기 상실에도, 그리고 루셀의 글쓰기와 같은 언어적 형식주의 안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거울을 통한 자기 상실에도 매료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22-4)


"『임상의학의 탄생』은 여러 면에서 『레몽 루셀』에서의 심미주의에 대한 과학적 대응물이다. 두 책의 두드러진 차이점 하나는, 일관된 박식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맹렬한 비판의 섬광과 같은 것이 『임상의학의 탄생』에는 있지만 『레몽 루셀』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푸코는 〈'의사/환자 관계'라는 (···) 어렴풋이 에로틱해진 어휘〉를 조롱한다. 그에 따르면, 〈이 어휘는, 너무 많은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결혼의 환상이 갖는 무기력한 힘들을 전달하려 애쓰다 지쳐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폭발은, 비록 자주 발생하지는 않지만, 푸코의 역사 연구가 갖는 특징이며, 그 연구가 갖는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어젠다를 암시한다. 반면 『레몽 루셀』은 심미적 기쁨 그 자체에 완전히 도취되어, 루셀이 〈몇 번의 여름 동안 내 사랑이었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는 푸코를 보여준다. 이러한 대비는, 푸코의 삶과 사유에서 심미적 관조와 정치적 행동주의 간의 근본적 긴장과 관련한 초기의 두드러진 사례다."(25-6)


2. 문학 


"푸코는 우리가 엄밀히 말해 '저자'가 아닌 '저자 기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텍스트와 그저 특정한 실제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이를테면 인과적으로 그 텍스트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텍스트와 관련해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정의된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건조물이며, 문화와 시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니체는 '누가 말하는가?'(누가, 어떤 역사적 입장에 서서, 어떤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경청될 권한을 주장하는가?)를 늘 텍스트에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문학에 관해서라면 말라르메가 이 질문에 답했다고 푸코는 말을 잇는다. '말 자체'가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글을 통해 말하는 것들 대부분은 그들이 가진 독특한 통찰력이나 능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텍스트에서 그저 언어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31-4)


"한 표준적(낭만적) 구상에서는 저자가 개인의 유일무이한 통찰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구조에 맞서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의 가정은 저자가 언어 이전의 개인적 비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즉 한낱 관습적 표현으로 기울어지는 언어의 경향에 대항하여 작동해야 하는 것의 표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고전적' 구상에서는 저자가 전통적 비전을 구현하는 또 다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표준적 구조들을 받아들이고 활용한다고 본다. 고전적 관점과 낭만적 관점 모두 글쓰기는 개인들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문제라고 본다. 그 두 관점의 차이는 단지 그 표현된 것이 저자 자신의 사적 비전인지 아니면 저자가 전통으로부터 차용한 것인지와 관련된다. 하지만 푸코는 특히 저자가 언어와 관계 맺는 또 다른 방식에 흥미를 갖는다.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자로서의 저자 개념의 죽음이다."(34-5)


"푸코가 니체와 아르토 그리고 레몽 루셀 같은 '미친' 작가의 작품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푸코는 이런 경우에조차 작가의 성취가 결코 문자 그대로의 광인의 성취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광기'가 '작품의 부재'임을 상기시킨다." "'미친' 작가들의 특권과 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그들이 제정신인 세계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하는, 그들의 한계적 위치에서 기인한다." "푸코가 아방가르드 문학에 매료되는 것은 극단적 (한계-) 경험 속에서 일상적 삶을 넘어서는 진실과 성취를 추구하는 그의 경향의 한 측면이다." "사인(私人)으로서의 푸코에게 이 강렬함에의 유혹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1960년대, 그러니까 문학에 대한 에세이들 대부분을 썼던 이 시기가 지나고 나자, 한계-경험과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라는 확신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대신 그는 인간 해방을 가져오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한 훨씬 더 정치적인 구상 쪽으로 옮겨간다."(42-4)


3. 정치 


"드레퓌스 사건이나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특히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지식인의 삶에는 강력한 정치적 색조가 있었다. 난해한 철학 논문이나 사회학 논문들이 비난받거나 찬사를 받는 이유는 거기서 감지할 수 있는 입장, 즉 당시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사르트르의 주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글쓰기는 참여적(engagé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참여 문학은 글쓰기와 역사적 상황의 피할 수 없는 관계 맺음을 인식하는 글쓰기이며, 그 글의 독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내재된 인간 해방의 잠재력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끔 하기 위해 분투하는 글쓰기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그런 글쓰기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그런 글쓰기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에 내재되어 있는 영원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기 세대의 다른 모든 지식인들처럼 푸코도 사르트르의 그늘 아래 성장했다."(48-9)


"사르트르보다 스물한 살 아래인 푸코가 전쟁을 경험했던 때는 혼란스러운 청소년 시절이었다. 전후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과 모호함 속에서 자라난 그는 사르트르의 윤리적·정치적 절대성에 회의적이었다. 그가 〈보편 지식인〉, 자유정신, 〈보편적인 것의 대변자〉, 〈진실과 정의의 주인 자격으로 말하기〉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허세를 문제삼을 때 그는 분명 사르트르를 염두에 두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이것은 한때 틀림없이 가치 있는 소명이었지만 오늘날 보편적인 도덕 체계는 더 이상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효과적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에겐 해당 문제들에 구체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의 상세한 답변이 필요하다. 푸코는 이것이 〈특수 지식인〉, 그러니까 교수, 엔지니어, 의사, 또는 자문 위원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특수 지식인은 〈국가에 봉사하든 반대하든,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생명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자, 말하자면 사르트르가 아니라 오펜하이머다."(50-2)


"로티는 푸코의 정치적 분석이 〈그 어떤 '우리'에도 호소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로티는 푸코가 그 어떤 합의로부터도 출발하지 않음으로써 담론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혼동하고, 자유 사회의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기 창조의 일부로서만 적절한 가치, 이를테면 강렬한 한계-경험의 추구 등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푸코는 이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을 당혹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푸코는 봉기라는 근본적 행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러한 봉기를 통해서만 '주체성(위대한 사람의 주체성이 아닌 누군가의 주체성이)이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푸코가 그런 판단 자체를, 정치적이거나 다른 윤리적 틀의 이론적 범주를 적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소여로 간주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상황을 직접 경험한 이들의 판단 외에는 그 어떤 권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59, 62-5)


4. 고고학 


"푸코는, 어떤 주어진 영역에서 어떤 주어진 시기에 사람들이 사유할 수 있는 방식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천체가 원을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거나 땅을 이루는 물질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수 세기 동안이나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일련의 제약이다." "따라서 '관념사'─여기서는 과학자들, 철학자들 등의 마음속에서 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미한다─보다는, 그들의 사유의 맥락을 형성하는 기저 구조가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우리는 흄이나 다윈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흄이나 다윈을 가능케 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것이 푸코의 유명한 '주체의 주변화'의 핵심이다. 그가 개인의 의식이 실재함을 부정한다거나, 혹은 더 나아가서 개인의 의식이 최고의 윤리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푸코는, 개인은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한정하고 또 제한하는 개념적 환경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69-70)


"'주체-중심적' 설명은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내러티브로 본다. 이야기나 내러티브는 한 사람 혹은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경험의 관점에서 말해지기 때문에 의식의 연속성과 목표 지향성을 가정한다. 그래서 역사는 인간의 관심사에 의해 통합되고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결론에 이르는 플롯과 더불어 하나의 소설이 된다. 이런 내러티브는 피상적으로는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런 내러티브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역사가 연속성과 목적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릇된 가정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 역사를 체험하는 의식들의 경험과 기획이 주도한다는 그릇된 가정 말이다. 고고학은 우리가 우리 삶에서 읽어내는 연속성과 방향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의식 외부의 요인들을 도입한다. 푸코의 역사는 텍스트를 기록물(document)이 아니라 기념물(monument)로서 다룬다. 고고학적 은유로 말하면, 푸코의 관심은 연구된 특정 대상(텍스트)이 아니라 이 대상이 발굴된 그 현장의 전체 구성에 있다."(71-3)


"다른 한편 푸코는 마르크스주의나 다른 형태의 사적 유물론의 방식으로 경제적 힘이나 사회적 힘과 같은 외적 힘을 통해 관념들을 설명하는 기획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기획은 오히려 인간 사유의 의식적 내용에다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인간 사유를 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에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잠재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잠재력은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발견되는 필연성에 도전하는 대안적 사고 방식을 제시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광기를 '정신질환'으로 여기는 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합리적 대안은 없다고 믿지만, 푸코의 고고학에 따르면, 현대 과학 세계의 '아버지들'인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도 불과 200년 전에는 광기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유했었다." "이러한 개념이 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논쟁을 유발하는 실천들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고고학은 분명 언어적 추상화에 대한 중립적 기술(記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74, 81-2)


5. 계보학 


"단순히 역사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니체와 푸코의 계보학은 상당히 다르지만 푸코는 근본적인 측면 하나에서만큼은 철저하게 니체적이다. 푸코 역시 비판적 의도를 가지고 계보학을 사용한다. 니체는 계보학을 사용해 우리가 가장 우러르는 제도들과 실천들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푸코의 계보학 역시 한 사회의 제도들과 실천들의 진짜 기원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의 자기이해와 관련된 공인된 의미들과 평가들을 해체한다. 〈역사의 시작들은 하찮다. 비둘기의 걸음처럼 겸허하고 소박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소롭고 아이러니하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모든 자만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어떤 것의 계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치 있고 영속하는 것을 낳는 우연, 미세한 일탈, 혹은 반대로 완전한 역전, 즉 오류, 허위 감정, 잘못된 계산을 식별하는 것이다.〉 이 인용문들은 니체에 대한 푸코의 설명이자 푸코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92-3)


"푸코의 계보학이 명백히 니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 있다. 바로 지식과 권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생각의 변화가 생각 자체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푸코의 기본적인 통찰, 즉 생각들이 바뀔 때 그 원인은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사회적 힘들이라는 통찰을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지식에 대한 푸코의 고고학적 관점을 고려할 때, 권력은 우리 지식의 기저에 놓인 근본적인 고고학적 틀(에피스테메 또는 담론 형성)을 변형시킨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모호하고 논쟁적인 개념을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사유 체계(이를테면 플라톤 철학,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으로 제시했었다." "푸코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심 없는[객관적인] 증거와 논증의 힘에만 근거한다고 자부하는 과학, 종교, 그리고 여타의 인식들이 갖는 권위 뒤에 도사리고 있는 힘을 찾아내는 니체의 테크닉에 분명 감명받았고, 그 테크닉을 채택했다."(95-7)


"푸코는 권력이 지식을 제약하거나 제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긍정적[실정적]인 인식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권력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푸코의 생각이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한 의심은 객관적이고 상대화되지 않는 진실에 푸코가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비판일 때도 있고 칭찬일 때도 있는 끈질긴 주장의 기초가 된다. 만약 내가 믿는 모든 것이 내 사회의 권력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면, 내 신념이 그 사회의 기준과 무관할 경우, 어떻게 그것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비평가들은 푸코의 입장이 자기논박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신념이, 그 신념들이 기원한 권력 체계에 대해서만 유효하다면 푸코의 상대주의적 주장 자체는 기껏해야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질 뿐이다. 푸코가 종속되어 있는 동일한 권력 체제에 우리도 종속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의 입장을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와 무관하다."(96-9)


6. 복면 철학자 


"철학에 대한 근대적 구상을 정의하는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푸코는 철학적 기획의 일반적 비판의 방향을 공유하는 정도의 철학자다. 그러나 그는 칸트나 대부분의 다른 근대 철학자들의 관심을 공유하지 않는다. 요컨대 생각, 경험, 행동의 필요조건들의 한계를 정하는 철학적 진리의 독특한 영역을 찾는 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푸코가 현상학적 분석이나 언어학적 분석이 진정으로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기획은 그러한 진실을 향하기보다는 필연성으로 위장한 우연성을 향한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은 선험적인 철학적 분석의 방법이 아니라 역사적 조사의 방법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푸코는 자신의 비판 기획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나 그 기획을 수행하는 방법론의 차원에서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포괄적으로 비판에 참여한다는 측면에서만 철학자다."(111-2)


7. 광기 


"푸코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광기에 대한 피상적이지만 결정적인 탐색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광기가 완전히 인간적인 현상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광기는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인간 존재의 대안적 방식이었지, 인간 존재의 단순한 거부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광기는 (경멸받거나 혐오스럽더라도) 이성에 대한 의미 있는 이의 제기였다. 광기는 (에라스뮈스의 『우신 예찬』에서처럼) 이성과의 아이러니한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고, (보스의 회화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처럼) 이성이 이용할 수 없는 인간 경험과 통찰력의 영역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요점은 과거에 광기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서구] 문화의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광기에 대한 이런 풍부한 이해는 17세기 중반, 프랑스가 고전주의 시대라 부르는 시기가 시작되면서 끝났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관점과 대조적으로, 고전주의 시대는 광기를 이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129-30)


"이러한 개념적 배제와 상관적인 신체적 배제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미치광이들을 격리하는 여러 기관들에 그들을 감금했을 때 미치광이들에게 가해지는 효과로서 말이다. 이 신체적 배제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은 1656년 프랑스의 '대감호' 때였다." "미치광이에 대한 개념적이고 신체적인 배제는 도덕적 비난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광기라는] 도덕적 잘못은 인간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공동체의 근본 규범들 중 하나를 위반한다고 하는, 그런 일반적 유형의 잘못이 아니다. 광기는 오히려 순수한 (비인간적) 동물성의 삶을 위해 인류와 인간 공동체 전체를 깡그리 거부하는 급진적 선택에 해당된다. 고전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미치광이의 동물성은 그들이 여러 정념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표현되며, 정념의 지배는 그들을 망상으로 이끌고 그 망상 속에서 그들은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 정념에 의한 망상은 그러므로 이성의 빛을 차단하는 근본적 맹목을 초래한다."(131-2)


"푸코는 우리를 해방했다고 여겨졌던 이성 그 자체가 우리를 지배하는 주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수사학이 지닌 격렬한 풍자는 이성의 허세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며, 푸코가 광기를 영웅화하는 것은 이성의 체계에 대한 대안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 대안은 광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미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언급되는 탈이성적이고 위반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행위가 필요로 하는 특정한 프로그램은 광기의 구조화되지 않은 폭발 안에 기초할 수 없다. 혁명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작위적인 섬광이 아니라 세심하게 통제되는 해체 작업이다. 푸코는 이 탈이성적 경험에의 매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그는 결국 그것이 계몽 이성의 의미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광인의 〈목소리〉에 대한 낭만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현재 우리의 이성이 배치되어 있는 방식에 완전히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상기시켜주는 것으로서만 그렇다."(136-9)


8. 중범죄와 처벌 


"『감시와 처벌』이 전작인 『광기의 역사』와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감옥 모델이 근대 사회 전반에 전이되었다는 생각이다. 그 결과 『감시와 처벌』은 『광기의 역사』와는 달리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정상 사회)로 정의하기 위해 맞세우는 특수한 '타자'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사회 자체가 지배받는 타자들의 다중으로서 나타난다. 중범죄자들, 학생들, 공장 노동자들, 군인들, 구매자들 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 각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 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자들이다. 따라서 권력의 단일한 중심은 존재하지 않으며, 특권을 누리는 '우리'─이것과의 대조 속에서 소외된 '그들'이 정의된다─따위도 없다. 권력은 사회 전체에 다수의 미시적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다. 권력이 다수의 미시적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으므로, 발전의 배면에 있다고 상정되는 목적론도 없고, 지배계급이나 세계사적 과정도 없다. 근대 권력은 조직화되지 않은 수많은 사소한 원인들이 계보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153-4)


"이러한 분석은 반동적 결론을 제시한다. 의미 있는 혁명, 즉 진정한 해방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 요컨대 미시적인 중심들로 이루어진 근대적 권력망의 유일한 대안은 전체주의적 지배라는 결론 말이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반동적 절망이라기보다는, 혁명적 해방은 전지구적 변혁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의 부정일 것이다. 푸코에게 정치는─혁명적 정치조차도─늘 지역적(local)이다. 그러나 지역성(locality) 자체는 종종 반동의 피난처다. 그래서 푸코는 1970년대부터 광인을 근본 타자로 보는 낭만적 사유 대신 주변부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은 광인들과는 달리, 우리의 가치에 의미 있게 이의를 제시할 수 있는 가치들을 갖고 있으며, 우리 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충족될 수 있는 욕구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사는 효과적인 정치적 행위를 위한 프로그램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프로그램들은 유토피아적이고 전 지구적인 야망 없이도 진정으로 혁명적일 수 있다."(155-7)


"마지막 어려움은 이것이다. 왜 우리의 정치적 실천이 이렇게나 주변부 집단에 집중되어야 할까? 예를 들어 주류 가치들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심화하거나 그 가치들을 다른 사회들로까지 확장하려는 신보수주의 정치는 왜 안 된단 말인가? 이것은 푸코처럼 자기비판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정치적 의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가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안됐지만 존 롤스 같은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푸코에게는 이 물음에 답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그저 끊임없는 자기 변형에 대한 개인적 전념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부 집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떤 정체성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푸코에게 정치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의 혐오를 공유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는─유사한 맥락에서 사용한 적 있는 말들로─이렇게 답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같은 행성에서 오지 않았다.〉"(158-9)


9. 근대의 성 


"『성의 역사』 시리즈의 서문에 해당하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마지막 장에서 푸코는 성 현상 자체를 넘어서서 생명관리권력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관리권력은 살아 있는 존재들로서의 우리, 즉 성적 기준들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정상성의 기준에 종속된 존재로서의 우리를 향하는 모든 형태의 근대 권력을 아우른다. 생명관리권력은 두 수준에서 작동하는 〈생명을 관리하는 작업〉과 관련된다. 그 첫 번째 수준인 개인의 수준에는 〈인간 신체의 해부-정치〉가 있고, 두 번째 수준인 사회 집단들의 수준에는 〈인구의 생명관리정치〉가 있다." "첫 번째 수준, 이를테면 근대 의학에서의 비만 개념은 소외된 사회 계층으로서의 〈뚱뚱한 사람들〉에 해당하며, 질병에 대한 근대적 약물 치료 기술은 제약 산업의 자본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두 번째 수준은 국가 전체의 인구에 초점을 맞추는 근대적 관점과 관련된다. 근대에는 국가 전체의 인구를 보호·감독·개선되어야 할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171-2)


"더 중요한 것은 푸코가 〈주체의 역사〉라고 부르게 되는 것을 향하는, 또 다른 방향의 확장일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때로 규율적 통제의 대상들이 어떻게 규범들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게 되는지 언급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분야의 '대상들'로서만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식을 스스로 철저히 검토하고 스스로 형성하는 '주체들'로서도 통제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은 푸코로 하여금 성 해방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나는 자기 성찰을 통해 나의 깊은 성적 본성을 발견하고 다양한 심리적 저항과 신경증들을 극복함으로써 그 깊은 성적 본성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일련의 규범들에 맞춰 내 삶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일까?" "우리의 성 현상에 우리가 끝없이 집착하는 것의 아이러니는, 푸코에 따르면, 그러한 집착이 해방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173-5)


10. 고대의 성 


"'문제화(problematization)'는 푸코 후기 사유의 핵심 개념이다. 문제화는 개인이 자신의 실존과 맞닥뜨리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들과 선택들을 정식화한다. 내 실존이 특정한 방식으로 문제화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들어가 있는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화가 주어지면 그 문제화가 제기하는 문제에 내 방식대로, 더 정확하게는, 내 역사적 맥락 안에서 자기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푸코가 이 문제화라는 용어를 도입한 고대의 맥락에서 문제화된 것은 여성이나 노예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의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그리스 남성들의 삶이다. 사회적 소외는 사회가 개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약에 해당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것에 대항하는 혁명적 운동들에 참여할 수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184)


"그리스도인들에게 성 윤리 규범에 복종한다는 것은 절대적 배제의 문제였다. 이상적인 독신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덜 영웅적인 경우에는 일부일처제 결혼이라는 엄격하게 한정된 영역으로의 제한이다. 반면 고대인들에게 성 윤리 규범에 복종한다는 것은 쾌락의 적절한 사용(크레시스chresis)의 문제였다. 본질적으로 악한 특정 행위들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범위의 성적 활동에 참여하더라도 적절하게 절제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자기제어(엥크라테이아enkrateia)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고대에 윤리적 삶의 목표는 절제(sophrosyne)였다. 절제는 (자신의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와 (타자들에 대한 지배의 자유라는) 적극적 자유를 모두 포함하는 자유의 한 형태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였고, 그 이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의지에 완전히 굴복할 뿐이었다."(189-90)


"푸코 스스로 주장하듯이, 그가 마지막으로 출판한 책(『자기배려』) 이전의 작업은 모두 진실에 관한 것이었지만, 전통 철학자들이 보여주었던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는 반대로 푸코는 진실을 시험했다. 그의 고고학은 진실과 종종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틀이 초월적이라고 상정되지만 실은 얼마나 우연적인지를 보여주었고, 그의 계보학은 진실이라는 것이 권력과 지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고 상정되지만 실은 얼마나 권력 및 지배와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그는 이론적 지식의 본체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진실을 끌어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은 인식론이 아니라 진실의 윤리다." "고대인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예술에 비유할 수 있는 개인적 자기창조의 산물로서의 진실이 그 첫 번째이고, 사회적 덕목으로서의 진실 말하기가 그 두 번째다. 여기,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푸코의 삶과 작품을 정의하는 이분법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미학인가? 정치인가?"(194-6)


11. 푸코 이후의 푸코 


"자유주의 통치들을 분석할 때 푸코는 두 가지 핵심 개념들을 사용했다. 그중 하나인 인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에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인 통치성은 정치적 이론화의 전문 용어에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다음절(多音節)의 추상적 개념이다. 물론 현존했던 모든 정치 단위에는 통치자가 통제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구가 있다. 푸코가 말하는 인구는 정치적 범주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 범주이기도 하다. 인구는 인구를 통치하는 도구들인 정교한 통계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하는 의학적, 경제적, 사회적 지식들의 근대적 조직체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통치성은 〈인구를 주요 타깃으로 삼는 이러한 권력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 절차, 분석, 반성, 계산과 전술의 총체〉다." "그는 근대 통치성의 기원들이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통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의 사목적 돌봄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보다 나중의 기원들은 통치성의 정치적 합리성을 강조한다."(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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