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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자유주의 - 어느 사상의 일생
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2월
평점 :
서론 자유주의 관행
자유주의자들의 역사에서 네 가지 이념은 각기 다른 뿌리를 갖고 있다. 첫 번째 이념인 갈등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정은 종교 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경제 변화 및 지적 균열이 견고한 사회를 격변으로 내몰았다는 깨달음에 근거했다. 두 번째 이념인 권력에 대한 불신은 분립해 있지 않은 권한으로는 복잡한 사회를 통치할 수 없다는 근대적 깨달음과 더불어, 권력은 견제되지 않으면 무자비해질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오래된 지혜에 근거했다. 세 번째 이념인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향상되고 정돈되며 개선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열망에서 비롯됐지만,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는 17, 18세기의 종교적 각성과 계몽주의적 열정에서 생겨났다. 네 번째 이념인 시민적 존중―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건, 어떤 존재이건 간에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국가와 사회가 법에 기초해 존중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종교적 인정과 사람들의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의 강조에 근거했다. 16)
# 자유주의의 네 가지 이념 : 갈등, 권력에 대한 저항, 진보, 시민적 존중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곤경에 대한 실천적 대응으로 생겨났다. 이는 과도한 권력에 의지하지 않는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간적 진보라는 윤리적으로 수용 가능한 질서를 제시했다. 그것은 국가든 부든 사회든 우월한 권력에 의해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는 근대적이고 냉정한 사람들에게 특히 설득력을 발휘했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것을,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기획을 동등하게 존중할 것을 제안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 안에서의 도덕적·물질적 갈등을 불가피하게 여겼지만, 그 갈등이 논쟁과 실험과 교류를 통해 결실을 맺기를 바랐다. 네 가지 지도 이념은 자유주의의 익숙한 경쟁적 표어인 “자유” “개인” “권리” “평등”의 근간이자 그것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다만 자유주의의 약속이 어느 정도까지 민주주의적으로 지켜질 수 있는지, 즉 어떤 사람인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지켜질 수 있는지는 여전히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로 남아 있다. 42)
1부 자신감 넘치는 청년기(1830~1880)
1장 1830년대의 역사적 상황: 부단히 변화하는 세계
빌헬름 폰 훔볼트가 태어난 1767년의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구세계의 병폐와 골칫거리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독단적인 절대 군주, 퇴보와 무시와 문맹, 노예제와 불관용, 원하는 바를 말하고 표현하거나 바라는 만큼 돈을 버는 것의 불가능함, 발언권 없음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전에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고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던 기존의 윤리적 권위와 수용된 행동 양식들이 갑자기 부담스럽고 해명을 요하는 것이 되었다. 전에는 자연스럽다거나 없앨 수 없다고 여겨졌던 관행이나 조건에 대해 이제는 많은 사람이 대안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변화를 일으킬 당파도, 저항의 중심도, 진보의 수단도 없었다. 훔볼트의 젊은 시절에는 “liberal”이라는 말이 너그럽거나 통이 크거나 혹은 잘못에 관대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훔볼트가 죽을 무렵(1835년)에는 세상이 달라져 있었고, 놀라운 변화를 받아들이며 이끌기 위해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등장하고 있었다. 46)
1835년의 여름이 끝날 무렵, 한 라인란트 상인은 아들에게, 훔볼트가 베를린에 세운 신생 대학으로 가 진지하게 학문에 매진하라고 닦달했다. 그 청년은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고, 머잖아 그는 역사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9월에는 영국의 해군 함정 비글호가 4년간 지질학 탐사를 수행 중이던 박물학자를 태운 채 갈라파고스 제도에 정박했다. 그 박물학자는 바로 찰스 다윈이었고, 조만간 그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지배 계급의 교체를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경쟁적인 그림으로 포괄적인 자유주의적 점진주의에 도전했다. 다윈주의는―다윈 자신은 아니고―자유주의자들이 정치를 일종의 생물학으로 여기도록 부추겼다. 또한 1835년에 지방 관리로 봉직하던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 여행을 통해 전통, 신분, 특권에 등 돌린 사회를 몸소 체험한 뒤 그 신생국에 대한 어리둥절한 성찰인 『미국의 민주주의』 제1권을 출간했다. 48-9)
2장 선구자들이 보여준 지도 이념: 갈등, 저항, 진보, 존중
훔볼트는 『국가 활동의 한계』(1792)에서 국가가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소극적 복지”)을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부양하는 일(“적극적 복지”)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훔볼트는 정체政體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적합한 정체는 지역마다 달랐다. 어디서나 관건은 “가능한 한 시민들의 특성에 적극적이고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체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시대인이었던 뱅자맹 콩스탕(1767~1830)은 훔볼트의 주된 생각의 보호적이고 소극적인 측면에 동조하며 그것을 확충했다. 『정치의 원리』(1815)에서 콩스탕은 “인간 존재에게는 부득불 개인적이고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 부분은 당연히 사회라는 범위 밖에 놓여 있다”라고 썼다. 둘 다 사람들에게서 고유한 가치를 보긴 했지만, 콩스탕은 그 가치를 근대인들이 더 많은 방법으로 침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된 사적인 것으로 보았고, 훔볼트는 그 가치를 성장을 위해 배양되고 자극되어야 할 잠재력의 싹으로 여겼다. 51-2)
콩스탕이나 훔볼트 모두 선출에 대한 의식을 가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고, 노동자의 친구도 아니었다. 훔볼트의 자유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심각한 간섭이 없는 통치를 기대하는 엘리트의 자유주의였다. 콩스탕은 특권에 반대했고, 재능에 대해 열려 있는 사회를 바랐다. 윤리적으로 말해서,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투표장에서의 엄격한 평등도, 산업 민주주의도 믿지 않았다. 훔볼트와 콩스탕의 세계는 두 사람 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들로 변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훔볼트의 배경이나 콩스탕의 연줄이 없는 사람들이 정부에서의 발언권을 원했다. 경제적으로는, 사장과 노동자들 사이의 계급 투쟁이 시작되었다. 훔볼트와 콩스탕의 뒤를 이은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교훈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시민적 존중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새롭고 제한 없는 방식으로―즉, 민주주의적으로―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59)
프랑수아 기조(1787~1874)는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해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지속적으로 위협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하나의 계급·신념·이해관계가 사회를 지배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상세히 설명했다. 권력은 교묘하고 가변적이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왔다. 정치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끝없는 과정이었다. 기조는 조국을 분열시키고 유럽의 대부분과 등지게 만든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 대해 비판적으로 썼다. 그는 사회들이 조화롭지 않고 갈등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종교적 불화 및 내전에 충격받았던 보댕과 홉스 같은 앞선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절절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갈등과 무질서에 대한 기조의 답은, 보댕이나 홉스의 경우와 달리,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규범에서와 달리, 권력이 아니었다.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정치의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이 기조의 생각이었다. 60)
기조는 왕이든 시민이든 그 누구도 제약 없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조는 최종 결정권을 믿는 좌파와 우파 모두의 약점을 공격했다. 그는 예컨대 루소에게 소중한 생각,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휘하며 우리의 뜻은 철회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지휘를 맡고 있는 것은 우리의 바람들이 아니라 이성과 권리라고 기조는 생각했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바람은 일관되고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적이지 않았고, 정치는 바로 그러한 이들과 함께해야 했다. 동시에 기조는 왕의 절대 권리라는 원리에 목매는 정통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최고 권력의 행사라는 바로 그 주권 개념은 기조가 생각하기엔 폐기되어야 했다. 정치에서 유일한 주권은 법과 정의와 이성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주 중대한 결과로 이어졌다. 모든 권력 행사가 공유되어야 했다. 정부가 선거를 통해 교체될 수 있어야 했다. 언론이 제한받지 않아야 했고, 정치적 모임들이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했다. 66)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단지 투표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문화적 변화라는 큰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확산을 보았다. 사회적으로 위계가 사라지고 있듯이, 의견과 취향에서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결정권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토크빌이 보기엔 그랬다. 그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중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는 진화하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관점과 태도도 진화하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는 과도한 권력의 근대 국가와 과소한 권력의 근대 시민을 어떻게 처리할지였다. 토크빌이 생각하기에 그 둘은 연결되어 있었고, 둘 다 극복되어야 했다. 그가 가장 우려한 점은, 사회가 개입적인 국가, 특히 유익한 동기들을 가진 국가가 부추길 수 있는 계획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들의 원자화된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된 토크빌의 놀라운 그림은 많은 20세기 자유주의자를 매혹했다. 71)
19세기 자유주의 개혁가들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두 가지였지만, 그것들이 항상 같은 충고를 주진 않았다. 그 둘 중 하나는 공공의 이익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 시장이었다. 전자와 관련된 강력한 이론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였고, 후자와 관련된 강력한 이론은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이었다. 공리주의를 따르는 정부를 향한 개혁적 메시지는 사회 개선에 복무하는 개입과 통제였다. 정치경제를 따르는 정부를 향한 개혁적 메시지는 부의 확산, 생산자들의 더 많은 자유, 구매자들의 더 폭넓은 선택에 복무하는 통제 철폐와 비개입이었다. 그 메시지들은 수렴되는 것이었다. 정치경제학의 목표인 더 큰 부는 결국 공동선에 기여했다. 공리주의자들의 목표인 더 좋은 사회는 더 큰 자유와 더 많은 선택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 그 메시지들은 흔히 상충했다. 공동의 이익과 자유 시장이라는 메시지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사실상 이후 줄곧 자유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79-80)
“국가”는 정치사상과 정치적 구호의 활용에서는 깔끔한 용어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장 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이 마주한 것은 하나의 일관되고 강압적인 권력이 아니라, 지역적이면서 중앙적이고, 관습적이면서 법률적이고, 자발적이면서 의무적인, 여러 권위가 중첩된 가변적인 네트워크들이었다. 중앙집중화 압력은 20세기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두 가지 골칫거리―자신의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관료들과 잘못 이해된 집단주의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법적·경제적 힘들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도시들이 성장해 국가의 관할권이 되려 하면서, 경쟁하는 당국들 사이에서 판결이 필요해졌다. 둘째, 기업과 은행들은 큰 국내 시장을 원했다. 그것들은 도로, 수로, 철도 같은 공공시설을 원했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공통의 기준과 집행 가능한 전국적 법률을 동반하는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원했다. 요컨대 상업은 단일한 시장을 원했다. 하지만 단일 시장을 만드는 것은 중앙집중적인 국가를 필요로 했다. 81-2)
존 스튜어트 밀(1806~1873)만큼 자유주의 사상의 상충하는 요소들을 하나로 아우른 사람은 없었다. 밀은 여러 자유주의 계열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중 어디에도 붙잡혀 있지 않았다. 밀의 시대에 중앙 정부는 평화시의 책무가 거의 없고 그런 책무들에 부합하는 수단도 거의 없는 작고 흔히 부패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는 중앙 정부의 근대화와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관련된 밀의 권고 중 마지막 권고들은, 머잖아 주로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하게 될, 전쟁을 하고 성장하는 제국을 관리하며 사회복지를 통해 계급 투쟁을 억제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과 능력을 급속히 키워줄 새로운 강력한 도구들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밀은 20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좋지 않게 보게 한 이유인 경제적 약점들, 예컨대 무임승차, 이익집단의 통제, 엄격한 예산 제약의 부재 등에 대해 일찌감치 알아차린 선견지명이 있었다. 96, 103-4)
밀은 진보가 번영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 둘을 혼동하지는 않았다. 『정치경제학 원리』 제4권에서 그는 경제가 광범위한 부에 다다라 성장을 멈추게 될 때 이루어지는 “정상定常 상태”를 묘사했다. 굉장한 부자도 굉장한 빈자도 없는 균형 잡힌 사회에서는, 물질적 번영 자체는 성장을 멈출지라도, 인간적 번영은 전보다 더 완전하고 더 거리낌 없이 계속 진전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 같은 이상은 자유주의 관행에서 밀이 중요하게 여긴 것 중 많은 부분, 즉 사회 진보, 사회 균형,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높이면서 사람들 자신의 목표를 존중하기 등과 협력했다. 그러나 상업적 진보가 둔화되거나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인구 과잉과 식량난에 몰두한 훗날의 정치경제학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번영이 위축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1930년대의 세계 불황 이후 전후戰後 경제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도면 우리에게 “충분한가?” “과한가?”를 묻기 시작했다. 106)
3장 실행에 옮겨진 자유주의: 네 명의 대표적 정치인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과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1809~1898) 두 사람은 각각 자국의 장수 집권당이었던 미국 공화당과 영국 자유당을 만들고 이끌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자유주의자들을 감동시켜온 호소력 있는 발언들은 이 책에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정치 관행에는 사상적 관점뿐만 아니라 그 사상에 힘을 실어주는 수사도 필요하다. 링컨과 글래드스턴은 서론에서 언급한 자유주의적 감정들, 즉 지배에 대한 반감, 자기가 몸담은 사회에 대한 자부심과 수치심, 부당함에 대한 격분, 노력하고 행동하는 열정, 평온에의 갈망 등을 이끌어냈다. 능숙한 설교자로서 그들은 그런 감정의 더 어둡고 덜 희망적인 측면, 즉 시기와 원망, 소심한 자책, 선택적 분노, 그리고 위험에 대한 과도한 공포와 결부된 신중치 못한 간섭도 이용했다. 두 사람 다 1880~1945년의 자유주의를 앞서 가리켜 보였는데, 링컨은 전쟁국가의 탄생과 관련해, 그리고 장수한 글래드스턴은 대중 정치의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과 관련해서 그랬다. 108)
프랑스에서, 전제적인 제2제정(1852~1870)은 개혁적인 전제 군주와 협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딜레마에 처한 프랑스 자유주의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제2제정은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에겐 많은 점에서 재앙이었다. 놀랍게도 그 밖의 점들에서는 그들에게 유익했지만 말이다. 반자유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프랑스 자유주의자는 공법 교수이자 반노예제 활동가 에두아르 라불레(1811~1883)였다. 『자유주의 정당』(1861)에서 라불레는 자신의 사상을 민주주의적 자유주의로 피력했다. 두 나폴레옹이 보통선거권을 “독재적”으로 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불레는 보통선거권의 장점을 알아보았다. 대중 민주주의는 패배한 소수에게 내일의 다수가 될 희망을 안겨주고 바람직하지 않은 정부의 평화로운 제거라는 소극적인 제재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라불레는 개인의 자유, 사회적 화해, 그리고 파리와 나폴레옹 3세가 임명한 지사들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의 탈집중화를 옹호했다. 115-6)
대표적인 독일 자유주의자 오이겐 리히터(1838~1906)는 비스마르크를 성가시게 하는 진보적 가시 같은 존재였다. 리히터는 권력에 대한 비스마르크 수상의 편의적이고 교묘한 접근을 “사회 독재”라고 비난했다. 독일 최초의 전업 정치인들로 구성된 의회, 1867년에 출범한 의회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고 해외 무역, 규제 없는 시장, 긴축 예산, 시민적 자유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국가 권력과 국가의 세력 강화에 대한 적대감에서 발원한 그 신념은 단지 비스마르크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만이 아니었다. 의회에서 리히터의 동료 자유주의자 대부분은, 다른 원칙들이 독일의 국력과 번영을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불러올 수만 있다면 자유 시장 원칙들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교 우위, 국제적 개방, 작은 정부 같은 요원한 약속에 반대하면서, 그들은 당장 국력과 관세와 막강한 해군을 강조하는 비스마르크를 추종했다. 리히터는 고집스럽게도 신념을 고수했다. 116, 118)
4장 19세기의 유산: 조롱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시민적 존중의 세 가지 약속 중 비침해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과 관련 있었다. 그것은 주로 법적인 것으로서, 국가와 시장과 사회에 일군의 제약을 가해 그것들이 사람들의 프라이버시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시민적 존중의 두 번째 요소인 비방해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으로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과 관련 있었다. 주로 사회적·경제적 성격을 띠는 비방해는 사람들의 능력의 제약 없음과 사람들의 자본의 생산성에 호소했다. 따라서 계획의 자유, 장벽의 제거, 그리고 자유주의자에게는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번영을 가로막는 것으로 비치는 규제의 철폐를 주장했다. 세 번째인 비배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근원적으로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달리 말하면, 그 누구도 인간의 도덕적 공동체에서 배제되지 말아야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비배제의 범위를 제한했지만 점차 그 범위를 열심히 확대했다. 131)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유주의적인 시민적 존중의 내용 대부분이―전체는 아닐지라도―법이나 사회 관행에 새겨져 있었다. 20세기에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이 법의 시각이나 경제 효율의 관점에서 점점 덜 중요해졌고, 결국 공권력은 사람들이 더 많은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배제적인 격분과 분파적인 적의 자체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훔볼트와 밀이 바란 대로 교육이 확산되었지만, 확실하게 독자적인 시민들은 여전히 찾기 힘들었다. 헤겔, 콩스탕, 토크빌이 예견한 대로 사회는 중간 계층을 성장시켰지만 부자와 빈자의 물질적 갈등은 남아 있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점점 더 번영했지만, 동류 의식의 자연적 공급 부족―흄이 언급하고 밀이 해결하려 씨름한―은 그에 보조를 맞춰 회복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상호 수용의 메커니즘은 없다는 것을 자유주의자들은 알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존중이 사람들에게 약속한 국가, 부, 사회의 힘로부터의 보호는 결코 확실하지 않았다. 139)
2부 성숙기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씨름하다(1880~1945)
5장 1880년대의 역사적 상황: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 1880년대의 정부 지출은 국가 생산량의 10 내지 15퍼센트를 차지했다. 1945년경에는 평화 시에 그 수치가 40 내지 50퍼센트 선을 유지했다. 회사와 소비자들은 쉴 새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자기네 편의에 따라 국가를 이용했고, 어려움에 처하면 국가에 의존했고, 국가가 도움이 돼주지 못하면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애덤 스미스가 간파했듯이, 기업은 멋대로 하도록 정부가 기업을 내버려두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기업을 등한시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국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근대 국가도 전쟁을 통해 가장 눈에 띄게 성장했지만, 평화 시의 요인들도 작용했다. 188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기간에 정부는 덜 부패했고, 배타적이거나 수탈적인 사회 중추 세력의 도구로 덜 기능했으며, 더 예측 가능했고, 더 유능했다. 유권자와 기업들이 정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수록 정부는 더욱더 유능해졌고, 정부의 역량이 커질수록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148)
결국 이 모든 일은 국가의 권위가 확립된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소간 통합된 근대 국가가 다소간 통일된 국민을 통솔했다. 분열은 존속했다. 사회적으로 말해서, 독일제국은 낙후된 시골인 동부와 발전하고 산업화된 서부로 분열되었다. 미국 역시 남북의 축을 따라 유사한 분열을 보였고, 여기에 인종 문제가 추가되었다. 영국의 경우, 국가의 권위가 비교적 중앙집중적이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도로 통합되어 있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권위는 가난하고 주로 가톨릭교도로 이루어진 아일랜드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1870년 독일에 패해 부유한 산업 지역인 알자스로렌을 빼앗기긴 했어도 통일성이 있었고, 마침내 안정적인 자유주의 질서를 갖춘 제3공화국(1870~1940)에 진입했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일탈은 언제나 가능했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네 국가 모두 우리가 현재 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그 공통의 정치 관행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148)
6장 자유민주주의를 이끌어낸 타협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고전적 이상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든, 매디슨이나 콩스탕과 마찬가지로, 어떤 규모의 근대 국가에서도 직접적 참여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10』에서 대의민주주의에 찬성하는 소극적인 논거들을 제시했다. 그는 대의에서 대중의 의지의 분산을 보았고, 또한 단일 이해관계나 권력에 의한 모든 지배로부터의 보호를 보았다. 콩스탕은 『고대와 근대의 자유』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제 일을 스스로 하지만 부자들은 집사들을 고용한다”라며 좀더 적극적인 생각을 추가했다. 콩스탕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것이 진보와 번영의 다행스러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행정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근대 행정의 복잡성을 무시한 것이었고, 근대 시민들이 자신들의 “집사들”에 비해 얼마나 적은 발언권을 갖고 있는지를 간과한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거하면 위임은 오히려 방기에 가까워 보였다. 155)
라불레, 밀, 액턴 모두 자유주의자들이 투표에서 대중 민주주의와 화해할 때 채택할 만한 일련의 근거를 전해주었다. 바로 다수자의 비영구성, 다수자에 의해 지배되지 않음, 소수자의 비배제, 평화로운 교체, 시민의 참여, 노동자의 안정, 비정통파의 발언권, 그리고 공정함―일반적으로―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용은 포용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의구심은 여전했다. 영국의 법 사학자 헨리 섬너 메인은 『대중의 통치』(1885)에서 민주주의가 입법의 교착 상태를 초래한다고 불만을 표했다. 또 하나의 우려는 선거권 확대의 재정적 결과였다. 1913년, 영국 정부의 통계 전문가 버나드 맬릿이 그 문제를 적절하게 지적했다. 그는 선거 민주주의에서는 수입이 소수의 좀더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조달되는 반면 지출은 주로 “좀더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에 함축된 바는,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갖는다면, 비과세 대상인 다수의 노동 계급도 자기네 몫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7-8)
프랑스와 독일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대중의 대의代議보다는 엘리트들이 이끄는 관료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독일의 정치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정당론』(1911)에서 “과두제의 철칙” 하나를 제시했다. 좋든 나쁘든, 관료화와 엘리트에 의한 의사 결정은 민주주의적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철칙이었다. 미헬스는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은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는 중요한 문제들에서 권위주의적 해결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고 썼다. 전前 자유주의자 조르주 소렐(1847~1922)은 『진보의 환상』(1908)과 『폭력에 대한 성찰』(1908)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억압적인 가식이라며 혹평했다. 그것은 권력과 활력이라는 진정한 원천을 가리는 가식이었다. 소렐의 이야기는 열띤 반응을 낳으며 20세기의 반자유주의로 이어졌지만, 결국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소렐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타협을 경멸한 전前 자유주의자 미헬스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지지자로 끝을 맺었다. 158-9)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셀레스탱 부글레(1870~1940)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자유주의자들의 윤리적 이상들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보았다. 배타적 증오가 퍼져나가는 만큼 타자들에 대한 따뜻한 수용도 확대되고 있었다. 근대성은 사람들을 고정관념의 권위에서 해방시킨 만큼이나, 편견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초반에 많은 진지한 자유주의자는 근간이 되는 신조도, 통합을 가져오는 동족적 충성도 근대의 사회 질서에는 필요치 않다고 여겼다. 교조적이거나 분파적인 퇴보는 최악의 경우에도 단지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행복한 경로에서의 일시적 이탈로 비칠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동향은 자유주의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불관용을 용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종적·종파적 편견에 대해 국가 권력을 동원해야 하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적 부조화 속에서 시민적 조화를 꿈꿨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는 그런 식으로 되어가고 있지 않았다. 170-1)
7장 근대 국가와 근대 시장의 경제 권력
1880년대에, 자유 시장 자유주의, 혹은 더 적절하게 말해서 기업 자유주의라 부를 만한 일련의 사상이 삼각형을 형성했다. 세 꼭짓점 중 하나는 한계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강화된 시장 경제였다. 또 하나는 계약의 자유라는 원칙으로 압축되는 법적 개인주의였다. 나머지 하나는 비즈니스 출판물로, 이것은 시장 경제를 대중화하고 공론의 무기로 벼려냈다. 두 명의 걸출한 한계주의 주창자는 레옹 발라(1834~1910)와 앨프리드 마셜(1842~1924)이었다. 한계주의 해명은 경제적 선택의 성격을 분명히 했고, 그 선택이 일어나는 곳을 분리했고, 좋은 경제적 선택과 나쁜 경제적 선택을 분별하는 법을 제시했다. 그래서 한계주의자들은 아쉬움이 최소화된 개선 불가능한 한계점을 찾는다는 생각을 신중한 경제적 의사 결정의 한 가지 만능 규칙으로 일반화했다. “자유” 시장에서 제약 없이, 무역이나 거래의 대상이 무엇이든, 한계 편익이 한계 비용과 일치하는 그 지점에서 사람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게 될 것이었다. 177-8)
자유 시장 삼각형을 형성하는 이념 집합체에서 두 번째 꼭짓점은 계약의 자유라는 법적 원칙이었다. 계약의 자유 아래서는 계약 당사자들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합의할 수 있었다. 신의 의지, 다수의 의지, 전통, 공평, 공익 같은 것은 더 이상 끼어들지 않았다. 합의 내용과 관련해 당사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주권자였다. 내용이 합법적이기만 하면, 내용이 관례적인지 공평한지 정당한지 도덕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계약 당사자들의 사회적 배경은 더 이상 개입되지 않았다. 계약은 비인격적인 것이 되었다. 부자인지 빈자인지, 영리한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법원은 유효한 계약의 당사자를 사정을 알고 시장에 들어온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계약의 자유가 정치적 싸움에서 법의 볼모가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노동과 자본이 평등하지 않은 것처럼, 계약 당사자들은 평등하지 않았다. 183)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짓점은 비즈니스 출판물이었다. 한계주의보다 한참 전인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시장 대중화의 생생한 전통이 생겨났고, 19세기 후반의 비즈니스 관련 출판물들은 그런 전통에 의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바스티아(1801~1850)와 영국의 해리엇 마티노(1802~1876)는 재미있는 우화와 친숙한 예화들을 통해 자유 시장 사상을 고취하는 매우 대중적인 책들을 썼다. 태양을 가려 불공정한 경쟁자를 제거해달라는 양초 제조인들의 청원을 다룬 바스티아의 이야기와 인클로저로 부유해진 브룩 마을을 소개한 마티노의 이야기는 시장 관념을 친숙한 말로 전하는 방법의 본보기였다. 상층, 하층, 중간층이 혼합된 마티노의 인물들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대화로 표현된 영국 사회의 핵심 표본을 제공했다. 영국은 1843년에 창간된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주간 경제지라는 것의 발생을 이끌었다. 1862년 프랑스에서 『레코노미스트 프랑세』가 그 뒤를 따랐다. 183-4)
국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와 국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 간의 다툼이 한껏 격화되었을 때 한 위대한 균형자가 그들의 논쟁을 휩쓸어버렸다. 그 균형자는 바로 돈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빈곤한 측과 부유한 측은 공동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해가고 있었다. 좀더 어려운 문제는 그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 부담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 갈등은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 낮은 직접세, 작은 정부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글래드스턴의 방식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높은 관세, 낮은 직접세, 큰 정부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비스마르크와 미국의 대기업 자유주의자들의 방식이었다. 아니면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 높은 직접세, 큰 정부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새로운 자유주의”와 미국 진보당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탱할 수 없는 부채를 쌓이게 하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낮은 관세, 낮은 직접세, 큰 정부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196-7)
8장 손상된 이상, 무너진 꿈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자유주의 세계는 제국주의 세계였다.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유주의자의 마음속에 있는 경쟁적인 두 가지 갈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갈망들은 두 가지 조국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조국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꿈꾸는 질서를 추구할 수 있는 조국이다. 전자는 국가적인 것이고, 후자는 세계적인 또는 보편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적 제국의 예측 불가능하고 즉흥적인 형성 위에서 보편적 조국과 국가적 조국이라는 그 대조적인 꿈들이 떠다녔다. 일단 그 꿈들이 구별되면 19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어색함은 더 분명해진다. 자유주의적 보편주의자에게서는 ‘자유주의적’과 ‘제국적’이 화목하게 공존한다. 자유주의자들을 갈라놓는 강조점은 ‘제국적’과 ‘국가적’ 사이에, 보편적 조국과 국가적 조국 사이에 있다. 200-2)
전쟁은 일탈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서,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환한 낮의 질서에는 끼어들 수 없는 비이성적인 퇴보였다. 사실, 1914년에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믿으려면 70년에 걸친 제국의 폭력을 못 본 체해야 했다. 그러나 식민지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낙후되어 있었고, 간과되기 쉬웠다. 그것은 또한 62만 명이 사망한 미국의 남북전쟁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일단 수립되어 안정화된 진보적인 근대 국가들은 자기네끼리 싸우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로써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는 경쟁적이지만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그림에서 여전히 무장 폭력을 표백할 수 있었다. 그런 나라들은 스스로의 호전적인 정신을 흘려보낼 평화의 수로들을 갖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가치와 계속되는 갈등이 화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안식처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914년에는 믿음을 갖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때문에 그 뒤에 벌어진 일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15)
1914~1918년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자유주의 전쟁국가를 처음으로 온전히 보게 되었다. 자유주의 국가의 그러한 면모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쇠퇴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영원히 되살아났다. 1945년 이후, 자유주의의 시민들은 언제라도 자유민주주의 수호 전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무장 국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반영구적인 경계 상태에서 살았다. 자유주의의 법정, 입법부, 언론, 대중은 이제 안보 국가의 요구들에 대해 그다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크게 보면 평화적인 자유주의 스스로가 불러왔다 할 수 있는 참혹한 전쟁은 자유주의의 골칫거리인 도전받지 않는 국가 권력의 엄청난 팽창에 기여했다. 자유주의 매파는 전쟁을 자유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십자군 전쟁으로 정당화했다. 링컨이 처음에는 국가의 가치를 지키는, 그다음에는 노예 해방의 가치를 지키는 십자군 전쟁으로 전쟁을 정당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225)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과도한 권력에 기대지 않는 안정된 질서를 희망하며, 따라서 그들은 언제 반대가 요구되는지에 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은, 자신이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부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 많은 반대에 우호적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으로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더 적은 반대를 원하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처럼 생각한다. “국민에 의한 정부”라는 마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에서 통치자와 시민들은 우선순위가 다른 상이한 역할을 맡는다. 정부는 시민을 통치한다. 시민은 정부를 통제한다. 정기적인 선거는 가장 가시적인 통제 형태다. 반대―공개적 시위, 양심적 병역 거부, 시민 불복종―또한 필수적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어느 정도의 반대를 원하든 간에, 오늘날 거의 모든 자유주의자는 반대가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231-2)
9장 1930년대~1940년대의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은 질서와 자유의 긴장에 대해서보다는 닫힌 질서와 열린 질서라는 라이벌 질서들의 경쟁에 대해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용어로 이야기했다. 포퍼의 드라마는 자유주의자에 걸맞게 헤라클레이토스와 부단한 변화로 시작되었지만, 닫힌 질서 쪽에는 플라톤과 헤겔과 마르크스가 있었다. 인상적인 서문에서 포퍼는 변화, 불확실성, 삶과 지식의 잠정적이라는 특징을 수용하는 자유주의 지향의 열린 정신, 그리고 동일성, 고정성, 안정성을 갈망하는 반자유주의적인 닫힌 정신으로 세계를 사실상 양분했다. 하이에크의 주장을 이어받아 포퍼는 자유주의의 적들을 공격하는 '부정의 방법'을 수행해나갔다. 자유주의의 적들은 사회 진보를 단계적 개혁을 통한 점진적 개선의 수용으로 보기보다 유토피아로의 도약으로 보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보다 아무래도 집합적으로 더 크고 더 능력 있고 더 가치 있다고 보는 “전체론적” 시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틀렸다. 272)
포퍼는 자유주의의 정신과 실행을 과학의 정신과 실행에 견주고 자유주의의 적들의 정신과 실행은 준과학 또는 유사 과학의 정신과 실행에 견줌으로써, 기술을 중시하는 시대에 자유주의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과학은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진리를 목표로 삼는다고 포퍼는 말했다. 자유주의는 더 나쁜 것에서 더 나은 것으로 진보하지만, 이상적인 확고한 상태에는 이를 수 없었다. 과학은 비판적이고 실험적이었다. 자유주의는 탐구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개방적이었다. 실행으로서의 과학은 검증 가능한 이론들을 제시하면서 발전하며, 그 이론들은 그릇된 것으로 판명나면 폐기된다. 실행으로서의 자유주의는 정책과 제도와 정부를 검증해 그중 작동하지 않는 것들을 개조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진전했다. 포퍼의 이른바 과학의 ‘반증反證주의’에 상응하는 것이 정치의 ‘부정의 방법’인데, 그 기본 원리는 선을 최대화하기보다 악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의민주주의였다. 273-4)
3부 두 번째 기회와 성공(1945~1989)
10장 1945년 이후의 역사적 상황: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작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기간에 민주주의적 자유주의가 어떤 역사적 타협을 통해 출현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기간에는 그 타협의 조건들이 재조정되고 정착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유 시민들을 위해 주장했던 보호와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었다. 마침내 정치적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가졌다. 자유주의자들이 현명하고 교육받은 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프라이버시와 허용이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면서 윤리적 민주주의가 확산되었다. 콩스탕이 훔볼트를 눌러 이긴 것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도 퍼져나갔다. 더 많은 사람이 경제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사회는 피라미드 형태보다는 다이아몬드 형태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맨 꼭대기의 소수의 부자와 맨 아래의 소수의 빈자 사이에 두터운 중간 계층이 끼어들었다. 피셔, 케인스, 하이에크가 각자의 방식으로 구해내고자 했던 그런 종류의 경제 사회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280)
정치에서 자유주의자들을 그들의 경쟁자와 구별시켜주는 사고는 갈등을 결코 끝나지 않는 것,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1945년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의 성공으로 이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그 지론을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싹텄다. 그러나 경제와 관련된 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분쟁은 정부 대 정부 고용인, 어린아이 대 연금생활자, 주주 대 경영인, 부유한 도시 대 가난한 지방, 신기술 대 퇴조하는 산업의 분쟁처럼 다면적이었다. 정치적 갈등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는 “범분야적”이었다. 특히 경제가 나아지고 있을 때, 사람들은 도덕, 충성―머잖아 “정체성”으로 알려지는―, 신념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자체가 형태를 잃어버리고 각각 다른 “자유주의들”로 분열된 것이 아닌지 자유주의자들은 자문했다. 반면, 다른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서사의 단순화를 포기하고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분열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성취를 특징짓는 것으로 비쳤다. 280-1)
11장 새로운 토대: 권리, 민주주의적 법치, 복지
1948년의 인권선언에 대한 정치적 실망은 주로 예기치 않은 과제 변경·추가·확대의 상황에 기인했다. 권리 담론은 권리 주장을 더욱 널리 확산시켰다. 그렇다보니 머잖아 어떤 정치 이슈든 모두 사실상 권리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었다. 불만이 쏟아졌고, 뒷받침해주는 많은 논거가 있었다. 유엔에서 이른바 “권리 인플레이션”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시민적·정치적 인권이라는 1세대는 사회적·경제적 권리라는 2세대를 낳았고, 2세대는 집단과 소수의 권리라는 3세대를 낳았다. 과도한 확대의 문제는 유럽에서의 인권의 “과도한 법제화” 문제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만약 모든 정치적 요구가 인권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게 된다면, 명백한 권력 남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운동이 한없는 요구와 만족할 줄 모르는 바람으로 보일 위험이 있었다. 그것이 염려되는 점이었다. 그런 실망들이 협력해 인권의 재림을 가져왔다. 인권의 재림은 시민운동의 모습으로, 즉 문제 해결에 사람들이 직접 나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89)
비인도적 대우와 권력 남용을 반대하는 핵심 요구들은 도덕적·정치적 힘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1961년 런던에서 정치범들을 위한, 앰네스티라고 불린 캠페인을 시작한 영국 변호사 피터 베넨슨(1921~2005)의 깊은 확신이었다. 베넨슨은 “인도주의 운동은 법전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그런 주장을 비난했다. 하지만 비판자들이 놓친 것은 분노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분노는 특히, 모범적이거나 희생적인 피해자라는 존재를 기리는 데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아는 이들을 움직였다. 같은 해에 시민운동의 새롭지만 좀더 힘든 양상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중심이 된 것은 공산권의 양심수들, 특히 1966년에 투옥된 율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냡스키였다. 그들 옆에는 군비 축소 약속을 지킬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반핵 운동가들이 있었다. 289-91)
케인스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경제적 타협을 대변했다면, 복지 정책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타협에서의 새로운 큰 진전을 대변했다. 영국에서 그 계획을 설계한 사람은 평생 자유당원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였다. 베버리지의 계획은 이제 막 생겨나고 있던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국가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우파에 우호적인) 중립적인 경기장 관리자이자 법적 평등의 옹호자로 보는 관점과 (좌파에 우호적인) 관심과 연대의 활발한 중심지로 보는 관점 모두에 걸쳐 있었다. 국민 복지 정책은 덜 이론적인 방식으로 전반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했고, 영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의 도덕적·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킴으로써 “사회적 건강”을 향상시키려는 더 나은 종류의 자유주의의 항시적 관심에 화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어떤 하나의 합의된 목표나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근거가 없다는 것은 단점이 되었고, 비용이 상승하면서 특히 그랬다. 302-3)
12장 1945년 이후의 자유주의 사상
마이클 오크숏(1901~1990)은 근대적 삶에 대한 거부자였다. 그는 베버리지의 복지국가 이면에 있는 온전한 “새로운 자유주의”의 정신을 거부했다. 정치는 인문학에 속하며, 인문학을 과학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오크숏은 주장했다.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과제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적인 과제가 아니었다. 물질적 결과도 중요하지만, 정직, 자제, 예의 같은 공적인 덕목들도 중요했다. 그의 전기 작가 폴 프랭코는 좋은 의미로 오크숏에게 “반시대적”이라는 니체적 찬사를 보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나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법칙들이란 없었고, 단지 자기가 참여 중인 “대화”에 알맞은 갖가지 근거를 부여하기도 하고 빼기도 할 뿐이었다. 오크숏은 토대에 대한 관심의 결여, 면밀한 분석에 대한 무관심, 폭넓은 종합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고, 이러한 점들 때문에 존 듀이나 리처드 로티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실용주의자들과 동조를 이루었다. 308-9)
아이제이아 벌린(1909~1997)은 범주화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오크숏처럼 그도 사상에 심취했지만 기술적인 철학에는 거리를 두었다. 벌린은 사상들을 의인화하고, 대립되는 짝을 만들어 그 사상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극작가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가 동의하지 않은 사상가들이 특히 그를 매혹시켰다. 계몽주의의 자식이었던 벌린은 반계몽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갈등에 몰두했고, 갈등은 온/오프나 흑/백처럼 둘로 극화하기가 가장 쉬웠다. 글을 쓰는 사람이자 강의하는 사람인 벌린은 깔끔한 대조가 갖는 저항 불가능한 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치사상가들을 하나의 사상을 가진 고슴도치와 여러 사상을 가진 여우로 분류했다. 그는 자유주의의 가장 큰 토템을 소극적 자유(좋은 것)와 적극적 자유(나쁜 것)로 나누었다. 사상가와 정치인은 갈등을 인정해야 하며, 단순화하는 학설이나 어떤 이해관계를 다른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려는 독재적인 시도로 갈등을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벌린은 주장했다. 310)
하이에크의 사상은 항상 질서와 자유 사이의 긴장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알게 될수록 더욱더 민주주의 선택에 따른 질서, 법, 제한들을 강조했다. 경제에 대한 무지는 계획과 중앙의 규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 법이 이해관계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 돈과 자유가 윤리적 쌍둥이인 이유는 “경제에 대한 지배”가 곧 “우리의 목표들 모두에 대한 지배”이기 때문이라는 것, 법 앞의 평등만이 중요할 뿐 결과의 평등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를 독창적으로 끌어들였다. 노조 없는 노동 시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새로운 사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웠다. 독점은 국가만큼이나 강제적일 수 있었다. 벌린의 어떤 암시를 반향하며, 하이에크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자유주의의 적은 전체주의와 삶에 대한 중앙집중적 통제였다.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 정치였고, 이는 자유와 양립할 수 있었다. 317-8)
정치 언어의 사용과 오용에 대해 숙고했던 조지 오웰(1903~1950)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반공산주의자, 토리파 무정부주의자라 칭했다. 글에서는 격정적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지식인들을 조롱한 지식인이자 특권적 사회주의자들을 경멸한 좌파 이튼스쿨 동문이었다. 오웰은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한 점을 인식했는데, 그것은 바로 불변성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정치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혁명가는 잠재적 토리파인데, 모든 것이 사회 형태를 바꿈으로써 고쳐질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변화가 이루어지면, 그들은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오웰은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가 사실상 무제한이라는 신념과 불의에 대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신념을 결합했다. 높은 요구와 낮은 능력으로 인한 오웰의 승산 없는 도덕성은 그를 영국의 실존주의자로 만들었다. 322-3)
알베르 카뮈(1913~1960) 역시 달갑잖고 다루기 힘든 사회에서 거부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카뮈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이후에 보수주의자들이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근대성의 범죄들은 자유 때문인가 아니면 자유의 악용 때문인가? 최초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카뮈는 근대성의 과도함을 자유 자체가 아니라 자유의 악용 탓으로 돌렸다. 과도한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카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는 보편적 의무에 대한 반항을 취했다. 신의 침묵, 자연의 무심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직면했을 때 유일하게 온당한 반응은 반항이라고 카뮈는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반항적임은 우리의 인간성을 규정해주었다. 반항은 불가피하게 사회적이었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관련시켰다. 서구의 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철회의 책인 『실패한 신』(1950)처럼, 카뮈의 책은 스탈린주의의 폐해에 대한 좌파 지식인의 비판 표명을 억제해온 그간의 분위기를 해제하는 것이기도 했다. 324-5)
“유능한 판관들”이 사람들에게 삶의 더 좋은 형태와 더 나쁜 형태를 보여줄 수 있다고 밀이 생각했다면, 존 롤스(1921~2002)는 그 유능한 판관들의 지도적 권위가 이제 사라졌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런 민주주의적 환경에서, 롤스는 공정 지향적인 근대 시민들이 인정하고 참여할 수용 가능한 자유주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원리들로 어떤 것이 있을지 알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지만 공정과 정의의 요구에도 열려 있다고 보았다. “정의로운 사회가 정의로운 시민을 만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라는 오랜 난제에 대해 사실상 그는 “둘 다”라고 주장했다. 롤스는 자신의 사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원천에 의존했는데, 정치적 의무에 대한 사회계약론, 칸트의 보편주의 윤리학, 당시의 사회과학, 합리적 선택 이론, 그리고 특히 자신의 도덕적 직관이 그것이었다. 롤스 체계의 복잡함은 어느 정도는 그 체계의 다양한 부분이 서로 맞물릴 것이라는 희망에 기인했다. 328-9)
권리는 자유주의 사유에서 개념적 마스터키가 되었다. 권리는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권리는 롤스의 사회 지향적 자유주의에 대립해서도,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소환되었다.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1974)에서 정의에 대한 롤스의 원칙들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노직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는 사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정치 시장에서 우파 논객들은 공정한 절차에 대한 롤스의 표면적 관심이 평등한 결과에 대한 평등주의적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직의 비판을 환기했다. 노직은 전후의 복지국가주의적 타협이 느슨해진 1970년대의 경제적 격변에 비추어 글을 쓰고 있었다. 노직에게 평등권은 그 어떤 정부도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고 자유롭게 체결된 계약을 집행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축소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사람들의 반박 불가능한 자연적 자유의 한 가지였다. 337)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사실상 일체의 자유주의에 대한 좀더 전면적인 거부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에 기인한 것이었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1981)에서 자유주의가 도덕성에 대한 잘못된 묘사에 의존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원하게 된 것이 사람들의 가치와 이상을 결정한다고 가정했지만, 실은 가치와 이상이 사람들이 당연히 원해야 하는 바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매킨타이어가 생각하기에는 도덕적 부정합성이 자유주의의 원죄였다. 자유주의자들은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관점들을 파괴하는 장치”라는 치명적 결점을 물려받았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본성에 걸맞은 목적을 찾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을 포기함으로써, 계몽주의는 도덕성과 사회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도덕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음울한 설명은 현대 사유 일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설명과 유사했다. 둘 다 이론의 부정합성과 실천의 붕괴를 강조했다. 339-40)
13장 1950년대~1980년대의 폭넓은 자유주의 정치
“산업혁명의 근본 문제들은 해결되었다. 노동자들이 산업적·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은 『정치적 인간』(1960)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후의 물질적 풍요는 경제적 갈등을 감소시켰고, 새로운 방식으로 시민적 존중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를 침묵시키지는 못했다. 국가의 권력, 시민의 자유, 시민적 존중의 정당한 수단, 심대한 윤리적 불일치의 수용과 관련해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전후에 이어지던 경제 호황이 1973년에 끝나자, 다이아몬드 형태의 사회에서 상층과 중간층에 있는 사람들이 하층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물질적 갈등 자체가 되살아났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변화들은 많은 사람에게 환영할 만한 격변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들은 격변이었다. 그것들은 기대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친숙한 패턴들을 교란시켰다. 그것들은 분노에 찬 반대와 좌절된 희망이 뒤섞인 강력한 반작용을 축적해갔다. 344, 355)
제임스 뷰캐넌(1919~2013)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늑대로서의 국가를 생각해보라고 촉구했다. 뷰캐넌은 정치인과 관료들은 득표나 종신 고용을 위해 자신들을 “팔” 것이고, 따라서 공공재가 과잉 공급될 공산이 크다고 주장했다. 뷰캐넌은 롤스가 그랬듯이 원칙의 문제에 대한 합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하이에크와 달리 뷰캐넌은,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적·윤리적 안정성을 영원히 뒤집어버리기 이전의 분명한 역사적 평온 상태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을 믿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이 믿을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과세와 지출의 헌법적 제한에 대한 뷰캐넌의 사상은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까지 퍼져나갔다. 거기서 공화당원들은 정부 지출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줄이기 위한, 자기 제한적 조례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뷰캐넌의 연구는 미국 대중 전반에서 커지고 있던 반정치적 정서에 학문적 무게를 부여했다. 358-9)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심지어 정부의 유일한 경제적 임무라고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정부에 기대하게 된 다른 임무들은 프리드먼이 생각하기엔 정부에 의해 수행되어 분명 악영향을 미치거나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어 더 좋은 영향을 미치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는 항상 일시적 절충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구적 절충은 없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의 발생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높은 인플레이션은 일자리를 없앤다. 케인스의 교훈에 따르면, 정부는 돈을 더 풀거나 더 지출함으로써 약간의 인플레이션 상승을 대가로 아주 조금의 실업률 하락을 얻을 수 있었다. 프리드먼은 동의하지 않았다. 359-60)
1970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와 미국주의의 결합이 믿음을 주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미국주의 각각이 도전에 직면했다. 좌파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의 오랜 루스벨트-트루먼 연합의 분열을 도왔다. 민주당은 국가와 도시보다 피부색, 민족 집단, 젠더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기 시작했다. 우파에서는 도덕 정치가 과거의 소수파를 지배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핵심 세력으로 만들면서 공화당을 완고하고 협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적 성취에 대한 기술로서든, 어떤 사회적 이상에 대한 기술로서든, 하나의 당파적인 정치적 꼬리표로서든, 미국 정치에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은 전쟁의 깃발이 되었다. 대처는 시장 권력을 해방시키기 위해 국가 권력을 사용하면서 국가를 공격했다. 레이건은 비슷한 목적으로 정부를 운영하기 위해 비슷하게 정부에 맞섰다. 대처가 정부를 이기적이고 못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면, 레이건은 정부를 우스워 보이게 만들었다. 367-8)
프랑스에서 반자유주의적 좌파는 급진 녹색당, 반신자유주의자, 현대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발효시키며 살아남았다. 그중 어느 쪽도 자유주의적 중도주의에 대한 자신만의 일관성 있고 신뢰할 만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 각각은 자유주의의 자기만족에 구멍을 뚫는 날카롭고 효과적인 못과 같았다. 극우파는 생명력을 이어갔는데, 그들은 미국 공화당 우파의 경우와 비슷하게, 거대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맹목적 애국주의 및 오래된 저열한 편견들과 결합시켰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드골주의 우파의 영웅적 저항과 국가적 자부심에 대한 신화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좌파의 미완의 혁명에 대한 전설도 사멸해가고 있었다. 호화로운 퍼레이드가 열린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식에 어떤 정치적 주안점이 있다면, 그것은 압제자를 끌어내리거나 계급 투쟁을 재개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방, 다양성, “차이”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언제나 역사적 사건들의 총체 그 이상이었다. 371)
4부 21세기 자유주의의 꿈과 악몽
14장 자유민주주의를 흔든 20년
트럼프 휘하의 미국 공화당원과 이민배척주의자들에게 꽉 잡힌 영국 보수당원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강경 우파 정치 엘리트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었다. 언제든 대의 정부의 익숙한 규범들을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권력 분립을 못 견뎌한다는 것, 도전을 받으면 재빨리 자신들이 국민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답한다는 것,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국제적 합의에 의해 약속된 오래된 원칙들을 뒤집거나 무시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지지자들이 보기에, 강경 우파의 지도자들은 어려운 시기에 분열된 사회에 방향을 제시했고, 헌법의 규범을 뒤틀거나 무시했던 과거의 독단적이지만 존경받았던 지도자들―예컨대 루스벨트, 처칠, 드골―의 방식으로 공직의 권한을 사용했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트럼프 공화당과 브렉시트 보수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험한 반전으로, 이제 제한 장치나 자기 수정 장치가 파괴된 채 비자유주의적이거나 비민주주의적인 권력 형태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379)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부식제인 포퓰리즘이 진행 중인 상황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 널리 제시되었다. 포퓰리즘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포퓰리즘이 제도적 장치나 민주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자기 정당화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포퓰리즘 자체의 논쟁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포퓰리즘은 엘리트 현상이다. 포퓰리즘은 흔히 인민과 엘리트 사이의 경쟁으로 잘못 소개되지만, 사실 포퓰리즘은 엘리트끼리의 경쟁으로, 한쪽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인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흔히 특정 인종의 국가로 상상되는 어떤 고결한 국가를 부패한 기성 체제와 위협적인 외국인들로부터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부패한 기성 체제와 부자들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이 인민이라는 그 신화적인 존재를 얼마나 소리 높여 대변하든, 흔히 그들은 자신들이 몰아내고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적수들과 같은 배경을 가진 활동가였다. 380-1)
경제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다는 주장은 자유민주주의에 불리한 일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로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사회 갈등은 충분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만 관리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저성장 혹은 제로 성장이 치솟는 물가와 결합된 1970년대에는 경제적 우파가 경제적 좌파와의 논쟁에서 승리했는데, 우파의 논지는 대체로 1970년대의 파괴적인 인플레이션을 1930년대 이후의 통설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그다음에 유럽 전역에서, 경제적 우파의 대안―인플레이션 없는 성장, 낮은 세금, 균형 예산―이 그것의 내부 긴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통설이 되었다. 중국과 인도의 무역 개방과 경제성장에 힘입어, 그 새로운 통설은 저인플레이션과 강력한 성장의 1990년대에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도 좌파 정당들도 그것을 수용해, 이들은 경제의 측면에서 중도 우파 정당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되었다. 386-7)
자유 시장과 작은 정부 통설이 공개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포기된 것은 2008년의 금융위기와 그것의 여파에 이르러서였다.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밀어붙인 결과, 자유 시장 통설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게다가 30년 동안 계속된 복지비 삭감은 위기가 닥쳤을 때 사회적 비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은 없었다. 케인스식이든 하이에크식이든 프리드먼식이든 한 가지 답은 없었다. 정부는 그때그때 조치를 취했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세금이 낮아졌고, 정부는 지출을 늘렸다. 하지만 이미 세금이 낮았기 때문에 재정적 도구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재정 적자에 대한 걱정이 덜한 달러 발행국 미국을 제외하고, 정부들은 곧 다시 지출을 줄였다. 교리는 혼란에 빠지고 통설들은 퇴색했지만, 분명한 것은 경제성장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의 제한 없는 사회적 약속들은 이행되지 못할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387-8)
자유주의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기후 변화의 딜레마와 다르지 않았다. 기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비용을 별로 혹은 전혀 들이지 않고 무대책으로 있다가 나중에 극심한 위기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예방했는데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날 수도 있다. 복지 자본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미래의 은총을 믿고 있다가 은총을 받지 못하면 사회 갈등에 직면하게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면, 사회적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장치와 시장의 은총이 어떻게든 가져다줄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기술적 조치가 성장을 촉진하리라는 데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한 정치적 동의는 거의 없었다. 마술적인 해법을 제쳐놓는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타협에 대한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393)
자유주의자를 몽유병자로 여기는 대단히 비판적인 의심자와 조롱자가 많았다. 국수주의적 열기의 회귀에 직면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럼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이상을 분명히 하는 것, 위축되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 이상들을 고수하는 것, 무엇보다 초점을 흐리는 단순 논리들을 피하는 것이었다. 초점을 흐리는 단순 논리들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3)에 담겨 있는, 윤리적-문화적 갈등이 계급 간 경쟁을 대체했다는 주장이었다. 문명이란, 지정학 내에 설득력 있게 배치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의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2008년 이후 몇 년 동안 계급과 불평등이 기운차게 정치로 돌아온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문화가 정치 갈등의 원인인 계급과 경제를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문명 전쟁은, 그런 전쟁이 도모되고 추진되는 게 아니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420)
둘째, 자유주의가 서구의 여권을 가지고 왔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자유주의가 19세기의 의상을 입고 왔다는 주장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서구가 보기에는 보편주의, 나머지가 보기에는 제국주의”라는 조롱 섞인 주장은 “나머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애매모호했다. 자유주의 가치가 서구적이라거나 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그 “나머지”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별로 없고 발언권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다른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열정적 애착이 없는 자유주의자라는 주장이었다. 브렉시트 캠페인에 동원된 거짓말 중 하나가 바로 국가적 감정에 관한 거짓말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만을 갖고 있고 초국적 애국주의를 느낄 줄은 모른다는 주장은 틀렸다. 국가도, 국가 아래의 하위 집단도 그것들 자체에 대한 누군가의 충성심이나 감정을 요구하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청구권을 갖고 있지 않다. 420-1)
15장 정치의 우선성
이 책에 서술된 자유주의의 역사가 암시했듯이, 보편적 교육과 문화적 진보는 인간의 사리 분별을 보증하지 않는다. 계몽하고 개선하려는 자유주의적 열정은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충동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근대 경제는 저절로 믿음직하게 안정화되지 않는다. 국제 무역과 금융 거래는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거만한 위세는 적대적인 비판자들의 주장과 달리 자유주의의 일부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인지하고 맞서 싸워야 할, 자유주의 덕목들의 습관적 악습이다. 20세기 초에 자유주의자들은 충격적이게도, 자유주의의 평화적 질서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성공이 가능케 한 규모의 전쟁과 야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1세기 초에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자립적이지도 않고 전 세계에 행복하게 확산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교훈들을 하나로 뭉뚱그린다면, 자유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방어되고 보수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교훈이다. 438)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의 가장 큰 약점은 정치적 합의와 정치 참여를 혼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비판은 건강한 자유민주주의가 지속적 성공을 위해서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시민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지속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 자유주의는 합의를 필요로 했다. 자유주의는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자유주의자가 많이 있을 것을―대다수일 것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느 때건 실제로 정치에 관여하는 이들, 즉 정치인, 공무원, 기부자, 활동가, 자원봉사자는 늘 소수다. 자유민주주의는 스스로의 제도들을 계속 보수하고 스스로의 결점들과 싸우기 위해서, 활발한 소수의 적극적 자유주의자와 신뢰할 수 있는 다수의 수동적 지지를 필요로 했다. 그 두 가지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치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가능하다. 441)
“정부가 문제”라는 슬로건보다 사회에 더 큰 해를 끼친 슬로건은 없다. 사람들이 현재 자유주의를 ‘작은 정부’ 교리로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자들 자신도 이에 책임이 있다. 교조적인 ‘자유 시장’ 자유주의는 과도한 국가 권력에 너무 오래 집중함으로써 정치적 난제들을 낳았는데, 오늘날 부의 과잉 집중과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 속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해 있는 것이 바로 그 난제들이다. 주된 경제적 난제는 불평등 자체가 아니며, 불평등으로 인한 어려움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경제적 난제는 성장이 너무 느리고 임금이 너무 낮고 노동 불안정성이 공식적 실업률이 말해주는 것 이상으로 높다는 데서 암시된다. 근본적인 사회적·정치적 난제는 특권의 강화와 특권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인데, 이 두 병폐의 증상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다. 지난 30~40년간의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극명한 결함은 다수가 아닌 소수를 위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력을 함께 운용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444)
이 책은 실제로 시도된 적 있는 알려진 정치 관행들 중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결함이 적다고 가정했지만,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목표는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더 잘 파악하여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더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작가이자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는 자신의 노트에서 동료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되어야만 더 나아질 것이라고 썼다. 이 책 『자유주의: 어느 사상의 일생』은 그런 조언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만약 21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비판자들이 하듯이 자신의 모든 난제를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쌓아 올리고만 있지 않는다면, 만약 그들이 이전의 자유주의자들처럼 저항, 진보, 존중이라는 목표를 새로운 도전에 걸맞게 재고할 수 있다면, 만약 그들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많은 결점을 일부라도 고쳐보려는 정치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희망의 동상 아래 자유주의를 묻어버리기는 아직 너무 이를 것이다. 4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