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1 -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제2판 근대세계체제 1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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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중세적 서곡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생겨난 유럽 세계경제(European world-economy)는 제국은 아니었지만 대제국만큼이나 넓었으며 제국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세계에서는 실로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사회체제였으며, 바로 이 점이 근대 세계체제(modern world-system)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것은 제국, 도시국가, 민족국가 등과 달리 경제적 실체이지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범위 안에 제국들, 도시국가들, 그리고 이제 막 등장하는 〈민족국가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세계〉 체제이다. 그것이 전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사법상 규정된 어떤 정치적 단위보다도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체제의 부분들 사이를 잇는 기본적인 연결점이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세계경제〉이다. 비록 문화적 연결점에 의해서, 그리고 정치적 편제와 심지어 연합적 구조들에 의해서 그러한 연결점이 어느 정도 공고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33)


"그 이전에도 세계경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같이 제국으로 변형되었다. 근대 자본주의와 근대 과학기술의 발달로, 근대 세계경제가 통일된 정치구조를 출현시키지 않고도 번영하고 생산하고 팽창하는 일이 불가능했더라면 이 세계경제 역시 마찬가지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모르며, 그렇게 될 것 같은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자본주의가 하는 일은 더 많은 이윤을 내는 (적어도 장기적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내는) 잉여 착취의 다른 원천을 제공하는 일이다. 제국은 공납을 거두어들이는 기구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는 정치적 힘이 독점적 권리(혹은 그에 가까운)를 확보하는 데에 이용된다. 국가는 그 자체가 주된 경제활동 주체이기보다는 남의 경제활동 안에서 특정한 거래조건을 확보하는 수단이 된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시장의 작동은 (자유로운 작동은 아니지만) 생산성을 높이는 유인들과 근대 경제의 발전에 따른 모든 부수 효과를 창출한다. 세계경제는 이러한 과정들이 일어나는 무대이다."(34-5)


"한 체제로서의 봉건제를 교역과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어느 시점까지는 봉건제와 교역의 확장이 서로 제휴하여 나아간다." "그렇지만 봉건체제는 지역 내 교역과 반대되는 원거리 교역에서는 오직 한정된 교역량밖에는 지탱하지 못했다. 이것은 원거리 교역이 대량 적하물의 교역이 아니라 사치품 교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격차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 정말로 부유한 자들의 정치적 방종과 경제적 능력에 의존한 교역이었다. 원거리 교역 자체가 일부 대량 적하물 교역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확대 생산의 과정을 촉진하는 것은 오직 근대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생산이 확대될 때에만 가능하다." "주요 경제활동은 여전히 소규모 경제영역 내에서 거래되는 식료품 생산과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활동의 규모가 서서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양한 경제적 중핵들이 팽창했다. 새로운 변경지역의 토지가 경작되고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었다."(40-2)


"그런데 14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이 팽창이 끝났다. 경작면적이 줄어들었다. 인구가 쇠퇴했다. 그리고 봉건적 유럽 전역에 걸쳐서 또 그 너머까지 전쟁과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두드러지는 어떤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농업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고 있던 이 시기에는, 도시의 임금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공업제품의 가격도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 역시 인구 감소로 야기된 노동력 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다시 지대를 감소시키는 한편(명목상의 물가는 올라가고 있는데 지대는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한), 농업노동력의 비용을 상승시켰다." "중앙 당국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더 어렵고 당국이 유지해주는 질서의 혜택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길 정도로 장원 영주들이 미약한 처지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중앙기구의 강화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14-15세기의 경제적 어려움과 영주들의 수입 감소가 빚어낸 상황이었다."(42, 49, 53)


"콩종크튀르의 거대한 압력 속에서 이제 유럽이 발전시키고 또 지탱하게 된 것은 잉여 전유의 새로운 형태, 즉 자본주의 세계경제였다."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립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들이 필수적이었다. 즉 해당 세계의 지리적 규모의 확대, 그 세계경제의 서로 다른 생산품과 서로 다른 지역에 적합한 상이한 노동 통제 방식의 발전 그리고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핵심국가가 될 곳에서의 비교적 강한 국가기구의 창출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것은 첫번째 것의 성공 여부에 주로 달려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영토 확장은 〈봉건제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이론적으로 관건이 되는 필요조건이었다. 영토 확장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상황은 상당히 지속적인 무질서와 한층 더 심각한 수축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어떻게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붙들게 되었는가? 그것을 붙든 것은 또는 적어도 앞장을 선 것은 유럽이 아니라 포르투갈이었다는 것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이다."(66-7)


# 콩종크튀르conjoncture : 페르낭 프로델은 인구, 물가, 임금 등과 같이 주기적으로 변동하는 것을 콩종크튀르라고 하여, 그 시간지속을 장기지속과 사건적인 짧은 시간 사이의 중기적 시간으로 본다.


"14-15세기 영주계층의 수입 감소라는 문제를 상기해보자. M. M. 포스턴은 그 결과 나타난 영국 귀족들의 행동을 〈악당행위(gansterism)〉라고 불렀는데, 말인즉 소득수준의 감소를 메우기 위하여 불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현상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폭력행위의 한 형태가 바로 팽창이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 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봉건귀족들은 자기 토지에서의 소득이 줄어드는 경우,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토지를 더 많이 가지려고 적극 노력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기대할 만한 수준까지 실질소득을 다시 끌어올리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왜 포르투갈이 해외로 팽창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은 그렇지 않았는가 하고 물을 때,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다른 나라의 귀족들은 좀더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향 근처에서 배보다는 말을 사용하여 좀더 쉽게 팽창해나갈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80-1)


2 유럽의 새로운 노동분업 : 1450? - 1640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근거한 유럽 세계경제가 등장한 것은 16세기의 일이었다. 이 초창기에 나타난 가장 기이한 측면은 자본가들이 전 세계에 그들의 깃발을 휘날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유기업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개인주의나 과학 또는 자연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도 아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세계관으로서 성숙한 것은 모두 18-19세기에 가서의 일이었다. 이 시기를 풍미한 듯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들자면 그것은 국가통제주의(statism) 또는 국가이성이라는 이데올로기였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특한 특징은, 경제적 결정은 주로 세계경제 무대를 지향한 반면, 정치적 결정은 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더 작은 구조들─세계경제 내의 국가들(민족국가, 도시국가, 제국)─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사회계급과 인종(민족, 종교) 집단 역시 동시에 그리고 때로는 대립적인 양상으로, 국가구조 및 세계체제의 틀 안에서 사회적 존재로 등장하게 되었다."(109-10)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가장 명백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인플레이션, 이른바 가격혁명이었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실질)임금의 극적 하락은 그 자체가 16세기에 아직도 제거되지 않고 있던 전(前)자본주의 경제의 잔재들인 세 가지 구조적인 요인들의 결과였다." "세 가지 요인들이란, 화폐에 대한 착각 및 임금 요구의 불연속성, 관습이나 계약 또는 법령에 의한 임금의 고정, 그리고 임금 지불의 지체이다. 피에를루이지 초카가 말하는 화폐에 대한 착각이란, 불연속적인 몇몇 시점을 제외하고 점진적인 통화 팽창 움직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설령 통화 팽창 움직임이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임금협상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만 가능했다. 더욱이 16세기에는 관습이나 계약이 무력해진 경우 종종 국가가 간섭하여 임금인상을 금지했다. 끝으로 당시의 많은 노동자들은 일 년에 한 번만 임금을 받았는데, 그것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던 당시로서는 가치가 떨어진 화폐로 받는다는 뜻이었다."(128-9)


"카를로 치폴라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노동비용이 다른 경쟁국들의 임금수준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았던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노동자 조직들이 노동생산성에 걸맞지 않은 임금수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찰스 벌린든 역시 16세기 벨기에의 도시들에서 임금이 밀의 생산가에 육박했음을 발견한다. 이 지역들은 무역의 〈옛〉 중심지였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정치경제적 세력으로서 비교적 강력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 노동자들은 날로 더해가던 폭리 취득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관행의 〈진전〉에 의해서 옛 구조들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16세기에 산업 중심지로서 쇠퇴하고, 장차 승리자로 떠오를 홀란트, 잉글랜드, 그리고 이들에게는 못 미치지만 프랑스와 같은 신참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 또한 바로 노동자들의 힘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습의 진전 때문이었다."(130-1)


"인플레이션은 소득의 재분배─유럽 세계경제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복잡한 재분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취약한 부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 축적된 자본은 누군가에 의해서 다시 투자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은 강요된 저축, 따라서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이었고, 이러한 이윤을 세계경제 체제를 통해서, 주변부 및 반주변부─〈옛〉 선진지역들─로부터 우리가 세계경제의 신흥 핵심지역이라고 불러온 곳으로 불균등하게 배분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이면에는 세계경제 내의 노동분업의 등장이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 분업은 농업과 공업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활동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화와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노동 통제 및 다양한 방식의 계층화가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들〉, 즉 정치적 활동의 영역에 상이한 정치적 결과들을 가져왔다."(133-5)


"신생 세계경제의 지리적, 경제적 주변부에서는 두 가지 주요 활동, 즉 금은을 캐내기 위한 광산활동과 식량을 조달하기 위한 농업활동이 이루어졌다. 16세기에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주로 전자를 제공한 반면, 동유럽은 주로 후자를 제공했다. 두 경우 모두 기술은 노동집약적이었고, 사회제도는 노동착취적이었다. 그 잉여는 전체적으로 핵심지역 주민들의 필수품들을 공급하는 데 지나치게 많이 돌아갔다. 기업의 직접적인 이윤은 핵심지역의 집단들, 국제적 무역집단 그리고 지역의 관리자들(예를 들면 폴란드의 귀족,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관료와 엥코멘데로들)이 나누어 가졌다. 인구의 다수는 강제노동에 종사했는데, 이 제도는 국가와 그 사법기구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제되고 시행되었다. 노예들은 이윤이 남는 한 이용되었고, 그러한 사법적인 극단주의가 너무 비용이 많이 들 경우에는, 그 대안으로 형식상 자유롭되 법률적으로 강요되는 농업 노동이 환금작물 분야에서 채택되었다."(159-60)


"세계경제의 핵심부인 서유럽의 경우에 상황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인구밀도는 (심지어 14-15세기와 같은 인구 감소기에도) 기본적으로 매우 높았다. 따라서 농업 역시 한층 더 집약적이었다. 더욱이 토지의 일부는 경작지에서 목초지로 바뀌었다." "핵심지역에서는 도시들이 번성하고 공업들이 탄생했으며, 상인들은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세력이 되었다. 16세기 전 기간을 통해서 농업은 여전히 인구 대다수의 생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동유럽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유럽 세계경제로의 편입은, (약탈과 높은 이윤을 통해서) 자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핵심부의 일부 노동력을 해방시켜 다른 활동들에 전문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핵심부 안에는 주변부에서의 활동들과 유사한 커다란 잔재(예를 들면 곡물 생산)도 있었다. 그러나 핵심부에서의 추세는 다양성과 전문화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반면 주변부에서의 추세는 단일작물재배를 지향했다."(160-2)


"잉글랜드처럼 인클로저와 임차지에 토대를 두거나 동유럽처럼 강제 환금작물 노동에 토대를 둔 대영지로 나아갈 수 없었던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의 지주계급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출현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서, 반(半)자본주의적 기업의 형태로 분익소작제(sharecropping)라는 중간 단계를 선택했는데, 사실 그것은 반주변부에 알맞은 형태였다. 반주변부가 주변부처럼 완전한 위성지역이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높은 토지/노동력 비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강력한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있어서 불황기에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대한 특별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뒤비에 따르면, 도시 상인들의 수가 많고 비교적 세력이 컸던 지역에서는 많은 영지들이 이들 도시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들 도시민은 기근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했으며, 토지 소유에 따르는 사회적 지위는 추구하되, 손수 농사를 짓는 수고는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토지를 분익소작제에 할당하는 것은 합리적인 타협이었다."(169-70)


"자유노동은 핵심부 국가들에서 숙련작업에 적용된 노동통제 방식이었고, 강제노동은 주변부 지역들에서 비숙련작업에 적용된 노동통제 방식이었다. 두 방식을 결합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자본주의는 세계제국의 구조 안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로마에서 출현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이다. 상인들은 단일한 국가구조 안에서보다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정치적으로 한층 수월하게 다양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단일 국가의 지배자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압력에 대응해야만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밀이 단일한 민족국가의 구조 안에서보다는 비(非)제국적인 세계경제 구조 안에서의 노동분업의 확립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K. 베릴은 20세기의 저개발 국가들에서 〈국제무역이 종종 국내교역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용이하며······국가간의 전문화가 종종 한 국가 내에서의 지역간 전문화보다 훨씬 빠르고 용이하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16세기 유럽에서도 사실이었다."(198-9)


3 절대왕정과 국가통제주의


# 16세기 국왕권 강화의 주요 측면들

1. 관료제화

2. 권력 독점

3. 정통성의 창출

4. 신민의 동질화


"국왕은 어떻게 (영속적이고 종속적인) 관료들을 확보했는가? 그는 돈을 주고 그들을 샀다. 국왕의 문제는 그에게 대리인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는 행정과 군사의 기능을 수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이전에는 국왕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또는 그들의 동료와 가족의 이해관계에 따른 반대압력에 직면할 경우, 국왕의 뜻을 수행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국왕은 대개 〈평범한 출신〉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렸으며, 그들은 봉급을 받는 상근 직원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케 한 주요한 관행은 〈관직 매매〉로 알려지게 되었다. 재정적 공평무사와 보편적 충원의 규범에 기반을 둔 관료제와는 달리, 이러한 형태의 관료제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제한된 국왕 권력을 예고하며, 국가의 수입이 관직을 매입한 이 관리집단에 대한 증대된 보상으로 전용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과거의 봉건제와는 달리, 관직 매매는 국가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을 가능케 했다."(211)


"인구 증가와 함께 다양한 동기로 추진된 인클로저 운동은 유랑의 문제를 초래했으며, 용병대의 등장은 다른 목적들 가운데서도 이들 〈유랑민들〉의 일부를 고용하여 나머지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용병은 군주의 힘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그들은 국왕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세울 뿐만 아니라 소귀족들의 일자리를 빼앗음으로써, 전통적인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물론 여러 지역의 몰락한 기사들에게 한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그들은 국왕을 위한 복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국왕의 힘이 보다 센 곳에서는 비적행위가 그만큼 더 어려웠다. 그러나 군주의 힘이 약한 지역에서는 비적행위가 많은 이익이 돌아갔고, 국왕을 위해서 복무할 기회는 그만큼 더 적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비적행위는 〈전통적 저항〉으로의 도피라기보다는 보다 강력한 국가를 바라는 하나의 요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국가 구조 안'에서의' 저항이었다."(220)


"정치조직체는 비록 부분적인 정당성이나마 획득하게 되면 언제나 그만큼 더 안정을 얻는다. 정당화는 대중이 아니라 핵심집단과 관련된다. 정치적 안정성의 문제는 국가기구를 관리하는 소수 집단이 다수 집단인 중앙의 간부진 및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얼마나 납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즉 그 체제가 이들 핵심집단이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합의된 가치에 근거하여 형성되었고 또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그와 아울러 이 체제가 커다란 장애 없이 계속 작동하는 것이 이들 핵심집단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러한 상황이 실현될 때, 우리는 한 체제를 〈정당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당성의 문제는 단 한 차례로 결판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타협의 문제이다. 16세기에 군주의 새로운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떠오른 이데올로기는 왕권신수설이었으며, 그 체제를 우리는 절대왕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221-2)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의 국가의 등장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절대주의를 민족 또는 민족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계체제 내에서 강한 국가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강한 국가들 내부에서든 주변부에서든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 전제조건이었다. 민족주의는 한 국가의 구성원들을 신분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으로서, 그것이 함축하는 집단적 결속의 모든 필요조건들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절대주의는 국가 그 자체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전자의 본질은 하나의 집단적 감정이고, 후자의 본질은 국가기구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소수 집단의 감정이다. 물론 강한 국가의 지지자들은 시일이 흐르면서 그들의 목적을 견실하게 보강하고자 민족감정을 조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16세기에 어느 정도 이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집단적 감정은, 만일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전체로서의 국민보다는 주로 군주 개인에 맞물려 있었다."(223-4)


"교회가 전력을 기울여 근대성에 반기를 든 것은 초국가적 기구인 교회가 똑같이 초국가적인 경제체제의 등장에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국가적인 경제체제는 특정 (핵심부) 국가들의 강력한 국가기구 창출에서 그 정치적 힘을 얻었는데, 그러한 진전은 이들 국가들 안에서의 교회의 위상을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유럽 세계경제의 장기적 성공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주변부 국가에서의 교회의 성공이었다. 1648년 이후 종교개혁의 전쟁열기가 마침내 식어버린 것은 양측이 지쳐서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지리적 분업이 세계경제의 근원적인 추진력의 자연스러운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일부 군주들은 관직 매매 관료, 용병군대, 왕권신수설, 그리고 종교적 통일성(cuius regio)으로 막강한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또 어떤 군주들은 실패했다. 이것은 세계경제 내의 노동분업에서 그 지역이 떠맡은 역할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240-1)


4 세비야에서 암스테르담까지 : 제국의 실패


"1519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자 유럽 내의 그의 영토는 (아라곤을 포함한) 에스파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남부 독일의 여러 지역들, 보헤미아, 헝가리, 프랑슈-콩테, 밀라노, 에스파냐의 지중해 영토들(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 등)과 같은 다양하고 분산되어 있는 지역들을 포괄했다. 당시 쉴레이만 대제의 오스만 제국이나 이반 뇌제의 모스크바 제국 등과 구조가 유사했던 이 제국은 한때 유럽의 정치적 공간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를 5세만이 유럽 세계경제를 그의 영토 안으로 흡수하고자 꾀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도 똑같은 일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프랑스는 영토의 규모로 보나 그 중앙의 위치로 보나 이점을 안고 있었다." "사실상 두 거대 제국, 즉 합스부르크와 발루아 간의 투쟁은 결국 1557년, 양자가 모두 쇠진하고 유럽에서 제국의 오랜 꿈이 종결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261-2)


"합스부르크 제국과 발루아 제국은 둘 다 실패했고 함께 몰락했다. 1557년, 두 제국의 재정파탄으로 군사적 투쟁이 곧바로 중단되고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은 차후 100년 동안 유럽의 정치적 판도를 바꾸어놓을 것이었다." "무너진 것은 어느 특정한 국가구조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것은 그 세계체제였다. 100년동안 유럽은 새로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전의 방식으로 그 번영에서 이익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술적 발전과 자본주의적 요소들의 부상은 이미 너무나 멀리 앞서나가 있어서 경제영역과 부합될 어떤 정치적 제국들을 다시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했다. 1557년이라는 해는, 이를테면 그러한 시도가 실패하고 유럽에 하나의 세력균형이 확립된 것을 알려준 해였는데, 이러한 세력균형은 민족이 되고자 하는 국가들(이른바 민족국가들[nation-states])로 하여금 제몫을 챙기고, 또 계속 번창하는 세계경제를 통해서 살쪄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283)


"핵심 국가들 자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발루아 제국의 경제적 파탄으로부터 유익한 재정적 교훈을 끌어냈다. 그들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재정적 혼란에 다시는 덜미를 잡히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유리한 무역수지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줄 일종의 수입통제를 창안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당시에 널리 유행하게 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이 무역수지만을 염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비록 당시에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국민총생산을 또한 염려했으며, 국민총생산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몫과 그것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염려했다. 그 결과는 카를 프리드리히가 지적하듯이, 〈제2차〉 16세기 말에 이르러서 〈이제까지 자금을 대부해준 금융 가문들보다도 국가 자체가 신용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내부로 관심을 전환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국가들 사이에서는, 지친 끝에 찾아온 상대적인 평온상태가 한동안 지배했다."(304-5)


"발전하는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왜 민족적-사회적 복합 혁명이 다른 곳(무엇보다도 프랑스를 제외하고)에서는 사회질서가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던 〈제2차〉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또 오직 여기서만 일어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봉기가 대체로 성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혁명의 발발에 대한 열쇠는 장인들이나 도시 노동자들의 사회적 불만이나, 혁명의 커다란 수혜자들임에 틀림없는 부르주아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네덜란드〉 귀족들이 군주는 자기들의 대변자가 아니며, 군주의 정책들은 중단기적으로 볼 때 그들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것이고, 군주가 정책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군주의 정치적 무대, 즉 에스파냐 제국이 확고히 자리잡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무대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에) 것을 갑자기 우려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민족주의적〉 저항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313-4)


"〈혁명〉은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의) 최초의 봉기와 그 진압(1566-72), 북부의 홀란트와 젤란트에서만 일어난 (보다 〈개신교적인)〉 제2차 봉기와 헨트 평화조약에 의한 봉기의 종결, 플랑드르 남부에서 일어난 급진적인 봉기(1577-79), 1579년 이래 나라가 두 부분(북부에는 연합주, 남부에는 국왕파의 체제)으로 갈라진 것, 1598년의 재통일 시도, 1609년 영구적인 휴전 성립 등 많은 단계들을 거쳤다. 이 시기에는 분쟁이 차츰 북부의 국가적 독립을 달성하려는 개신교적인,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화된〉 북부의 투쟁으로서 분명한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북부는 상업 부르주아지의 요구와 합치하는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 상업 부르주아지의 힘은 투쟁을 통해서 성장했으며, 마침내 17세기에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던 것이다. 일단 분쟁이 시작되자, 〈제국이 실패한〉 상황에서, 새로운 유럽의 세력균형이 나타난 상황에서 이를 막기 위하여 에스파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316-7)


"네덜란드 혁명의 의미는 그것이 민족해방의 모델을 확립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중요성은 유럽 세계경제에 대한 경제적 영향에 있다. 네덜란드 혁명은 영국인들이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세계체제의 결정적인 공고화에 필요한 조처를 취할 준비가 될 때까지, 어려운 조정기에 걸쳐 세계체제를 하나의 체제로서 지탱해줄 수 있는 힘을 풀어놓았던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발트 해 무역에서 점차 그 역할이 증대되었고, 16세기 초까지 한자 도시들을 대체해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무역은 발트 해 무역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보다 증가시켰는데, 네덜란드인들 자신은 발트 해 무역을 〈모(母)무역〉이라고 불렀다. 결국 동유럽은 네덜란드 도시들의 인구를 먹여살릴 곡물과, 네덜란드의 수산업과 조선업에 필수적인 선박물자들을 공급했다. 이번에는 조선업이 네덜란드가 성공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암스테르담은 유럽 경제의 삼중적 중심, 즉 상품시장, 해운업 중심지, 자본시장이 되었다."(325-9)


5 강한 핵심부 국가들 : 계급 형성과 국제교역


"통상 젠트리는 아직 작위귀족에는 미치지 못하며, 〈요먼(yeoman)〉보다는 더 상위에 있는 계층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젠트리〉에 관한 핵심적인 논점은 그것이 형성중인 하나의 계급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형성중인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봉건제의 계서제적 질서 아래서는 지위, 의무, 특권, 명예를 규정하고 있는 수많은 범주들이 발전했다. 지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가문의 연속성은 물론 불안정했으며, 지위와 수입의 상관관계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팽창은 〈지주(landowner)〉(이는 분명히 토지보유 규모에 따라 세분될 것이다)라는 새로운 범주에 따른 분류체계에 반영되었다. 젠트리는 바로 자본주의적 지주를 포괄하는 용어로서 나타났다. 다른 용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젠트리〉는 점차 팽창하여 다른 용어들을 흡수하고 없애버린 한 집단의 호칭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적어도 〈젠트리〉와 함께 여전히 〈특권귀족(aristocrat)〉과 〈요먼〉이 있었다."(370-1)


"그렇다면 이것이 젠트리에 관한 예의 고전적인 논쟁에 대하여 무엇을 시사해주는가? 토니의 기본 논지는 씀씀이가 헤픈 귀족이나 야반도주하는 투기꾼들에 비해서 젠트리가 인플레이션 시대의 생존에 적응하는 데 더 적합한 생활방식을 영위한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재산을 주무르는 모험가들에 비해서 지방 젠트리들은 단순한 약탈꾼들에 맞서는 정착민들이었다.〉 그들과 같은 부류의 프랑스인들에 비해서 그들이 가진 이점은 그들이 〈제도에 개인을 희생시키는 냉혹한 영국의 가족제도에 의해서 소수로 유지되고 강하게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농촌의 출신지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같은 부류의 네덜란드인들에 비해서 정치적으로 훨씬 강력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대표자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방민과 지역에 대한 애착을 소귀족들의 귀족적 기품과 결합시켰으며, 이 두 가지 카드를 세련된, 그러나 냉혹한 현실인식 위에서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기〉 때문이다."(373)


"〈젠트리〉가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되고 있던 자본주의적 농장주에게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면, 요먼은 무엇인가? 밀드레드 캠벨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구조 내의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보건대, 요먼 신분은 성격이 꽤 명확했다. 그들은 토지와 농업의 이익에 주로 관심을 두고 "부귀와 빈곤의 중간지대"에서 살아가는, 농촌의 견실한 중간계급이었는데, 잉글랜드에는 젠트리와 농민층 사이에 위치하여······나라에 능력껏 봉사하는 "중간층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16세기에는 두 종류의 인클로저, 즉 목초지를 위한 대토지의 인클로저와 더욱 효율적인 경작을 위한 소토지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먼은 주로 후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목초지 인클로저에 따른 정치적 저항을 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식량 공급을 증대시킨다는 점에서 소토지의 통합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요먼의 역할은 그만큼 더 중요했다."(381-6)


"16세기, 특히 1540년에서 1640년에 이르는 시기는 일종의 계급형성기, 자본가적 농업계급의 형성기인 것 같다(그중 좀더 부유한 사람들은 〈젠트리〉로 부르고, 그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요먼〉으로 부른다). 이 시기의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토지 통합의 사회적 과정은 좀더 하위의 구성원까지도 포함한 이 계급 전체의 소득이 상승하는 과정이었던 한편, 프롤레타리아의 형성이 시작되는 과정을 수반하고 있는데, 그러한 프롤레타리아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도시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유랑민〉이 되거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땅뙈기를 가진 계절적 임금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시의 룸펜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국가기구는 하나로 응집된 강력하고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 상충하는 두 추세 사이의, 즉 새로운 여러 경제적 가능성에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적응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상위 신분의 사람들과 경제생활의 완전한 상업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상승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전장이었다."(396-7)


"〈제1차〉 16세기의 정치는 유럽 세계경제를 세계제국으로 전환하려는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시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대서양 탐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은 근본적으로 육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그 시도들이 실패한 한 가지 부차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16세기의 정치는 비제국적인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정치적, 상업적 우위를 누리는 통합된 민족국가의 창출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국외와 국내의) 해로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을 지향했다. 이 점에서 북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자연적인 지리적 이점들이 제몫을 톡톡히 했다. 프랑스의 정치는 육상지향적인 세력과 해상지향적인 세력들 사이의 긴장, 흔히 암묵적인 긴장상태였다. 프랑스측과 잉글랜드 및 연합주 측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뒤의 두 나라의 경우 양립 가능한 선택이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러한 선택들이 어느 정도 상충했다는 점이다."(410-1)


"1600-10년 사이에 프랑스는 종교전쟁이 낳은 분열로 인한 손실들을 어느 정도 만회했지만, 1610년 이후에 또 한 차례의 커다란 쇠퇴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주로 네덜란드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잉글랜드와의 경쟁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네덜란드인들과 심지어 영국인들조차도 가격경쟁에서 프랑스인들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세계시장이 축소되고 있던 순간에, 이전의 50-60년 사이에 축적된 산업자본과 기술의 우위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모든 주요 지표에서 경쟁국들에 뒤처졌다. 프랑스 제조업체들의 노동분업 수준은 더 낮았다. 숙련노동자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적절한 임금 계서제를 정착시킬 수 없었다. 그 시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국가의 보조는 부정기적이었고 단속적이었으며, 보잘것 없었으며, 화폐의 축적은 충분한 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세계경제의 중간 층위에 적합한 나라가 되었다."(449-50)


"부르주아지와 귀족의 요구 사이에서 흔들리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정 간의 차이점은, 잉글랜드에서는 상업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가 강력한 중앙정부와 연결되어 있었던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 국가의 변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활동하는, 본질적으로 더욱 다루기 힘든 부르주아지를 제어하기 위해서 프랑스 왕정은 자신을 강화시켜야 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매매를 통해서 그들을 매수해야 했고, 또 그들을 산업투자로부터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어야 했다. 잉글랜드에서는 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의 생활방식을 배워야만 했으며 부분적으로 그들과 뒤섞여야만 했다. 프랑스에서 그런 압력은 살아남아야만 하는 부르주아지에게 가해졌다. 양국 모두 중심부는 주변부에 대해서 승리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이것은 민족적 부르주아지라는 대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지의 후퇴를 의미했다."(458-9)


6 유럽 세계경제 : 주변부 대 외부지역


"첼소 푸르타도는 〈금과 은을 제외하고, 최초로 식민화가 이루어진 세기에, 아메리카에서 생산될 수 있었던 것 중 유럽에 팔 만한 상품은 거의 없었다. 단위무게당 가치가 매우 높았던 후추, 비단, 모슬린과 같은 물품들을 생산했던 동인도와는 달리, 아메리카는 수지타산이 맞는 무역을 뒷받침할 만한 상품을 전혀 생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계경제의 주변부(periphery)와 외부 지역(external area) 사이의 구분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구분법을 적용할 것이다. 하나의 세계경제의 주변부는 그 내부에서 주로 낮은 등급의 상품들(다시 말해서 노동에 대하여 많은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품들)을 생산하지만, 그 상품들이 일상적인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에 전체 분업체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지리적 영역이다. 세계경제의 외부지역은 하나의 세계경제가 때때로 〈호화스런 교역〉이라고 불리는 귀중품들의 교환을 위주로 무역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세계체제들로 구성된다."(464)


"폴란드는 16세기 말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 수출업자〉가 되었다. 폴란드 곡물 수출 경제의 대두는 강제 환금작물 노동에 바탕을 둔 대영지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귀족의 정치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했는데, 서유럽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무역에 대한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폴란드의 개방경제가 유지되었다. 폴란드 귀족의 번영이 이 자유무역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가는 폴란드의 〈중추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1626-29년에 시행한 비수아 강 봉쇄정책이 야기한 경제적 어려움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르지 토폴스키는 〈발트 해의 항구들을 경유하는 곡물 수출이 전체 경제구조를 지배할 정도로 [폴란드에서] 급속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17세기의 경기후퇴가 불러온 파괴적인 효과들을 설명하는 데에 원용하는데, 그 효과들은 폴란드의 각 지방경제가 얼마나 수출지향적인가에 따라서 달랐다."(467-8)


"폴란드가 팽창하고 있는 서유럽 시장을 겨냥해 (곡물을) 생산했던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영주들이 팽창하는 국내시장을 목표로 생산했다.〉 사실, 16세기에는 〈나라 밖으로 [곡물을] 실어내려면 차르의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다.〉" "러시아 세계경제의 핵심부는 공업제품들(각종 철물제품, 직물, 피혁제품, 무기와 갑옷)을 수출하고 사치품, 면직물, 말 그리고 양을 들여왔다. 게다가 그들은 〈비록 16세기에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유럽의 공업제품을 동부로 '재'수출했다. 러시아는 한 경제적 공동체의 초점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행복한 결과들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할 것은 독립적인 러시아 세계경제가 사실상 사라지고 러시아가 유럽 세계경제의 또 하나의 주변부가 되었던 18-19세기의 현상들에 미루어서 16세기를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유럽측에서 보면, 적어도 17세기는 되어야 러시아가 〈곡물과 임산물의 저장고〉로서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469-70)


"16세기가 서유럽에서는 국가권력이 대두하는 기간이었지만, 동유럽에서는 국가권력이 쇠퇴하는 시기였다. 그것은 동유럽의 경제적 지위를 규정하는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국제무역에서 이윤을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폴란드의 토지귀족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토착 부르주아지가 약화됨에 따라 국가의 과세기반이 조금씩 사라져갔고, 그것은 곧 국왕에게 적절한 수준의 군대를 유지할 여유가 없음을 의미했다." "서유럽에서 국왕의 재산은 교회재산을 희생시키면서 성장했고, 심지어 가톨릭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폴란드는 사정이 달랐다. 종교개혁의 최초의 충격이 지속되는 동안, 몇몇 교구 교회의 토지들이 개신교도 젠트리에게 몰수되었으나, 대부분의 교회재산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때 가톨릭 종교개혁이 승리했다. 그러나 국가의 취약성 때문에, 국왕의 재산은 감소했다. 비슷한 과정들이 동유럽의 다른 곳─일례로 융커 계급이 등장한 독일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475-7)


"러시아 내에서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데 차르가 사용한 주요 무기는 세습적인 국가기구의 창설이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프랑스나 잉글랜드의 경우보다도 토지에 대한 권리들을 재분배하는 것과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 가지 중요한 개혁은 징세청부권의 형태로 녹봉을 주던 제도, 즉 '코름레니에'라는 지역행정 체제를 일부는 현금으로, 일부는 토지 형태로 급료를 받는 관료제로 대체한 것이었다. 이 개혁은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과세기반을 창출했다. 이것은 차르의 권위가 팽창하는 과정의 일부이자 또 이로부터 이익을 얻은 지방 젠트리들이 확고하게 장악하는 지방 정부기구들을 창설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군사적 봉사가 확실하게 포메스티예(pomestye, 왕실 소유의 토지로서, 궁정관리와 군대소집 등에 응하여 봉사하는 귀족에게 분배함)의 보유와 결부되어, 비교적 충성스러운 상비군을 보유했다는 확신을 차르에게 안겨준 것이 바로 이때였다(1556)."(485)


"포르투갈이 인도양과 뒤이어 중국해에서 순식간에 우위를 차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은 이 시기에 두 지역에 존재했던, 트레버-로퍼의 표현에 따르면, 〈해상운송 무역의 공백〉이었다. 〈아시아의 방대한 무역─유럽과의 원거리 무역은 그 일부분에 불과했다─은 먼저 오는 사람들의 차지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먼저 와서 그것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백이 지속되는 한─유럽이 그것을 장악하거나 혹은 아시아가 그것에 저항할 때까지─그들이 무역을 독점했다.〉 그 공백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그 무역을 처음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들은 당시에 인도양의 경우에는 무슬림 상인들[아랍인들과 구자라트인들] 그리고 중국해의 경우에는 왜구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기존의 무역망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시간적으로 먼저 일어났던 무슬림 무역업자들의 추방은 〈평화로운 경쟁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504)


"이 시기에 아시아는 유럽 세계경제의 일부가 아니었다.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보통 아시아 민족들이 세워놓은 조건과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몇몇 식민활동의 거점들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럽인들은 모두 그곳에서 [아시아인들의] 묵인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유럽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군사적 우위가 단지 해군력의 우위에 불과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존재하던 세계경제 조직을 조금 개선했고, 그러한 노력에 대한 대가로 몇몇 상품들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정치적 상부구조뿐만 아니라 경제의 사회적인 조직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주요 변화는 후추 생산에서 일어났고, 그것은 〈대량 생산이 등장했던〉 유일한 향료가 되었다." "따라서 한 세기 동안의 포르투갈의 지배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에게 아랍인이 아니라 주로 포르투갈인들이 이윤을 챙겼다는 것을 의미했다."(506-9)


7 이론적 재고찰


"세계체제는 하나의 사회체제이다. 그것은 경계, 구조, 성원집단, 정당화의 규정 그리고 일관성을 가진 사회체제이다. 그 안에서 투쟁하는 세력들은 서로 당기는 힘에 의해서 그 체제를 결합시키며, 또 각 집단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것을 개조하려고 끝없이 노력함으로써 체제를 분열시킨다. 그것은 유기체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것은 수명이 있는데, 그 동안에 어떤 특징은 변화하고 또 어떤 특징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체제의 내부적 작동논리에 의해서 그 구조들을 어느 때는 강하고 어느 때는 약하다는 등 때에 따라 다르게 규정할 수가 있다. 내 생각으로는 한 사회체제를 특징짓는 것은 그 안에서의 생활이 〈주로〉 자기완결적이라는 점과 그 발전의 원동력이 주로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완결적이라는 것을 이론상의 절대 개념, 즉 좀처럼 볼 수가 없는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기는 더욱더 어려운 일종의 사회적 진공상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531-2)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까지 나타난 세계체제는 오직 두 종류, 즉 비록 그 실질적인 통제력이 아무리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그 지역 대부분에 걸쳐 단일한 정치제도가 존재하는 세계제국들 그리고 그 공간 전체 또는 사실상 전체에 걸쳐 그와 같은 단일한 정치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들이 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편의상 그리고 좀더 적절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후자를 가리켜 〈세계경제(world-economy)〉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근대 이전의 세계경제들은 매우 불안정한 구조들이어서 세계제국으로 바뀌어가든가 붕괴하든가 하기 십상이었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세계경제가 500년 동안이나 생존해오면서도 아직도 세계제국으로 변모해가지 않았다는 점이 근대 세계체제의 특수성인데─이 특수성이야말로 그 힘의 비밀이다."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번영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세계경제가 그 영역 안에 단일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복수의 정치체제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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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의 형성 - 16-18세기
이영림.주경철.최갑수 지음 / 까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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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장 15세기 말의 세계와 유럽


# 근대(1500-1800년) 서구에서 형성된 새로운 구조들

1. 경제 : 14-15세기에 발생한 기근, 질병, 전쟁으로 인한 농업 인구의 극적인 감소 추세에서 점차 회복, 농노 신분제가 약화되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도시 분야도 발전

2. 정치 : 기사계급, 곧 영주들이 몰락하고 국왕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통치구조를 공고히 하는 절대주의 국가 강화

3. 종교 : 대륙 전체를 통합하던 가톨릭의 위세 약화,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신교와 구교의 대립 격화

4. 문화 : 점차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문화와 예술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으로 귀결

5. 해외 팽창 : 상기한 요소들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결합하여 유럽인들의 해외 진출을 독려


제2장 근대 유럽의 물질적 조건


"출발점과 종착점을 어느 시점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인구 증가세가 다르게 잡히지만, 일반적으로 1300-1800년의 5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최소 140퍼센트, 최대 400퍼센트 증가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500년 동안 이 정도의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면 연평균으로는 2퍼밀(‰)이 안 되는데, 이 정도의 비율은 그 시대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미미한 변화이다. 전체 흐름을 정리하면, 일상에서 경험하는 단기적 차원에서는 인구 증가가 거의 매번 무화되어 인구가 정체하는 듯이 보이지만, 100년 단위의 차원에서는 극심한 상승과 하락을 보이고, 다시 그보다 더 긴 차원, 즉 근대사 전체를 포괄하는 단위에서는 매우 큰 인구 증가를 이룬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은 장기적 인구 증가는 뚜렷하게 인식되지는 않지만 사실 근대사의 핵심 사항 중의 하나이다.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 수가 2배, 심지어 4배가 되었다면 사회의 다른 모든 요소들이 이에 맞추어 근본적인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6)


"농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선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들의 문자해독률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농민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사회가 이루어낸 성과를 후세대에게 전하는 방식에서 책을 읽는 방식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구전문화(oral culture)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 그리고 사회적 결속과 구속이 강했다. 그 결과 마을 공동체의 힘, 기능, 규제가 대단히 강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가정'이라는 범주보다 마을 공동체라는 범주가 사람들에게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점차 이런 공동체의 규제로부터 벗어나서 개인의 존재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 근대 사회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의 양태로 나타났다." "유럽의 경우 이런 '가족주의'는 19세기에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강화되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54)


"전반적으로 서유럽에서는 인신적 규제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더 이상 중세적인 농노의 신분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이제 농민들은 자유의 몸이었다. 다만 영주들이 '지배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지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로 지대를 지불하는 것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상으로만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실제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원칙 그대로 지대만 내면 그것으로 영주와의 관계가 사실상 끝나는 것은 영국과 같은 예외적인 곳의 일이었다. 나머지 지역들은 지대 이외에도 상속세, 판매세 등의 각종 부담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지난 시대의 봉건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의미로 '봉건잔재(封建殘滓)'라고 부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주들로서도 그들의 지위와 부(富)가 쇠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런 봉건잔재들을 되살리고 더욱 확대하려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이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커졌다."(55-6)


#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프랑스 농민들이 구체제에 저항한 것도 귀족들의 억압과 수탈이 너무 심해서라기보다는, 농민층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방해집단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일으킨 봉기라고 볼 수 있다.


"동부 유럽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동유럽이 서유럽인에게 개방된 것은 12-13세기의 동유럽 식민화(Ostsiedlung, Drang nach Osten)의 결과였다.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 인구 압력이 너무 커지자, 동유럽에 식민 개발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우선 서유럽의 기사들이 동유럽에 무력으로 진군해 들어가서 현지인들을 억누르고 강제로 기독교화한 다음 그곳에 이주농들을 불러온 것이다. 즉 이 지역에서 개간이 이루어지고 마을이 들어선 것은 영주층의 주도로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공동체에 비해 지배층의 힘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다른 요인들 중 하나는 서유럽의 곡물 수요가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동유럽의 영주들로서는 농민들을 압박하여 곡물을 많이 확보한 다음 잉여 생산물을 서유럽에 판매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런 인센티브가 주어지자 영주들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59-60)


"발트해 무역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유럽이 최초로 외부로 팽창하여 '식민화'한 실험 사례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곡물 위기가 심각할 때 원거리 곡물 무역은 이를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를 두고 서유럽의 곡물 수요 대부분을 동유럽의 기아 수출로 해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곡물 위기 상황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한계적인(marginal)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구조적으로 늘 어느 지역에선가는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이 문제를 해결할 정도의 곡물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면 사회 전체의 안정을 기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마지막 한계 국면에 직면한 다수의 농민들의 식량을 빼앗아 더욱 심각한 상황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와 서유럽의 상업 자본주의는 이런 식으로 결합하게 되었다."(60-1)


제3장 사회문화적 변화


"촌락 공동체의 규모는 5-6가구에서 60-70가구까지 지역과 환경에 따라서 다양했다. 농촌 수공업자, 대장장이, 방앗간 주인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촌락민들은 귀족인 영주에게 예속되었고 국가, 군주에 대한 소속감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소교구 주임 사제는 촌락 공동체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소교구의 교회는 단지 종교적 예배장소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공적 집회소인 동시에 사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위로부터의 명령과 지시사항이 전달되고 각종 정보가 공유되며 교환과 계약이 이루어졌다. 또한 공동체의 안전과 농경, 공유지 사용 등 구체적인 모든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친구와 연인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공동체의 집회는 주로 가장들의 모임이었지만 경제적인 문제의 경우에는 과부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읍이나 도시의 소교구도 유사한 기능과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시기에 신구교를 막론하고 소교구 공동체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은 이처럼 다기능적인 용도 때문이었다."(80-1)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16세기 도시에서 전개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정치 엘리트 층의 형성과 성장이다. 국가와 시 행정의 규모가 커지고 체계화되면서 전문 관리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전통적인 전사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새로운 집단에서 동원된 이 새로운 유형의 도시 행정귀족들은 무지와 폭력과는 다른 문화와 교양을 갖춘 정치적 실무자들이었다. 그들의 등장과 성장은 정부의 구조와 작동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초래하며 미래의 정치 엘리트 집단의 형성을 예비했다. 이러한 관료집단의 형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궁정의 발달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부와 권위를 갈망하며 궁정이 위치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의 문화 역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발휘했다. 특히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탈리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유럽 도처의 학생들과 종교적 반대파, 예술가, 음악가들이 이탈리아로 몰려들었다."(87-8)


"이탈리아 반도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던 15세기 중엽에 르네상스 문화는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는 경제적 쇠퇴기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공화국의 몰락기였다. 정치와 경제 모두 불안정한 상황에서 도시국가의 정치지배자들은 강한 우월감을 가진 동시에 불안감에 시달렸고 이러한 이중 감정은 자기 과시로 표출되었다. 그들은 봉건 영주와는 다른 출신 성분과 성장 과정을 거쳤지만 봉건귀족을 동경했다. 전제군주이건 과두 지배자들이건 봉건귀족의 군사적 풍조에 매료되어 군사훈련을 익히고 마상시합을 즐겼다. 특히 밀라노와 피렌체의 전제군주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 건축을 통해서 권위를 과시했다. 이러한 정치 지배자들의 경쟁심과 허영심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발달에 기여했고 제한적이나마 경제적 활력소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순수하게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측면이 강했다."(92-3)


# 1530년 북이탈리아가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르네상스는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


"북서 유럽에서도 일찍부터 새로운 문화적 시도가 나타나긴 했지만, 북서 유럽에서 르네상스 현상이 본격화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전해지면서부터이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를 무조건 세속주의적 문화 운동으로, 북서 유럽의 인문주의를 기독교 인문주의로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북서 유럽의 인문주의자들도 초기에는 고전 연구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1500년경 면벌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북서 유럽의 식자층을 사로잡은 최대 이슈는 올바른 신앙을 위한 교회개혁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교적인 고전 연구가 신앙심과 도덕을 전복시킬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자연히 인간 사회의 윤리를 최우선적인 관심사로 삼았던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 도덕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개혁의 파장이 거세지면서 키케로 모방과 화려한 수사 연구와 같은 세속적 인문주의의 풍조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북서 유럽의 인문주의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갔다."(104-6)


"초기의 인쇄업자들은 고정 독자층이 유지되는 분야의 책 생산에 주력했다. 가장 위험부담이 적은 책은 성경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으로 책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동일한 텍스트를 무한대로 재생산할 수 있게 되자 인쇄업자들은 더많이 팔릴 수 있는 주제를 찾는 데에 몰두했다. 유럽 각국에서 서민적이고 낭만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유행하게 된 것은 작고 얇은 값싼 대중용 인쇄물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라블레,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출판업자의 이해관계와 민중층의 독서 욕구에 부응하듯이 르네상스의 새로운 세계관과 그 지역의 토착적인 정서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이들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중세와 맞닿아 있다. 르네상스 문학의 인기 비결은 중세의 주제를 도시와 궁정의 환경에 알맞게 각색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과거지향적인 민중의 정서에 쉽게 파고든 이러한 오자투성이 책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110-2)


제4장 종교와 정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헌장 제1조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교회가 철저하게 천국의 입장권을 독점한 셈이다. 모든 신자들에게 이 원칙을 시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교리와 종교관행도 마련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신자가 적어도 1년에 1번 사제에게 개별 고해를 하고 사제가 부과한 보속(補贖)을 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사항이다. 이후 고해와 보속은 중세인들의 종교생활의 핵심을 이루었다. 나아가 라테라노 공의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위계질서를 확고히 함으로써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지배체제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유럽인들은 가톨릭이라는 하나의 제도적 틀 안에서 살았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은 주문과 마술이 혼재하는 미신과 이교적인 종교문화에 지배되었다. 중세 가톨릭 세계는 단지 외형상으로만 통합되어 있었을 뿐이며 기독교는 개인적 종교이기 이전에 문명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116-7)


"북유럽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부패와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왕권 강화에 성공한 몇몇 군주들이 국내의 종교 문제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며 교회 당국과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밖의 두 세력은 근본적을 교황권 자체를 부정하거나 도전하지는 않았다. 교황의 독단을 억제하려는 공의회주의자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황권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늘 교회 내부의 개혁세력이었다. 개인의 구원과 영적 완성을 목표로 은둔과 고행을 하며 강압적인 교회제도에 저항하는 일부 성직자들의 개혁 운동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 이래 가톨릭의 역사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개인적 신앙, 양 측면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얼룩져왔다. 개인적 신앙심이 초래할지도 모를 영적 모험주의와 계시주의는 종종 교회의 권위 자체를 문제삼기도 했다. 1517년 교황청이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위험하게 여긴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121)


"가톨릭에서는 모든 신자가 교회에 소속되어야 하며 교회 바깥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반면 루터는 예수에 대한 개인의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루터의 믿음지상주의이다. 인간은 대리자나 중재자 없이 누구나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서를 읽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직접 예수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믿음지상주의는 자연스럽게 만인사제주의로 연결된다. 사제의 도움 없이 신에 대한 개별적인 믿음만으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만인은 스스로 자신의 사제이다. 만인사제주의는 성직자와 신자의 전통적인 구분을 불식시키고 나아가 모든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평등하다는 새로운 이념을 부각시켰다. 영적으로 평등해진 모든 신자를 신 앞으로 인도할 유일한 진리이자, 권위의 준거는 성서이다. 성서에 명시되지 않거나 부합하지 않는 모든 규범을 거부하는 성서지상주의는 믿음지상주의, 만인사제주의와 더불어 루터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3대 원칙이다."(125)


"중앙집권적인 권위 체계를 유지해온 교황청은 중세 내내 각국의 지배자들과 미묘한 경쟁 혹은 갈등을 벌였다. 중세 말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교회 재산을 탐낸 정치 지배자들은 교황과의 종교협약이나 신민들에 대한 강요를 통해서 자국 내의 고위 성직 임명권을 잠식해갔다. 프랑스, 영국, 에스파냐 군주정의 팽창은 교황지상주의를 퇴색시키고 국가교회주의를 부추겼다. 실제로 종교개혁 당시 세 강대국의 교회는 각각 교황청으로부터 상당한 자유를 부여받았다. 반면 제후나 도시의 과두 지배자, 혹은 주교에 의해서 지배되던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의 소규모 국가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문제가 훨씬 더 복잡했다. 교황권의 횡포가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과 경쟁관계에 있는 신성 로마 황제의 모호한 위상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이중으로 꼬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루터의 움직임은 종교적 강요와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로 여겨졌다."(138-9)


제5장 국가 만들기


"근대 초 유럽의 정치 지배자들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적극적인 정치 선전정책을 시도했다. 중세 이래 유럽 각국에서 유지되어 온 국가의례가 더욱 성대해진 것고 같은 맥락에서였다. 대관 축성식에서는 모두가 위계질서에 따라 입장하고 좌석이 배치되었다. 서열에 따라 도열한 사람들 자체가 최고 서열인 군주의 권위를 가시화시키는 무대장치 역할을 했다. 왕을 봉건적인 종주권자이자 기독교 왕국의 수장으로 추대하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종교의식이 거행되었고 모두가 왕에게 복종의 기도를 바치는 절차가 이어졌다. 이는 왕이 신의 대리자임을 확인시키고 신민의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일종의 연극 무대에 다름 아니었다." "중세 말 이후 유럽 각국의 국왕 장례식에는 죽은 왕을 상징하는 허수아비가 세워졌다. 허수아비는 신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처럼 유한한 생명체인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구불멸의 신비스런 정치체인 왕은 살아 있음을 뜻하는 무대 소품이었다."(159)


"그러나 기독교적이고 중세적 위계질서에 의존하던 국가의례들은 점차 세속적인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친림법정(lit de justice)이다. 왕이 고등법원에 왕림하는 의식절차인 친림법정은 구체적인 목적을 띤 정치 집회이다. 특히 국왕 사망 이후 개최된 첫 친림법정은 주권의 영속성이 어떻게 국가의례로 표현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1610년 5월 15일 아침, 선왕인 앙리 4세의 사망 이후 12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에 8세의 신왕 루이 13세(1610-1643)가 파리 고등법원으로 행차했다. 그는 직접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모후인 마리 드 메디치에게 섭정권을 부여하는 왕령을 공포한 뒤에 파리 고등법원에 법으로 등기할 것을 명령했다. 선왕의 승하 40일 후에 치러지는 장례식 이후에야 신왕이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관행을 깨고 신왕이 즉각 죽은 왕을 대체한 이 친림법정은 영속적이고 무제한적인 군주권의 이론을 과시하는 정치적 제스처였다."(159-60)


"실질적인 군주권의 행사를 합리화하고 이론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그러한 작업을 떠맡은 것은 법학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부여된 과제는 군주를 봉건 영주보다 우월하고 강력한 존재로 부각시키고 중세 이래 전 유럽에서 통용되던 기존의 관습법 체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 개념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장 보댕은 『국가론』에서 오랜 전쟁과 내전에 지쳐 평화와 안정을 갈구하던 대다수 가톨릭 프랑스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국왕주권론을 논증했다. 여기서 주권이란 입법권을 의미한다. 그는 권력을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 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통치권자의 능력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주권과 동의어인 국왕권은 신법과 자연법을 제외하고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한 국가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이다. 이런 점에서 보댕은 유럽 정치사에서 절대군주를 종교적 분파와 정치적 당파 위에 군림하는 왕국의 구심점으로 상정한 절대주의 이론가로 평가된다."(160-2)


"16-17세기에 유럽의 군주들은 끊임없는 반란에 직면한 동시에 국외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점차 왕령지 수입에 의존하던 중세의 재정구조에서 벗어나 조세에 의존하는 근대적인 재정국가를 향해 나아갔다.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조세제도의 정착은 요원한 문제였지만 각국의 지배자들로서는 전쟁비용 충당이라는 급박한 현실을 뚫고나가기 위해서 다양한 명목으로 세금을 신설하거나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과세동의권을 보유한 신분제의회의 역할이 중요했다. 각국의 재정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신분제의회의 반발은 거세졌다. 정치 지배자들은 무마하기 위해서 의회를 지배한 특권층과 타협했다. 다시 말해서 의회를 지배한 특권 신분층을 과세 대상에서 제외시켜줌으로써 의회의 과세동의권을 박탈하는 교묘한 정책을 썼던 것이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엘리트 층이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면세특권을 누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163-5)


"높은 조세증가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전비 증가율을 감당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간접세와 국채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일종의 재정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재정구조는 17세기에 가서야 다른 나라에 도입되었다. 대신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허덕이던 군주들은 대부라는 손쉬운 방법에 빠져들었다. 장기적인 경제 상승국면을 보였던 16세기에 군주들은 미래의 조세 수입을 담보로 비교적 수월하게 대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각국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전쟁은 국가 재정의 전환점이 되었다. 정부와의 담합을 통해서 조세 청부권을 획득한 대금융업자들은 먼저 거액의 선수금을 제공하는 대신 고리의 선취금을 공제함으로써 조세 징수액의 절반 이상을 중간에서 삼켜버렸다. 그럴수록 관리와 금융업자들은 거부가 된 반면 농민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 관직 매매의 규모도 엄청나게 확대되어 17세기 중엽 유럽에는 거대한 관직시장이 형성되었다."(167-8)


제6장 계시와 이성의 세계


"종교개혁으로 단일 기독교 왕국의 전통이 깨지고 유럽 사회는 종교적 관용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국교주의가 강화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에서 채택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재확인된 종교 선택의 기준은 정치 지배자의 종교였다. 그때부터 '하나의 신앙, 하나의 왕'의 원칙에 따라서 정치 지배자의 종교가 신민에게 강요되었고 국교주의가 지배적인 추세로 정착되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종교가 선택되고 물질적 가치에 의해서 종교적 가치가 좌우되면서 국교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비국교도가 법적으로 허용된 영국에서조차 국교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듯이 17세기 유럽사에서 국교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국교는 한 사회의 다수에게 정체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일종의 제도적 장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치사상가들과 신학자들도 교회와 국가의 결합을 인정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세력 사이의 동등한 결합이 아니었으며 세속적인 국가 권력의 무게가 압도적이었다."(193-4)


"사육제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휴식을 맛볼 수 있는 긴장 완화의 순간인 동시에 기존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종교적 재정복 과정에서 민중문화는 부도덕하고 문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개신교 지역에서는 축제 자체가 금지되었고 이교적이며 미신적인 종교관행들이 소탕되었다. 교회와 공공 당국은 미신적 종교관행들뿐만 아니라 왜곡된 결혼관행을 꼬집으며 민중층의 독자적 사회 통제방식으로 기능하던 샤리바리(charivaries)와 같은 관행도 엄격하게 규제했다. 가톨릭 지역에서는 사육제가 유지되었지만 촌락 공동체 구성원을 통제하던 신자들의 모임은 점차 종교적인 목적의 신도회로 재조직되었다." "궁정과 도시를 중심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에게 예절과 교양이라는 이름의 세속적인 윤리가 강요되고 확산되던 그 시점에 농촌과 도시의 민중층에게는 전통적인 민중문화를 통제하고 기독교를 강요하는 대대적인 도덕적 재정복이 전개되었다."(202-3)


"전문 교육기관에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은 모든 종교행위를 감독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신자들의 의무사항인 예배 참석 여부가 철저히 감시되었다. 1600년경 영국에서는 일요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 1실링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성찬식 대신 설교가 강화된 개신교에서는 설교를 통해서 신앙생활 및 일상생활에 관한 도덕적 훈계를 했다. 칼뱅교 지역에서는 여기에 철저한 도덕적 훈육체계가 첨가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임 사제가 부활절 고해성사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의 명단을 교회 문 앞 벽보에 붙인 뒤에 그들을 파문하고 장례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강제적 협박의 결과 개신교 지역에서는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구역단위의 종교생활이 일상생활에 접목되었다." "이른바 '바로크적 경건성'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1700-1730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추세가 반드시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과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유럽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204-5)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기도 했지만 1660년경이 되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같은) 새로운 과학 이론은 이미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개신교 지역의 반응은 가톨릭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자연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는 가톨릭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과학이 제시한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설명방식은 개신교와 양립 가능했다. 우주를 신에 의해서 설치된 거대한 기계로 간주한 새로운 자연관에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지만, 신은 여전히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과 계시,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를 수용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칼뱅주의는 새로운 자연관과 조화를 이루었다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발표했을 때 영국 사회는 이미 그를 지지하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환호성을 보낼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태였다."(213-4)


"엄격한 연역의 방식으로 사고하는 데카르트주의에 의하면 세계는 마음과 물질의 두 실체로 정리된다. 사상은 우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한 입자로 규정되는 물질은 수학적으로 발견되고 설명될 수 있다. 요컨대 물질 세계는 감정이나 조화, 또는 스콜라주의자들의 생각처럼 고유의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 우주의 존재를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신도 추론할 수 있다. 케플러처럼 데카르트에게도 여전히 신은 우주의 창조자이다. 그러나 신은 더 이상 피조물의 운동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은 추론을 통해서 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우주처럼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의 법칙도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의 몸도 추론될 수 있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움직이는 물체를 기계구조로 설명함으로써 기계론적 우주관과 유물론의 발전에 기여했다."(216-7)


제7장 세계 속의 유럽


"유럽이 해외로 팽창하려면 우선 그런 항해가 가능할 정도의 기술적 준비가 필요하고, 동시에 해외로 적극적으로 나가도록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흔히 지적하는 기술적 발전 요인으로는 배의 방향을 잘 조정할 수 있는 중앙타(中央陀)의 발명, 배의 외피를 탄탄히 만드는 겹쳐잇기 기술, 그리고 배의 방향을 잡는 데에 유용한 삼각범과 풍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사각범을 한 배에 함께 사용하는 범포 사용의 개선을 든다. 이와 함께 항해 지도의 발전과 나침반 사용의 확대, 또 아스트롤라베(astrolabe)와 같은 관측기구의 개발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이런 것들이 대개 아시아에서 들어온 수입 기술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기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항해에 관해서도 유럽은 자신이 먼저 개발하여 다른 지역에 제공하기보다는 다른 문명권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컸다. 자체 개발에는 뒤쳐졌더라도 수입 기술들을 더 개선하여 잘 이용하는 능력이 유럽이 가진 강점이었다."(226)


"그렇다고 이런 기술적 개선이 꼭 해외 팽창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걸고 그 위험한 원양항해를 감행하도록 추동한 어떤 힘이 있어야 한다." "사실 유럽인들은 중세 내내 아시아로 찾아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권 유럽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슬람 문명과 대치했으며, 언젠가는 이슬람 세력을 패퇴시키고 정복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권 배후의 세력과 제휴하여 양쪽에서 이슬람권을 협공한다는 낭만적인 꿈도 품고 있었다. 11-13세기에 전반적으로 유럽의 힘이 증가하자 이슬람권에 계속 압박을 가했는데, 이는 크게 두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동방의 이슬람권을 공격한 십자군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8세기 이래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려는 소위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지속된 이슬람권과의 투쟁은 근대 초에 유럽이 해외로 나가고자 할 때에도 여전히 강박적으로 지속되는 요소였다."(226-7)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구축한 상업 거점 제국은 1590년대까지 다른 유럽 세력의 방해 없이 유지되었다. 다른 나라 상인들로서는 포르투갈이 들여온 아시아 상품의 유럽 내 도매 거래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굳이 포르투갈의 방해를 뚫고 들어가서 아시아 항로를 직접 개척하는 힘든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찾아온 계기는 1580년에 정치 상황의 급격한 변화로 포르투갈 왕실이 에스파냐 왕실에 합병당한 사건이다. 이후 1640년까지 60년 동안 포르투갈이 독립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사이 아시아 상업 네트워크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에스파냐는 기존의 아시아 상품의 도매 거래방식에 영향을 미쳐서 자국에 적대적인 대상인들에게 도매 거래 참여를 제한하려고 했다. 특히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실과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는 아예 상품 판매를 거부했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직접 아시아로 가는 항해 루트를 개척하고자 했다."(234)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여오는 상품으로는 후추를 비롯해서 정향과 육두구, 계피와 같은 향신료가 대종을 이루었다. 중세에는 이 상품들이 모두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지만, 대양항해의 발전으로 대량 수입되자 가격이 크게 떨어졌고, 따라서 유럽 내 판매 수익성도 떨어졌다. 이제 아시아 교역에서는 직물, 차와 커피, 도자기와 같은 신상품들의 비중이 더 커졌다. 그 결과 교역 지역도 전통적인 향신료 산지보다는 인도나 중국처럼 새로운 교역 상품의 산지로 중심이 이동하게 되었다." "17세기 전반기만 해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총체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밀렸으며, 특히 이때까지도 모든 유럽인들이 찾아가고자 했던 후추와 향신료 산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던 인도네시아에서 밀려난 것이 큰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 상인들은 할 수 없이 인도로 향했는데, 역설적으로 이것이 후일 영국이 다른 유럽 세력을 누르고 아시아 식민지 교역에서 우위를 차지한 시발점이 되었다."(236-7)


"18세기 전반기에 극적으로 팽창한 영국 동인도회사가 사업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첫 계기가 된 상품은 인도 면직물이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도 값이 저렴한 인도의 면직물은 원래 아시아 상업 세계에서도 이미 대단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그 때문에 현지의 생산자들과 상인들이 면직물 거래를 장악하고 있어서 동인도회사로서는 아시아 시장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수익을 얻기가 힘들었다. 영국인들이 생각한 혁신적인 방안은 이 직물을 유럽에 수입해서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순면직물에 익숙하지 않던 유럽 소비자들은 처음에 이 직물을 벽 가리개 같은 용도로 사용했지만 결국 면직물 의류의 장점을 알게 되면서, 곧 수요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유럽 내 다른 직물업을 위기로 몰아넣을 정도로 면직물 수입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기적으로는 영국에서 인도 면직물 수입을 대체하기 위한 방안을 찾다가 기계혁명이 일어났고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또다른 역설적 결과이다."(238)


"미지의 해역을 탐험하는 해상 활동은 18세기에 들어서 항해술의 발달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에는 크로노미터의 개발로 원양항해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던 경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특히 1763년 이후 평화 시기에 유럽 선박의 해양 탐사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해상 여행은 과학적 탐구 목적을 강조하는 특징이 강했다. 각국의 해양 탐사선에는 지리학자, 천문학자, 자연사학자, 의사 등이 승선하여 각종 관찰과 실험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가 국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제 과학은 실제적인 의미로나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으로나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로 여겨졌다. 18세기 후반에 영불전쟁이 재개된 것도 이런 현상을 막지는 못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각국의 해양 탐사는 태평양에 집중되었다. 특히 남태평양을 탐험하고 여행기를 쓴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은 '선한 야만인(bon sauvage)'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256-7)


제8장 근대 국가체제의 성립


"30년전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오스트리아는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제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격이 다른 수많은 정치체들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라는, 화해하기 힘든 종교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어 중동부 유럽에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내심으로는 이것을 넘어 유럽 전체를 복속시켜서 대제국을 건설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일개 지역 내부의 종교 문제로 시작된 전쟁이 결과적으로 17세기 판 세계대전으로 비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을 일단락 짓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황제의 원래 목표였던 독일 전역에 대한 종교, 정치적 통일 제국 건설의 꿈을 결정적으로 좌절시켰다. 이 전쟁에서 동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서쪽의 에스파냐라는 양대 세력과 전쟁을 벌여 우위를 지킨 프랑스는 국제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고, 다음 시대인 루이 14세 시대에는 절정기를 누리게 되었다."(263)


"30년전쟁의 또다른 패자는 에스파냐였다. 속국이었던 네덜란드가 독립국이 되어 떨어져 나갔고, 아르투아와 루시옹 지역을 프랑스에 상실했으며, 1580년 이후 합병했던 포르투갈이 다시 독립했다. 에스파냐는 이제 명백하게 강대국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강국으로 떠오르는 나라로는 우선 영국이 대표적이다. 중세에는 유럽 변방의 후진국에 불과했던 영국은 16-17세기를 거치면서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어갔고 국제적으로도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서 점차 유럽 내의 정치, 군사 문제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네덜란드 역시 독립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북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가장 뚜렷한 결과는 프랑스가 유럽 내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루이 14세가 성년이 되어 친정(親政)을 시작할 무렵 프랑스는 영토가 더욱 넓어졌고, 각국에 친프랑스적 세력을 유지했으며,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프트파워 면에서도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273-4)


"1600년의 유럽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양대 강국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형국이었고, 1660년대로부터 1680년대까지는 프랑스가 우위를 누리던 시대였다. 그러나 1714년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어느 국가도 헤게모니를 차지하지 못하는 균형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로서는 릴, 스트라스부르, 브장송 같은 일부 영토를 얻고 국경의 취약성 문제를 보강했으며, 무엇보다도 합스부르크의 포위를 결정적으로 깼다는 점이 중요한 성과였다.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의 우위가 점차 확고해졌다. 그러나 태양왕이 유럽을 주도한다는 꿈은 깨졌다. 동시에 프랑스의 적들도 약화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를 밀어내면서 영토를 확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정치적 통합성은 부족했다. 영국은 일류 강국으로 발전해가고 있었고, 특히 해양과 식민지 분야에서 강세를 이어갔다.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지나서 이제 내리막길로 들어섰으며, 오랫동안 국제 분쟁에 끼어들었으나 결국 얻은 것이 없었다."(282-3)


"16-18세기 유럽 국제관계의 발전 양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는 전쟁이었다. 각국은 서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군사력을 최대한 키워나갔고, 이 과정에서 이전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군사발전을 이루었다. 이를 '군사혁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통상 군사혁명은 무기의 발전, 군대 규모의 증가, 대규모 복합전술의 사용, 사회에 대한 군대의 영향 증가 등 네 가지 요소의 발전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 유럽의 군사력 발전은 명백하게 이러한 양태를 보였다. 다만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발전을 거듭하고 또 그런 국가들 사이에 합종연횡의 관계가 맺어지자, 어느 한두 국가가 나머지 국가들 모두를 군사적으로 누르고 정복을 완수하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해졌다. 군사 경쟁이 매우 치열하면서도 최종적으로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자 유럽 내부적으로는 세력 균형 상태가 형성되었고, 그렇게 누적된 강력한 군사력이 유럽 외부로 향하게 되어 식민주의를 낳게 되었다."(283)


제9장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부르주아들이 단지 구체제의 소유 및 과세 체계에서 기생적인 중간자나 통치 관료제의 구성원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다른 한편에 서유럽에는 상업적 내지 자본주의적 엘리트 및 더 수가 적은 전문직업인 내지 지적 엘리트가 존재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가능하다면 자본을 장기간에 걸쳐 묶어두지 않으면서 약삭빠르게 투자하여 이윤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는 '움직이는 돈'이었고, 토지 자산이나 연금으로부터 수입을 축적하는 것과는 달랐다. 생활방식도 귀족의 그것과 달랐다. 그들은 사회적 인정의 추구와 안락함의 외적인 장식을 검약이라는 고전적인 부르주아 가치와 결합시켰다. 이것은 '검약과 동시에 계산된 사치'의 생활방식이었다. 이들 가운데 최부유층은 생업에서 은퇴하고 귀족적인 삶을 영위하며 자녀를 귀족으로 진입시켰지만, 많은 가문들은 생업을 대대로 영위했다. 상업 회의소와 다른 상인조직을 결성했던 상인계층은 도시 문명의 특징적인 구성요소였다."(312)


"동업조합의 상태는 직종에 따라서 상당히 달랐다. 번창하는 업종에서 직인은 귀찮게 장인권을 얻지 않고서도 청부일을 맡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관행은 공장과 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 바늘, 제화, 가구 제조 업종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19세기에 이것은 '고한노동(苦汗勞動)'으로 알려지며, 경쟁이 심해서 생산의 질만이 아니라 노임 단가도 떨어져 장인층의 처지가 매우 열악했다. 다른 형태의 도시 생산은 양말과 견직업과 같은 산업에서 발견된다. 직인과 도장인은 상인에 대해서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졌다. 도장인은 직기와 작업장을 소유한 덕분에 여전히 직인과는 달랐으나, 양자 모두 상인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리옹의 견직물 산업이 보여주듯이, 노동의식은 이런 곳에서 날카롭게 나타났다. 이들은 끊임없이 노임 단가를 낮추려는 상인들에 맞서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이는 숙련 노동을 덜 요구하는 직종에서 장인들이 사실상 단순한 노동자, 곧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과정이었다."(314-5)


"노동자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계급의식을 결여했지만 그러한 종속을 언제까지나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투쟁의 대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임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용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예컨대 18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파업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빵사, 목공, 인쇄공 등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대부분은 단명하고 실패했지만, 일부는 잘 조직되어 파업기금을 갖추고 가담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배제했다. 고용 문제를 둘러싸고 파업이나 '비밀결사'가 터져나왔다. 직인조합을 직업소개소로 인정하지 않는 도장인들은 배척을 당했다. 소요는 재무총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국왕을 설득하여 1775년에 일시적으로 동업조합을 폐지했을 때에 특히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파업과 노동자들의 결사는 예외적이었다. 직종에 관계없이 남녀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은 임금이나 노동 조건보다는 빵 값의 상승 때문이었다."(316-7)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외부의 혁신에 일치하여 반대했다. 작물과 경작법의 선택에서 그들은 관습에 집착했다. 그 결과는 비참할 정도로 낮은 수확률이었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생산성을 낮을지 모르나 모든 농민의 생존과 독립을 보장하는 평등주의를 보여주었다. 소보유지의 유용성을 믿는 농민들은 귀족 영주, 부농, 도시 부르주아에 의한 대농장의 형성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촌락 공동체는 사적 소유권을 선호했지만 전통적인 소규모의 한계 내에서 그러했다. 그것는 반영주적이지만 또한 반자본주의적이거나 반개인주의적이었다." "무거운 부담이 수확의 많은 부분을 앗아갔기 때문에, 농민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생산한 것을 되사야 했고 이를 위해서 종종 부수입을 올리거나 돈을 꾸어야 했다. 이것은 필사적인 투쟁이었다. 공동체는 보호막 구실을 하면서 농민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지탱해주었다. 사실상 그들에게 불안에 맞서 전통에 집착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인 듯 보였다."(322-3)


"18세기에 극적으로 증가한 빈곤은 그 성격 또한 변했다. 빈곤은 우선 기근, 전염병, 전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았다. 반면에 농촌 및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만성적으로 영양실조 상태였다. 이들은 결혼을 함으로써 빈곤을 세습했다. 빈곤의 자기증식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당대인들이 실제로 본 것은 일반적인 빈곤이 아니라 그것이 표출된 '적빈(赤貧)'이었다. 양자의 차이는 재난의 위협과 그것이 실제 일어난 것의 차이다. 당시 전형적인 농민 가족은 기본적으로 빈곤 속에 살았다. 그러나 흉작이나 가장의 중병이나 사망 등 불운이 닥치면 그 가족은 적빈의 상태로 추락하기 십상이었다. 농촌과 도시에서 빈곤과 적빈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했다. 적빈자는 종속 상태로 떨어지거나, '일탈 행위'로 빠져들었다. 자선과 구제는 부적절했고 사실상 처벌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적빈 인구의 대부분이 길거리로 나와 부랑자가 되었고 구걸, 좀도둑, 뜨내기일 등 하루살이 인생을 살았다."(328-9)


제10장 산업혁명을 향하여


"이른바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산업상의 질적 변화는 불가피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국가의 역할과 시장의 존재이다. 강력하고 안정적인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효과적인 전쟁도구나 국내 폭력의 독점자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계급관계의 적극적인 조정자인 동시에 공공성을 담보해야 한다. 실제 18세기에 오면 일부 국가는 상비군, 조세체제, 전문적 관료제, 공공재정 등을 발전시켜, 근대 초 군주들의 오랜 관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울러 중세 이래 형성된 무수한 제도적, 법적 특권의 틈새로부터 점차 시장이 발달하여 토지, 노동, 자본을 더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봉건적 잔재의 장애물을 넘어 더 쉽게 만나도록 해주었다. 강력한 국가와 역동적인 시장은 경재행위를 예측할 수 있는 사회적 틀을 마련하여 경제적 실험이 가능하고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환경을 창출했다."(364)


"현재의 지식 상태에서 가장 그럴듯한 결론은 농업혁명이나 상업혁명 같은 요소들을 유럽의 다른 지역이나 나라가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잉글랜드가 그 모든 것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잉글랜드에서 물품을 생산하는 더 좋은 방법을 고안한 사람들은 기득권 집단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필요한 자본, 노동, 토지를 가능한 가장 싼 값으로 필요한 양만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산품을, 투자된 자본과 실험의 위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가격과 양으로 팔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새 발명은 언제나 프랑스인이 고안하지만 결국 그것을 실용화한 것은 영국인이라고 한 당대인의 지적은 새겨둘 만하다. 기술사가들이 '거시혁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속출했지만, 그것을 산업현장에서 써먹으려면 하급 기술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미세조정'이 있어야 했는데, 바로 잉글랜드의 제반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365)


"그러나 영국에서조차 산업조직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주요한 발명은 천재 발명가에 의한 탁월한 발견이라기보다는 이미 생산에 이용되고 있던 기술을 독창적으로 적용한 결과일뿐더러, 그것이 산업현장에 적용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더욱이 기계의 등장이 불가피하게 공장 생산을 이끈 것도 아니었다." "공장의 발전은 적어도 처음에는 기술적 요구와 큰 관련이 없었다. 제조업자들은 일출과 일몰, 계절적 변화의 시간 흐름에 익숙해 있는 노동자들에게 공장 노동의 규율을 부과하여 그들을 더 쉽게 감독하기 위해서 한 지붕 아래로 집중시켰다. 그들의 목표는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실수를 범할 수 없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선술집, 맥주집, 커피집에 있고, 아침이나 저녁을 먹고, 놀고, 자고, 담배 피우고, 말다툼하거나 업무와 무관한 일을 하고, 아무 까닭 없이 늑장을 부린다〉는 이유로 임금을 삭감당했다."(367)


"농업 및 산업의 생산성 향상이 상업비용의 감소와 결합하면서, 값싸고 다양한 소비재를 빈민들이 구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인구의 더 많은 부분, 특히 도시민들이 소비재를 구입하여 물질주의의 태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유욕 내지 획득욕은 단지 경제적 동기에서만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설에 의하면, 낭만적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진 근대 소설의 발전과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특유하게 근대적인 쾌락주의의 대두는 '소비혁명'의 정서적 배경을 이룬다. 중세 이래 도덕적으로 경계해야 할 탐욕 가운데 하나인 '물욕'을 표현하기 위해서 17세기부터 중립적인 '이해관계(interest)'라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소비혁명'이 '근대성'의 창출이라는 더 광범위한 현상의 한 부분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18세기에 서유럽과 기타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소비혁명'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이었으며 유럽 전체에 보편적인 것도 아니었다."(373-4)


"소비혁명의 도래가 뜻하는 바는 유럽이 근대 경제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자본집약적인 방식으로 더 많은 제품을 더 싼 값으로 대량생산하는 산업혁명이라는 '공급'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도시 소비자들이 더 많고 다양한 종류의 재화와 용역을 요구하는 '수요'의 측면에서도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즉 증기기관과 기계 그리고 공장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장인이나 기타 노동자들이 일했던 가내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산업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근대 경제 성장이 생산의 규모, 기술의 사용 또는 투자 등에서의 혁신 못지않게 단순히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비주의의 발견은 자본주의가 생산에 대한 투자만이 아니라 탐욕스런 이윤의 추구를 함축하며, 아울러 어떻게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장악해 들어갔는가, 아니 관점을 달리 해보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가치체계를 비록 일부나마 수용하게 되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378-9)


제11장 18세기의 문화와 계몽사상


"성공회와 특히 루터파 교회는 17세기 중엽이 되면 초기의 종교적 열정이 쇠퇴하고 군주들의 활기 없는 조력자로 떨어져 신도들의 영성에 대한 열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런 공백을 메운 것이 독일의 경건주의(Pietism)와 영국의 감리교(Methodism)이다. 경건주의는 17세기 말부터 약 1세기 동안 영향을 미쳤는데,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던 독일에서 뜻하지 않게 민족주의 감정의 운반자가 되었다." "1670년대에 출현한 '경건파'는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과 루터파 교회의 계서제에 실망하여 개인의 양심과 우위에 대한 종교개혁 당시의 믿음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이들은 신에 대한 더 열렬한 개인적 헌신('경건성')과 활발한 자선활동('선업')을 옹호하고 실천했으며, 속인이 종교생활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8세기의 마지막 사분기에 이르면 경건주의의 영향은 약화되었다. 이는 계몽사상의 확산과 함께 루터파가 국교로서 독일 북부의 국가들에서 대학을 장악했음을 반영한다."(384-6)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믿어 만인이 신 앞에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종교적 열정을 공동체적 관행과 결합시키려고 했다. 웨슬리 자신은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감리교의 정신적 평등주의는 지배층의 비위를 거슬렀다. 세기말에 이르면 영국 성공회도 감리교의 자극을 받아 하층민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 한 해석에 따르면, 감리교는 영국의 일반 민중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감리교는 정치나 경제에 관한 급진적인 교리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사실상 정신적 평등과 우애를 촉진했고, 그 결과 영국이 1790년대의 혁명기에 사회, 정치적 격변에 처하는 것을 막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감리교 복음주의는 영국 사회의 동력인 동시에 안정화의 힘이었다. 이제 감리교를 통해서 사회의 저변인 하층민도 검약, 노동, 음주와 도박의 절제, 자기수양 등의 덕목을 배우는 동시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내면화했다. 기독교는 18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활력을 가지고 있었다."(386-7)


"교회의 후퇴가 전적으로 계몽사상의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계몽사상을 포함하는 더 큰 역사적 흐름의 희생자였다. 먼저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행했던 많은 영역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기 교회사의 최대 사건인 '예수회의 몰락'이 가톨릭 국가 가운데 가장 몽매하다는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었음은 시사적이다." "예수회는 가톨릭 종교개혁을 일으켜 '바로크적 경건성'을 이룩한 핵심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예수회의 해산은 각국에서 대학과 중등교육의 재조직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러나 관용과 세속화, 심지어 이신론(理神論)이나 무신론의 표출조차도 종교의 후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도로서의 교회 및 교권주의의 영향과 중요성을 기본적으로 약화시키거나 이 약화를 반영하는 계기임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기독교가 그만큼 하층민의 마음속까지 장악하여 실질적으로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차라리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388-9)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지식은 인식의 대상이나 주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중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이었다. 이는 개인의 의식을 지식과 행동의 절대적인 근원으로 간주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이제 개인은 합리적 판단에 입각하여 공동선에 부합하는 규칙을 파악할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계몽을 통한 진보의 가능성을 신뢰했기 때문에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즉각적인 체제비판으로 이끌지 않아 실제로는 온건했다. 그들은 당시의 사회가 부패했다고 보면서도 그 원인이 구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기보다는 개인의 무지, 편견, 공포에 있다고 보아 지식의 보급을 통해서 이를 얼마든지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유를 파괴하는 전제주의와 교권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했으면서도 정작 개혁의 구체적인 방략에 직면해서는 교육자나 입법자, 심지어 계몽군주에 의탁하기 십상이었다. 결국 계몽사상으로부터 그 논리적 귀결을 이끌어내는 일은 후대의 몫이 되었다."(403-4)


"후기 계몽사상은 전성기 계몽사상의 확산이자 새로운 방향 모색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의 교리가 나타났다. 독일에서 철학자들은 합리성과 자연법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졌다. 인간 자유의 지표는 이제 이성의 행사가 아니라 감성의 표현이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민족문화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테르나 루소가 사라진 프랑스에서 철학자라 자칭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군주제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선배들의 공론장이 살롱이었다면, 3세대 '철학자들'은 싸구려 카페를 드나들고, 집세가 싼 높은 층에 살고, 자주 주소를 바꿔 채권자들을 따돌리면서, 국왕의 검열이 출세를 방해한다고 떠들어댔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경제적 자유의 요청, 민족문화의 뿌리의 추구 및 감성적 수용을 통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 관념론의 대두, 여론의 발전, 특히 프랑스에서 군주제를 공격하는 출판물의 생산 등은 모두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에 이바지했다."(413)


제12장 정치와 국제체제, 1715-1789


"유럽의 군대는 이미 1700년에 수적으로 최고치에 달했고 18세기를 통해서 이 수준을 유지했다. 1710년에 유럽에는 최소한 100만 명의 군인이 있었으며, 당시 최대 군사강국인 프랑스는 적어도 30만 명의 군대를 거느렸다. 아울러 신형 머스킷총이 도입되었고, 전투의 규모와 강도도 커졌다. 이제 국가 이외에 이런 규모의 군대를 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는 없었다. 이 시기의 군대는 아직 국민군도 아니고 개병제도에 입각한 징집군도 아니었지만, 국가는 군대를 직접 무장시키고 관리하는 책임을 졌다." "나라마다 특징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양상은 명확했다. 나라는 살아남으려면 징집이든 직업군이든 육군과 해군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해당 영토의 주민들에 대한 수취능력을 증대시켜야 했다. 그렇지 못한 나라는 전장에서 패배하여 흡수당했다. 18세기의 폴란드, 19세기의 작센과 바이에른이 그러했다. 그 어떤 유럽 국가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18세기에 평화국가란 있을 수 없었다."(430)


"18세기 후반기의 유럽 국제체제에는 약탈적 세력 균형의 원리가 작동했다. 어느 한 나라가 이익을 얻으면 다른 나라는 '보상'을 요구했고, 다른 나라의 정책 탓에 한 나라가 손실을 입으면 '배상'을 요구했다. 협상의 당사자는 좁게 정의된 동맹관계의 구성원으로 한정되었다. 국가 이성의 논리가 지배하여 영토 확장이 노골적으로 추구되었지만, 적어도 5개 강대국(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사이에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국가군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강대국 위주의 세력 균형원리는 특히 소국에게는 난폭했다.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간주되어 빈발했다. 강대국들은 노골적인 점령과 보상 그리고 배상을 통해서 노획물을 챙기는 과정에서 중간에 있는 소국들을 희생시키곤 했다. 이탈리아의 제후령들은 열강들의 거래 대상이 되어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극단적인 예로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452)


"1740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1711-1740)가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의 위기로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맏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영토를 그대로 물려주기를 원해 죽기 전에 열강에 양보와 예방 조치를 취했으나, 그가 죽자마자 주변국들은 오스트리아의 약세를 예상하고 침입했다." "결국 전쟁은 아헨 조약(1748년)으로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는 건재하고 프로이센이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영국은 식민지를 확대했으나, 프랑스는 승전에도 불구하고 저지대 지역을 되돌려주어 별무소득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은 세력 균형에 입각한 국제질서의 약탈적 성격과 전투의 승패가 전쟁의 향배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잘 드러내준다. 당사국들은 영토 획득의 야욕 때문에 외교적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고, 단기이익에 급급하여 진영을 마구 바꿨다. 결국 지루한 외교전이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전쟁은 열강들의 분쟁거리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더 큰 전쟁을 부를 불씨를 남겼다."(456-7)


"7년전쟁은 두 경쟁관계의 충돌이다. 하나는 대륙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숙적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이다. 그리고 제3의 요소로서 강대국 러시아의 중서부 유럽 진출을 꼽을 수 있다. 1750년대에 들어 긴장이 고조되자 놀랍게도 외교혁명을 통해서 동맹관계가 재편성되었다. 영국과 프로이센의 접근이 나타나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1756년에 동맹을 결성했고, 러시아와 스웨덴이 이에 가담했다. 세력 균형원리의 역동성 내지 가변성이 명쾌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7년전쟁의 결과는 심대했다. 프로이센은 압도적인 적대세력과 맞서 건재를 과시했고, 오히려 위상이 강화되어 전후에는 군사개혁의 모범이 되었다. 프로이센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부상을 도왔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경쟁의 심화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폴란드, 일부 독일 지역에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58-9)


제13장 근대 세계를 향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기능은 18세기에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따라서 그 어떤 나라도 정상적인 조세 수입으로 전비를 즉각 충당할 수 없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정부는 우선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하여 공채를 발행했고, 차후에 채권자들에게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갔다. 정부는 당연히 채권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이 귀족이나 부르주아와 같은 유산자층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특히 18세기 후반에 거의 항상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정부의 부채는 엄청난 규모로 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쟁의 승자였던 영국도 그러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프랑스보다 조금 많았지만 인구가 프랑스의 거의 3분의 1에 불과했던 영국이 받은 재정적 부담은 프랑스와 비교하여 오히려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서 영국은 7년전쟁 이후에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종전의 방임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실시하여 결국 미국 혁명을 불러왔던 것이다."(469)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모든 국민들은 주권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는 '국가 간 체제'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억지로라도 국민국가를 빚어내야 했다. 혁명은 모든 인간의 기본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것은 오직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즉 특정국가의 시민인 경우에만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789년의 '인권선언'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구분했다. 프랑스 혁명은 분명 '인권의 혁명'이지만, 식민지인들에게 그것은 동시에 제국의 거푸집을 지녔다. 프랑스와 유럽은 전 주민에게 자유를 주어 역동적인 정치 공동체를 이룩하는 한편, 국내에 있던 예속과 억압을 해외로 수출한 셈이었다. '아이티 혁명'(1791-1804)이 보여주듯이, 이제 전 세계 식민지의 피압박민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배우면서도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졌다. 여기에서 근대 세계의 구축은 프랑스 혁명의 계승이자 극복이었다."(479-80)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의 국제체제와 군사체제, 그리고 전쟁의 실제 양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약탈적인 세력 균형의 국제정치가 더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공정한 '유럽의 협조체제'로 이행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적어도 유럽 내에서는 차후 40년간 열강 사이에 전쟁이, 그리고 한 세기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는 분명 유럽에만 국한시킨다면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열강들은 결국 국제체제가 장기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형평성을 가져야만 개별 국가의 이익도 충족될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이는 체제 내에서 자신의 즉각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합당한 이익도 보장해줌을 뜻한다. 유럽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근대 국제질서의 초석을 놓은 뒤에도 2세기에 가까운 엄청난 소모전의 희생을 거치고서야 스스로 '국제법의 원리'라고 부르는 높은 수준의 국제정치관에 이르렀다."(486-90)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국가의 영향은 프랑스의 정복을 훨씬 더 넘어섰다.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의 노예 반란은 아이티 혁명(1791-1804)으로 도약하여 최초의 자주적인 흑인국가인 아이티를 탄생시켰다. 위대한 '검은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의 군대는 (1794년에 아이티로 진군해 들어온) 거의 10만 명에 가까운 영국군을 붙잡아둠으로써 유럽에서 혁명의 진전을 도왔다. 혁명정부가 승인한 노예 해방을 1800년에 나폴레옹이 뒤엎으려고 했을 때, 흑인 노예군은 제국군을 물리쳐 나폴레옹의 식민제국의 꿈을 무산시켰다. 프랑스 혁명의 충격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먼 거리를 움직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에스파냐 점령은 라틴아메리카의 반란을 촉발했다. 노예무역의 교란과 멕시코 및 페루에서의 은 생산 중단은 서아프리카와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변화의 파장을 일으켰다. 남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 사이의 충돌과 유럽 정주 공동체 내에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주변 아프리카 왕국에 연쇄효과를 일으켰다."(491)


"영국은 아일랜드가 1798년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지배체제를 강화시켰다. 아울러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는 1812년에 '영미 전쟁'을 불러왔고, 영국은 캐나다를 재편했다. 아시아에서 영국은 인도에 대한 침투력을 높여갔고, 나폴레옹과 동맹관계에 있던 네덜란드 바타비아공화국의 동인도를 침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유럽 열강의 군사적 활력과 공세는 아시아의 제국들이 품고 있던 내적 모순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를 빼앗겼고, 러시아의 군사적 압력에 시달렸다. 무굴 제국의 인도와 중앙 아시아는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서 분할되었다. 심지어 먼 태평양에까지 혁명은 간접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대륙 봉쇄는 영국의 포경업자와 부랑자들이 고래 기름을 찾아 남태평양까지 진출하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의 형사(刑事) 식민지 및 선교 거점이 되었던 것은 영국 내외의 혁명적 충돌이 가져온 여파의 결과물이었다."(491-2)


"혁명과 제국의 외양을 한 새로운 국가는 모방자와 함께 반대자를 낳았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의 정복은 18세기의 맹아적인 애국주의를 근대 국민국가를 위한 묘판으로 변형시켰다. '혁명적 제국주의'가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우고 강화시켰던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는 프랑스 신문을 통해서 이탈리아와 자유를 배웠다. 그는 처음에는 혁명의 보편적 자유에 관심을 가졌다가 곧 단테와 지오토의 고국인 이탈리아 조국의 영광을 운위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대항하는 가운데 차르 및 정교회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1812년 전쟁에 참전한 농민들은 애국자가 되었다. 괴테는 1793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독일 국민에 주목했다. 심지어 이미 국민적 정체성이 강했던 영국이나 미국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 속에서 폭넓은 대중적 성격을 갖추었다. 트라팔가르와 워털루의 승리, 그리고 영국 해군에 의한 수도 워싱턴의 방화사건은 양국에서 민족감정을 크게 강화했다."(493)


"나폴레옹은 유럽을 재조직하는 데에서 왕조나 전통보다도 민족이나 인종을 강조했다. 그는 제국을 세우면서도 왕권신수설에 의존하지 않고 혁명의 원리를 체현했다고 주장했다. 국가 이성이 근대화에의 호소와 결합했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에서 폴란드나 아일랜드와 같이 국권을 상실한 인민의 지도자들은 장차 새 국가 건설의 토대가 될 민족의 예언자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 인도, 실론 등지에서 혁명전쟁과 제국주의는 이제껏 유동적인 애국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종종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시켰다. 이런 새로운 민족성의 원리는 오직 새 국가의 설립을 통해서만이 충족되는 것이어서 반제국주의의 속성을 가지면서도 결국 유럽이 주도하게 되는 근대 국가체제를 강화시키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 해방의 계기가 국민국가를 통해서 작동하게 되는 근대 세계가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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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충돌 - 미중 기술패권 전쟁과 7가지 게임체인저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박현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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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5G, 인공지능, 양자기술 같은) 첨단기술 경쟁에서 중국은 미국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한 세기 만에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위협받게된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중국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를 넘어뜨려야 한다. 이 사다리 걷어차기의 관건이 바로 반도체다. 때마침 반도체산업의 생태계는 미국과 그 동맹·우방국(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들이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는 미국이 반도체 기술을 틀어쥐면 중국의 추격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고 본다. 반도체가 미중 패권 경쟁에서 '초크 포인트Choke Point'(전략적 관문)로 불리는 이유다." "군사력 경쟁은 근본적으로 한 나라가 힘을 키우면 상대국의 안보 불안이 커지는 '제로섬 게임'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안보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기술 경쟁은 대개 국가 간 물적·인적 교류를 촉진하며 양측이 모두 만족하는 '윈윈 게임'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데 세계질서가 어지러워질 때는 기술도 제로섬 게임의 도구가 된다. 오늘날이 그렇다."(12-3)


1 긴 전쟁의 서막


"지난 1세기 동안 어느 나라도 경제 규모에서 미국의 60%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맞수였던 일본과 독일은 두 나라의 경제력을 더해도 그에 미치지 못했고, 냉전 당시 소련도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4년 일찌감치 60%를 넘어섰고, 2020년에는 70%까지 넘었다. 이런 추세라면 2030년대 중반께 양국의 경제 규모가 엇비슷해질 전망이다. 물가 차이를 고려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는 중국이 2017년에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또한 냉전 시기 소련은 세계무역기구WTO 이전의 국제경제체제인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에 가입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 진영과는 별개의 경제 생태계를 구성했다. 반면 중국은 WTO 회원국으로서 이미 세계 최대 무역국이자 수출국이다. 미국과 서방 세력이 냉전 당시 소련에 시도한 봉쇄 전략이 구조적으로 먹혀들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미중 패권 경쟁의 승패는 양국 체제의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 특히 첨단기술을 둘러싼 경쟁에 달려 있다."(35)


2 세 개의 분수령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관건인 까닭은 무엇일까? 칩 하나를 설계해 완제품을 생산하기까지 국경을 수십 차례 넘어야 할 정도로 분업화가 매우 복잡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설계-제조-후공정(조립·테스트·패키징) 단계를 거치는데, 미국은 설계 부문만 주도하고, 생산과 후공정은 대만·한국·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 의존한다. 인텔·퀄컴 등 세계적 반도체 설계회사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설계 역량은 단연 앞서지만, 생산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 능력의 70% 이상은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대만(20%)이 가장 앞서고, 이어 한국(19%), 일본(17%), 중국(16%) 순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있는 대만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63%를 차지한다. 한국은 전체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18%에 그치지만, 메모리 반도체로 좁히면 44%를 차지한다. 대만·한국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의 전략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59-60)


"미중 반도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동맹·우방국과의 협력 관계다. 미중 어느 나라도 글로벌 공급망 바깥에서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 글로벌 공급망의 길목에 있는 국가들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시장이다. 아무리 제품이 뛰어나도 시장을 잃으면 설 땅이 없다. 중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물량의 60%를 소비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는 중국과 단절할 수 없으며, 그 틈을 타 중국은 자체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다. 중국 경제가 별 탈 없이 성장을 지속한다면 시간은 중국 편이다. 세 번째는 생산성과 혁신 역량이다. 두 나라 모두 약점을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낮은 생산성으로 제조 경쟁력이 떨어진다." "반면 중국은 타개책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자력갱생이라는 기치 아래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그 때문에 혁신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66-7)


"인공지능 경쟁의 성패는 연산능력과 방대한 데이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산능력의 발전은 처리 속도를 높이고,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정확도를 높인다. 연산능력이 인공지능의 엔진이라면 데이터는 연료에 비유할 수 있다. 미중의 경쟁도 이 두 가지를 빨리 확보하고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은 2019년 중국 최대 슈퍼컴퓨터 제조사인 중커수광中科曙光, 대표적인 음성·안면인식 업체인 아이플라이텍(중국명은 커다쉰페이科大訊飛), 센스타임(상탕커지商湯科技) 등을 수출제한 명단에 올린 데 이어,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인 2021년 4월에도 슈퍼컴퓨터 기업 7곳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 슈퍼컴퓨터는 대규모 데이터 처리에 필수다. 중국은 중국대로 강점인 데이터 통제에 나서고 있다. 2021년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데이터 보안법'은 플랫폼 기업을 통제하려는 목적과 함께 데이터를 둘러싼 미중 경쟁에 대응하겠다는 포석도 담긴 법안이다."(73-4)


"미중 경쟁에서 가장 위태로운 부분은 군사 영역이다. 두 나라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율무기체계 선점을 위해 사실상 인공지능 군비 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이는 20세기 초반 영국-독일의 군함 건조 경쟁, 냉전 시기 미국-소련의 핵무기 경쟁에 비견된다. 그나마 핵 냉전 시대엔 일단 한쪽에서 핵 공격을 시작하면 상대도 보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두 나라 모두 괴멸적 타격을 입는 시나리오(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로 인한 억지력이 작동했다. 그런데 인공지능 무기는 공격원 추적의 난점, 상대적으로 저렴한 개발 비용과 기술 습득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 그런 억지력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전투에서 삶과 죽음의 결정권을 기계에 맡길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문제까지 제기되는 형편이다. 유엔이 2014년부터 관련 국제협약 체결을 논의중이지만, 강대국들은 이런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바야흐로 미중 간 '인공지능 냉전'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76-7)


"미중이 통신기술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것은 이 기술이 경제적 파급 효과뿐만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은 초기 음성통화 중심에서 3G부터 데이터통신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데이터 전송속도 경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5G는 4G보다 전송속도가 20배나 빠를 뿐만 아니라, 사용자 그룹이 사람에서 서버-기계 간 통신으로 확장되었다. 자율주행·원격의료·사물인터넷·인공지능·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이 되는 셈이다. 5G의 기술표준은 스마트폰의 통신 기준을 넘어 산업용 기계장치와 로봇들을 연결하기 위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 교환의 기준까지 결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5G의 기술표준을 장악한 국가와 기업이 4차 산업혁명의 기초 인프라를 통제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은 우주기술과 최첨단 군사 시스템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중이 사활을 걸고 5G·6G 개발에 매진하는 이유다."(89-90)


3 지상·해저·우주에서의 네트워크 대전


"양자기술은 양자의 물리적 특성(중첩성, 복제 불가능성, 얽힘 등)을 이용해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는 '파괴적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가운데 양자통신은 양자의 복제 불가능한 특성을 이용해 통신 내용을 암호화하는 것으로, 현존하는 어떤 기술로도 해킹할 수 없는 보안 체계로 알려져 있다. 양자통신에서 미국을 추월한 중국은 2016년 8월 세계 최초로 양자통신 위성 '모쯔墨子 호'를 발사해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바 있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공격은 행위자 입장에선 선전포고 없이 상대국을 위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다. 상대국 입장에선 사이버 공격이 물리적 폭력과 인명 살상으로 규정되는 무력 침공이나 테러 행위와 달라 강력하게 응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사이버 공격 카드를 자주 만지작거린다면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물론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커진다. 현재 사이버 무기 개발 및 공격·응징과 관련한 국제 협약이나 규범은 전무하다."(111-3)


"미국에선 과거 정부와 군이 우주개발을 주도했으나, 2015년께부터 민간이 주도하는 이른바 '뉴 스페이스'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뉴 스페이스 시대에 급성장하는 영역이 바로 저궤도 소형 군집위성이다. 경제적 파급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기존의 통신위성이 정지궤도(고도 3만5786km)에서 서비스를 하는 것과 달리, 저궤도 운용은 지구와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 데이터 전송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전 세계 약 40억 명이 모두 잠재적 고객이다." "미군은 이런 민간의 혁신을 적극 채용하고 있다. 미 공군은 2019년 말 지휘통제실의 첨단전투관리체계ABMS 1차 테스트에 스타링크 위성통신을 적용했다. 중무장 지상 공격기인 AC-130에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 스타링크를 활용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이 초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통신 인프라가 파손된다고 해도 미 공군 지휘통제 시스템에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117-9)


"미중은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를 자국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이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핵심 기반시설이 해저케이블과 데이터센터다. 여기에는 막대한 액수의 초기 투자액과 유지비용이 필요해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미중의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 장악 경쟁은 세계패권 경쟁의 일환이다. 중국은 2013년부터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육로와 해로로 연결해 경제권을 형성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일대일로 연선국이 60여 나라에 이른다. 이 정책의 핵심축 가운데 하나가 '디지털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5G 통신망과 인공위성 기반의 위치 정보시스템(베이더우), 해저케이블, 데이터센터 등 디지털 기반시설을 패키지 형태로 제공한다. 두 나라가 지상(5G·데이터센터)과 해저(케이블), 그리고 우주(위치 정보)를 무대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중국은 제3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매력 공세를 펴고 있다."(126-30)


4 중국의 히든카드


"희토류는 네오디뮴 등 17종의 원소를 지칭하는데 부존량이 매우 적어 희토류rare earth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토류의 독특한 화학적·전기적·광학적 특성이 소재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토류가 사용되는 분야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영구자석이다. 특히 네오디뮴을 활용한 영구자석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자기공명영상MRI 등 첨단제품뿐만 아니라 첨단무기 개발에도 필수적이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보고서에서 희토류의 군사 응용 분야로 미사일 유도, 항공기·미사일의 디스크 드라이브 모터, 레이저, 위성통신, 잠수함 음파 등을 제시했다. 이를 활용한 첨단무기로는 F-35 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미사일, 프레더터 등을 예시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미국 첨단무기의 공급이 본질적으로 중국의 지속적인 희토류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리스크이며, 미중 간 패권 전쟁 발발 시 결과를 가를 키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라고 밝혔다."(137-8)


"오바마 미국 행정부 말기인 2016년, 미중 기업 간에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코발트 광산을 사고파는 거래가 있었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미국이 땅을 치며 후회한 거래였다. 당시 미국 광산기업 프리포트 맥모란은 콩고에 소유하고 있던 2개의 대규모 코발트 광산을 중국 기업 뤄양롼찬무예China Molybdenum에 매각했다. 이 중국 회사는 지방정부가 지분 25%를 소유해 중국 당국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콩고는 세계 코발트 매장량의 70% 이상을 보유한 나라로, 중국은 이 거래로 세계 코발트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내연기관차의 경쟁력이 엔진에 달려 있다면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다. 전기차 생산원가의 40%를 차지할뿐더러 주행거리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양극재에는 중국이 공급을 장악한 코발트가 필수다. 요컨대 중국은 '소재-배터리-전기차'라는 생태계를 완벽히 구현하며 전기차 사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152-4)


5 프랭클린과 마오의 금융패권 전쟁


"미국 달러는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으로 기축통화 지위에 오른 이래 오늘날까지 무역·금융 등 국제 지불결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빌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와 미국 내 은행 간 결제시스템인 칩스CHIPS를 활용한다." "미국의 제재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제재 대상에 오를 경우 미국 금융시장은 물론 국제결제시스템에 접근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정상적인 국제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전 세계 은행들의 달러 결제는 반드시 미국 은행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한국의 국민은행 명동지점이 우리은행 명동지점과 달러 거래를 하려고 해도 미국 은행을 거쳐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기업과 금융기관이 혹시라도 미국의 제재망에 걸릴까 우려해 거액의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자금세탁방지 등 내부통제에 신경 쓰는 이유다."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 국가·기관·개인과의 금융거래를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167-8)


"이런 제재가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상당한 고통을 안기겠지만 미국이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지긴 힘들 것이다. 미국이 그동안 북한·리비아·시리아·이라크·이란 등 다른 나라들에 시행한 경험을 보면 긍정적인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제재는 한번 시작하면 뒤로 물리기 어렵다. 제재 대상국이 행동을 바꾸지 않았는데도, 제재를 해제하면 유약한 이미지가 생길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제재 회피를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금융 분야에서 위안화의 국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2010년께부터 위안화 국제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은 국제결제이 2.4%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 디지털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통화 발행을 준비하는 흐름은 새로운 변수다. 특히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는 달러 패권 체제를 뒤흔들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169-71)


"반면에 디지털화폐와 관련한 미국의 움직임은 매우 느린 편이다. 반대파는 지금도 달러 거래가 매우 디지털화되어 있고, 금융포용은 다른 수단으로도 가능하며, 중앙은행이 개개인들의 거래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점 등을 거론한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에서는 금융위기 발생 시 개인들이 은행 예금이나 펀드에서 돈을 인출해 초안전자산인 디지털 달러로 바꿀 유인이 생기는 등 금융 시스템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보고서도 내놓은 바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디지털 달러화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2021년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국제 지급결제 시장에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언급하면서 〈빨리 도입하는 것보다 제대로 도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더라도 국경 간 자금 거래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간소화되더라도 여전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177-8)


6 첨단 무기 전쟁


"국제정치학자 김상배 교수는 《4차 산업혁명과 신흥 군사안보》에서 〈인공지능·빅데이터·로봇 등의 기술혁신은 지정학적 경계를 넘어서 민간부문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에 군사부문에 적용되는 '스핀온spin-on'의 양상을 보인다. 이는 20세기 후반 냉전기에 주요 기술혁신이 주로 군사적 목적에서 진행되어 민간부문으로 확산되었던 '스핀오프spin-off' 모델과 차이가 있다〉라고 진단했다." "미국은 2014년에 이미 '제3차 상쇄 전략'을 내놨다. 이 전략은 새로운 기술적 우위를 통해 경쟁국의 수적 우위를 상쇄시킨다는 개념으로, 냉전 때 두 차례 시행된 이 전략을 다시 꺼내들 만큼 상황이 엄중하다는 의미다. 1차는 1950년대 동유럽에 배치된 옛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기 위해 시행한 핵무기 개발을, 2차는 소련의 핵·미사일 역량을 상쇄하기 위해 스텔스·위치 정보시스템 등을 개발한 것을 일컫는다. 3차에서는 인공지능·바이오·레이저·극초음속 등이 '게임체인저' 기술로 꼽힌다."(186-9)


"군산복합체는 군과 방산업체가 중심이며, 보수적 싱크탱크·언론이 이들의 논리를 전파하는 구조로 움직인다. 워싱턴 정치의 핵심으로 선거자금에 목말라하는 의원들에게는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제공한다. 의회에는 '미사일방어 코커스'라는 의원 모임까지 구성되어 있다."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런 현상을 두고 '군산복합체'를 넘어 '군·산·의회 복합체'라며 개탄한 바 있다." "포스톨 교수는 워싱턴의 이런 구조가 국제관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꼬집었다. 미사일방어는 미중, 미러 간 핵억지력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핵억지력은 한쪽의 핵 공격 시 다른 한쪽이 남은 핵전력으로 상대를 보복해 둘 다 괴멸적 타격을 입기 때문에 어느 쪽도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미사일방어망을 갖춰 핵미사일을 성공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면 이런 '공포의 균현'은 무너지고, 선제공격의 가능성은 커진다. 이로 인해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는 것이다."(196-8)


"포스톨 교수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지금 동아시아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은 202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극초음속 궤도 미사일 시험을 진행했다. 이 미사일은 지구 궤도를 돌다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한 뒤 음속의 5배 이상으로 활강해 목표물을 타격한다. 이른바 '부분궤도폭격체계FOBS' 기술이 적용된 극초음속 미사일은 미국의 조기경보 레이더의 눈을 피해 MD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방장관 자문관을 지낸 밴 잭슨 교수는 〈첨단 미사일 기술이 아시아 우방국과 경쟁국들 사이에 확산하고, 핵 강국들은 광범위한 핵무기 현대화 노력을 진행 중〉이라며 〈미국이 이런 우려스러운 흐름의 원인은 아니지만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접근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핵추진 잠수함 기술의 오스트레일리아 이전, 일본의 장거리 순항미사일 연장 검토,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 등의 조처를 중국을 불안하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199-201)


7 디커플링─21세기의 냉전


"경제·기술 경쟁 분야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른바 '디커플링' 가능성이다. 디커플링은 미국과 중국 간 경제·기술 생태계가 의도적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말한다. 관건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처럼 완전한 디커플링이 가능할 것인지다. 현재로선 두 강대국의 경제·기술 생태계가 완전히 분리되는 상황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실제로,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2021년 3535억 달러로, 대중국 관세 부과 직전인 2017년(3752억 달러 적자)에 다시 근접하고 있다. 미국 투자자들은 중국의 주식·채권을 2020년 말 기준으로 약 1조2000억 달러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2017년 7650억 달러에서 57.5%나 급증한 것이다. 중국의 미국 주식·채권 보유액은 2020년 말 기준으로 2조1000억 달러다. 이런 상황은 두 강대국이 상호 간에 격렬하게 제재와 반-제재 조처를 취했음에도, 민간 기업과 투자자들의 경제교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와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209-11)


"'중국판 우버'라 불리는 디디추싱DiDi은 2021년 6월 30일 중국 규제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기롭게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기업공개로 조달한 금액이 무려 44억 달러(약 5조 원)에 이른다. 2014년 뉴욕 증시에 입성한 알리바바(공모금액 250억 달러) 이후 최대 규모다. 그런 디디추싱이 반년도 되지 않은 2021년 12월 3일 뉴욕 증시에서 상장 폐지를 결정해 또 한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전에도 차이나텔레콤 등 일부 중국 기업의 상장 폐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 리스크나 인권침해 연루를 이유로 제재 대상 기업으로 지목한 영향이 컸다. 그러나 디디추싱은 사정이 다르다. 무엇보다 자국 정보인 중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2021년 6월 중국 내 데이터의 국외 이전을 제한하는 내용의 데이터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중국 인터넷 기업이 수집·저장하고 있는 데이터가 잠재적으로 국가안보 리스크와 직결된다는 게 이유였다."(215-6)


"미국 정부도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에 대한 압박에 가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20년 12월 18일 '외국회사문책법안HFCAA'에 서명을 했다. 이 법은 미국에 상장된 외국 기업은 외국 정부 소유가 아니고 외국 정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외국 회계법인이 상장사 회계감사를 하면서 취득한 회계 관련 증거자료에 대해 미국 규제당국이 3년 연속 검사를 하지 못할 경우 증권 거래를 금지한다. 이미 미중은 거의 10년간 이 회계 검사권을 놓고 갈등을 빚어왔는데 협상에 진척이 없었다. 중국은 이런 '무제한' 자료 접근권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발해왔다. 데이터를 많이 보유한 인터넷 기업의 경우, 회계 증거자료에는 고객 정보뿐만 아니라 회사와 정부기관 간에 오간 이메일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중 양국이 모두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가 이어진다면 중국 IT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을 통한 윈윈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217-21)


에필로그


"미중 패권 경쟁은 둘 사이에 낀 나라들이 받을 타격이 더 크다. 전쟁 같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배제하고 경제적 측면만 따져봐도 그렇다. 두 강대국이 보호주의로 돌아설 경우 우리처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들은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중 간 또는 OECD-중국 간 디커플링이 이뤄져도 두 블록과 모두 교역이 허용될 경우에는 국내총생산이 소폭 증가했다. 한국이 중국을 대체하는 어부지리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블록 내에서만 교역이 허용될 경우에는 한국이 입을 타격은 치명적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 때는 GDP 감소율이 6%로 조사 대상국 중 피해가 가장 컸다. OECD-중국 간 디커플링 때도 감소율이 5%에 달했다. 일본은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는 미중 디커플링 때에는 -1%였지만, OECD-중국 디커플링 때는 0%였다. 이런 예측은 미중 패권 다툼을 대하는 안목과 태도에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230-1)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수석과 정책실장을 지낸 이호승 전 실장의 말이다. 〈이걸 선택의 문제로 국한해서 보면 국익에 부합을 안하는 거고, 너무 성급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나라가 다투다가 이를테면 극단적으로는 대만을 둘러싸고 전쟁을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급하게 어느 편에 빨리 서야 한다, 어느 편은 배제해야 한다는 태도는 단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준은 우리가 선진국으로서 민주주의·환경·공정한 경쟁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분명하게 지지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원칙 속에서 누구를 배제하거나 누구하고만 관계를 맺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232-3)


"미중 경쟁은 우리에게는 기술력과 산업경쟁력을 유지·확대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미국과의 기술 협력을 통해 원천 기술에 접근할 수 있지만,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기술 접근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도체·배터리 같은 분야는 세계시장에서 더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중국에 뒤처져 있는 인공지능·클라우드·빅데이터·항공우주·양자기술 등에서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요컨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한편으로,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행운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의 미중 관계는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위태롭다. 기술의 진보 단계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점, 그리고 대결의 주무대가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바뀐 점 등만 빼면 미중 대결은 영독 대결의 판박이다. 한국 등 주변국들이 진영 대결이나 각자도생에만 매몰된다면 비극의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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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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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생생한 목소리로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meconnaissance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기반이 되는 '합리적 유토피아주의'의 근간에는 사회학 작업이 내포하는 이런 자기분열이 놓여 있다. 이를 견뎌 내거나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회학자를 포함해) 사회세계의 행위자를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밝힐 수만 있다면, 결국 외양의 허상과 기만적인 자명성을 비판하고 속박 상태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비록 모든 사람이 완수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기회를 살리게 될 것이다."(18-9)


1장 사회학자의 직능


"역사학자에게는 많은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고 심지어는 [그런 사실만 발견해도] 업적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만일 어떤 역사학자가 특정한 역사적 인물과 다른 역사적 인물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발굴한다면, 그러니까 친분을 찾아낸다면, 이는 일종의 발견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찬사를 보낼 겁니다. 반면에 제가 예컨대 대학 세계, 또는 학문 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려고 입만 벙긋하더라도 저는 괴물 같은 밀고자 취급을 당할 겁니다. 옳은 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죠. 다른 한편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학이 취하는] 시간적 거리는 중립화neutralisation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 있고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28-9)


"저는 결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절 같은, 그런 입장을 취한 적이 없고 지금도 굉장히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단절에 불과하며, 조사연구를 실천하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이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데─단절입니다. 이런 단절은 우리가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담론에서 발견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것과 속된 것, 달리 말해 성자와 속인, (신성한) 예언자와 평민을 구분하는 기능입니다. 저는 이런 기능이 역겹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우리의 과학이 아직까지는 시작에 불과하고 초보적이며 유아적인 단계에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과학에 관해 논할 수 있고 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어찌 되었건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혹은 경제학자가 실천하는 과학적 노력과, 예컨대 철학자가 수행하는 노력 사이에는 성격상의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자와 달리] 검증이나 반증 가능한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요."(32)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종 분류체계를 아무런 주저나 성찰 없이 사용하는 대신에 저는 분류체계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범주를 너무 순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일이지요. 일례로, 의사라는 개념 자체가 끝없이 변하는 역사적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의사들의 지위를 비교하는 시계열적 통계를 산출할 수 없습니다[범주 자체가 다르니까요]." "아무튼 역사를 사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단어, 개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입니다." "확실히 역사학자는 시대착오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요즘 널리 쓰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 단어가 아예 없었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된 과거의 실재를 조명합니다." "대체로 이런 오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성이 더욱더 중요한 것이죠."(36-8)


"샤르티에 / 선생님이 통시성diachronie, 즉 장기적인 시간에 관해 말한 것은 동시대 사회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집단, 다른 계층이 똑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범주를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무심코 사용합니다." "부르디외 / 역사학자들이 범하는 이런 종류의 시대착오는 사회학자에게는 자계급 중심주의ethnocentrisme de classe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38-9)


2장 환상과 인식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회계층 가운데 자유라는 환상에 특히 경도된 집단이 있습니다. 지식인들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학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거나, 사회학에서 '철학에 대한 증오'를 발견하고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거부는 지식인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알기 싫어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유의 주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요인들을 스스로 인식하는 한에서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49-50)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변에 대해 액면가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사고를 통해서, 그리고 극적인 자기 신비화를 거쳐서 스스로에게 사기를 불어넣습니다. 사회학자는 남들의 말을 듣고 남들에게 질문하고 남들이 말을 하게 하지만, 모든 담론을 비판 아래 둔다는 점에서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수단을 갖습니다."(54-9)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담론에 저항합니다. 사회학자가 상징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예를 들면 언론인, 주교, 교수, 철학자를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상징생산의 종사자들은 사회세계가 이렇다고 그럴싸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말로 먹고 삽니다. 사회학자는 이런 담론의 외양을 애써 조심합니다. 우리 사회학자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것은 실상 사회세계에 관한 일상적 담론,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는 상징적 호신술의 교사입니다." "예를 들면, 선거방송에서 한쪽에서는 언론인이 정치가를 논평하고, 반대쪽에서는 정치학 교수가 언론인을 반박합니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에 대해 메타-담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타'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메타'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내가 말해 줄게〉라고 하는 것이죠."(62-4)


3장 구조와 개인


"가짜 문제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가짜 문제들의 장점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과학의 관점에서 이런 가짜 문제는 대체로 진정한 정치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제가 볼 때 지리멸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대립쌍이지만, 예를 들어 개인과 사회,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주의와 전체론holisme 등등, '~주의'isme가 달린 단어들의 대립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 일련의 대립쌍은 사회주의 또는 집단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대립쌍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유착 관계를 통해서 정치투쟁이 학문 장 안에 슬그머니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학문 장의 자율성은 이런 가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경계를 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컨대 학문적으로 매우 취약한 입장도 그 뒤에 정치적 힘이 있다면 충분히 세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학문장 내에서 정치적 국면을 등에 업은 지적 활동이 가능한 겁니다."(74)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왜 가짜 문제일까요?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자생적] 학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학의 특별한 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학의 경우도 같은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데, 즉각적 이해라는 바로 이런 환상이 [진정한] 이해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환상과 단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객관화 방법을 도입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뒤르켐의] 유명한 문장에 다다릅니다.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다루어야 한다.〉" "저는 연구대상이 제게 말한 것, 그가 체험한 것, 그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말한 것, 그의 정신적 경험이나 표상 등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심지어 의심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뒤르켐의 '선관념',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또는 자생적 사회학을 뜻하는데, 그 이름이 뭐든지 간에 저는 의심을 지우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객관주의적 입장입니다."(74-5)


"나는 세계에 속하는 하나의 사물입니다. 나는 하나의 신체로 존재합니다. 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다양한 힘에 복속됩니다." "저는 또한 세계를 이해합니다. 달리 말해 저는 세계에 관한 표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서 제가 차지하는 위치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의 작업은 [위치와 관점] 두 가지를 포괄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라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 대 사회는 전적으로 가짜, 허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대립쌍은 객관주의적 공격이나 주관주의적 공격 모두에서 사용될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한 허구입니다." "사르트르가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주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한다면,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객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하고 있죠. 어느 편을 드는 대신에 우리는 사르트르에 반대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 찬성하고, 레비-스트로스에 반대하면서 사르트르에 찬성해야 합니다."(77-8)


"사르티에 / 선생님의 이런 주장은 결국 역사학자들의 경우 인식론적 실험의 상황에 거의 놓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상 역사학의 대상과 역사학자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고, [사회학과 달리] 연구 주체의 고유한 이해관심이 [대상과의] 직접적인 연루가 아닌 다른 층위에 놓이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서 현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예외가 되는데, 그 경우 [역사학과 사회학 사이의] 학문적 경계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물론 [역사학 장에도] 두 개의 대립극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조의 축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의미지향의 축에 속합니다. 이와 같은 대립쌍이 사료의 종류, 역사쓰기의 방식, 역사학자 사이를 구분하긴 하지만, 분열이 심하지는 않지요. 그 덕분에 상이한 접근들이 아주 원만하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계는 완전히 통일된 장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주제와 역사쓰기의 방식들이 몰려 있는 일종의 모자이크 상태와 유사한 것이죠."(82-3)


4장 하비투스와 장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 이후에는 후설, 모스, 뒤르켐, 베버 등 다양한 학자가 하비투스 개념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 개념은 결국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즉 사회적 '주체'는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정신esprits instantanes이 아니란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의 실천을 이해하려면 그에게 가해진 자극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모종의 성향 체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면서 어떤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됩니다. 하비투스 개념은 대강 이런 뜻입니다. 자세히 논의하자면 끝이 없는데, 이 개념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행위자는 역사를 가지며 개인사의 산물이자 환경과 연관된 교육의 산물이고, 집단적 역사의 산물입니다. 특히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등은 사회구조가 체화된 산물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하비투스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92-3)


"그렇지만 하비투스는 숙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저를 두고 해석하는 식의 불가피한 운명fatum이 아닙니다. 하비투스는 성향들의 열린 체계입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고, 그런 경험들에 의해서 마침내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이런 주장에 재빨리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일련의 경험이 하비투스를 [변화시키는 대신] 강화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개연성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연계된 사회적 숙명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하비투스를 형성한 경험들과 조화로운 방향으로 경험을 쌓아 가게 됩니다. 또 하나의 난점을 해소해 봅시다. 하비투스는 잠재성virtualite의 체계로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남들이 저를 두고 해석하는 바와 달리, 하비투스는 특정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것은 스프링과 같지만, 방아쇠가 필요한 것이죠. 게다가 상황에 따라 하비투스는 정반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99)


# 하비투스는 통상적으로 순응 기제로 작동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달리 말해 하비투스가 실행되는 장이 달라지면 저항 기제로 발현될 수도 있다.


"저는 거대한 경향적 법칙에 대해서 일종의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방법론적인 이유에서 저는 그런 법칙을 거의 믿지 않아요. 반면에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인기를 끌었고,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에게 언제나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이런 문제들 중에서 엘리아스의 문제들이 가장 공감이 간다고 말이죠. 그는 국가 형성이라는 실제의 거대한 과정에서 자신의 역사진화론적인 사회심리학을 추구합니다. 국가는 물리적 폭력(저는 여기에 상징폭력을 추가합니다)을 시작으로 온갖 형식의 권위를 독점하면서 구축됩니다. 일례로, 교육체계는 누가 똑똑하고 누가 멍청한지 선언할 수 있는데, 이런 발언권을 독점하는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 결국은 교육체계를 형성합니다. 이런 과정은 제가 하비투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다소 애매하고 위험한 용어로 심성이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어요."(102-3)


"사르티에 / 선생님의 저작에서 장들은 언제나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들이 그 자체로 국가의 발현으로 묘사됩니다." "부르디외 / 그렇기는 해도 저는 우리가 만일 국가에서 출발한다면, 국가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예로, 제가 연구한 예술 장에서 인상주의 혁명은 국가에 맞서서,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맞서서 일어나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달리 말해,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장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경제 장에 대해 독립적인 소우주들이 어떻게 창출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 국가는 메타-투쟁의 장소, 즉 장들에 대한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장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법률 제정을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 있습니다. 주택가격이나 은퇴연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는 장들을 가로질러 일어나는 투쟁이지만, 세력관계를 재편하는 투쟁이기도 합니다."(109-11)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아카데미가 지배하는 통합된 사회세계에서는 하나의 노모스nomos, 즉 근본적 법칙과 분할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그리스어 노모스는 나누다, 분할하다를 뜻하는 동사 네모nemo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중에 분할의 원리도 있는데, 이는 동시에 시각의 원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적/남성적, 습한/건조한, 뜨거운/차가운 등이 그렇지요. 잘 통합된 아카데미 세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화가이고 저 사람은 화가가 아니다.〉 이 사람은 '보증'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화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화가로서 인증받았기 때문에 화가입니다. 이것이 아카데미죠. 이런 상황에 마네가 일격을 날린 겁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누가 화가인지 아무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노모스에서 아노미anomie로 이행한 셈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정당성[혹은 인정체계]을 놓고 정당하게 투쟁할 수 있는 세계로 옮겨 간 것이죠. 그리고 어느 쪽도 서로의 도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117-8)


"장에서는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됩니다. 사회학자는 언제나 도전에 처합니다. 사회학자로서 그의 정체성이 언제나 문제시될 수 있지요. 게다가 장이 발전할수록, 그 장에 특수한 자본이 축적될수록 다른 화가의 정당성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그 자신이 화가로서의 특수한 자본을 점점 더 많이 갖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념 미술가는 회화를 근본까지 의심합니다. 그들은 캔버스를 찢으면서 이런 도전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의제기 형식을 살펴보면, 그들은 유치한 우상파괴자와 달리 회화적인 방식으로 회화를 문제화합니다. 그런데 이를 적절히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회화의 역사에 통달해야 합니다. 엄청난 지식이 필요한 것이죠. 예술가가 수행하는 특수한 우상파괴는 예술 장에 대한 거의 완벽한 숙달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분명히 역설이지만, 장과 더불어 생겨난 역설입니다. 〈그는 세 살짜리 우리 아들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식의 순진한 발언은 그 장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죠."(119)


"이번엔 철학의 사례를 들어 보지요. 어떤 사람이 철학 게임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른바 '나치'식의 관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하이데거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철학 게임에 들어가기 위해 그는 철학계의 작동 법칙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설령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장은 이런 식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는 '반칸트주의'가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매개 요인이 개입합니다. 하이데거가 [학계에] 등장할 때, 유대인들은 합리주의의 표상으로 칸트를 옹호했습니다. 만일 제가 나치식 관념을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관념을 [철학 장의 법칙에 맞추어] 철저히 변형시켜야 합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는 분명히 나치죠.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존재론의 언어 속에서 나치식 주장을 했는지 아는 데 있습니다."(121-2)


"많은 사람이 발자크를 사회학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설가 가운데 최고의 사회학자, 사회학의 창시자는 바로 플로베르입니다." "특히 『감정교육』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추구한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정확히 우리는 마네에 관해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식을 탐구했지만, 이는 동시에 사실주의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은 쓸모없는 대립 가운데 하나입니다. 플로베르 사례에서 형식의 탐구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의 회귀, 즉 사회적 상기anamnese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이야기하기'만 가지고 소설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순수소설, 순수하게 형식적인 탐구에 힘입어 플로베르는 사회세계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뱉어 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국 그는 당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객관화에 성공합니다. 플로베르가 이룬 성취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분석들과 견줄 만합니다."(124-6)


"역사학에서 멋진 이야기는 환기evocation 작용을 합니다. 학문적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 대상을 느끼게 하고 보게 하는 데 있으며, 거의 미슐레적 의미에서 [즉 역사를 실감 나게 그려 내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대상 자체를 환기시키는 데 있죠. 제가 이런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우리는 구조를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역사학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에 사회학자는 즉각적인 직관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는 기능이 다르지요. 만일 선거방송에서 해설을 한다면, 사회학자는 시청자들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핵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학자는 때때로 멋진 형식에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킵니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는 원초적 경험, 심미적 선호, 대상관계의 쾌락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지요."(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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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 《국가》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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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사람들이 페이라이에우스(피레우스) 항 근처에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를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밋밋한 대화가 아니라 격정과 냉소, 찬탄과 질책이 오고가며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희곡이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호적인 이들도 있고 적대적인 자들도 있다. 적대적이라 해서 당장 상대방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아니다. 그 정도로 적대적이면 아예 마주앉아 대화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그 자리에 끼어들었을 리 없다. 설득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이들이다. 말을 섞는 것조차 곤란한,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호적이라 해서 좋은 말만 하고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의외로 그런 자들이 하기 마련이다." "(대화편 《정치가》나 《법률》과는 달리) 《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이끌고 가지만 다른 이들도 끌려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화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16-7)


서론 또는 문제 제기: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폴레마르코스는 단순히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붙잡은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겨 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대화가 시작된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다. 격렬한 대결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약간의 긴장, 이 정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와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한다. 《국가》는 '대화를 통한'(dia logon)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설득은 철학자의 과제다. 이 대화가 끝날 때쯤 여기서 시비를 걸던 사람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말에 승복하거나 적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의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목적도 설득에 있다. 플라톤은 그들의 설득과 자신의 설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26-8)


#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1. 케팔로스 :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어서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갚을 것은 갚는 것'이 올바름이다.

2. 폴레마르코스 :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올바름이다.

3. 트라쉬마코스 : 더 강한 자의 편익이 바로 올바름이다.

4.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 올바름은 그 자체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논증해야 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약정을 하면 된다. 글라우콘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법률(nomoi)과 약정(계약: syn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nomos)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nomimon)이며 올바르다(dikaion)고 한다.〉 법이 〈올바름의 기원(genesis)이며 본질(ousia)〉이라고까지 말한다. 합법성과 올바름(정당성)이 법을 통해서 결합된다. 체제가 법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되어 있기만 하다면 정당성을 얻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참된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 것인지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결국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77-8)


"담대한 글라우콘과 섬세한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하는 것은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밝히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윤리적인 행동 지침을 세우는 차원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만한 것까지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한 사람의 올바름과 한 나라 또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올바름 모두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올바름을 원리로서 탐구할 것을 요구하는 글라우콘, 올바름의 작용과 이로움을 밝혀 달라는 아데이만토스, 이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아테나이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면서도 지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가 언급했듯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들에 대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올바름의 원리와 작용을 구축하는 작업, 즉 올바름의 학學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담대함과 섬세함으로 수행되는 이 작업은 '기쁨'을 낳아 놓을 것인가."(80-1)


제1부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의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이 공공 영역인 폴리스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주귀감서에 그것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닌 피지배자들, 주권자가 아닌 자들, 신민의 쾌락은 그저 억누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민주 정체가 성립하면서 바로 이들이 폴리스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자신들의 쾌락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돈 놓고 돈 먹기'와 같은 보수 획득술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선거의 핵심 주제, 심지어 당락을 가르는 쟁점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를 쌓아 올리려는 애타는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이다." "즉, 《국가》는 민주 정체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89-90)


"《국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올바름의 기준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철학적 정치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호자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호자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원칙인 '한 사람이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수호자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직업을 갖는 나라에서 수호자들도 그 명칭은 '하나의' 직업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향은 교육을 통해서 다면적으로 변화하였으며 바로 그 다면성이 수호자 또는 통치자의 근본적인 특성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수호자(와 통치자)만 유식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 무식한 상태로 만들자는 것인가라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민정치를 하자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과잉해석일 것이다."(113-4)


"시가 교육이 좋은 성격과 그에 이은 지성의 측면을 위한 것이었다면 체육 교육은 '격정'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을 위해서 양쪽 다를 제도화한 것〉(410c)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혼이 가지고 있는 두 측면을 위해서 그 두 가지 교육이 요구된다. 〈수호자들은 성향상 이들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만〉(410e)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시가와 체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 측면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둘을 골고루 쓸 수 있다. 이것이 혼화混和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름은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활동을 가리킨다. 올바름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최선의 것을 궁리해 내는 사유활동이다. 플라톤에 있어 올바름은 혼의 혼화에 이르는 과정을 이끌어서 혼화의 상태와 적절함을 만들어 내는 사유의 힘이다."(124-6)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양 중세에서 장남은 집안의 문장紋章을 이어받는다. 차남은 자신의 운명에 승복하고 다른 방책, 이를테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십자군에 참전한다. 왜 불평이 없는가? 그것이 자신의 기본값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굳이 따져서 알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함 따위를 따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장남이 될 수 없다. 노력하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체제에서만 올바름과 공평함이 문제된다." "플라톤이 올바름에 대해 논의를 했다는 것은 민주 정체에서 핵심적인 쟁투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테나이에서는, 민주정 시기는 물론 참주정 체제에서도 이런 일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는 민주정에서 조화로운 정치적 행위들이 가능한 방법, 체제 붕괴를 불러오는 당파적 쟁투를 막는 민주 정체 지도자들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궁리한 것이다."(128-9)


"통치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없애야 하는 데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들도 한 명의 주권자이지만 그들이 공직에 있는 한 그들은 공직이라는 기구(apparatus)의 한 조각이다. 거대한 조직(organization)의 한 기관(organ)에 불과한 것이다. 이 조직과 기구는 그 안에 어떤 인간이 들어온다 해도 규범과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플라톤 시대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민주 정체는 시민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회에서 모든 공적인 사안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민주정을 흔들고 불안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상적인 권력 기구라 부르는 장치를 구상한 것이다. 수호자들의 사적인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권력 기구와 전면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 '폴리스'만 남는다. 그들은 폴리스의 일(ergon)을 수행하는 기계와 마찬가지다."(191)


제2부 공동체의 궁극적 근거와 철학적 정치가


"현실은 현실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구상을 제시하였을 때 그것에 상응하는 제도와 조직이 만들어질 가망이 없는 것을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하며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을 현실적이라고들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적 제도와 조직이라는 실제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유형有形의 것들이 있다. 그것에 상응하거나 그것을 반영하는 정치적 사유를 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가. 이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유가 현실의 정치적인 것을 반영한다 해도 인간의 사유는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할 수 없다. 모든 사유에는 인간의 반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반성은 사유이고 관념이다. 관념(idea)은 이상적(ideal)이고 이상주의적인(ideal) 것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생각, 곧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든지 정치가가 철학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의 아테나이에서 펼쳐지는 정치를 검토한 다음에 나온 것이므로 관념이고 이상적인 것이다."(200-1)


"현실은 내버려두면 그대로 흘러간다. 가끔은 그것을 되짚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살펴볼 때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만들어 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닮은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본本이 있어야 그것에 대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그러다 보면 뭐가 되더라도 되겠지,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어'라는 태도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가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현실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정치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자는 것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정치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이다."(201-2)


"소크라테스는 자체를 아는 것이 앎이고,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진리로 간주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견 속에서 산다. 그들을 어떻게든 이끌고 가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모름을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이 무지의 자각은 앎인가, 의견인가? 아직은 의견이다. 자신이 무식한 건 알지만 아직 앎은 없다.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중간 단계다. 이것은 모름과 앎의 운동 과정이다. 앎과 모름은 이처럼 연속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닌 반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흰색과 까만 색도 반대 관계이다. 흰 색에 때가 묻으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때가 아주 많이 묻으면 까만 색이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간 단계를 우리는 '생성'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성에 나섰을 때 그것을 인도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국가》에서는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일단 앎을 가진 철학자가 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212-3)


"형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본은 형상을 닮은 것이다. 형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의 면적을 계산할 때 원주율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한다. 이는 원을 다각형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무한히 쪼갠다고 가정해서 얻어 낸 원의 면적이 원의 진짜 면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무한히 쪼개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주율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얻어 낸 면적은 원의 진짜 면적에 접근해 있을 뿐이다. 원의 진짜 면적은 신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은 그 면적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알고 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고 인간은 신 닮은 것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차원을 구분한다. 하나는 완전하게 자기 스스로와 합치하는 차원, 즉 신의 차원, 형상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극한의 노력을 기울여 형상의 차원에 가깝게 간 '본'의 차원이다."(213-4)


"형상을 알아내는데서 그치면 그는 철학자일 뿐이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한다. 천상에 올라가 지식을 얻은 다음 그들을 인도하러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올라가면 철학자이고 내려가면 정치가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철학자는 형상을 앎으로써 스스로 완성된다. 그것으로써 목적에 이르러 끝난다. 형상의 세계는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곳이다. 인간 세상은 변화에 얽매여 있는 곳이다. 천상의 세계는 질서 잡혀 있으며 한정되어 있으나 아래는 혼돈스러우며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들 각각은 진리와 비진리이니 겹칠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 자족성(autarkes)이 있다면 본을 가진 정치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은 논리적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인간 공동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상에 있는 형상을 '전체에 따라서'(kata holon) 모방한 본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 본은 어중간하게 중간에 있는 것이다."(220-1)


"폴리스에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까닭으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를 제시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를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면 '공동선'共同善이다. 이러한 최종 근거의 원초적 형태는 자연적 우주론, 즉 우주적 혼(cosmic soul)의 선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가 이것에 관한 정신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근대적 형태의 우주론은 칸트의 초월론적 선험론에서 주장하는 '실천이성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최고선, 자유의지, 영혼불멸은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인간 삶의 윤리적 국면을 위해서 목적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에 있어서는 공공복지 같은 이념이 정치에서의 최고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이 설정됨으로써 정치의 궁극적 과제가 도출되며, 이것으로써 정치는 사적인 이익의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정치의 궁극적 정당화 근거'이다."(253)


"많은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해 내려가야만 한다. 상승과 하강,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묶어서 '이행'(메타바시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매정하게 설명했다. 폴리스에서는 특정한 부류가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지내게 하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자면 정치가는 공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서 그곳에서 누리는 '관상적 삶', 현실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 이 두 가지 모두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둘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철학적 정치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견뎌 내는, 서로 다른 상태인 올라감과 내려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것, 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다."(282-3)


제3부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


"아테나이, 로마 공화정, 현대 민주정 등을 제외한 정치 체제들에서는 정치적 공직이 출생, 군주의 호의, 확립된 과두제 안에서의 지위의 획득에 의해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성취될 수 있었다. 이는 공직을 귀속적으로 충원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구상한 폴리스에 적용되는 방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교육적 충원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체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정체의 쇠퇴가 일어나는 원인이 정체의 구조 문제라기보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정체에 살고 있다 해도 그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사느냐, 즉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체는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시민들에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정치 체제의 상태를 평가하고 이름 붙이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정치학적 의미에서의 체제론을 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302)


#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

1. 크레테 및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은밀하게 추구함

2. 과두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드러내놓고 추구함

3. 민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인이 추구함

4. 참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광적으로 찾아내서 지도자로 추대함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극대화되어 겹치면 민주정으로 가게 된다. 욕망 충족과 멋대로 하기에는 민주정만한 곳이 없다." "민주 정체에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에 불변의 고정적 정의가 없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중선동에 능한 자가 민주 정체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데 왜 전통을 지켜야 하느냐면서 기존의 것을 엎어 버리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전통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전통을 깨는 합의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극도의 대중영합주의 시대가 되어 버리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이 깨져 나간다." "모든 즐거움은 동일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 민주정의 핵심에 자리한다.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욕구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소비자주의'다. 가치의 위계질서가 해체된 상태, 이것이 민주 정체의 필연적인 귀결이다."(324-8)


"참주 정체로 나아가는 씨앗은 이미 민주 정체 안에 들어 있다. 민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은 자나 정당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배하게 되므로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이 법을 어기고 대중의 격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뭔가를 하게 되는 지점, 즉 선도자가 되면 참주정으로 가게 된다. 마지막에 선도자는 '참주'로 변한다. 시민이 다양한 명칭을 갖는 것처럼, 똑같은 정치가가 상황의 변화와 진전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군중을 거느리고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그때부터 참주가 된다. 그는 늑대인간이다. 〈다른 제물들의 내장들 속에 잘게 썰어 넣은 인간의 내장 한 조각을 맛본 자는 반드시 늑대가 된다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다. 참주 정체에서는 이러한 일이 사법살인의 형태로 자행된다. 대중선동가, 선도자, 참주, 이 연속 단계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339)


"인간이라는 존재는 쾌락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쓰면 이기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이 그 쾌락을 충족시키려 하는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다." "플라톤도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오니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충족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 정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즉 법을 강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 궁극적인 신뢰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 내놓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진리 닮은 것이다. 진리는 항상 저쪽에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강제하겠는가. 결국 마음을 닦으라는 말만 하게 된다. 공동체의 법을 어기는 불법과 결합된 한 사람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처방은 한 사람의 심신수련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341-2)


제4부 참된 올바름과 궁극적 보답


"플라톤은 철학자가 언어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을 진리라 하고, 시인이나 화가가 말하는 것은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철학자나 시인이나 모두 모방(mimesis)을 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모방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행위자가 초월적 실재로서의 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의 후보자들이 있다. 은유는 인간이 만들어 낸 임의적인 것이라 약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모방한 결과물이 은유인 것이다. 은유는 초월적 실재인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다. 한마디로 모방은 은유를 형성해 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모방은 진리와 인간이 은유를 통해 오고가는 것, 즉 이행(metabasis)이다. 진리는 인간으로, 인간은 진리로 오고가는 것이다. 진리가 아무래도 위에 있다는 느낌이 있으니 그것을 알기 위해 인간이 올라가서'(anabasis) 진리를 가지고 '내려오는'(katabasis) 것이다. 은유는 오르내리는 사다리다."(369-70)


"소크라테스는 시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진리의 인식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온갖 착시에 빠져 있다. 〈같은 것들이 물속에서 볼 때와 물 밖에서 볼 때, 구부러져 보이기도 하고 곧은 걸로 보이기도 하는가 하면, 색채들과 관련되는 착시로 인해서 오목하게도 또는 볼록하게도〉 보인다. 시각을 통해 보는 것은 왜곡이 된다. 이것을 꼭 시각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판적인 안목 없이 사태를 바라보면 대상이 던져 주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산된 것과 측정된 것 또는 계량된 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들은 비판적 검토를 거쳐서 객관화된 것들이다. 계산된 것, 측정된 것, 계량된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미디어를 왜곡시키는 자들이요, 플라톤 시대에는 시인이었다. 시인들이 '혼의 헤아리는 부분'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의 미디어론으로 읽을 수 있다."(370-1)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은, 살아서 혼을 순수한 상태로 만들고 올바름을 지켰던 사람은 죽어서도 훌륭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살아서의 삶이나 죽어서의 삶 모두에 대한 궁극적인 보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야기의 보전'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과제라 천명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이 이야기를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설득할 의무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설득된 자들은 '잘 지낸다'(eu zen)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아 인간들과는 물론 신과도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올바르게 살았던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보존하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보존하는 것, 사실 이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다. 앞날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 가 본 길들을 철학자가 갈 수 있겠는가. 안 가 본 길들은 정치가들이 가는 것이다."(385-6)


추기追記


"아테나이 민주정의 결정적 계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었다. 그는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는 방식을 개조하였고, 정치적 선택을 아테나이 전래 집단인 데모스에 전체적으로 할당하였다. 여기서 민주정은 근대의 개인주의 방식이 아닌 집단의 선택으로 작동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로 민주정 체제에 숨은 문제는 '쾌락'과 연관된 부의 문제였다. 아테나이에서는 정치적 투쟁의 핵심인 부의 원천을 둘러싼 분배방식의 쟁투가 민주정으로 봉합되었고, 전쟁 시기에는 일당지급제도(misthophoria)라는 편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로 충당된 국가의 핵심인력으로서의 해군에 대한 사회적 지위 부여 문제와도 얽혀 있는 것이다. 부를 분배하는 방식은 민주정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으나 부의 원천 자체는 토지 이외의 것이 획기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기술혁신이 불가능했던 고대 경제는 약탈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제국주의로 표출된 것이다."(394-5)


"민주정의 지도자가 가진 문제는 권력 획득의 과정과 기술에 있다. 달리 말해서 정치적 기술로서의 연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의 술어로 표현하면 '대중영합주의'의 문제다." "한 개인의 내면적 심성의 특성이나 도덕성보다는 대중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기술, 곧 연설술이 민주정에서는 탁월한 정치술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를 배척한 것은 체제의 요체를 곧바로 겨냥한 것이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민주정이 실현한 일종의 '세계의 탈주술화'를 되돌리려 하였다. 주지하듯이 민주정은 절차적 합리성만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에서는 최종적 정초가 되는 이념이 없는데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라는 이념을 도입한다. 이는 탈주술화의 귀결인 민주정을 다시 주술화하려는 시도이다. 《국가》의 주제가 '올바름'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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