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유럽의 형성 - 16-18세기
이영림.주경철.최갑수 지음 / 까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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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장 15세기 말의 세계와 유럽


# 근대(1500-1800년) 서구에서 형성된 새로운 구조들

1. 경제 : 14-15세기에 발생한 기근, 질병, 전쟁으로 인한 농업 인구의 극적인 감소 추세에서 점차 회복, 농노 신분제가 약화되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도시 분야도 발전

2. 정치 : 기사계급, 곧 영주들이 몰락하고 국왕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통치구조를 공고히 하는 절대주의 국가 강화

3. 종교 : 대륙 전체를 통합하던 가톨릭의 위세 약화,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신교와 구교의 대립 격화

4. 문화 : 점차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문화와 예술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으로 귀결

5. 해외 팽창 : 상기한 요소들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결합하여 유럽인들의 해외 진출을 독려


제2장 근대 유럽의 물질적 조건


"출발점과 종착점을 어느 시점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인구 증가세가 다르게 잡히지만, 일반적으로 1300-1800년의 5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최소 140퍼센트, 최대 400퍼센트 증가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500년 동안 이 정도의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면 연평균으로는 2퍼밀(‰)이 안 되는데, 이 정도의 비율은 그 시대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미미한 변화이다. 전체 흐름을 정리하면, 일상에서 경험하는 단기적 차원에서는 인구 증가가 거의 매번 무화되어 인구가 정체하는 듯이 보이지만, 100년 단위의 차원에서는 극심한 상승과 하락을 보이고, 다시 그보다 더 긴 차원, 즉 근대사 전체를 포괄하는 단위에서는 매우 큰 인구 증가를 이룬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은 장기적 인구 증가는 뚜렷하게 인식되지는 않지만 사실 근대사의 핵심 사항 중의 하나이다.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 수가 2배, 심지어 4배가 되었다면 사회의 다른 모든 요소들이 이에 맞추어 근본적인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6)


"농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선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들의 문자해독률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농민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사회가 이루어낸 성과를 후세대에게 전하는 방식에서 책을 읽는 방식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구전문화(oral culture)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 그리고 사회적 결속과 구속이 강했다. 그 결과 마을 공동체의 힘, 기능, 규제가 대단히 강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가정'이라는 범주보다 마을 공동체라는 범주가 사람들에게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점차 이런 공동체의 규제로부터 벗어나서 개인의 존재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 근대 사회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의 양태로 나타났다." "유럽의 경우 이런 '가족주의'는 19세기에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강화되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54)


"전반적으로 서유럽에서는 인신적 규제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더 이상 중세적인 농노의 신분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이제 농민들은 자유의 몸이었다. 다만 영주들이 '지배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지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로 지대를 지불하는 것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상으로만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실제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원칙 그대로 지대만 내면 그것으로 영주와의 관계가 사실상 끝나는 것은 영국과 같은 예외적인 곳의 일이었다. 나머지 지역들은 지대 이외에도 상속세, 판매세 등의 각종 부담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지난 시대의 봉건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의미로 '봉건잔재(封建殘滓)'라고 부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주들로서도 그들의 지위와 부(富)가 쇠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런 봉건잔재들을 되살리고 더욱 확대하려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이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커졌다."(55-6)


#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프랑스 농민들이 구체제에 저항한 것도 귀족들의 억압과 수탈이 너무 심해서라기보다는, 농민층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방해집단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일으킨 봉기라고 볼 수 있다.


"동부 유럽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동유럽이 서유럽인에게 개방된 것은 12-13세기의 동유럽 식민화(Ostsiedlung, Drang nach Osten)의 결과였다.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 인구 압력이 너무 커지자, 동유럽에 식민 개발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우선 서유럽의 기사들이 동유럽에 무력으로 진군해 들어가서 현지인들을 억누르고 강제로 기독교화한 다음 그곳에 이주농들을 불러온 것이다. 즉 이 지역에서 개간이 이루어지고 마을이 들어선 것은 영주층의 주도로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공동체에 비해 지배층의 힘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다른 요인들 중 하나는 서유럽의 곡물 수요가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동유럽의 영주들로서는 농민들을 압박하여 곡물을 많이 확보한 다음 잉여 생산물을 서유럽에 판매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런 인센티브가 주어지자 영주들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59-60)


"발트해 무역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유럽이 최초로 외부로 팽창하여 '식민화'한 실험 사례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곡물 위기가 심각할 때 원거리 곡물 무역은 이를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를 두고 서유럽의 곡물 수요 대부분을 동유럽의 기아 수출로 해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곡물 위기 상황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한계적인(marginal)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구조적으로 늘 어느 지역에선가는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이 문제를 해결할 정도의 곡물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면 사회 전체의 안정을 기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마지막 한계 국면에 직면한 다수의 농민들의 식량을 빼앗아 더욱 심각한 상황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와 서유럽의 상업 자본주의는 이런 식으로 결합하게 되었다."(60-1)


제3장 사회문화적 변화


"촌락 공동체의 규모는 5-6가구에서 60-70가구까지 지역과 환경에 따라서 다양했다. 농촌 수공업자, 대장장이, 방앗간 주인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촌락민들은 귀족인 영주에게 예속되었고 국가, 군주에 대한 소속감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소교구 주임 사제는 촌락 공동체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소교구의 교회는 단지 종교적 예배장소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공적 집회소인 동시에 사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위로부터의 명령과 지시사항이 전달되고 각종 정보가 공유되며 교환과 계약이 이루어졌다. 또한 공동체의 안전과 농경, 공유지 사용 등 구체적인 모든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친구와 연인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공동체의 집회는 주로 가장들의 모임이었지만 경제적인 문제의 경우에는 과부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읍이나 도시의 소교구도 유사한 기능과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시기에 신구교를 막론하고 소교구 공동체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은 이처럼 다기능적인 용도 때문이었다."(80-1)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16세기 도시에서 전개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정치 엘리트 층의 형성과 성장이다. 국가와 시 행정의 규모가 커지고 체계화되면서 전문 관리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전통적인 전사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새로운 집단에서 동원된 이 새로운 유형의 도시 행정귀족들은 무지와 폭력과는 다른 문화와 교양을 갖춘 정치적 실무자들이었다. 그들의 등장과 성장은 정부의 구조와 작동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초래하며 미래의 정치 엘리트 집단의 형성을 예비했다. 이러한 관료집단의 형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궁정의 발달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부와 권위를 갈망하며 궁정이 위치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의 문화 역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발휘했다. 특히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탈리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유럽 도처의 학생들과 종교적 반대파, 예술가, 음악가들이 이탈리아로 몰려들었다."(87-8)


"이탈리아 반도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던 15세기 중엽에 르네상스 문화는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는 경제적 쇠퇴기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공화국의 몰락기였다. 정치와 경제 모두 불안정한 상황에서 도시국가의 정치지배자들은 강한 우월감을 가진 동시에 불안감에 시달렸고 이러한 이중 감정은 자기 과시로 표출되었다. 그들은 봉건 영주와는 다른 출신 성분과 성장 과정을 거쳤지만 봉건귀족을 동경했다. 전제군주이건 과두 지배자들이건 봉건귀족의 군사적 풍조에 매료되어 군사훈련을 익히고 마상시합을 즐겼다. 특히 밀라노와 피렌체의 전제군주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 건축을 통해서 권위를 과시했다. 이러한 정치 지배자들의 경쟁심과 허영심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발달에 기여했고 제한적이나마 경제적 활력소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순수하게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측면이 강했다."(92-3)


# 1530년 북이탈리아가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르네상스는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


"북서 유럽에서도 일찍부터 새로운 문화적 시도가 나타나긴 했지만, 북서 유럽에서 르네상스 현상이 본격화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전해지면서부터이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를 무조건 세속주의적 문화 운동으로, 북서 유럽의 인문주의를 기독교 인문주의로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북서 유럽의 인문주의자들도 초기에는 고전 연구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1500년경 면벌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북서 유럽의 식자층을 사로잡은 최대 이슈는 올바른 신앙을 위한 교회개혁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교적인 고전 연구가 신앙심과 도덕을 전복시킬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자연히 인간 사회의 윤리를 최우선적인 관심사로 삼았던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 도덕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개혁의 파장이 거세지면서 키케로 모방과 화려한 수사 연구와 같은 세속적 인문주의의 풍조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북서 유럽의 인문주의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갔다."(104-6)


"초기의 인쇄업자들은 고정 독자층이 유지되는 분야의 책 생산에 주력했다. 가장 위험부담이 적은 책은 성경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으로 책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동일한 텍스트를 무한대로 재생산할 수 있게 되자 인쇄업자들은 더많이 팔릴 수 있는 주제를 찾는 데에 몰두했다. 유럽 각국에서 서민적이고 낭만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유행하게 된 것은 작고 얇은 값싼 대중용 인쇄물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라블레,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출판업자의 이해관계와 민중층의 독서 욕구에 부응하듯이 르네상스의 새로운 세계관과 그 지역의 토착적인 정서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이들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중세와 맞닿아 있다. 르네상스 문학의 인기 비결은 중세의 주제를 도시와 궁정의 환경에 알맞게 각색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과거지향적인 민중의 정서에 쉽게 파고든 이러한 오자투성이 책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110-2)


제4장 종교와 정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헌장 제1조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교회가 철저하게 천국의 입장권을 독점한 셈이다. 모든 신자들에게 이 원칙을 시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교리와 종교관행도 마련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신자가 적어도 1년에 1번 사제에게 개별 고해를 하고 사제가 부과한 보속(補贖)을 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사항이다. 이후 고해와 보속은 중세인들의 종교생활의 핵심을 이루었다. 나아가 라테라노 공의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위계질서를 확고히 함으로써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지배체제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유럽인들은 가톨릭이라는 하나의 제도적 틀 안에서 살았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은 주문과 마술이 혼재하는 미신과 이교적인 종교문화에 지배되었다. 중세 가톨릭 세계는 단지 외형상으로만 통합되어 있었을 뿐이며 기독교는 개인적 종교이기 이전에 문명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116-7)


"북유럽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부패와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왕권 강화에 성공한 몇몇 군주들이 국내의 종교 문제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며 교회 당국과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밖의 두 세력은 근본적을 교황권 자체를 부정하거나 도전하지는 않았다. 교황의 독단을 억제하려는 공의회주의자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황권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늘 교회 내부의 개혁세력이었다. 개인의 구원과 영적 완성을 목표로 은둔과 고행을 하며 강압적인 교회제도에 저항하는 일부 성직자들의 개혁 운동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 이래 가톨릭의 역사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개인적 신앙, 양 측면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얼룩져왔다. 개인적 신앙심이 초래할지도 모를 영적 모험주의와 계시주의는 종종 교회의 권위 자체를 문제삼기도 했다. 1517년 교황청이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위험하게 여긴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121)


"가톨릭에서는 모든 신자가 교회에 소속되어야 하며 교회 바깥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반면 루터는 예수에 대한 개인의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루터의 믿음지상주의이다. 인간은 대리자나 중재자 없이 누구나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서를 읽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직접 예수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믿음지상주의는 자연스럽게 만인사제주의로 연결된다. 사제의 도움 없이 신에 대한 개별적인 믿음만으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만인은 스스로 자신의 사제이다. 만인사제주의는 성직자와 신자의 전통적인 구분을 불식시키고 나아가 모든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평등하다는 새로운 이념을 부각시켰다. 영적으로 평등해진 모든 신자를 신 앞으로 인도할 유일한 진리이자, 권위의 준거는 성서이다. 성서에 명시되지 않거나 부합하지 않는 모든 규범을 거부하는 성서지상주의는 믿음지상주의, 만인사제주의와 더불어 루터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3대 원칙이다."(125)


"중앙집권적인 권위 체계를 유지해온 교황청은 중세 내내 각국의 지배자들과 미묘한 경쟁 혹은 갈등을 벌였다. 중세 말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교회 재산을 탐낸 정치 지배자들은 교황과의 종교협약이나 신민들에 대한 강요를 통해서 자국 내의 고위 성직 임명권을 잠식해갔다. 프랑스, 영국, 에스파냐 군주정의 팽창은 교황지상주의를 퇴색시키고 국가교회주의를 부추겼다. 실제로 종교개혁 당시 세 강대국의 교회는 각각 교황청으로부터 상당한 자유를 부여받았다. 반면 제후나 도시의 과두 지배자, 혹은 주교에 의해서 지배되던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의 소규모 국가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문제가 훨씬 더 복잡했다. 교황권의 횡포가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과 경쟁관계에 있는 신성 로마 황제의 모호한 위상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이중으로 꼬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루터의 움직임은 종교적 강요와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로 여겨졌다."(138-9)


제5장 국가 만들기


"근대 초 유럽의 정치 지배자들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적극적인 정치 선전정책을 시도했다. 중세 이래 유럽 각국에서 유지되어 온 국가의례가 더욱 성대해진 것고 같은 맥락에서였다. 대관 축성식에서는 모두가 위계질서에 따라 입장하고 좌석이 배치되었다. 서열에 따라 도열한 사람들 자체가 최고 서열인 군주의 권위를 가시화시키는 무대장치 역할을 했다. 왕을 봉건적인 종주권자이자 기독교 왕국의 수장으로 추대하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종교의식이 거행되었고 모두가 왕에게 복종의 기도를 바치는 절차가 이어졌다. 이는 왕이 신의 대리자임을 확인시키고 신민의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일종의 연극 무대에 다름 아니었다." "중세 말 이후 유럽 각국의 국왕 장례식에는 죽은 왕을 상징하는 허수아비가 세워졌다. 허수아비는 신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처럼 유한한 생명체인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구불멸의 신비스런 정치체인 왕은 살아 있음을 뜻하는 무대 소품이었다."(159)


"그러나 기독교적이고 중세적 위계질서에 의존하던 국가의례들은 점차 세속적인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친림법정(lit de justice)이다. 왕이 고등법원에 왕림하는 의식절차인 친림법정은 구체적인 목적을 띤 정치 집회이다. 특히 국왕 사망 이후 개최된 첫 친림법정은 주권의 영속성이 어떻게 국가의례로 표현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1610년 5월 15일 아침, 선왕인 앙리 4세의 사망 이후 12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에 8세의 신왕 루이 13세(1610-1643)가 파리 고등법원으로 행차했다. 그는 직접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모후인 마리 드 메디치에게 섭정권을 부여하는 왕령을 공포한 뒤에 파리 고등법원에 법으로 등기할 것을 명령했다. 선왕의 승하 40일 후에 치러지는 장례식 이후에야 신왕이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관행을 깨고 신왕이 즉각 죽은 왕을 대체한 이 친림법정은 영속적이고 무제한적인 군주권의 이론을 과시하는 정치적 제스처였다."(159-60)


"실질적인 군주권의 행사를 합리화하고 이론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그러한 작업을 떠맡은 것은 법학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부여된 과제는 군주를 봉건 영주보다 우월하고 강력한 존재로 부각시키고 중세 이래 전 유럽에서 통용되던 기존의 관습법 체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 개념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장 보댕은 『국가론』에서 오랜 전쟁과 내전에 지쳐 평화와 안정을 갈구하던 대다수 가톨릭 프랑스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국왕주권론을 논증했다. 여기서 주권이란 입법권을 의미한다. 그는 권력을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 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통치권자의 능력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주권과 동의어인 국왕권은 신법과 자연법을 제외하고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한 국가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이다. 이런 점에서 보댕은 유럽 정치사에서 절대군주를 종교적 분파와 정치적 당파 위에 군림하는 왕국의 구심점으로 상정한 절대주의 이론가로 평가된다."(160-2)


"16-17세기에 유럽의 군주들은 끊임없는 반란에 직면한 동시에 국외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점차 왕령지 수입에 의존하던 중세의 재정구조에서 벗어나 조세에 의존하는 근대적인 재정국가를 향해 나아갔다.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조세제도의 정착은 요원한 문제였지만 각국의 지배자들로서는 전쟁비용 충당이라는 급박한 현실을 뚫고나가기 위해서 다양한 명목으로 세금을 신설하거나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과세동의권을 보유한 신분제의회의 역할이 중요했다. 각국의 재정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신분제의회의 반발은 거세졌다. 정치 지배자들은 무마하기 위해서 의회를 지배한 특권층과 타협했다. 다시 말해서 의회를 지배한 특권 신분층을 과세 대상에서 제외시켜줌으로써 의회의 과세동의권을 박탈하는 교묘한 정책을 썼던 것이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엘리트 층이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면세특권을 누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163-5)


"높은 조세증가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전비 증가율을 감당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간접세와 국채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일종의 재정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재정구조는 17세기에 가서야 다른 나라에 도입되었다. 대신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허덕이던 군주들은 대부라는 손쉬운 방법에 빠져들었다. 장기적인 경제 상승국면을 보였던 16세기에 군주들은 미래의 조세 수입을 담보로 비교적 수월하게 대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각국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전쟁은 국가 재정의 전환점이 되었다. 정부와의 담합을 통해서 조세 청부권을 획득한 대금융업자들은 먼저 거액의 선수금을 제공하는 대신 고리의 선취금을 공제함으로써 조세 징수액의 절반 이상을 중간에서 삼켜버렸다. 그럴수록 관리와 금융업자들은 거부가 된 반면 농민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 관직 매매의 규모도 엄청나게 확대되어 17세기 중엽 유럽에는 거대한 관직시장이 형성되었다."(167-8)


제6장 계시와 이성의 세계


"종교개혁으로 단일 기독교 왕국의 전통이 깨지고 유럽 사회는 종교적 관용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국교주의가 강화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에서 채택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재확인된 종교 선택의 기준은 정치 지배자의 종교였다. 그때부터 '하나의 신앙, 하나의 왕'의 원칙에 따라서 정치 지배자의 종교가 신민에게 강요되었고 국교주의가 지배적인 추세로 정착되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종교가 선택되고 물질적 가치에 의해서 종교적 가치가 좌우되면서 국교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비국교도가 법적으로 허용된 영국에서조차 국교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듯이 17세기 유럽사에서 국교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국교는 한 사회의 다수에게 정체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일종의 제도적 장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치사상가들과 신학자들도 교회와 국가의 결합을 인정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세력 사이의 동등한 결합이 아니었으며 세속적인 국가 권력의 무게가 압도적이었다."(193-4)


"사육제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휴식을 맛볼 수 있는 긴장 완화의 순간인 동시에 기존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종교적 재정복 과정에서 민중문화는 부도덕하고 문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개신교 지역에서는 축제 자체가 금지되었고 이교적이며 미신적인 종교관행들이 소탕되었다. 교회와 공공 당국은 미신적 종교관행들뿐만 아니라 왜곡된 결혼관행을 꼬집으며 민중층의 독자적 사회 통제방식으로 기능하던 샤리바리(charivaries)와 같은 관행도 엄격하게 규제했다. 가톨릭 지역에서는 사육제가 유지되었지만 촌락 공동체 구성원을 통제하던 신자들의 모임은 점차 종교적인 목적의 신도회로 재조직되었다." "궁정과 도시를 중심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에게 예절과 교양이라는 이름의 세속적인 윤리가 강요되고 확산되던 그 시점에 농촌과 도시의 민중층에게는 전통적인 민중문화를 통제하고 기독교를 강요하는 대대적인 도덕적 재정복이 전개되었다."(202-3)


"전문 교육기관에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은 모든 종교행위를 감독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신자들의 의무사항인 예배 참석 여부가 철저히 감시되었다. 1600년경 영국에서는 일요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 1실링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성찬식 대신 설교가 강화된 개신교에서는 설교를 통해서 신앙생활 및 일상생활에 관한 도덕적 훈계를 했다. 칼뱅교 지역에서는 여기에 철저한 도덕적 훈육체계가 첨가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임 사제가 부활절 고해성사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의 명단을 교회 문 앞 벽보에 붙인 뒤에 그들을 파문하고 장례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강제적 협박의 결과 개신교 지역에서는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구역단위의 종교생활이 일상생활에 접목되었다." "이른바 '바로크적 경건성'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1700-1730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추세가 반드시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과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유럽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204-5)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기도 했지만 1660년경이 되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같은) 새로운 과학 이론은 이미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개신교 지역의 반응은 가톨릭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자연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는 가톨릭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과학이 제시한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설명방식은 개신교와 양립 가능했다. 우주를 신에 의해서 설치된 거대한 기계로 간주한 새로운 자연관에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지만, 신은 여전히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과 계시,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를 수용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칼뱅주의는 새로운 자연관과 조화를 이루었다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발표했을 때 영국 사회는 이미 그를 지지하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환호성을 보낼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태였다."(213-4)


"엄격한 연역의 방식으로 사고하는 데카르트주의에 의하면 세계는 마음과 물질의 두 실체로 정리된다. 사상은 우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한 입자로 규정되는 물질은 수학적으로 발견되고 설명될 수 있다. 요컨대 물질 세계는 감정이나 조화, 또는 스콜라주의자들의 생각처럼 고유의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 우주의 존재를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신도 추론할 수 있다. 케플러처럼 데카르트에게도 여전히 신은 우주의 창조자이다. 그러나 신은 더 이상 피조물의 운동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은 추론을 통해서 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우주처럼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의 법칙도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의 몸도 추론될 수 있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움직이는 물체를 기계구조로 설명함으로써 기계론적 우주관과 유물론의 발전에 기여했다."(216-7)


제7장 세계 속의 유럽


"유럽이 해외로 팽창하려면 우선 그런 항해가 가능할 정도의 기술적 준비가 필요하고, 동시에 해외로 적극적으로 나가도록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흔히 지적하는 기술적 발전 요인으로는 배의 방향을 잘 조정할 수 있는 중앙타(中央陀)의 발명, 배의 외피를 탄탄히 만드는 겹쳐잇기 기술, 그리고 배의 방향을 잡는 데에 유용한 삼각범과 풍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사각범을 한 배에 함께 사용하는 범포 사용의 개선을 든다. 이와 함께 항해 지도의 발전과 나침반 사용의 확대, 또 아스트롤라베(astrolabe)와 같은 관측기구의 개발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이런 것들이 대개 아시아에서 들어온 수입 기술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기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항해에 관해서도 유럽은 자신이 먼저 개발하여 다른 지역에 제공하기보다는 다른 문명권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컸다. 자체 개발에는 뒤쳐졌더라도 수입 기술들을 더 개선하여 잘 이용하는 능력이 유럽이 가진 강점이었다."(226)


"그렇다고 이런 기술적 개선이 꼭 해외 팽창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걸고 그 위험한 원양항해를 감행하도록 추동한 어떤 힘이 있어야 한다." "사실 유럽인들은 중세 내내 아시아로 찾아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권 유럽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슬람 문명과 대치했으며, 언젠가는 이슬람 세력을 패퇴시키고 정복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권 배후의 세력과 제휴하여 양쪽에서 이슬람권을 협공한다는 낭만적인 꿈도 품고 있었다. 11-13세기에 전반적으로 유럽의 힘이 증가하자 이슬람권에 계속 압박을 가했는데, 이는 크게 두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동방의 이슬람권을 공격한 십자군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8세기 이래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려는 소위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지속된 이슬람권과의 투쟁은 근대 초에 유럽이 해외로 나가고자 할 때에도 여전히 강박적으로 지속되는 요소였다."(226-7)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구축한 상업 거점 제국은 1590년대까지 다른 유럽 세력의 방해 없이 유지되었다. 다른 나라 상인들로서는 포르투갈이 들여온 아시아 상품의 유럽 내 도매 거래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굳이 포르투갈의 방해를 뚫고 들어가서 아시아 항로를 직접 개척하는 힘든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찾아온 계기는 1580년에 정치 상황의 급격한 변화로 포르투갈 왕실이 에스파냐 왕실에 합병당한 사건이다. 이후 1640년까지 60년 동안 포르투갈이 독립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사이 아시아 상업 네트워크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에스파냐는 기존의 아시아 상품의 도매 거래방식에 영향을 미쳐서 자국에 적대적인 대상인들에게 도매 거래 참여를 제한하려고 했다. 특히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실과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는 아예 상품 판매를 거부했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직접 아시아로 가는 항해 루트를 개척하고자 했다."(234)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여오는 상품으로는 후추를 비롯해서 정향과 육두구, 계피와 같은 향신료가 대종을 이루었다. 중세에는 이 상품들이 모두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지만, 대양항해의 발전으로 대량 수입되자 가격이 크게 떨어졌고, 따라서 유럽 내 판매 수익성도 떨어졌다. 이제 아시아 교역에서는 직물, 차와 커피, 도자기와 같은 신상품들의 비중이 더 커졌다. 그 결과 교역 지역도 전통적인 향신료 산지보다는 인도나 중국처럼 새로운 교역 상품의 산지로 중심이 이동하게 되었다." "17세기 전반기만 해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총체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밀렸으며, 특히 이때까지도 모든 유럽인들이 찾아가고자 했던 후추와 향신료 산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던 인도네시아에서 밀려난 것이 큰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 상인들은 할 수 없이 인도로 향했는데, 역설적으로 이것이 후일 영국이 다른 유럽 세력을 누르고 아시아 식민지 교역에서 우위를 차지한 시발점이 되었다."(236-7)


"18세기 전반기에 극적으로 팽창한 영국 동인도회사가 사업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첫 계기가 된 상품은 인도 면직물이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도 값이 저렴한 인도의 면직물은 원래 아시아 상업 세계에서도 이미 대단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그 때문에 현지의 생산자들과 상인들이 면직물 거래를 장악하고 있어서 동인도회사로서는 아시아 시장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수익을 얻기가 힘들었다. 영국인들이 생각한 혁신적인 방안은 이 직물을 유럽에 수입해서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순면직물에 익숙하지 않던 유럽 소비자들은 처음에 이 직물을 벽 가리개 같은 용도로 사용했지만 결국 면직물 의류의 장점을 알게 되면서, 곧 수요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유럽 내 다른 직물업을 위기로 몰아넣을 정도로 면직물 수입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기적으로는 영국에서 인도 면직물 수입을 대체하기 위한 방안을 찾다가 기계혁명이 일어났고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또다른 역설적 결과이다."(238)


"미지의 해역을 탐험하는 해상 활동은 18세기에 들어서 항해술의 발달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에는 크로노미터의 개발로 원양항해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던 경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특히 1763년 이후 평화 시기에 유럽 선박의 해양 탐사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해상 여행은 과학적 탐구 목적을 강조하는 특징이 강했다. 각국의 해양 탐사선에는 지리학자, 천문학자, 자연사학자, 의사 등이 승선하여 각종 관찰과 실험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가 국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제 과학은 실제적인 의미로나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으로나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로 여겨졌다. 18세기 후반에 영불전쟁이 재개된 것도 이런 현상을 막지는 못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각국의 해양 탐사는 태평양에 집중되었다. 특히 남태평양을 탐험하고 여행기를 쓴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은 '선한 야만인(bon sauvage)'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256-7)


제8장 근대 국가체제의 성립


"30년전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오스트리아는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제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격이 다른 수많은 정치체들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라는, 화해하기 힘든 종교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어 중동부 유럽에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내심으로는 이것을 넘어 유럽 전체를 복속시켜서 대제국을 건설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일개 지역 내부의 종교 문제로 시작된 전쟁이 결과적으로 17세기 판 세계대전으로 비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을 일단락 짓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황제의 원래 목표였던 독일 전역에 대한 종교, 정치적 통일 제국 건설의 꿈을 결정적으로 좌절시켰다. 이 전쟁에서 동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서쪽의 에스파냐라는 양대 세력과 전쟁을 벌여 우위를 지킨 프랑스는 국제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고, 다음 시대인 루이 14세 시대에는 절정기를 누리게 되었다."(263)


"30년전쟁의 또다른 패자는 에스파냐였다. 속국이었던 네덜란드가 독립국이 되어 떨어져 나갔고, 아르투아와 루시옹 지역을 프랑스에 상실했으며, 1580년 이후 합병했던 포르투갈이 다시 독립했다. 에스파냐는 이제 명백하게 강대국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강국으로 떠오르는 나라로는 우선 영국이 대표적이다. 중세에는 유럽 변방의 후진국에 불과했던 영국은 16-17세기를 거치면서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어갔고 국제적으로도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서 점차 유럽 내의 정치, 군사 문제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네덜란드 역시 독립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북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가장 뚜렷한 결과는 프랑스가 유럽 내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루이 14세가 성년이 되어 친정(親政)을 시작할 무렵 프랑스는 영토가 더욱 넓어졌고, 각국에 친프랑스적 세력을 유지했으며,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프트파워 면에서도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273-4)


"1600년의 유럽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양대 강국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형국이었고, 1660년대로부터 1680년대까지는 프랑스가 우위를 누리던 시대였다. 그러나 1714년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어느 국가도 헤게모니를 차지하지 못하는 균형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로서는 릴, 스트라스부르, 브장송 같은 일부 영토를 얻고 국경의 취약성 문제를 보강했으며, 무엇보다도 합스부르크의 포위를 결정적으로 깼다는 점이 중요한 성과였다.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의 우위가 점차 확고해졌다. 그러나 태양왕이 유럽을 주도한다는 꿈은 깨졌다. 동시에 프랑스의 적들도 약화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를 밀어내면서 영토를 확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정치적 통합성은 부족했다. 영국은 일류 강국으로 발전해가고 있었고, 특히 해양과 식민지 분야에서 강세를 이어갔다.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지나서 이제 내리막길로 들어섰으며, 오랫동안 국제 분쟁에 끼어들었으나 결국 얻은 것이 없었다."(282-3)


"16-18세기 유럽 국제관계의 발전 양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는 전쟁이었다. 각국은 서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군사력을 최대한 키워나갔고, 이 과정에서 이전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군사발전을 이루었다. 이를 '군사혁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통상 군사혁명은 무기의 발전, 군대 규모의 증가, 대규모 복합전술의 사용, 사회에 대한 군대의 영향 증가 등 네 가지 요소의 발전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 유럽의 군사력 발전은 명백하게 이러한 양태를 보였다. 다만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발전을 거듭하고 또 그런 국가들 사이에 합종연횡의 관계가 맺어지자, 어느 한두 국가가 나머지 국가들 모두를 군사적으로 누르고 정복을 완수하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해졌다. 군사 경쟁이 매우 치열하면서도 최종적으로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자 유럽 내부적으로는 세력 균형 상태가 형성되었고, 그렇게 누적된 강력한 군사력이 유럽 외부로 향하게 되어 식민주의를 낳게 되었다."(283)


제9장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부르주아들이 단지 구체제의 소유 및 과세 체계에서 기생적인 중간자나 통치 관료제의 구성원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다른 한편에 서유럽에는 상업적 내지 자본주의적 엘리트 및 더 수가 적은 전문직업인 내지 지적 엘리트가 존재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가능하다면 자본을 장기간에 걸쳐 묶어두지 않으면서 약삭빠르게 투자하여 이윤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는 '움직이는 돈'이었고, 토지 자산이나 연금으로부터 수입을 축적하는 것과는 달랐다. 생활방식도 귀족의 그것과 달랐다. 그들은 사회적 인정의 추구와 안락함의 외적인 장식을 검약이라는 고전적인 부르주아 가치와 결합시켰다. 이것은 '검약과 동시에 계산된 사치'의 생활방식이었다. 이들 가운데 최부유층은 생업에서 은퇴하고 귀족적인 삶을 영위하며 자녀를 귀족으로 진입시켰지만, 많은 가문들은 생업을 대대로 영위했다. 상업 회의소와 다른 상인조직을 결성했던 상인계층은 도시 문명의 특징적인 구성요소였다."(312)


"동업조합의 상태는 직종에 따라서 상당히 달랐다. 번창하는 업종에서 직인은 귀찮게 장인권을 얻지 않고서도 청부일을 맡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관행은 공장과 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 바늘, 제화, 가구 제조 업종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19세기에 이것은 '고한노동(苦汗勞動)'으로 알려지며, 경쟁이 심해서 생산의 질만이 아니라 노임 단가도 떨어져 장인층의 처지가 매우 열악했다. 다른 형태의 도시 생산은 양말과 견직업과 같은 산업에서 발견된다. 직인과 도장인은 상인에 대해서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졌다. 도장인은 직기와 작업장을 소유한 덕분에 여전히 직인과는 달랐으나, 양자 모두 상인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리옹의 견직물 산업이 보여주듯이, 노동의식은 이런 곳에서 날카롭게 나타났다. 이들은 끊임없이 노임 단가를 낮추려는 상인들에 맞서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이는 숙련 노동을 덜 요구하는 직종에서 장인들이 사실상 단순한 노동자, 곧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과정이었다."(314-5)


"노동자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계급의식을 결여했지만 그러한 종속을 언제까지나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투쟁의 대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임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용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예컨대 18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파업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빵사, 목공, 인쇄공 등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대부분은 단명하고 실패했지만, 일부는 잘 조직되어 파업기금을 갖추고 가담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배제했다. 고용 문제를 둘러싸고 파업이나 '비밀결사'가 터져나왔다. 직인조합을 직업소개소로 인정하지 않는 도장인들은 배척을 당했다. 소요는 재무총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국왕을 설득하여 1775년에 일시적으로 동업조합을 폐지했을 때에 특히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파업과 노동자들의 결사는 예외적이었다. 직종에 관계없이 남녀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은 임금이나 노동 조건보다는 빵 값의 상승 때문이었다."(316-7)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외부의 혁신에 일치하여 반대했다. 작물과 경작법의 선택에서 그들은 관습에 집착했다. 그 결과는 비참할 정도로 낮은 수확률이었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생산성을 낮을지 모르나 모든 농민의 생존과 독립을 보장하는 평등주의를 보여주었다. 소보유지의 유용성을 믿는 농민들은 귀족 영주, 부농, 도시 부르주아에 의한 대농장의 형성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촌락 공동체는 사적 소유권을 선호했지만 전통적인 소규모의 한계 내에서 그러했다. 그것는 반영주적이지만 또한 반자본주의적이거나 반개인주의적이었다." "무거운 부담이 수확의 많은 부분을 앗아갔기 때문에, 농민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생산한 것을 되사야 했고 이를 위해서 종종 부수입을 올리거나 돈을 꾸어야 했다. 이것은 필사적인 투쟁이었다. 공동체는 보호막 구실을 하면서 농민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지탱해주었다. 사실상 그들에게 불안에 맞서 전통에 집착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인 듯 보였다."(322-3)


"18세기에 극적으로 증가한 빈곤은 그 성격 또한 변했다. 빈곤은 우선 기근, 전염병, 전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았다. 반면에 농촌 및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만성적으로 영양실조 상태였다. 이들은 결혼을 함으로써 빈곤을 세습했다. 빈곤의 자기증식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당대인들이 실제로 본 것은 일반적인 빈곤이 아니라 그것이 표출된 '적빈(赤貧)'이었다. 양자의 차이는 재난의 위협과 그것이 실제 일어난 것의 차이다. 당시 전형적인 농민 가족은 기본적으로 빈곤 속에 살았다. 그러나 흉작이나 가장의 중병이나 사망 등 불운이 닥치면 그 가족은 적빈의 상태로 추락하기 십상이었다. 농촌과 도시에서 빈곤과 적빈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했다. 적빈자는 종속 상태로 떨어지거나, '일탈 행위'로 빠져들었다. 자선과 구제는 부적절했고 사실상 처벌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적빈 인구의 대부분이 길거리로 나와 부랑자가 되었고 구걸, 좀도둑, 뜨내기일 등 하루살이 인생을 살았다."(328-9)


제10장 산업혁명을 향하여


"이른바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산업상의 질적 변화는 불가피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국가의 역할과 시장의 존재이다. 강력하고 안정적인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효과적인 전쟁도구나 국내 폭력의 독점자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계급관계의 적극적인 조정자인 동시에 공공성을 담보해야 한다. 실제 18세기에 오면 일부 국가는 상비군, 조세체제, 전문적 관료제, 공공재정 등을 발전시켜, 근대 초 군주들의 오랜 관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울러 중세 이래 형성된 무수한 제도적, 법적 특권의 틈새로부터 점차 시장이 발달하여 토지, 노동, 자본을 더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봉건적 잔재의 장애물을 넘어 더 쉽게 만나도록 해주었다. 강력한 국가와 역동적인 시장은 경재행위를 예측할 수 있는 사회적 틀을 마련하여 경제적 실험이 가능하고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환경을 창출했다."(364)


"현재의 지식 상태에서 가장 그럴듯한 결론은 농업혁명이나 상업혁명 같은 요소들을 유럽의 다른 지역이나 나라가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잉글랜드가 그 모든 것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잉글랜드에서 물품을 생산하는 더 좋은 방법을 고안한 사람들은 기득권 집단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필요한 자본, 노동, 토지를 가능한 가장 싼 값으로 필요한 양만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산품을, 투자된 자본과 실험의 위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가격과 양으로 팔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새 발명은 언제나 프랑스인이 고안하지만 결국 그것을 실용화한 것은 영국인이라고 한 당대인의 지적은 새겨둘 만하다. 기술사가들이 '거시혁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속출했지만, 그것을 산업현장에서 써먹으려면 하급 기술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미세조정'이 있어야 했는데, 바로 잉글랜드의 제반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365)


"그러나 영국에서조차 산업조직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주요한 발명은 천재 발명가에 의한 탁월한 발견이라기보다는 이미 생산에 이용되고 있던 기술을 독창적으로 적용한 결과일뿐더러, 그것이 산업현장에 적용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더욱이 기계의 등장이 불가피하게 공장 생산을 이끈 것도 아니었다." "공장의 발전은 적어도 처음에는 기술적 요구와 큰 관련이 없었다. 제조업자들은 일출과 일몰, 계절적 변화의 시간 흐름에 익숙해 있는 노동자들에게 공장 노동의 규율을 부과하여 그들을 더 쉽게 감독하기 위해서 한 지붕 아래로 집중시켰다. 그들의 목표는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실수를 범할 수 없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선술집, 맥주집, 커피집에 있고, 아침이나 저녁을 먹고, 놀고, 자고, 담배 피우고, 말다툼하거나 업무와 무관한 일을 하고, 아무 까닭 없이 늑장을 부린다〉는 이유로 임금을 삭감당했다."(367)


"농업 및 산업의 생산성 향상이 상업비용의 감소와 결합하면서, 값싸고 다양한 소비재를 빈민들이 구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인구의 더 많은 부분, 특히 도시민들이 소비재를 구입하여 물질주의의 태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유욕 내지 획득욕은 단지 경제적 동기에서만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설에 의하면, 낭만적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진 근대 소설의 발전과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특유하게 근대적인 쾌락주의의 대두는 '소비혁명'의 정서적 배경을 이룬다. 중세 이래 도덕적으로 경계해야 할 탐욕 가운데 하나인 '물욕'을 표현하기 위해서 17세기부터 중립적인 '이해관계(interest)'라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소비혁명'이 '근대성'의 창출이라는 더 광범위한 현상의 한 부분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18세기에 서유럽과 기타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소비혁명'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이었으며 유럽 전체에 보편적인 것도 아니었다."(373-4)


"소비혁명의 도래가 뜻하는 바는 유럽이 근대 경제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자본집약적인 방식으로 더 많은 제품을 더 싼 값으로 대량생산하는 산업혁명이라는 '공급'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도시 소비자들이 더 많고 다양한 종류의 재화와 용역을 요구하는 '수요'의 측면에서도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즉 증기기관과 기계 그리고 공장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장인이나 기타 노동자들이 일했던 가내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산업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근대 경제 성장이 생산의 규모, 기술의 사용 또는 투자 등에서의 혁신 못지않게 단순히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비주의의 발견은 자본주의가 생산에 대한 투자만이 아니라 탐욕스런 이윤의 추구를 함축하며, 아울러 어떻게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장악해 들어갔는가, 아니 관점을 달리 해보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가치체계를 비록 일부나마 수용하게 되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378-9)


제11장 18세기의 문화와 계몽사상


"성공회와 특히 루터파 교회는 17세기 중엽이 되면 초기의 종교적 열정이 쇠퇴하고 군주들의 활기 없는 조력자로 떨어져 신도들의 영성에 대한 열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런 공백을 메운 것이 독일의 경건주의(Pietism)와 영국의 감리교(Methodism)이다. 경건주의는 17세기 말부터 약 1세기 동안 영향을 미쳤는데,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던 독일에서 뜻하지 않게 민족주의 감정의 운반자가 되었다." "1670년대에 출현한 '경건파'는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과 루터파 교회의 계서제에 실망하여 개인의 양심과 우위에 대한 종교개혁 당시의 믿음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이들은 신에 대한 더 열렬한 개인적 헌신('경건성')과 활발한 자선활동('선업')을 옹호하고 실천했으며, 속인이 종교생활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8세기의 마지막 사분기에 이르면 경건주의의 영향은 약화되었다. 이는 계몽사상의 확산과 함께 루터파가 국교로서 독일 북부의 국가들에서 대학을 장악했음을 반영한다."(384-6)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믿어 만인이 신 앞에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종교적 열정을 공동체적 관행과 결합시키려고 했다. 웨슬리 자신은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감리교의 정신적 평등주의는 지배층의 비위를 거슬렀다. 세기말에 이르면 영국 성공회도 감리교의 자극을 받아 하층민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 한 해석에 따르면, 감리교는 영국의 일반 민중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감리교는 정치나 경제에 관한 급진적인 교리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사실상 정신적 평등과 우애를 촉진했고, 그 결과 영국이 1790년대의 혁명기에 사회, 정치적 격변에 처하는 것을 막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감리교 복음주의는 영국 사회의 동력인 동시에 안정화의 힘이었다. 이제 감리교를 통해서 사회의 저변인 하층민도 검약, 노동, 음주와 도박의 절제, 자기수양 등의 덕목을 배우는 동시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내면화했다. 기독교는 18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활력을 가지고 있었다."(386-7)


"교회의 후퇴가 전적으로 계몽사상의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계몽사상을 포함하는 더 큰 역사적 흐름의 희생자였다. 먼저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행했던 많은 영역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기 교회사의 최대 사건인 '예수회의 몰락'이 가톨릭 국가 가운데 가장 몽매하다는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었음은 시사적이다." "예수회는 가톨릭 종교개혁을 일으켜 '바로크적 경건성'을 이룩한 핵심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예수회의 해산은 각국에서 대학과 중등교육의 재조직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러나 관용과 세속화, 심지어 이신론(理神論)이나 무신론의 표출조차도 종교의 후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도로서의 교회 및 교권주의의 영향과 중요성을 기본적으로 약화시키거나 이 약화를 반영하는 계기임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기독교가 그만큼 하층민의 마음속까지 장악하여 실질적으로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차라리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388-9)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지식은 인식의 대상이나 주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중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이었다. 이는 개인의 의식을 지식과 행동의 절대적인 근원으로 간주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이제 개인은 합리적 판단에 입각하여 공동선에 부합하는 규칙을 파악할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계몽을 통한 진보의 가능성을 신뢰했기 때문에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즉각적인 체제비판으로 이끌지 않아 실제로는 온건했다. 그들은 당시의 사회가 부패했다고 보면서도 그 원인이 구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기보다는 개인의 무지, 편견, 공포에 있다고 보아 지식의 보급을 통해서 이를 얼마든지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유를 파괴하는 전제주의와 교권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했으면서도 정작 개혁의 구체적인 방략에 직면해서는 교육자나 입법자, 심지어 계몽군주에 의탁하기 십상이었다. 결국 계몽사상으로부터 그 논리적 귀결을 이끌어내는 일은 후대의 몫이 되었다."(403-4)


"후기 계몽사상은 전성기 계몽사상의 확산이자 새로운 방향 모색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의 교리가 나타났다. 독일에서 철학자들은 합리성과 자연법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졌다. 인간 자유의 지표는 이제 이성의 행사가 아니라 감성의 표현이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민족문화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테르나 루소가 사라진 프랑스에서 철학자라 자칭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군주제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선배들의 공론장이 살롱이었다면, 3세대 '철학자들'은 싸구려 카페를 드나들고, 집세가 싼 높은 층에 살고, 자주 주소를 바꿔 채권자들을 따돌리면서, 국왕의 검열이 출세를 방해한다고 떠들어댔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경제적 자유의 요청, 민족문화의 뿌리의 추구 및 감성적 수용을 통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 관념론의 대두, 여론의 발전, 특히 프랑스에서 군주제를 공격하는 출판물의 생산 등은 모두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에 이바지했다."(413)


제12장 정치와 국제체제, 1715-1789


"유럽의 군대는 이미 1700년에 수적으로 최고치에 달했고 18세기를 통해서 이 수준을 유지했다. 1710년에 유럽에는 최소한 100만 명의 군인이 있었으며, 당시 최대 군사강국인 프랑스는 적어도 30만 명의 군대를 거느렸다. 아울러 신형 머스킷총이 도입되었고, 전투의 규모와 강도도 커졌다. 이제 국가 이외에 이런 규모의 군대를 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는 없었다. 이 시기의 군대는 아직 국민군도 아니고 개병제도에 입각한 징집군도 아니었지만, 국가는 군대를 직접 무장시키고 관리하는 책임을 졌다." "나라마다 특징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양상은 명확했다. 나라는 살아남으려면 징집이든 직업군이든 육군과 해군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해당 영토의 주민들에 대한 수취능력을 증대시켜야 했다. 그렇지 못한 나라는 전장에서 패배하여 흡수당했다. 18세기의 폴란드, 19세기의 작센과 바이에른이 그러했다. 그 어떤 유럽 국가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18세기에 평화국가란 있을 수 없었다."(430)


"18세기 후반기의 유럽 국제체제에는 약탈적 세력 균형의 원리가 작동했다. 어느 한 나라가 이익을 얻으면 다른 나라는 '보상'을 요구했고, 다른 나라의 정책 탓에 한 나라가 손실을 입으면 '배상'을 요구했다. 협상의 당사자는 좁게 정의된 동맹관계의 구성원으로 한정되었다. 국가 이성의 논리가 지배하여 영토 확장이 노골적으로 추구되었지만, 적어도 5개 강대국(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사이에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국가군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강대국 위주의 세력 균형원리는 특히 소국에게는 난폭했다.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간주되어 빈발했다. 강대국들은 노골적인 점령과 보상 그리고 배상을 통해서 노획물을 챙기는 과정에서 중간에 있는 소국들을 희생시키곤 했다. 이탈리아의 제후령들은 열강들의 거래 대상이 되어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극단적인 예로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452)


"1740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1711-1740)가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의 위기로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맏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영토를 그대로 물려주기를 원해 죽기 전에 열강에 양보와 예방 조치를 취했으나, 그가 죽자마자 주변국들은 오스트리아의 약세를 예상하고 침입했다." "결국 전쟁은 아헨 조약(1748년)으로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는 건재하고 프로이센이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영국은 식민지를 확대했으나, 프랑스는 승전에도 불구하고 저지대 지역을 되돌려주어 별무소득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은 세력 균형에 입각한 국제질서의 약탈적 성격과 전투의 승패가 전쟁의 향배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잘 드러내준다. 당사국들은 영토 획득의 야욕 때문에 외교적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고, 단기이익에 급급하여 진영을 마구 바꿨다. 결국 지루한 외교전이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전쟁은 열강들의 분쟁거리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더 큰 전쟁을 부를 불씨를 남겼다."(456-7)


"7년전쟁은 두 경쟁관계의 충돌이다. 하나는 대륙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숙적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이다. 그리고 제3의 요소로서 강대국 러시아의 중서부 유럽 진출을 꼽을 수 있다. 1750년대에 들어 긴장이 고조되자 놀랍게도 외교혁명을 통해서 동맹관계가 재편성되었다. 영국과 프로이센의 접근이 나타나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1756년에 동맹을 결성했고, 러시아와 스웨덴이 이에 가담했다. 세력 균형원리의 역동성 내지 가변성이 명쾌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7년전쟁의 결과는 심대했다. 프로이센은 압도적인 적대세력과 맞서 건재를 과시했고, 오히려 위상이 강화되어 전후에는 군사개혁의 모범이 되었다. 프로이센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부상을 도왔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경쟁의 심화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폴란드, 일부 독일 지역에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58-9)


제13장 근대 세계를 향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기능은 18세기에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따라서 그 어떤 나라도 정상적인 조세 수입으로 전비를 즉각 충당할 수 없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정부는 우선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하여 공채를 발행했고, 차후에 채권자들에게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갔다. 정부는 당연히 채권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이 귀족이나 부르주아와 같은 유산자층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특히 18세기 후반에 거의 항상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정부의 부채는 엄청난 규모로 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쟁의 승자였던 영국도 그러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프랑스보다 조금 많았지만 인구가 프랑스의 거의 3분의 1에 불과했던 영국이 받은 재정적 부담은 프랑스와 비교하여 오히려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서 영국은 7년전쟁 이후에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종전의 방임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실시하여 결국 미국 혁명을 불러왔던 것이다."(469)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모든 국민들은 주권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는 '국가 간 체제'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억지로라도 국민국가를 빚어내야 했다. 혁명은 모든 인간의 기본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것은 오직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즉 특정국가의 시민인 경우에만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789년의 '인권선언'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구분했다. 프랑스 혁명은 분명 '인권의 혁명'이지만, 식민지인들에게 그것은 동시에 제국의 거푸집을 지녔다. 프랑스와 유럽은 전 주민에게 자유를 주어 역동적인 정치 공동체를 이룩하는 한편, 국내에 있던 예속과 억압을 해외로 수출한 셈이었다. '아이티 혁명'(1791-1804)이 보여주듯이, 이제 전 세계 식민지의 피압박민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배우면서도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졌다. 여기에서 근대 세계의 구축은 프랑스 혁명의 계승이자 극복이었다."(479-80)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의 국제체제와 군사체제, 그리고 전쟁의 실제 양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약탈적인 세력 균형의 국제정치가 더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공정한 '유럽의 협조체제'로 이행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적어도 유럽 내에서는 차후 40년간 열강 사이에 전쟁이, 그리고 한 세기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는 분명 유럽에만 국한시킨다면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열강들은 결국 국제체제가 장기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형평성을 가져야만 개별 국가의 이익도 충족될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이는 체제 내에서 자신의 즉각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합당한 이익도 보장해줌을 뜻한다. 유럽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근대 국제질서의 초석을 놓은 뒤에도 2세기에 가까운 엄청난 소모전의 희생을 거치고서야 스스로 '국제법의 원리'라고 부르는 높은 수준의 국제정치관에 이르렀다."(486-90)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국가의 영향은 프랑스의 정복을 훨씬 더 넘어섰다.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의 노예 반란은 아이티 혁명(1791-1804)으로 도약하여 최초의 자주적인 흑인국가인 아이티를 탄생시켰다. 위대한 '검은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의 군대는 (1794년에 아이티로 진군해 들어온) 거의 10만 명에 가까운 영국군을 붙잡아둠으로써 유럽에서 혁명의 진전을 도왔다. 혁명정부가 승인한 노예 해방을 1800년에 나폴레옹이 뒤엎으려고 했을 때, 흑인 노예군은 제국군을 물리쳐 나폴레옹의 식민제국의 꿈을 무산시켰다. 프랑스 혁명의 충격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먼 거리를 움직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에스파냐 점령은 라틴아메리카의 반란을 촉발했다. 노예무역의 교란과 멕시코 및 페루에서의 은 생산 중단은 서아프리카와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변화의 파장을 일으켰다. 남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 사이의 충돌과 유럽 정주 공동체 내에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주변 아프리카 왕국에 연쇄효과를 일으켰다."(491)


"영국은 아일랜드가 1798년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지배체제를 강화시켰다. 아울러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는 1812년에 '영미 전쟁'을 불러왔고, 영국은 캐나다를 재편했다. 아시아에서 영국은 인도에 대한 침투력을 높여갔고, 나폴레옹과 동맹관계에 있던 네덜란드 바타비아공화국의 동인도를 침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유럽 열강의 군사적 활력과 공세는 아시아의 제국들이 품고 있던 내적 모순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를 빼앗겼고, 러시아의 군사적 압력에 시달렸다. 무굴 제국의 인도와 중앙 아시아는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서 분할되었다. 심지어 먼 태평양에까지 혁명은 간접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대륙 봉쇄는 영국의 포경업자와 부랑자들이 고래 기름을 찾아 남태평양까지 진출하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의 형사(刑事) 식민지 및 선교 거점이 되었던 것은 영국 내외의 혁명적 충돌이 가져온 여파의 결과물이었다."(491-2)


"혁명과 제국의 외양을 한 새로운 국가는 모방자와 함께 반대자를 낳았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의 정복은 18세기의 맹아적인 애국주의를 근대 국민국가를 위한 묘판으로 변형시켰다. '혁명적 제국주의'가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우고 강화시켰던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는 프랑스 신문을 통해서 이탈리아와 자유를 배웠다. 그는 처음에는 혁명의 보편적 자유에 관심을 가졌다가 곧 단테와 지오토의 고국인 이탈리아 조국의 영광을 운위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대항하는 가운데 차르 및 정교회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1812년 전쟁에 참전한 농민들은 애국자가 되었다. 괴테는 1793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독일 국민에 주목했다. 심지어 이미 국민적 정체성이 강했던 영국이나 미국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 속에서 폭넓은 대중적 성격을 갖추었다. 트라팔가르와 워털루의 승리, 그리고 영국 해군에 의한 수도 워싱턴의 방화사건은 양국에서 민족감정을 크게 강화했다."(493)


"나폴레옹은 유럽을 재조직하는 데에서 왕조나 전통보다도 민족이나 인종을 강조했다. 그는 제국을 세우면서도 왕권신수설에 의존하지 않고 혁명의 원리를 체현했다고 주장했다. 국가 이성이 근대화에의 호소와 결합했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에서 폴란드나 아일랜드와 같이 국권을 상실한 인민의 지도자들은 장차 새 국가 건설의 토대가 될 민족의 예언자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 인도, 실론 등지에서 혁명전쟁과 제국주의는 이제껏 유동적인 애국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종종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시켰다. 이런 새로운 민족성의 원리는 오직 새 국가의 설립을 통해서만이 충족되는 것이어서 반제국주의의 속성을 가지면서도 결국 유럽이 주도하게 되는 근대 국가체제를 강화시키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 해방의 계기가 국민국가를 통해서 작동하게 되는 근대 세계가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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