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1 -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제2판 근대세계체제 1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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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중세적 서곡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생겨난 유럽 세계경제(European world-economy)는 제국은 아니었지만 대제국만큼이나 넓었으며 제국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세계에서는 실로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사회체제였으며, 바로 이 점이 근대 세계체제(modern world-system)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것은 제국, 도시국가, 민족국가 등과 달리 경제적 실체이지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범위 안에 제국들, 도시국가들, 그리고 이제 막 등장하는 〈민족국가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세계〉 체제이다. 그것이 전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사법상 규정된 어떤 정치적 단위보다도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체제의 부분들 사이를 잇는 기본적인 연결점이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세계경제〉이다. 비록 문화적 연결점에 의해서, 그리고 정치적 편제와 심지어 연합적 구조들에 의해서 그러한 연결점이 어느 정도 공고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33)


"그 이전에도 세계경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같이 제국으로 변형되었다. 근대 자본주의와 근대 과학기술의 발달로, 근대 세계경제가 통일된 정치구조를 출현시키지 않고도 번영하고 생산하고 팽창하는 일이 불가능했더라면 이 세계경제 역시 마찬가지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모르며, 그렇게 될 것 같은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자본주의가 하는 일은 더 많은 이윤을 내는 (적어도 장기적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내는) 잉여 착취의 다른 원천을 제공하는 일이다. 제국은 공납을 거두어들이는 기구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는 정치적 힘이 독점적 권리(혹은 그에 가까운)를 확보하는 데에 이용된다. 국가는 그 자체가 주된 경제활동 주체이기보다는 남의 경제활동 안에서 특정한 거래조건을 확보하는 수단이 된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시장의 작동은 (자유로운 작동은 아니지만) 생산성을 높이는 유인들과 근대 경제의 발전에 따른 모든 부수 효과를 창출한다. 세계경제는 이러한 과정들이 일어나는 무대이다."(34-5)


"한 체제로서의 봉건제를 교역과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어느 시점까지는 봉건제와 교역의 확장이 서로 제휴하여 나아간다." "그렇지만 봉건체제는 지역 내 교역과 반대되는 원거리 교역에서는 오직 한정된 교역량밖에는 지탱하지 못했다. 이것은 원거리 교역이 대량 적하물의 교역이 아니라 사치품 교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격차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 정말로 부유한 자들의 정치적 방종과 경제적 능력에 의존한 교역이었다. 원거리 교역 자체가 일부 대량 적하물 교역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확대 생산의 과정을 촉진하는 것은 오직 근대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생산이 확대될 때에만 가능하다." "주요 경제활동은 여전히 소규모 경제영역 내에서 거래되는 식료품 생산과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활동의 규모가 서서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양한 경제적 중핵들이 팽창했다. 새로운 변경지역의 토지가 경작되고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었다."(40-2)


"그런데 14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이 팽창이 끝났다. 경작면적이 줄어들었다. 인구가 쇠퇴했다. 그리고 봉건적 유럽 전역에 걸쳐서 또 그 너머까지 전쟁과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두드러지는 어떤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농업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고 있던 이 시기에는, 도시의 임금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공업제품의 가격도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 역시 인구 감소로 야기된 노동력 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다시 지대를 감소시키는 한편(명목상의 물가는 올라가고 있는데 지대는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한), 농업노동력의 비용을 상승시켰다." "중앙 당국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더 어렵고 당국이 유지해주는 질서의 혜택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길 정도로 장원 영주들이 미약한 처지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중앙기구의 강화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14-15세기의 경제적 어려움과 영주들의 수입 감소가 빚어낸 상황이었다."(42, 49, 53)


"콩종크튀르의 거대한 압력 속에서 이제 유럽이 발전시키고 또 지탱하게 된 것은 잉여 전유의 새로운 형태, 즉 자본주의 세계경제였다."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립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들이 필수적이었다. 즉 해당 세계의 지리적 규모의 확대, 그 세계경제의 서로 다른 생산품과 서로 다른 지역에 적합한 상이한 노동 통제 방식의 발전 그리고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핵심국가가 될 곳에서의 비교적 강한 국가기구의 창출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것은 첫번째 것의 성공 여부에 주로 달려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영토 확장은 〈봉건제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이론적으로 관건이 되는 필요조건이었다. 영토 확장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상황은 상당히 지속적인 무질서와 한층 더 심각한 수축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어떻게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붙들게 되었는가? 그것을 붙든 것은 또는 적어도 앞장을 선 것은 유럽이 아니라 포르투갈이었다는 것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이다."(66-7)


# 콩종크튀르conjoncture : 페르낭 프로델은 인구, 물가, 임금 등과 같이 주기적으로 변동하는 것을 콩종크튀르라고 하여, 그 시간지속을 장기지속과 사건적인 짧은 시간 사이의 중기적 시간으로 본다.


"14-15세기 영주계층의 수입 감소라는 문제를 상기해보자. M. M. 포스턴은 그 결과 나타난 영국 귀족들의 행동을 〈악당행위(gansterism)〉라고 불렀는데, 말인즉 소득수준의 감소를 메우기 위하여 불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현상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폭력행위의 한 형태가 바로 팽창이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 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봉건귀족들은 자기 토지에서의 소득이 줄어드는 경우,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토지를 더 많이 가지려고 적극 노력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기대할 만한 수준까지 실질소득을 다시 끌어올리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왜 포르투갈이 해외로 팽창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은 그렇지 않았는가 하고 물을 때,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다른 나라의 귀족들은 좀더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향 근처에서 배보다는 말을 사용하여 좀더 쉽게 팽창해나갈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80-1)


2 유럽의 새로운 노동분업 : 1450? - 1640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근거한 유럽 세계경제가 등장한 것은 16세기의 일이었다. 이 초창기에 나타난 가장 기이한 측면은 자본가들이 전 세계에 그들의 깃발을 휘날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유기업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개인주의나 과학 또는 자연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도 아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세계관으로서 성숙한 것은 모두 18-19세기에 가서의 일이었다. 이 시기를 풍미한 듯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들자면 그것은 국가통제주의(statism) 또는 국가이성이라는 이데올로기였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특한 특징은, 경제적 결정은 주로 세계경제 무대를 지향한 반면, 정치적 결정은 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더 작은 구조들─세계경제 내의 국가들(민족국가, 도시국가, 제국)─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사회계급과 인종(민족, 종교) 집단 역시 동시에 그리고 때로는 대립적인 양상으로, 국가구조 및 세계체제의 틀 안에서 사회적 존재로 등장하게 되었다."(109-10)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가장 명백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인플레이션, 이른바 가격혁명이었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실질)임금의 극적 하락은 그 자체가 16세기에 아직도 제거되지 않고 있던 전(前)자본주의 경제의 잔재들인 세 가지 구조적인 요인들의 결과였다." "세 가지 요인들이란, 화폐에 대한 착각 및 임금 요구의 불연속성, 관습이나 계약 또는 법령에 의한 임금의 고정, 그리고 임금 지불의 지체이다. 피에를루이지 초카가 말하는 화폐에 대한 착각이란, 불연속적인 몇몇 시점을 제외하고 점진적인 통화 팽창 움직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설령 통화 팽창 움직임이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임금협상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만 가능했다. 더욱이 16세기에는 관습이나 계약이 무력해진 경우 종종 국가가 간섭하여 임금인상을 금지했다. 끝으로 당시의 많은 노동자들은 일 년에 한 번만 임금을 받았는데, 그것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던 당시로서는 가치가 떨어진 화폐로 받는다는 뜻이었다."(128-9)


"카를로 치폴라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노동비용이 다른 경쟁국들의 임금수준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았던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노동자 조직들이 노동생산성에 걸맞지 않은 임금수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찰스 벌린든 역시 16세기 벨기에의 도시들에서 임금이 밀의 생산가에 육박했음을 발견한다. 이 지역들은 무역의 〈옛〉 중심지였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정치경제적 세력으로서 비교적 강력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 노동자들은 날로 더해가던 폭리 취득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관행의 〈진전〉에 의해서 옛 구조들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16세기에 산업 중심지로서 쇠퇴하고, 장차 승리자로 떠오를 홀란트, 잉글랜드, 그리고 이들에게는 못 미치지만 프랑스와 같은 신참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 또한 바로 노동자들의 힘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습의 진전 때문이었다."(130-1)


"인플레이션은 소득의 재분배─유럽 세계경제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복잡한 재분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취약한 부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 축적된 자본은 누군가에 의해서 다시 투자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은 강요된 저축, 따라서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이었고, 이러한 이윤을 세계경제 체제를 통해서, 주변부 및 반주변부─〈옛〉 선진지역들─로부터 우리가 세계경제의 신흥 핵심지역이라고 불러온 곳으로 불균등하게 배분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이면에는 세계경제 내의 노동분업의 등장이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 분업은 농업과 공업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활동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화와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노동 통제 및 다양한 방식의 계층화가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들〉, 즉 정치적 활동의 영역에 상이한 정치적 결과들을 가져왔다."(133-5)


"신생 세계경제의 지리적, 경제적 주변부에서는 두 가지 주요 활동, 즉 금은을 캐내기 위한 광산활동과 식량을 조달하기 위한 농업활동이 이루어졌다. 16세기에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주로 전자를 제공한 반면, 동유럽은 주로 후자를 제공했다. 두 경우 모두 기술은 노동집약적이었고, 사회제도는 노동착취적이었다. 그 잉여는 전체적으로 핵심지역 주민들의 필수품들을 공급하는 데 지나치게 많이 돌아갔다. 기업의 직접적인 이윤은 핵심지역의 집단들, 국제적 무역집단 그리고 지역의 관리자들(예를 들면 폴란드의 귀족,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관료와 엥코멘데로들)이 나누어 가졌다. 인구의 다수는 강제노동에 종사했는데, 이 제도는 국가와 그 사법기구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제되고 시행되었다. 노예들은 이윤이 남는 한 이용되었고, 그러한 사법적인 극단주의가 너무 비용이 많이 들 경우에는, 그 대안으로 형식상 자유롭되 법률적으로 강요되는 농업 노동이 환금작물 분야에서 채택되었다."(159-60)


"세계경제의 핵심부인 서유럽의 경우에 상황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인구밀도는 (심지어 14-15세기와 같은 인구 감소기에도) 기본적으로 매우 높았다. 따라서 농업 역시 한층 더 집약적이었다. 더욱이 토지의 일부는 경작지에서 목초지로 바뀌었다." "핵심지역에서는 도시들이 번성하고 공업들이 탄생했으며, 상인들은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세력이 되었다. 16세기 전 기간을 통해서 농업은 여전히 인구 대다수의 생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동유럽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유럽 세계경제로의 편입은, (약탈과 높은 이윤을 통해서) 자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핵심부의 일부 노동력을 해방시켜 다른 활동들에 전문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핵심부 안에는 주변부에서의 활동들과 유사한 커다란 잔재(예를 들면 곡물 생산)도 있었다. 그러나 핵심부에서의 추세는 다양성과 전문화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반면 주변부에서의 추세는 단일작물재배를 지향했다."(160-2)


"잉글랜드처럼 인클로저와 임차지에 토대를 두거나 동유럽처럼 강제 환금작물 노동에 토대를 둔 대영지로 나아갈 수 없었던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의 지주계급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출현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서, 반(半)자본주의적 기업의 형태로 분익소작제(sharecropping)라는 중간 단계를 선택했는데, 사실 그것은 반주변부에 알맞은 형태였다. 반주변부가 주변부처럼 완전한 위성지역이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높은 토지/노동력 비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강력한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있어서 불황기에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대한 특별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뒤비에 따르면, 도시 상인들의 수가 많고 비교적 세력이 컸던 지역에서는 많은 영지들이 이들 도시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들 도시민은 기근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했으며, 토지 소유에 따르는 사회적 지위는 추구하되, 손수 농사를 짓는 수고는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토지를 분익소작제에 할당하는 것은 합리적인 타협이었다."(169-70)


"자유노동은 핵심부 국가들에서 숙련작업에 적용된 노동통제 방식이었고, 강제노동은 주변부 지역들에서 비숙련작업에 적용된 노동통제 방식이었다. 두 방식을 결합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자본주의는 세계제국의 구조 안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로마에서 출현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이다. 상인들은 단일한 국가구조 안에서보다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정치적으로 한층 수월하게 다양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단일 국가의 지배자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압력에 대응해야만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밀이 단일한 민족국가의 구조 안에서보다는 비(非)제국적인 세계경제 구조 안에서의 노동분업의 확립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K. 베릴은 20세기의 저개발 국가들에서 〈국제무역이 종종 국내교역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용이하며······국가간의 전문화가 종종 한 국가 내에서의 지역간 전문화보다 훨씬 빠르고 용이하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16세기 유럽에서도 사실이었다."(198-9)


3 절대왕정과 국가통제주의


# 16세기 국왕권 강화의 주요 측면들

1. 관료제화

2. 권력 독점

3. 정통성의 창출

4. 신민의 동질화


"국왕은 어떻게 (영속적이고 종속적인) 관료들을 확보했는가? 그는 돈을 주고 그들을 샀다. 국왕의 문제는 그에게 대리인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는 행정과 군사의 기능을 수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이전에는 국왕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또는 그들의 동료와 가족의 이해관계에 따른 반대압력에 직면할 경우, 국왕의 뜻을 수행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국왕은 대개 〈평범한 출신〉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렸으며, 그들은 봉급을 받는 상근 직원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케 한 주요한 관행은 〈관직 매매〉로 알려지게 되었다. 재정적 공평무사와 보편적 충원의 규범에 기반을 둔 관료제와는 달리, 이러한 형태의 관료제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제한된 국왕 권력을 예고하며, 국가의 수입이 관직을 매입한 이 관리집단에 대한 증대된 보상으로 전용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과거의 봉건제와는 달리, 관직 매매는 국가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을 가능케 했다."(211)


"인구 증가와 함께 다양한 동기로 추진된 인클로저 운동은 유랑의 문제를 초래했으며, 용병대의 등장은 다른 목적들 가운데서도 이들 〈유랑민들〉의 일부를 고용하여 나머지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용병은 군주의 힘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그들은 국왕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세울 뿐만 아니라 소귀족들의 일자리를 빼앗음으로써, 전통적인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물론 여러 지역의 몰락한 기사들에게 한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그들은 국왕을 위한 복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국왕의 힘이 보다 센 곳에서는 비적행위가 그만큼 더 어려웠다. 그러나 군주의 힘이 약한 지역에서는 비적행위가 많은 이익이 돌아갔고, 국왕을 위해서 복무할 기회는 그만큼 더 적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비적행위는 〈전통적 저항〉으로의 도피라기보다는 보다 강력한 국가를 바라는 하나의 요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국가 구조 안'에서의' 저항이었다."(220)


"정치조직체는 비록 부분적인 정당성이나마 획득하게 되면 언제나 그만큼 더 안정을 얻는다. 정당화는 대중이 아니라 핵심집단과 관련된다. 정치적 안정성의 문제는 국가기구를 관리하는 소수 집단이 다수 집단인 중앙의 간부진 및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얼마나 납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즉 그 체제가 이들 핵심집단이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합의된 가치에 근거하여 형성되었고 또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그와 아울러 이 체제가 커다란 장애 없이 계속 작동하는 것이 이들 핵심집단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러한 상황이 실현될 때, 우리는 한 체제를 〈정당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당성의 문제는 단 한 차례로 결판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타협의 문제이다. 16세기에 군주의 새로운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떠오른 이데올로기는 왕권신수설이었으며, 그 체제를 우리는 절대왕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221-2)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의 국가의 등장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절대주의를 민족 또는 민족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계체제 내에서 강한 국가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강한 국가들 내부에서든 주변부에서든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 전제조건이었다. 민족주의는 한 국가의 구성원들을 신분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으로서, 그것이 함축하는 집단적 결속의 모든 필요조건들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절대주의는 국가 그 자체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전자의 본질은 하나의 집단적 감정이고, 후자의 본질은 국가기구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소수 집단의 감정이다. 물론 강한 국가의 지지자들은 시일이 흐르면서 그들의 목적을 견실하게 보강하고자 민족감정을 조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16세기에 어느 정도 이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집단적 감정은, 만일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전체로서의 국민보다는 주로 군주 개인에 맞물려 있었다."(223-4)


"교회가 전력을 기울여 근대성에 반기를 든 것은 초국가적 기구인 교회가 똑같이 초국가적인 경제체제의 등장에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국가적인 경제체제는 특정 (핵심부) 국가들의 강력한 국가기구 창출에서 그 정치적 힘을 얻었는데, 그러한 진전은 이들 국가들 안에서의 교회의 위상을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유럽 세계경제의 장기적 성공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주변부 국가에서의 교회의 성공이었다. 1648년 이후 종교개혁의 전쟁열기가 마침내 식어버린 것은 양측이 지쳐서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지리적 분업이 세계경제의 근원적인 추진력의 자연스러운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일부 군주들은 관직 매매 관료, 용병군대, 왕권신수설, 그리고 종교적 통일성(cuius regio)으로 막강한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또 어떤 군주들은 실패했다. 이것은 세계경제 내의 노동분업에서 그 지역이 떠맡은 역할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240-1)


4 세비야에서 암스테르담까지 : 제국의 실패


"1519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자 유럽 내의 그의 영토는 (아라곤을 포함한) 에스파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남부 독일의 여러 지역들, 보헤미아, 헝가리, 프랑슈-콩테, 밀라노, 에스파냐의 지중해 영토들(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 등)과 같은 다양하고 분산되어 있는 지역들을 포괄했다. 당시 쉴레이만 대제의 오스만 제국이나 이반 뇌제의 모스크바 제국 등과 구조가 유사했던 이 제국은 한때 유럽의 정치적 공간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를 5세만이 유럽 세계경제를 그의 영토 안으로 흡수하고자 꾀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도 똑같은 일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프랑스는 영토의 규모로 보나 그 중앙의 위치로 보나 이점을 안고 있었다." "사실상 두 거대 제국, 즉 합스부르크와 발루아 간의 투쟁은 결국 1557년, 양자가 모두 쇠진하고 유럽에서 제국의 오랜 꿈이 종결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261-2)


"합스부르크 제국과 발루아 제국은 둘 다 실패했고 함께 몰락했다. 1557년, 두 제국의 재정파탄으로 군사적 투쟁이 곧바로 중단되고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은 차후 100년 동안 유럽의 정치적 판도를 바꾸어놓을 것이었다." "무너진 것은 어느 특정한 국가구조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것은 그 세계체제였다. 100년동안 유럽은 새로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전의 방식으로 그 번영에서 이익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술적 발전과 자본주의적 요소들의 부상은 이미 너무나 멀리 앞서나가 있어서 경제영역과 부합될 어떤 정치적 제국들을 다시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했다. 1557년이라는 해는, 이를테면 그러한 시도가 실패하고 유럽에 하나의 세력균형이 확립된 것을 알려준 해였는데, 이러한 세력균형은 민족이 되고자 하는 국가들(이른바 민족국가들[nation-states])로 하여금 제몫을 챙기고, 또 계속 번창하는 세계경제를 통해서 살쪄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283)


"핵심 국가들 자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발루아 제국의 경제적 파탄으로부터 유익한 재정적 교훈을 끌어냈다. 그들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재정적 혼란에 다시는 덜미를 잡히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유리한 무역수지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줄 일종의 수입통제를 창안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당시에 널리 유행하게 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이 무역수지만을 염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비록 당시에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국민총생산을 또한 염려했으며, 국민총생산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몫과 그것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염려했다. 그 결과는 카를 프리드리히가 지적하듯이, 〈제2차〉 16세기 말에 이르러서 〈이제까지 자금을 대부해준 금융 가문들보다도 국가 자체가 신용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내부로 관심을 전환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국가들 사이에서는, 지친 끝에 찾아온 상대적인 평온상태가 한동안 지배했다."(304-5)


"발전하는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왜 민족적-사회적 복합 혁명이 다른 곳(무엇보다도 프랑스를 제외하고)에서는 사회질서가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던 〈제2차〉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또 오직 여기서만 일어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봉기가 대체로 성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혁명의 발발에 대한 열쇠는 장인들이나 도시 노동자들의 사회적 불만이나, 혁명의 커다란 수혜자들임에 틀림없는 부르주아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네덜란드〉 귀족들이 군주는 자기들의 대변자가 아니며, 군주의 정책들은 중단기적으로 볼 때 그들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것이고, 군주가 정책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군주의 정치적 무대, 즉 에스파냐 제국이 확고히 자리잡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무대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에) 것을 갑자기 우려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민족주의적〉 저항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313-4)


"〈혁명〉은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의) 최초의 봉기와 그 진압(1566-72), 북부의 홀란트와 젤란트에서만 일어난 (보다 〈개신교적인)〉 제2차 봉기와 헨트 평화조약에 의한 봉기의 종결, 플랑드르 남부에서 일어난 급진적인 봉기(1577-79), 1579년 이래 나라가 두 부분(북부에는 연합주, 남부에는 국왕파의 체제)으로 갈라진 것, 1598년의 재통일 시도, 1609년 영구적인 휴전 성립 등 많은 단계들을 거쳤다. 이 시기에는 분쟁이 차츰 북부의 국가적 독립을 달성하려는 개신교적인,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화된〉 북부의 투쟁으로서 분명한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북부는 상업 부르주아지의 요구와 합치하는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 상업 부르주아지의 힘은 투쟁을 통해서 성장했으며, 마침내 17세기에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던 것이다. 일단 분쟁이 시작되자, 〈제국이 실패한〉 상황에서, 새로운 유럽의 세력균형이 나타난 상황에서 이를 막기 위하여 에스파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316-7)


"네덜란드 혁명의 의미는 그것이 민족해방의 모델을 확립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중요성은 유럽 세계경제에 대한 경제적 영향에 있다. 네덜란드 혁명은 영국인들이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세계체제의 결정적인 공고화에 필요한 조처를 취할 준비가 될 때까지, 어려운 조정기에 걸쳐 세계체제를 하나의 체제로서 지탱해줄 수 있는 힘을 풀어놓았던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발트 해 무역에서 점차 그 역할이 증대되었고, 16세기 초까지 한자 도시들을 대체해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무역은 발트 해 무역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보다 증가시켰는데, 네덜란드인들 자신은 발트 해 무역을 〈모(母)무역〉이라고 불렀다. 결국 동유럽은 네덜란드 도시들의 인구를 먹여살릴 곡물과, 네덜란드의 수산업과 조선업에 필수적인 선박물자들을 공급했다. 이번에는 조선업이 네덜란드가 성공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암스테르담은 유럽 경제의 삼중적 중심, 즉 상품시장, 해운업 중심지, 자본시장이 되었다."(325-9)


5 강한 핵심부 국가들 : 계급 형성과 국제교역


"통상 젠트리는 아직 작위귀족에는 미치지 못하며, 〈요먼(yeoman)〉보다는 더 상위에 있는 계층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젠트리〉에 관한 핵심적인 논점은 그것이 형성중인 하나의 계급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형성중인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봉건제의 계서제적 질서 아래서는 지위, 의무, 특권, 명예를 규정하고 있는 수많은 범주들이 발전했다. 지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가문의 연속성은 물론 불안정했으며, 지위와 수입의 상관관계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팽창은 〈지주(landowner)〉(이는 분명히 토지보유 규모에 따라 세분될 것이다)라는 새로운 범주에 따른 분류체계에 반영되었다. 젠트리는 바로 자본주의적 지주를 포괄하는 용어로서 나타났다. 다른 용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젠트리〉는 점차 팽창하여 다른 용어들을 흡수하고 없애버린 한 집단의 호칭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적어도 〈젠트리〉와 함께 여전히 〈특권귀족(aristocrat)〉과 〈요먼〉이 있었다."(370-1)


"그렇다면 이것이 젠트리에 관한 예의 고전적인 논쟁에 대하여 무엇을 시사해주는가? 토니의 기본 논지는 씀씀이가 헤픈 귀족이나 야반도주하는 투기꾼들에 비해서 젠트리가 인플레이션 시대의 생존에 적응하는 데 더 적합한 생활방식을 영위한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재산을 주무르는 모험가들에 비해서 지방 젠트리들은 단순한 약탈꾼들에 맞서는 정착민들이었다.〉 그들과 같은 부류의 프랑스인들에 비해서 그들이 가진 이점은 그들이 〈제도에 개인을 희생시키는 냉혹한 영국의 가족제도에 의해서 소수로 유지되고 강하게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농촌의 출신지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같은 부류의 네덜란드인들에 비해서 정치적으로 훨씬 강력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대표자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방민과 지역에 대한 애착을 소귀족들의 귀족적 기품과 결합시켰으며, 이 두 가지 카드를 세련된, 그러나 냉혹한 현실인식 위에서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기〉 때문이다."(373)


"〈젠트리〉가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되고 있던 자본주의적 농장주에게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면, 요먼은 무엇인가? 밀드레드 캠벨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구조 내의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보건대, 요먼 신분은 성격이 꽤 명확했다. 그들은 토지와 농업의 이익에 주로 관심을 두고 "부귀와 빈곤의 중간지대"에서 살아가는, 농촌의 견실한 중간계급이었는데, 잉글랜드에는 젠트리와 농민층 사이에 위치하여······나라에 능력껏 봉사하는 "중간층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16세기에는 두 종류의 인클로저, 즉 목초지를 위한 대토지의 인클로저와 더욱 효율적인 경작을 위한 소토지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먼은 주로 후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목초지 인클로저에 따른 정치적 저항을 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식량 공급을 증대시킨다는 점에서 소토지의 통합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요먼의 역할은 그만큼 더 중요했다."(381-6)


"16세기, 특히 1540년에서 1640년에 이르는 시기는 일종의 계급형성기, 자본가적 농업계급의 형성기인 것 같다(그중 좀더 부유한 사람들은 〈젠트리〉로 부르고, 그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요먼〉으로 부른다). 이 시기의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토지 통합의 사회적 과정은 좀더 하위의 구성원까지도 포함한 이 계급 전체의 소득이 상승하는 과정이었던 한편, 프롤레타리아의 형성이 시작되는 과정을 수반하고 있는데, 그러한 프롤레타리아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도시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유랑민〉이 되거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땅뙈기를 가진 계절적 임금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시의 룸펜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국가기구는 하나로 응집된 강력하고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 상충하는 두 추세 사이의, 즉 새로운 여러 경제적 가능성에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적응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상위 신분의 사람들과 경제생활의 완전한 상업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상승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전장이었다."(396-7)


"〈제1차〉 16세기의 정치는 유럽 세계경제를 세계제국으로 전환하려는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시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대서양 탐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은 근본적으로 육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그 시도들이 실패한 한 가지 부차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16세기의 정치는 비제국적인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정치적, 상업적 우위를 누리는 통합된 민족국가의 창출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국외와 국내의) 해로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을 지향했다. 이 점에서 북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자연적인 지리적 이점들이 제몫을 톡톡히 했다. 프랑스의 정치는 육상지향적인 세력과 해상지향적인 세력들 사이의 긴장, 흔히 암묵적인 긴장상태였다. 프랑스측과 잉글랜드 및 연합주 측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뒤의 두 나라의 경우 양립 가능한 선택이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러한 선택들이 어느 정도 상충했다는 점이다."(410-1)


"1600-10년 사이에 프랑스는 종교전쟁이 낳은 분열로 인한 손실들을 어느 정도 만회했지만, 1610년 이후에 또 한 차례의 커다란 쇠퇴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주로 네덜란드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잉글랜드와의 경쟁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네덜란드인들과 심지어 영국인들조차도 가격경쟁에서 프랑스인들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세계시장이 축소되고 있던 순간에, 이전의 50-60년 사이에 축적된 산업자본과 기술의 우위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모든 주요 지표에서 경쟁국들에 뒤처졌다. 프랑스 제조업체들의 노동분업 수준은 더 낮았다. 숙련노동자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적절한 임금 계서제를 정착시킬 수 없었다. 그 시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국가의 보조는 부정기적이었고 단속적이었으며, 보잘것 없었으며, 화폐의 축적은 충분한 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세계경제의 중간 층위에 적합한 나라가 되었다."(449-50)


"부르주아지와 귀족의 요구 사이에서 흔들리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정 간의 차이점은, 잉글랜드에서는 상업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가 강력한 중앙정부와 연결되어 있었던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 국가의 변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활동하는, 본질적으로 더욱 다루기 힘든 부르주아지를 제어하기 위해서 프랑스 왕정은 자신을 강화시켜야 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매매를 통해서 그들을 매수해야 했고, 또 그들을 산업투자로부터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어야 했다. 잉글랜드에서는 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의 생활방식을 배워야만 했으며 부분적으로 그들과 뒤섞여야만 했다. 프랑스에서 그런 압력은 살아남아야만 하는 부르주아지에게 가해졌다. 양국 모두 중심부는 주변부에 대해서 승리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이것은 민족적 부르주아지라는 대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지의 후퇴를 의미했다."(458-9)


6 유럽 세계경제 : 주변부 대 외부지역


"첼소 푸르타도는 〈금과 은을 제외하고, 최초로 식민화가 이루어진 세기에, 아메리카에서 생산될 수 있었던 것 중 유럽에 팔 만한 상품은 거의 없었다. 단위무게당 가치가 매우 높았던 후추, 비단, 모슬린과 같은 물품들을 생산했던 동인도와는 달리, 아메리카는 수지타산이 맞는 무역을 뒷받침할 만한 상품을 전혀 생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계경제의 주변부(periphery)와 외부 지역(external area) 사이의 구분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구분법을 적용할 것이다. 하나의 세계경제의 주변부는 그 내부에서 주로 낮은 등급의 상품들(다시 말해서 노동에 대하여 많은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품들)을 생산하지만, 그 상품들이 일상적인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에 전체 분업체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지리적 영역이다. 세계경제의 외부지역은 하나의 세계경제가 때때로 〈호화스런 교역〉이라고 불리는 귀중품들의 교환을 위주로 무역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세계체제들로 구성된다."(464)


"폴란드는 16세기 말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 수출업자〉가 되었다. 폴란드 곡물 수출 경제의 대두는 강제 환금작물 노동에 바탕을 둔 대영지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귀족의 정치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했는데, 서유럽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무역에 대한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폴란드의 개방경제가 유지되었다. 폴란드 귀족의 번영이 이 자유무역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가는 폴란드의 〈중추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1626-29년에 시행한 비수아 강 봉쇄정책이 야기한 경제적 어려움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르지 토폴스키는 〈발트 해의 항구들을 경유하는 곡물 수출이 전체 경제구조를 지배할 정도로 [폴란드에서] 급속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17세기의 경기후퇴가 불러온 파괴적인 효과들을 설명하는 데에 원용하는데, 그 효과들은 폴란드의 각 지방경제가 얼마나 수출지향적인가에 따라서 달랐다."(467-8)


"폴란드가 팽창하고 있는 서유럽 시장을 겨냥해 (곡물을) 생산했던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영주들이 팽창하는 국내시장을 목표로 생산했다.〉 사실, 16세기에는 〈나라 밖으로 [곡물을] 실어내려면 차르의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다.〉" "러시아 세계경제의 핵심부는 공업제품들(각종 철물제품, 직물, 피혁제품, 무기와 갑옷)을 수출하고 사치품, 면직물, 말 그리고 양을 들여왔다. 게다가 그들은 〈비록 16세기에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유럽의 공업제품을 동부로 '재'수출했다. 러시아는 한 경제적 공동체의 초점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행복한 결과들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할 것은 독립적인 러시아 세계경제가 사실상 사라지고 러시아가 유럽 세계경제의 또 하나의 주변부가 되었던 18-19세기의 현상들에 미루어서 16세기를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유럽측에서 보면, 적어도 17세기는 되어야 러시아가 〈곡물과 임산물의 저장고〉로서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469-70)


"16세기가 서유럽에서는 국가권력이 대두하는 기간이었지만, 동유럽에서는 국가권력이 쇠퇴하는 시기였다. 그것은 동유럽의 경제적 지위를 규정하는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국제무역에서 이윤을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폴란드의 토지귀족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토착 부르주아지가 약화됨에 따라 국가의 과세기반이 조금씩 사라져갔고, 그것은 곧 국왕에게 적절한 수준의 군대를 유지할 여유가 없음을 의미했다." "서유럽에서 국왕의 재산은 교회재산을 희생시키면서 성장했고, 심지어 가톨릭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폴란드는 사정이 달랐다. 종교개혁의 최초의 충격이 지속되는 동안, 몇몇 교구 교회의 토지들이 개신교도 젠트리에게 몰수되었으나, 대부분의 교회재산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때 가톨릭 종교개혁이 승리했다. 그러나 국가의 취약성 때문에, 국왕의 재산은 감소했다. 비슷한 과정들이 동유럽의 다른 곳─일례로 융커 계급이 등장한 독일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475-7)


"러시아 내에서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데 차르가 사용한 주요 무기는 세습적인 국가기구의 창설이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프랑스나 잉글랜드의 경우보다도 토지에 대한 권리들을 재분배하는 것과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 가지 중요한 개혁은 징세청부권의 형태로 녹봉을 주던 제도, 즉 '코름레니에'라는 지역행정 체제를 일부는 현금으로, 일부는 토지 형태로 급료를 받는 관료제로 대체한 것이었다. 이 개혁은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과세기반을 창출했다. 이것은 차르의 권위가 팽창하는 과정의 일부이자 또 이로부터 이익을 얻은 지방 젠트리들이 확고하게 장악하는 지방 정부기구들을 창설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군사적 봉사가 확실하게 포메스티예(pomestye, 왕실 소유의 토지로서, 궁정관리와 군대소집 등에 응하여 봉사하는 귀족에게 분배함)의 보유와 결부되어, 비교적 충성스러운 상비군을 보유했다는 확신을 차르에게 안겨준 것이 바로 이때였다(1556)."(485)


"포르투갈이 인도양과 뒤이어 중국해에서 순식간에 우위를 차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은 이 시기에 두 지역에 존재했던, 트레버-로퍼의 표현에 따르면, 〈해상운송 무역의 공백〉이었다. 〈아시아의 방대한 무역─유럽과의 원거리 무역은 그 일부분에 불과했다─은 먼저 오는 사람들의 차지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먼저 와서 그것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백이 지속되는 한─유럽이 그것을 장악하거나 혹은 아시아가 그것에 저항할 때까지─그들이 무역을 독점했다.〉 그 공백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그 무역을 처음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들은 당시에 인도양의 경우에는 무슬림 상인들[아랍인들과 구자라트인들] 그리고 중국해의 경우에는 왜구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기존의 무역망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시간적으로 먼저 일어났던 무슬림 무역업자들의 추방은 〈평화로운 경쟁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504)


"이 시기에 아시아는 유럽 세계경제의 일부가 아니었다.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보통 아시아 민족들이 세워놓은 조건과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몇몇 식민활동의 거점들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럽인들은 모두 그곳에서 [아시아인들의] 묵인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유럽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군사적 우위가 단지 해군력의 우위에 불과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존재하던 세계경제 조직을 조금 개선했고, 그러한 노력에 대한 대가로 몇몇 상품들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정치적 상부구조뿐만 아니라 경제의 사회적인 조직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주요 변화는 후추 생산에서 일어났고, 그것은 〈대량 생산이 등장했던〉 유일한 향료가 되었다." "따라서 한 세기 동안의 포르투갈의 지배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에게 아랍인이 아니라 주로 포르투갈인들이 이윤을 챙겼다는 것을 의미했다."(506-9)


7 이론적 재고찰


"세계체제는 하나의 사회체제이다. 그것은 경계, 구조, 성원집단, 정당화의 규정 그리고 일관성을 가진 사회체제이다. 그 안에서 투쟁하는 세력들은 서로 당기는 힘에 의해서 그 체제를 결합시키며, 또 각 집단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것을 개조하려고 끝없이 노력함으로써 체제를 분열시킨다. 그것은 유기체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것은 수명이 있는데, 그 동안에 어떤 특징은 변화하고 또 어떤 특징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체제의 내부적 작동논리에 의해서 그 구조들을 어느 때는 강하고 어느 때는 약하다는 등 때에 따라 다르게 규정할 수가 있다. 내 생각으로는 한 사회체제를 특징짓는 것은 그 안에서의 생활이 〈주로〉 자기완결적이라는 점과 그 발전의 원동력이 주로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완결적이라는 것을 이론상의 절대 개념, 즉 좀처럼 볼 수가 없는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기는 더욱더 어려운 일종의 사회적 진공상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531-2)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까지 나타난 세계체제는 오직 두 종류, 즉 비록 그 실질적인 통제력이 아무리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그 지역 대부분에 걸쳐 단일한 정치제도가 존재하는 세계제국들 그리고 그 공간 전체 또는 사실상 전체에 걸쳐 그와 같은 단일한 정치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들이 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편의상 그리고 좀더 적절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후자를 가리켜 〈세계경제(world-economy)〉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근대 이전의 세계경제들은 매우 불안정한 구조들이어서 세계제국으로 바뀌어가든가 붕괴하든가 하기 십상이었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세계경제가 500년 동안이나 생존해오면서도 아직도 세계제국으로 변모해가지 않았다는 점이 근대 세계체제의 특수성인데─이 특수성이야말로 그 힘의 비밀이다."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번영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세계경제가 그 영역 안에 단일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복수의 정치체제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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