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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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영제국을 보는 시각과 방법


# 영제국에 대한 (보수적) 역사서술 방법

1. 경제·군사 팽창론(전통적 견해) : 19세기 영제국의 팽창은 독점자본의 이윤극대화 운동에서 비롯했다는 홉스-레닌 식의 견해

2. 신사 자본주의론 : 대토지 소유 귀족과 젠트리들─시장경제를 이용해 임대소득을 추구하면서도, 일상적인 노동을 멀리하고 여가와 아마추어 정신을 중시하는─이 근대 영국의 부의 축적을 주도했다는 견해. 이들과 기존의 상업 자본이 결합된 금융-상업자본이 제국 팽창과 맞물려 해외 시장으로 그 힘을 집중시켰다고 본다.

3. 장식주의론(ornamentalism) : 19세기의 영제국 역시 인종주의가 만연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적 위계를 중시한 사회였기 때문에, 토착지역의 부왕이나 제후들에게 각종 칭호를 부여하여 제국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는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했다는 견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의식한 조어이다.

4. 네트워크론 : 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인쇄언어 연결망, 전신망, 해저 케이블 등 19세기의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영국적인 것'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했다는 견해. 말하자면 현대의 세계화는 대부분 영제국이 시행한 제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것이다.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과 국민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제국 해체 이후 한 세대 이상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 팽창과 해체의 전 과정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과 해체의 충격이 오히려 시대 변화에 순조롭게 적응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요구했던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제국사 연구는 역사가들이 이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국을 '역사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문제는 이 '제국의 역사화'가 이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히려 제국 지배를 시대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국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영미문화의 세계적 확산과 기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세계화 과정에서 영미문화의 확산을 중시하고, 그러한 확산이 영제국에서 영연방에 이르는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27-8)


"존 매켄지는 『선전과 제국』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이 영국의 공공여론을 조성하는 데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문화적 현상으로서 제국주의가 20세기까지 계속 영국인들의 내면세계에 뿌리내려 왔음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들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적 가치가 시대의 추세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영향을 받아 영국사 연구자들은 제국과 제국적 가치가 영국사의 지배적인 동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메켄지는 이러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본다. 제국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밀려났지만, 일상생활에서 소비되는 제국적 상품(차·담배·코코아·비누·설탕 등)과 대중문화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매켄지가 보기에, 〈제국의 유산은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의 보호무역시장〉 안에서 계속 번창하고 증식해 온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야말로 〈제국적 세계관의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이 영국인의 의식 속에 침전되어 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32-3)


1부 19세기의 유산


1장 재정-군사국가와 신사 자본주의


"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 체제의 맥락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그 체제 중심부 국가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해당한다. 명예혁명 이후 나폴레옹 몰락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영토와 인구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영국이 마침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존 브루어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간헐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전쟁은 원래부터 의도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해외시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벌어졌기 때문에 주된 전장은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해외 식민지였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지출을 점차로 늘렸고, 이를 부담하기 위해 물품세 부과와 일련의 국채 발행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일종의 효율적인 전쟁기구였다. 따라서 그 성격은 한마디로 '재정-군사국가(fiscal-military state)'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43-4)


"제국사 연구에서 주변부 이론은 경제적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전의 경제적 해석에서 19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시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제국 팽창의 휴지기였다. 그러나 주변부 이론은 이것이 공식적인 식민지 확장만을 제국주의로 간주하는 오해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한다. 이 시기에 영국이 식민지를 확대하지 않은 것은 '자유무역'을 통해 제국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부 이론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새롭게 신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 시기에 걸쳐 제국정책이 이어졌으며, 다만 이전에는 그 정책이 비공식적 제국(inform empire)의 형태로 표출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토착세력의 협력에 힘입어 적은 비용으로 제국을 꾸려나가는 방안이며, 이 협력관계야말로 〈제국주의를 규정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주변부 이론은 제국의 확대가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부의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라고 본다."(55-6)


"케인과 홉킨스는 주변부 이론과 경제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두 이론이 다 같이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전제로 삼고 있음에 주목한다. 경제적 해석이 제국주의를 산업자본의 진화단계에 연결지었다면, 주변부 이론은 산업화가 해외 지역의 확대를 촉진했다고 본다. 자유무역의 대두와 제국의 성장을 산업화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과 홉킨스에 따르면, 영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대 자본주의'이다. 근대 초기 이래 이 나라에서 부의 축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지대(rent)를 소득원으로 하는 경제 범주로 성장해 왔음을 뜻한다. 물론 영국의 귀족과 신사층은 아직도 봉건적 전통의 계승자였다. 그들은 질서·권위·신분과 같은 전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17세기 말에 그들은 봉건귀족의 삶에서 벗어나 '시장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57-9)


"지주 세력은 부재지주로서 농업 이윤이나 지대뿐 아니라 도시화와 경제 활성화에 따른 열매까지도 거두어들였다. 광산 개발의 이득과 도시 지역의 각종 임대소득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소득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부의 축적에 하루 내내 매진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부를 중시하면서도 일상적인 부의 추구를 경멸했으며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각종 기예와 그 철학으로서 아마추어 정신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태도와 분위기는 귀족과 지주층을 넘어서 다른 사회세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사 자본주의란 '신사적 규범'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이 활동이야말로 영국 경제발전의 주된 동력이었다. 귀족과 지주 외부로부터 다양한 자산가들이 이 활동 무대에 스스로 등장했다. 18세기에 화폐자산을 소유한 부유층이 대거 이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금융 및 서비스 분야의 부유층이 여기에 합류했다."(59-60)


"18세기 이래 영국 사회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는 틀을 유지해 왔다. 지주와 화폐자산가층의 동맹은 18세기에는 '낡은 부패 관행'으로, 19세기에는 값싼 정부와 자유무역주의로 변모했지만, 그 동맹은 언제나 영국의 경제발전과 해외 팽창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신사적 자본가층이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내부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동맹의 균형추가 경제개혁의 주된 수혜자였던 금융세력에 기울어진 것이다. 이러한 재편성 과정에서 신사적 자본가들은 적극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도 영국 사회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로는 '보수적 진보(conservative progress)'를 내세웠다. 케인과 홉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 구호는 〈전통과 특권을 보호하면서도 또한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의 권리를 지지하고 물질적 향상의 전망을 제시한다.〉 요컨대 19세기 후반 영제국의 새로운 팽창은 구 런던시 서비스 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63-4)


2장 네트워크로서의 제국


"겉으로 보면 영제국은 두 차례에 걸쳐 급속하게 팽창했다. 우선 7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해외 지역을 흡수한다. 다음으로,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 프랑스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분할에 가담한다. 그사이의 시기, 즉 미국 독립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팽창의 열기가 약해졌는가. 공식적인 제국 지배 지역만 살피면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영제국의 실질적인 지배력과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으며 오히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갤러거와 로빈슨이 주목한 '비공식적 제국'은 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 비공식적 제국은 물론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세계시장 확대와 직접 연결된 것이었다." "사실 상황에 따라 비공식적 제국은 공식적 제국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제국주의가 그 결과이다. 19세기 중엽에 주로 비공식적 제국을 추구했다고 해서 군사력을 동원한 팽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 제국과 비공식적 제국의 경계는 고정되지 않았다."(67-8)


"19세기 영제국 또는 영국 세계 체제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다윈에 따르면, 그것은 브리튼, 인도, 시티(the City)의 금융자본,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분석에서 각지에 산재한 다른 식민지들은 위의 구성요소와 비교하면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에서 브리튼은 특히 제조업과 재정 및 석탄자원을 의미하고, 인도는 그 경계를 넘어 아덴에서 미얀마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해양, 즉 페르시아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말레이반도, 그리고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 등 인도양 인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략 지역이었다." "자치령의 존재야말로 영국과 유럽 다른 나라의 제국 경영을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영국인 이민을 근간으로 형성된 백인 정착지는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백인 정착지로 이주한 영국인 이민들은 대체로 개인의 자유, 독립, 평등에 기초를 둔 사회를 형성함과 동시에 영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69-73)


"1851년 이후 영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좀 더 유리해졌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협조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의 이해관계를 양보했지만, 그 대신에 지중해의 몰타, 실론, 케이프타운을 완전히 장악했고, 중남미의 해안 지역도 속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이러한 팽창은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 아메리카와 아시아 해상무역을 분할해 온 중상주의 질서의 종국을 나타내는 신호였다. 기존의 영국 지배 영역과 새로운 식민지들은 전략적으로 아메리카·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남아시아·중국·태평양 등 전 세계에 걸친 연결망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었다.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영제국에 편입된 케이프타운·몰타·지브롤터·수에즈 운하·아덴·실론·싱가포르·홍콩·밴쿠버 아일랜드·포클랜드·노바 스코샤 등은 영국 해군의 세계 항로 지배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오직 영국만이 해상을 통한 전 지구적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77-8)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치령과 식민지, 그리고 복잡한 정부기구를 하나로 묶는 연결망은 어떻게 강화·유지되었는가. '영국 세계 체제'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다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우선 신문·전신·증기선·철도·상품·정보인력 이동 등 기술진보와 변화가 제국 연결망을 강화했고, 다음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이윤·상품·서비스·문화로 구성된 '영국적 세계'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자의식 또한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확립된 영제국은 기본적으로 취약한 네트워크 연결망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수 식민지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이 무임승차한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엽 이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동시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영국의 우월한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외부 자극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해 준 것이 토착 엘리트의 협조와 19세기 이래 지정학적 요인이었다."(78, 95)


"19세기 영제국의 팽창과 제국 네트워크의 출현은 영국 정부의 분명한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 국제 정세와 특히 지정학적 조건과 요인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윈은 〈수동적인 동아시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국제 상황이 영제국 세계 체제의 성립에 도움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시티 금융자분의 자기 이익 추구 경향과 상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제국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수에즈 운하 자체가 이 지정학적 요인을 더 강화한 지렛대였다. 이 운하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지정학적 조건이 변하면서, 그 요인은 오히려 제국 해체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두는 영국이 자체의 힘으로 대처할 수 있는 도전이 아니라 제국의 출현과 해체에 항상 영향을 미치는 상수였던 셈이다. 그렇더라도 제국 네트워크는 오늘날 지구화 현상의 초석이 되었다."(96-7)


3장 제국과 '대영국'에 관한 담론


"'대영국(Greater Britain)' 개념은 영국인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대륙을 기반으로 팽창한 강대국들의 등장에 자극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그 말이 함축한 전제적이고 군국적인 의미가 영국인의 자유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인 정착지가 영국의 일부라고 주장한 존 실리 이전에 제임스 프로드가 이미 새로운 강력한 국가들에 맞서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연결하는 〈군살이 없고 좀 더 효율적이며 응집력이 강한〉 '대영국'의 이상을 설파했다. 〈다른 나라의 인구증가, 제국적 에너지, 막강한 정치 발전을 고려할 때, 그리고 러시아, 미국 또는 독일에 속하는 광대한 영토와 우리 브리튼섬의 보잘것없는 면적을 비교할 때, 우리가 식민지를 우리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해서 영국인을 그곳까지 확산시키고 영토를 배가히자 않는다면 경쟁국 속에서 한 국가로서 우리 위치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110)


"실리는 브리튼섬과 백인 자치령을 결속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다가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지금까지 영국의 자치령과 속령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영토였다. 19세기 철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운활동에 근거한 영국의 이점은 위축되는 대신 준대륙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가 등장했다. 그러나 증기선·전신·전기 등 새로운 기술혁신과 더불어 이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말이다." "실리는 '대영국'의 구체적인 구현체로서 '제국연방(Imperial Federation)'을 언급한다. 제국연방운동을 전개한 '제국연방연맹'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미합중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 또는 국가연합으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여기에서 제국연방의 핵심 개념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이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112-5)


"19세기 중엽 영국 정부 각 부처의 행정개혁, 이른바 '글래드스턴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개혁조치가 이루어진 직후, 영국과 백인 자치령 사이에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교류와 무역이 급속하게 증가했으며, 제국의 경계 안에 있는 여러 지역은 왕실을 매개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었다. 왕실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 모두에게 국가(또는 지역)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원래 백인 정착지는 국왕의 하사장(charter)을 받은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였다. 이민집단은 국왕에게서 위임받은 왕령지에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의식은 백인 정착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 캐나다를 비롯한 '백인 자치령(white dominion)'은 더 이상 속령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런 구별은 백인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결국, 백인 자치령의 출현은 비백인으로 구성된 속령 및 식민지의 팽창과 관련되어 자리 잡은 것이다."(119-20)


"'대영국'론이 (그 인기에 비해) 단순히 구호에 그쳤던 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 실리가 입론의 근거로 삼았던 기술발전이 그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그가 내세운 '거리의 소멸'은 한 세기 후에나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해상 네트워크와 통신을 통한 연결은 대륙 국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근대 기술문명의 추세를 감지했지만, 오히려 기술적 난점이 '대영국'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영국 정체성의 문제 또한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 영국식 이름 및 지명의 세계적 확산과 영국성의 확장 가능성을 연결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친숙성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형성해 나간 정체성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리는 앵글로색슨인의 확산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영국성의 확대를 통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정체성을 포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129)


2부 전쟁과 불황


4장 전쟁과 동원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공 등 자치령 국가는 광활한 국토와 비교하면 인구가 적었다. 그런데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못지않게 성인 남성 가운데 상당수를 군 자원으로 소집해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터키의 갈리폴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 31일 현재 캐나다군 병력 규모는 62만 8,964명이었다. 이 가운데 영국에 파견된 군 병력은 42만 2,405명에 이르렀다. 영국에서 유럽 대륙 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규모는 40만 1,191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또한 인구 규모에 비해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전선에 투입했다. 성인 남성 대비 참전군인의 비율은 캐나다 13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13퍼센트, 뉴질랜드 19~20퍼센트에 이르렀다(영국은 27퍼센트)."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백인 자치령 국가의 경우 막대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입었다. 특히 참전군인 대비 사상자 비율은 캐나다 50퍼센트, 뉴질랜드 59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65퍼센트에 이른다."(150-2)


"일부 사회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자치령 국가들은 전쟁 동원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치령 국가의 적극적인 협조를 친영국적 정서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영국과 인종적·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인식에는 군주제, 대의제 헌정, 시민적 자유 등 그들이 공통의 선진적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긍지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정치평론가 아치볼드 허드에 따르면, 당시 독일 측 정세분석가들은 자치령 국가들이 유럽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치령 국가와 식민지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자치령 국가들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그 제도의 요체는 시민적 자유를 토대로 하는 군주제와 대의제 헌정(representative constitution)이었다. 대의제 헌정이란 구체적으로 의회(parliament)와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로 구현된다. 그들은 전쟁을 자신의 제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다."(153-4)


"전쟁 이전에 '대영국'론은 영국과 해외 자치령 지식인 및 정치인들 사이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이상이었다. 강대국들의 국제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대영국론은 영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호소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전과 그에 따른 막대한 희생이 제국의 원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치령 국가들은 이전 제국 질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자치령은 전후에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도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국제기구나 회의에 자치령 국가들이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자치령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정한 '제국의 원리'를 고안했다. 영국왕이 〈영연방 개별 국가들을 결속하는 초석〉이라는 원리였다. 단일한 군주를 중심으로 상징적으로 맺어진 네트워크야말로 개별 국가들의 협조와 발전의 기초가 되는 셈이었다."(160)


5장 경제불황과 제국


"영국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화된 제국의 연결망을 새롭게 강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920년대 말 영국의 실무 관리와 지식인들은 미국의 대두에 따른 영국의 대응전략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유럽 대륙과의 공조 또는 유럽 경제권에 대한 관심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맥락에서 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들 논의는 모두 자유무역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두 경제권 모두 미국에 대한 대응전략이면서도 각지 서로 다른 약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었다. 유럽 경제권의 공조를 강조하는 데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 상호보완적인 경제 특징보다는 경쟁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영제국은 국제분업의 효율성을 보여 주면서도 제국 네트워크의 취약성과 미국 영향력 증대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166, 170-1)


"이 시기 국제경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현안은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금본위제도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금본위제 채택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하락 추세에 있던 파운드화의 환율을 정하는 일이었다. 1파운드당 4.86달러라는 이전 수준의 환율로 되돌아갈 경우 외국 투자자들이 파운드화에 실망하고 뉴욕으로 금융 거래를 옮길 위험이 있었다. 반면, 파운드화로 이루어진 해외투자 자본의 가치를 높일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전시 부채 상환도 더 유리해질 것이었다. 처칠은 뒤의 가능성을 더 중시했다. 달러에 대한 스털링화의 가치는 전전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본위제 복귀로 영국은 수출산업의 타격과 노동계급 생활수준 하락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1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의 시기에 전통적인 수출산업은 구조적 변화의 기회를 상실했다. 그에 따라 해외시장에서 이들 산업의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약해졌다. 여기에 스털링화의 과대평가가 어느 정도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73, 178-9)


6장 제국 경영의 한계


"전후 영국 사회는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시경제체제에 비교적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노동계급이 실업과 경제침체에 따른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리기 시작했다." "제국 문제와 관련지어 이 시기 격렬한 노동자 항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들은 제국 네트워크를 다시 강화하려는 시도, 특히 상업제국의 활성화를 위한 노동자의 양보와 희생을 거부한 셈이었다. 물론 전후에 일반 여론은 앞으로 영국의 번영이 전쟁 이전 상업제국의 복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런던은 세계 최고의 투자처이자 교역 및 금융 중심지로서 지위를 되찾아야 했다. 금본위제 도입을 통한 파운드화 가치 안정, 수출경쟁력 회복, 수출시장 확대는 제국 운영에 긴요한 조건들이었다. 수출경쟁력 제고는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 삭감 이외에 대안이 없었다. 전쟁기의 산업 평화에 순응했던 노동자들은 정부의 이 같은 견해에 협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사관계의 불안은 제국 경여의 미래에도 불안을 안겨주었다."(193, 198)


"전 세계에 걸친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국내 정치 및 사회의 혼란이 겹치면서, 영국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 제국을 둘러싼 찬반 담론이 가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정치인과 지식인의 각성을 가져왔다. 전쟁의 참혹함과 야만성을 목격한 사람들은 산업화된 서구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류 번영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간디와 타고르 같은 지식인들의 비판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징후를 나타냈다. 영국 정치가들도 그 시대의 추세를 느끼고 있었다."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식민지 지배가 일종의 약탈 면허이며 그나마 문명화라는 식민지 지배의 인도적 전통도 1890년대 이후 사실상 붕괴되었다는 비관론이 대두했다. 문화적·인종적 전통을 공유하는 백인 자치령 국가들조차 전후의 경제침체에 따라 영국의 이익과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199-200)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서아시아 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조지 커즌이다. 그는 인도 총독을 지냈고 전시내각에 참여했으며 1919~24년간 외무장관을 지냈다. 전후에는 서아시아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까닭은 인도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인도 지배를 위해서는 서아시아에 다른 경쟁국이 들어서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영제국의 확장을 의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커즌이 선호한 것은 인도 지방의 토후국 모델을 적용해 서아시아 지역에 아랍인 자치국들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서아시아 진출은 전쟁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정러시아 붕괴 후 독일이 서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독일 동맹국인 오스만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영국군이 이 지역에 진출했다. 이는 전후에 곧바로 제국의 방어비 증가를 가져왔다. 영국은 전후에 팔레스타인·이라크·이란 등에 대한 신탁통치 주도국이 되었다."(235-6)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중국의 홍콩과 상하이를 이 지역 상업 무역 금융 중심지로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전간기에 특히 발전한 도시는 상하이다. 19세기 후반에 조차지를 개발한 영국은 인접한 미국 조차지와 행정단위를 묶어 상하이 공공조계로 개발했다. 1920년대 상하이가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공업생산지가 된 것은 상하이 공공조계의 번영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반영감정의 고조,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은 별로 없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미국 정부는 영국 해군력 증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을 둘러싼 경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의 대두와 함께 중지되었다." "일본은 이미 쿠릴열도에서 타이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태평양까지 진출을 노리는 해상제국이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중국에서 영국의 이익,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어까지 책임져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239-42)


3부 이행, 제국에서 국가연합으로


7장 제국의 해체, 2차 세계대전에서 수에즈 위기까지


"존 다윈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완패는 제국의 토대로 삼았던 모든 전제가 무너진 탓이다. 그 전제는 프랑스와 연합해 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영국의 선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며,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 지구적인 경제력을 행사함을 뜻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배, 제국 네트워크의 확장에 따른 해군력의 취약점 노출, 그리고 1930년대 영국 경제의 불황 심화로 이 모든 전제가 붕괴된 것이다." "전후에 영제국은 한동안 느슨한 형태로나마 유지되었다. 에이레가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국가가 된 인도·파키스탄·실론이 공화국 체제를 선택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1949년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인도아대륙의 신생 3개국이 잔류를 선어하고, 기존 식민지를 대부분 지배함으로써 기존의 제국적 결속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영연방 체제는 형식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의 해체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수에즈 위기 이후의 일이다."(252, 259-60)


"1956년 11월 6일 영국이 수에즈에서 군대 철수를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균열, 이든에 대한 여론의 비판, 유엔의 철수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바로 그날부터 파운드화가 폭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경제에서 파운드 스털링화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축통화였다. 파운드 스털링 통화권은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여러 나라가 금 대신에 파운드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면서 성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은 제국에 속한 국가들을 적용대상으로, 스털링 통화권 국가를 단일한 환율시행 지역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파운드화의 외환 가치를 보전하고 제국 내 무역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상당 기간 자치령 국가와 영제국 식민지들의 협조 체제가 유지되었고, 이것이 후일 새로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288-9)


"1930년대 이래 스털링 통화권은 제국 내 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영국이 완만한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영국 수출품의 주된 소비시장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영국 금융자본의 주요 채무국이자 영국 금융서비스 및 해운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파운드화를 축적하지 못할 때 채무상환 이행과 지불준비금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의 지불유예 선언이 계속될수록 파운드화 폭락 위험이 가중될 것이다." "1949년 경제불황기에 파운드화가 다시 폭락하자 영국 정부는 결국 파운드의 가치를 30.5퍼센트 인하한다. 이 당시는 달러결핍시대였기 때문에 스털링 통화권 국가들도 대부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폭락 우려가 높아졌을 때 이전과 달리 통화권 내 국가들의 동요가 커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 폭락을 방치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89-90)


"수에즈 위기는 세계경제에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스털링 통화권은 런던 시티의 금융자본과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경제 영역이었다. 이 통화권은 영국 경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건전성이나 수지균형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관성적으로 지속되었다. 기업가와 상인과 투자자들은 이전부터 익숙한 국제무역과 환거래의 관행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영국은 미국의 여러 지원과 도움을 통해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위기는 제국 지배의 오랜 유산인 스털링 통화권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군사개입의 좌절은 그 취약성을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위기 이후 스털링 통화권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국제무역과 환거래에서 기존의 오랜 관행과 익숙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293)


8장 탈식민화의 정치와 영연방


"영연방의 성격이 크게 바뀌고 그와 함께 회원국들의 결속력이 약화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영연방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해럴드 윌슨은 총리직에 오르기 전부터 코먼웰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영제국에 대한 복고적 유토피아나 대국주의적 편견보다는 그의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비국교도 전통을 지녔으며 세계의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는 영국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영연방을 이용하려는 정략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연방을 통해 개발도상국과 관련된 대외정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그의 국제주의적·사회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윌슨의 제안은 영국이 회원국의 농산물과 원료를 고가로 구매하고, 그 대가로 회원국은 자국의 투자계획에서 영국의 우선권을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식민부의 경제 관리들은 이러한 정책이 실제로는 영국 경제의 쇠퇴를 가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305-7)


"그렇다면 당시 경제 실무를 맡은 관리들이 영연방 회원국 사이의 무역 증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파운드화는 태환화폐였다. 달러부족시대에 회원국 무역의 영국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독일 및 일본의 대두와 더불어 파운드화는 약세로 돌아섰으며 영국과 회원국 간의 무역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실무 관리들은 회원국과의 무역 증대가 영국에 실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회원국의 1차 상품을 시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면서도 영국 수출 증대를 통해 수지균형을 꾀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수에즈 사태 이후 영국이 재정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과 캐나다의 보증 및 지원을 통해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영연방 회원국과 무역을 강화할 경우 반대급부로 역외무역, 특히 대유럽무역이 쇠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더욱이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자국의 경제발전에만 관심이 있었다."(309)


"오늘날 영연방은 주권국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일부 국가들이 가입 또는 탈퇴를 거듭하기도 하고, 이전에 영제국 지배와 관련이 없는 나라들도 새롭게 회원국으로 가입 신청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시도와 영연방 사무국 체제의 등장 이후 영연방에 대한 영국 정치가들의 관심은 약화되었다. 영연방은 더 이상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국이 주도할 수 없고 또 영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오늘날 영국은 코먼웰스에 관례적인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연방 사무국의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은 이전 영제국의 유산을 상징하지만, 1980년대 이후 특히 정상회의는 주로 자치령 국가 또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주도한다. 1971년 싱가포르 회의 이후 대부분 격년으로 지금까지 25차례 열렸다. 그 가운데 영국이 개최한 것은 4차례에 불과하다. 이는 영연방의 탈중심화와 다변화를 보여 준다."(314-5)


9장 유럽으로의 복귀


"오늘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중요한 이슈로 제기한 정당은 보수당이다. 영연방에서 유럽공동체로 방향 전환을 처음 시도한 정당도 보수당이었고 1970년대 보수당 집권기(히스 총리)에 유럽공동체 가입이 이루어졌다.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당시 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의회 토론 과정에서 국가주권 침해 문제가 논의되었음에도 이런 점들은 의회보고서나 유럽공동체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정부가 의회주권 문제에 대해서 실제로 관심이 없었는지, 또는 그 심각성이 장래에 문제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유럽공동체 가입 당시에 영국 정부와 일반 여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이 없었다는 점이다. EEC가 유럽통합운동의 산물이고, 통합운동이 초국가적 정치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명해 온 점을 고려하면 의회주권의 전통을 중시해 온 영국에서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329)


4부 제국 이후


10장 제국의 기억과 영연방, 그리고 '상상의 잉글랜드'


"전후 노동력 부족에 직면한 영국은 아일랜드와 유럽 대륙 국가로부터 노동자를 모집했다. 특히 1948년 '국적법'은 아일랜드인에게 자유로운 출입국 권리 및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시기까지 영국의 이민정책은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유럽인에게만 한정된 셈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영제국 해체가 가속되면서 새로운 영연방국 출신들이 대거 영국으로 몰려왔다. 이는 영국이 제국 지배의 경험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경제부흥기에 값싼 해외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당시 노동시장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인도아대륙, 카리브해 연안국 출신 소수 인종이 다양한 연결망을 통해 영국으로 입국했다. 자유방임적인 이민정책은 이런 경제상황뿐 아니라 백인 자치령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영연방 결속을 통해 미국과 소련에 대응하려는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1968년 8월 20일, 유색인 혐오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존 파월의 연설은 결국 유색인 이민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빚어낸 사건이었다."(347-8)


"유력 정치인과 의원은 물론 언론의 논조는 대부분 파월에 비판적이었지만, 일반 시민의 여론은 파월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소위 '유혈의 강' 연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파월 지지자들의 편지 쓰기이다. 몇 주에 걸쳐 파월의 자택, 의원 사무실, 언론사에 엄청난 양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개인 상황이나 가정 조건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 힘을 나타냈다. 말하자면 편지 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공동체를 나타내고자 했다. 빌 슈워츠에 따르면, 파월에게 지지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다수는 백인 여성이었다. 이들 편지에 나타나는 정서는 〈친숙한 세계의 붕괴를 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기억에 자리 잡은 이전의 친숙했던 세계란 본토, 백인 남녀, 변경, 식민지, 백인 정착지,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상상된 백인의 세계라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무질서를 인식하고 분노한 것이었다."(350-2)


"영제국 역사에서 식민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종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문명을 다른 세계에 전파했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이를 통해 그들의 '백인성'을 확인했다. 1950~60년대 영국인들의 일부는 분명 해외 백인 자치령 국가에서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았으며, 이들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이러한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백인 자치령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백인 자치령이 '백인성'을 중시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한 점과 관련된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치령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대영국' 이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었음에 비해, 1950~60년대 본토에서 해외로 이주한 영국인들의 집착은 오히려 쇠락하고 변질된 영국 사회를 대신해 해외에서 순수한 잉글랜드 또는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으려는 퇴행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365-6)


11장 다문화 사회의 명암


"에드워드 사이드 이래 문예비평 분야에서 축적된 탈식민이론은 기본적으로 언어 및 문화 중심주의와 관련된다. 이 경향은 인간의 삶 자체를 문화로 본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는 단순히 정신활동의 결과물만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그 활동 과정과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 문예비평가들이 보기에, 문화는 주로 의미, 즉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생산과 교환에 관련된다. 의미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고 언어는 재현을 통해 작동한다. 언어는 그 기호와 기의를 다른 사람들이 해독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재현하고 드러낸다." "로버트 영은 문화는 처음부터 타자, 달리 말해 인종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문화란 닮은 것과 다른 것(차이)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즉, 인종·종족·젠더 등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이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사회관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370-2)


"탈식민담론은 외부 세계에 대한 근대 유럽인들의 인식과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 유럽인들은 외부 세계 사람들을 항상 자기와 다르고 열등한 '타자'로 인식했으며, 이 '타자'에 대한 담론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계몽운동기 이래 유럽 문화는 〈정치적·사회적·군사적·이념적·과학적으로, 또 상상력으로써 오리엔트를 관리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산해 왔다.〉 사이드의 문제 제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권력모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타자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체계가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중요한 기능을 행사했다는 사이드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담론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사이드가 오리엔트 담론 형성 과정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속지학, 역사학, 여행기의 형태로 처음 형성된 식민지 담론의 원자료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369-70, 388)


"예컨대 리처드 프라이스는 남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코사 주민들에 대한 영국인의 지식체계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를 추적한다. 19세기 전반 이들에 대한 선교사 기록은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준다. 남자는 긍지가 있고 여성은 온순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성은 선교사들이 만난 종족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체격을 지녔고 여성은 생기발랄하면서도 뻔뻔하지 않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생활에 대해 인간 문화의 보편성이라는 맥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34~35년 무렵 변경지방에서 영국인 이주민과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정착민 담론이 식민성에 대한 인도주의적 담론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코사인들의 호전성, 신뢰할 수 없는 문화를 자주 언급한다. 이후 이 지역에 관한 새로운 지식체계는 식민지의 열등성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영제국의 아프리카 정책 수립에 기초가 되었다."(388-9)


12장 브렉시트, 그 이후


"1970년대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직후 영국의 헌정(憲政) 위기를 강조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이자 좌파 지식인 톰 네언은 브리튼이라는 모호한 영국 헌정이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대두─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월주의─와 함께 위기에 직면하리라고 예상했다." "네언이 보기에, 유럽통합은 브리튼섬에서 앵글로-색슨 헤게모니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 헤게모니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섬나라 근성'과 협소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 토대가 잠식될 것이었다. 그는 새롭게 '잉글랜드적인 것'에 대한 열광이 퇴행적 쇼비니즘 및 EU 회의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보았다." "요컨대 브렉시트 선거 결과는 단기적인 요인 못지않게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이후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른 잉글랜드 중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장기 요인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네언이 예건했듯이, '잉글랜드적인 것(Englishness)'에 대한 새로운 열광과 퇴행적 민족주의의 대두가 장기적으로 영국 헌정의 해체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405-6)


종장 거대한 경험과 유산


"영제국 네트워크가 20세기 중엽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근대 세계에서 영국은 일종의 강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강소국이면서도 선점 효과에 따른 이점을 극대화했다. 해군과 상선대에 바탕을 둔 영국의 해양 지배력에 강력하게 도전할 만한 세력은 근대 산업문명의 초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 세력이 가시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나, 그마저도 새롭게 등장한 여러 국민국가 사이의 역학관계와 국제정치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 유럽 대륙의 국민국가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균형에 집착하였고 대서양 반대쪽의 미국은 국내 개발과 발전에 치중했으며, 동아시아의 전통 국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만 영향받는 위치에 있었다. 유럽 대륙의 균형이 깨어지고 미국이 외부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동아시아 국민국가들이 새롭게 깨어나기 시작할 경우, 영제국과 그 네트워크는 충격을 받고 붕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416)


"영국의 정치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대중까지도 한동안 제국 경영이나 제국 네트워크를 외면해 왔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부정적 측면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덜 사악한 제국이나 선한 제국이라는 수사가 이를 나타낸다. 제국에 거리를 두려는 사회 심리적 경향은 제국의 상실에 따른 충격에서 일찍 빠져나오려는 자기방어적 기제에 해당한다. 영국이 과거 제국 경험을 상당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18세기 이래 영국은 제국 네트워크를 경영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이 이룩한 선진적인 수단과 방법, 그리고 이상을 다른 세계에 확산시켰다. 근대성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주의, 시장주의, 대의제 정치, 책임정부제도, 재산권 보장, 시민적 자유 등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전 세계에 퍼졌다. 영제국은 어떤 점에서는 근대 세계와 표리관계를 이룬다."(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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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의 탄생 -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사의 탐색, 1494-1763
김준석 지음 / 북코리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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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16세기 이후 유럽예외주의(제국이 아닌 다국체제)가 등장하게 된 요인들

1. 다수의 비옥한 분지 사이에 강과 숲, 산맥, 복잡한 해안선 등이 위치한 지형적 특성

2.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거주하는 유목민족의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서유럽

3. 카롤링거 제국이 해체된 이래 귀족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


"1500년 전후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는 이후 적어도 약 3세기 동안은 오직 유럽에만 국한된 현상이었다. 이 기간에 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거대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의 명·청제국, 인도의 무굴제국, 이란을 중심으로 한 서남아시아의 사파비제국, 터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부의 오스만제국이 그들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16~18세기는 '제국의 시대'였으며,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현상이었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전 세계의 국제정치체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국제정치체제가 유럽의 비유럽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발흥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중 국제정치체제와 경제적 발흥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의 결과 군사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유럽의 세계진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높다."(25-6)


# 근세 초(1500-1800년경) 국제정치에 남아 있던 전근대적 요소들

1. 유럽 각국의 대외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가를 자신의 가산으로 간주하는) 군주를 비롯한 소수의 정책결정권자들의 지대한 영향력

2.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연합왕국'의 형태였는데, 영토 간에 동일한 군주가 다스린다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유대관계도 없는 상황

3.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 우위('보편왕국'의 건설)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면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


"그럼에도 근세 초 유럽 각국의 대외정책에 공통적인 목표 또는 행동의 준칙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보편왕국의 수립이 아니라 세력균형의 보존이었다. 세력균형은 루이 14세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상대로 수차례 전쟁을 벌인 17세기 후반부터 국제정치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 1714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세력균형은 평화를 위해 모든 국가가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여러 번 언급되었다. 비록 본격적으로 언급되거나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17세기 중반 이전에도 국가들은 암묵적으로 세력균형의 원리에 따라 행동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유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정당한 군주에 대한 저항을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펠리페 2세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 반란세력을 지원했는지, 또 어떤 이유에서 30년전쟁 당시 리슐리외의 프랑스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과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같은 가톨릭 국가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36)


2 16세기 근대 국제정치체제의 기원과 전개


"백년전쟁(1337~1453)을 거치면서 정부의 전반적인 '군사-행정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는 백년전쟁이 기간과 규모 면에서 그 이전의 전쟁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한편에서는 두 왕국의 완전한 통합을 목표로, 다른 한편에서는 영국을 다시 섬나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치열하게 그리고 전례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싸움을 이어나가다. 그 결과 전쟁 기간 동안 군사기술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기병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궁수와 보병의 중요성이 증가했다. 14세기 말부터는 화포가 전투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년전쟁을 계기로 병력을 동원하고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과거와 같이 영주에 대한 봉건적 의무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기사들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자원병을 모집해야 했다. 자원병이 병력동원의 중심적인 부분이 된 것은 백년전쟁이 처음이었다."(48-9)


"전쟁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점점 늘어나는 전쟁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세금이 상설화되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조세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결과 프랑스는 왕권의 약화와 분열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1445년 샤를 7세는 칙령을 발표하여 유럽 최초의 상비군으로 알려진 부대의 창설을 골자로 하는 군사개혁을 감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정부가 이전보다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조세수입 증가는 이웃한 영국, 카스티야 등과 비교해서도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특히 프랑스보다 빠른 시기에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영국이 백년전쟁 이후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전시에 이룬 재정상의 혁신을 이어나가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프랑스의 성취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49-52)


"1494년을 근대적인 국제정치의 출발점으로 잡는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근대국가'로서의 프랑스가 벌인 첫 번째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둘째, 비록 '전근대적' 혹은 '중세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으킨 전쟁은 적어도 그 외관에서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근대국가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셋째, 이탈리아전쟁은 1516~19년을 전후하여 모습을 드러낸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제국과 프랑스의 세력다툼으로 확대되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고, 두 나라 사이의 대결은 곧 이탈리아를 넘어 서부 독일,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대립은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의 중심축이었다. 두 나라의 세력다툼은 1750년대 두 나라가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체결한 이른바 '외교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55-6)


"카를 5세를 수장으로 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출현은 유럽 근대국제정치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19년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의 관심은 합스부르크제국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막는 데 집중되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출현에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를 5세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그 모든 영토를 상속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상속도 의도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었다." "'연합왕국'이었던 합스부르크제국의 스페인과 네덜란드, 밀라노와 나폴리 등은 모두 통치자가 카를 5세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국가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아니라 통치자 개인의 지배여서 각 영토의 정치적 실력자들과 신분제의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통치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통치자는 각 영토에 동일한 자치권을 일률적으로 부여하는 대신 정치적 실력자들과 신분제의회와의 개별 협상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했다."(61-3)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과 함께 마침내 이탈리아전쟁이 막을 내렸다. 1559년에 전쟁이 끝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양측의 재정이 더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갈되었다." "둘째, 프랑스에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고 불과 두어 달 후에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정치적 불안정이 커지면서 프랑스의 대외적인 활동 능력이 제약되었다. 셋째,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발발했다. 종교전쟁은 부분적으로 군주의 때 이른 죽음으로 초래된 왕권 약화로 촉발되었다. 프랑스는 부르봉가의 앙리 4세(r.1589~1610)가 왕위에 올라 정치적인 안정을 다시 가져올 때까지 국내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은 1559년을 기점으로 중단되었고, 1635년까지 두 나라는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두 나라는 전면전을 감행하지 않았을 뿐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서로를 견제했다."(69-70)


"카를 5세의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유지와 보존이었다. 펠리페 2세 역시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여러 영토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에 비해 객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1556년 이후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영토를 포함했다. 또한 16세기 전반 합스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프랑스가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일단 영토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모두 이베리아반도와 육로로 연결되지 않아서 마드리드의 펠리페 2세가 이 두 지역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상당했다. 특히 카스티야에서 거친 대서양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가 더욱 어려웠다."(82-3)


"네덜란드와 함께 스페인 연합왕국을 유지·보존하는 데 펠리페 2세가 직면한 또 하나의 장애물은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린 영국이었다. 영국은 종교전쟁으로 약화된 프랑스를 대신하여 네덜란드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사략선을 동원하여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고 나포하는 등 스페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다. 1580년 펠리페 2세가 왕가의 대가 끊긴 포르투갈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막대한 크기의 해외영토가 스페인의 해외영토에 합쳐지자 영국의 스페인에 대한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88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하여 영국 원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네덜란드와 영국은 재위 기간 내내 연합왕국을 유지·보존하려는 펠리페 2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았거나 정당하게 획득한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84-5)


"한편, 1595년 앙리 4세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여전히 자신을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스페인의 간섭을 물리치고 외부 적과의 싸움으로 국내 분열을 일시적으로나마 봉합하고자 하는 동기가 전쟁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내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연방, 영국과 전쟁 중이던 스페인에 세 번째 전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큰 부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네덜란드연방과 영국, 프랑스가 동맹을 체결했다. 1596년 5월 세 나라는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하여 셋 중 어느 한 나라도 다른 두 나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이제 펠리페 2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전쟁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이 (내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세 나라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맞춰졌다."(105)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음에도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준수한 전과를 올렸다. 재정적으로 적절하게 뒷받침된다면 스페인군의 전력은 여전히 유럽 최강이었다." "이에 앙리 4세는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영국, 네덜란드연방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펠리페 2세에게 평화조약 체결을 제의했다. 그의 재위 기간을 통틀어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채무에 대한 지급정지를 선언한 펠리페 2세는 프랑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1598년 5월 베르뱅 조약으로 두 나라는 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스페인은 칼레를 프랑스에 되돌려주었다. 다수의 프랑스인은 조약체결을 사실상의 승리로 간주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대다수 프랑스인이 이를 프랑스의 패배로 여겼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이후 40여 년 동안 스페인의 막강한 힘이 유럽인에게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105-6)


"유럽에서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의 탄생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규모를 갖춘 제국의 등장은 주변 국가들에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제국이 '유럽제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대외전략은 기본적으로 수세적·방어적이었다. 하지만 폴 케네디가 지적했듯이 제국의 전례 없는 규모로 인해 그러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전략도 주변 국가들에는 위협적인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합스부르크제국을 견제할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토가 합스부르크제국에 속한 영토에 둘러싸인 프랑스는 이 '포위망'을 깨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반추하고 개념화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가운데 유럽 국가들은 근대적인 국제정치의 기본 문법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114)


3 30년전쟁과 17세기 중반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위기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에는 심각한 분쟁의 소지가 될 만한 몇몇 요소가 포함되었다. 우선 평화협정은 프로테스탄티즘 중 루터파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칼뱅교를 비롯한 다른 프로테스탄트 분파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비루터파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적지 않게 심각한 문제였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평화협정에서 교회제후국의 통치자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면 그 통치자는 제후로서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교회제후국에 관한 유보조항')는 규정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협정 체결 이후에도 유보조항을 협정의 일부로 볼 수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반면 가톨릭 제후들은 교회제후국에서 프로테스탄트 귀족과 시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협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의 위반이라고 맞섰다. 평화협정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은 이후 30년전쟁의 발발을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38)


"보헤미아는 15세기 초에 얀 후스가 주도한 종교개혁운동의 유산을 간직한 곳이었다. 1618년에 발발한 보헤미아 반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반란을 연상시켰다. 양자 모두 합스부르크 연합왕국에 대한 저항이었고, 중앙정부의 강압적인 종교정책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종교 자유를 확보하는 문제가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 중앙정부와 반란세력 사이의 싸움에 제3자가 개입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프라하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남짓 지난 1619년 7월 보헤미아 반란 주도세력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슐레지엔, 상·하부 라우지츠의 다섯 개 지역으로 구성되는 '보헤미아 연합'의 수립을 결의함으로써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같은 해 8월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폐위를 선언했고, 칼뱅교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내전'이 독일의 '내전'으로 확대되었다."(149-50)


"신앙심과 정치적 야심을 동시에 지닌 프리드리히 5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보호와 증진이라는 명분 아래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정치적 입지의 확대와 강화를 모색해온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 5세의 왕위 수락은 1619년 당시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결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일단 독일을 포함하여 유럽 전역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가 주도한 가톨릭화 작업이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쾰른 분쟁, 도나우뵈르트 사건, 율리히-클레베 계승전쟁 등에서 나타난 합스부르크 황제와 가톨릭 제후국의 공세적인 정책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프리드리히의 얼핏 무모해 보이는 보헤미아 왕위 수락 결정은 합스부르크가 주도하는 반종교개혁의 예봉을 꺾고 프로테스탄트 제후국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선제적인 조치로 이해될 수 있다."(150-1)


"1620년 빌라 호라 전투에서의 승리로 보헤미아 반란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한 페르디난트 2세는 1629년 3월 '복원칙령(Restitutionsedikt)'을 발표하여 1552년 이후에 세속화된 모든 교회영토의 재(再)가톨릭화를 명령했다." "일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과격한 내용의 칙령이 발표되자 모든 종교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 칼뱅교 제후들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오랜 기간 페르디난트 2세를 지지해온 작센을 비롯한 루터파 제후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상당수 가톨릭 제후들 역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칙령이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위기를 부채질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가 제국 내에서 오랜 기간 지켜져온 '정치적 금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는 스페인도 우려를 표명했다. '복원칙령'은 페르디난트 2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157-8)


"1630년 7월 36세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독일 북부 포메른에 상륙했다. 스웨덴의 개입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던 합스부르크와 가톨릭 세력의 우위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반면에 1630년 이전까지 유럽 국제정치체제에서 주변적인 위치만을 점했던 스웨덴은 30년전쟁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단숨에 주요 강대국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스웨덴은 이때 획득한 강대국이 지위를 '대북방전쟁'이 종료된 1721년까지 유지했다." "구스타브 아돌프가 30년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합스부르크-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스웨덴의 안전을 지키는 데 있었다. 물론 이들로부터의 위협이 임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독일 전역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스웨덴의 안전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황제가 같은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와 손잡고 스웨덴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었다."(168, 172)


"스웨덴이 무려 18년 동안 중단 없이 독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군사기술과 행정역량 때문이었지만, 프랑스가 개입 초기부터 스웨덴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631년 1월 베르발데 협정에서 프랑스는 스웨덴에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독일에서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수년간 스웨덴의 전쟁 개입을 부추겼다. 프랑스가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위그노와의 오랜 싸움이 1628년 10월에야 라로셀 함락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만토바 계승전쟁에 개입하여 스페인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벌어야 했으며, 국내적으로는 '데보(devots)'라 불린 정치그룹이 같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슐리외는 폴란드와 스웨덴 양국 간의 정전협정 체결을 중재했고, 구스타프 아돌프가 참전한 후에는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177)


"스페인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사이 프랑스는 스웨덴과 헤세-카셀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과 동맹을 맺고 1637년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 3세(r.1637~57)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뇌르틀링겐 전투(1634)의 패배로 독일 북부로 물러나 있던 스웨덴군은 본국에서의 병력 증원과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독일 중심지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스웨덴군은 황제의 군대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국의 군대에 맞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완벽하게 부활했다. 30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제와 제후국의 군대는 스웨덴군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1643년 7월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전쟁을 매듭짓기 위한 평화회담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양측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양측 간의 싸움은 평화조약이 체결된 해인 1648년까지도 계속되다가 그해 10월 각국 대표들이 조약문에 최종적으로 서명하고 나서야 종료되었다."(190-2)


"몇몇 역사가는 30년전쟁의 시작단계에서부터 국제전으로의 성격이 중요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30년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오랜 기간 지속된 스페인과 프랑스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보헤미아 반란에서 비롯된 황제와 독일 제후들 사이의 전쟁은 강대국 사이의 〈오랜 갈등과 경쟁관계에 얹혔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은 전쟁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벌어진 종교적·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30년전쟁은 1635년 혹은 적어도 스웨덴이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1630년 이전까지 독일의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었다. 1630년 이전에 전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제국 내에서 가톨릭-프로테스탄트 관계와 황제-제후국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30년전쟁이 전적으로 강대국 국제정치의 문제였다고 결론짓기보다는 1630~35년을 계기로 독일의 전쟁에서 국제전쟁으로 성격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193-4)


"17세기 중반은 오랜 기간 유럽 국제정치사에서 근대적 국제체제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여겨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의 한가운데에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중요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베스트팔렌 조약의 역사적 의미와 의의를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주권원칙이 최초로 확립되었다는 믿음의 타당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조약에 관한 역사적 해석의 정확성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 견해에서는 평화조약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이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베스트팔렌에서 주권원칙이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역사가들과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에 대해 두 가지 이유에서 의문을 제기한다."(206-8)


"먼저 기존 견해에서는 뮌스터 조약 제65조에서 제후국들이 독자적으로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리야말로 주권이 징표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제후국들은 1648년 훨씬 이전부터 타 국가들과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한을 사실상 인정받아 행사해왔다." "독일 제후국들이 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상위의 정치적·법적 조직이 해체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약을 협상하고 체결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제후들의 기본 입장은 자신들의 오래된 특권이 유지·보존되어야 하며, 30년전쟁 기간 동안 이를 빈번하게 침해한 황제의 권력 행사에 분명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이들이 황제의 권력과 제국의 제도들을 무력화하고 스스로 주권국가가 되고자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08)


"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신·구교 간 공존 문제가 해결되면서 종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아울러 연합왕국에 내재한 불안정 요인이 17세기 중반 이후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연합왕국의 결함은 17세기 중반 이전 주요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전쟁이 연합왕국의 '내부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종교전쟁과 1640년대의 카탈루냐 반란도 전자는 스페인과 영국이, 후자는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부분적으로 국제화되었다. 이에 반해 베스트팔렌 이후의 전쟁들은 거의 전적으로 '국제전'이이었다. 이는 17세기 중반 이후 유럽 국가들이 연합왕국의 결함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연합왕국 내의 어떤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촉발하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타 국가에 의해 이용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211-3)


4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의 부상과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변화


"1659년 8월 중순부터 11월 7일까지 24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피레네 조약의 체결로 프랑스는 1635년 이후 24년간 중단 없이 계속된 전쟁을, 스페인은 30년전쟁이 발발하고 네덜란드와의 정전협정이 종료된 1618~21년 이후 무려 40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마무리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559년 스페인과 프랑스는 카토-캉브레지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역시 수십 년간 지속된 전쟁을 마무리한 바 있다." "다만 국제정치적인 위상에서 1559년과 1659년 두 나라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한 이후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전성기를 구가한 반면, 조약체결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마상시합에서 앙리 2세가 낙마하여 죽음을 맞이한 이후 프랑스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내전의 늪에 빠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레네 조약 이후 프랑스는 젊고 유능한 루이 14세 치하에서 유럽 국제정치를 주도한 반면, 스페인의 지위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236-7)


"유럽 국제정치무대에서 스페인의 위상은 눈에 띄게 저하되기 시작했다.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페인은 모든 힘을 포르투갈의 독립을 저지하는 데 쏟아부었다. 하지만 1665년 펠리페 4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계속된 포르투갈에 대한 대공세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1665년 빌라비치오사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은 스페인군에 대승을 거뒀다. 1668년 스페인은 결국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매듭지었음에도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독립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자 당대인들은 왕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다. 1667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상속전쟁'을 일으켜 스페인령 남부 네덜란드를 공격했지만, 스페인은 변변하게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엑스라샤펠에서 개최된 평화회담에서 스페인 대표단은 프랑스 왕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프랑스와 남부 네덜란드 사이의 국경선을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들여야 했다."(238-9)


"1658년에 결성된 라인 동맹은 서부 독일에서 일종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제후국들은 동맹을 통해 서부 독일이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프랑스는 독일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신 제후국들로부터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이 지역을 거쳐 남부 네덜란드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라인 동맹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고, 이로써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지역에서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를 둘러싼 대외환경이 안정적이었음에도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한 후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는 대신 국정을 직접 장악한 루이 14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가 더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었다. 1661년 이후 무려 54년간 프랑스의 거의 모든 주요 대외정책을 직접 결정한 루이 14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240-1)


# 루이 14세가 치른 전쟁들

1. 상속전쟁(1667~68) : 펠리페 4세가 사망한 후, 자신의 왕비이자 펠리페 4세의 장녀인 마리-테레즈의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벌인 전쟁. 네덜란드연방, 영국, 스웨덴이 3국 동맹을 체결하여 양국 간 합의를 종용하였고, 그 결과 엑스라사펠 조약이 체결됐다. 

2. 네덜란드전쟁(1672~78) : 프랑스 안보의 위협요소였던 남부네덜란드를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전쟁 초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에 도취된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연방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개입했다. 그 결과 네이메헨 조약이 체결됐다.

3. 재결합전쟁(1683~84) : 독일과의 국경선을 '합리화'한다는 명분 아래, 프랑스 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과 스페인, 스웨덴에 속했던(속한다고 여겨졌던) 영토들을 합병한 전쟁. 1681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들이 '제국군' 창설에 합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4. 9년전쟁(1689~97) : 퀼른 선제후국의 후임자 선출을 둘러싸고 프랑스가 '재결합전쟁'에서 획득한 영토의 안전을 빌미로 일으킨 전쟁. 동맹국(영국·스페인·네덜란드연방·오스트리아·독일 제후국들)이 참전하면서 '소모전'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레이스베이크 조약이 체결됐다.

5.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 :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자신의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에게 넘기자 프랑스·스페인의 통합 가능성을 우려하던 동맹국(영국·네덜란드연방·오스트리아)이 프랑스에 맞서 벌인 전쟁.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됐다.


"1712년 1월 29일부터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약 15개월 동안 진행된 평화회담 기간 내내 영국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적국인 프랑스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같은 동맹에 속한 네덜란드연방과 오스트리아도 영국의 평화안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볼링브룩이 큰 틀을 마련한 영국 평화안의 대원칙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다시는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세력균형의 원칙에 따라 스페인의 왕위계승과 영토분배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볼링브룩은 영국의 특수한 이익, 곧 네덜란드연방의 방어태세를 약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성과였지만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비하면 네덜란드연방에 주어진 보상은 너무나 미약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네덜란드연방이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마지막 전쟁이었다."(301-2)


"위트레흐트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영국은 유럽 최강의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적어도 7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해와 지중해,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영국의 제해권이 굳건히 유지되었다. 비록 하노버가의 조지 1세가 영국 왕위에 오른 후 정권을 탈환한 휘그당에 의해 탄핵되어 런던탑에 갇히거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옥스퍼드와 볼링브룩을 비롯한 토리당의 꿈이 실현되었다. 지중해의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획득으로 영국은 자국 상인들의 레반트 무역을 지원할 천혜의 해군기지를 확보했고, 뉴펀들랜드 획득으로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남아메리카에서는 네덜란드연방을 배제하고 수익성 좋은 사업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 왕위의 프로테스탄트 계승 원칙을 인정하고, 제임스 2세의 아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할 것도 약속했다. 이 합의에 따라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로렌 공국으로 망명지를 옮겨야 했다."(302)


"1714년 3월 라슈타트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와 란다우를 보유하는 대신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 중 라인강 우안에 위치한 브라이자흐, 켈, 프라이부르크 등 모든 도시와 요새를 반환할 것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또한 이탈리아에서 과거 스페인에 속했던 거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밀라노와 만토바, 미란돌라, 파르마, 피아첸차 등 주변의 작은 공국, 나폴리, 사르데냐가 모두 오스트리아의 소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남부 네덜란드 역시 오스트리아 수중에 들어갔다. 스페인 왕위와 모든 영토의 계승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으므로 평화조약체결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던─카를 6세는 1725년까지도 자신을 스페인 국왕으로 칭했다─오스트리아는 역설적이게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참전국 중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더불어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304-5)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발단은 프랑스의 부르봉가가 왕위를 계승하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왕위를 계승하든 어느 한편의 왕위계승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스페인을 차지하는 국가로 급격히 기울어질 것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전쟁을 결심하게 한 것은 왕위계승으로 초래될 국가들 사이의 힘의 배분 변화였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왕위계승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붕괴를 막기 위한 '세력균형 전쟁', '예방전쟁'이었다." "위트레흐트 평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들이 남긴 글에서 드러난 한 가지 중요한 인식상의 변화는 유럽 국제정치체제가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로서 개별 국가의 '사적 이익'과 구분되는 '공적 이익'을 갖는다는 관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가장 중요한 '공적 이익'은 '안정'과 '평온'으로 규정되었다. 개별 국가의 '사적 이익'은 이러한 체제의 '공적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정당하게 허용될 수 있었다."(308-9)


5 18세기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 힌슬리와 도일의 이론과 그 한계점

1. 1715년 이후 그 어떤 유럽 국가도 단독으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고전적인' 세력균형을 이루는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와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종종 '전근대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개념화·이론화의 수준이 떨어졌지만), 이들은 이미 세력균형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2. 18세기 유럽 국제관계는 외재 변수들이 통제될 때 세력균형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실험실' 같은 환경을 제공했다. → 18세기 이후 국가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국가이성 이념이 판단기준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군주의 명예와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정책결정자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변심 같은 외재적 변수는 여전히 존재했다.


"위트레흐트 이후의 유럽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프랑스가 더 이상 여타 국가들을 위압하거나 이들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스웨덴과 폴란드, 러시아 사이에 '대(大)북방전쟁(Great Northern War)'이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서유럽은 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1740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비견될 만한 규모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과 무력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거의 25년간 쉼 없이 이어진 전쟁의 후유증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면서 갈등의 중심축이 사라짐에 따라 군사적 충돌의 강도가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 대신 각 국가는 파트너를 바꾸어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동맹을 체결했다. '주적(主敵)'이 사라진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협력할 상대와 적대할 상대를 택했다."(324-5)


"1716년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 체결에 합의했다. 영국이 먼저 동맹체결을 제안했고, 오를레앙의 섭정체제가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던 프랑스는 잠시 고민한 끝에 이를 수락했다. 9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20년 이상 치열하게 대립한 두 나라가 동맹을 체결한 것은 내정 불안의 위험에 처해 있던 오를레앙과 조지 1세가 안정적인 대외환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동맹을 체결하는 대가로 프랑스는 영국에 하노버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반란을 주도한 '제임스 3세'를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 교황령으로 추방할 것을 약속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서약을 깨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 오를레앙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1717년 네덜란드연방의 가입으로 삼국동맹으로 재편된 이 동맹은 이후 1731년까지 양국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위트레흐트 체제에 가장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였다."(327-8)


# 1715년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를 대신하여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1723년까지 섭정 역할을 맡게 되자, 왕위계승 서열에서 앞서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했음에도 오를레앙 공작의 정통성을 공공연히 문제 삼았다.


# 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법'에 따라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독일인의 왕위계승은 정통성 문제를 야기했고, 자코바이트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왔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1731년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제2차 빈 조약 체결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영국이 오스트리아와의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 했고, 프랑스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내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이 아닌 오스트리아가 영국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맹 파트너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화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너무나 심각하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모두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대륙 국가였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가 1680년대 이후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중·동부 유럽에서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획득하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도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밀라노, 나폴리 등을 획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자 프랑스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2)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에 즉위하기 훨씬 전부터 새로운 영토획득이 프로이센 통치자로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1731년 19세의 프리드리히는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당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영토는 브란덴부르크와 동프로이센 사이에 위치한 서프로이센과 스웨덴령 포메른이었다. 1740년 슐레지엔이 새로운 목표물이 된 것은 카를 6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은 그동안 주저하고 망설이던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특히 당시 서인도제도에서의 무역 분쟁이 발단이 되어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을 지원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자국의 위상을 강화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망으로 활짝 열린 기회의 창문을 적극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던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을 계기로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351-3)


"프리드리히 2세의 슐레지엔 침공으로 대륙에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무렵 영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은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무역 분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국령 자메이카와 프랑스 소유의 몇몇 섬을 제외하면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의 주요 섬들과 플로리다, 멕시코, 온두라스,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보유한 스페인 정부와 경제적으로 큰 이윤이 보장되는 이 지역과의 무역을 늘려나가기를 원하는 영국 무역업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원인이 되어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국민들은 영국이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었지만, 예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했다." "유럽대륙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 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고, 영국-스페인 전쟁은 차츰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일부로 흡수되었다."(353, 356)


"이제 오스트리아에게 도움을 제공할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1742년 7월 28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주선으로 베를린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베를린 조약의 체결과 함께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첫 번째 국면이 막을 내렸다. 의심의 여지없이 승자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는 애초에 세웠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슐레지엔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슐레지엔 합병으로 프로이센의 인구는 220만 명에서 32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작센의 공세에 사실상 홀로 맞서야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 중 슐레지엔과 보헤미아의 일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이 독일을 넘어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면, 오스트리아 역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확인받을 수 있었다."(365)


"대륙의 상황에 한층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의 주선으로 1943년 9월,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사이에 보름스 조약이 체결됐다.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시칠리아를 최종적으로 차지하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보름스 조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였다. 오스트리아로부터 할양받기로 한 영토의 전략적 가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가 약속을 지킨다면 사르데냐는 밀라노와의 사이에 마조레 호와 티치노 강, 포 강이라는 '자연국경'을 가지게 될 터였다. 카터릿은 〈이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사르데냐 국왕은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약 120년 후 현실이 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이처럼 높은 가치를 지닌 영토할양을 약속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르데냐와의 동맹을 원하는 프랑스-스페인과 영국-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몸값'을 올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368)


"보름스 조약의 체결은 루이 15세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르데냐와 동맹을 맺은 결과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긴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다시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베를린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에 다시 개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745년 12월 15일에 체결된 드레스덴 조약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침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녀로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1745년 1월에 사망한 카를 6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선출된 남편 프란츠 1세의 권위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드레스덴 조약으로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막을 내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중립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클라인슈넬렌도르프와 베를린에 이어 드레스덴에서 세 번째로 프랑스와의 동맹를 일방적으로 포기했다."(369-71)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한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참전국들이 1748년 10월 18일 엑스라샤펠에서 조약안에 서명함으로써 8년여에 걸쳐 지속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엑스라샤펠 조약의 기본원칙은 '전전(戰前)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남부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에 반환했고, 영국은 1745년 6월에 빼앗은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부르 요새를 반환했다. 오늘날의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브레턴 섬에 위치한 루이스부르 요새는 프랑스령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오스트리아는 밀라노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며, 영국은 1738년 영국-스페인 전쟁 발발 이전에 누리던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의 무역특권을 다시 인정받았다." "베를린과 보름스, 드레스덴에서 영국의 압력으로 상당한 양보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오스트리아는 엑스라샤펠에서 다시 한번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데 대해 크게 분노했고, 영국과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379-81)


"169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영국과 대등한 해군력을 보유했다. 오히려 전함 숫자에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에 앞섰다. 영국 해군이 9년전쟁 중에 벌어진 1692년 바르플뢰르 해전과 라오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동맹국인 네덜란드연방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9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의 해군력은 프랑스에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은 꾸준히 전함을 건조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지상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재정적으로 벅찬 상황에서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는 해군력 증강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가졌다. 프랑스 정부는 값비싼 전함을 건조하고 함대를 운용하는 대신 사략선을 활용하여 적국의 민간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상업 및 무역 활동을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해권 장악이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411-2)


"결국 1758년을 전후하여 완전한 저력을 갖추게 된 영국 해군은 프랑스에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프랑스 선박과 이를 호위하는 전함의 항해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영국 선박은 프랑스 해군과 사략선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인원과 물자를 안전하게 북아메리카로 운반했다. 1758년을 기점으로 북아메리카의 전황이 영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황이 역전된 두 번째 이유는 영국이 프랑스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북아메리카 현지의 인적 자원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7년전쟁이 발발할 즈음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계 주민의 수는 5만여 명에 불과했던 데 비해 영국계 주민은 110만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피트가 현지 주민에게 영국의 영국의 전쟁 노력에 인적·물적으로 기여하면 전쟁이 끝난 후 본국 정부가 그 비용을 모두 변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415)


"1759년은 영국에 '기적의 해'였다. 북아메리카에서 퀘벡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지역의 바다와 육지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도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해군은 서인도제도의 과들루프를 점령하여 이 섬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와 커피 등을 본국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이베리아반도 인근의 라고스 만과 프랑스 서부 해안의 퀴베롱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정찰군이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다. 이는 피트 내각이 전례 없이 많은 수의 병력을 대륙에 파병한 덕분이었다. 무려 10만 명의 영국군이 본국의 지원을 받는 5만 명의 독일군과 함께 페르디난트의 지휘를 받았다. 당대의 유명한 예술사가이자 정치인이던 호레이스 월폴은 계속되는 승전보에 〈승리를 알리는 종이 닳을 정도〉라고 썼다. 영국과 프랑스의 7년전쟁은 1759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승부가 갈렸다."(416-7)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은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6주의 협상을 거쳐 체결되었다. 1648년 이후 체결된 모든 평화조약을 위한 협상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협상이 완료되었다. 조약 내용은 단순명료했으며 두 나라는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하는 데 합의했다. 오스트리아는 1742년의 베를린 조약과 1745년의 드레스덴 조약을 재확인했다." "엄청난 인명 희생과 재원의 소진을 초래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어떠한 영토상의 변화도 없이 종료되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실지와 명예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굳이 승자를 따지자면 프로이센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세 나라를 상대로 전반적으로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프로이센을 승자로 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이유다."(419-20)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프랑스와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데 있다. 7년전쟁을 통틀어 둘 이상의 동맹국 군대가 합동으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했더라면 프로이센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동맹국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18세기 유럽의 전쟁에서는 결정적이었던 프로이센의 또 하나의 승리 요인은 세 동맹국의 군대가 겨울철이 되면 충분한 식량과 사료를 확보할 겨울숙영지를 찾아 전장에서 철수하여 각지의 근거지로 이동해야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 나라의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를 지속적인 전략적 우위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즉, 프로이센군을 패배시킨 후 여세를 몰아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지 못했다."(421)


"1763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간에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뷰트 내각이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프랑스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거부한 것은 만약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게 되면 멀지 않은 장래에 전쟁이 재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 측에서 평화협상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베드포드는 프랑스에 뉴펀들랜드 해역에서의 조업권을 허용하는 것은 장차 영국을 상대할 해군을 재건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 피트에 대해 프랑스의 해군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은 〈자연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베드포드는 영국이 해상에서 절대 패권을 장악한다면 유럽 국가들은 서로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영국은 루이 14세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루이 14세의 기억이 반세기가 넘도록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영국에 더 신중하게 패전국을 상대하도록 한 것이다."(429)


"7년전쟁에 합류한 시점에 프랑스 정부 내에서는 영토의 크기보다 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획득한 상업적 부가 국가의 국력수준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프랑스가 7년전쟁을 계기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재정의함에 따라 해양세력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들과 대륙국가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중부 및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분절'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은 중부 및 동유럽 세 나라의 폴란드 분할(1772, 1793, 1795)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반대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원하여 영국과 벌인 전쟁(1778~83)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1800년대 나폴레옹의 집권과 함께 프랑스가 대륙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함에 따라 '분절'은 잠시 사라졌지만, 그의 몰락 이후 다시 중요해졌다."(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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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 990~1992년 프리즘 총서 27
찰스 틸리 지음, 지봉근 옮김 / 그린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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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세계사에서의 도시와 국가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national states─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된 자치 가능한 구조를 방편으로 다양한 인접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국가─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제국이나 도시국가 또는 다른 어떤 형태였다. 유감스럽지만 국민국가라 해도 반드시 국민들이 강한 언어적·종교적·상징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민족국가nation-state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웨덴과 아일랜드 같은 국가가 현재 이러한 이상형에 근접하지만 극소수의 유럽 국민국가만 민족국가로 보기에 적합하다. 영국, 독일, 프랑스는─기본적으로 국민국가이긴 하지만─분명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호전적인 민족성을 보이는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그 밖의 다른 지역과 한 묶음인 소비에트연방은 매일 고통스러운 차이를 경험했다." "지배자들 간에 서로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상호 권리를 인정했던 명목상의 독립국가들이 거의 전 세계를 점유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19)


"유럽에서 국민국가가 태동하고 국가적 군비 확장과 유럽의 긴 헤게모니 장악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들─990년 한참 이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에서 번창했던 느슨하게 결합된 지역적 제국들─이 유럽에서 득세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이 의문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다." "명확히 한정된 어느 정도 독립한 국가들로 분할되는 과정과 밀집하고 불균등한 네트워크의 동시 발생은 결과적으로 유럽을 다른 세계들과 구별시켰다. 도시와 국가의 변화하는 지형학 이면에는 (도시를 선호하는) 자본과 (특히 국가 안에서 확고해지는) 강제의 역학이 작동했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이중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990년 이후 유럽에서 득세했던 국가의 종류와 관련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는 거대한 변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유럽의 국가들이 결국 국민국가의 다양한 변형들로 통합했는가? 왜 변화의 방향이 그렇듯 유사한데 경로는 다양한가?〉라는 문제이다."(22-3)


# 기존 이론들

1. 국가주의적 분석 : 정치적 변화를 경제적 변화의 부분적 독립 과정으로 보며 특정 국가의 내부적 사건들의 결과로 제시한다.

2. 지정학적 분석 : 국제 체제 내에 '국가 제조 기술자'가 있으며, 국가 구성은 국가 관계에 대한 현재 채제에 강하게 조응한다.

3. 생산양식 분석 : 봉건주의, 자본주의 또는 다른 생산 조직의 논리가 국가 영토 내에서 작동하면서 국가와 그 변화를 추동한다.

4. 세계 체제 분석 : 국가 간의 관계를 경제 구조에서 도출하지만, 개별 국가의 구조를 세계 경제 내 위상의 결과로 간주한다.


"자본을 축적하고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이 책의 분석에서 도시는 확실히 중요한데, 이는 자본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이자 그들의 이권을 위한 조직적 동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각 가정의 생존 문제는 고용, 투자, 재분배 또는 다른 강한 연계를 통한 자본의 존재에 의존하는 바, 인구 분배는 자본 분배를 따라갔다(그러나 때때로 자본은 싼 노동력을 쫓아가며, 둘은 상호적 관계이다). 교역, 창고 저장, 은행, 생산은 모두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는데, 서로 인접함으로써 모두 이득을 얻는다. 농업 생산력에 의한 한계 내에서도 그러한 인접함은 조밀하고 차별화된 인구 구성을 촉진시키는데, 그들은 외부, 즉 도시에 이어지는 연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 성장의 혁신은 집중과 축적 사이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 축적이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집중화가 상대적으로 저조한 곳은 훨씬 작은 규모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자본 집중만이 단일하게 부각된 곳은 도시 인구가 중심지 주변에 응집한다."(43-4)


"유럽의 국가들은 실제로 핵심적 활동과 조직의 분야에서 상당히 달랐다. 세 가지 상이한 국가 양식은 990년 이후 중요한 분절의 시기에 유럽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확산하였다. 그 세가지는 조공을 받는 제국들, 도시국가와 도시연합 같은 주권 분할 체제, 국민국가이다. 첫째는 대규모 군대와 차출 기구를 건설했으나 지역 행정의 대부분은 지방 실세들에게 남겨 주었고 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주권 분할 체제에서는 연정과 협의 기구들이 전쟁과 차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국가적 규모에서 지속적인 국가 장치가 부상하는 일은 드물었다. 국민국가는 군사 조직, 차출 조직, 행정 조직, 심지어 유통 및 생산 조직조차도 상대적으로 조직적이고 중앙집권화한 구조 내에 통합한다. 이 세 가지 형식 모두의 오랜 생존과 공존은 유럽의 국가 구성이 단일하고 단선적이라는 통념, 또는 국민국가가 본질적으로 우월한 정부 형태라는─실제 점차 우월해지기는 한다─통념에 반하는 내용이다."(49)


"축적은 유럽의 경제사에서 보다 큰 장기적 차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심 고리는 단순하다. 장기적인 면에서 면에서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전쟁과 전쟁 준비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구성 요소를 생산해 냈다. 전쟁에 패한 국가들은 보편적으로 수축되고 흔히 그 존재를 마감했다. 국가의 크기와 상관없이, 가장 큰 강제 수단들을 소유한 국가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효율성(투입량 대비 산출량)은 유효성(총산출량)에 이어 두 번째 순서였다. 경쟁, 기술적 변화, 가장 큰 교전 상대국의 규모가 상호작용하며, 전쟁과 강제 수단의 창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광대한 확장을 이루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수록 점점 더 소수의 지배자들만이 자신들이 소유한 정규 자산으로 군사적 수단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지배자들이 단기적 차용과 장기적 조세로 바꾸었다. 두 활동 모두 기존의 자본 집중이 이루어진 곳으로 더 쉽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곳에서 통치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61-2)


2장 유럽의 도시와 국가


"990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가장자리에 살았던 대략 3000만 명의 사람들은 역사와 공동의 운명으로 연결된 단일한 집합적 인간들로 자신들을 생각하리라는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었다." "황제, 왕, 왕자, 공작, 칼리프, 술탄, 그리고 다른 강력한 통치자들은 정복자, 조공 수취인, 임대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영역 내 사람들을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통제하는 국가의 수장은 아니었다. 나아가 그들의 관할권 내에는 경쟁자들과 표면상의 신하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명목상 주권자들의 이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병私兵들이 대륙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유럽 어느 곳에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뻗어서 형성된 원 안에서 수명이 짧은 국가의 주권은 더욱 심하게 분열되어 수백 개의 공국, 주교 관할 지역, 도시국가, 그리고 수도의 작은 배후지에서 중첩된 통제를 가하는 권력체로 분열되었다."(78-80)


"1490년, 유럽의 주변 지역에는 실질적인 영토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이 자리했다. 오스만제국뿐 아니라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모스크바대공국, 튜튼기사단의 땅, 스칸디나비아 동맹,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나폴리가 그런 곳들이다. 그러한 권력은 대체로 임대료와 공물에 근거해 유지되었고, 자신의 지역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의 거물들을 통해 지배하였다." "보다 큰 국가들의 부서진 원형 내부에서 유럽은 극도로 주권이 분할된 땅으로 남아 있었다." "유럽의 8000만 인구는 500개의 국가, 국가 지망 세력, 작은 주, 유사 국가 조직들로 분할되어 있었다. 다시 5세기가 지난 1990년, 유럽인들은 통합 작업을 훨씬 더 강화하였다. 현재 6억 명이 유럽 대륙 주위에 살고 있다." "비록 1490년에 존재했던 정치적 독립체들 대부분보다는 크지만, 룩셈부르크와 안도라 같은 소국들은 진기한 것이 되었다. 계산법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유럽 전체는 단지 25~28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82-4)


"유럽의 도시들은 상업과 산업의 우선성에 의해 느슨한 위계를 형성했는데, 거의 모든 시기에 소수의 도시 클러스터들이 나머지 도시들을 확실하게 지배했다." "상업적 농업은 전반적으로 상인, 대규모 자영농, 작은 영지의 영주들을 번창하게 했지만, 대영주가 농촌 환경에서 민중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시켰다." "성장하는 도시들은 커다란 이주민 흐름을 생성시켰다. 즉, 행상·상인·하인·장인들이 해마다 계절마다 도시와 시골 사이를 자주 오갔던 것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강한 교역의 존재는 지배자들에게 관세와 소비세를 통해 수익을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과세의 기회, 영주의 권력, 군대의 공급은 국가가 형성되는 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량 공급, 이주, 교역, 통신, 취업 기회를 통해 큰 도시 클러스터들은 주변 지역의 사회적 삶에 그 표시를 각인시켰고, 따라서 국가권력을 그 지역까지 확장하려는 지배자들의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도시 성장의 시기에 이러한 효과들은 더 강화되었다."(92-5)


"강제의 지형도와 자본의 지형도 사이에 오랜 기간 지속되는 불일치는 이들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적 관계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하도록 했다. 990년부터 현재까지 유럽 전체적으로 자본과 강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변천은 두 개의 평행선 원호를 따라왔다. 먼저 '가산제'의 시대에 유럽의 왕조들은 보통 필요한 자본을 직접 통제 아래 있는 토지와 주민들로부터 공물과 임대료로 차출하였다.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금액은 통상 엄격한 계약상의 제한 금액 내에 있었다. '중개'의 시대(특히 1400년~1700년 즈음)에 왕조들은 대출, 수익 사업 관리, 세금 취합을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자본가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면 '국유화'의 시대가 왔는데, 대부분의 주권자들이 재정적 장치들을 국가 구조에 직접 병합시켰고, 독립적인 계약자들이 관여하는 것을 급격하게 축소시켰다. 근세기 '전문화'의 시대에는 군사 조직에서 재정을 더 확실하게 분리하였고, 고정자본 감독에 대한 국가 관여를 증가시켰다."(101)


"강제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진화가 이루어졌다. 가산제의 시대에 왕조들은 하인, 신하, 왕에게 인력 봉사를 해야 했던 민병대로부터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이 또한 계약상의 제한 내에 국한되었다. 중개의 시대(특히 1400년~1700년까지)에 왕들은 상당한 행동의 자유를 유지했던 하청업자들로부터 공급받은 용병들에게 점점 더 의존했다. 다음으로 국유화의 시대에 주권자들은 육군과 해군을 국가의 행정 구조에 직접 흡수했는데, 점차 외국 용병들을 돌려보내고 대부분의 병력을 국가 자체의 시민들로부터 고용하거나 징병했다. 19세기 중반 전문화의 단계에서 유럽 국가들은 대규모 민간 행정가들의 후원으로 시민 군대 체제를 통일하였고, 전쟁 이외의 강제적 사용에 특화하기 위해 경찰력을 분리시켰다. 19세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군대와 재정 메커니즘을 내재화하였다. 강제와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이는 다양하고 폭넓은 규율·보상·분배·보호 활동과 병행되었다."(101-2)


3장 전쟁이 국가를 만든 방식, 그리고 그 반대의 방식


"강제는 항상 상대적이다. 집중된 강제 수단을 통제하는 누구라도 이웃이 그런 수단들을 구축하게 되면 이익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1400년 이전의 유럽에서 친족 집단에 의한 대부분 국가의 통치는 그 경쟁을 가중시켰다. 번성하는 친족 집단의 성향은 확장과 점증하는 상속자 수에 비례한 영역 확보를 추구하는 바, 이것이 정복을 조장했고, 따라서 경쟁 관계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공석이 된 왕위에 대한 권세 있는 왕조의 요구 덕분에 지배자 가족들 간의 결혼은 증가하였다. 주권이 분할된 유럽 지역에서 경쟁자들은 항상 쉽게 닿을 만큼 가까운 관계였지만, 어떤 특정한 중심권이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동맹으로도 항상 유효하였다. 더욱이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같은 보다 큰 국가들은 현재의 주권에 대한 '내부적' 경쟁자들을 오랫동안 품어 주었는데, 그 경쟁자들은 지배에 대한 일부 권리를 주장하는 무장 집단이며 외부의 적에 대해 묵시적이거나 명시적인 연합군으로 공헌하기도 했다."(133)


"모든 국가의 특정한 전쟁 만들기 유형은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요소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주요 경쟁자들의 특성, 외부를 향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지배자 자신과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신하여 지배자가 수행했던 보호 활동의 논리가 그것이다." "17세기까지 줄곧, 대규모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국내 지배를 위해 무장했고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던 지역 거물들에 의존한 탓에 그들이 지배자에 반대해 무기를 들 때마다 반복적으로 내전을 치러야 하는 위험에 마주쳤다. 1400년부터 1700년까지의 중대한 시기에 지배자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경쟁적 청구인들을 무장해제하거나, 고립시키거나, 동참하도록 하는데 대부분의 공력을 소모했다. 지방 권역에서는 자체의 소규모 경찰 병력을 오래전에 창설하였지만, 유럽 국가들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복을 갖추고, 급여를 받으며 관료제를 갖춘, 그리고 시민들을 통제하는 데 특화된 경찰력을 확립하였다. 덕분에 군대는 외부 정복과 국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132, 140)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유럽 국가 형성의 중대한 시기였던─유럽 대부분 지역에 배치된 군대들은 전반적으로 대영주와 군사 기획가에 의해 모집된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단순히 군대를 모집하고 이들에게 급여를 지불하는 것만을 수반한 것은 아니었다. 호전적 국가는 그만큼 보급을 해야만 했다. 17세기말 6만 명의 남성으로 된 군대와 4만 마리의 말들은 하루에 거의 100만 파운드의 곡식을 소비했다. 일부는 군사들과 함께 끌고 다녔고, 일부는 창고에 보관했으며, 군대가 위치한 곳이 어디건 대량의 곡식을 구해 주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은 막대한 비용과 조직이 필요했다. 당시의 금액과 임금으로 보면 100만 파운드의 곡식 가격은 일반 노동자 9만 명의 하루 임금과 같은 금액이었다. 군대는 음식 외에 무기, 말, 의류, 막사 또한 필요로 하며, 군대가 크면 클수록 개개인에게 보급품을 제공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하여 물자 보급에도 관여하게 된 17세기의 용병 사업가들의 거대 사업은 더욱 커졌다."(149)


"역사적으로 대국들이 군사적 비용을 당기 수입에서 지불할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그 부족분을 차용이나 또 다른 방식에 의해 해결했다. 즉, 채권자를 기다리게 만들고, 공직을 팔고, 고객들로부터 대출을 강요하고, 정부의 미래 수입에 대한 청구권을 획득한 은행가들로부터 빌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기꺼이 하고자 할 때는 대출 기관으로서, 대출 동원자로서, 그리고 관리자 또는 그 대출을 상환하는 수입의 모집인으로서도 국가에 봉사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국가 경제의 화폐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시작된 대중 동원 체제와 대규모 시민 군대의 시대에 국가의 순수 인구 규모는 대체적으로 전쟁 도발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자본가의 활약, 화페화, 활용 가능한 신용, 전쟁 도발의 용이함이 유럽 국가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점들은 자본가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국가들에서 전시 체제로 재빨리 변동하는 중요한 장점을 제공해 주었다."(157-8)


"해외의 제국은 모국에서 지상전을 치렀던 범주의 국가 구조와는 다르게 건설되었다. 그럼에도 국가와 제국의 관계는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유럽 국가의 특성이 유럽 외부로 확장하는 형태가 지배적이었고, 제국의 특성이 본국 중심지의 작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와 네덜란드공화국 같은 자본 집중 국가는 주로 교역의 독점권을 향한 무자비한 추구에 몰두했으나, 군사적 정복과 식민화에는 거의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노르웨이와 스페인 같은 강제 집중 국가는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정착, 토착(또는 수입) 노동력의 노예화, 공물의 강제 징수에 쏟았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절충형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제국주의 게임에 입장했고, 자본주의와 강제 전략을 결합하여 뛰어난 결과를 만들었다." "정복과 정착 전략은 불가피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육군과 해군을 필요로 했는데, 전세계에 걸친 관료들의 그물망이 태동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중앙정부에 관리를 추가해야 하는 일을 만들었다."(171-2)


4장 국가와 시민


"전쟁 만들기와 국가 만들기는 서로를 강화시켜 주며, 국가가 상당한 규모의 인접 영토 주변으로 확실하게 인정받는 경계를 구성하기 시작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구분이 안 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 둘 모두 지역 주민들로부터 자원을 차출─국가 만들기, 전쟁 만들기, 보호를 위한 수단을 국민 대중으로부터 끌어내기─하게 된다. 자원 차출 시도 때문에 국가가 보호에 관여하는 일이 늘어나는데, 이는 선택된 고객에 대한 경쟁자와 적을 저지하는 일이다. 차출과 보호가 확장하면서 국민 대중 내의 분쟁에 대한 판결 요구가 생성되었고, 여기에는 차출과 보호 자체에 대한 법적 규제가 포함되었다." "지배자들이 전쟁과 다른 강제 수단을 위해 지역 경제로부터 더욱더 많은 자원을 인출할수록, 그 경제 내의 주요 계급들은 강제와 전쟁의 영역 바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더욱 많이, 성공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사한 1000년의 범위에서 강제 활동이 명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75-6)


"산발적이건 대규모건 저항에 직면했을 때 지배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협상을 했다. 납세 저항자를 뭉개고 망설이는 납세자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데 '협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본보기의 처벌을 빈번히 사용하는 것─저항하는 이들 모두가 아니라 소수의 주모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 모든 연체자들 대신에 가장 부유한 지역 납세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권력자들이 민중 다수와 타협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어떤 경우건, 협상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모든 타협은 국가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청원, 국가 대 개인과 집단의 권리, 국가의 시민에 대한 의무를 창출했거나 아니면 확인했다. 그것은 또한 시민에 관한 국가의 권리도 창출했다. 우리가 지금 '시민권'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은 지배자들이 머리를 짜내고, 특별히 호전적 행위와 같은 국가 활동의 수단들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구획된 다수의 협상들로 구성된 것이 맞다."(183)


"1750년 이후 국유화와 전문화의 시대에 국가들은 거의 보편적이었던 간접 지배 체제에서 직접 지배의 새로운 체제로 이동했다. 이는 지역 공동체, 가정, 생산적 기업의 삶에 대한 중재되지 않은 개입을 의미했다." "18세기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세를 증대시키면서, 공동체·가정·기업과 바로 타협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율적 중재자를 모두 없앴다." "17세기 이전에 규모가 큰 유럽 국가들은 모두 강력한 중재자들을 통해 신민을 통치했는데, 중재자들은 상당히 자율권을 가졌고, 국가권력의 대리 행사를 통해 그들 자신의 이권을 챙겼다." "그러나 인력을 포함한 더 많은 자원이 전쟁에 필요해지자, 그리고 대국들의 정복 위협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훨씬 더 많은 지배자들이 오랜 중재자들을 우회하거나 억압하거나 끌어들여서 전쟁에 충당할 돈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와 가정에 직접 손을 뻗쳤다. 따라서 국가 상비군, 국민국가, 직접 지배는 서로 인과관계라고 하겠다."(186-8)


"지배자들은 국가권력을 조작하기 위한 더욱 자의식 강한 시도 중 하나로, 직접 지배를 장치하는 과정에서 인구 구성을 동질화하고자 자주 노력했다. 지배자의 시점에서 언어·종교·이데올로기가 동질화된 인구 구성은 왕의 요구에 반대하는 공동 전선을 펼 위험을 주었다. 따라서 동질화는 분리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 동질성은 많은 것을 보상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동질화된 인구 구성 내에서 일반 민중은 지배자와 동일화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의사소통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어질 수 있고, 한 분야에서 작동했던 행정적 혁신이 다른 곳에서도 그만큼 작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통의 기원을 느꼈던 사람들은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통합할 가능성이 더욱 컸다. 예를 들어 1492년 그라나다 정복을 완수했던 직후에 스페인은 종교적 소수자들─특히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개종과 이주 중에 선택할 기회를 주어서 주기적으로 동질화를 촉진시켰다."(191-2)


"직접 통치가 유럽 전역에 확산되자 유럽 보통 사람들의 복지, 문화, 일상은 그들이 거주하게 되었던 국가에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방식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 국가는 국어, 국가 교육 체계, 국가 병역,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부여하려고 착수했다." "그러한 점에서 삶은 국가 내부에서는 균질화되었고, 국가들 사이에서는 이질화되었다. 국가적 상징은 결정화되었고, 국어는 표준화되었으며, 국가 노동시장은 조직화되었다. 전쟁 자체는 균질적인 경험이었는데, 이는 군인들이 전체 국민을 대표하였고 시민 대중은 공동의 궁핍과 책임을 감내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 구성의 후기 단계에서 '민족주의'의 표지 아래 같이 묶을 수 있는 이질적인 현상들이 산출되었다. 그 말은 정치적 독립에 대한 요구에도 그들 자체의 국가를 갖지 못한 주민들의 집단적 행동 동기를 지칭한다. 그것은 또한 유감스럽게도 다른 국가에 강한 일체감을 가진 기존 국가의 주민들의 동기를 지칭하기도 한다."(206-7)


5장 국민국가의 계통


"국가란 명확한 영토 내에서 집중화된 강제의 수단들을 통제하는 차별적 조직이고, 어떤 점에서는 같은 영토 내에서 작동하는 모든 조직들에 대해 일차적 우선순위권을 행사한다. 무장한 남성들이 국가를 만드는데, 그 수단은 주어진 영토 내에서 강제의 수단을 축적하고 집중시켜서, 그 영토 내에서 생산과 재생산을 지배하는 조직과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구별되는 조직을 창설하여, 같은 영토 내에서 다른 집중화된 강제를 압수·포섭·청산함으로써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 안에서 관할권을 실행하면서 구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인접 영토들에 같은 과정을 확산시키고, 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되고 자율적인 조직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국민국가를 창안하였다." "비록 국가 창설자들이 항상 정복과 통제의 모델을 의식적으로 따르려 했지만, 그러한 활동들이 낳은 국가의 단계별 구성에 대한 계획을 세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활동은 강제적 통제의 하향식 위계를 필연적으로 창안하였다."(232-3)


"넓게 보면 유사한 방식으로,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브란덴부르크 국가는 호전적인 군주들과 무장한 영주들 사이의 강한 동맹, 귀족과 신흥 중산계급에 대한 통치 권력의 큰 양보, 농민에 대한 합동 착취, 한정된 범위에서 상업 자본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 "왕과 귀족의 상대적 무게(전쟁이 지속 가능한 국가 구조를 만들어 낸 정도)는 매우 다양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모두 잔혹한 강제에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이웃한 유럽 국가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16세기에 동유럽의 곡물이 서쪽으로 엄청나게 밀려오기 시작하자, 대영주들이 기존 통제 구조에서 운송을 통해 직접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대영주들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상인들을 억제했고 농업 생산자들을 강압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농노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권력 균형의 상황에서는 상업 확장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건설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자본가 계급도, 유럽의 도시국가를 닮은 국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250-1)


"우리는 국가 구성의 주요한 선택적 형식들로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스페인의 경로를 대조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유럽 전체의 범위에서 보면 그 넷은 (네덜란드와 베네치아 같은) 자본 집중과 (러시아와 폴란드 같은) 강제 집중의 경로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는 공통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네 경우 모두 야망을 품은 왕조들이 다양한 성공을 거치며, 16세기와 17세기에 군사력 구축을 위해 지방의 중요 신분을 대표하는 회합들을 분쇄하거나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신분 의회Estates가 복종하였고, 스페인 의회Cortes는 휘청거렸고, 영국 의회Parliament는 지배계급 권력의 방어벽으로 생존했다. 네 경우 모두 자본의 중심과 강제의 중심이 일치했던 점은─최소한 잠깐이었더라도─적시에 대규모 군사력 창설을 용이하게 했다. 그 적시란 대규모의, 고비용의, 잘 무장된 육군과 해군이 국민국가가 헤게모니와 제국을 추구하는 데 엄청난 장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기를 뜻한다."(280)


"왜 베네치아나 러시아는 잉글랜드가 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와 이탈리아는 1세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국민국가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전 역사가 그들 곁을 맴돌았다. 베네치아는 상업 귀족의 이익에 경도된 국가를 창설했고, 이 귀족 계급은 대규모의 영속적 군사력을 구축하려는 노력에 협조하는 것보다는 유럽 상업 체제의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른바 전제군주에 의한 국가를 창설했지만, 이들은 농민의 노동력과 그 생산물을 국가의 목적에 맞추어 내주는 것을 보류하려는 이해관계를 가진 영주들의 협력에, 그리고 국가가 생산한 이익을 쉽게 소비해 버리는 관료 체제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각기 다른 혁명─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볼셰비키 혁명─이 베네치아와 모스크바 사람들을 서유럽의 강대한 국민국가들을 닮아 가는 새로운 국가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계승 국가들도 이전 정체성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다."(280-1)


"중국에 대한 스키너의 설명은 군사력의 구축과 그 조직적 결과들이 자본과 강제의 상대적 무게, 차출과 지배의 '상향식'과 '하향식' 체제, 그리고 도시와 국가의 기능에 따라 유럽의 지역과 지역 사이에 어떤 다양성을 보였는지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비록 모든 국가들이 전쟁과 전쟁 준비에 핵심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러한 공통성 너머에 그들의 지배적 활동들은 자본과 강제와 이전 역사의 네트워크 내 위치에 따라 다양했다. 나아가 유사한 활동이라 해도 언제 어디에서 발생했는가에 따라 다른 조직상의 잔여물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점차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특정 국가의 구조와 활동을 결정했다. 국제전에서 국가의 자원을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장점 때문에,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체로서, 그리고 국가 구성의 모델로서 대규모 국민국가가 조공 수취 국가, 연합, 도시국가, 그리고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대체했다. 이러한 국가들이 마침내 유럽 국가 체제의 특징으로 규정되고, 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선봉에 섰다."(281)


6장 유럽의 국가 체제


"990년 무렵, 유럽 지역은 너댓 개의 상대적으로 독특한 국가 집단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동유럽의 정복 정권들이 계속 상대의 지배 영역 내부로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와, 남쪽으로는 비잔틴과, 동쪽으로는 스텝 지역의 무장 세력과 관계를 유지했다. 주로 무슬림이 지중해를 둘러쌌고 이베리아 지역 대부분을 뒤덮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플랑드르에 이르는 상대적 도시 지역에서는 수백 개의 반半자치 세력들이 교황령과 신성로마제국의 관할권 주장 지역과 중첩되었다. 색슨의 영역이 그 지역의 북동쪽 가장자리와 닿아 있었다. 북부 쪽의 다소 분리된 영향력 작용 지역에서는 덴마크 제국이 영국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이 국가 클러스터들은 곧 보다 강한 상호 연계를 맺는데, 그들은 지중해로부터 북쪽으로의 교역 확대, 스텝 지역에서의 유목민 군대의 끊임없는 출몰, 기독교와 무슬림의 영토 투쟁, 북쪽 해양 전사들의 광범위한 침략을 통해 연계되기 시작했다."(286-7)


"1490년으로 나아가 보면, 500년 전에 유럽인들은 이후 독특해진 두 가지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첫째는 조약, 외교관, 혼사, 그리고 광범위한 의사소통에 의해 연결된 상호 연계 국가 체제고, 둘째는 대규모의 훈련된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공식적 평화협정에 의해 종료되는 전면전이었다. 유럽인들은 전쟁 종료 후, 다수의 국가들이 합의한 문서에 의해 대륙 전체에 걸쳐 국경과 주권에 대한 주요 재편성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낡은 전쟁 형식은 해적질과 강도질에, 몽골의 개입의 마지막 국면에, 발칸 지역을 가르며 일어났던 무슬림과 기독교도 사이의 불규칙한 전투에,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탐험 여행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국가 체제를 닮은 어떤 것이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나아가 점차 그 참여자들은 도시국가, 연맹, 또는 제국이 아닌 국민국가─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중앙집권화된─들이었다."(288-9)


"19세기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종전 합의는 국가 체제 참여자들을 계속 입장하게 했고, 그 구성원들에 대한 주요한 재편성이 계속 나타났다. 1830년 프랑스혁명 직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프랑스의 사보이와 니스 병합, 그리고 이탈리아왕국의 창설은 1859년 오스트리아에 맞선 프랑스와 피에몬테의 전쟁에서 야기되었다.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북독일연방(제국의 전신이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직접적 결과물)의 구성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남동부 유럽에서 크림전쟁, 오스트리아-독일 전쟁, 그리고 여러 번의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매번 오스만 지배의 해체와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에 의한 새로운 국민국가 구성을 촉발시켰다. 그리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가 그 실례였다. 더욱이 크림전쟁의 종식(1856년)은 오스만제국을 터키로 재구성했는데, 이는 유럽의 구성 방식을 어느 정도 닮은 새로운 국가였다."(297-8)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은 흔히 유럽 국가 체제를 정상에 하나의 헤게모니 권력이 있거나 두 개의 경쟁 권력이 있는 단순 위계로 취급했다. 헤게모니를 다투는 전쟁에 대한 모든 이론은 국가들이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가정 위에 구축되었다. 사실 어떤 단일한 국가도 그러한 모델에 요구되는 방식의 체제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프랑스의 힘이 정점에 달했던 1812년, 영국과 러시아가 이에 굴복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19세기에 영국이 번창하였던 때,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은 모든 고비마다 영국과 분쟁을 벌였다. 단일한 위계 모델의 결함은 명백하고 치명적이다. 권력의 힘이 즉각 미치는 인접 지역에서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지만 근거지에서 떠날 경우 그 권력이 축소되는 것을 발견한다." "유럽 국가 체제에 대한 더 좋은 개념은 그것을 어떤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중심에 있고 영향력이 있지만, 체제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위계는 다른, 지리학적으로 분산된 네트워크로 다루는 것이다."(305-6)


"지난 3세기 동안, 강대국들의 협약은 권력에 대한 국가적 분쟁 발생에 대한 제약을 점점 더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는 국제전의 종결 후 합의의 시행, 식민지의 조직화, 군대와 관료와 다른 국가 장치의 요소들을 표준화한 모델의 확산, 국가 체제를 돌볼 임무를 맡은 국제 조직의 창설, 국경에 대한 집합적 보장,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개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협소화에 의해 국가 구성의 대안적 통로 가능성은 제한되었다. 전 세계에 걸쳐 국가 구성은 어느 정도 계획적인 국민국가─제국도 도시국가도 연방도 아닌─구성으로 통합되었는데, 이 모델은 강대국이 제안하고 보조하고 강요한 바에 따른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1500년에 지구 대지의 대략 7%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갖고 있었고, 이는 1800년 35%, 1914년 84%로 치솟았다. 이러한 자체 확장은 전 세계에 걸친 국민국가의 증식을 촉진하였다. 16세기 자본의 확장과 전쟁의 재조직화 모두 국민국가의 지배력 확대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319-21)


7장 1992년의 군부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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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역사 -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
김학이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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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역사가 변화라면,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포착하기 어렵다. 감정은 이념과 달리 제도로 귀착되지 않는다. 자유는 의회와 법으로 제도화되고, 평등은 경제의 집단화로 제도화된다. 따라서 그 역사적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감정에는 제도가 없지만 역사는 있다. 감정이 역사를 갖는 이유는 감정이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인간이 느끼는 격동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비밀스럽기도 하기에 도덕규범의 피안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문제로만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감정은 규범과 긴밀히 얽힌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마주한 상황이 정당치 않아서다. 감정의 문화적 차원은 1970년대 이후 인지심리학에서 정밀하게 연구되고 이론화되었다. 그 실험심리학은 인간의 감성체제the affective system가 특정 현실에 당면하여 비의지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발동시키지만, 그것은 실상 경험과 기대에 따라 사회 환경을 계산하고 평가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정보처리 작업의 결과라는 점을 논증했다."(10-1)


"대표적인 감정은 그 시대의 유일한 감정이 아님은 물론 지배적인 감정도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해당 시대에 가장 많이 말해진 감정이고, 가장 문제시된 감정이며, 따라서 시대의 가치가 함축된 감정이고, 그리하여 사회적 연관이 엮여 있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개념사의 '기본 개념'에서 '기본'에 해당하지만, '기본 감정'이라는 학술용어는 이미 보편적인 생물학적 감정을 지칭하기에 사용할 수 없을 따름이다. 시대적 감정은 생물학적 감정이 아니라 문화적 감정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감정을 시대별로 가려내고 그 감정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확인하면 각 시대의 고유성 역시 도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역사학의 의의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보면 공감과 혐오가 이 책에서 말하는 대표 감정이다. 그 감정 속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참여의 가치와 배제의 요구가 담겨 있고, 그 근저에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논의가 깔려 있다. 그 두 가지 감정은 우리 시대의 지표이다."(13-4)


1장. 근대 초 의학의 신성한 공포


"시초에 공포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를 근대 독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는 한 그렇다. 루터의 저술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팸플릿은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소교리 문답》이다. 루터는 십계명의 조항 하나하나를 간결하게 해설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썼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앞서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제2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도 해설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우리가 하나님 이름으로 저주하지 말고 맹세하지 말 것이며······.〉 제10계명까지 모든 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반복한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정작 제2계명에서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은 신이 〈처벌하지 않고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을 뿐인데, 루터는 모든 계명에서 신을 두려워하라고 쓴 것이다."(26-7)


"루터의 공포는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시대의 공포를 잘 드러내는 시대적 현상이 하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궁정 점성가를 역임했던 성직자 요한네스 리히텐베르거가 1488년에 《기이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입각한 라틴어 예언》이란 책을 발간했다." "리히텐베르거는 교회와 신성로마독일제국과 민중에게 닥칠 일들, 즉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의 침입, 플랑드르 도시들의 봉기, 별들에 의해 격동된 민중의 반란 등을 때로는 군주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서술했다." "예언서의 폭증은 중세 말의 정치사회적 격변 외에, 우주와 지상 만물과 인간을 통일체로 파악하는 지적인 혁명인 15세기 신플라톤주의에 의하여 추동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문헌의 (재)발견에 부심하던 휴머니즘 덕분에 대두했는데,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을 천사의 지위로 높였지만 그것에 접속한 예언서는 인간의 공포를 강화했다."(28-30)


"16세기의 독일인들은 공포를 '예종적 공포'와 '순애적 공포'로 구분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갖는 공포인 예종적 공포는 각종의 현실적 재앙에 대한 공포로서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죄다. 순애적 공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자식의 공포로서, 신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러해야 하고, 그것은 곧 구원의 길이다." "예종적 공포의 내용은 자기 자신과 세속에 대한 사랑이고, 순애적 공포의 내용은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다시 말해서 순애적 공포라는 기표의 기의는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신에 대한 공포에서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예종적 공포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선명히 대비되어 의미를 발동시킨다." "신에 대한 공포는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래서 루터가 십계명을 해설하는 가운데 신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동시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35-6)


"파라켈수스는 근대 해부학을 개시한 베살리우스와 혈액순환설을 제시한 하비와 함께 근대 의학의 비조로 꼽힌다." "파라켈수스는 1525년 《파라미룸 의서》라는, 자기 의학의 요점을 담은 책을 서술했다. 사후에 발간되는 그 책에서 그는 인체의 각 기관에 〈연금술사〉가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음식과 공기에서 영양분과 독소를 〈분리〉시키고 독소를 체외에 내보내는데, 그 분리 작용이 오작동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병이라고 주장했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사를 때로는 〈원력原力archeus〉이라고 칭하는데, 다름 아닌 화학 작용이다. 파라켈수스는 연금학의 원리를 의화학적 질병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체액의 불균형이 아닌 체내의 화학 작용에서 찾았던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또한 신이 연금술사를 인간 외에 동물 식물 광물에도 배치해두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치료법은 연금술사가 기능을 회복하도록, 금속 식물 동물에서 원력을 뽑아내어 인체에 투입하는 것이었다."(46, 57)


"파라켈수스는 병의 원인 여섯 가지를 지목하는데, 독, 자연, 별, 악마, 신 외에 인간의 〈정신〉이 그중 하나다. 그것을 파라켈수스는 의지로 칭했지만, 내용은 온전히 감정이다. 감정은 그에게 중요한 병인이었다. 다만 정말 놀랍게도 정신, 즉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병은 정신 주체의 병이 아니라 타인의 병이다. 인간의 내면이 주체의 욕망과 억압의 역동성에 의하여 병드는 게 아닌 것이다. 이는 16세기 인간의 내면이 18세기 이후의 내면과 얼마나 달랐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은 타인의 정신에게 자신의 의지적 감정을 강요한다. 그러면 두 정신은 투쟁을 벌이고, 이때 패배한 정신이 〈상처〉를 입는다. 〈나의 정신은 내 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나의 칼로 타인을 찌를 수 있다.〉 여기서 찔린 것은 정신만이 아니다. 정신이 찔리니 신체가 실제로 피를 흘린다. 정신의 상처가 신체의 상처로 물질화되는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정신에 의해 찔린 신체는 외과적으로 치료하려 해도 소용없고 정신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6-7)


"파라켈수스에게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은 몸과 환경의 물리적인 상호 작용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감정은 도덕과 신앙의 문제이기도 했다. 분노와 공포와 증오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표증이었다. 거꾸로 겸손과 기쁨과 사랑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 존재의 증거였다. 따라서 감정은 멸망이냐 구원이냐의 기준이었다." "문득 치밀어 오른 부정적 감정은 악마가 자신을 장악한 증거일 수 있었다. 그렇듯 인간은 감정의 물질성과 감정의 종교성 사이의 덫에 걸린 존재였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언된 16세기에 인간은 외적인 경건성과 일상적 행동은 물론 내밀한 감정까지 단속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그 자신만만했던 르네상스인들을 겨냥한 규율화 및 도덕화 장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파라켈수스는 그가 거부했던 당대 종교개혁가들과 일치한다. 그 역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간을 규율화함으로써 윤리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를 생산하려던 시대적 노력의 일부였던 것이다."(80-1)


2장. 30년전쟁의 고통과 감정의 해방


"요한네스 헤베를레(1597-1677)는 제화공이다. 그는 황제에 종속되지만 기여금 납부를 제외하고는 독립을 누리던 도시, 울름의 지배를 받는 농촌 수공업자였다." "30년전쟁의 참혹한 전화를 겪으면서 헤베를레는 무엇을 느꼈을까? 헤베를레의 연대기에는 감정어가 몇 개만 등장한다. 감정 명사만 열거하자면, 비탄, 가슴 아픔, 공포, 경악, 용기, 기쁨, 신뢰 등이다. 눈에 띄는 것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찌된 일일까? 가족의 죽음에 대한 서술을 보면 해석의 실마리가 발견된다. 헤베를레는 단 한 번도 슬프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1634년 10월 7일 갓 태어난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는 썼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심판 날에 그가 기쁘게 부활하게 하시고 그에게 영생을 주소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죽음 대부분을 그처럼 짧은 관용어로 표현했다. 루터가 신자는 죽음에 직면하여 슬퍼하되 그 슬픔이 신적인 슬픔이어야 한다고 거듭 설교했기 때문이다."(89, 93)


"그 끔찍한 고통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헤베를레는 군대와 병사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가 캐럴 스턴스는 근대 초 영국인들의 자아 문서에서 17세기말 이전 시기에는 분노를 표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려 9년 동안 일했지만 봉급 한 푼 못 받은 수공업 도제, 계모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모조리 빼앗긴 청교도 목사, 동료와 경제적 갈등에 휘말린 영국 국교회 수학자 등이 자서전에 자신들의 감정을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탄griefe〉이라고 돌려 말했다. 이는 당시 분노가 근본적으로는 신의 감정이었고, 세속에서는 제후만이 지배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반인의 분노는 광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헤베를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그는 분노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 그 많은 악행을 저지른 병사들을 '사악한'이라는 형용사로 묘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97)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헤베를레의 진면목은 다른 데서 발견된다. 그렇게 긴 개인 연대기를 작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고유성이다." "1600년경 독일 개신교 지역의 거의 모든 교구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도시 수공업자들의 문자 해득률은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문자 해득 능력과 글을 유창하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따라서 헤베를레는 자신이 연대기를 썼다는 것 자체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연대기에는 스트랄준트 전투, 마그데부르크 파괴,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아우크스부르크의 고난, 프라하조약, 프랑스군의 진군, 베스트팔렌조약 등, 30년전쟁의 결정적 사건들이 놀랄 만큼 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엄청난 지적 성취야말로 신분을 넘어 자신을 주장하는 그의 개인일 것이다. 그는 사회적인 '쓰인 자아'와 그것으로 채 수렴되지 않는 신분을 벗어나는 '쓰는 자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다."(103-4)


"페터 하겐도르프(?~1679)는 방아쟁이 수공업자 출신의 용병 병사다. 20년 넘게 전장을 누비며 폭력을 행사한 하겐도르프의 경험은 어떻게 감정으로 표현되었을까? 놀랍게도 17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연대기 전체에 감정 명사는 딱 한 번 쓰였다. 1636년 여름 벨기에 지역에서 부대원 11명과 함께 숲에서 양을 약탈할 때였다. 숲에서 2천 마리의 양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양 떼 때문에 〈공포감에 숨이 멎을 듯 질려서〉 도망쳤다. 눈을 씻고 찾아보면 감정을 지시하는 일반 명사가 있기는 하다. 1631년 5월 말, 마그데부르크 파괴를 지켜보며 그는 〈그 도시가 그토록 경악스럽게 불타는 것이 나를 심장으로부터 아프게leit 했다〉고 적었다. 1642년 5월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다리 아래 설치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을 〈보는 것이 하나의 쾌감lust〉이라고 적었다. 하겐도르프는 연대기에 자신을 감정적 자아로 내세우지 않으려 했다. 또한 인용문 속의 공포감, 심장의 아픔, 쾌감은 모두 감정의 신체성을 보여준다."(111)


"그의 연대기는 사건에 대한 건조한 진술로 일관하지만, 지역과 마을과 도시에 대한 서술은 놀랄 만큼 서정적이다. 그가 그처럼 감정적인 인간이라면, 즉 쓰는 자아가 그토록 서정적이었다면 쓰인 자아는 왜 그렇게 무감동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왜 자신을 그토록 무감동한 인간으로 내세웠을까? 이는 그가 군인의 직무를 인간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사무적인 업무로 내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력서인 연대기를 통하여 그의 문서 능력을 과시하고 더불어 자신의 직무 적합성을 자랑하려 한 것이 아닐까. 기실 연대기의 사실적인 내용 자체가 행정적이고 관료제적이다. 그 결과로서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무감동한 하겐도르프가 표현되었던 것이니, 직무와 사적 감정을 구분하는 인간이 그려진 것이다. 그런 인간은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의 결과로 출현했다고 강조한 '궁정인courtier'이다. 하겐도르프라는 용병 병사에게서 궁정인이 식별되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114, 118-20)


"폴크마르 하페(1587~1659)는 슈바르츠부르크 존더하우젠 백작령에서 봉급을 받는 진정한 의미의 공무원 관리였다." "하페의 연대기에서 감정은 상황으로부터 독립하지는 않았지만 규범으로부터는 완연히 독립했다. 이것은 하페가 헤베를레 및 하겐도르프와 다른 점이고, 또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특히 공포Furcht 감정이 그랬다. 하겐도르프는 그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고, 헤베를레도 극히 꺼렸다. 필자는 하페의 연대기에서 그 단어의 출현 빈도를 세다가 포기했다. 문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공포 감정이 당시에도 여전히 신적인 공포가 아니면 예종적 공포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페는 공포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그가 순애적 공포와 예종적 공포의 구분을 몰랐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하페의 연대기에서 공포는 부정적인 대상에 한정되지 않았다. 하페는 병사들과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 모든 상황에 대하여 그 단어를 사용했다."(121, 129-30)


"유의할 점은 하페가 (절규문이자 통곡문인 자신의) 그토록 감정적인 기록을 〈튀링겐 연대기〉로 칭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기록을 공적인 연대기로 간주한 것이다. 하페 역시 자신의 연대기가 식자층에게 읽히리라 예상했고 또 실제로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페는 공공성을 의식한 연대기에 자신의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인데, 이는 근대 초의 감정 레짐과 완전히 어긋난다. 근대 초에 인간은 공적인 기록에서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사적인 편지 등에서 상대적으로 다소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제 바뀐 것이다. 대단히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공적 문서에 데뷔한 것이다. 기존의 감정 레짐이 무력화된 것이다. 이 역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1670년대에 이르면 감정이 특히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과 인간학 서술에서 독립적 가치로 설파되기 시작하는데, 하페의 연대기는 그 전조가 30년전쟁의 와중에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33-4)


3장. 경건주의 목사들의 형제애와 분노


"경건주의는 독립 교파가 아니었다. 17세기 전반기 퓨리턴 대부분이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더욱 확실한 칼뱅주의를 관철하려 했듯이,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대부분 루터파 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경건한 열망》을 저술한 슈페너는 교리를 문제 삼기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의 상태를 비판했다." "《경건한 열망》에서 슈페너는 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을 세속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그가 적시한 문제는 〈궁정 생활〉이 관리, 일반민, 성직자들을 물들인다는 점이었다. 궁정 생활이란 빠르면 14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흔히 '르네상스 궁정'으로 일컬어지던 절대주의 제후의 궁정을 뜻했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세련된 '외적' 매너였다." "새로이 부각된 이상형은 '진정성'을 구비한 '신사'였다. 슈페너가 궁정 생활을 〈외적인 허영〉으로 선언하면서 그 반대 항으로 〈진정성〉을 제시한 것은 정확히 시대를 반영한다."(150-1, 158)


"또한 결정적인 것은, 슈페너에게 내적인 인간은 곧 감정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인간의 내면이란 곧 감정이었다는 점이다. 슈페너는 자신을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루터 역시 격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깨우침이 로마서 1장 17절(〈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그와 달리 슈페너는 신의 은총을 〈황홀하게〉 경험했다고 썼다. 신 앞에서 의로워진 루터와 황홀경 속에서 신을 만나는 슈페너의 차이가 경건주의의 본질을 말해준다. 경건주의 신자란 신을 감정적으로 확인하는 사람이다." "신앙이란 곧 사랑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악마의 유혹〉이다. 그리고 사랑은 실천으로, 즉 선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선행이 없다면 중생도 없다. 또한 그래서 중생한 사람들이 갖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도덕감정이다! 경건주의는 도덕감정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종교운동이었던 것이다."(158-61)


# 중생重生 : 성경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지점인 의인화義人化justification를 거쳐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30년전쟁은 감정사적 격변을 일으켰다. 전쟁이 감정을 기존의 도덕규범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감정 레짐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감정이 약동하게 된 것이다. 그 맥락에서 경건주의가 중생을 신을 만나는 황홀한 감정 체험으로 규정한 것은 자유로워진 그 감정에 호응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감정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 감정은 사회적 제약을 모조리 무시할 수도 있다. 슈페너와 프랑케의 인용문을 보면 격정을 〈육체적인〉, 〈사적인〉, 〈자기 자신도 끌 수 없는〉, 〈무절제한〉 등으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된 감정을 부도덕으로 직행하는 통행로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경건주의가 제시할 새로운 감정 레짐은 약동하는 동시에 절제된 감정이어야 했다. 그 내용은 부드러운 〈온유함〉이다. 그리고 그 신학적 내용은 〈절제의 영〉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감정 레짐의 내용은 형제애이고, 그 표현은 절제이며, '다정함'이다. 경건주의는 해방된 감정을 종교화, 재규범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162-3)


"계몽주의 목사 필립 마테우스 한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바로 멜랑콜리였다. 그는 언제나 멜랑콜리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다고 썼다. 육체를 거추장스러워 한 것이다." "작가인 카를 필립 모리츠는 1783년부터 1793년까지 《경험영혼론 저널》을 발간했고, 그 저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당대까지 유장하게 지속되어온 영혼론, 즉 인간의 내면을 인간의 정신·신체적 기능들의 교차로 설명하던 틀을 벗어나 내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방향 전환의 와중에 멜랑콜리가 신체적인 히포콘드리아 심기증과 정신적 우울로 분화된다. 그리하여 모리츠가 1785년부터 1790년까지 발표한 소설 《안톤 라이저, 심리소설》에서는 멜랑콜리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사회적 억압의 결과로 제시된다. 이는 감정사의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다. 17세기를 거치면서 규범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감정이 17세기 중반 이래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되더니 18세기 말에는 신체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187-9)


"목사 한의 일기는 18세기 중후반의 독일 부르주아가 1세기 전 슈페너의 부르주아와 무척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천적 사랑, 온유함, 다정함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목사 한은 분노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주 터뜨렸다. 물론 그것은 한이 접촉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정당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17세기 중반 이후 거세게 밀려든 사회적 이동성이 신분사회의 틀 내부에서 진행되다 보니 신분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이 중첩되었고, 이는 전선을 복합화했으며, 그 귀결은 정당성 기준의 혼란이었다. 그 문제 상황은 갈수록 심화되어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슈페너으 온유함과 감성주의의 감성은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었고, 그래서 한은 그리도 자주 분노를 격렬하게 표출했을 것이다." "다만 한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한은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줄곧 반성했다."(201)


"한의 반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내와 사별하고 새 아내를 고르는 모습은 삶이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반성하는 과정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새 아내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라고 변명했지만, 실상 그 선택은 육체적 감정에 대한 항복이었다." "미국 역사가 윌리엄 레디는 18~19세기 프랑스 감정 레짐에 대한 연구에서 카페, 독서회, 살롱, 프리메이슨 등의 부르주아 사회성들을 궁정문화의 외적 매너와 감정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감정의 피란처〉로 정했다." "그러나 그 피란처는 실상 숨 막힐 정도로 강력하고 위압적인 감정 통제 장치였다. 그것들은 필시 강력한 감정 통제의 기제인 동시에 감성이라는 새로운 감정 레짐을 실천하는 장이자, 그 실패를 확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로 얼룩진 그 경건주의적 실천이 독일인들을 깊이 내면화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가차없는 내적 감정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도달하기 힘든 감정 레짐을 추구하면서 근대를 만들었던 것이다."(202-3)


4장. 세계 기업 지멘스의 감정


"지멘스는 가족 중심 기업이었는데, 그 면모는 19세기 독일 기업사에서 예외적이기보다 전형적이었다. 가족 기업은 창업 자본의 조달은 물론 자본 확충에도, 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익 배당보다 기업 자본의 안정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경우에도 소유는 언제나 가족 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지분 위기가 초래되는 경우는 예외였다. 모두가 지멘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족은 제3의 생산요소였던 것이다. 가족은 생존공동체이자 자본공동체이지만 감정공동체이기도 했다." "베르너 지멘스에게 가족과 기업은 일상에서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창업한 뒤 줄곧 공장 1층에서 살았다. 유의할 점은 신뢰와 충성이 베르너가 아우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요구한 감정이었고, 회사에서도 스스로 '노동'한 감정이었다는 데 있다. 아내와 동생들의 가부장이었던 그는 마이스터와 노동자들에게도 가부장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가부장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223-5, 232)


"신뢰는 18세기 초까지 거의 언제나 신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 믿음은 신에 대해서 갖는 것이지 인간에게 갖는 것이 아닌 터였다." "신뢰는 감성주의를 거치면서 세속화되는 동시에 쾌감valence과 강도强度를 갖춘다. 19세기 전반기에 출간된 사전들은 신뢰란 '타인이 좋은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는 감정으로서, 그 사람은 그럴 힘과 의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시에 하등의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우리를 휘어잡으며, 그 기대가 우리의 삶에 행복을 준다'고 풀이했다." "충성은 19세기 내내 거의 언제나 신뢰와 함께 사용되었고, 두 단어는 교환 가능했다. 충성은 18세기 감성주의에서 신뢰와 늘 함께 쓰이면서 개인의 의무로 내면화되는 동시에 쾌감과 강도를 갖추게 된다. 충성은 이때 신뢰만으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것, 즉 미래적 확실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신뢰와 충성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노동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하는 기제였고, 두 감정에 노동자를 동기화시키는 장치였다."(237-9)


"베르너의 회고록에서 부각되는 키워드는 세 개다. 첫째가 유용성이고, 둘째가 행동력이며, 셋째가 기쁨이다." "베르너는 유용성 개념을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제시할 때 사용하면서 그것에 사업활동도 포함시킨 것인데, 유용성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공리utility이다. 그것은 서양의 산업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와 산업활동에 부여하는 도덕적 의미 그 자체다. 물론 유용성은 감정이 아니다. 다만 베르너는 유용성이 '행동력'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게서 행동력은 감정과 분리 불가능했다." "회고록에서 기쁨이 일상적인 만족감으로 쓰인 경우는 다섯 번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30회의 기쁨 표현 중에서 25회가 미래의 비전, 지식의 증가, 사업, 노동, 실험, 발명, 연구, 혁명, 성채 방어, 케이블 설치, 케이블 부설에 따른 위험의 극복, 선행의 기억, 문명의 건설, 아들의 무난한 경영 상속 등을 서술할 때 사용되었다. 기쁨이 인간이 기획하고, 행동하고, 성과를 얻은 것과 결합되어 사용된 것이다."(241-2, 247-8)


"노동을 기쁨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 아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노동은 징벌이었고, 종교개혁과 함께 신적인 소명이자 이웃사랑으로 변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및 관념론과 함께 인간이 자신을 완성하는 윤리적 통로로 의미화되었다." "베르너의 편지를 보면, 노동은 성공에서 의미를 갖고, 성공은 기쁨을 주는데, 노동은 행동력의 소산이고, 행동력은 멜랑콜리를 극복하게 해준다. 한편에는 멜랑콜리가, 다른 한편에는 노동과 기쁨이 위치한다. 그리하여 신뢰와 충성 및 명예 외에 기본 감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노동의 기쁨이었다. 흥미롭게도 멜랑콜리의 다른 표현으로서 1869년 미국 정신의학에서 고안된 신경쇠약이 1880년대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경제인이든 지식인이든 독일 부르주아들은 신경쇠약에 걸렸다며 너도 나도 의사를 찾아갔다. 바로 그 시기, 그러니까 1900년 무렵에 독일 산업세계와 학계에서 노동의 기쁨이 담론화된 것이다."(248, 251)


5장. 일상의 나치즘, 그래서 역사란 무엇인가


"무관심은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조차 되지 못한다. 무덤덤함은 오히려 나치즘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지지와 반대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나치가 그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못 견뎌했다는 데 있었다. 나치는 독일인들의 삶을 문자 그대로 관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끝도 없이 일상의 독일인들을 '동원'하려 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당의 최하 말단 조직인 블록Blockwart이 20만 개, 나치 복지단체인 인민복지회의 블록 조직이 51만 개였다. 나치당 블록이 평균적으로 60~80개 가구를 책임졌으므로, 우리로 치면 아파트 한 동에 나치당 블록 대표가 한두 명, 노동전선 대표위원 두세 명, 인민복지회 위원이 서너 명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 돌격대 대원 대여섯 명과 히틀러총소년단원 20~30명을 추가해야 한다." "1938년이면 독일인의 3분의 2가 어느 것이든 나치 기구 하나에는 속해야 했다."(270-1)


"나치에게는 모든 조직이 곧 도덕공동체였다. 이해관계의 조직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치즘을 해명하는 데서 도덕은 중요한 '설명' 요소이다. 그리고 나치 도덕공동체의 핵심에는 배제가 있었다." "전쟁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없었다면 의당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로 직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배제와 학살은 같은 것이 아니다. 배제 없는 학살은 없지만, 학살 없는 배제는 많다. 문제는 배제가 학살로 귀결되는 경로를 밝히는 일이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배제에만 항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수용소에 가둔 것에 대해서도 감히 항의하지 못했고, 개별 기업에서 나치의 간섭 덕분에 특혜를 얻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출하자 특혜의 범주 자체보다 해당 사람이 그 범주에 포함되어도 좋은지 다투었으며 또 그 특혜에 동승하고자 했다. 밀고는 이때 난무했다. 그 '부당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런 태도를 학살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274-5)


"유의할 것은 나치즘에 대한 지지 문제를 설명할 때 반드시 나치의 여론 독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원적 의사 형성 과정이 제거되자 인민의 여론도 나치즘에 부합하게 진행된 것이다." "자신은 〈진정한 독일 애국자〉이기에 나치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자신의 인종과 몸에 대하여 고민했다. 나치의 언어에 공명한 것이다. 간혹 그런 고민을 떨쳐낸 사람들은 공적 여론이 나치에게 독점되었던 탓에 자기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자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나치가 인민의 지지 여부를 묻고자 하면 일부의 일탈을 제외하고는 인민에게서 나치 자신의 모습만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현실은 자아의 확인에 불과하게 되고, 현실감각의 소실과 자기기만이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가 물리적인 객관적 한계에 부딪쳐 실현되지 않으면 의지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게 마련이고, 의지의 실현은 미래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미래는 자기예언적 실천이 된다."(285-6)


"서부 독일 졸링겐의 김나지움 교사 아우구스트 퇴퍼빈은 언어학 박사를 취득한 지식인이자 독실한 개신교도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여다. 그는 고백교회 인근에서 발행되는 저널을 받아볼 만큼 나치에 비판적이었다." "1939년 12월과 1940년 5월에 퇴퍼빈은 일기에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 소문〉을 기록한다. 1942년 5월 그는 급기야 벨라루스에서 자신이 목격한 유대인학살을 기록한다." "진정 놀랍게도 그후 무려 17개월 동안 퇴퍼빈은 유대인학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43년 11월 중순 그는 돌연히 쓴다. 〈우리는 비단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유대인만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 그 자체를 절멸하려 한다.〉 그가 17개월 만에 갑자기 양심의 고통을 느낀 것이다. 이유는 우연히 만난 어느 병사의 말 때문이었다." "영국 역사가 스타가르트는 퇴퍼빈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편적 맥락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논의의 자극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고 분석한다."(294-6)


"다시 말해서 독재 권력이 금지한 주제에 관한 한, 그에 대한 사적인 소통이 멈추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정립되지 못함은 물론 도덕적 자아의 점검 작업도 멈추었던 것이고, 양심은 그 문제가 소통에 의하여 다시 주제화되어야만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43년 9월 초 우크라이나에서 퇴퍼빈은 포로수용소의 독일군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서까지 소련군 포로 630명을 탈출시켰다. 그런 그가 1944년 여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대패한 독일군 병사들을 보면서 적었다. 〈병사들은 전투에 지치고 의심으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복종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명예의 한 페이지다.〉 그가 히틀러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최종적으로 버린 시점은 무려 1945년 3월이었다. 이는 나치즘에 대한 가의 입장에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가 얽혀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 복합성을 무시하고 나치 범죄를 '학살적 반유대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296-7)


6장. 나치 독일의 '노동의 기쁨'


"1925년에 출간된 《노동학. 기업 노동의 토대, 조건, 목표》의 기고자들은 대부분 테일러리즘을 비판했다. 노동자를 생산 도구로만 간주하여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기고자들은 노동을 '문화'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가치로서의 노동이 산업노동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되고, 그리하여 노동의 기쁨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실천적 질문에 가장 가까이 답한 사람은 기계공학자인 편집자 리델이었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부터 논한다. 기계는 고유한 법칙적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작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계의 낯선 운동에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 내부에서 작용하는 내적 역동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계의 운동이 노동자 자신의 일부로 경험될 수 있다. 요컨대 기계 작동에 대한 인지와 숙달과 그 과정에서 발동되는 감정적 동일시를 통하여 기계는 인간이 구축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309-11)


"1920년대 중반에 노동에 투여된 의미 성분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은 가치의 경험이자 창출이고, 그래서 문화활동이다. 둘째, 노동하는 인간은 감각 및 지각의 복합체가 아니라 영혼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심신 복합체이다. 셋째, 기계는 인간의 세계 안으로 통합되어 인간화될 수 있다. 넷째,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 과정, 그리고 노동 및 생활환경에 의하여 구성된다. 즉, 노동자는 조형적이다. 다섯째, 그 전체 과정을 통하여 노동자는 고유한 인격이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의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누빔점'이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이고, 그 의미 작동의 매개이자 결과물이 활동 감정, 가치감정, 생 감정, 노동의 기쁨이며, 그 감정의 내용은 〈존엄한 자아〉이다. 테일러리즘이 주장한 노동의 객관화가 노동의 주관화와 인격화로 전환된 것이다. 요컨데 비너와 리델은 노동의 기쁨을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자를 동기화하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12-3)


"1925년, 아른홀트는 '독일 기술노동교육연구소(딘타Dinta)' 소장에 임명됐다. 딘타는 나치 집권 이후 노동전선에 편입되고, 아른홀트는 노동전선 직업교육국 국장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아른홀트가 생산한 노동과학 언설은 바이마르공화국으로부터 나치즘으로 넘어가는 다리라고 할 것이다." "아른홀트의 교육시설에서는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와 가치로서의 노동이 삭제되었다. 따라서 아른홀트에게 자부심은 존엄한 자아와 그 활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많이 생산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능히 감당하는 신체적 힘에서 발생한다. 갓 입소한 수련생들은 턱걸이 한 번을 제대로 못하지만, 교육장의 수련생들은 권투, 체조, 수영, 육상, 축구를 순서에 따라 실행한다. 아른홀트에게 스포츠는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체조는 〈인간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을 살아나게 하고, 끝내 자기를 관철하려는 용기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스포츠는 궁극적으로 경쟁심, 즉 상승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314-5)


"1930년이 되자 아른홀트는 5년 전과 꽤나 달라져 있었다. 노동 감정을 강조하는 것은 같았다. 딘타의 목적은 공장을 〈창조의 기쁨〉의 샘으로 만드는 데 있고, 〈우리 노동자들은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을 보유하고 있기에 부정의한 대우에 가장 분노하고, 정상에 〈진정한 사나이〉가 서 있는 기업을 〈가장 사랑〉한다. 아른홀트의 강연은 노동자 인격이 아니라 〈지도자 인격〉에 맞춰져 있었다." "아른홀트는 나치당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한때 몸담았던 자유군단의 지도자와 추종자 개념을 가져다가 자본주의 정신으로 변조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자유군단은 전투 집단이자 정치 집단이었다. 그 조직은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이념 집단이자 행동 집단이었다. 그들의 이념은 민족공동체로서의 독일의 도덕적 혁신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그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독립적 개인의 집합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은 운동 속에서 신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했다."(316, 320)


"1936년의 아른홀트의 언설은 1925년은 물론 1930년과도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의미상의 듣는 이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가라는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이다. 바이마르 시절의 그는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노동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이제 그는 노동자의 태도를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기업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가장 큰 차이는 언설의 중심에 1925년의 노동자의 상승 욕망도, 1930년의 지도자 인격도 아닌, 〈독일인의 유類적 특징〉이기도 한, 〈창조하는 인간〉이 놓였다는 점이다." "아른홀트의 생각이 변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그가 노동담론 그래프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나치 노동전선의 자리에서 기업가들에게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민족공동체 속에서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는 기업을 민족공동체라는 정치 이념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24-6)


"감정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치 노동법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역사가도 주목하지 않은 결정적인 지점이 가시화된다. 나치 노동법은 감정법이다. 법조문이 신뢰, 충성, 배려, 명예라는 감정들로 누벼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법을 담당하는 기관들의 명칭이 '신뢰위원회' '노동신탁위원' '사회적 명예법원'이다." "우리가 베르너 폰 지멘스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신뢰, 충성, 명예가 19세기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사회적 도덕감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치 노동법은 그 감정들을 자유군단 '운동'의 지도자, 추종자, 공동체의 틀 속에 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립되는 기업공동체는 상호적인 동시에 위계적이었다. 기업 지도자들에게는 배려의 의무가, 추종자에게는 충성의 의무가 할당되었으나, 그 위계적 성격은 기업 지도자가 추종자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에 의해 약화되었고, 당시 노동법원은 기업 지도자에게도 추종자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부과했다."(328-9)


"1936년의 아른홀트는 열광의 이면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한 바람직한 인간은 타인의 감정적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차분한 인간이다." "그가 노동을 의미화하는 누빔점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5년에는 사회적 상승 욕망이, 1930년에는 지도자 인격이, 1936년에는 창조하는 인간이, 1937~40년에는 성과주의적 기계-인간 합생론이 의미화의 축이었다. 아른홀트는 대단한 사상가가 아니었음은 물론 고유하게 사유하는 기술인도 아니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1925년에는 우익 기업가 진영의 입장을 대변했고, 1930년에는 운동 국면의 나치즘에 영합했으며, 1936년에는 노동전선의 초기 입장을, 1937년 이후에는 전쟁 준비에 돌입한 나치즘을 대변했다. 아른홀트는 해당 국면의 나치즘을 드러낸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기에 도착한 그의 감정 레짐, 즉 성과에 진력하되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는 인간이 그 시기 나치즘의 감정 레짐이었다고 할 것이다."(338, 343)


7장. 나치 독일의 '독서의 기쁨'


"나치가 금서목록을 체계화하기 시작한 때는 1935년이다. 그 시점에 괴벨스가 금서에 관해서도 독점적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국문필국은 1938년에서야 비교적 정리된 목록을 완성했는데, 그때 책 4,175종 저자 565명이 블랙리스크에 올랐다. 대부분 유대인, 공산당, 사민당, 자유주의 망명 지식인, 모더니즘 저자들이었다. 기묘하게도 문필국은 목록을 사정 당국들과 공유했을 뿐 출판사와 서점에게는 〈엄격히 비밀〉에 부쳤다. 더욱이 문필국은 사전검열을 거부했다. 저자와 출판사와 서점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게 상황이 모호하면 작가와 출판사는 짐작만으로 쓰고 출간해야 하고, 그 현실적 결과는 자기 검열이다." "여기에 더해 수준 높은 작가들 다수가 망명을 떠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현명한 독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썼기에, 새로 발간되는 도서는 압도적으로 2급 작가들의 책이었다. 나치의 문학정책은 문학시장을 파괴하지는 않고 왜곡했으나 독일 문학의 수준을 추락시켰던 것이다."(379-80)


"한스 쉐퍼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나치의 영화, 연극, 소설 등에서 오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인민 동원이 정신적인 휴식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괴벨스의 원칙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괴벨스의 정책이 나치 독일인들을 '사생활로 후퇴시킨' 것이다." "슈푀를의 코미디 소설에 대한 괴벨스의 촌평은 괴벨스 문화정책이 인민의 정신적 휴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해석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슈푀를의 소설이 나치 지배권력의 일상적 작동을 방어하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즘 하에서 독서는 고도로 정치화된 사적인 기쁨이었다〉는 라빈바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반면 슈푀를의 소설에는 라빈바흐가 향토소설과 달리 인종주의가 등장하지 않는다. 슈푀를의 소설이 정치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인종주의와 그 속에 함축된 〈용기와 의지와 독립성과 주인적인 가치〉가 아니라, 도덕과 물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나치의 지배 기술에 순응해가는 일상의 독일인들이다."(392-3)


"슈푀를의 소설 《가스검침관》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노동 담론과 마찬가지로 열광이 아니라 차분함이다. 주인공을 빼고는 아무도 흥분하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태평스러움을 가장하려 한다." "뻔뻔스러움이든 차분함이든 내적인 격정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똑같지만, 차분함이 적절한 또 다른 이유는 소설에 그 감정의 이면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푀를이 뜻밖에도 1930년대 나치 독일사회의 본색을 제대로 형상화했음을 볼 수 있다. 나치 독일은 개별화된 사회였다. 그리고 개별화되는 와중에 노동자들은 회사에 틈입한 온갖 나치 기관원들에게 줄을 서야 했다." "개별화는 자본에 대하여 개인을 약화시키고, 약화된 개인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그 개인은 공포를 드러내지 않고 차분해야 한다. 순환적이다. 차분함은 공포로 이어지면서 공포를 강화하고, 그 공포를 또다시 차분함 뒤에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394, 397-9)


"공포가 지배 기술에 속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나치가 원하는 독일인은 공포에 찌든 인간이 아니었다. 공포는 인간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가스검침관은 나치가 원하던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야심에 괴로워하는 도덕적인 인간이고, 일확천금을 했지만 가스 검침이라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소홀함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며, 국가에게 공포를 느껴 나치 독재의 작동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하고 주장하는 인간이다. 하기야 합리화에 의해 개별화된 독일인들이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고도의 성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필수적인 전제가 바로 그 자기주도성이었다. 그리고 가스검침관에게 쏟아진 돈다발은 그런 인간에게 미구에 닥칠 나치 소비 천국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괴벨스가 그 소설을 마땅히 영화화해야 한다고 평한 것은 지당하다. 나치 치하 독일인들이 정신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하여 읽던 소설은 나치 정치 이념을 유쾌하게 형상화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이었다."(400-2)


"유대인과 관련된 나치의 텍스트는 강도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나치당 기관지 《민족의 파수꾼》은 1942년 12월 11일의 머리기사에서 미국의 유대인들이 영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50만 명의 젊은 독일인들을 살해할 사디즘의 잔치〉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홀로코스트가 개시되고 최소 1년 이상이 지난 때다. 1943년 10월 13일 머리기사는 연합군이 전후에 〈독일인 수백만 명을 소련에 강제노동자로 보내서 절멸시키려고 한다〉고 외쳤고, 같은 달 21일에는 강제노동의 대상을 독일의 모든 남자로 확대했다. 그 시점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단순 학살로부터 한발 물러나 '노동을 통한 절멸'로 되돌아간 때였다. 1944년 9월 26일에는 미국의 재무장관 모겐소가 〈독일인 4천만명을 퀘벡에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나치가 유대인을 동유럽 학살수용소에 끌어내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는 '죽음의 행진'으로 내몬 시점이었다."(405-6)


"1943년 봄 이후 나치는 민간인 지역까지 타격하던 영국군과 미군의 폭격을 〈유대인의 테러공격〉으로 표상했다. 그것은 민간인 지역의 폭격과 유대인을 병렬시킴으로써 폭격의 부도덕성을 이중으로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폭격의 주체가 연합군 뒤에 숨은 유대인이고, 그 유대인이 〈혐오스러운 세균〉이라면, 공포는 더욱 용이하게 분노로 전환되지 않겠는가. 또한 연합군의 배후가 유대인일 뿐이라면, 날이 갈수록 폭격이 강해지고 독일군이 퇴각하고 있다고 하여도, 전쟁의 그 본질에 대하여 연합국을 설득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버텨내기만 하면, 연합군에 대한 계몽이 성공하여 결국은 연합군의 공세가 멈추지 않겠는가. 《민족의 파수꾼》이 연합국 〈국민들〉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계속 선전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실상 나치 독일이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바깥세상을 판단하고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지고 말았다는 예증이기도 하다."(408-9)


"폭격으로 사망한 독일인은 약 42만 명이다. 일부 독일인들은 폭겨과 고통을 독일의 범죄 탓으로 돌리면서도, 그 고통을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희생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종전 이후 서독에 구축되는 피해자 정체성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1945년 초에도 독일인들이 '공포의 운명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나치 국가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것 같다. 재난사회학을 참조하면 사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 연구들은 재난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재난이 초래한 위험을 경감시키는 가장 중요한 힘은 지역공동체의 노력과 주민들의 참여이고, 그다음이 국가의 지원이다.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인지는 부차적이다." "동시에 패전에 직면한 재난사회의 삶은 우연적이었다. 삶이 우연적일수록 사회적 지평은 좁아지고,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것에 집중하게 마련이다."(410-2)


"독일인들은 더욱더 가족에게 매달렸고, 빵 한 덩어리라도 더 얻기 위하여 나치 당국에 호소하는 동시에 이웃을 무자격자로 밀고했다." "재난사회의 작동은 폭력의 지역화로도 나타났다. 1944년 가을 안보 문제가 각 지역 게슈타포 분소로 넘어오자 지역의 친위경찰은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일말의 흐트러짐도 처형으로 처벌했다. 그리하여 연합군의 루르 지역 포위망이 좁혀지던 1945년 3월 그 지역 노동수용소 곳곳에서 수십 명을 단번에 총살하는 마구잡이 학살이 벌어졌다. 강제노동자들이 학살을 피해 탈출하여 도심으로 들어오거나 친위경찰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리자, 독일인들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그들을 보았다. 그 현실이 마치 처음이기라도 한 양, 독일인들은 처벌 공포와 죄의식에 몸을 떨었다. 사회적 지평의 수축, 처벌 공포, 죄의식, 상호 불신, 나치에 대한 부인, 망각에의 의지, 정상성에의 강박, 가족에 대한 애착, 독일인들은 그 모든 것을 안고 승전국 군대를 맞았다."(412-3)


8장. 서독인들의 공포와 새로운 감정 레짐


"지금 돌아보면, 독일인들을 처벌 혹은 재교육시키려던 점령군의 탈나치화 작업은 솜방망이였고 실효성도 없었다. 유럽 어느 나라에도 과거청산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인들은 그 미래를 몰랐다. 초기에 그 작업은 무서웠다." "모니카 블랙은 전쟁과 포스트워 시기가 독일인들에게 〈일상적 삶에 대한 일상적인 지식〉에 〈인간학적 쇼크-인간 그 자체의 쇼크〉를 일으켰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일상적 〈현실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당연한 구분〉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걸어 다니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점은 세계가 그들에게 알 수 없는 것,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그 세계는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가 개시했던 필름누아르의 세계, 흑백의 교차로 반짝이는 표면 밑에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버티고 있는 세계와 닮았다고, 그리하여 독일인들의 고단하지만 범속한 일상 아래 전쟁과 살인의 기억이 버티고 있었다고 강조한다."(420-2)


"전후 독일인들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미군과 아렌트의 해석은 정확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릇된 것 같지는 않다. 공포를 감추려는 독일인들의 표면이 무감동 외에 달리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1930년대 중후반 이래 독일의 노동 담론과 코미디 소설에서 확인했던 감정문화이다. 내용을 떠나 형식만 보자면, 공포와 차분함의 결합은 바로 나치 감정 레짐이었다. 놀랍게도 그 감정 레짐이 종전 직후의 독일에서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감정 레짐이 놓인 역사적 맥락은 전혀 달랐고, 따라서 감정 실천에 의해 느껴지는 감정 경험도 아주 달랐다. 전쟁 이전에는 성과주의 시스템이 발휘하는 압력이 문제였다면, 폭격 이후에는 전쟁의 상처와 전쟁범죄가 문제였다. 앞선 감정 경험이 사회적 상승 의지의 표현이라면, 뒤의 경험은 벌거벗은 생존과 고통스런 자아 정립에 병행한 처벌 공포와 죄책감, 그리고 추후 드러나듯 자기변명이었다."(429)


"비상사태법은 국가가 외부 공격의 목전에 있거나 실제로 공격을 받는 외적인 비상사태와 자유 민주적인 기본 질서가 위협받는 내적인 비상사태가 닥치면,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와 파업권을 제한하고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를 약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60년에 그 내용이 알려지자 사민당과 노동조합,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거칠게 비판에 나섰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독일의 과거, 즉 히틀러국가가 목전에 있다고 말했다." "1961년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정당〉이 〈탈정치화의 베일〉로 은폐되어 있지만, 곧 〈무관심한 대중〉이 〈강력한 권위적 국가의 지휘〉에 동원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전체주의를 우려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경고에서 독일이 얼마나 히틀러국가의 망령에 쫓기고 있었는지 드러나거니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독일의 일급 지식인들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이다."(436-8)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독일의 범죄를 본격적으로 대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판사들은 친위경찰은 물론 증인으로 나선 생존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초연한 거리'를 유지했다.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때의 홀로코스트 재판은 형법에 따라 개개인의 범죄 행위와 〈저열한〉 동기를 확인하려 했을 뿐 범죄의 체제적 성격을 심문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타가 개별적인 일탈로 의미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평범한 학살자' 유형과 '사디스트 학살자' 유형 두 가지를 부각시켰다. 그 두 가지 유형은 교차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고문으로 악명 높던 인물이 서독에서는 흠결 없는 시민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섭게 섬뜩한 것이었다." "프랑크 비스는 이 지점에서 절묘해진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학살에 대한 '나의 책임'을 주제화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학살자 유형은 비판적 시선을 인간 주체의 내면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440)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생활·주거 공동체의 최소한의 공통점은, 그들이 그곳에서 개별적인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적·감정적·물질적 결속을 얻고, 출신 성분과 무관한 평등한 사회적 접촉을 실천하며, 그럼으로써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다. 사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관성과 공동체를 결합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고, 정신분석학에 침윤되지 않은 사람조차 사회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내적인 해방감과 진실된 감정 및 새로운 감정적 교류를, 요컨대 새로운 감정적 사회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감정은 신좌파의 이론과 실천 모두의 중핵이었다. 디터 둠의 《자본주의 소의 공포》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이 부정적 감정의 생산이라고 믿었고, 유아기의 억압에서 벗어나면 진실된 감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1970년대 신좌파는 감정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했던 것이다."(450-1)


"그 대안문화 전체에서 지배적인 것은 마르쿠제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감수성〉이요, 라이하르트의 조사로는 〈따스함〉이었다. 조심할 점은 따스함이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좌파 스스로가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고통스러운 정신분석적 작업을 통과해야만 따스함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생활·주거 공동체의 현실이 따스함을 생산하기는 커녕 그들이 적대시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이다! 코뮌1은 평등한 논의의 장이 되고자 열심히 토론했다. 그러나 토론이 평등할 수는 없었다. 승자가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대안 유치원에서도 '무지한 스승'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안 유치원의 현실은 권위와 명령이었다." "공동체적 감정이 지속되지도 못했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진부해져간 것이다. 결국 혁명적 주체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공동체일수록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거리 두기, 차가움, 고립감이 나타났다."(452-3)


에필로그


"500년이 넘는 그 오랜 시기의 대표적인 감정 담론들을 분석하면서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감정은 도덕공동체 구축의 핵심 기제'라는 것이다. 감정은 나만의 비밀에 속하기에 도덕공동체와 연결된다는 단언이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사회와, 그리고 사회를 견지하는 도덕과 연결된다. 이는 감정이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이기에 도덕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압해야 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감정은 그 자체로 언제나 도덕감정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늘 부도덕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조차 감정의 도덕성을 전제한다." "우리가 도덕감정을 통하여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의 결론은, 감정에 역사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도덕적인 감정공동체를 구축한다는 목표는 언제나 같았으나, 감정에 대한 평가, 문제적인 대표 감정,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방식, 그 모두에 깔려 있는 인간학적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459, 467)


"감정은 원체 포괄적인 동시에 모호하기에 존재의 불확실성과 잘 어울린다. 감정은 합리적 인지에 선행하는 인지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과 낙관적 인간은 같은 대상을 완전히 다르게 인지한다. 그리고 그 인지는 때로는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시킨다. 따라서 공감이 요청된다고 말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공감이야말로 자아에 몰두하는 개인을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감에의 호소가 개별화되고 불확실해진 자아에게 잘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감정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말해지면 말해질수록 불확실한 개인은 공감보다는 자아의 내적 격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공감이 아니라 혐오가 작렬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감정의 역사는 현재 나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해준다. 이를 통해 나의 사회성을 깨닫고 나의 자아실현을 재차 성찰하게 해준다. 자아는 실현하는 것이되, 성찰되는 것이다."(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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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남기 - 우리가 몰랐던 신기한 전쟁의 과학
메리 로취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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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제2의 피부(전쟁 때 입는 것)


"폭발로 공기가 가속되어 밀려 빽빽해지면, 사람을 납작하게 짓누를 수도 있다. 더 세부적으로 보면, 압력파는 옷을 피부에 찰싹 달라붙게 하는데, 그러면 전달되는 열이 더 커지고 화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 현재의 방염 육군 전투복 천인 디펜더 M이 내세우는 속성 중 하나는 불이 붙으면 풍선처럼 부풀어서 몸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소방관 제복에 종종 쓰이는 노멕스는 방염 성능이 뛰어나다. 그래서 옷에 불이 붙기까지 적어도 5초는 벌게 된다. 모든 군복을 노멕스로 만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습기에 취약해서다. 중동에서 땀을 쏟으면서 달리는 군인들에게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불꽃이 없어도, 의류는 불이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면의 자연발화 온도는 약 370도다. 중요한 것은 노출 시간이다. 핵폭발 때 생기는 열파는 극도로 뜨겁지만,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 "폭탄이 터질 때 빠르게 지나가는 열파라면, 단 몇 초 동안 견디는 방염 천도 엄청난 차이를 낳을 수 있다."(20-4)


"물이 주성분인 액체는 대부분 표면 장력이 세다. 즉 물을 흘렸을 때 물 분자들이 천의 표면을 이루는 대부분의 분자들보다 자기들끼리 서로 더 강하게 결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뜻이다. 알코올처럼 표면 장력이 약한 액체는 물처럼 천 위에 방울을 형성하지 않고, 곧바로 스며들어서 천을 적신다." "초방수 피막은 수련의 잎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수련 잎의 표면을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오돌토돌 미세한 돌기들로 가득 뒤덮여 있다. 마찬가지로 천에 오돌토돌한 작은 돌기들을 붙이면, 천과 그 위에 쏟아지는 액체 사이의 접촉과 상호 작용이 줄어든다." "이 신기술은 화학적/생물학적 방호복에 쓰일 것이다. 초방수 천을 사용한 의복에 닿는 물질의 95퍼센트가 그냥 굴러 떨어져 나간다면, 독성 물질에 결합할 활성탄 수용체가 훨씬 더 적어도 된다는 의미다. 좋은 일이다. 두꺼운 활성탄 층을 가진 의복은 덥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공기 필터를 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방호복은 무엇보다도 편해야 한다."(28-30)


2장 붐박스Boom Box(폭발문 지대에서 차량을 모는 사람들의 안전)


"이라크에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미 육군은 차량에 멕서스 장갑판을 장착하려 시도했다. 마크는 회상한다. 「그걸로는 로켓포를 막지 못해요.」 육군은 반응 장갑 타일을 덧붙인다는 생각도 했다. RPG에 타격을 입으면, 충전재가 폭발한다. 바깥을 향한 이 폭발은 RPG의 폭발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지나가던 사람이 그 폭발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값싸고 더 단순한 방법이 먹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철망형 장갑이라는 튼튼한 강철 격자를 두른 차량이다. 날아오는 RPG 포탄은 격자의 그물코에 주둥이가 박혀서 불발탄이 된다." "철망형 장갑이 너무나 잘 막는 바람에 이라크 반군은 RPG를 대체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제 폭탄을 만드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라크전 초기에 그들은 사제 폭탄을 도로 양편에 매설했다. 이 사제 폭탄이 차량의 옆쪽을 강타하자, 육군은 차량 옆구리에 장갑판을 덧대고 차 유리를 〈교황 유리〉로 교체했다."(47-8)


# 스트라이커Stryker : 미 육군이 쓰는 8륜 장갑차, 교황 유리 : 교황의 순방 행사 차량에 붙이는 두께 약 5센티미터의 투명한 장갑판


"아프가니스탄 반군은 도로 옆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에 폭발물을 매설하여 밑에서 차량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전환했다. 대부분의 트럭이 그렇듯이, 당시 미국의 전투 차량은 차대가 편평했다. 나중에 나온 차량들은 V자나 이중 V자 모양의 차대로 폭발 에너지가 비껴가도록 한 반면, 편평한 차틀은 폭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리고 좌석이 승객 칸 바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어서, 폭발 에너지가 탑승자의 발, 척추, 골반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곤 했다." "더 신형 차량은 좌석 밑에 여유 공간을 두고 있다. 그러면 폭발의 힘이 바깥으로 방출되면서 빠르게 줄어든다. 그래도 30~60센티미터 이내에서는 에너지가 대단히 응축되어 있어서 고체 탄환처럼 작용하여 차량 바닥을 뚫을 수 있다. 차체가 뚫리면서 온전했던 원형을 잃는 순간, 부서져 나간 모든 조각과 부품은 발사체가 된다. 육군 병사와 해병 대원은 비행기 조종사가 방호복을 입는 대신에 깔고 앉는 것과 같은 이유로 험비 바닥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두곤 했다."(49)


3장 귀를 이용한 전투(군대 소음의 수수께끼)


"수십 년 동안 귀마개를 비롯한 수동적인 청력 보호 수단들은 군 청력 보존 사업들에서 주된 방어 무기가 되어 왔다. 대다수의 귀마개는 소음을 30데시벨쯤 줄여 준다. 꾸준히 들려오는 지겨운 배경 소음을 줄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브래들리 전투 장갑차가 아스팔트 위를 덜거덕거리며 지나가는 소음(130데시벨)이나 블랙호크 헬기의 푸드득 소리(106데시벨) 같은 것들이다. 30데시벨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요하다. 시끄러운 소음의 세기가 3데시벨 커질 때마다 청력 손실 위험이 없는 노출 가능 시간은 절반씩 줄어든다. 사람의 맨귀는 85데시벨(고속도로 소음, 혼잡한 식당)까지의 소리에는 하루에 8시간씩 노출되어도 청력 손실이 없다. 115데시벨(사슬톱, 록 콘서트 무대 바로 앞)의 소음은 안전한 노출 시간이 30초에 불과하다. AT4 대전차 화기가 뿜는 187데시벨의 소음에는 1초밖에 견디지 못하는데, 그 짧은 노출에도 보호되지 않은 맨귀는 청력이 영구적으로 저하된다."(67-8)


"귀마개가 제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깊이 꽂기 위해서는 귓바퀴를 잡아당겼다가 놓아야 한다. 전투 헬맷을 쓴 채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여유를 허용하는) 1차원적인 전쟁터는 더 이상 없다. 어디든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IED가 폭발하고 실력 행사가 이루어진다. 귀마개로 청력을 보호하려면, 정찰하는 13시간 내내 끼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 중 95퍼센트는 아무런 큰 소리도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끼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팰런은 이렇게 말한다. 「군대에는 소음 문제가 없어요. 조용한 게 문제지요.」" "최고의 임무 수행 능력을 지닌 부대에서는 청력 손실이 어느 정도만 일어나도 〈사살 비율〉(없앤 적의 수를 생존한 부대원의 수로 나눈 값)이 50퍼센트 줄어들었다. 잘 듣지 못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총을 쏘거나 달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 능력이 방해를 받자, 그들은 더 주저하게 되었다."(79, 83)


4장 허리띠 아래(가장 잔인한 총격)


"IED는 두세 개씩 함께 묻는다. 하나는 차량에 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다. 다른 폭탄은 도우러 오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다. 화이트는 칸다하르 주의 부비트랩이 가득한 길에서 통로 확보 임무를 맡아서 지휘 통제 차량을 타고 가던 중에 첫 폭발을 목격했다. 그는 전투 공병 소대를 이끌고 있었다. 도로, 벽, 엄폐호, 다리 등을 건설하거나 파괴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그 분쟁 지역에서 미국과 나토와 협력하는 아프간 육군 병사들이 탄 험비 차량은 앞서 가지 말라는 화이트의 경고를 무시했다. 세 명이 죽고, 세 명이 다쳤다. 차량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길을 막았기에, 치우기 위해 공병대가 파견된 것이다. 화이트가 묻혀 있던 압력판을 밟는 순간,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10킬로그램짜리 〈희생자 작동형victim-operated〉 IED였다." "「몸을 일으켜서 지혈대를 꺼내 오른쪽 다리에 묶으려 했는데, 다리가 없는 거예요.」 왼쪽 다리는 길이는 온전했지만, 종아리 부위가 찢겨 날아가고 없었다."(89)


"화이트의 수술에서는 한 가지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간호사가 황갈색의 표준 살균제를 수술 부이에 바르고 있다. 그런데 사타구니가 아니라 얼굴에 바르고 있다. 보조 외과의인 몰리 윌리엄스 소령은 요도를 늘이는 데 쓸 조직을 화이트의 볼 안쪽에서 띠 모양으로 떼어 낸 조직으로 만들 것이라고 설명한다. 입 조직은 우수한 요도 대체물이 된다. 무엇보다도 털이 없다. 소변에는 광물질이 들어 있어서, 요도에서 털이 자라면 엉겨 붙어 쌓일 것이다. 요로결석은 소변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끊고, 소변을 눌 때 엄청난 통증을 일으키는 골칫거리다." "집도의인 제임스 제지어는 말한다. 「또 입은 오줌을 견뎌 냅니다.」 그는 입이 본래 축축한 곳에 알맞게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팔뚝 아래쪽이나 귀 뒤쪽의 털이 없는 피부로도 요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변에 자주 젖다 보면 손상될 수 있다. 일종의 기저귀 발진이 요도 안에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염증이 조직을 먹어치우면서 구멍이 난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다."(93)


5장 기이해질 수 있다(성기 이식에 바치는 찬사)


"간이나 콩팥과 달리, 얼굴이나 손은 피부, 근육, 점막의 다양한 집합, 즉 복합 조직이다. 음경이라면, 거기에 발기 조직도 추가된다. 몸은 한두 종류의 조직만 받아들이고 다른 조직은 거부할 수도 있다. 피부는 특히 문제를 일으킨다. 피부는 보호 장벽이기 때문이다. 면역학적으로 삼엄한 경계 상태를 유지한다. 이 몸의 보초병을 속이기 위해, 환자에게 기증자의 골수를 주입한다. 골수는 면역 세포를 만드는 일을 한다. 기증자의 골수는 환자 자신의 골수를 대체하지는 않지만, 면역 체계를 얼마간 재프로그래밍 한다. 몸은 새로 이식된 부위를 점점 수상쩍게 여길지 모르지만, 통째로 제거하는 일까지는 하지 않는다. 거부될 위험이 더 낮다는 것은 면역 억제제가 덜 필요하다는, 따라서 투여량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부작용도 더 적어지고 환자도 더 건강해진다. 골수 주입 같은 신기술들은 목숨을 구하는 용도가 아닌 형태의 이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윤리적 균형의 저울을 기울였다."(110-1)


"이식된 부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어려 있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생되었기 때문이다. 환자가 그 점을 얼마나 불편하게 느낄지 상상할 수 있다. 콩팥이나 허파 같은 내부 장기는 이식의 심리적 영향이 대체로 적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니까." "성형 및 재건 외과의인 데이먼 쿠니의 경험은 달랐다. 「나는 그것이 몸이 온전한 사람의 오만임을 깨달았어요. 당신과 나는 두 손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손을 얻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겁니다. 하지만 한 손을 잃은 채로 사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거든요.」 쿠니는 자기 수술진이 손을 이식한 환자 6명 모두가 수술에서 깨어난 즉시,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다. 아직 감촉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그랬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이식 받았을 때에도 당사자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심란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식의 대안이란 얼굴이 아예 없는 채로 사는 것이니까."(115-6)


6장 포화 속 살육(의무병은 어떻게 대처할까?)


"초기 인류로부터 진화한, 우리의 뇌에 새겨진 생존 전략은 위협이 닥치면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아드레날린은 코르티솔이 혈액으로 왈칵 쏟아지도록 자극한다. 코르티솔은 허파에는 산소를 더 많이 빨아들이라고, 심장에는 두 배 또는 세 배 더 빨리 뛰어서 그 산소를 더 빨리 온몸으로 보내라고 재촉한다. 한편 간은 포도당을 토해 냄으로써, 그런 일들에 쓸 연료를 공급한다. 필요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신체 부위로 산소와 연료를 보내기 위해, 팔과 다리의 큰 근육에 있는 혈관들은 팽창하는 반면, 우선순위가 더 낮은 기관들(위장과 피부 같은)로 뻗은 혈관들은 수축된다.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주요 기관인 전두엽도 배급 제한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근육의 능력 발휘를 충돌질하는 아드레날린은 신경 활동도 증진시킨다. 그래서 몸이 덜덜 떨리게 된다. 여기에 구급 헬기의 움직임과 진동까지 고려하면, 위생병이 얼마나 힘겨운 도전 과제에 직면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136)


"터널시tunnel vision라는 전문 용어는 주의가 협소해진다는 뜻이다. 그것 역시 선사 시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생존 스트레스 반응의 재앙을 일으키는 한 요소다. 다른 것들을 다 배제하고 오로지 위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브루스 사이들은 어느 의사와 불안해하는 인턴의 재미있는 사례를 들려준다. 의사는 교통사고 환자의 찢긴 상처를 꿰매라고 인턴을 응급실로 보냈다. 인턴은 꿰매는 일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투 치료의 주된 스트레스 요인은 모든 훈련 시뮬레이션에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위생병을 훈련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자동적으로 하게 될 때까지 어떤 기술을 무수히 연습시키는 것이다. 전두엽이 무단 외출할 때, 이성이 결석할 때, 근육 기억이 남아서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연습을 충분히 반복하면, 극도의 생존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응급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말이다."(143, 149)


7장 땀 흘리는 총알(열기 속 전쟁)


"땀은 시원하지 않다. 피만큼 따뜻하다. 본질적으로 땀은 피다. 땀은 혈장에서 나온다. 혈장은 피에서 주로 물로 이루어진 무색의 성분을 가리킨다. 땀은 증발을 통해 열을 식힌다. 열을 공기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몸이 과열되기 시작할 때, 피부의 혈관은 확장되어서 피가 피부로 더 많이 향하게 된다. 피부의 모세 혈관으로부터 뜨거운 혈장이 땀샘─약 240만 개의─을 통해 몸의 표면으로 스며 나와서 증발된다. 증발을 통해 몸에서 수증기 형태로 열이 빠져나간다." "땀을 흘리면서 계속 일하면, 그들이 쓰는 근육은 몸이 땀을 흘리는 데 쓰는 혈액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혈액을 차지하려는 이 경쟁의 가장 약한 결과는 열 탈진과 열 실신이다. 피가 몸을 식히기 위해 피부로 흐르는 한편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산소를 전달하기 위해 근육으로도 흐르다 보면, 피를 뇌로 보내는 데 필요한 혈압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산소를 운반하는 피가 뇌로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기절한다."(155-8)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헐거운 옷을 입으면 더 시원한 이유는 전도로 설명할 수 있다. 헐렁한 셔츠는 뜨거워지지만, 옷이 피부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에 꽉 끼는 티셔츠와 달리 몸으로 열을 전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공기가 수분으로 포화되어 있을 때에는 땀이 증발할 곳이 없다. 피부에 물방울처럼 고였다가 얼굴과 등을 따라 흘러내린다. 더 중요한 점은 땀이 몸을 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온이 섭씨 33.3도 미만일 때, 몸은 더 차가운 공기로 열을 발산함으로써 저절로 식을 수 있다. 이 온도를 넘어서면 열은 발산되지 못한다. 발산의 짝은 대류다. 우리의 몸이 주변에 형성하는 가열된 축축한 공기의 구름은 피부로부터 위로 올라가고, 그 빈자리를 더 차가운 공기가 와서 메운다. 그리고 더 건조할수록, 더 많은 땀이 증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산들바람은 몸이 주변에 만들어 내는 습한 공기 막을 날려 버림으로써 몸을 식힌다. 밀려드는 공기가 더 차갑고 더 건조할수록, 몸은 더 빨리 식는다."(163, 160-1)


8장 질질 싸는 네이비실(국가 안보 위협 요소로서의 설사)


"이른바 〈현대 의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오슬러는 1892년에 이질이 〈병사들에게 화약과 총알보다 더 치명적이었다〉라고 썼다. (〈이질〉은 병원체가 창자의 내층에 침입하여 세포와 모세 혈관의 내용물이 새어 나오게 하고, 이질 특유의 증후군을 일으키는 감염병을 포괄하는 용어다). 1848년 멕시코 전쟁 때 미국인 1명이 전투로 사망할 때마다 7명이 병으로 죽었으며, 대부분은 설사 때문에 죽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설사나 이질로 죽은 병사는 95,000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입원한 군인보다 설사병으로 입원한 군인이 거의 4배 더 많았다." "해군 대령 로버트 필립스는 재수화액에 포도당을 첨가하면 장의 염분과 물 흡수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병원에 가서 정맥주사로 수액을 맞는 대신 재수화액을 마시는 방법으로도 수분을 보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 방법으로 의료 시설이 부족한 오지에서 싸우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178-9)


"세균성 이질을 일으키는 주된 병원체인 시겔라와 캄필로박터는 독소를 전달하는 〈분비 기구〉를 휘두른다. 피하 주사기 겸 총검으로 장 내층의 세포에 독소를 주입함으로써, 세포들을 죽이고 그 내용물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이 유출은 설사를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퇴역하는 세포들이 아주 많아지면, 장 전체가 물을 흡수하는 본래의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 그 결과 음식 찌꺼기는 소화관을 따라 가면서 점점 물기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장관 응집성 대장균ETEC이라는 세균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이 세균을 장을 뒤덮어서 흡수를 막는 세균 밀집 대형, 살아 있는 비닐 랩이 된다. 콜레라균과 장관 응집성 대장균은 화학 무기 공격도 가한다. 둘 다 세포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펌프를 약탈하여 독소를 만드는 데 쓴다. 징발된 펌프는 환자가 물을 마셔서 보충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세포로부터 물을 빨아내기 시작한다."(182)


9장 구더기 역설(전쟁터의 파리, 좋은 쪽과 나쁜 쪽)


"〈상처 부위의 옷을 제거하는 순간, 상처에 수많은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에 나는 경악했다.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나는 서둘러서 이 끔찍해 보이는 생물들을 씻어 냈다. 그리고 상처를 식염수로 씻자, 놀라운 광경이 드러났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분홍빛 육아 조직이 상처를 채우고 있었다.〉 1917년, 미국 원정군의 외과의 윌리엄 베어는 일부러 상처에 구더기를 들끓게 해서 치료를 돕는다는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는지를 그렇게 설명한다. 지저분한 파리 유충은 죽은 고기나 썩어 가는 고기를 좋아한다. 그 고기가 열린상처의 일부라면, 먹는 행위는 일종의 자연적인 죽은 조직 제거 기능을 수행한다. 죽었거나 죽어 가는 조직을 제거하면 감염이 억제되고 치유가 촉진된다. 죽은 조직에는 혈액 공급이 안 되어서 면역 방어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세균이 들끓기 쉽다. 그 결과 건강한 조직에도 감염이 일어나고 염증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치유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208-9)


# 분홍빛 육아 조직 : 빠르게 불어나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어린 조직


"구더기의 입 부위는 삐걱거리면서 움직이는 휘어진 커다란 낫처럼 보인다. 구더기의 몸에서 유일하게 키틴질로 된 부위다. 축축하고 하얗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다른 부위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갈색의 단단한 부위다. 다행히도 죽은 조직 제거 구더기 요법을 받는 환자의 상처 깊숙한 곳에 있는 조직─죽은 조직이든 살아 있는 조직이든─에는 감각 신경이 없다. 감각 신경은 피부의 맨 위쪽 층에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균과 죽은 조직의 잔해까지 다 제거하고 싶다면, 구더기를 외과의로 택하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펙은 폭발로 입은 상처의 죽은 조직을 초기에 제거하는 데 구더기를 쓰자는 주장을 결코 한 적이 없다. 구더기는 치료가 한참 진행된 군인에게 쓰일 것이다. 즉 아마도 흙 같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유별나고 강력한 항생제 내성 균주가 폭발로 상처에 아주 깊이 다량으로 침투해서, 난치성 감염이 일어날 때 말이다. 이런 합병증은 자주 나타난다."(214-5)


10장 죽이지 않는 것은 악취를 풍기게 할 것이다(냄새 폭탄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이었던 OSS는 국방 연구 위원회NDRC 무기 개발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악취 물질을 직접 개발하러 나섰다. 회고록에 나온 바에 따르면, 러벌이 원래 받은 명령은 〈심한 설사를 일으키는 역겨운 냄새〉 물질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누구, 나?〉는 러벌이 SAC-23 계획에 붙인 위장 명칭이었다." "NDRC는 추가 요구 조건을 정했다. 〈역분사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퍼지는 〈범위〉가 적어도 3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행할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야 한다.〉또 시선을 끌지 않아야 한다. 빗물, 비누, 용매에 씻기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몇 시간 동안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군사적으로 〈악취제malodorant〉, 곧 비살상 악취 무기는 그보다는 〈지역 거부terrain denial〉을 일으키는 데 더 널리 쓰인다. 사람들이 표적지인 땅에서 기어 나오도록(또는 그 땅을 피하도록) 하는 용도다. 베트콩 땅꿀, 테러리스트의 은신처, 무기 저장소 등에서 말이다."(230-3)


"1944년 11월 9일에 〈누구, 나?〉의 최종 검사 보고서가 나왔다. 아서 D. 리틀의 1945년 2월 19일 자, 〈누구, 나?〉 최종 보고서 목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양인을 진료한 경험이 많은 한 해군 의사와 논의한 끝에, 확실하게 혐오감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악취는 단 두 종류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컹크 냄새와 시체 냄새다. 〈누구, 나?〉를 토대로 삼지만, 대변 냄세를 스컹크 냄새로 대체함으로써 우리는 〈누구, 나?〉Ⅱ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지독한 냄새를 지니며, 침투성과 지속성이 더 강하다.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것이 확실하다.〉 마침내 〈누구, 나?〉 500개와 〈마크Ⅱ 오리엔탈 누구, 나?〉 100개가 제조되었다. 하지만 전선으로 보내진 것은 한 병도 없다. 이유는? 국방 연구 위원회가 일본인에게 쓸 지속성과 침투성이 훨씬 큰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나?〉의 두 번째이자 최종 보고서가 나오기 17일 전,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다."(241-2)


11장 옛 친구(상어 기피제를 시험하는 방법)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군 역사상 열대 해역과 그 상공에서 전투를 벌인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침몰하는 배나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했다가 상어에게 공격을 받고 잡아먹힌 이야기가 해군과 공군에 떠돌기 시작했다(제1차 세계대전이 펼쳐진 북대서양의 차가운 물에는 그들을 잡아먹을 존재가 없었다)." "미 해군은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비록 고위 인사 중 한 명이 해군 중에서 상어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한 공식 기록이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걱정한 것은 군의 사기였다.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상어가 무섭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타려는 병사들이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스튜어트 스프링어는 그 터무니없는 역설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는 되었지만, 조국을 위해 잡아먹힐 준비가 되었느냐는 다른 문제다.〉 적어도 기피제는 상어를 겁내는 비행사를 위한 심리 치료제 역할을 할 터였다."(251-4)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내내, 해군 고위층에서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해군 의료국 국장인 로스 T. 매킨타이어 소장은 포장지에 굵은 대문자로 찍힌 샤크체이서라는 글자가 그것을 보기 직전까지 탈수, 굶주림, 익사, 열기, 추위 같은 해양 생존의 진정한 위협들에 몰두하고 있던 마음에 공포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사실상 사기를 높이기보다는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극히 타당한 문제를 지적했다. 매킨타이어의 말을 빌리자면, 상어가 해군 병사에게 가하는 〈위협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얼마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일까?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지만, 진행 과정의 어느 시점에 남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모든 해군 기지와 병원선에 〈상어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진정한 사례〉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통신문을 보냈다. 취합해 보니, 단 두 건이었다. OSS는 정보기관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보고서를 없애 버린 것이다. 그것은 OSS에게 또 하나의 악취 폭탄이었다."(259-60)


12장 가라앉는 느낌(바다 밑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감압병을 이해하려면, 부엌의 탄산 가스 발생기를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거품이 이는 물은 감압병에 걸린 수돗물이다. 액체가 든 용기에 압축 공기를 불어넣으면, 기체 중 일부는 액체에 들어간다(그 기체는 평형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용액으로〉 들어간다). 이제 통 속의 압력을 갑작스럽게 해방시킨다고 하자. 병이 열렸거나 잠수부가 수면으로 쑥 헤엄쳐 올라올 때처럼 말이다. 공기 압력을 통해 액체에 불어넣은 기체 분자들은 이제 용액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기체 분자들은 서로 결합하여 공기 방울을 형성한다. 그냥 그렇게 뭉친다. 이제 이제 당신은 쉬이익 소리가 나는 청량한 물 한 잔을 얻는다. 아니면 시야가 어른거리는 감압병 증상을 얻거나. 감압병은 공기 방울들이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피떡처럼 작용하면서 중요한 기관으로 향하는 혈액의 흐름을 막거나, 조직을 찢어서 통증을 일으키거나, 혹은 양쪽 다 하거나 등등의 일을 한다."(296-7)


"잠수부는 천천히 올라옴으로써 감압병을 피할 수 있다. 그러면 혈액에서 생겨나는 기체가 허파로 보내져서, 내쉬는 숨을 통해 그냥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이 공기 방울의 주범은 질소다. 공기에는 질소가 아주 많이 들어 있고, 질소는 지방에 녹아들어서 숨어 있곤 한다). 잠수부가 가압된 공기를 호흡하는 시간이 더 길수록, 공기가 더 강하게 압축되어 있을수록, 내보내야 하는 질소의 양도 더 많아지고, 따라서 더 천천히 올라와야 한다." "아주 깊이 내려간 상태가 아니라면, 비상 탈출구 안에서 1분쯤 가압 공기를 호흡하는 것 정도로는 시간이 짧아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잠수함이 침수된다면, 유입된 물이 쓰레기 압축기처럼 공기를 압축할 것이다. 수심 240미터에서는 비상 탈출구의 공기를 심하게 가압해야 하므로(바깥의 수압과 평형을 이루어서 해치를 열 수 있게 하려면), 그 공기를 1분 동안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감압병 위험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많은 질소가 몸에 녹아들 것이다."(297-8)


13장 위와 아래(잠수함 승무원은 잠을 자려고 애쓴다)


"그렉 벨렌키 대령은 수면 시간이 하루 8시간에서 4~5시간으로 줄어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안다. 며칠에 걸쳐 인지력이 감소하다가, 새로운 안정 상태에 들어선다.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들수록, 정신적 능력이 퇴화하다가 안정 상태에 들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더 늘어난다. 어떤 정신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능력이 그렇다. 수면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사고, 의사 결정,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담당하는 신경망도 약해진다. 벨렌키는 이렇게 말했다. 「일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냥 포기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해결책이 떠오르고요? 잠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뇌를 정상 수준으로 돌려놓는 겁니다.」" "『군 작전 노트 소식지』는 여기서 더 크고 굵은 활자에 밑줄과 기울임체까지 써서 강조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매일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면 며칠 사이에 피로가 쌓여서 술 취한 것과 비슷한 기능 결핍 상태가 된다.〉"(305-6)


"햇빛은 가장 강력한 체내 시계 조정자다. 우리 몸에는 눈의 막대 세포와 원뿔 세포 외에 제3의 광수용체가 있다. 이 광수용체는 햇빛의 청색 파장에 맞추어져 있다. 이 빛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정보는 솔방울샘으로 들어간다. 솔방울샘은 몸의 천연 수면제인 멜라토닌을 만드는 곳이다. 햇빛은 멜라토닌 생성을 중단시키고, 그럼으로써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하루 주기 변경에 따른 생체 시계 이상은 수면 시간 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각성도와 수행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잠수함 부대는 〈6시간〉이라는 근무 일정표를 써 왔다. 당직 6시간, 기타 업무와 훈련 등 6시간, 개인 활동과 취침 6시간이다. 그런 다음 다시 당직을 선다. 하루 일정을 18시간으로 정한 결과, 각 선원은 24시간마다 6시간씩 당직을 한 번 더 서게 되었다. 문제는 이 일정표에 따른 활동이 개인의 생물학적 리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이 몹시 잠들기를 원하는 시간에 일하게 된다."(323-5)


14장 사자死者로부터의 피드백(시신은 어떻게 사람이 계속 살 수 있게 돕는가)


"골수 주사는 정맥 주사의 사촌격이다. 정맥보다는 골수를 통해서 수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가 피를 다량 잃는다면, 혈관벽이 팽팽하지가 못해서 혈관을 찾아 바늘로 찌르기가 어렵다. 핀으로 새로 분 풍선을 찌르는 것과 파티를 한 뒤 일주일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풍선을 찌르는 것의 차이다." "예전이었다면, 이 남자의 멋진 가슴 근육이 그의 죽음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 매일 같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육군 병사나 해병대원은 가슴 근육이 너무나 우람해지는 바람에 허파가 쪼그라들었을 때─총알이 허파를 뚫는 바람에 허파의 공기가 그 주변 공간으로 빠져나가서 쌓일 때 같은─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럴 때에는 바늘로 가슴을 찔러서 공기압을 줄여야 하는데 근육이 두꺼워서 바늘이 근육을 뚫고 더 안쪽까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남성 부상 환자의 약 절반이 그러했다. 미군 법의관시스템AFMES이 제공한 야전 피드백 덕분에, 지금은 우람한 병사에게는 더 긴 바늘을 쓴다."(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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