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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세계사 - 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평점 :
절판
서문
"혁명가도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아니었던 보나파르트는 (공화국의 제1통령이라는 직함을 취하면서) 프랑스에 일종의 '민주적 이상들'이라는 외관에 가려진 계몽 전제정을 선사했다. 주권은 인민이 아니라 오로지 통치자에게 있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그를 '혁명의 자식'으로 묘사하지만 그를 '계몽주의의 자식'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흔히 가져오는 혼돈과 혼란,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인내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경로를 좌지우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군중에 대한 멸시를 여러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혁명 대신 보나파르트는 관용과 법 앞에서의 평등, 합리주의와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계몽 전제정의 신조에 충실하게, 그는 자신이 믿기에 인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줌으로써 강한 프랑스 국가를 건설하고자 애썼지만 민주공화정을 끌어안거나 주권을 인민의 의지에 넘긴다는 전망은 결코 제시하지 않았다."(13)
"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 진동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반향을 낳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아우스터리츠, 트라팔가르, 라이프치히, 워털루는 모두 나폴레옹 전쟁의 표준적인 역사서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장소들과 더불어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올리언스, 퀸스턴하이츠, 루세, 아슬란두즈, 아사예, 마카오, 오라바이넨, 알렉사드리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로 파견된 영국 원정군과 이란과 인도양에서의 프랑스-영국의 외교적 책략, 오스만 제국에 대한 프랑스-러시아의 공작, 핀란드를 둘러싼 러시아-스웨덴의 힘겨루기를 다루지 않고는 이 시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17)
1장 혁명적 서곡
"프랑스 혁명전쟁[엄밀하게는 1792년부터 1802년까지 벌어진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들을 지칭한다]에 대한 전통적인 서사는 특정한 패턴을 따른다. 그 서사는 1792년 무렵에서 출발하여, 이웃한 군주정들로부터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과, 결국 차례차례 프랑스와의 강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정들의 상황을 비롯해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법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을 제시하며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의 여러 중요한 사태들, 즉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취약성으로 인해 전개된 사태들을 간과한다. 혁명과 혁명전쟁은 프랑스 권력의 허약성을 노출시킨 기존의 정치적 긴장관계 속에서 벌어졌고, 그에 따라 세계 여타 지역에서 유럽 열강의 제국적 야심을 부추겼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유럽과 남동유럽, 북동태평양 지역, 카리브 해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혁명 전야에 국제 정치와 바다 건너 유럽 본토의 상황에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32-3)
"프랑스 혁명은 일단의 복잡한 정치적·재정적·지적·사회적 문제들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그 기원이 프랑스 외부에서 유래했다. 가장 결정적인 발전상으로는 1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대양 무역의 확립과 17세기 전 세계적인 상업 회로들의 등장이 있다. 둘 다 외교적·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유럽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어났다. 열강은 가공할 함대를 구축하고, 무역 회사를 인가하고, 해외 식민지 팽창을 장려하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함으로써 대륙 간 통상에 접근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7년 전쟁(1756~1763) 동안 겪은 정치적·군사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프랑스는 진짜 상업 제국을, 아메리카와 인도양, 아프리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며, 늘어나는 국제 무역량을 수용하기 위해 급속히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가던 금융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상업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다."(33-4)
"혁명전쟁은 국왕들의 사안이었던 전쟁을 국민들의 사안으로 탈바꿈시켰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거의 중단 없이 이어진 싸움은 국가의 자원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투입되고 소모되는 것을 목격하며 무력 충돌의 지속과 확대를 가능케 했다.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위협은 이 무력 충돌에서 혁명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었다. 프랑스 군대는 점령 지역에서 지금 우리가 〈정권 교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해 광범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혁명가들은 혁명이 유럽 전역에서 반갑게 맞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혁명가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만약 유럽 군주정들이 〈국왕들의 전쟁〉을 개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인민들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 그들은 왕위에서 쫓겨난 폭군들에 맞서 서로를 끌어안으리라.〉 인류는 임박한 무력 충돌에서 틀림없이 고통을 겪겠지만 혁명가들은 전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53-4)
2장 18세기 국제 질서
"18세기의 막이 올랐을 때, (유럽 대륙 전체로 확대된 세력 균형의) 평형 상태는 프랑스(에스파냐와 몇몇 독일 국가들에 의해 때로 지지를 받는) 대 오스트리아(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합세한)라는 구도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이 끝난 뒤에 평형 상태는 더 많은 강대국들을 포함하고 훨씬 넓은 지리적 범위를 아울렀다. 이 전쟁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희생시켜 해상과 식민지에서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세력 다툼의 분명한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즉 프랑스보다 두 배가 넘는 전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가 앞바다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물자 보급을 차단하고,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군사력을 대륙에서 봉쇄하는 사이, 영국은 대륙에서 동맹 세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해외에서 군사적·상업적 패권을 확립했다. 1789년에 이르자 영국은 분명히 유럽에서 앞서 나가는 상업, 식민 열강이었다."(58-9)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치하에서 프로이센의 혜성 같은 등장과 엘리자베타(재위 1740~1762)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치하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오랫동안 서쪽에 있던 유럽의 무게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새로운 '문제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바로 발트해 지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운명을 둘러싼 '북방문제'와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둘러싼 '동방문제'였다. 신흥 강국과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열강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무력 분쟁에서 거듭 좌절을 겪었고, 재정적·정치적 난국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전야에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명확한 집단이, '강대국'으로 이미 등장했다. 집단적으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는 일단 외교술이라는 고상한 수단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해 유럽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쟁쟁한 한 역사가가 적절하게 평가했듯이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먹잇감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59)
"유럽 열강들 간 경쟁을 개관하는 가장 편리한 출발점은 오스트리아-러시아-오스만 제국 전쟁이 발발한 1787년이다. 이 전쟁은 강대국들 간의 기존 경쟁관계들─유럽 중심부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와 동부에서 러시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 남부에서 영국-러시아의 경쟁관계─을 특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경쟁관계들을 강화했다. 남동유럽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19세기에 가장 골치 아픈 외교 문제 가운데 하나, 즉 점차 약해지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유럽 국가들 간의 각축전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제의 시초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에서 강화를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시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사안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맡아왔던 역할이었다.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소요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프랑스의 무능력은, 프랑스가 더 이상 일류 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만큼 프랑스 군주정에 굴욕이었다."(73-9)
"영국과 프랑스는 카리브 해역에서도 충돌을 벌였다. 유럽의 통상에 미치는 식민지 생산의 경제적 중요성이 워낙 커서 서인도제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식민지 경쟁관계는 혁명으로 불붙은 노예 봉기로 복잡해졌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적 사건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년 8월)은 프랑스령 식민지들, 특히 생도맹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1년 5월, 자유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재산 자격 기준을 갖춘 모든 남성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프랑스 국민의회의 결정은 생도맹그의 포르토프랭스에서 공공연한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1791년 11월 초에 이르자 마르티니크의 여러 교구들은 노예 반란으로 들썩였다." "1792년 4월 4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모든 자유 유색인에게 시민권을 확대했고,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얻어내길 희망했다. 그로부터 고작 16일 뒤에 세상을 바꿀 전쟁이 시작되었다."(94-6)
3장 1차 대불동맹전쟁, 1792-1797
"혁명은 위협을 제기했지만, 혁명이 강력한 사상들에 의해 추동되어서가 아니라 그 사상들이 총포를 함께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의견〉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질타를 받았을 때 영국 총리는 유명한 답변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골방의 의견들이나 학교의 사변들에 맞서 무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장을 한 의견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정부는 외교정책에서 진심 어린 이상주의를 한껏 드러냈고, 심지어 정복과 영토 확장을 배격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1792년 후반에 이르자, 첫 성공을 맛본 뒤 혁명의 〈자유를 위한 전쟁〉은 이미 더 전통적인 목표들을 향한 무력 충돌로 진화한 상태였다." "혁명의 보편적 원칙들은 많은 이웃나라들로부터 정말로 환영받았지만 그 해방의 수혜자들이 〈프랑스의 살인적인 박애〉의 희생자처럼 느끼기 시작하자 프랑스의 점령은 더 많은 주민들로부터 원망과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04-5)
"1794년 7월에 공안위원회를 전복하고 출범한 프랑스의 신정부는 사방으로부터 공격에 시달렸다. 오른편에서는 왕당파가 군주정을 복귀시키려고 한 반면, 왼편에서는 자코뱅파의 재집권 희망이 계속되는 경제적 문제들로 되살아났다. 총재 정부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다가 왕정주의의 재기로 위협을 받자 다시금 왼쪽으로 돌아갔고,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이동은 다시금 자코뱅주의의 부활을 부추겼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총재 정부가 허약하고 부패했으며 국내외 정책과 재정에서 무능했다고 비판해왔고, 이러한 평가는 자연히 보나파르트 장군의 정권 타도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통령 정부와 제정의 핵심적인 제도들이 중앙집권화와 정부 행정의 공고화를 진지하게 추구한 총재 정부 치하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수년간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피로감에 쌓인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만큼 충분한 공적 신뢰는 받지 못했다."(109-10)
"1797년 10월 17일에 체결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혁명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차 대불동맹은 실질적으로 끝장났고 프랑스가 승리했다. 비록 조약은 바타비아(네덜란드) 공화국과 관련한 어떠한 단서 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세력권 안에 바타비아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저지대 지방과 북부 이탈리아를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 아래 두어 프랑스를 서유럽의 헤게모니 세력으로 만들었고, 영국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맞수가 되었다. 과거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이오니아제도를 보유할 것을 고집한 보나파르트의 뜻이 관철됨에 따라 프랑스의 이해관계는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뻗게 되었고, 동지중해에서 그 입지가 적잖게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발칸반도, 특히 그리스에 혁명의 이상들을 전파했다. 대체로 파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합의한 조약은 공화국의 일개 군인에서 커다란 정치적 야심을 품은 정치가로서 보나파르트의 부상을 만천하에 과시했다."(114)
4장 라 그랑 나시옹la Grande Nation의 형성, 1797-1802
"1797년부터 1802년까지 5년간은 유럽사의 경로를 그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와 재정상의 시급한 사안들은 새로운 점령지의 정치 사정들과 맞물려서 라 그랑 나시옹이란 관념을 향해 외교정책을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 라 그랑 나시옹은 타민족을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발상과 프랑스의 국익을 보호한다는 발상을 조화시키려는 관념이었지만, 물론 프랑스의 국익은 현지 애국자들의 열망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입장 변화였는데, 자유와 공화주의라는 초기의 혁명 원칙들을 암묵적으로 뒤엎고 그 대신 프랑스의 더 폭넓은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제국적인 힘의 정치machtpolitik의 요구들을 지지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1797년에 루이 드세 장군은 일기에 보나파르트가 〈이 모든 민족들에게 프랑스 국민이라는 원대한 관념을 부여하는 위대하고 기민한 정책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프랑스 최대의 적부터 시작해 지구적 규모로 그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139-41)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은 (영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동시에) 동지중해에서 프랑스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아시아에서 더 큰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을 터였다. 1798년 봄 총재 정부는 취약해 보이고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토양이 비옥한 이집트는 귀중한 상품 공급원이 될 수 있을 듯했다(생도맹그의 상실을 상쇄할 훌륭한 대체물이었다). 그러한 제안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화榮華를 되살린다는 〈재문명화〉 임무라는 관념 안에 틀이 짜여 있었다. 이것은 '동방 전제정'에 관한 계몽주의 시대 논쟁들, 그리고 독재와 압제에 맞선 혁명 에토스의 연장이었다. 탈레랑은 총재 정부에 보내는 각서에서 〈이집트는 한때 로마 공화국의 속주였다. 이제 그곳은 프랑스 공화국의 속주가 되어야 한다. 로마 정복은 저 위대한 나라[이집트]에 퇴락의 시대였다. 프랑스 정복은 그 번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자애로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했다."(147)
"바스티유 습격 이후 고작 9년 만에 북아프리카 바닷가에 프랑스 병사들이 상륙했다는 사실은 혁명이 얼마나 재빨리 프랑스 국경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계도 벗어났는지를 드러낸다. 이집트 원정은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항구적인 유산─이집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을 남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군사적·정치적 실패였다. 원정은 레반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들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영국 식민 권력을 강타하는 대신 프랑스의 전통적 맹방(오스만 제국)이 숙적 러시아와 영국과 손을 잡게 몰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총재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798년 후반기에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도록 촉진했다. 그것은 공화주의 이상들을 식민주의와 영토 확장과 결합하려는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제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이제 인도로의 해상 접근로만이 아니라 아대륙의 인접 영토들을 통한 접근 경로도 고려해야만 했다."(154-5)
"프랑스인들이 도입한 기본 원칙들이 너무 급진적이고 이질적이라 심한 저항에 부딪혔기에 점령 자체는 이집트 사회를 그다지 '근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 진공은 곧 카발랄리 메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알리 파샤는 프랑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지 10년 안에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세력을 무찌르고, 이후 중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근대화되고 강한 이집트 국가의 토대를 놓기 시작했다." "이집트 원정이 배태한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집트 원정은 이슬람 사회를 유럽의 제국에 편입하려는 최초의 (그 마지막은 아니지만) 근대적 시도를 대변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으로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계기,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들이 수렴되고, 서구 지배의 온갖 수단들이 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계기였다."(155-6)
5장 2차 대불동맹전쟁과 그레이트 게임의 기원들
"프랑스의 활동은 근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부활시켰지만 영국 정부는 다음 행보를 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윌리엄 그렌빌이 이끄는 외무부는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의 심각성을 경시했다. 그는 유럽에서 대불동맹을 떠받치는 데 더 열성적이었고, 동맹은 프랑스를 저지대 지방에서 축출하기를 원했다. 전쟁부 장관이자 동인도회사 인도 운영위원회 회장이던 헨리 던다스는 이러한 접근법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영국은 제국이며 제국의 전략적·상업적 이해관게를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반면, 유럽에서 프랑스를 억제하는 임무는 대륙 열강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운영위원회는 일단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면 필연적으로 아시아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무력으로 제국을 얻어냈고, 그 제국은 계속해서 무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한 동인도회사의 임원은 말했다."(174-5)
"1780년대에 이르자 러시아는 남부 캅카스, 특히 카르틀리-카케티의 에레클레 국왕이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 맞서 러시아의 도움을 구하던 동부 조지아에 점차 관심을 보였다. 남부 캅카스는 여러 목적에서 유용한 교두보였고, 〈러시아 땅 끌어 모으기〉는 오랫동안 모스크바 정책의 특징이었다." "러시아의 정계, 상업계, 지성계는 그러한 개입이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는데, 러시아가 서구 열강과 대등하다는 인식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식민지 수립 사업에서 빠져 있었던 러시아는 이제 그 주변부에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열강의 일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비춰볼 때 특히 중요했다. 1795년 이란의 티플리스 유린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전환점이었다 그 사건은 동부 조지아와 그 너머에서 러시아 군주정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추겼기에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구적인 개입에 기여했다."(185-90)
6장 평화의 의례들, 1801-1802
"1799년 10월, 이집트에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명확한 계획이 없었지만 현 정부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일단의 정치가들이 그에게 접근해왔다. 스스로가 총재 정부의 일원인 에마뉘엘 시에예스가 주도하는 이 당파는 보나파르트 같은 어수룩한 군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전쟁 영웅인 그의 위상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는 결코 어수룩하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겸손하고 학구적인 시민의 배역을 취하고서, 석학들을 만나고 프랑스 학사원에서 이집트 원정의 학문적 성과에 관해 연설을 하는 등 자신을 지식을 추구하고 지성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곳에서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고, 어느 한편에 가담하기 전에 모든 정파와 분파를 탐구하면서 정치적 저류─당시 총재 정부에 맞서 꾸며지고 있던 음모는 예닐곱 가지 이상이었던 것 같다─를 면밀히 주시했다."(200-1)
# 1799년 11월 9~10일(브뤼메르 18~19일) 쿠데타
"프랑스에서 통령 정부(1800~1804)는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혁명은 이제 끝났다. 급진적 자취들은 싹 치워졌고,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으며, 망명 귀족들은 귀환이 허락되었다. 화해와 질서 회복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새 정부에 대한 공적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보나파르트가 일련의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 개혁 정책들이야말로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건설적이고 항구적인 유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민 다수가 새로운 국가수반에게 허락한 무비판적인 승인을 활용하는 다양한 전략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합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 지도자였고, 그런 관행은 20세기에 어디서나 만연하게 된다. 남성 보통선거권과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허울 속에서 보나파르트 정권은 통치받는 대중에게 아무런 실제 권력을 주지 않았고, 그 대신 정치 과정을 솜씨 좋게 형성하고 통제했다."(203-4)
"통령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나폴레옹 법전으로 알려지게 된 프랑스 민사법의 집대성이었다." "새로운 법전들의 혁신으로 꼽히는 첫 번째 원칙은 명료성이었다. 수백 가지 면제 조항과 변칙 사항을 둔 관습법에 젖어 있는 법률가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종교를 국가의 사안에서 분리시키는 세속주의였다. 이 원칙에 따라 혼인은 이제 세속적인 민사 계약으로 인식되고 이혼이 허용되며,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개인적·시민적 존재를 위한 길이 닦였다. 세 번째는 절대적이고 침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개인의 재산권 원칙이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법 앞의 평등 같은)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 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206-7)
7장 전쟁으로 가는 길, 1802-1803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2년 동안 이어진 협상의 성과인 아미앵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지난 6년 동안 프랑스가 대륙에서 정복한 땅과 관련한 쟁점은 논의 자체를 거부했고, 영국이 이 점을 묵인한 것을 고려할 때, 아미앵 조약은 혁명전쟁의 결정적 성과 두 가지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지지했다. 바로 프랑스의 서유럽 지배와 영국의 해상 패권이었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아미앵 조약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완전한 전환을 가져왔고, 윌리엄 피트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수립된 국제 체제가 〈완전히 폐지되어 (···) (그것을) 유효한 것처럼 여겨봐야 부질없다〉고 시인해야 했다."(229-36)
"뤼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은 대륙의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광범위한 양보는 8년간의 전쟁으로 얻어낸 전략적 이점들을 내주는 것처럼 보였기에 국내에서 우려와 허탈감을 자아냈다. 영국 정치인 오클랜드 경 윌리엄 이든이 지적한 것처럼 물론 그 조약들이 〈지나치고 무시무시하게 비대해진 프랑스 권력〉을 만들어내기는 했다. 영국 혼자서는 그 현실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 다시 말해 국내의 난제들을 처리할 시간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이 영국 제독 조지 키스 엘핀스톤이 표현한 대로 〈프랑스가 지금처럼 강한 상태로 있는 한 유럽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할 시간이었다. 〈유럽 대륙의 열강이 마침내 이 점을 확신하게 되면 프랑스를 합당한 경계 안으로 되돌아가게 하도록 모두 기꺼이 힘을 합치게 되지 않을까?〉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미앵 강화는 단명하게 되고, 1802년 말에 이르자 벌써 뚜렷한 긴장의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239)
# 뤼네빌 조약 : 1801년 2월 9일에 체결된 프랑스-오스트리아 강화 회담
"한편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1804년 1월 1일, 아이티 독립 선언─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보나파르트는 생도맹그를 확고하게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위협과 영국과의 전쟁 재개 전망은 루이지애나 보유가 프랑스에 커다란 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한다면 영국이 서반구에서 전리품을 얻을 가능성을 초장에 제거하고, 미국과의 갈등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미국을 장래에 영국의 경쟁자로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보나파르트는 그러므로 뉴올리언스 매입에 관한 미국의 문의에 선뜻 반응했다."(252-4)
# 1803년 5월 2일, 루이지애나 영토 이전 합의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해체한) 남독일 국가들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 수립은 군사적·외교적 승리 둘 다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의 영토 변경을 좌절시키려고 무력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 보나파르트는 재빨리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에 후한 보상을 제안해 그들과 한편이 되었다. 1801년 프랑스와 러시아의 합의는 남독일에서 프랑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기보다는 그들과 공통의 대의명분을 찾고자 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이 동의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중유럽에서 오스트리아 권력이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자기편이 전혀 없는 오스트리아로서는 물러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협조를 얻고, 프랑스의 궤도 안으로 중급 규모의 독일 국가들을 끌어당김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중점을 둔 보나파르트의 외교는 그러므로 독일의 운명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268-9)
8장 파열, 1803
"아미앵 조약이 와해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몰타섬의 미래와 관련이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은 몰타의 전략적 가치를 드러냈다. 그 섬은 동방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동방에서 프랑스의 정복은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영국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터였다." "진짜 장애물은 양측이 몰타의 가치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 한 영국 장교가 표현한 대로 〈해협들[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의 입구와 시리아 해안으로부터 거의 동일 거리에 위치해, 전쟁 발발시 지중해와 레반트의 무역 전체가 몰타섬 소유자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몰타는 지중해의 무역을 쉽사리 좌지우지할 수 있을 테고, 파리와 런던 둘 다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런던으로서는, 프랑스의 의존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에 희망봉을 넘겨서 인도로 가는 도상의 핵심 지역에 대한 접근권을 이미 상실했다. 영국이 몰타에서 철수한다면 대안 경로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게 될 터였다."(278-80)
"아미앵 조약의 파기는 근대사의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전쟁과 참화의 12년 세월을 열었고,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운명들을 좌우했다." "보나파르트가 (다른 많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혐오했으며 그의 대륙 정책과 식민지 정책이 영국과의 전쟁 결정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1800년과 1815년 사이에 벌어진 모든 분란에 그 혼자만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기만적인 것 같다." "1800~1803년에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전통적인 라이벌에 맞서 프랑스의 지위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박고 있는 지정학적 논리를 따랐다. 영국의 급속한 산업화, 국제 무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 폐쇄적인 식민지 체제, 우월한 해군력은 프랑스가 시장과 원자재로부터 차단되고, 더 넓은 국제 체제에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전망에 직면함을 의미했다. 프랑스 엘리트 계층은 그러한 우려를 공유했고, 보나파르트의 팽창 정책은 국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누렸다."(300-3)
#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가 1803년 3월에 시작된 12년간의 유혈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통령의 언행은 권력을 향한 강력한 추진력을 가리켰으니, 대륙의 평화를 유지했을 수도 있는 신중함과 유화적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실제로 전쟁을, 프로이센 군사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의 연장일 뿐〉이라고 봤고,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은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이웃 국가를 최대한 자극하고 찔러보면서, 결국에는 전쟁의 열매를 맺은 원한의 씨앗을 뿌렸다. 개별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프랑스의 행위들은 도발적이었지만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그 행위들은 프랑스가 헤게모니 국가로서 유럽과 해외에서 제국적 구상을 공세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적 현실을 창출했다.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다."(306-7)
9장 코끼리 대 고래 : 프랑스 대 영국의 전쟁, 1803-1804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 위해 해군을 증강하는 동안 프랑스는 서유럽을 가능한 한 많이 지배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하노버점령은 영국-프랑스 전쟁 동안 유럽의 정세에서 핵심 지표였다. 선제후령은 1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803년 한 해에만 프랑스는 1700만 프랑이 넘는 금액을 뜯어갔고, 하노버는 주변국들로부터 다시금 수백만 프랑을 융자해야 했다. 더 중요하게도, 하노버 위기는 유럽 열강에 만연한 태도─상호 불신, 협력의 결여, 지역적 이해관계에 대한 몰두─의 예시이며, 바로 그런 태도가 다음 10년 동안 프랑스가 유럽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비록 북독일은 유럽 열강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프랑스가 하노버를 침공해 북독일에서 패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조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1803년 봄 내내 애매모호한 정책을 추구했고 프로이센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의 하노버 점령을 가능케 했다."(324)
"(보나파르트가 모든 것을 지휘·감독하는) 국가 원수와 총사령관의 권위의 결합은 뚜렷한 이점들을 지녔다. 나폴레옹은 적수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설정해 외교와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반면, 그의 적수들은 동맹전쟁 수행에 따르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회의나 군주에 의해 종종 손발이 묶였다. 전쟁 수행의 모든 측면을 확고하게 1인이 총괄할 때의 이점은 조타기를 잡은 그 사람이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더욱 커졌다. 정치적·군사적·병참적 그리고 무수한 여타 요인들의 세부 사항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경이로웠다. 하지만 의사 결정 권한의 극단적인 집중화는 이점과 더불어 대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신이 속보로 가는 말보다 더 빠르지 않은 시대에 제아무리 유능할지라도 단 한 사람이 방대한 거리에 걸쳐 흔히 널찍이 분리된 전쟁 권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을 조율하는 것은 때로 불가능에 가까웠다."(337)
10장 황제의 정복, 1805-1807
"1804년 가을과 1805년 봄 내내 유럽 열강의 외교관들은 프랑스에 맞선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그러나 주요 열강은 서로의 야심을 의심했고, 일부 국가들은 이미 프랑스에 두 번이나 패퇴한 동맹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힘겹게 결성된 3차 대불동맹은 하노버와 북독일에서 프랑스의 철수, 스위스와 네덜란드 독립의 재확립,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복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의 완전한 축출을 원했다. 이것만도 만만찮은 목표였지만 동맹 세력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조약 조항에 따르면 〈여러 국가들의 안보와 독립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향후의 찬탈을 막을 견고한 방벽을 제시하는 유럽 내 질서의 수립〉을 추구했다." "하지만 대불동맹은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프랑스 내 정권 교체를 실시할 생각은 없었다.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의 대관과 더불어 프랑스의 혁명 급진주의(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위협)는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356-9)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패권을 안겼고 그 지역에서 그는 설득과 압박을 통해 남독일 핵심 국가들(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냈다. 다른 유럽 열강은 그가 거둔 승전들의 규모와 신속함에 깜짝 놀랐다. 이 전역으로 열강이 부활한 프랑스를 패배시킬 만큼 강력한 동맹을 결성하고 주도할 능력이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나마 허레이쇼 넬슨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의 3분의 2를 섬멸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위안거리였지만, 이 전투는 또한 해양 강국은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해상에서의 승전들은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지만 육상에 기반을 둔 강국을 상대할 때 내재한 제약들을 상쇄할 수 없었다." "다음 7년 동안 영국은 나폴레옹과 그의 제국을 몰락시키기 위한 시도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375-80)
"1800~1801년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심대한 변화는 독일에서 일어났다. 3차 대불동맹 소멸의 여파로 제국의회가 폐지되자(1806년 1월 20일)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 재편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개시했다. 3월에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다스릴 새로운 독일 군소국을 처음 수립했다. 신설된 베르크 대공국은 매부인 뮈라에게 주었다. 더 중요하게도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을 프랑스가 지배하는 독일 정치체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완충국이자 프랑스 상품을 위한 시장, 제국을 위한 군대 인력의 원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1806년 7월, 독일 제후들이 파리 조약을 수용하고 카를 테오도어 폰 달베르크를 〈대제후〉로, 나폴레옹을 〈수호자〉로 인정하면서 라인연방이 정식으로 구성되었다. 최초의 16개 연방 가입 국가들 가운데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바덴, 베르크는 모두 8월 1일 신성로마제국에서 탈퇴해 사실상 제국에 종말을 고했다."(387)
11장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 유럽과 대륙 봉쇄 체제
"많은 이들이 나폴레옹의 최대 실수로 꼽는 대륙 봉쇄 체제는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훨씬 전에도 줄곧 시도되었던 전통적 정책들의 지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프랑스 배들이 트라팔가르만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여전히 실현될 수 없었고, 프랑스 상선 자원은 꾸준히 감소했으며, 프랑스 산업가들은 영국과의 경쟁에서 확연히 뒤처졌으니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제도의 효과적인 고립만이 영국을 굴복시킬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 상품은 일체 통과할 수 없는 [무역] 장벽 뒤로 프랑스가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에 따른 시장의 상실은 영국 경제에 처참한 타격을 입히고 어쩌면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소요를 야기해 나라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을 터였다. 반대로 유럽 대륙을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킴으로써, 이 체제는 제국에도 큰 혜택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412-4)
"대륙 봉쇄 체제는 고작 6년만 존속해, 영국을 굴복시키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실패 원인은 이 체제를 충분히 긴 기간 동안 철저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 있다. 실패를 야기한 요인들은 첫째, 에스파냐에서 나폴레옹의 패착과 더 중요하게도 러시아에서의 패착은 이 체제에 결정타를 가했다. 둘째, 영국의 국가적·경제적 안보는 봉쇄에 대처해 스스로를 조정한 영국 재정 시스템의 유연성 덕분에 진정으로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해군은 영국의 제해권을 위협하거나 유럽 대륙에서 영국 상품을 배제할 수 있는 봉쇄를 실효적으로 강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대륙 봉쇄 체제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영국이 프랑스의 해외 시장 접근을 막고 여타 지역에서 상품 판매를 늘림으로써 유럽 시장의 상실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경제의 최악의 시기는 유럽과 미국 둘 다에 대해 수출이 막혔던 1810~1811년에 발생했다."(421-2)
"대륙 봉쇄 체제는 심대한 무역 교란, 산업에서 농업으로의 대규모 자본 이동, 사회적 불안과 인력 손실, 전쟁과 전쟁이 초래한 격변으로 인한 자본 파괴를 이미 경험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산업 공동화에 일조했다. 또한 대륙 상당 부분을 영국과의 활발한 교류로부터 고립시키고, 신기술과 공법의 유입을 저해해 일부 산업들은 영구적인 쇠락이 야기되었다." "대륙 봉쇄 체제가 설치한 보호 장벽은 대륙의 산업이 성숙할 만큼 오래가지 못했고, 그래서 1814~1815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관세 폐지와 시장 개방으로 대륙의 산업 부문들이 영국의 경쟁자들로부터 심한 타격을 받으면서 극심한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경제적 고통은 결국에는 나폴레옹의 전 유럽 지배의 꿈을 끝장낸 민족주의 부흥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대륙 전역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궁핍에 일조한다고 대륙 봉쇄 체제를 비난했다. 외국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분노는 깊고도 정당했다."(428-30)
12장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쟁탈전, 1807-1812
"1807년 여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정에 영국의 통상에 대해 포르투갈의 항구를 폐쇄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포르투갈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자국의 해외 식민지(특히 브라질)와 상업적 번영이 위험에 빠지거나, 프랑스의 침공과 점령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1807년의 위기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군의 입성에 앞서) 포르투갈의 사적·공적인 자산, 정치 지도자 대다수, 사실상 나라의 해상력 전체가 빠져나갔다. 다음 15년 동안 브라질에 머물게 될 왕실의 망명은 포르투갈 구체제의 소멸과 심대한 정치적·문화적·경제적 결과를 낳은 대서양 건너편으로의 이전을 알렸다. 유럽 국가를 다스리는 왕가가 최초로 해외 식민지에 정착해, 본국의 삶에서 식민 영토가 하는 결정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상당한 재정적·물질적 원조를 받아 1808년부터 1821년까지 〈영국의 보호국〉이 되다시피 했다."(435, 445-6)
"프랑스 황제는 에스파냐에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정치적 혼란과 만연한 반反 고도이 정서를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16일,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맹방으로서 에스파냐 궁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좌시할 수 없으며 반목하는 정치 분파들을 중재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는 발표와 함께 부르봉 왕조에 개입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은 부자를 프랑스의 비욘시로 초대했고, 두 사람은 거기서 악명 높은 희비극의 일부가 되었다." "부자 모두를 강제로 퇴위시킨 바욘 퇴위는 추악한 강압과 기만을 결합한 것으로 한 저명한 역사학자의 결론을 정당화한다. 〈재능 면에서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품성과 수법 측면에서는 대단한 마피아 두목이었다.〉 바욘 사건으로 황제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으니, 그 순간 나폴레옹은 곧 지극히 난감한 형국으로 탈바꿈할 상황에 확실하게 발을 담근 것이었다."(452-7)
#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 : 프랑스의 간섭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왕가의 도피를 막기 위해 과격한 행동에 나서자, 페르난도 왕세자는 부모에게 그들의 신변안전과 대신 고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전면 퇴위 뿐이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새로운 왕위에 오른 사건
"에스파냐 점령은 나폴레옹의 가장 근본적인 판단 착오 가운데 하나이며,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될 실수였다. 그는 자신의 친척을 페르난도 왕세자와 결혼시킴으로써(왕세자 본인이 거듭 청한대로) 에스파냐와 혼인동맹을 수립하는 훨씬 더 안전한 경로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 대신 황제는 황제는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를 축출하고 그 왕국을 직접 떠맡는 더 과격한 노선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인들이 자국 왕실에 적대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외세의 지배를 열렬히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스파냐에 속국(봉신 군주정)을 수립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에스파냐의 국가적 직조 표면 아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원심성 지방분권주의의 엄청난 힘을 풀어헤치는 혁명을 유발했다." "바일렌에서의 패배를 필두로, 그때까지 무적이었던 (프랑스) 제국 군대의 패배는 대륙 곳곳에서 들뜬 흥분을 불러와, 유럽 전역의 반프랑스 정서에 새로이 불을 지폈다."(458-64)
"한편 웰링턴이 리스본 반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구축한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은 반도전쟁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드러났다. 웰링턴에게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영국은 최소의 손실만 입으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대중은 꼼꼼하고 체계적인 웰링턴의 파비우스적Fabian 성격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이런 전략이 결정적 전투나 승리를 가져오지 않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링턴의 전략은 포르투갈의 시골 지방에 파괴적이긴 했어도 실용주의적이고 통찰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프랑스는 또 다른 포르투갈 침공 작전을 기획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영국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에스파냐로 반격에 나섰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이 혹독한 시험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리스본에서는 어떤 친프랑스 진영도 생겨나지 않았고, 포르투갈인들은 끝까지 결연하게 전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영국군을 지원했다."(490-1)
# 파비우스적 전략 :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한니발에 맞서 정면 전투를 회피하고 지연 전술을 써서 전략적 승리를 추구한 데서 나온 표현
13장 대제국, 1807-1812
"나폴레옹 제국은 어떤 목적들에 복무했는가? 이 제국 건설 뒤에 자리한 타당한 원동력으로서 '가족적 친밀성'을 내세우는 논의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일 것이다.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며, 주로 영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논의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나폴레옹의 과대한 권력욕에 대한 주장이다. 한편 나폴레옹 예찬자들은 그를 행동하는 인간, 낡아빠지고 억압적인 제도들을 무너뜨리고 수 세기에 걸친 관습과 전통을 폐지했으며, 교육과 사법 체계를 개편하고, 개인의 권리들과 능력의 옹호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새 유럽을 위한 토대를 놓은 혁명가로 봤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본다).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분명한 뉘앙스가 담긴 답변은 나폴레옹은 한 가지 형태의 전제정을 또 다른 형태의 전제로 대체했다는 것, 개혁을 전파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를 약화시키고 점령지를 착취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알렉산더 그랩의 표현을 빌리면 〈나폴레옹 지배의 야누스적 얼굴〉은 여전하다."(504)
"현재의 유럽연합 체제는 회원국들 간 평등에 바탕을 둔다. 유럽에 대한 나폴레옹의 비전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강성함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모델을 수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가 우월한 행정 체제와 법적 체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럽 나머지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거기에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는데 프랑스 노선에 따라서 다른 나라들을 변모시키면 나폴레옹 자신의 지배와 자원 착취가 크게 용이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정권은 결코 하나의 '유럽적' 정체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에 제국의 생존 자체가 프랑스 무력의 지속적인 우위에 의존했지 제국 지배의 대중적 지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초월적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것은 동등한 국가들로 구성된 연방의 이상이 아니라 보편 제국의 이상, 그 정신에서 유럽연합보다는 샤를마뉴 제국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510-1)
"나폴레옹 체제의 혜택들은 따라서 프랑스 치하 영토들에 대해 프랑스가 한 요구들과 나란히 놓고 고려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전쟁은 전쟁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고, 실질적으로 그것은 프랑스 점령이 법 앞에서 평등과 종교의 자유 같은 높은 이상들만이 아니라 병력 모집과 물적 착취의 증대를 동반한다는 뜻이었다. 프랑스 벙력의 주둔은 그들의 군사적 필요 일체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지 인구에 무거운 부담을 지웠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나폴레옹의 〈대제국〉은 본질적으로 소속 국가들이 각자 병력과 재정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적 체제였고, 그것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정적 기여에 덧붙여 나폴레옹 정권은 그 군사적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 징병을 요구했다." "나폴레옹 징병 메커니즘의 규모와 범위는 러시아 침공 준비 과정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당시 그는 전체 60만 병력의 절반을 위성국과 동맹국에 의존했다."(514-5)
"증세, 강제 분담금, 징병제, 탄압은 나폴레옹 정권이 유럽 곳곳에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지 못한 핵심 이유였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저지대 지방이든 간에 귀족층은 프랑스 개혁 조치들이 수반하는 결과들에 당연히 심기가 불편했고, 이런 변화들로부터 가장 혜택을 입는 부르주아들은 새로 얻은 권리와 지위에 대한 기쁨과 억압받고 검열당하고 과중한 세금과 대륙 봉쇄를 겪어야 하는 데 따른 괴로움을 조화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농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군대에 식량과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나폴레옹 주둔군의 부담을 주로 짊어졌다. 프랑스 황제는 혁명의 화신이라는 온갖 말들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코뱅이었던 그는 1793~1794년의 원칙들을 체현하지 않았고 그의 개혁 정책들은 결코 사회경제적 평등의 달성을 겨냥하지 않았다. 그는 1789년의 원칙들을 온전히 대변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와 점령지에서 나폴레옹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거나 여론을 표현하는 모든 조직적 수단을 억압했다."(519)
14장 황제의 마지막 승리
"나폴레옹이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를 몰아낸 것을 비춰볼 때 오스트리아 주전파─프랑스와의 공공연한 대립을 옹호하는 쪽─는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생존은 나폴레옹에 대한 단호한 도전으로만 보장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1808년 가을 주전파는 카를 대공의 반대를 극복하고 프랑스와 새로운 무력 분쟁을 벌여도 좋다는 프란츠 황제의 승인을 얻어냈으니, 이것이 5차 대불동맹전쟁이다." "1796년이나 1805년의 상황들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는 입지가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더 허약하고 군사적으로 지나치게 확대 배치되었다고 여겨졌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고위 관리가 자랑스럽게 천명한 대로 이전의 패배들은 비전과 지도력 결여의 결과었지만 그러한 과거의 잘못들에서 배운 바가 있었다. 〈다름 아닌 적의 무기들로 적과 싸우자. 그에게 자신의 총알들을 되돌려주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위신에 도전해 그것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했다."(543-6)
"1809년 4월 10일, 카를과 오스트리아 군의 주력이 바이에른을 침공하고, 요한 대공의 또 다른 오스트리아 군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시작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565-6)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또 한 차례의 참패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과 굴종적인 동맹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몇 년 동안 그 동맹에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가져온 최대의 충격파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는 기대치를 조정해야 했고 그에 따라 미래의 협력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전쟁은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제국을 무너뜨리는 1813~1814년의 대동맹을 위한 길을 닦는 데 보탬이 되었다."(566)
15장 북방문제, 1807-1811
"덴마크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보다는 영국의 해군력에 관해 더 걱정하면서 혁명전쟁 기간 내내 중립을 유지했다. 영국은 발트 지역과 교역을 유지하고 그곳에 영국 해군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영국의 해군력에 결정적인 요소였으므로 당연히 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덴마크가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면, 영국 해운이 발트 해역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좁은 외레순 해협이 폐쇄돼 영국의 무역과 접근권은 위협받게 될 터였다. 더욱이 덴마크 해군의 규모와 우수성을 감안하면, 덴마크, 프랑스-네덜란드, 에스파냐 해군력이 연합할 경우 대서양은 아니라고 해도 영국의 북해 지배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려는 덴마크의 노력을 간과하는 편을 택했다. 1807년 코펜하겐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영국도 무거운 대가를 치렀다. 영국군이 떠난 지 고작 열흘 뒤에 덴마크는 나폴레옹과 동맹조약을 맺었고, 11월 4일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602-14)
"스웨덴과 영국의 동맹관계는 발트해에서 영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러시아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부동항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고 그 결과 수익성 높은 해외무역에 참여할 수 없었던 러시아에게 발트해는 특히 중요했다. 발트해는 서유럽으로 통하는 최단거리 통로를 제공했다. 발트해로 접근할 수 없다면 러시아는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유럽에서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존재는 그 제국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모든 외국(즉 영국) 전함에 대해 발트해를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스웨덴 군주정이 응답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고, 1807년 12월 30일 러시아는 스웨덴이 계속 답변을 회피한다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808년 1월, 구스타브는 프랑스 병력이 발트해에 존재하고 나폴레옹이 독일 항구를 영국에 폐쇄하는 한, 이전의 합의 내용을 지킬 수 없다며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러시아는 이 거절을 개전 사유로 여겼다."(622-5)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강화를 위한 세 가지 선결조건을 주장했다. 스웨덴은 핀란드 전체를 할양하고, 영국과의 동맹을 공식 파기하며,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와 화평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대륙 봉쇄 체제에도 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달 간의 협상 끝에 1809년 9월 17일에 서명된 강화조약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전체 영토 가운데 거의 절반을 상실한 반면, 러시아는 그 지역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발트해에서 입지를 다졌다. 아닌 게 아니라 핀란드 주민들은 600년 넘게 스웨덴의 패권 하에 살다가 이제는 새로운 제국의 주인을 맞게 되었다." "프레드릭스함 조약은 스웨덴이 외교정책도 재조정하도록 강요했는데,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러시아와 또 한 번 파멸적인 전쟁을 낳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쟁 대신에 스웨덴은 전략적 고려에서 아예 〈핀란드 문제〉를 제거하는 쪽을 택하고 동부에서의 영토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서 노르웨이에 초점을 맞췄다."(651-2)
"발트해 사안에서 영국의 개입은 영국의 의도를 불신하던 스웨덴의 냉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사실 저강도 영국-러시아 전쟁─한 러시아 역사학자가 인상적으로 표현한 대로 〈연기 없는 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사실 프랑스-러시아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영국은 가능성 있는 동맹의 기초 작업에 나섰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뒤에 영국-러시아 동맹이 드디에 외레브로 조약(7월 18일)으로 현실화됐으니, 이 조약은 영국-러시아 전쟁을 정식으로 종결시키고 6차 대불동맹 수립의 토대를 놓았다."(638-42)
16장 사면초가의 제국 :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 전쟁
"동방문제의 기원은 오스만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계속되는 군사적 성공과, 그 결과 흑해 연안 지역을 따라 이뤄진 러시아의 영토 확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럽 정치가들에게 당대의 중요한 질문은 오스만이 러시아의 영토적·전략적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가, 막아낼 수 없다면 상호 경쟁하는 열강이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였다. 프랑스 혁명전쟁 전야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오스만이 지배하는 발칸 지역 한 조각을 얻기를 기대하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전쟁에 가담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유럽에서 혁명적 격동이 시작되자 바뀌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라인란트와 이탈리아에서 패배한 뒤 빈의 태도는 당연히 중유럽과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오스만 국경지대는 뒤로 밀려났다. 인도에서 자국 세력이 증대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유럽 내 세력 균형유지와 더불어 인도 방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체로 오스만 제국을 떠받쳐주려고 애썼다."(672-3)
"그래서 19세기 초에 러시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할 때 비교적 운신의 자유를 누렸고 세 가지 상호 연결된 목표를 추구했다. 첫 번째는 일방적인 병합이나, 다른 유럽 열강과 함께 오스만 영토를 분할해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술탄의 기독교 신민들에 대한 가호와 민족주의적 정서의 유발을 통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을 얼마간 남겨두어 완충지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때로 〈허약한 이웃〉 정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지막 목표는, 1802년 한 러시아 대신의 표현으로는 〈현재의 영토 판도에서 러시아는 더는 확장이 필요하지 않고, 튀르크인들보다 더 고분고분한 이웃도 없으며, 우리의 이 자연스러운 적의 보존이 향후 우리 정책의 근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일단 러시아가 오스만한테서 충분한 영토를 빼앗으면 두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결코 대등하지는 않을 터였다."(673-4)
"프랑스와 오스만의 관계는 1798년, 프랑스 공화국이 오스만령 이집트를 장악해 영국 무역을 위협함으로써 영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는 원대한 구상을 추구하면서 악화되었다.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은 치외법권 내 프랑스 상인들의 보호와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라틴(로마가톨릭) 기독교도 비호라는 레반트에 대한 프랑스의 전통적 정책들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침공은 영국의 식민 권력에 타격을 주는 대신, 전통적인 맹방인 오스만 제국이 적국 영국과 손잡게 만들었다. 오스만 정부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책의 중대한 전환으로서 1798년 9월에 러시아 해군 전대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양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고,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동부 지중해에서 영국-러시아 함대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 및 영국과 조약을 체결해 대불동맹에 가담했으니, 오스만 제국이 유럽 동맹의 일원이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676)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806년 12월 29일 베오그라드, 1807년 2월 샤바츠 함락으로 이어진 일련의 군사적 승리들로 이전 베오그라드 피샬리크[파샤 관구]는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세르비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저항을 무너뜨릴 중요한 압력 수단을 제시한 셈이었다." "러시아가 러시아인과 세르비아인을 잇는 공통의 정신적·종족적 유대를 언급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의 지도자) 카라조르제는 자연스레 장래 세르비아 독립에 관한 러시아의 확약을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약속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사실 세르비아의 완전한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정한 형태의 후원-의존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다." "비록 프랑스-러시아 간 틸지트 조약은 세르비아를 언급하지 않지만 두 나라는 오스만튀르크가 러시아-오스만 전쟁의 종식을 위한 프랑스의 중재 제의를 거절할 경우 발칸 지역을 〈해방〉시키기로 동의했다."(733-4)
"1809년 1월, 기회를 틈탄 영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자, 런던과 화평을 맺지 말라고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에 거듭 경고하는 가운데 석 달간의 협상을 거쳐 칼라이 술타니예(다르다넬스 해협) 강화는 영국-오스만 관계를 복원했다. 영국 정부는 오스만 영토 내 모든 병력을 소개하는 데 동의한 한편 술탄은 영국에 치외법권적인 특권들을 복원시켜주었다. 런던은 술탄의 영토를 보전하고 프랑스의 속셈을 저지할 오스만-러시아 강화를 이끌어내도록 러시아를 중재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조항 가운데 하나는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이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외국 전함에 대해 상시 폐쇄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지중해에서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 간 연합 가능성에 관한 영국의 우려를 반영한 조항이었다. 다음 3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오스만 전쟁을 틀어막고, 오스만튀크르·오스트리아와 삼자동맹을 발전시키며, 오스만 제국에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 둘 다를 억제하는 복잡한 전략을 추구했다."(730)
"1812년 5월 28일, 프랑스의 침공 위협이 높아짐에 따라 심한 압박감을 느낀 러시아가 전쟁 종식에 합의하면서, 술탄 마무드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오스만군은 1813년에 세르비아군을 궤멸했고, 그해 말에 이르면 베오그라드를 점령한다. 이로써 1차 세르비아 봉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카라조르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반면 카라조르제의 라이벌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일부 크네제스는 오스만 지배의 복귀를 수용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그렇게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746-8)
17장 카자르 커넥션 : 이란과 유럽 열강, 1804-1814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캅카스에서 러시아-이란 분쟁을 배경으로 하는 핑켄슈타인 조약(1807년 5월 4일 체결)은 동방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떠받치고자 오스만 제국 및 이란과 삼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대한 나폴레옹의 관심을 반영했다. 1월 17일자 샤에게 쓴 다소 아첨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 공통의 적에 맞서 프랑스-오스만-이란 합동 전선의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영구적인 동맹을 결성합시다〉라고 그는 샤에게 촉구했다. 핑켄슈타인 조약은 이 같은 야심의 표명이었다. 그것은 파트 알리 샤를 이용해 공동의 적 러시아에 맞서 양동작전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고, 이란이 인도의 서쪽 이웃이라는 위치를 활용해 아대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약은 이란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동부 조지아와 여타 남부 캅카스의 정치체들을 카자르의 속령으로 인정하는 프랑스-이란 동맹을 수립했다."(764)
"카자르 군대의 최대 문제는 러시아군의 기술적 우위보다는 군사 조직과 유지, 그리고 전쟁 수행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에서 기인했다. 이란군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 병사들은 통제와 협조가 어려웠다. 그들은 자연스레 부족의 이해관계를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했고 서구식 전쟁 방식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므로 틸지트 조약 체결로 러시아와의 적대행위가 재개되었을 때, 새롭게 편성된 사르바즈 부대는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개혁 조치들이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개혁 조치들이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맹비난했다. 이 시책들을 초기 이슬람 관행의 부활─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코란의 특정한 언급들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로 묘사하려던 카자르 군주정의 시도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사르바즈 병사들은 프랑스 장교들이 부과하는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고 부족적 연대감을 없애려는 일체의 시도에 반발했다."(768-9)
"시간이 흐르면서 파트 알리 샤는 비록 본의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리란 점을 깨닫고 다시금 영국이란 대안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사절 존스는 틸지트 조약에 따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1809년 3월에 체결된 두 번째 영국-이란 조약은 카자르 왕조가 이전에 유럽 열강과 체결했던 조약들의 핵심 결함들을 바로잡았다. 영국은 이란 군대를 훈련·무장시키는 것은 물론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는 이란이 프랑스에 했던 모든 양보와 합의 사항을 폐지하고 유럽 열강이 인도에 도달하기 위해 이란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유럽'이란 자구의 삽입은 카자르 측의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란에게 그것은 러시아를 의미한 반면, 런던에게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프랑스를 의미했다. 영국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구상을 억지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776-7)
"1812년 6월에 개시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에서 영국을 애매한 입장에 빠뜨렸다." "러시아에 맞서 영국의 계속되는 지원을 기대한 파트 알리 샤는 영국인들로부터 이란은 적과 강화해야 한다는 말─그것도 아주 명확한 어조의─을 들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하고 프랑스에 맞서 새로운 유럽 동맹이 결성되는 마당에 영국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맹방인 러시아를 이 먼 구석에서까지〉 도울 결심이었고, 영제국의 이해관계에 더 이상 보탬이 되지 않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영국 대사 우즐리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 샤가 1813년 여름에 강화 회담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1813년 10월 24일, 마침내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확인하는 강화조약이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남동부 캅카스 영토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잠식은 무슬림에 대한 부당한 취급과 더불어 러시아-이란 관계를 심각하게 긴장시켰다."(787-8)
18장 영국의 해외 원정, 1805-1810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서인도제도 등지에서 프랑스를 겨냥해 해외원정을 행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방대한 조선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전함들이 건조됨에 따라 다양한 항구들에서 출동 태세를 갖춘 전함들이 유지되었고, 영국 해군은 광대한 지역에 걸쳐 배치되어 적이 봉쇄를 뚫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인력과 선박을 상당히 소모시켰다. 함대는 몇 달씩 바다에 머물면서 식량을 소비하고 대서양이나 지중해의 강풍을 견뎌야 했다. 함대의 능률을 유지하는 일은 영국 해군부가 전쟁 동안 맞닥뜨린 최대의 과제로서, 대규모 선박 수리에 필요한 건선거 시설이 극히 드문 사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어려운 과업이었다.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조선소를 활용할 수 없었고, 몰타에 있는 것은 완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람에 의한 지속적인 마모와 파손에 직면해 영국 전함들은 플리머스나 포츠머스, 채텀의 모항母港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816-7)
"이 모든 활동은 머잖아 미래에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과 거의 대등한, 적어도 전열함 수에서는 거의 대등한 전력을 꿈꿀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력 균형은 화력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쪽으로 우세하게 기울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결정은 영국에게는 시기상으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영국 해군은 전력의 한계 수준까지 확대 전개되어, 발트해와 지중해만이 아니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서까지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반도전쟁에만 노력을 집중하고 해상에서 충분한 우세를 점했다면 유럽 패권 투쟁은 프랑스에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잘 보호되는 항만에서 해군을 건설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가 바다에서 영국 해군에 도전할 날을 준비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침공 준비는 프랑스 조선소에서의 작업들을 늦추고 나중에는 완전히 중단시켰는데, 조선공과 선원들이 프랑스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징발된 탓이었다."(822-3)
19장 영국의 동방 제국, 1800-1815
"영국 식민주의에 결정적인 요인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해상력이었다. 해상력이 없다면 아시아의 지배 영토는 그야말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상력 자체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인도는 중앙 권위를 파괴하다시피 한 세력 투쟁을 겪었다." "무굴 제국이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권위를 공고히 했다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세기 후반에 훨씬 더 만만찮은 적과 대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대륙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고, 중앙의 정치 리더십만이 아니라 단일한 정체성과 공통의 대의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인도 병사들은 국가에 헌신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게 헌신했고, 그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경쟁관계, 시기심이 아대륙의 계속되는 내분을 지탱했다. 그 덕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다양한 인도 세력의 연합 전선에 직면한 적이 없었고 강압적 조치와 위협, 외교를 통해 현지 통치자들의 단결 투쟁을 차단할 수 있었다."(833)
"1808년에 벌어진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남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그리고 그 이후로도) 영국은 중국을 향해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고 영국 경제와 전쟁 수행 노력을 지탱하는 무역으로부터 계속 이익을 얻는 편을 선호했다. 광둥 무역은 계속해서, 특히 동인도회사가 아편 공급에 뛰어들면서 성장했다." "1805년과 1813년 사이에 동인도회사는 무려 900퍼센트에 가까운 이윤을 거둬들였고 영국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이던 면화를 아편이 대체했다. 이 밀수 무역은 막대한 통화 유출을 촉진하고 중국 정부가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재정 출혈에 기여했다. 1830년대 후반에 아편 무역을 둘러싸고 중국의 '강경' 자세에 직면하자 영국은 해군력과 포격 능력을 이용해 중국에 빠르고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860)
# 마카오 사건 : 1808년 9월, 드루리 제독 휘하의 해군 전대가 마카오를 무단 점령하면서 중국과 충돌한 사건. 중국의 강력한 대응에 굴복한 영국군은 12월 20~23일에 걸쳐 마카오에서 철수한다.
"1803년 이래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새로 영토를 획득할 때마다 동방 바다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영토 상실이 뒤따랐다. 1811년 자바 함락에 이어, 1812년이 되자 나폴레옹은 희망봉 동쪽에 더는 작전 근거지가 없었고, 프랑스 함대가 인도양에서 매우 철저하게 일소되어 프랑스 황제는 러시아와 진행 중인 갈등관계를 해소할 때까지 그 지역에서 해군 작전에 대한 생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812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동인도제도 함대는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단단히 다지고 가능한 위협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마땅히 거둔 성공에 만족했다. 인도, 중국, 아시아의 여타 지역들을 상대로 한 영국 무역은 번창했고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가고 중유럽에서 동맹 수립을 위해 자금이 절실한 정부의 금고를 채워주었다." "1803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의 승리들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얻은 잡다한 속령들을 단단히 다져서 궁극적으로 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77)
20장 서방문제? : 아메리카 대륙 쟁탈전, 1808-1815
"1793년 에스파냐는 1차 대불동맹에 가담했지만, 불과 2년 뒤에는 바젤 조약에 의거해 일방적으로 프랑스와의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영국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영국이 에스파냐 해운을 공격하면서 에스파냐의 대서양 무역은 붕괴했고, 남아메리카 식민지들과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외세의 침입을 부추겼다. 1796년 산로렌소 조약은 미국인들에게 미시시피강 항행권을 보장해, 오랫동안 에스파냐가 지배해 온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길을 닦았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지도부는 미국과 국경을 맞대는 에스파냐 영토를 유럽 열강이 일체 손 댈 수 없게 하고 싶었다." "미국인들은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가) 자신들이 아닌 (누구에게도) 넘겨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파냐가 그곳을 계속 소유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한 이웃이며 우리는 머잖아 틀림없이 이 (지역을) 미국에 병합하게 될 (···) 날을 조바심 내지 않고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888-9)
"19세기에 들어섰을 때 영국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프랑스와 미국 둘 다 에스파냐 영토를 탐내는 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1801~1803년 내내 영국 정치가들은 어떤 행동 노선을 취해야 할지를 놓고 머뭇거렸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영토를 이전하도록 에스파냐를 압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890)
"에스파냐-아메리카 세력 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촉발한 사건은 1808년 프랑스의 에스파냐 찬탈이었다." "포르투갈 군주정이 브라질로 탈출하고 에스파냐 부르봉 궁정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은 에스파냐 식민지들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그들은 바욘에서 벌어진 희비극─에스파냐 왕실이 포로가 된 것─과 뒤이은 전국적 봉기에 관해 알게 되었고,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 곳곳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합법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부르봉 군주의 부재는 유례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일부 식민지 지도자들은 부르봉의 대의에 계속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군주의 부재라는 상황을 이용해 더 큰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다. 후자의 주장은 아메리카 대륙이 통치 군주하에 인적人的인 연합으로 에스파냐와 이어져 있으며, 페르난도 7세의 폐위로 식민지들과 본국을 하나로 묶는 그 끈이 끊어졌다는 전제에 근거했다."(894-6)
"한편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각종 시도를 이어갔다. 에스파냐 국왕에게 충성하는 당국자들로부터 계속되는 저항에 직면한 그는 정책을 조정해 이베리아 에스파냐와 아메리카 에스파냐 간의 공식적 단절을 재촉하고자 해다. 그는 1809년 12월 12일 입법원 연설에서 〈(나는) 아메리카 대륙 나라들의 독립에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음 몇 년 동안 식민지 훈타 정부와 에스파냐 훈타 정부(그리고 나중에는 섭정위원회)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나폴레옹은 반란을 부추기고 선언서를 발표하도록 수십 명의 대리인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했다. 그는 남아메리카 군사 원정 계획을 고려하고 반란자들에게 재정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러시아 침공 준비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도들 중 어느 것도 뚜렷한 혜택을 가져오지 않았다. 영국 해군의 보호 속에서 해상을 통한 일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에스파냐 식민 정부는 내부의 난제들에만 집중했다."(900-1)
#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내부 분쟁
1.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현 멕시코) : 1813년 11월 6일 애국파가 독립을 선언했으나 1815년 근왕파에게 패배하면서 1차 멕시코 혁명 종결
2.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 1810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수립 선언 후 8년간 지속된 아르헨티나 독립전쟁 발발
3. 누에바그라나다(현 콜롬비아) : 근왕파가 우세를 점했으나 1816년, 시몬 볼리바르의 공화파 세력이 귀환하면서 10년간 지속된 독립전쟁 발발
4. 페루 부왕령 : 확고한 근왕파 지역으로 남았지만, 1812년 반도전쟁의 베테랑 산마르틴이 애국파에 합류하면서 칠레 재정복 투쟁의 기틀 마련
21장 전환점, 1812
"러시아와 프랑스 두 제국의 관계는 1808~1811년에 갈수록 긴장이 높아졌다. 알렉산드르가 틸지트 조약에 의거해 가담하기로 동의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체제는 러시아 경제에 대단히 불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는 여전히 농업 근간의 제국이었으며 핵심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제조업 공장 수가 점차 늘어나기는 했어도 프랑스나 영국과 비교할 때 러시아의 산업적 기반은 한참 뒤쳐져 있었다. 러시아는 자원을 수출하기 위해 자국 상선보다는 외국 상선에 더 의존했고, 영국이 러시아의 주도적인 무역 상대국이었다." "러시아가 느끼는 답답함은 영국이 흉작으로 고생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풍작을 누린 1810년에 극에 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지배하는 항구들에서 영국으로 곡물 수출을 허용했지만(그러면서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러시아는 대륙 어느 곳보다 최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단 한 톨도 팔 수 없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러시아 지주들은 이런 상황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926-7)
"폴란드는 양국 지도자 간 마찰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대공국 창설은, 알렉산드르 황제가 〈러시아라는 몸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한 대로, 폴란드 국토와 국가 정체성의 온전한 복원에 대한 러시아의 두려움을 일깨웠다.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복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상의 보장을 받아내려는 러시아의 시도에 퇴짜를 놨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에 맞선 전략적 장벽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러시아 이해관계는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놓고도 충돌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확보하려는 알렉산드르의 야심을 가로막으려고 나폴레옹은 작심한 것 같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발칸반도 분할에 관한 구상에서도 뜻이 일치하지 않았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라인연방 재편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핵심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첫 10년대가 끝날 무렵 틸지트에서 합의된 정치적 타협은 수명이 다했고, 새로운 유럽 전쟁이 곧 불붙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했다."(929-30)
"정말이지 그렇게 어마어마한 군사와 방대한 거리, 병참상 난관들이 개입되고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결정적인 결과가 나온 전쟁의 실례도 드물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 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946-7)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은 '동장군'이었다고 오랫동안 얘기되어왔지만 그런 주장들은 근거가 의심스럽다. 기상관측소에서 나온 당대의 관측 자료들은 그해 겨울이 사실 11월 후반까지 온화했음을 드러내는데, 그때쯤이면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에서 졌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 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러시아 내 수송 기간시설의 미비는 가용한 물자를 병사들에게 때맞춰 전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전략적인 퇴각과 초토화 작전을 통한 러시아의 소모전 전략으로, 적군은 시골에서 식량, 특히 마초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이로 인해 짐을 나르는 동물과 군마가 엄청나게 희생되었다."(947-8)
22장 프랑스 제국의 몰락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프랑스 군대 내 자신의 휘하에 있는 프로이센 분견대는 중립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프로이센 장군의 결정은 프랑스 상관들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 대한 분명한 반역 행위였다. 여태까지 프로이센 국왕은 더 애국적 성향의 프로이센 장교들과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것을 줄곧 말려왔다. 비록 국왕은 협약을 공식 부인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공식적 규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행위들이 프로이센 전역에서 되풀이되어 광범위한 봉기를 촉발했고, 결국 프로이센 군주정도 편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967-8)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란츠 1세가 자기들 편에 가담하기를 바랐지만 독일에서 그들의 행보는 빈의 우려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궁정은 러시아에서 프랑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반겼고, 나폴레옹이 유럽에 부과한 제국적인 합의 내용들을 변경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가 확실히 패배한다면 프랑스 헤게모니가 러시아의 지배로 대체될 게 뻔했고, 이는 오스트리아에게 전혀 반가운 전망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외무대신 메테르니히의 안보 목표들은 오스트리아가 1813년 봄 내내 와일드카드(예측 불가능한 수)로 남는 데 초점을 맞췄다." "빈에게 똑같이 걱정스러운 것은 독일 군주들에게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프랑스가 좌우하는 라인연방을 대체해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라고 촉구하는,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3월 후반에 발표한 선언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게 핵심 질문은 이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새로운 독일〉이 될 것인가였다."(970-1)
"영국의 전략은 세 가지 폭넓은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식민지와 해상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때쯤에 영국은 이미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식민지들을 모조리 점령했고, 아직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은 유일한 해외 영토는 영국 맹방들의 식민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륙의 전후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휘두를 수 있는 외교적 무기를 제공했다." "두 번째로, 영국은 이전 협정들에 의거해 떠맡은 책무들을 이행해야 했다. 여기에는 노르웨이에 대한 스웨덴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한다는 약속은 물론 포르투갈, 에스파냐, 나폴리에서 이전 정부들을 복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 이전 국경선으로 축소하고, 부상하는 러시아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대륙에서 항구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런던은 오스트리아와 어느 정도 공통의 기반을 공유했다."(982-3)
"1813년 6월 26일,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과 긴 면담을 가졌다. 그것은 전쟁 전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신이 전달한 예비 제안들과 나중에 7월 12일과 8월 10일 사이에 프라하 강화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바르샤바 공국의 해체(바르샤바 공국은 동맹 열강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라인연방의 재편, 오스트리아에 일리리아 자치주 반환, 1810년 프랑스가 병합한 한자동맹 도시들의 복원, 1806년 이전 상태로 프로이센의 지위 복귀 등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열띤 대화를 이어가다가 제의를 거부했고, 그의 발언은 러시아 참사를 겪은 뒤에도 아무도 자신을 꺾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 결국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군주와 진정한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품고 드레스덴을 떠났다.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동맹 세력─6차 대불동맹 수립─에 가담해 나폴레옹에게 제시한 강화 조건들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속했다."(985-6)
"나폴레옹이 (관대한 조건과는 거리가 먼) 협상을 내켜하지 않은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가 없었다거나 동맹국들이 최소 조건들을 바탕으로 나폴레옹과 강화를 맺는 데 합의했다는 주장은 상황을 잘못 짚은 것 같다. 상대방들처럼 프랑스 황제도 유럽 대륙의 평화에 관해 자신만의 특정한 비전을 추구하고 있었고, 여기서 승리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드레스덴에서 제시된 일단의 요구 사항은 오로지 예비 교섭을 시작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고, 만약 나폴레옹이 요구들을 수용했다면 동맹국들은 최종 협상에서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더 제기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 점을 알았으며, 자신이 군사적으로 비교적 우위에 있는 한 그러한 조건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비타협성은 두 가지 구체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동맹의 가장 강력한 구성원인 러시아와 직접 해결을 보겠다는 것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한 오스트리아를 혼내주겠다는 것이었다."(987)
"1814년의 전역을 치르면서 러시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지원과 영국의 보조금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반대로 메테르니히는 영국-오스트리아 상호 이해가 확고한 한, 러시아의 야심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알았다."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이는 동맹세력 대표들에게 군사적으로 동맹 세력의 입지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지적하고, 상호 불신을 누그러뜨렸으며, 가장 결정적인 공헌으로서 대륙에 영국이 바라는 바와 같은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해외 식민지들을 원상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캐슬레이의 노력은 곧 반목하는 동맹 세력을 다시 규합하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다는 공동의 목적의식을 되찾아주었다. 그들은 캐슬레이의 도움을 받아 체결한 쇼몽 조약에서 4국 동맹으로 알려진 것을 구성했다. 동맹 세력은 나폴레옹이 정전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의 〈유구한 국경선〉 제의를 수용할 때만 그의 제위 보유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1011-4)
"동맹군이 수도 파리의 목전에 이르자, 1814년 3월 31일 마르몽과 모르티에 원수는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의 권력 부상에 그토록 결정적 역할을 한 탈레랑이 이제 그의 몰락에도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전직 외무대신은 사실상의 쿠데타를 도모해, 동맹 세력과 협상을 개시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프랑스 왕위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도록 동맹 새력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1814년 4월 2일 원로원으로 하여금 나폴레옹을 퇴위시키는 특별 선언문을 채택하게 한 것은 탈레랑과 그의 동료 변절자인 전직 치안대신 조제프 푸셰였다." "4월 11일 나폴레옹의 운명은 퐁텐블로 조약의 조건들로 공식적으로 정해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왕위를 공식 포기하고 그 대신 엘바섬의 군주로 인정되며 프랑스로부터 연 200만 프랑을 받기로 했다. 동맹 세력과 그렇게 지독하게,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던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가혹한 처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큰 몰락이었다."(1019-20)
"5월 30일에 서명된 파리 조약은 6차 대불동맹전쟁을 공식 종결시켰다." "그동안 프랑스에 경제적 착취를 당했고 향후에도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쉽다고 느끼는 프로이센과 독일 국가들은 프랑스의 핵심 국경지대를 박탈하고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리는 더 가혹한 조건들을 요구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영국은 과거의 숙적을 이류 국가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대륙에서 이제 간신히 도달한 위태로운 정치적 안정을 더욱 해칠 뿐이라고 판단해 좀 더 유화적이었다."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도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1021-2)
23장 전쟁과 평화, 1814-1815
"나폴레옹의 귀환이 대단히 비범하긴 하지만 그가 엘바섬에 남았다면 나라에는 더 좋았을 것이다. 동맹 세력이 그를 무찌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러가며 10년 넘게 싸웠는데 이제 와서 그의 귀환을 순순히 묵인하리라는 희망을 나폴레옹이 진지하게 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동맹 구성원들은 내부 분열로 고생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입장 차이 중 일부는 깊이 뿌리박힌 것이라 해도, 무엇도 나폴레옹 제국과 상대해온 지난 과거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지 닷새 뒤인 1815년 3월 25일에 이르자 8대 강국은 7차 대불동맹을 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군대를 제공하고, 나폴레옹이 확실하게 패배해 동맹조약의 표현대로 〈더는 말썽을 일으키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서약했다." "나폴레옹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프랑스인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대불동맹을 쪼갤 신속하고 압도적인 승리였다."(1060-2)
"워털루는 전술적 수준(여기서 나폴레옹은 사실상 자신의 권한을 부관들, 특히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전술을 들고 나오지 못하는 미셸네 원수에게 위임했다)과 작전적 수준(여기서의 실패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리니 전투 이후 그루시의 행위로 초래되었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약화되었다) 모두에서 프랑스군의 총체적인 패배였다. 이런 측면에서 워털루 전투는 유럽에서 프랑스 패권의 종식으로서 마땅히 기려질 만하다. 하지만 워털루는 새로운 한 세기를 연 전투가 아니었다. 유럽의 운명은 라이프치히의 굽이치는 언덕들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빈의 무도회와 여러 경축 행사 와중에 굳어졌다. 역사 결정론처럼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서 주장하자면 나폴레옹은 첫 포탄이 발사되기도 전에 전략적 수준에서 이미 전쟁에 졌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라도 동맹 세력이 그를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1069-70)
#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일~18일) : '민족들의 전투'라고도 불리며 병사 수와 화력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한 동맹군이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사실상 6차 대불동맹전쟁의 승리를 확정지은 전투
24장 대전쟁의 여파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비록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수시로 충돌했지만 그들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구축해 자신들의 주권을 잠재적 침략자(들)로부터 안전히 지키기에 충분한 상호 이해관계가 되었고, 유럽 협조 체제의 주요 목적은 평화와 안정이었다." "빈 회의 이후로 거의 한 세기 동안 유지된 이 평형 상태는 나폴레옹 이후 40년 간의 평화를 가져온 한편, 19세기 후반기의 무력분쟁들은 결코 더 커다란 전화戰禍로 탈바꿈하지 않았다.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들이 빠짐없이 개입한 장기 무력 분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18세기와 달리 탈나폴레옹 유럽의 무력 분쟁은 대체로 두 나라나 세 나라가 개입한 사건이었고, 2년 이상 지속된 적이 드물었다."(1077-9)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에 자유주의가 중간계급과 동일시되면서 많은 지식인들과 더 큰 사회집단들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만큼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군주제를 공화정으로 교체하길 열망한 새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은 더 큰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추구했고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수 정권들에 맞선 투쟁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때로는 힘을 합쳤지만 딱 어느 정도까지였다."(1079)
"(혁명적 행위들에 질겁한)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 간 영구적인 동반자 관계, 다시 말해 러시아 보수주의적 작가 니콜라이 카람진의 표현을 빌리면,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해왔고 사멸하지 않으려면 과거로부터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살아 있는 사회적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만물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신의 피조물이며, 어느 한 세대도 사회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그보다는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것이 한 세대의 도리다." "그러므로 나폴레옹 이후 평화 정착의 세 번째 기둥은 '개입'이었다. 강대국들은 혁명 정신의 전염에 맞서 서로서로 그리고 유럽 일반을 보호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 나라가 동란으로 위협을 받을 때마다 열강은 기존의 조약에 의거하고 현행 영토상의 합의를 존중해, 그 나라에 개입해 합법적(이라고 쓰고 보수적이라고 읽는다) 질서를 옹호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협력했을 때 열강은 자유주의 혁명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당대의 보수적 질서를 유지했다."(1080-1)
"마지막으로 앞의 세 가지 원칙은 네 번째 원칙, 상호 보상의 원칙으로 조절되었다. 유럽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면서 승전국들은 만일 한 나라가 영토를 내놓거나 특정 이익을 놓고 타협한다면 일정한 형태나 형식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그러한 보상들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불러일으킨 민족자결의 정신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다." "유럽 대제국들의 문화와 정체성은 꽤 다양했다. 물론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군주에 대한 유대와 하나의 전체로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체코인이나 폴란드인이나 헝가리인이나 불가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른 누구든 간에─은 점점 더 자신들의 문화적 고유성과 그 고유성을 보존하는 일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 민족적 개별성에 대한 의식은 민족자결로 가는 첫 단계였고, 민족자결은 제국들의 통합성을 위협하고 빈 회의에서 재편된 유럽 정치 질서를 위험에 빠뜨렸다."(1082-3)
"1815년의 합의는 1814년의 강화 조건보다 상당히 가혹했다. 프랑스는 국경지대의 영토와 요새들을 추가적으로 할양해야 했고, 국경선도 1792년이 아니라 1790년의 국경선으로 축소되었다. 프랑스가 1814년에는 보유했었던 사보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 라인란트의 일부를 내놓아야 했다는 소리다. 더욱이 확정 조약은 7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최대 5년까지 동맹국 군대의 점령 비용을 부담할 의무를 프랑스에 부과했다." "경제사가 유진 N. 화이트의 표현으로는 〈배상은 이제 새로운 유럽 질서를 위협한 잘못에 대한 벌금을 산정하고 장래의 (적대적인) 시도들을 억지하는 역할을 하며, 더 가혹한 강화 패키지의 일부가 되었다. 배상금 지불은 또한 인센티브이기도 했는데, 지불을 이행하면 프랑스는 유럽의 사안을 처리할 때 다시 강대국의 역할을 맡는 것이 허용될 예정이었다.〉 또 다른 혁신은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군사 점령 체제의 운용이었다."(1084-6)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산품과 설비 물자에 대한 수요가 곤두박질치면서, 오히려 전후 불황이 찾아왔고, 전 지구적인 기후 재앙(1815년 탐보라 화산 폭발)은 한 세기 이상 만에 최악의 흉작을 야기해 식량 가격의 급등을 초래했다. 무역 개방을 되살리려는 시도보다는 협소한 경제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고, 유럽의 농업과 산업은 유럽 국가들이 세운 새로운 관세 장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농업과 제조업 경기의 후퇴는 수만 명의 귀환병들에게 제공할 일자리가 별로 없음을 의미하는 한편, 빈곤층의 생활 조건은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여전히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개인적 자유와 성문成文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시위를 부채질하고 민주적 대의제와 공평한 부의 분배를 옹호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출현에 기여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소요는 그러므로 근대 유럽의 탄생에 일조한, 변화의 힘들과 전통 사이에 벌어지는 더 큰 투쟁의 발로였다."(1107-8)
"나폴레옹 전쟁이 몰고 온 정치적 격동은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할 때 유럽 정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한 가지 중요한 유산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전쟁이 낡은 행정적 결함과 부조리를 일소해버려서 유럽 정부들은 이제 관료제와 법 집행 과정, 과세를 더 단단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억압적 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었다." "보수 지배 체제는 1820년, 민중 반란이 에스파냐와 나폴리 군주정을 위협했을 때 탄력을 얻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와 피에몬테에 개입하는 것을 지지한 한편, 프랑스는 반동적인 부르봉 왕가가 에스파냐에서 권력을 탈환하는 것을 도왔다. 1825년 러시아에서는 일단의 군 장교들이 알렉산드르 황제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제한적이나마 입헌 정체로의 변화를 꾀했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고작 하루를 간 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108-9)
"탈나폴레옹 시대의 혁명들 가운데 남아메리카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만이 결국 성공했다." "남아메리카의 1차 독립전쟁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모든 독립운동은 사실상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왕가의 권위가 휘청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몰락은, 에스파냐 근왕파가 소망한 것과 달리 반란의 즉각적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마침내 1823년 멕시코는 공화국이 되었고 자결권을 끌어안아 중앙아메리카 연합주 구성을 위한 길을 닦았다."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애국파는 1821년 근왕파를 무찌르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합친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근왕파는 칠레에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산마르틴이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대의 도움을 받은 칠레 크리오요들은 1817년에 근왕파를 무찌르고 독립을 선언했다." "페루 독립은 1820년 12월에 선언되었지만 공화파가 권력을 확실히 다지기까지는 6년이 더 걸렸다."(1110-15)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11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