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충돌 - 미중 기술패권 전쟁과 7가지 게임체인저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박현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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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5G, 인공지능, 양자기술 같은) 첨단기술 경쟁에서 중국은 미국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한 세기 만에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위협받게된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중국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를 넘어뜨려야 한다. 이 사다리 걷어차기의 관건이 바로 반도체다. 때마침 반도체산업의 생태계는 미국과 그 동맹·우방국(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들이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는 미국이 반도체 기술을 틀어쥐면 중국의 추격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고 본다. 반도체가 미중 패권 경쟁에서 '초크 포인트Choke Point'(전략적 관문)로 불리는 이유다." "군사력 경쟁은 근본적으로 한 나라가 힘을 키우면 상대국의 안보 불안이 커지는 '제로섬 게임'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안보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기술 경쟁은 대개 국가 간 물적·인적 교류를 촉진하며 양측이 모두 만족하는 '윈윈 게임'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데 세계질서가 어지러워질 때는 기술도 제로섬 게임의 도구가 된다. 오늘날이 그렇다."(12-3)


1 긴 전쟁의 서막


"지난 1세기 동안 어느 나라도 경제 규모에서 미국의 60%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맞수였던 일본과 독일은 두 나라의 경제력을 더해도 그에 미치지 못했고, 냉전 당시 소련도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4년 일찌감치 60%를 넘어섰고, 2020년에는 70%까지 넘었다. 이런 추세라면 2030년대 중반께 양국의 경제 규모가 엇비슷해질 전망이다. 물가 차이를 고려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는 중국이 2017년에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또한 냉전 시기 소련은 세계무역기구WTO 이전의 국제경제체제인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에 가입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 진영과는 별개의 경제 생태계를 구성했다. 반면 중국은 WTO 회원국으로서 이미 세계 최대 무역국이자 수출국이다. 미국과 서방 세력이 냉전 당시 소련에 시도한 봉쇄 전략이 구조적으로 먹혀들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미중 패권 경쟁의 승패는 양국 체제의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 특히 첨단기술을 둘러싼 경쟁에 달려 있다."(35)


2 세 개의 분수령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관건인 까닭은 무엇일까? 칩 하나를 설계해 완제품을 생산하기까지 국경을 수십 차례 넘어야 할 정도로 분업화가 매우 복잡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설계-제조-후공정(조립·테스트·패키징) 단계를 거치는데, 미국은 설계 부문만 주도하고, 생산과 후공정은 대만·한국·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 의존한다. 인텔·퀄컴 등 세계적 반도체 설계회사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설계 역량은 단연 앞서지만, 생산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 능력의 70% 이상은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대만(20%)이 가장 앞서고, 이어 한국(19%), 일본(17%), 중국(16%) 순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있는 대만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63%를 차지한다. 한국은 전체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18%에 그치지만, 메모리 반도체로 좁히면 44%를 차지한다. 대만·한국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의 전략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59-60)


"미중 반도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동맹·우방국과의 협력 관계다. 미중 어느 나라도 글로벌 공급망 바깥에서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 글로벌 공급망의 길목에 있는 국가들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시장이다. 아무리 제품이 뛰어나도 시장을 잃으면 설 땅이 없다. 중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물량의 60%를 소비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는 중국과 단절할 수 없으며, 그 틈을 타 중국은 자체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다. 중국 경제가 별 탈 없이 성장을 지속한다면 시간은 중국 편이다. 세 번째는 생산성과 혁신 역량이다. 두 나라 모두 약점을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낮은 생산성으로 제조 경쟁력이 떨어진다." "반면 중국은 타개책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자력갱생이라는 기치 아래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그 때문에 혁신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66-7)


"인공지능 경쟁의 성패는 연산능력과 방대한 데이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산능력의 발전은 처리 속도를 높이고,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정확도를 높인다. 연산능력이 인공지능의 엔진이라면 데이터는 연료에 비유할 수 있다. 미중의 경쟁도 이 두 가지를 빨리 확보하고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은 2019년 중국 최대 슈퍼컴퓨터 제조사인 중커수광中科曙光, 대표적인 음성·안면인식 업체인 아이플라이텍(중국명은 커다쉰페이科大訊飛), 센스타임(상탕커지商湯科技) 등을 수출제한 명단에 올린 데 이어,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인 2021년 4월에도 슈퍼컴퓨터 기업 7곳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 슈퍼컴퓨터는 대규모 데이터 처리에 필수다. 중국은 중국대로 강점인 데이터 통제에 나서고 있다. 2021년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데이터 보안법'은 플랫폼 기업을 통제하려는 목적과 함께 데이터를 둘러싼 미중 경쟁에 대응하겠다는 포석도 담긴 법안이다."(73-4)


"미중 경쟁에서 가장 위태로운 부분은 군사 영역이다. 두 나라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율무기체계 선점을 위해 사실상 인공지능 군비 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이는 20세기 초반 영국-독일의 군함 건조 경쟁, 냉전 시기 미국-소련의 핵무기 경쟁에 비견된다. 그나마 핵 냉전 시대엔 일단 한쪽에서 핵 공격을 시작하면 상대도 보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두 나라 모두 괴멸적 타격을 입는 시나리오(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로 인한 억지력이 작동했다. 그런데 인공지능 무기는 공격원 추적의 난점, 상대적으로 저렴한 개발 비용과 기술 습득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 그런 억지력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전투에서 삶과 죽음의 결정권을 기계에 맡길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문제까지 제기되는 형편이다. 유엔이 2014년부터 관련 국제협약 체결을 논의중이지만, 강대국들은 이런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바야흐로 미중 간 '인공지능 냉전'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76-7)


"미중이 통신기술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것은 이 기술이 경제적 파급 효과뿐만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은 초기 음성통화 중심에서 3G부터 데이터통신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데이터 전송속도 경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5G는 4G보다 전송속도가 20배나 빠를 뿐만 아니라, 사용자 그룹이 사람에서 서버-기계 간 통신으로 확장되었다. 자율주행·원격의료·사물인터넷·인공지능·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이 되는 셈이다. 5G의 기술표준은 스마트폰의 통신 기준을 넘어 산업용 기계장치와 로봇들을 연결하기 위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 교환의 기준까지 결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5G의 기술표준을 장악한 국가와 기업이 4차 산업혁명의 기초 인프라를 통제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은 우주기술과 최첨단 군사 시스템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중이 사활을 걸고 5G·6G 개발에 매진하는 이유다."(89-90)


3 지상·해저·우주에서의 네트워크 대전


"양자기술은 양자의 물리적 특성(중첩성, 복제 불가능성, 얽힘 등)을 이용해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는 '파괴적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가운데 양자통신은 양자의 복제 불가능한 특성을 이용해 통신 내용을 암호화하는 것으로, 현존하는 어떤 기술로도 해킹할 수 없는 보안 체계로 알려져 있다. 양자통신에서 미국을 추월한 중국은 2016년 8월 세계 최초로 양자통신 위성 '모쯔墨子 호'를 발사해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바 있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공격은 행위자 입장에선 선전포고 없이 상대국을 위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다. 상대국 입장에선 사이버 공격이 물리적 폭력과 인명 살상으로 규정되는 무력 침공이나 테러 행위와 달라 강력하게 응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사이버 공격 카드를 자주 만지작거린다면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물론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커진다. 현재 사이버 무기 개발 및 공격·응징과 관련한 국제 협약이나 규범은 전무하다."(111-3)


"미국에선 과거 정부와 군이 우주개발을 주도했으나, 2015년께부터 민간이 주도하는 이른바 '뉴 스페이스'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뉴 스페이스 시대에 급성장하는 영역이 바로 저궤도 소형 군집위성이다. 경제적 파급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기존의 통신위성이 정지궤도(고도 3만5786km)에서 서비스를 하는 것과 달리, 저궤도 운용은 지구와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 데이터 전송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전 세계 약 40억 명이 모두 잠재적 고객이다." "미군은 이런 민간의 혁신을 적극 채용하고 있다. 미 공군은 2019년 말 지휘통제실의 첨단전투관리체계ABMS 1차 테스트에 스타링크 위성통신을 적용했다. 중무장 지상 공격기인 AC-130에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 스타링크를 활용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이 초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통신 인프라가 파손된다고 해도 미 공군 지휘통제 시스템에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117-9)


"미중은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를 자국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이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핵심 기반시설이 해저케이블과 데이터센터다. 여기에는 막대한 액수의 초기 투자액과 유지비용이 필요해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미중의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 장악 경쟁은 세계패권 경쟁의 일환이다. 중국은 2013년부터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육로와 해로로 연결해 경제권을 형성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일대일로 연선국이 60여 나라에 이른다. 이 정책의 핵심축 가운데 하나가 '디지털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5G 통신망과 인공위성 기반의 위치 정보시스템(베이더우), 해저케이블, 데이터센터 등 디지털 기반시설을 패키지 형태로 제공한다. 두 나라가 지상(5G·데이터센터)과 해저(케이블), 그리고 우주(위치 정보)를 무대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중국은 제3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매력 공세를 펴고 있다."(126-30)


4 중국의 히든카드


"희토류는 네오디뮴 등 17종의 원소를 지칭하는데 부존량이 매우 적어 희토류rare earth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토류의 독특한 화학적·전기적·광학적 특성이 소재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토류가 사용되는 분야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영구자석이다. 특히 네오디뮴을 활용한 영구자석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자기공명영상MRI 등 첨단제품뿐만 아니라 첨단무기 개발에도 필수적이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보고서에서 희토류의 군사 응용 분야로 미사일 유도, 항공기·미사일의 디스크 드라이브 모터, 레이저, 위성통신, 잠수함 음파 등을 제시했다. 이를 활용한 첨단무기로는 F-35 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미사일, 프레더터 등을 예시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미국 첨단무기의 공급이 본질적으로 중국의 지속적인 희토류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리스크이며, 미중 간 패권 전쟁 발발 시 결과를 가를 키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라고 밝혔다."(137-8)


"오바마 미국 행정부 말기인 2016년, 미중 기업 간에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코발트 광산을 사고파는 거래가 있었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미국이 땅을 치며 후회한 거래였다. 당시 미국 광산기업 프리포트 맥모란은 콩고에 소유하고 있던 2개의 대규모 코발트 광산을 중국 기업 뤄양롼찬무예China Molybdenum에 매각했다. 이 중국 회사는 지방정부가 지분 25%를 소유해 중국 당국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콩고는 세계 코발트 매장량의 70% 이상을 보유한 나라로, 중국은 이 거래로 세계 코발트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내연기관차의 경쟁력이 엔진에 달려 있다면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다. 전기차 생산원가의 40%를 차지할뿐더러 주행거리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양극재에는 중국이 공급을 장악한 코발트가 필수다. 요컨대 중국은 '소재-배터리-전기차'라는 생태계를 완벽히 구현하며 전기차 사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152-4)


5 프랭클린과 마오의 금융패권 전쟁


"미국 달러는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으로 기축통화 지위에 오른 이래 오늘날까지 무역·금융 등 국제 지불결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빌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와 미국 내 은행 간 결제시스템인 칩스CHIPS를 활용한다." "미국의 제재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제재 대상에 오를 경우 미국 금융시장은 물론 국제결제시스템에 접근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정상적인 국제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전 세계 은행들의 달러 결제는 반드시 미국 은행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한국의 국민은행 명동지점이 우리은행 명동지점과 달러 거래를 하려고 해도 미국 은행을 거쳐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기업과 금융기관이 혹시라도 미국의 제재망에 걸릴까 우려해 거액의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자금세탁방지 등 내부통제에 신경 쓰는 이유다."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 국가·기관·개인과의 금융거래를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167-8)


"이런 제재가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상당한 고통을 안기겠지만 미국이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지긴 힘들 것이다. 미국이 그동안 북한·리비아·시리아·이라크·이란 등 다른 나라들에 시행한 경험을 보면 긍정적인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제재는 한번 시작하면 뒤로 물리기 어렵다. 제재 대상국이 행동을 바꾸지 않았는데도, 제재를 해제하면 유약한 이미지가 생길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제재 회피를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금융 분야에서 위안화의 국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2010년께부터 위안화 국제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은 국제결제이 2.4%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 디지털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통화 발행을 준비하는 흐름은 새로운 변수다. 특히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는 달러 패권 체제를 뒤흔들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169-71)


"반면에 디지털화폐와 관련한 미국의 움직임은 매우 느린 편이다. 반대파는 지금도 달러 거래가 매우 디지털화되어 있고, 금융포용은 다른 수단으로도 가능하며, 중앙은행이 개개인들의 거래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점 등을 거론한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에서는 금융위기 발생 시 개인들이 은행 예금이나 펀드에서 돈을 인출해 초안전자산인 디지털 달러로 바꿀 유인이 생기는 등 금융 시스템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보고서도 내놓은 바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디지털 달러화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2021년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국제 지급결제 시장에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언급하면서 〈빨리 도입하는 것보다 제대로 도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더라도 국경 간 자금 거래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간소화되더라도 여전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177-8)


6 첨단 무기 전쟁


"국제정치학자 김상배 교수는 《4차 산업혁명과 신흥 군사안보》에서 〈인공지능·빅데이터·로봇 등의 기술혁신은 지정학적 경계를 넘어서 민간부문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에 군사부문에 적용되는 '스핀온spin-on'의 양상을 보인다. 이는 20세기 후반 냉전기에 주요 기술혁신이 주로 군사적 목적에서 진행되어 민간부문으로 확산되었던 '스핀오프spin-off' 모델과 차이가 있다〉라고 진단했다." "미국은 2014년에 이미 '제3차 상쇄 전략'을 내놨다. 이 전략은 새로운 기술적 우위를 통해 경쟁국의 수적 우위를 상쇄시킨다는 개념으로, 냉전 때 두 차례 시행된 이 전략을 다시 꺼내들 만큼 상황이 엄중하다는 의미다. 1차는 1950년대 동유럽에 배치된 옛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기 위해 시행한 핵무기 개발을, 2차는 소련의 핵·미사일 역량을 상쇄하기 위해 스텔스·위치 정보시스템 등을 개발한 것을 일컫는다. 3차에서는 인공지능·바이오·레이저·극초음속 등이 '게임체인저' 기술로 꼽힌다."(186-9)


"군산복합체는 군과 방산업체가 중심이며, 보수적 싱크탱크·언론이 이들의 논리를 전파하는 구조로 움직인다. 워싱턴 정치의 핵심으로 선거자금에 목말라하는 의원들에게는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제공한다. 의회에는 '미사일방어 코커스'라는 의원 모임까지 구성되어 있다."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런 현상을 두고 '군산복합체'를 넘어 '군·산·의회 복합체'라며 개탄한 바 있다." "포스톨 교수는 워싱턴의 이런 구조가 국제관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꼬집었다. 미사일방어는 미중, 미러 간 핵억지력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핵억지력은 한쪽의 핵 공격 시 다른 한쪽이 남은 핵전력으로 상대를 보복해 둘 다 괴멸적 타격을 입기 때문에 어느 쪽도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미사일방어망을 갖춰 핵미사일을 성공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면 이런 '공포의 균현'은 무너지고, 선제공격의 가능성은 커진다. 이로 인해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는 것이다."(196-8)


"포스톨 교수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지금 동아시아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은 202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극초음속 궤도 미사일 시험을 진행했다. 이 미사일은 지구 궤도를 돌다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한 뒤 음속의 5배 이상으로 활강해 목표물을 타격한다. 이른바 '부분궤도폭격체계FOBS' 기술이 적용된 극초음속 미사일은 미국의 조기경보 레이더의 눈을 피해 MD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방장관 자문관을 지낸 밴 잭슨 교수는 〈첨단 미사일 기술이 아시아 우방국과 경쟁국들 사이에 확산하고, 핵 강국들은 광범위한 핵무기 현대화 노력을 진행 중〉이라며 〈미국이 이런 우려스러운 흐름의 원인은 아니지만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접근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핵추진 잠수함 기술의 오스트레일리아 이전, 일본의 장거리 순항미사일 연장 검토,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 등의 조처를 중국을 불안하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199-201)


7 디커플링─21세기의 냉전


"경제·기술 경쟁 분야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른바 '디커플링' 가능성이다. 디커플링은 미국과 중국 간 경제·기술 생태계가 의도적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말한다. 관건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처럼 완전한 디커플링이 가능할 것인지다. 현재로선 두 강대국의 경제·기술 생태계가 완전히 분리되는 상황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실제로,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2021년 3535억 달러로, 대중국 관세 부과 직전인 2017년(3752억 달러 적자)에 다시 근접하고 있다. 미국 투자자들은 중국의 주식·채권을 2020년 말 기준으로 약 1조2000억 달러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2017년 7650억 달러에서 57.5%나 급증한 것이다. 중국의 미국 주식·채권 보유액은 2020년 말 기준으로 2조1000억 달러다. 이런 상황은 두 강대국이 상호 간에 격렬하게 제재와 반-제재 조처를 취했음에도, 민간 기업과 투자자들의 경제교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와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209-11)


"'중국판 우버'라 불리는 디디추싱DiDi은 2021년 6월 30일 중국 규제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기롭게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기업공개로 조달한 금액이 무려 44억 달러(약 5조 원)에 이른다. 2014년 뉴욕 증시에 입성한 알리바바(공모금액 250억 달러) 이후 최대 규모다. 그런 디디추싱이 반년도 되지 않은 2021년 12월 3일 뉴욕 증시에서 상장 폐지를 결정해 또 한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전에도 차이나텔레콤 등 일부 중국 기업의 상장 폐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 리스크나 인권침해 연루를 이유로 제재 대상 기업으로 지목한 영향이 컸다. 그러나 디디추싱은 사정이 다르다. 무엇보다 자국 정보인 중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2021년 6월 중국 내 데이터의 국외 이전을 제한하는 내용의 데이터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중국 인터넷 기업이 수집·저장하고 있는 데이터가 잠재적으로 국가안보 리스크와 직결된다는 게 이유였다."(215-6)


"미국 정부도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에 대한 압박에 가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20년 12월 18일 '외국회사문책법안HFCAA'에 서명을 했다. 이 법은 미국에 상장된 외국 기업은 외국 정부 소유가 아니고 외국 정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외국 회계법인이 상장사 회계감사를 하면서 취득한 회계 관련 증거자료에 대해 미국 규제당국이 3년 연속 검사를 하지 못할 경우 증권 거래를 금지한다. 이미 미중은 거의 10년간 이 회계 검사권을 놓고 갈등을 빚어왔는데 협상에 진척이 없었다. 중국은 이런 '무제한' 자료 접근권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발해왔다. 데이터를 많이 보유한 인터넷 기업의 경우, 회계 증거자료에는 고객 정보뿐만 아니라 회사와 정부기관 간에 오간 이메일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중 양국이 모두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가 이어진다면 중국 IT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을 통한 윈윈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217-21)


에필로그


"미중 패권 경쟁은 둘 사이에 낀 나라들이 받을 타격이 더 크다. 전쟁 같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배제하고 경제적 측면만 따져봐도 그렇다. 두 강대국이 보호주의로 돌아설 경우 우리처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들은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중 간 또는 OECD-중국 간 디커플링이 이뤄져도 두 블록과 모두 교역이 허용될 경우에는 국내총생산이 소폭 증가했다. 한국이 중국을 대체하는 어부지리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블록 내에서만 교역이 허용될 경우에는 한국이 입을 타격은 치명적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 때는 GDP 감소율이 6%로 조사 대상국 중 피해가 가장 컸다. OECD-중국 간 디커플링 때도 감소율이 5%에 달했다. 일본은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는 미중 디커플링 때에는 -1%였지만, OECD-중국 디커플링 때는 0%였다. 이런 예측은 미중 패권 다툼을 대하는 안목과 태도에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230-1)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수석과 정책실장을 지낸 이호승 전 실장의 말이다. 〈이걸 선택의 문제로 국한해서 보면 국익에 부합을 안하는 거고, 너무 성급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나라가 다투다가 이를테면 극단적으로는 대만을 둘러싸고 전쟁을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급하게 어느 편에 빨리 서야 한다, 어느 편은 배제해야 한다는 태도는 단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준은 우리가 선진국으로서 민주주의·환경·공정한 경쟁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분명하게 지지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원칙 속에서 누구를 배제하거나 누구하고만 관계를 맺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232-3)


"미중 경쟁은 우리에게는 기술력과 산업경쟁력을 유지·확대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미국과의 기술 협력을 통해 원천 기술에 접근할 수 있지만,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기술 접근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도체·배터리 같은 분야는 세계시장에서 더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중국에 뒤처져 있는 인공지능·클라우드·빅데이터·항공우주·양자기술 등에서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요컨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한편으로,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행운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의 미중 관계는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위태롭다. 기술의 진보 단계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점, 그리고 대결의 주무대가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바뀐 점 등만 빼면 미중 대결은 영독 대결의 판박이다. 한국 등 주변국들이 진영 대결이나 각자도생에만 매몰된다면 비극의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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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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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생생한 목소리로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meconnaissance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기반이 되는 '합리적 유토피아주의'의 근간에는 사회학 작업이 내포하는 이런 자기분열이 놓여 있다. 이를 견뎌 내거나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회학자를 포함해) 사회세계의 행위자를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밝힐 수만 있다면, 결국 외양의 허상과 기만적인 자명성을 비판하고 속박 상태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비록 모든 사람이 완수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기회를 살리게 될 것이다."(18-9)


1장 사회학자의 직능


"역사학자에게는 많은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고 심지어는 [그런 사실만 발견해도] 업적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만일 어떤 역사학자가 특정한 역사적 인물과 다른 역사적 인물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발굴한다면, 그러니까 친분을 찾아낸다면, 이는 일종의 발견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찬사를 보낼 겁니다. 반면에 제가 예컨대 대학 세계, 또는 학문 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려고 입만 벙긋하더라도 저는 괴물 같은 밀고자 취급을 당할 겁니다. 옳은 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죠. 다른 한편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학이 취하는] 시간적 거리는 중립화neutralisation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 있고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28-9)


"저는 결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절 같은, 그런 입장을 취한 적이 없고 지금도 굉장히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단절에 불과하며, 조사연구를 실천하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이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데─단절입니다. 이런 단절은 우리가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담론에서 발견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것과 속된 것, 달리 말해 성자와 속인, (신성한) 예언자와 평민을 구분하는 기능입니다. 저는 이런 기능이 역겹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우리의 과학이 아직까지는 시작에 불과하고 초보적이며 유아적인 단계에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과학에 관해 논할 수 있고 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어찌 되었건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혹은 경제학자가 실천하는 과학적 노력과, 예컨대 철학자가 수행하는 노력 사이에는 성격상의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자와 달리] 검증이나 반증 가능한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요."(32)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종 분류체계를 아무런 주저나 성찰 없이 사용하는 대신에 저는 분류체계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범주를 너무 순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일이지요. 일례로, 의사라는 개념 자체가 끝없이 변하는 역사적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의사들의 지위를 비교하는 시계열적 통계를 산출할 수 없습니다[범주 자체가 다르니까요]." "아무튼 역사를 사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단어, 개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입니다." "확실히 역사학자는 시대착오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요즘 널리 쓰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 단어가 아예 없었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된 과거의 실재를 조명합니다." "대체로 이런 오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성이 더욱더 중요한 것이죠."(36-8)


"샤르티에 / 선생님이 통시성diachronie, 즉 장기적인 시간에 관해 말한 것은 동시대 사회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집단, 다른 계층이 똑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범주를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무심코 사용합니다." "부르디외 / 역사학자들이 범하는 이런 종류의 시대착오는 사회학자에게는 자계급 중심주의ethnocentrisme de classe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38-9)


2장 환상과 인식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회계층 가운데 자유라는 환상에 특히 경도된 집단이 있습니다. 지식인들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학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거나, 사회학에서 '철학에 대한 증오'를 발견하고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거부는 지식인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알기 싫어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유의 주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요인들을 스스로 인식하는 한에서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49-50)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변에 대해 액면가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사고를 통해서, 그리고 극적인 자기 신비화를 거쳐서 스스로에게 사기를 불어넣습니다. 사회학자는 남들의 말을 듣고 남들에게 질문하고 남들이 말을 하게 하지만, 모든 담론을 비판 아래 둔다는 점에서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수단을 갖습니다."(54-9)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담론에 저항합니다. 사회학자가 상징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예를 들면 언론인, 주교, 교수, 철학자를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상징생산의 종사자들은 사회세계가 이렇다고 그럴싸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말로 먹고 삽니다. 사회학자는 이런 담론의 외양을 애써 조심합니다. 우리 사회학자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것은 실상 사회세계에 관한 일상적 담론,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는 상징적 호신술의 교사입니다." "예를 들면, 선거방송에서 한쪽에서는 언론인이 정치가를 논평하고, 반대쪽에서는 정치학 교수가 언론인을 반박합니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에 대해 메타-담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타'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메타'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내가 말해 줄게〉라고 하는 것이죠."(62-4)


3장 구조와 개인


"가짜 문제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가짜 문제들의 장점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과학의 관점에서 이런 가짜 문제는 대체로 진정한 정치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제가 볼 때 지리멸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대립쌍이지만, 예를 들어 개인과 사회,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주의와 전체론holisme 등등, '~주의'isme가 달린 단어들의 대립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 일련의 대립쌍은 사회주의 또는 집단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대립쌍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유착 관계를 통해서 정치투쟁이 학문 장 안에 슬그머니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학문 장의 자율성은 이런 가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경계를 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컨대 학문적으로 매우 취약한 입장도 그 뒤에 정치적 힘이 있다면 충분히 세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학문장 내에서 정치적 국면을 등에 업은 지적 활동이 가능한 겁니다."(74)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왜 가짜 문제일까요?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자생적] 학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학의 특별한 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학의 경우도 같은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데, 즉각적 이해라는 바로 이런 환상이 [진정한] 이해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환상과 단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객관화 방법을 도입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뒤르켐의] 유명한 문장에 다다릅니다.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다루어야 한다.〉" "저는 연구대상이 제게 말한 것, 그가 체험한 것, 그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말한 것, 그의 정신적 경험이나 표상 등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심지어 의심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뒤르켐의 '선관념',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또는 자생적 사회학을 뜻하는데, 그 이름이 뭐든지 간에 저는 의심을 지우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객관주의적 입장입니다."(74-5)


"나는 세계에 속하는 하나의 사물입니다. 나는 하나의 신체로 존재합니다. 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다양한 힘에 복속됩니다." "저는 또한 세계를 이해합니다. 달리 말해 저는 세계에 관한 표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서 제가 차지하는 위치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의 작업은 [위치와 관점] 두 가지를 포괄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라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 대 사회는 전적으로 가짜, 허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대립쌍은 객관주의적 공격이나 주관주의적 공격 모두에서 사용될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한 허구입니다." "사르트르가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주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한다면,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객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하고 있죠. 어느 편을 드는 대신에 우리는 사르트르에 반대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 찬성하고, 레비-스트로스에 반대하면서 사르트르에 찬성해야 합니다."(77-8)


"사르티에 / 선생님의 이런 주장은 결국 역사학자들의 경우 인식론적 실험의 상황에 거의 놓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상 역사학의 대상과 역사학자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고, [사회학과 달리] 연구 주체의 고유한 이해관심이 [대상과의] 직접적인 연루가 아닌 다른 층위에 놓이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서 현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예외가 되는데, 그 경우 [역사학과 사회학 사이의] 학문적 경계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물론 [역사학 장에도] 두 개의 대립극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조의 축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의미지향의 축에 속합니다. 이와 같은 대립쌍이 사료의 종류, 역사쓰기의 방식, 역사학자 사이를 구분하긴 하지만, 분열이 심하지는 않지요. 그 덕분에 상이한 접근들이 아주 원만하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계는 완전히 통일된 장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주제와 역사쓰기의 방식들이 몰려 있는 일종의 모자이크 상태와 유사한 것이죠."(82-3)


4장 하비투스와 장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 이후에는 후설, 모스, 뒤르켐, 베버 등 다양한 학자가 하비투스 개념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 개념은 결국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즉 사회적 '주체'는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정신esprits instantanes이 아니란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의 실천을 이해하려면 그에게 가해진 자극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모종의 성향 체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면서 어떤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됩니다. 하비투스 개념은 대강 이런 뜻입니다. 자세히 논의하자면 끝이 없는데, 이 개념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행위자는 역사를 가지며 개인사의 산물이자 환경과 연관된 교육의 산물이고, 집단적 역사의 산물입니다. 특히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등은 사회구조가 체화된 산물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하비투스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92-3)


"그렇지만 하비투스는 숙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저를 두고 해석하는 식의 불가피한 운명fatum이 아닙니다. 하비투스는 성향들의 열린 체계입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고, 그런 경험들에 의해서 마침내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이런 주장에 재빨리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일련의 경험이 하비투스를 [변화시키는 대신] 강화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개연성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연계된 사회적 숙명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하비투스를 형성한 경험들과 조화로운 방향으로 경험을 쌓아 가게 됩니다. 또 하나의 난점을 해소해 봅시다. 하비투스는 잠재성virtualite의 체계로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남들이 저를 두고 해석하는 바와 달리, 하비투스는 특정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것은 스프링과 같지만, 방아쇠가 필요한 것이죠. 게다가 상황에 따라 하비투스는 정반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99)


# 하비투스는 통상적으로 순응 기제로 작동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달리 말해 하비투스가 실행되는 장이 달라지면 저항 기제로 발현될 수도 있다.


"저는 거대한 경향적 법칙에 대해서 일종의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방법론적인 이유에서 저는 그런 법칙을 거의 믿지 않아요. 반면에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인기를 끌었고,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에게 언제나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이런 문제들 중에서 엘리아스의 문제들이 가장 공감이 간다고 말이죠. 그는 국가 형성이라는 실제의 거대한 과정에서 자신의 역사진화론적인 사회심리학을 추구합니다. 국가는 물리적 폭력(저는 여기에 상징폭력을 추가합니다)을 시작으로 온갖 형식의 권위를 독점하면서 구축됩니다. 일례로, 교육체계는 누가 똑똑하고 누가 멍청한지 선언할 수 있는데, 이런 발언권을 독점하는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 결국은 교육체계를 형성합니다. 이런 과정은 제가 하비투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다소 애매하고 위험한 용어로 심성이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어요."(102-3)


"사르티에 / 선생님의 저작에서 장들은 언제나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들이 그 자체로 국가의 발현으로 묘사됩니다." "부르디외 / 그렇기는 해도 저는 우리가 만일 국가에서 출발한다면, 국가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예로, 제가 연구한 예술 장에서 인상주의 혁명은 국가에 맞서서,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맞서서 일어나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달리 말해,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장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경제 장에 대해 독립적인 소우주들이 어떻게 창출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 국가는 메타-투쟁의 장소, 즉 장들에 대한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장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법률 제정을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 있습니다. 주택가격이나 은퇴연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는 장들을 가로질러 일어나는 투쟁이지만, 세력관계를 재편하는 투쟁이기도 합니다."(109-11)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아카데미가 지배하는 통합된 사회세계에서는 하나의 노모스nomos, 즉 근본적 법칙과 분할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그리스어 노모스는 나누다, 분할하다를 뜻하는 동사 네모nemo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중에 분할의 원리도 있는데, 이는 동시에 시각의 원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적/남성적, 습한/건조한, 뜨거운/차가운 등이 그렇지요. 잘 통합된 아카데미 세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화가이고 저 사람은 화가가 아니다.〉 이 사람은 '보증'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화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화가로서 인증받았기 때문에 화가입니다. 이것이 아카데미죠. 이런 상황에 마네가 일격을 날린 겁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누가 화가인지 아무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노모스에서 아노미anomie로 이행한 셈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정당성[혹은 인정체계]을 놓고 정당하게 투쟁할 수 있는 세계로 옮겨 간 것이죠. 그리고 어느 쪽도 서로의 도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117-8)


"장에서는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됩니다. 사회학자는 언제나 도전에 처합니다. 사회학자로서 그의 정체성이 언제나 문제시될 수 있지요. 게다가 장이 발전할수록, 그 장에 특수한 자본이 축적될수록 다른 화가의 정당성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그 자신이 화가로서의 특수한 자본을 점점 더 많이 갖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념 미술가는 회화를 근본까지 의심합니다. 그들은 캔버스를 찢으면서 이런 도전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의제기 형식을 살펴보면, 그들은 유치한 우상파괴자와 달리 회화적인 방식으로 회화를 문제화합니다. 그런데 이를 적절히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회화의 역사에 통달해야 합니다. 엄청난 지식이 필요한 것이죠. 예술가가 수행하는 특수한 우상파괴는 예술 장에 대한 거의 완벽한 숙달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분명히 역설이지만, 장과 더불어 생겨난 역설입니다. 〈그는 세 살짜리 우리 아들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식의 순진한 발언은 그 장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죠."(119)


"이번엔 철학의 사례를 들어 보지요. 어떤 사람이 철학 게임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른바 '나치'식의 관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하이데거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철학 게임에 들어가기 위해 그는 철학계의 작동 법칙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설령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장은 이런 식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는 '반칸트주의'가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매개 요인이 개입합니다. 하이데거가 [학계에] 등장할 때, 유대인들은 합리주의의 표상으로 칸트를 옹호했습니다. 만일 제가 나치식 관념을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관념을 [철학 장의 법칙에 맞추어] 철저히 변형시켜야 합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는 분명히 나치죠.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존재론의 언어 속에서 나치식 주장을 했는지 아는 데 있습니다."(121-2)


"많은 사람이 발자크를 사회학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설가 가운데 최고의 사회학자, 사회학의 창시자는 바로 플로베르입니다." "특히 『감정교육』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추구한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정확히 우리는 마네에 관해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식을 탐구했지만, 이는 동시에 사실주의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은 쓸모없는 대립 가운데 하나입니다. 플로베르 사례에서 형식의 탐구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의 회귀, 즉 사회적 상기anamnese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이야기하기'만 가지고 소설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순수소설, 순수하게 형식적인 탐구에 힘입어 플로베르는 사회세계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뱉어 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국 그는 당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객관화에 성공합니다. 플로베르가 이룬 성취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분석들과 견줄 만합니다."(124-6)


"역사학에서 멋진 이야기는 환기evocation 작용을 합니다. 학문적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 대상을 느끼게 하고 보게 하는 데 있으며, 거의 미슐레적 의미에서 [즉 역사를 실감 나게 그려 내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대상 자체를 환기시키는 데 있죠. 제가 이런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우리는 구조를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역사학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에 사회학자는 즉각적인 직관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는 기능이 다르지요. 만일 선거방송에서 해설을 한다면, 사회학자는 시청자들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핵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학자는 때때로 멋진 형식에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킵니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는 원초적 경험, 심미적 선호, 대상관계의 쾌락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지요."(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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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 《국가》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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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사람들이 페이라이에우스(피레우스) 항 근처에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를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밋밋한 대화가 아니라 격정과 냉소, 찬탄과 질책이 오고가며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희곡이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호적인 이들도 있고 적대적인 자들도 있다. 적대적이라 해서 당장 상대방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아니다. 그 정도로 적대적이면 아예 마주앉아 대화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그 자리에 끼어들었을 리 없다. 설득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이들이다. 말을 섞는 것조차 곤란한,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호적이라 해서 좋은 말만 하고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의외로 그런 자들이 하기 마련이다." "(대화편 《정치가》나 《법률》과는 달리) 《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이끌고 가지만 다른 이들도 끌려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화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16-7)


서론 또는 문제 제기: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폴레마르코스는 단순히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붙잡은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겨 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대화가 시작된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다. 격렬한 대결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약간의 긴장, 이 정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와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한다. 《국가》는 '대화를 통한'(dia logon)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설득은 철학자의 과제다. 이 대화가 끝날 때쯤 여기서 시비를 걸던 사람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말에 승복하거나 적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의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목적도 설득에 있다. 플라톤은 그들의 설득과 자신의 설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26-8)


#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1. 케팔로스 :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어서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갚을 것은 갚는 것'이 올바름이다.

2. 폴레마르코스 :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올바름이다.

3. 트라쉬마코스 : 더 강한 자의 편익이 바로 올바름이다.

4.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 올바름은 그 자체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논증해야 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약정을 하면 된다. 글라우콘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법률(nomoi)과 약정(계약: syn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nomos)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nomimon)이며 올바르다(dikaion)고 한다.〉 법이 〈올바름의 기원(genesis)이며 본질(ousia)〉이라고까지 말한다. 합법성과 올바름(정당성)이 법을 통해서 결합된다. 체제가 법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되어 있기만 하다면 정당성을 얻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참된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 것인지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결국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77-8)


"담대한 글라우콘과 섬세한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하는 것은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밝히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윤리적인 행동 지침을 세우는 차원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만한 것까지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한 사람의 올바름과 한 나라 또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올바름 모두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올바름을 원리로서 탐구할 것을 요구하는 글라우콘, 올바름의 작용과 이로움을 밝혀 달라는 아데이만토스, 이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아테나이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면서도 지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가 언급했듯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들에 대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올바름의 원리와 작용을 구축하는 작업, 즉 올바름의 학學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담대함과 섬세함으로 수행되는 이 작업은 '기쁨'을 낳아 놓을 것인가."(80-1)


제1부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의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이 공공 영역인 폴리스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주귀감서에 그것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닌 피지배자들, 주권자가 아닌 자들, 신민의 쾌락은 그저 억누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민주 정체가 성립하면서 바로 이들이 폴리스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자신들의 쾌락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돈 놓고 돈 먹기'와 같은 보수 획득술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선거의 핵심 주제, 심지어 당락을 가르는 쟁점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를 쌓아 올리려는 애타는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이다." "즉, 《국가》는 민주 정체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89-90)


"《국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올바름의 기준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철학적 정치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호자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호자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원칙인 '한 사람이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수호자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직업을 갖는 나라에서 수호자들도 그 명칭은 '하나의' 직업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향은 교육을 통해서 다면적으로 변화하였으며 바로 그 다면성이 수호자 또는 통치자의 근본적인 특성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수호자(와 통치자)만 유식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 무식한 상태로 만들자는 것인가라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민정치를 하자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과잉해석일 것이다."(113-4)


"시가 교육이 좋은 성격과 그에 이은 지성의 측면을 위한 것이었다면 체육 교육은 '격정'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을 위해서 양쪽 다를 제도화한 것〉(410c)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혼이 가지고 있는 두 측면을 위해서 그 두 가지 교육이 요구된다. 〈수호자들은 성향상 이들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만〉(410e)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시가와 체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 측면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둘을 골고루 쓸 수 있다. 이것이 혼화混和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름은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활동을 가리킨다. 올바름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최선의 것을 궁리해 내는 사유활동이다. 플라톤에 있어 올바름은 혼의 혼화에 이르는 과정을 이끌어서 혼화의 상태와 적절함을 만들어 내는 사유의 힘이다."(124-6)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양 중세에서 장남은 집안의 문장紋章을 이어받는다. 차남은 자신의 운명에 승복하고 다른 방책, 이를테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십자군에 참전한다. 왜 불평이 없는가? 그것이 자신의 기본값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굳이 따져서 알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함 따위를 따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장남이 될 수 없다. 노력하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체제에서만 올바름과 공평함이 문제된다." "플라톤이 올바름에 대해 논의를 했다는 것은 민주 정체에서 핵심적인 쟁투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테나이에서는, 민주정 시기는 물론 참주정 체제에서도 이런 일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는 민주정에서 조화로운 정치적 행위들이 가능한 방법, 체제 붕괴를 불러오는 당파적 쟁투를 막는 민주 정체 지도자들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궁리한 것이다."(128-9)


"통치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없애야 하는 데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들도 한 명의 주권자이지만 그들이 공직에 있는 한 그들은 공직이라는 기구(apparatus)의 한 조각이다. 거대한 조직(organization)의 한 기관(organ)에 불과한 것이다. 이 조직과 기구는 그 안에 어떤 인간이 들어온다 해도 규범과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플라톤 시대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민주 정체는 시민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회에서 모든 공적인 사안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민주정을 흔들고 불안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상적인 권력 기구라 부르는 장치를 구상한 것이다. 수호자들의 사적인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권력 기구와 전면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 '폴리스'만 남는다. 그들은 폴리스의 일(ergon)을 수행하는 기계와 마찬가지다."(191)


제2부 공동체의 궁극적 근거와 철학적 정치가


"현실은 현실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구상을 제시하였을 때 그것에 상응하는 제도와 조직이 만들어질 가망이 없는 것을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하며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을 현실적이라고들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적 제도와 조직이라는 실제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유형有形의 것들이 있다. 그것에 상응하거나 그것을 반영하는 정치적 사유를 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가. 이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유가 현실의 정치적인 것을 반영한다 해도 인간의 사유는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할 수 없다. 모든 사유에는 인간의 반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반성은 사유이고 관념이다. 관념(idea)은 이상적(ideal)이고 이상주의적인(ideal) 것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생각, 곧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든지 정치가가 철학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의 아테나이에서 펼쳐지는 정치를 검토한 다음에 나온 것이므로 관념이고 이상적인 것이다."(200-1)


"현실은 내버려두면 그대로 흘러간다. 가끔은 그것을 되짚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살펴볼 때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만들어 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닮은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본本이 있어야 그것에 대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그러다 보면 뭐가 되더라도 되겠지,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어'라는 태도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가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현실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정치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자는 것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정치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이다."(201-2)


"소크라테스는 자체를 아는 것이 앎이고,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진리로 간주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견 속에서 산다. 그들을 어떻게든 이끌고 가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모름을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이 무지의 자각은 앎인가, 의견인가? 아직은 의견이다. 자신이 무식한 건 알지만 아직 앎은 없다.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중간 단계다. 이것은 모름과 앎의 운동 과정이다. 앎과 모름은 이처럼 연속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닌 반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흰색과 까만 색도 반대 관계이다. 흰 색에 때가 묻으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때가 아주 많이 묻으면 까만 색이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간 단계를 우리는 '생성'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성에 나섰을 때 그것을 인도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국가》에서는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일단 앎을 가진 철학자가 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212-3)


"형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본은 형상을 닮은 것이다. 형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의 면적을 계산할 때 원주율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한다. 이는 원을 다각형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무한히 쪼갠다고 가정해서 얻어 낸 원의 면적이 원의 진짜 면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무한히 쪼개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주율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얻어 낸 면적은 원의 진짜 면적에 접근해 있을 뿐이다. 원의 진짜 면적은 신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은 그 면적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알고 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고 인간은 신 닮은 것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차원을 구분한다. 하나는 완전하게 자기 스스로와 합치하는 차원, 즉 신의 차원, 형상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극한의 노력을 기울여 형상의 차원에 가깝게 간 '본'의 차원이다."(213-4)


"형상을 알아내는데서 그치면 그는 철학자일 뿐이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한다. 천상에 올라가 지식을 얻은 다음 그들을 인도하러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올라가면 철학자이고 내려가면 정치가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철학자는 형상을 앎으로써 스스로 완성된다. 그것으로써 목적에 이르러 끝난다. 형상의 세계는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곳이다. 인간 세상은 변화에 얽매여 있는 곳이다. 천상의 세계는 질서 잡혀 있으며 한정되어 있으나 아래는 혼돈스러우며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들 각각은 진리와 비진리이니 겹칠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 자족성(autarkes)이 있다면 본을 가진 정치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은 논리적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인간 공동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상에 있는 형상을 '전체에 따라서'(kata holon) 모방한 본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 본은 어중간하게 중간에 있는 것이다."(220-1)


"폴리스에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까닭으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를 제시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를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면 '공동선'共同善이다. 이러한 최종 근거의 원초적 형태는 자연적 우주론, 즉 우주적 혼(cosmic soul)의 선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가 이것에 관한 정신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근대적 형태의 우주론은 칸트의 초월론적 선험론에서 주장하는 '실천이성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최고선, 자유의지, 영혼불멸은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인간 삶의 윤리적 국면을 위해서 목적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에 있어서는 공공복지 같은 이념이 정치에서의 최고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이 설정됨으로써 정치의 궁극적 과제가 도출되며, 이것으로써 정치는 사적인 이익의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정치의 궁극적 정당화 근거'이다."(253)


"많은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해 내려가야만 한다. 상승과 하강,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묶어서 '이행'(메타바시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매정하게 설명했다. 폴리스에서는 특정한 부류가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지내게 하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자면 정치가는 공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서 그곳에서 누리는 '관상적 삶', 현실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 이 두 가지 모두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둘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철학적 정치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견뎌 내는, 서로 다른 상태인 올라감과 내려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것, 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다."(282-3)


제3부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


"아테나이, 로마 공화정, 현대 민주정 등을 제외한 정치 체제들에서는 정치적 공직이 출생, 군주의 호의, 확립된 과두제 안에서의 지위의 획득에 의해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성취될 수 있었다. 이는 공직을 귀속적으로 충원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구상한 폴리스에 적용되는 방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교육적 충원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체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정체의 쇠퇴가 일어나는 원인이 정체의 구조 문제라기보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정체에 살고 있다 해도 그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사느냐, 즉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체는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시민들에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정치 체제의 상태를 평가하고 이름 붙이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정치학적 의미에서의 체제론을 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302)


#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

1. 크레테 및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은밀하게 추구함

2. 과두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드러내놓고 추구함

3. 민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인이 추구함

4. 참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광적으로 찾아내서 지도자로 추대함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극대화되어 겹치면 민주정으로 가게 된다. 욕망 충족과 멋대로 하기에는 민주정만한 곳이 없다." "민주 정체에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에 불변의 고정적 정의가 없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중선동에 능한 자가 민주 정체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데 왜 전통을 지켜야 하느냐면서 기존의 것을 엎어 버리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전통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전통을 깨는 합의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극도의 대중영합주의 시대가 되어 버리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이 깨져 나간다." "모든 즐거움은 동일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 민주정의 핵심에 자리한다.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욕구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소비자주의'다. 가치의 위계질서가 해체된 상태, 이것이 민주 정체의 필연적인 귀결이다."(324-8)


"참주 정체로 나아가는 씨앗은 이미 민주 정체 안에 들어 있다. 민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은 자나 정당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배하게 되므로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이 법을 어기고 대중의 격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뭔가를 하게 되는 지점, 즉 선도자가 되면 참주정으로 가게 된다. 마지막에 선도자는 '참주'로 변한다. 시민이 다양한 명칭을 갖는 것처럼, 똑같은 정치가가 상황의 변화와 진전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군중을 거느리고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그때부터 참주가 된다. 그는 늑대인간이다. 〈다른 제물들의 내장들 속에 잘게 썰어 넣은 인간의 내장 한 조각을 맛본 자는 반드시 늑대가 된다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다. 참주 정체에서는 이러한 일이 사법살인의 형태로 자행된다. 대중선동가, 선도자, 참주, 이 연속 단계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339)


"인간이라는 존재는 쾌락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쓰면 이기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이 그 쾌락을 충족시키려 하는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다." "플라톤도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오니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충족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 정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즉 법을 강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 궁극적인 신뢰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 내놓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진리 닮은 것이다. 진리는 항상 저쪽에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강제하겠는가. 결국 마음을 닦으라는 말만 하게 된다. 공동체의 법을 어기는 불법과 결합된 한 사람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처방은 한 사람의 심신수련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341-2)


제4부 참된 올바름과 궁극적 보답


"플라톤은 철학자가 언어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을 진리라 하고, 시인이나 화가가 말하는 것은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철학자나 시인이나 모두 모방(mimesis)을 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모방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행위자가 초월적 실재로서의 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의 후보자들이 있다. 은유는 인간이 만들어 낸 임의적인 것이라 약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모방한 결과물이 은유인 것이다. 은유는 초월적 실재인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다. 한마디로 모방은 은유를 형성해 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모방은 진리와 인간이 은유를 통해 오고가는 것, 즉 이행(metabasis)이다. 진리는 인간으로, 인간은 진리로 오고가는 것이다. 진리가 아무래도 위에 있다는 느낌이 있으니 그것을 알기 위해 인간이 올라가서'(anabasis) 진리를 가지고 '내려오는'(katabasis) 것이다. 은유는 오르내리는 사다리다."(369-70)


"소크라테스는 시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진리의 인식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온갖 착시에 빠져 있다. 〈같은 것들이 물속에서 볼 때와 물 밖에서 볼 때, 구부러져 보이기도 하고 곧은 걸로 보이기도 하는가 하면, 색채들과 관련되는 착시로 인해서 오목하게도 또는 볼록하게도〉 보인다. 시각을 통해 보는 것은 왜곡이 된다. 이것을 꼭 시각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판적인 안목 없이 사태를 바라보면 대상이 던져 주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산된 것과 측정된 것 또는 계량된 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들은 비판적 검토를 거쳐서 객관화된 것들이다. 계산된 것, 측정된 것, 계량된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미디어를 왜곡시키는 자들이요, 플라톤 시대에는 시인이었다. 시인들이 '혼의 헤아리는 부분'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의 미디어론으로 읽을 수 있다."(370-1)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은, 살아서 혼을 순수한 상태로 만들고 올바름을 지켰던 사람은 죽어서도 훌륭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살아서의 삶이나 죽어서의 삶 모두에 대한 궁극적인 보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야기의 보전'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과제라 천명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이 이야기를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설득할 의무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설득된 자들은 '잘 지낸다'(eu zen)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아 인간들과는 물론 신과도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올바르게 살았던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보존하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보존하는 것, 사실 이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다. 앞날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 가 본 길들을 철학자가 갈 수 있겠는가. 안 가 본 길들은 정치가들이 가는 것이다."(385-6)


추기追記


"아테나이 민주정의 결정적 계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었다. 그는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는 방식을 개조하였고, 정치적 선택을 아테나이 전래 집단인 데모스에 전체적으로 할당하였다. 여기서 민주정은 근대의 개인주의 방식이 아닌 집단의 선택으로 작동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로 민주정 체제에 숨은 문제는 '쾌락'과 연관된 부의 문제였다. 아테나이에서는 정치적 투쟁의 핵심인 부의 원천을 둘러싼 분배방식의 쟁투가 민주정으로 봉합되었고, 전쟁 시기에는 일당지급제도(misthophoria)라는 편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로 충당된 국가의 핵심인력으로서의 해군에 대한 사회적 지위 부여 문제와도 얽혀 있는 것이다. 부를 분배하는 방식은 민주정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으나 부의 원천 자체는 토지 이외의 것이 획기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기술혁신이 불가능했던 고대 경제는 약탈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제국주의로 표출된 것이다."(394-5)


"민주정의 지도자가 가진 문제는 권력 획득의 과정과 기술에 있다. 달리 말해서 정치적 기술로서의 연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의 술어로 표현하면 '대중영합주의'의 문제다." "한 개인의 내면적 심성의 특성이나 도덕성보다는 대중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기술, 곧 연설술이 민주정에서는 탁월한 정치술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를 배척한 것은 체제의 요체를 곧바로 겨냥한 것이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민주정이 실현한 일종의 '세계의 탈주술화'를 되돌리려 하였다. 주지하듯이 민주정은 절차적 합리성만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에서는 최종적 정초가 되는 이념이 없는데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라는 이념을 도입한다. 이는 탈주술화의 귀결인 민주정을 다시 주술화하려는 시도이다. 《국가》의 주제가 '올바름'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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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 체제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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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사 주해


▶ 읽게 될 것


"역사, 그리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사 모두 궁극적으로는 '읽기'다. 읽는 것은 정신의 연습이다. 헬라스 신화에는 아홉 명의 무사mousa 여신들이 있는데, 그것 이전에 보이오티아에서 기원한 신화에는 아오이데 여신과 므네메 여신, 멜레테 여신 이렇게 세 명의 여신이 있다. 아오이데 여신은 노래와 목소리(song, voice)를, 므네메 여신은 기억(memory)을, 멜레테 여신은 연습과 기회(practice, occasion)를 관장한다. 앞의 두 여신들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여하는 반면 멜레테 여신은 이들과 달리 행위, 즉 노래를 잘하거나 기억을 잘하기 위한 연습에 관여하므로, 이 여신은 다른 여신들에게 있어 일종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습을 통해서 얻게 될 통찰력 또는 창발創發(emergence)은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앎과 그것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원리로 올라서는 힘이거니와, 이 원리는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이론'(TOE, Theory of Everything)은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의 이론'은 '아무것도 아닌 이론'(TON, Theory of Nothing)이다."(125-6)


▶ 우리가 시도하는 바


"철학은 서사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맥락에서 탈피한 추상적 보편성에 이르러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요구는 '오늘의 나'가 역사적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해야만 충족될 수 있다. '오늘의 나'를 소거하고 탈시간적 보편성의 규준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는 것은 배진적背進的 소급적遡及的 태도로 과거에 접근하는 것인데, 이는 취사선택한 부분적 과거에 근거하여 오늘을 섣부르게 정당화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떻게 하여도 공정한 재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실천철학이 '사상사적 탐구를 통한 역사성'과 '철학적 관상으로써 얻어지는 보편성'을 통일한 참다운 사상이려면 어제의 발현이라 할 '오늘의 희미한 빛'이 주는 실마리를 잘 살펴봄으로써 사태 자체(사상事象)의 보편적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세계사의 진행과정과 미래를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그러한 이상(Ideal)이 지배하던 관념론(Idealismus)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그것은 섣부른 목적론적 형이상학으로 간주될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단언을 삼가고 각각의 시대가 드러내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 짐작되는(또는 그것이라고 상정想定한) 것을 살펴보는 데 만족해야만 한다."(126-7)


서문


▶ 쾌락에 빠진 시민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 같은 이들은 현전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여기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는 초월적 이념에 눈을 돌리게 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초월적 이념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차안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피안의 세계와 불변하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절박한 동경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그러한 동경에서 이끌어 낸 이념적 열정으로써 현실을 개조하려 한다. 아테나이 폴리스 쇠퇴기에 등장한 플라톤의 형상形相(eidos) 이론은 이러한 동경과 변혁의 강력한 전조이다. 현세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냥 헛소리이지만, 적어도 초월적 이념을 주창하는 이에게는 그 이념이야말로 진짜이며 생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에게는 세계가 둘이 된다─거짓 세상과 참다운 세계, 땅 위의 세속 세계와 하늘의 신성한 세계." "현세의 삶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 그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초월적 반성을 요청했던 사람이 아주 가끔 등장했던 세계, 그 요청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세계가 고전 시대 전반기의 폴리스라는 역사적 공간이었다."(130-3)


1장 민주정이 시작된 역사적 공간 '폴리스'_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 정의는 정의로운 것의 심판 


"정의(dike)는 법적인 정의이고, 정의로움(dikaiosyne)은 넓은 의미에서의 올바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용어로 '합법성'(legality)과 '올바름'(justice)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법 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만 되어 있다면 합법성을 획득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현대의 개체주의적 자유 민주정은 내면의 양심과 이념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절차적 합법성을 체제 구축의 필요조건으로서 승인한다. 절차적 합법성에 따라 선출된 권력은 바로 그 합법성으로부터 권위의 '정당성'(legitimacy)까지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정의로움, 즉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은 격렬한 이념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폴리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규정을 준용한다면, 폴리스의 정당성이 올바름에 정초되지 않았을 때, 또는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어떠한 합법성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137-8)


2장 민주정의 절정기, 체제 유지를 위한 패권 싸움_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 《헬레니카》


▶ 전쟁이 시작


"전쟁의 시작에 관한 논의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 투퀴디데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한국어 판은 모두 '원인'으로 옮겨져 있지만 헬라스 어 원문에는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prophasis와 aitia이다. aitia는 〈양쪽이 공공연하게 제기한 (···)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고 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원인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당시의 헬라스 세계 사람들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휴전협정 파기와 선전포고의 원인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완결될 수 없다고 보아 alethestate prophasis, 즉 〈진정한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아테나이의 세력이 커진 것에 대한 펠로폰네소스 지역 사람들의 두려움이다." "〈진정한 원인〉은 일종의 내면적인 원인 또는 의도인데, 이것에 실현 도구가 더해지면 〈공공연한 원인〉이 도출된다. 즉 'prophasis+도구=aitia'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투퀴디데스를 비롯한 고대의 기록자들은 prophasis까지 파고들어야 참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prophasis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심상 지도(mental map) 같은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되려면 도구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그 도구들이란, 작용하는 토대인 지리적 구조와 현실의 힘(자본, 제해권, 함선 건조기술 등과 같은 인간사를 구성하는 것들)을 통칭한다."(155-7)


▶ 민중이 원하는 대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를 가리킨다. 플라톤은 《정체》(Politeia)에서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를 논하면서, 과두 정체에서 〈올바르지 못한 짓을 아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는 경우〉(554c)가 등장하고 이것을 누구나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민주 정체로의 이행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니까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바뀌는 것은 (···) 그것이 내세우게 된 '좋은 것'에 대한, 즉 최대한 부유해져야만 한다는 데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aplestia) 때문〉(555b)이다." "민주 정체의 시민들은 개인이 가진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가치가 절대로 공격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목격할 수 있는, '미숙한 평등주의'로 변질된 자유이다.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공허한 자만심에 편승하여 떼를 쓰는 이들이며, 그것에서 정치적 자산을 취하는 이가 나쁜 의미의 '포퓰리스트'이다."(167)


▶ 30인 참주를 축출


"뤼시아스에 따르면 30인 참주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편, 돈을 갈취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7)다. 그들의 주요한 행동 동기는 이익이었다. 그들은 〈불의를 당한 이들〉(52)이나 〈페이라이에우스 측 사람들을 위해서나 부당하게 죽어가고 있던 이들을 위해서 분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56)다. 이들은 명료하게 나쁜 짓을 한 이들(Wrongdoers)이다. 불의를 당한 이들은 저항자들(Resisters)이나 희생자들(Victims)을 가리킨다. 그런데 뤼시아스는 다른 이들도 있었음을 알린다. 〈그 민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훌륭한 시민이었던 이들은, 사전에 준비된 것과 강제된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일부는 그 자리에 머무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적어도 도시에 대해 그 어떤 해악도 표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75). 침묵을 지키거나 표결에 불참한 사람들은 중립적인 이들(Neutrals) 또는 수동적 방관자들(passive By-stander)이다.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으며, 다름 아닌 그 협조자들에 의해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 올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입니다〉(85). 이들은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을 것이라 기대했던 협조자들(Beneficiaries from Wrongdoing)이다. 저항했던 이들과 희생당한 이들이 한 쪽에 서고, 나쁜 짓을 한 자들과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은 자들이 한덩어리가 된다."(168-9)


3장 민주정 시대를 체감한 소크라테스_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 기록


"플라톤의 철학적 사색(필로소피아philosophia)은 궁극으로 추상적인 기하학과 초월적 형이상학으로 귀결한다. 이는 서구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전통(metaphysical tradition)의 시원이 되고, 기독교 신학에서도 신플라톤주의로 계수된 것이 접합되어 핵심적인 한 줄기를 이룬다. 이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 개념은 신념 체게가 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여기는 인문주의적 전통(humanist tradition)의 원천 중 하나이다. 이 둘의 구분은 플라톤이 《정체》에서 제시한 '선분의 비유'(509d~511e)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참된 앎은 의견(doxa)이 아닌 최상위에 있는 사유(noesis)이고 철학자는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의견에서 시작하여 합의에 이르는 것이 합당한 탐구활동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고독한 진리 탐구자이나 이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이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의 궁극적 관심사는 인간사이다. 인간의 일이 이소크라테스의 관심사이고, 소크라테스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록들도 소크라테스가 인간사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던 일들을 집중적으로 담고 있다."(173-5)


4장 체제의 정당성을 묻는 '이념 혁명'_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소한 이들의 행동에서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이러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고발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잘못된 행동은 바로 이 수치심 결여에서 나온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여러분께서는 저한테서 모든 진실을 들으시게 될 것입니다〉(17b).  소크라테스가 자기 변론 첫머리에 내놓는 핵심은 이처럼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밝히려 하는 진실은 도덕이 포함된 진실이고, 이는 부끄러움과 관련된 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게 강하게 반론할 때 취하는 주제이다. 부끄러움은 좋은 것에 대한 보편적 욕구와 앎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공명심이나 명예욕에서 생겨나는 굴욕감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 대한 규정 두 가지, 즉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자."(74-5)


"앎에 대해서는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디까지를 알고 있고 어디부터는 무지한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무지의 지이다. 마지막은 뭔가 아는 것이 있기는 한데,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소크라테스는 두번째 경우를 선택하겠다고 한 것이다. 무지의 무지가 최악이다. 차라리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낫다. (무지의 무지는 오만함이다. 무지를 낯설게 느끼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인과 정치가와 장인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이 사람들은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 무지를 아는 자,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자와 대립하는 자, 인간을 넘어서는 자가 아닌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자임을 의미할 것이다."(81-2)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아테나이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 중 일부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열광하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그들의 민주 정체는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했었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그저 청렴하고 고고한 도덕주의자의 상투적인 지탄이 아니다.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사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그가 일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촉구한 것은 혼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질문을 하고 캐묻고 심문〉(29e)한다. 이것이 그가 행하는 신에 대한 봉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신의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당대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아테나이 사람들 중 일부는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결심했던 것이다."(91-2)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영혼을 돌보라고 깨우치는 일을 '개인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올바름을 늘 말할 수 있으려면 특정 당파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 당파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반정치, 정치 혐오가 아니라 불편부당한 진리의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아테나이는 전쟁의 격변 속에서 그리고 패배의 혼란 속에서 정치 체제가 계속 바뀌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정파에 가담하는지는 올바름의 기준이 아니었다. 특정 정파에 가담하는 것은 공인의 입장에서 그 정파에 동조하는 것이어서, 그 정파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주장할 때에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사인의 입장을 고집한 것은 공인으로서의 법적 책임보다 더 근본적인 부끄러움을 짊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치를 혐오한 것도 아니요, 민주정도 참주정도 찬성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올바름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입장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92-6)


"아테나이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의 난관을 이겨 내고 마침내 민주 정체를 성취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고 시민들은 폴리스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테나이 시민들의 삶은 '쾌락이라는 참주'에게 굴복한 것이다. 민주 정체에서 산다고 해서 곧바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름을 지향해야만 '더 많은 이의 더 나은 삶'이라고 하는 민주 정체의 탁월함이 참으로 실현될 것이다. 달리 말해서 민주 정체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이 아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매개로서 완성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은 바로 올바름인 것이다." "어떤 정체에 살고 있는지보다 훨씬 더, 아니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올바름이다. 이 올바름에 대한 철저한 촉구 때문에 미묘한 경계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체제 정당성에 대한 급진적 이념 혁명가가 된다."(101-2)


5장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정치적 지향_플라톤 《메넥세노스》


▶ 나라 체제는 인간들의 생활양식


"나라 체제, 즉 어떤 정치 체제(politeia)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trophe)이 규정된다. 정치 체제는 생활양식을 조건 지우고 생활양식은 정치 체제를 조건 지운다. 서로 스며들어서 서로를 적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지 못하므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하려면 나라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르지 못하면 나라 체제를 올바르게 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람들이 악해져 있으니 체제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정치 체제가 생활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보다는 미약하지만 생활양식도 정치 체제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므로 《정체》에서는─나라와 개인의 올바름이 반드시 상응하지는 않지만─한 나라의 올바름을 먼저 따진 후 한 사람의 올바름을 따지는 것이다. 더 큰 것이기에 따지기 쉽기도 하지만, 나라가 올바르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도덕주의적 처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 처방은 그저 사람이 올바르면 된다는 처방이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지혜롭고 사려 깊다면 그러한 것이 정치 체제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메넥세노스》에서 제시된 연설은 생활양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정치 체제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해서 보여 줌과 동시에 두 영역의 미묘한 경계선도 보여 준다. 이 경계선, 즉 사인이 공적인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가 역사다."(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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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회학 - 개정판
오경환 지음 / 서광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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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장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


"우리는 종교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고 여타의 사회 현상들과 지속적이며 상호적인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 사회적·경제적 현상의 부산물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종교에는 사회적인 측면이 있고, 그 사회적인 측면은 다른 사회 현상들과 지속적인 상호 관련성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종교 사회학은 종교를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는 어떤 것이나 가치가 있다거나 종교는 전부 거짓이라는 독단적이고 평가적인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특정 종교는 진실한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판결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종교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학은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어떤 종교이든지 사회적 사실 혹은 현상으로 간주하면서 종교와 여타의 사회 현상과의 관련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13-4)


제2장 종교의 사회학적 정의


"사회학에서 최근에 사용되는 종교 정의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인 접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종교를 어떤 다른 것의 표현으로 보려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지양하고 종교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것 자체를 그대로 가지고 만들어지는 정의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사회학적 정의는 종교의 본질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종교의 경계선을 지적하는 데 일차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회학은 종교를 포함하는 많은 사회현상들 가운데서 종교와 종교 아닌 것들을 구분하는 적당한 기준점이나 경계선을 지적하는 것이 종교 정의의 목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사회학적 정의는 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또한 연구에 필요하여 임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경계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정의들은 연구 작업을 위한 임시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도 아니고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도 아니다."(41-2)


# 종교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종교 정의

1. 실체적(substantive) 정의 : 〈성스러운 것the sacred〉(뒤르켐), 〈거룩한 것the holy〉(오토)에 대한 체험, 이러한 경험들이 외적으로 표현되어 세 가지 양식─이론적 표상인 교리, 실천적 표상인 의례, 사회적 표상인 공동체─으로 나타나는 것

2. 기능적(functional) 정의 :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그 집단의 통합에 기여(뒤르켐), 종교 의식은 사회적 가치와 규범에 관한 생생한 느낌을 참여자의 정신 안에 재생산함으로써 사회 통합에 기여(래드클리프-브라운), 인간이 직면하는 궁극적 질문들─죽음, 고통, 악의 문제 등─에 대한 의미 부여·개념화(베버)


제3장 개인의 종교성의 형성


"사회학은 종교의 사회적 측면에 많은 관심을 두기 때문에, 종교 집단과 종교의 사회적 표상을 강조한다. 그러나 종교 단체에 속해 있는 개인들은 동시에 사회적 행동자, 즉 나름대로의 동기와 의미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각 신자들의 태도, 신념, 행동은 종교 단체에 의하여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고 보이지만, 종교 집단의 믿음과 신자 개인들의 믿음 사이에 언제나 뚜렷하고 결정적인 일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다양한 종교 단체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종교에 속해 있다 해도 신자 개인들의 종교성(religiosity)은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종교는 어떤 집단의 소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개인의 소유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종교가 사회 현상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 경우에, 개인의 종교성은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한다. 종교가 종교성이 약한 개인들을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73-4)


# 개인의 종교성의 형성 과정

1. 내재화 : 어린아이가 출생 이후로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종교적 개념과 실천을 배워서─비공식적으로는 개인적 접촉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강의나 설교를 통해─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이때 기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부모, 형제, 친구 같은)들과의 상호 관계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여부가 결정적 영향

2. 개종(conversion) : 해당 종교의 사상적 성격, 개종자의 인격적 특성, 경제·사회적 또는 신체적 박탈감, 기성 신자와의 친밀한 상호 작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의 종교적 믿음 체계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종교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여 그 단체에 대한 소속감을 발전시키는 경우


제4장 개인적 종교성의 측정과 사회 조사


# 글러크와 스타크의 종교성 측정

1. 이념적(ideological) 차원 : 신도들이 교리를 얼마나 깊게 수용하고 있는지 여부

2. 의례적(ritualistic) 차원 : 종교 예식에 얼마나 참여하고 실천하는지 여부

3. 경험적(experiential) 차원 : 신도들이 개인적 종교 경험을 얼마나 하는지 여부

4. 지성적(intellectual) 차원 : 자신의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지 여부

5. 결과적(consequential) 차원 : 종교적 믿음, 의례, 경험, 지식이 신도의 세속 생활에 미치는 정도


"로버트슨은 사회의 종교성이 그 구성원들의 종교성을 종합함으로써 측정될 수 있다는 글러크의 주장에 반대하며, 그러한 견해는 개인주의적 착각이라고 비난한다. 마치 사회의 민주주의성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성향의 종합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듯이, 사회의 종교성을 시민들의 종교성의 종합과 동일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사회적 종교성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문화의 종교성을 개인적 종교성의 종합과 동일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과 언어의 종교적 내용이 그것의 좋은 지표라고 본다. 그래서 로버트슨은 예술과 문학에 종교적 내용이 많을수록,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가 많이 참작될수록 문화적 종교성은 높은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세속화는 종교성의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볼 때, 종교성의 이러한 개념은 세속화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133-4)


제5장 종교 진화론 : 종교와 과학


"19세기에 이미 원시 사회의 여러 현상과 종교에 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진화론적 사고의 경향을 갖기 시작하던 서구인들에게 1858년에 출판된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은 커다란 확신을 심어 주었다." "종교 진화론자들은 자료에 근거해서 종교란 원래부터 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원시인(Primitive)의 여러 가지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고, 종교는 그 본질상 〈미숙한 과학〉이며 과학의 초기 형태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종교는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원시인의 노력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도 훈련되지 않은 원시인의 사고와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수롭게 생각할 가치가 없는 미숙한 과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진실한 과학 지식이 발전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약화되고 결국에는 소멸할 운명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종교 진화론자들은 이전의 세속화 이론을 보강하고, 왜 종교가 과학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더욱 이론화했다고 보인다."(136-7)


# 19세기의 종교 진화론자들

1. 허버트 스펜서 : 조상 숭배가 가장 동질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종교이며, 영(ghosts)에 대한 믿음이 영혼이나 신에 대한 믿음에 앞서 발생했다. 불가해한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점차 신의 개념이 탄생했다.

2. 에드워드 타일러 : 문명 사회의 종교는 원시 사회에서 전수된 문화적 잔재로서, 습성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문화적 습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는 별다른 의미나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다.

3. 제임스 프레이저 : 인간의 지적 발전은 주술(일종의 거짓 과학이며,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종교(탈주술화 과정을 거쳐 신과 같은 높은 존재에게 호소하고 기원)로, 다시 종교에서 과학으로 단계적으로 나아간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고, 과학에 의하여 종교는 약화되고 나아가 소멸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응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신학과 사회학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이것은 전통적인 종교의 이론적 표상 혹은 믿음 체계가 자연과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 체계들이 현대인의 상황에도 적합성을 지니는 실존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종교의 믿음 체계에 신화(myth)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와 종교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이며, 두 개의 언어는 실재(reality)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이지만 다른 실재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과학이 탐구하는 실재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어떤 역사적 사건이 종교 이야기 안에 등장하여 묘사되고 있어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162)


"종교는 일종의 가짜 지질학이나 역사학이나 물리학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의 신앙 체계는 사람들이 가졌던 총제적 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종교는 경험된 총체(felt-whole),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들을 포함하며 인생과 사건들의 의미를 제공하는 하나의 맥락의 구실을 하는 어떤 전체를 묘사하고 상기시키는 상징 체계(symbol system)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고 종교의 신앙 체계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연결시키고 그것들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궁극적 질서에 대한 종교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종교는 인생의 여러 사건과 경험에 대하여 의미를 제공하는 보편적 질서를 표현하는 상징 체계인 까닭에, 종교는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다루어지고 발견되는 실재와는 판이한 특유의 실재(reality suigeneris)를 묘사하는 것이다. 종교의 실재와 과학의 실재는 다른 것이어서 서로 대치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것이지만, 두 가지 모두 진실이다."(165)


제6장 마르크스의 종교 이론


"마르크스는 신이란 인간의 (절대성을 향한) 열망이 투사(projection)된 것에 불과하다는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로 포이에르바하는 아직도 인간의 본성을 다룰 때 개인 안에 있는 본성을 생각하는 반면에 인간의 사회적 맥락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조건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인간을 논의하자면 반드시 사회적 현실, 물질적 조건, 노동의 역할, 생산 조건 등을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두번째 비판은 포이에르바하가 아직도 인간을 역사와는 분리해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헤겔과는 달리 그는 감각적이며 육체를 가진 구체적 인간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인간을 역사나 세계와는 동떨어진 보편적 종(species)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역사적 과정 안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시대 배경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173)


"마르크스는 불의하고 비인간적이며 냉혹한 사회, 인간에게 사회적 소외와 고통을 안겨 주는 사회에서 종교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소외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소망을 투사하고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진정한 고통에 대한 반항적이고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라고 말하면서 소외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박탈에 대하여 말한다." "사회 계층에 따라서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에 대한 의미와 경험은 다르고 그들의 고통의 정도 또한 다르다. 마르크스는 그 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자주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박탈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윤택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의 중심부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보다는 변두리로 밀려나서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은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보는 것이다."(174-6)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종교가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하여 설명한다. 분업의 결과로 인하여 생산 수단은 개인들의 사유 재산이 되는 까닭에, 노동자들은 노동 이외에 상품으로서 제공할 것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임금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임금이 되지 못한다.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이 잉여 가치, 즉 임금과 상품의 교환 가치의 차액을 떼어먹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자본이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는데, 노동자의 생산품은 노동자에게서 분리되어 소외된 상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스럽게 가치가 상승하여 물신(物神, fetish)으로 변한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인간의 손의 산물이 물신의 특성을 갖게 되듯이, 인간 정신의 산물, 종교와 하느님이 신비스러운 특성을 얻어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는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와 노동자의 고립을 초래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매우 부합하는 종교 형태라고 보았다."(178-9)


"마르크스는 종교란 인간 소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에서 얻는 행복은 환상적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종교에서 어떤 행복을 얻는다 해도, 그들은 환상에 빠져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종교는 실제로 있는 진정한 고통의 상징이고 표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종교를 없애자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찾자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종교와 함께 공존하는 그 현실은 틀림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소망을 투사하도록 강요할 만큼 고통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제거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출현시키는 그 현실을 제거하지 않고는 의미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종교 비판은 사회 비판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래서 종교 비판 다음에는 정치 비판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또한 혁명의 실천이 그 뒤를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업은, 진실이 아닌 세계가 사라지자마자 이 세계의 진실을 건설하는 것이다.〉"(180)


제7장 자본주의 발전과 종교에 대한 베버의 관점


"마르크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종교 연구가들이 원시 사회의 종교를 연구하던 시대에, 베버는 서양의 천주교와 개신교, 중동의 이슬람교와 고대 유태교, 그리고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 중국의 유교와 도교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당시의 학자들이 종교의 본성이나 기원에 많은 관심을 둔 데 비하여, 베버는 종교의 기원보다는 그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관심을 두었다. 종교 사회학에서 베버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역사 발전에 있어 종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그는 17세기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동서양의 상이한 역사 발전에 세계 종교들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논제를 검토하기 위하여 역사적 분석을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버는 동양의 힌두교, 불교, 유교보다는 이슬람교, 유태교, 천주교, 특히 개신교, 다양한 개신교 종파 가운데서도 칼빈의 사상(Calvinism)이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 활동의 합리화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201)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가 사상의 요인을 무시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관념이 역사 안에서 효과적인 세력이 되는 양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역사의 변천을 설명하면서 관념과 사상의 역할을 전혀 무시할 뿐 아니라 관념을 단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의 반영이나 부수 현상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과 사상의 역할을 철저하게 도외시하는 역사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베버의 견해를 말해 준다. 베버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조건들이 종교를 포함해서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따라서 사회경제적 구조와 조건들의 변화에 의하여 종교 사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사상에 대한 물질적 조건의 영향만을 주장하고 물질적 조건에 대한 사상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다."(204)


"마르크스가 자본의 원시 축적과 혁명을 중요시한 것과 달리, 베버는 원시 축적에 관하여 별로 논의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나 충분한 자본의 축적은 있었으므로,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화의 출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특별한 방법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 축적이 아니고 오히려 합리적 경제 활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 개혁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베버는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중세 도시들의 반란은 자본가들이 주도한 것이며, 이러한 혁명은 비합리적이고 약탈적인 귀족들의 법률을 자본주의 발전에 적합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법률로 대치했다고 본다. 이러한 혁명은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의 재산을 탈취하는 혁명이 아니라, 재산에 관련된 제도의 개혁을 가져오는 혁명이다. 그래서 베버는 경제 활동의 계산 가능성과 예측성을 높여 주는 법률 체제를 도입하는 정치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필요했다고 보았다."(232-3)


제8장 종교에 대한 뒤르켐의 시각


"뒤르켐은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신과 이념을 옹호하며 그것의 학문적 토대를 건설하려는 데 정력을 쏟은 이론가였다고 파악할 수도 있다. 그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수렴하여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르켐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적·경제적 질서의 중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편이었다. 뒤르켐의 주된 학문적 관심은 전통 사회들이 합리화, 산업화, 그리고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혼란은 겪으며 비틀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진실된 토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행동에 질서와 틀을 마련해 주는 사회적 요소들인 종교, 법률, 도덕, 그리고 교육이 뒤르켐의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뒤르켐의 중심적 질문은 자유와 권위, 합리적 선택과 전통의 준수, 개인의 자율과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236)


"뒤르켐은 〈인간의 종교적 본성, 다시 말하면 인간성의 한 가지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를 종교 연구의 목표로 정하고 있다. 그는 이 말을 통해서 종교란 인간의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일시적인 측면에 불과하다고 보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종교 연구의 자세는 공정하고 동정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학의 하나의 기본적 가정은 인간의 제도가 착오와 거짓의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뒤르켐은 원시 사회의 종교도 실재(reality)에 관련된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확신 아래 다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뒤르켐은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기이한 의례와 가장 이상한 신화라도, 인간의 어떤 요구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삶의 어떤 측면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는 거짓된 종교란 없고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진실하며, 모든 종교가 그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 실존의 주어진 조건에 응답한다고 보았다."(238)


"뒤르켐에 의하면 종교 현상은 두 개의 근본적 범주, 즉 믿음과 의례로 짜여져 있다. 전자는 신념과 견해, 표상(representation)들이고, 후자는 일정한 행동의 양식이다." "이전의 학자들, 특히 종교 진화론자들이나 마르크스, 아마도 베버까지도 종교란 어떤 믿음 체계라고 보면서 종교 의례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늘날 의례가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견해가 종교 연구자들 사이에 보편화된 것은 뒤르켐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울러 종교 정의에는 주술과 종교를 구분해 주는 종교의 다른 요소가 또하나 포함되어야 한다. 뒤르켐은 그것이 집단이라고 보았다.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과 단체로 만드는 경향을 가진다." "뒤르켐의 정의에 따르면, 〈종교는 성스러운 것─따로 보관되고 금지된 것─에 대한 믿음과 실천의 통일된 체계이다. 그 믿음과 실천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라고도 불리는 하나의 도덕적 공동체로 규합시킨다.〉"(244-6)


"뒤르켐은 성스러움이 물체들의 내재적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은 결국 모두 하나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종교 진화론의 문제는 성스러운 것들이 상징이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인간이나 자연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다른 원천에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뒤르켐은 종교 경험, 즉 성스러움의 근원을 개인이나 물리적 세계가 아닌 어떤 다른 실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의 원천으로는 〈개인과 물리적 세계를 떠나서, 틀림없이 어떤 다른 실재가 있다.〉 뒤르켐에게 그 실재는 바로 사회이다." "뒤르켐은 사회란 수많은 개인들,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토대,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그들의 움직임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고와 관념이라고 보았다." "종교는 현실의 불의, 죄악, 고통, 죽음뿐 아니라 현실의 사회 안에서 실현되지 않은 이상과 가치들도 표현하는 것이다."(248-52)


# 뒤르켐은 사회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뒤르켐은 과학이 발전한 다음에라도 종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두 가지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종교의 신앙 체계가 쓸모없는 것이 되더라도 인간은 아직도 집합적 감정을 일으키고 행동을 향하여 밀어 줄 집회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는 언제나 도덕, 즉 집합적 감정과 관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제의적 집회를 통해서만 지탱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 과학이 결코 종교를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종교 없이는 사회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과학은 느리게 발전할 뿐 아니라 모든 문제를 풀지도 못하고 언제나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당장 행동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을 기다릴 수가 없다. 뒤르켐에 의하면 종교 사상은 과학이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과학이 영영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신앙 체계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262)


제9장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적 종교 이론


"프로이트는 종교 역사에 관해서 진화론자들이 제시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기보다는, 이미 설정되어 있었던 자신의 종교 이론을 보강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료를 이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07년과 1910년의 논문에서 발견되듯이, 그는 벌써부터 에디푸스 컴플렉스와 그로 인한 노이로제가 종교의 토대라는 견해를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의 종교 이론은 그의 정신 분석학 이론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분석학은 실제로 세 가지의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신 분열증의 임상 치료법, 인성(人性) 이론, 그리고 도덕성, 집단 생활, 사회, 역사, 예술 및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 이론이다. 종교에 관한 모든 설명은 정신 분석학적 방법에서 출발하며, 두 개의 개념, 즉 무의식과 어린 시절이 그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의도적·의식적 생활은 언제나 무의식적 감정, 의도, 그리고 지향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279-80)


"종교 관념이 받아들여지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긴급한 소망에 뿌리를 박고 있는 환상이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종교 관념은 〈경험의 침전물이나 사색의 결정체가 아니라, 그것들은 환상이고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긴급한 소망의 충족이다. 그 힘의 비결은 그 소망의 힘 안에 들어 있다.〉 그 소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 아이 같은 무력한 인간이 인생의 위험에서 보호받고, 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며, 후세에서도 지상의 생활을 연장하고, 우주의 기원과 아울러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이해하고 싶은 소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종교 관념들이 오류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실증적 증거를 통해서 입증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부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교 관념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혹은 반대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289-91)


"보통 유아기의 신경성 질환의 대부분은 성장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극복되고, 나머지는 나중에 정신 분석학적 치료를 통해서 제거될 수 있다. 인류 전체가 그 발전 단계에서는 비슷한 신경성 질환에 처할 수 있고, 무지하고 지성이 약하기 때문에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종교에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성숙을 포기하고 미숙하고 유아기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무엇을 제안하는가? 개인이나 인류는 영원히 어린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발전의 유아적 단계에 지나지 않는 종교를 떠나야 한다. 인간은 성장해야 하고, 자신의 자원과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의 현실을 지배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운명에 대해서는 체념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종교적 신앙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지성과 과학, 그리고 실증적 검증을 통해서 얻어진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장래성이 있다고 확신했다."(294-6)


"프로이트는 종교 진화론자들, 마르크스, 그리고 뒤르켐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팽배했던 실증주의 철학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실증적 증거를 통해서 입증되지 않는 종교의 가르침과 내용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종교의 진실성을 부인하고 종교가 말하는 초월적 세계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 사회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종교 아닌 다른 어떤 현실의 상징이나 표현으로 환원시키려는 이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적 생활 밑바닥에는 거대한 무의식이 있고, 이것이 의식적 정신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프로이트의 귀중한 공헌이다." "이 무의식은 겉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는 흔히 상징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징들은 허황된 어떤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숨겨진 중대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표출하는 상징들 중 특히 꿈과 종교 관념을 중요시한다."(309-10)


제10장 종교와 사회 변화 : 종교와 정치


"종교와 사회 변화와 관련해서 볼 때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종교 조직체가 분화되어서 종교가 비교적 독립적인 조직체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종교의 분화는 종교가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조직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와 신앙 체계에도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종교가 분화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원시 사회에서는 종교 사상, 예식, 조직체가 다른 사회적 사상이나 예식, 조직체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로 한데 엉켜서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의 분화가 발생한 것은, 그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지역에서도 3000여 년을 거의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는 최근까지도 종교는 분화되지 못했었다. 그리고 종교 조직체가 분화되지 않고 다른 조직체와 혼합되어 존재하는 경우에 그것은 사회학에서 확산 종교라고 불리고, 분화된 종교는 흔히 제도 종교라고 불린다."(324-5)


"종교 조직체가 분화한다는 것은 우선 종교 지도자의 역할이 독립되고 신도의 역할도 따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러면 가장이나 추장이 더 이상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겸임하지 않고 대신에 종교 전문가가 출현하고, 동시에 더 이상 단순히 어떤 부족의 성원이라 해서 누구나 자동적으로 그 부족 종교의 신도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되면 지도자와 신도들은 종교 생활만을 목적으로 삼는 종교 조직체를 형성한다. 종교의 분화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고, 그 다음이 불교와 이슬람교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와 힌두교의 분화는 아직도 미약한 정도이다. 종교가 분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부족 혹은 국가와 같은 사회 조직들이 종교 조직체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다른 비종교적 조직체에 맡겨졌던 종교 기능을 분화된 종교 조직체가 전담하게 되기 때문에 종교적 기능이 좀더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분화는 종교의 진보나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325)


"그렇다면 종교가 사회의 기존 체제를 강화·유지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회 제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정당성을 인정하며 협력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제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당하고 정당하다고 말하는 해명과 설명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 제도의 정당화에는 격언, 속담, 현인의 말, 전설 등이 이용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종교는 제도의 정당화와 합법화를 위해서 가장 널리 사용된 수단이었다. 그것은 종교가 사회 제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정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종교가 여러 가지 제도를 영원 불멸의 빛 아래서 바라보며, 경험적 사회 제도를 궁극적 실재나 세계와 연결시키는 데에서 발생한다. 종교는 사회 제도를 성스럽고 우주적인 세계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역사 안에서 발생한 제도는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인식된다."(330-1)


"한편, 세계 종교와 함께 비로소 진정한 분화된 종교 혹은 제도 종교가 출현하였다. 세계 종교의 출현, 그리고 종교의 조직상의 분화는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오고, 사회적 갈등과 긴장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며, 따라서 종교가 사회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은 현저하게 증대한다. 이제 정치 엘리트는 종교의 지도권을 독점할 수가 없고, 기존 체제의 정당화는 보장된 것이기보다는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사이의 힘의 미묘한 균형에 의해 좌우된다. 고대 종교의 유일한 사회적 기능은 기존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제도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상반된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이 특색이다. 제도 종교는 위정자를 옹호할 수 있는가 하면, 비판하고 반대할 힘도 갖게 된다. 이것은 종교가 어떤 경우에는 사회 변화를 방해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사회 변화를 촉진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화된 종교의 출현은 언제나 위정자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332-3)


"위정자들은 종교를 예속시키고 종교의 비판적 자세를 예방할 목적으로 매우 다양한 법률적 내지 정치적 전략을 사용하였다. 서양에서 흔히 사용된 것은 정교 협약(concordat)이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경우에 따라 변했지만, 대체로 정부가 특정 종교를 지원하고 보호할 의무와 아울러 간섭할 권리를 포함할 뿐 아니라, 관련된 종교가 정부에 대하여 수행할 의무와 간여할 권리들을 담고 있었다. 위정자는 그것을 통해 종교 지도자의 선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동시에 정당화의 획득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에, 종교는 정치 체제를 정당화해 주는 대가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중국 청나라에서는 정부는 특히 불교와 도교가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활동을 하거나 위험한 종교 사상을 퍼뜨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많은 법률적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면 정부는 상제(上帝)에게 제사드리는 일을 황제에게만 국한시키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336-7)


제11장 종교 조직체의 종류, 변화와 갈등


# 종교 조직체의 종류

1. 종파(sect) : 사회적 제도나 관습을 비판하는 예언자를 중심으로 모여든 열성적인 신도들로 구성된 집단

2. 교회(church) : 종파의 지도자가 가진 카리스마가 일상화(routinization)의 과정을 거쳐 발생하는 집단

3. 교단(denomination) : 교회보다 한층 더 나아가 사회의 기존 가치와 제도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집단

4. 제의 운동(cult) : 기성 종교의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전통과도 극단적으로 단절한 이질적인 종파 운동


제12장 현대 사회와 세속화 과정


# 세속화와 세속주의(secularism)

1. 세속화 : 종교가 사회 여러 분야에 대한 통제를 상실해가는 과정, 세속적인 목표들이 성스러운 목표를 지향하는 의례와 행위들을 대치해 가는 과정들

2. 세속주의 : 모든 형태의 성스러운 세계를 부인하고 개인의 윤리와 사회 조직의 기반으로서 비종교적인 또는 반종교적인 원리를 주장하는 사상 체계


"피터 버거는 세속화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사회 구조적·문화적·개인의 의식적 세속화가 그것이다. 사회 구조적 세속화에 대하여 그는, 〈교회의 통제와 영향 아래 있던 영역으로부터 그리스도교회가 퇴거하는 데서, 즉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고 교회령을 몰수하고, 교회의 권위로부터 교육이 해방되는 데서 세속화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문화와 상징 체계의 세속화는 사회 구조적 세속화 이상을 의미한다. 문화의 세속화는 〈예술, 철학, 문학의 영역에서 종교적 내용이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이 세계에 대한 자율적이고 철저하게 세속적인 시각으로서 나타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이상의 두 가지 차원 외에 주관적이고 의식적인 세속화가 있다. 개인 의식 차원의 세속화는 개인들의 종교성이 약화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근대의 서구 사회가 종교적 해석을 빌리지 않고서도 세계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개인들의 수를 증가시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397)


# 여기에 네 번째로 제도 종교의 세속화─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에서 현세적인 가치로 무게중심 이동, 신도수와 참여율의 감소, 종교의 신앙 진술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개인적 자율성의 증가─를 추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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