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을 상상하다 - 조선 연행사절단의 연행록을 중심으로
거자오광 지음, 이연승 옮김 / 그물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장 문헌 개설: 조선과 일본 문헌 중의 근세 중국사료


"중국으로 여행을 갔던,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로 출사했던 조선 사신들은 『조천록(朝天錄)』이나 『연행록(燕行錄)』과 같이 중국에 대한 수백 종의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문헌들은 대체로 '당시 사람들이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의 관원이나 문인들의 관찰 기록이고, '외국인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본 것이며, 특히 봉황성(鳳凰城)에서 북경까지 가는 길에 있는 중국 북쪽 지역의 정치·사회·풍속·인정 등을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17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 풍속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회의 내재적 변화를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그 중에서도 조선인들이 특히 주목하였던 풍속의 변화로는 '상례에 음악을 쓰는 것(喪禮用樂)', 남녀 구별이 없는 것(男女無別)', 부처와 관공(關公)을 공경하여 제사지내는 것', '관원과 문인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런 현상들은 전통을 고수해 왔던 조선인들의 눈에는 청나라의 심각한 사회 변화로 여겨졌다."(29-30)


"물론 조선인들의 기록들 가운데 일부는 '보고 들은 것[見聞]'이 아니라 '기억'이다. 조선의 관원이나 문인들이 전통적 중화, 특히 명나라 왕조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역사기억'으로 바꾸었고, 이를 청나라와 대비시켜서 과거의 '중화문명'에 대한 찬양과 현실의 '오랑캐'에 대한 경멸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의 '중국'은 두 개의 분열된 '중국'으로 변해버렸다." "이는 결국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빌어 현실의 청나라를 폄하한 셈이다. 당연히 이렇게 애증이 분명한 기록은 진실한 역사라고 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야말로 진실한 역사였다. 한국의 역대 개인 문집에는 시가(詩歌)·서발문(序跋文)·여행기[遊記]와 서신 등이 많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모두 한·당·송·명의 한족 중국에 대한 과장된 상상과 기억이 담겨 있으며, 청나라에 대하여 다소 고집스러운 편견과 이유 없는 멸시가 실려 있다. 다만 이러한 상상의 배후에는 수많은 역사가 간직되어 있으며, 수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31-4)


제2장 시대적 배경: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 대한 조선의 관찰과 상상


"중국 역사의 시야에서 보자면 정릉(定陵)에 잠들어 있는 명나라 신종, 즉 만력제 주익균(1563-1620)은 기념할 만한 군주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기록 안에서 만력제는 극히 숭고한 명예를 누리고 있다. 만력 20년(1592)부터 26년(1598)의 전쟁에서 만력제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점령되는 것을 막았으니, 그의 조치가 조선왕조를 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묘년(1627)과 임신년(1632)에 조선이 억지로 청조를 받을어야 했던 뒤에도 조선 조정의 관리들은 여전히 '신종 황제께서 재건해주신 나라[神宗皇帝再造之國]', '신종 황제께서 살려주신 백성[神宗皇帝所活之民]'이라고 불렀으며 끝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고수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만력제는 조선에서 성대하고 장중한 제사를 받았다." "명 왕조에 대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항상 광범위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친밀감은 조선 왕국의 문화를 명나라의 상징적 문화와 매우 깊게 연결시켰다."(58-60)


"조선인들은 왜 한족들이 그렇게 쉽게 만청에 귀순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강희연간에 청나라를 방문했던 이의현(1669-1745)은 자칭 명나라의 대장 상유춘(1330-1369)과 상우춘의 후예라는 상옥곤을 만나서는 〈당신은 명나라의 자손인데, 어찌 옛 명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상옥곤은 〈이미 다른 사람(=청나라)을 따르고 있습니다(已順他人也)〉라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이는 명나라만을 인정하려고 고집하던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의아한 일이었다. 건륭연간에 북경에 출사했던 홍대용도 여전히 조선 역사를 탐문하러 왔던 엄성(1733-1767)과 반정균(1743-?)에게 〈앞선 명나라는 우리나라에게 재조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라고 솔직하게 물었다. 이와 같이 청나라 치하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이야기가 조선 사신의 입에서 나오자, 두 청나라 문인들은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였다."(76-8)


"결과적으로 청나라 시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마음속으로 중국에 가는 것이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경으로 출장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신들의 여행기 명칭은 대체로 〈조천朝天〉이 아니라 〈연행燕行〉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비록 공손하게 청 조정에 가서 하례했다고 해도 마음속은 울분으로 가득 했다. 한태동(1646-1687)은 자신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으나 국왕의 일이기 때문에 정말로 부득이하게 간 것이라고 하면서, 〈낯선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날마다 나쁜 놈들을 만나 능욕과 핍박을 받으니 매우 고통스럽다. 비린내 나는 오랑캐 조정에서 개돼지 같은 놈들이 주는 것에 고맙다고 엎드려 절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고 정말로 부끄럽다〉고 하였다. 건륭·가경 연간에 이르러 비록 명나라가 멸망한 지 이미 백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의 '대명(大明)'에 대한 역사기억은 여전히 이처럼 또렷하였다."(80-1)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 학술의 역량을 무시했던 것은 명으로부터 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상적, 문화적 입장이 일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홍대용이 말했던 바와 같이 조선 사인들의 마음속에서 주자의 학문은 〈올바르며 치우침이 없고, 진실로 공맹의 정통을 잇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은 청나라 문인들이 『춘추』를 논의할 때, 주희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서 '끝내 화이내외(華夷內外)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의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문장은 아름답다고 할 만하나 성인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은 오직 상하의 구분과 내외의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말씀이 전혀 없으시니 본지를 잃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당시 고증학이 풍미하던 한족의 독서인들이 주희가 한대의 『시서(詩序)』를 폐기한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자,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은 오직 주자의 주해를 알 뿐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고 강경하게 밝혀 말했다."(94-5)


"만약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문화적 일체감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의 존재를 잠시 유지시킬 수 있었다면, 모든 것은 17세기 이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천주교 선교사를 축출하라는 법령을 발포하고 일본을 '신국(神國)'이라고 선포했다." "많은 중국의 지식을 배운 도쿠가와 시대의 학자들에게 '화하(華夏)'와 '이적(夷狄)'은 더 이상 지리상의 공간에 의한 구분이 아니었다. 중세기 불교의 '천축(天竺)·진단(震旦)·본조(本朝=日本)'로부터 생겨난 3국의 정립(鼎立)이라는 관념은 이 시기가 되자 점차 대등하다는 의식을 발생시켰으며, 일본인들은 자아인식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이후, 일본인들은 고대 중국의 '화이' 관념을 끌어들여서 소위 '일본형 화이 관념'을 형성함으로써, 유가중국(儒家中國)에 대항하는 신도일본(神道日本), 야만족의 청나라에 대항하는 진정한 중화 문화라는 관념을 형성하였다."(106-7)


"조선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중화문화의 교양을 받아들이고 중국을 경모하며 기꺼이 중국의 번속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족의 성격 내부에 잠재된 자존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본래 오랑캐에 속했던 만주인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되자, 조선인들은 억지로 유지해오던 문화공동체에 대한 일체감과 충성을 바꾸어버렸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에 출사할 때 그들은 문화가 다른 이국으로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조선 문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은 두 개로 변해 버렸다. 하나는 역사상 일찍이 빛났던 '명나라'였고, 다른 하나는 현실 속에서 이미 타락해버린 '청나라'였다. 역사상의 중국과 현실의 중국이 조선 사신들의 마음속에서 분열되어 다시는 중첩되지 않는 두 개가 되었다. 그들은 문화상으로는 전자를 따르고, 정치상으로는 후자에게 신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동아시아 사상사와 문화사의 특이한 풍경이었다."(108-9)


제3장 나라를 떠나면서 고향을 그리워함: 압록강변의 감회


"17세기 중엽 명청 교체 이후에 각종 연행 사신들의 기록 안에는 고국을 떠나는 슬픔이 가득했던 것 같다. 민진원(閔鎭遠)은 〈강을 건널 때에 오랑캐의 산은 음산하고, 압룩강 물은 검푸르게 보였다. 어찌 고국을 떠나는 심정을 억누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절구를 읊었다. 오랑캐의 산은 막막하게 둘러쳐 있고, 압록강은 가득히 깊구나. 산이든 물이든 어디를 간들 상심하지 않겠는가!〉 왜 〈어디를 간들 상심하지 않겠는가!(無虛不傷心)〉라고 했던 것일까? 고국을 떠나면 곧 타국에 들어가는데, 그 타국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명청 교체 이전과 정말로 다르다. 명나라 숭정 12년(1639) 심열(沈悅)이라는 조선의 관원은 명나라에 출사하기 전 의주에서 통군정에 올라서 말하기를, 〈통군정에서 화이(華夷)의 경계를 보니, 산은 제왕의 땅과 이어져 있구나!〉라고 하였으니, 조선을 오랑캐[夷]라고 하고 명나라를 '중화문명[華]'이라고 여겼던 것이다."(123)


제4장 오삼계(吳三桂)는 결코 강백약(姜伯約)이 아니다!


"강희 12년(1673) 겨울 11월 21일, 오삼계는 운남(雲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자칭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라고 했다." "조선 사람들이 오삼계 『격문』의 자기 표창을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오삼계가 반청 의거를 일으킨 것이라고 과장되게 상상하였다. 사실상 이는 단지 복명에 대한 조선인들이 품었던 내면의 희망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강희 18년(1679) 3월에 마침내 오삼계가 패배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조선인들도 차차 〈오삼계가 형산(衡山)의 남쪽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고 홍화(弘化)로 개원(改元)하였으나, 원래 주씨(朱氏)를 세운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음을 남몰래 축하하며 다행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오삼계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하여 와신상담했던 강백약(姜伯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대역무도하게 황제가 되려고 참월했던 자였기 때문이다."(147, 152, 156)


"오삼계와 그의 부하들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은 반드시 고국이 그리워 명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석주의 다음으로 김창업이 강희 51년 청나라에 출사했을 때, 그는 〈세인들이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했던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청군을 중원으로 들인 것이 죄인지〉 여부에 대하여 의혹을 느꼈다. 당시에 〈황성(皇城)은 이미 함락되고,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며, 천하는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오삼계는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었다. 더욱이 역적 이자성을 죽일 수도 없었다. 따라서 〈만약 오삼계가 헛되이 의리를 지키면서 청나라 군사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결국 이자성에게 패배하고 청나라 군사는 스스로 산해관을 넘어왔을 것이니, 천하의 일에 무슨 보탬이 되었겠는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김창업은 여전히 오삼계의 가장 중요한 죄과는 〈대명의 종실을 세우지 않고 천하를 실망시켰으며,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다가 결국 패멸하여 명분과 절의를 상실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170-1)


"시세는 결국 인력보다 강하며, 세월은 기억을 마모시키기 마련이다. 강희 말년에는 조선 문인들도 더 이상 오삼계에게 그다지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찍이 오삼계에 대하여 지대한 호감을 품었던 임본유 역시 청 황제의 새로운 정치가 〈관대하고 어질며 훌륭한 덕을 갖추었고, 종족을 화목하게 한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번의 난이 평정된 지 60년이 지난 후, 이 사건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가고 있었고, 한족 문인이든 조선 문인이든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삼계는 이미 '두 마음을 품은 신하'나 '역적'임이 자명하게 되었다. 조선 문인들과 청나라 조정의 평가도 이미 더 이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비록 노이점(1720-1788)이라는 조선의 문인은 오삼계를 떠올리면서 우연히 한 왕실을 회복하려다가 죽은 촉한의 명장 강유(姜維)를 연상하였지만, 그 역시 오삼계는 강백약에 비할 수 없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오삼계는 〈결국은 산해관의 문을 열어 적을 들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173-4)


제5장 이역의 슬픔을 상상함: 200년 간 계문란에 대한 조선 사신들의 멀고 먼 상상


"대다수의 조선 사신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모두 계문란의 이야기를─강남 여자 계문란이 북방 오랑캐 땅으로 끌려가게 됨을 한탄하며 지었다는 제시(題詩)로서, 풍윤현(豊潤縣) 부근의 진자점(榛子店)이라는 객점 근방에 있는 한 인가의 담장에 쓰여있었다고 전해진다─명청 교체기의 역사적 단편이라고 상상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상상은 역사가 되어갔다. 그런데 이 무오년이 후금의 천명(天命) 3년, 즉 명나라 만력 46년(1618)이 아니라면, 이는 바로 청나라 강희 17년(1678)의 일이다. 그러나 만력 46년, 명나라는 산해관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만주인들은 강남 여인을 심양으로 붙잡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며, 강희 17년은 명나라가 이미 멸망했고 청나라 사람들은 이미 명나라 사람과 북경 부근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계문란을 명청 교체기에 고통을 받은 사람으로 상상하거나, 이 시를 명청 교체기의 비극을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무언가 적절하지 않은 셈이 된다."(189-90)


"사실 사정은 매우 분명했다. 강희 22년(1683) 김석주가 진자점을 지나면서 이 시를 보았을 때, 그의 부사 유(柳)씨가 이미 이 집의 주인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물었고, 〈(주인 여자는) 5-6년 전에, 심양의 왕장경이 백금 70냥으로 이 여인을 사서, 이곳을 지나갔다고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라고 하였다. 5-6년 전이면 마침 강희 17-8년 전후가 되며, 이때 붙잡힌 계문란은 아마도 바로 오삼계에 속했던 가속의 일부였을 것이다." "다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고집스러운 조선인이 강남 여인 계문란을 명나라 때 수재의 처로 만들었고, 만주(滿州)의 왕장경은 70냥의 백금으로 그녀를 사서 심양으로 데려온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이 사건을 명청 교체기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힌 데에서 비롯된 비극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시가 있든 없든, 조선 사신들은 여전히 계문란 제시를 빌어 중국의 슬픔을 상상하였고, 여러 가지의 화답시를 가지고 만주인들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었다."(191-4)


"계문란에 대한 조선인들의 동정은 점차 약간의 불만으로 바뀌었다. 최초로 불만을 드러냈던 것은 강희 35년(1696) 북경에 출사했던 사은부사 홍만조(洪萬朝)였는데, 그는 『조계문란(嘲季文蘭)』에서 계문란은 진자점에서 오욕을 당했으나, 그저 담벼락에 〈영원히 마음이 아프다[萬古傷心]〉는 네 글자와 시 한 수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화적 소양과 시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독서하여 소양을 갖춘 여성임을 생각할 때, 반드시 취하고 버리는 구분을 깊이 살폈어야 했으나, 살기를 도모하여 모욕을 참았으니 끝내 뛰어내려 자진하는 절개는 본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는 정말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인들에게 계문란은 이미 민족주의적인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하나의 문화전통적 부호가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계문란의 제시는 만이(蠻夷)가 중화를 짓밟았음을 규탄하는 것이고, 계문란이 자결했다면 그 전통의 가치를 더욱 분명히 드러냈으리라는 것이다."(199-200, 203-4)


제6장 밝은 촛불은 이유 없이 누구를 위해 사르는가?: 청대 조선의 조공사신 눈에 비친 계주의 안록산 묘와 양귀비 묘


"계주성 밖에 있던 안록산과 양귀비의 묘에 대한 관찰에서 조선인들의 역사 기억과 현실적 해석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인들은 우선 명 왕조의 문명을 떠올렸고, 이 문명이 실추된 것을 만주족의 탓으로 돌렸으며, 당시 이미 이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던 중국에 대한 경멸감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한족 중국인들을 대신하여 이역의 슬픔을 상상하였고,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태도로 이 기이한 제사를 해석하면서, 모종의 역사적 암시를 감추고 일말의 동정심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멸감과 동정심이 교차되면서, 그들은 옳은 일에 있어서는 결코 사양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스스로 중화문명의 정종(正宗)이 되었다고 상상했다. 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했던 이래 조선인들은 일찍이 〈오늘날 천하에서 중화의 제도는 오직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당시 중국의 모든 기괴한 현상들을 보면서 그 탓을 모두 청나라에 돌렸다."(231-2)


제7장 명나라의 의관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 사신들이 조선의 정식 의관, 즉 명대의 의관을 입고 북경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청나라 수도의 기이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청나라의 문화인들은 이미 한족의 의관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호기심도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인들은 의복과 모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유구와 안남의 사신들을 대면하면서 마치 높은 지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스스로 정통이라고 여기는 오만함을 느꼈고,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더욱이 자신의 복장이 명나라의 의관에 가깝다고 하여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이미 복색을 바꾼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마음속 깊이 경시하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가면 늘 시험하듯이 명나라의 의관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이때 외국 사절들의 복장은 한족 중국인들로 하여금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고, 명대의 의관을 한 조선인들은 한족의 전통적 의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하였다."(236, 259)


제8장 당자(堂子)에서는 혹시 등(鄧)장군을 제사하는가?


"산해관의 외부에서 떨쳐 일어났던 만주인들은 본래 샤머니즘을 신봉했기 때문에, 늘 제단을 마련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정실(靜室)에서 여러 신들의 패위(牌位)에 제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중요한 날에는 늘 그랬듯이 제사 의식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는데, 특히 정원 초하루가 그러했다." "이는 본래 만족의 의식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만족의 황제가 전면적으로 '중국'을 상징하는 황제가 되자 한족의 전통적인 제사를 정식 규범으로 수용하고, 〈상주(商周)의 제도와 마치 부절을 합한 것 같다〉고 해석하고자 했으며, 그런 후에 비로소 〈억만 세의 바탕을 이어간다(綿億萬載之基)〉고 하였다." "조선 사신 서문중(徐文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목도했던 강희제 시대에 당자 제사는 정월 초하루에 이미 고정된 절차가 되어 있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줄곧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인지, 또 왜 그렇게 바쁘게 지나가는지를 추측하였다."(276-7, 280-2)


"강희 9년(1670). 민정중(閔鼎重)은 청조의 황제가 일찍 가서 제사지내는 것은 등 장군인데, 등 장군은 청조와 맞섰던 명나라의 장군이고 사후에는 여귀가 되어, 〈그를 만나는 자들은 모두 죽고, 호인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게 되므로 묘를 세워 기도하는 것이다. 만주족이 연경에 들어간 후에도 역시 그만 두지 못하고 묘를 세워 존숭하고 받든다〉라고 이미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소문은 줄곧 지속되었으며, 점점 더 심하게 과장되어갔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가 반만(反滿) 입장을 공개할 수 있는 만청시대가 되자, 조선인들은 점차 '당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반면, 한족 중국인들은 오히려 점차 '당자'의 역사적 상상으로 되돌아갔으니, 격렬한 민족 정서는 한족 중국인들과 조선인들로 하여금 입장을 바꾸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한족 중국인들은 〈당자에서는 등 장군을 제사 지낸다〉는 옛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청 황제를 조롱했다."(284-5, 293)


제9장 뜻밖에 오랑캐의 수도에서 한족 문화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다: 북경에서의 연희(演戱)에 대한 조선 사신들의 관찰과 상상


"건륭과 가경, 그리고 도광연간(1821-1850)의 북경은 정말로 번화한 도시였다. 산해관 밖의 소슬함과 한기를 거친 후, 조선 사신들이 산해관을 지나 풍윤(豊潤)·소주(蘇州)·통주(通州)를 거쳐서 동직문(東直門)·조양문(朝陽門)과 동악묘(東岳廟)를 통하여 북경 성으로 들어오자, 오색이 찬란하여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의 풍경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일기를 보면, 북경에서 가장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문화적 풍경이었다. 첫째가 유리창(琉璃廠) 책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서적이고, 둘째가 천주당의 서양인들 및 천주당에 있는 회화와 신기한 물건들이었으며, 셋째는 박학다식한 문화인들이었고, 넷째는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마술[幻戱]', 즉 눈속임을 하는 절묘한 기교들이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것으로는 북경성 안의 연희 공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는 단지 상연되는 연희일 뿐 아니라 중국을 관찰하는 자료가 되었다."(300)


제10장 이웃집의 낯선 사람: 청나라 중기의 조선이 서양을 대면하다


"관례대로라면 청나라는 조선 사신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마음대로 접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령은 금령일 뿐이었고,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은 항상 스스로 천주당에 갔는데, 선교에 뜻이 있었던 서양인들 역시 언제나 주동적으로 이 청나라 동쪽 이웃의 사절들을 접촉하였다. 그들은 필담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서로 예물도 주고받았다. 강희로부터 옹정연간에 조선 사신들은 선교사로부터 각종 예물과 서적을 얻었고, 예의상 선물을 받으면 답례를 하는 이런 습관을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져 갔다." "만남이 거듭되고 필담이 이어짐에 따라 조선인들은 얼마간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끝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화의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있으니, 이제 조선인들도 이런 이방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서양인과 조선인들이 멀리서 서로 바라보면서 가졌던 호감은 천주교가 조선으로 전파하면서 결국 막바지로 치닫게 되었다."(354-7)


"가경 10년(1805), 그때까지 천주교도들의 활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청 조정 역시 마침내 상유(上諭)를 반포하여 서양인들이 서적을 간행하고 전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제 조선왕국과 청나라는 선교사에 대하여 외적인 국가의 문호와 내적인 마음의 문을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문호를 닫았고, 그들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도 전대미문의 엄격한 금지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견고한 선박과 맹렬한 화포를 앞세운 서양인들은 결국 얼마 후에 조선과 중국의 봉쇄를 타파하였으니, 너희들이 국문을 잠그면 우리는 억지로 열겠다는 식이었다. 이는 일본의 쇄국이 마침내 개국으로 변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60년 이후인 동치 5년(1866), 정사(正使) 유후조의 조수였던 조선의 사신은 북경에서 새로운 하나의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즉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수도 북경은 더 이상 선교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양인들도 천주당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었다."(36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과 중화 - 조선이 꿈꾸고 상상한 세계와 문명 돌베개 한국학총서 17
배우성 지음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위대한 청나라'와 '문명의 계승자' 사이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고두叩頭의 예를 행함으로써 병자호란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게 왕이 머리를 조아렸다는 사실에 조선의 선비들은 분노했다. 패전의 상처는 강요된 조형물로도 남았다. '삼전도비'로 더 많이 알려진 '대청황제공덕비'가 그것이다. 앞면은 만주문과 몽골문, 뒷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 조선의 잘못과 청나라의 시혜 등에 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이경석(1595~1671)이다."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은 1703년(숙종 29)에 올린 상소에서 비석의 제작 경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주상께서 타이르시기를, '이는 바로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다. 뒷날 자강自强하는 일은 오직 내 몫이다. 다만 마땅히 문자文字는 그들 뜻에 힘써 맞추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의 조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주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여겨 은인하며 명령을 받들었습니다.〉"(33-4)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 비석은 만몽한을 아우르는 제국의 상징물이자, 청나라가 조선에 시혜를 베풀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동원해 중국 전역을 천문측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지도를 편찬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황여전람도〉다. 이 지도는 옹정제와 건륭제 때 계속 수정되었다. 이 도엽 중에는 조선 전도도 들어 있다. 청나라가 조선을 직접 정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조선 전도에서 비각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강희제 때 편찬된 판본에는 한강가에 만주어로 버이bei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삼전도비를 가리키는) 비碑를 뜻하는 한어의 음가를 만주어로 음차한 것이다. 옹정제와 건륭제 때의 판본에는 한강가에 (삼전도 비각을 기리키는) 비정碑亭이 보인다." "비석을 본 조선 지식인들에게 남은 것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20리 방안 군현지도집에서도, 김정호의 지도집에서도 비각의 존재가 선명하다."(63-5)


"1666년(현종 7), 노년의 김수홍(1601~1681)은 마지막 남은 소망 하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론을 주장하는 것이 예치가 구현된 세상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면, 지도를 펴내는 것은 과거에 예치가 구현된 땅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김수홍의 입장에서 보면, 그 땅과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땅, 그런 역사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론과 지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의 제목은 김수홍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지도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말해준다. '천하'는 당시의 세계, '고금'은 옛날과 오늘날, 즉 역사를 뜻한다. '대총편람'은 '망라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김수홍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와 그 역사를 한 장의 도면에 그리려 했다." "그는 단순히 중원대륙과 그 주변을 공간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중원대륙의 역사 가운데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었다."(66-70)


"김수홍은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조선팔도고금총란도〉에서 고금의 지명과 그 땅에서 나온 인물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 두 지도 어디에서도 청나라의 존재감을 읽어낼 수 없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의 '고금'古今은 역사적 인물과 당대의 인물을 뜻하지만, 적어도 '今'은 명대를 넘어 청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서 중원대륙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강조된 곳은 조선이다." "28수가 비치는 땅은 중원대륙이고 그 중원대륙에 중화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문화적 원형질이 내재되어 있다면, 조선이 소중화 혹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중원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28수의 기미 분야에 해당하는 유주幽州가 조선의 역사적 영토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조선 지식인이라면 이제 기미 분야의 조선을 소중화 혹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80-2)


# 28수 : 적도 부근의 28개의 별자리


2부 지리와 풍토론은 어떻게 중화관을 형성했는가


"원 간섭기의 고려 지식인들은 몽골을 중국 혹은 중화라고 부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몽골이 중원대륙을 지배하고 유교문화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명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여말선초 유학자 집단을 대표하는 정몽주조차 중국 혹은 중화를 말할 때 형세와 명분을 두루 고려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 관료들이 대부분 형세론적 화이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다만 정몽주가 천명을 빌려 중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정몽주의 논리에 따르면, 원나라가 '스스로 파천을 자초한 의롭지 못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형세 때문은 아니다. 더 이상 중원대륙의 패자가 아니기 때문에 중화가 아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중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천을 자초했다는 의미다. 중화는 천명을 받은 의로운 자의 몫인 것이다. 정몽주에게 천명과 명분은 결코 형세를 치장하는 도구만은 아니었다."(93-6)


"그렇다면 고려는 화이의 틀로 설명할 수 있는가.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은 다음 두 가지를 논거로 삼고 있다. 하나는 소천하 단위별로 풍토와 기질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고대의 강역을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문화적 자주성과 유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다원적 천하관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다원적 천하론자들이 자국을 소천하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지덕地德, 즉 지기地氣의 작용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고려시대의 자주적 유신, 나아가 다원적 천하관의 소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풍토와 기질의 차이, 역사 계승의식 등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고려시대의 자주적 유신 혹은 다원적 천하관의 소유자로부터 풍토와 기질의 차이, 유구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 지덕의 작용을 긍정하는 정서를 이어받는 한편, 모화주의자 또는 화이론적 천하관의 소유자로부터 명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중요성을 배웠다."(99-100)


"조선은 해외海外의 나라인가 아닌가. 한글 창제 당시 거론된 논점이다. 정인지(1396~1478)는 풍토風土가 다른 문자(漢字)를 빌려 조선의 소리를 표현할 것이 아니라 자기 소리를 표현하는 문자, 풍토에 맞는 문자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중화의 예악과 문물을 추구하는 나라지만, '외국'外國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문자를 가지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은 '외국'의 소리로 '외국'의 글자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창제된 것이다." "정인지의 풍토부동론은 조선이 '외국'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정인지가 말하는 '외국'은 '중국에 대한 외국'이다. '외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외'外로 만드는 중심으로서 중국이 전제된다. 풍토의 차이로 인해 다른 어떤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이적'이 아니라 '외국'인 한, 그 선택은 중국과 외국을 아우르는 보편문화의 테두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124-6)


"홍대용(1731~1783)은 '화'와 '이'의 구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 바다를 건너와 구이九夷의 땅에서 살았다면 화제華制를 써서 오랑캐의 습속을 변화시켜 주나라의 도를 역외域外에서 일으켰으리니, 내외의 구분과 존양의 뜻이 스스로 마땅히 역외춘추에 있었으리라.〉 공자가 구이에 와서 살았다면 역외춘추가 내內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 누구나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주장이다. 그러나 그 안에도 전제가 있다. 내와 외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분되어 있다. 구이의 땅을 역외라고 말하는 것은 중원대륙을 구역九域 혹은 구주九州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미 이런 구분법을 인정한 것이다. 역외의 인간은 다만 역외에서 춘추를 구현할 수 있을 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춘추가 구현된 그 땅이 여전히 역외인 한 역외를 구역 혹은 구주의 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지리적 중화관과 풍토부동론의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164)


"풍토부동론은 조선이 '해외의 나라' 혹은 '방외의 별국'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풍토가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이 해외의 나라라는 사실을 늘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선이 '해외의 나라'임에도 소중화인 것은 그 풍토가 중국과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하영(1741~1812)은 중화를 '동일한 풍토와 규모의 차이'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이 소중화라고 불린 것은 기본적으로 예악과 문물이 중화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예악과 문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산천의 풍기 또한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론계 지식인 이종휘(1731~1797)의 눈에 비친 조선은 예악과 문물이라는 역사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나라이며, 명청 교체 후 중화문화를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는 나라다. 공자가 말한 동주東周, 맹자가 말한 선국善國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나라이다."(167-72)


3부 조선은 왜 만주 지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임고타林古打는 만주어 '닝구타'ningguta를 음차한 것인데, 조선 후기 사람들이 늘 만주족의 발상지로 기억했던 영고탑과 음가가 같다." "효종 대는 영고탑 회귀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이며, 조선이 유일한 중화로 자신을 분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영고탑 회귀설은 寧古塔 혹은 寧固塔이 임고타를 대신해서 닝구타의 지명으로 굳어지는 시점에서 조선의 중화주의적 사고가 청나라의 운명적 멸망을 전망하는 쪽으로 이어지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북경에서 영고탑으로 이동할 때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조선의 서북 지역과 만주 일대의 지리에 대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조선 지식인들은 심양-길림(울라)을 거쳐 영고탑까지 가는 길이 험하고 먼 우회로인 반면, 조선의 서북 지방을 경유하는 길은 훨씬 완만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만일 지리적 형세가 실제로 그렇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197-9)


"남구만은 청나라가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해도 만주를 경유하는 쪽이 조선의 서북 지대를 경유하는 쪽보다 험하지도 않고 가까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만주 지리서를 확보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1697년(숙종 23)에 입수한 성경지에는 『대명통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리 정보가 담겨 있었다." "숙종도 성경지를 보고 백두산 남쪽 자락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구만은 청나라가 성경(심양)에서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지리적 여건상 조선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몽골이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까지 논증하지는 못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이명도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의 운명적인 몰락을 예견하는 한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결국 성경지의 지리 지식이 보급되었지만 영고탑 회귀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위력을 발휘했다."(200-5)


"다양한 만주 지리서가 도입되면서 영고탑 회귀설은 차츰 약화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늘 '오랑캐에게는 100년의 운세가 없다'고 말해왔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지만, 이미 그 '오랑캐' 나라는 100년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 논리는 19세기까지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1860년 서양 세력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정에서조차 영고탑 회귀설의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1861년 훈련천총 윤섭이 방어책을 올렸다.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난다면 반드시 요양遼陽 방면으로 동진東進하여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주장이었다." "조선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생각하는 한, 청나라는 아무리 번성한 문물을 가지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늘 타자일 수밖에 없었다. 영고탑 회귀설이 1860년대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220-1)


4부 변경과 역사적 고토는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 지도와 지리서들은 조선이 당면한 정치적 이슈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학술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이 문헌들에서 소개된 정보들은 조선이 백두산과 북만주에 대해서 알고 있던 지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만부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성경지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고는 백두산에서 흘러나가는 물줄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이만부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국경이어서 조선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데 비해 그 위쪽은 전문傳聞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청나라의 기록과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정계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백두산과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여러 고지도 중에는 토문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별개로 보거나 분계강을 설정한 것이 적지 않다."(267, 272-3, 285-6)


"이익은 단군과 기자에 의해 이어져오던 정통이 기준箕準에 의해 삼한三韓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삼한정통론은 안정복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만일 삼한정통론을 승인한다면, 요하 일대 혹은 북만주 일대에서 자국 고대사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 그것이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이라면 중화와 정통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고구려나 부여나 발해라면 사정이 다르다. 요동과 북만주에서 아무리 넓은 영토를 차지했더라도 이 나라들은 정통이 아니다." "송시열은 고토故土가 어디까지인지, 나아가 고토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일까. 청나라에서 1684년(숙종 10)에 처음 간행된 성경지는 송시열이 죽던 1689년(숙종 15)까지 조선에 수입되지 않았다. 만주 지리서를 본 적이 없는 송시열에게 고토의 영역을 자기 시대의 위치값으로 고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300)


"고토에 관한 이슈는 백두산 정계定界 문제로 이어진다. 이익은 정계 때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는 선춘령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두만강의 원류만을 찾으려 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토문강의 원류를 찾아서 경계를 따진다면 선춘령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조선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당시 당국자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고토론자의 면모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다음부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갑자기 찾으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데다, 방수防守의 부담이 장래에 큰 걱정거리가 되리니, 반드시 영토를 넓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 사대事大하여 도움이 되는 데다가 변방의 근심이 사라졌으니, 그 땅을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익의 제자였던 안정복 역시 정계 문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왕자王者의 다스림은 덕에 힘쓰는 것이다. 땅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301-3)


"이종휘(1731~1797)는 이익이나 안정복처럼 고토 회복에 무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신채호가 높이 평가할 정도로 적극적인 고토 회복론자였다." "이종휘의 논설 「취요심」은 그가 고토를 어떤 맥락에서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준다. 이종휘가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고토는 요심, 즉 요동 지역이다." "이종휘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요동을 오랫동안 치지도외置之度外해온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요동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히 그곳이 고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이 땅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심을 취하지 않으면 양계兩界를 보존할 수 없고, 양계를 보존할 수 없다면 '동국'東國 또한 그에 따라 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휘에게 고토는 조선이 이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장소다. 이종휘의 고토 회복론이 재래의 화이론에 기반한 것이라는 평가는 그런 점에서 옳다."(305, 309)


"이종휘에게 고토 회복은 오랑캐로부터 중화문명 국가 조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행위다. 이 점에서 고토를 말하면서도 덕치德治를 강조한 이익이나 안정복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고토 회복을 영토 확장의 문제로만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분계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분계강을 주장하는 모든 논자들은 분계강을 자국 고대사의 중심무대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분계강이 변경 혹은 국경이 되어야 한다고만 말했다. 분계강이야말로 순수하게 영토적인 아젠다였다." "1884년 지견룡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국경을 넓히는 일은 자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며, 자강은 내수를 위한 전략이다. 국경을 넓히는 일이야말로 곧 내수를 위한 선결 과제가 된다. 지견룡의 논리는 '외양外攘을 위해서 내수해야 하고 내수를 위해서는 군주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이 가장 중요하다'는 시대적 논법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세계 각국이 대소를 따지지 않고 교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323)


5부 중국 밖의 세계와 지리적 시야의 확대


"조선이 처음부터 유구(오늘날의 오키나와)를 중화문화 국가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유구가 재상의 자제들을 명나라에 보내 공부하게 한 사실은 이미 조선 초기에도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유구의 문화는 일본적이거나 비유교적이며, 심지어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초기의 소중화 의식은 당시의 조공책봉 관계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청 교체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 속에서 청나라와의 조공책봉 관계는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굴레였을 뿐이다. 버거운 현실일 뿐 지향해야 할 세계는 아니었다. 그런 청나라와 조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 같은 수는 없는 일이다. 청나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 관계에 기초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 반면, 조선은 중화문화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보려 했다. 유구라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도 그런 차이가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 지식인들은 유구 문화 자체가 얼마나 중화적인가에 더 관심을 쏟았다."(351-2)


"이덕무가 하이도(오늘날의 훗카이도)에 주목한 것은 일본이 하이도를 경유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이도를 통해 조선을 치려 했다고 말해왔으며,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이런 견해를 듣게 되었다. 이덕무는 경험적으로 볼 때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했다. 유사 이래 왜구는 규슈와 쓰시마 일대로 들어와 조선의 서남해안을 노략질했으나 동해안은 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덕무에 따르면 일본의 지형이 사람'인'人 자 혹은 들 '입'入 자와 같아서 조선의 동해와 남해 두 바다를 마주하고 있지만, 동해 쪽은 파도가 높고 바람이 많아서 군사적인 근심거리는 없었다 한다. 그러나 이덕무는 표류인의 진술을 통해서 하이도가 지금의 연해주와 매우 가까우며, 조선의 함경도와도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생각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워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61)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하 강리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등 구대륙 전체를 망라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확대된 세계 안에는 여전히 지리적 중화관이 내재되어 있다. 단순히 중원대륙의 크기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중원대륙의 서쪽 전체가 극도로 왜곡된 현상 역시 지리적 중화관이 작동한 결과이다. 〈강리도〉는 새로 알게 된 넓은 세계와 전통적인 중화세계관이 모두 표현된 도면이었다." "〈강리도〉가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림이자 통치의 정당성과 이념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졌지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지도에는 한자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번역 지명이 무수하게 등장했다. 이 번역 지명들 중 대부분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나아가 그 안에서 설명되는 '천하'와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었다. 번역 지명이 주었을 거부감이 희석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문異聞을 넓힌다'는 정서였다."(379, 399)


"이문은 신기한 이야기나 믿기 힘든 이야기이며, 또 사실관계를 확정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나라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거나, 명 중심 국제질서의 안팎에 있는 나라들에서 전해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때로 그것은 현실의 조공책봉 체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곳에 관한 이야기, 혹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문은 조선에서 신뢰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유교적 합리주의자라고 해야 할 조선 지식인들로서는 사실관계를 확정할 수 없는 어떤 논의도 공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공인되거나 혹은 이단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이문이라도 그 존재 의의가 부정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보다 넓은 영역을 보여주는 〈강리도〉가 제작된 점, 그 사본들이 16세기까지도 계속 복제된 점은 모두 '이문을 넓힌다'는 말의 정당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399-401)


6부 세계의 인식과 지리적 중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서구식 세계지도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서양'(대서양과 소서양)도 들어 있었다. 정화의 항해를 계기로 중국의 조공권에 편입된 수많은 인도양 국가들을 '서양'으로 부르던 중국인들은 당연히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서양이 그 일부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유럽으로서의 서양'은 사실상 중국인들이 말해왔던 인도양 국가로서의 서양과 달랐으며,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사이四夷 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인들은 마테오 리치의 서양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으로서의 서양은 새로운 이역, 인도양 국가로서의 서양은 전통적인 이역이었을 뿐이다. 『대청일통지』는 사이四夷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이역, 즉 유럽으로서의 서양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이역과 전통적인 이역과의 구분선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416-8)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말한 서양은 구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서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그가 말한 불랑기국이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수광이 '유럽을 말하려 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난센스다. 이수광이 말하려 한 것은 유럽 국가 포르투갈이 아니라 타이의 서남쪽 바다에 있는 해양국가 포르투갈이다. 영결리국과 남번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봉유설』에서 언급한 외국 가운데 구라파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도 유럽 국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수광이 유럽을 어설프게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유럽으로 표상되는 '넓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자기 나름의 스토리 구조 안에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땅에서 시작되는 몇 갈래의 '땅끝'으로 설명했다. 철전鐵甸에서 이어지는 '북쪽 땅끝', 회회국에서 시작되어 불랑기국을 거쳐 영결리국에 이르는 '서쪽 땅끝', 그리고 확대된 서역 끝자락으로서의 구라파국 등이 그런 것들이다."(449-50)


"그렇다면 이수광의 세계관이 보통의 유학자들과 같았다고 보아도 좋은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이수광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세계를 결코 중국과 조선 중심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화문화를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이나 '소중화'인 조선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점에서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전통적인 지리 관념을 변형하고 재해석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이 북황의 바깥으로 어찌 또 『삼재도회』에 적혀 있는 세계와 같은 곳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세계'世界라는 말을 구사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세계'라는 단어는 십방十方을 의미하는 불교적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삼재도회』에 실려 있는 도면 가운데 규모 면에서 거기에 해당하는 것은 서구식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식 세계지도를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적 규모와는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451-2)


"조선 사회에서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기 시작한 17세기는 신선설神仙說이 대두했다가 쇠퇴하는 시기였으며, 명청 교체에 따라 중화관념이 변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노장사상 혹은 신선설은 이미 16세기부터 주목받았다." "17세기 초에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양생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이수광은 유학자이면서도 무위자연과 자기절제를 강조하는 도교의 양생설에 심취해 있었으며, 노자와 장자의 글도 편견 없이 평가했다. 그러나 개방적 학풍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신선설은 곧 강화되어가던 중화주의에 묻혀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사회에서 중화와 이적,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문제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수광의 노장적 취향은 이단 학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조식(1501~1572)과 서경덕(1489~1546)의 문하생들은 입지가 약화되어 독자적인 그룹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양생설이나 도교적 취향은 학문적으로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웠다."(473)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지식인들이 추연이나 육합을 거론하거나, 땅과 바다의 관계에 대한 『중용』과 『주자어류』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구식 세계지도 때문이었다. 서구식 세계지도를 전통적인 직방세계의 바깥, 혹은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동양 고대의 모델을 통해서 이해하려 한 그들은 그 세계상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신선적·도교적 문헌에서 발견했다. 서구식 세계지도는 신선설이 쇠퇴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도교 계통의 문헌이 다시 주목받는 근거가 되었다." "'바다 밖에 땅이 있다'는 세계 구성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서구식 세계지도의 세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동시에 성현이 말한 진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면서 도교적 문헌이 재발견되고 바다 밖에 땅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은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도면으로도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이 도면을 '천하도'天下圖라고 불렀다."(473-4)


# 추연 : 전체 세계는 아홉 개의 주로 나뉘어 있고, 각 주는 비해라는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고 주장한 전국시대 음양가의 사상가, 육합 : 십이간지를 배합한 방위 개념으로도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상하와 사방을 의미하는 용어


7부 중화세계관이 그린 마지막 궤적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소중화로서 혹은 '조선 중화'로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 출발점은 늘 기자였다. 물론 '공자가 구이의 땅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논어』의 기록도 자주 인용된다. 송시열은 공자가 동방을 문명의 땅이나 살 만한 곳으로 여겼다고 보았다." "제후국 조선이 가진 문화의 전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자보다 오래된 인물, 그리고 제후로서 조선을 문명화한 인물이 필요했다. 기자는 그렇게 '재발견'되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명청 교체 후 조선이 간직한 중화문화는 공자의 문화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기자의 문화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1910년 연해주에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했던 유인석이 여전히 기자를 중시했던 것은 그가 중화문화의 보편성을 첫 번째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신석의 사례에 비추어본다면, 1910년대 연길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이 기자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중화문화의 계승자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뜻한다."(522-3)


"공교孔敎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인 한 당연히 유교문화권 안에서는 공유될 수 있는 자산이다. 그러나 김정규에게는 공자가 '화'華와 '한'韓에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화와 한이 엄연히 별개라는 사실은 더 중요했다." "조선의 유학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중화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굳게 믿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한 것은 중화세계의 재건이었다. 김정규의 스승인 유인석도, 그리고 심양에서 동북삼성공교회를 설립한 이승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교지회를 통해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을 결집시키고 그 아이들에게 '조국'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보편적 가치인 공자의 가르침은 그에게는 '조국'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을 뿐이다. 신학문은 제대로 된 손가락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하며, 그 손가락이 제대로 된 손가락인지도 살펴야 한다. 김정규의 인식은 그런 것이었다."(539-43)


"조선과 기자를 지우려 했던 김정규, 조국 정신에 입각해 귀화를 반대하던 김정규, 신학문에 대해 투쟁하던 김정규, 그리고 공자로 조국을 가리키던 김정규. 이는 그와 문제의식을 같이 했던 1910년대 연길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이주자 사회에도 3·1운동의 기운이 꿈틀거리면서, 연길과 연해주를 아우르는 독립군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면 전환의 기회를 맞은 김정규는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을 결집하여 의군義軍을 편성하고, 연해주 의병 세력과 제휴하여 의군부 결성을 추진했다." "그에게 '의'란 '충후예의한 민족'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에게 '소중화'란 제후국의 표상이 아니라 '의를 간직한 민족'의 아이콘일 뿐이다. 대성중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김정규는 단 한 번도 '대한국'의 백성이 아닌 적이 없었다. 공자를 들어 조국을 가리키는 것. 김정규에게 공자와 대종교, 나아가 중화와 중화세계는 그런 의미였다."(543-5)


"조선을 현실의 중화로 여기면서도 중원대륙에 중화국가가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정서는 송시열에서 이항로까지, 다시 이항로에서 최익현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나 최익현이나 유인석은 송시열과 전혀 다른 정치적·문화적 환경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과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조선과 중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현해야 했다." "최익현에게 당시의 세계는 두 개의 패러다임이 충돌하는 현장이다. 개화하고 경쟁하려는 야만의 패러다임과 개화하지 않고 중화 질서를 지키려는 문명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그 갈림길에서 공법 질서를 버리고 중화 질서를 택한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중화 질서를 택하지 않는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그가 구사한 논리가 흥미롭다. 아무리 개화하고 경쟁하는 공법 체제라 하더라도 일본이 그 질서 안에서나마 생존하길 바란다면 (중화 질서의 이론적 근거인) 신의와 도라는 보편적인 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563-5)


"최익현은 오랜 시간 적대적 타자였던 청나라를 어떻게 전략적 제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생각한 사람은 유인석이었다. 유인석이 청나라를 전략적 제휴의 대상으로 본 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중화세계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금수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이적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 논리다." "'자주독립'할 수 있게 된 상황이라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능력이 있는데도 '중국'을 섬긴다면 사람들의 의혹을 풀기 어렵지 않겠는가.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에는 서구 국가 시스템과 공법 체제라는 틀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문제는 '자주독립'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서구 국가 시스템과 공법 체제하의 세계 질서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중화세계 재건의 당위성을 믿는 유인석은 '자주독립'이라는 용어가 전제하는 그 틀 자체를 거부했다."(566-8)


"유인석에게 세계란 중화를 본질로 삼는 가치적인 질서이며, 동시에 위계적인 질서여야 한다." "유인석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 문명권을 건설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왜양일체론을 견지했던 최익현이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 삼국의 연대를 희망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동아시아 문명권과 서양이 대립하는 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의 주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같지 않다. 유인석은 청나라에 대해서는 전략적 제휴의 대상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확장된 화동華東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중화문화를 보존해온 조선, 중원대륙에 들어설 가상의 중화국가, 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일본이 이루게 될 '확장된 화동'이야말로 '유교적 동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는 조선왕조를 앞뒤로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해도 좋다. 유인석의 '유교적 동양'은 그 중화론이 그려낸 궤적의 끝자락을 장식했다."(568, 5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머리말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대부계급은 '중소규모의 토지·노비 소유를 표준적인 경제적 토대로 하고, 자신들이 정치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진 지식계급'이었다." "사대부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가진 문제점을 살펴보면, 첫째, 사대부계급의 일차적인 특성에 대한 이해이다. 즉 물질적 기반과 지식-인문학적 교양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 특성이냐 하는 문제이다. 양자는 비중상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한다면 지식-인문학적 교양이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지주가 아니어도 사대부로 대접받을 수 있지만 지식-인문학적 교양이 없으면 사대부로 대접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이해이다. 사대부의 표준이 중소지주라는 것은 반드시 중소지주의 수가 가장 많다는 산술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중소지주의 이해가 대지주의 이해보다 우선적으로 관철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부의 크기와 사회적 지위가 직결되었던 서구 중세의 영주계급과 명료히 대조된다."(7-8)


"셋째, 사대부의 시기별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이해이다. 여말선초에는 사대부가 문벌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역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연출했다면, 사대부사회 해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가 보수·반동적 역할을 연출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조선 후기 사대부의 모습으로 조선사회의 사대부계급을 평가하고 전체 조선시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넷째, 사대부와 성리학의 관계이다." "문제는 사대부계급의 성향을 비롯한 조선사회의 여러 특징을 지나치게 성리학의 일방적인 영향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딱 잘라서 말한다면 성리학이 조선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가 조선시대 성리학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하였다. 사회를 운영하는 데, 그리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충족시키는 데 성리학을 적극 활용하였고, 마침내 조선 고유의 특징을 가진 '조선성리학'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까지의 설명은 주객이 전도되었던 셈이다."(8-9)


1부 조선시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과 연구의 반성


"명치유신 이래 서구 배우기에 전력을 기울였던 일본은 그 과정에서 서구중심주의사관에 빠지게 되었다. 서구중심주의사관의 수용은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단계적인 발전을 밟아나갔다는 것으로 자위했고, 그 점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예외적 존재라 주장하며 과거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한국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 하였다. 일본의 중세는 서구의 중세와 같은 '봉건사회'였다는 것이 일본사의 세계사적 발전 단계 이행론의 핵심적 논거였다. 이에 따라 한국사의 정체성론의 핵심적 논거도 한국의 '봉건사회결여론'에 두어졌으니 20세기 초 후쿠다 도쿠조는 당시의 한국사회의 수준을 일본의 고대에 해당하는 후지와라 시대─AD 894년 이후 약 3세기에 걸친─비정하기까지 하였다. 즉, 서구중심주의사관 자체가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식민사관이라 할 수 있다."(27-8)


"자기 부정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 정체성론'에 맞서 등장한 '내재적 발전론'은 고대 노예제사회·중세 봉건제(농노제)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라는 '사회구성체에 입각한 서구 삼구분이 시대구분법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민족 내부의 역량으로 우리의 역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입증하려는 노력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은 조선 후기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맹아'를 입증하는 데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나 상공업의 발달이 제시되고, 실학은 근대 사상의 여러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치명적인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조선 후기 농민층의 양극 분해나 '경영형 부농'의 존재 입증과 같은 실증상의 문제도 제기되었지만, 설사 자본주의 맹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왜 우리는 싹만 틔운 채 자본주의를 개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는가 하는 의문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2)


"1960~70년대까지의 개설서들은 조선사회의 신분제가 유례없이 엄격하고 폐쇄적임을 단호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설은 시각뿐만 아니라 실증 면에서나 방법론 면에서도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실증 면에서 신분간의 차등에 대한 설명은 사실에 반하거나 사실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거나 관직을 독점한다는 양반의 특권 주장이다. 둘째, 방법 면에서 신분과 계급이나 계층 같은 집단 범주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모두를 같은 차원에서 다루는 결함을 갖고 있다. 계급으로 간주해야 할 양반을 신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나타난 모든 사회적인 구분이나 차별은 곧 신분적인 구분이나 차별로 간주하게 된다. 의미가 다른 '양인'과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든가, '평민'이나 '상인' 대신 아주 드물게 사용되던 '상민'을 조선시대 평민의 대표적 명칭으로 내세우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50-2)


"〈소수의 지배계급이 모든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독점한다〉는 명제 자체는 지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명제가 어느 시대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라는 데 있다. 고대든 중세든, 그리고 근대 이전이든 근대 이후이든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몰역사적인 인식을 초래하는 비역사적이 명제라는 점이다. 이 명제를 도식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신라의 진골·고려의 문벌·조선의 양반의 동질성만이 부각되고 이질성은 사상捨象된다. 신라의 골품귀족과 함께 고려의 문벌은 물론 조선의 양반마저 거리낌 없이 귀족으로 지칭되고, 시대에 따른 지배계급 간의 차이나 지배계급을 교체시킨 사회적 변화, 역사발전의 흐름은 묻히고 마는 것이다." "〈민중의 지위와 생활의 실질적 향상〉으로 발전이나 개혁의 의의를 검증하려는 것도 적절한 평가 기준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발전이나 개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세계 어느 지역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다."(58-9)


2부 조선시대의 신분·계급구조


"조선시대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천인에는 노비만 소속되었고 모든 비노비자非奴婢者는 양인으로 간주되었다." "양인에는 모든 비노비자가 포괄되었으므로 사대부·평민 할 것 없이 모두 양인 신분소유자였다. 통설에서 곧잘 백정白丁·무격巫覡·사당社堂·창기娼妓 등을 노비와 함께 천민 신분을 형성하는 부류로 설명했지만, 이들은 양·천 출신이 모두 섞여 있는 일종의 직업집단일 뿐 양인과 구분되는 독립된 신분 범주가 아니었다." "'사士'는 특정한 혈통이나 가문의 후예가 아니다. 사의 핵심이 되는 관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정치를 보필하기 위해 군주에 의해 인민 중에서 발탁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인민은 원초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서있으며, 그가 지닌 현능賢能으로 군주에게 발탁될 가능성을 지닌 자이다. 따라서 천인을 제외한 모든 인민 즉 양인에게는 자연히 동일한 신분적 자격과 권리·의무가 부여된다. (이하 '양인의 신분적 제일성齊一性'이라 지칭)"(69-70)


"천인은 본래 양인이었다가 천인으로 전락된 자로 상정되었다. 인민 중에 범죄로 말미암아 신민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자가 천인 즉 노비였다. 조선시대에 양인이 노비가 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반역에 연루된 경우이다. 반역을 저지른 반국가사범 당자는 처형되지만 가족들이 연좌되어 노비가 되는 것이다." "노비 중에는 애당초 범죄와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빈곤이나 부채로 인하여 노비가 된 자들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들을 원칙적으로 '압량위천壓良爲賤(양인을 억눌러서 천인으로 만듦)'의 희생자로 간주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노비 중의 비범죄자의 존재는 통상 체제 정당화를 위한 논리 체계에서 배제하였다. 모든 노비는 일단 범죄자(또는 그 후예)로 간주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차별도 그것으로 정당화하였다. 노비에 관한 사항이 법전 가운데 형전에 실린 것도 그들이 죄인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비는 '선량한 인민'인 '양인'과 구별되어 '천인'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71)


# 양천제론에 대한 비판적 주장 검토

1. 양천제는 노비제에 불과하다 → 양천제는 귀족과 같은 특권신분의 존재를 부인하고 노비 아닌 자를 하나로 묶어 보편적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2. 양천제는 국역동원체제에 불과하다 → 양천제는 의무체계가 아니라 권리체계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도 양인의 사환권(관직진출권)은 보장되었다.

3. 양천제는 조선 초기라는 과도기의 신분제에 불과하다 → 이 주장의 논거는 조선 후기 양반이 '면역의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반의 군역 면제를 규정한 법령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 번도 제정된 일이 없다.

4. 평민은 명목상의 부거권(과거응시권)만 가질 뿐이었으므로 양천제는 허구적인 제도에 불과하다 → 법적 권리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귀족사회)와 적어도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 그래서 제한적이나마 권리의식 발휘가 가능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5. '법제적 신분'으로서의 양인·천인 이외에 양반·중인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다. → 이른바 사회통념상의 '사회적 지위 내지 위신'을 가리키는 '사회적 신분'은 모호한 기준을 적용한 초시대적 구분이자, 양반을 하나의 신분으로 취급하는 기존의 통설을 답습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명칭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용어인 '양반'은 여말선초를 포함한 조선시대 전체의 지배계급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반면 사대부라는 명칭은 몇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 조선 전 시기를 걸쳐 일관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성격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명칭이다. 즉 그 핵심 성원인 관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시대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지식인·교양인의 의미를 잘 담고 있다. 비교사적 연구를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편리한 용어이다. 중국사의 경우에도 사대부계급·사대부시대가 논의되므로 양 지역의 지배계급을 비교하는 데도 유용하다. '사대부'라는 명칭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양반'보다 선호되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관직이 없는 자도 '양반'이라 칭한다 하여 그 호칭을 지탄한 반면, 〈천하에 아름답고 좋은 것이 사대부라는 이름이다.〉(『택리지』. 「사민총론」)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18-9)


"조선 초기에는 16세기 이후처럼 '양반'이나 '사족'은 사대부계급의 집단적 호칭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양반'을 비롯하여 사대부·사류士流·사류士類·의관衣冠·진신搢紳 등이 거의 모두 관원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양반과 사족은 관직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배계급을 범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관직을 가지지 않은 자라도 양반이나 사족으로 지칭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고, 관원의 부녀도 아예 '사족'이라 약칭되었다. 초기에 문무관원을 가리키던 양반과 사족은 다함께 사대부계급의 사람을 범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서로 혼용할 수 있는 동의어가 되었다. 양반이라는 사회계급이 확립되어 양반과 양반 아닌 자의 구분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자 사회적 호칭 전반에 변화가 일어났다. 관직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서인은 일반 사람을 가리키거나 서얼을 가리키게 되었다.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상인常人'도 의미가 바뀌어 양반 아닌 자를 범칭하는 용어로 종종 쓰이게 되었다."(131)


"16세기 이후에는 사대부로서의 자격을 관직의 관직의 취득 여부보다는 학식이나 덕망의 여부로 판정하려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선도한 것은 사림파였다. 성종 대에 대두한 사림파는 재야사족, 특히 재지사족의 정서와 이해를 대변하는 성리학 근본주의자이자 보수적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적인 정치적 물갈이를 시도하는 한편, 도덕성이나 품행을 위주로 한 평가 기준을 확립하려 애썼다. 관직의 고하나 유무 외에 도덕과 품행이라는 별도의 기준이 중시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대다수의 재야사족들도 자신들이 치자 계급에 속하는 자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사족이 관직을 차지할 수 없는 이상, 앞으로 무수히 배출된 관인의 자손들이 관직 없이도 자신의 존재이유와 긍지를 느끼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방안을 마련해야 했는데, 사림파가 이러한 방안까지도 분명하게 제공한 셈이었다. 결국 사림파는 재야사족의 정치적 선도자이자 계급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였다."(132)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계급의 대표 명칭으로는 여러 동의어 가운데 '평민'이 단연 좋다. 그 다음은 '평인'이다. '상인'·'상민'은 대표 명칭으로서 각기 문제가 있다. '평민'은 문자 그대로 '보통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상인'은 평민계급의 사람을 가리켜서도 곧잘 사용되었지만 '양반'(또는 '사족')과 대조되는 일체의 사람을 통칭해서도 사용되어 상인 안에는 평민말고도 서얼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일체의 비양반자가 포함될 수 있었다. '상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극히 드물게밖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양인'·'양민'은 평민과 동의어가 아닌 이의어라서 애당초 적합하지 않다. 양인은 본래 일체의 비노비자를 가리키는 법제적 용어로서 평민 이외의 사람들도 포함하므로 적절치 않다." "'양민'은 주로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회적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선량한 인민'임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잘 사용되는 용어여서 계급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139-41)


"조선시대 평민 가운데에는 적극적으로 사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그중에 사환에 성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평민의 가장 대종이 되는 사환로는 조선 전기에는 직업군사, 조선 후기에는 무과라 할 수 있다." "16세기 평민의 주된 입사로는 직업군사인 갑사·별시위였다. 갑사·별시위는 당시의 평민에게 아주 매력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과거나 이서를 통한 사환보다 손쉬웠을 뿐 아니라, 복무 후 '무예武藝' 취재를 거쳐 만호나 첨절제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호나 첨절제사는 군직軍職이 아닌 정식 무관으로서 확실한 양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갑사·별사위와 같은 직업군사를 없애는 대신, 복무 중의 군사에게 군직을 수여하거나 무관으로 발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꺼번에 많은 합격자를 뽑아 흔히 '만과萬科'라 불리었던 조선 후기의 무과에는 많은 수의 평민이 합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신出身'이라 자처했고 조정에서는 사대부로 대우했다."(155-7)


"종래의 4신분론에서는 양반-중인-상민과 함께 최하 신분으로 천민을 내세웠다. 천민을 구성하는 집단으로는 노비와 함께 광대·사당·창기·무격 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집단이 아니라 양·천이 모두 포함된 직업집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천민 '신분'이 아닐 뿐 아니라, 노비와 함께 천민이라는 '계급'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첫째, 그들은 계급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관계를 토대로 성립한 집단도 아니고 공통의 사회적 역할도 없다. 각기 직업이나 존재 양태가 매우 이질적이어서 그들 사이에 같은 계급이라는 정체성이나 연대감이 있을 수 없었다. 둘째, 조선시대에 그들을 노비와 함께 포괄하여 다른 계급이나 부류와 대조하는 사회적 구분 자체가 없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직업을 미천하게 보기는 했지만, 그들을 노비와 같은 위치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결국 조선시대의 최하 계급은 노비로만 구성된 단일한 계급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160-1)


"노비는 사대부와 지배-피지배, 착취-피착취의 대립관계를 가지지만 보호-피보호, 부양-피부양의 의존관계도 가지고 있다. 노비계급의 주류는 사노비였다. 조선시대의 계급구조는 평민과 노비가 피지배계급을 형성한 상태에서 사대부-평민, 사대부-노비라는 두 관계가 병립하고 있는 형태이다. 평민이 국가의 기본 토대였다면 노비는 사대부의 기본 토대였고, 평민의 일부인 소작농이 사대부의 부차적 토대였다면 노비의 일부인 공노비가 국가의 부차적 토대였다." "범죄인이라는 노비 차별의 정당화 논리는 공노비에게나 해당되지 사노비에게는 거의 해당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자손손 노비의 신분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죄를 줄 때 처자는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죄인불노'의 유교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노비제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노-주관계가 상하·존비라는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바탕이며(『인조실록』 4년 11월 22일) 노비제로 말미암아 조선이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고 강변했다."(166-7)


# 조선시대 노비와 노예·농노와의 차이점

1. 매매 : 노비의 매매는 노예와 달리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정부는 토지보다 노비의 매매에 더 까다롭게 대처하여 공증과 증빙을 요구했다. 노비와 주인이 복종과 배려라는 상호 의리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매매를 억제하는 윤리적 조건이었다.

2. 재산권 : 노비의 재산은 법으로 보호되었다. 노비는 자신의 재산을 매매·상속·증여·양도할 수 있었고, 국가로부터 그 사실을 공증받을 수 있었다. 주인이 부당하게 노비의 재산권을 침탈할 가능성이 상존했지만 노비도 주인과 법적 다툼을 벌일 수 있었다.

3. 인권 : 노비는 생명과 신체에 대한 제3자의 침해로부터 양인과 똑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비록 주인의 사형권私刑權이 인정되었지만, 주인에게 생사여탈권을 내맡긴 노예와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노비는 자신의 배우자나 동거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4. 인격 : 노비도 다른 사회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내린 인민('천민天民')이요, 나라의 인민('국민國民')으로 지칭되었다. 노비도 법률행위의 주체로서, 주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고소·고발할 수 있었다. 재산 문제라면 주인과 권익을 다툴 수 있었다.


"노비는 엄연히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었다. 올랜도 패터슨이 노예상태는 자유의 부재라기보다는 '사회적 죽음'이라 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점에서도 노비는 노예와 달랐다." "조선사회의 노비는 다른 공동체원과 분리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적어도 평민과 어울려 살 수 있었다는 점도 노예와 달랐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세계사에서 노예도 농노도 아닌, 예속인의 독특한 한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 매매의 공인이라는 노예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물성보다 인성이 월등히 강하였다. 다음으로 같은 노비라도 자유인에 가까운 존재로부터 노예에 가까운 존재에 이르기까지 존재 양태의 편차가 아주 크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고 공동체 내부에서 충당되면서도 인구 구성의 수적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도 아주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조선시대 노비의 이러한 특징은 궁극적으로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진 사대부계급의 존재 양태에 대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184-5)


"단순하게 사회적 위계상의 등급으로만 본다면 전문인·서얼·향리는 그보다 상위계층인 양반과 그보다 하위계층인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등급적 계층으로서의 사회적 이동성을 갖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누대적으로 종사하는 국가 전문직이라는 가업, 서자라는 특수한 혈통상의 조건, 향역이라는 세습적인 특수 신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문인·서얼·향리를 '중간계층'이 아닌 '중간계급'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사회관계를 토대로 성립한 집단도 아니고 그들 사이에 공통된 사회적 역할도 없기 때문이다. 각 집단의 속성이 너무 이질적이며 그들 사이에 동일한 계급이라는 계급 정체성이나 연대감도 없다. 더구나 그들이 한 무리로 묶여 인식된 시기는 후기라는 조선시대의 한 시기에 불과하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조선 전시기에 존재한 사대부·평민·노비계급과 나란히 하나의 계급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하기에는 시기적인 불균형이 크기 때문이다."(186-7)


"양반계급 이전에도 문지에 대한 의식은 있었고, 중간계층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류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양반계급 성립 이전과 이후는 중간계층의 성격이나 양상이 크게 달랐다. 조선 초기에도 중앙의 이서나 직업군사는 그 사회적 위계가 표준적인 사대부와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특별히 중간계층으로 분류해서 인식하지 않았다." "'중인中人'이나 '중서中庶'와 같이 중간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는 조선 후기에 비로소 나타났다. 어느 시기에도 중간계층은 있기 마련인데 유독 조선 후기의 사람들이 중간계층에 주목하게 된 것은 후기에 와서 사회적 위계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진 탓이다. 그 배경으로는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양반계급의 확립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문자의 우열로 반·상을 가리고 문지로 위세를 떨치는 양반계급의 행태가 노골화되자, 문지와 같은 사회적 위계를 중시하는 의식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까지 파급된 것이다."(189)


# 중간집단별 특성

1. 전문인 : 양인 내의 독립된 신분집단이었던 서얼·향리와 달리 성취적 지위였으므로 적어도 전기까지는 다양한 성분의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16세기 말부터 전문업을 가업으로 하는 가계가 형성되면서 성취적 지위에서 귀속적 지위로 변모한다.

2. 서얼 : 집단성원 사이의 지위의 분화가 매우 크다. 사족의 길을 꿈꾸거나, 문·무과에 진출하려는 상층 지향적인 이들과 상업이나 전문직, 직업군사·서리로 진출하는 현실 수용적인 이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차별과 신분적 세습성이 완화되었다.

3. 향리 : 고려 이래로 향역을 세습해왔으며 조선에서도 정부의 특별 취급을 받았다. 한 지역에 대대로 정착해온 토착민으로서 지방 군현에서 권력과 지위가 자못 높았다. 이에 따라 수령과 지방사족·향리 사이에는 제휴와 견제의 관계가 작동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계급적 특성은 그들이 지닌 계급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에 계급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계급의 소속은 개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계급 간 사회이동의 장벽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대부는 양인들 사이에 신분이 나누어져서는 안 되지만 계급은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장한 '사'와 '농·공·상'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계급적 구분일 뿐 신분적 구분과는 무관하였다. 사·농·공·상이라는 생업은 자손에게 세전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당대에 생업의 전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지배신분과 피지배신분을 나누거나 사회이동의 법제적 장벽을 세우려 하지 않은 것은 근대 이전의 지배계급 가운데 사대부가 보여준 중요한 계급적 특성이다." "그러나 사대부는 하자 없는 양인의 사회이동 기회만 제도적으로 열어 놓았을 뿐 실제적으로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09-13)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뛰어난 혈통-가문의 위세이고, 둘째 커다란 부이며, 셋째 강력한 물리적 강제력이다." "그런데 사대부계급은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세 가지 요건 모두가 미약했다." "사대부에게 지배계급으로서의 기반이 미약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에 비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훨씬 큰 데서 유래한다. 사대부의 수적 비중이 높은 까닭은 항상 새로운 가문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유동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관원이 되는 데 성공한 집안은 물론 생원·진사 정도를 배출한 가문의 후예라도 당당히 사대부를 자처하는 까닭에 자칭·타칭의 사대부는 막대한 수에 이르게 된다. 사대부는 지배계급으로서의 개별적 기반이 미약한 반면 지배계급의 수는 방대한 편이어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과는 다른 지배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213-5)


# 사대부계급의 지배방식

1. 간접적 지배 : 국가·군주라는 통일 권력 또는 국가의 위임을 받은 지방관을 매개로 피지배계급을 다스린다. 그렇다고 국가·군주가 무턱대고 사대부의 역성을 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치'가 지배의 기본 방식이 된다.

2. 비물리적 지배 : 이념적으로 위민정치나 덕치를 표방한다. 학식·덕성 같은 지적·인격적 우위를 앞세우고 예절·의리 같은 덕목을 강조하여 복종과 순응을 유도한다. 과거제와 같은 공개경쟁 제도의 성공도 한 요인이었다.

3. 집단적 지배 : 15세기 후반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재지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림파가 등장한 이후에 사대부계급의 집단적 지배가 본 궤도에 올라섰다. 향촌사회의 핵심 지배기제였다.

4. 분할 지배 : 피지배계급을 공통의 이해관계나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운 양·천 두 개의 신분으로 분할·지배했다. 기본적으로 천인에게는 지배계급을 봉양하는 역할을, 양인에게는 국가를 지탱하는 역할을 나누어 맡겼다.


3부 조선시대의 의식구조: 이데올로기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맹자였다. 맹자에게 왕도王道란 참다운 왕이 행할 법도로서, 왕도정치란 인정仁政이요, 인정을 토대로 인민의 교화를 이루는 정치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정이나 왕도정치란 인민의 불행을 좌시하지 않고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민생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치이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은 민본주의 내지 위민사상이다." "인정이란 무엇인가. 맹자는 확실한 정의를 내렸다.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는 정치(不忍人之政)를 행〉하는 것이 인정이라는 것이다. 맹자에게 차마 할 수 없다는 것은 인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과 같은 차마 가해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불행에 빠진 인민을 팔을 걷어붙이고 구제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군주가 된 자의 참된 임무라는 것이다. 맹자의 왕도정치론은 여기서 그 빛을 발한다."(238-9, 242)


"백가쟁명이 벌어지던 당시 '농가農家'는 천하의 정의를 세우려는 자들은 남에게 기생하여 살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농사에 종사하여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맹자는 사회적 분업의 논리를 이용하여 농가의 주장을 반박했다. 농민이 공장工匠에게 자신이 생산한 곡식을 주고 그로부터 밥을 지어먹을 그릇이나 농사짓는 도구를 사오는 것은 농민이나 공장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농민이 정치까지 담당한다면 농사에 방해가 되고 정치인이 농사까지 지으면 정치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맹자는 농민이 안심하고 정치를 맡길 수 있는 '치인자治人者'의 자격요건을 갖춘 자를 '사士'라 상정했다. 사는 기본 생활을 보장할 만한 일정한 자산(恒産)이 없어도 오륜을 지킬 수 있는 변치 않는 마음(恒心)을 지닌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사가 정치의 주체가 되고 농과 같은 인민들은 객체가 되어, 사는 인민을 다스리고 인민은 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천하에 통용되는 대의라는 것이다."(246-8)


"'사'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의는 성리학에서 그대로 수용되었다. 다만 성리학에서는 치인자에 관련한 새로운 논의가 추가되었다. 바로 '현능'이라는 치인자 자질의 형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이다. 성리학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면서, 성선의 근거를 이理를 부여받은 데서 찾음으로써 인성에 대한 구체적인 형이상학적 설명을 전개했다." "이러한 설명에 내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사람은 똑같이 인의예지라는 '이'(본연지성)를 받고 태어나지만 사람이 탄생할 때 맑고 깨끗한 '기'를 받았는지, 무겁고 탁한 기를 받았는지 등의 차이(기질의 성)에 따라 인의예지를 발현하는 정도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논리는 사람들 사이에 태어날 때부터의 자질에 따라 군자와 소인, 치자와 피치자가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덕성과 재능에서 불평등한 존재라는 논리로 현실의 계급적 구분을 어느 정도 정당화는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255-7)


"그러나 주의할 것은 성리학이 출생에 의한 신분을 결코 정당화하거나 절대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질의 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 부여되는 기의 우연적인 상태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혈통에 따른 차이나 유전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의 인간의 차이란 기질의 성에 비롯된 것이어서 본연의 성을 잘 발현시키면 기질의 성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범상한 사람이라도 잘 수양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수한 기질의 성을 가져도 수양을 게을리 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성인도 배워서 이르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성리학은 후천적인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원칙에 입각한 사대부사회에서 성리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또한 이와 같이 치인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양인에게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 지배의 정당성은 더욱 합리화되고 공고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257-8)


"세습군주제를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리는 성리학에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성리학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군신 사이의 규범이 부자 사이의 규범과 대등함을 강조하고 이를 인간 사이의 윤리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적 진리의 차원인 '천리天理'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사대부는 군주가 정치를 잘못한다거나 자신들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여 군주와 정면으로 대립할 수 없었다. 군주가 왕도정치를 수행하지 않아도 군주를 폐할 수 없고 간언諫言하거나 군주를 떠나는 것(去君)으로 그쳐야 한다는 기존의 자세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을 조정에 발탁할 구심점이며 피지배계급에 대한 간접적 지배의 실행자로서 군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사대부계급의 이해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소극성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바로 군신의 의리는 천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최선의 방안은 훌륭한 군주를 만들기 위해 군주를 끊임없이 계도하는 것이었다."(258-9)


# 조선시대 사대부계급의 왕도정치론

1. 수기주의修己主義 : 선정을 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치인자의 수양이 선행되어야 한다(공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

2. 민생주의民生主義 : 민생 기반의 확충을 위한 제도·정책 마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맹자의 유위이치有爲而治).


"조선시대 공론이 지니는 결정적인 한계는 그것이 사회전체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사대부계급의 여론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공론의 참여 범위가 재야의 사대부까지 확대되었지만, 도리어 사대부의 계급적 이해를 한층 강하게 반영할 여지를 남겼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대부들이 대량 배출된 상황에서 재야의 사대부들이 공론의 이름으로 반상의 명분을 내세우며 평민들과 다른 대접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 그것이다. 사대부계급 내에서도 공론의 일치를 보기 어렵다는 것도 뚜렷한 한계다. 16세기 이후 성리학 근본주의 풍조가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자 사대부계급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붕당의 당론을 공론이라 주장하기 십상이었다. 상대 붕당 인사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과 고발이 일어나고 정쟁이 유발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대부계급 양산의 여파로 사대부 사이의 경쟁과 반목은 심화되고 성리학 근본주의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286-7)


4부 조선시대의 정치구조


"조선시대의 군주는 명분상·형식상 전제권을 가졌다. 이는 고려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국가조직 자체가 군주로 하여금 국가의 주요 행정기관을 직접 통할할 수 있도록 짜여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와 차이가 있었다. 조선의 군주는 재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정을 챙기기 용이하도록 편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군주가 모든 국가기관을 일일이 통할할 수는 없다. 자문-심의기관이나 언론-감찰기구 및 예우기관들은 그 수가 많지 않으므로 군주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행정기관은 그 수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채택된 방식은 군주가 행정의 중추기관인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직접 통할하고, 여타의 기관은 6조로 하여금 통할하도록 하는 군주-육조-속아문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중앙기관은 6조 어느 하나의 속아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승정원과 같은 비서기구가 독립하여 존재하기 되고 그 기능도 대폭 강화된 것은 크게 늘어난 군주의 과중한 업무를 돕기 위해서였다."(298-9)


"중앙집권체제의 두 번째 요소는 군주의 일원적 지방통치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지방분권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분권이 법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중앙권력에 도전할 만한 지방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군현의 행정은 철저히 중앙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주-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도의 장관으로 파견된 관찰사는 지방세력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였다. 군사지휘관으로는 2년 임기의 전임의 병마절도사(=병사兵使)와 수군절도사(=수사水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민정 담당의 관찰사로 하여금 해당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예겸例兼하게 하여 전임의 병사·수사를 견제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문반 우위의 원칙을 살렸다. 도 아래의 부·대도호부·주·도호부·군·현에는 5년 임기의 수령이 파견되어 민정과 군정을 함께 담당했다."(301-2)


"6조를 중심으로 국가업무가 수행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첫째, 고려의 6부는 상서성에 소속되어 있었던 반면, 조선의 6조는 다른 기관에 부속되지 않는 독립 기관이었다. 둘째, 고려시대에는 6부의 장관인 상서尙書가 정3품으로 재상 축에 끼지 못했으나, 조선시대 6조의 판서는 재상에 해당하는 정2품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셋째, 고려시대의 중앙행정기관들이 6부와 비교적 독립적으로 운영된 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모든 중앙행정기관들이 6조의 속아문으로 규정되고 6조의 직접적인 통할을 받았던 것 등이다." "각조를 살펴보면, 이조는 문반의 인사와 공훈자에 대한 예우가 주 업무였고, 호조는 호구관리와 재정·세무를 관장하였다. 예조는 외교·의례 및 시험·교육을 담당하였고, 병조는 무반의 인사와 국방·경비 업무를, 형조는 사법과 노비 업무를, 그리고 공조는 공역工役이나 물자의 생산·관리를 맡았다. 6조는 그 휘하에 각조의 업무와 연계되거나 특화 업무를 취급하는 속아문들을 두고 통할하였다."(320-1)


"비행정기관은 행정기관에 비해 숫자가 아주 적지만 위상이나 기능은 자못 컸다. 재상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최고의 기관인 의정부는 기본적으로 심의·자문기관에 해당한다." "대간으로 불리는 사헌부·사간원이 바로 언론-검찰기관이었다. 사헌부는 백관의 규찰을 담당하는 반면 사간원은 군주에 대한 간쟁을 맡도록 되어있다." "대간과 함께 삼사三司로 칭해졌던 홍문관은 본래 학문 진흥과 인재 양성을 위해 세워진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경연經筵을 주관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고 있었다. 홍문관이 언론기관이 된 것은 경연이 단순히 군신이 경사를 함께 공부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시정을 논하는 장소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군주에 대한 보고·건의·청원 등은 원칙적으로 모두 승정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승정원은 이를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별하는 권능까지 행사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승정원은 군주의 자문에 응하고 중요한 사안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다."(322-3)


"천명의 수임자라는 조선 군주의 위상에는 한 가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조선의 군주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은 제후諸候라는 또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책봉冊封체제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단 관료들만이 아니라 때로는 군주 역시 사대관계 즉 중국의 황제와 조선의 군주 사이의 책봉체제를 중국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외교상의 양보를 넘어서, 군신상호관계로서 성의를 다해서 그 의리를 지켜야 할 것으로 주장하기 일쑤였다." "책봉과 천명 사이의 괴리를 메울 방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은 중국의 '번국藩國' 즉 울타리 나라라는 논리였다. 울타리는 집안과 집밖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집안임을 강조할 수도 있고 집밖임을 강조할 수도 있다. 중국과의 문화적 동질성을 주장할 때는 조선은 중국과 같은 천하의 영역에 소속되고, 핏줄을 논할 때는 중국과 다른 외국이 된다. 조선의 군주는 조선 역내에서는 천명을 받은 유일한 주권자였다."(335-7)


"국교인 성리학은 군주의 자의적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군주의 결정에 대한 반대나 관원 탄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위민·민본정치의 배치 여부였다. 군주를 위해서 인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군주가 존재한다는 민본 이념은 관념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군주도 국교에 충실하고 국익을 추구하며 국법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민은 존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맹자 식의 사고는 조선시대 위정자들에게 철저히 각인되어 있었다." "제한군주적인 면모를 거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 원칙에 따른 법의 운용이다.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어하는 근본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를 소박하게 〈미리 제정된 법에 의거하여 국가가 통치한다는 원칙〉이라 규정한다면 조선시대의 법치주의 원칙은 확고부동했다고 할 수 있다."(340-1)


5부 조선시대의 경제구조


"조선사회의 소유제는 기본적으로 오늘날처럼 사유재산제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왕토사상이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했고 실제의 토지정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왕토사상은 군주의 토지소유권이나 토지국유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왕토사상의 존재 의의는 어디까지나 토지 공공성의 강조에 있었다." "토지국유론자들도 조선시대에 토지가 매매되고 상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 아래 모두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다〉라는 관념적 표방이 당시의 국법이었던 것으로 상정하고, 현실에서 나타난 매매·상속의 사유 행태는 법을 벗어난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하였다. 왕토사상이 토지국유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해명되어 있다. 왕토나 공전으로 지칭된 땅의 상당수는 엄연히 사유지로 존재했다. 자유롭게 매매·상속되고 있었고 공증제도까지 운용하며 국가가 법으로 보장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382-3)


"그렇다면 왕토사상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왕토사상은 군주나 위정자가 지향하는 이념이 아니라, 개혁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활용 도구였다. 농민에게 토지를 고루 나누어 주고자 할 때 국가의 모든 토지가 왕토임을 내세움으로써 사유지 타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정전제를 중시하는 민생주의 왕도정치론은 왕도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개혁사상가는 토지개혁의 주체를 군주 또는 국가에 설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군주를 개혁의 주체로 설정하고 군주의 권력을 빌어서야 토지개혁을 정당화하고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은 소유권과 공공성은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유권의 보호 그 자체도 공공성을 가질 수 있다. 농지에 대한 사유권 보호는 일차적으로 지주인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작 농민의 토지소유권도 보호하기 때문이다."(386-7)


"왕토사상이 내포한 토지의 공공성은 특히 비농지 정책에서 명료히 드러난다. 농지에는 사유권을 철저히 보장한 반면 비농지는 개인의 사유를 허락하지 않고 만인에게 개방하여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비농지란 농지 외에 자연의 자원을 채취하거나 농림수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산림천택山林川澤'이라 통칭되었다. 여기에는 산지·황무지·개펄 등 토지만이 아니라 내·못·강·해안까지도 포괄되었다. 국가는 산림천택에 대한 사유권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산림천택은 굳이 소유자를 따지자면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사용하는 곳 외에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이었으므로 국가의 소유지라기보다는 무주지 또는 국가가 관리·처분권을 갖고 있는 토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산림천택의 사적 이용을 허락하는 경우는 농지로 개간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비농지는 개간한 사람에게 국가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그 소유권을 내주었다."(392-3)


"조선시대에 국가가 자유로운 산림천택 이용권을 억제한 대표적인 부문은 광물 채취의 경우였다. 종래 민간의 광물 채취 금지는 국가의 광업 독점경영과 상공업의 억압책과 관련되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의할 점이 있다. 하나는 다른 자연물의 채취처럼 광물 역시 몇몇 종류를 빼고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고 보이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광물 채취의 금지가 상공업의 억압책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적인 채굴을 막고 국가가 독점적으로 이용하려 한 대표적 광물은 금·은·옥과 같은 보물이었다." "같은 광물이라도 철이나 구리의 경우는 보물과 달랐다. 정도전은 금·은·주옥과 달리 철이나 구리는 생활용구나 농기구로 쓰인다는 점을 강조하여 철 생산지에서 민정을 동원해서 철을 생산하면서도 민간의 제련에 과세하지 않았던 고려의 정책을 지지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도 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되 민간의 제련에 대해서는 수세하였다."(396-7)


"토지소유권의 일정한 제한, 즉 간혹 농지의 소유권을 실질적 이용과 결부시키는 조선시대의 관행을 사회적 미발달과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다분히 서구중심적 선입견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농지에 대한 소유권 정책은 〈정당한 소유라면 적극적으로 보호한다〉로 간추릴 수 있다. '정당한 소유'란 무엇인가. 농지 취득의 적법성이 전제 조건이 된다. 매매나 상속, 그리고 무주지의 개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소유를 위한 소유, 공공성에 위배되는 소유가 아닐 것이 요구되었다. 소유의 목적에 합당한 소유 즉 이용을 위한 소유가 그것이다. 이용은 반드시 직접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대부는 수기치인에 전념하기 위해 경작에는 타인의 노동력을 비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소유 자체를 위해 소유하는 것을 넘어서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농지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여 '진지리'를 구현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았다."(405-6)


# 진지리盡地利 : 땅이 제공하는 이익을 모두 거두자는 정책 목표


"조선시대의 재정 운영 원칙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 국가재정 운영의 대원칙은 절검의 원칙과 고정의 원칙이다. 절약과 검소에 최대 역점을 두는 것이다. '손상익하損上益下'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苛政猛於虎)'의 정신에서 온다. 왕도정치를 부르짖는 정부가 과중한 수취로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중한 수취를 막기 위해서 관원들은 군주의 절검을 부단히 강조했다. 군주 스스로도 자신의 사유재산을 포기하거나 공납물을 감축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여주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절검의 원칙은 재정을 고정불변하게 유지하자는 두 번째 원칙으로 이어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늘 재정 부족을 느끼는 것이 항례이다. 재정을 고정시키는 것은 바로 수취나 소비를 억제하여 절검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수취할 양을 고정시켜 놓고 수입의 한도 내에서만 지출한다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원칙은 바로 재정 고정의 원칙에서 파생된 원칙이다."(412-3)


# 손상익하損上益下 : 윗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나온 것으로 아랫사람에게 이롭게 함


# 부세의 종류(조租·용庸·조調)

1. 조세 : 농지에 부과되는 세금(조租 또는 전조田租), 수조권收租權자가 경작자에게 받은 '조' 중의 일부를 내는 세금(세稅 또는 전세田稅)을 합친 것

2. 공납 : 지역 단위로 왕에게 봉헌하는 토산물(공물), 각 도의 지방관들(관찰사와 병·수사)이 개인 자격으로 왕에게 봉헌하는 물품인 진상을 합친 것

3. 요역 : 관아·성곽 구축과 도로 건설 같은 공공시설 축조, 관원들을 영접하고 환송하는 '영송迎送'과 뒷바라지하는 '지대支待'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4. 잡세 : 농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부세


6부 종합과 전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종래 적지 않은 대동법 관련 연구들은 이 법의 상업적 효과에 관심을 집중했다. 즉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대동법을 검토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전했고, 그것이 이전 시기와 대비되는 사회 변화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그런 경향은 대동법과 관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대동법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이 당시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키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동법 자체는 국가재정과 민생 안정, 국가 운영의 관점에서 논의되고 집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로 검토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동법을 상업의 범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대동법 실시에 따른 결과보다는 오히려 그 원인과 추진 과정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정치적으로 대동법과 같은 거대한 재정개혁을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들이 무엇이었는가에 주목했다."(24-5)


제1부 대동법의 계보


"조선 초기의 조租·용庸·조調 체제는 왕조의 지속과 함께 천천히 변했다. 가장 핵심적 현상은 정부 수입에서 전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줄고, 공물(진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장기간의 변화였기에 그 현상이 금방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추세는 명백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주들의 지속적 저항이었다. 양반이 곧 지주는 아니었지만 지주들이 속한 가장 큰 사회계층은 역시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이었다. 그들의 저항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균등과세를 위한 장치를 갖춘 쪽에서의 정부수입이 줄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의 수입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는 정부의 수취가 전체적으로 균등과세의 원칙에서 이탈해갔던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공물변통貢物變通, 즉 공물 수취의 방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의 배경이다. 그 목소리는 16세기 초부터 등장했지만, 그 문제가 집중적이고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42-3)


1장 관행이 변하기 시작하다


"조선 초 공물의 분정分定, 즉 각 고을에 공물을 얼마나 부과할 것인가에 관한 규정은 불확실했다. 점차 요역이 그러했듯이 공물도 역민식役民式으로 규정되어 8결 단위로 순환조발循環調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거두어졌다." "공정한 수취라면 8결씩 나뉜 단위 토지 안에서 고르게 돌아가며 공물이 부과되어야 했다.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토지 소유자의 위세와 무관하게 8결을 단위로 하여 순서대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선 세력 있는 측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토지는 공물의 부과 대상에서 빠졌다. 누락된 공물의 몫은 다른 사람들 소유의 전결에 더해졌다. 그뿐 아니라 공물의 부과 대상이 되는 전결 안에서조차 그 부담이 고르게 나눠지지 않았다. 권세가의 토지에는 공물 부담이 면제되거나, 적게 부과되었다. 역시 그들이 부담해야 할 공물은 8결 안의 다른 토지에 전가되었다."(46-8)


"각관에 공물의 분정이 고르게 되려면 반드시 각관의 전결 규모에 비례해야 한다. 전결 규모야말로 각관이 공물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 때 각 고을 전결 규모의 상대적 차이는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고을의 크기에 관계없이, 공물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작은 고을이 큰 고을에 비해 단위전결당 부담이 무거워지고, 윤회의 횟수도 늘어났다." "이후원은 인조 말에서 효종대(1649~1659)에 활약한 고위 재정관료였다. 그에 따르면, 인조 말년쯤에는 공물가를 '별도로 거두는 곳'이 거의 없었다. 대신, 각 고을이 1년에 바치는 전체 공물가를 〈아울러(井)〉 마련하고, 그것을 '대동'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개별 공물을 특정한 8결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총 공물가를 고을 전체의 전결에 분할헤서 함께 거둔다는 뜻이다. 여기서 '대동'은 이전까지의 윤회분정을 대체하는 개념이다. 대동이라는 말 자체가 공물의 수취 방식이라는 측면이 있다."(49-50)


"공물작미貢物作米, 즉 공물을 현물이 아닌 그 값에 해당하는 미·포로 바꾸어 내는 것은 이미 조선 전기의 어느 시점부터 일반화된 일이었다. 공물작미의 진정한 사회적 의미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중앙정부가 현물이 아닌 미·포를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적 형태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뜻한다. 중앙정부의 이런 결정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이런 결정 자체가 공물 수취 과정에서 자행된 점퇴點退를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미 공물의 납부 방식이 현물납이 아니었기에, 점퇴는 그것의 최초 설립 취지인 공물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품질 검사 과정이 아니라, 공물을 받는 측이 높은 방납가를 실현하기 위한 빌미였을 뿐이다. 점퇴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부가 미·포를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 형태로 인정하고, 그것을 법으로 규정해야 했다. 즉 '작미作米'를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품의 종류와 질이 단일화되면 점퇴의 근거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55)


# 점퇴點退 : 각관이 납부한 공물에 대해 경각사가 그 품질을 검사해서 퇴자를 놓고 받지 않는 것


2장 대동법의 원형이 만들어지다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 논의는 인조 즉위 직후 시작되어, 이 법을 제안했던 이원익이 법의 폐지를 요청하면서 인조 3년 2월 7일 종결되었다. 만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하지만 삼도대동법은 본격적이며 전국적인 곡물변통의 첫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길게 이어지는 대동법 논의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 "인조는 대동법의 취지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 법이 흉년에 제대로 작동하여 효과를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바로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조익이다." "조익은 대동법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실시 가능한 정책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당시 경작지의 평균 곡물 생산량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해도 전결에 부과되는 전조田租·대동미大同米·삼수미三手米의 총액은 소출의 1/10에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대동법이 백성들의 담세 능력 범위 안에 있음을 뜻했다. 또 그는 각종 반론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하나하나 반박했다."(63, 73-4)


# 대동법에 반대하는 주장에 대한 조익의 반론

1. 일시에 결당 8두를 거두면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여러 번 거두면 그때마다 발생하는 부대비용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양을 내야 한다.

2. 부자들은 내야 할 쌀이 많아서 일시에 내기 어렵다. → 가난하고 일손 없는 사람들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3. 방납의 폐단은 오래된 것이어서 갑자기 꺾을 수 없다. → 궁핍한 백성들과 국가재정을 고려하면 호세가와 방납자들의 사욕을 제어하는 것이 마땅하다.

4. 쌀을 한 곳에 쌓아놓으면 화재 위험이 있다. → 쌀창고는 집들과 달리 붙어 있지 않아 오히려 화재 위험이 적으며, 진짜 걱정은 그런 축적이 없는 것이다.

5. 서울까지 쌀을 운반할 때 배가 침몰할 우려가 있다. → 기강을 세우고, 과적을 금지하고, 겨울 전에는 태안 이북의, 봄에는 태안 이남의 곡식을 운반한다.


"경대동 또는 반대동半大同이란 각 고을이 경각사에 내는 공물만 미·포로 거두고, 각관 자체의 수요는 이전의 방식대로 수취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당시에 경대동으로 백성들로부터 걷기로 한 양은 매해 결당 9두였다. 경대동 안은 얼핏 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흉년에 공·역가 전부를 한 번에 걷거나,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옮기는 것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삼도대동청이 말했듯이, 민결民結에 부과되는 역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공물이었고, 현상적으로 공납의 폐단은 방납으로 나타났다. 경대동을 통해 경각사의 방납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백성들이 혜택을 입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납 폐단을 다양한 차원의 불균등 문제로 보면, 그것의 본질은 방납으로 볼 때와는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불균등의 틀로 보면 공납의 폐단은 일부 방납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이때 경대동은 전혀 공납 폐단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89-90)


# 방납防納 : 조선 시대 상인이나 아전이 농민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는 것. 관리와 결탁한 상인들은 공물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백성들이 정상적으로 납부할 수 있는 것마저 막아 가며 방납의 대가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징수하였다.


"삼도대동청이 경대동의 내용을 보완해나갔던 것과는 별도로, 경대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주인, 지방 큰 고을들의 호강층, 경각사의 하급 실무 담당 직원, 각관 수령 들 중에는 대동법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경대동의 실패로 대동법 자체에 대한 정책 신뢰성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조익이 말했듯이 대동법에 대한 지역의 여론은 지역 호강들의 세력에 달린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과 작은 고을들은 원래의 대동법 규정대로라면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동법을 중앙에서 정한 규정대로 엄격히 집행했을 때만 가능했다. 삼도대동법이 경대동으로 혼란스럽게 진행될 때, 가난한 백성들과 작은 고을들은 오히려 기존의 납부액에 경대동 몫의 첩징이나 가징이 덧붙여진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생각은 토호들과 큰 고을들에 의해서 가려지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97-8)


# 사주인私主人 : 중앙의 각사에 소속되어 외방 각 고을의 공리貢吏나 번상番上 군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세공물을 일시 보관하며 그것의 방납을 맡아 하던 특수 상인


"인조 원년 가을에 실시된 대동법은 시행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법 시행과 동시에 극심한 흉년까지 겹쳤다. 흉년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중국에서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극심한 흉년은 공물가의 가을 수취분인 결당 쌀 8두의 수취를 어렵게 했다. 그러자 정부는 8두 중에서 서울에서의 수요를 위한 몫으로 절반만 거두고, 각관의 수요는 종전의 관행을 따르도록 했다. 가뭄과 그로 인한 쌀값 상승 때문에 백성들에게 시혜적으로 내려진 조치였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대동법을 혼란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삼도대동법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실로 강력했다. 탐관오리, 호강품관 등이 이들 세력의 중심이었다. 인조 초 삼도대동법을 좌초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세력은 지방의 호강품관들이었다." "대동법의 불편함에 대한 여론이 확산되고, 중앙정부의 정책적 확신이 약해지자, 삼도대동법은 인조 원년 가을부터 인조 2년 가을까지만 유지되고 단명하고 말았다."(106-7)


"그러나 정책 실패의 진정한 원인은 대동법을 추진했던 세력의 주체적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시기 대동법 실패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양입위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양입위출量入爲出이란 백성들로부터 미리 정해진 몫만큼만 거두고, 어떤 일이 있어도 거둔 것 안에서 지출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이 법의 추진 주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정책담당자들은 경대동과 대동법의 정책적 함의의 차이를 명백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경대동으로는 양입위출을 핵심으로 하는 대동법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결국 삼도대동청의 실패는 경대동의 실패였다. 이렇듯 정책담당자들이 공납 문제를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흉년에 대처하면서 정책적으로 양보해도 좋을 내용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 당시에는 사실상 대동법의 추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108)


3장 두 가지 공물변통 방법론이 성장하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사이 10년간, 조정에서 공물변통과 대동법에 관련된 논의는 두 가지 경로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임진왜란과 그 후의 계속된 혼란으로 빚어진 양안과 공안의 손상·왜곡을 원상태로 회복시키자는 주장이다. 양안과 공안의 왜곡은 조정이 전쟁 물자를 긴급하게 마련하는 과정에서 지역별 전결의 분포를 무시하고 공물을 부과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의 경로는 정묘호란 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한층 더 높아지자, 군비 마련 방법 중 하나로 공물변통을 검토한 것이다." "병자호란에서 비록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그 후 군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공물변통을 둘러싸고 상충했던 한쪽 힘이 사라진 것을 뜻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공물변통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공물변통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때 조성된 논의는 결국 효종대의 호서대동법으로 귀결된다."(113-4)


# 양안量案 : 일종의 토지대장, 공안貢案 : 공물의 세입 장부, 어공御供 : 조선시대 왕과 왕실 구성원에게 의식주 관련 물건을 바치는 일 또는 그 물건, 제향祭享 : 나라에서 지내는 각종 제사 의식


"호조 판서 김기종에 따르면,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면서도 국가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전量田뿐이었다. 지역별로 전품田品을 고르게 하려면, 전품이 낮게 평가된 지역의 토지 등급을 끌어올리거나, 높게 평가된 지역의 토지 등급을 낮추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조정은 후자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전자의 방법은 백성들에게 더 많은 전세와 공물 부담을 지우는 것을 뜻했기에 민의 불만과 소요을 불러올 것이 불 보듯 확실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방법을 쓰면 자연히 국가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민의 저항과 국가수입 저하를 모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기존 결수의 등급 인하에 따라 줄어드는 전결수를 양전을 통해 새로 보충하는 방법뿐이었다. 양전을 하면 신기결新起結(새로 개간된 땅)과 은결隱結(숨겨져 있는 땅)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으로 줄어드는 총 전결수를 그전처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조 12년 말에서 13년 초에 걸쳐 삼남에서 양전이 실시되었다."(119)


"병자호란 이전 공물변통 논의의 두 가지 맥락은 상충했다. 하나는 백성들의 역 부담을 줄이고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서 재원을 마련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련되기 어려웠다. 병자호란 후에 조정에서 공물변통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또다시 시간이 걸렸다." "병자호란 직후 조정의 공물변통 논의에는 세 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는 어떠한 공물변통에도 반대하는 입장이고, 둘째는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입장이며, 셋째는 절용을 위주로 공안을 개정하자는 입장이었다. 첫째 입장은 병자호란 이후의 국내외적 불확실성에 기초한 것으로, 인조 자신의 생각이자 조정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둘째 입장은 지지자들이 꾸준히 늘면서, 인조 22년 이후에는 가장 이상적인 공물변통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는 공물변통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으로서, 여전히 다수 논자들의 견해를 대표했다. 군자 마련을 위한 주장은 그 급박한 필요가 사라지자, 논의 의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136-8)


"청은 병자호란 후 조선에 세공歲貢(매년 바쳐야 하는 조공물)을 요구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정묘호란도 청이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발생한 자신들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무역이 중단되어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여기에 더해 당시 만주 지역을 강타한 기근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자 명나라를 대신하여 물자를 공급해줄 수 있는 대안으로써 조선이 지니는 경제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인조 21, 22년에는 전염병으로, 23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사간원 헌납에 재직하던 조익의 아들 조복양이 국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현실 상황은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상소를 계기로 재생청이 만들어졌고, 이 재생청의 경험이 몇 년 후 대동법 성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145-9)


"인조 23년 9월에 성립된 재생청 활동의 이론적 틀은 이이의 공물변통론이었다. 이이의 공물변통론은 재생청 성립 이전까지 수없이 등장했던 여러 공물변통론들의 원형이었다. 지방재정을 배제한 경대동의 실시, 사주인의 배제와 관에 의한 직접적 공물 운송 및 경각사 납부, 공물가 인하의 세 가지가 그 이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재생청은 임시기관이었으므로, 그 경험을 국가정책의 수준에서 일반화시킬 것이 요청되었다. 재생청의 정책 결과가 대단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또 흉년으로 인해 각 고을로부터 공물 수취가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호조가 각 고을 대신 경각사에 공물가를 지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 차원의 진휼 실시와 공물 운용이 서로 접근했다. 공물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고, 진휼을 위한 기구가 선혜청 안에 흡수되어 상설화되었다. 이 모두가 대동법 실시라는 종착점에 이르는 각각의 이정표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167-8)


제2부 대동법의 정치


4장 효종 시대: 드디어 대동법이 성립되다


"효종 원년, 청나라 사신이 거듭해서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 때문에 산림 인사들과 김상헌을 포함한 대청 강경론자들이 조정에서 일제히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법의 실시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동법에 대해서 소극적이거나 반대에 가까운 의견을 표명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나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대청 강경론자들의 대부분은 당시 조선에서 재정개혁보다 정치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각론보다는 총론에, 실무보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국내적으로는 정치개혁을, 대외적으로는 대청 강경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그런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의 개인적 삶의 경험과 학문적 경향성이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효종 초 조선과 청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그들 중 다수가 조정을 떠나야 했던 상황은 호서대동법의 성립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다."(180-3)


"호서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김육의 역할은 이 법의 반대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대동법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원두표는 이 당시 몇 남지 않은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었다. 그런 원두표와 역시 정사공신이자 호서대동법의 실무 책임자인 이시방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시방이 호서대동법 추진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육의 정치적 보호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김육만 했던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의 호서대동법 논의도 그가 홀로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나아가 대동법에 대한 이해에서도 김육이 가장 정통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서대동법 실시가 결정된 후, 조정에서 그 진행을 정치적으로 보호했던 것은 김육 혼자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홍욱은 본래 공안개정론자였지만, 대동법을 실시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자 흔들리지 않는 대동법 지지자로 바뀌었다. 그가 충청 감사에 임명된 것도 김육이 힘쓴 결과였다."(200-5)


"효종 7년 8월, 전남 우수사가 수군을 조련하는 과정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 고을의 전선 13척과 병선·협선 등이 침몰 또는 파손되었고, 죽은 수졸이 1,000명이 넘었다. 호남에서 연속적으로 대동법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가 도달하고 큰 사고까지 겹치자, 김육은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했다. 대동법의 원래 이름이 선혜법宣惠法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동법은 국가가 실질적으로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효종 9년 9월,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한 김육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호남의 대동법 실시를 위해 적절한 인물을 감사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호남대동법이 중단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이유로 김육은 서필원을 호남 감사로 임명하도록 왕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마침내 효종 9년(1658) 말에 호남 연해 27개 고을의 대동법이 마련되고, 추등秋等의 대동미로 결당 7두를 걷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217, 223-4)


5장 현종 시대: 대동법이 튼튼히 뿌리내리다


"현종대(1659~1674)는 효종대로부터 공물변통의 의제들을 넘겨받았다. 그렇다고 현종대의 논의와 대동법 실시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조정에서 호남 산군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된 것이 두 번이나 번복되었다가 세 번째 시도에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현종대는 즉위년부터 연속해서 큰 흉년이 이어졌고, 현종 11년(1670)과 12년에는 그 유명한 '경신대기근'을 겪었다. 그 사이에도 전염병과 우역牛疫이 끊이지 않았다. 흉년에는 각종 개혁정책이 미뤄지는 것이 조선의 관행이었다." "조정의 상황인식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호남 산군의 대동법이 폐지되자 곧바로 방납이 되살아났다. 현종 7년 후반 전라도 암행어사 신명규는, 조정에서 전라도대동법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의 상황과는 반대의 소식을 전해왔다. 즉 큰 고을의 잘 사는 집들은 대동법을 혁파한 것을 편리하게 여기지만, 작은 고을의 가난한 집들은 모두 이 법을 다시 시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35, 244)


"며칠 후 좌의정 홍명하는 호남 산군에서 당초 대동법을 혁파하기를 원했던 곳은 서너 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이 법의 혁파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인정人情이나 점퇴는 대동법을 실시할 때는 없었는데, 지금은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조정은 호남 산군지역에서 대동법을 다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현종 7년에 충청도와 전라도 전체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호남 산군의 대동법 성립 과정을 살펴보면 공물변통에는 전결에 기초한 작미·작포의 방식, 즉 대동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을 거부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현실의 폐단들이 지체 없이 되살아났다. 또 대동법과 임토작공을 어중간하게 섞는 방식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대동법이 폐지되어도, 그에 따른 폐단이 곧 나타났기 때문에 대동법 실시 요구는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공납 문제의 제도적 해법은 대동법이 유일했던 것이다."(245-6)


# 임토작공任土作貢 : 각 고을에서 비치는 공물은 산지를 따라야 하며, 현물로 납부해야 한다는 원칙, 인정人情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뇌물과 수수료를 합한 개념


"경기선혜법(1608)은 선조 36년(1603)의 양전을 기초로 했다. 경기선혜법이나 그것이 기초한 양안은 이미 60년이 지난 것이어서 현종대에 이르러 정비가 불가피했다. 경기 각관의 관수는 공식적으로 크게 축소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첩징과 가징을 통해 과도하게 늘어난 상태였다." "각관의 자체 수요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과외로 추가 징수한 항목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추가로 거두는 공물은 대부분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는 어공·진상·칙수 같은 것들이었다. 또 광해군에서 효종 때까지 경기는 특히 다른 도보다 외교·군사적 측면에서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환경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호서대동법이 성립된 직후부터 경기선혜법의 재정립을 위한 양전 요구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종 4년 경기 양전이 완결되었고, 그 결과 정부는 효종 말에 비해서 세 배 가까운 실결을 확보했다. 이것을 기초로, 다음 해에 경기선혜법은 호서대동법의 틀에 맞춰 재정립되었다."(279-80)


"대동법이 도별로 실시됨에 따라 마지막으로 제기된 문제는 불균등한 도별 결당 공물가를 균일하게 맞추는 것이었다. 대동법의 근본 취지가 균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별 공물가 차이를 균일화하는 것은 공물변통의 긴 여정에서 마지막 작업에 해당했다. 결당 12두로 조정된 최초의 도는 경기였다. 조정에서의 논의 과정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경기에서 결당 12두로 공물가가 정해지는 과정은 비교적 순탄했다. 우선 기존보다 공물가를 더 걷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 새로 양전을 해서 종전보다 세 배 가까운 실결을 확보했기 때문에 결당 수취액을 줄여서 받아도 재정이 줄어들지 않으리라고 예측되었다." "호남 연해 각관의 공물가는 처음에 결당 13두로 정해졌지만, 현종 초반에 매년 흉년이 들었고, 중앙정부는 그때마다 공물가를 결당 2, 3두씩 줄여서 받았다. 마침내 현종 7년 봄 호남 연해 각관의 공물가는 전보다 결당 1두가 줄어든 12두로 정해졌다."(273-4)


"경신대기근(1670~1671)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다른 지역이라고 이 재앙에서 무사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호서지역은 대동법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을 겪었다. 그에 따라 이 지역의 결당 공물가를 올려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호서는 다른 곳보다 결당 공물가가 낮아, 여기서 공물가를 지급받는 경각사는 다른 경각사에서 경비를 계속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정책 논의 과정이나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원칙에 비춰보면, 호서의 결당 공물가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어야 했다. 경기나 호남처럼 공물가를 낮추는 것도 아니고, 새로 양전을 해서 과세 대상인 실결이 증가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서의 공물가 인상은 실제로 전혀 소란스럽거나 어렵지 않게 시행되었다. 대동법 실시로 공물가가 법 실시 이전에 비해 대략 1/5~1/6 정도로 줄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동법은 경기와 양호에 실시되고, 그 수취액까지 결당 12두로 맞춰졌다."(275-6)


제3부 대동법의 해부


6장 대동법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대동법의 실행 규정을 담고 있는 것이 대동절목大同節目 또는 대동사목大同事目이다. 종래에는 대동미를 막연히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거나, 서울로 올려 보내는 몫인 상납분과 지방 각관에 남겨두기로 한 몫인 각관 유치분으로 나누어 세부 항목들을 설명했다. 대동미를 선혜청이 주관하는 상납미와 영營·읍邑이 주관하는 유치미의 틀로 나누는 것은 대동미를 누가 운용하는가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대동미 분류 방식은 이제까지의 논지와 거리가 있다. 특히 상공과 별공의 분류 방식은 대동법의 기본 의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공이든 별공이든, 이것은 모두 중앙의 수요를 중심으로 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류 방식에 따른다면,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각관의 수요를 이전의 현물공납제처럼 계속 국가재정체계의 밖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대동법의 큰 의의 중 하나는 각관 수요를 국가재정의 틀 안으로 통합시켰다는 점이다."(288-9)


"대동사목에 따르면, 백성들에게 걷은 대동미(포)는 크게 세 부분─중앙 경각사로 올라가는 것, 각관의 관수로 쓰이는 것, 예비비인 여미餘米─으로 나뉘어 처리된다. 여미는 불시에 일어나는 수요를 대비하는 데 쓰였다. 흉년이 들어 민에게 그 해의 대동미 납부를 면제해줄 때, 선혜청은 미리 비축한 여미로 경각사에 지급하게 했다." "17세기 중반에 적법하지는 않지만 각관에서 예비비 역할을 했던 것은 은결隱結이다. 은결이 수령의 사적 치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각관에서 공적 경비의 예비비로 쓰였던 것을 조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재정 및 민생과 직결된 문제를 계속 비공식적이고 변칙적 영역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 당시 은결은 연이은 전쟁 때문에 줄어들었던 전결이 전후에 회복되는 과정 중 양안의 등재에서 조직적으로 이탈되어 발생했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전정田政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각종 은결의 정리 역시 불가피했다."(293-5)


"조선시대 공물 수취에서 현물납이 언제 대부분 사라졌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시기를 아무리 늦춰 잡아도 임진왜란 이전에 현물납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현물납으로 인한 방납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주인을 거치지 않고는 각관이 공물로 바칠 현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방납 금지의 법령은 오히려 민이 부담해야 할 방납가를 인상시킬 뿐이었다. 민은 공·역가로 대개 미·포만을 납부하고, 대부분의 공물은 사주인을 통해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경각사 입장에서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많은 종류의 물품들을 자체적으로 구매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경각사의 운영에는 많은 운영비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들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런 운영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도 역시 사주인이었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후가 되면 사주인에 대한 인식은 비판의 대상에서 현실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환되었다."(321)


"대동법은 기존 현물납의 극심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위험의 재발을 영구히 종식시킨 법은 아니었다. 민에게서 수취하는 모든 공물과 노동력 동원이 대동법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공물과 노동력 동원은 대동법 이전처럼 호역戶役으로 조달되었다. 또 모든 물품들이 공물주인을 통해 서울에서 마련된 것도 아니다. 일부는 여전히 각관이 직접 납부 책임을 졌다. 그에 따라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방납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대동법은 중앙정부가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관리해야만 했던 법이다." "대동사목의 근본 취지는 단순히 공물 조달에 따른 폐단의 방지나 안정적인 공물 확보가 아니라, 공물의 수취를 어떻게 공정하게 민결 위에 정립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대동법은 종래에 대가 없이 수취하던 각종 항목들을 대동미로 흡수함으로써, 이 항목들에 대한 중앙정부 차원의 관리 근거와 기준을 마련했다."(327)


7장 조선시대 경세론의 핵심을 대동법에서 보다


"17세기의 여러 변통론이 기반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 틀을 제시한 것은 이이李珥였다. 17세기의 공물변통론들은 이이가 제시한 해법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유형원은 국내외 요인들로 인한 오랫동안의 국정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제도개혁의 기초를 토지에서 찾았다. 이 당시 수많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작성한 시무책의 제1조를 장식했던 내용은 '군주의 바르게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유형원이 제도개혁의 기초를 토지에 둔 것은 이 시기 지식인과 관료들의 움직일 수 없는 국가 통치의 제1원리를 상대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곧 유형원이 자기가 살던 사회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을 넘어, 그 사회 자체의 존립 근거를 예리하고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기존의 익숙한 주류적 담론이 만들어놓은 준거 틀을 넘어선 것이었으며, 유형원이 생각하는 개혁의 대상이 단순히 제도 운영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폐단들이 아닌, 제도 그 자체였음을 의미한다."(332-3)


"유형원은 공물의 부과 기준을 명확히 설명했다. 국가재정의 재건을 둘러싸고 대동법과 함께 제기된 대안들 중 하나는 호구 정비와 호패법의 실시였다. 유형원은 여기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인정人丁과 호구戶口를 토지의 종속변수로 생각했다." "유형원이 인정과 호로 수취제도의 기초를 삼은 것을 비판한 현실적인 이유는 당시 만연해 있는 인징과 족징 때문이었다. 인징·족징은 수많은 유망과 피역층避役層을 양산해냈으며, 이 시기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조租·용庸·조調 제도에서도 토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전조田租가 부과되지 않았다. 전조의 부과 대상이 토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과 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두 가지는 인정과 호에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인징·족징을 일으킨 제도적 원인이 인정을 기초로 운영되는 부세제도 자체에 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제도 자체의 뿌리에서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해법을 추적했던 것이다."(335-7)


"현물의 작미·작포를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임토작공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공물에 대한 당시의 상식적 믿음이었다." "대부분의 현물 공물들은 납부 과정에서 각 읍, 각 도, 경사京司를 거치다보니, 그 품질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어려웠다. 각 단계마다 공물의 품질을 확인하는 담당 관리가 그 품질에 일부러 트집을 잡지 않는다 해도, 장기간의 이동은 공물의 품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물이 전달되는 각 단계마다 다음 단계의 점퇴에 대비하기 위해서 원래 부과된 양보다 훨씬 많은 공물을 준비해야 했다. 공물의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와 여러 단계를 계속 거쳐 상급기관으로 올라가면서 점퇴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는 서로 결합하여 백성에 대한 첩징과 가징을 심화시켰다. 이것은 공물 수취를 담당하는 관리가 탐욕스럽고 부패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임토작공의 법규정 아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제도적 문제였다."(340-1)


"공물의 작미·작포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는 임토작공이 천자에 대한 제후의 봉헌奉獻이므로 시장에서 사서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임토작공은 경제적 논리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논리이며, 통치체제의 정체성과 관련되었다. 작미·작포는 단지 현실적 편의 때문에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유형원은 수취제도로서의 작미·작포 제도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구차하게 현실론에 기대지 않고 고전을 연구했다. 그는 전결세로서의 대동법이야말로 고법이며, 현재 고법이라고 불리는 임토작공은 오히려 고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형원이 보기에, 옛날 임토작공은 천자와 제후 사이의 예를 표현한 수단일 뿐 수취제도가 아니었다. 예물에 흠이 있어도 그것을 바친 제후가 책망을 받을 뿐, 점퇴로써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임토작공은 이름만 같을 뿐, 옛날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제도이다. 즉 이미 예가 아닌 수취제도에 불과한 무거운 부세인 것이다."(342-4)


"대동법의 핵심 내용으로, 공물을 부과하는 기준이 전결화된 것과 수취수단이 미·포로 바뀐 것을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양자를 대동법의 본질적 요소라고 볼 수는 없다. 양자는 이미 대동법이 성립되기 오래전부터 실제로 각 지방에 광범위하게 정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진정한 의미는 이 두 가지가 법으로 규정됨으로써 양입위출을 위한 객관적 지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대동법의 핵심은 위의 두 가지가 법적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전결세화 및 작미·작포화는 양입위출과 연결됨으로써 대동법의 진정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양입위출의 제도적 성립이야말로 대동법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대동법 실시론자들은 민에게서 공물가를 한 번 거둔 후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수취 액수의 고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반면 공안개정론은 공물수요자들의 자발적 절약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350-1)


에필로그


"종래 대동법의 변통론적 의의에 대해서는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에서 검토되었다. 이 학설은 17세기 전반의 변통론을 둘로 나누었다. 즉 정통 주자학과 수양론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며 부세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쪽과, 반주자학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소농적 입장을 옹호하며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이런 구분을 통해 전자는 후자보다 보수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진정한 개혁은 후자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공적 공간, 정책 논의의 장에서 제기되었던 것은 언제나 과세를 어떻게 민의 담세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실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나 과제는 불합리한 과세로 인한 피역避役·유망流亡과 그로 인한 담세층 감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였다. 사실 토지제도 개혁은 국가체제 자체가 붕괴되거나 정지된 상태에서 가능했다. 현존하는 체제 안에서 소유 문제를 둘러싼 토지제도 개혁 논의는 있을 수 없다."(398-9)


"대동법은 조선 건국 이래의 재정 원칙인 양입위출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입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된 현실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변통의 모습을 취했다. 대동법 실시론자들과 공안개정론자들이 양입위출을 이해하는 차이는 재정 차원을 넘어, 제도개혁 자체에 대한 입장으로 확장되었다. 공안개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행정적 엄벌주의로 대처했다. 이에 비해 대동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관료들의 도덕적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폐습이 빚어진 것이 '사私'에서 비롯되었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 당시에 문제의 해결을 제도의 관점에서 시도하려는 태도는 오래도록 잊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성리학적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조선 건국기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원칙이었다."(4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의 세계사 - 부와 권력을 향한 인류 문명의 투쟁
스티븐 솔로몬 지음, 주경철 외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문명 탄생의 필수 자원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해제이다. 물은 다른 분자를 포화, 용해, 융합할 수 있어 핵심적인 화학반응의 촉매작용을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가장 중요한 변화 요인이다. 작물과 나무 끝부분, 인간의 혈관 등에서 중력을 거슬러 영양분과 미네랄이라는 생명력을 위로 올리는 것도 물이다. 초기 생명체의 진화를 도와서 산소가 풍부한 지구의 대기 환경을 창조한 것도 물의 힘이었다. 얼면 밀도가 낮아지고 부피가 팽창하는 물의 이례적인 성질은 암석을 쪼개서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호수나 강의 표면을 얼음층으로 덮어 격리함으로써 그 아래의 수중 생물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한다. 온도가 오르는 동안 엄청난 양의 열을 흡수하는 예외적인 능력은 계절적인 표면 온도 상승을 완화하며, 그 결과 지구가 금성처럼 항상 수증기 넘치는 온실이 되거나 화성처럼 얼어붙은 사막이 되지 않게 해 준다. 물의 움직임은 지구의 피부층에 해당하는 지표면의 비옥한 토양층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재분배한다."(19-20)


"정말로 중요한 물의 특징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체 재생산이 가능한 핵심 자원이라는 점이다. 증발한 물은 염분이 제거되어 정화된 형태로 비가 되어 지구 전역에 내린다. 지구의 지속적인 물 순환 시스템 덕분에 자연적인 생태계가 회복되고 문명이 지속될 수 있다." "건조하거나 습하다는 기본 조건, 계절적인 강수량과 그에 대한 예측 가능성 패턴, 강물 흐름의 특징과 운항 가능한 거리 등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모든 지역의 핵심 요소들이다. 대양의 조류에 의한 열 분산 효과 혹은 대기 중의 온난한 증기층이 제공하는 열 보존 효과 때문에 지구는 적도부터 냉대까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 "변화하는 물 조건의 도전에 사회가 당대의 기술과 조직을 동원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곧 역사를 결정짓는 핵심 동력이다. 주도적인 문명이란 자연적인 물의 방해를 이겨내고, 이 필수불가결한 자원에 숨겨진 이익을 얻어 그것을 지렛대로 사용하는 데 성공한 문명이다."(20-1, 25)


"초기의 관개농업 문명들은 모두 범람을 일으키고 토사를 운반하는 큰 강 주변의 반건조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대개 강우 농경을 하기에는 비가 너무 적게 오는 곳이었다. 최초로 문명이 발전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산지의 농부들이 페르시아 만 입구 근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수메르 지방의 돌 없고 진흙땅인 범람원이나 늪지로 이주했다. 비가 적게 오고 치명적인 수인성 질병들이 창궐하는 험악한 말라리아 지방인 데다가 극심한 홍수와 가뭄이 맹위를 떨치는 곳으로 농부들이 이주해 가는 현상은 우리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 강들에는 모든 결점을 보상하고도 남는 두 가지 탁월한 자산이 있다. 하나는 연중 계속 대량으로 흘러오는 안정적인 물 공급이고, 다른 하나는 범람과 함께 경지로 밀려와서 쌓이는 충적토이다.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유지만 잘한다면 안정적인 물 공급과 충적토는 강우에 의존하는 산지의 농업에 비해 몇 배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조건이 된다."(31-2)


"농업이 부의 근원이던 시대 전체를 통해, 물이 풍부하고 관개를 하는 국가들과 물이 부족하고 인구가 희박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규모가 작은 강우 의존형 국가들 사이에 인류 문명을 가르는 핵심 구분선이 그어진다. 또 다른 두 가지 구분선 역시 물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고대 관개 제국들의 주변 지역에서 해상 활동을 하는 문명들이 서서히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곳들은 국내의 농업 생산성이 낮아서 주로 이웃 국가들과 교역을 통해 소득을 얻었다. 해상 교역은 물의 부력을 이용한 빠르고 값싼 항해 가능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잔잔하고 닫힌 바다인 지중해에서는 그 조건에 맞게 돛과 노로 동력을 얻는 화물선이 등장한 후 이것이 점차 발전을 거듭해서 기원전 2000년 대에는 엄청난 역사적 힘이 되었다." "다른 물 관련 구분선은 '야만인'과의 구분이다. 이는 원시적인 수렵채집인들의 후손인 유목민들과 점차 확대되는 문명화된 농경 거주민들 사이의 실존적 충돌이라 할 만하다."(34-5)


"나일 강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집트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혜택은 파라오의 통제를 넘어서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곧 강의 연례적인 홍수에 좌우되었다. 지나친 홍수는 모든 마을을 물에 잠기게 하고 경지를 쓸어가 버렸다. 수면이 낮아지는 해는 그보다 훨씬 더 나빠서, 물과 토사가 부족해 기근과 절망의 카오스를 가져왔다.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 내내 왕조의 흥망성쇠는 놀라울 정도로 나일 강 범람의 순화고 일치했다. 범람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시기에는 잉여 식량이 생기고 나일 강 유역의 상이집트와 늪지 삼각주 지역의 하이집트가 통합되었으며, 급수시설의 팽창, 이집트 문명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전과 기념물, 그리고 왕조의 회복이 가능했다. 이에 비해 저수위가 계속되면 결핍과 분열,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파라오 왕국은 강 유역과 삼각주 지역으로 분열되었으며, 종종 군벌들이 지배하고 도적떼의 위협을 받는 서로 경쟁하는 구역들로 갈라졌다."(40-1)


"나일 강과 달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특징은 강의 범람과 후퇴가 예측하기 힘들며 흔히 아주 격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업 주기와 맞지 않아 문제였다. 물이 가장 필요한 시기는 파종과 경작을 하는 가을인데, 이때 수위가 가장 낮았다. 늦봄에는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강한 비 때문에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거의 다 자란 작물들을 망칠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핵심은 거대한 수리사업을 통해 쌍둥이 강을 일 년 내내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 큰 저수 댐에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작물이 자라는 기간에 방류하고, 경작용 고랑을 만든 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고지대로 물을 길어 올렸으며,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튼튼한 방재 둑을 설치했다." "간단히 말해 이집트는 자연적인 물 자원을 제공하는 나일 강이 준 선물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는 정교한 물 공학과 의도적인 사회 조직을 통해 자연을 거슬러 가며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문명이었다."(54-5)


"집약적인 관개농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에 부작용을 미쳐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우선 지하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토양이 물에 잠기고 동시에 모세관 현상 때문에 치명적인 염분기가 작물 뿌리에 달라붙는다. 덥고 메마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일어나는 증발 현상으로 인해 한때 비옥했던 지표면에 눈에 보일 정도로 완연하게 소금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수확은 점차 감소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기원전 18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한 석판에는 〈검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위기를 심화시킨 두 번째 인공적인 환경 악화 요소는 숲의 남벌이다. 주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함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현재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한때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숲을 개간하면 그 지역은 더 메마르고 덜 비옥해진다. 이 때문에 강수량도 줄어들고 토양이 빗물을 머금는 능력도 떨어지는 것이다."(60-1)


"모든 면에서 인더스 문명은 고전적인 수리사회였다. 중앙집중화와 재분배 성격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내부에 밀과 보리를 저장하는 거대한 곡물 창고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발굴된 유해에서 발견된 풍토병 말라리아의 흔적은 이 병을 옮기는 모기의 존재를 증언해 준다. 관개용 수로의 고인 물에서 번식하는 모기는 수리사회라면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 우기에 물을 보관하였다가 건기에 방류하는 것은 몬순 지역 거주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700년경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개 북서쪽에서 흰 피부와 옅은 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도유럽 어족 아리안 계 기마민족이 침입해 와서 붕괴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이들은 게르만 족, 켈트 족 혹은 고대 그리스 민족의 사촌뻘로서, 그 후손들이 나중에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에서 베다 힌두문명을 건설한다. 그러나 아리안 족이 침입해 왔을 때 인더스 문명은 이미 심각한 쇠퇴를 겪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취약한 수리환경이다."(72-4)


"진정 위대한 지중해 해양문명으로 우뚝 선 세력은 일찍이 조심스럽게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데 그쳤던 이집트 인이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크레타 섬의 미노아 인들이었다. 260킬로미터에 걸친 이 날렵한 섬의 가장 중요한 자연적인 자산은 다름 아닌 전략적 위치로서, 레반트, 소아시아, 이집트라는 수익성 좋은 시장과 서지중해의 원재료 공급지들을 중개하는 곳이었다. 미노아 인들이 특히 청동기 시대에 큰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청동 재료들을 쉽게 크레타에 집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부를 이용해서 미노아 인들은 화려한 다층 궁전('미노스' 왕의 궁전)과 큰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예술에 전념했다. 특히 성채의 시대였음에도 그들의 최대 도시인 크노소스만은 성벽을 두르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미노아의 해군이 얼마나 우월한지 말해 줄 뿐 아니라, 범선의 시대 내내 공해(公海)가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역사상 최초의 증거들이다."(84-5)


"살라미스 해전 이후 아테네는 동지중해의 해군 및 해상 교역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해양문화에서는 대의제적 자유시장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모델이 더욱 발전했다. 관개사업과 대지 중심의 수리국가 민중들로서는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정책 지시와 중과세에 따르는 일 외에는 실제적으로 다른 경제적 대안이 거의 없었던 데 비해, 사적인 해양상인들은 저렴한 세금을 내고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며 안전이 확보된 항구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상 많은 중요한 해양무역 국가들이 대개 중요한 대의제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이며, 이들이 모두 아테네에서 탄생한 정치경제의 계보를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테네의 흥기와 함께, 상품과 인력을 동원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 사이에 문명의 거대한 이원적 긴장이 결합되었다. 하나는 권위적인 정부의 지시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가격이라는 기준과 사적 이윤의 동기로서, 이 두 가지는 21세기까지 여러 형태로 우위를 다퉜다."(93-4)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한 첫 번째 세력이다.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로마는 지중해 서쪽의 자연 자원과 지중해 동쪽 선진 문명의 역동적인 시장 및 노하우, 양쪽 모두에서 부를 얻을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 로마는 물론 육군으로 유명하지만 진정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에 서부 지중해의 해로들을 장악한 이후이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년) 당시 한니발이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로 이탈리아에 침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마의 해상 우위 때문이었다. 로마는 실제적이고 잘 조직된 대규모 토목 기술과 군사력을 결합함으로써 문명사회로서의 독특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특히 물을 잘 다스리고 이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수리 기술을 통해 로마는 해군을 위한 조선업과 항해 기반시설을, 육군을 위한 제국 도로를, 그리고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문명 요소를 창안하는 데 필수적인 대규모 수로와 수리체계를 완수했다."(99, 103)


"중국의 물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7세기 초에 대운하가 완성된 일이다. 대운하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수리적인 단층선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물과 토양 사이의 불일치는 반복되는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 대운하는 중국 북부의 고질적인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여 지극히 풍부한 양질의 토양에 신선한 물을 공급해서 식량생산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이끌었고, 동시에 남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력이 약한 데 비해 물이 과도하게 많은 반대 성격의 문제를 해결했다. 나일 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한 것처럼, 운하는 중국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생산 자원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와 자체 군사방어 능력을 갖춘 민족국가를 통합했다. 대운하는 중국이 중세에 세계에서 가장 조숙한 문명이 되는 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15세기에 중국이 세계에 등을 돌리는 운명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서서히 쇠퇴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125-6)


"명이 1403년에 베이징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을 때 대운하 전체의 준설, 보수, 확대 사업은 국가의 최대 관심사였다. 북쪽 변경 지역에 식량과 군수품을 운반하는 통로인 대운하는 이 나라 전체 방어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기존의 해상 수송 체계는 해적들과 자연적인 해상 위험 요소들 때문에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렇지만 베이징 너머까지 확대된 대륙 운하를 통해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혁신이 필요했다. 원대의 기술자들은 이 문제로 좌절하곤 했는데, 건기에도 고산지대의 최고점에 달하도록 충분한 물을 대서 연중 운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대형 화물선은 우기가 돌아올 때까지 통상 6개월은 묶여 있었다. 이 문제는 1411년 천급갑문을 건설하면서 해결되었다. 새로운 갑문은 섞여서 흐르는 두 강물을 나누었으며, 관리인들은 15개의 갑문 체계를 이용해서 계절별로 물 흐름을 조정했다. 천급갑문이 건설되면서 이제 대운하는 단번에 믿을 수 있는 사계절 내륙 수송로가 되었다."(154-5)


"새 대운하의 완성은 중국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서 나머지 세계와 단절하게 된 정책적 전환의 계기였다. 더구나 대운하는 더 자족적이고 통제적인 수리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명의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높여주었다. 황제와 그 주변의 보수적인 신유교 관료들은 지주 계급과 결탁하여 아직 잔존한 상인층을 힘으로 억눌렀다. 바로 이 계층이 활기찬 송대 황금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은 당시 유럽과 대조를 보인다. 유럽은 전체를 통합하는 내륙 수상 수송 체계가 없고 그 대신 해상 수송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작은 국가 단위가 만들어졌고, 이런 체제가 완성되면서 통제받지 않은 교역과 자유시장 기업들이 확대되었다." "중국의 해상 수송로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곧 폐쇄되었다. 1419년부터 모든 원양항해용 선박 건조가 중단되었다. 1433년 이후 정화의 원정을 중단하고 중국 내부의 자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은 내향적 정책 결정의 또 다른 단계일 뿐이었다."(155-6-5)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은 지중해와 인도양이라는 두 해상 변경으로 둘러싸인 사막이었다. 이 지역에는 운항이 가능한 강이라든지 중국의 대운하 같은 수로가 없어서 희귀한 수자원 사이에 메마른 공지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으므로, 이슬람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적 중심지들을 통합하고 중앙집권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슬람은 물에 취약한 문명이 되었다. 이 문명은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수리조건의 변화에 극도로 취약했다. 이슬람 문명에서 풍요의 시기는 잠깐이었고, '충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 세기 동안 아라비아 인들은 물 부족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사용하는 생활 방식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덥고 메마른 사막과 바다로 막힌 변경이라는 장애를 오히려 상업 교역로의 준독점으로 바꾼 아랍의 천재성 덕분에 동과 서 사이의 장거리 이동로와 경유지를 통제하는 위대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동시에 12세기 이후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 역시 설명해 준다."(160)


"이슬람권 사람들이 구세계 문명권의 여러 교차로 근처의 영토를 정복해서 상업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은 결국 농업용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 조건 때문에 식량생산이 제한되고 그에 따라 유지 가능한 인구가 정해졌다. 평온한 시대에도 이슬람은 3000만~5000만 명의 인구만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인구는 그 세 배이고 세계 인구는 열 배였다. 그 결과 이슬람은 항시적으로 인력이 부족했고 따라서 종교적 개종이나 정복을 통해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종교적 보편주의, 그리고 아랍 지도자들이 늘 비아랍 개종자들을 수용하는 것 역시 이런 인구 부족에서 기인한다. 피정복민, 용병, 심지어 수많은 노예들까지 이 사회 내로 흡수되는 데 그토록 관대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또한 물 부족 문제로 물이 나는 지역에 이슬람 인구가 고도로 집중되었다. 그래서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처럼 예외적으로 큰 인구 과밀 도시들이 생겨났다."(167-8)


"이슬람 문명의 또 다른 물 관련 약점은 작은 강들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슬람의 '유량 부족'은 단순히 빠르고 안전하고 광범위한 내부 수송 네트워크의 발전을 저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던 수력의 이용 또한 막았다. 무슬림의 수리공학이 유럽보다 더 발전해 있었으면서도 물레방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물살이 빠른 강이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수많은 작은 강들의 수력과 수송 잠재력을 활용해 초기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적 상승기를 타는 동안 이슬람 시대의 스페인은 물레방아를 단지 곡물 제분과 양수에만 사용했다." "되돌아 보건대 첫 번째 치명적인 실패는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지중해를 이슬람의 호수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해양국가들이 해상력을 건설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점차 축출되어 중요한 부의 원천에서 배제되자 이슬람 문명은 사막 자원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85)


2부 물과 유럽의 번영


"카리브 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멕시코 만류 덕택에 북유럽은 아(亞)북극에 해당하는 위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연중 농사가 가능한 온대 기후를 유지했다. 이 지역은 물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많고, 강수량이 풍부했으며, 끝없이 긴 톱니모양의 해안선과 함께 운송과 무역에 적합한 좋은 자연 항구들이 많았다. 또한 지중해 지역의 강들에 비해 훨씬 먼 곳까지 이르는 북유럽의 강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흘렀으며, 길고 항행이 가능하여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의 잠재적인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 시대 내내 북유럽 지역은 농업 확대에 있어 극복하기 어려운 물 관련 장애물에 직면해 있었다. 강수량이 지나치게 많았고, 무거운 진흙질의 토양은 자연적으로는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 평평하고 종종 침수되는 북유럽의 평지 대부분은 빽빽한 삼림과 늪지였다. 지중해 지역과 중동의 가볍고 건조한 토양에 사용했던 경작 기술들(특히 황소가 끄는, 나무로 된 얕고 단순한 쟁기)은 북부 지역의 토양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200)


"북유럽의 경제적 각성을 자극한 농업혁명의 중요한 돌파구는 바퀴 달린 몰드보드 중쟁기와 함께 찾아왔다. 4~8마리의 황소가 끄는 몰드보드 쟁기에는 크고 굴곡진 철제 날 또는 철판이 덮인 목재 날이 달려 있었다. 이 판은 깊은 고랑을 파내는 동시에 높은 진흙 두둑을 만들어서, 넓은 공간에 걸쳐 진흙질 땅의 생산성을 높였다." "몰드보드 쟁기 덕분에 질척거리는 토지의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어진 농업 발전과 인구 팽창은 곧 지역 내의 수자원 개발을 활성화해 경제 팽창을 더욱 자극했다. 1000년 이후, 유럽 내륙의 긴 강들과 북부 해안에는 종종 중무장한 상선들이 활기차게 왕래했다. 이 상선들은 곡물과 목재, 금속, 밀랍, 모피 같은 원재료, 그리고 나중에는 염장 청어 같은 상품을 싣고 부상하는 자유 상업 도시들과 계절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교역 시장들을 오갔다. 북부 해역에서 활동하는 이런 초기 상인들 중 많은 이들은 긴 배를 타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노르만 족의 후손들이었다."(202-4)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물레방아의 발명은 문명사의 분수령 중 하나로 기록된다. 주로 경지 관개용 물을 끌어 올리려는 목적으로 동물의 힘으로 움직이던 고대의 노리아(물동이들의 연쇄)가 물레방아의 오래된 사촌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륜의 물갈퀴 판이 설치된 물레방아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 속에 들어 있는 물의 에너지를 생산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에너지로 자동으로 전환시켰다. 말하자면 물레방아는 역사상 최초의 기계식 엔진이었다." "11세기 이후 물레방아는 기계 전동장치, 플라이 휠, 캠축, 컨베이어 벨트, 도르래, 이동장치 그리고 피스톤 등의 실험을 자극했고, 이는 산업 생산의 핵심적인 노하우를 개발하는 발단이 되었다." "물레방아는 또한 중세 유럽에서 철을 용해하는 용광로는 개발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철이 동시대에 확산된 화약과 결합하여 대포와 화기를 만들어 내자 유럽의 함선과 군인들은 향상된 무기로 무장했고, 이것은 대항해 시대의 정복 원정을 이끌었다."(208-10, 214)


"유럽 내부의 권력 중심지는 16세기 중에 지중해에서 대서양 북서쪽의 해상 열강들로 이동했다. 유럽의 해양 팽창 세력이 지구의 대양을 빠르게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보충적인 역할을 했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물의 혁신이 일어났다. 배에서 마실 물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지만, 장거리 원양 항해에서는 가장 힘든 문제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선상에서 신선한 물을 장기간 보존할 방도는 없었다. 미지의 해안에 상륙할 때 탐험가들은 가장 먼저 물 공급지를 찾아내야 했다. 그 시대에는 문명 지역의 항구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신선한 물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때는 변색된 물, 소금물, 세균 투성이의 물, 그리고 오염된 물을 마시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로 살균한 맥주나 포도주, 또는 뜨겁게 끓인 물로 수분 섭취를 제한했다. 그러던 중 15세기에 물을 장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물통을 개선하면서 선원들의 상황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243)


"장거리 항해와 대포의 시대에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때까지는 공해의 자연적 힘을 동원하는 해상 강국의 이점은 월등한 육군에 대항해 힘의 우위를 회복하는 세 번째 축으로 작동하는 정도였으나, 이제 그 장점이 더욱 발전해서 작고 민주적인 해상 국가들이 글로벌 지배를 둘러싼 충돌에서 오히려 우세를 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섬나라 영국이 대륙의 경쟁국 네덜란드를 능가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육상 침공에 대항해 견고한 방비를 갖추어야 하는 추가 부담을 아예 지지 않고, 모든 자원을 해군력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네덜란드가 쇠퇴한 최종 근인(近因)이기도 했는데, 흥미롭게도 고대 페니키아 인들이 이웃의 대륙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 의해 몰락한 까닭과 유사하다. 항해 시대를 통틀어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영국을 침공하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까지 1세기 동안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262-3)


"물은 지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질 가운데 온도 범위에 따라 액체, 고체, 기체의 모든 상태로 존재하는 유일한 물질이지만, 지금까지 각 문명은 주로 액체 상태의 물을 이용해 왔다. 물을 가열해 가스 상태가 된 증기의 팽창력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17세기 말에 가서야 런던에서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과 함께 일했던 프랑스 출신 물리학자 드니 파팽이 기압에 대해 새로운 과학 지식에 따라 실용적 증기 압력 밥솥을 발명했고, 최초의 증기기관들의 이론적 기초가 될 일부 기본 설계들에 대한 개념적인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1698년 영국의 군사 엔지니어인 토머스 세이버리는 비록 매우 불안정하고 폭발하기 쉬웠지만, 처음으로 콘월 주석 광산에서 물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증기펌프를 설치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처음 사용되자마자 17미터 높이의 물이 채워져 있던 수직 갱도에서 물을 비워 냈다. 동시에 와트의 증기기관은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송풍기에도 이용되었다."(272-3)


"용광로를 가열하는 송풍기에 증기력이 이용되면서, 저렴한 고품질 주철의 대량 생산이 촉진되었고, 주철은 곧 산업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자재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한정된 양의 단조 철이 공급되어 주로 영국 해군의 대포와 다른 주요 장비 제조에만 쓰였다. 증기력과 철이 만들어 낸 역동적인 시너지 효과는 자체 강화되는 경제 팽창의 선순환을 일으켰으며, 산업혁명의 두 번째 국면을 이끈 핵심 기술 클러스터가 되었다. 증기력은 더 많은 철을 주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더 많은 철은 증기력이 활용될 수 있는 튼튼한 장비들과 응용물들을 생산해 냈다. …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초기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중요한 사례 중 하나는 전통적인 물레방아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증기력으로 물을 끌어 올려서 물 흐름을 보충해 거대한 철제 바퀴를 돌리자 물레방아의 힘은 엄청나게 증대되었다." "수력과 증기력은 나란히 성장을 계속했다. 증기력이 수력을 앞지른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281-3)


"사람들은 증기력 덕분에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에서 1920년까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5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주했던 것은 이러한 발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이주한 결과 미국의 서부 팽창을 제한하던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현상이 줄어들고, 동시에 유럽에서는 1848년의 사건같이 혁명적 분란의 위협을 가하는 유럽 내 실업인구의 과잉이 완화되었다." "이전의 수상 운송 혁신들과 마찬가지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증기력 역시 세계의 지정학적인 균형을 재조정했다. 증기력은 지구상의 모든 사회를 잠재적인 원료 공급지이자 동시에 빠르게 성장하는 유럽 산업을 위한 잠재적 시장으로 만들었다. 식민지 위성국들과 그들의 유럽 식민모국들 사이에는 종속적인 상호관계가 형성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세계의 경제적 질서에서 제조업을 장악한 서구의 '중심부'는 더 지배적이고 부유해졌다."(286-9)


"수력발전은 그 자체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혁명을 만들어 냈다. 전기는 송전이 용이했고, 수력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와 공장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증기력에 필요했던 석탄은 부족했지만 산악 지역에 수량이 풍부한, 즉 '백색 석탄'이 많은 국가들은 갑작스럽게 에너지 자원을 얻어서 산업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다. 산악지형인 이탈리아가 극적인 사례이다." "수력 전기의 확산은 유럽과 미국을 넘어 전세계로 산업혁명이 퍼져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력발전소에 적합한 물 공급지가 부족해지고 증기 터빈이 개선됨에 따라, 화석 연료나 핵연료를 사용하는 대형 화력 발전소에서 더 많은 전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물을 증기 터빈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냉각제로도 사용했다. 석유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의 중요한 혁신 과정에서도 물은 중요한 냉각제로 쓰였다." "20세기의 특출한 산업 팽창에 힘을 공급하는 핵심 과정에서 물과 에너지는 상호 공생적으로 연결된 파트너였다."(305-7)


3부 물과 현대 산업 사회의 형성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은 역사적으로 항상 칼의 양날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었다. 먼저 사람은 생존을 위해 매일 2~3.5리터의 물을 마셔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데 수 리터, 그리고 최소한의 위생을 유지하는 데에도 40~75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병균이 서식하고 있는 고인 물에 노출되면 질병 감염, 수명 단축, 각종 신체적 고통의 주요 원인이 된다. 모든 시대를 망라해 가장 강력한 수인성 질병은 이질과 일반적인 설사 증상이었다. 인류 문명이 수렵, 채취 단계에서 관개농업 단계로 넘어가면서, 인간은 말라리아, 황열병, 뎅기열 등을 옮기는 모기, 주혈흡충, 기니 벌레 등이 살고 있는 관개수로의 고인 물 웅덩이에 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확산되는 치명적인 수인성 질병들의 위험을 증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와 장티푸스라는 유행병이다."(314)


"대항해 시대 이후 처음으로 차와 커피, 초콜릿이 각각 중국, 이슬람권, 멕시코에서 유럽으로 도입되었을 당시 이 식품들은 의학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것들을 뜨거운 상태로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형태의 무균 음료인 곡물 증류주가 대중화되었다. 그리스 인과 로마 인은 고대부터 초기 형태의 증류주를 제작했고, 유럽에서는 9세기 이후로 증류기를 사용했다. 근대에 들어서 증류주는 의학적 효과 때문에 의사나 약사들이 권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2세기가 지난 후 증류주가 대중화되자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오염 가능성이 있는 물을 정화하려 할 때, 더 나은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임시 민간요법에 따라 식초 몇 방울을 물에 넣기도 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 역시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건조한 지중해 연안 주민들 사이에서 애용되는 방법이었다. 깨끗한 물을 안전하게 섭취하는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맥주였다."(315-6)


"19세기 중반 위생의 위기는 산업화된 시장경제 고유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초기적 현상이었다. 이 체제는,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지속적인 생산 증가의 필요조건이라고 할지라도, 원치 않는 성장의 부산물로 오염된 자연 생태계를 건강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을 자동적이고 내재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영국에서 위생 개혁을 이끌어낸 최후의 기폭제가 된 사건은 바로 1858년에 발생한 템스 강의 '대악취'였다." "위생 관념이 등장하고 세균 이론을 수용하게 되자, 영국인들은 이제 런던에 깨끗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하기 위해 추가 조치들을 취했다. 주요 원칙은 가능한 한 가장 깨끗한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고 그 물을 제대로 정화해야 하며 공급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염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하수 처리 시설도 개선되었다." "위생혁명은 깨끗한 물의 공급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킴으로써 현대 산업 도시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25-30)


"영국 정부의 정책은 식민지인들을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에 묶어 두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의 해상 제국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도자들은, 유혹적인 미시시피 강 유역의 농지와 산맥 너머의 서로 교차하며 흐르는 가항(可航) 하천들이 자신들만의 풍족한 서부 제국을 만들어 줄 핵심 열쇠임을 알아차렸다." "미시시피 강은 간선 하천인 동시에 범람 하천이며 관개가 가능한 하천이었다. 이 강의 가항성으로 인해 자연적인 내륙 수로 교통망이 가능해졌고, 그 덕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지역에 걸쳐 띄엄띄엄 분포해 있는 국민들을 곧바로 통합할 수 있었다. 육로였다면 그런 일은 실제 불가능했을 것이다. '빅머디(Big Muddy, 미시시피 강의 별칭)'는 특히 서쪽에서 흘러드는 지류 덕분에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양의 진흙을 운반한다. 그리고 수차례 범람하면서 중서부의 농지에 두툼하고 비옥한 잔여물을 남긴다."(341-3)


"전기는 저장과 장거리 전송이 모두 용이한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리하여 전기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변화시켰다. 도시는 밝아졌고 가정에는 세탁기, 전화, 라디오가 설치되었다. 냉장 보관 덕분에 음식을 오래 저장하고 먼 곳까지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모든 종류의 제품에 소형 전기 엔진이 장착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산업 분야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은 풍부한 양의 전기만 있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원석에서 추출하고 정제할 수 있는 재료이다.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같은 수력 전기가 풍부한 나라들은 중요한 알루미늄 생산국이 되었다. 그리고 싼값에 알루미늄을 확보하면 항공기, 선박, 자동차 등을 생산하는 데 유리해진다. 강철, 석유, 내연기관과 더불어 전기는 증기와 철의 시대를 대체한, 2차 대량 생산 산업혁명의 역동적 토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약을 위해서는 전력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수력터빈이 그 중요한 사례다."(356-7)


"수력발전은 새로운 산업 시대에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위치에 오르는 데 일조했다. 미국 역사에서 수력발전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건조한 서부의 프론티어에 묻혀 있던 부를 끌어내는 데 기여한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리 호수와 온타리오 호수 사이에 위치한 나이아가라 폭포는 낙차가 크고 연중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기 때문에 수력발전에 적합하지만, 미국 내에 이러한 환경을 가진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기 전환기 즈음 여러 가지 산업 기술들을 조합하여 인공적인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콘크리트 댐이 그것이다. 미국 남서부 콜로라도 강에 만들어진 후버 댐은 이런 면에서 선구적이다. 1936년에 완성된 이 거대한 다목적 댐은 홍수를 통제하고 관개용수를 공급했으며, 10만 마력급 프랜시스 터빈을 통해 막대한 수력 전기를 생산해 냈다. 후버 댐과 그것을 모델로 삼아 이후에 만들어진 거대 댐들은 미국 극서부 지방 개발을 위한 핵심 기반 시설이 되었다."(357-8)


"서부 하천에서 기선 사업이 호황을 맞은 것은 한편으로 오랫동안 넘어설 수 없었던 장애물, 즉 애팔래치아 산맥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없는 상황을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그런 길을 확보할 수 없다면 서부의 하천들은 동부의 활기찬 산업 지대와 농경지 그리고 시장에서 동떨어진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부는 여전히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해안을 따라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서부에서 보면 사실상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을 무대로 하는 증기선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미시시피 유역에 묻혀 있는 부의 원천들을 끌어내며 또한 전통적인 남북으로의 팽창 대신 서부로의 확장을 추동할 수 있는 엄청난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1825년 10월 완공된 이리 운하는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총길이 585킬로미터의 운하는 수문 83개, 송수교 18개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곳을 오르내리는 화물선은 약 50톤 정도의 물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360-5)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 증기와 철의 시대에 영제국이 지니고 있던 패권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1914년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기술에 기댄 대량 생산 시대에 선두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미국에게 유리하도록 세계의 역학 구도가 재조정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파나마 지협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되었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과 동아시아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된 세계 규모의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두 개의 대양을 잇는 빠르고 저렴한 수로는 미국에게 광범위한 해양 환경의 이점을 온전히 선사했다. 미국은 막다른 길이었던 카리브 해를 대륙을 가로지르는 수송의 지름길로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극서부 지역에 묻혀 있는 광물과 농업 자원을 미시시피 유역, 오대호, 동부 해안의 번창한 산업 및 시장과 연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하나로 통합해 외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379-80)


"파나마 운하는 미국 해양 역사의 세 단계 중 첫 번째 시기에서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미 해군이 자국의 국경과 물길을 방어하고 자유 무역을 보호하며 해상무역상들의 시장 접근성을 확보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적당한 기회를 노려 대륙 내에서 팽창을 도모하던 긴 시대는 이제 끝났다. 파나마 운하 완공 이후 미 해군은 미국이 군사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전 세계에 걸쳐 팽창하는 한편, 미국의 국력이 밖으로 뻗어 나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중재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독일 잠수함들이 영국의 해상 장악과 항구 봉쇄를 무너뜨리려고 분투하던 중 미국을 비롯한 공식적 중립 국가의 상선과 여객선을 침몰시키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공언했듯이,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는 세 번째 시기 내내, 막강한 미 해군은 자유세계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바다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로를 순찰하고 다녔다."(402-3)


"전후 초기 거대 댐 건설의 시대 동안 수백 개의 댐들이 미국 전역에 세워졌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약 7만 5000개의 댐이 만들어졌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재임 기간이 끝나고 약 200년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하루에 하나 꼴로 댐이 들어선 셈이다. 6600개에 달하는 높이 15미터 이상의 거대 댐은 모두 다목적 용도로 지어졌고, 후버 댐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극서부 건조 지역의 농업은 시작하자마자, 세계 역사상 최고의 관개농업 지대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1978년을 기준으로 17개의 서부 주에는 18만 제곱킬로미터의 관개 농지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는 전 세계 관개 농지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건강하며, 최초로 완전한 전기화를 이루고, 최고의 산업 생산력을 달성했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도시화를 경험한 일등 국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앞장서서 물 사용의 혁신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434-5)


"20세기 말부터 댐의 시대가 허락한 전세계적인 물의 풍요는 한계에 도달했고, 그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형 하천들은 더 이상 바다에 제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는 바다에 닿더라도 삼각주와 해양 생태계에 상당히 줄어든 양의 유량과 퇴적물을 운반해 주었다. 장기간 계속된 집중적인 관개농업과 염류 축적, 침수, 토사 침식으로 황폐해진 토양에 부적합한 배수 시설이 설치된 결과 발생한 유해한 부작용은 어디에서나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관개 농지는 세계적으로 식량 대량 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기존의 농토는 새로운 농토가 개발되는 것과 같은 속도로 쓸모없게 되어 버렸고 그 결과 역사적인 관개 농지의 순 증가 추세도 끝이 났다.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지표수가 바닥을 드러내자, 점점 더 많은 지역에서 자연적인 물의 순환이 메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하수를 끌어다 관개용수로 사용했다. 세계 농업의 약 10퍼센트는 결국에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다."(457)


4부 결핍의 시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의 총량 가운데 0.001퍼센트에 해당하는 한정된 물이 증발산과 강수 작용으로 대기를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는데, 이 현상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존재한 모든 문명들을 지탱해 왔다. 인간은 실질적으로 이 재생가능한 물 공급량의 최대 3분의 1까지만 이용하며, 다른 3분의 2는 강이나 지하로 급속히 사라져 지표면과 지하수의 생태계를 충전하고 궁극적으로는 바다로 되돌아간다." "가장 다루기 힘든 수리 환경은 아주 건조하거나 습한 환경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이 크게 변하거나 홍수 같은 예측할 수 없는 물난리, 산사태, 가뭄 등 급작스럽고 극단적인 이상 기후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환경이다. 계졀적 변화는 수자원공학의 복잡성과 비용을 증가시키고, 그로 인한 예측불가능성은 꼭 필요한 급수시설의 건설마저도 어렵게 할 만큼 개발을 좌절시킨다. 역사상 가장 가난한 사회들이 종종 가장 다루기 힘든 수리 환경에 처한 사회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470-1)


"아스완 댐은 나일 강의 흐름을 완벽히 통제한다는 지난 5000년 동안 계속된 이집트 지도자들의 꿈을 실현시켰으며, 주기적으로 극단적인 가뭄과 홍수를 몰고왔던 강에 대한 끔찍한 외상으로부터 이집트 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아스완 댐은 그 엄청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나일 강의 또 다른 역사적 특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즉 이집트 사회의 행복은 나일 강 분지의 물을 엄청난 비율로 소비하는 데 달려 있지만, 나일 강은 거의 전적으로 이집트 국경 밖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더 상류에 있는 적도 동아프리카의 대호수 평원의 국가들이 백나일 강의 수원을 이룬다. 에티오피아 고원지대는 단연 이집트로 흘러들어 가는 물의 최대 공급지로, 청나일 강과 앗바라 강 그리고 소바트 강은 도합 85퍼센의 물을 공급하며, 매년 6월 아스완 댐에 도달하는 모든 토사를 실어 보낸다. 역사적으로 곤궁한 에티오피아와 백나일 강 주변국들은 계속되는 빈곤을 막기 위해 이제 더 많은 양의 나일 강물을 사용하고 있다."(484-6)


"상류 국가들, 특히 에티오피아에 의해 나일 강 물 공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거의 편집증적인 두려움은 수 세기 동안 이집트 인들의 정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종종 과열되곤 했다. 베르디는 오페라 「아이다」에서 비극적인 연인을 통해 이 불안감을 표현했다. 베르디의 이야기는 1875년과 1876년에 이집트 군이 몇 차례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을 가한 끝에 6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에 의해 전멸한 유혈사건에서 부분적으로 끌어온 것이다. 아스완 댐을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이집트 인들은 역설적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가중되었는데, 그러한 성취가 이웃한 상류의 빈국들을 자극해서 댐을 건설하여 나일 강의 물을 더 많이 이용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다른 나라들이 수에즈 운하와 아랍-이스라엘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이집트의 정책을 바라보는 데 반해, 이집트 지도자들은 명확히 자국의 최우선적인 국가 안보 목표인 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486)


"3차 중동전쟁(1967)의 충격적인 결과는 중동의 지정학을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갑자기 네 배로 늘어났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과 주변국들 사이의 수리적 힘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전쟁 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수계의 10퍼센트 미만을 통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유역의 지배적인 물 통제국가가 되었다. 서안에서 가장 큰 대수층을 포함하는 이 지하수층은 녹지대 부근의 산등성이를 따라 남북으로 흐르다가 이스라엘과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 아래 주로 존재한다. 2000년대 초, 요르단 강 서안의 대수층은 이스라엘 물 공급지의 3분의 1을 담당했다. 1981년 병합되었으며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도 한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 물 사용량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갈릴리 해의 재생가능한 수원지를 확보해 주었다."(506)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얻은 풍부한 물을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활력소로 활용했다. 1982년에는 요르단 강 서안의 물 공급을 '전국수로망'에 통합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물을 국내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즉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새로 우물을 파거나 기존의 우물을 더 깊이 파는 것 그리고 물을 관개에 이용하는 것을 가혹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급되는 물의 양을 불균형적으로 줄였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 물을 둘러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이가 가장 극면하게 벌어진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그들과 나란히 거주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사용하는 물의 양의 4분의 1밖에 사용할 수 없다.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관개농지는 전체 경작지의 4분의 1에서 20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 기근과 아랍의 물이 도둑맞고 있다는 분노는 1987년에 일어난 반이스라엘 운동(제1차 인티파다)을 크게 악화시켰다."(506-7)


"지난 천 년간 인도인의 삶은 단 수 개월 동안 연간 강우량과 유거수의 80퍼센트에 집중되는 폭우성 몬순 기후 때문에 생겨나는 예측할 수 없는 풍년과 흉년의 주기 사이에서 매년 심하게 요동쳤다. 너무 늦게 찾아오는 적은 양의 몬순은 끔찍한 기근을 낳고, 반면 일찍 시작되는 대규모 몬순은 엄청난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많은 이재민을 양산한다. 이와 달리 적절한 때에 불어오는 적당한 규모의 몬순은 작물에 물을 공급하고 강과 지하수를 충전하며 소박한 풍요를 가져온다. 오늘날까지도 인도 경제에서 몬순의 시작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21세기에 들어서 인도는 관개용수의 절반 이상을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 어느 국가도 그렇게 많은 양의 지하수를 뽑아내지 않는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인도는 자연적으로 충전되는 속도보다 두 배나 빠르게 지하수를 끌어다 쓴다고 한다. 고갈되고 있는 지하수로 재배한 식량은 지속가능하지 못한 거품과 다를 바 없다."(529-31)


"파키스탄의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인더스 강은 다시 한 번 인도와의 충돌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인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후 인더스 강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힌두교 국가인 인도를 나누는 국경선으로 책정되었지만, 이는 인더스 강 유역이 하나의 유기적인 수리적 통일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치였다. 이는 유럽의 식민 통치를 겪은 국제 수역권의 공통된 문제이다. 즉각적으로 강의 지류의 통제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발했다. 1948년 양국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다." "1960년 세계은행이 주도하여 인더스강수자원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이 조약은 양측이 6개의 인더스 강 지류들 가운데 각각 3개의 지류들에 대해서 특권적 권리를 갖는다는 최소한의 타협이었다. 1999년에는 다시 양국이 전쟁 발발 직전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카슈미르에서 폭력사태가 계속되었다. 조약은 반세기 동안 유지되었지만 인더스 강은 여전히 언제든 점화될 수 있는 분쟁의 도화선으로 남아 있다."(537)


"임박한 중국의 물 부족 위기는 훨씬 빨리 시작될 수도 있다. 황허 강 유역 토목 사업의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북중국의 미세환경이 심각하게 건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회복되는 하천유량의 상실(댐과 관개수로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광범위한 습지 배수, 산림 벌채, 농지조성을 위한 초지 개간, 1990년대부터 시작된 노천탄광 급증, 그리고 탐욕스러운 지하수 채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토양 침식위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물과 관련된 가장 심각한 21세기 환경문제들이다. 티베트 고원의 황허 강 발원지를 둘러싸고 있던 호수의 절반과 초지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이루어진 황허 강 중류에서는 비옥한 고원 황토의 70퍼센트가 침식되어 버렸다. 사막화가 북중국을 잠식하고 있다. 북중국을 포위하는 사막의 모래는 옛 야만족 유목민들을 대신해 만리장성 주변에서 최대의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546)


"콜로라도 강 유량의 두 배반~세 배이고 리비아 지하대수로 유량의 스물다섯 배에 달하는 남북대수로 공사가 성공한다면, 물 부족 위기로 인한 당면한 위협을 극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쯔 강 자체가 이미 초과 이용되고 있으며, 중국의 급격한 현대화에 장기간 보조를 맞출 수 있을 만큼 북으로 보낼 충분한 잉여 수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지구 온난화가 중국 전체의 물 공급 문제에 대한 환경상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등장했다. 주요 강들의 발원지인 티베트 고원의 빙하는 히말라야 산지에서 급격히 녹아내리고 있다. 만약 빙하가 사라져서 중국의 수리 시설들이 완전히 새롭고 극단적인 계절적 기후 유형에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중국의 모든 대규모 댐과 수로들이 하룻밤 사이에 역사적 헛수고로 전락할 수 있다. 중국이 대규모 댐과 수로공사의 성공에 거는 기대 수준을 놓고 볼 때, 많은 것이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558-9)


# 부족을 기회로, 새로운 물 정책

1. 하수와 폐수를 대규모로 집중 처리·정화하고, 자연 여과작용을 한 번 더 거친 후 상수원에 재공급한다.

2. 해수담수화 기술의 효율성을 높인다(열담수화 공정 → 역삼투압법 → 에너지 회복 및 삼투막 기술).

3. 수원지 상류 근처의 숲과 토양 오염을 개선해서 더 많은 물을 보존하고 오염물질도 더 많이 여과한다.

4. 상하수도 요금 인상, 물 절약형 화장실 변기 공급 등을 통해 도시의 일인당 물 사용량을 크게 낮춘다.

5. 산업용수의 재활용 비중을 확대하고 절수 공정을 도입한다. 농업용수의 가격을 올리고 미세관개농업 같은 첨단 기술을 적용한다.

6. 물 정책은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 그리고 기후변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내·국가 간 정치적 타협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