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을 상상하다 - 조선 연행사절단의 연행록을 중심으로
거자오광 지음, 이연승 옮김 / 그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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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문헌 개설: 조선과 일본 문헌 중의 근세 중국사료


"중국으로 여행을 갔던,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로 출사했던 조선 사신들은 『조천록(朝天錄)』이나 『연행록(燕行錄)』과 같이 중국에 대한 수백 종의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문헌들은 대체로 '당시 사람들이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의 관원이나 문인들의 관찰 기록이고, '외국인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본 것이며, 특히 봉황성(鳳凰城)에서 북경까지 가는 길에 있는 중국 북쪽 지역의 정치·사회·풍속·인정 등을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17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 풍속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회의 내재적 변화를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그 중에서도 조선인들이 특히 주목하였던 풍속의 변화로는 '상례에 음악을 쓰는 것(喪禮用樂)', 남녀 구별이 없는 것(男女無別)', 부처와 관공(關公)을 공경하여 제사지내는 것', '관원과 문인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런 현상들은 전통을 고수해 왔던 조선인들의 눈에는 청나라의 심각한 사회 변화로 여겨졌다."(29-30)


"물론 조선인들의 기록들 가운데 일부는 '보고 들은 것[見聞]'이 아니라 '기억'이다. 조선의 관원이나 문인들이 전통적 중화, 특히 명나라 왕조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역사기억'으로 바꾸었고, 이를 청나라와 대비시켜서 과거의 '중화문명'에 대한 찬양과 현실의 '오랑캐'에 대한 경멸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의 '중국'은 두 개의 분열된 '중국'으로 변해버렸다." "이는 결국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빌어 현실의 청나라를 폄하한 셈이다. 당연히 이렇게 애증이 분명한 기록은 진실한 역사라고 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야말로 진실한 역사였다. 한국의 역대 개인 문집에는 시가(詩歌)·서발문(序跋文)·여행기[遊記]와 서신 등이 많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모두 한·당·송·명의 한족 중국에 대한 과장된 상상과 기억이 담겨 있으며, 청나라에 대하여 다소 고집스러운 편견과 이유 없는 멸시가 실려 있다. 다만 이러한 상상의 배후에는 수많은 역사가 간직되어 있으며, 수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31-4)


제2장 시대적 배경: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 대한 조선의 관찰과 상상


"중국 역사의 시야에서 보자면 정릉(定陵)에 잠들어 있는 명나라 신종, 즉 만력제 주익균(1563-1620)은 기념할 만한 군주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기록 안에서 만력제는 극히 숭고한 명예를 누리고 있다. 만력 20년(1592)부터 26년(1598)의 전쟁에서 만력제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점령되는 것을 막았으니, 그의 조치가 조선왕조를 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묘년(1627)과 임신년(1632)에 조선이 억지로 청조를 받을어야 했던 뒤에도 조선 조정의 관리들은 여전히 '신종 황제께서 재건해주신 나라[神宗皇帝再造之國]', '신종 황제께서 살려주신 백성[神宗皇帝所活之民]'이라고 불렀으며 끝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고수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만력제는 조선에서 성대하고 장중한 제사를 받았다." "명 왕조에 대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항상 광범위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친밀감은 조선 왕국의 문화를 명나라의 상징적 문화와 매우 깊게 연결시켰다."(58-60)


"조선인들은 왜 한족들이 그렇게 쉽게 만청에 귀순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강희연간에 청나라를 방문했던 이의현(1669-1745)은 자칭 명나라의 대장 상유춘(1330-1369)과 상우춘의 후예라는 상옥곤을 만나서는 〈당신은 명나라의 자손인데, 어찌 옛 명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상옥곤은 〈이미 다른 사람(=청나라)을 따르고 있습니다(已順他人也)〉라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이는 명나라만을 인정하려고 고집하던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의아한 일이었다. 건륭연간에 북경에 출사했던 홍대용도 여전히 조선 역사를 탐문하러 왔던 엄성(1733-1767)과 반정균(1743-?)에게 〈앞선 명나라는 우리나라에게 재조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라고 솔직하게 물었다. 이와 같이 청나라 치하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이야기가 조선 사신의 입에서 나오자, 두 청나라 문인들은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였다."(76-8)


"결과적으로 청나라 시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마음속으로 중국에 가는 것이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경으로 출장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신들의 여행기 명칭은 대체로 〈조천朝天〉이 아니라 〈연행燕行〉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비록 공손하게 청 조정에 가서 하례했다고 해도 마음속은 울분으로 가득 했다. 한태동(1646-1687)은 자신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으나 국왕의 일이기 때문에 정말로 부득이하게 간 것이라고 하면서, 〈낯선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날마다 나쁜 놈들을 만나 능욕과 핍박을 받으니 매우 고통스럽다. 비린내 나는 오랑캐 조정에서 개돼지 같은 놈들이 주는 것에 고맙다고 엎드려 절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고 정말로 부끄럽다〉고 하였다. 건륭·가경 연간에 이르러 비록 명나라가 멸망한 지 이미 백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의 '대명(大明)'에 대한 역사기억은 여전히 이처럼 또렷하였다."(80-1)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 학술의 역량을 무시했던 것은 명으로부터 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상적, 문화적 입장이 일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홍대용이 말했던 바와 같이 조선 사인들의 마음속에서 주자의 학문은 〈올바르며 치우침이 없고, 진실로 공맹의 정통을 잇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은 청나라 문인들이 『춘추』를 논의할 때, 주희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서 '끝내 화이내외(華夷內外)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의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문장은 아름답다고 할 만하나 성인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은 오직 상하의 구분과 내외의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말씀이 전혀 없으시니 본지를 잃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당시 고증학이 풍미하던 한족의 독서인들이 주희가 한대의 『시서(詩序)』를 폐기한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자,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은 오직 주자의 주해를 알 뿐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고 강경하게 밝혀 말했다."(94-5)


"만약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문화적 일체감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의 존재를 잠시 유지시킬 수 있었다면, 모든 것은 17세기 이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천주교 선교사를 축출하라는 법령을 발포하고 일본을 '신국(神國)'이라고 선포했다." "많은 중국의 지식을 배운 도쿠가와 시대의 학자들에게 '화하(華夏)'와 '이적(夷狄)'은 더 이상 지리상의 공간에 의한 구분이 아니었다. 중세기 불교의 '천축(天竺)·진단(震旦)·본조(本朝=日本)'로부터 생겨난 3국의 정립(鼎立)이라는 관념은 이 시기가 되자 점차 대등하다는 의식을 발생시켰으며, 일본인들은 자아인식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이후, 일본인들은 고대 중국의 '화이' 관념을 끌어들여서 소위 '일본형 화이 관념'을 형성함으로써, 유가중국(儒家中國)에 대항하는 신도일본(神道日本), 야만족의 청나라에 대항하는 진정한 중화 문화라는 관념을 형성하였다."(106-7)


"조선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중화문화의 교양을 받아들이고 중국을 경모하며 기꺼이 중국의 번속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족의 성격 내부에 잠재된 자존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본래 오랑캐에 속했던 만주인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되자, 조선인들은 억지로 유지해오던 문화공동체에 대한 일체감과 충성을 바꾸어버렸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에 출사할 때 그들은 문화가 다른 이국으로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조선 문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은 두 개로 변해 버렸다. 하나는 역사상 일찍이 빛났던 '명나라'였고, 다른 하나는 현실 속에서 이미 타락해버린 '청나라'였다. 역사상의 중국과 현실의 중국이 조선 사신들의 마음속에서 분열되어 다시는 중첩되지 않는 두 개가 되었다. 그들은 문화상으로는 전자를 따르고, 정치상으로는 후자에게 신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동아시아 사상사와 문화사의 특이한 풍경이었다."(108-9)


제3장 나라를 떠나면서 고향을 그리워함: 압록강변의 감회


"17세기 중엽 명청 교체 이후에 각종 연행 사신들의 기록 안에는 고국을 떠나는 슬픔이 가득했던 것 같다. 민진원(閔鎭遠)은 〈강을 건널 때에 오랑캐의 산은 음산하고, 압룩강 물은 검푸르게 보였다. 어찌 고국을 떠나는 심정을 억누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절구를 읊었다. 오랑캐의 산은 막막하게 둘러쳐 있고, 압록강은 가득히 깊구나. 산이든 물이든 어디를 간들 상심하지 않겠는가!〉 왜 〈어디를 간들 상심하지 않겠는가!(無虛不傷心)〉라고 했던 것일까? 고국을 떠나면 곧 타국에 들어가는데, 그 타국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명청 교체 이전과 정말로 다르다. 명나라 숭정 12년(1639) 심열(沈悅)이라는 조선의 관원은 명나라에 출사하기 전 의주에서 통군정에 올라서 말하기를, 〈통군정에서 화이(華夷)의 경계를 보니, 산은 제왕의 땅과 이어져 있구나!〉라고 하였으니, 조선을 오랑캐[夷]라고 하고 명나라를 '중화문명[華]'이라고 여겼던 것이다."(123)


제4장 오삼계(吳三桂)는 결코 강백약(姜伯約)이 아니다!


"강희 12년(1673) 겨울 11월 21일, 오삼계는 운남(雲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자칭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라고 했다." "조선 사람들이 오삼계 『격문』의 자기 표창을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오삼계가 반청 의거를 일으킨 것이라고 과장되게 상상하였다. 사실상 이는 단지 복명에 대한 조선인들이 품었던 내면의 희망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강희 18년(1679) 3월에 마침내 오삼계가 패배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조선인들도 차차 〈오삼계가 형산(衡山)의 남쪽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고 홍화(弘化)로 개원(改元)하였으나, 원래 주씨(朱氏)를 세운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음을 남몰래 축하하며 다행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오삼계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하여 와신상담했던 강백약(姜伯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대역무도하게 황제가 되려고 참월했던 자였기 때문이다."(147, 152, 156)


"오삼계와 그의 부하들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은 반드시 고국이 그리워 명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석주의 다음으로 김창업이 강희 51년 청나라에 출사했을 때, 그는 〈세인들이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했던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청군을 중원으로 들인 것이 죄인지〉 여부에 대하여 의혹을 느꼈다. 당시에 〈황성(皇城)은 이미 함락되고,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며, 천하는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오삼계는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었다. 더욱이 역적 이자성을 죽일 수도 없었다. 따라서 〈만약 오삼계가 헛되이 의리를 지키면서 청나라 군사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결국 이자성에게 패배하고 청나라 군사는 스스로 산해관을 넘어왔을 것이니, 천하의 일에 무슨 보탬이 되었겠는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김창업은 여전히 오삼계의 가장 중요한 죄과는 〈대명의 종실을 세우지 않고 천하를 실망시켰으며,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다가 결국 패멸하여 명분과 절의를 상실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170-1)


"시세는 결국 인력보다 강하며, 세월은 기억을 마모시키기 마련이다. 강희 말년에는 조선 문인들도 더 이상 오삼계에게 그다지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찍이 오삼계에 대하여 지대한 호감을 품었던 임본유 역시 청 황제의 새로운 정치가 〈관대하고 어질며 훌륭한 덕을 갖추었고, 종족을 화목하게 한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번의 난이 평정된 지 60년이 지난 후, 이 사건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가고 있었고, 한족 문인이든 조선 문인이든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삼계는 이미 '두 마음을 품은 신하'나 '역적'임이 자명하게 되었다. 조선 문인들과 청나라 조정의 평가도 이미 더 이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비록 노이점(1720-1788)이라는 조선의 문인은 오삼계를 떠올리면서 우연히 한 왕실을 회복하려다가 죽은 촉한의 명장 강유(姜維)를 연상하였지만, 그 역시 오삼계는 강백약에 비할 수 없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오삼계는 〈결국은 산해관의 문을 열어 적을 들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173-4)


제5장 이역의 슬픔을 상상함: 200년 간 계문란에 대한 조선 사신들의 멀고 먼 상상


"대다수의 조선 사신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모두 계문란의 이야기를─강남 여자 계문란이 북방 오랑캐 땅으로 끌려가게 됨을 한탄하며 지었다는 제시(題詩)로서, 풍윤현(豊潤縣) 부근의 진자점(榛子店)이라는 객점 근방에 있는 한 인가의 담장에 쓰여있었다고 전해진다─명청 교체기의 역사적 단편이라고 상상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상상은 역사가 되어갔다. 그런데 이 무오년이 후금의 천명(天命) 3년, 즉 명나라 만력 46년(1618)이 아니라면, 이는 바로 청나라 강희 17년(1678)의 일이다. 그러나 만력 46년, 명나라는 산해관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만주인들은 강남 여인을 심양으로 붙잡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며, 강희 17년은 명나라가 이미 멸망했고 청나라 사람들은 이미 명나라 사람과 북경 부근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계문란을 명청 교체기에 고통을 받은 사람으로 상상하거나, 이 시를 명청 교체기의 비극을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무언가 적절하지 않은 셈이 된다."(189-90)


"사실 사정은 매우 분명했다. 강희 22년(1683) 김석주가 진자점을 지나면서 이 시를 보았을 때, 그의 부사 유(柳)씨가 이미 이 집의 주인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물었고, 〈(주인 여자는) 5-6년 전에, 심양의 왕장경이 백금 70냥으로 이 여인을 사서, 이곳을 지나갔다고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라고 하였다. 5-6년 전이면 마침 강희 17-8년 전후가 되며, 이때 붙잡힌 계문란은 아마도 바로 오삼계에 속했던 가속의 일부였을 것이다." "다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고집스러운 조선인이 강남 여인 계문란을 명나라 때 수재의 처로 만들었고, 만주(滿州)의 왕장경은 70냥의 백금으로 그녀를 사서 심양으로 데려온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이 사건을 명청 교체기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힌 데에서 비롯된 비극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시가 있든 없든, 조선 사신들은 여전히 계문란 제시를 빌어 중국의 슬픔을 상상하였고, 여러 가지의 화답시를 가지고 만주인들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었다."(191-4)


"계문란에 대한 조선인들의 동정은 점차 약간의 불만으로 바뀌었다. 최초로 불만을 드러냈던 것은 강희 35년(1696) 북경에 출사했던 사은부사 홍만조(洪萬朝)였는데, 그는 『조계문란(嘲季文蘭)』에서 계문란은 진자점에서 오욕을 당했으나, 그저 담벼락에 〈영원히 마음이 아프다[萬古傷心]〉는 네 글자와 시 한 수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화적 소양과 시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독서하여 소양을 갖춘 여성임을 생각할 때, 반드시 취하고 버리는 구분을 깊이 살폈어야 했으나, 살기를 도모하여 모욕을 참았으니 끝내 뛰어내려 자진하는 절개는 본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는 정말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인들에게 계문란은 이미 민족주의적인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하나의 문화전통적 부호가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계문란의 제시는 만이(蠻夷)가 중화를 짓밟았음을 규탄하는 것이고, 계문란이 자결했다면 그 전통의 가치를 더욱 분명히 드러냈으리라는 것이다."(199-200, 203-4)


제6장 밝은 촛불은 이유 없이 누구를 위해 사르는가?: 청대 조선의 조공사신 눈에 비친 계주의 안록산 묘와 양귀비 묘


"계주성 밖에 있던 안록산과 양귀비의 묘에 대한 관찰에서 조선인들의 역사 기억과 현실적 해석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인들은 우선 명 왕조의 문명을 떠올렸고, 이 문명이 실추된 것을 만주족의 탓으로 돌렸으며, 당시 이미 이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던 중국에 대한 경멸감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한족 중국인들을 대신하여 이역의 슬픔을 상상하였고,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태도로 이 기이한 제사를 해석하면서, 모종의 역사적 암시를 감추고 일말의 동정심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멸감과 동정심이 교차되면서, 그들은 옳은 일에 있어서는 결코 사양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스스로 중화문명의 정종(正宗)이 되었다고 상상했다. 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했던 이래 조선인들은 일찍이 〈오늘날 천하에서 중화의 제도는 오직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당시 중국의 모든 기괴한 현상들을 보면서 그 탓을 모두 청나라에 돌렸다."(231-2)


제7장 명나라의 의관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 사신들이 조선의 정식 의관, 즉 명대의 의관을 입고 북경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청나라 수도의 기이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청나라의 문화인들은 이미 한족의 의관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호기심도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인들은 의복과 모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유구와 안남의 사신들을 대면하면서 마치 높은 지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스스로 정통이라고 여기는 오만함을 느꼈고,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더욱이 자신의 복장이 명나라의 의관에 가깝다고 하여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이미 복색을 바꾼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마음속 깊이 경시하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가면 늘 시험하듯이 명나라의 의관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이때 외국 사절들의 복장은 한족 중국인들로 하여금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고, 명대의 의관을 한 조선인들은 한족의 전통적 의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하였다."(236, 259)


제8장 당자(堂子)에서는 혹시 등(鄧)장군을 제사하는가?


"산해관의 외부에서 떨쳐 일어났던 만주인들은 본래 샤머니즘을 신봉했기 때문에, 늘 제단을 마련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정실(靜室)에서 여러 신들의 패위(牌位)에 제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중요한 날에는 늘 그랬듯이 제사 의식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는데, 특히 정원 초하루가 그러했다." "이는 본래 만족의 의식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만족의 황제가 전면적으로 '중국'을 상징하는 황제가 되자 한족의 전통적인 제사를 정식 규범으로 수용하고, 〈상주(商周)의 제도와 마치 부절을 합한 것 같다〉고 해석하고자 했으며, 그런 후에 비로소 〈억만 세의 바탕을 이어간다(綿億萬載之基)〉고 하였다." "조선 사신 서문중(徐文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목도했던 강희제 시대에 당자 제사는 정월 초하루에 이미 고정된 절차가 되어 있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줄곧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인지, 또 왜 그렇게 바쁘게 지나가는지를 추측하였다."(276-7, 280-2)


"강희 9년(1670). 민정중(閔鼎重)은 청조의 황제가 일찍 가서 제사지내는 것은 등 장군인데, 등 장군은 청조와 맞섰던 명나라의 장군이고 사후에는 여귀가 되어, 〈그를 만나는 자들은 모두 죽고, 호인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게 되므로 묘를 세워 기도하는 것이다. 만주족이 연경에 들어간 후에도 역시 그만 두지 못하고 묘를 세워 존숭하고 받든다〉라고 이미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소문은 줄곧 지속되었으며, 점점 더 심하게 과장되어갔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가 반만(反滿) 입장을 공개할 수 있는 만청시대가 되자, 조선인들은 점차 '당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반면, 한족 중국인들은 오히려 점차 '당자'의 역사적 상상으로 되돌아갔으니, 격렬한 민족 정서는 한족 중국인들과 조선인들로 하여금 입장을 바꾸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한족 중국인들은 〈당자에서는 등 장군을 제사 지낸다〉는 옛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청 황제를 조롱했다."(284-5, 293)


제9장 뜻밖에 오랑캐의 수도에서 한족 문화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다: 북경에서의 연희(演戱)에 대한 조선 사신들의 관찰과 상상


"건륭과 가경, 그리고 도광연간(1821-1850)의 북경은 정말로 번화한 도시였다. 산해관 밖의 소슬함과 한기를 거친 후, 조선 사신들이 산해관을 지나 풍윤(豊潤)·소주(蘇州)·통주(通州)를 거쳐서 동직문(東直門)·조양문(朝陽門)과 동악묘(東岳廟)를 통하여 북경 성으로 들어오자, 오색이 찬란하여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의 풍경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일기를 보면, 북경에서 가장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문화적 풍경이었다. 첫째가 유리창(琉璃廠) 책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서적이고, 둘째가 천주당의 서양인들 및 천주당에 있는 회화와 신기한 물건들이었으며, 셋째는 박학다식한 문화인들이었고, 넷째는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마술[幻戱]', 즉 눈속임을 하는 절묘한 기교들이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것으로는 북경성 안의 연희 공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는 단지 상연되는 연희일 뿐 아니라 중국을 관찰하는 자료가 되었다."(300)


제10장 이웃집의 낯선 사람: 청나라 중기의 조선이 서양을 대면하다


"관례대로라면 청나라는 조선 사신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마음대로 접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령은 금령일 뿐이었고,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은 항상 스스로 천주당에 갔는데, 선교에 뜻이 있었던 서양인들 역시 언제나 주동적으로 이 청나라 동쪽 이웃의 사절들을 접촉하였다. 그들은 필담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서로 예물도 주고받았다. 강희로부터 옹정연간에 조선 사신들은 선교사로부터 각종 예물과 서적을 얻었고, 예의상 선물을 받으면 답례를 하는 이런 습관을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져 갔다." "만남이 거듭되고 필담이 이어짐에 따라 조선인들은 얼마간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끝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화의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있으니, 이제 조선인들도 이런 이방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서양인과 조선인들이 멀리서 서로 바라보면서 가졌던 호감은 천주교가 조선으로 전파하면서 결국 막바지로 치닫게 되었다."(354-7)


"가경 10년(1805), 그때까지 천주교도들의 활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청 조정 역시 마침내 상유(上諭)를 반포하여 서양인들이 서적을 간행하고 전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제 조선왕국과 청나라는 선교사에 대하여 외적인 국가의 문호와 내적인 마음의 문을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문호를 닫았고, 그들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도 전대미문의 엄격한 금지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견고한 선박과 맹렬한 화포를 앞세운 서양인들은 결국 얼마 후에 조선과 중국의 봉쇄를 타파하였으니, 너희들이 국문을 잠그면 우리는 억지로 열겠다는 식이었다. 이는 일본의 쇄국이 마침내 개국으로 변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60년 이후인 동치 5년(1866), 정사(正使) 유후조의 조수였던 조선의 사신은 북경에서 새로운 하나의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즉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수도 북경은 더 이상 선교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양인들도 천주당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었다."(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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