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병사들 -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하랄트 벨처 지음, 김태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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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당시 독일 국방군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예상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지금과 달랐으며, 따라서 타인에게 자랑하여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만한 일들도 지금과 달랐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언뜻 보기에는 아주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다만 우리가, 인간은 그저 자기 '태도'에 따라서 행동하는 법이라고, 그리고 그런 태도가 이념, 이론, 거대한 신념과 결합되어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사람들이 기대한다고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이는 추상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그들이 놓인 구체적 장소, 목적,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독일 군인들이 왜 그처럼 잔혹하게 5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으며 5000만 명을 희생시키고 대륙 하나를 모조리 황폐하게 만들 만큼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전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13-4)


1 / 군인의 눈으로 전쟁 보기: 프레임 분석


"인간들이 행하는 해석과 행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즉 어떤 해석 틀과 표상과 관계 안에서 그 상황을 인식했고 그 인식한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재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프레임 분석 방식을 도입한다. 프레임을 고려하지 않으면 과거 행위에 대한 학문적 분석은 규범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로 현재의 규범적 척토를 끌어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쟁과 폭력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종종 그저 '잔인하게' 보이곤 한다. 그러나 사실 '잔인하다'는 것은 다만 도덕적인 범주일 뿐이다. 또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종종 아예 비정상적이거나 병리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 시각에서 이 세계를 재구성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거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 분석을 활용하여 도덕 중립적이고 비규범적인 시선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행해진 폭력을 바라보아야 한다."(19-20)


"1차 프레임은 각 시대의 인간이 배경으로 행동하는 폭넓은 사회·역사적 구조들을 포괄한다. 그러나 보통은 아무도 1차 프레임이 지니는 정위(定位) 기능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2차 프레임은 역사·문화·지리적으로 1차 프레임보다 좀 더 구체적인 프레임이다. 이는 우리가 대부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경계를 그릴 수 있는 사회 문화적 공간을 말하는데, 가령 어느 정권의 통치 기간이나 어느 헌법의 효력 기간 같은 것이 있고, 제3제국 같은 사적(史的) 구조의 역사 등도 이에 속한다. 3차 프레임은 더욱 구체적이다. 이는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맥락들이며, 특정 인물들이 그러한 맥락 안에서 행동하게 한다. 예컨대 전쟁은 군인들이 전투를 수행하게 한다. 4차 프레임은 한 개인을 어떤 상황 안으로 밀어 넣는 그 개인의 특성, 인식 방식, 해석하는 관점, 의무감 등이다. 이 차원에서는 심리학이 중요하며, 개인적 특성과 개인적 결정 방식 등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2차 프레임과 3차 프레임을 분석할 것이다."(20-1)


# 프레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1. 문화적 결속 : 문화적 결속이나 의무는 종종 자기 보존 욕구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게 작용하며, 종종 어떤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택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낳는다.

2. 무지 : 역사는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변화하는 사회·심리적 환경을 대개 인식하지 못하고, 사후에 조정한다.

3. 예상 :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기존의 프레임으로 파악하려 한다. 그런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절멸 과정의 치명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4. 시대별 맥락 :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것과 '정상성'에 대한 그 시대의 관념이 무엇인가, 무엇이 일상적이고 무엇이 극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는 프레임의 중요한 배경 요소이다.

5. 역할 모델과 역할 요구 : 평범한 일상이라면 다원적 역할들에 따른 선택 가능성과 행동 대안들이 존재하지만, 전시의 사건 맥락들에서는 이런 가능성과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6. 해석 틀 : 해석 틀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상황들을 유형화하고 자동으로 분류하는 틀이어서, 우리 삶을 구조화한다. 해석 틀은 체험된 일을 분류할 때 일종의 선해석을 제공한다.

7. 공식적 의무 : 평범한 일상에서는 완전한 예속부터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연속적 단계들이 있지만, 군대에서는 계급과 직책에 따라 운신의 폭이 정해져 있고,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8. 사회적 의무 : 인간은 인과 관계를 따지고 합리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행동한다. 이런 사회적 의무는 꼭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내면화되어 있다.

9. 상황 : 어떤 사람의 인격적 특성보다 그가 처한 특정한 상황이 그 사람의 행위에 훨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다음에는 모든 일이 경로 의존성을 보인다.

10. 개인적 성향 : 국가사회주의가 보여준 홀로코스트와 섬멸전을 보면, 폭력적이고 반인륜적인 태도가 친사회적 성향에 가까웠다. 개인적 편차는 비교적 하찮은 의미만 가질 뿐이다.


2 / 군인의 세계


"2차 프레임의 구성 요소들은 대개의 경우 당사자에게 의식된다. 예를 들어 1935년 독일인들 대부분은 제3제국 사회의 특징을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때 바이마르공화국과의 차이를 강조했을 것이다. 가령 경제 성장이 시작되었고 치안과 질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적 자부심을 되찾았고 총통과의 일체감이 생겼다는 등 여러 가지 차이를 언급할 것이다. 이런 2차 프레임은 바로 ('체제 시대(Systemzeit)'라 경멸적으로 불린) 직전 시기와의 근본적 차이 때문에 매우 명료하게 의식되었다. 당대의 인터뷰에서도 이제 〈새롭고〉 〈좋은〉 때가 시작되었다는, 〈다시 위로〉 올라가고 〈무엇인가 행해지는〉 때가 시작되었다는, 〈청소년들이 길거리를 방황하지 않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때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자주 강조하곤 한다." "그것은 아주 새롭고 중대한 어떤 것이 등장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경험, 한마디로 말해 '위대한 시대'의 현장에 있다는 강렬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52)


"제3제국에서 발전한 프레임에서 군인들의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특별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유대인 문제(Judenfrage)와 더불어 차츰 뿌리내린 생각, 즉 인간은 그 범주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다. '범주에 따라'라는 표현이 뜻하는 것은,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 가령 '아리아계' 독일인 집단 구성원이 어떤 개인적 노력이나 실패를 통해 다른 집단에, 가령 '유대계' 독일인 집단으로 옮겨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국가사회주의의 일상이다. 이제까지 여러 연구들은 사회적 활동의 상징 형식들, 가령 '이데올로기', '세계관', '강령' 등을 주로 탐구했으며, 그래서 일상생활의 사회적 활동들이 (무엇보다도 반성적으로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상징 형식들보다 훨씬 강력한 구성력을 지닌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적인 것들이 지닌 구성력이야말로 제3제국 프레임의 본질적 측면 중 하나이다."(53)


"페터 롱게리히의 관찰에 따르면, 독일 사회의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탈유대화(Entjudung)'는 〈개인적 생활 영역들로 점진적으로 침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바로 이를 통해서 도덕적 기준들을 재편성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정상적'이라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선하다'거나 '악하다'라고, '점잖다'거나 '괘씸하다'라고 여기는 기준에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국가사회주의 사회는 비도덕적이지 않다. 집단 학살조차도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타락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국가사회주의 도덕'이 놀랍도록 빠르고 심대하게 뿌리내린 결과였다. 이 도덕은 민족과 민족 공동체를 도덕적 행위의 준거 집단으로 정의하고, 가령 전후 민주주의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정착시켰다. 이런 도덕적 규준에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아니라 불평등이라는 가치가 속했고,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민족'의 가치가 속했으며, 보편적 연대가 아니라 일부의 연대가 속했다."(61)


"사회적 범죄의 한편에는 범죄를 계획하고 예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가해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런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방관자나 관객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이런 범주들로 나눌 경우, 결국 전쟁과 집단 학살과 섬멸로 사람들을 이끌어 갔던 행위 맥락을 적절하게 서술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행위 맥락에서 실은 관객이나 방관자는 없다. 모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즉 어떤 사람은 더 강력하고 열성적으로, 어떤 사람은 좀 더 회의적이고 무관심하게, 공동의 사회적 현실을 함께 만들어 낼 뿐이다." "여기에서 본질적 부분은 일상의 실천적인 변화이다.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공개적 항의는 그 어디에서도 없었고, 유대인들이 겪는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비판도 없었다." "다시 말해, 정치권의 주도뿐 아니라 개인들이 이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사회주의 프로젝트가 놀라울 만큼 단기간에 그렇게 광범위한 동의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70-1)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순수 군사적 가치들이 독일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1866년과 1871년의 승리가 전통적 귀족 엘리트층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민적 도덕규범의 이상들이 포기되고 그 대신 전통적 상류층의 명예 규범이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인본주의적 이상과 평등의 관념이 규범적 측면에서 격하되었던 것이다. 〈명예 문제는 높은 위치를, 도덕 문제는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본주의의 문제나 인간 평등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러한 과거의 이상들은 전반적으로 사회적 하류층들이 지닌 허약함의 특징이라고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엘리아스는 이를 독일 시민 계층에서의 '게슈탈트 전환(Gestaltwandel)'이라고 부르는데, 19세기 후반의 이런 변화를 통해 명예 문제, 인간의 불평등성, (결투 등에 의한) 명예 회복 문제, 민족 문제 등이 계몽과 인본주의 이상보다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74)


3 / 전투, 죽음과 죽어 감


〈폭탄 투하가 내게는 욕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짜릿합니다. 기분이 상쾌하지요. 총살만큼이나 기분 좋아요.〉(공군 중위, 1940년 7월 17일)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이 사람을 야만스럽게 만든다고. 그리고 군인은 폭력을 경험하면서, 절단된 신체, 피살된 동료, (섬멸전에서처럼) 집단 학살 당한 남자, 여자, 아이들을 보면서 포악해진다고." "폭력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심리학적인 연구들에서도 이런 야만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을 수 있다. 첫째, 이런 생각은 폭력 사용이 매력적 경험이라는 사실, 예컨대 '짜릿한 일'일 수 있음을 처음부터 간과한다. 둘째, 극단적 폭력을 저지르러면 먼저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쩌면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함을 처음부터 간과한다. 극단적 폭력 사용을 위해서는 어쩌면 어떤 무기 하나, 비행기, 아드레날린, 평소에는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 정도면 족할지도 모른다." "군인들은 폭력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야만화' 같은 토포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이야기들에서 극단적 폭력에 적응하는 사회화는 종종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91-2)


"군인들은 자신들이 수행하는 총격을 뚜렷하게 보이고 입증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또 자주 이야기했다. 그들은 자신의 총격 수와 자신이 소속된 비행전대와 적의 총격 수를 매우 정밀하게 헤아렸다. 의외가 아니다. 이 총격 수에 의거해 포상과 진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비행장에 몇 차례 성공적으로 착륙하고 그 작전에서 가한 총격 수를 면밀하게 합산하고 나서 뒤늦게 1급 철십자훈장이나 기사철십자훈장도 수여되곤 했다. 조종사들은 (특히 육군 병사들과는 달리) 전공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적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불타거나 폭발하는 것을 보면서, 지상의 건물이나 기차나 다리가 터지고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그리고 어떤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한다. 공중으로부터의 살인에는 이를 미적 체험으로 인식하고 감지하도록 만드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는 바로 가시성이고 둘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13)


"해군들도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미리 사회화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적국 상선의 승무원들이 해전에서 죽어 가는 것에 대해 누구도 회의를 가지지 않았다. 이는 늦어도 1917년에는 거대한 해군력을 지닌 나라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불문율로 수용되었다. 해전에서는 개별 군인들이 개인적 능력에 기초해 자신의 용맹함과 탁월한 조종 실력 덕에 살아남을 기회가 매우 드물었다. 제대로 맞으면 우리가 침몰하고 적을 제대로 맞히면 그쪽이 침몰한다. 그러므로 격침과 익사 이야기를 과시하면서도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음은 의외가 아니다. 게다가 해전에서는 비교적 먼 거리에서 어뢰를 쏜다. 그래서 특히 잠수함 승조원들은 비행기 조종사들과는 달리, 대개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 수상 공격 시에는 상갑판에 네 명만 있고, 수중 공격 시에는 지휘관만 잠망경으로 목표물을 본다. 나머지 승조원은 기껏해야 침몰하는 배의 소음을 들을 뿐이다. 그래서라도 이들에게 연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130)


〈뮐러: 러시아의 어느 마을에 빨치산이 있었어요. 그럼 당연히 마을을 초토화 시켜야죠.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말이에요. ······ 우리 부대에 브로지케라는 사람이 있었죠. 베를린 출신이었어요. 그는 마을에서 보이는 사람은 모조리 집 뒤로 끌고 가서 목덜미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죠. 그때 이 녀석 나이가 스무 살인가 열아홉 살인가 그랬어요. 이 마을에서 남자의 10분의 1을 총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병사들은 〈애걔, 대체 10분의 1이 뭐야? 이 마을 놈들 씨를 말려야 하는데〉라고 말했죠. 우린 맥주병에 휘발유를 채워서 테이블 위에 세워 두고 밖으로 나오면서 아주 느긋하게 뒤로 수류탄을 던졌죠. 그러면 모조리 활활 타올랐죠. 초가지붕들이었거든요. 여자고 아이고 모조리 쏴 죽였죠. 그중에 빨치산은 아주 적었어요. 저는 빨치산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면 절대 총을 쏘지 않았어요. 하지만 많은 동료들은 그런 걸 무지무지 재미있어했지요.〉


"뮐러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가 자기 이야기 안에 베를린 출신 브로지케라는 준거 인물을 심어 놓고 자신은 긍정적인 의미로 그자와 구별한다는 사실이다. 브로지케의 행동은 분명 범죄적이었고, 살인을 저지르면서 〈무지무지하게 재미있어〉하던 〈많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교해 뮐러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군인들이 법률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음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즉 가해자가 범죄적 행위의 전체 테두리 안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처럼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은 부당한 일에 가담했다는 도덕적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다. 집단 학살과 이른바 유대인 작전에서 가해자들은 내부에서 여러 집단으로 구별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를 이처럼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학살이 전체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도록 보장한다."(141-2)


〈디크만: 우리는 간첩 년 하나를 우리 부대에서 처형한 적이 있어요. 스물일곱 살인가 그랬죠. 그 여자는 전에 우리 부대 주방에서 일했어요.〉

〈브룬데: 그 마을에 사는 여자였나요?〉

〈디크만: 마을에 사는 여자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전에 마을에 산 적이 있었죠. 보병대가 아침에 그년을 끌고 왔죠. 오후에 참호 앞에 세우고 처형했어요. 그년은 영국 정보부 소속이라고 자백했죠.〉

〈브룬데: 처형 명령을 누가 내렸나요?〉

〈디크만: 사령관이 명령했죠. 저는 총을 쏘지는 않았어요. 그냥 처형을 지켜봤지요.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서른 명 잡았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어요. 지하실에 처넣었다가 벽에 세우고 방아쇠를 당겼지요.〉


"디크만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아이들까지 테러리스트로 간주해서 가차 없이 〈벽에 세우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보는 환상 역시 독일의 전쟁 범죄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점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광기라기보다는 프레임 변화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적을 정의할 때 어느 집단에 속하는가가 중요하지, 예컨대 나이와 같은 그 외의 속성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범주상 적으로 정의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이 전쟁의 실천적 규범 구조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법률에 따라 수사할 경우 이를 예외적으로 일어난 일로 간주하는 모순을 범하곤 한다. 그래서 이를 오판하게 된다." "즉, 자기 목적적 폭력 역시 전쟁의 구조적 폭력이 아니라 다만 바람직하지 않은 예외일 뿐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폭력의 장이 일단 열리면, 다른 사람의 어떠한 사소한 행동이라도 그를 사살하는 충분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151-2)


〈놈들은 우리를 '독일 돼지들'이라고 부르죠. 우리에겐 바그너, 리스트, 괴테, 실러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는데, 놈들은 우리를 '독일 돼지들'이라고 불러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독일인들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그래요. 이 인간적인 면을 놈들이 악용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욕하는 거라고요.〉(1942년 1월 27일)


〈암베르거: 어느 상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토할 것 같아. 이런 방식으로 유대인을 집단 총살하는 것 말이야. 이런 식으로 죽이는 건 무슨 사명 같은 게 아니지! 깡패들이나 하는 짓이야.〉


"프레임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지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자신과 다르게 볼 때 느끼는 당혹감이다. 그래서 다른 민족이 자신들을 '독일 돼지들'로 볼 때 느끼는 깊은 분노는 유대인 섬멸이라는 끔찍한 범죄가 군인들의 생활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니까 유대인 섬멸은 적어도 그들에게 문화 민족이라는 자화상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게 만드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대화는 유대인 섬멸이 어떤 한계를 넘어선 짓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 윤리는 많은 군인들에게 너무도 지당한 신념을 부여했다. 유대인이 객관적으로 문제이며 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배치하는 프레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대개의 경우 정말로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한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192-3)


〈로트키르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유대인들이 그래도 몇 사람은 빠져나와서 늘 떠들고 다니겠지요. ······언젠가 보복을 당할지도 몰라요. 유대인들이 권력을 잡아 보복을 한다면 끔찍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유대인이 권력에 접근하게 할지가 문제이지요. 왜냐하면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 등 외국의 대다수 국민들도 유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죠. 그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우리를 이기기 위해서요. 우리가 당시 볼셰비키와 계약을 맺었던 것과 다르지 않지요. 한동안 그랬잖아요. 그들도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계에서 대세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지요.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그들을 또다시 자극할 일은 모두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죠. 이봐, 우리는 이성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참여하기 원한다고.〉


"반유대주의 정책이 지닌 의의를 분명히 인정하는 사람이 그것의 실행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다. 또한 그 실행 방식이 어마어마한 분노를 불러일으킨 실수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계의 미래를 책임지는 국가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하면, 반유대주의 정책 실행 방식이 부적합하다고 느껴도 로트키르히의 논리가 뿌리내린 인종주의적 세계관이라는 프레임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니고, 독일이 국제 정치에서 예나 지금이나 동등한 자격으로 신뢰받을 수 있다는 자화상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만하거나 순진하거나 그저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지만 이는 당대의 프레임을 이루는 것이며, 로트키르히 같은 당대의 사람들은 이 프레임 안에 자신의 행동을 배치한다. 종전 후 독일 사회의 1970년대까지도 그들은 자신이 저지르거나 묵인한 일이 틀렸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프레임에 기인하는 것이다."(205-6)


〈특임대의 행동도 모두 역시 특이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작전이 끝나면 자신도 같은 인종인 수천 명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했고, 나는 이것이 늘 놀라웠다.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그들에게 결코 누설하지 않았으며, 희생자들이 옷을 벗을 때 아주 자상하게 거들어 주었고, 반항하는 자에게는 폭력을 사용했다. 또 불안에 떠는 사람을 인도해 가거나 처형 때 옆에서 붙드는 일도 했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잘 인도해서 총을 들고 기다리는 친위대 부사관을 못 보도록 하고 이 친위대원이 희생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목덜미에 총을 댈 수 있도록 했다. 가스실로 데려갈 수 없는 병들고 허약한 자들까지도 유혹해서 데려갔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했다. 마치 자신이 가해자에 속한다는 듯이.〉


"'희생자에게 책임 돌리기'가 잘 작동할 때는, 희생자가 처한 여건을 염두에 두지 않고 희생자의 인성이 바로 그 행동을 야기했다고 보게 된다. 특히 열등시되거나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오만 가지 편견들에 이런 메커니즘이 나타난다." "이는 마치 실험용 동물을 가지고 실험할 때 그 실험 조건은 언급하지 않고 그 동물의 태도만 서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희생자의 행동을 이야기할 때 가해자 자신이 창출한 조건들을 '배제'할 뿐 아니라 애초부터 인식조차 하지 않는 고찰 방식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저 근본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에서 '유대인'은 화자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영역에 속한다. 희생자가 죽어 간 실험 조건들을 자신이 만들었기에 가장 명료하게 알고 있었을 루돌프 회스조차 자서전에서 이런 관점을 취한다. 예를 들어 이른바 '특임대' 구성원들, 즉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데리고 가고 그들이 살해당한 뒤 다시 끌어내는 수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회스는 이런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213-4)


"국가사회주의에서 〈점잖음〉의 윤리가 생기는 동기는 특히 개인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거나 살인, 강간, 약탈 등의 각종 범죄들을 저질러도 거기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이상을 위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잖음의 도덕 덕분에, 서양의 기독교 윤리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극악한 일들까지 정당한 일로, 나아가 불가결한 일로 여기면서 자신의 도덕적 자아상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또한 살인까지 저지르며 그 〈추잡한 일〉을 실행하면서 고뇌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국가사회주의 도덕 덕분에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윤리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힘러 같은 유대인 섬멸 이론가들, 루돌프 회스 같은 실제 수행자들, 그리고 또 다른 무수한 사람들은 인간을 섬멸하는 일이 자기 '인간성'에 반하는 불쾌한 업무지만, 바로 그러한 감정을 이겨 내고 살인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 가해자의 탁월한 인격을 보여 준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233-4)


"도청 기록은 일반적으로 나치 정권 지도급 인사 개개인이 민족 동지들로부터 각각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는지 보여 준다. 이런 대화를 훑어볼 때 두드러지는 부분은 총통 신앙에 대한 언급이다." "총통 신앙은 계급과 직위를 망라하여 철두철미한 확신에 가까웠다. 이와 관련된 많은 발언은 마치 화자가 히틀러와 개인적 관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대중 스타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있고 남다른 특징을 지니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프로파간다에서 철저한 계산을 통해 총통을 디자인하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모든 자기 연출과 마찬가지로 실상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다. 처칠이 히틀러처럼 연서를 수천 통 받는다거나 괴링처럼 딸이 태어났을 때 전보를 10만 통 이상 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제3제국의 지도급 인사들은, 아니 적어도 이 두 인물은 대중 매체의 전문적 연출로 나타나는 대중문화 현상을 이미 보여준다."(318-20)


〈볼게초겐: 아, 우리가 진다면! ······ 저는 절대 전쟁에서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안 좋지만요. 아돌프는 결코 포기하지 않아요! 그에게 최후의 1인이 남아 있는 한,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다면 어떻게 될지 그는 알거든요! 그는 마침내 가스를 쓸 거예요.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상관없지요.〉


"이런 류의 발언은 총통 신앙이 지닌 두 가지 기능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자기 운명의 희비가 그에게 위임된다. 총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승리를 위해 충분한 수단과 냉혹함을 가지고 있다.(〈그는 알거든요!〉) 좀 더 흥미로운 다른 측면은, 전능한 총통이라는 이미지가 의심을 물리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볼게초겐 하사는 전쟁에서 정말 승리할 것이라는 데 의심을 품고 있다.(〈러시아에서는 상황이 안 좋지만요.)〉 하지만 총통의 이미지를 상징처럼 불러들임으로써 의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총통 신앙을 간직하는 것은 인지 부조화를 줄이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런 신앙에 대해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전망이 의심스러울수록, 총통 신앙은 더 굳건해져야 한다. 총통의 능력과 힘을 의심한다면 앞서 투자한 이런 감정들까지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총통의 운명은 곧 독일 국민의 운명이다."(325-6)


"군인의 덕목은 특히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군인들이 내면의 신념으로 〈최후까지〉 싸우게 만들었다. 〈마지막 총알까지〉 싸우는 것이 군인의 모범적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어 가면서, 정치 지도부와 군 수뇌부는 〈최후까지〉 싸울 것을 더욱 철저하게 요구했다. 그리하여 전쟁 말기가 되면 이처럼 끝까지 싸우는 것이야말로 국방군의 상징이 되었다. 1941~1942년 모스크바 근교에서의 동절기 위기에는, 전술적으로 전투가 결판날 때까지 싸우라는 요구가 마침내 '열광적으로' 싸우다 죽으라는 요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부하들이 전장에서 죽는 것이 어떠한 군사적 가치도 가져올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고집스럽게 현지 사수 명령을 고수했고 이를 따르지 않는 부대 지휘관들을 교체해 버렸다." "히틀러는 병사들의 희생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국가 통합의 대전제라고 보았다."(360-2)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운다는 토포스는 해군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나타났다. 1918년의 수병 반란(Matrosenrevolte)이라는 오점이 있는 해군 지휘부로서는 2차 세계대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런 잘못을 갚는 일이었다. 해군 참모총장 에리히 레더는 1939년 9월 3일 이미 절망적 열세에 처한 해군은 〈명예롭게 죽는 법을 안다〉는 사실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소망과 현실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묻게 된다." "강경한 말은 말에 그쳤다. 자기희생은 단지 소규모 전투 부대에만 요구되었다. 이런 소규모 전투 부대에는 임기응변으로 급작스럽게 만들어 기술적으로 무르익지 않은 무기들을 주었다. 인간 어뢰, 폭탄선, 1945년부터는 2인승 잠수함까지 있었다. 인간 어뢰를 조종하는 병사들의 손실은 어마어마했으므로 수지 타산이 전혀 맞지 않았다. 젊은 병사들의 희생정신은 일본 대사 오시마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이런 태도를 가미카제 조종사 정신에 견주었다."(379-82)


"독일군 병사들이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이든 제대로 완수해 내는 것이었다. 민간인일 때 훌륭한 회계사, 농부, 목수였던 것처럼, 잠수함 기능사로서도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공병으로서도 잘 싸우고자 했다. 물론 열악한 노동 조건, 잘못된 생산 방식과 노동 과정과 지시 등에 대한, 모든 공장에서 흔한 비판이 군대에도 있었다." "파국적인 전체 상황의 맥락 안에서 유독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는 이야기 모델은 군인들의 대화에서 흔히 나타난다. 이는 일상에서 '회사', '연구소', '상관' 등에 대해 나누는 대화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훌륭한 노동'이라는 이상이 행위자의 인식과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러한 '전문성'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스스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직업 노동과 전쟁 노동이 지니는 구조적 공통점이자 심성적 공통점이다."(401-3)


"우리는 군인들이 가진 프레임이 민간인의 프레임에서 전쟁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며, 이런 요소가 그 어떤 세계관이나 성향,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후자는 기껏해야 군인들이 어떤 것을 예측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여기며 어떤 것을 놀랍거나 화나는 일로 보는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뿐, 그들이 실제 행동하는 데에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말은 이 군인들이 저지른 일을 볼 때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은 평소 여건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을 하도록 만드는, 사건 및 행동의 맥락을 형성한다. 이런 맥락 안에서 군인들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유대인을 죽이고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나라를 '열광적으로' 수호한다. 이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과대평가하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전쟁을 일으키는 동기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군인들이 왜 사람을 죽이고 전쟁 범죄를 범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460)


4 / 국방군의 전쟁은 얼마나 국가사회주의적이었는가?


"전쟁 상황에서 행동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는 적이라고 정의(定義)하는 것이 이 정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적'으로 정의된 사람의 행동은 그가 적이라는 증거로 인식된다. 이런 점은 독일 국방군의 전쟁에서나 다른 전쟁들에서나 차이가 없으며, 국가간 전쟁이나 비대칭전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누가 적이고 누가 적이 아닌지는 언제나 군인들이 내리는 정의에 달려 있다. 적에 맞서, 적의 세계 지배 야욕과 폭력에 맞서 자위권을 발동했다는 흔해 빠진 논리는 전범 재판이나 인터뷰나 증언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래야만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런 정당화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역사적·문화적·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눈앞의 상황과 거기 있는 사람들에 대해 내리는 정의가 그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프레임을 형성한다. 그다음에는 집단 사고와 폭력의 역학의 작용으로 인해 거의 언제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470-3)


"정의에 의거한 살인─즉, 자기방어로 정의된 살인─이라는 이런 해석은 인종 학살에까지 확장할 수 있다. 적어도 인종 이론 창시자들과 홀로코스트 조직자들에게는 유대인 살해 역시 자기방어로 정의되었다. 또한 그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였다. 그들이 살해할 유대인들은 때로는 빨치산, 즉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비정규 적군으로 간주되었다. 한 독일군 병사가 말했듯, 〈유대인이 있는 곳에 빨치산이 있다.〉 자기방어로 정의된 살인은 문화적·역사적 맥락에도 존재한다. 1990년대 르완다에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한 것은 어떤 인식 및 해석 방식 때문이었는데, 미국의 역사가이자 인권 운동가 앨리슨 데스 포지스는 이를 〈거울 보고 규탄하기(accusation in a mirror)〉라고 표현했다. 이는 인종 학살의 환상에 빠져 상대편이 자기편의 절멸을 꾀하고 있다고 억측하는 것이다." "살인을 목적으로 한 모든 형태의 공격과 조직적 학살은 필연적인 자기방어 행위로 인식된다."(473-4)


"모든 전쟁에는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전우애이고 집단의 중요성이다. 군인들은 결코 혼자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사회적 환경은 그들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며, 어떤 기준들에 의거해 행동하고 그 행동을 평가하는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그 집단이 자기를 본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본다. 어빙 고프먼이 '낙인'에 대한 저서에서 발견한 것처럼, 이를 통해 집단에 순응해야 할 가장 강력한 동기가 생긴다. 전시의 군인은 극단적 여건 속에서, 자신이 당분간 떠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모르며, 자기 마음대로 조직할 수도 없는 집단의 한 부분인 것이다. 민간인과는 달리, 누구와 함께 지낼지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자기가 속하고 자기가 함께 형성하는 집단을 고를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집단은, 특히 생사가 오가는 전쟁 중에는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481-2)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폭력이 가령 영국군이나 미군이 저지른 폭력보다 '일반적으로 더 국가사회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악의로 바라보아도 군사적 위협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한 경우에만 그 폭력이 국가사회주의 특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 전쟁 포로 학살, 그리고 무엇보다 유대인 학살이 이에 해당한다. (모든 인종 학살에서 그러하듯이) 전쟁은 이를 위해 문명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한 새로운 장을 제공했다." "폭력을 단지 일탈로 정의하기를 그칠 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지닌 자기 환상을 벗어나서 우리 사회에 대해, 우리 사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생존을 위한 인간 공동체의 사회적 행위 가능성들 중 하나로 이해할 때, 이 생존 공동체가 곧 살인 공동체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스스로 비폭력적이라는 현대의 믿음은 망상이다. 여러 이유에서 인간은 서로를 죽인다. 그리고 군인은 그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죽인다."(4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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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 라이더가 말하는 한국형 플랫폼 노동
박정훈 지음 / 빨간소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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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거장'이다. 정거장 경제, 정거장 혁명, 정거장 노동으로 부르면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경제나 노동 앞에 플랫폼을 붙였을까? 지하철 정거장을 우선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어딘가를 가기 위해 입장료를 내고 정거장에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만약 '직업'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정거장이 있다면 어떨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일감'이라는 열차를 기다릴 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거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사람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 있다고 해서 플랫폼 노동을 '클라우드(cloud) 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이번에 도착한 열차에 모두가 타지 못할 수도 있다.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한다. ... 이러한 플랫폼 노동의 과정을 요약하면 '로그인-대기-일감 탑승-수행-대기 또는 로그아웃'이다."(17-8)


# 정규직─1~2년짜리 비정규직─(주 단위로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극단적 비정규직─(필요할 때만 쓰는) 플랫폼 노동자


"비 오는 날 배달 산업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상여금을 줘서라도 좀 더 많은 이들이 앱에 접속해 일하게 해야 한다. 반대로 봄가을처럼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에는 주문은 적고 일하려는 라이더들은 많다. 쓸데없이 상여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다. 이렇게 극단적인 임금 유연화가 필요하므로 근로자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디지털 세계에는 퇴근이 없다. 서버는 잠을 자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로부터 일감과 업무 지시를 받는 노동력도 노동법에서 정한 노동시간의 제한을 받으면 안 된다. 놀고먹는 노동자가 없는 '꿈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탄생한 플랫폼에서 노동자는 반드시 사용자여야 하며, 발전된 기술을 통해서든 자기 착취를 통해서든 끊임없이 감시당해야 한다. 그래서 플랫폼자본주의를 감시자본주의라고 부른다. 플랫폼은 노동법을 절대로 펼칠 수 없도록 노동법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노동법이 펼치는 낡고 구태의연한 모든 시도는 플랫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23)


"플랫폼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함으로써 이 산업이 발생시키는 사회적 문제와 비용에 대한 책임에서도 벗어난다. 그렇다면 플랫폼 기업이 던져버린 책임을 누가 떠맡을까? 오롯이 개인이다." "배달, 청소와 숙박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에 대한 책임도 개인에게 돌아간다. 생산수단을 일하는 사람이 가졌으니 책임도 일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디지털 세계의 플랫폼은 이론상 무한대로 노동력을 소유할 수 있다. 생산수단을 버리는 대신 데이터를 소유함으로써 얻은 성과다. 상상해보라. 중국의 플랫폼 기업이라면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 억 단위의 플랫폼 노동력에 대한 데이터를 소유할 수 있다. 근로자로 고용할 경우 상상하기 힘든 숫자다. 이는 오래된 자본의 꿈인 무한 축적을 가능케 한다. 심지어 노동력 관리와 책임의 위험에서도 해방한다. 진정한 공유경제라면 책임과 이윤도 공유하겠지만, 그런 자선 사업을 누가 하겠는가."(25-6)


"플랫폼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독점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엄청나게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이 독점이 사회 전체적으로 효율적이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플랫폼 기업은 네트워트 효과를 바탕으로 카카오뱅크 같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낸다. 플랫폼의 원래 뜻인 정거장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과 열차를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 하지만 플랫폼 자본은 중개만 하지 않는다. 정거장을 청소하는 사람, 관리하는 역무원, 정거장 주변에 좌판을 깐 장사꾼, 우동과 김밥을 파는 깔끔한 프랜차이즈, 렌터카 회사와 관광 안내소, 택시를 떠올려보라. 카카오 가입자 숫자를 바탕으로 카카오뱅크를 만들고 카카오택시와 카카오카풀까지 뛰어든 것처럼, 플랫폼 자본은 데이터 독점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본 축적이 아니라 데이터 축적이야말로 플랫폼자본주의의 원리다. 그래서 적자 운영 중인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데이터 독점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의 투자를 받는다."(32-4)


# 네트워크 효과 : 어떤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상품을 쓰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


2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배달의민족이 만든 '혁신'이란 무엇일까? 배달의민족은 전국에 있는 수백만 장의 전단을 스마트폰 앱 속에 집어넣었다." "전단 찾느라 거실을 활보하지 않고, 가장 중요하게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불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배달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편리함을 소비자에게 제공한 것은 배달의민족이 만든 커다란 혁신이다." "음식점에도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준다. 무엇보다도 장사하는 사람의 영원한 숙제인 좋은 장삿목과 비싼 임대료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면 오프라인 가게는 잘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심지어 홀 손님을 아예 받지 않고 배달만 한다면 매우 좁은 곳으로 가도 된다." "오프라인 손님을 버리고 배달만으로 성공하려면, 배달 수요가 충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예측까지 가능해야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손님들이 접속하게 만드는 것, 곧 최강의 독점적 플랫폼이 탄생해야 한다. 배달의민족은 바로 이것을 해냈다."(58-61)


"손님이 배달의민족에서 스마트폰으로 결제할 때마다 약 3퍼센트의 수수료가 음식점에 부과된다. 요기요도 3퍼센트를 부과한다. 배달의민족은 손님이 음식점을 검색하면 가까운 동네 음식점이 노출되게 만들었다. 음식점은 노출 비용을 내야 하는데, 이것을 '깃발'이라고 부른다. 가령 망원동에 사는 손님이 '치킨'을 검색했을 때 내 음식점이 노출되게 하려면 망원동 깃발을 사야 한다. 이 임대료가 월 8만 8천 원이다. 깃발을 하나만 꽂으면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목인 앱 상단 노출이 잘 안 된다. 하지만 몇 개의 깃발을 꽂아야 자기 음식점이 위에 노출되는지는 사장도 잘 모른다. 그래서 이용자들끼리 깃발 꽂기 전쟁을 하는데, 월 100만 원에서 200만 원을 쓰는 음식점도 있다. 배달의민족이 광고 노출 알고리즘을 알려주지 않는 한 얼마의 광고비를 써야 노출이 되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정보 독점을 바탕으로 한 수수료 정책은 플랫폼의 전형적인 수법이다."(62-3)


"플랫폼 회사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개인정보를 제공해 앱을 깔 수 있도록 무료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배달 할인 쿠폰'까지 뿌린다. 이 효과를 알 수 있는 사례가 초복, 중복, 말복에 뿌려지는 치킨 할인 쿠폰이다. 이날 밤 동네 치킨집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새벽까지 오토바이의 불빛들이 골목 구석구석을 밝힌다. 소비자 시장을 쿠폰으로 자극해 반대편 시장인 공급 시장을 터뜨리는 것이다. 쿠폰을 통해 소비자가 자주 플랫폼을 사용하다 보면 디지털 단골이 만들어진다. 소비자에게 앱을 여러 개 까는 건 너무나 귀찮은 일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용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출근길에 익숙한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정류장을 계속해서 이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교차보조금 사용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플랫폼 사업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줄이다. 이 자금은 어디서 왔을까? 배달의민족의 지분 대부분은 국제 투기자본이 갖고 있다."(64-5)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플랫폼의 형태는 양자 또는 3자 중개다. 손님-음식점-라이더(3자)를 연결하거나, 클라이언트와 노동자(양자)를 중개한다. 그런데 한국은 주문 중개 플랫폼과 배달 대행 플랫폼이 나뉘어 있다. 여기에는 동네 배달 대행사가 끼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플랫폼 산업은 2개의 플랫폼(주문 중개, 배달 대행)이 손님-음식점-동네 배달 대행사-라이더, 4자를 중개한다. 여기에는 배달 대행 플랫폼 사와 동네 배달 대행사의 독특한 관계도 있다. 배달 대행 플랫폼 사는 동네 배달 대행사와 '위탁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이 동네 배달 대행사는 라이더와 '알선 계약'을 맺는다. CU 편의점 알바가 CU 본사의 직원이 아니고 동네 편의점의 직원인 것처럼, 플랫폼 회사는 라이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게다가 CU 편의점 알바가 가맹점의 직원인 것과 달리, 라이더는 배달 대행사의 직원도 되지 못한다. 두 번 멀어지는 셈이다."(74-5)


3 우버이츠는 왜 한국에서 철수했을까


# 배달 산업의 플랫폼 형태

1. 우버이츠형 : 2019년 10월 한국시장에서 철수

2. 배민라이더스(배달의민족), 요기요플러스(요기요)

3. 프랜차이즈형(부릉, 바로고, 생각대로)


"우버이츠는 라이더가 일하고 싶을 때 스마트폰의 앱에 로그인하면, 자동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음식점의 배달 주문을 연결하는 서비스다. 스마트폰으로 온 배달 주문을 수락한 뒤 음식점에서 음식을 받아 손님에게 전달하면 된다. 이때 주문이 들어온 음식점 위치만 알려주고 최종 목적지인 손님의 주소는 알려주지 않는다. 라이더가 음식점에 도착해야만 손님의 주소를 알 수 있다. 주거 밀집 지역이고 상점이 별로 없어 다음 주문을 받기 힘든 소위 '똥콜'을 거절하고, 상점이 많아 다음 콜이 뜰 확률이 높은 소위 '꿀콜'만 잡아서 가는 걸 막기 위해서다. 정보를 통제하고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플랫폼의 또다른 특징이다. 결제는 모두 앱에서 미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라이더가 카드 결제기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스마트폰, 오토바이가 있다면 오토바이로, 자전거가 있다면 자전거로,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없다면 도보로 할 수 있다."(89-90)


"수많은 정보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힘과 권력이다. 당연히 기존의 대기업들도 이런 힘을 사용해왔다. '영업 비밀'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산재를 은폐하고, 경영상의 위기를 과장해서 정리해고를 하거나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플랫폼은 정보의 배타적 독점 자체가 기업의 수익 모델이자 가치라는 점이다. 이러한 정보 비대칭이 만드는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라이더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선택 상황에 놓인다. 자기 자신을 불신하거나 플랫폼을 불신한다." "더욱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본인의 판단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라이더는 자연스럽게 플랫폼이 좋아할 만한 태도로 열심히 일하거나, 플랫폼이 불공정하다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는 불신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플랫폼 노동의 화두다. 나는 이것을 노동과정의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비통제의 통제', '마음에 대한 지휘'라고 부른다."(96-7)


"그래도 우버이츠는 전투콜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강제로 배차한 배달 주문을 라이더가 수락하거나 거절하면 된다. 게다가 한 건씩만 배달하면 된다. 따라서 여러 건의 배달을 묶기 위해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전투콜을 잡기 위해 1초 단위의 싸움을 할 필요도, 좀 더 빠르게 콜을 잡기 위해 성능 좋은 스마트폰을 살 필요도, 주행 중에 스마트폰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 안전하다. 그런데 배달을 한 개씩만 하면 돈이 안 된다. 음식 픽업하는 데 10분, 배달하는 데 10분, 다음 콜을 기다리는 데 10분이 걸린다면 한 시간에 2~3개 정도 배달이 한계다. 이러면 최저임금도 안 나온다. 우버이츠는 이 문제를 높은 배달 단가로 해결한다." "우버이츠는 초기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무료 배송 마케팅을 했다. 그러다 우버이츠가 손님에게 배달료를 받자 콜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소비자는 쿠폰 할인과 저렴한 배달료만 부담하면 되는 다른 배달 플랫폼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98-9)


"(우버이츠 시스템을 모방한) 쿠팡이츠는 우버이츠보다 긴 계약서를 갖고 있었다. 쿠팡이츠의 계약서는 플랫폼 노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에 꼼꼼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4조 회사 및 배송사업자 간 관계 1항 회사와 배송사업자 또는 일체의 제3의 제공자 사이에는 ①자회사 또는 계열사 ②파트너십, 고용 또는 대리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회사와 라이더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을 명확히 써놓았다." "〈제8조 배송사업자에 대한 평가 1항 물품 수령인은 쿠팡이츠 사이트 등에 배송사업자의 배송 서비스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2항 배송사업자에 대한 배송 서비스 평가 결과가 회사가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회사는 배송사업자의 회사 배송 프로그램(앱)의 접속 권한을 상실·제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품 수령인은 손님을 말한다. 손님의 별점 평가를 통해서 앱 접속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약관에 집어넣었다. 회사는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공지하지 않는다."(101-4)


"〈제14조 면책 2항 배송사업자가 배송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배송사업자의 책임과 비용으로 해결하여야 하며, 회사는 이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습니다.〉 플랫폼의 욕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조항이다. 배송사업자이기 때문에 사고 나면 오롯이 사장인 네가 책임지라는 뜻이다. 과연 라이더가 사장일까?" "계약 내용만 보면 책임은 회피하고 경제적으로는 종속시키는 독소 조항이 가득하다. 계약서엔 회사의 책임과 의무에 관한 사항이 거의 없다. 서로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진행되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서명해야 하는 계약은 결코 자유로운 계약이 아니다. 사용자와 노동자를 규정하는 법률이 자유로운 계약을 기반으로 한 민법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동자를 보호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법인 이유를 쿠팡이츠 계약서가 잘 보여준다. 플랫폼이라는 간판을 붙인다고 해서,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약관'을 쓴다고 해서 이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107-9)


4 개인사업자인가, 근로자인가


"(요기요플러스의) '배송 업무 위탁 계약서'라는 제목의 계약서 '제6조 을의 지위'에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나온다. 〈'을'은 '갑'의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의 지위로서 '갑'에게 종속되지 아니하며, 위탁 계약 업무는 '을'의 재량과 책임하에 수행하되, 본 계약에서 약정한 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의무를 부담한다.〉" "'제4조 위탁 계약의 이행 방법'에는 음식의 배송 순서, 배송 시간, 배송을 위한 고객과의 연락 등 배송 업무 수행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을의 재량과 책임으로 결정한다고 적혀 있다. 이 계약서만 보면 배송 업무 일체를 을인 라이더에게 맡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기요플러스는 용산에 사람이 부족하면 성북에서 일하던 라이더를 용산으로 이동시켰다. 식사 시간에는 아예 조를 편성했다. 1시와 2시는 철수와 영희, 2시와 3시는 재덕과 정훈, 3시와 4시는 윤정과 미정 등으로 조를 짜서 공지했다. 당연히 근태 관리와 강제 배차가 이루어졌다. 라이더에게 배송 업무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한은 없었다."(127-9)


"배민라이더스는 2019년 여름, 라이더를 모집하기 위해 입사 4주 안에 200건 이상의 배달을 하면 100만 원의 보너스를, 그다음 4주 안에 또 200건 이상을 하면 100만 원의 보너스를 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8주 일하면 총 200만 원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고가 나면 보너스를 못 받는다. 라이더의 잘잘못은 따지지 않는다. 라이더의 잘못이 없어도 사고가 나면 무조건 프로모션 조건이 사라진다. 프로모션 때문에 무리하게 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지각, 무단결근, 무단 조퇴 등에 대해 단 1회라도 근무 건당 300원씩 차감한다는 페널티 제도였다." "이 공지는 카톡으로 하는 임의 조치가 아니라 서면 계약 조항이었다. 플랫폼 기업이 그렇게 강조한 '우리 라이더들은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예요'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계약이다."(139-41)


# 2019년 11월 6일 라이더유니온 기자회견 이후 페널티 제도 폐지


"배민라이더스는 안정된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업으로 일하는 '라이더스'라는 이름의 라이더를 모집했고, 순간순간 급증하는 배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부업으로 일하는 '배민커넥터'라는 이름의 라이더를 따로 모집했다." "2019년 7월, 배민커넥터를 모집하면서 회사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배민커넥터는 '일반인'이므로 전업 라이더인 '라이더스'와 같은 조건에서 전투콜을 수행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배민커넥터로 새로 들어온 라이더에게 15초 먼저 배달 콜을 볼 수 있도록 조치했다. 라이더스는 15초 동안 배민커넥터가 가져가고 남은 배달을 처리하는 신세가 됐다." "(한동안 이런 사정을 모르던) 라이더스들은 콜이 급감한 이유를 이상하게 여길 따름이었다. 이는 라이더가 앱의 알고리즘에 따라 디지털과 1:1로 관계를 맺고 일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과 달리 앱은 일그러진 표정, 격앙된 어조, 적절하지 않은 단어와 욕설, 말실수 등을 하지 않는다. 애플리케이션에는 표정이 없다."(145-7)


"중요한 것은 (라이더의 근무 환경을 실험해서 얻은) 데이터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속도와 숫자가 아니라, 데이터화된 속도와 숫자라는 점이다. 가령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내비게이션에 나온 도착 예정 시간이 15분인 곳을 배민 라이더가 신호 위반과 과속, 자기만이 아는 지름길과 골목길을 통해서 7분 30초 만에 도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실제로는 20명쯤 필요한 일을, 초인적인 노동을 하는 배민 라이더 10명이면 충분하다는 데이터로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데이터화·알고리즘화된 노동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중립적이라는 환상을 만든다." "회사 측도 이게 정말로 괜찮은 시스템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돌려봐야 안다. 많이 돌려보고 데이터를 축적하면 할수록 서비스는 나아진다. 게다가 배달이 덜 발전한 나라로의 진출을 노린다면, 배달에 최적화된 한국에서의 끊임없는 실험은 합리적인 경영 전략이다. 그래서 배민라이더스 라이더들이 자신을 '실험용 쥐'라고 부르는 것이다."(148-9)


"라이더들 간의 갈등이 단순히 배달료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배달료뿐 아니라 오토바이 임대료, 배달 개수 등이 기존 라이더, 배민커넥터, 신규 라이더 사이에 모두 달랐다. 그 결과 라이더들 사이에 위화감이 커지고 갈등이 생겼다. 단결은커녕 원수가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보인다. 배민라이더스는 이 갈등을 잘 활용했다. 배민커넥터에 대한 우대 정책으로 라이더스의 불만이 고조되자 배민커넥터에게 20시간 근무 제한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라이더유니온이 매일 바뀌는 프로모션에 문제를 제기하자 회사는 프로모션을 없애버렸다. 일부 라이더들은 라이더유니온이 설쳐서 근무 조건이 불리하게 바뀌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라이더들은 출근하는 공장도, 함께 밥을 먹는 식당도 없기 때문에 노조가 이에 관해 해명하는 전단 한 장 뿌릴 수 없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갈등을 악용해 노조를 탄압했던 대기업들이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150-1)


5 부릉은 무엇으로 사는가


"2019년 3월 28일 배달 대행 플랫폼 부릉은 라이더 4명의 애플리케이션 접속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약이 되어 있는 것도 없는데 그러면 저희가 계속 이거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본사가 거짓말한 건 아니다. 플랫폼 사는 동네 배달 대행사와 위탁 계약을 맺고, 동네 배달 대행사는 다시 라이더와 계약을 맺는다. 따라서 라이더와 플랫폼 회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본사와 전 지점장이 갈등을 빚은 원인은 배달료였다. 전 지점장 김 씨는 1.5킬로미터 이내의 배달 한 건당 3,700원의 높은 배달료를 라이더에게 지급했다. 부릉 본사는 이것이 시장 가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500원을 인하하라고 요구했다. 김 씨는 거부했다. 지점장이 갑자기 교체되고 배달 단가가 일방적으로 내려갔다." "부릉 본사가 배달 단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배달 단가는 프로그램 사가 정하지만, 라이더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게 부릉의 입장이다."(163-5)


"배달 대행 플랫폼은 백가쟁명이다. 춘추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달 대행 프로그램 사는 동네 배달 대행사와 음식점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배달 한 건당 프로그램 사용료를 가져감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따라서 지역 배달 대행사와 음식점을 늘리는 게 핵심이며, 이를 통해 디지털 지대를 가져가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배달 대행 프로그램 사들이 프랜차이즈화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전략도 각양각색이다. 이 책에서는 부릉처럼 배달료, 음식점 영업 등에 상당히 개입하는 배달 대행 플랫폼을 '관리형 배달 대행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탁 계약한 동네 배달 대행사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사용료만 받는 플랫폼을 '디지털 임대형 배달 대행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건물의 출입 통제부터 세입자까지 직접 관리하는 건물주고, 후자는 임대만 주고 세입자는 신경 안 쓰는 건물주라고 보면 된다. 전자에 비교해 후자가 영세한 편이다."(171)


"동네 배달 대행사의 가장 큰 특징은 '초기 자본주의'와 닮았다는 점이다. 배달 세계에서 만들어진 규칙은 있지만, 우리 사회가 만든 근로자 보호, 사고 예방과 치료, 보호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네 배달 대행사에서 일을 시작할 때 대부분은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흔히 라이더를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라이더가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배달 일 한다고 사업자를 내는 라이더는 없다. 세무적으로 따지면 인적용업사업소득자다. 그럼 실제로는 어떻게 일할까? 그냥 일한다. 심지어 면허를 확인하지 않는 예도 있다. 무보험 오토바이를 태우는 지역 회사도 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계약서도 안 쓰는데 산재보험에 가입할 리 만무하다. 반면 규칙은 빡빡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 주말 필수 근무 등 출퇴근에 대한 지휘·감독이 엄격하다. 휴무도 마음대로 못 쓴다."(175-6)


"2009년 11월 〈OBS〉에서 동네 배달 대행업체 약 30곳을 조사했다. 이 중 4곳은 산재보험 가입 자체가 불가하다는 답변을 당당히 했고, 25곳은 모두 원하면 가입이라고 안내했다. 단 한 개 업체만이 법이 규정한 대로 의무 가입이라고 답했다. 의무 가입이라고 답한 곳도 라이더로부터 산재보험료로 매일 1,200원을 걷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인 라이더가 한 달에 부담해야 할 산재보험료는 15,630원이다(2019년 기준, 2020년은 14,030원이다). 나머지 절반의 산재보험료 15,630원을 업주가 부담해야 하지만, 라이더에게 전가했다. 즉 30곳 모두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라이더가 원하면 가입시켜준다는 업체들 가운데 산재보험료 명목으로 매일 1,600원을 걷는 업체가 있는가 하면, 월 4만 원, 심지어 매일 3,000원을 걷는 업체도 있었다. 산재보험료를 종사자와 업주가 5:5로 분담하는 경우는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무법천지라고 할 만하다."(181-2)


6 플랫폼 산업의 진짜 '혁신'을 위한 조건


"근로기준법은 그 이하로는 근무 조건을 후퇴시키지 말라는 최후의 보루이다. 문제는 이 보호에 울타리가 있다는 점이다.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들어오지 못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종속성'이다. 근로자에게는 반드시 자신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사장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최근에 근로자 개념을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장이 여러 명이거나 사장을 찾기 힘든 플랫폼 노동자에게 어울리는 대안이다. '경제적 종속성' 개념을 대입해서, 비록 그 회사에 출근하지 않더라도 그 기업을 위해 일하고 이를 통해 소득을 얻는다면 근로자로 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본사로부터 물건을 납품받고, 가격, 영업시간, 마케팅 등의 관리를 받는 편의점 사장도 근로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근로자 개념의 확대를 통해 기존 근로기준법으로 플랫폼 노동자뿐 아니라 프랜차이즈의 지휘·감독을 받는 위장된 자영업자를 보호할 수 있다."(207-8)


"(이런 조치 후에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 정말로 개인사업자로 일하기를 원하는 라이더들을 위해서는 공정거래법의 적극적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 여기서 핵심은 플랫폼 노동자가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해 신고하고 대처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기반이 최소한 현재의 노동청과 노동위원회 근로감독관 제도만큼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불공정 거래 행위로 인해 플랫폼 노동자의 손해를 입증할 수 있는 징벌적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플랫폼 노동자가 소를 제기하고 대응하기란 매우 힘들다. 새로운 계약에 동의하지 않으면 앱 접속 자체가 막히기 때문이다. 자료를 확보하기도 힘들다. 앱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는데 접속을 막으면 어떻게 증거 자료를 확보하겠는가? 따라서 증거를 중시하는 송사에 휘말리면 정보가 없는 플랫폼 노동자가 일단 불리하다. 플랫폼이 가진 정보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209-10)


"이런 법제도들의 활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조합 할 권리다. 다종다양한 산업 형태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일률적 적용이 어렵다는 고민이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를 박탈하는 논의로 흐른다면 곤란하다." "이 문제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ILO(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을 비준하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결성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다. 국가가 전교조를 하루아침에 법외노조라고 통보하듯이 법적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또 종속성이 약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조 할 권리는 노동청의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기존 근로기준법이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낡았다고 하는데, 낡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노조법이다. 일단 전 세계의 상식인 ILO 핵심 협약 비준으로 누구나 노조할 수 있게 만들자. 핵심 협약을 비준하기 싫다면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면 된다."(212)


"강력한 정보 독점과 속도도 문제다. 과거의 기업이라면,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중간 관리자가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만나 술도 마시고 회유도 하고 보너스도 돌릴 것이다. 하지만 플랫폼 기업은 수만 명이든 수백만 명이든 간단한 앱 공지와 문자 하나로 모든 노동자에게 즉각 선전할 수 있다. 배민라이더스는 배민커넥터의 노동시간을 20시간으로, 라이더스의 노동시간을 60시간으로 줄이는 발표를 하면서 민주노총과 협의했다는 문장을 붙여 노동자들 간 불화를 조장했다. 또한 매일 바뀌는 수수료에 대한 라이더유니온의 문제 제기에 프로모션 폐지로 맞섰다. 이렇게 되면 라이더들은 자신들의 불리한 처우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플랫폼이 아니라, 거기에 힘도 없이 맞선 노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노조는 이에 대응할 수단이 많지 않다. 동료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과 소통 창구의 독점은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무력화한다."(214-5)


"식상하지만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거리에 돈을 뿌리고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배달 산업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길거리가 아니라 사람과 안전, 시스템에 돈을 뿌려야 한다. 이 돈을 함께 지급하는 것이야말로 플랫폼 기업이 만들어 낸 난폭 운전과 수많은 사고에 대한 해결책이다. 사실은 이 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탄생한 것이 플랫폼 산업이다. 플랫폼 산업은 고정급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또한 소비자의 수요와 라이더의 공급, 계절적·문화적 요인에 따라 배달료는 물론이거니와 근무 방법과 시간 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노동력 데이터를 갖고 있다. 이것들이 플랫폼의 존재 이유다.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에 기반을 둔 명령이 듣고 잊어버릴 수 있는 욕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빅데이터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AI가 정한 근무 조건은 신의 심판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려 사람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인간이다."(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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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3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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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B. 권력공백의 단계 : 파펜-슐라이허 시기


제7장 "신국가"


"브뤼닝의 실각과 함께 권력은 힌덴부르크를 둘러싼 소규모 집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종식을 의미했다. 1930년 이후 대통령정부라는 개념은 헌법적 현실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우리가 그의 정부에 건 기대들을 어떻게 평가한다 하더라도─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의 지배의 의회민주주의적 작업방식을 확고히 지켰다. 브뤼닝의 후임자인 파펜이 당시 자신의 정부가 권위적인 유형의 브뤼닝 정부를 단순히 지속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되돌아보면 파펜 스스로가 그의 정부와 브뤼닝 정부 간의 〈결정적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펜의 반응은 새 선거를 통하여 마지막 남은 잠재적인 민주적 다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선거가 얼마나 과격한 결과를 낳을지는, 당시의 정치적 사정을 보든 주 의회 선거의 경과를 보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15)


"파펜 정부의 형성과 형태는 독일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거의 철저했다. 거기에는 중간계급과 노동자층 대표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공화국으로부터 빌헬름 제국 시기의 귀족-관료적 정권으로 그리고 경제적 권력 집단들로의 후퇴를 입증했다. 좌파들의 신문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귀족내각〉, 〈반동적 집중의 내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던 반면에, 중간정당들의 반응 또한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국가당은 헌법정신에 거슬러 구성되었고, 극우정당들이 공식적으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 극우정당들의 지시만을 수행하는 내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기독교 사회당 역시 분명히 거리를 두었고 적어도 나치당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함께 지도록 요구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그들이 새 제국정부의 형성과 목표 설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아무런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고집했다."(23-4)


"슐라이허가 기존 권력구조의 틀 내에서 나치당을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에, 파펜 주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개혁, 곧 권위주의적 국가의 창출을 위해 그러한 조치들을 이용하고자 애썼다." "그 핵심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판에 의거하여 〈입헌적인 [즉, 영향력이 없을 정도로까지 제한된] 의회주의〉를 통해 국가질서의 정치적·헌법적 기본 특징들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중심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요구는 헌법 제54조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는데, 이에 따르면 정부는 제국의회의 신임을 필요로 했고 불신임 표결의 경우에 물러나야 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적 반(半)절대주의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즉, 의회의 통제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노출된 국가수반은 내각을 자신의 〈초당적인〉 통찰력으로 선택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정부를 모든 당파적 이해관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했다."(26-9)


"〈신국가〉의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권위관계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군주제적 이데올로기에 의식적으로 접목하여 나치의 지도자 개념에 맞서 〈혁명적-보수적〉 지배 개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국가의 〈지배자〉로서의 힌덴부르크가 부분적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히틀러보다 우위에 놓여졌다. 그 때문에 포괄적인 헌법 개혁을 통해서 〈정당들과 사회세력들의 놀이 공으로서 이리저리 차이지 않고 그 위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강력하고 초당적인 국가권력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질서는 〈지배의 헌법적 생존조건들〉로부터가 아니라 정신적-도덕적 조건들로부터 그 정당성의 기반을 얻었다. 그것은 〈결코 협상 대상이 아니며〉 제한되어서는 안 되었고 〈신에 의해서만 책임을 지므로 본질적으로 절대적이었다〉: 〈지도자는 초자연적으로 정당화'되어지는' 반면 (신이 보낸 인물인) 지배자는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37)


제8장 프로이센, 파펜의 쿠데타


"프로이센은 1919년 이래 짧았던 두 번의 예외(슈테거발트 내각과 마르크스 내각)를 제외하면 사민당 주도의 바이마르 연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전보다 더 정치적 타협 준비가 되어 있는 사민당이 〈부르주아 블록〉 내에 계속 머물렀고, 중앙당이 철저한 민주정치를 더욱 결연하게 주장했던 바로 이 순간의 프로이센 정치 상황은 제국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반적인 권력 이동이 바이마르 질서의 가장 중요한 이 토대(사민당 주도의 연정구조)를 고립시켰다." "브뤼닝의 실각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중요한 부분 문제인 프로이센 문제를 구체적인 정치적 결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극우적 파트너와 독일민족인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는 파펜 내각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장 거대한 지방정부(프로이센)를 신속히 제압하여 자신의 권위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82-3)


"프로이센 내각은 파펜에게 내정 간섭의 법률적 계기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파펜의 간섭의 근거는 무엇보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 쿠데타를 헌법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주요 논거는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이었다. 우익이 활용했던 그 오래된 전술, 즉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와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를─실제 의미와는 상관없이─동일시하여 사민당을 포함한 모든 연정을 〈볼셰비즘적〉이라고 비난하는 전술은 파펜과 힌덴부르크의 마지막 의구심을 잠식시킴으로써 새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관건은 극단적으로 분열된 의회가 정상적인 후속 정부를 구성하지 못할 경우 정부 운영의 문제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주장이, 의회 소수파인 〈민족적 야당〉이 폭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정부 교체의 〈국가 정치적〉 근거를 다시 한 번 더 제공해야 했다."(85-90)


"프로이센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파펜은 평소의 방식대로 대단히 신속하게 진행된 협의를 〈이것은 결국 국가이성의 활동이다〉라는 말로 끝냈다. 이로써 결국 법치국가 사상에 대해 권력국가 사상이 우위에 섰다는 것이 아주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제국의 간섭〉은 결코 은밀한 쿠데타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동원된 제국군대에 의해 지원받았고, 독재의 계관법률가 칼 슈미트에 의해 법정에서 변호되었다. 〈헌법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2개의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규정을 반대하는 데 〈국가이성〉이 동원되었다. 반 년 뒤 파펜은, 슐라이허와 함께 연합하여 행한 쿠데타에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쿠데타의 명수를 만났다. 하지만 히틀러의 부총리로서 파펜은, 히틀러가 자신을 위해 헌법 전체를 폐지하는 데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될 것이었다."(100-1)


"쿠데타는 진정한 내전상황을 초래했다. 한편에서는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에게 충성하는 제국군대가 서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기관으로서 프로이센 경찰과 아울러 바이마르 연정 정당, 제국기치, 그리고 총파업이라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 수단을 갖고 있는 노조가 서 있었다. 그리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각자 고유한 목표에 기초한 이 전선 사이에는 또한 나치 전투조직과 공산주의 전투조직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경찰지도부, 특히 베를린 경찰지도부가 저항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저항 의지를 원천적으로 억제하는 데 있어서 제국군대에 대한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존경심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속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무질서와 혁명적 저항에 대한 혐오가, 관헌국가로부터 전수된 이러한 혐오에 근거한 일련의 금기사항들이 위와 같은 존경심과 더불어 한 역할을 하였다."(113)


"제국기치의 한 회원의 말을 믿는다면, 조직을 강화하고, 모든 반(反)공화주의적 노력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영구적인 공화국 긴급 보호 상황〉 선언에 전력투구할 강한 세력이 제국기치 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장은 대단히 불충분하였다. 그리고 결정권은, 7월 20일 헌법에 근거한 항의로 대항했지만,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지닌 자신들의 직책에 따른 의무인, 구체적인 정치적 책임의식을 지니고서 대항하지 못했던, 너무 조심스런 집행부와 공화주의적 장관들, 정당집행부, 노조집행부에게 있었다." "독일사민당의 최고결정기구는 7월 20일 사건 4일 전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헌법의 법적 기초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합법성 유지가,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헌법 적대세력에 의해 합법성이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에 맞는〉 유사합법성으로 전환되는 곳에서는 그 한계를 갖기 마련이었다."(116-7)


제9장 파펜 내각의 고립


"프로이센에 대한 작전은 파펜 시대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후, 7월 31일 선거가 반대 진영의 압도적인 다수 득표와 함께 대통령 내각의 자화자찬격 정부 계획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은 순간 환상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파펜이 제국의회 해산과 선거 일정의 최대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출발을 위해 벌었던 8주의 기간은 이날로 막을 내렸다. 모든 정당이 기대와 우려 속에서 기다렸던 선거 결과는 성공적 작전의 주역들이 희망했던 명예 획득을 저해하였다." "프로이센 작전은 공화국 지지파의 약점을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나치당의 권력 장악 기대감을 강화하였고 전체주의 운동권이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결정적 선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며칠 동안 〈신국가〉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폭력적이고 소란스러운 프로이센 장악은 강화된 국가 권위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그것에 대한 민주적 정당들의 외면을 확고하게 한 동시에 반항적인 나치당에게 그들의 권력 장악 구상을 위한 좋은 사례를 제시하였다."(127-8)


"1932년 7월 31일의 선거는 내정적 정쟁(政爭) 중지와 집회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유혈충돌로 분출된 극도의 긴장과 흥분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전반적으로 선거 결과는 모든 진영에 실망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에 비해 증가된 투표율에서 나치당은 그들의 제국의회 의석을 충분하게 배가할 수 있었으며 주 의회에서 차지했던 규모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얻었던 득표 이상을 많이 넘어서지는 못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 조건 아래에서 나치가 이룩한 확장의 최종점은 이미 도달했던 것이다. 독일 유권자의 62.8%가 이 시점에조차 나치 지배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던 반면 나치가 도달한 상한선은 37.2%였다. 나치당은 사민당이(독립사민당 없이)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선거에서 당시 단독 지배권을 주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때 얻었던 득표율보다 낮은 지지를 얻었다."(137-8)


"한편 부르주아적 중도진영은 사라졌으며 〈민족〉 진영과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공고화 이후 나치당의 더 이상의 팽창이 어려워 보였던 반면에, 그 양 진영 사이에 중앙당은 동요 없이 서 있었다. 이처럼 정당 진영의 경화와 포화상태 속에서 정당의 종식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거나─논의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유리한 타협을 가능하게 하였을 자기 진영의 성장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채 서로 맞섰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무엇보다 대통령 내각의 막대한 패배였다. 그의 유일하고 안전했던 의회 내 기둥이었던 독일민족인민당과 독일인민당은 대폭 약화되어, 정부는 중앙당과 나치당 협력에 의해 문제 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 유리한 과반수는 파펜 정부를 헌법상 정식으로 축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막을 수 있는 길로서는 파펜과 히틀러의 협력 아니면 제국의회의 해산, 이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141-2)


"〈히틀러의 권력 요구를 제어하고〉 그의 대중 운동을 〈긍정적인〉 민족주의 안에서 강력하고 제국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대통령 내각으로 이끈다는 오랫동안 추진되어 온 계획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7월 31일은 새로운 단계를 열었으며 그 결과는 히틀러를 전문가들이 보증하는 정부의 총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슐라이허가 볼 때는 상황이 아직 그런 조치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즉, 제국군대와 국가 기구는 온전해 보였고,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의 입지는 신뢰할 만한 제어력과, 대통령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야망에 대한 균형추를 보증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에는─제 3단계로서─나치당을 분열시키는 대안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1932년 7월, 8월 슐라이허가 추진한 계획의 전환은 그로 하여금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제국군대의 권력 토대가 충분치 않았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다."(144-5)


"8월 30일 파펜, 가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노이데크에서 새롭고 대폭적인 경제 및 제도 계획에 관해 논의했다. 이 기회에 최종적으로 의회해산 명령이 결정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선거를 수개월 연기하며, 그동안 비상명령을 통한 대규모 제도 개혁을 실시하는 계획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하지만 뢰베 대신에 괴링이 제국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사민당이 의장단과 모든 서기직으로부터 배제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신임 의장이자 의회에 적대적인 〈운동〉의 대표인 괴링은 의회와 대통령 내각을 반목시키고, 의도된 의회해산에 대한 항의의 표현으로 이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입증된 제국의회의 다수 확보 능력과 업무능력을 강조함으로써 나치당의 전술적 능력을 과시하였다. 이틀 후 연립내각 협상의 지속을 알리는 중앙당과 나치당 공동성명이 뒤따랐다. 이제 정부는 거의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사방으로부터 동시에 위협받고 있음을 깨달았다."(159-60)


제10장 파펜에서 슐라이허로


"1932년 11월 6일에 선출된 제국의회는 새로운 연립 가능성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부정적 다수(의석의 50.7%)는 옛 브뤼닝 블록에 대응했다. 이제 사민당에서 인민당까지 〈대연립〉(38.2%)도 하르츠부르크 전선도(42.3%) 정부 구성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기본적 상황 내부에서 중심축의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중앙당-바이에른인민당과 나치당 사이의 연립을(48.8%) 불가능하게 했고, 민족인민당은 7월 31일에 잃었던 핵심적 위치를 되찾았다." "부르주아 정당들의 4년에 걸친 감소 또한 이제 멈췄다. 극히 명백히 여기에 책임이 있었던 것은 7월 선거에 비해 낮은 투표율(80.6% : 84.0%)만도 아니었고, 또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투표로부터 추적당한 주민들의 싫증도 아니었다. 정치적 발전의 가능성 있는 전환점은 나치당의 지속적 상승이라는 신화가 일격을 맞았음─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배 요구에 대한 거부─을 알려주었다."(190-2)


선거결과는 나치의 팽창에 맞선 민주적 정당들의 증가된 대항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미 시작된 나치당의 후퇴 운동은 며칠 후에 작센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및 뤼벡의 시장선거에서 계속되었으며, 모든 선거 단위에서 가시적으로 된 충분히 가능성 있는 현상이라는 점은 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 대학생들의 선거행위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특히 나치당 내부의 분위기와 고려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식이었다. 히틀러의 완전한 권력 요구는 이제 특히 나치당의 당지도부에서 파괴 현상과 분열 현상을 야기한 심각한 부담에 직면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처음에 힌덴부르크와 파펜의, 이어서는 슐라이허의 새로운 그리고 최종적인 길들이기 시도를 야기한 상황이었다. 너무도 명백히 나치당의 팽창 능력에 한계를 보여준 마지막 선거의 결과는 길들이기 구상의 반대자들을 나치의 권력의식 및 그 조직적인 토대에 대한 새로운 과소평가로 오도했다."(209)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및 카스와의 협상이 실패한 뒤) 먼저 파펜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사실 파펜은 히틀러의 비타협적인 태도가─8월 13일 이상으로─진정한 국가비상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을 명확히 제시했다. 제국의회에 반대하고 거의 무한정 확장된 헌법 제48조로써만 통치하던 힌덴부르크는 이제 그 이상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이 그러한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까지 정부를 유지시키고 그의 총리직 아래서 모든 저항에 맞서 필요할 경우 정부의 계획을 폭력으로 관철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반항적인 제국의회의 배제, 모든 정당들 및 반(半)정치적인 조직들에 대해 제국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 그리고 국민투표나 〈새로 소집된 국민의회〉를 통하여 허용된 헌법 개혁 등은 후겐베르크 측에 의해서도 강하게 영감을 받은 제안이었고, 이를 위해서 파펜은 〈만일의 경우 바이마르 헌법의 중단〉을 감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235-6)


"슐라이허는 독일민족인민당에 의해서만 담지된 그토록 협소한 내각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자신의 필생의 업적, 즉 국방부장관의 초당적인 역할을 위험에 빠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권력도구를 폭력적인 복고정책을 위해서 투입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는 의문의 여지 없이 히틀러에 대한 폭력 행위가 위험스러워 보이게 한 〈제국군대의 내적 분열〉을 고려했음에 틀림없었다." "슐라이허는 다시 한 번 〈제국군대의 신뢰〉에서 나오는 전권적인 주장으로 정치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늙은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또 정치적 위기의 이성적인 중재를 위한 최후의 기회를 허비할 수도 있는 총리를 해임했다. 그와 함께 가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광범위한 개혁안들은 외관상 명백히 포기되었지만 〈새로운 국가〉라는 이상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240-2)


"슐라이허의 관념들은 도달가능한 모든 정당들과 집단들의 접근과 협력에 지향되었으며, 파펜 식의 원칙적인 개혁 선전을 포기했다." "그는 의회의 일시정지(새로운 선거 없이)를 생각했다. 제국기치와 철모단은 통일적인 제국전사연맹으로 통합되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해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들은 하나의 단일 노동조합으로 통합되고, 나치당은 완전히 금지되어야만 했다." "이 계획 또한, 사민당 중앙위원회가 어떠한 협정도 거부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사민당은 공산당과의 경쟁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화된 장군에 대한 불신을 공화국의 파탄에 대한 인식보다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두 가지 요인들을 경시했는데, 이들은 결국 일차적으로 그의 실각과 〈길들여지지 않은〉 나치당의 승리를 초래했다. 그 두 가지 요인이란 그의 달갑지 않은 친구이자 그의 등 뒤에서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파펜과 자신의 모든 계획을 지원했던 독일민족인민당의 이탈이었다."(256-7)


제11장 "집권"으로 가는 길


"사건은 많았지만 결과는 적었던 1932년 말, 정치적 장면은 제국대통령 관저를 둘러싼 중재자들과 책략가들의 바쁜 활동으로 결정지어졌던 권력 공백의 징후 속에 있었다. 그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짧은 파시스트적 간주곡 이후의 그들의 집권을 꿈꾸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적 통일전선과 민주주의·의회주의적 결집의 구호들 사이에 끼여서 노동조합의 실용주의적 요구의 압박을 받고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상당한 기반과 행동의 자유를 상실했다. 중앙당은 카스의 잃어버린 핵심적 지위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폭넓은 우익 정부의 구상을 위해 좌익과의 연대를 대폭적으로 희생시켰다. 독일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사망했고, 중도 우익은 완전히 분열했으며,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던 보수주의의 독일 민족주의 부류는 파펜의 전복으로 새로운 내적 갈등에 빠졌다. 나치들은 마침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오인할 수 없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259)


"슐라이허는 (상호대립을 상쇄하고 미미한 정부의 지반을 확대하기 위해) 파펜의 프로이센적 해결안을 고수하는 동시에, 의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회보험의 사안을 지지하며 노동조합과 협상했지만, 독일 산업의 제국협회 요구에 대해서도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를 거부했지만, 대통령 내각은 그의 〈초당파적〉 노선이 정당정치적 이해를 통해 방해받지 않도록 할 것임을 장군이자 제국 국방부장관으로서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실각 2주 후인 12월 16일, 파펜은 귀족클럽의 연례집회에서 명예 손님으로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좌절된 개혁 계획을 슐라이허의 균형 전술에 대해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파펜은 스스로가 집권해 있던 1932년 8월과 11월에는 히틀러에 대한 모든 양보를 거절하고 슐라이허의 계획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병든 개인으로 강등된 그는 스스로 히틀러를 통해 권력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했다."(260-8)


"브뤼닝의 실각 이후, 이제 86세인 힌덴부르크는 사실상 〈측근〉(Kamarilla)이란 슬로건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을 만큼, 그의 최측근의 영향력에서만 자문을 받았다. 4명의 충복 중 새로운 별이 파펜이었던 반면에, 슐라이허의 영향력은, 분명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마이스너와 무관하지 않게, 눈에 띄게 줄었다." "파펜에 대한 재신임이 힌덴부르크의 희망사항에서 첫 순위를 차지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치당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정부를 공격하는 방식은) 파펜의 첫 임용을 이끌었던 생각이었고, 브뤼닝의 배제를 초래했던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나치 문제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분열적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이러한 관념 때문에 일찍이 브뤼닝의 해결 노력이 저지되었다. 그것은 히틀러와 싸워야 할지 그를 등용해야 할지 선택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었고, 그가 신임하는 사람을 통해 나치당을 그의 〈민족주의적인〉 친구들의 진영으로 이끌고자 하는 기대이기도 했다."(290-1)


"슐라이허의 억제책은 우익단체들과 경제계들에게는 실망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들은 종국적으로 히틀러 군대 쪽으로 옮아갔다." "장군은 황태자가 정상에 서 있는 군주정의 복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파펜의 실패 후에 슐라이허를 바라보며 가졌었던 기대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나치 지도부는 나치적 혁명에 뒤이어 군주정적 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전적으로 열어 놓았고─빌헬름 2세의 귀환을 거부했던 브뤼닝과는 다르게─파펜이 실제로 힌덴부르크를 그러한 해결에 관하여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아 보였다. 군주정으로 넘어가는 교각으로서의 온순한 나치, 그것은─무솔리니의 해법을 바라볼 때─이제 바이에른의 군주정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외교계의 계산 속에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고려되었던 생각이었으며, 또한 대기업 후원자들의 희망을 움직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은 후에는, 그러한 희망이 곧바로 무시되었다."(305-7)


"힌덴부르크는 〈빌헬름 2세와 히틀러 사이에서 남의 자리를 맡아주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도 1933년 1월 30일의 국민투표도 아니었다." "불분명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았던 제국군대의 권력 지위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저지시킬 능력이 없었다." "반 년 뒤에 이미 효력 있는 안전장치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민주주의의 담지자들은 배제되었다. 즉, 정당들, 의회, 주, 노동조합들, 경제, 언론과 문화가 〈획일화〉의 궤적을 따라 사라졌던 반면에, 제국군은 확실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중심적 민주주의의 껍데기뿐인 연속성은 1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는 힌덴부르크가 사망했고 군대는 1934년 6월 30일의 학살─에른스트 룀 숙청─을 재가했으며, 아무런 저항 없이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바쳤다. 나치 지배가 공고화되었던 이 시기의 끝에 히틀러의 무제한적인 단독 통치와 그의 전체주의적 기구들이 확립되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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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2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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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A. 권력의 상실 과정 : 브뤼닝 시대


제1장 브뤼닝 정부의 성립


"의회가 지배하는 마지막 다수파 정부─사민당의 뮐러 내각─는 1928/1929년에 오랜 협상 끝에 그리고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출범하였으며, 수많은 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연립정부들보다 더 오래 유지되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공화국의 구조와 메커니즘의 민주적 건설의 태만함 등은 더 없는 부담이 되었고, 그 결과 공화국은 비록 뜻밖인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 최대의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새로운 정치형식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고, 전쟁 이전 시기의 안정된 사회에 대한 기억과 냉정한 현재에 대한 맹목적 실망이 너무 생생했다. 따라서 모든 위기현상이 전후문제라는 보다 더 큰 연관관계 속에 있다면, 그 현상은 대중을 타협으로 애써서 균형을 이룬 정당정치에 대한 분노로, 또 복잡하지 않은 강력한 질서, 결단력 있고 권위주의적인 지도부 등에 대한 강한 기다림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16-20)


"유럽의 동반자가 될 당시의 적대국가들과 끈질기면서도 평화적인 논쟁에서 공화국의 외적인 해방과 내적인 공고화를 위한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의 수단인 〈화해정책〉은 새로이 시작되는 경제위기의 인과관계에 빠져들었다." "슈트레제만의 죽음은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결합되었다. 이 세계사적인 사건은 수출시장에서 독일의 상황에, 외국자본의 회수에, 산업상황에, 실업의 증가와 농업의 판매위기에 동시에 뚜렷이 악영향을 미쳤다. 전면에서 이익단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29년 3월에 새로이 형성된 농업의 〈녹색전선〉 또한 의회 안팎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는 이미 1929년에 현저한 조세수입 감소를 기록해야만 했고, 절약에 대한 호소가 제기되었다. 1929/1930년 겨울엔 연립정부 내의 사회주의파와 자본주의파의 갈등이 번번이 일어났다. 이는 슈트레제만이 죽기 하루 전에 독일인민당과 사민당 사이에 타협을 달성한 후였다."(21-2)


"실업의 증가가 점점 더 거대한 사회적 부담금을 필요로 하였지만, 경제적 위기현상들이 조세수입의 감소에 반영되었을 때, 이제 갈등은 새로이 대연정의 정치적 영역에서 발생하였다." "독일인민당은 근본적인 개혁, 즉 사회적 부담금의 축소에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보았다. 이에 반해 사민당은 재정적인 치유를 무엇보다도 실업보험의 희생으로─바로 지금─실행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지지하였다. 사민당은 부담금의 증액 (피고용인이 항상 절반을 부담)과 보험부담금의 유지를 요구했다. 근본적으로 한편에서는 〈부담금 축소〉, 다른 한편에서는 〈부담금 증액〉이라는 투쟁구호와 함께 실업자의 보조 전반에 대한 요구권을 둘러싼, 말하자면 독단적인 〈자율경제〉에 맞서서 어렵게 달성한 노동자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한 인정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전선도 점차 정당정치적으로 명확히 특징지어졌으며, 대연립을 가로질러 진행되었다."(24)


"오락가락하는 사민당과 특히 〈비타협적인 노동조합들〉의 책임은, 향후 정치적 형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행사가능성이 의회주의 정부 형태의 타도와 더불어 완전히 가로막힐 위험성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립의 붕괴를 감수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구성원의 의지에 구속된 그리고 그 통일성의 유지를 위하여 투쟁하는 한 정당의 딜레마에 근거를 둔 〈비극적인〉 책임이었다." "그 결과는 가장 강력한 민주정당 및 제국의회의 완전한 자기배제였다. 반 년 후에 제국의회는 이론적으로도 대연립정부를 구성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이익정책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수주의적인 원칙들이 타협능력이 있는 현실주의를 이긴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 당 전략의 실패를 의미했으며, 사민당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패배였다." "1930년 3월 27일은 〈사민당과 독일민주주의 전체의 암흑의 날〉이 되었다."(38-9)


# 1930년 3월 브뤼닝 정부 출범


제2장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깊은 불만은 공산당보다 나치당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 나치당의 상승은 즉각 가시적으로 사민당을 축출하고 중도우파의 지탱가능한 연립을 안정시키려던 힌데부르크(바이마르공화국 2대 대통령)-브뤼닝 계획의 파탄을 의미했다. 이미 후겐베르크─브뤼닝 내각 초기부터 제국의회의 해산공작을 벌였던 독일민족인민당의 당수─의 국민발의를 위한 선동은 당에 위신과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점차 〈이행정책〉에 불만을 품은 경제계의 재정적 후원까지도 얻게 되었다." "이 전복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활동능력과 연립능력을 갖춘 옛 제국의회의 파괴에 뒤이었다. 적어도 여러 지역 선거의 결과들은 이 운동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운동은 독일민족인민당의 약화와 중도정당의 감퇴에 모든 주에서 나치당의 놀라운 성장을 대비시켰던 반면에, 공산당도 부분적으로 사민당을 제물로 삼아 득표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92-3)


"브뤼닝의 독자노선은 점차 국내정책이 복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재정개혁〉에 지향되어 있었으며, 그는 모든 다른 문제들을 이 문제보다 하위에 두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들을 여러 차례의 선언을 통하여 국내정치적인 결과에 상관없이 〈모든 합헌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제국의회의 배제와 해체에 직면한 모든 민주적인 정당들의 경고와 염려, 명백히 저돌적으로 성장하는 나치적 급진주의의 파괴적 선동에 대한 언급,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독일무대의 흥분과 무분별이 반영된 새로운 제국의회의 완전한 활동불능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브뤼닝의 사고와 계획 속에서 가차없는 정부령을 통하여 자신의 재정경제적 계획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과 계획들의 배후로 밀려난 듯했다." "브뤼닝은 자신의 확고한 개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의회에 반대하여 또는 의회 없이 예전에 종종 위협하였던 권위주의의 길로 나아갔다."(97-8)


"1930년 7월 15일에 브뤼닝은 정치적 협상 가능성 및 타협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재정적 조치들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제국의회의 논쟁을 개시했다." "7월 16일의 표결에서 정부는 공산당, 사민당, 나치당 등 야당과 독일민족인민당 다수파의 반대로 193 대 256으로 패배하였다. 뒤이어 브뤼닝은 정부가 (재정) 보전안에 대한 협상의 지속에 전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즉시 대통령의 비상령을 선포하는 길로 나아갔다. 정부가 형성된 후 독일민족인민당 우파를 끌어들이려던 정부의 희망이 거의 충족되지 못하고, 정치적 타협이라는 민주적인 길을 포기한 후, 이 길은 이제 외관상으로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사민당이 비상령을 무효화시키자는 안을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과 연결시켜 제출하자, 7월 18일의 격렬한 논쟁과 브뤼닝의 새로운 패배가 이어졌고, 이어 브뤼닝은 대통령령을 통해서 제국의회를 해산하였다."(99-100)


"브뤼닝은 1930년 7월 18일에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우연적인 다수(Zufallsmehrheit)의 저항에 반의회 투쟁으로 대답함으로써, 그리고 흥분한 국민들에게 그러한 상태에서 조기선거라는 거의 도발적인 (무리한) 요구를 부과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고려해왔던 경제정책을 (어쩔 수 없이) 일관성 있게 수행하고 있다는 전술적 의구심과 모든 정치적 고려를 일거에 희생시켰다. 이제 그는 선거를 통하여 의회에서 안정된 기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주로 민주적인 의회로 인한 계획들의 위험과 교환하여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위험을 얻었다. 그 영향 면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이 더 큰 위험은 이제 정치적 지평선을 점점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바이마르공화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잘 계획된 모든 경제적 조치들을 환멸스럽게 만들게 될 것이었다. 이제 원칙적으로 반공화국적인 나치당이 거리와 의회에서 제일의 정치적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109-10)


제3장 공황기의 정부


"1930년 9월 14일의 선거에서 제국의회 의석수의 증가로 인한 의회 신참자들의 대거 진입을 포함하는 의회에서의 엄청난 세력관계 변화는 오직 극단적인 정당들, 특히 나치당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나치당이 9배로 늘어난 원내교섭단체가 되어 제국의회로 들어왔을 때, 이미 선거운동에서 결코 소박하지 않은 대담한 당의 기대치는 초과 달성되었다. 나치당은 민족적 보수주의자들 대신에 대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대중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소부르주아층 및 농민층에 속하면서, 심리적으로는 감성적이거나 증오심에 불타는 왕조적·권위주의적 영광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브뤼닝은 이 선거가, 예상했던 나치표의 성장을 미연에 방지하고, 향후 4년 이내에 활동능력이 있는 의회의 권력배분을 만들어 냄으로써, 공황과 곤궁에 처한 정부가 극복되고 좌우의 열병에 가까운 급진적인 운동이 고갈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144-5)


"부르주아층을 선거에 끌어들인 구호들은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모든 부르주아 정당 및 우익정당들의 위협물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산당의 득표증가로 귀결되었고, 중도파의 결집은 근본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결국 〈책임 없는 자들의 승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비투표자들에 대한 호소로 5백만 명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은 주로 나치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증가하는 실업자 외에도 벌이가 나쁜 단기노동자들과 사무직원, 소기업가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 여기에 소시민적 중간계급, 농민층, 청년들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축과 내적·외적인 안전을 상실하였다." "본래 '신생정당들'은 청년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 (직접적인) '행동'이라는 비합리적인 철학 그리고 청년운동의 저항 이데올로기 등을 제공하였는데, 이들은 이제 정치적인 능동성으로 바뀌었다."(149-50)


"나치당은 1930년 11월 30일 브레멘에서 9월 14일에 비해 득표수(25.5%)를 거의 2배로 늘렸다." "브뤼닝은 28개 법안을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 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어 각 정당 간의 협의─그가 제출한 프로그램의 입법적인 측면에 대한 정규적인 의회의 논의─후에 아마도 다수의 동의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 12월 3일에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이미 이틀 전에 헌법 제48조를 근거로 하여 〈경제와 재정의 안정〉에 관한 포괄적인 비상령을 발동시켰다. 1930년도 예산을 법령으로 (7월 26일) 강제로 통과시킨 데 이어 1931년의 예산도 비상령으로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는 총 104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1930년에 비해 (수입과 지출을 합쳐) 총 11억 5천 2백만 마르크의 긴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보전정책에도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판매 위기와 실업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었다."(171-5)


"1931년 7월 1일 이후 국가 간의 모든 채무지불의 1년간 유예를 제안한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Hoover-Moratorium)은 배상의 역사에서 사실상 결정적인 한 장을 의미했다. 독일은 모든 지불을 1년간 유예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계획은 특히 상호 채무관계에 가로막혔던 유럽의 구매력과 수입능력의 회복에 대한 미국의 관심에 사실상 상응하는 경제적 관점들이 깔려 있었다. 그 계획은 여전히 강하게 결합되어 있던 미국 자본이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독일 신용능력의 붕괴를 최후의 순간에 막으려 했다. 주식시장은 후버 선언의 출판에 주가 상승으로 답했다. 유럽 최대의 배상채권자인 프랑스의 저항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했으나, 힘든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매우 넓게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담할 정도로 솔직한 정책도 위기의 정치적 결과를 극복하지는 못했다."(207-9)


제4장 대통령 내각과 〈민족적 반대파〉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공화국의 모든 반대자들은 〈하르츠부르크 전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장교단과 방위단체 출신의 반공화주의자들과 왕조주의자들은 정치지도자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 외부 권력의 대표자들을 지지하였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제 중요한 이익단체들과 함께 기존의 부르주아적·사회민주주의적인 타협질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환영받기도 했던 브뤼닝의 권위주의적 임시처방책에 대해서도 결단코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독일민족인민당, 나치당, 철모단, 전국농업연맹(Reichslandbund), 여러 경제단체들, 독일인민당, 경제당, 전독일연맹, 그리고 여러 귀족가문들이 대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건설적인 개혁안이나 혁명계획을 위한 공통분모 혹은 정치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뒤이은 파펜과 슐라이허 정부의 영향 아래 있었던 '권력공백'의 단계는 이미 이 순간에 두드러졌던 것이다."(216-8)


"후일 후겐베르크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하르츠부르크 자체는 (현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의 선포이자, 〈민족적 반대파〉 연합이 최후의 승리로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했으며) 특히 우익반대파가 공동의 대통령후보를 합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에서도 후겐베르크는 분명 여전히 히틀러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천재적인 동맹자들, 〈민족적 부르주아지〉 및 경제계의 대중선동적인 나치의 활동에 대한 거부감을 힘닿는 대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서 그는 순진한 자의식에서 추가적인 독일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거기서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다른 한편에서 독일민족인민당 및 나치당과 더불어 독일민족인민당과 중앙당 사이에 있는 많은 정당들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평행선 속에 설정될〉 수 있는가였다. 그렇지만 나치당은 하르츠부르크에서 예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자신의 노선을 조종했다."(221)


"1931년 11월 25일, 한 나치 이탈자에 폭로된 〈복스하이머 문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그것을 실행할 계획을 작성한 것이었다." "이 문서는 현존하는 국가질서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타도된 뒤에 나치의 집권이 오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어 〈나치 돌격대, 지역방위부대들〉 또는 유사한 조직들은 유일한 질서의 담지자로서 〈공석이 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각 내각의 기능을 넘겨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 반역사건의 법적인 추적은 제국고등검찰과 제국대심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국정부가 마지막 시간에 급진주의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려는 실천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 또 정치적 측면의 판결을 정치적으로 매우 오락가락하는 사법부 관료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점, 그리고 나아가서 바로 지금 우파와의 연립 탐색, 즉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를 둘러싸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253-7)


"그 사이에 경제적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 파멸적인 영향은 공적·사적인 생활 전체로 확산되었다. 확실히 국제관계의 수정을 위한 브뤼닝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독일에 대한 배상금 지불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열었다. 후버 모라토리움은 일시적인 비상령으로서 인정받았다. 그것은 최종적인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빠르게 성장하게 한 전기를 마련했다." "브뤼닝의 올바르고 진정한 긴축재정 정책이 외국에서 얻은 신뢰는 경제적·군수기술적인 문제들의 이성적이고 전체적인 규정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여는 협상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성은 독일 내에서 그의 낮은 인기 때문에 중단되었고, 결국 배상회의가 1932년 4월과 7월로 연기되자, 군축회의의 결의안은 심지어 1932년 12월까지 지연되었다. 이 결의안은 결국 그의 후임자들과 이어서는 히틀러가 세밀한 계획과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을 따서 자신의 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260-1)


제5장 제국대통령 선거


"힌덴부르크는 단호하게 자신의 고유한 목표로서 모든 정치적 노력의 중심을 우파정부 건설에 옮겨 놓았다." "재선에 나서기로 결심한 힌덴부르크의 최종적인 결론은 특징적인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파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나의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조건 늦어도 5월에는 치러져야만 할 프로이센 선거 이후에 집중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협상들을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제 정부를 우파로 이동시키고 〈집중정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브뤼닝 체제의 가장 중요한 지역기반인 프로이센 정부를 교체하는 것 또한 말하자면─완전히 〈민족적 반대파〉의 의미에서─제국대통령궁의 정치적 계획 일정에 포함되었다. 공화주의적 기관들의 권력 상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될 사건들은─이는 브뤼닝의 실각과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폭력적인 작전이다─그러한 계획으로부터 발전된 것이지 직접적인 깜짝 작전의 결과는 아니었다."(291)


"적어도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와 대결하여 명백한 승리를 거둔 것은(49.6% : 30.1%) 민주적 결집후보의 첫 번째 목적을 충족시켰다. 이는 또한 점차 커지던 나치의 권력 요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한계를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었고, 나치 지도부의 고조된 분위기를 당의 상황에 위협적인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뜨렸다. 뒤스터베르크가 재기불가능할 정도로 패배한 것(6.8%)은 〈민족적 반대파〉 내부의 경쟁관계를 명백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후겐베르크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철모단 그리고 그 밖의 〈민족적 단체들〉은 의문의 여지 없이 엄청난 수의 유권자들을 나치당의 매우 영향력 있는 급진적 선동에 빼앗겼다." "나치의 득표수는 1930년의 제국의회 선거와 뒤이은 지방선거에 견주어서 추정해보면 계속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 수는 본래 당이 기대했던 수준에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한 관찰자들의 추정보다도 약간 뒤처져 있었다."(326)


"헌법은 제1차 선거에 대해 절대다수를 요구했으나, 힌덴부르크는 간발의 차로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헌법의 여러 규정에 따라 제국대통령의 제2차 선거는 4월 10일로 예정되어 되었다. 우파의 다른 매력적인 통일후보자를 얻으려는 시도들과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노력들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쟁관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얼마 후에 곧 자신은 히틀러를 선택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신뢰의 파괴에 대해 좌파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슐라이허도 몹시 화가 났다. 슐라이허는 아마도 히틀러를 쳐부수기 위해 황태자의 입후보를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선거에서 히틀러(36.8%)는 힌덴부르크(53%)에 맞서 더 높은 득표의 증가를 달성(6.6% : 3.4%)했으나, 수많은 선거연설에서 표현되었던 2천만 표에서 3천만 표의 기대는 명백히 성공하지 못했다."(328-32)


"어쨌든 힌덴부르크는 주로 1925년에 그에 반대했던 집단들의 힘으로 재선되었고, 따라서 그의 재선은 이제 압도적으로 정반대되는 기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25년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1918/1919년의 바이마르〈체제〉를 반(反)공화주의적으로 바로 잡아줄 것을 기대했다면, 1932년의 투표는 명확한 다수가 안정된 민주적 상황 그 자체의 유지와 재건에 대한 희망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었건 간에 말이다." "이 선거는 공화국의 마지막 승리로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이어 공화주의자들을 때려눕히며, 이제 그 반대자를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부를 순치시키려 했을 때, 힌덴부르크는 중요한 모든 과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화는 시시각각으로 상승하여, 마침내 한 민족의 정치적 판단력의 상징적인 이미지로까지 되었다."(333-5)


제6장 브뤼닝의 실각


"1932년 4월 13일, (제국 국방장관과 내무부장관을 겸임했던) 그뢰너는 친위대와 그에 속하는 모든 참모부와 시설들, 돌격대 예비대, 자동차 돌격대, 해양 돌격대 및 기수 돌격대, 항공단, 위생단, 지도자학교, 돌격대 병영, 병기창들에도 관계된 돌격대 금지를 공표했고, 이어 4월 14일 경찰조치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가택수색과 광범위한 압수뿐만 아니라 나치본부인 뮌헨의 〈갈색의 집〉의 임시점거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이러한 경과는 나치 측에서─괴벨스의 메모가 보여주듯이─준비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슐라이허 측의 즉각적인 대적행위를 계산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추정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돌격대 부하들에게─그는 그 수를 40만이라고 계산했다─새로운 합법적인 전술을 호소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을 〈이제부터는 단지 당 동지들이라고만〉 표현했으며 박두한 주 의회선거를 〈복수의 날〉로 일컬었다."(349-50)


"슐라이허가 그뢰너와 결별한 결정적인 요인은, 방위단체들의 탈정치화를 통하여 우익을 안전하게 포섭하는 문제와 내정적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가 통제하는 군사력 강화를 성취한다는, 그가 선호하던 계획이 내무부의 돌격대 금지를 통하여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모든 〈군사적이고자 하는 조직들〉에 대해 유보적이었고 특히 철모단의 점증하는 정치화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현실정치적인 주의력은 나치당의 상승에 집중되었다. 그는 국방정책에 대한 나치당의 긍정적인 태도를 제국군대에 적대적인 급진적 좌익에 대한 균형추로서 계산에 넣고, 그들의 쿠데타 의도를 온전한 제국군대를 동원하여 중지시키고, 그들의 정치적 승리의 행진을 세계경제 대공황 동안의 책임을 통해서─그리고 고령의 힌덴부르크가 그러한 실험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보장해주는 한─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361-3)


"그의 협력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뢰너의 돌진〉을 통해 위협받고 있다고 여겨졌던 이 기본구도를 슐라이허는 이 몇 주뿐만 아니라 다음 몇 달간 확고히 견지했다." "슐라이허는 정부의 기반을 우측으로 넓히려는 노력이 〈그의〉 총리인 브뤼닝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희망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나치당과의 교감을 넓혀 갔으며 이제는 그뢰너뿐만 아니라 브뤼닝도 실각시키는 쪽으로 일을 꾸몄다. 〈우리는 슐라이허 장군으로부터 위기는 계획한 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괴벨스는 이렇게 들떠서 승전가를 구가하였다. 브뤼닝의 실각은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제 누가 의회적으로 묵인되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의 해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거둘 것인가, 권위주의적인 개혁가들인가 혹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전체주의자들인가에 있었다."(363-5)


"한편 4월 24일 주 의회 선거 결과 (사민당 지도부가 명명한) 〈나치공산주의자들〉이 의석의 절대다수인 52%를 차지했다. 민주주의 다수파 형성이 결국 봉쇄되었던 동안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수많은 불신임안과 선동안─한편으로는 볼셰비즘에 대항한,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대항한 수없이 인용되었던 방어벽으로서─으로써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동의 의회 내 승리를 거두었다. 나치당은 정부와 공산당을 반목시켜 이용했고, 공산당은 다시금 민주주의 세력의 모든 유보에 대해서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으로의 길은 바로 파시스트적 중간정권을 거쳐 간다는 천편일률적인 기대로써 대응했다. 이제 독일의 모든 의회들에서, 새로운 권력분배의 긍정적 이용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열어 놓지 않은 채 민주적 메커니즘의 기능능력이 마비되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인수를 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일관된 부정성, 즉 권력공백이었다."(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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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1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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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권력구조의 문제


제1장 바이마르공화국의 형성에 대하여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의 길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귀족과 독일 부르주아층의 결합을 거쳤다. 그리하여 1870/1871년의 승리는 혁명의 정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결산일 뿐만 아니라 독일적 정치발전과 서방적 정치발전 사이의 분열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민족적 성공들은 민주적 이상의 빛바랜 광채보다 통일의 사상과 성공의 경험으로부터 더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자유주의자 다수를 비스마르크 지지자로 만들었다. 민족적 이데올로기 앞에서의 시민적 자의식의 이 내적 붕괴는 독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단절을 표시했다. 봉건적 사회구조와 강력한 관료제에 기초한 〈민주적 장식물로 치장한 군주적 국가〉는 이제 시민을 안전하게 길들일 줄 알았다. 비스마르크의 헌법조작,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들, 프로이센 지배의 군사정치적 및 정신적 전통을 통하여 대의제적·민주적 발전은 저지당했고 세기 전반기의 징후들 역시 뒤로 내던져버려졌다."(50-1)


"1918년의 혁명은 양면성─패전의 비참함과 〈응급처방이자 전술적 방편〉으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불충분함─을 가진 사건이었으며, 공화국은 국가질서를 전혀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고 강력한 봉건적 및 관헌국가적인 기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요구들을 힘들이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대두하였으며 그 존재가 독일제국의 패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약체성은 이중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과 젊은 국가의 역사적 기초에 대한 의식의 심화가 어떤 시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활발한 반대세력들은 겉보기에만 그리고 단기간에만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혁명이 일어났던 몇 주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의 선전을 벗어나지 못한 정치적으로 피동적인 대중을 곧 다시 장악하였다."(64-5)


"급속히 재강화되는 대산업, 10만 병력으로의 감축 뒤에 팽팽하게 자율적으로 조직화된 제국군대, 새로운 질서에 의해 거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관료의 중단되지 않은 권력, 곧 다시 화해불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전락하는 정당들, 사회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대변하는 실질적으로 강화된 집단들, 사려 깊게 보호되고 섬세하며 모든 신분상의 하락을 배상하고도 남는 위신에 대한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욕구, 특히 순수한 민주적 타협을 거부한 군주적-보수적 및 민족주의적 반대운동들의 세력 및 영향력 강화: 이 모든 원심적인 세력들이─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공화국의 권력분배를 문제 삼았고 무의식적이지만 상당히 효과적으로 끊임없이 발호하는, 위기의 순간들에 위험스럽게 발생하는 아주 상이한 상대들의 연합으로 결합되었는데, 약한 민주주의 국가는 이들에 대해 충분한 방어수단도, 효과적 통합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78-9)


제2장 의회민주주의에서 대통령제 국가로


"전후 몇 년간의 난제들에 직면하여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으나 정부 부처 관료들의 반의회적 활동들에 도움이 된, 각료에게 폭넓은 전권을 양도한 결정은 입법부를 상당한 정도로 약화시켰다." "의회적 공화국의 민감한 구조와 그것을 지탱하는 정당들 사이의 대립들이 흔히 정부형성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초래했기 때문에 곧 성과 없는 연정협상 대신에 그들의 전문지식, 사회적 처지 및 정치적 태도 덕분에 관료층의 신뢰를 보장받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를 세우려는 경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헌법이 그것에 허용한 권력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제국의회는 통제기관으로서 더욱 강하게 공격을 받았다. 경제적 관계들의 복잡화로 국가가 경제에 점점 더 간섭을 확대하고 정당은 이익단체들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권력은 입법부로부터 국가관료 및 사적 관료의 수중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의회는 더 이상 아무런 통제를 행사할 수 없었다."(86-9)


"의회적 정치구조를 파괴하고 비스마르크-빌헬름적 관헌국가를 복구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분화된 정당구조 덕분에 정부 형성은 연정의 틀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불안정한 타협의 기초 위에서 사람들은 의회적으로 약한 내각, 대다수의 경우에 심지어 단지 관용받는 소수내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부의 결성은 의회 다수당을 통한 당연한 권력 인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별로 안정적이지 못한 연립정부를 창출하기 위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힘겨운 협상을 의미했다. 그러한 협상에서는 실제적인 연정강령뿐만 아니라 장관 자리의 분배도 중요하였다. 야당이 여당을 교체하거나 그 거꾸로 교체하는 관습은 의회의 다수파 구성 상황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동시에 계속적인 연정구성의 어려움들은 정부의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요와 더불어 이미 일찍부터 정부 구성에서 제국대통령의 기능을 강화시켰다."(90)


"이론적 토론은 항상 재삼재사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정당국가적인 실제 사이의 차이를 물고 늘어졌으며, 이 대립들을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분별없이 동일시했다." "의회적인 정당국가를 둘러싼 징후적 논쟁은 이미 세계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기 오래전에 상당한 규모에 달했다. 한 유명한 법학자의 1927년 베를린에서의 총장 취임 연설은 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매우 조심스럽게 권위주의적 국가론의 초안이 구체화되었으며 이것을 대통령제 정부 그리고 특히 파펜 실험의 문필적 및 정치적 지지자들이 수용할 수 있었다. 정당국가에 대한 이 비판 역시 정당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위탁에 결속된 〈인민의 심부름꾼〉으로서의 의원에 대한 〈순수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칼 슈미트가 동일한 이름의 글에서 (극복해야 할) 〈오늘날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기초〉라고 일컬었으며, 그것이 1919년 독일헌법도 완전히 지배했다."(98-9)


# 정당정치 내의 의원들이 토론이 아니라 파벌들의 결정─책임지지 않는 익명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적) 정당국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


"반동적-군국주의적 및 민족주의-권위주의적 집단들의 비타협적 태도 못지않게 파국적이었던 것은 여기서 새로운 헌법의 구속력 없는 자유주의를 내키지 않아 했고 혁명사건들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단초들을 배신당한 것으로 믿었던 사회주의적 성향의 대중들의 실망으로 인한 냉담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의회는 극단적인 좌·우 급진정당들을 얻었으며 그 강세는 곧 집단들의 자유로운 대결과 건설적인 야당의 여지를 거부했으며 의회적 메커니즘을 결국 치명적으로 마비시켰다." "〈순수하지 못한 다수〉로의 그들의 성장은 의회를 완전한 마비와 지속적 자기해체의 상태로 빠지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속에서는 초의회적이고 권위적인, 민주적 헌법을 극도로 긴장시키며 결국 파괴하는 조치들만이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바로 이것이 결국 민주적 틀을 파괴했고 집단들의 끝없이 고조된 적대상태를 갑작스런 폭력적 종말로 몰고 갔다."(108-9)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헌법결정의 도입과 확장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명한 제48조는 계엄입법과 비상사태입법의 전통에 접속하였다; 그것을 헌법으로 삽입한 것은 국민의회에 의해서 많은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민주적 성향의 의원들 다수의 동의를 얻어 당시 국가의 내·외적 상황에 직면하여 가결되었다." "여기서 제국대통령의 예외권과 비상령권의 삽입은 분명히 (민주주의자였던) 에버트의 인물에 맞추어져 있었고 결코 헌법을 초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위기상황에서 헌법의 온전한 보존과 헌법적 질서의 재건을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제48조의 적용도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권위주의적 해결책의 가장 용감한 지지자들조차도 이 조항이 언젠가 매년 계속하여 정부의 모든 시도들의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고 전체주의적 국가질서로의 이행을 지지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계산하지 못했다."(116-8)


# 힌덴부르크 제국대통령 선출 이후 권위주의적 대통령군주제의 기반으로 해석·활용되었다.


제3장 민주적 공간에 있는 정당들


"유일하게 의회정치를 가능케 했던 정당들의 연정(聯政)은 점점 더 이익단체들과의 연결 및 그들 조직의 진입을 예상해야 했고, 이는 정당들의 내부구조와 기능적 배치를 계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공화국의 정당구성이 전체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은 채 과거 붕괴되었던 군주제 상태에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국가가 지속적 안정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에서 가정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빌헬름 국가의 정당들은 갑작스럽고 결코 예상하지 않았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위치, 즉 임시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첫 번째 책임자라는 아주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내외적으로 경직화 경향, 즉 군주제적 권위주의 국가에서 정당과 의회가 맡았던, 소극적이고 찬반에서 거의 무의미한 역할에 부응하는 외형과 내용을 채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143-4)


"가령, 사회의 가장 약한 부류인 〈노동자 계층의 삶의 원칙〉으로서의 철통같은 조직, 수와 조직 면에서 뛰어난, 거의 군대와 같은 결합을 통한 대중의 구조화를 자랑했던 사민당의 전통적 형태들과 탄탄한 결속은 흔들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러한 이질화 과정과 이에 수반한 지도부의 마찰, 그리고 독립사민당(USPD), 스파르타쿠스동맹 및 공산당의 이탈을 가져왔던 극좌파에서의 분리경향 등에 맞서서, 곧바로 사민당 중도파의 조직적 이념적 경직화가 시작되었다. 중도파는 과거 투쟁에서 전수되었던 조직의 내부 원칙에 의존했고, 또한 지도부의 구성뿐만 아니라 외부와 관련한 당의 전술과 당 내부의 통합과정에서도 단호하게 전쟁 전의 전통에 의존했다." "특히 〈반동적〉 제국군대에 대한 불신은 처음부터 공권력 중 군대와 같은 권력요소에 대해서 본질적인 영향력 행사를 방해했고, 이 요소가 결국 우익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144-6)


"바이마르 국민의회에서 계속된 경향, 즉 사민당 의원들 중 절반 이상이 노조 경험을 갖고 있고, 그들 중 3분의 1 이상에게 노조관료가 본업이었다. 설사 그들이 정식으로 당 경력에 연결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주 의회, 지자체 의회 그리고 작은 행정기구에서 일했다 하더라도, 당과 노조간부들의 권력과 정치양식은 꼼꼼한 관료지배의 빛과 그림자 모든 면을 지니면서 의회활동, 즉 당의 의회주의적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고 제국의회 원내교섭단체의 전술적 활동을 현저하게 제한했다." "사민당 의원들은 사적 관계를 통해 당 지도부와도 확실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사민당 원내교섭단체의 행동과 주도권은 자주 당론과 의회 외부에서 활동하는 다른 기관의 결정을 선도했다. 거기에 계속적으로 현실적인 개혁적 방향으로 기울었고, 자신들의 조합원들이 사민당 지지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회주의 계열 노조들의 영향이 첨가되었다."(152-3)


"긴장의 해결방식과 기존 국가와 사회질서에 대한 사민당의 입장은 다른 민주정당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현실노선을 추구하는 점진적 사회주의의 참여 하에서 구성된 바이마르 연정의 안정과 유지─이것은 바이마르의 기회였다. 이것 대신 우리는 전통적 야당의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하고 당 구조 및 당의 이데올로기적·마르크스적 이상을 새로운 과제에 적응시키는 데 머뭇거리는 사민당의 완고한 망설임을 기록한다. 이는 또한 우파 및 극좌파의 모든 접촉시도를 반대한 민감성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신뢰할 수 있었던 유권자 계층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부동성이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을 해야 할 시점에서 우유부단하고 이중적인 그리고 결국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결정했다." "이로써 나치가 승리하기 오래전에 이미 공화국 최후의 보루로서의 그들의 권력은 거의 저항 없이 차례로 무너졌다."(161)


# 주요 우파 정당들

1. 독일민족인민당(DNVP) : 반反혁명·반反공화주의 세력들을 주축으로 결집된 정당

2. 독일민주당(DDP) : 공화국의 안정과 자유주의 구축을 우선시한 부르주아 정당

3. 독일인민당(DVP) : 국내정치보다 강대국과의 외교정책을 중시한 부르주아 정당

4. 중앙당 : 반反극단·반反권위주의적 태도로 타협자세를 유지한 가톨릭 기반 정당


"중앙당이 핵심부를 중심으로 아주 안정적으로 그룹화되고 마지막까지 사회적으로 다채로운 〈국민정당〉(Volkspartei)으로 남았던 반면,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뿐만 아니라, 온건한 보수주의적-기독교적 우파와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변형과 해체 과정의 소용돌이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큰 흐름은 사민당의 조직 자체는 흔들지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 활동은 마비시켰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이러한 역동성의 양극점이 되었다." "〈독일중간계급 제국당〉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유사 정당들〉 역시 바이마르 정당체제의 이러한 위기적 전개의 테두리에서 일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파괴적 효과는 의회소속 정당들의 통합관심을 여론과 유권자의 영역에서 민감하게 교란시켰고─정치적 대립을 화해할 수 없는 개별 이해들의 적대감과 증오의 태도로 변형시킴으로써─다수당을 구성하기 위한 협력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179)


제4장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발흥


"의회 메커니즘을 결국 완전히 절름발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 두 정당은─각자 자기 나름대로─1918년 혁명과 관련된 문제 덕분에 형성되고 프로필을 얻게 되었다. 독일공산당(KPD)은 혁명이 의회적인 경로로 들어서고 바이마르공화국의 타협안이 소련식의 발전 과정에 의도적으로 대립적인 방향을 취하게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서 평의회 혁명가들은 다수파사민당(MSPD)의 길에서 이탈해나갔다. 나치당(NSDAP,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소속당)은 이에 반해 혁명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이 사건은 보수적-군주적 집단에 의해 역사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특수집단들은 일반적인 야당적 태도를 넘어서서 우선 혁명과 패전의 결과로서 바이마르공화국과의 어떤 전술적 타협에도 반대하는 반(反)혁명적 활동을 전개했다."(183-4)


"독일공산당과 나치당의 형성 과정과 내정적 위치는 일정한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것은 조직형식을 보더라도 확인이 된다." "이들은 민주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명령구조로, 의회적 타협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획일화된 독재 방식으로 맞서고, 연정과 야당의 위치를 주고받는 게임에 기초한 민주적 연속성을 애초부터 봉쇄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내부 운동과정은, 이것은 자유로운 국가 내의 사회 유동성의 정치적 표현인데, 정치적 자유를 결코 훼손하지 않는 합법적 표현 형식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역동적인 정치적 발전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민주적 의미에서 다수당 연정이나 야당연합의 형성에 지속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의회정당들의 한계를 넘어서 의회를 초월한 영역으로 치달아, 결국에는 완전히 전체주의적이고 어떤 화해도 거부하는 정치적 구원종교의 영역에로 흘러들었다."(184-5)


"1919년 창설된 코민테른은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면서 무엇보다 서방에서 실패한 혁명 대신 러시아 혁명의 영광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독일공산당은) 명백히 모스크바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 당 노선의 고립된 성격이 이러한 제한을 통해 그만큼 더 첨예하게 바이마르공화국의 내정적 역동성 한가운데서 드러난다. 이 성격은 1928년 이후 당의 성장, 곧 영향력 증가와 유권자의 바람이 갖는 일정한 고유 비중을 통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명령과 복속 구조는 이러한 최악의 경우에조차 견지되었고, 대중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간부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은 원격조종되었고 종교와 비슷한 형태의 기대내용들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호전적인 나치조직과의 경쟁에서 더욱 강화된 바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반란시도들이 실패하고(1918~1923) 의회제공화국이 안정화되면서 공산당은 합법적 영향력을 통해서 대중을 얻으려는 방법으로 전술을 바꾸었다."(194-5)


"극단적 저항운동으로서 나치즘은 국민의 정치·사회적 구성에 대한 생각에서만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반(反)자본주의적 논리와 혁명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사회질서, 관료적 관헌국가를 전복하기보다는 그것의 보다 철저한 조직화와 계서적이고 명령추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기반 및 권력확장을 지향하는 일련의 주장들을 가지고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나치당은 단순한 반항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적개심운동'으로서 시작했다. 군사적 패배와 〈과다한〉 민주적 변혁으로 비로소 정치화된 소수의 실망자들이 그 핵심을 형성했다. 1930년 이후 대중정당의 조직화된 지지층, 특히 간부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자기 신분과 가족 내에서 스스로를 국외자로서 느꼈으며 노이로제가 될 만큼 자존심이 상했고, 균형감각을 갖지 못하고 적응을 잘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밖에도 괴벨스 현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된 프롤레타리아화한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01-2)


# 나치운동의 세 가지 뿌리

1.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반反의회주의 감정에 기반한 저항

2. 경제적·사회적 위신의 하락을 두려워한 '중간계급의 공포'

3. 청소년의 세대 문제와 낭만주의의 반항적 분위기 이용


제5장 정치적 공간에서의 급진운동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거의 모든 공공생활 영역의 논의를 지배하였던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위기'라는 표어는 특히 전통적인 정당의 본질과 기능을 겨냥한 것이었다. 민주적 정당들의 운동능력, 수용능력 그리고 재생능력이 거의 사라져 간 대신에, 낭만적·유기체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정치대표체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커졌다. 즉, 정당 대신에 '운동' 혹은 '연맹', 사회 대신에 '공동체', 민주적 조직 대신에 권위주의적 종자구조, 의회주의적 조정 대신에 혁명적 투쟁, 자유로운 결정 대신에 무조건적 복종, 다원주의 대신에 완전한 통합 등이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잡아갔다. 그 배후에는 특히 '낡은 것'의 지배적 계서제(階序制)에 대한 전반적 저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저항은 세대 문제가 표출된 것으로 초시대적 성격을 지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정도가 특히 강했다."(239-40)


# 종자구조(從者構造, Gefolgschaftsstruktur)

'종자'(Gefolgschaft)란 본래 영주, 군주 혹은 귀족과 종자 사이에 신뢰와 복종에 기초한 관계로, 게르만 법률의 본질적 요소인 commitatus 및 이로부터 파생된 모든 현상들을 지칭하는 용어. 나치는 이 개념을 독일사회의 모든 영역, 특히 노사관게에 도입하여 지도자-종자의 도식을 발전시켰다.


"나치는 권위주의적 정치공동체의 이상에 가장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형식을 만들어 냈으며, 모든 본질적 특징들을 통일시키는 듯이 보였다." "이는 합리적 논리를 비합리적 비전에 기초한 신념공동체(신앙연합체)의 신비로운 연대감으로 대체하고, '지도자' 속에 체현된 '일반의지'를 통하여 무미건조하고 역겨운 일상정치를 조화로운 '민족공동체'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조직원리들이었다. 여기서 '낡은 것들'에 대한 청소년─청소년은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좌파'단체들이 그랬다) 혹은 혁명에 대한 책임(그 '민족적' 반대파들이 그랬다)을 덮어씌웠다─의 저항은 조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슬로건들은 급진정당들의 (젊은) 연령 구성으로 매우 효과가 있었다. 이 슬로건들은 '상대화 경향이 있는 지식'보다는 교양에 희의적인 '행동'을 중시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교 및 대학생의 활동영역에서도 일찍 호응을 얻었다."(246-7)


"활동적인 전쟁세대 및 전후세대, 〈특히 참전자들〉의 모집에서 외관상 군대와 유사한 대형과 엄격한 기술적 구성으로 반대파의 준군사조직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경쟁자가 된 것은 지도자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에 충실하고 헌법을 보호하는, 심지어 외국에 지부를 두기까지 한 대중조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반공화주의적 정당들과 그 준군사단체들의 파괴활동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또한 해체되던 종파 집단 및 단체의 민족지상주의적·권위주의적인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이 단체들은 역설적으로 제국기치(참전자 및 공화주의자연맹)가 지켜낸 상태를 극복한 후에 본래 실천하고자 했던 규정을 넘어서 낭만적·영웅주의적인 지도자 국가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인지대(Nienandland)로, 민족공동체라는 초민주적 독재의 비전으로 나아갔다." "이 소수파는 결국 (공화국) 말기에 정당정치의 개편으로 〈민족적 반대파〉에 흡수되었다."(268-9)


"제국기치는 공식적으로 350만 명의 회원이 속했으나, 시대의 민주주의에 걸맞은 어떤 것을 갖지 못했다. 이 조직의 존재는 정치적 반목의 격렬함과 국내정치에서 공화국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치 돌격대(SA)는 (제국기치가 해체되면서) 점차 비워진 공간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돌격대는 거리에서도 나치당의 권력성장이 존중받도록 배려했고, 폭력과 테러로 시민을 협박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집회, 행진, 가두투쟁 등 공공영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강력한 반(反)제국기치 세력이 된 돌격대는 오랫동안 철모단의 대중운동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도 결국 당군대(黨軍隊)는 〈민족적 반대파〉의 모든 연합단체들과 전사단체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과 더 구체적인 목표를 관철시켰다. 히틀러는 돌격대를 나치당의 〈물리적〉 권력도구로 조직하여 투입하고자 하였다."(269-70)


제6장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는 국내정치를 형성하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민족주의 사상에 빼앗겼으나, 사회주의의 발전에 그 흔적을 남겼다. 19세기는 민족주의 사상이 특히 서방 민주주의의 경험과 제안을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게 차단한 과정이었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전쟁의 패배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로부터 국내외 정책에 파생된 모든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차단 과정은 독일인들의 저항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거대한 정치적 흐름들 사이의 논쟁을 민족주의적 고립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이 흐름들은 중재되지 못하고, 따라서 거의 불가피하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서로 충돌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한 배상이행 정책의 대표자들조차 (자신의 입장에 대한) 공개적 고백으로부터 국제관계의 냉정한 평가로 물러섰다.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들은 공화국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284-5)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 최대의 정치적·세계관적 관철능력을 발전시켰는데,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이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전체주의적 행동계획과 구성계획을 통해서 민주적 사회의식 및 국가의식을 파괴하는 데서 차지하는 전술적·전략적 중요성을 증명해 준다. 전체주의적 운동이 적과 동지라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사회적, 정신적, 종교적으로 위기의식에 휩싸인 당대인들에게 제공한 것은 〈속죄양의 철학〉이라는 편안한 탈출구였다. 이는 불쾌감과 실패, 공포와 분노의 근거를 잘 묘사하여 손쉽게 특정의 소수 그룹에 뒤집어씌우려는 아주 오래된 심리적·의식적인 욕구였다. 모든 박해의 기반이 된 이 욕구는 결국 위기의 탈출구로, 문제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사람의 수중에 있는 가장 예리한 무기가 되었다. 여기서 실망, 적응의 어려움, 현실적인 문제의 부정,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비이성적 공격성 등은 증오감으로 귀결되었다."(289-90)


"나치즘은 민족지상주의적·전체주의적인 정당으로서보다는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위신 요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중간계급 선박의 이른바 조난구호자로 나섬으로써 대중운동이 될 수 있었다." "중간계급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신분제적 감정의 영역, 즉 사회의식의 영역에서 긴장된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상황, 더 대규모의 경제정책적 융합 및 기능적 종속 경향 등의 압력 아래 있었다. 이 계층은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협에 대항하는 보루, 경제적 상태와 사회 이데올로기적 요구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의 해소책, 신분제적 특수 존재─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위기에 책임이 있는 실망스러운 민주주의를 넘어─의 구제자를 찾았다. 《공산당 선언》의 저자들이 관찰했듯이, 그런 추동력으로부터 성장한 것은 혁명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 전투적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이 계층의 지속적인 몰락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되었다."(300-1)


"이제 가장 급진적인 반대파 정당이자 동시에 가장 시끄러운 반공운동 조직인 나치당을 선택한 사무직원, 부르주아지, 농민 등은 아직 거의 초안도 잡히지 않은 나치국가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우선 현존하는 국가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민족주의적 혹은 신분제적이고 낭만적인, 반자본주의적인 구호 혹은 계급투쟁에 적대적인 구호를 동원해서 달성했건 간에, 나치당은 중간계급의 거대한 정당이 되었다. 나아가서 나치당은 새로운 (비)투표자, 자포자기에 빠진 실업자들과 본능적 확신에 찬 기회주의자들에게도 손을 뻗칠 수가 있었다. 나치당은 특히 그 경제적 토대를 빼앗긴 계층의 위신 욕구를 채워 줄 신분제적 질서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민족적〉(national)이란 이 중간계급적 의미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을 뜻했고, 〈사회주의적〉이란 반(反)금권정치적인 것을 의미했다." "신분제 원리는 평준화 위협에 대한 균형추로서 사무직원들과 관리계층에게도 유인력을 가졌다."(315-6)


제7장 관료제 문제


"왕조적 절대주의가 만들어낸 직업공무원 계층은 귀족과 더불어 신분제 국가의 붕괴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으며, 인민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회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사회집단을 의회민주주의와 결합시키는 일은 그들의 강력한 신분제적 결속으로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다. 비스마르크 시기에는 프로이센 내무부장관이었던 푸트카머의 조치를 통해 공무원제도의 절대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이어 전통적으로 계몽된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봉건제에 적대적이었던 이 계층의 태도는 카스트의 계서제적 폐쇄성으로 대체되었다. 또 이 카스트는 종종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습관과 세계관이 동일했고, 특히 보수적 당국의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통일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결정권을 갖는 군주는 엄격하게 조직된 행정 계서제의 꼭대기에 있었다." "〈공무원 계층의 탈정치화〉 요구는 바로 이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328-30)


"공무원 계층이 국가의 기본적 제도로서 어떻게 헌법의 전체적 연관관계 속에 편입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관료계층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핵심집단이 민주주의 본래의 문제점들에 거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집단의 경향과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점들을 행정기술적 과제로 환원시키고, 과도한 전문화를 통하여 법을 〈법학적 대수표〉(Logarithmentafel)로 만들어 입법부를 회피하는, 간단히 말해서 모든 생활을 명령에 끼워 넣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의회의 통제와 내각 상급자들의 취약함은 주로 이러한 기술적 사고방식을 강화시켰는데, 이 사고방식은 다양한 정치적 음모, 심지어는 〈관료의 사보타지〉에 공간을 제공했다. 거기에는 또 기술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 질서의 권위주의적 국가상, 즉 계서제로 등급화된 관헌국가의 형식적 신격화가 사회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그리고 유동성이 있는 국가 구상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음에 틀림없었다."(336-7)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료 문제와 관련하여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표제어로 종합된 현상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애매한 개념은 사법부가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명료하다는 것은 기준들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상징한다." "본래 사법부는 직접적인 국가기구이자 관료적인 실행기구라는 이중적인 기능 덕택에 애매한 중간입장을 취했고, 여론 형성과 조정에서 특히 효과적인 심리적 도구로 작동했다." "모든 법질서는 그 형성으로 인해 관련 공동체에서 권력의 배분에 직접 영향을 미치므로, 모든 법체계에서 사법부는 남용될 수 있다. 이것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현저했다. 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특히─전문적인 특수화 경향과 학문적 법률가 신분의 사회적 폐쇄성 경향 속에 각기 포함된─재판관 권력의 증대였다. 완고한 인사정책은 정치적 과정과 헌법의 발전 속에 표현된 법 개념의 약화와 해체를 더욱 심화시켰다."(348-50)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정치가들과 정치평론가들은 검은 제국군대의 불법적 기구들 및 그밖의 군국주의적 우익급진주의 현상들을 비판했다. 그런데 이 모든 비판이 반역으로 처벌받았던 반면에, (반란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의 재판(Feme-Prozess)에서 (바이에른의 우익정권 내지 히틀러 반란사건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치 장교들에 대한 라이프치히의 반역죄 재판에서 히틀러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 재판 자체의 실행, 주심에서 제국재판소 검찰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만 등은 사법관료 수뇌부의 정치적 취약성 혹은 약점을 증명했다." "그러한 현상들의 정치적 영향은 결국 극히 무의식적으로도 조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판결들은 증오심에서 부당하게 취급된 사람들, 회의적인 경멸과 권력현실적인 사법부의 평가를 통해서 이득을 본 자들로 채워져 있다."(354-5)


제8장 경제정책적 권력구조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적 권력구조는─정당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 행사와 정치적·경제적인 인적 연합체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관료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각종 정부 위원회들의 복잡한 연결과─경제정책의 협상과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통해서도 〈전문가 이데올로기〉로 위장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은폐된 그리고 관료적이고 〈전문가적〉으로 정당회된 직접적인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정치적 공간에서 찾아내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민주적 기구들에 의한 최소한의 통제도 빼앗긴 상태였다. 정치에서 이익정치로, 그리고 이익정치에서 정치로의 이 지속적인 변화는 집중 과정, 즉 (연합철강이나 IG 파르벤 같은) 독점적 카르텔 및 콘체른의 형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중 과정은 정치적·경제적 연결 과정들을 떠받쳤고, 여기에 과두제적 성격을 부여했다."(387-8)


"카르텔과 콘체른 체제는 모든 경제생활을 자신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과두제적으로 구조화된 조직들과 영향력 있는 이익적 결합들의 네트워크로 덮어씌웠다." "이에 대한 실질적 조치들은 매우 약했으며, 특히 민족정책적 관점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다. 만약 광범위한 반(反)트러스트 입법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말할 수 없었다면, 여기에 기여한 것은 공산당과 부분적으로는 사민당 측에서 자본주의의 이러한 〈최후의 과잉〉이 지닌 불가피성에 대한 결정론적 확신이었다. 특히 노동조합과 사민당 온건파에게서는 희망적인 견해가 발전될 수 있었다. 즉, 이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원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사민당의 지도적인 경제이론가는 1927년에 현존하는 경제에서는 모범적인 민주주의적 경제체제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389-90)


"〈독점 자본주의〉의 경제적·합리적인 자기 정당화는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경제적인 반론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이나 정치 일반과 관련된 반론에도 완고하게 그러나 엄청나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합리화운동의 전반적인 틀 속에서 카르텔 운동과 콘체른 운동이 갖는 경제적 효율성에서 출발하였고, 다음에는 이윤, 임금, 가격 등이 발전과 인구에 대한 배분을 고려하였다. 반면에 이 자기정당화는 그것이 정치권력의 배분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무시하였다. 세계경제 대공황의 발생과 전개과정은 여기서도 경제와 정치의 밀접한 결합을 보다 더 분명하게 조명해 주며, 결국 경제 체제에 비해 정치 체제가 허약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이 경제 체제는 구조적·주기적 원인으로 발생한 각종 어려움들을 정치 수준으로 이동시켰고, 아래로부터, 즉 해고된 노동자들, 사무직원들, 소상점주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실업으로부터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을 흔들리게 하였다."(392-3)


제9장 제국군대


# 제국군대(Reichswechr)의 세 가지 뿌리

1. 베르사유 조약이 가한 압도적인 구속력

2. 1918년/1919년 독일의 혁명적인 정치 상황

3. 제크트 장군


"독일 정당들 중에서 비무장 화해정책을 가장 선호하였던 사민당이 1919년 당시 재임 중이던 바우어 내각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평화군을 위한 예비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평화조약에 서명한 지 불과 일주일 후에 새로운 제국군대의 재건을 위한 첫 조치를 취한 것도 바로 이 내각이었다." "새로운 군대가 납세자들의 희생으로 군사적으로 쓸모없이 단순한 병사놀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베르사유 조건의 틀을 넘어서야만 했던 것이다." "사민당의 상대자들은 정부에 결여되어 있던 것 모두─명확한 목표 설정, 단호함, 결연함 그리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주민계층의 후원─를 예전에 제국장교단의 형태로 더욱더 많이 보유하였다. 제국장교단은 1918년 11월의 붕괴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되었으며, 특히 〈임시 제국군대〉의 건설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증명되었다."(418-9)


"프로이센-독일제국에서 장교단은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① 위신에 맞게 사회계서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위치한 군국주의화된 사회질서와 ② 개인적 충성에 기초한 왕조와의 유대라는 두 가지 중심축에 의거했다." "그 질서 속에서 장교단은 〈제1신분〉, 즉 특권적인 엘리트였다. 게다가 장교단은 나머지 사회 계층에 대해서도 군국주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 체제는 이미 프로이센 왕조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국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압력 아래서 장교단은 공격받았던 왕조와 밀접히 결합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이센-독일 군사체제의 두 번째 접점이 형성되었다. 장교단은 자유주의자들의 헌법선서 요구에 맞서 병사들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왕조에 대한 개인의 신뢰에 기반을 둔 유대를 강력히 장려하였다. 이는 주로 귀족적인 장교단 내에서 여전히 생생한 봉건적 미래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421-3)


"(군부가 주도한 카프쿠데타의 실패는) 곧 제크트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제크트는 이제 군지휘부의 책임자 자리를 찬탈했고, 제국군대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대기주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서 첫 조치로서 광범위한 정치적 야망을 동시에 포기하면서 전통적인 지침에 따른 군대의 건설이 주목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현존하는 정권과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타협에서 정권은 군지휘부에 있는 장교단을 승인하는 한편, 군대의 재건에 자유재량권을 보장해주었다. 정부는 군정책 영역에서 이렇게 보장된 자율성에 대한 대가로 장교단으로부터는 공식적인 충성선서를 받았고, 또한 정치적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제국군대는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났으며, 〈비정치적〉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장교단과 국가 사이의 이익 유대를 재건시키려는 시도는 중단되고, (일종의 휴전협정 같은) 임시변통적인 해결책으로 대체되었다."(434-5)


"(군사문제에서 의회를 배제하고자 했던) 제크트의 목표는 국방부장관과 육군지휘부 사령관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국가법적인 의구심이 있었으므로, 그는 〈명령권〉(Befehlsgewalt)과 〈지휘권〉(Kommandogewalt)에 대한 어느 정도 세련된 구별법을 이용하였다. 즉, 후자(지휘권)는 육군지휘부 책임자에게 속하는데, 이는 제국군대의 모든 부대와 기관에 대한 최고명령권 및 장교인사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포함해야 할 것이었다. 또한 전자(명령권)는 장관의 소관사항이나 본질적으로는 행정권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처럼 국방부를 〈명령실행 참모부〉와 행정당국으로 나누려는 노력은 제크트의 요구로 그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그에 의하면 육군지휘부의 사령관은 〈어떠한 정치적 속박도 없이 무조건적이고 단독으로···〉 제국군대의 이익을 대표해야 하는 반면에, 국방부 장관은 〈무엇보다도 군부대의 정치적 혼란을 멀리할 수 있어야만〉 했다."(439-40)


"국방부장관 지위의 약화는 군지휘부의 책임자가 내각회의에 참석하고 특히 제국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서 강력해져 거의 군주제적인 부가물로서 제공되었던 대통령의 지위는 일찍이 제국 군지휘부의 주목을 받았고, 또 여기서 장교단의 의도대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는 듯했다. 따라서 제국군대를 특히 대통령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군사영역으로부터 그것을 넘어서서 대통령에 이르는 직무상의 위계체계에서 이른바 〈직접적인 군사적 보고의 길〉이라는 특별한 통로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국방부장관과 총리를 우회하여 직접 대통령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은 공식적으로 군사적 기술적인 문제의 논의에만 이용되었으나, 진행 중인 사안이 중요할 경우 장관에게 알리지 않고서도 이용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금방 명백해진다."(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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