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294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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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횡단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 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 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걸음이었다.

느린 걸음이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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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마른 나무 껍질 같은 시어를 끈질기게 씹어보니 누런 속살에서 생기가 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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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명저 시리즈 1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지음, 박성식 옮김 / 가람기획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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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대인들에게 신성(神性)은 자연 만물에 깃들어있으며 그로부터 발현되는 섭리이다. 태양이 뜨고, 강물이 범람하며, 곡식이 익고, 죽음이 찾아드는 모든 과정이 바로 신들의 보살핌 덕분이다. 그런데 인간이 신들의 심기를 거슬러 이런 자연적 질서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신의 분노가 적극적으로 쏟아진다면 대홍수 같은 파멸이 닥칠 것이요, 신의 태업을 유발한다면 안온한 인간의 삶은 밀려오는 근심걱정을 처리하느라 부산해질 것이다.

수메르 인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고 만물의 균형을 관리하는 신의 임무를 보좌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신이 배고프면 세상이 느려질 것이며, 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두워질 것이다. 신이 죽는다면 세상도 죽을 것이다(따라서 신은 당연히 불멸이다). 수메르 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목적, 곧 신에게 의식주를 충분히 제공하고 봉사하여 신들의 심기를 편안히 하고, 성스런 에너지를 채우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은 불필요한 가치이며, 애써 추구해야 할 과업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을 분석하는 일보다는 그 거대함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지키고 위로해주는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들은 섭리를 알지 못했지만 신을 바라봄으로 섭리가 ‘있음’을 이해했다. 신은 태고부터 존재하므로 모든 좋은 것들-아름다운 유토피아도, 안식만이 있는 황금시대-도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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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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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 그런 메스꺼운 형제애는 사양한다.-115쪽

나는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벌써 천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믿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들은 얼마나 긍지에 차 있었던가. 그것은 그들의 천국이었고, 저 하늘 높이에서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도 않는데 그들 스스로 거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던가! 다만, 그후, 그 천국은 그들의 눈밑에서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298쪽

내가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아침, (뜻밖에도) 이 세계를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쓸쓸한 모습으로. 이 세계는 화려한 치장과 광고로부터 버림받았고, 정치적 선전으로부터, 사회적 유토피아들로부터, 문화 담당 공무원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이 세계는 내 세대 사람들의 열정에 찬 지지로부터 버림받았고 (또한) 제마넥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 세계는 정화되었다.-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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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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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중에서는 죽어가는 자들이 신음하며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24장 12절)-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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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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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내릴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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