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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ㅣ 역사 명저 시리즈 1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지음, 박성식 옮김 / 가람기획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인들에게 신성(神性)은 자연 만물에 깃들어있으며 그로부터 발현되는 섭리이다. 태양이 뜨고, 강물이 범람하며, 곡식이 익고, 죽음이 찾아드는 모든 과정이 바로 신들의 보살핌 덕분이다. 그런데 인간이 신들의 심기를 거슬러 이런 자연적 질서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신의 분노가 적극적으로 쏟아진다면 대홍수 같은 파멸이 닥칠 것이요, 신의 태업을 유발한다면 안온한 인간의 삶은 밀려오는 근심걱정을 처리하느라 부산해질 것이다.
수메르 인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고 만물의 균형을 관리하는 신의 임무를 보좌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신이 배고프면 세상이 느려질 것이며, 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두워질 것이다. 신이 죽는다면 세상도 죽을 것이다(따라서 신은 당연히 불멸이다). 수메르 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목적, 곧 신에게 의식주를 충분히 제공하고 봉사하여 신들의 심기를 편안히 하고, 성스런 에너지를 채우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은 불필요한 가치이며, 애써 추구해야 할 과업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을 분석하는 일보다는 그 거대함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지키고 위로해주는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들은 섭리를 알지 못했지만 신을 바라봄으로 섭리가 ‘있음’을 이해했다. 신은 태고부터 존재하므로 모든 좋은 것들-아름다운 유토피아도, 안식만이 있는 황금시대-도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