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8
에드먼드 버크 지음, 이태숙 옮김 / 한길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옮긴이 해제


"보수주의는 인간·사회·역사에 대한 특정한 규정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인식론적 겸손이라고도 하며, 기존 제도를 옹호할 때나 변혁 주장을 논박할 때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강조하는 논지─와 역사적 공리주의─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제도들을 현존하는 이익과 행복의 원천이라고 규정하는 논지─를 주요 논지로 삼는다. 이 논지들은 특정한 정치양식의 옹호로 이어진다. 즉 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기존 제도들은 사람들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효능을 지니므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 정치양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정치양식─기존 상황에 대하여 어떤 태도가 타당한지─을 규정한 이데올로기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는 정치 목표에 주안을 두는 이데올로기들─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로 분류된다. 보수주의와 같은 기반에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는 마찬가지로 정치양식의 하나인 급진주의다."(20-1)


"버크의 사상에서 본격적인 보수주의 논설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비로소 피력되었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에서 영국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감지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개한 논설이 보수주의의 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수주의가 심대한 체제 위협에 대항하는 상황적 이데올로기(situational ideology)라는 헌팅턴의 정의가 확인된다. 또한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비로소' 보수주의 논설을 제시했으므로, 보수주의를 규명할 때 버크의 전기 논설을 후기 논설과 혼합해서 자료로 삼아서는 안 된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영국체제를 위협한다고 인식되자, 인간성과 역사와 신의 이름을 동원하여 그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보수주의자로 '전환'했다.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은 세련된 보수주의 논설을 갖게 되었다. 버크를 상당한 개혁주의자로 묘사하는 견해들은, 〈자유주의〉로 평가되기도 하는 버크의 초기 언설들에 부당하게 비중을 둔 데서 종종 연유한다."(24-5)


제1부 프랑스 사태와 일부 영국인의 경거망동


"나는 프랑스의 새 자유에 축하를 보내는 일을, 그들의 자유가 통치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자유가 공적 권력, 군대의 기율과 복종, 효율적이고 잘 배당된 조세 징수, 도덕과 종교, 재산의 안정성, 평화와 질서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관습들과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알게 될 때까지 미룰 것이다. 이 모두가 (각각의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이다." "우리는 곧 불평으로 변할지도 모를 축하를 하러 나서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이 각자 고립된 사사로운 개인의 경우에 분별력에 따르는 처사다. 그러나 자유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행동할 때 권력이 된다. 사려 깊은 국민은 태도를 천명하기 전에 권력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지켜볼 것이다. 특히 그들의 원칙, 기질 그리고 성향에 관해 겪어본 적이 없는 거의 새로운 사람들 손에 새로운 권력이 주어진 매우 어려운 경우에는, 그리고 표면적으로 가장 요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추진자가 아닐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할 것이다."(46-7)


"프랑스 사태를 찬양하는 프라이스 박사는 영국인이 명예혁명의 원리에서 세 개의 근본적 권리─그는 그 권리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하나의 짧은 문장 속에 개괄된다고 본다─를 획득했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한다. ① 우리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 ② 부당 행위를 이유로 통치자를 추방할 권리, ③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 이 새롭고 들어본 적이 없는 권리장전은, 비록 전체 인민의 이름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신사들과 그 일당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전체 영국민은 그것에 관여한 바 없다." "1688년의 혁명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이라고 불리는 법률에서다. 정열적이고 경험 없는 열성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법률가와 정치가가 작성한 매우 현명하고 분별 있고 사려 깊은 그 선언에는, 〈우리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하고 부당 행위를 이유로 추방하고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보편적 권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또는 암시조차도 들어 있지 않다."(57-8)


"그리고 설사 우리가 명예혁명 전에 우리 왕을 선출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더라도, 영국민은 당시에 자신과 후손을 위해 영원히 엄숙하게 부정하고 폐기했다. 이 신사들은 자신들의 휘그(Whig) 원리─명예혁명 전에 후일의 제임스 2세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려 한 일파를 반대파가 스코틀랜드 반란자 명칭인 휘그로 부른 데서 유래한다. 그 반대파도 아일랜드 도적을 가리키는 토리라고 불림으로써 휘그(의회 중심, 비국교도, 상업 중시)와 토리(국왕과 국교회 그리고 지주인 젠트리 중시)는 영국의 전통적 양대 당파 이름이 되었다─에 대해 자신들 좋을 대로 자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솜머스 경보다 더 나은 휘그로 받들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명예혁명을 성사시킨 사람들보다 명예혁명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할 마음도 없다. 그리고 우리 법률과 가슴에 감동적인 문체로 그 영원한 법의 언어와 정신을 새겨 넣은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신비한 뜻을 권리선언에서 읽을 마음도 없다."(63)


"우리가 형이상학적 궤변의 미로에 빠지지 않는다면, 확정된 규칙과 일시적 이탈을 둘 다 조화롭게 이용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다. 국가가 그러한 수단이 없다면, 독실한 마음으로 보존하기를 원했던 헌정의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 보존과 교정이라는 두 원리는, 영국에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인 왕정복고와 명예혁명이라는 위기의 두 시기에 강력하게 작동했다. 그 두 시기에 국민은 그들의 오랜 건축물에 존재하는 통합의 유대를 상실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구조를 해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두 경우 모두에서 그들은, 손상되지 않은 부분들을 통해 옛 헌정체제의 결함 부분을 쇄신했다. 그들은 이 오래된 부분들을 그대로 유지해 쇄신된 부분이 잘 들어맞도록 했다. 그들은 옛 조직의 형태를 유지하며 옛날에 조직되었던 신분제의회로 행동했던 것이지, 유대가 풀린 인민이라는 유기체 분자들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65)


"현재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겠지만, (과거의) 광신도들은 〈왕은 신이 정한 세습과 불가침적 권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다〉라고 주장했다. 단지 자의적 권력을 옹호할 뿐인 이러한 옛 광신도들은, 세습에 따른 왕이 세계에서 유일한 합법적 통치자인 것처럼 독단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마치 민중의 자의적 권력에 대한 우리 시대 새 광신도들이 민중 선거가 권위의 유일한 합법적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바와 같다. 확실히 예전의 열광적 대권 옹호자들은 우둔하게도 그리고 아마도 불경스럽게도, 국왕제가 다른 어떤 통치체제보다도 더 신의 재가를 받았다고 상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습에 따른 통치권이, 왕위에 누가 오르게 되든지 개개 인물 모두의 경우에 그리고 어떤 시민적·정치적 권리도 존재할 수 없는 모든 상황에서도, 절대로 파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인은 법에 따른 왕위 세습 계승을, 오류가 아니라 옳은 것으로 간주한다. 불평거리가 아니라 혜택으로, 예속의 표지가 아니라 자유의 보장으로 여긴다."(71-2)


"혁신하는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기적 성향과 편협한 시각의 산물이다. 자연의 양식을 따르는 헌정 방침에 의해, 우리는 우리 정부와 특권을, 재산과 생명을 향유하고 전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고 보유하고 전달한다. 정치제도, 재산 그리고 섭리가 부여한 재능이 동일한 경로와 순서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며, 우리에게서 전달되어 나간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세상의 질서와 일시적인 부분들로 이루어져 영원한 전체가 된 존재 양식과 그대로 상응하며 조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존재 양식에는 인류를 거대하고 신비한 통합체로 엮어내는 위대한 지혜에 의해, 전체는 어느 한 시기도 노년이라거나 중년이라거나 연소한 상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변함없는 항구성 속에서 영원한 쇠퇴, 몰락, 쇄신, 진전이라는 행로를 거치면서 움직인다. 국가운영에서 자연 양식을 견지함으로써 우리가 개선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결코 전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며, 우리가 보유하는 경우에도 결코 전적으로 낡은 것이 되지 않는다."(82-3)


제2부 프랑스 혁명의 실상


"당신들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에 매우 근접한 헌법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질서 잡힌 사회로 구성된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선택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당신네는 잘못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멸시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자본 없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만일 당신 나라의 바로 앞 세대가 별로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지나쳐버렸으면 될 것이다. 당신들의 주장을 더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끌어오면 될 일이었다. 그러한 조상에 대한 경건한 애호 속에서, 당신의 상상력은 요즈음의 천박한 행동을 넘어서 그들에게서 덕과 지혜의 기준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닮고자 하는 모범과 더불어 향상되었을 것이다. 조상을 존경하면서 자신을 존경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프랑스인을 어제 갓 태어난 사람들로 간주하거나 1789년 해방의 해까지는 미천하고 예속된 가련한 사람들로 여기도록 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85-6)


"국민의회는 자신들의 지식과 현명함 그리고 성실성을 조국에 바치기로 서약했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법정의 자랑거리인 일류 변호사들도 아니었다. 대학의 고명한 교수들도 아니었다─그 대신에, (출중한 예외도 있지만) 그렇게 수가 많은 경우 으레 그럴 것이지만, 훨씬 많은 부분이 법률가 중에서 하급으로 무식하고 사무적이며 단지 보조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구성된 집단에 최고 권위가 부여되면 언제나, 자신들을 존중하도록 습관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최고 권위가 놓인 데에 수반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질 평판을 애초부터 갖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진 것에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 더 놀랄 이들이, 절제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갑자기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예속된 미천한 지위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자신들의 준비되지 않은 위대함에 도취되지 않으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95-6)


"단언컨대, 수평이 되게 맞추려는 자들은 절대로 평등을 이룰 수 없다. 모든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시민들로 이루어지는 법이어서, 그중 어떤 부류가 최상위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평등화하려는 자들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변화시키고 전복시킬 뿐이다.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땅 위에 두어야 할 것을, 그들은 공중에 세움으로써 사회라는 건축물에 무거운 부담을 준다. 그 공화국을 (파리 공화국이 그 한 예다) 구성하고 있는 재봉사 단체와 목수 단체들은, 찬탈 중에서 최악인 자연적 특권에 대한 찬탈을 통해 당신들이 그들에게 강요한 지위를 감당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명예로운 것이 못 되는)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억압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개별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통치하도록 허락된다면, 국가가 억압되게 된다. 당신들은 이 점에서 편견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실은 자연과 투쟁하는 것이다."(104-5)


"공공 사회가 협약(convention)의 소산이라면, 그 협약이 공공 사회의 법이 되어야만 한다. 그 협약이 공공 사회에서 형성된 모든 종류의 기본법을 한정하고 조절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은 그 피조물이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상황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개인들의 열정이 억제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집단과 단체에서도 인간의 성향이 빈번하게 좌절되고, 의지가 통제되고, 열정이 극복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오직 '그들 자신에서 나온 권력에 의해서' 실시될 수 있다. 그 기능을 행사할 때 제어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임무인 사람들의 의사와 열정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억제가 그들의 권리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와 억제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변경의 여지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를 어떤 추상적 규칙에 기반하여 정해놓을 수는 없다. 그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자유와 억제를 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119-20)


"한 국가를 구성하거나, 혁신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학문은 그 밖의 다른 경험과학처럼 '선험적'으로 교육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 실천적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짧은 경험이 아니다. 도덕적 요인의 진정한 결과는 반드시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해로운 것이 더 나중 작용에서는 탁월할 수도 있다. 그 탁월성이 처음에 산출된 나쁜 결과에서 생길 수도 있다. 반대로, 아주 그럴듯한 계획이 매우 만족스럽게 시작되었다가도 종종 낭패스럽고 유감스런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통치 지식은 그 자체로 매우 실천적이면서 그러한 실천적 목적을 지향하므로 (한 개인의 삶 전체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경험(experience)을 요구한다. 따라서 여러 시대를 거쳐서 상당한 정도로 사회의 공통된 목적에 부응해온 건축물을 감히 쓰러뜨리려고 시도하는 경우나, 증명된 유용성을 간직한 모델과 모형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재건축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는, 무한한 조심성이 요구된다."(121)


"저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국왕은 한 남자에 불과하다. 왕비는 한 여자에 불과하다. 국왕 시해, 존속 살인, 신성 모독은 미신적 허구일 뿐이다." "이 야만적인 철학의 사고방식은, 냉정한 가슴과 불명료한 이해력의 소산이며, 모든 아취와 고상함이 결여된 것만큼이나 확실한 지혜도 결핍되어 있다. 여기서 법은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아니면 법은, 각자가 사적인 궁리로 찾은 관심사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사적 이익에서 보아 할애한 부분에 따라서만, 지지될 것이다. 그들의 아카데미의 덤불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끝에 보이는 것은 교수대뿐이다. 국가 쪽에는 애정을 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기계론적인 철학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 제도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도 된다면, 인격 속에 결코 구현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내면에 사랑, 존경, 찬미 또는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애정을 내쫓는 그러한 종류의 이성이 인격을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44)


"우리는 자칫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들을 초래하고 아마도 지금까지 지탱하는 원인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예절, 우리의 문명 그리고 예절이나 문명과 연관된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이 유럽 세계에서 오랫동안 두 가지 원리에 기초했다는 점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실은 두 가지가 결합된 결과였다. 이 두 가지는 신사의 정신과 종교의 정신이다." "어떤 나라에 무역과 공업은 없지만 귀족과 종교의 정신이 남아 있다면, 판단력이 전자의 자리를, 그것도 반드시 나쁘지는 않게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래의 기본적 원리들 없이 국가가 얼마나 잘 지탱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려고 덤벼서 그 와중에 상업과 기술이 상실된다면, 그 국민은 상스럽고 우둔하고 난폭하며 동시에 가난하고 누추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종교도 명예도 남자다운 자부심도 없이, 현재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그럴 희망이 없게 된 나라는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146-7)


"이 계몽된 시대에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화되지 않은 감정의 소유자라고 대담하게 고백한다. 우리의 옛 편견(prejudices)을 모두 버리는 대신에 상당한 정도를 소중히 여기며,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편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중히 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편견이 더 오래 지속된 것일수록, 더 일반적일수록, 우리는 더 소중히 여긴다고 고백한다." "우리나라의 사변적 인물 다수는 일반적 편견을 퇴출시키는 대신, 그 속에 가득한 잠재적 지혜를 발견하는 데에서 자신들의 현명함을 발휘한다." "이성을 지닌 편견은, 행동에 그 이성을 부여하는 동력을 보유하며, 행동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애정을 지닌다. 편견은 위급시에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편견은 정신을 미리 지혜와 덕성의 꾸준한 길을 따르도록 하고, 결정의 순간에 사람들을 회의하고 당황하고 미결 상태에서 망설이도록 두지 않는다. 편견은 미덕을 습관으로 만들지, 서로 연결되지 않은 행위의 연속 상태로 버려두지 않는다."(158-9)


"우리는 인간이 그 성격상 종교적 동물임을 알고 있다. 무신론은 우리의 이성뿐 아니라 본능에도 배치되며, 결코 오랜 기간 지배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안다는 점에 자부심을 지닌다. 그러나 만일 난동 시기에, 그리고 프랑스에서 현재 맹렬하게 뒤끓고 있는 지옥의 증류 가마에서 나온 강한 술로 착란상태에 빠져서 기독교를 폐기하여 우리의 알몸을 드러낸다면, 투박하고 위험하며 저열한 미신이 그를 대신할 것이라고 (정신은 진공 상태를 참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염려하는 바다. 기독교는 이제까지 우리의 자부심이었고 위안이었으며,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국민에게 문명의 일대 원천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당신네가 했듯이 기존 제도에서 자연스런 인간적 존경 수단들을 제거하여 경멸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대신에 어떤 다른 것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164)


"이 혁명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해 채용된 모든 사기, 기만, 폭력, 약탈, 방화, 살인, 몰수, 강제유통지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전제와 잔인함이 그 자연적 결과를 나타낼 때, 즉 모든 유덕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도덕심에 충격을 주었을 때, 이 철학적 체계의 선동자들은 즉시 프랑스의 옛 왕정을 비난하는 데 목청을 높였다. 폐위된 권력을 충분히 불명예스럽게 만든 후, 그들은 새로운 악용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구체제 당파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들의 조악하고 난폭한 자유 기획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속의 옹호자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필요성에 쫓겨서 이러한 천박하고 경멸스러운 기만을 행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편에 그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 극악한 폭정이 있어서 그외에는 제3의 다른 선택이 없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들의 행위와 기획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궤변이라는 이름도 붙일 가치가 없다."(208-9)


"사람들이 현존하는 법에 의해 일정한 생활양식을 영위하도록 조장되었고 또 합법적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방식이 보호될 때─그들이 모든 생각과 모든 습관을 그 방식에 적응시켰을 때─법률이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규칙에 충실함을 평판의 기반으로 삼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치욕의 기반 또는 형벌의 기반으로 삼았을 때─나는 입법부가 그러한 때에 자의적 법률에 의해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갑작스러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상태나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강등시킨다든지, 전에는 그들의 행복과 명예의 척도가 되었던 성격과 습관을 치욕과 오명으로써 낙인찍는 일은 부당하다고 확신한다. 만일 여기에 더하여 그들이 집에서 추방되고 재산이 모두 몰수된다면─무릇 혁명은 몰수하는 데 적절한 기회다─나는 사람의 감정과 양심, 편견, 그리고 재산을 가지고 행해지는 이 전제정치적 오락이 어떻게 극악한 폭정과 구별될 수 있을지 알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252-3)


"인간 정신의 왕성한 생산력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힘을 어떤 것이라도 파괴하는 행위는, 물질세계에서 물체의 분명한 활동 속성을 파괴하는 짓을 도덕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질산소다에 함유된 기체의 팽창력이나 증기, 전기, 자기의 힘을 (만일 우리에게 파괴할 능력이 있다면) 없애려고 덤비는 것과 같다." "나는 어떤 자가 감히 자신의 나라를 백지(carte blanche)에 불과하다고 보고 자신이 좋을 대로 그 위에 갈겨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로 오만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열렬한 공상적 선의로 가득한 자라면, 자신의 사회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구성되기를 기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애국자이고 진정한 정치가라면, 자신의 국가에 현존하는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최선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할 것이다. 보수하려는 성향과 개선하는 능력이 같이 가는 것이 정치가에 대한 내 기준이다. 그외에 다른 것은 모두 그 생각에서 천박하고 실행에서 위험하다."(255-4)


"미신은 정신이 허약한 자들의 종교다. 따라서 약간의 이러저러한 사소한 형태와 또는 약간의 열정적인 형태로, 상호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하기 때문에 '찬미자'가 되지 않으며 이러한 것들에 격렬하게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격렬하게 혐오하지도 않는다. 지혜는 오류에 대한 가장 엄격한 교정자가 아니다. 양자는 경쟁하는 오류이며, 서로 가차 없는 전쟁을 벌인다. 양자가 자신의 우세를 이용하는 데 매우 잔인하여, 상호 논쟁에서 무절제한 대중을 이편에 또는 다른 편에 끌어들이는 일이 있을 정도다. 신중함은 중립일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그러한 열기를 만들어내게끔 되어 있지 않은 사안에 관해 맹목적 집착과 격렬한 반감이 대립하는 경우, 정열이 초래하는 과오와 과도함 가운데 무엇을 비난하고 무엇을 용인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아마도 현명한 인물은 건설하는 미신이 파괴하는 미신보다 더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256-7)


제3부 국민의회의 새 국가 건설 사업


"국민의회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이나 계속하는 모든 일은, 가장 통상적인 기술에 속한다. 그들은 야심가 선조들이 그들에 앞서 했던 그대로 나아간다. 그들의 모든 책략, 기만 그리고 폭력의 자취를 추적해보면,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폭정과 찬탈의 정식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적은 결코 없다. 공공선과 관련된 모든 규칙에서는 그들의 정신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전체를 시험해보지 않은 사변의 처분대로 맡겨버렸다. 그들은 공중의 가장 소중한 이익을 산만한 이론에 맡겨버렸는데,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는 그들 중 누구도 이론에 맡긴 바가 없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확보하려는 욕망에 완전히 열성적이어서, 이미 다져놓은 길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공공이익에 관해서는, 전부 우연에 내맡겨버렸다. 내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계획은 경험상 그 경향이 유익하다고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267-8)


"나는 국민의회의 민중 지도자들 가운데는 상당한 재능의 소유자도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 몇몇은 연설과 저술에서 유창함을 보였다. 이러한 유창함은 풍부하고 연마된 재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창함은 그에 비례하는 정도의 지혜를 동반하지 않고도 갖출 수 있다." "체제 그 자체를 시민의 번영과 안전을 확보하고 국가의 힘과 위엄을 증진하기 위해 구성된 하나의 국가 계획으로 보았을 때, 종합적이며 적절한 정신 작업이라거나, 심지어 통속적인 신중함이라도 나타내는 그 어떤 것은 단 하나의 예도 발견할 수 없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서나 곤란을 회피하고 빠져나가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관은 엄격한 교사다. 그들이 탈피하기보다는 회피했던 난관이 그들의 길에 다시 나타난다. 곤란은 증가하고 무성하게 그들을 덮친다. 그들은 혼란된 세부 사항들의 미로에 부딪혀 방향을 잃고 끝없는 수고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일 전체가 위태롭고, 타락하고, 불안정하게 된다."(268-70)


"보존과 개혁을 동시에 하려는 것은 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오랜 제도의 유용한 부분들이 유지되며, 그 위에 덧붙여진 것이 보존된 것에 적합하게 되기 위해서는 활발한 정신, 꾸준하고 끈기 있는 주의력, 비교하고 결합하는 여러 능력 그리고 방편이 풍부한 이해력이 제공하는 자원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질은 반대편 해악의 결합 세력과 계속 싸우면서 발휘되어야 한다. 또 모든 개선을 거부하는 완고함과 소유하는 것 모두에 대해 염증을 내고 혐오하는 경솔함과도 싸우면서 발휘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진행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속도가 느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걸려야 한다." "생명을 지니지 않은 물질을 처리하는 데에서조차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이 지혜의 일부라고 한다면, 우리가 파괴하고 건설하는 것이 벽돌과 재목이 아니라 민감한 존재여서 그들의 상태와 상황 그리고 습관을 갑자기 변경하면 다수가 비참해질지 모르는 경우에, 조심과 주의는 진정 의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271)


"고대의 공화국들을 조형한 입법자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힘든 일이어서, 대학생 수준의 형이상학이나 소비세 담당관 수준의 수학과 산술 같은 도구로는 도저히 완수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들은 인간을 다루어야 했으며,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시민을 다루어야 했으며, 시민이 생활하는 환경 속에서 전달되는 습관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이 2차적 본성이 1차적 본성에 작용하여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인식했다." "반면 프랑스의 권력자들은 형이상학을 많이 가졌는데, 그것은 나쁜 형이상학이다. 기하학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은 나쁜 기하학이다. 비례산술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은 잘못된 비례산술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재편하는 일에서, 도덕과 관련된 어떤 것이나 정치와  관련된 어떤 것을 참조한 바는 무엇이 되었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의 관심사, 행위, 정열, 이익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289-92)


"세심한 정확성을 지니고 인간의 도덕 상태와 경향에 따르던 몇몇 고대 공화국 입법자들의 유능한 성향과는 매우 달리 그들은 발견되는 모든 위계를 평준화하고 한꺼번에 분쇄해버렸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계급화는 만일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면, 모든 정부 형태에서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공화국에 실효성과 영속성을 부여하는 필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전제의 과도함을 막는 강력한 장벽을 구성한다. 이런 것 없이 만일 현재의 공화국 기획이 실패한다면, 절제된 자유를 위한 모든 보장도 함께 실패하게 된다. 전제정치를 완화하는 모든 간접적 규제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만일 프랑스에서 현재의 왕조든 아니면 다른 왕조 아래서든, 왕국이 세력을 다시 전부 키우게 된다면, 아마도 그 왕국─만일 국왕의 현명하고 도덕적인 의도에 의해 초기에 자발적으로 진정되지 않는다면─은, 지상에 출현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완전한 자의적 권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절망적인 게임이다."(294-5)


"무릇 군대는 이제까지 원로원이나 민중적 권위 기관에 대해서는 매우 위태롭고 불확실하게만 복종했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군대는 2년 동안만 지속되는 의회에 대해서는 거의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장교들이 중재자들이 행사하는 지배를 완벽한 복종과 적당한 존경을 지니고 대한다면, 그들은 군인의 특징적 성향을 완전히 잃었음이 틀림없다." "한 권위는 취약하고, 모든 권위는 부침을 거듭하는 속에서, 장교들은 한동안 불온한 채로 파쟁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마침내 병사의 호감을 얻는 기술을 이해하고, 지휘의 진정한 기백을 갖춘 어느 민중적 장군이 출현하여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것이다. 군대는 그 개인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런 사태에서는 군대의 복종을 확보할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는 그자가 당신들의 주인이 된다. 당신네 왕의 주인, 당신네 의회의 주인, 당신네 공화국 전체의 주인인 것이다."(340-1)


"(능력과 요구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좋은 질서는 모든 좋은 것들의 기반이다. 획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민중이 굴종적이지 않되 온순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 정부 고관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법률은 권위를 지녀야 한다. 민중의 마음속에서 자연적 복속 원리가 인위적으로 근절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은 자신들이 한몫 차지할 수 없는 재산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들은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대개 그렇듯이 성공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위안은 영원한 정의가 행하는 최종 분배에서 얻어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 이 위안을 빼앗는 자는 그들의 근면성을 꺾으며, 모든 보존과 함께 모든 획득의 뿌리에 타격을 입힌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인물은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한 잔인한 압제자이며, 무자비한 적이다. 동시에 그는 사악한 공상에 의해, 성공한 근면의 열매와 재산 축적을, 태만한 자들, 실망한 자들, 그리고 실패한 자들의 약탈에 노출시킨다."(373)


"나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사소한 기교와 고안을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많은 중요한 사안을 실행할 수 있게 한다. 민중을 결합하게 한다. 노력하는 정신에 생기를 준다. 도덕적 자유의 엄격한 얼굴에 때때로 유쾌함을 퍼뜨린다. 모든 정치가들은 매력을 지니기 위해 희생해야 하며, 이성과 유순함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행해지는 사업에서는, 이러한 모든 보조적 감정과 방책들이 별로 쓸모가 없다.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대단한 신중함이 필요치 않다. 권력의 자리를 안정시키고, 복종을 가르치면 일은 완수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일은 더욱 쉽다. 지도할 필요가 없다. 고삐를 놓아버리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정신을 국민의회의 지도자들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375)


"나는 내 나라 사람들이 누구든 우리 이웃나라들에게 영국 헌정의 예를 추천하기 바란다. 나는 우리의 행복한 상태가 우리의 헌정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헌정 전체 덕분인 것이다. 변경하고 첨가한 것들과 더불어 몇 번에 걸친 검토와 개혁을 거치면서도 유지시킨 것에 크게 혜택받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데 진정 애국적이고 자유로우며 독립적인 정신을 발휘할 일들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나는 변경을 배제하지 않겠다. 그러나 변경할 때에도 그것이 보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심대한 불만거리가 있을 때 비로소 치료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행동에 옮길 때, 나는 우리 선조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수선을 할 때, 가능한 한 그 건물과 같은 방식으로 할 것이다. 현명한 조심성, 주도면밀함, 기질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인 소심함이 우리 선조들이 가장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 지녔던 지도 원리들이었다."(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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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정치가는 어떻게 세상을 망치는가 - 조제프 푸셰 : 어느 기회주의자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강희영 옮김 / 바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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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어둠의 서막


"푸셰는 그의 생애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서도 어디까지나 배후의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보이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속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그는 사건의 내부에 있었고, 각 당파 안에서 익명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마치 시계 내부의 기계장치처럼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활동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역사의 전면에서 재빨리 사라지는 그의 옆얼굴을 얼른 포착하려 해도 곧 포기해야 할 만큼 그는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설사 날쌔게 움직이는 푸셰의 옆얼굴을 붙잡았다 하더라도 처음 본 때와 그다음에 본 때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같은 피부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이 1790년에는 수도원의 교사였고, 불과 2년 후인 1792년에는 교회의 겁탈자가 되었으며, 1793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백만장자가, 그리고 10년 후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8)


1 조제프 푸셰, 세상 밖으로 진출하다


"1770년경 프랑스에서 정신적으로는 이미 각성된 시민계급들은 조바심치며 바깥세상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직장은 그다지 변변치 않았다." "제3계급에게 문이 열려 있는 곳은 교회뿐이었다. 아주 신분이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정신의 왕국에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소년 조제프는 수도복을 입고 머리 한가운데를 삭발한 모습으로 다른 신부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했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오라토리오회 생활 10년 동안은 한 사람의 사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높은 서품을 받지도 않았고, 어떠한 서원도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빠져나갈 길을 열어놓고 변화의 가능성만은 남겨두고 있었다. 그가 후일 혁명, 총재정부, 통령정부, 제국, 왕국에 대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교회에 일시적으로, 그것도 잠시 동안만 있었을 뿐이다. 조제프 푸셰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에게조차도 일생 동안 변함없는 충성을 서약하는 의무를 단 한번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15-7)


"프랑스의 모든 근원을 뿌리째 뒤흔들게 될 대의원 집회에 나가기 위해 로베스피에르가 출발하자, 곧 아라스의 오라토리오회 수도자들도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이 바람의 관측자는 사회적 폭풍이 프랑스로 몰려오고 있으며, 정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없었다 정치의 한가운데로! 그는 단숨에 수도복을 벗어던지고, 삭발했던 머리를 길게 기르고는 낭트의 용감한 시민들에게 정치 강연을 시작했다." "의회 선거가 공포되자마자 한때의 사제교사는 입후보자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의원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셰는 선량한 유권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상업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며,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했다. 낭트에서는 좌익보다는 우익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는 구제도에 대항하는 것보다는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들을 향해 격렬하게 욕하는 쪽을 선택했다."(21-3)


"이 영리한 남자는 어둠 속에 몸을 도사렸다 그는 권력가에게 접근하기는 했지만 모든 공공연한 권력, 눈에 보이는 모든 권력을 경원했다. 연단에서나 신문지상에서나 떠들썩하지 않게 위원회에 선출되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도 감시받는 일이 없고, 미움을 사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그늘 속에 숨어서 여러 사건을 통찰했다." "이렇게 흑막의 인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생 동안 조제프 푸셰가 보였던 삶의 태도였다. 결코 표면상 권력의 소유자가 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권력을 억제하고, 모든 끈을 끌고는 있지만 절대로 매사에 책임자가 되지 않는 것, 그것이다. 언제나 일인자의 배후에 숨어서 그를 방패로 삼으며 전면에 내세우다가 그 사람이 뛰어나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 이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 정치 무대에서 아주 완전무결하게 간사한 이 사람은 스무 번 넘게 분장을 바꾸면서 공화당원으로서도, 국왕 밑에서도, 황제 밑에서도 많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32-3)


"1793년 1월 16일, 예상을 뒤엎고 루이 16세의 '사형 집행'에 투표한 다음날, 푸셰는 선언문을 인쇄해서 발표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깊이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먼저 덤벼들면서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고 위협하려는 태도마저 취했다." "〈폭군의 여러 범죄행위는 명백하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의 머리가 단칼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강도나 살인자가 모두 머리를 쳐들고 날뛰어도 별 수 없다. 그러면 가장 무서운 사회문란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시대는 우리들 편이고, 지상의 모든 국왕에 반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하루 전까지만 해도 확신에 찬 처형 반대의사 선언문을 호주머니 속에 준비하고 있던 이 남자는 처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라고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적 순간에 모든 계산의 결정적인 분모는 대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변절자의 계산은 옳았다."(41-2)


"이제 급진파 소속으로 지방에 파견의원으로 나간 푸셰는 그의 관할 지역인 루아르 강 남부의 낭트, 느베르, 물랭 등 여러 곳에서 미친 듯이 과격하게 행동하며 온건파에 맞서 호통을 치고 속사포 같은 포고로 그 지역을 뒤흔들었다. 부자와 겁쟁이, 얼간이, 잡종 패거리들을 난폭한 방법으로 위협하고, 부락에서 지원병을 강제로 끌어내어 연대를 조직해서 적과 싸우는 데 동원하기도 했다. 조직력과 재빠른 정세 파악에서 그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철면피적인 언변에서는 단연코 모든 동료들을 능가했다." "리옹의 '훈령'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공화국 법률을 지킨다면 공화국 국민에게는 어떠한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법률을 위반하거나 표면상이라도 그 목표를 넘어 이탈하는 자는 언제나 정당한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한 자유는 더욱더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46-8)


"그러나 조제프 푸셰는 격정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언제나 변함없는 타산가이자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의회에 보고서를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국적인 상투어나 편지는 불환지폐와 함께 이미 오래전에 시세가 떨어졌으며, 사람들을 감탄시키기 위해서는 금속성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징용한 군대가 국경을 향해서 진격하는 동안 교회에서 강탈한 물건에서 나온 모든 소득을 파리로 보냈다. 각종 상자 더미가 계속해서 의회로 운반되었다. 무엇보다도 공화국이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 이러한 웅변적 포획물을 대의원들에게 보낸 것은 그가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활동력에 다른 의원들은 깜짝 놀랐고, 터질 듯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푸셰라는 이름은 이 시간부터 강철 같은 사람, 공화국에서 가장 두려움을 모르는 자, 가장 강력한 공화당원으로 불렸고, 또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다."(54)


2 리옹의 학살자


"혁명 지도자들은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피 흘리는 것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들은 정적을 몰아내고 규탄하기 위해 처형이라는 위협용 무기를 들이댔다. 살인이라는 용의 이는 한 번 살인을 이론적으로 시인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계속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가의 죄과는 피에 취한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말에 도취한 것이다. 그들은 다만 국민을 감격시키고 자신들의 급진주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은어를 창조하여 끊임없이 배반자와 사형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거칠고 자극적인 말에 도취된 민중이 얼이 빠져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착각한 〈과감한 조치〉를 요구하면, 지도자들은 배반자들을 단두대에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에 반대할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단두대에 대한 자신들의 경고가 거짓이라고 책망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68-9)


"조제프 푸셰 역시 리옹에서 왕당파 반동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무시무시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재현하면서, 스스로를 이렇게 변호했다. 〈재판소의 판결은 범인에게는 소름끼치는 무서움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동요하는 민중은 점차 진정되고 위로를 얻게 된다. 우리들이 죄인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은총의 영예를 배풀었다면 아마 민중들은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우리들은 단 한 번의 은총도 허락한 일이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푸셰가 태도를 바꾸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의회의 바람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그 특유의 민감한 감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그의 거친 사형집행의 나팔소리에 당연히 메아리쳐 돌아와야 할 반향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코뱅당의 친구이자 무신론의 동지인 에베르, 쇼메트, 롱생 등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로베스피에르의 무정한 손이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이다."(81-2)


"이미 다수당에 있지 않다는 오래 전부터의 불안감이 푸셰의 마음을 휘감았다. 테러리스트들은 물러났는데 더 이상 테러리스트가 될 필요가 있을까." "이전에 그는 팸플릿에서 교수대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계속 작동은 하되 주저주저했다. 그 옛날 브로토 들판의 '국민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했다. 그 대신 푸셰는 갑자기 총구의 방향을 축제의 발기인과 명령의 집행관인 급진주의자들에게로 돌렸다." "그는 양쪽에 도박을 걸었다. 파리에서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책임을 추궁하면, 그는 수천의 묘지와 파괴된 리옹의 건축물들을 가리킬 수 있었다. 또 자기를 학살자로 고발하면, 자신은 온건주의자이며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견책한 자코뱅 당원의 탄핵서를 끌고 와서 방패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오른쪽 주머니에는 준엄하다는 증명서를, 왼쪽 주머니에는 온건주의자라는 증명서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82-3)


3 혁명과 반동: 로베스피에르와의 결전


"위대하고 순수한 이념이 1794년의 로베스피에르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더 적절하게 말하면, 그 이념은 살아 있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응고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헤어날 수도, 또 그 역시도 그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모든 독단적 정신의 운명이다. 이렇게 속을 터놓는 온정이나 매혹적인 인간성이 부족한 그의 행위에는 참다운 생산적인 힘이 없었다. 완고한 데에만 그의 강점이 있고, 냉엄한 데에만 그의 힘이 존재한다. 독재적인 것이 그에겐 생활의 뜻이고 형식이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자아를 혁명과 일체화시키지 못하면 자아가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남자는 어떠한 다른 의견을 허용할 수 없고, 누군가를 자기와 견주는 것을 용서치 못한다.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다. 자신의 견해를 거울처럼 반사하는 생쥐스트와 쿠통 같은 정신적인 노예에게만 참을 수 있을 뿐이다."(96)


"푸셰의 등골에는 공포가 스쳤다. 지형도 알지 못한 채 너무 깊이 파고들었으니 재빨리 후퇴하는 것이 좋다. 홀로 권력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다. 푸셰는 후회하면서 곧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그날 밤 로베스피에르의 집으로 가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용서를 구했다." "그 당시 푸셰가 로베스피에르에게 무엇을 말하고, 또 그의 '재판장'이 그에게 무엇을 대답했든 간에 이 두 사람의 대화는 결코 친절한 환대가 아니라 내리치는 듯한 무자비한 설교이며, 노골적으로 차가운 위협이자 일종의 결석재판의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격분에 떨면서 생토노레 거리의 계단을 내려온 그 남자, 굴욕을 당하고 거절당하고 위협당한 조제프 푸셰는 다만 자신의 목이 얼마간은 붙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제 생사를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 푸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투가 시작된 것이다."(93-5)


"푸셰는 계획적으로 두더지처럼 지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위원회를 방문하고, 의원들과 그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또 만나는 누구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자코뱅 당원들이었다. 그들과는 재치 있고 솔직한 말로 충분히 상통할 수 있었고, 리옹에서 이룬 성과도 어느 정도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주히 돌아다니거나 산책하듯 배회하면서도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며, 어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사람들에게도 뜻밖이었지만, 특히 로베스피에게 그러했다. 9월 18일, 조제프 푸셰가 다수결로 자코뱅 클럽의 총재로 선출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소식을 들은 로베스피에르는 경련을 일으키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푸셰가 그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100)


"로베스피에르의 분노에 찬 연설은 명백하게 푸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말이었다. 이제 700명의 의원 중에서 푸셰는 가장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가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푸셰가 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는 은밀하게, 그리고 차례로 의원들을 방문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준비하고 있다는 새로운 비밀징집 명부에 대해 넌지시 수군거렸다. 그리고 〈당신도 리스트에 들어 있습니다〉 혹은 〈다음 차례는 당신입니다〉라고 속삭였다. 급작스러운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하에서 퍼져나갔다. 고대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카토 같은 철저한 청렴결백 앞에서 완전히 깨끗한 양심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대의원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푸셰는 차례로 실을 풀어 새로운 그물코를 맺으며, 불신과 혐의의 이 거미줄 속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했다."(107-8)


"반동의 성공 이후, 예상과 달리 푸셰는 자코뱅당의 옛 좌석을 지켰다. 그는 정치적인 열정의 냉정함을 알고 있었다. 반동도 혁명과 똑같이 그 이빨을 뽑아버리지 않는 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으며 배를 채울 것이고, 최후의 자코뱅 당원이 법정에 끌려 나와서 공화국이 붕괴되기 전에는 반동의 복수심이 중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가 범한 살인죄로 인해 끊으려야 끊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혁명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단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다!" "당시 파리에서는 하층계급 출신의 프롤레타리아인 그라쿠스 바뵈프가 박해를 받고 있었다. 푸셰는 겉으로는 바뵈프와 제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민중을 자극하도록 바뵈프를 꼬드겼다. 그러나 바뵈프를 앞세운 푸셰의 대담한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알몸뚱이의 생명만을 부지했다. 그 후 3년 동안 프랑스에서 푸셰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126-8)


4 몰락과 부활: 장막 뒤의 권력자


"조제프 푸셰의 유배는 3년이나 계속되었고, 그가 추방되었던 절해고도의 이름은 빈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견의원이었고 혁명의 향방을 좌우한 신분이었던 그가 권력의 최고단계에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진창과 수렁 속으로 몰락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5인 회의인 총재정부에서 오래 전부터 바라스와 뜻을 달리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가장 올곧은 사람으로 알려진 카르노였다. 바라스는 이 두 사람을 없애면 자신이 모든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계획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리저리 날뛰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암살자와 도살자가 필요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철학이 없으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적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푸셰가 아닌가. 이렇게 유배는 입신출세의 학교가 되었다."(136-9)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푸셰는 공화주의적인 양심 따위는 밑바닥에서부터 털어버렸고, 금전욕에 대한 증오도 다락방 굴뚝 밑에 걸어놓은 채 아예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새로운 상대들과 관계를 맺어나갔다. 그는 총재정부의 대표 격인 바라스의 옆방에 밀정으로 드나들며 새로운 권력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무차별의 빵'을 구워서 민중들과 함께 나누려 했던 1793년의 급진 공산주의자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은행가들의 친구가 되었고, 좋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그들의 여러 소망과 사업을 돌보아주었다." "성가신 감시자들을 모두 처치한 프뤽티도르(열매달, 프랑스 혁명력의 12월) 18일에 일어난 바라스의 쿠데타 때 오로지 푸셰만이 지하운동을 통해 그의 동업자를 도왔던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게 후원자 바라스가 새롭게 조직된 총재정부에서 독재군주가 되자 이제까지 남의 눈을 꺼리던 푸셰는 요란스럽게 덤벼들며 당당하게 보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141-4)


"조제프 푸셰가 대신이라고! 파리는 포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모두 경악했다. 리옹의 학살자, 성체 모독자, 교회 약탈자, 무정부주의자, 바뵈프의 친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후 혁명파, 반동파 모두에게 '이번 경무대신이 정말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대신이 된 자코뱅 당원은 더 이상 자코뱅당의 대신이 아니라는 미라보의 명언이 진리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전에는 피에 젖어 있었던 입술이 지금은 속죄의 언어로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질서, 평온, 보안 같은 관용어가 예전 테러리스트였던 푸셰의 경무부 고시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고, 무정부주의를 탄압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구호로 등장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무제한의 선동 연설도 종말을 고하였다. 첫째도 둘째도 질서와 평온과 보안이다. '리옹의 학살자' 조제프 푸셰보다 더 보수적인 훈령을 내린 사람은 없었다."(146-7)


"그는 때로는 음모를 조장하고 때로는 음모를 방해했다. 때로는 교묘하게 선동하고 때로는 떠들썩하게 적발했다. 그와 동시에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게 시기를 놓치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는 이중, 삼중, 사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것이 점차 그의 정열이 되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력과 시간을 많이 투입해야 했지만,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자' 푸셰는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정치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모든 서류를 살펴보고, 보고사항을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중대한 사항은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 앉아 문을 잠그고 혼자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서서히, 어느 누구로부터 임명받지 않았음에도 프랑스 전역의 '고해신부'로서 모든 인간의 비밀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153-4)


"그는 권력을 은밀하게 누릴 줄 알았고, 그 권력을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는 나름의 비결도 알게 되었다. 강압적이었던 혁명 친위대가 총검을 빼들고 최고 권력자, 즉 파견의원의 집을 지키던 리옹 시대는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지금은 포부르 생제르맹의 귀부인들이 그의 객실로 몰려들고, 흔쾌히 면회가 '허락되는' 시절이다." "푸셰는 모두에게 똑같이 친절한 인상을 주는 인물로 변신했다. 내일 당장 어느 당파가 정권의 키를 잡을지 알지 못하는데, 자코뱅당이든, 왕당파든, 온건파든, 혹은 보나파르트든 간에 불쾌하게 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매혹적이고 융화적인 인물로 바뀌었다. 공개적인 연설과 정치적 성명을 통해 왕당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을 가열차게 비판했지만, 뒤돌아서서는 은밀하게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거나 매수하기도 했다. 그는 시끄럽게 법적 절차를 밟거나 잔인한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은 피했고, 폭력 대신 폭력을 가할 듯한 제스처로 만족했다."(154-5)


"이런 가운데 조제프 푸셰는 총재정부의 운명이 멀지 않다는 것을 예감했다. 난세가 되면 사람들은 영웅을 갈구한다. 모든 사람의 눈에 칼과 두뇌, 두 가지 모두를 한 몸에 겸비한 유일한 남자는 보나파르트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 10월 11일, 보나파르트는 독단적으로 이집트에서 돌아와서 프레쥐스에 상륙했다. 민중은 그를 개선장군으로 환영했다." "훗날 보나파르트가 세인트헬레나에서 술회한 바에 따르면, 두 시간 동안의 첫 대화에서 푸셰만큼 딱 들어맞고 일목요연하게 프랑스와 총재정부의 전체 사정을 설명해준 사람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정직하게 털어놓는 일이 거의 없었던 푸셰가 왕위를 노리는 보나파르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모든 것을 이 사람의 자유에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역할은 정해졌다. 주인과 하인, 세계의 형성자와 시대의 위정자로서 그들의 공연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157-62)


5 황제와 신하: 적대적 공존


"두 사람 사이에 친숙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푸셰가 나폴레옹에게 유쾌한 신하가 아닌 것처럼 나폴레옹도 푸셰에게는 유쾌한 주군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충성심을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다." "수많은 문서에서도 드러나듯 나폴레옹은 부관과 고문관 앞에서도 푸셰를 가차 없이 꾸짖었다. 입에서 거품을 내뿜을 만큼 극도로 분노해서 리옹 사건이건 그의 테러리스트 시대의 일이건 모조리 끄집어내서 푸셰를 배반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은 배반자야! 확 총살했어야 했어!〉라고 황제가 호통 칠 때도 그는 말투 하나 바꾸지 않고 〈폐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수백 번의 해직 예고는 물론이고, 추방과 파면 협박도 받았지만 황제는 내일이면 다시 자기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는 태연히 방을 떠났다. 언제나 그가 옳았다. 분노하고 믿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미워했지만 나폴레옹은 마지막 순간까지 푸셰를 완전히 내칠 수 없었다."(205-7)


"전쟁은 나폴레옹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를 미천한 지위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점점 더 전쟁을 원했고, 한층 더 강력한 적이 출현하기를 바랐다." "해가 거듭될수록 전국 각 도시의 성문에 붙은 장정들의 징집 명단에 따라 18세가 19세의 젊은이들이 집에서 끌려 나와 포르투갈 국경이나 러시아의 눈 덮인 황무지에서 아무런 명분 없이 죽어가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의지 때문에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반항심은 거센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의 별만을 쳐다보는 황제와, 조국의 피폐한 상황과 국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 점차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다. 전제군주가 된 나폴레옹은 대개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황제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미친 듯이 굴러가고 있는 이 수레바퀴를 어떻게든 멈춰 서게 할 수 있을지 은밀하게 숙고하기 시작했다."(211-3)


"같은 족속이면서 차이가 있는 친구보다 더 격렬하게 서로를 미워하는 자는 없다. 탈레랑과 푸셰는 내적인 본능으로 상대를 혈육처럼 세밀하게 알게 됨으로써 상대편을 꺼리고 외면했다." "그들은 독설의 칼로 서로를 마구 찔러댔다. 두 사람이 서로 원한을 품고 증오하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백 명의 근면한 밀정이 감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두 사람을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파리 사람들은 두 호적수의 끈질긴 적대관계를 보며 즐거워했고, 옥좌 곁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가며 연출되는 광경을 몰리에르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관찰했다. 두 신하는 끊임없이 서로를 비꼬았으며, 신랄한 기지로 서로 비방했다." "그런데 모두가 좀 더 재미있는 개와 원숭이 싸움을 기대할 즈음, 갑자기 두 배우는 서로 역할을 바꾸어 진지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갖고 있던 주군에 대한 분노가 처음으로 둘의 경쟁의식보다 더 커졌던 것이다."(217-9)


6 권력투쟁: 황제에게 맞서다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적으로 영국과의 강화회담을 진행하던) 푸셰의 면직은 곧 세상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여론은 그의 편이었다. 혁명으로 지위가 높아진 한 남자가 '단독'으로 '제정'에 홀연히 반항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억압의 사슬을 타파하고 자유의 공기를 맛본 프랑스 국민에게 제정이란 이미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자에 불과한 푸셰에게 그렇게 많은 동정이 쏠린 것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황제의 뜻을 거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과 강화를 맺으려 했던 푸셰의 노력이 처벌을 받을 만한 범죄였다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왕당파는 물론 공화주의자들과 자코뱅당, 외교 사절들마저도 이구동성으로 나폴레옹 휘하의 아량과 능력을 겸비한 대신의 실각은 평화사상의 명백한 퇴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황제의 질투가 한 남자의 사회적 명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보다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249-50)


7 생존을 위한 줄타기


"나폴레옹은 자신의 바람을 성취하였고, 권력은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위이며, 로마 국왕의 아버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황송하게도 자신들의 크고 작은 왕관들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나폴레옹의 자비로움에 감사해하며, 그 앞에서 강아지처럼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고 알랑거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적인 영국도 나폴레옹의 위세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푸셰 같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보좌진 정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단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음 편히 명상에 잠길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된 오트란토 공작(푸셰)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인 나폴레옹과 힘으로 겨루려 했던 자신의 실책과 불손을 깨닫게 되었다." "푸셰에게는 황제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영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푸셰는 이미 처리된 것이다. 황제에게 공공연히 반항한 이 남자에게 파리와 튀일리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269)


"나폴레옹이 푸셰에게 다시 한번 관직을 제안한 것은 결코 그를 좋아하거나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관직을 제의한 것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불안감 때문이었다. 황제는 처음으로 패배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군대의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거드름을 피우며 환영 깃발에 둘러싸여 개선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털가죽을 턱 위까지 둘러 얼굴을 가리고 야음을 틈타 남몰래 들어온 것이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가장 막강했던 정예부대 병사들이 러시아의 눈보라 속에서 동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언제나 승리한다는 신화가 무너지자 가장 가까운 친구들부터 등을 돌리고 달아나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면서 엎드려 절하던 주변 나라의 군주들은 대패한 황제 앞에서 체면을 차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무력으로 압박당하고 있던 한 세계가 그 가혹한 군주에 대항해서 일어났다."(272-3)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파리는 성문을 활짝 열었다. 적군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이 파리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는 동안 푸셰는 황제의 의도에 따라 국내 정치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결국 새 정부는 탈레랑의 영도 하에 완전히 새롭게 조직되었다. 이전 정부에서 파문당했던 탈레랑은 필요한 때 그 자리에 있었고, 푸셰보다 더 민첩하게 수완을 발휘해서 간판을 바꿔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가 탈레랑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다 루이 18세도 그를 선임하고 있었기에 탈레랑은 자신의 뜻대로 내각의 모든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그동안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일리리아와 이탈리아를 분주히 오갔던 오트란토 공작에게는 그 어떤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기다려주거나 걱정해주지 않았다. 푸셰는 인생의 어떤 한때처럼 다시 야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282-3)


8 백일천하: 푸셰, 권력의 정점에 서다


"1815년 3월 20일 아침, 엘바에서 귀환한 나폴레옹 황제의 백일천하의 첫날 아침이 밝았다. 수천 명의 환호성이 아직도 그의 핏속에서 일렁이고 있지만, 이미 냉정한 현실을 달관으로 체득한 나폴레옹은 승리 속에 숨어 있는 위험을 내다보고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권좌에 오르기보다는 오랫동안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토록 등을 보이고 싶지 않고 미워하는 푸셰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인물은 푸셰밖에 없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생각이었다." "오트란토 공작을 경무대신에 임명한다는 기사를 실은 관보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푸셰는 자신의 기대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무대신이라니!"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한 더 큰 도박만이 그를 자극할 수 있었다. 대륙의 여러 나라의 운명을 판돈으로 거는 도박이 아니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299-301)


"푸셰는 지극히 불만스러웠지만 경무대신직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 야심만만하고 열정이 끓어오르는 도박사에게도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었다. 도박판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생을 건 이 거대한 도박판의 밖에 서 있을 수도, 게다가 단 한 시간이라도 방관자로 있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말과 행동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그의 비범한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천재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평범함이다. 푸셰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자기를 진정으로 아는 자는 푸셰라고 생각했다. 목마른 자가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물에 손을 내미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충실하고도 무능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교활하지만 믿을 수는 없는 남자를 원했던 것이다. 이처럼 10년 동안의 격렬한 적의가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켰다는 사실이 어중간한 우정보다 더 신비스러울 때가 가끔 있다."(302-4)


"1815년의 나폴레옹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 황제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이름뿐인 권력의 옷을 입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 비해 그의 곁에 있던 푸셰는 힘이 있는, 말 그대로 숨은 권력자였다."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결국에는 혼란의 바람에 흔들리는 믿을 수 없는 나폴레옹의 천재성보다는 푸셰의 냉정하고 타산적인 이성이 피로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확신과 안심을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 황제가 보낸 밀사들이 가차 없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던 그 삼엄한 국경이 오트란토 공작의 밀사에게는 마법의 열쇠라도 닿은 것처럼 쉽게 열리곤 했다. 웰링턴, 메테르니히, 탈레랑, 오를레앙, 러시아 황제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도 푸셰의 밀사를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이제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기만 했던 이 남자는 단번에 세계를 무대로 한 도박판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도박꾼이 된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사건은 의도한 대로 처리되었다."(308-9)


"그런데 푸셰가 다른 나라, 즉 적들과 공공연하게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주변국이 나폴레옹을 배제한 채 푸셰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게 아닌가. 이는 유럽 열강들은 프랑스에서 어떠한 정부 형태가 성립되든 동의할 수 있지만, 다만 한 가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정부만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뜻이다." "자기에게 이처럼 대담하게 도전한 남자를 나폴레옹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푸셰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20년 전인 1793년으로 돌아가보자. 그때도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로베스피에르는 2주일 후에는 푸셰의 목이든 자기의 목이든 둘 중 하나는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도박사 기질을 지닌 오트란토 공작은 그때도 자신에 차 있었다. 나폴레옹의 화를 돋우지 말라고 충고하는 친구에게 푸셰는 로베스피에르 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떨어져 나간 것은 그의 목이었소.〉"(320-3)


"(나폴레옹을 퇴위시킨 후) 푸셰는 자신이 옳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그 한 가지를 실행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의회에서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카르노 앞에서는 공화제를, 동맹군 앞에서는 오를레앙 공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그 이전의 국왕, 즉 루이 18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금씩, 그러나 능숙하게 방향을 돌림으로써 자기와 가장 가까운 동료들조차도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방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부패와 뇌물이라는 거대한 수렁의 늪을 지나서 왕당파 쪽으로 헤엄쳐 건너가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보나파르트파와 공화파를 넘나들면서 자신에게 위임된 정부를 부르봉가에 넘기기 위해 교섭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결법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를 이전 국왕에게 넘겨주는 협약을 통해 외국 군대에 유린된 프랑스를 보호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339)


"푸셰는 루이 18세가 자신을 새로운 정부의 내각에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만 하면 언제든지 파리 성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파리의 어둠 속에서 근세사의 가장 파렴치한 거래가 전 자코뱅 당원과 전 국왕 사이에 비밀리에 성립되었다. 튀일리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부조리극이 펼쳐졌다. 루이 16세의 후예이자 그 동생인 루이 18세가 푸셰를 맞는 생각지 못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푸셰가 누구인가. 그는 루이 16세를 시해한 자들과 공범이며, 왕정 이후 공화국에서 대신을 지냈으며, 무엇보다 일곱 번이나 서약을 어기고 배신한 자가 아닌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직접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담벼락을 타넘고 도망쳤던 자가 아닌가. 그래서 루이 18세는 〈그놈처럼 교활하고 약삭빠른 놈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푸셰는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다짐하겠다는 여덟 번째 서약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345-6)


9 실각과 종언: 역사의 복수


"권력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반발이 뒤따른다. 국왕이 파리에 무사히 입성하려면 푸셰를 경무대신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국왕은 파리에 입성할 때 유혈 참사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얼마나 조바심을 냈던가.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귀족들이 돌변해서 오트란토 공작에게는 눈곱만큼도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리옹에서 수백 명의 성직자와 귀족들을 학살하고, 루이 16세 처형에 가담한 푸셰만큼은 결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트란토 공작은 언젠가부터 국왕 주변의 귀족들이 자기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멸시하는 태도로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옹 학살자에 대한 탄핵 문서가 갑자기 등장하고, 복고 프랑크당과 갑작스럽게 출현한 '애국단체'들이 집회를 열어서 〈백합기는 과거의 오점을 걷어내고 새롭게 순화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푸셰는 결사적으로 저항했다."(358)


"그러나 이 노회한 야심가도, 국가를 판돈으로 걸었던 대담한 도박꾼도, 더없이 교활한 인간도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아무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유령과 싸우는 법이었다. 푸셰는 왕궁에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같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왕투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일가 중에서 학살을 면했던 단 한 사람, 바로 앙굴렘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가담한 공범자인 푸셰에게는 결코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맹세했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공간에 머무르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대신과 귀족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푸셰를 멸시하고 증오감을 표출했다." "그녀가 변절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경멸하자 다른 사람들도 푸셰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왕족 모두가 루이 18세에게 이구동성으로 국왕의 주권이 확립된 지금 튀일리궁에서 푸셰를 내쫓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기에 이르렀다."(360-2)


"다시 세상에 내던져진 푸셰에게 얇은 외투라도 걸쳐주기 위해서 지극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작은 직책이 주어졌다. 관보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경무대신 직위에서 파면되었다는 사실은 제외하고, 드레스덴 궁전의 공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만을 실었다." "의회에서는 아무도 오트란토 공작의 공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이름의 한 고관이, 새 국왕 루이 18세가 의기양양하게 환호 속에 파리로 귀환하게 했다는 사실은 모두 잊어버렸다. 그들 모두는 다만 일개 시민 푸셰, 1792년 국왕의 처형에 가담한 푸셰, 리옹의 학살자 푸셰만을 입에 올릴 뿐이었다. 마침내 32대 334라는 절대다수로 〈하느님으로부터 선출된 국왕에게 맞선〉 푸셰는 특사로서의 모든 은전을 박탈하고, 평생 동안 프랑스에서 추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당연히 공사 직책에서도 파면당했다는 것을 뜻했다. 모든 직책과 권리를 박탈당한 푸셰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한발에 걷어 채여 차가운 거리로 쫓겨났다."(366-7)


"이렇게 오트란토 공작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 때문에 메테르니히가 1819년에 오트란토 공작에게 트리에스테 이주를 허락했을 때에도 몇 명의 오스트리아 경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주의해서 보는 사람이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도 된다는 것을 메테르니히는 알고 있었다. 일하기 좋아하고 쉴 줄 몰랐던 푸셰에게 아무런 기약 없는 무위도식의 나날은 30년 동안의 격무보다 그를 더 지치게 했고 심신의 손상을 입혔던 것이다. 그의 폐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험한 기후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태양빛이 비추는 곳을 죽을 장소로 허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트리에스테였다." "북해의 어느 항구에서 태어나 기이하고 숙명적인 생애를 살아온 푸셰는 1820년 12월 26일, 남해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12월 28일, 이곳저곳으로 불안하게 쫓겨 다니다가 결국 추방당했던 이 남자는 마침내 영원의 안식을 찾았다."(3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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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회고록 -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
이해찬 지음 / 돌베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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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당을 정기노선으로 다니는 대형 노선버스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 지방자치 선거를 정기적으로 치러 내야 하는 정치조직입니다. 지향하는 노선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내야 합니다. 특정 후보가 선거 때 올라타서 패배하면 버리고 마는 중고 승용차가 아닙니다. 특히 언론, 노조, 시민사회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는 정당의 역할과 책임이 매우 큽니다. 2018년 당대표로 취임한 이후 2년 동안 한 일들, 당원이 참여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경선 제도를 정비하며 시스템 공천으로 21대 총선을 치른 것 모두, 국민들의 뜻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민주적이고 유능한 국민정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21대 총선의 큰 승리도 그 여정에 있어 하나의 결과일 뿐입니다." "2022년 봄 대선 과정에서 보듯이 선거는 패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패배 이후에도 당과 진영이 흔들리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내는 것, 그리고 그다음 선거를 준비할 수 있는 힘과 안정감이지요." (7)


"33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온전한 공인(公人)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려면 공인의식(Public Mind)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올바른 공인의식을 가지려면 역사와 현실을 함께 사고하는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정치인은 책임과 열정과 균형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덕목으로 열정, 책임감, 균형을 강조했지요. 제 오랜 공직 생활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은, 이런 덕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책과 사안을 다룰 때 경중과 선후와 완급을 가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일이 더 중요한지,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급히 해야 할 일인지 좀 더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할 일인지를 생각해야 실수도 적고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일이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성실한 태도로 끈기 있게 해 나가며, 반드시 이 사안을 꼭 해결하겠다는 절실한 심정이 중요합니다." (8)


"이 책을 준비하고 구술하며 새삼 확인한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꿈이 모이면 현실이 되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어렵고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꿈을 나누고, 그 꿈을 향해 진실하고 성실하며 절실하게 오늘을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꿈꾸었던 일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한 하루하루 삶의 축적이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저는 그 꿈이 이루어지는 이야기,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 책에 담고자 했습니다." "2년 가까이 준비하고 구술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모아 놓고 나니, 참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 그 시대를 함께 살아왔고 지금을 함께 사는 분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분들이 제 입을 빌려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해찬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함께 살아온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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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세계사 - 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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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혁명가도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아니었던 보나파르트는 (공화국의 제1통령이라는 직함을 취하면서) 프랑스에 일종의 '민주적 이상들'이라는 외관에 가려진 계몽 전제정을 선사했다. 주권은 인민이 아니라 오로지 통치자에게 있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그를 '혁명의 자식'으로 묘사하지만 그를 '계몽주의의 자식'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흔히 가져오는 혼돈과 혼란,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인내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경로를 좌지우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군중에 대한 멸시를 여러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혁명 대신 보나파르트는 관용과 법 앞에서의 평등, 합리주의와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계몽 전제정의 신조에 충실하게, 그는 자신이 믿기에 인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줌으로써 강한 프랑스 국가를 건설하고자 애썼지만 민주공화정을 끌어안거나 주권을 인민의 의지에 넘긴다는 전망은 결코 제시하지 않았다."(13)


"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 진동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반향을 낳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아우스터리츠, 트라팔가르, 라이프치히, 워털루는 모두 나폴레옹 전쟁의 표준적인 역사서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장소들과 더불어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올리언스, 퀸스턴하이츠, 루세, 아슬란두즈, 아사예, 마카오, 오라바이넨, 알렉사드리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로 파견된 영국 원정군과 이란과 인도양에서의 프랑스-영국의 외교적 책략, 오스만 제국에 대한 프랑스-러시아의 공작, 핀란드를 둘러싼 러시아-스웨덴의 힘겨루기를 다루지 않고는 이 시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17)


1장 혁명적 서곡


"프랑스 혁명전쟁[엄밀하게는 1792년부터 1802년까지 벌어진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들을 지칭한다]에 대한 전통적인 서사는 특정한 패턴을 따른다. 그 서사는 1792년 무렵에서 출발하여, 이웃한 군주정들로부터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과, 결국 차례차례 프랑스와의 강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정들의 상황을 비롯해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법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을 제시하며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의 여러 중요한 사태들, 즉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취약성으로 인해 전개된 사태들을 간과한다. 혁명과 혁명전쟁은 프랑스 권력의 허약성을 노출시킨 기존의 정치적 긴장관계 속에서 벌어졌고, 그에 따라 세계 여타 지역에서 유럽 열강의 제국적 야심을 부추겼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유럽과 남동유럽, 북동태평양 지역, 카리브 해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혁명 전야에 국제 정치와 바다 건너 유럽 본토의 상황에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32-3)


"프랑스 혁명은 일단의 복잡한 정치적·재정적·지적·사회적 문제들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그 기원이 프랑스 외부에서 유래했다. 가장 결정적인 발전상으로는 1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대양 무역의 확립과 17세기 전 세계적인 상업 회로들의 등장이 있다. 둘 다 외교적·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유럽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어났다. 열강은 가공할 함대를 구축하고, 무역 회사를 인가하고, 해외 식민지 팽창을 장려하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함으로써 대륙 간 통상에 접근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7년 전쟁(1756~1763) 동안 겪은 정치적·군사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프랑스는 진짜 상업 제국을, 아메리카와 인도양, 아프리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며, 늘어나는 국제 무역량을 수용하기 위해 급속히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가던 금융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상업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다."(33-4)


"혁명전쟁은 국왕들의 사안이었던 전쟁을 국민들의 사안으로 탈바꿈시켰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거의 중단 없이 이어진 싸움은 국가의 자원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투입되고 소모되는 것을 목격하며 무력 충돌의 지속과 확대를 가능케 했다.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위협은 이 무력 충돌에서 혁명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었다. 프랑스 군대는 점령 지역에서 지금 우리가 〈정권 교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해 광범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혁명가들은 혁명이 유럽 전역에서 반갑게 맞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혁명가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만약 유럽 군주정들이 〈국왕들의 전쟁〉을 개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인민들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 그들은 왕위에서 쫓겨난 폭군들에 맞서 서로를 끌어안으리라.〉 인류는 임박한 무력 충돌에서 틀림없이 고통을 겪겠지만 혁명가들은 전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53-4)


2장 18세기 국제 질서


"18세기의 막이 올랐을 때, (유럽 대륙 전체로 확대된 세력 균형의) 평형 상태는 프랑스(에스파냐와 몇몇 독일 국가들에 의해 때로 지지를 받는) 대 오스트리아(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합세한)라는 구도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이 끝난 뒤에 평형 상태는 더 많은 강대국들을 포함하고 훨씬 넓은 지리적 범위를 아울렀다. 이 전쟁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희생시켜 해상과 식민지에서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세력 다툼의 분명한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즉 프랑스보다 두 배가 넘는 전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가 앞바다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물자 보급을 차단하고,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군사력을 대륙에서 봉쇄하는 사이, 영국은 대륙에서 동맹 세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해외에서 군사적·상업적 패권을 확립했다. 1789년에 이르자 영국은 분명히 유럽에서 앞서 나가는 상업, 식민 열강이었다."(58-9)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치하에서 프로이센의 혜성 같은 등장과 엘리자베타(재위 1740~1762)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치하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오랫동안 서쪽에 있던 유럽의 무게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새로운 '문제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바로 발트해 지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운명을 둘러싼 '북방문제'와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둘러싼 '동방문제'였다. 신흥 강국과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열강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무력 분쟁에서 거듭 좌절을 겪었고, 재정적·정치적 난국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전야에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명확한 집단이, '강대국'으로 이미 등장했다. 집단적으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는 일단 외교술이라는 고상한 수단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해 유럽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쟁쟁한 한 역사가가 적절하게 평가했듯이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먹잇감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59)


"유럽 열강들 간 경쟁을 개관하는 가장 편리한 출발점은 오스트리아-러시아-오스만 제국 전쟁이 발발한 1787년이다. 이 전쟁은 강대국들 간의 기존 경쟁관계들─유럽 중심부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와 동부에서 러시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 남부에서 영국-러시아의 경쟁관계─을 특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경쟁관계들을 강화했다. 남동유럽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19세기에 가장 골치 아픈 외교 문제 가운데 하나, 즉 점차 약해지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유럽 국가들 간의 각축전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제의 시초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에서 강화를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시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사안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맡아왔던 역할이었다.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소요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프랑스의 무능력은, 프랑스가 더 이상 일류 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만큼 프랑스 군주정에 굴욕이었다."(73-9)


"영국과 프랑스는 카리브 해역에서도 충돌을 벌였다. 유럽의 통상에 미치는 식민지 생산의 경제적 중요성이 워낙 커서 서인도제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식민지 경쟁관계는 혁명으로 불붙은 노예 봉기로 복잡해졌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적 사건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년 8월)은 프랑스령 식민지들, 특히 생도맹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1년 5월, 자유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재산 자격 기준을 갖춘 모든 남성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프랑스 국민의회의 결정은 생도맹그의 포르토프랭스에서 공공연한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1791년 11월 초에 이르자 마르티니크의 여러 교구들은 노예 반란으로 들썩였다." "1792년 4월 4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모든 자유 유색인에게 시민권을 확대했고,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얻어내길 희망했다. 그로부터 고작 16일 뒤에 세상을 바꿀 전쟁이 시작되었다."(94-6)


3장 1차 대불동맹전쟁, 1792-1797


"혁명은 위협을 제기했지만, 혁명이 강력한 사상들에 의해 추동되어서가 아니라 그 사상들이 총포를 함께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의견〉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질타를 받았을 때 영국 총리는 유명한 답변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골방의 의견들이나 학교의 사변들에 맞서 무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장을 한 의견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정부는 외교정책에서 진심 어린 이상주의를 한껏 드러냈고, 심지어 정복과 영토 확장을 배격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1792년 후반에 이르자, 첫 성공을 맛본 뒤 혁명의 〈자유를 위한 전쟁〉은 이미 더 전통적인 목표들을 향한 무력 충돌로 진화한 상태였다." "혁명의 보편적 원칙들은 많은 이웃나라들로부터 정말로 환영받았지만 그 해방의 수혜자들이 〈프랑스의 살인적인 박애〉의 희생자처럼 느끼기 시작하자 프랑스의 점령은 더 많은 주민들로부터 원망과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04-5)


"1794년 7월에 공안위원회를 전복하고 출범한 프랑스의 신정부는 사방으로부터 공격에 시달렸다. 오른편에서는 왕당파가 군주정을 복귀시키려고 한 반면, 왼편에서는 자코뱅파의 재집권 희망이 계속되는 경제적 문제들로 되살아났다. 총재 정부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다가 왕정주의의 재기로 위협을 받자 다시금 왼쪽으로 돌아갔고,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이동은 다시금 자코뱅주의의 부활을 부추겼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총재 정부가 허약하고 부패했으며 국내외 정책과 재정에서 무능했다고 비판해왔고, 이러한 평가는 자연히 보나파르트 장군의 정권 타도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통령 정부와 제정의 핵심적인 제도들이 중앙집권화와 정부 행정의 공고화를 진지하게 추구한 총재 정부 치하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수년간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피로감에 쌓인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만큼 충분한 공적 신뢰는 받지 못했다."(109-10)


"1797년 10월 17일에 체결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혁명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차 대불동맹은 실질적으로 끝장났고 프랑스가 승리했다. 비록 조약은 바타비아(네덜란드) 공화국과 관련한 어떠한 단서 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세력권 안에 바타비아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저지대 지방과 북부 이탈리아를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 아래 두어 프랑스를 서유럽의 헤게모니 세력으로 만들었고, 영국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맞수가 되었다. 과거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이오니아제도를 보유할 것을 고집한 보나파르트의 뜻이 관철됨에 따라 프랑스의 이해관계는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뻗게 되었고, 동지중해에서 그 입지가 적잖게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발칸반도, 특히 그리스에 혁명의 이상들을 전파했다. 대체로 파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합의한 조약은 공화국의 일개 군인에서 커다란 정치적 야심을 품은 정치가로서 보나파르트의 부상을 만천하에 과시했다."(114)


4장 라 그랑 나시옹la Grande Nation의 형성, 1797-1802


"1797년부터 1802년까지 5년간은 유럽사의 경로를 그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와 재정상의 시급한 사안들은 새로운 점령지의 정치 사정들과 맞물려서 라 그랑 나시옹이란 관념을 향해 외교정책을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 라 그랑 나시옹은 타민족을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발상과 프랑스의 국익을 보호한다는 발상을 조화시키려는 관념이었지만, 물론 프랑스의 국익은 현지 애국자들의 열망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입장 변화였는데, 자유와 공화주의라는 초기의 혁명 원칙들을 암묵적으로 뒤엎고 그 대신 프랑스의 더 폭넓은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제국적인 힘의 정치machtpolitik의 요구들을 지지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1797년에 루이 드세 장군은 일기에 보나파르트가 〈이 모든 민족들에게 프랑스 국민이라는 원대한 관념을 부여하는 위대하고 기민한 정책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프랑스 최대의 적부터 시작해 지구적 규모로 그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139-41)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은 (영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동시에) 동지중해에서 프랑스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아시아에서 더 큰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을 터였다. 1798년 봄 총재 정부는 취약해 보이고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토양이 비옥한 이집트는 귀중한 상품 공급원이 될 수 있을 듯했다(생도맹그의 상실을 상쇄할 훌륭한 대체물이었다). 그러한 제안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화榮華를 되살린다는 〈재문명화〉 임무라는 관념 안에 틀이 짜여 있었다. 이것은 '동방 전제정'에 관한 계몽주의 시대 논쟁들, 그리고 독재와 압제에 맞선 혁명 에토스의 연장이었다. 탈레랑은 총재 정부에 보내는 각서에서 〈이집트는 한때 로마 공화국의 속주였다. 이제 그곳은 프랑스 공화국의 속주가 되어야 한다. 로마 정복은 저 위대한 나라[이집트]에 퇴락의 시대였다. 프랑스 정복은 그 번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자애로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했다."(147)


"바스티유 습격 이후 고작 9년 만에 북아프리카 바닷가에 프랑스 병사들이 상륙했다는 사실은 혁명이 얼마나 재빨리 프랑스 국경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계도 벗어났는지를 드러낸다. 이집트 원정은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항구적인 유산─이집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을 남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군사적·정치적 실패였다. 원정은 레반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들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영국 식민 권력을 강타하는 대신 프랑스의 전통적 맹방(오스만 제국)이 숙적 러시아와 영국과 손을 잡게 몰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총재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798년 후반기에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도록 촉진했다. 그것은 공화주의 이상들을 식민주의와 영토 확장과 결합하려는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제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이제 인도로의 해상 접근로만이 아니라 아대륙의 인접 영토들을 통한 접근 경로도 고려해야만 했다."(154-5)


"프랑스인들이 도입한 기본 원칙들이 너무 급진적이고 이질적이라 심한 저항에 부딪혔기에 점령 자체는 이집트 사회를 그다지 '근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 진공은 곧 카발랄리 메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알리 파샤는 프랑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지 10년 안에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세력을 무찌르고, 이후 중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근대화되고 강한 이집트 국가의 토대를 놓기 시작했다." "이집트 원정이 배태한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집트 원정은 이슬람 사회를 유럽의 제국에 편입하려는 최초의 (그 마지막은 아니지만) 근대적 시도를 대변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으로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계기,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들이 수렴되고, 서구 지배의 온갖 수단들이 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계기였다."(155-6)


5장 2차 대불동맹전쟁과 그레이트 게임의 기원들


"프랑스의 활동은 근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부활시켰지만 영국 정부는 다음 행보를 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윌리엄 그렌빌이 이끄는 외무부는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의 심각성을 경시했다. 그는 유럽에서 대불동맹을 떠받치는 데 더 열성적이었고, 동맹은 프랑스를 저지대 지방에서 축출하기를 원했다. 전쟁부 장관이자 동인도회사 인도 운영위원회 회장이던 헨리 던다스는 이러한 접근법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영국은 제국이며 제국의 전략적·상업적 이해관게를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반면, 유럽에서 프랑스를 억제하는 임무는 대륙 열강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운영위원회는 일단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면 필연적으로 아시아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무력으로 제국을 얻어냈고, 그 제국은 계속해서 무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한 동인도회사의 임원은 말했다."(174-5)


"1780년대에 이르자 러시아는 남부 캅카스, 특히 카르틀리-카케티의 에레클레 국왕이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 맞서 러시아의 도움을 구하던 동부 조지아에 점차 관심을 보였다. 남부 캅카스는 여러 목적에서 유용한 교두보였고, 〈러시아 땅 끌어 모으기〉는 오랫동안 모스크바 정책의 특징이었다." "러시아의 정계, 상업계, 지성계는 그러한 개입이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는데, 러시아가 서구 열강과 대등하다는 인식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식민지 수립 사업에서 빠져 있었던 러시아는 이제 그 주변부에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열강의 일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비춰볼 때 특히 중요했다. 1795년 이란의 티플리스 유린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전환점이었다 그 사건은 동부 조지아와 그 너머에서 러시아 군주정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추겼기에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구적인 개입에 기여했다."(185-90)


6장 평화의 의례들, 1801-1802


"1799년 10월, 이집트에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명확한 계획이 없었지만 현 정부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일단의 정치가들이 그에게 접근해왔다. 스스로가 총재 정부의 일원인 에마뉘엘 시에예스가 주도하는 이 당파는 보나파르트 같은 어수룩한 군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전쟁 영웅인 그의 위상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는 결코 어수룩하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겸손하고 학구적인 시민의 배역을 취하고서, 석학들을 만나고 프랑스 학사원에서 이집트 원정의 학문적 성과에 관해 연설을 하는 등 자신을 지식을 추구하고 지성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곳에서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고, 어느 한편에 가담하기 전에 모든 정파와 분파를 탐구하면서 정치적 저류─당시 총재 정부에 맞서 꾸며지고 있던 음모는 예닐곱 가지 이상이었던 것 같다─를 면밀히 주시했다."(200-1)


# 1799년 11월 9~10일(브뤼메르 18~19일) 쿠데타


"프랑스에서 통령 정부(1800~1804)는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혁명은 이제 끝났다. 급진적 자취들은 싹 치워졌고,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으며, 망명 귀족들은 귀환이 허락되었다. 화해와 질서 회복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새 정부에 대한 공적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보나파르트가 일련의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 개혁 정책들이야말로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건설적이고 항구적인 유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민 다수가 새로운 국가수반에게 허락한 무비판적인 승인을 활용하는 다양한 전략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합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 지도자였고, 그런 관행은 20세기에 어디서나 만연하게 된다. 남성 보통선거권과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허울 속에서 보나파르트 정권은 통치받는 대중에게 아무런 실제 권력을 주지 않았고, 그 대신 정치 과정을 솜씨 좋게 형성하고 통제했다."(203-4)


"통령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나폴레옹 법전으로 알려지게 된 프랑스 민사법의 집대성이었다." "새로운 법전들의 혁신으로 꼽히는 첫 번째 원칙은 명료성이었다. 수백 가지 면제 조항과 변칙 사항을 둔 관습법에 젖어 있는 법률가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종교를 국가의 사안에서 분리시키는 세속주의였다. 이 원칙에 따라 혼인은 이제 세속적인 민사 계약으로 인식되고 이혼이 허용되며,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개인적·시민적 존재를 위한 길이 닦였다. 세 번째는 절대적이고 침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개인의 재산권 원칙이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법 앞의 평등 같은)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 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206-7)


7장 전쟁으로 가는 길, 1802-1803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2년 동안 이어진 협상의 성과인 아미앵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지난 6년 동안 프랑스가 대륙에서 정복한 땅과 관련한 쟁점은 논의 자체를 거부했고, 영국이 이 점을 묵인한 것을 고려할 때, 아미앵 조약은 혁명전쟁의 결정적 성과 두 가지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지지했다. 바로 프랑스의 서유럽 지배와 영국의 해상 패권이었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아미앵 조약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완전한 전환을 가져왔고, 윌리엄 피트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수립된 국제 체제가 〈완전히 폐지되어 (···) (그것을) 유효한 것처럼 여겨봐야 부질없다〉고 시인해야 했다."(229-36)


"뤼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은 대륙의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광범위한 양보는 8년간의 전쟁으로 얻어낸 전략적 이점들을 내주는 것처럼 보였기에 국내에서 우려와 허탈감을 자아냈다. 영국 정치인 오클랜드 경 윌리엄 이든이 지적한 것처럼 물론 그 조약들이 〈지나치고 무시무시하게 비대해진 프랑스 권력〉을 만들어내기는 했다. 영국 혼자서는 그 현실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 다시 말해 국내의 난제들을 처리할 시간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이 영국 제독 조지 키스 엘핀스톤이 표현한 대로 〈프랑스가 지금처럼 강한 상태로 있는 한 유럽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할 시간이었다. 〈유럽 대륙의 열강이 마침내 이 점을 확신하게 되면 프랑스를 합당한 경계 안으로 되돌아가게 하도록 모두 기꺼이 힘을 합치게 되지 않을까?〉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미앵 강화는 단명하게 되고, 1802년 말에 이르자 벌써 뚜렷한 긴장의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239)


# 뤼네빌 조약 : 1801년 2월 9일에 체결된 프랑스-오스트리아 강화 회담


"한편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1804년 1월 1일, 아이티 독립 선언─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보나파르트는 생도맹그를 확고하게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위협과 영국과의 전쟁 재개 전망은 루이지애나 보유가 프랑스에 커다란 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한다면 영국이 서반구에서 전리품을 얻을 가능성을 초장에 제거하고, 미국과의 갈등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미국을 장래에 영국의 경쟁자로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보나파르트는 그러므로 뉴올리언스 매입에 관한 미국의 문의에 선뜻 반응했다."(252-4)


# 1803년 5월 2일, 루이지애나 영토 이전 합의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해체한) 남독일 국가들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 수립은 군사적·외교적 승리 둘 다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의 영토 변경을 좌절시키려고 무력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 보나파르트는 재빨리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에 후한 보상을 제안해 그들과 한편이 되었다. 1801년 프랑스와 러시아의 합의는 남독일에서 프랑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기보다는 그들과 공통의 대의명분을 찾고자 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이 동의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중유럽에서 오스트리아 권력이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자기편이 전혀 없는 오스트리아로서는 물러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협조를 얻고, 프랑스의 궤도 안으로 중급 규모의 독일 국가들을 끌어당김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중점을 둔 보나파르트의 외교는 그러므로 독일의 운명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268-9)


8장 파열, 1803


"아미앵 조약이 와해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몰타섬의 미래와 관련이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은 몰타의 전략적 가치를 드러냈다. 그 섬은 동방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동방에서 프랑스의 정복은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영국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터였다." "진짜 장애물은 양측이 몰타의 가치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 한 영국 장교가 표현한 대로 〈해협들[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의 입구와 시리아 해안으로부터 거의 동일 거리에 위치해, 전쟁 발발시 지중해와 레반트의 무역 전체가 몰타섬 소유자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몰타는 지중해의 무역을 쉽사리 좌지우지할 수 있을 테고, 파리와 런던 둘 다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런던으로서는, 프랑스의 의존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에 희망봉을 넘겨서 인도로 가는 도상의 핵심 지역에 대한 접근권을 이미 상실했다. 영국이 몰타에서 철수한다면 대안 경로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게 될 터였다."(278-80)


"아미앵 조약의 파기는 근대사의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전쟁과 참화의 12년 세월을 열었고,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운명들을 좌우했다." "보나파르트가 (다른 많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혐오했으며 그의 대륙 정책과 식민지 정책이 영국과의 전쟁 결정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1800년과 1815년 사이에 벌어진 모든 분란에 그 혼자만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기만적인 것 같다." "1800~1803년에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전통적인 라이벌에 맞서 프랑스의 지위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박고 있는 지정학적 논리를 따랐다. 영국의 급속한 산업화, 국제 무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 폐쇄적인 식민지 체제, 우월한 해군력은 프랑스가 시장과 원자재로부터 차단되고, 더 넓은 국제 체제에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전망에 직면함을 의미했다. 프랑스 엘리트 계층은 그러한 우려를 공유했고, 보나파르트의 팽창 정책은 국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누렸다."(300-3)


#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가 1803년 3월에 시작된 12년간의 유혈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통령의 언행은 권력을 향한 강력한 추진력을 가리켰으니, 대륙의 평화를 유지했을 수도 있는 신중함과 유화적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실제로 전쟁을, 프로이센 군사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의 연장일 뿐〉이라고 봤고,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은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이웃 국가를 최대한 자극하고 찔러보면서, 결국에는 전쟁의 열매를 맺은 원한의 씨앗을 뿌렸다. 개별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프랑스의 행위들은 도발적이었지만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그 행위들은 프랑스가 헤게모니 국가로서 유럽과 해외에서 제국적 구상을 공세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적 현실을 창출했다.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다."(306-7)


9장 코끼리 대 고래 : 프랑스 대 영국의 전쟁, 1803-1804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 위해 해군을 증강하는 동안 프랑스는 서유럽을 가능한 한 많이 지배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하노버점령은 영국-프랑스 전쟁 동안 유럽의 정세에서 핵심 지표였다. 선제후령은 1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803년 한 해에만 프랑스는 1700만 프랑이 넘는 금액을 뜯어갔고, 하노버는 주변국들로부터 다시금 수백만 프랑을 융자해야 했다. 더 중요하게도, 하노버 위기는 유럽 열강에 만연한 태도─상호 불신, 협력의 결여, 지역적 이해관계에 대한 몰두─의 예시이며, 바로 그런 태도가 다음 10년 동안 프랑스가 유럽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비록 북독일은 유럽 열강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프랑스가 하노버를 침공해 북독일에서 패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조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1803년 봄 내내 애매모호한 정책을 추구했고 프로이센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의 하노버 점령을 가능케 했다."(324)


"(보나파르트가 모든 것을 지휘·감독하는) 국가 원수와 총사령관의 권위의 결합은 뚜렷한 이점들을 지녔다. 나폴레옹은 적수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설정해 외교와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반면, 그의 적수들은 동맹전쟁 수행에 따르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회의나 군주에 의해 종종 손발이 묶였다. 전쟁 수행의 모든 측면을 확고하게 1인이 총괄할 때의 이점은 조타기를 잡은 그 사람이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더욱 커졌다. 정치적·군사적·병참적 그리고 무수한 여타 요인들의 세부 사항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경이로웠다. 하지만 의사 결정 권한의 극단적인 집중화는 이점과 더불어 대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신이 속보로 가는 말보다 더 빠르지 않은 시대에 제아무리 유능할지라도 단 한 사람이 방대한 거리에 걸쳐 흔히 널찍이 분리된 전쟁 권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을 조율하는 것은 때로 불가능에 가까웠다."(337)


10장 황제의 정복, 1805-1807


"1804년 가을과 1805년 봄 내내 유럽 열강의 외교관들은 프랑스에 맞선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그러나 주요 열강은 서로의 야심을 의심했고, 일부 국가들은 이미 프랑스에 두 번이나 패퇴한 동맹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힘겹게 결성된 3차 대불동맹은 하노버와 북독일에서 프랑스의 철수, 스위스와 네덜란드 독립의 재확립,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복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의 완전한 축출을 원했다. 이것만도 만만찮은 목표였지만 동맹 세력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조약 조항에 따르면 〈여러 국가들의 안보와 독립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향후의 찬탈을 막을 견고한 방벽을 제시하는 유럽 내 질서의 수립〉을 추구했다." "하지만 대불동맹은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프랑스 내 정권 교체를 실시할 생각은 없었다.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의 대관과 더불어 프랑스의 혁명 급진주의(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위협)는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356-9)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패권을 안겼고 그 지역에서 그는 설득과 압박을 통해 남독일 핵심 국가들(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냈다. 다른 유럽 열강은 그가 거둔 승전들의 규모와 신속함에 깜짝 놀랐다. 이 전역으로 열강이 부활한 프랑스를 패배시킬 만큼 강력한 동맹을 결성하고 주도할 능력이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나마 허레이쇼 넬슨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의 3분의 2를 섬멸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위안거리였지만, 이 전투는 또한 해양 강국은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해상에서의 승전들은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지만 육상에 기반을 둔 강국을 상대할 때 내재한 제약들을 상쇄할 수 없었다." "다음 7년 동안 영국은 나폴레옹과 그의 제국을 몰락시키기 위한 시도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375-80)


"1800~1801년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심대한 변화는 독일에서 일어났다. 3차 대불동맹 소멸의 여파로 제국의회가 폐지되자(1806년 1월 20일)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 재편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개시했다. 3월에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다스릴 새로운 독일 군소국을 처음 수립했다. 신설된 베르크 대공국은 매부인 뮈라에게 주었다. 더 중요하게도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을 프랑스가 지배하는 독일 정치체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완충국이자 프랑스 상품을 위한 시장, 제국을 위한 군대 인력의 원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1806년 7월, 독일 제후들이 파리 조약을 수용하고 카를 테오도어 폰 달베르크를 〈대제후〉로, 나폴레옹을 〈수호자〉로 인정하면서 라인연방이 정식으로 구성되었다. 최초의 16개 연방 가입 국가들 가운데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바덴, 베르크는 모두 8월 1일 신성로마제국에서 탈퇴해 사실상 제국에 종말을 고했다."(387)


11장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 유럽과 대륙 봉쇄 체제


"많은 이들이 나폴레옹의 최대 실수로 꼽는 대륙 봉쇄 체제는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훨씬 전에도 줄곧 시도되었던 전통적 정책들의 지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프랑스 배들이 트라팔가르만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여전히 실현될 수 없었고, 프랑스 상선 자원은 꾸준히 감소했으며, 프랑스 산업가들은 영국과의 경쟁에서 확연히 뒤처졌으니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제도의 효과적인 고립만이 영국을 굴복시킬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 상품은 일체 통과할 수 없는 [무역] 장벽 뒤로 프랑스가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에 따른 시장의 상실은 영국 경제에 처참한 타격을 입히고 어쩌면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소요를 야기해 나라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을 터였다. 반대로 유럽 대륙을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킴으로써, 이 체제는 제국에도 큰 혜택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412-4)


"대륙 봉쇄 체제는 고작 6년만 존속해, 영국을 굴복시키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실패 원인은 이 체제를 충분히 긴 기간 동안 철저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 있다. 실패를 야기한 요인들은 첫째, 에스파냐에서 나폴레옹의 패착과 더 중요하게도 러시아에서의 패착은 이 체제에 결정타를 가했다. 둘째, 영국의 국가적·경제적 안보는 봉쇄에 대처해 스스로를 조정한 영국 재정 시스템의 유연성 덕분에 진정으로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해군은 영국의 제해권을 위협하거나 유럽 대륙에서 영국 상품을 배제할 수 있는 봉쇄를 실효적으로 강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대륙 봉쇄 체제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영국이 프랑스의 해외 시장 접근을 막고 여타 지역에서 상품 판매를 늘림으로써 유럽 시장의 상실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경제의 최악의 시기는 유럽과 미국 둘 다에 대해 수출이 막혔던 1810~1811년에 발생했다."(421-2)


"대륙 봉쇄 체제는 심대한 무역 교란, 산업에서 농업으로의 대규모 자본 이동, 사회적 불안과 인력 손실, 전쟁과 전쟁이 초래한 격변으로 인한 자본 파괴를 이미 경험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산업 공동화에 일조했다. 또한 대륙 상당 부분을 영국과의 활발한 교류로부터 고립시키고, 신기술과 공법의 유입을 저해해 일부 산업들은 영구적인 쇠락이 야기되었다." "대륙 봉쇄 체제가 설치한 보호 장벽은 대륙의 산업이 성숙할 만큼 오래가지 못했고, 그래서 1814~1815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관세 폐지와 시장 개방으로 대륙의 산업 부문들이 영국의 경쟁자들로부터 심한 타격을 받으면서 극심한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경제적 고통은 결국에는 나폴레옹의 전 유럽 지배의 꿈을 끝장낸 민족주의 부흥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대륙 전역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궁핍에 일조한다고 대륙 봉쇄 체제를 비난했다. 외국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분노는 깊고도 정당했다."(428-30)


12장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쟁탈전, 1807-1812


"1807년 여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정에 영국의 통상에 대해 포르투갈의 항구를 폐쇄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포르투갈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자국의 해외 식민지(특히 브라질)와 상업적 번영이 위험에 빠지거나, 프랑스의 침공과 점령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1807년의 위기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군의 입성에 앞서) 포르투갈의 사적·공적인 자산, 정치 지도자 대다수, 사실상 나라의 해상력 전체가 빠져나갔다. 다음 15년 동안 브라질에 머물게 될 왕실의 망명은 포르투갈 구체제의 소멸과 심대한 정치적·문화적·경제적 결과를 낳은 대서양 건너편으로의 이전을 알렸다. 유럽 국가를 다스리는 왕가가 최초로 해외 식민지에 정착해, 본국의 삶에서 식민 영토가 하는 결정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상당한 재정적·물질적 원조를 받아 1808년부터 1821년까지 〈영국의 보호국〉이 되다시피 했다."(435, 445-6)


"프랑스 황제는 에스파냐에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정치적 혼란과 만연한 반反 고도이 정서를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16일,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맹방으로서 에스파냐 궁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좌시할 수 없으며 반목하는 정치 분파들을 중재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는 발표와 함께 부르봉 왕조에 개입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은 부자를 프랑스의 비욘시로 초대했고, 두 사람은 거기서 악명 높은 희비극의 일부가 되었다." "부자 모두를 강제로 퇴위시킨 바욘 퇴위는 추악한 강압과 기만을 결합한 것으로 한 저명한 역사학자의 결론을 정당화한다. 〈재능 면에서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품성과 수법 측면에서는 대단한 마피아 두목이었다.〉 바욘 사건으로 황제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으니, 그 순간 나폴레옹은 곧 지극히 난감한 형국으로 탈바꿈할 상황에 확실하게 발을 담근 것이었다."(452-7)


#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 : 프랑스의 간섭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왕가의 도피를 막기 위해 과격한 행동에 나서자, 페르난도 왕세자는 부모에게 그들의 신변안전과 대신 고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전면 퇴위 뿐이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새로운 왕위에 오른 사건


"에스파냐 점령은 나폴레옹의 가장 근본적인 판단 착오 가운데 하나이며,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될 실수였다. 그는 자신의 친척을 페르난도 왕세자와 결혼시킴으로써(왕세자 본인이 거듭 청한대로) 에스파냐와 혼인동맹을 수립하는 훨씬 더 안전한 경로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 대신 황제는 황제는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를 축출하고 그 왕국을 직접 떠맡는 더 과격한 노선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인들이 자국 왕실에 적대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외세의 지배를 열렬히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스파냐에 속국(봉신 군주정)을 수립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에스파냐의 국가적 직조 표면 아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원심성 지방분권주의의 엄청난 힘을 풀어헤치는 혁명을 유발했다." "바일렌에서의 패배를 필두로, 그때까지 무적이었던 (프랑스) 제국 군대의 패배는 대륙 곳곳에서 들뜬 흥분을 불러와, 유럽 전역의 반프랑스 정서에 새로이 불을 지폈다."(458-64)


"한편 웰링턴이 리스본 반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구축한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은 반도전쟁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드러났다. 웰링턴에게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영국은 최소의 손실만 입으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대중은 꼼꼼하고 체계적인 웰링턴의 파비우스적Fabian 성격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이런 전략이 결정적 전투나 승리를 가져오지 않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링턴의 전략은 포르투갈의 시골 지방에 파괴적이긴 했어도 실용주의적이고 통찰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프랑스는 또 다른 포르투갈 침공 작전을 기획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영국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에스파냐로 반격에 나섰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이 혹독한 시험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리스본에서는 어떤 친프랑스 진영도 생겨나지 않았고, 포르투갈인들은 끝까지 결연하게 전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영국군을 지원했다."(490-1)


# 파비우스적 전략 :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한니발에 맞서 정면 전투를 회피하고 지연 전술을 써서 전략적 승리를 추구한 데서 나온 표현


13장 대제국, 1807-1812


"나폴레옹 제국은 어떤 목적들에 복무했는가? 이 제국 건설 뒤에 자리한 타당한 원동력으로서 '가족적 친밀성'을 내세우는 논의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일 것이다.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며, 주로 영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논의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나폴레옹의 과대한 권력욕에 대한 주장이다. 한편 나폴레옹 예찬자들은 그를 행동하는 인간, 낡아빠지고 억압적인 제도들을 무너뜨리고 수 세기에 걸친 관습과 전통을 폐지했으며, 교육과 사법 체계를 개편하고, 개인의 권리들과 능력의 옹호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새 유럽을 위한 토대를 놓은 혁명가로 봤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본다).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분명한 뉘앙스가 담긴 답변은 나폴레옹은 한 가지 형태의 전제정을 또 다른 형태의 전제로 대체했다는 것, 개혁을 전파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를 약화시키고 점령지를 착취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알렉산더 그랩의 표현을 빌리면 〈나폴레옹 지배의 야누스적 얼굴〉은 여전하다."(504)


"현재의 유럽연합 체제는 회원국들 간 평등에 바탕을 둔다. 유럽에 대한 나폴레옹의 비전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강성함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모델을 수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가 우월한 행정 체제와 법적 체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럽 나머지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거기에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는데 프랑스 노선에 따라서 다른 나라들을 변모시키면 나폴레옹 자신의 지배와 자원 착취가 크게 용이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정권은 결코 하나의 '유럽적' 정체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에 제국의 생존 자체가 프랑스 무력의 지속적인 우위에 의존했지 제국 지배의 대중적 지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초월적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것은 동등한 국가들로 구성된 연방의 이상이 아니라 보편 제국의 이상, 그 정신에서 유럽연합보다는 샤를마뉴 제국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510-1)


"나폴레옹 체제의 혜택들은 따라서 프랑스 치하 영토들에 대해 프랑스가 한 요구들과 나란히 놓고 고려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전쟁은 전쟁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고, 실질적으로 그것은 프랑스 점령이 법 앞에서 평등과 종교의 자유 같은 높은 이상들만이 아니라 병력 모집과 물적 착취의 증대를 동반한다는 뜻이었다. 프랑스 벙력의 주둔은 그들의 군사적 필요 일체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지 인구에 무거운 부담을 지웠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나폴레옹의 〈대제국〉은 본질적으로 소속 국가들이 각자 병력과 재정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적 체제였고, 그것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정적 기여에 덧붙여 나폴레옹 정권은 그 군사적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 징병을 요구했다." "나폴레옹 징병 메커니즘의 규모와 범위는 러시아 침공 준비 과정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당시 그는 전체 60만 병력의 절반을 위성국과 동맹국에 의존했다."(514-5)


"증세, 강제 분담금, 징병제, 탄압은 나폴레옹 정권이 유럽 곳곳에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지 못한 핵심 이유였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저지대 지방이든 간에 귀족층은 프랑스 개혁 조치들이 수반하는 결과들에 당연히 심기가 불편했고, 이런 변화들로부터 가장 혜택을 입는 부르주아들은 새로 얻은 권리와 지위에 대한 기쁨과 억압받고 검열당하고 과중한 세금과 대륙 봉쇄를 겪어야 하는 데 따른 괴로움을 조화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농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군대에 식량과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나폴레옹 주둔군의 부담을 주로 짊어졌다. 프랑스 황제는 혁명의 화신이라는 온갖 말들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코뱅이었던 그는 1793~1794년의 원칙들을 체현하지 않았고 그의 개혁 정책들은 결코 사회경제적 평등의 달성을 겨냥하지 않았다. 그는 1789년의 원칙들을 온전히 대변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와 점령지에서 나폴레옹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거나 여론을 표현하는 모든 조직적 수단을 억압했다."(519)


14장 황제의 마지막 승리


"나폴레옹이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를 몰아낸 것을 비춰볼 때 오스트리아 주전파─프랑스와의 공공연한 대립을 옹호하는 쪽─는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생존은 나폴레옹에 대한 단호한 도전으로만 보장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1808년 가을 주전파는 카를 대공의 반대를 극복하고 프랑스와 새로운 무력 분쟁을 벌여도 좋다는 프란츠 황제의 승인을 얻어냈으니, 이것이 5차 대불동맹전쟁이다." "1796년이나 1805년의 상황들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는 입지가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더 허약하고 군사적으로 지나치게 확대 배치되었다고 여겨졌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고위 관리가 자랑스럽게 천명한 대로 이전의 패배들은 비전과 지도력 결여의 결과었지만 그러한 과거의 잘못들에서 배운 바가 있었다. 〈다름 아닌 적의 무기들로 적과 싸우자. 그에게 자신의 총알들을 되돌려주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위신에 도전해 그것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했다."(543-6)


"1809년 4월 10일, 카를과 오스트리아 군의 주력이 바이에른을 침공하고, 요한 대공의 또 다른 오스트리아 군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시작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565-6)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또 한 차례의 참패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과 굴종적인 동맹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몇 년 동안 그 동맹에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가져온 최대의 충격파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는 기대치를 조정해야 했고 그에 따라 미래의 협력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전쟁은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제국을 무너뜨리는 1813~1814년의 대동맹을 위한 길을 닦는 데 보탬이 되었다."(566)


15장 북방문제, 1807-1811


"덴마크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보다는 영국의 해군력에 관해 더 걱정하면서 혁명전쟁 기간 내내 중립을 유지했다. 영국은 발트 지역과 교역을 유지하고 그곳에 영국 해군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영국의 해군력에 결정적인 요소였으므로 당연히 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덴마크가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면, 영국 해운이 발트 해역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좁은 외레순 해협이 폐쇄돼 영국의 무역과 접근권은 위협받게 될 터였다. 더욱이 덴마크 해군의 규모와 우수성을 감안하면, 덴마크, 프랑스-네덜란드, 에스파냐 해군력이 연합할 경우 대서양은 아니라고 해도 영국의 북해 지배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려는 덴마크의 노력을 간과하는 편을 택했다. 1807년 코펜하겐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영국도 무거운 대가를 치렀다. 영국군이 떠난 지 고작 열흘 뒤에 덴마크는 나폴레옹과 동맹조약을 맺었고, 11월 4일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602-14)


"스웨덴과 영국의 동맹관계는 발트해에서 영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러시아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부동항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고 그 결과 수익성 높은 해외무역에 참여할 수 없었던 러시아에게 발트해는 특히 중요했다. 발트해는 서유럽으로 통하는 최단거리 통로를 제공했다. 발트해로 접근할 수 없다면 러시아는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유럽에서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존재는 그 제국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모든 외국(즉 영국) 전함에 대해 발트해를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스웨덴 군주정이 응답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고, 1807년 12월 30일 러시아는 스웨덴이 계속 답변을 회피한다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808년 1월, 구스타브는 프랑스 병력이 발트해에 존재하고 나폴레옹이 독일 항구를 영국에 폐쇄하는 한, 이전의 합의 내용을 지킬 수 없다며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러시아는 이 거절을 개전 사유로 여겼다."(622-5)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강화를 위한 세 가지 선결조건을 주장했다. 스웨덴은 핀란드 전체를 할양하고, 영국과의 동맹을 공식 파기하며,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와 화평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대륙 봉쇄 체제에도 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달 간의 협상 끝에 1809년 9월 17일에 서명된 강화조약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전체 영토 가운데 거의 절반을 상실한 반면, 러시아는 그 지역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발트해에서 입지를 다졌다. 아닌 게 아니라 핀란드 주민들은 600년 넘게 스웨덴의 패권 하에 살다가 이제는 새로운 제국의 주인을 맞게 되었다." "프레드릭스함 조약은 스웨덴이 외교정책도 재조정하도록 강요했는데,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러시아와 또 한 번 파멸적인 전쟁을 낳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쟁 대신에 스웨덴은 전략적 고려에서 아예 〈핀란드 문제〉를 제거하는 쪽을 택하고 동부에서의 영토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서 노르웨이에 초점을 맞췄다."(651-2)


"발트해 사안에서 영국의 개입은 영국의 의도를 불신하던 스웨덴의 냉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사실 저강도 영국-러시아 전쟁─한 러시아 역사학자가 인상적으로 표현한 대로 〈연기 없는 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사실 프랑스-러시아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영국은 가능성 있는 동맹의 기초 작업에 나섰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뒤에 영국-러시아 동맹이 드디에 외레브로 조약(7월 18일)으로 현실화됐으니, 이 조약은 영국-러시아 전쟁을 정식으로 종결시키고 6차 대불동맹 수립의 토대를 놓았다."(638-42)


16장 사면초가의 제국 :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 전쟁


"동방문제의 기원은 오스만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계속되는 군사적 성공과, 그 결과 흑해 연안 지역을 따라 이뤄진 러시아의 영토 확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럽 정치가들에게 당대의 중요한 질문은 오스만이 러시아의 영토적·전략적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가, 막아낼 수 없다면 상호 경쟁하는 열강이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였다. 프랑스 혁명전쟁 전야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오스만이 지배하는 발칸 지역 한 조각을 얻기를 기대하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전쟁에 가담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유럽에서 혁명적 격동이 시작되자 바뀌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라인란트와 이탈리아에서 패배한 뒤 빈의 태도는 당연히 중유럽과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오스만 국경지대는 뒤로 밀려났다. 인도에서 자국 세력이 증대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유럽 내 세력 균형유지와 더불어 인도 방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체로 오스만 제국을 떠받쳐주려고 애썼다."(672-3)


"그래서 19세기 초에 러시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할 때 비교적 운신의 자유를 누렸고 세 가지 상호 연결된 목표를 추구했다. 첫 번째는 일방적인 병합이나, 다른 유럽 열강과 함께 오스만 영토를 분할해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술탄의 기독교 신민들에 대한 가호와 민족주의적 정서의 유발을 통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을 얼마간 남겨두어 완충지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때로 〈허약한 이웃〉 정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지막 목표는, 1802년 한 러시아 대신의 표현으로는 〈현재의 영토 판도에서 러시아는 더는 확장이 필요하지 않고, 튀르크인들보다 더 고분고분한 이웃도 없으며, 우리의 이 자연스러운 적의 보존이 향후 우리 정책의 근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일단 러시아가 오스만한테서 충분한 영토를 빼앗으면 두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결코 대등하지는 않을 터였다."(673-4)


"프랑스와 오스만의 관계는 1798년, 프랑스 공화국이 오스만령 이집트를 장악해 영국 무역을 위협함으로써 영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는 원대한 구상을 추구하면서 악화되었다.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은 치외법권 내 프랑스 상인들의 보호와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라틴(로마가톨릭) 기독교도 비호라는 레반트에 대한 프랑스의 전통적 정책들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침공은 영국의 식민 권력에 타격을 주는 대신, 전통적인 맹방인 오스만 제국이 적국 영국과 손잡게 만들었다. 오스만 정부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책의 중대한 전환으로서 1798년 9월에 러시아 해군 전대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양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고,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동부 지중해에서 영국-러시아 함대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 및 영국과 조약을 체결해 대불동맹에 가담했으니, 오스만 제국이 유럽 동맹의 일원이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676)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806년 12월 29일 베오그라드, 1807년 2월 샤바츠 함락으로 이어진 일련의 군사적 승리들로 이전 베오그라드 피샬리크[파샤 관구]는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세르비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저항을 무너뜨릴 중요한 압력 수단을 제시한 셈이었다." "러시아가 러시아인과 세르비아인을 잇는 공통의 정신적·종족적 유대를 언급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의 지도자) 카라조르제는 자연스레 장래 세르비아 독립에 관한 러시아의 확약을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약속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사실 세르비아의 완전한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정한 형태의 후원-의존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다." "비록 프랑스-러시아 간 틸지트 조약은 세르비아를 언급하지 않지만 두 나라는 오스만튀르크가 러시아-오스만 전쟁의 종식을 위한 프랑스의 중재 제의를 거절할 경우 발칸 지역을 〈해방〉시키기로 동의했다."(733-4)


"1809년 1월, 기회를 틈탄 영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자, 런던과 화평을 맺지 말라고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에 거듭 경고하는 가운데 석 달간의 협상을 거쳐 칼라이 술타니예(다르다넬스 해협) 강화는 영국-오스만 관계를 복원했다. 영국 정부는 오스만 영토 내 모든 병력을 소개하는 데 동의한 한편 술탄은 영국에 치외법권적인 특권들을 복원시켜주었다. 런던은 술탄의 영토를 보전하고 프랑스의 속셈을 저지할 오스만-러시아 강화를 이끌어내도록 러시아를 중재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조항 가운데 하나는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이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외국 전함에 대해 상시 폐쇄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지중해에서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 간 연합 가능성에 관한 영국의 우려를 반영한 조항이었다. 다음 3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오스만 전쟁을 틀어막고, 오스만튀크르·오스트리아와 삼자동맹을 발전시키며, 오스만 제국에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 둘 다를 억제하는 복잡한 전략을 추구했다."(730)


"1812년 5월 28일, 프랑스의 침공 위협이 높아짐에 따라 심한 압박감을 느낀 러시아가 전쟁 종식에 합의하면서, 술탄 마무드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오스만군은 1813년에 세르비아군을 궤멸했고, 그해 말에 이르면 베오그라드를 점령한다. 이로써 1차 세르비아 봉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카라조르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반면 카라조르제의 라이벌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일부 크네제스는 오스만 지배의 복귀를 수용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그렇게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746-8)


17장 카자르 커넥션 : 이란과 유럽 열강, 1804-1814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캅카스에서 러시아-이란 분쟁을 배경으로 하는 핑켄슈타인 조약(1807년 5월 4일 체결)은 동방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떠받치고자 오스만 제국 및 이란과 삼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대한 나폴레옹의 관심을 반영했다. 1월 17일자 샤에게 쓴 다소 아첨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 공통의 적에 맞서 프랑스-오스만-이란 합동 전선의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영구적인 동맹을 결성합시다〉라고 그는 샤에게 촉구했다. 핑켄슈타인 조약은 이 같은 야심의 표명이었다. 그것은 파트 알리 샤를 이용해 공동의 적 러시아에 맞서 양동작전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고, 이란이 인도의 서쪽 이웃이라는 위치를 활용해 아대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약은 이란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동부 조지아와 여타 남부 캅카스의 정치체들을 카자르의 속령으로 인정하는 프랑스-이란 동맹을 수립했다."(764)


"카자르 군대의 최대 문제는 러시아군의 기술적 우위보다는 군사 조직과 유지, 그리고 전쟁 수행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에서 기인했다. 이란군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 병사들은 통제와 협조가 어려웠다. 그들은 자연스레 부족의 이해관계를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했고 서구식 전쟁 방식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므로 틸지트 조약 체결로 러시아와의 적대행위가 재개되었을 때, 새롭게 편성된 사르바즈 부대는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개혁 조치들이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개혁 조치들이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맹비난했다. 이 시책들을 초기 이슬람 관행의 부활─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코란의 특정한 언급들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로 묘사하려던 카자르 군주정의 시도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사르바즈 병사들은 프랑스 장교들이 부과하는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고 부족적 연대감을 없애려는 일체의 시도에 반발했다."(768-9)


"시간이 흐르면서 파트 알리 샤는 비록 본의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리란 점을 깨닫고 다시금 영국이란 대안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사절 존스는 틸지트 조약에 따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1809년 3월에 체결된 두 번째 영국-이란 조약은 카자르 왕조가 이전에 유럽 열강과 체결했던 조약들의 핵심 결함들을 바로잡았다. 영국은 이란 군대를 훈련·무장시키는 것은 물론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는 이란이 프랑스에 했던 모든 양보와 합의 사항을 폐지하고 유럽 열강이 인도에 도달하기 위해 이란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유럽'이란 자구의 삽입은 카자르 측의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란에게 그것은 러시아를 의미한 반면, 런던에게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프랑스를 의미했다. 영국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구상을 억지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776-7)


"1812년 6월에 개시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에서 영국을 애매한 입장에 빠뜨렸다." "러시아에 맞서 영국의 계속되는 지원을 기대한 파트 알리 샤는 영국인들로부터 이란은 적과 강화해야 한다는 말─그것도 아주 명확한 어조의─을 들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하고 프랑스에 맞서 새로운 유럽 동맹이 결성되는 마당에 영국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맹방인 러시아를 이 먼 구석에서까지〉 도울 결심이었고, 영제국의 이해관계에 더 이상 보탬이 되지 않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영국 대사 우즐리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 샤가 1813년 여름에 강화 회담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1813년 10월 24일, 마침내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확인하는 강화조약이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남동부 캅카스 영토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잠식은 무슬림에 대한 부당한 취급과 더불어 러시아-이란 관계를 심각하게 긴장시켰다."(787-8)


18장 영국의 해외 원정, 1805-1810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서인도제도 등지에서 프랑스를 겨냥해 해외원정을 행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방대한 조선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전함들이 건조됨에 따라 다양한 항구들에서 출동 태세를 갖춘 전함들이 유지되었고, 영국 해군은 광대한 지역에 걸쳐 배치되어 적이 봉쇄를 뚫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인력과 선박을 상당히 소모시켰다. 함대는 몇 달씩 바다에 머물면서 식량을 소비하고 대서양이나 지중해의 강풍을 견뎌야 했다. 함대의 능률을 유지하는 일은 영국 해군부가 전쟁 동안 맞닥뜨린 최대의 과제로서, 대규모 선박 수리에 필요한 건선거 시설이 극히 드문 사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어려운 과업이었다.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조선소를 활용할 수 없었고, 몰타에 있는 것은 완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람에 의한 지속적인 마모와 파손에 직면해 영국 전함들은 플리머스나 포츠머스, 채텀의 모항母港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816-7)


"이 모든 활동은 머잖아 미래에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과 거의 대등한, 적어도 전열함 수에서는 거의 대등한 전력을 꿈꿀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력 균형은 화력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쪽으로 우세하게 기울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결정은 영국에게는 시기상으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영국 해군은 전력의 한계 수준까지 확대 전개되어, 발트해와 지중해만이 아니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서까지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반도전쟁에만 노력을 집중하고 해상에서 충분한 우세를 점했다면 유럽 패권 투쟁은 프랑스에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잘 보호되는 항만에서 해군을 건설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가 바다에서 영국 해군에 도전할 날을 준비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침공 준비는 프랑스 조선소에서의 작업들을 늦추고 나중에는 완전히 중단시켰는데, 조선공과 선원들이 프랑스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징발된 탓이었다."(822-3)


19장 영국의 동방 제국, 1800-1815


"영국 식민주의에 결정적인 요인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해상력이었다. 해상력이 없다면 아시아의 지배 영토는 그야말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상력 자체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인도는 중앙 권위를 파괴하다시피 한 세력 투쟁을 겪었다." "무굴 제국이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권위를 공고히 했다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세기 후반에 훨씬 더 만만찮은 적과 대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대륙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고, 중앙의 정치 리더십만이 아니라 단일한 정체성과 공통의 대의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인도 병사들은 국가에 헌신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게 헌신했고, 그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경쟁관계, 시기심이 아대륙의 계속되는 내분을 지탱했다. 그 덕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다양한 인도 세력의 연합 전선에 직면한 적이 없었고 강압적 조치와 위협, 외교를 통해 현지 통치자들의 단결 투쟁을 차단할 수 있었다."(833)


"1808년에 벌어진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남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그리고 그 이후로도) 영국은 중국을 향해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고 영국 경제와 전쟁 수행 노력을 지탱하는 무역으로부터 계속 이익을 얻는 편을 선호했다. 광둥 무역은 계속해서, 특히 동인도회사가 아편 공급에 뛰어들면서 성장했다." "1805년과 1813년 사이에 동인도회사는 무려 900퍼센트에 가까운 이윤을 거둬들였고 영국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이던 면화를 아편이 대체했다. 이 밀수 무역은 막대한 통화 유출을 촉진하고 중국 정부가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재정 출혈에 기여했다. 1830년대 후반에 아편 무역을 둘러싸고 중국의 '강경' 자세에 직면하자 영국은 해군력과 포격 능력을 이용해 중국에 빠르고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860)


# 마카오 사건 : 1808년 9월, 드루리 제독 휘하의 해군 전대가 마카오를 무단 점령하면서 중국과 충돌한 사건. 중국의 강력한 대응에 굴복한 영국군은 12월 20~23일에 걸쳐 마카오에서 철수한다.


"1803년 이래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새로 영토를 획득할 때마다 동방 바다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영토 상실이 뒤따랐다. 1811년 자바 함락에 이어, 1812년이 되자 나폴레옹은 희망봉 동쪽에 더는 작전 근거지가 없었고, 프랑스 함대가 인도양에서 매우 철저하게 일소되어 프랑스 황제는 러시아와 진행 중인 갈등관계를 해소할 때까지 그 지역에서 해군 작전에 대한 생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812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동인도제도 함대는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단단히 다지고 가능한 위협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마땅히 거둔 성공에 만족했다. 인도, 중국, 아시아의 여타 지역들을 상대로 한 영국 무역은 번창했고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가고 중유럽에서 동맹 수립을 위해 자금이 절실한 정부의 금고를 채워주었다." "1803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의 승리들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얻은 잡다한 속령들을 단단히 다져서 궁극적으로 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77)


20장 서방문제? : 아메리카 대륙 쟁탈전, 1808-1815


"1793년 에스파냐는 1차 대불동맹에 가담했지만, 불과 2년 뒤에는 바젤 조약에 의거해 일방적으로 프랑스와의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영국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영국이 에스파냐 해운을 공격하면서 에스파냐의 대서양 무역은 붕괴했고, 남아메리카 식민지들과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외세의 침입을 부추겼다. 1796년 산로렌소 조약은 미국인들에게 미시시피강 항행권을 보장해, 오랫동안 에스파냐가 지배해 온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길을 닦았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지도부는 미국과 국경을 맞대는 에스파냐 영토를 유럽 열강이 일체 손 댈 수 없게 하고 싶었다." "미국인들은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가) 자신들이 아닌 (누구에게도) 넘겨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파냐가 그곳을 계속 소유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한 이웃이며 우리는 머잖아 틀림없이 이 (지역을) 미국에 병합하게 될 (···) 날을 조바심 내지 않고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888-9)


"19세기에 들어섰을 때 영국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프랑스와 미국 둘 다 에스파냐 영토를 탐내는 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1801~1803년 내내 영국 정치가들은 어떤 행동 노선을 취해야 할지를 놓고 머뭇거렸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영토를 이전하도록 에스파냐를 압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890)


"에스파냐-아메리카 세력 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촉발한 사건은 1808년 프랑스의 에스파냐 찬탈이었다." "포르투갈 군주정이 브라질로 탈출하고 에스파냐 부르봉 궁정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은 에스파냐 식민지들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그들은 바욘에서 벌어진 희비극─에스파냐 왕실이 포로가 된 것─과 뒤이은 전국적 봉기에 관해 알게 되었고,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 곳곳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합법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부르봉 군주의 부재는 유례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일부 식민지 지도자들은 부르봉의 대의에 계속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군주의 부재라는 상황을 이용해 더 큰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다. 후자의 주장은 아메리카 대륙이 통치 군주하에 인적人的인 연합으로 에스파냐와 이어져 있으며, 페르난도 7세의 폐위로 식민지들과 본국을 하나로 묶는 그 끈이 끊어졌다는 전제에 근거했다."(894-6)


"한편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각종 시도를 이어갔다. 에스파냐 국왕에게 충성하는 당국자들로부터 계속되는 저항에 직면한 그는 정책을 조정해 이베리아 에스파냐와 아메리카 에스파냐 간의 공식적 단절을 재촉하고자 해다. 그는 1809년 12월 12일 입법원 연설에서 〈(나는) 아메리카 대륙 나라들의 독립에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음 몇 년 동안 식민지 훈타 정부와 에스파냐 훈타 정부(그리고 나중에는 섭정위원회)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나폴레옹은 반란을 부추기고 선언서를 발표하도록 수십 명의 대리인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했다. 그는 남아메리카 군사 원정 계획을 고려하고 반란자들에게 재정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러시아 침공 준비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도들 중 어느 것도 뚜렷한 혜택을 가져오지 않았다. 영국 해군의 보호 속에서 해상을 통한 일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에스파냐 식민 정부는 내부의 난제들에만 집중했다."(900-1)


#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내부 분쟁

1.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현 멕시코) : 1813년 11월 6일 애국파가 독립을 선언했으나 1815년 근왕파에게 패배하면서 1차 멕시코 혁명 종결

2.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 1810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수립 선언 후 8년간 지속된 아르헨티나 독립전쟁 발발

3. 누에바그라나다(현 콜롬비아) : 근왕파가 우세를 점했으나 1816년, 시몬 볼리바르의 공화파 세력이 귀환하면서 10년간 지속된 독립전쟁 발발

4. 페루 부왕령 : 확고한 근왕파 지역으로 남았지만, 1812년 반도전쟁의 베테랑 산마르틴이 애국파에 합류하면서 칠레 재정복 투쟁의 기틀 마련


21장 전환점, 1812


"러시아와 프랑스 두 제국의 관계는 1808~1811년에 갈수록 긴장이 높아졌다. 알렉산드르가 틸지트 조약에 의거해 가담하기로 동의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체제는 러시아 경제에 대단히 불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는 여전히 농업 근간의 제국이었으며 핵심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제조업 공장 수가 점차 늘어나기는 했어도 프랑스나 영국과 비교할 때 러시아의 산업적 기반은 한참 뒤쳐져 있었다. 러시아는 자원을 수출하기 위해 자국 상선보다는 외국 상선에 더 의존했고, 영국이 러시아의 주도적인 무역 상대국이었다." "러시아가 느끼는 답답함은 영국이 흉작으로 고생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풍작을 누린 1810년에 극에 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지배하는 항구들에서 영국으로 곡물 수출을 허용했지만(그러면서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러시아는 대륙 어느 곳보다 최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단 한 톨도 팔 수 없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러시아 지주들은 이런 상황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926-7)


"폴란드는 양국 지도자 간 마찰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대공국 창설은, 알렉산드르 황제가 〈러시아라는 몸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한 대로, 폴란드 국토와 국가 정체성의 온전한 복원에 대한 러시아의 두려움을 일깨웠다.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복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상의 보장을 받아내려는 러시아의 시도에 퇴짜를 놨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에 맞선 전략적 장벽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러시아 이해관계는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놓고도 충돌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확보하려는 알렉산드르의 야심을 가로막으려고 나폴레옹은 작심한 것 같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발칸반도 분할에 관한 구상에서도 뜻이 일치하지 않았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라인연방 재편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핵심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첫 10년대가 끝날 무렵 틸지트에서 합의된 정치적 타협은 수명이 다했고, 새로운 유럽 전쟁이 곧 불붙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했다."(929-30)


"정말이지 그렇게 어마어마한 군사와 방대한 거리, 병참상 난관들이 개입되고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결정적인 결과가 나온 전쟁의 실례도 드물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 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946-7)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은 '동장군'이었다고 오랫동안 얘기되어왔지만 그런 주장들은 근거가 의심스럽다. 기상관측소에서 나온 당대의 관측 자료들은 그해 겨울이 사실 11월 후반까지 온화했음을 드러내는데, 그때쯤이면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에서 졌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 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러시아 내 수송 기간시설의 미비는 가용한 물자를 병사들에게 때맞춰 전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전략적인 퇴각과 초토화 작전을 통한 러시아의 소모전 전략으로, 적군은 시골에서 식량, 특히 마초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이로 인해 짐을 나르는 동물과 군마가 엄청나게 희생되었다."(947-8)


22장 프랑스 제국의 몰락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프랑스 군대 내 자신의 휘하에 있는 프로이센 분견대는 중립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프로이센 장군의 결정은 프랑스 상관들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 대한 분명한 반역 행위였다. 여태까지 프로이센 국왕은 더 애국적 성향의 프로이센 장교들과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것을 줄곧 말려왔다. 비록 국왕은 협약을 공식 부인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공식적 규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행위들이 프로이센 전역에서 되풀이되어 광범위한 봉기를 촉발했고, 결국 프로이센 군주정도 편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967-8)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란츠 1세가 자기들 편에 가담하기를 바랐지만 독일에서 그들의 행보는 빈의 우려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궁정은 러시아에서 프랑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반겼고, 나폴레옹이 유럽에 부과한 제국적인 합의 내용들을 변경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가 확실히 패배한다면 프랑스 헤게모니가 러시아의 지배로 대체될 게 뻔했고, 이는 오스트리아에게 전혀 반가운 전망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외무대신 메테르니히의 안보 목표들은 오스트리아가 1813년 봄 내내 와일드카드(예측 불가능한 수)로 남는 데 초점을 맞췄다." "빈에게 똑같이 걱정스러운 것은 독일 군주들에게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프랑스가 좌우하는 라인연방을 대체해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라고 촉구하는,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3월 후반에 발표한 선언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게 핵심 질문은 이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새로운 독일〉이 될 것인가였다."(970-1)


"영국의 전략은 세 가지 폭넓은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식민지와 해상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때쯤에 영국은 이미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식민지들을 모조리 점령했고, 아직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은 유일한 해외 영토는 영국 맹방들의 식민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륙의 전후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휘두를 수 있는 외교적 무기를 제공했다." "두 번째로, 영국은 이전 협정들에 의거해 떠맡은 책무들을 이행해야 했다. 여기에는 노르웨이에 대한 스웨덴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한다는 약속은 물론 포르투갈, 에스파냐, 나폴리에서 이전 정부들을 복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 이전 국경선으로 축소하고, 부상하는 러시아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대륙에서 항구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런던은 오스트리아와 어느 정도 공통의 기반을 공유했다."(982-3)


"1813년 6월 26일,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과 긴 면담을 가졌다. 그것은 전쟁 전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신이 전달한 예비 제안들과 나중에 7월 12일과 8월 10일 사이에 프라하 강화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바르샤바 공국의 해체(바르샤바 공국은 동맹 열강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라인연방의 재편, 오스트리아에 일리리아 자치주 반환, 1810년 프랑스가 병합한 한자동맹 도시들의 복원, 1806년 이전 상태로 프로이센의 지위 복귀 등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열띤 대화를 이어가다가 제의를 거부했고, 그의 발언은 러시아 참사를 겪은 뒤에도 아무도 자신을 꺾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 결국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군주와 진정한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품고 드레스덴을 떠났다.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동맹 세력─6차 대불동맹 수립─에 가담해 나폴레옹에게 제시한 강화 조건들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속했다."(985-6)


"나폴레옹이 (관대한 조건과는 거리가 먼) 협상을 내켜하지 않은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가 없었다거나 동맹국들이 최소 조건들을 바탕으로 나폴레옹과 강화를 맺는 데 합의했다는 주장은 상황을 잘못 짚은 것 같다. 상대방들처럼 프랑스 황제도 유럽 대륙의 평화에 관해 자신만의 특정한 비전을 추구하고 있었고, 여기서 승리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드레스덴에서 제시된 일단의 요구 사항은 오로지 예비 교섭을 시작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고, 만약 나폴레옹이 요구들을 수용했다면 동맹국들은 최종 협상에서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더 제기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 점을 알았으며, 자신이 군사적으로 비교적 우위에 있는 한 그러한 조건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비타협성은 두 가지 구체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동맹의 가장 강력한 구성원인 러시아와 직접 해결을 보겠다는 것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한 오스트리아를 혼내주겠다는 것이었다."(987)


"1814년의 전역을 치르면서 러시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지원과 영국의 보조금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반대로 메테르니히는 영국-오스트리아 상호 이해가 확고한 한, 러시아의 야심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알았다."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이는 동맹세력 대표들에게 군사적으로 동맹 세력의 입지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지적하고, 상호 불신을 누그러뜨렸으며, 가장 결정적인 공헌으로서 대륙에 영국이 바라는 바와 같은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해외 식민지들을 원상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캐슬레이의 노력은 곧 반목하는 동맹 세력을 다시 규합하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다는 공동의 목적의식을 되찾아주었다. 그들은 캐슬레이의 도움을 받아 체결한 쇼몽 조약에서 4국 동맹으로 알려진 것을 구성했다. 동맹 세력은 나폴레옹이 정전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의 〈유구한 국경선〉 제의를 수용할 때만 그의 제위 보유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1011-4)


"동맹군이 수도 파리의 목전에 이르자, 1814년 3월 31일 마르몽과 모르티에 원수는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의 권력 부상에 그토록 결정적 역할을 한 탈레랑이 이제 그의 몰락에도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전직 외무대신은 사실상의 쿠데타를 도모해, 동맹 세력과 협상을 개시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프랑스 왕위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도록 동맹 새력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1814년 4월 2일 원로원으로 하여금 나폴레옹을 퇴위시키는 특별 선언문을 채택하게 한 것은 탈레랑과 그의 동료 변절자인 전직 치안대신 조제프 푸셰였다." "4월 11일 나폴레옹의 운명은 퐁텐블로 조약의 조건들로 공식적으로 정해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왕위를 공식 포기하고 그 대신 엘바섬의 군주로 인정되며 프랑스로부터 연 200만 프랑을 받기로 했다. 동맹 세력과 그렇게 지독하게,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던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가혹한 처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큰 몰락이었다."(1019-20)


"5월 30일에 서명된 파리 조약은 6차 대불동맹전쟁을 공식 종결시켰다." "그동안 프랑스에 경제적 착취를 당했고 향후에도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쉽다고 느끼는 프로이센과 독일 국가들은 프랑스의 핵심 국경지대를 박탈하고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리는 더 가혹한 조건들을 요구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영국은 과거의 숙적을 이류 국가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대륙에서 이제 간신히 도달한 위태로운 정치적 안정을 더욱 해칠 뿐이라고 판단해 좀 더 유화적이었다."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도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1021-2)


23장 전쟁과 평화, 1814-1815


"나폴레옹의 귀환이 대단히 비범하긴 하지만 그가 엘바섬에 남았다면 나라에는 더 좋았을 것이다. 동맹 세력이 그를 무찌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러가며 10년 넘게 싸웠는데 이제 와서 그의 귀환을 순순히 묵인하리라는 희망을 나폴레옹이 진지하게 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동맹 구성원들은 내부 분열로 고생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입장 차이 중 일부는 깊이 뿌리박힌 것이라 해도, 무엇도 나폴레옹 제국과 상대해온 지난 과거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지 닷새 뒤인 1815년 3월 25일에 이르자 8대 강국은 7차 대불동맹을 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군대를 제공하고, 나폴레옹이 확실하게 패배해 동맹조약의 표현대로 〈더는 말썽을 일으키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서약했다." "나폴레옹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프랑스인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대불동맹을 쪼갤 신속하고 압도적인 승리였다."(1060-2)


"워털루는 전술적 수준(여기서 나폴레옹은 사실상 자신의 권한을 부관들, 특히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전술을 들고 나오지 못하는 미셸네 원수에게 위임했다)과 작전적 수준(여기서의 실패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리니 전투 이후 그루시의 행위로 초래되었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약화되었다) 모두에서 프랑스군의 총체적인 패배였다. 이런 측면에서 워털루 전투는 유럽에서 프랑스 패권의 종식으로서 마땅히 기려질 만하다. 하지만 워털루는 새로운 한 세기를 연 전투가 아니었다. 유럽의 운명은 라이프치히의 굽이치는 언덕들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빈의 무도회와 여러 경축 행사 와중에 굳어졌다. 역사 결정론처럼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서 주장하자면 나폴레옹은 첫 포탄이 발사되기도 전에 전략적 수준에서 이미 전쟁에 졌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라도 동맹 세력이 그를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1069-70)


#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일~18일) : '민족들의 전투'라고도 불리며 병사 수와 화력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한 동맹군이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사실상 6차 대불동맹전쟁의 승리를 확정지은 전투


24장 대전쟁의 여파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비록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수시로 충돌했지만 그들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구축해 자신들의 주권을 잠재적 침략자(들)로부터 안전히 지키기에 충분한 상호 이해관계가 되었고, 유럽 협조 체제의 주요 목적은 평화와 안정이었다." "빈 회의 이후로 거의 한 세기 동안 유지된 이 평형 상태는 나폴레옹 이후 40년 간의 평화를 가져온 한편, 19세기 후반기의 무력분쟁들은 결코 더 커다란 전화戰禍로 탈바꿈하지 않았다.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들이 빠짐없이 개입한 장기 무력 분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18세기와 달리 탈나폴레옹 유럽의 무력 분쟁은 대체로 두 나라나 세 나라가 개입한 사건이었고, 2년 이상 지속된 적이 드물었다."(1077-9)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에 자유주의가 중간계급과 동일시되면서 많은 지식인들과 더 큰 사회집단들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만큼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군주제를 공화정으로 교체하길 열망한 새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은 더 큰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추구했고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수 정권들에 맞선 투쟁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때로는 힘을 합쳤지만 딱 어느 정도까지였다."(1079)


"(혁명적 행위들에 질겁한)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 간 영구적인 동반자 관계, 다시 말해 러시아 보수주의적 작가 니콜라이 카람진의 표현을 빌리면,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해왔고 사멸하지 않으려면 과거로부터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살아 있는 사회적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만물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신의 피조물이며, 어느 한 세대도 사회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그보다는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것이 한 세대의 도리다." "그러므로 나폴레옹 이후 평화 정착의 세 번째 기둥은 '개입'이었다. 강대국들은 혁명 정신의 전염에 맞서 서로서로 그리고 유럽 일반을 보호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 나라가 동란으로 위협을 받을 때마다 열강은 기존의 조약에 의거하고 현행 영토상의 합의를 존중해, 그 나라에 개입해 합법적(이라고 쓰고 보수적이라고 읽는다) 질서를 옹호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협력했을 때 열강은 자유주의 혁명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당대의 보수적 질서를 유지했다."(1080-1)


"마지막으로 앞의 세 가지 원칙은 네 번째 원칙, 상호 보상의 원칙으로 조절되었다. 유럽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면서 승전국들은 만일 한 나라가 영토를 내놓거나 특정 이익을 놓고 타협한다면 일정한 형태나 형식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그러한 보상들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불러일으킨 민족자결의 정신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다." "유럽 대제국들의 문화와 정체성은 꽤 다양했다. 물론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군주에 대한 유대와 하나의 전체로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체코인이나 폴란드인이나 헝가리인이나 불가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른 누구든 간에─은 점점 더 자신들의 문화적 고유성과 그 고유성을 보존하는 일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 민족적 개별성에 대한 의식은 민족자결로 가는 첫 단계였고, 민족자결은 제국들의 통합성을 위협하고 빈 회의에서 재편된 유럽 정치 질서를 위험에 빠뜨렸다."(1082-3)


"1815년의 합의는 1814년의 강화 조건보다 상당히 가혹했다. 프랑스는 국경지대의 영토와 요새들을 추가적으로 할양해야 했고, 국경선도 1792년이 아니라 1790년의 국경선으로 축소되었다. 프랑스가 1814년에는 보유했었던 사보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 라인란트의 일부를 내놓아야 했다는 소리다. 더욱이 확정 조약은 7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최대 5년까지 동맹국 군대의 점령 비용을 부담할 의무를 프랑스에 부과했다." "경제사가 유진 N. 화이트의 표현으로는 〈배상은 이제 새로운 유럽 질서를 위협한 잘못에 대한 벌금을 산정하고 장래의 (적대적인) 시도들을 억지하는 역할을 하며, 더 가혹한 강화 패키지의 일부가 되었다. 배상금 지불은 또한 인센티브이기도 했는데, 지불을 이행하면 프랑스는 유럽의 사안을 처리할 때 다시 강대국의 역할을 맡는 것이 허용될 예정이었다.〉 또 다른 혁신은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군사 점령 체제의 운용이었다."(1084-6)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산품과 설비 물자에 대한 수요가 곤두박질치면서, 오히려 전후 불황이 찾아왔고, 전 지구적인 기후 재앙(1815년 탐보라 화산 폭발)은 한 세기 이상 만에 최악의 흉작을 야기해 식량 가격의 급등을 초래했다. 무역 개방을 되살리려는 시도보다는 협소한 경제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고, 유럽의 농업과 산업은 유럽 국가들이 세운 새로운 관세 장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농업과 제조업 경기의 후퇴는 수만 명의 귀환병들에게 제공할 일자리가 별로 없음을 의미하는 한편, 빈곤층의 생활 조건은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여전히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개인적 자유와 성문成文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시위를 부채질하고 민주적 대의제와 공평한 부의 분배를 옹호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출현에 기여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소요는 그러므로 근대 유럽의 탄생에 일조한, 변화의 힘들과 전통 사이에 벌어지는 더 큰 투쟁의 발로였다."(1107-8)


"나폴레옹 전쟁이 몰고 온 정치적 격동은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할 때 유럽 정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한 가지 중요한 유산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전쟁이 낡은 행정적 결함과 부조리를 일소해버려서 유럽 정부들은 이제 관료제와 법 집행 과정, 과세를 더 단단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억압적 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었다." "보수 지배 체제는 1820년, 민중 반란이 에스파냐와 나폴리 군주정을 위협했을 때 탄력을 얻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와 피에몬테에 개입하는 것을 지지한 한편, 프랑스는 반동적인 부르봉 왕가가 에스파냐에서 권력을 탈환하는 것을 도왔다. 1825년 러시아에서는 일단의 군 장교들이 알렉산드르 황제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제한적이나마 입헌 정체로의 변화를 꾀했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고작 하루를 간 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108-9)


"탈나폴레옹 시대의 혁명들 가운데 남아메리카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만이 결국 성공했다." "남아메리카의 1차 독립전쟁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모든 독립운동은 사실상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왕가의 권위가 휘청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몰락은, 에스파냐 근왕파가 소망한 것과 달리 반란의 즉각적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마침내 1823년 멕시코는 공화국이 되었고 자결권을 끌어안아 중앙아메리카 연합주 구성을 위한 길을 닦았다."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애국파는 1821년 근왕파를 무찌르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합친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근왕파는 칠레에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산마르틴이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대의 도움을 받은 칠레 크리오요들은 1817년에 근왕파를 무찌르고 독립을 선언했다." "페루 독립은 1820년 12월에 선언되었지만 공화파가 권력을 확실히 다지기까지는 6년이 더 걸렸다."(1110-15)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1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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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김응종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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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혁명과 반혁명


1 인권선언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드라마이다. 1791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3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5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 세 인권선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은 자유, 평등, 소유권이다. 1789년 인권선언에서 '자유'는 '소유',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자연권이라고 선언되었다. 평등은 권리의 평등으로 제한되었지만 소유권이 보장되고 권리가 평등한 상태에서 평등은 자유와 충돌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권리〉라고 재차 강조되었다. 1789년 인권선언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언하여 구체제의 특권적인 신분사회에서는 벗어났으나 '자유'와 '소유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사회적 조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인권선언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사회적 조치에 대한 많은 요구가 거부된 것은 1789년 인권선언이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61)


"1793년 새로운 헌법은 파리 민중의 요구를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공동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으며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적 지위를 차지했고 '소유'는 네 자연권 가운데 말석으로 밀려났다. 공적인 자유가 개인적인 자유보다 우선시되었고,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열월 정변' 이후 제정된) 1795년 헌법은 민중의 정치 참여와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다는 목적 아래 제정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이 되어 권리의 남용을 막고자 했으며, 자연권 개념이 삭제되어 〈자유, 평등, 안전, 소유〉는 사회적 권리로 강등되었다. '소유권'을 존중하는 것은 '의무'라고 규정함으로써 소유권을 강화했다. 1795년 헌법은 1791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1795년에 혁명이 다시 부르주아 단계로 복귀하면서 혁명은 동력을 상실했다. 좌절한 혁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의 독재였다."(62)


# 열월 정변 : 테르미도르 반동(reaction)을 가리킴


2 방데 전쟁의 폭력성


"방데 전쟁은 1793년 3월에 시작되어 1793년 12월 23일 사브내 전투로 끝났다. 역사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혁명정부의 가혹한 전후처리였다." "19세기 이래 프랑스혁명사를 지배해온 공화주의 역사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을 반혁명 전쟁으로 규정하고 방데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들은 방데 전쟁이 벌어진 시기의 공포정치는 외전과 내전의 시기에 국가와 혁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받아들인 반면, 방데 전쟁의 폭력적인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외면해왔다. 이들의 역사 서술에서 방데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이들과 달리 수정주의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는 공안을 이유로 폭력을 용서하는 것에 반대했다. 〈방데의 파괴와 동시에 진행된 방데인들의 대량살육은 공안이라는 이유로 사면될 수 없는 공포정치의 최대 집단학살이었다.〉 다만 퓌레는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고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86-7)


"제노사이드 논쟁을 가열시킨 사람은 레날 세셰였다. 그는 방데 전쟁 이후 벌어진 전후처리는 공안위원회가 주도한 제노사이드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클레망 마르탱은 공안위원회가 주도하지도 않았으며, 세셰의 주장은 역사적 비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고 반박했다." "제노사이드를 〈집단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학살〉이라고 정의할 경우,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이렇게 확대하면 사실상 모든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속하게 되어 제노사이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종족의 전면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학살'로 한정되어야 한다." "방데 학살이 제노사이드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프랑스혁명이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체제에서 자행되던 야만적인 폭력은 '자유-평등-형제애'를 외친 혁명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87-8)


3 리옹 반란


"파리에 대한 지방의 저항은 1792년 8월 10일 이후, 특히 9월 학살 이후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무시하고 '주권'의 담지자임을 주장하고, 산악파 의원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시작되었다. 보르도를 위시한 지방 대도시는 파리가 주권을 독점하는 데 반대했고,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인 국민공회가 주권의 담지자라고 주장했다. 연방주의 반란은 근본적으로는 주권의 소재를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서부의 방데 전쟁이 지역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장기간 항전한 반면, 연방주의 반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단명했다. 캉은 도주한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고 보르도는 지역 출신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지롱드파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세유, 리옹, 툴롱의 반란은 과격한 산악파에 대한 중산계급의 반란이라는 성격의 강했다. 계급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특정 계급이 처벌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란에 참여한 계급이 가장 가혹한 처벌 대상이었다."(115-6)


"연방주의 반란은 파리 정부를 크게 위협했다. 방데 전쟁과 대외전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파리 민중의 사회적 요구도 과격했으며, 파리의 혁명군은 리옹의 전후처리에 동원되어 잔혹함을 과시했다. 콜로 데르부아와 푸셰는 리옹을 없애라는 혁명적 수사를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폴 핸슨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 연방주의 반란이 공포정치를 의사일정에 오르게 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라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공회가 방데 전쟁을 진압한 후 2만~4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행위나, 리옹에서 2천 명의 시민을 학살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것은, 팔머에 의하면, 〈무책임하고 통제불가능한 극단주의자들이 자행한 전제정치〉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국가의 처벌 수위를 넘어선 광적인 사회적 복수였다."(117-8)


4 슈앙 반혁명 운동의 여러 모습


"빅토르 위고의 《93년》은 엄밀히 말하면 서부의 반혁명 전쟁 가운데 슈앙 반혁명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는 두 반혁명 전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성격의 저항으로 보고 있다. 슈앙 반혁명 전쟁을 제2의 방데 전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자 위고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그에게 서부의 반혁명 전쟁은 〈진리와 정의와 권리와 이성과 해방에 맞선, 당당하되 긴 무지의 저항〉, 중앙에 대한 지역의, 문명에 대한 야만의 저항이라는 오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저항,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지만, 〈진보에 공헌한〉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고는,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고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고뇌한다. 〈도대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파괴하고 인간성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혁명을 감행했단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1789년 혁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지고의 실체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것들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146-7)


5 가톨릭교회의 수난


"1789년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자 오랜 기간 왕정과 공생해오던 가톨릭교회 역시 붕괴를 면하기 어려웠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과는 반대로, 프랑스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박해했다. 혁명은 선서 거부파는 물론이고 선서파도 박해했으며, 나아가 프로테스탄트교회, 유대교회 등 일체의 종교를 박해했다. 기존의 종교는 미신에 불과했고, 프랑스혁명이 계시이자 섭리이자 진정한 종교였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와 양립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혁명은 종교를 종교 본연의 일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속화'라는 유산을 남겨주었다. 세속화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정치는 종교에 개입하지 않고 종교 역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속화는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정치라는 오염에서 벗어나 순수해진 것으로, 공포정치 시대에 극성을 부리던 파괴적인 탈그리스도교와 구분된다."(170-2)


6 '열월 정변'과 공포정치의 청산


"역사학에서 reaction이 반동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후다. 레닌이 죽은 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혁명을 '타락'시킨 새로운 열월파라고 비난했다. 프랑스혁명사의 자코뱅 해석에 의하면, 자코뱅과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순수하고 강고한 혁명을 전개하던 혁명력 2년의 영웅적인 시기는 열월 9일에 파괴되었고 그 후 '반동'이 진행되었다. 반면, 수정 해석을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열월의 반동〉 대신 〈열월 9일〉 혹은 〈열월파 국민공회〉 같은 용어를 선호하며, 열월 9일의 사건을 〈과거로의 회귀〉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프랑수아 퓌레는 열월 9일을 혁명 자체의 끝이 아니라 민중적 형태의 혁명에 의해 감추어졌던 또 다른 형태의 혁명을 드러내준 사건으로 본다. 그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전쟁과 공포정치 때문에 궤도에서 이탈한 혁명을 본궤도로 복귀시킨 사건이었다. 박즈코가 열월의 사건을 혁명의 종식이 아니라 〈공포정치의 종식〉으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175-6)


"혁명력 2년 열월 9일,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파를 제거했다. 공포정치의 청산과 함께,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공포정치가들도 청산되었으며 민중운동도 쇠퇴했다. 전쟁, 내전, 공포정치에 지친 민중운동은 열월 9일 이전에 이미 동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통제경제를 폐지하고, 상퀼로트를 축출하는 등 민중운동을 억압했으나 민중의 저항은 약했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혁명력 3년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정치의 재림과 상퀼로트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온갖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혁명은 민중혁명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했다. 열월파 국민공회 시기는 억울한 혐의자들을 석방하고, 지롱드파 의원을 복권시키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야만적인 박해를 중단하고, 방데인을 사면함으로써 내전을 완화시키고, 과격한 자코뱅 혁명가와 상퀼로트를 제거하는 등 사회를 안정시키고 혁명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공포정치를 청산한 시기였다."(207)


2부 혁명가


7 라파예트─세 혁명의 영웅


"라파예트는 '혁명'과 '질서'의 조화를 잡으려고 노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인들부터 현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양분된다. 라파예트에 대한 가장 유명한 평가는 그를 〈두 세계의 영웅〉이요 프랑스의 워싱턴으로 보는 것이다. 이 평가는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792년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 혁명 프랑스를 탈출한 라파예트는 당시의 혁명가들로부터 혁명과 조국을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라파예트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그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공화주의 역사가인 미슐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가는 미라보와 나폴레옹의 평가를 수용하여 라파예트를 현실 정치와 사회적 갈등에 무지한 미성숙하고 무식하고 공상적이고 허영심 가득한 모험가로 보았다. 라파예트 전문가인 고트촉은 젊은 귀족 라파예트가 미국 혁명에 뛰어든 것은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가 도피한 것으로 보았다."(239-40)


"역사가들과 달리 대중은 라파예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2007년 라파예트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두 세계의 영웅'을 팡테옹에 안치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 해도, 혁명전쟁이 한창일 때 조국을 버린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라파예트의 팡테옹 이장 시도는 무산되었다. '두 세계의 영웅'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가 자연권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자유였다. 그에게 '자유'는 종교와 마찬가지였다. 1790년 라파예트는 〈봉기는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한 권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구체제의 폭정이건 자코뱅의 폭정이건 외국의 폭정이건 어디에서건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에 맞서 저항이라는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다. 1793년 6월,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라파예트는 에냉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유를 〈나의 신성한 광기〉라고 소개했다."(241-2)


8 시에예스 신부─혁명의 시작과 끝


"시에예스에 따르면,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일 계급인가? 제3신분은 크게 부르주아와 비부르주아─도시 수공업자와 농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부르주아는 자본가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자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어원대로 도시bourg 거주민이라는 뜻이다. 중세 이래 구체제에서 부르주아는 시민권과 정치적인 권리를 가진 도시 거주민으로 '법적으로' 인정된 계급이었다. 부르주아의 18세기 의미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귀족, 교양인, 부유한 토지 소유 계급이었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 그 부르주아의 의미는 자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의미이다. 시에예스는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으로 태어났고 본인도 이런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시에예스가 혁명적 역할을 기대한 계급은 제3신분 모두가 아니라 제3신분 가운데 부르주아 계급이었다."(252-3)


"시에예스를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민중을 경멸하고 상황과 권력에 따라 변절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르주 르페브르는 시에예스를 주교가 되지 못해 귀족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치가라고 평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한 '두더지'라는 평도 유명하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부르주아 혁명의 관점에서 시에예스를 바라보면 다른 면이 보인다. 시에예스는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지향한 직접민주주의에 반대했고, 그것의 토대가 된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덕에도 반대했다. 시에예스에게는 정치적 덕이 아니라 물질적 복지가 근대 유럽 국가의 목표였다. 시에예스는 혁명이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 전달한 대의제 관념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한 인물이었다. 시에예스는 루소와 달리 대의제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은 뱅자맹 콩스탕 같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269-70)


9 콩도르세─계몽사상가에서 혁명가로


"콩도르세는 계몽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이성주의자였다. 볼테르보다 과격한 반교권주의자였고 과격한 무신론자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장애물은 〈편견, 불관용, 미신〉이었다." "콩도르세는 보호무역주의자 네케르에 반대하여 튀르고의 중농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자유무역이야말로 인류의 진보에 필수라고 생각했다." "혁명 발발 후 콩도르세는 프랑스 전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량형 단위를 통일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791년 3월 26일 의회는 '미터'를 국가 도량형의 표준 단위로 결정했다. 콩도르세는 달랑베르의 뒤를 이어 《백과전서》의 편집에 적극 참여하여 수학 관련 논문 24편을 기고했다. 콩도르세를 통해서 수학과 통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응용되는 근대적인 학문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미국의 인권선언과 헌법이념을 지지했으며, 여성·프로테스탄트·유대인·흑인노예 같은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팸플릿들을 발표했다."(275-6)


"콩도르세의 계몽사상과 혁명사상은 그의 유작인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 종합되어 있다. 혁명이 폭력과 아나키의 위협을 받고 자신의 앞날에는 기요틴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계몽사상가로서 인류의 진보는 계속될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간직했다." "'진보'가 콩도르세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다. 보댕, 파스탈, 데카르트 같은 프랑스 근대 철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했으며, 18세기의 사상가 가운데 카스텔뢰,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볼네도 진보를 지지했다. 특히 콩도르세의 정치적 멘토인 튀고르는 1750년 소르본대학에서 《인간정신의 연속적인 진보에 대한 철학적 개요》를 발표한 바 있다. 콩도르세는 섭리의 개념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완전히 세속적인 차원에서 '진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보론에서 진보했다." "콩도르세 사후인 1795년에 출판된 《개요》는 계몽철학의 유언이었고 포스트 테르미도르의 참고서가 되었다."(297-301)


10 당통─구국의 영웅인가 부패한 기회주의자인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다. 그들은 서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혁명을 이끌어왔다. 그들은 〈혁명의 두 기둥〉, 〈자유의 두 기둥〉으로 불렸다. 19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은 당통을 복권시켰다. 미슐레는 1792년 여름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당통을 혁명의 화신이라고 평가했고, 당통의 죽음과 함께 공화국이 죽었다고 보았다. 에드가 키네는 당통의 〈대담함〉 연설에서 민중의 함성을 들었다. 그 무렵, 실증주의자인 콩트는 당통을 실증주의의 예언자로 묘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에는 볼테르의 부정적 합리주의, 루소의 종교성, 디드로의 원原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혁명기에 각각 〈지롱드파의 회의주의, 로베스피에르의 신정정치, 당통의 갱생적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갱생적 해방이란 그리스도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제3공화국의 공화주의자들은 혁명의 공화주의적 화신이면서도 공포정치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을 찾았는데 당통이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333)


"로베스피에르는 '청렴지사'였다는 점에서 당통의 부패는 더욱 비교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당통은 부패했을까? 거의 모든 역사가는 당통이 돈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프랑수아 퓌레는 마티에가 입증한 자료들이 당통의 부패를 확인해준다고 인정했지만, 역사는 〈도덕의 학교가 아니다〉라며 당통이 혁명의 대의를 위해 기여한 바를 간과하지 않았다." "국가가 혁명과 전쟁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혁명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도덕'이나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통은 혁명을 이상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거나 '덕의 공화국'을 건설한다거나 하는 천년왕국적인 관념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혁명은 인간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 발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적을 박멸하기보다 화합하려 했고,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려 했으며,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334-6)


11 로베스피에르─혁명의 수사학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루소와 동일시했다. 그가 쓴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장 자크 루소의 영혼에게 바치는 헌사〉는 정치적 유언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 '덕'은 〈신과 같은 분〉으로 추앙하는 루소가 제시한 것이다. 〈헌사〉에서 유독 《고백》만 강조한 것은 '박해받는' 루소의 이미지를 자기의 이미지에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가 동시대의 계몽사상가들로부터 박해받았듯이 자신도 동시대의 혁명가들로부터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박해의식은 혁명이 심화될수록 그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혁명기의 일반적인 정신병리가 그렇듯이 로베스피에르는 의심, 불안에 시달렸으며 그럴수록 집요하게 음모를 고발했다. 그에게 비우호적인 매체들은 그를 〈정신병자〉, 〈광인〉이라고 부르는 등 그의 심리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다."(341)


"로베스피에르가 요구하는 (정치적) '덕'은 국가의 법을 따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 덕으로부터 공포가 나온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은 반혁명적이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평화시라면 이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고 처벌받을 것이지만 혁명시에는 이러한 절차를 따를 수 없다. 〈신속하고 준엄하며 단호한 정의〉가 필요하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는 폭정에 대한 자유의 전제專制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자유의 전제〉라는 모호하고 모순적인 말은 자칫 로베스피에를 아나키스트 같은 자유주의자로 오해하게 할 수 있으나, 그가 말한 자유는 혁명기의 자유였고, 개인적인 자유나 시민적인 자유가 아니라 공적인 자유, 국가의 자유였다. 따라서 자유의 전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반反자유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에게 공포정치, 자유의 전제, 덕의 공화국은 동일한 수사였다."(363)


12 마라와 코르데─혁명의 두 순교자


"마라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의 재산, 자유, 생명을 침해할 권리가 있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압하고 노예화하고 학살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마라는 의회의 혁명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라는 《민중의 친구》를 간행하면서 철저하게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다." '1793년 4월 5일 자코뱅 클럽 의장으로 선출된 후 마라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지롱드파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반혁명이 국민공회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봉기합시다. 예, 봉기합시다! 혁명의 모든 적과 혐의자들을 체포합시다. 우리가 절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음모자를 가차 없이 절멸시킵시다. 뒤무리에가 왕정을 회복하기 위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축출된 이후에도) 마라는 욕조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국민공회에 보복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의원들은 마라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라의 생물학적 생명은 물론 정치적 생명도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381-4)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구국의 영웅이자 통합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코르데는 귀족이면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는 인물로 기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그리스도교 이름 Marie Anne Charlotte Corday은 쉽게 그녀를 공화국의 수호여신 '마리안'으로 변모시켰다. 코르데는 원했던 대로 마라를 죽였고 희망했던 대로 천사로, 잔다르크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마라의 죽음과 함께 자유가 찾아왔는가? 마라는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다. 마라의 경쟁자들은 내심 마라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코르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코르데는 마라를 영웅으로, 자유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그의 숭배에 불을 붙인 것이다." "마라를 '민중의 친구'로, 코르데를 반혁명적인 왕당파로만 보는 것은 복잡한 역사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411-2)


3부 혁명사


13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예언


"국민의회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며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 불가능하고 신성한 권리들〉을 선언했지만, 버크는 이러한 추상적인 계몽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크에게 자연법과 자연권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진리이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허위다. 국민의회 의원들이나 파리 민중같이 무지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지혜가 없고 미덕이 없는 자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해악 중 최대의 것이다. 그것은 감독이나 규제가 없는 상태의 어리석음, 죄악, 광기이기 때문이다.〉" "버크는 10월 6일 사건에서 공화주의를 예감하며, 광신적인 혁명가들과 무지한 민중이 지배하는 '민주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지배하는 전제정보다 훨씬 잔혹할 것임을 예견한다. 버크는 또한 프랑스혁명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자의적인 전제정으로 전락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민중적 장군의 지배로 끝맺을 것임을 예언한다."(425-7)


# 10월 6일 사건 : 파리 민중이 왕과 왕비를 튈르리 궁에 감금한 사건


"페인은 시종일관 공화주의라는 시각으로 프랑스혁명을 바라본다. 페인이 생각하기에 정부 형태는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대의정의 네 종류가 있다. 공화정은 군주정을 제외한 다른 세 형태의 정부와 결합할 수 있는데 대의정과 가장 잘 어울린다." "페인은 미국 독립혁명을 이어받은 프랑스혁명이 유럽혁명 나아가 세계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불법적인 전제군주에서 해방되어 공화국을 수립하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했으며 '유럽의회'의 구성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전쟁과 공포정치로 탈선했다. 혁명이 전쟁과 민중 개입을 유발해 공포정치로 탈선할 것이라는 혁명의 메커니즘을 내다보지 못한 페인에게 그것은 탈선이었다. 페인은 프랑스에서도 미국 독립혁명과 같은 공화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번영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통적인 왕국 프랑스와 신생국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페인의 이상주의는 고상했으나 비현실적이었다."(442-3)


1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미슐레가 시도한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주인공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민중이다. 민중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옳다는 그의 민중관은 다분히 낭만적인 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학살의 민중은 7월 14일의 민중이나 8월 10일의 민중과는 다른 민중이었다는 미슐레의 변론은 역사적이지 못하다. 민중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나 브리소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민중을 덜 계몽된 존재로 파악했고,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인식했다." "미슐레는 혁명이 본궤도를 달리던 시기를 민중 혹은 민중과 엘리트가 함께 혁명을 주도하던 시기로 보는데, 바로 1789년 7월 14일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이다. 민중이 혁명 전선에서 물러나고 엘리트 혁명가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혁명은 궤도에서 이탈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포정치 시기가 바로 그 시기이다. 미슐레는 이 두 시기를 대조적으로 바라본다."(464-5)


"미슐레는 〈의심〉, 〈질투〉, 〈고발〉, 〈무고〉, 〈비방〉, 〈독선〉, 〈위선〉 등과 같은 용어로 로베스피에르의 행동을 분석하며, 로베스피에르를 〈대고발자〉, 〈이단 재판관〉이라고 규정한다. 미슐레는 로베스피에르가 〈청렴지사〉라는 세간의 평가를 거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도덕주의를 무기 삼아 〈내적인 숙정〉을 외치는 사람보다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과 타협하고 필요하면 매수하는 당통을 위대한 정치가로 보았다." "미슐레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당시 국민은 국왕 처형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산악파는 다수파인 지롱드파에 대한 정치공세 차원에서 국왕 처형을 주장했고, 그 결과 왕을 순교자로 만들어 왕국을 신성하게 만들고 교회를 부활시킴으로써 공화정에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루이 16세는 유죄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고, 처형은 국가 이익을 해쳤다는 것이 공화주의 혁명사가가 〈당시의 모든 역사가에 맞서서〉 국왕 처형을 비판한 이유이다."(463-4)


15 한나 아렌트와 프랑스혁명


"아렌트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미국혁명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으나, 빈자들이 혁명에 개입하면서 '정의'가 '법'을 위협했고 역사적으로 누적된 고질적인 사회문제가 사회혁명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자유의 전제', '덕의 공포', '공포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은 공화국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진정한 혁명의 지위를 누려온 반면, 미국혁명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에 그쳤을 뿐 혁명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렌트는 불평등, 빈민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한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진정한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미국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삼음으로써 그 역시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485-6)


16 알베르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소불이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한 역사가라는 사실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바로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이다." "소불이 외면한 것,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이고, '자유, 평등, 형제애'에 가려진 폭력이며, 롤랑 부인이 절규한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이다. 소불이 1791년 헌법을 부르주아 헌법이라고 폄하하고 1793년 산악파 헌법을 〈정치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확정지은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1793년 헌법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졸속 제정되었고, 콩도르세 헌법안보다 민주주의가 후퇴한 헌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 헌법은 헌법으로 시행하기에 적절하지 못했고 산악파 혁명가들에게는 의회 선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시행이 유보되었다가 폐기되었다."(505-6)


"소불은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어떤 상황에서도 통찰력 있고 단호하게 민중의 권리를 옹호했다〉라고 평가했다." "소불은 로베스피에르가 부르주아로서 노출한 모순과 한계를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 유심론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임을 노출하는 또 다른 편견이다." "소불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에 의거하여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규정하며, 부르주아 혁명에서 민중혁명으로 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는 '자유의 전제'에서 희망을 본다. 그는 민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혁명사를 해석하며 평가한다. 민중사가에 의하면 전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왕의 전제는 나쁘지만 민중의 전제는 그렇지 않다. 왕의 폭력은 나쁘지만 민중의 폭력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클로드 마조리크의 말대로 소불의 《프랑스혁명사》가 '고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고전이다."(506-7)


17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 부르주아 혁명의 발발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구체제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모순이 축적된 위기의 시기여야 한다. 대부분의 프랑스혁명사 개설서가, 특히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가 한결같이 '구체제의 위기'로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세가 끝나고 300~400년이 지났음에도 혁명 전 프랑스 농촌은 여전히 가혹한 봉건적 부과조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기에다가 혁명 전에 나타난 '귀족의 반동'은 구체제의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니, 봉건제를 타파하는 부르주아 혁명은 필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퓌레는 '상황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혁명 초부터 〈혁명은 전쟁이었고 평화는 반혁명이었다〉며 전쟁에 혁명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 역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혁명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퓌레의) 관점은 혁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반혁명파의 혁명관이기도 하다."(518-21)


"퓌레는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자코뱅주의에서 찾는다. 퓌레가 보기에, 러시아혁명은 자코뱅의 이데올로기를 이어받았다. 퓌레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혁명의식을 떠받치는 두 개의 신념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는 모든 개인적·도덕적·지적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정치적인 해결 대상으로 보는 신념체계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행동과 지식과 도덕 사이에는 완전한 합치가 존재한다는 신념체계이다. 정치가 진실과 허위의, 그리고 선과 악의 영역이 될 때, 그리고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것이 정치라고 할 때 역사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동력을 지니게 된다. 마르크스가 적절히 말했듯이,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환상'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은 사회경제적 적대감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적 환상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사가로서 퓌레는 환상에 의해 과거를 바라보지 말 것과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525-7)


18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장클레망 마르탱이 자신의 저서 《폭력과 혁명》에서 자코뱅 프랑스혁명사 해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전략은 폭력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폭력은 프랑스혁명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동시대의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서 일어난 혁명에서도 자행되었다. 여기에서 장클레망 마르탱은 프랑스혁명은 다른 혁명들보다 더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한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이 극심했던 것은 그것이 구체제의 폭력과 연속이면서 동시에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폭력이었다〉는 수정 해석의 공세에 맞서 자코뱅 혁명사가들이 취한 전략은 '비교'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혁명의 폭력성을 당연시하는 것이었다. 혁명만 폭력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도 폭력을 자행했으며, 프랑스혁명만이 아니라 다른 혁명에서도, 구체제에서도 폭력이 자행되었는데 왜 프랑스혁명만 비난하느냐는 것이다."(534-8)


"그러나 '공포정치' 특히 1794년 봄 이후 자행된 '대공포정치'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에서 혁명이 책임질 사안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가장 중대한 과제와 맞닥뜨린) 장클레망 마르탱의 전략은 '공포terreur'는 인정하되 '공포정치Terreur'는 부정하는 것이었다. 방데 전쟁에서 학살은 있었어도 제노사이드는 없었듯이,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집중을 두려워한 과격 공포정치가들이 목월의 법을 악용하여 죽음을 양산함으로써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 공포정치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열월 정변'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공포정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모든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 전가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가 실제로 의사일정에 오른 것은 1793년 9월 5일이 아니라 '열월 정변' 이후이며, 명실상부한 공포정치가 자행된 것도 이때라는 것이다."(543-8)


4부 맺음말


"프랑스혁명은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정치혁명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오랜 절대군주정 체제를 지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만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반발은 혁명 못지않게 커서 내전으로 충돌하기 십상이었다.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은 이상주의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대외전쟁을 도발할 필요을 느꼈고,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과 체제 변화는 주변의 왕정 국가들에게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은 대외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쟁은 비상 체제를 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포정치였다. 공포정치를 낳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전쟁이지만 근원적으로는 혁명이었다. 혁명은 구체제를 타도하고 신체제를 건설하여 역사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지만 공포정치와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실험이다."(576)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이탈한 것은 프랑스가 충분히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혁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계몽사상가들은 프랑스 민중이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이 점에서는 루소도 마찬가지였다. 혁명 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라파예트나 브리소 같은 혁명가들도 당시의 프랑스에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정의 수립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은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5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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