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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피고인 김재규 - 10·26 비공개 재판 통합 증언록
김재홍 지음 / 폴리티쿠스 / 2024년 12월
평점 :
서문 10· 26 거사,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10·26의 주역인 김재규의 군사재판 진술을 총정리해서 정제해낸 박정희 살해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유신독재에 대한 미국의 비판과 그것에 반발해 반미 노선을 감행하려는 박정희를 보며 김재규는 국가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미국은 유신체제를 고쳐 민주헌정으로 복원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압박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대외정책에서 강력한 인권 보호를 내걸었다. 김재규는 카터 미국 행정부의 요구를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미국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 김재규는 그것을 6·25 전쟁이 재발하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두 개의 국가안보 책임 자리에 임명된 유일한 실력자로 국가안보 지상주의자였다. 그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미국의 견제, 이어지는 박정희의 반미 행보로 인해 국가안보가 위기를 맞았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6-7)
둘째, 1979년 10월 중순 폭발한 부산·마산시민항쟁이 단순한 재야 민주화 운동권이나 대학생 단체의 행동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독재 반대의 민심이 발화점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부마항쟁의 현장에 파견된 특전사 예하 공수부대는 그로부터 7개월 뒤 광주항쟁에 투입되는 동일한 진압군인 1·3·5 공수여단이었으며 여단장도 동일 인물이었다. 부마에서 진압군은 전차를 세워놓고 무력 과시 위주로 시위대를 압박했으며 가혹한 폭행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발포는 없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부마항쟁 중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는 참나무 몽둥이로 시민·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으며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민군과 자치공동체를 조직하자 아예 발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바뀌었으며 지역이 부산·마산과 광주라는 차이일 뿐이지만 가해 행위와 피해 상황은 큰 차이를 보였다. 7-8)
10·26 사건의 셋째 원인은 대통령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였다. 소행사·대행사로 불리는 ‘술과 여자’를 즐기는 박정희의 부도덕한 사생활에 대한 김재규의 인간적 환멸감이었다. 박정희는 궁정동에 사실상 비밀 요정인 안가를 두고 여기서 사흘에 한 번꼴로 외부에서 여자를 불러들여 술자리를 가졌다. 국가 위기관리의 핵심기관인 중앙정보부의 기밀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안전가옥 (안가)에서 최고권력자가 측근들을 불러놓고 빈번하게 주색 유희에 빠져든 것이다. 동석하는 여자는 항상 두 명으로 가수나 영화배우 등 기성 연예인과 나이 어린 연예인 지망생이었다. 혼자서 여자와 술 마실 때는 소행사라 했으며 청와대 비서실장·경호실장·중앙정보부장 등 핵심 측근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는 대행사라고 했다. 10·26 당일도 유명 가수와 연예계 지망 여대생이 동석한 대행사였다. 박정희의 비밀 요정 궁정동 안가와 소행사·대행사를 관리하는 직책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대통령의 채홍사라 불리기도 했다. 8)
1장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재판이 시작되다(계엄보통군법회의 1회 공판, 1979년 12월 4일)
변호인단은 근본적인 문제를 따지고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직후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법적으로 유효하냐는 지적이다. 유신체제 아래서 오랫동안 길들어져 정부가 하는 일이 법적으로 옳으냐의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생각해온 풍토였다. ‘위’에서 결정된 대로 따르는 데 익숙해 있었지 그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일 자체를 불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로 구체제가 무너진 직후가 아닌가. 공포통치체제였던 박정희 정권 아래서 무서움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장, 바로 ‘남산의 부장’이 정권을 타도했다. 과연 새 세상이 올 것인가.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고 언론 비판, 사법적인 논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10·26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은 이런 앞날의 전망을 짐작케 해주는 풍향기였다. 변호사들은 구체제 아래서의 법 적용이나 판례를 뛰어넘어 ‘과도적 혁명기’에 걸맞은 새로운 법리논쟁을 끌어내려 했다. 30)
처음부터 재판장과 심판관, 법무사, 검찰관들은 한 세대의 정치사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군부가 그런 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또 그 후 신군부의 등장을 보더라도 과히 틀리지는 않은 생각이었다. 그만큼 군인정치체제는 최고권력자 한 사람이 사라진다 해서 금방 민주화로 바뀔 수 없을 만큼 이미 뿌리가 깊었다. 재판 자체도 보안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의 지침에 따라 진행됐다. 군사법정의 진행 상황은 유신체제 아래서 중정에 파견됐던 공안검사들에 의해 면밀히 청취되고 시나리오가 짜였다. 이들이 재판정의 막 뒤에서 그때그때 지침을 적은 쪽지를 보냈다. 그래서 이 군사재판에 대해 ‘쪽지재판’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돌기도 했다. 이는 10·26 사건의 군사재판이 구체제 타도자에 대한 체제 수호 세력의 단죄를 위한 각본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증거였다. 역사적 전환기를 가져온 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가리는 순수한 재판이 될 수 없었다. 33)
2장 집권 쿠데타인가 민주 회복 거사인가(2회 공판, 12월 8일 오전)
10·26 사건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군법회의가 아니라 민간법원에 있다는 변호인단의 재정신청은 대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고 판시했다. 지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인한 계엄령 때도 똑같은 재정신청이 있었으나 대법원은 그때 군법회의 재판권을 인정했다. 그것이 판례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2월 8일 김재규 피고인 등에 대한 군사재판의 2회 공판이 속개됐다. 또 재판부는 법적으로 허용돼 있는 피고인 진술에 대한 변호인의 녹음도 일절 금지했다. 변호사들은 변론자료 준비를 위해 휴대했던 녹음기를 법정에 들어오면서 모두 맡겨야 했다. 변호인단이 녹음권을 계속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불허 결정을 내렸다. 피고인들이 전직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국가 최고 기밀을 취급하는 직위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이유다. 재판정의 녹음은 계엄사 당국 외에는 일절 금지됐다. 38)
12월 6일 기존의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된다. 그는 당선 다음 날로 민주화와 정치 발전을 위한 첫 조치를 취했다. 우선 헌법 개정 등 정치적 논쟁을 일체 금지시켰던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인사들이 석방됐다. 지난 1973년 여름 도쿄에서 강제납치되었다 살아 돌아온 후 6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묶여 있던 김대중 씨는 12월 8일 0시를 기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또 국회도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최 대통령은 12월 21일 취임사에서 1년 이내 개헌을 완료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 총선 실시 등 향후 정치 일정을 제시했다. 이렇게 민주화가 실천돼가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두 번째 공판이 열린 날은 바로 긴급조치 해제와 정치범 석방, 김대중 씨 연금 해제 등 가장 눈에 띄는 조치가 나온 날이었다. 변호인단이 10·26에 대해 그런 민주화를 불러온 역사적 사건이라고 역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44)
변호인들이 김재규 피고에 대해 계속 ‘장군’이라고 부르자 검찰 측이 경고 발언을 했다. 군 검찰은 국가원수를 살해하고 국헌 문란을 기도한 국사범을 영웅시하는 것은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법적으로도 판결에 따라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며 전관예우를 한다고 해서 문제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확인된다. 첫째, 당일 오후 4시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의 연회를 전화로 통보하자 김재규는 4시 15분경 정승화 육참총장과 김정섭 중정 2차장보를 초대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행사가 있는 시각에 같은 장소에 다른 손님을 부른다는 것은 보통은 없는 일이었다. 둘째, 그는 이어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검사까지 했다. 이는 그가 박 대통령과 차지철로부터 정국 문제에 관해 힐난을 받은 데 자극받아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보안사 측의 주장에 반대되는 정황이다. 즉 사전에 결심했다가 이날로 결행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38, 53)
10·26 사건의 주역은 역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최측근인 박선호 의전과장 및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의 거사에 대해 김 부장의 두 부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김 부장은 연회장에서 나와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쏘러 들어가기 직전에야 두 부하를 불러 함께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처음 두 부하는 모두 꺼렸다. 박선호는 “각하까지입니까?”라고 확인한 뒤 “경비원이 7명이나 되므로 오늘 밤은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고 경호원 수를 3명이나 부풀려 거짓 보고를 했다. 박흥주도 깜짝 놀라 묵묵부답의 태도를 보였다. 김 부장은 주머니 속의 권총을 툭 쳐 보인 데 이어 “저쪽에 육참총장과 제2차장보도 와 있다”고 말했다. 박흥주 대령은 이 말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상당히 진행돼온 것으로 생각했다. 박선호도 어차피 김 부장은 결행할 기세였고 이미 그 얘기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나기 어렵다고 느꼈다. 두 부하는 이렇게 해서 엄청난 사건에 즉석에서 끌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58)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이어 그는 옆에 앉은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팔을 툭 치면서 “대통령 각하 좀 똑똑히 모시시오”라고 말하고는 권총을 빼 들었다. 첫 발은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소리치며 경호실장 차지철을 쏘았다. 곧바로 두 번째를 박 대통령의 가슴에 발사했다. 박 대통령은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졌으나 차지철은 팔목에 맞아 화장실로 피신했다. 권총을 계속 쏘려 했으나 탄피가 빠져나오지 않는 바람에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박선호의 권총을 낚아채 들고 다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는 차지철에게 재차 사격한 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그는 권총을 박 대통령의 뒤통수에 바싹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냉혹한 방법이었지만 완전한 제거를 위한 최후의 가격이었다. 후에 그는 법정진술에서 부하들이 박 대통령의 병원 후송 여부를 물어왔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63)
결행이 끝나자마자 그는 정승화 육참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와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을 차에 태우고 궁정동을 나섰다. 정 총장이 차 안에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김 부장은 말없이 오른편 엄지손가락을 세워 밑으로 뒤집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 총장이 재차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적이 알면 큰일입니다.” “외부의 침입입니까, 내부의 일입니까?” 김 부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효자동길과 종합청사 앞, 시청 앞, 신세계를 거쳐 퇴계로의 세종호텔에 다다랐다. 여기서 김 부장은 “어디로 가지?”라고 물었다. 이 대목이 그의 사후 계획은 조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지적을 낳게 했다. 또 그것이 그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김 부장의 이 물음에 정 총장은 “육본으로 가시지요”라고 받았다. 위기 시에 자기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 것은 별 계획 없이도 나타날 수 있는 반사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0·26의 역사적 운명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돼버린 것이다. 68)
김재규 부장이 처음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이 육본 벙커에서였다. 육본 벙커에 들어왔던 총리 이하 국무위원들이 국방부로 자리를 옮기자 김재규 부장과 김계원 실장은 잠시 둘만 남게 됐다. 김 실장이 힐난조로 말했다. “이 사람아, 어떻게 각하까지 그렇게 했어.” 이 말에 김 부장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시오. 사태 수습이 더 급선무입니다.” 이어 그는 차후의 계획을 내비쳤다. “보안유지를 해야 됩니다. 하루빨리 계엄사령부 간판을 내리고 혁명위원회로 바꿔 달아야 합니다.” 이 혁명이란 말에 김 실장은 사태를 새로이 파악했다. 그는 후에 법정진술에서 이때 비로소 김 부장이 분명하게 박 대통령을 겨냥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보안사 측은 김재규가 처음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가 나중에 변호인 접견을 통해 ‘의식화’돼서 민주화 혁명이란 말을 내놓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해석은 육본 벙커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는다. 73)
김 피고는 자신이 3군단장으로 재임중이던 때인 1972년 유신 선포 직후 새 헌법은 박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 만든 헌법임을 알고 이의 타도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1976년 중정부장이 된 후에는 순리적인 방법으로 유신체제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그는 진술했다. 그러자 검찰관은 그에게 물었다. “긴급조치 9호는 날이 무디어졌습니다. 긴급조치 10호라는 시퍼런 칼날을 주십시오, 이렇게 건의한 일이 있지요?” 그는 그러나 새로이 긴급조치 10호의 제정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것은 9호의 독소를 뽑아버리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검찰 측은 그의 이 주장을 계속 반박하며 믿지 않았다. 이에 김재규 피고인은 박 대통령의 성격에 관한 체험담을 소개하며 부연 설명했다. “대통령 각하께 우리가 ‘완화하십시오’라고 약하게 나오면 각하는 꼭 반대로 강하게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9호의 독소조항을 뺀 것을 만들려면 우리는 강화하는 인상을 주는 작전을 써야 합니다.” 78)
김재규 피고인은 유신체제 타도의 동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한미관계의 악화에 큰 비중을 두었다. 유신체제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버리려 하고 있다고 그는 위기감을 토로했다. 미국은 한국에게 독재체제를 그만두고 민주주의체제로 환원하라는 선의의 권고와 충고를 여러 번 했다는 것이다. 유신체제의 실질적인 권력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진술은 당시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과 똑같았다. 그는 바로 며칠 전까지 현직 중정부장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잡아들이고 고문했던 반체제 세력의 주장을 중정부장이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해서 서유럽의 민주주의와 다를 수 없다며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려 하자 재판부와 검찰 측이 함께 소리를 질렀다. 재판장이 “지금 변호인 측과 피고는 국가안보에 관한 중요한 발언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 10분간 휴정하겠습니다” 하고 선언했다. 그 뒤부터 김재규의 진술은 국가기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재판에 부쳐졌다. 97)
3장 국가안보를 이유로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되다(2회 공판, 12월 8일 오후)
재판부가 비공개 선언을 하고 신문을 계속하려 할 때 시각은 이미 오후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토요일 오후였다. 변호인단은 이날 공판을 종료하자고 제의했지만 재판부는 변호인 신문을 재촉했다. 그러자 변호인단은 신문을 포기했고, 이어 재판부의 법정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 피고인은 독재자 박정희 한 사람을 제거한 것이지 체제를 전복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건재하면 자유민주주의가 회생될 수가 없었기에 박 대통령 스스로 그런 숙명관계로 몰고 갔다고 진술했다. 미국이 유신체제를 좋지 않게 생각하니 한번 완화해보자고 건의하면 박 대통령은 내정간섭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대꾸했다. 그는 “미국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 하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김재규가 직선제 대통령선거로 바꿀 것을 건의하자 다른 수석비서관과 상의해보라고 외면했다. 김재규는 이 같은 체제 완화 건의가 일절 먹히지 않는다고 깨닫고 민주화의 방법으로 혁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103, 109)
법무사는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소아를 버렸다면 김 피고 자신도 자결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처음엔 박 대통령과 같이 없어지는 방법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을 결행하고 나서 그 뒤치다꺼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생각이 달라졌다고 답변했다. 그는 4·19 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얼마 못 가서 무능하다는 이유로 군사혁명에 의해 무너졌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새 혁명정부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책임이 혁명을 결행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김재규 피고인은 구치소에서 변호인 접견 시 바깥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긴급조치를 해제한 것과 유신헌법을 고치겠다는 담화 등을 그는 10·26 거사의 성과로 꼽았다. 박 대통령 한 사람이 없어지니까 그런 민주화 조치가 가능해지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115)
4장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을 신문하다(3회 공판, 12월 10일)
10·26 사건의 피고인 8명 중 김계원 피고인의 진술은 다른 이들과 입장 차이가 가장 두드러졌다. 김계원 피고인은 처음부터 이 사건 자체를 비난했다. 자신이 연루돼 법정에 선 것은 오해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또 김재규 피고인의 거사 동기에 대해서도 민주 회복 혁명이니 대의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진술이 많았다. 사건 당일 밤 현장에서 자극을 받아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함께 죽지 못한 것은 불충이라고 자책했다. 이런 입장인 그가 법정진술에서 유신체제나 박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 한마디 비판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가 핵심권력 내부의 일에 관해 공개한 것은 경호실장 차지철의 월권과 오만방자한 태도뿐이었다. 김재규 피고인도 김계원 실장에 대해 혁명인 줄 알았으면 결코 따라오지 않았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같은 김재규 피고인의 비난은 오히려 그에게 사형을 면하게 해준 변론의 효과가 됐다. 120)
김계원 피고인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경질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오히려 김 부장 자신이 그만두어야 할 시기를 사전에 귀띔해줄 것을 수차 부탁해왔다는 것이다. “시오도키가 다이지라고 남자란 일하다가 뺄 때, 그만둘 때가 중요하니 나도 중정부장을 언제 그만두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사전에 좀 알려주십시오.”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등 군 출신 정권의 최고권력자들은 대부분 일본군 출신이어서 자기들끼리 술 마실 때나 은밀한 대화를 나눌 때 일본말 속어를 쓰곤 했다. 김 실장은 “대통령께서 요직 개편 문제에 대해서 금년 중에 고려하고 계시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김재규 피고인이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어 경질당할 것으로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보안사 측의 수사 결과와는 상반되는 진술이다. 그는 또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해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뒤 들어선 정운갑 총재대행 체제가 제대로 가동되도록 한 것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고 공개했다. 128)
사건 당일 밤 연회가 시작되기 전 박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김재규 부장은 김계원 실장에게 “오늘 해치워버릴 테니 뒷일을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이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의 진술 중에는 대질신문 등을 통해 검증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체포권은 우선 경찰이 가졌다고 보아야 하며 또 대통령 경호실도 임무 수행상 체포할 수 있다. 사실상 군은 민간인 신분인 중정부장을 체포할 권한과 책임이 없다. 그러나 중정부장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한 것은 군 헌병과 보안부대였다. 그때는 계엄이 선포되기도 전이다. 법적인 근거를 가릴 것 없이 중정부장을 체포할 능력은 경찰이 아니라 군이 갖고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김계원 실장이었다. 그는 내무장관과 경호실 차장(이재전 중장)도 있었으나 이들을 제쳐두고 국방부 장관과 육참총장에게 김재규 부장의 체포를 주문했다. 137, 144)
보안사는 사건 발생 후 3시간여 만에 외부 기관으로는 가장 빨리 박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알았다. 이 정보 확인 작전의 주역은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보안사는 이같이 엄청난 사건이 터졌을 때 냉철하게 파고드는 자세를 보였다. 당시 국내에서 중앙정보부와 함께 가장 조직적인 위기관리 촉각을 가진 집단이 보안사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중정은 이미 대통령 살해 집단으로 전락했으므로 보안사가 유일한 핵심 조직인 셈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청와대에 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사건 개요를 청취한 것은 10·26 다음 날 오후 5시 반. 그는 수사관 2명을 대동했다. 평상시 같으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범죄 사건을 설명해 달라고 청하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죽었고 계엄 아래서 보안사가 그 사건의 수사기관임을 전 소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권력에 대한 후각은 군인 차원을 훨씬 넘어선 골수 정치군인의 그것이었다. 161)
5장 궁정동 안가의 대행사 소행사(4회 공판, 12월 11일)
박선호 피고인은 해병대 대령 출신의 중정 의전과장으로 김재규 부장이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이었다. 당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핵심권력자들이 술을 마시는 궁정동 안가는 이미 요정화 돼 있었다. 관립 요정인 셈이다. 그 관립 요정의 관리를 중정이 맡았고 중정 의전과장이 지배인격이었다. 박선호 피고인은 의전과장의 임무 중에서도 술 시중 여인을 구하는 일이 가장 괴로웠다. 그는 중간에 몇 번 그만두겠다고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심복이 아니면 맡길 수도 없어 김재규 부장은 박 과장을 계속 붙들었다. 박선호 피고인은 법정에서 그런 김 부장에 대해 한마디도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김 부장에 대해 상관으로서 존경하고 신뢰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오히려 박 대통령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언을 남겨 김재규 부장의 10·26 결행이 정당한 판단이었음을 부각시켰다. 그는 1980년 5월 24일 김 부장 등 5명의 피고인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3)
박흥주는 동기생 중 항상 1차로 진급하는 그룹으로 분류된 육사 18기의 선두주자였다.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와는 거리가 먼 야전군인이었다. 중령 시절 12사단 포병대대장 보직을 마치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 수행비서관이 되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군사정권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장교였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이었다.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보직에서 일선 연대장으로 나가기를 희망했으나 김재규가 몇 달만 더 하라고 붙잡는 바람에 박 대령의 운명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1979년 10·26 사건 때 김재규의 지시로 안가 경비원 이기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함께 식당에 있던 경호원 사살에 가담하였고 김재규가 보안사에 체포되면서 본인도 구속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박흥주는 10·26 당시 현역 군인이었기에 1심 선고만으로 사형이 확정됐고 1980년 3월에 사형이 집행됐다. 208)
김재규는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서 나를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가 경비조장인 이기주와 운전기사 유성옥, 경비원 김태원이 합류했다. 이들은 함께 식당에서 총격을 가해 2명 살해, 3명 살인미수로 동일한 죄가 적용되었다. 김태원은 영문도 모른 채 명령에 따랐다가 사형을 받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가장 의연한 모습을 보여 변호인들조차 감명을 받았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여러 차례 그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며 “저에게 극형을 내려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극형만은 면해 주시기 바란다”고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와 박선호·이기주·유성옥·김태원은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의 사형선고를 받았고 선고 나흘 후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18 광주민주항쟁이 최종적으로 발포 진압된 5월 27일을 사흘 앞둔 날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232, 249)
6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과 청와대 경호관의 권총 대결(4회 공판, 12월 11일)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이 검찰관 측의 신문에 답변하면서 내비친 궁정동 안가의 대행사·소행사에 착안했다. 대통령 박정희의 연회행사와 그 자리에 동원된 외부의 여자들. 국정 최고책임자가 술과 여자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다고 느껴졌다. 권력자의 부도덕성으로 예부터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바로 술과 여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쏜 사건의 배경에 대해 품었던 자신의 의혹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의 타락상과 판단력 마비 때문에 국가 위기가 다가옴을 절감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 부산·마산의 시민데모가 심각했고 밖에서는 미국 측의 압력이 전해져 오고 있었으니 그것이 국가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강 변호사는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을 해온 박선호 피고인을 통해 박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폭로하기로 마음먹었다. 박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킬수록 그만큼 10·26 거사의 정당성이 커지는 것이다. 261)
박선호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청와대 경호관들인 정인형과 안재송 등을 사살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이른바 ‘확인사살’ 지시를 내린 장본인이라는 혐의다. 확인사살 지시에 대해서 중정 경비원들이 주장했으나 박선호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경호관들에게 총을 쏜 것은 자신도 시인한 범죄사실이다. 그 경호관들 중에서도 정인형 경호처장은 박선호와 해병대 장교 임관동기로 친구 사이였다. 10·26 당일 밤, 그 전우에게 권총을 겨누며 박선호는 “함께 살자”고 설득을 시도했다.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옆에는 한국에서 속사권총의 1인자로 올림픽 대표선수 출신인 안재송 경호부처장이 함께 있었다. 정인형과 안재송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이내 속사수 안재송이 권총에 손을 댔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미 권총을 겨누고 있는 박선호에게 대항하기는 무리였다. 박선호의 권총은 안재송에 이어 정인형에게 불을 뿜었다. 268)
7장 거부할 수 없는 운명(5회 공판, 12월 12일)
12월 12일 오전 10시, 박흥주 대령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이 시작됐다. 박 대령은 명문 서울고교 출신으로 육사 18기의 유망주. 유망주였기 때문에 힘깨나 쓰는 장성인 김재규의 부관으로 발탁됐으나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단축시킬 줄이야…. 게다가 그가 살았던 집은 찻길조차도 안 닿는 산동네 꼭대기의 단칸방으로 밝혀져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현역 군인인 그는 재판도 다른 피고들과 달리 항소심이 없는 단심이었다.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은 김재규 부장이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사건과 긴급조치 10호 건의문제 등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김 부장은 왕조시대의 어전에 나가는 신하와도 같았다. 집무실에서 양치질과 세면을 다시 하고 거울 앞에서 복장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진언할 보고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일일이 검토했다. 그러니까 그가 권총을 쏜 대통령 박정희는 이미 개인적인 동향이라거나 육사 동기(2기) 사이라는 정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276)
법무사는 박흥주 대령에게 군인의 윤리 문제를 물었다. 직속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것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보호하는 일, 그것이 서로 상충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박 대령은 직속상관인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대통령 살해를 거들었다. 그는 고민했지만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 갑자기 당한 긴박 상황에서 국가변란 같은 것보다도 자신의 처신만을 생각했다고 그는 법정에서 토로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진술했다. 박선호 피고인이 확신범이라면 박 대령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휩쓸린 우발범에 가까웠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대통령 박정희의 사생활을 얼마나 아느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선호 피고인은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을 하면서 최고권력자의 타락상에 혐오감을 가졌었다. 이에 비해 박흥주 피고인은 그런 베일 속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의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판이한 것은 당연했다. 이는 일반 국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304)
8장 기타 반주 속의 총성(6회 공판, 12월 14일)
12월 14일 오전 10시, 계엄보통군법회의 6회 공판이 열렸다. 본래 13일 속개하게 돼 있었으나 12·12 군사반란 다음 날이어서 이날 공판이 열리지 못했다. 이 군사재판의 최고책임자(관할관)인 계엄사령관이 바뀐 것이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이 이 사건과 연루된 혐의가 있다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그를 체포해버렸다. 12·12 군사반란은 변호인단의 변론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재판부는 더욱 보안사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일례로 중정 경비원은 이기주 피고인 확인사살 장면은 안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인사살을 실행한 김태원 피고인은 이기주 피고인과 함께 들어가 한 명을 쏘는 것은 그가 지켜보았다고 수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보안사 수사관은 이기주 피고인에게 김태원 피고인의 진술을 인정하라고 종용했다. 이기주는 마지못해 “김태원이 정 그러면 내가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꿰맞추기 수사로 확인사살 행위가 크게 부각된 것이다. 311, 337)
현역 군인 박흥주 대령에 대한 신문이 계속되었다. 박흥주 대령의 말에 의하면 그는 10·26 당일 저녁에야 김재규의 계획을 들었고 상관의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었다. 그는 사건이 벌어진 안가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육본으로 가서도 어떤 조치를 취할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그의 솔직한 진술을 듣고 있으면 상명하복의 군대보다 더 엄정한 조직인 중정에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 강직한 젊은 군인의 비극적 운명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재규는 1978년 10월 1일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국내적으로는 양대 선거,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갈등이 깊었던 시기였다. 대통령 박정희의 독선은 1979년에 들어 그 강도가 심해졌다. 그는 건강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대통령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부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박흥주는 본받아야 할 롤모델이자 상사로서 김재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랐다. 343, 348)
9장 승리했으나 포로가 된 장군(7회 공판, 12월 15일)
12월 15일 오전, 제7회 공판이 시작됐다. 국선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는 주로 김재규의 개인사와 삶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는 사표를 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내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며 건강 악화로 인해 중앙정보부장의 직무를 내려놓고 싶었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재규는 10·26 거사가 결코 우발 충동행위가 아니었다며 유신헌법이 선포된 직후인 1972년 11월 이미 박 대통령을 연금하고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재규 피고인은 3군단장이었다. 유신헌법을 구해 읽어보니 완전히 개인의 영구집권을 위한 내용임을 알고 박정희를 밀어낼 계획을 세웠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신임해 전방 부대 순시 때면 그의 임지에 가서 머물다 가곤 했다. 그런 기회에 그는 박 대통령을 연금하고 하야할 것을 요구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진실인지 완전히 검증된 주장은 아니나, 그가 박 대통령의 독재권력에 문제의식을 오래전부터 품어왔다는 한 지표였다. 389, 396)
[김재규 진술] 저는 정권을 잡을 생각은 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군인이고 혁명가입니다. 군인이나 혁명가가 정권을 잡으면 독재를 하게 마련입니다. 독재를 마다하고 혁명을 하는 사람인 제가 정권을 잡아서 독재할 요인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됩니다. 금번 대통령 각하를 희생해서 혁명을 했습니다만, 개인의 의리라든가는 제가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득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을 취하려면 다른 한쪽은 안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각하는 자신의 운명과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완전히 숙명적 관계로 만들어놨습니다. 각하께서 희생되셔야만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고 각하께서 희생되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가 회복이 안 되는 그런 관계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부득이 각하는 제가 희생시켰지만, 제가 각하의 무덤 위에 올라설 정도로 제 도덕관은 아직 그렇게 타락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한 적이 없습니다. 398)
[김재규 진술] 저는 10·26 혁명이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지금 현재까지도 자유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지사실입니다. 10·26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회복될 것이 보장되어 있어요. 이것은 최 대통령께서 권한대행 때 국민 앞에 공약했습니다. 국회에서는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었고요. 이런 일련의 행위가 10·26 혁명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할 때,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사로서, 영웅으로서 저는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과업을 마지막까지 수행하지 못하고… 하고 말았기 때문에 앞으로 해야 할 혁명과업이 많습니다. (···) 제 지금 기분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 장군이 우연한 기회에 적에게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완성해놓고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409-10)
10장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증언(8회 공판, 12월 17일)
12월 17일 오전 10시 제8회 공판이 열렸다. 이날 궁정동 안가의 연회 담당 사무관인 남효주와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공군 준장 등 증인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했다.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국군서울지구병원장에 따르면 시신의 얼굴은 피로 흠뻑 젖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정 경비원들이 보안조치라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제지했다고 했다. 병원장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망진단을 하기 위해 복부를 들추어보았을 때였다. 배꼽 아래 흰 반점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시신이 박 대통령임을 알아보았다. 언젠가 박 대통령이 흰 반점을 제거할 수 없겠느냐며 보여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을 절명케 한 것은 제2탄이었다. 1탄을 발사한 후 김재규 부장은 권총이 고장 나 밖에 나가 박선호 피고의 총을 가져왔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권총을 그의 머리에 바싹 들이대고 2탄을 발사했다. 이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병원장은 이 두부 관통상으로 박 대통령이 소생 불능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445)
박 대통령의 사망을 궁정동 술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 외에 가장 먼저 알았던 곳은 보안사였다. 병원장이 시신의 신원을 알아차린 직후 첩보 보고를 받은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전화로 병원장을 찾았다. 그는 병원장이 외부에서 온 경비원들의 감시 아래 있어 부자유스럽다는 낌새를 알아챘다. “지금 병원장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묻는데 대해 ‘예’나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 병원에 들어온 시신이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러자 우 준장은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코드 원’입니까?” 이 말에 병원장은 짧게 응답했다. “예.” 우 준장은 곧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았고 사건을 알게 된 전 소장은 다음 날 낮 청와대로 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청취한다. 전 소장은 이때부터 권력의 중심권에 진입할 채비에 들어간 셈이다. 그 당시 이미 보안사는 나라의 중요 정세를 예의주시해온 핵심집단이었다. 451)
11장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9회 공판, 12월 18일)
재판부는 12월 18일 제9회 공판으로 사실심리와 증인진술, 증거조사 등을 모두 끝냈다. 공판이 시작된 지 14일 만에 이런 절차를 마친 것은 사법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재판이었다. 그것도 국가원수 살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생각하면 법조인이면 누구든지 혀를 내두를 만큼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재판이었다. 김재규 피고인의 최후진술을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법정은 10분간 휴정에 들어갔다. 휴정하는 동안 재판부는 방청객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가 최후진술에서 국가기밀을 공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법정은 비공개로 들어갔다. 이날 오후 6시 반, 김 피고인은 물을 한 컵 청해 마시고는 정성껏 다듬은 문장과도 같은 최후진술을 전개해나갔다. 메모를 준비하지 않은 채 30여 분간 이어진 웅변을 통해 그는 ‘10·26 혁명’의 의의와 불가피성을 설득력 있게 정리해놓았다. 당시 비공개법정의 장막에 갇힌 그의 최후진술은 군 당국의 녹음기에만 기록돼 훗날의 역사적 평가와 재심을 기다려야 했다. 473)
[박흥주 진술] 실로 이번 일은 국민과 국가와 전 세계에 영향을 크게 미친 충격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본인으로서는 예기치 않았던 일이고, 행동에 참여는 했지만 큰 계획도 모르고 실시했던, 생각해보면 많은 복잡한 생각을 가져오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당일 갑자기 부장께서 “나라가 잘못되면 자네나 나나 죽는 거야”라고 말씀하시고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외치며 들어가실 때, 본인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지 부장의 평소의 인격과 평소의 판단력과 본인 스스로 갖고 있던 사태·소요에 대한 핵심, 이런 것들만 생각하고 실제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물론 사건이 다 끝난 오늘에 와서는 생각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가장 적절하고 가장 정확한 판단에 의해서 지시되는 사항으로 알고 거기에 순응했던 것입니다. 이제 본인은 궁정동의 비극이 발전하는 민주 대한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유족 여러분에게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475)
[박선호 진술] 부장님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 국민이 거꾸로 돌아가도 거꾸로 돌아갑니다가 아니고 바로 돌아갑니다 하는 것, 국민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아픈 데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정확한 판단하에서 일을 집행하시는 점에서 제가 존경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 나라에서 정보 면에서 가장 정확하게 많이 알고 계시는 분이 정보부장을 3년가량 하신 김 부장님이라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분께서 직접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건의해도 안 되고 마지막으로 부산까지 가셔서 실제 체험을 하고 오셨고 또한 부산과 같은 상황이 서울에서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고, 막아지지 못했을 때는 옛날의 4·19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고, 부장님도 그렇게 판단하심으로써, 이번 거사를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 인해서 최소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갈망했던 민주 회복을 10~20년은 앞당겨놓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476)
[김계원 진술] 각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총애와 신뢰를 받아오던 접니다. 하해 같은 은덕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하던 영광된 자리에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각하께 홍모의 보은도 드리지 못하고 마지막에 국립묘지까지 모시고 가지 못한 불충을 지금 백 번 만 번 사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각하의 명복을 빌고 그 유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가호가 같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각하를 그렇게도 숭상하시던 국민 여러분, 각하의 서거를 그렇게도 애통해하던 국민 여러분, 군 장병 여러분, 죄송합니다. 각하 보필을 제대로 못 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바라건대 새로운 영도자를 모시고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각하께서 이룩하지 못한 민족중흥의 대업을 한시바삐 완성시켜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명분이 제아무리 좋고 어떠한 미명하에서도 이와 같은 인륜 도덕을 무시하는 모반사건이 이 나라에서 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건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477)
[김재규 진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700만이 다 같이 갈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는데 어찌하여 내란죄의 적용을 받아야 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또 10·26 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혁명의 결과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보장되었습니다. (···) 또 이 혁명은 5·16 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해서 그야말로 정정당당합니다. 허약한 자유민주당 정권을 무력하다는 이유로 밀어치우는 것과 앞마당에서 한바탕해서 자유주의를 말살하는 것에 비하면,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해서 유신체제를 타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10·26 혁명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479)
[김재규 진술] 나는 최 대통령 각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대문 앞에까지 와 있는데 지금 문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빨리 회복시키는 데 절대로 혼란이 올 리 없습니다. 자유당 때 자유민주주의 해서 혼란이 온 것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안 하고 부정선거를 해서 혼란이 온 겁니다. 공화당 정권 되고 난 이후에 국민을 우롱하는 사건을 만들어내니까 혼란이 왔지, 자유민주주의 해서 혼란이 온 게 아닙니다. 물론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3~4개월이나 5~6개월이면 충분하지 1년이나 1년 반씩 끌 아무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빨리 민주주의 회복을 안 하고는, 자꾸 끌다가는 내년 3~4월이면 틀림없이 민주 회복 운동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 나는 그래서 이런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을 미리미리 없애라고 권고드리고 싶습니다. 482)
[김재규 진술]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내 앞일을 청산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때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내가 한 혁명이 원인이 되어서 이 나라에 혼란이 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기마저 흔들릴 요인이 생길까 봐 몹시 겁이 납니다. (···) 일시적인 감정이나 감상에 사로잡혀서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았다, 20~25년 앞당겨놨다 하는 자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만만세가 되고 10월 26일 혁명이 만만세가 되도록 기원합니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만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그 여한이 한량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기약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못 보았다뿐이지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심판장님께서는 소신껏 심판해서 제게 알맞은 형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483)
12장 항소심 진술 - 박정희의 술과 여자(고등군법회의 2~3회, 1980년 1월 23, 24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 등 피고인 7명은 고등군법회의에 항소했다. 1980년 1월 22일 오전 10시, 계엄고등군법회의가 개정됐다. 이날은 김계원·김태원 피고인만 출정시켜 검찰부가 1심 공판 때의 사실심리 내용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검찰부는 1심에서 김계원 피고인에게 적용됐던 ‘내란 목적 살인죄’를 ‘단순 살인’으로 바꾸었다. 다음 날인 1월 23일 항소심 2회 공판이 열렸다. 김재규·박선호·이기주·유성옥·유석술 피고인 등 5명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단의 사실심리가 진행됐다. 유일한 현역 군인인 박흥주 대령은 단심으로 이미 사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1980년 1월 24일 오전 10시, 고등군법회의 3회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들이 진술하는 것으로 마지막인 결심공판이다. 대법원의 상고심은 대법관들이 군법회의가 법률을 제대로 적용했는지만을 검토하는 이른바 법률심이다. 대법원은 군법회의 재판이 다시 검토해야 할 만한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이들의 사형이 확정된 것이다. 486)
1심에서의 판결은 그대로 2심 항소심에 이어졌다. 심지어 군사법원에서 내려진 판결과 대법원의 심리결과 간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재판이 이미 정해진 결론을 실천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냐는 비판 시각에 상당한 근거를 제공했다. 재판부는 이 판결문을 작성하는 데 법률가뿐만 아니라 정치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수려한 문장으로 이름 있는 언론인 등에게 자문을 구했다. 지식인들은 자문 요청에 “법률적으로만 충실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대부분 거절했다. 보통군법회의 판결문(1979년 12월 20일)의 최종 선고는 이러하다. 〈피고인 김재규·김계원·박선호·박흥주·이기주·유성옥·김태원을 각 사형에, 유석술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인 유석술에 대하여 판결 선고 전 구금 일수 중 50일을 위 징역형에 산입한다. 압수된 증거 제36호 및 37호, 32구경 권총 1정과 동 실탄 4발은 김재규로부터 몰수한다.〉 1979년 12월 20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장 육군 중장 김영선 521-3)
# 피고인 김계원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형을 복역하다가 1982년 5월 1일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