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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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위기


"근대성은 어쨌든 시간의 흐름을 지칭한다.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는 시간에 있어서 새로운 체제, 가속, 파열, 혁명을 지칭한다. '근대적'이라거나 '근대화', '근대성'이라는 말을 쓸 때에 우리는 그 반대말로, 낡아빠지고 정적인 과거를 지칭한다. 나아가 그 말은 언제나 고대인과 근대인이라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싸움의 한복판으로 던져진다. '근대적'이라는 말은 따라서 이중적으로 비대칭적인데, 우선 시간의 규칙적인 흐름에 있어서의 단절을 지시하며 또한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있는 전투를 가리킨다." "몇 걸음을 되짚어보자. 우리는 근대성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고 탈근대성의 징후를 해석하여 왜 우리가 더 이상 지배와 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의 핵심사항에 헌신할 수 없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40-1)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번역'이 없다면 '정화'는 헛되고 무의미할 것이다. '정화'가 없다면 '번역'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번역'은 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정화'는 내가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번역'은 예를 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 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정화'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41-2)


"우리가 번역과 정화, 두 가지의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인이다─우리의 비판적 기획이 저 아래에서 하이브리드들의 증식proliferation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정화 작용과 혼성화 작용에 주목하기만 한다면 그 즉시 우리가 현재에 근대인임을 멈추게 되고 우리의 미래는 변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우리가 근대인이어 왔다는 사실도 중단되는데, 우리가 회고적으로 실천의 두 가지 집합이, 이제는 끝나가는 역사적 시기 안에서 이미 언제나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른 자연-문화들에 대해 유지해온 고통스러운 관계 또한 변형되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 지배, 제국주의, 허위의식, 제파 혼합주의syncretism─인류학자들이 '대분할'Great Divide이라는 느슨한 표현 하에 요약하는 모든 문제들─는 다르게 설명될 것이고, 그에 따라 비교 인류학을 변형시키게 될 것이다."(42-4)


# 하이브리드(hybrid), 혼성화(hybridization) : 하이브리드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의 범주 사이에 존재하면서 양자 어느 쪽으로 간단하게 환원되지 않는 중간적인 존재, 혹은 행위자를 지칭한다.


2장 헌법


# 헌법(Constitution) : 근대성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구조'보다는 가변적이며 문화나 공유된 신념보다는 실재적이다.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부문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간과 비-인간으로 분할하고 그 분할 상태를 유지하면서 각각의 영역의 자율성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과 기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 입헌주의 헌법과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셰핀과 셰퍼의 책의 탁월함은 홉스의 과학 저작들에 대한 발굴의 성공에서, 그리고 보일의 정치 이론을 망각에서 구출한 데에서 기인한다. 비대칭성을 수립하면서, 보일에게는 과학을, 홉스에게는 정치이론을 나눠주는 대신에 셰핀과 셰퍼는 오히려 훌륭한 사분법의 윤곽을 제시한다. 보일에게는 자신의 과학과 정치이론이 있고, 홉스에게도 자신의 정치이론과 과학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둘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의했다. 두 사람 다 군주, 의회, 그리고 유순하고 통일된 교회를 원했고, 모두 기계론 철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이 철저한 합리주의자였지만 실험, 과학적 추론, 그리고 정치적 주장에서─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공기펌프로부터─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 두 사람 간의 불일치는 이들을 새로운 인류학을 위한 이상적인 실험 재료, 즉 완벽한 초파리로 만들었다."(57-9)


"보일은 의견doxa을 위해 명증한 추론의 확실성을 포기했다. 이 의견을 대중들의 허황된 상상력이 아닌 동료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새로운 기제였다. 보일은 자신의 업적을 논리나 수학, 수사학 등 위에 정초하지 않고 재판의 흉내를 내는parajuridical 은유에 기댔다." "역설적이게도 구성주의자들의 핵심 질문─사실은 실험실에서 완전히 구축되는 것인가?─은 바로 보일이 제기하고 품었던 문제이다. 그렇다. 사실들은 실제로 실험실의 새로운 기자재들 안에서, 그리고 공기 펌프라는 인위적인 중재자에 의해 구축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면 '사실들이란 제조되는 것이다.'" "신이 사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가 그 사물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실들의 본질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상황 하에서 그 사실들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사실들로 이루어진 도구화된 자연으로 제한하고, 원인들에 대한 해석을 제쳐놓는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의 약점은 힘이 된다."(60-2)


"홉스는 보일의 증명의 연극을 거부한다. 홉스에게 주권자는 사회 계약에 의해 임명된 행위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권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위하면서 리바이어던을 해체하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신법divine law이나 최고의 존재란 없다. 지식이 권력과 동일한, 이 새로운 체제에서 모든 것─주권자, 신, 물질, 그리고 다중─은 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축소된다. 홉스는 심지어 자신의 국가학이 초월성에 대해 탄원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각한다. 그는 모든 그의 과학적인 결과물들에 대해 의견이나 관찰, 혹은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학적 증명, 즉 만인이 동의를 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논증의 방법을 통해 도달한다." "유명한 사회계약조차도 공포에 질린 모든 시민들이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갑자기, 그리고 동시에 도달하는 계산의 합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홉스의 일반화된 구성주의로서 이것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구성주의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에도 의지하지 않는다."(64-5)


"보일은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정치 담론을 창조하였고, 반면 홉스는 실험 과학이 배제되어야만 하는 과학의 정치를 상상했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우리의 근대 세계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근대 세계에서 실험실을 매개로 한 사물들의 표상은 사회 계약을 매개로 한 시민들에 대한 대표로부터 영원히 분리된다. 따라서 과학의 정치에 대해 보일이 취한 입장을 과학사가들이 간과한 바로 그때 정치 철학자들이 홉스의 과학을 무시한 것은 단지 실수가 아니다. 그들 모두는 홉스와 보일의 시대 이래로 '이중적으로 봐야' 했고 비-인간의 표상과 인간의 대표 사이에, 그리고 사실의 작위성과 정치체Body Politic의 인위성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수립해서도 안 되었다. 대표와 표상이라는 말은 동일하지만 홉스와 보일 사이에 일어난 논쟁은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유사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완전히 근대인은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의미는 다시금 보다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82-3)


"(근대인들이 인정하는) 초월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동원 가능하고 인간화할 수 있고, 사회화할 수 있는 것으로 유지된다. 매일매일 실험실과 표본들, 계산과 이윤의 중심부, 조사기관과 연구기관들은 사회집단들의 다양한 운명들과 자연을 뒤섞는다. 반대로 사회는 우리가 계속해서 건설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능가하고 우리를 지배하며 그 자체의 법률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자연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이다. 매일 실험실과 표본들, 계산과 이윤의 중심부, 조사기관과 연구기관들은 사회집단들의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고 인간들의 관계를 누구도 만든 적이 없는 지속가능한 사물로 변형시킨다. 근대인의 비판적 힘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언어에 놓여있다. 근대인은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무한히 떨어뜨려 놓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핵심에서 자연을 동원한다. 또한 그들은 사회의 법률을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고 허물 자유를 갖는다."(104-5)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것은 회고적인 감정의 문제이며 우리 역사를 다시 읽는 문제이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우리는 더 이상 탈-탈-탈근대주의자의 무분별한 비행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훨신 더 정교하고 더욱 비판적이며, '의심의 시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결코 근대의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회고적인 태도는 밝혀내기보다는 배치하며, 제하기보다는 부가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친밀해지고, 폭로하기보다는 분류하는데, 이를 나는 근대적이지 않은 것nonmodern으로 (혹은 비非근대적인amodern 것으로) 규정한다. 근대인의 헌법과 함께 그 헌법이 증식시키기를 거부하면서도 허용하는 모든 하이브리드를 동시에 고려할 때에 누구나 비근대인인 것이다."(128-9)


"근대 세계는 '그 가능성에 있어서는'in potentia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비가역적 발명품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이 '그 가능성에 있어서는' 탄생하는 새로운 세계의 산파였던 것처럼. 그러나 연결망으로서 볼 때에 근대 세계는 혁명처럼 실천들의 작은 연장, 지식의 순환에 있어서의 약간의 가속, 사회들의 조그만 확장, 행위자들의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이상의 어떤 것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연결망으로 간주할 때 서구의 혁신은 여전히 인지 가능하고 중요한 것으로 남지만 대신에 더 이상 영웅담의 소재로 충분치 않다. 그 영웅담은 급진적인 단절과 돌이킬 수 없는 운명, 비가역적으로 운이 좋거나 나쁜 거대한 어떤 것이다. 반근대인들은 탈근대인들처럼 그들 상대방의 경기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경기장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는 비근대적 세계들의 장이다. 그것은 중기 왕국Middle Kingdom이며 중국만큼이나 광활하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30-1)


3장 혁명


"탈근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의 총체적 분리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발화주체의 언어게임을 받아들임으로써─따라서 근대적 헌법의 하반부를 망각함으로써─, 혹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연결망과 콜라주의 혼성적 성격 안에서만 즐거워한다는 점에서─이 경우에는 근대적 헌법의 상반부를 망각함으로써─, 자신들이 여전히 근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근대인은 언제나 정화작용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의 광범위한 팽창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중간적 존재들을 증식시켜왔다. 보일의 진공펌프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보았듯이 과학은 언제나 공동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적 모순이란 이중적 모순, 즉 한편으로는 자연과 사회라는 헌법의 두 보장간의 모순이자 다른 한편으로 정화와 매개의 작용간의 모순이다.〉" "탈근대인은 실제로는 지금까지 긴장을 일으킨 원인이었던 주 동인을 확실히 치워버리고 근대주의를 종결시킨다."(162-4)


"탈근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그들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말로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종말들의 종말을 고했다─즉 종말을 고하는 방식들의 종말이자, 훨씬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비판들이 한층 더 정신없이 빠르게 교체되는 연속성에 이르는 이행 방식들의 종말이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postmods'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진정으로 이 종말을 확고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이 종말을 즐긴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보드리야르와 리오타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렇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드리야르가 항변하듯이 그들을 이번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잠들어 있게 놔두고 우리는 갈 길을 가도록 하자. 즉 우리의 발걸음을 다시 따라가면서 더 이상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자."(164-5)


"니체가 오래 전에 관찰한바, 근대인은 역사주의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간직하고 모든 날짜를 기록하고자 한다. 그들이 더 많은 혁명을 축적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아낄 수 있고, 그들이 자본화를 더 심화할수록 그들은 박물관마다 더 많은 것들을 전시하게 된다. 광적인 파괴는 똑같이 광적인 보존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진정으로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근대의 시간성이 시간의 경과에 그리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과거는 남아 있고 심지어 '회귀'하기까지 한다. 이제 이러한 부활은 근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를 억압된 것들의 귀환으로 취급한다. 근대인들은 이를 의고주의archaism으로 본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암흑기로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180)


"근대인들에게 시간의 화살이란 애매하지 않다. 즉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과거와 단절해야만 하고, 뒤로 가는 선택을 취할 수도 있지만 이미 자신들의 과거와 극단적으로 그 관계를 끊은 근대화의 전위들과 반드시 단절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방적 요구는 지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근대 사상을 조직했다. … 이제 와서야 다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할 수 없는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혁명이며, 그것이 과학, 기술, 정치학이나 철학에서의 혁명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실망스러운 일로 해석할 때, 마치 의고주의가 모든 것을 침범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때, 마치 이미 억압된 재료들을 우리 뒤에 쌓아둘 수 있는 공용 매립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여전히 근대인일 것이다. 우리가 역대의 모든 요소들─오래되고 시대에 뒤쳐진─을 하나의 콜라주로 병치함으로써 이러한 실망감을 극복하려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탈근대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181-2)


"근대인들은 이 왕국을 이해할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준대상들을 단순히 억제하기만 원했다는 듯이 소거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사라지게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되 본격적인 매개자를 단순한 중간적 존재[중간매체]로 전락시킴으로써 그 역할을 제거했다." "그러나 매개자는 본원적 사건이며 번역하려는 대상이나 그 사이에서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존재들을 직접 창조해 낸다. 우리가 단지 모든 행위자들에게 이 매개의 역할을 되돌려준다면 정확히 똑같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바로 그 세계가 근대적이길 그치면서도 결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즉 비근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잃어버린 통일체의 복원을 위해 중간매체를 증식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꾸준히 인정되어왔지만 그 중간매체들이 순수 형태들의 혼합물로 이해되는 한 근대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수 업다. 이 전체 차이는 겉보기에는 사소한 매개자와 중간매체 사이의 뉘앙스 차이에 달려있다."(200-2)


"분기점─그리고 합류점─은 출발점이 된다. 설명은 더 이상 순수한 형태들로부터 현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극단들로 진행된다. 극단들은 더 이상 실재의 결합점이 아니라 무수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결과물이 된다." "우리의 설명을 대상Object과 주체/사회Subject/Society라고 알려진 두 개의 순수 형태들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는데, 이들이 반대로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중심부에서 이뤄지는 실천의 부분적인 정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설명으로 분명 자연Nature과 사회Society를 획득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최종 결과물로서이지 기원으로서가 아니다. 자연도 공전公轉을 하지만 주체/사회를 그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 자연은 사물과 인간을 생성하는 집합체 주위를 선회한다. 주체는 공전하지만 자연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인간과 사물이 발생하는 집합체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마침내 중기 왕국이 표상/대표된다. '자연들'과 '사회들'은 이 왕국의 위상들이다."(202-4)


# 매개(mediation) : 매개란 기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혹은 하이브리드와 하이브리드)를 연결하여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라투르는 이를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정화(purification) : 매개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연결망으로서 존재하는 하이브리드, 즉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체가 분할되고 절단되며 순수한 주체와 대상, 사회(혹은 문화)와 자연이 추출된다.


"모든 매개자에게 자연과 사회 속에 구속되어 있던 존재[의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의 경과는 다시 한 번 쉽게 이해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자연과 사회의 극단들 사이에 갇혀있어야만 했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세계에서 역사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은 단순히 발견되거나 사회는 전개되거나 무엇이던 다른 것에 적용될 뿐이었다. 현상이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과의 조우에 불과했다. 우연적 역사란 것이 분명 존재하였지만 인간에게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자연적 사물들의 필연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우리가 중간에서 출발하자마자, 이 중간매체를 완전히 성장한 매개자의 신분으로 격상시키자마자 비로소 역사가 실제로 가능하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 보일에게도, 공기의 탄성에도, 진공에도, 공기 펌프에도, 왕에게도, 홉스에게도 무언가 실제로 일어난다. 이들은 모두 변화한다. 역사는 더 이상 사람들people의 역사가 아니라 자연 사물들의 역사도 된다."(209-10)


4장 상대주의


"절대적 상대주의는 독립되고 통약불가능하며 어떤 형태의 위계에도 편입되지 않는 문화들을 가정한다. 이들은 자연을 판단에서 제외하므로 이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보다는 덜 명확한 문화적 상대주의의 경우에는 유일한 자연이 중요한데, 그러한 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작업, 사회, 구축활동, 동원, 연결망을 전제조건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아직 과학의 작업이 사람들의 관심영역밖에 머무르는 이유는 인식론에 의해 재검토와 수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유일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속되는 한 문화들은 저 유일한 자연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성을 지닌 너무나도 많은 관점들에 모두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특정 문화에 종속되지 않는 유일한 자연이 등장하게 되면 제3의 모델이 언제나 몰래 사용된다. 이 보편주의를 나는 '특수'하다고 부를 것이다. 오직 한 사회─그것은 언제나 서양이었다─만이 타자들의 위치를 포함하는 유일한 자연이라는 일반적 틀을 정의한다."(263-5)


"모든 자연들-문화들은 이들이 동시에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들을 구성해 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만 알려져 있는 외부적인 유일한 자연에 자의적으로 씌워진 기호나 상징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어느 '자연들-문화들'도─특히 서양의 경우─사물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 모든 자연-문화들은 기호를 담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한다.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인간적 집합체들과 이를 둘러싸는 비-인간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집합체들을 구성함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조상을 동원하고, 다른 종족들은 사자, 항성, 혹은 제물의 응고된 피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서구의 경우에는 유전학, 생물학, 천체물리학, 혈액의학 등을 동원했던 것뿐이다." "문화상대주의로부터 출발해 이제 우리는 '자연'상대주의로 나아간다. 전자는 우리를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이끌었지만, 후자를 통해 우리는 다시 상식으로 복귀할 수 있다."(266-7)


"모든 집합체들은 서로 달라서 존재자들을 각자가 부여하는 속성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들이 용인한 동원 과정 속에서 나누어 버린다." "상대주의자들은 모든 문화들이 하나의 자연 세계에 대해 각자의 자의성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봄으로써 이 문화들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애쓰지만 이러한 과정의 산물은 설명되지 못한다. 따라서 상대주의자들은 서로를 지배하려는 집합체들의 노력을 고려하지 못한다. 반대로 보편주의자들은 집합체간의 뿌리 깊은 동질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서양인들에게만 자연에의 접근권을 부여하고 모든 타자들을 사회적 범주들 속에 속박시키기 때문이다. 타자들은 오로지 과학적 사고를 하거나 근대적 또는 서구적이 되어야만 이 범주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훌륭한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거나 효율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합체 생성에 참여하는 비-인간적 요소들을 배가시키고 우리가 이들을 재료로 삼아 만드는 공동체를 보다 친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68, 271-2)


# 집합체(collective) : 기존의 공동체(community)를 대체하기 위한 개념. 공동체란 (자연, 대상, 사물과 분리된) 사회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인간 주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집합체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를 포괄하는 집단, 사회, 혹은 공동체의 개념이다.


"나선형의 확장, 그것으로 촉진될 참여, 과학기술이 이 존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한히 확장하는 거리가 바로 근대적 과학의 특징이지, 결코 과학 이전 시대로부터의 완전한 어떤 인식론적 단절이 아니다. 근대적 지식과 권력이 특이한 것은 사회적인 것의 전제로부터 마침내 탈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연결 관계를 재구성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하이브리드들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기 펌프 뿐만 아니라 세균, 전기, 원자, 항성, 이차방정식, 인조인간과 로봇, 풍차와 피스톤, 무의식과 뉴런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에게 과학과 기술은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에게 자연이 더 이상 사회구조를 반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더 이상 거울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 문제는 점점 커지는 규모로 집합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물론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규모의 차이일 뿐이다. 자연적인 차이는 없다─문화적으로는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272-3)


"근대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은 개인 상호간의 접촉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무르거나 갑자기 '거시적' 차원으로 이동해 '탈맥락화'되고 '탈개인화'한 합리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단절한다. 영혼이 제거되고 구체적인 행위자가 부재한 관료제가 존재한다는 신화는 순수하고 완벽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나 보편적 과학 법칙이 존재한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의 판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세계로,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간의 세계로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실천과 도구, 서류와 번역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끈이다. 조직이나 시장, 제도는 조잡한 국지적 지상세계의 관계들을 재료로 삼아서 만들어진 천상의 대상이 아니다. 조직, 시장, 제도는 하이브리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서 수많은 객체들을 동원해야 한다." "국지적, 세계적이라는 양 극단보다는 우리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중간의 배치들이 훨씬 흥미로운 주제이다."(300-2)


"우리가 근대 세계를 포기한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어떤 본질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의 과정, 하나의 운동, 하나의 이행, 문자 그대로 공놀이에서 말하듯이 누군가에게 패스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속되고 위험한─위험하기 때문에 연속적인─존재로부터 기원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변성이 아니라 현존의 상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매듭vinculum 그 자체, 수많은 통로와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합적인 동시에 실재하고 담론적인 이 관계와 무관한 출발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나 언어라는 더 최신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의미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는 동일한 세계로서, 번역의 세계이고 교체의 세계이며 이행의 세계이자, 위임의 세계이기도 하다. 모든 영속성, 견고성, 영구성은 그것의 매개자들에 의해 대가가 지불될 것이다."(318-9)


5장 재분배


"우리는 먼저 인간, 즉 인간주의가 충분히 공정하게 대하고 있지 않은 인간의 위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인간을 위치시켜야 하는가? 준대상과 준주체의 역사적 연쇄 속에서 인간을 우리가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하나의 본질로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인류학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것을 하나의 최종적인 정의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영리한 시도, 즉 인간을 의미의 진공상태인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자유로운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모든 준대상에 대해 행위, 의지, 의미, 심지어 언어능력까지 허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다면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특정한 과학 분양의 특정한 결과를 찾음으로써 뉴런, 충동, 이기적 유전자, 기본적 욕구, 그리고 경제적 계산으로 움직이는 이 로봇에 옷을 입혀야 한다면 우리는 결코 괴물들과 가면들의 수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336-8)


"우리는 엄숙하게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고 따라서 인간을 언어 게임이나 모든 지성 작용을 빠져나가는 비인간적 구조의 일시적인 반영으로 분해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에 속하기 보다는 담론에 더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을 자신의 내부로 분해시키고 인간의 죽음을 선언할 만큼 충분히 비인간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기에는] 인간의 의지, 인간의 행위, 인간의 말은 너무나 풍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저 자연일 뿐인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킬 인간에 대한 초월적인 정의를 통해 문제를 회피해야만 할까? 이는 근대성의 헌법의 한 극으로 후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인권선언이나 헌법 전문들에 기입된 어떤 임시적이고 특수한 정의를 확장하도록 힘을 행사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두 번의 대분할을 다시 한 번 따라가는 것이며 또한 근대화를 믿는 일이 될 것이다."(339)


# 제1 대분할은 내적 분할로서, 우리(서구인) 안의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는 것이며, 제2 대분할은 외적 분할로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준대상들을 표상하는 데 전념해왔다. 따라서 반드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은 근대성의 헌법이 보장하는 사항─권력분립, 즉 정부의 두 부문이 분리된 상태, 그리고 정확하게 구획된 상태─인데, 그것이 근대인들의 분석의 연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회는 구분할 수 있는 양극이 아니라 사회-자연들의, 그리고 집합체들의 연속된 상태의 동일한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초안의 첫 번째 보장사항은 준대상, 준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이 될 것이다. 집합체들의 연속적인 배치를 방해하는 모든 개념, 제도, 실천들, 그리고 그것들에 입각한 하이브리드들에 대한 실험은 위험하고 해롭고─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텐데─부도덕한 일이 될 것이다. 매개 작용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이중의 권력의 가장 중심이 될 것이다. 연결망은 은신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중기왕국은 대표/재현될 것이며, 제3신분, 즉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들은 이제 전부가 된다."(345-6)


# 근대/비-근대의 헌법


1. 근대적 헌법 : 자연은 초월적이지만 동원가능하다(내재적이다). / 비근대적 헌법 : 자연과 사회는 사회-자연들의, 집합체들의 연속된 상태의 동일한 산물이다(준대상, 준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

2. 근대적 헌법 : 사회는 내재적이지만 우리를 능가한다(초월적이다). / 비근대적 헌법 : 객관적인 자연의 산출과 자유로운 사회의 산출에 대한 계속되는 추적. 마지막 분석에서는 결국 자연의 초월성과 사회의 내재성이 존재하지만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3. 근대적 헌법 : 자연과 사회는 전적으로 구분되며 정화작용은 매개 작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비근대적 헌법 : 자유는 더 이상 동질적인 시간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 하이브리드들의 조합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 된다.

4. 근대적 헌법 : 소거된 신은 완전히 부재하지만 정부의 두 부문 사이의 중재를 책임진다. / 비근대적 헌법 : 하이브리드들의 산출은 표면적이고 집합적인 성격을 갖게 되면서 하이브리드의 산출의 박자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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