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티모시 메이슨 지음, 김학이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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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게 노동계급은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 정치 세력(러시아 11월 혁명)이자 반전운동과 태업으로 민족의 등에 칼을 꼽은 배신자(제1차 세계대전)였다.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감으로 단호하게 무장한 나치는 혼란한 사회상에 지친 중하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선동과 테러를 자행하여 노동계급을 타격했으며, 집권 후에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을 소거하고 생산기계로서의 역할만을 남기고자 조직개편과 정신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나치는 곧 자신들의 궁극목표인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총력전 준비가 불가피하며, 일방적인 탄압과 강제로는 노동계급의 지지와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당혹스런 모순에 직면했다. 당과 정부에 혼재된 기관들이 현실 조건을 고려한 군수정책을 패배주의로 몰아세우면서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를 강조했지만, 비체계적이고 즉흥적인 정치 세력들간의 분열과 요구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공간을 넓혀주었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은 군수 산업에서 완전 고용을 이루어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된 1936년 이후에 한층 강화되었다. 물론 이때의 자율성은 어디까지나 정치성을 제거한 자유이며, "기쁨에 의한 힘"이 주도하는 휴가 및 복지 정책, 임금 인상의 형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주의에는 자신들의 세계관에 동조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쟁 잠재력을 부단히 훼손하는 노동계급을 길들일만한 처방이 없었다.




역사가 가르치는 대로 하자면, 한 번 더 등에 칼을 맞지 않게 위해서는 우선 노동운동을 파괴하여야 하였다. 즉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당직자들을 제거하고 그 조직들을 과격하게 억압하여야 하였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애국적"이지만, 다른 한 편 더 할 수 없이 "맹신적인" 독일 노동자들을 "11월의 범죄자들"의 해체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미구의 전쟁 수행을 위하여 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이다. 17-8)

히틀러는 1920년대 말에 단기적으로는 "통일적인 세계관"이 전쟁 준비의 현실적인 토대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그 세계관 속에서 물질적인 개선의 전망이 확실할 경우에만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26)

나치스 당이 지역적 차원에서 급성장 하였던 것은 나치스가 부르주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리라는 전망 덕분이었다.
...
바이마르 헌법은 1920년대의 노동운동에게 국가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 행사를 보장하였는데, 이제 확증되어야 할 것은 미래에는 노동운동에게 그러한 제도적 공간을 절대로 또 다시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69)

나치스 고용창출정책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우선시하였다는 것은 나치스 정부가 새로운 조치의 통계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기계의 사용을 가능한 한 억제하였다는 사실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1933/34년의 건설과 관개 사업은 원칙적으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이루어져야 했다. 이때 생산성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119)

나치스 집권 이후 호황 산업의 임금 인상이 상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판단에서는 헤센 지역 노동신탁위원이 집권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의 노동자들의 분위기에 대해서 내린 평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겉으로 조용한 것은 "진정으로 만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체념하고 포기해서"라는 것이다. 143-4)

요컨대 노동력 부족은 군수 4개년계획을 실천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1940년 중반까지의 군수 정책의 특징은 생산 애로가 빈발하고, 다수의 과제가 미해결된 채 방치하고, 전쟁 준비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전쟁에 대비한 물자의 비축에 빈약한 상태에 머무르던 것에 있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독일 공업의 노동력 부족이었던 것이다. 191)

나치스 지도부는 어렵기만 하고 인기는 없는 과제를 맡을 의도도 없었고, 희소 자원에 대한 군대와 경제계의 상충되는 요구들을 중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방기적 태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듯 요구가 상충될 때에는 그 결정을 관련 기관들의 자연적인 투쟁 과정에 맡겨버리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였다. 225)

1941년 6월 현재 독일의 공업과 농업에서 극악한 임금을 받거나, 혹은 아무 보상도 없이 노동을 하고 있던 15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 및 130만 명의 전쟁포로가 없었더라면, 독일에는 두 개의 길, 즉 독일군이 패배하거나 아니면 독일인들이 과격한 강제조치를 감내하는 것 이외에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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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과학자들 - 과학, 전쟁 그리고 악마의 계약
존 콘웰 지음, 김형근 옮김 / 크리에디트(Creedit)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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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윤리의 문제를 4가지 태도로 분류해보자.

1) 과학은 상급단체(국가, 기업)의 지원 의도가 연구의 본질과 무관할 때, 그들과 결별을 단행해야 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빌란트)
2) 과학은 상급 단체의 압력에 취약하며, 과학자는 그 부작용을 교정할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오토 한, 닐스 보어)
3) 과학은 도덕 중립적인 기술이므로 과학자들은 외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베르너 폰 브라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4) 과학은 자신의 연구를 지원하는 상급단체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해야 한다. (프리츠 하버, 에드워드 텔러)

굳이 '과학'의 범주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권력이 압력을 가할 때, 우리는 실천 저항형, 내면 갈등형, 세속 도피형, 적극 협조형으로 나뉜다. 1번이 가장 윤리적이며, 권장할만한 태도라면, 4번은 가장 비도덕적이며, 불길한 파우스트적 태도이다. 2번과 3번은 색깔이 분명하지 않으며, 둘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2번에 정착하는가, 3번에 정착하는가는 천양지차다.

둘의 차이는 외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무엇이 발생하며, 누구의 처지가 위협받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주변에서 혹은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벌어질 때 눈과 귀를 여는가에 있다. 한 인간의 나약함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의 속내이지만,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사소한 불편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처할 때, 그 사태를 직시하는 자는 체제에 균열을 내는 반면, 그 사태를 외면하는 자는 체제의 의도를 완벽하게 수행한다.

타락한 체제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좁다.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은 악마의 수행원 노릇을 자처했지만, 그런 행태가 나치 독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히틀러에 맞선 빌란트의 용기와 스탈린에게 굴복하지 않은 사하로프의 지조는 아름답지만, 그들의 동료 대부분은 탄압받거나 수용소 신세로 전락했다. 민주 체제는 로트블라트가 결연한 태도로 텔러를 비판할 수 있는 광장을 제공해주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프리츠 하버는 20세기 초의 전쟁 규칙을 가차없이 어겼다. 하버뿐만이 아니다. 하버의 무기 개발을 재빨리 답습한 영국의 J. B. S. 홀데인 같은 독가스 과학자들은 새로운 무기를 사용하면 전쟁에서 순식간에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하버는 가스 전쟁을 가리켜 "고차원적 형태의 살인"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가스에 의해 다치는 것이 재래식 폭탄에 의해 다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믿었다. 80)

하버는 또한 시안화수소산 개발을 부추겼다. 당시 시안화수소산은 두 가지 용도로 쓰였다. 살충제로도 쓰였지만, 밀폐된 공간에서는 치명적인 독가스가 되기도 했다. 이 독극물은 후일 `자이클론 B`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유태인을 죽이는 강력한 무기로 등장한다. 87)

노이만은 나치 독일을 독재자의 엄격한 통치 아래서 운영되는 정권으로, 지도자(Führer)가 아니라 권력의 블록들이 담합하는 베헤못(Behemoth) 혹은 비국가로 묘사했다. 다시 말해 군대와 대기업, 정부와 당의 과두 정치적 연합으로 보았다.
이 담합의 멤버들은 어떤 때는 서로 협력했지만 대개의 경우 충돌했다. 결국 권력의 블록들은 히틀러의 인기를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마치 "바퀴통 주변의 살과 같았다". 300)

(IBM 설립자) 허먼 홀러리스는 곧 자신이 만든 기계가 인간보다 수천 배나 빨리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기계는 미국 정부의 인구 통계 조사 비용을 500만 달러나 줄여주었으며 오늘날에도 회계, 엔지니어링, 과학적인 보험 통계 분석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IBM이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홀러리스 기계는 암호 해독과 같은 작전상의 전쟁 준비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집단 처형장으로 데려갈 예정인 유태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구별하는 작업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될 것이었다. 358-9)

나치 과학자로서 전후 자신들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국 및 미국의 민주주의와 소련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판단하는 기준이 절대로 양 진영 간의 도덕적 우위 비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은 어느 편이 더욱 자신들의 자유로운 과학 활동을 보장해주어, 정직한 사회 기반 위에서 자신들의 연구 업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과연 어느 편이 자신들의 연구 프로그램에 더 많은 돈을 대주고, 과학자로서 신분과 지위를 보장해줄 것인가였다. 504)

1946년 3월, `페이퍼클립 프로젝트`가 오버캐스트 프로젝트를 대체했다. 새 프로젝트는 적국 독일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장기적으로 활용하고, 나치 전범 처리에 관한 트루먼 대통령의 원칙을 강화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독일 과학자들은 나치와의 협력이나 동조 여부와 관계없이 선량한 이민자로서 대우받아야 하며, 미국 입국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527)

많은 과학자가 로스앨러모스에 모인 공식적인 동기는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핵무기 사용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전을 불과 몇 개월 앞둔 12월, 히틀러가 이런 폭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로스앨러모스 그룹에서 탈퇴한 과학자는 오직 한 사람, 바로 요제프 로트블라트 뿐이었다. 그는 핵무기 개발의 유일한 도덕적 근거는 전쟁 억지력에 있으며, 이 목적이 달성되면 핵 프로젝트는 당장 폐기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538)

요제프 로트블라트는 텔러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론적으로 반박했다. "지식 획득이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을 압도한다는 근본적인 생각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요제프 멩겔레도 자신이 추진한 각종 연구가 새로운 지식을 제공한다는 구실로 아우슈비츠에서의 `실험`을 정당화했다."
...
"지식 획득보다 우위에 선 다른 원칙이 있다. 바로 인도주의적 원칙이다. 과학자들은 항상 자신이 우선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하며 과학자라는 직업은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원칙은 때때로 지식 획득에 제한을 가할수도 있다."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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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1~6 세트 - 전6권
최규석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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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형인 한국 문학의 탁월한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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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파시즘 -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 철학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 김석근 옮김 / 가람기획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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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신주의의 논리적 귀결을 제1차 세계대전과 결부시켜 재구성한 텍스트"

사상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정신', 특히 '언어로 만들어낸 정신'이다. '언어'는 현실에 바탕을 두지만, 현실에 앞선 것처럼 자신을 꾸미며, 대개 그럴 듯한 얼굴을 지닌다. 언어는 빈약한 조건을 딛고 일어서는 정신 승리도, 체계적인 물질적 지원에 힘입은 성취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능숙하다.

주체와 객체의 배치와 구도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언어'만 강조하면 모든 사상이 실현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현실화 할 수 있는 사상'을 '현실화된 세계'에 투영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그 실현을 최대한 빨리 이루고자 한다. 자신의 한정된 수명 동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의 단초를 만들고 싶어한다.

지름길은 낙오자와 반대자라는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길이며, 그만큼 빨리 광신과 아집으로 달려가는 길이다. 광신도들은 자신을 희생으로 내몰지 않는다. '패배'라는 비참한 최후가 결정나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방법만 있다면 '옥쇄'와 '가미카제'는 다수의 몫이다. 그들은 다수의 피땀으로 불가능에 도전한다.

그들은 기꺼이 다수의 발을 늪에 밀어넣지만 자신의 헌신은 오직 '정신'으로 무장한 '언어'이며, '의지'만을 허락한다. 그는 몸부림칠수록 늪에 빠진 자의 죽음이 빨리 다가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부림을 요구한다. 그가 자발적으로 돌아나오는 길은 인민의 시체로 막혀 있다. 전쟁은 가장 매혹적인 역사의 비극이 된다.




일본 기업의 불입(拂入) 자본 총계는 1913년에는 20억 엔이었는데, 1차대전 시기 일본 기업의 신규투자액 총계는 무려 143억 엔에 이르고 있다. 경제 규모가 가파르게 수직상승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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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주식시장은 언제나 강화(講和)를 싫어했으며 그런 소문이 나돌 때마다 주가는 내려갔다. 군수 경기가 언제 중지될지 전전긍긍하다가 전쟁이 계속될 것 같으면 다시 올라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32-3)

(러일전쟁 당시) 메이지 후반 일본의 공업생산력이나 자금력으로는 러시아의 대군, 뤼순의 요새를 상대로 탄환을 마구 퍼부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새 공략전에서도 직접 전투에서도 인명을 경시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맹목적인 돌격에 의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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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몸을 아끼지 않는 정신주의, 혼(魂)의 돌격, 육탄(肉彈)이었다. 78)

(1926년의 <통수강령> 개정안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속전속결의 섬멸전으로 단숨에 결정한다. 천우신조로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는 승기를 절대 놓치지 않고 적을 궤멸시킨다. 그런 전쟁 지휘를 하고 싶을 때 외교 따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장수의 독단전행을 인정하지 않으면 적의 의표도 찌를 수 없다. 정치를 무시하고 군대가 마음대로 하게 해달라는 식의 바람을 읽어낼 수 있다. 135-6)

오바타는 1931년 만주사변에서의 이시와라의 근사한 작전 지도에 의한 속전속결을 `갖지 못한 나라`의 이상적인 전쟁으로 극찬했다. 그러면 이시와라는 왜 만주사변을 일으켰는가. 만주를 하나의 큰 산업기지로 삼아서, 가능한 한 빨리 `갖지 못한 나라`를 `가진 나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160)

옥쇄(玉碎, 쿄쿠사이)는 섬멸을 뒤집은 개념, 말하자면 섬멸당하는 것이다. 섬멸전에 실패해서 불리하고 열세의 입장에 내몰리더라도 `필승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퇴각이나 항복이라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옥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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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강약 정도에 따라서 섬멸 정신이 쉽게 옥쇄 정신으로 뒤집혀버리는 것이다. 171)

일본 국민이라는 `다`에게 천황이 `일`이라면, 천황이 자신의 본질이므로, 천황만 살아 있으면 개개의 일본인이 아무리 죽더라도 자신의 본질이 살아남는 것으로 되므로, 자신이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된다. 천황이 죽으라고 말하면, 자신의 의사(意思)로 죽는 것이다.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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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개정판 문제적 인간 4
로버트 서비스 지음, 윤길순 옮김 / 교양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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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낳은 혼돈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신의 눈 앞에 놓인 허술한 병영 국가 - 체제 수호 능력이 부족한 - 를 개조하는 작업에 열렬히 착수했다. 그의 무자비한 행보는 1941년 독소전 발발과 더불어 실질적 병영 국가 - 체제 수호 열의에 휩싸인 - 건설로 불타올랐으며, 전후에도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불멸의 전쟁에 대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의 죽음만이 그의 불안을 잠들게 했지만, 그가 남긴 '공포 정치'와 '개인 숭배'의 유산은 그의 조국만이 아니라, 그 자장 안에 머물러 있던 주변국에게도 무기력한 병영 국가 - 체제 수호 의지가 고갈되어버린 - 를 '잿더미의 유산'으로 남겼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1871년에 파리 코뮌이 실패한 이유가 무자비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탓이라고 믿었다. 볼셰비키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사 혁명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도 그들은 늘 불에는 불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있어 스탈린에게는 다른 사람의 설득이 필요가 없었다. 258)

스탈린은 러시아 곳곳에서 음모가 횡행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그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 때에도 음모가 존재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탈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
스탈린의 사고방식으로는 일이 잘못되면 늘 일부러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심지어 모스크바에 있는 여러 인민위원회의 지도부에도 반역자가 존재해야 했다. 275-6)

산업화와 학교 교육, 도시 건설, 사회주의 사상의 주입을 서둘러야 했다. 국가는 모든 일에 좀 더 속속들이 개입해야 하고, 종교와 민족에 대한 전통적인 애착은 사라져야 했다. 소련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군사 강국으로 변해야 했다. 408-9)

그는 자기 개인의 안전과 그의 정책, 지도부, 국가의 안전을 구분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말년에 스탈린이 전쟁이 일어나면 `제5열`이 침략세력을 지지할까 봐 두려워했고 그러한 두려움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1936년 7월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프랑코(1892~1975) 장군이 쉽게 추종자를 얻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소련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이런 생각은 국가 테러의 효능을 믿었던 그가 왜 느닷없이 1937~1938년에 대대적인 탄압으로 돌아섰는지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536)

그는 정치 경제적 변화를 가져온 주요 지렛대로서 국가를 강화했다. 그는 한 번도 인민의 자발적인 잠재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이 체제를 지지하고 몸이 닳도록 죽도록 일하고 `적`을 비난하기를 바랐다. 그는 수용소와 처형의 효율성에 기뻐했다.
...
스탈린은 자신이 건축한 것을 스탈린주의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575-6)

(개인) 숭배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라는 신념 체계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교리도 없었지만, 신자들은 공식적인 용어와 형상에 충실해야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같은 책은 복음서 구실을 했고, <단기 과정>과 스탈린의 공식 전기는 <사도 행전>과 같았다.
...
중세 기독교와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혼합물이었다. 820)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죽었을 때 소련 인민들이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를 존경했고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군사적 승리를 거둔 자랑스러운 소련을 상징하는 존재였고, 급속한 산업 발전과 문화적 진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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