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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개정판 ㅣ 문제적 인간 4
로버트 서비스 지음, 윤길순 옮김 / 교양인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낳은 혼돈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신의 눈 앞에 놓인 허술한 병영 국가 - 체제 수호 능력이 부족한 - 를 개조하는 작업에 열렬히 착수했다. 그의 무자비한 행보는 1941년 독소전 발발과 더불어 실질적 병영 국가 - 체제 수호 열의에 휩싸인 - 건설로 불타올랐으며, 전후에도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불멸의 전쟁에 대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의 죽음만이 그의 불안을 잠들게 했지만, 그가 남긴 '공포 정치'와 '개인 숭배'의 유산은 그의 조국만이 아니라, 그 자장 안에 머물러 있던 주변국에게도 무기력한 병영 국가 - 체제 수호 의지가 고갈되어버린 - 를 '잿더미의 유산'으로 남겼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1871년에 파리 코뮌이 실패한 이유가 무자비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탓이라고 믿었다. 볼셰비키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사 혁명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도 그들은 늘 불에는 불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있어 스탈린에게는 다른 사람의 설득이 필요가 없었다. 258)
스탈린은 러시아 곳곳에서 음모가 횡행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그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 때에도 음모가 존재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탈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 스탈린의 사고방식으로는 일이 잘못되면 늘 일부러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심지어 모스크바에 있는 여러 인민위원회의 지도부에도 반역자가 존재해야 했다. 275-6)
산업화와 학교 교육, 도시 건설, 사회주의 사상의 주입을 서둘러야 했다. 국가는 모든 일에 좀 더 속속들이 개입해야 하고, 종교와 민족에 대한 전통적인 애착은 사라져야 했다. 소련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군사 강국으로 변해야 했다. 408-9)
그는 자기 개인의 안전과 그의 정책, 지도부, 국가의 안전을 구분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말년에 스탈린이 전쟁이 일어나면 `제5열`이 침략세력을 지지할까 봐 두려워했고 그러한 두려움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1936년 7월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프랑코(1892~1975) 장군이 쉽게 추종자를 얻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소련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이런 생각은 국가 테러의 효능을 믿었던 그가 왜 느닷없이 1937~1938년에 대대적인 탄압으로 돌아섰는지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536)
그는 정치 경제적 변화를 가져온 주요 지렛대로서 국가를 강화했다. 그는 한 번도 인민의 자발적인 잠재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이 체제를 지지하고 몸이 닳도록 죽도록 일하고 `적`을 비난하기를 바랐다. 그는 수용소와 처형의 효율성에 기뻐했다. ... 스탈린은 자신이 건축한 것을 스탈린주의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575-6)
(개인) 숭배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라는 신념 체계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교리도 없었지만, 신자들은 공식적인 용어와 형상에 충실해야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같은 책은 복음서 구실을 했고, <단기 과정>과 스탈린의 공식 전기는 <사도 행전>과 같았다. ... 중세 기독교와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혼합물이었다. 820)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죽었을 때 소련 인민들이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를 존경했고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군사적 승리를 거둔 자랑스러운 소련을 상징하는 존재였고, 급속한 산업 발전과 문화적 진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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