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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평점 :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면 본래 천자와 신하들 사이에만 존재하던 군신관계가, 효렴孝廉이라는 관료 추천을 통해 관계에 입문한 유학생과 지방관 사이에도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성립된 군신 관계는 "가정도덕인 효행보다도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개인이 입신출세하는 것이 일족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설령 불행하게 자신 또는 그 일가가 멸망하는 비운을 당해도, 그의 충성이 조정에 인정되면 나머지 일족이 영예를 받고 특전을 향유했기 때문이다."(24-5) 이는 통일왕조가 무너지면서 보편 원리의 사적 전용轉用이 시대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징후였다.
도의가 무너진 자리를 이윤 추구가 파고들었다. 난세에 이르러 부자들이 동전을 수중에 넣고 시장에 내놓지 않자, "전납錢納으로 부賦를 부담"해야 했던 농민들은 본적지에서 도망하여,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객客으로 떠돌았다. 이들은 "큰 도시로 들어가 날품팔이 인부가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원에 들어가 예농隷農"(34) 신세로 전락했다. 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룬 위魏는 구품관인법을 도입하여 재능있는 인물을 등용하고자 했지만, 태평성대를 마음껏 누리려는 귀족층은 이를 문벌 자제들의 출세 수단으로 악용했다.
통일을 이룬 조씨 일가의 위 왕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진晋왕에 봉해진 사마씨 일가는 조씨 일가가 예정된 각본대로 한 왕조를 선양禪讓받은 것을 모방하여 무력으로 왕조교체를 이루었다. 진무제는 위왕조가 일족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배척하여 자신들에게 왕조를 탈취당한 것을 거울삼아, "그 반대되는 정책을 취해 대대적으로 봉건을 행해서 일족의 자제에게 영토를 분배했다." 그러나,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들은 왕조의 기대와 달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에 호소"했으며, 곧 팔왕의 난이라는 일족간의 살인극을 벌인다.(97-8)
팔왕은 장래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진의 영토 안에서 머무르던 이민족들은 "문명화한 숙번(熟蕃, 정부당국에 잘 순응하는 야만인)"이었고, 중국적 교양을 어느정도 체득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자립하자, "부패한 중국정권보다 소박한 이민족 정권"(104)을 선호한 서민은 물론 지식계층이 자진하여 그들의 휘하로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125)
"이른바 오호五胡시대에는 화북 중원지방에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이동하여 우왕좌왕하는 한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이 만리장성 저편으로부터 중국으로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다."(207) 격렬한 이민족간의 투쟁을 진압하고 동화 정책을 편 북위의 효문제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도도한 기세로 한화韓化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합을 모색한 한화정책이 의도와 달리 "중국사회의 산물이던 귀족제도를 되살려 관리 선임에 가문의 등급을 중시"(224)하는 풍토를 되살리자, 왕조 방위에 중심축을 담당하는 선비족 군인집단이 소외되어갔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언제 발생할 지 모르는 북방기병의 습격에 대비"하는 무천진의 장군과 사병들은 각별한 동료애를 품은 결속력 강한 집단이었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뒤, 북변의 육진은 관계가 끊어져 방치되고 그 지위가 점점 저하"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군벌 투쟁을 종식시키고 대륙을 석권한 것은 수 문제隋 文帝였다. "그는 종래의 구품관인법이 귀족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제도로 타락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중앙 정부에서 시험을 행하고, 급제자에게 고위관직에 오를 자격을 내리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기했다.(258)
수 왕조는 남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 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대륙 통일을 이루었지만, 무리한 토목 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막대한 고통에 시달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 왕조를 대체한 당唐은 한제국의 재건으로 간주되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한대에는 "귀족과 서민을 하늘로부터 부여된 본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유품'流品 사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서민에서 개인의 실력으로 조정 대신으로까지 출세하여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대에 재차 성행한 귀족주의는 서민이 관료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286)
"보통의 왕조라면, 안사의 난과 같은 대란을 겪고 난 뒤 곧 멸망해 버리고" 대륙은 다시금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당왕조는 거듭된 내란으로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으면서도 150여 년 정도를 여전히 존속했다." 그것은 당 왕조가 재정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종래의 왕조가 거의 예외없이 무력으로 지탱되었던 무력국가인 것에 반하여, 재정국가는 소금 전매 같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선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을 충족시켜"(313)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국제 교역에 힘입은 근세적인 상공업 도시의 발달도 한몫을 담당했다.
재정 정책은 왕조의 생명을 이어가는 극단적인 처방으로서, 당왕조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큰 희생을 초래했다. "일상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소금에 몇 십배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억지정책이었다."(328) 국가 전매제가 영속화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밀수를 감행하는 집단이 대거 생겨났고, 이들은 곧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마침내 주전충이 환관과 관료들을 대량 살육한 후에, 천자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後梁을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은 (또다시) 단명왕조가 잇따라 일어나는 오대五代의 분열시대로 접어든다."(336)
저자는 후한 말부터 송 왕조 이전까지를 중국 중세로 정의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운명과 이유 없는 재앙"(348)이 끝없이 이어지는 '대분열'과 '혼돈'이다. "힘이 만사를 결정하고, 권력관계만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잣대였기 때문에, "강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고, 일단 권력을 잃으면 이제까지의 응보를 일시에 받는"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 때마다 몇 십배 몇 천배의 사람이 죄없이 희생자가 되는 구조가 짜여져 있었다."(349) 송 왕조가 문치文治를 내세운 것이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