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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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실질은 대립하는가? 법法이라는 형식은 현실이라는 개별 사태를 최대한 포괄하려는 누적적 시도이지만, 언제나 현실에 후행한다.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사태를 기존의 형식으로 재단하는 일은 한계가 뚜렷하며, 둘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은 손에 닿으면 흩어지고 마는 신기루를 붙잡는 것처럼 지난한 과정이다. 새로운 사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단과 해석이라는 설명을 넘어 그 의의를 담아낼 수 있는 설명모형을 수립하고자 노력하는 일이며, 형식과 실질간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부단히 미지의 영역으로 전진하는 일이다. 이는 형식과 실질이 균형 잡힌 속도와 크기로 함께 자라도록 돌보는 일이며, 기존의 판단 근거에 매몰된 정신을 깨우는 일이다. 


형식과 실질 사이는 선 하나로 그은 경계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생존 최우선주의부터 공존 최우선주의까지 제각기 삶의 본능과 가치관이 살아 숨쉬며, 때로는 투쟁으로, 때로는 화합으로 생태계를 조성하는 너른 회색지대가 펼쳐져 있다. 저자가 정리한 10가지 쟁점 역시 두 개의 강고한 입장이 맞부딪힌다기보다는 각자의 의견 아래 별개의견과 보충의견이 달리고, 반박과 재반박이 허용되는 살아 있는 논쟁의 표본들이다. 숙고로 판결에 참여하고, 성찰로 쟁점을 되짚어보며, 집필로 노정을 공유하는 저자의 노력은 독자들 자신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이 작업에 참여할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고 나직하게, 그러나 힘주어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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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7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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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을 수놓은 상인(부르주아)의,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전환기 삶의 여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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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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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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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무렵, 가문에서 개인으로, 귀족에서 시민으로 이행하는 전환기 삶의 여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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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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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시대에 이르면 본래 천자와 신하들 사이에만 존재하던 군신관계가, 효렴孝廉이라는 관료 추천을 통해 관계에 입문한 유학생과 지방관 사이에도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성립된 군신 관계는 "가정도덕인 효행보다도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개인이 입신출세하는 것이 일족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설령 불행하게 자신 또는 그 일가가 멸망하는 비운을 당해도, 그의 충성이 조정에 인정되면 나머지 일족이 영예를 받고 특전을 향유했기 때문이다."(24-5) 이는 통일왕조가 무너지면서 보편 원리의 사적 전용轉用이 시대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징후였다.


도의가 무너진 자리를 이윤 추구가 파고들었다. 난세에 이르러 부자들이 동전을 수중에 넣고 시장에 내놓지 않자, "전납錢納으로 부賦를 부담"해야 했던 농민들은 본적지에서 도망하여,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객客으로 떠돌았다. 이들은 "큰 도시로 들어가 날품팔이 인부가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원에 들어가 예농隷農"(34) 신세로 전락했다. 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룬 위魏는 구품관인법을 도입하여 재능있는 인물을 등용하고자 했지만, 태평성대를 마음껏 누리려는 귀족층은 이를 문벌 자제들의 출세 수단으로 악용했다.


통일을 이룬 조씨 일가의 위 왕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진晋왕에 봉해진 사마씨 일가는 조씨 일가가 예정된 각본대로 한 왕조를 선양禪讓받은 것을 모방하여 무력으로 왕조교체를 이루었다. 진무제는 위왕조가 일족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배척하여 자신들에게 왕조를 탈취당한 것을 거울삼아, "그 반대되는 정책을 취해 대대적으로 봉건을 행해서 일족의 자제에게 영토를 분배했다." 그러나,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들은 왕조의 기대와 달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에 호소"했으며, 곧 팔왕의 난이라는 일족간의 살인극을 벌인다.(97-8)


팔왕은 장래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진의 영토 안에서 머무르던 이민족들은 "문명화한 숙번(熟蕃, 정부당국에 잘 순응하는 야만인)"이었고, 중국적 교양을 어느정도 체득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자립하자, "부패한 중국정권보다 소박한 이민족 정권"(104)을 선호한 서민은 물론 지식계층이 자진하여 그들의 휘하로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125) 


"이른바 오호五胡시대에는 화북 중원지방에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이동하여 우왕좌왕하는 한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이 만리장성 저편으로부터 중국으로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다."(207) 격렬한 이민족간의 투쟁을 진압하고 동화 정책을 편 북위의 효문제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도도한 기세로 한화韓化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합을 모색한 한화정책이 의도와 달리 "중국사회의 산물이던 귀족제도를 되살려 관리 선임에 가문의 등급을 중시"(224)하는 풍토를 되살리자, 왕조 방위에 중심축을 담당하는 선비족 군인집단이 소외되어갔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언제 발생할 지 모르는 북방기병의 습격에 대비"하는 무천진의 장군과 사병들은 각별한 동료애를 품은 결속력 강한 집단이었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뒤, 북변의 육진은 관계가 끊어져 방치되고 그 지위가 점점 저하"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군벌 투쟁을 종식시키고 대륙을 석권한 것은 수 문제隋 文帝였다. "그는 종래의 구품관인법이 귀족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제도로 타락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중앙 정부에서 시험을 행하고, 급제자에게 고위관직에 오를 자격을 내리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기했다.(258)


수 왕조는 남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 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대륙 통일을 이루었지만, 무리한 토목 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막대한 고통에 시달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 왕조를 대체한 당唐은 한제국의 재건으로 간주되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한대에는 "귀족과 서민을 하늘로부터 부여된 본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유품'流品 사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서민에서 개인의 실력으로 조정 대신으로까지 출세하여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대에 재차 성행한 귀족주의는 서민이 관료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286)


"보통의 왕조라면, 안사의 난과 같은 대란을 겪고 난 뒤 곧 멸망해 버리고" 대륙은 다시금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당왕조는 거듭된 내란으로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으면서도 150여 년 정도를 여전히 존속했다." 그것은 당 왕조가 재정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종래의 왕조가 거의 예외없이 무력으로 지탱되었던 무력국가인 것에 반하여, 재정국가는 소금 전매 같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선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을 충족시켜"(313)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국제 교역에 힘입은 근세적인 상공업 도시의 발달도 한몫을 담당했다.


재정 정책은 왕조의 생명을 이어가는 극단적인 처방으로서, 당왕조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큰 희생을 초래했다. "일상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소금에 몇 십배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억지정책이었다."(328) 국가 전매제가 영속화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밀수를 감행하는 집단이 대거 생겨났고, 이들은 곧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마침내 주전충이 환관과 관료들을 대량 살육한 후에, 천자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後梁을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은 (또다시) 단명왕조가 잇따라 일어나는 오대五代의 분열시대로 접어든다."(336)


저자는 후한 말부터 송 왕조 이전까지를 중국 중세로 정의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운명과 이유 없는 재앙"(348)이 끝없이 이어지는 '대분열'과 '혼돈'이다. "힘이 만사를 결정하고, 권력관계만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잣대였기 때문에, "강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고, 일단 권력을 잃으면 이제까지의 응보를 일시에 받는"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 때마다 몇 십배 몇 천배의 사람이 죄없이 희생자가 되는 구조가 짜여져 있었다."(349) 송 왕조가 문치文治를 내세운 것이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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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세오 다쓰히코 지음, 최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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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8~9세기는 하나의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 왕조가 유라시아 대륙의 세 거점을 장악한 시기이다. 크리스트교의 프랑크왕국과 동로마제국, 이슬람교의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 불교의 토번과 당 왕조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교통과 정보망의 개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세계 경제 체제를 형성"하였다.(60-1) 당 왕조는 유목 민족을 두려운 적수이자 격퇴해야 할 야만으로 규정하고 장성을 쌓아 분리하는 데 주력한 진한秦漢 왕조의 두려움을 반복하지 않고, 농목접경선에 사슬처럼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농목 접경 지대는 옛부터 농업과 유목이라는 다른 생업이 연결되는 통로 공간이자, "각 지대에서 생산된 산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여 정보와 부가 집적되는 장소"였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축적된 정보와 부를 보증하고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접경선을 따라 "많은 도시와 정치권력이 발생"했다.(40) 수 왕조의 수도로 출발한 장안은 대륙의 서북 지역에 위치한 농목접경지대에서 세계 경제 체제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농목 복합에 기반을 둔 중국 고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43) 


중국 역사에서 "내중국(중국 본토)과 외중국(만주, 내/외몽골, 신강, 티벳)을 모두 포괄하는 왕조는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이 있으며, "몽골, 신강 전역과 만주 남반부를 통치권에 넣은 당"(74)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장안과 북경이 가장 오랜 기간 왕도王都로 지속한 근본적인 이유는 두 도시가 농목접경선에 있어 왕도의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내중국의 농경 지역에 대한 통치 기능과 외중국의 유목 지역에 대한 외교적 정치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5) 


처음부터 이상理想 도시로 설계된 장안은 "'도시는 대지를 상징하는 네모꼴을 취함으로써 대지를 덮고 있는 둥근 하늘의 중심과 우주축을 통해 연결된다'는 중국의 전통적 도시계획에 기반"(67)하여 네모 형태를 취하였다. 여기에는 "왕도를 하늘이나 신이 정통성을 부여한 도시로 연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명확히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군사력 집중도가 낮은 상황을 상징의 힘으로 극복"(107)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왕도가 군사력에 바탕을 둔 무력 지배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가 통합에 이바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전통 사상에는 "지상에 있는 우주의 거울로 왕도를 건설한다는 천문사상, 왕조 의례의 무대로 왕도를 짓는다는 예사상禮思想, 중국 고래로 <주례>가 제시한 이상 도시의 모델,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 왕자王者에게 적합한 토지인지를 감정하는 역경易經 사상" 등이 속한다.(153)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계 종교인 불교가 비한족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활용되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었다. 전근대에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대상으로 "같은 왕조에 속한다는 공유의식을 형성하면 왕조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108)


왕조 후기로 가면, 당 왕조의 존재는 기성 사실이 되고 "황제, 관료, 서민 모두 충실한 주거환경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세계의 수도를 수놓은 활발한 상업 활동은 도시 기능을 분화시켜, "성 안팎을 무대로 (백성들의 삶에 밀착된) 민간설화가 널리 유행하였다."(216) 공고한 제국 체제가 이완되면서 장안은 "모든 백성에게 무의미하고 무표정하던 건축 당시의 격자형 도시 공간"에서 "주민이 공유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상업 교통로가 안정되고 확대됨에 따라 불교사원을 비롯한 종교 시설로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후 장안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우주론에 기반을 둔 성스러운 도시가 밟아간 변화의 과정이다."(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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