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얼음같이 고요한 오후다.
저녁에 있을 미팅을 생각하고 그 후의 송년모임을 떠올리며 좀 끄급한 침묵속에 잠긴다.
뭔지 모를 피로한 얼굴을 하고 좀 눈을 부치다 일어나 머리를 감아야하고.
주방을 가로지르다, 잘라서 물에 담아 둔 당근의 주황색 몸체에서 연둣빛으로 자라고 있는
작고 여린 이파리들을 보고, 또 거실을 지나다 수족관의 환하디 환한 불빛속에서 여전히 유영을
하고 있는 물고기들을 보다가 또 주황색 어린 플래티의 눈과 마주친다. 플래티는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게 어느날 혼자 태어나 많은 물고기들 사이에서 저 혼자 그림자처럼 잘 자라고 있다. 어미도 죽고 없는데. 낮인데도 늘 저녁같은 요즘 겨울 날씨들 속, 저 혼자도 환하게 빛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밝아지기 전에'를 막 읽고 난 뒤라 그런지, 노랑 겨울의 오후 어느 시간 주황의 밝음이 새삼 저홀로 빛나고 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고 있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109쪽)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123쪽)
그렇듯, 가장 적막한 것들은 저홀로 소리없이 살아내고 있다.
문득, 주황의 환한 빛이 침묵같이 깊은 위로를 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