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받은 지 딱 한 달이 된 詩集,을 여태 미처 못 읽고 있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시인의 20주기를 맞은, 951쪽의 시집이다.

   나의 나태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생으로는 그저 욱씬욱씬, 부끄러워

   간간히 빚쟁이처럼...몇 편씩만 읽고는...무거운 가슴을 뒤로 한 채, 오늘도 또

   빚쟁이가 되어 책장을 덮는다.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다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달라질 것이다'

   라는 495쪽의 어느 귀절을, 내 평생 써야 할 연작시라 한...이제는 없는 시인을

   아득하게 생각하는 여전히, 부끄러운 밤이다,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 보며   (P.738 )

 

 

 

 

 

 

                                                        - <김남주 시전집>-에서

 

 

 

 

 

 

 

 

 

 

뜨거운 저항의 삶과 시, 김남주의 시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다

변혁운동의 뜨거운 상징으로서 한국시사에 우뚝한 자취를 남긴 김남주 시인(1945~94)의 20주기를 맞아 그의 시 전편을 망라한 『김남주 시전집』이 출간되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한 이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10년 가까운 투옥생활을 겪고 1994년 49세의 이른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시인이자 전사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김남주 시인이 남긴 총 518편의 시를 집대성한 이 전집은 그의 시세계를 문학사적으로 온당하게 자리매김하고 그의 시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한 기초로서 뜻 깊은 성과이다.
『김남주 시전집』은 특히 여러 시집에 중복 수록되면서 개제·개고된 경우가 많은 그의 시를 전 시집에 걸쳐 면밀히 검토해 시 텍스트를 확정하고 작품의 개제(改題) 내역을 상세히 밝혔을 뿐 아니라, 각 시의 집필 시기와 제재 등을 고려해 시의 순서를 세심하게 새로 배열함으로써 김남주 시의 전체상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정본(定本)으로 완성되었다.
총 7부로 구성된 전집은 시의 집필 시기에 따라 크게 시인의 초기작과 옥중시, 출옥 이후의 시로 나누어 엮였다. 1부는 등단 이후부터 1979년 시인이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 이전에 발표된 초기시들이며, 2부~5부에 실린 옥중시 가운데 2부는 감옥 안의 상황과 옥중투쟁의 정황이 비교적 잘 드러나는 시들, 3부는 광주학살에 대한 대응과 현실상황에 대해 발언하는 투쟁적인 시들, 4부는 주로 서정성이 짙게 드러나는 시들, 그리고 5부는 감옥에서 썼으나 출옥 후에 발표되거나 퇴고한 시들을 묶었으며, 6, 7부에는 각각 출옥 후에 출간된 시집과 유고시집에 실린 시들이 나눠 실렸다.

김남주는 1945년 전남 해남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 유신반대 운동에 앞장서다 1973년에 8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대학에서 제적된 후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는 한편으로 습작에 몰두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어 시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잿더미」 「진혼가」 등 8편의 등단작은 순수한 열정과 언어적 활력이 넘치는 김남주 문학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로서 돋보이는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초기시에서부터 드러나는 ‘피’와 ‘꽃’의 눈부신 상징은 시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것으로서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영혼을 던져보았는가/그대는 바다의 심연에/육신을 던져보았는가/죽음의 불길 속에서/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파도의 심연에서/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꽃이여 피여/피여 꽃이여/꽃 속에 피가 흐른다/핏속에 꽃이 보인다/꽃 속에 육신이 보인다/핏속에 영혼이 흐른다/꽃이다 피다/피다 꽃이다/그것이다! (「잿더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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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0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0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4-03-27 07:45   좋아요 0 | URL
농사꾼 아들로 태어난 분이 쓴 노랫가락은
두고두고 차근차근 삭히듯이
날마다 한 줄 두 줄 읽으라는
이야기마당이리라 생각해요.

오늘 하루도 아침햇살 곱게 떴어요.

appletreeje 2014-03-28 06:48   좋아요 0 | URL
예~ 날마다 한 줄 두 줄 천천히 이야기빛을
새기며 두고두고 읽을 시집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도 또다시 곱게 시작되네요~^^

착한시경 2014-03-27 09:00   좋아요 0 | URL
사과 하나를 나누어 가진다는 마음,,,,이런 마음으로 이 봄을 보내고 싶네요~ 대전...아침 날씨는 약간 쌀쌀하지만 햇빛이 들면 따뜻해질거 같네요~ 언제 읽어도 좋은 시...감사해요^^

appletreeje 2014-03-28 06:55   좋아요 0 | URL
착한시경님께선, 늘 사과 하나를 나누어 가지시는 그런 분이 아니실까요~?^^
오늘 낮은 초여름 기온처럼 더운 하루가 될 듯 싶어요...저야말로 늘 고우신 마음으로 함께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ㅎㅎ

착한시경님!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4-03-27 09:36   좋아요 0 | URL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걸으며 떠오르던 상념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듯
아름다운 시네요 ~~^^
파릇한 봄기운 물씬 나는 목요일 ..
나무늘보님 덕에 행복한 아침을 시작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ㅎㅎㅎㅎ
늘 그렇듯 오늘도 나무늘보님 ,,,빛나는 하루 되세요

appletreeje 2014-03-28 07:01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참 아름답게 읽었어요. 자꾸 마음에 두며요~~^^
어느덧 벌써 금요일이네요. 요즘은 시간이 너무나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울 드림님 덕분에 행복한 아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ㅎㅎㅎ

드림님! 오늘도, 빛나고 행복한 좋은 하루 되세요~*^^*

2014-03-27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0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7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0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4-03-28 17:29   좋아요 0 | URL
항상 얇은 시집만 보다가 900 페이지가 넘는 시집이라.. 대단한것 같아요. 소설도 그만큼 읽기 힘든데, 시는 차근 차근 읽다보면 정말 오래걸릴것 같아요. 손목도 은근 부담되겠는걸요. ^^

나무늘보님이 대신 읽어주시니 저는 좋네요. ㅎㅎ

appletreeje 2014-03-28 18:09   좋아요 0 | URL
예 책의 무게가 1285g이 되는 상당히 무거운 시집입니다.^^
고은 시인의 <무제 시편>도 그랬는데, 더 두껍네요.
시들의 내용도 그 무게보다 더 무겁고 아프고 안타깝고요...
대부분의 시들이 거의 다 장문의 시인데, 그중 가장 짧고 희망의 시를
올렸습니다.
곁에 두고 내내 차근차근 오래오래, 읽어야 할 그런 시집이에요.^^

후애(厚愛) 2014-03-28 18:24   좋아요 0 | URL
즐겁게 행복하게 주말 되시고 포근한 오후 되세요~*^^*

appletreeje 2014-03-28 18:33   좋아요 0 | URL
앗! 울 후애님이 오셨네요~~
후애님께서도~ 즐겁고 행복하고 포근한
주말 되세요~*^^*
 
책방 주인
레지 드 사 모레이라 지음, 이희정 옮김 / 예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옴마야! 뭐 이렇게 매혹적인 책이 다 있는가. 무심코 건네받은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카스테라가 우유를 빨아들이듯 너무나 흡족한 행복함을 만났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책방에서 자신이 읽어본 책만 파는 책방주인! 너무빨리 읽지 마시기를, 즐거움을 천천히 오래 즐기시길.`뿌득뿌득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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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4-03-23 07:47   좋아요 0 | URL
나무늘보님께서 좋아하시는 책이니 일단 궁금하게 하는 책이네요. 다음달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할 목록에 담아두었어요. 좋은책을 좋아하는 서재에서 발견하면 더 좋아요. ^^

appletreeje 2014-03-25 22:0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저 좋았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4-03-23 08:00   좋아요 0 | URL
가만히 따지면, 모든 책방지기는 '스스로 만지고 다룬' 책만 팔아요. 그리고, 앞으로 작은 동네책방이 나아갈 길은 바로 '모든 책을 다 다루려는' 책방이 아닌, 책방지기가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여 이웃과 나누고 싶은 책을 다루는 모습으로 거듭나야지 싶기도 해요. 이런 넋과 이야기가 이 책에 곱게 흐를 테지요?

appletreeje 2014-03-25 22:05   좋아요 0 | URL
예~그랬어요.^^
많이 공감을 하며 즐겁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비로그인 2014-03-24 01:45   좋아요 0 | URL
옴마야! (덩달아)

언제 읽을지는 몰라도 일단 보관함에 담게 만드시는 엄청 귀엽고 귀여워서 또 귀여운...

appletreeje 2014-03-25 22:06   좋아요 0 | URL
ㅋㅋ 옴마야!
언젠가 기회가 되시면 읽어보셔도 좋을 책이라 생각합니다~^^

후애(厚愛) 2014-03-27 18:41   좋아요 0 | URL
저도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보관함에 담아 두어야겠어요~ ^^

appletreeje 2014-03-28 07:3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참 즐겁게 읽은 책이었어요~~
'뿌득뿌득뿌득'...^^

하늘바람 2014-04-27 01:05   좋아요 0 | URL
아 참 이쁘구 인상적인 책이네요

appletreeje 2014-04-28 00:11   좋아요 0 | URL
예~ 책표지와 책속의 일러스트들도 너무나 마음에 쏙 들었고
책내용도 제게는 너무나 좋았던, 참 매력적인 책이었어요~*^^*
 
조이랜드
스티븐 킹 지음, 나동하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시간이 없어서 선물받은 이 책을 방출하려 했는데, 컨디션님의 서재에서 이 책에 대한 권유를 듣고 누군가 이미 가져가 다시 구입을 했다. 역시, 읽기를 잘했다! 어느 누구라도, 우리는 `조이랜드`에서의 같은 시간을 생에서 한 번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감동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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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4-03-23 07:47   좋아요 0 | URL
스티븐 킹의 책이라 궁금했어요. 마침 도서관에서 희망도서가 도착해서 읽을 계획인데, 재미있으셨다니 기대가 됩니다.

appletreeje 2014-03-25 22:15   좋아요 0 | URL
예~재밌었습니다.
보슬비님께서도 즐거운 독서 되시길 빕니다~^^

숲노래 2014-03-23 08:02   좋아요 0 | URL
조이랜드라면... 즐거운 나라일 텐데, 말 그대로 즐거움이 가득한 나라일는지, 즐겁게만 보이는 나라일는지 궁금하네요 @.@

appletreeje 2014-03-25 22:32   좋아요 0 | URL
인생에서 진정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한 장소라고나 할까요?^^
누구라도 그곳이 어디든, 그런 때가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비로그인 2014-03-24 01:40   좋아요 0 | URL
바닷가에서 연 날리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스티븐 킹을 잘은 모르지만, 제 생각에 킹은 앞으로 스릴러를 표방한듯한 이런 류의 소설보다는 완전히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소설을 쓰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도 해봤네요.^^

appletreeje 2014-03-25 22:44   좋아요 0 | URL
저도 연 날리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컨디셔님 덕분에, 놓치지 않고 잘 읽었답니다~
고맙습니다.^^

후애(厚愛) 2014-03-27 18:42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어보셨군요.^^
평점이 다섯개라... 저도 나중에 꼭 봐야겠어요~ ㅎㅎ

appletreeje 2014-03-28 07:32   좋아요 0 | URL
후애님께서도, 참 재밌게 읽으실 책 같아요~
나중에 꼭 함 읽어 보셔요~~ㅎㅎㅎ

하늘바람 2014-04-03 00:24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하늘바람 2014-04-03 00:25   좋아요 0 | URL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저도 도서관 가서 함 봐야겠어요

appletreeje 2014-04-03 21:23   좋아요 0 | URL
예~ 한번 읽어 보셔요~*^^*
 

 

 

 

 

 

 

                 그냥 눈물이 나

 

 

 

 

 

                    옆구리가 터진 채

                    해변으로 흘러온

                    고래의 파란 흉터에

                    그냥 눈물이 나

 

                    국자에 뜨거운 스프를 받아 와

                    다친 고래의 입술에

                    부어주는 소년과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에

                    그냥 눈물이 나

 

                    '내가 집에 데려갈게'

                    눈발 속에서 입을 맞추는

                    둘의 자폐에

                    그냥 눈물이 나

 

 

                                          *

 

 

                    가출 후 자기 아파트 옥상 물탱크 속에서

                    몇 달을 살았다는

                    어느 여고생의 詩에

                    그냥 눈물이 나

                    "난 겁이 나....."

                    "나도 오늘 내 집으로 돌아가....."

                    그러나 물이 들어차

                    무수히 많은 빵 봉지들과 함께

                    노란 물탱크 속에

                    그 소녀 카나리아처럼 떠 있었다는

                    죽음의 묘사에

                    그냥 눈물이 나

 

 

                                        *

 

 

                    복권에 당첨되어 달아난 아비를

                    모르고 문패를 뜯어

                    발로 차며 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에

                    그냥 눈물이 나

 

                    입속에 천국을 만들고

                    북방의 달문(月門)을 가리는

                    귓속에도 살이 찐

                    벼슬들에게

                    그냥 눈물이 나

 

 

                                        *

 

 

                     모든 것을 가만히 둔 채

                     아무것도 멈추지 않은

                     시인들의 생식기에

                     불에 태운 설탕을 좋아하는

                     그들의 수사에

                     지적인 은신처에

                     그냥 눈물이 나

 

 

                                        *

 

 

                      너무 성급하게 우린

                      첫눈에 반해버려

                      그 말에 그냥 눈물이 나

                      시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며

                      지면으로 울혈을 푸는 철학자의

                      피곤에 대해

                      그냥 눈물이 나

 

 

                                         *

 

 

                       언제부턴가 신문지는 꽃잎이나

                       말리는 것으로 사용했는데

                       오래된 신문을 모아 햇빛에 놓아두면

                       습기도 날려버리고 소란도 옮겨 놓고

                       활자들도 구철초나 산국이나 쑥부쟁이처럼

                       향기도 기슭도 버리고

                       사나운 시절을 견딜 것 같아 모아두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기사는

 

 

                                           시집은 쌉니다

 

 

                                              그냥 눈물이 나

                                              나, 그냥     (P.44 )

 

 

                        * 어린왕자의 구절.

 

 

 

 

 

 

 

                     피아노가 된 나무 4

                                  -to Jake Levine

 

 

 

 

 

                          오늘은

                          달에 나무가

                          처음 열리는 날

 

                          오늘은

                          지구로 데려온

                          그 나무로

                          피아노를 만드는 날

 

                          오늘은

                          달의 물방울

                          하나가

                          피아노 속에

                          바다를 만드는 날

 

                          오늘은

                          아주 조그만 구멍 속에서

                          달팽이들이

                          몸의 물기를

                          핥아보는 날

 

                          당신이 날 안아줄 거라고 믿는다  (P.58 )

 

 

 

 

 

 

                         Let me in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너라는 이름이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

                            하얀 눈 위에

                            넌 잠들어 있었지

                            네 곁에 나는 가만히 누웠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잠옷을 입고

                            널 따라갔어

                            네 잠옷 속에 들어가 웅크렸지

 

 

                            무서워도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무서워서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  (P.10 )

 

 

 

 

 

 

                         책을 뒤척거리는 삶

 

 

 

 

 

                              어느 날 필통 속으로

                              잘못 흘러 들어온 젓가락 한 개처럼

 

                              시작해

 

                              수저통 속에 연필을 가뿐히 넣는 아이처럼

 

                              마친다   (P.103 )

 

 

 

 

 

                                                     -김경주 詩集, <고래와 수증기>-에서

 

 

 

 

 

 

 

 

 

 

 

 

 

 

“슬픔은 언제나 가지런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

무한히 떠도는 정겨운 우울들
자취들로 치러내는 질서와의 싸움


등단 이후 12년간 무수한 찬사와 수식에 둘러싸여온 시인이 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을 지닌 “문단의 괴물”이라는 극찬은 ‘시작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수상과 대중적 인기로까지 이어졌다. 그 시인, 김경주의 네번째 시집 『고래와 수증기』가 출간되었다. 5년 만의 시집이다.
김경주는 언어적 의미 확장이라는 대과제 아래 시집마다 어떤 ‘시도’를 해왔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논리를 무너뜨리고 의미의 틈을 비집든(『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시와 외부 장르를 통합한 형태의 언어 재창조로 두드러지든(『기담』), 언어와 삶 사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의 시차를 이야기하든(『시차의 눈을 달랜다』),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표현되지 않는 ‘불가능한 말들’을 시로써 드러내기 위해 분투해온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다르게’ 떠돌고자 하는 예술적 의지와 욕망”(김행숙)은 여전하지만, 여태의 그가 시적 발명가나 실험가에 가까웠다면, 이번 시집 『고래와 수증기』는 김경주가 지닌 기질에 구도자적 특성을 몇 스푼 더 끼얹은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초기의 산문시에 비해 형식적으로 간결해진 51편의 시들에서, 내놓인 언어만큼이나 표현되지 않은 여백과 행간 역시 읽어내길 유도한다. 연쇄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멈추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유동적이며, 시인이 포착한 ‘순간’에는 ‘순환’이 잠재되어 있다. 지난 세 권의 시집이 시인이 몸을 움직여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다면, 『고래와 수증기』는 좀더 가까이에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눈 비비고 다시 바라본 작업의 기록이다. 마치 일기(日氣)를 탐구함으로써 더 멀리 헤아리는 천문학자처럼, 김경주는 곁을 살피며 긴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뒤표지글]

월요일엔 사직서가 검색어 1위를 한다.
모두들 홀가분해지고 싶은가 보다.

열아홉에 들은 ARS 대학 낙방 멘트가 기억난다.
“죄송합니다. 귀하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해서
다음 날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두 살 어린 친구에게 CT-100 오토바이를 배웠다.

스물아홉엔 등록금을 벌기 위해 경마장 가서
『경마신문』을 배달했다.
두 살짜리 ‘쾌지나 칭칭’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마(種馬)의 인기가 대단했다.

서른아홉엔 우유 배달 신청서를 공원에 들고 가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두 살짜리 아이는 우유를 참 좋아한다

나름대로 배달 쪽 일은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사직서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진지하게 쓴 글은 크리스마스카드가 유일하다.
업계가 불안정해서 크리스마스카드 회사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 눈치다.
요즘은 아이들이 아닌 노인들만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는 시대니까.

긍지와 고뇌, 외로움으로 세월에 남겠다.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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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니 라방의 산책로

 

 

 

 

        오늘은 당인리 발전소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

        오랑캐 집들 헤아려보니

        지상의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다

 

        정이네 집으로 갈까

        옥이네 집은 멀고

        준규 집은 강 건너, 피안이다

 

        베를린 쪽으로 걷는 길은 심심하고

        코케인 들러 흑맥주나 한잔할까

        빵 지나면 곱창인데

        전골은 나중에 먹기로 하자

 

        오늘은 서교성당 지나

        다락방으로 고요히 귀환

 

        아홉 번째 오늘의 마지막 스케쥴은 뭘까

 

        산책 너머엔 목책

        목책 저 너머 밤하늘엔 속수무책

        그렁그렁 청춘의 별들만 총총  (P.11 )

 

 

 

 

 

 

           산타클라라

 

 

 

 

 

         작은 당나귀를 탄 노인네는 어디로가느냐는 질문에

         쿠바로 간다고 말한다

         그러곤 시가 상점으로 들어간다

 

         왜 체 게바라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젊은 인력거꾼은 모두에게 이로운

         혁명이라고 대답한다

 

         모두에게 이로운 혁명!

 

         걸어서 세계 속으로 쿠바 편이다

         제목은 매혹의 질주다

 

         나는 다른 제목을 생각해본다

         걸어서 혁명 속으로 고독 편이다

 

         산타클라라, 체 게바라가 묻혀 있는 곳

 

         걸어서 나는 여기까지

         모두에게 이로운 혁명에게까지 왔다  (P.105 )

 

 

 

 

 

 

            南蠻

 

 

 

 

 

              십이월 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나는 문득 남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쳐서 나뭇잎들은 뿔뿔이 흩어지려는 것이었

           는데

              남해나 통영, 강진이나 해남

              나는 문득 그리운 남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쪽에 무슨 그리운 것들을 두고 왔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따스한 햇살 한 조각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는데

              양푼 속에서 끓어오르던 한 줌의 눈송이는

              어느 겨울 저녁

              외롭고 가난한 이의 따스한 양식이 되었나

              나는 문득 가랑잎처럼 스러져가던

              가녀린 남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눈송이들 뽀얗게 날려 저녁 불빛에 비낄 때면

              흩어져가는 것들의 아득한 슬픔을 생각하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것들의 따스한 결속을 곰곰이 생

           각하다가

              나는 문득 십이월 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그것들이 남겨 놓은 허공에 나의 시선을 걸어두고는

              겨울비 내리는 처마끝에서

              우두커니 담배만 피우며

              나의 그리운 남만을 되새김질하는 것이었다  (P.113 )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레게 머리를 출렁이며 공을 차요

               아마도 그게 밥 말리 인생의 정점이었을 거예요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요

               그 사람과 함께 평생을 보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요

               아직 내가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해요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은 이미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지요

               그 이후엔 소식들이 없네요

               가끔 혼자 술을 마시는 밤이면

               문득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떠올라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나의 음악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밥 말리는 말했던가요

               나의 음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나의 울음은 이미 끝나버렸네요, 율리아나

               아부데바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어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이곳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 싶어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의 삶

               그림자가 끝나는 곳에서의 새로운 삶

               레게 머리를 출렁이며 공을 차고 싶어요

               스프링으로 묶인 누런 갱지 노트에 시를 쓰며

               이동 천막에서 매일매일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이며 새로 시작되는 삶

               바람이 불지 않아도 여전히 펄럭이는

                중력과 무관한 삶

               나를 따라다니던 그림자를

               이젠 조용히 여기에 두고 떠나요

               내가 좋아하는

               고독의 돌멩이 하나만 가방에 넣고

               다른 삶으로 가요, 그래요

               다시 날아오르진 못할 게예요

               뭐 그래도

               안녕  (P.124 )

 

 

 

 

 

 

                  나전 장렬

 

 

 

 

 

                  나전은 비단밭

                  햇살은 장렬

                  햇살 좋은 날에는 나전 장렬에나 가야지

                  그곳에 가서 낮은 언덕엔 뽕나무 심고

                  가파른 비탈에는 산머루나 길러야지

                  아침 늦게 눈뜨면 새소리에 귀를 씻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상추쌈에 된장국 늦은 아침을 먹어

               야지

                  풀꽃 향기 자욱하게 흐르는 앞 강물에

                  설거지를 하면 오전이 다 지나갈 거야

                  먼 곳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마음 속에 장뇌삼처럼 묻어두고

                  그곳에서 고독이나 장렬하게 피워 올리다 보면

                  새들은 햇살을 물고 석양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황혼녘 어둠을 물고 자작나무 산그늘로 스며들겠지

                  나전은 비단밭

                  고독은 장렬

                  고요하게 바람부는 날에는 나전 장렬에나 가야지

                  그곳에 가면 청춘이 피워 올린 장작불도 조금씩 사그라

               들어

                  잔설 위엔 빛나는 달빛의 밤이 찾아 오리니

                  아궁이에 남아 있는 바알간 숯불로 밤을 밝히면

                  숨죽였던 사랑도 고요히 피어 오르겠지

                  때늦은 사랑의 밤은 봉창에 어리는 꽃그림자로 피어나

               리니

                  마음은 산머루처럼 깊어가고

                  강물은 음악 소리를 내며 밤새 흫허가겠지

                  빛나는 고독이 문턱으로 달빛 쏟아지는 밤이면

                  인생은 여전히 외로운 한 마리 짐승일 테니

                  꿈꾸듯 조금씩 그대를 사랑해야지

                  나전은 비단밭

                  그대는 생의 장렬이니

                  나 그대를 환하게 꿈꾸는 생의 낮과 밤에는

                  당나귀 타고 타박타박

                  비단밭 장렬에나 가야지  (P.130 )

 

 

 

 

 

 

                  정선

 

 

 

 

 

                  기 드보르는 어딘가에 집시로 살아 있고(그랬으면 좋겠네)

                  에밀 쿠스트라차는 자그레브와 사라예보 사이에 있네

                  짐 자무시는 일기예보 너머 눈 내리는 코케인에 있고

                  코케인은 쏟아지는 눈발과 허공 사이에 있는 한 점의 섬

 

                  장고 라인하르트는 빨랫줄에 걸려 있고

                  닉 케이브는 베를린의 동굴에 있네

                  가수리는 눈 내리는 강원도 정선에 있고

                  정선은 태평양과 한반도 사이에 있는 세계의 내면

 

                  가수리의 남쪽에는 그녀가 있고

                  그녀의 북쪽에는 내가 있네

 

                  이것은 가수리 북대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영혼의 동지들에게 보내는 고독의 실황 공연

                  여기는 라디오 레벨데 체 게바라 만세  (P.177 )

 

 

 

 

 

 

                                                 -박정대 詩集, <체 게바라 만세>-에서

 

 

 

 

 

 

 

 

 

 

 

 

                                                                 

 

고독의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실황 공연

박정대 시인이 펴낸 일곱 번째 시집 『체 게바라 만세』가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제13회 미당문학상 본심에 오른 후보작을 두고 “박정대는 자유롭고 분방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며 문장의 유희를 즐기는 시인이다. 특히 언어를 조율하는 힘이 장중하고 박력 있다”(허혜정)라고 평가를 받았다. 이번 시집 작품들에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집시의 자유롭고 비극적 감수성이 결정을 이룬 시편들로 알알이 박혀 있다. 일체의 제도와 속박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박정대 시인. 그는 이번 시집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선동적이고 아름다우며 서글프고 치명적인 탈주선에 매혹”되게 만든다. 또한 시인의 존재론적 숙명과 고독 그리고 미적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낭만주의자의 혁명적 산책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박정대의 시를 읽으면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문장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감상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국적이면서도 낭만적 감수성을 한국적 낭만주의 정신으로 잘 체화한 그의 작품들은 고독한 현대인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애초에 정신적 고향을 뒤로한 채 자신의 의미를 찾아 떠도는 어느 낭만주의자의 혁명적 산책은 이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 낡은 오솔길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란 무릇 불멸의 슬픔을 안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자신의 삶을 걸어가며 뜨거운 가슴으로 혁명을 꿈꾸는 자를 말한다면 그는 바로 박정대 시인을 말하는 것이다.

박정대 시인의 낭만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줄곧 회자된 그의 센티멘털과 혁명적 분위기는 근대 도시의 파괴적 매혹성과 파편화된 개인성을 기반으로 탄생했으며, 그의 낭만적 기질은 부르주아 사회의 물질주의, 속물근성에 대한 거부감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희망이 멀어진 데 따른 환멸감으로 발현된다

 

 

 

 

 

 애도 일기

빛이 슬픔에 닿자 장마가 끝났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 장마가 끝나자 애도 일기가 시작되었다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 잔다리 위구르족 마을에서는 양 몸통에 커다란 막대기를 끼운 채 양 통구이를 만들고

여인네는 달군 화덕에 반죽을 붙여 낭을 굽고 허브 차와 호두로 저녁을 준비하지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국수를 즐겨 먹는 위구르족은 소금만으로 간을 한 국수에 허브로 만든 양념장을 넣고 담백하고 조촐한 저녁을 먹지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떨어진 후 밤 열시쯤 저녁을 먹는다네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 어떤 위구르 가족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카펫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별빛처럼 반짝이는 삶을 나누네

위구르족의 수염은 양의 수염

양의 생애가 끝나자 수염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고독이 출렁거리는 슬픔에 닿자 저녁이 되었다

고독의 라마단은 그때부터 시작되므로 태풍이 몰려오는 밤의 한가운데 앉아 누군가 종교처럼 술을 마시지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 인류의 마지막 열차처럼 덜컹거리는 건물의 이 층 창가에 앉아 미친 듯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지

태풍이 몰려오는 검은 밤에는 흑맥주를 마시자

지금은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고독 곁을 지나가는 자정

저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한 방식

수염이 돋아난 천사가 인류의 마지막 이 층 창가에 앉아 여전히 중얼거린다

이것은 밤새 태풍에 펄럭이는 한 마리 시

그것은 애도의 대상

저것은 송강호의 염소수염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

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 네 노래를 듣는 좌파적 저녁

기억하는지 톰, 그때 우리는 눈 내리는 북구의 밤 항구 도시에서 술을 마셨지

검은 밤의 틈으로 눈발이 쏟아져 피아노 건반 같던 도시의 뒷골목에서 톰, 너는 바람 냄새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

집시들이 다 그 술집으로 몰려 왔던가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

북구의 밤은 깊고 추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 은둔자였지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

시간의 문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 루이 아말렉은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올리비에 뒤랑스는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삶과 생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

죽음이 매 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에서 늦게라도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여들었지

양아치 탐정 파올로 그로쏘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

기억하는지 톰, 밤새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

죽음이 관통하는 삶의 거리에서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추모하며 죽도록 술을 마셨지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 파올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모인 우리가 밤새 찾으려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맥주 가게와 담배 가게를 다 지나면 아직 야근 중인 공장 불빛이 빛나고 다락방에서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빛 아래서 누군가 끙끙거리며 생의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지

누군가는 아프게 생을 밀고 가는데 우리는 하염없이 밤을 탕진해도 되는 걸까 생각을 하면 두려웠지 두려워서 추웠지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너의 노래를 따라 불렀지

기억하는지 톰, 그때 내리던 눈발 여전히 내 방 창문을 적시며 아직도 내리는데 공장의 불빛은 꺼지고 다락방의 등잔불도 이제는 서서히 꺼져 가는데 아무도 선언하지 않는 삶의 자유

끓어오르는 자정의 혁명, 고양이들만 울고 있지

그러니까 톰, 그때처럼 노래를 불러줘, 떼 지어 몰려오는 눈발 속에서도 앙칼지게 타오르는 불꽃의 노래를

그러니까 톰, 지금은 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 네 노래를 듣는 좌파적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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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3-21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네요

appletreeje 2014-03-23 01:2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2014-03-2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3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4-03-21 14:17   좋아요 0 | URL
눈물은 곧 웃음이고, 웃음은 다시 노래가 되어 삶을 간질일 테지요. 포근한 봄볕 꿈꾸며 시 한 줄 바라봅니다.

appletreeje 2014-03-23 01:20   좋아요 0 | URL
예,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좋은 밤 되세요.^^

그렇게혜윰 2014-03-21 14:23   좋아요 0 | URL
오늘 내일 올 텐데 이 글을 보니 더더욱 기다려 집니다. 안달나는 중이에요 ㅎㅎ

appletreeje 2014-03-23 01:26   좋아요 0 | URL
즐겁게 잘 받으시고, 또 즐겁게 읽으셨겠지요~?^^

그렇게혜윰님! 편안하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보슬비 2014-03-23 07:51   좋아요 0 | URL
'고래와 수증기' 속의 시들도 숨죽여 읽으면 눈물이 날것 같아요.
시인들은 어떻게 이런 감정속에서 살아남을까요...

appletreeje 2014-03-28 07:19   좋아요 0 | URL
예~ 이번 시집은 참 정적인 고요가 가득한 그런 시들이었어요.
그래서 함께 숨죽여 읽었던 듯 해요.
이런 감정들을 가져서 시인들은 시를 쓸 수 있는 듯 싶구요..^^

2014-03-2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불에 타는 아내의 시신을 묵묵히 끝까지 지켜본 사람 말투로, 나의 이야기를 한번 써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 사람이라는 자체에 대한 연민을, 담담히 쓴 충실한 이야기꾼의 이 소설을 나역시 담담히 잘 읽었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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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15 16:12   좋아요 0 | URL
새로 나온 그 소설책이로군요.
담담하게 읽히는 이야기와 빛이 궁금합니다.
오랜 나날 살아온 나이테와 깊이가
살며시 담겼겠지요.

appletreeje 2014-03-17 03:15   좋아요 0 | URL
HDTV같은 요즘 한국소설들이, 미리 독자들의 반응과 마케팅을 업고 나오는 것과는
달리, 작가가 40년을 삭힌 이야기를 비로소 스스로 삶의 또 하나의 '건너가기'로
담담히 적어간 자전소설이었기에...읽는 저 역시 담담하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어눌한 말투로 느릿느릿 하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갑갑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곧 익숙하게 되었고 책을 다 마친 후에는...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길은 자신의 발로만 걸어간다는 사실을 공감하며, 마음에 돌멩이를 하나 얹힌듯한 안정감을 만났습니다.^^

2014-03-15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4-03-15 17:39   좋아요 0 | URL
평점이 5개네요.^^
기회가 오면 보려고 담아 두었는데 나중에 꼭 봐야겠어요~

행복한 주말 되세요~*^^*

appletreeje 2014-03-17 02:39   좋아요 0 | URL
예~ 나중에 꼭 읽어보셔요~ㅎㅎ

후애님! 즐겁고 좋은, 한주 되세요~*^^*

2014-03-17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림모노로그 2014-03-17 17:23   좋아요 0 | URL
서영은님의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그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겠지요...
불에 타는 ... 사랑이라.......
카트로 고고씽 ~ ^^

appletreeje 2014-03-18 01:16   좋아요 0 | URL
예 드림님! 그런 파란만장한 사랑이었어요.
그러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스스로 원한 수난은 이미 수난이
아니겠지요.^^
카트로 고고씽~ㅋㅋ,

드림님! 편안하고 포근한, 꿈나라 되세요~*^^*

2014-03-17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9 0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9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