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음
가끔 찾아가는 돈가스집 주인은
지난해까지 서점 주인이었다
그래서 책표지를 잘 싼다
내가 가방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내
돈가스집 주인에게
책표지를 싸달라고 했다
한 권은 불교 법요집이고
한 권은 기독교 성경 해설집이다
돈가스집 주인은
책표지를 싸다가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죽어서 어디 갈라고 그러요?" (P.12 )
도너츠
눈 내리는 날,
한가운데 텅빈 마음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스산한 바람만 불었다
비움으로 끝내 남아 있는 중심의 괴로움을 처음에는 몰랐다
중심은 사라지고
주변은 드러나는 풍습이 그만큼 낯설다
그렇다고, 마음이 갇히지도 않았고
열리지도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다 먹혔을 때만
둘이 서로에게 고요하게 번진다
안과 밖이 서로에게 스민다
둘이 다투지 않는 고즈넉함이다
너와 내가 하나이듯이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이
밤과 낮이 하나이듯이
마치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그대로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흩어진다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P.16 )
사과와 사과 씨
봄을 지나 꽃 떨어졌다
여름을 견디며 살았다
나는 너를 키우고 너는 나를 키웠다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너라고 할 것도 없다
그토록 안으로 안으로만 뜨겁게 껴안으며 살았다
그렇더라도 이제 헤어져야 할 때
울지 마라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은 바람이고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땅이다 (P.31 )
안테나
아파트 지붕마다 안테나가 있지
교회 지붕 위 십자가도 안테나이기는 마찬가지
안테나는 곤충도 가지고 있고, 자동차도 가지고 있어
아마 박쥐도 가지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절터 당간지주는 안테나를 꽂았던 자리
산 위의 큰 안테나는 정부기관이나 방송국에서 세웠을 듯
핸드폰이 개인용 안테나라는 것
사람들이 그것을 호주머니 속이거나 가방 안에 넣고 다
니며,
보내는 사연과 받는 사연은 그만큼 여러가지일 터
혹은 받았지만 보내지 못하고, 보냈지만 받지 못하지
당연히 보이는 안테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안테나도 있
겠지
보내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안테나가 있는지도 몰라
통신회사가 많은 것은 어떻고
하늘을 떠다니는 인공위성도 안테나지
듣기로는 무당집에 세워 둔 대나무도 꽤 성능이 좋은
안테나라는 소문이 있다지
바닷가의 솟대도 안테나이기 마련이고,
솟대 위에 앉아 있는 저 기러기는 또 어떻다던
모든 안테나는 오래된 안테나이거나 새로운 안테나일 테지
추운 겨울밤이거나,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안테나는 흔들리면서 끝내 버티는 것이고
나는 너에게 외로울 때도 신호를 보내고,
외롭지 않을 때도 신호를 보내지
너도 나에게 그렇지
사람들은 오늘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고,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니 (P.40 )
닮다
걸어서 성북동 길상사에 가는 날
잠시 쉬어 갈 생각으로 돈암동 성당에 들렀더니
마당 한편에 성모마리아상이 있다
이미,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과
서울 돈암동 성당의 성모마리아상은 닮았다
둘 다 화강암이다
얼굴 표정도 비슷하다
표정이 그러니
마음도 그러겠다
모두 조각가 최종태 선생이 빚었다
그러므로 둘이 남매나 자매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빚은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리라 (P.47 )
가면무도회, 또는 너무 많은 나
지붕을 세우고, 방을 만들고, 창을 냈다
해가 뜨고, 달이 뜬다 나는
네이버와 다음과 싸이월드와 엠파스와
드림위즈와 구글과 유니텔에 깃들었다
블로그와 블로그 사이에서 나는
만나고, 헤어졌다 울고, 웃었다 눈을 뜨고, 잠이 들었다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는
빨간 우산이었다가, 미친 바다였다
물을 먹지 않고도 나무가 자랐다
후박나무였고, 소나무였고, 은행나무였다
향기 많은 비자나무였다
나이테를 보고도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곳에서 안거했다
구글어스에서 지구를 가지고 놀았다
어떤 때는 원주민이었다가, 나그네였다
개마고원이었다가, 고비사막이었다
압록강을 따라 서해로 갔다가,
다시 두만강을 따라 동해로 갔다
밤에는 사이좋은 나무와 새였다
아버지였다가, 어머니였고, 여자였다가, 남자였다
나이도 다르고, 얼굴도 달랐다
목소리도 다르고, 생각도 달랐다
나는 곧바로 많은 아이디의 이름들로 이탈했다
마우스들이 쉴새없이 나를 물어 날랐다
낯선 땅과 밤하늘과 바다에 흩뿌려졌다
가면을 잃고 허둥대는 날도 있었다
끈끈한 탯줄을 끊고 부유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는 니콜라이였다
니콜라이는 니콜라이를 몰랐다 (P.48 )
필담
대학도서관 큰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에서 마주앉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빈 종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필담을 나눈다
그러기를 한참이다
그래서, 나도 그 빈 종이에 필담을 남기고 싶었다
괜찮아요 말로 하세요 (P.81 )
역사는 흐른다
벼슬을 지낸 나의 12대조 할아버지 윤의는 임진왜란 때 여러
싸움에 나섰다 진주성 2차 싸움 때도 고향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이끌고 가서 일본 침략자들과 싸웠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에서 그렇게 싸우다가 죽었다 같은 날 의병장 김천일
도 죽고, 그 무렵 기생 논개도 죽었다 고향 나주에서 할아버
지의 죽음을 전해 들은 수성 최씨 할머니는 영산강에 몸을
던져 숨졌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할아버지와 할머
니의 후손인 나는 일본 사람의 뱃속에서 나와 할아버지의 목
판본 행장기를 인쇄판 행장기로 다시 묶었다 (P.79 )
-윤희상 詩集,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서
쌀 석 섬
권정생 선생은 평소 자신의 몸 상태를
멀쩡한 사람이 쌀 석 섬 지고 있는 것 같다 했다
개구리 짐 받듯 살면서도
북녘에서 전쟁터에서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아이들 짐 덜어주려 했다 그리했다
짐 진 사람 형상인 어질 仁
대웅보전 지고 있는 불영사 거북이
짐 진 자 불러 모은 예수
세상에는 짐을 대신 져주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홀가분했다 (P.37 )
어매
권정생 선생은
어매로 눈뜬 삶 어매로 눈 감았다
젖을 찾을 수 있을 때도 어매를 불렀고
젖을 찾을 수 없을 때도 어매를 불렀다
젖내를 찾아
처음 허공을 젖던 조막손, 마지막 늙은 손
어느 노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선생은 자비로운 삶 그 자체였다
젖을 물릴 수 있어서 기쁜 사랑 慈
젖을 물릴 수 없어서 슬픈 사랑 悲
다 어매에게 배운 것이었을 것이다
어매 사시는 그 나라에서는
더 이상 자비롭지 않아도 좋을 상봉에 겨워
저세상에 다시 태어난 울음도 컸을 것이다
웃음이었을 것이다 (P.54 )
감기약
이불을 뒤집어쓰고 낑낑 앓고 있으면
신시장 보신탕 골목에 다녀오라고
지전 몇 장 처방전인 양 쥐여주었다
약으로 먹으면 상관없다던 말씀은
불교도 미신도 아닌 비위 약한 아들놈 달래는 거였다
섬에서 소설 쓰는 친구 딸은
학교 급식으로 보신탕이 없는 게 섭섭한 쪽인데
어느 날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갓 사귄 친구 집에 갔겠다
마침 마당에서 뛰노는 강아지 보고
햐, 얘 참 맛있겠다며 무심코 한 말을 누가 들었는지 어
쨌는지
머지않아 초대받아 독상을 받고
그 식구들 보는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해치웠다는데
그 딸의 친구인 내 딸은
감기약으로도 도통 먹으려 들지 않으니
내 아배에게서 배운 부정을 쓸 기회가 없는 것이
아들놈 없어서 때 한번 밀어준 적 없는 것만같이 섭섭하여
감기 걸려 혼자 찾은 상주식당에서 소주 한잔 곁들인다 (P.76 )
난
귓가에 쨍쨍 소리가 있는 추운 날이면
난이 있는 밥상을 받고 싶어
안동 음식의 거리 낙원회관으로 간다
내장을 뺀 생태를 뼈째 난도질하여
무를 채 썰어 고춧가루와 소금으로만 버무린
난이라는 이 반찬은 어릴 적 할매가 만들어주던 것으로
매큼하니 가끔 뼈가 씹히는 그 맛 그대로를
이 식당 아지매는 살릴 줄 안다
명태가 잡히지 않는 요즘에는 생대구를 쓰지만
첫사랑을 닮은 이름만큼은 그대로 난이어서
난- 하고 입속에 굴리면 그녀의 숨결 맛이 돈다
어매 없이 막 자랄 때 할매 밑에서 받아먹던
이 못난 반찬을 그때와는 달리 뼈까지 맛들이고 있는 중
이다
국화를 넣어 빚은 막걸리를 곁들이면 더없이 좋은 안주
도 되는
이 난이라는 반찬은 첫사랑만같이 나만 알고 싶어서
오늘도 혼자서 입맛을 다시며 찾아간다 (P.78 )
-안상학 詩集,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에서
이번 한주는 무더위와 늘 그렇듯이 밀린 일들과 이러저러한 마음의 굴곡 때문에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환기'는 가벼운
책들을 훌쩍훌쩍 읽는 일과, 지난 주에 받은 몇 권의 詩集,을 '혼자 있기 좋은
방' 에 숨어 들어가듯...고요하게 때론 기쁘게 읽은 일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여유가 있고 비가 온다는 예보에 기다렸는데...비가 안 내려 울컥,했다.
대신 한대수의 '물 좀 주소'를 꺼내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