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드랍다
한동안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말
'꼰드랍다*'가 머릿속에 저 혼자 걸어 들어왔다
"꼰드라운 곳에 서 있지 마라"
"꼰드랍게 물건을 들지 마라"
가는 곳마다
꼰드라운 생각
꼰드라운 장소
꼰드라운 사람이 널려 있는
꼰드라운 세상에서
이따금 발목을 접질리다
'꼰드랍다'말 속에는
조심조심 살피며
세상을 살아가고
들쑥날쑥한 마음 단속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평평平平의 미학이 숨어 있다 (P.13 )
*꼰드랍다 : 사물이나 사람들이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아 넘어질듯 위태로운 상태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고리
그물망은 날로 촘촘해져
두세 사람만 건너면
누군지 알 수 있다는 말이 항간에 떠돈다
골목, 백화점, 지하철역...
신상을 알 수 있는
성능 좋은 CCTV카메라 돌아가고
지나다니는 이들은 고리에
코가 꿰인 코다리가 되어
불어오는 바람에 순하게 몸을 맡긴 채
꾸덕꾸덕 말라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리에
발목을 잡혀
운명을 맡기고
감정의 소용돌이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사람들
이음새가 허술해지면
고리는 떨어져 제 발등을 찧는다 (P.15 )
나무
장마철 숲속에는
싸리나무 곁에는 산초나무
떡갈나무 옆에는 갈참나무
서로 어깨 기대며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
해충으로 몸살 앓아도
칡넝쿨, 환삼덩굴이 괴롭혀도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저 푸른 옷을 입은 성자聖者들 (P.18 )
각도를 맞추다
해거름 따라 산책을 나가면
삐거덕거리는 관절이 비명을 질러댄다
억새가 우거진 물가에 앉아 고통을 잠재운다
문득 회한의 시간들이 밀려온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던 시간들이
회심의 웃음을 보낸다
고통으로 절삭된 순간들이
뼈의 각도가 원인인줄 미처 몰랐다
안락한 소파대신 허리받이 의자에 각을 세워 앉는다
틀어진 관절이 서서히 제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맞물린 아귀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고통이 뒤태를 보이며 사라진다
'본래 지니고 있던 각도를 유지해주기 바란다'라는
관절의 깊은 속내를 알아차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P.21 )
푸줏간
시장 모퉁이에
정육점이라는
예전 간판은 사라지고
'푸줏간'이라는 새 간판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다
우리글 상호가 정겨워
긴 줄 끝에 서니
뚱뚱한 주인남자는
쇠갈고리에 걸린 고깃덩어리를
쉴 새 없이 칼질 한다
양지머리, 등심, 앞다리살, 홍두깨살
오징어다리처럼 늘어진 종이가 문 앞에서
바람따라 너울너울 춤을 춘다
길 건너 정육점 주인은 파리만 날리고 서있다 (P.28 )
흔들리면 무너지지 않는다
말귀를 닮은 산, 산사山寺에는
태풍에도 살아남은 돌탑들이 서있다
돌을 쌓아 올릴 때
돌탑이 완성되었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흔들어 보는 일이다
돌 틈에 끼어있는 작은 버팀돌
돌탑이 흔들리면 따라서 흔들린다
흔들리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동안 흔들리지 못했던 젊은이들
흔들리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
바람을 만나 맥없이 무너졌다고
아침 신문에 커다란 활자로 떠다닌다 (P.37 )
천리포 수목원의 개구리
한국을 사랑했던 민병갈* 씨
서해를 끼고 있는 땅에서
평생 홀로 살며
꽃과 나무를 심고 보듬었다
어머니가 그리워
어머니가 좋아하는
목련나무 사백 팔십 여 종種을
공들여 키우고
사월엔 꽃잎이 벙그는
섬세한 떨림을 느끼려고
외출도 마다한 채 나무 곁을 지켰다
그가 가버린 뒤
초가집 앞 넓은 연못은
숲 그림자를 가슴에 품은 채
오늘도 말없이 누워 있다
물 위로 소리없이 떠다니는
수련 잎들
죽어서 개구리가 되어
수목원을 지키고 싶다던 그는
오늘도 수련잎에 앉아
떠도는 구름을 헤이며
찾아오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민병갈 : 2002년 4월 8일 한국 최초의 사립수목원을 세운
미국계 귀화 한국인.
-임덕기 詩集, <꼰드랍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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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기 시인은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고,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중,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바가 있다. 『수필시대』와『에세이문학』의 수필가를 거쳐서 2014년 계간시전문지『애지}로 등단했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대동창문인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애지문학회, 한국여성문인회, 송현수필문학회, 에세이작가회, 일현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수필《조각보를 꿈꾸다》,《수필공간》,《시인의 마을》등이 있다.
임덕기 시인의 첫 시집 {꼰드랍다}는 대단히 신선하고 그만큼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해준다. ‘꼰드랍다’는 사람이나 사물 등이 중심을 잘못 잡아 위태로운 상태를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집 {꼰드랍다}는 그 잘못을 수정해야 한다는 ‘평평平平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가는 곳마다/ 꼰드라운 생각/ 꼰드라운 장소/ 꼰드라운 사람이 널려 있는/ 꼰드라운 세상에서/ 이따금 발목을 접질”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히말라야 계곡의 소금밭]이나 [비둘기의 맨발]과도 같이, 이 세상에서 더없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천사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기교가 아니고, 기교는 시를 죽인다. 임덕기 시인의 ‘평평平平의 미학’은 오히려, 거꾸로, 그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인하여 그 어떤 기교보다도 더욱더 아름다운 신선함과 그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감자에 싹이 나왔습니다.
화분에 옮겨 심으니 화색이 돕니다.
키만 크더니 휘청거립니다.
하얀 감자 꽃이 피기도 전에
포실한 흙 속에
감자알을 꼭꼭 숨겨 놓았습니다.
씨알이 별로 크진 않지만
그릇에 담아냅니다.
2014년 초여름
"노래를 만들 때 듣는 사람이 좌인지 우인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래하는 사람과 듣
는 사람이 사상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고 해도 그 노래에 마음
이 흔들린다면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는 것이죠.
그 흔들림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 노래는 다양한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됩니다. " (P.35 )
/ 강상중, [사랑할 것]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