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십자로에서 유치원 다니는 아이 하나와 세 살쯤의 아이 하나와 출근길인지 아니면 등원길인지

가야할 곳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다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다른 산이 보이기도 하고 마을이 아스라이 보이기도 하는 곳을 바라보며 있는데 옆에 아는 청년이 하나 다가와 섰다. '저 길로 가보고 싶어'하자 '그럼 오늘은 저 길로 가보면 되죠?' '하룻쯤은,'. 그래서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의 푸른 산과 마을이 텅빈 운동장같은 한낮의 백주에 어슬렁 거리는 한 두마리 개만 보이는 골목에 도착해 다시 길을 여기 저기 걸었다. 작은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다 이내 멈추기도 했고 이번에는 또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를 그곳에  있는 하얀 십자로에서 다시 올라타고 한참을 달리다 창밖의 거리 풍경과 벙어리같은 무성영화 속을 걷는듯한 무섭게 내려쬐는 하얀 햇빛아래 우리는 어느 곳에 다 함께 내렸고, 또 그 도시의 어느 여자 둘을 만났다. '너희들, 어디선가에서 쫒겨오는 길이지, 잠시 우리 방에서 숨어 있어.'하길래 우리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참을 그 집에서 이야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여학생들이 하얀 교복 윗도리와 치마를 입고 와와 달려가는 학교운동장도 바라보다 문득, 아 우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쫒기고 있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곰곰 생각하고 있을때 창밖에서 어느 여자가 똑똑 웃으며 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여니 그 여자가 환히 웃으며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말했다. 그 여자는 그 청년의 어머니였다. 코팅을 입히지 않은, 얇은 책받침의 모서리를 잠시 잡고 팔랑, 흔드는 듯한 마치 백주와 같은 꿈을 꾸다 눈을 뜨니 빗속에 어디선가 작은 새소리가 잠깐 들리다 마는..조금 어두운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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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18 06:48   좋아요 0 | URL
더위를 살짝 누그러뜨리는 빗방울 머금은 구름이 새벽하늘을 덮었군요.
꿈속 이야기는 어떤 삶일까요...

appletreeje 2013-06-18 10:17   좋아요 0 | URL
아마...지금 '여기'에서 가끔은 '저기'로 떠나고 싶어하는
그러나 결국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곤 하는 그런 삶일까요?..히히..

수이 2013-06-18 09:19   좋아요 0 | URL
요즘 들어서 꿈을 부쩍 자주 꿔요.
바라는 마음이 강해져서 더 그런 걸까- 싶기도 해요.
단편영화 볼 때처럼 좋은걸요, 나무늘보님 꿈.

appletreeje 2013-06-18 10:18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 듯 해요.
저는 꿈의 상황이 비교적 구체적인 꿈을 꾸곤 하는데 새벽의 저 꿈은
깨고나서도 하도 어리둥절하여 가만 생각해보니...아마...저의 바라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었던 듯 하네요. ^^
 

 

 

 

 

 

                          별곡류(別曲類)

                              -아그네스 발차*를 위하여

 

 

 

 

 

                          그대가 CD속에 들어가 부르는 노래는

                          고려적 <청산별곡>과도 같이

                          제가 맘속 깊이 사랑의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기다리고 희망하는 영혼의 큰 갈망'을

                          지금 그 노래를 듣는 저로 하여금 알게도 해줍니다

                          "기차는 왜 여덟 시에 떠났나요?"

                          지금도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내 눈가에

                          그대의 옛모습이 꿈 그림자처럼 보일 듯 합니다

                          내가 떠나온 뒤 그대의 삶의 애처로움이

                          이젠, 죽어도 애처로움이 아니기를 빕니다

                          슬픔을 이기고, 그대여 울지 않기를 빕니다

                          그대 '기다리는 사랑'을 끝내 완수하고 완성하기를

                          나는 기원하고 기도합니다   (P.79 )

 

 

                            *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를 부른 아이리쉬계 가수 

 

 

                    

                                                            -이정우 詩集, <마음의 길>-에서

 

 

 

 

 

 

 

 

 

 

 

    다시 월요일이다.

    그렇지만, 왠지 마음이 차분한 편안함으로 가만히

    앉아 이정우시인의 시집,을 읽는 그런 월요일 아침.

    아침에 문득, 여러 권의 책들을 마음에 두고 펼쳐보다가

    이 책들을 드리고 싶은 분의 얼굴을 생각하고 이 책을

    읽으시며 어떤 마음의 웃음이나, 혹은 저 마음 안쪽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을까,

    조금 걱정도 해보며 이리 저리, 자꾸만 책들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 보았다.

    오늘은 비님이 오신다 하니, 왠지 안심이 된다.

    그런데 왜 오늘은 아침부터 이리도 고운 사람들의 얼굴

    에 선한가, 말이다.

멀리 있는 아름다운 사람도 그립고, 가까이 있는 친구도 그립고

지난 주, 사소한 틈새로 서먹해져 버린 너도 그립고, 신학교의 신부님도 그립고, 주말에

이사를 한 고운 벗도 그립고...요즘 건강이 안 좋아서 잘 안 보이시는 그 분들도 그립구나. 어제

녁미사때 할아버지 신부님의 강론중, '겸손'이란 말의 한자는 '흙'에서 왔다는

겸손이란, 흙처럼 모든 것을 가만히 다 끌어안는 것이란 말씀이 떠오르는 시간, 마음의 길로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를 찾아 들어야 겠다. 비록 아침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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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6-17 12:09   좋아요 0 | URL
기다리는 사랑은 슬퍼서 음......

appletreeje 2013-06-17 19:47   좋아요 0 | URL
저도 앤님을 그렇게 슬푸게 기다렸어요... :)

2013-06-17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7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8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8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6-17 13:50   좋아요 0 | URL
한자말 '겸손'은 한국말로 풀면 '다소곳하다'나 '얌전하다'가 되어요.
저는 언제나 '다소곳하다'와 '얌전하다'를 즐겨써요.

생각해 보면, 이런 낱말들 모두 먼 옛날
시골에서 흙 만지던 분들이
즐겁게 빚은 낱말이리라 느껴요

appletreeje 2013-06-17 19:43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댓글을 보고 '겸손'의 한자를 찾아보니 아무래도 그랬습니다.
어제 신부님께서 '용서'란 한자의 깊은 계곡을 덮어주는 뜻도 말씀해주셨는데
땡땡이 신자가 뭔가 듣기는 들었는데...제 맘대로 함부로 페이퍼를 썼나 봅니다. ^^::;

그래도 흙에서 나온 낱말이란 말씀에...안도와 감사함을 드립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3-06-17 16:38   좋아요 0 | URL
아그네스 발차는 그리스 가수로 알고 있습니다만....

appletreeje 2013-06-17 19:51   좋아요 0 | URL
...
저도 아그네스 발차가 그리스 가수라는 것은 얼핏, 알고는 있었는데
그냥 시인의 각주를 그대로 옮기다 보니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

노이에자이트님의 방문에 다시금 감사드리며,
서늘하고 좋은 밤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
그리고, 다시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를
듣고 있으니..새삼 참 좋습니다..

보슬비 2013-06-17 19:12   좋아요 0 | URL
제 생일 전후로 장마철인지라 대부분 생일날 비가 많이 내렸었어요. ㅎㅎ
그래서 센티해지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신랑과 가까워지게 된 계기도 생일날 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답니다. 생일 턱으로 제가 좀 과하게 마셨었는데, 신랑이 끝까지 저를 에스코트해주고, 그날 비가 왔었는데 굽까지 부러져 난감한 저에게 구두를 내주고 자신은 양말 신고 다녔거든요. (그때 다들 눈치 챘다고 하더라고요. 신랑이 저를 좋아한다는것을...^^;; ) 그 때문에 고마워서 영화도 보고 저녁도 먹고.. 그러다 결혼까지...ㅋㅋ

그때도 지금도 비가 좋아요.^^

appletreeje 2013-06-19 04:46   좋아요 0 | URL
역쉬~비처럼 보슬보슬하고 아름다운신 보슬비님!
신랑님의 사랑에 크게 공감 드리며(ㅎㅎ..저에게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거든요.)
다시금, 두 분의 아름다우신 사랑에 공감과 더불어,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 밤에는 비님이 오신다니..더욱 좋은 밤 되세요. :)
 

 

 

 

 

 

               金洙暎을 추모하는 저녁미사곡

 

 

 

 

 

                      六月 十六日은

                      그대의 祭日이다

                      花園에 가도 마음 달랠 꽃이 없어

                      나는 徒步로 그대, 무덤 곁으로 간다

                      무덤은 멀다 노을 아래로

                      노을을 머리에 이고

                      타박타박 駱駝처럼 걸어간다

                      내가 그대에게 줄 것은

                      식지 않은 사랑뿐이라고

                      걸으면서 가만히 내 반쪽 심장에

                      끓이는 더운물뿐이라고

                      무덤에 도착하면 오빠 곁을 안 떠나는

                      누이에게 전하리라

                      말하지 말라고 그대가 눈짓을 보내면

                      나는 또 장승처럼 서 있다가

                      타박타박 산길을 내려오려고 한다

                      반쪽 심장에는 올때마다

                      더 많은 더운물을

                      출렁거리면서

                      우리 마음이 오늘 저녁은 아무데나 가서

                      맞닿아 있어 서로 빈손을

                      크게 벌려 놓지 않으려고 한다    (P.76 )

 

 

 

                                                                        -<김영태 시선> -에서

 

 

 

 

 

 

 

 

 

 

  金洙暎을 추모하는 저녁미사곡,을

  처음 읽었을 때가 아주 오래 전

  시인의 <北호텔>,에서 였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의 내가

 '내가 그대에게 줄 것은/ 식지 않은 사랑뿐이라고/

  걸으면서 가만히 내 반쪽 심장에/ 끓이는 더운 물뿐이라고'

  를, 저 역시 반쪽짜리 심장에 출렁거리는 물,처럼 몸 어딘가에

  가득 담아넣고 다녔던 그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내가

  또 다시, 이 詩를 읽는다.

 '金洙暎을 추모하는 저녁미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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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6 11:49   수정 | 삭제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6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6-16 12:16   좋아요 0 | URL
김수영 시인처럼 사랑받는 시인 되도록
다른 시인들도
마음을 슬기롭게 갈고닦으면서
사랑 한 자락 빛내기를 빌어요..

appletreeje 2013-06-16 18:29   좋아요 0 | URL
예...그렇지요.
마음을 슬기롭게 갈고닦으면서
사랑 한 자락 빛내시는 시인들,
우리나라에 많으시면 좋겠습니다.
 

 

 

 

 

 

강윤영, 나 권난섭이야. 조금만 기다려...

 

아침마다 3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 사진 앞에,

생전에 커피를 좋아한 남편에게 커피를 끓여다 놓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老母의 커피 한 잔.

함익병씨가 홀로 계신 장모님 집에 가 하룻밤을 백년손님으로 보낸, 이듬날 아침의 풍경.

그리고 우연히 그 프로를 다운해 보는 나는,

쌉쌀하고 달콤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주말 밤.   So long,

 

 

커피 한 잔에는, 너무나 많은.. 말줄임표가 총총하다.

마치 너와 나의 말줄임표,같은 별들의 시간과 어제의 뒷모습들이 총총... 녹아 있다.

굿 밤,

 

 

 

 

 

 

 

 

 

 

 

 

 

P.51 : 가정에서 내리는 커피는 그 어떤 제약도 없지요. 그래서 30년 이상 된 카페 바흐의 단골손님들은 가게에서 내리는 방법을 기본으로 해서 취향에 따라 맛을 조절하곤 합니다. 그 손님에게는 자신이 내린 커피가 최고의 커피일 것입니다. 이처럼 ‘나만의 커피’를 내리는 손님은 자신의 인생을 좀더 풍성하게 가꾸어나갈 수 있습니다. 커피가 품고 있는 다양한 풍미와 향을 스스로 만들어낸 사람은 그만큼 삶도 다채롭게 빚어나갈 힘을 얻을 테니까요.

 

 

 

 

 

 

 

정감 어린 그림체와 독특한 감성으로 만화 독자와 커피 애호가의 애독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만화를 잘 읽지 않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까지 사로잡은 책 <커피 한 잔 더>.

씁쓸한 삶의 장면에서 입안에 감도는 쓰라린 맛을 느끼게 하면서도 따뜻하게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커피의 강력한 ‘위로’ 기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두 편의 이야기와 작가의 일상이 담긴 에세이 세 편이 묶인 3권에서는 1, 2권보다 더 짙은 커피 향이 배어나고, 재기 넘치는 에피소드들은 낭만과 서정만이 아니라 웃음과 재미까지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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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16 03:47   좋아요 0 | URL
따스한 것 몸속으로 스며들 때에
따스한 마음
찬찬히 일어나면 좋겠어요

appletreeje 2013-06-16 09:32   좋아요 0 | URL
때로는
삶의 한 순간
커피 한 잔,의 의미가
새로울 때가 있지요. 따스한 마음처럼요..

2013-06-16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6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6-16 21:02   좋아요 0 | URL
커피향 구수한 페이퍼네요. 아침마다 손수 내려준 전속 바리스타의 커피를 마시는 저는 그럼 무지하게 행복해 해도 되는거에요?! ^^ 손수 내리는 커피와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따라 가볍지 않네요. 제겐. 마음을 다스려야겠어요. 커피를 내리는 마음으로... ^^

appletreeje 2013-06-16 22:38   좋아요 0 | URL
아침마다 전속 바리스타의 커피를 마시시는 프레이야님! 진정 북구신의 여왕, 맞으십니당.~ 부럽습니다.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프레이야님은 그윽한 커피향,같으신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고운밤 되세요.~
 

 

 

 

 

 

 

  책형대磔刑臺*에 걸린 시

   -인간 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4.26 전까지의 나의 작품 생활을 더듬어볼 때 시는

어떻게 어벌쩡하게 써 왔지만 산문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감히 써볼 생각조차도 먹어보지를 못했다.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쥬'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뿐이 아니다. 태도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차럼 6.25 때에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이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이를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그런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하여서는 아니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이어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가 아니면 비명이 아니면

 

* 磔刑臺: 몸을 찔러 죽이는 형구刑具를 말한다.     (P.32 )

 

 

죽음의 시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앞으로 이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요사이는 시를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 4.26이 전취戰取한 자유는 나의 두 손  아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이런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輝煌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지난날의 낡은 시단의 과오나 폐습을 나는 여기서 새삼 뇌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듯 숨막힐 듯 한 괴로운 시대 속에서 과감하게 자기의 세계를 지켜가면서 싸워온 시인이 현現 시단의 기성인 중에서도 몇 사람은 있다는 것을 나는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느나라 시단이고 진짜 시인보다는 가짜 시인이 훨씬 더 많은 법이고 요즈음 세간의 여론의 규탄을 받고 있는 소위 어용시인이나 아부시인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서는 완전히 자격을 상실한 자들뿐이다. (아니 애당초 시인이 되어보지도 못한 자들뿐이다.) 그러니까 그까짓 것은 하등 문제꺼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4.26 이전의 우리나라의 시단의 작품들이 대체로 낡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시로서 합격된 작물作物 중에 특히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새로운    (P.33 )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제작 상의 모험적 기도를 용납할 수 있는 시대적 혹은 사회적 여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고민을 처절히 체득한 시인이라면 4. 26은 그에게 황금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시인들만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4. 26의 역사적 분수령을 지조를 굽히지 않고 넘어온 기성시인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새 시대의 선수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 힘든다.

 '책임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서구의 고언古言이 있는데 이 말은 4. 26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출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이 필히 느꼈어야 할 기본인식이다. 이 인식의 감득感得이 없이는 새 시대의 출발은 불가능하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다.

이제야말로 꿈을 가지라.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이와 같은 꿈은 여지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태도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를 투박하게 요구한다. 여기에 과실즙이나 솥뚜껑 위에 여린 밥풀 같은 달콤하고도 거룩한 시인의 책임이 있다. 시인들이여

새로운 시인들이여 이제야말로 인간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趙芝薰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P.34 )

 

 

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휫트맨'인가의 말을 차용借用하여가면서 기염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윤돈倫敦*에 있는 박태진朴泰鎭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율시旋律詩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은 구제가 없겠지요.'라는 같은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면 반드시 시작품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洞察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은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불쌍타 봤어. 그런 폭도暴徒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은 모두 다     (P.35 )

 

* 런던

 

 

모름지기 이승만李承晩의 뒤나 따라가 죽든지 양자택일 하여라.

 4.26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磔刑臺 위에 걸어놓았다.    (P.36 )

 

 

                                                                     <경향신문京響新聞> 1960년 5월 20일

 

 

 

 

 

                                 

                             그것을 위하여는

 

 

 

 

 

                      실낱 같이 잘디 잔 버드나무 가 지붕 위 산 밑으로

                   보이는 객사客舍에서 등잔을 등에 지고 누우니 무엇을 또

                   생각하여야 할 것이냐.

                      나이는 늙을수록 생각만이 싸이는 듯

                      그렇지 않으면 며칠 만에 한가한 시간을

                      얻은 것이 고마워서 그러는지

                      나는 조용히 들어 누워

                      하나 원시적인 일로 흘러가는 마음을 자찬自讚하고싶다

                      불같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 밤만은 그러한 소리가

                   귀에 젖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이 있다면 저 등불이라도 마시라면 마시고 싶은 마음이다.

                      혹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잠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이 집 둘째 아들처럼

                      [돈은 암만 벌어도 ㅁㅁ 하여지지 않는다]

                      는 상인商人을 업수히 여기는 나의 마음도

                      사실은 오지 않을 기적을 기다리는 염려의 상인

                      만나야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가야할 곳도 가지 못하고

                      나의 천직도 이제 아주 잊어버렸다

                      이렇게 불빛을 등지고

                      한 발의 관객들 조차

                      무시하고

                      홀로 생각 아닌 생각에 젖어있으면

                      언덕을 넘어오다

                      무의미하게 보고 온

                      눈 위로 나오고 눈 속에 파 무친 도랑나무 많이 심은

                   공원까지 생각이 나서

                      내 자신이 원시적인 사람처럼

                      원시적인 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설움을 어떻게 발산할 것인가도 자연히

                   알아지는 것인가 보다.

                      그러니까

                      내 앞에 누운 나의 그림자조차 저렇게 금방 가늘어졌다

                      굵어졌다

                      제 마음대로

                      나중에는

                      채색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보아라.

                      만나야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가야할 곳도 가지

                   못하고

                      이제는, 나의 천직도 잊어버리고

                      날만 새면 차디찬 곳을 찾아

                      차디찬 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니까 밤이 되면

                      객사를 찾아

                      등잔을 등에 지고 들어 누워

                      있어야할 게 아니냐.

                      그러하니까

                      재미있는 생각이

                      굶주린 마음에서

                      폭수爆水같이

                      폭수같이

                      쏟아져 나올게 아닐까보냐.

                      그것을 위하여는

                      일부러 바보라도 되어보게 싶구나.   (P.18 )

 

 

                                                                < 연합신문聯合新聞> 1953년 10월 3일

 

 

 

 

                                              -詩人 金洙瑛 作品集, <책형대에 걸린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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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15 14:31   좋아요 0 | URL
눈이 밝을 때에 마음을 밝혀
삶을 밝히는 이야기로
사람들 사이에 솟아날 사랑을 밝히는 길,
곧 시인이 될 수 있겠지요...

appletreeje 2013-06-15 19:25   좋아요 0 | URL
'눈이 밝을 때에 마음을 밝혀
삶을 밝히는 이야기로
사람들 사이에 솟아날 사랑을 밝히는 길,' -

정말 그런 듯 싶어요. :)

2013-06-15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