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단어에 "おごる(오고루)"란 말이 있습니다.
한자로 "奢る(오고루)"라고 쓰면 우리말로썬 "한턱내다" 즉 "자신이 돈을 내고 남에게 (주로 음식을) 대접한다" 그런 말이 됩니다.

또 하나 다른 한자로 "驕る(오고루)"라고 하면 우리말로썬 "사치하다", "교만하다", "남을 얕보다", "우쭐거리다", "잘난 체하다" 그런 뜻이 됩니다.
둘 다 좀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요.

이 두번째 "驕る(오고루)"에 관해서 일본에 매우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驕る平家は久しからず(おごる へいけは ひさしからず : 오고루 헤이케와 히사시카라즈 = 교만한 헤이씨는 오래 가지 않는다, 즉 일찍 멸망한다.)".

헤이케(平家 또는 헤이씨:平氏)는 12세기 중엽이후 12세기 말에 이르는 약 20년간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가문이며,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인 정권을 수립한 집안입니다.

헤이케(平家)의 동량(棟樑=우두머리)이었던  平 淸盛(타이라 키요모리) 아직 지위가 낮았던 1160년 천황가(天皇家)내의 권력 다툼과 동시에 일어난 귀족(후지와라씨)들의 권력 다툼에 틈타 언제나 승리자 편에서 공을 세워 점차 힘을 키워 나갑니다.


平 淸盛(타이라 키요모리)


귀족들이 권력 다툼 과정에서 연달아 쇠약해지자  平 淸盛(타이라 키요모리)의 위세는 그에 반비례하게 되여, 1167년에는 드디어 귀족들의 최고 관직인 太政大臣(だじょうだいじん:다죠우 다이진 = 영의정에 해당)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이건 무인으로썬 역사상 처음 되는 일이었습니다.

동량(우두머리)인 平 淸盛(타이라 키요모리)의 지위 상승에 따라 헤이씨(平氏) 집안 많은 사람들이 높은 관직을 얻었고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또한 다른 많은 귀족,무인을 탄압하였습니다.
교만하게 된 헤이씨(平氏)의 어느 사람이 "헤이씨(平氏)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고까지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의 최고 권위자인 천황도 포함되었습니다.

1180년 헤이씨(平氏)를 원수(怨讐)로 여겨왔던 源氏(미나모토 씨) 세력이 헤이씨(平氏)를 타도하기 위하여 반란 전쟁을 일으킵니다.

源氏(미나모토 씨)를 진압하는 전쟁 와중에 平 淸盛(타이라 키요모리)가 죽게 되자 더 이상 헤이씨(平氏) 집안은 버티지 못하게 되여 정권과 수도.교토를 포기하여 도망갑니다.

그러나 결국 이 시대의 영웅 源義經(미나모토 요시쯔네)에 의하여 1185년 단노우라(壇ノ浦
, 지금의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에서 멸망합니다.



단노우라(壇ノ浦)


단노우라 전투

그들의 멸망은 결국,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너무 교만하게 되여 스스로 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올해 11월25일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일본 전통 예술 歌舞伎(가부키) 배우인 市川海老藏(이치카와 에비조우:33살)가 술집에서 폭행을 당하여,얼굴이 함몰골절, 앞니가 몇개 부러지고, 눈알을 부상, 뒤통수가 크게 부었다고 합니다. 중상이었습니다.

이날(11월24일)은 원래, 내년 1월의 공연에 관한 기자 회견을 할 예정이었던데 전날 23일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회견을 취소하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海老藏(에비조우)


무대 위의 海老藏(에비조우)

그런데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 심하게 술에 취한 상태에서 폭행을 당하였단 말입니다.(범인은 오늘, 즉 12월11일에 체포되었습니다.)

측과 소문이 파다하는데, 海老藏(에비조우)측에 잘못이 하나도 없었던 건 아닌듯합니다. 오히려 심하게 술에 취한 海老藏(에비조우)가 범인을 조롱하거나, 도발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12월7일, 13일만에 퇴원한 市川海老藏(이치카와 에비조우)는 기자 회견 자리에서,
"今回のことは、自分の驕りが招いたことだと思います(이번 사태는 나의 교만함이 끌어들인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느 이번 사태를 깊히 반성하여 무기한 공연 출연을 삼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기자 회견 모습. 중상이었던데 수술을 잘해서 거의 상처가 눈에 띄지 않아서 그것만은 다행이다.



전통 예술 歌舞伎(가부키)의 가장 인기 높은 배우이면서도, 사생활에서는 많은 여성 이름이 들려 오기도 하였고 심하게 취한 모습이 여러번 보도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생활이지, 개인적인 일이며 전통 예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사실,그런 보도가 여러번 나와도 그는 인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海老藏(에비조우)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를 질투하거나 시새운 사람들의 비방 중상으로 알았었지만, 아닌듯합니다.

아무튼 오늘 폭행 범인이 체포되었던 것이니 점차 진실은 밝혀진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건 海老藏(에비조우)에 있어서도 단죄의 나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海老藏(에비조우)의 얼굴에는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고 합니다.
얼굴 표정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歌舞伎(가부키)에 있어서, 이 사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33살.
재능도 있고, 미남이고, 그의 연기는 훌륭합니다.
이번 사태를 극복하여 그가 더 훌륭한 배우로 되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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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12-12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노우라가 시모노세키였군요. 전 왜 카가와현으로 알고 있었죠...?

ChinPei 2010-12-12 23:41   좋아요 0 | URL
아 그건,헤이씨(平氏) 사람들은 교토를 포기하여 처음은 屋島(야시마:현재의 카가와현 야시마)에 도망쳐 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지요.
1183년 7월에 야시마에 도망쳐 온 헤이씨(平氏) 사람들은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미나모토씨와 싸워 일시기 교토를 다시 탈취할 위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미나모토 요시쯔네의 기습을 맞아 1185년에 야시마도 포기하여 단노우라(壇ノ浦) 근처까지 내려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노우라에서 마지막 결전에 패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BRINY 2010-12-13 18:40   좋아요 0 | URL
아하, 그래서 제가 착각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10-12-1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기카와 에이지가 쓴 헤이케 이야기가 70년대 초반 번역되었는데 이젠 절판되었어요.

ChinPei 2010-12-16 19:19   좋아요 0 | URL
일본어 원문 소설은 지금도 일본에 많이 팔고 있어요.
지금도 다름없이 매우 훌륭한 소설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지요.
그 소설은 아마 "아름다운 일본어"도 볼거리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