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2-73
인류는 평균적으로 봤을 때 20세기 후반 50년 동안 케인스의 낙관적인 기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경제 문제의 해결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전히 요원한 일로 보인다. 2000년에도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OECD국의 1인당 평균 GDP는 100년 전 미국의 1인당 GDP보다 더 작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비극은 6억 명 주민 대부분이 에이즈, 내전, 불안한 정국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보다 한층 더 불편한 발전이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 내 불평등 수준이 높아지면서 성장률이 낮은 지역에서 극빈층이 극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왜 생활 수준의 편차가 아직도 이렇게 큰 걸까? 자본 축적도 그 원인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다수의 연구가 입증하듯이 더 큰 원인은 기술의 차이(또는 '총요소 생산성'의 차이)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는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기술들을 활용할 수 없거나 부유한 나라보다 훨씬 뒤늦게 채택한다. 아이디어의 확산이나 기술적 향상이 전 세계 수준에서 왜 아직 이렇게 느린지는 오랜 논쟁거리이다. 기술 채택에 장벽이 되는 제도적, 정치적 문제들은 분명 중요한 요인이다.
대런 아제모글루와 질리보티가 2001년에 발표한 글을 보면, 그런 장벽이 없다고 해도 신기술과 인간의 능력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때문에 산업화 국가에는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개발도상국에는 '적절하지 않은' 기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에서 이뤄지는 혁신은 숙련 노동자가 필요한 신기술을 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1990년대 IT 혁명을 생각해보라). 고학력 노동자가 부족한 가난한 나라들은 이런 기술적 혜택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므로 선진국에서 개발된 기술을 채택하는 데 제동이 걸린다. 결국 성장을 촉진하는 기관들과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야말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의 핵심이 될 수 있다.
p.76-77
인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삶을 즐기는 데 소비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면 인간이 활용 가능한 모든 시간에서 노동시간뿐 아니라 가사 활동에 쓰는 시간도 제외해야 한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집안일에 대한 장기 추세를 다룬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그린우드와 동료 학자들이 보고한 2005년 수치에 따르면 1930년에 미국에서는 가구당 주 평균 40시간을 집안일로 소비했다. 아헨과 스태퍼드는 2005년에 소득동학패널을 바탕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2001년 기준 미국 기혼 부부가 집안일에 쓰는 시간이 주당 25시간 정도인 것으로 결론지었다. 두 데이터가 상응한다고 가정하면 모든 개인은 하루 1시간 이상 가사 활동의 속박에서 벗어난 셈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본 인프라 및 가전 제품(수돗물,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에서 노동력을 아껴주는 기술 발전이 이뤄졌기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렇게해서 남은 시간 전체가 여가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그린우드의 2005년 연구는 19000년부터 1980년까지 80년간 여성 노동력이 약 28%p 증가한 것은 가정용 기술의 혁신 덕분이었다고 설명한다.
p.88~89
케인스 경제학은 그 자체로 거시경제 정책을 이행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하지만 이런 발전적 변화는 경제 문제 '해결'과는 관련이 없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상품을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근본적인 경제 '모델'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p.157
자본주의란 인간의 가장 악한 특성이 모두가 최대의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가장 악한 일을 할 것이라는 놀라운 믿음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p.171-173
소득 분배와 임금, 이익의 조정은 자본이 노동을 얼마나 쉽게 대체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 대체 작업이 생산 중에 바로 일어나든, 아니면 소비가 노동 집약적인 상품에서 자본 집약적인 상품으로 옮겨가는 중에 일어나든 마찬가지다. 노동이 자본으로 비교적 쉽게 대체될 수 있으면 (전문 용어로 경제 전반의 대체 탄력성이 1보다 크면) 시간이 지날수록 총소득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몫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임금도 상승하겠지만 이윤이 증가하는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케인스가 상상했던 기술 진보와 자본 축적으로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던 세상에서 벌어질 그럴듯한 결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극단적인 예로 로봇이 보편화되면서 인간의 노동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두려움을 들 수 있다. 그런 세상이 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답은 꽤 명확해 보인다. 우리의 손자, 손녀, 혹은 그들의 손자 손녀들이 진정으로 생존 가능한 세상에서 살려면 자본의 소유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만약 자본이 주된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면 이들 모두가, 즉 모두가 자본 소득에 대한 적절한 청구권을 가져야 한다. 자본의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많다. 그 장치가 강제적 저축이든, 보편적 배당이든, 연기금의 확대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독창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이 진전되지 않았다. 다행히 케인스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제도를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윈체스터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도 희망을 걸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세상이 돈을 긁어모으는 다른 백만장자보다 더 앞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만장자들로 가득하다면, 케인스는 여전히 불행할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회가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또 케인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모두가 케임브리지 사도처럼 사는 세상도 달갑지 않다. 경제적으로 행복한 사회에서도 다양성은 삶에 흥취를 더하는 향신료와 같다. 나의 화두인 형평성 구현의 문제가 수정된 경제 체제의 첫 번째 목표가 되어야 하고, 이를 달성하려면 적어도 처음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 재분배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케인스의 화두인 삶을 어떤 내용물로 채우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남을 것이다. 긴급히 채울 욕구가 사라진다면, 새로운 의미의 '직업'교육을 통해 베블런의 장인 본능을 발화할 여지가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혹은 레드삭스와 양키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시샘을 느끼는 경쟁심과 더불어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살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기억하라. "경제적 축복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는 인구 통제 능력, 전쟁 및 시민 분쟁을 피하려는 결의,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과학에 위임하려는 의지,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차이로 결정되는 축적 비율의 네 가지로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p.182
케인스의 미시경제학이 마셜의 미시경제학보다 신고전파 경제학에 더 가깝다고 여겼던 미국인들의 생각과 달리, 케인스는 효율적인 시장 형태로서 원자적 경쟁, 즉 완전 경쟁을 거부했다. 그는 카르텔, 지주회사, 무역협회, 공동출자같이 독점 권력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조하는 정부 정책을 옹호했다. 그래야만 정부가 관련 산업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크로티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적어도 1920년대의 케인스는 국가가 거시경제뿐 아니라 미시경제를 위해서도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당당한 협동조합주의자였다."
강력한 기업 통합과 노조 조직화의 물결이 1930년대에 영국 뿐 아니라 유럽 대륙과 미국에서 다양한 수준으로 발생했다. 미국의 경우 1920년대 초에는 자동차 회사가 수십 개나 됐지만 1930년대 말이 되자 거대 기업 세 곳만 남았다. 1938년에는 미국 산업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과점 조직들이 제기한 기업규제 및 해산 문제를 자문하기 위해 의회가 임시국가경제위원회(TNEC)를 설립했다. TNEC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절부터 리처드 닉슨 임기 때까지 미국을 지배했던 협동조합주의적 색채를 가진 조직으로서 닉슨 시기부터 반독점 해체와 규제 완화 정책, 글로벌 경쟁을 배경으로 조금씩 약화되었다가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