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3 (반양장) - 제1부 한의 모닥불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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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부작 10권으로 쓰인 소설 『태백산맥』의 1부인 권1에서 권3에 대한 소회이다. 1부는 1948년 여수순천사건(여순봉기)을 중심으로 남한단독의 정부수립이 있기까지의 미 군정(美 軍政)치하에서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생존권 마저 빼앗기고 피폐해진 농민의 실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정신의 진보에 역행하는, 자유, 평등, 민주 등 시대적, 인간적 자각의 순리를 차단하려는 소수의 반민중(反民衆)에 의한 혐오와 수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 이 소설은 진정 한국의 현대사라 논평하기도 하였다. 문학작품을 역사서로 칭하는 것은 외람된 평가이기도 하지만 가진 자, 지배자의 시점(視點)이 아닌 절대 다수의 민중이라는 실질적 사회적 토대를 굳게 딛고 서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야말로 최적의 시대 현실 성찰 도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그 추오의 원천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 체화되고 반영된 자기 자각과 반성의 기반을 위한 시작이며, 거꾸로 혹은 퇴행적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한 의식의 연대를 위한 수행(修行)이라 할 것이다. 소설의 소감을 이렇게 역사에 대한 인식들로 쏟아놓게 되는 것은 이야기에 그만큼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지극히 자연스레 독자의 정신세계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매혹적 문장들과 서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걸쭉한 남도 사투리에 스민 가난한 소작농들이 뱉어내는 분노와 한의(恨)의 넋두리와 해방 이후 더욱 극렬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주계층과 친일반민족자들의 악질적 폭력 행태에서 절로 역사흐름의 역행과 사회적 기대가 배반되는 참담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서울 토박이인 내게 소설의 현장인 전남 벌교가 그리 가까이 느껴질 수가 없다. 사람다운 삶을 기대하고 그의 도래를 위해 죽음 앞에 당당히 마주 섰던 사람들의 숨결이 되살아나 지금 내 곁에 있는 듯한 생생한 모습 때문이다. 또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견뎌내던 아내와 자식들, 부모들, 연인들, 동료등 친지들의 진정함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의 눈을 피해 인적 없는 산야를 달리는 청년이 있다. 비밀노동당원 신분인‘정하섭’이 투쟁자금의 조달 거점마련을 위한 행보이다. 한편 벌교와 보성지역의 군당위원장인 ‘염상진’은 벌교를 접수하고 읍장, 금융위원장, 악질지주 등 민중을 착취하던 주구들을 처단하지만 미군의 대대적 지원을 받은 군경의 반격에 쫓겨 지리산 기슭으로 내몰린다. 벌교를 수복한 지주 등 군경세력은 다시금 잔인한 보복 살인을 감행한다. 빨갱이들의 소멸, 그 뿌리까지 없애버리겠다는 강박적 폭력성은 부녀자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지주이지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소작인의 삶을 보듬던 김사용과 그의 차남인‘김범모’는 염상진의 후의에 의해 그들의 처단행위를 피한다. 일정(日政)하에서 염상진과 좌익운동을 함께하던 김범모는 학병으로 끌려갔다 해방으로 귀향한 후 미국과 소련등 제국주의 탐욕을 가린 사상에 불과한 이념(사회주의, 자본주의)의 허위성을 깨닫고 해방된 민중들의 민족적 삶을 위한 화합을 우선적 신념으로 삼게 된다. 이와는 달리 학창시절 염상진, 김범모와 함께 뜻을 같이하던 동료‘손승호’는 인간적 삶의 회복이라는 인본주의적 관념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 투쟁을 비판한다. 조국의 독립과 핍박받는 가난한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을 함께 꿈꾸던 동료들은 이렇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인본주의로 삼분된다.

 

자기 방어를 필요로하는 악질 지주계급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집권을 노리는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이들의 처단과 농지개혁을 통한 민중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는 좌익, 이러한 이념적 갈등보다는 민족적 화합을 우선 이루자는 신념과 무엇보다 인간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상의 혼재는 당대의 사람들을 지배하던 인식의 커다란 범주이다. 해방은 당연히 민중을 위한 세상의 열림일 것이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해방이되자 일신의 안위를 위해 비굴하게 피신했던 일인(日人)의 주구들은 미군정에 의해 다시금 일제의 지위를 계승하게되고 민중은 참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소련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적대적 칼을 휘두를 적임자로 일제의 주구들을 선택한다. 권력의 야욕과 더욱 배부르기 위해 지주계급과 권력지향적 세력인 이승만은 미군정에 아부하고 편승하여 일제 식민지하에서보다 더욱 극렬하게 민중을 착취하고 학대하기 시작한다. 인구의 80퍼센트에 이르는 농민, 특히 착취만 당하던 이들의 80퍼센트인 소작농에게 이것은 역사적 배반이요, 삶과 정의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토지개혁을 미루고 오히려 친일 지주계급과 밀착한 3년 남짓의 미군정 기간이 한국사 이래 최대의 민중학살 시대로 일컬어지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주계급의 반동적 탐욕이 얼마나 격렬하고 악랄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반면에 38선 이북은 소련에 의한 공산세력이 정착하고, 대대적인 농지개혁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일거에 처단해 버린다. 그리고 이북의 악질 지주들, 일제주구들은 이남으로 피신해 온다. 이후 이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구성해 소작농들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가장 잔혹하게 학살하는 주도세력이 되어 우익의 절대적 비호를 받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계급 배경을 지닌다. 민족적 반성이 거부되고 차단된 것으로 부족해서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속하는 역사적 모순에 빠진 한국사회의 부정과 불의의 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대표적 인물로 벌교의 대지주이자 가장 파렴치한 일제주구였던‘최익승’이라는 국회의원이 그려지고 있다. 지방의 소소한 행정은 물론 국정에 이르기까지 사적 이익의 실현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인간, 자신의 이익에 거스르는 인간은 권력을 이용하여 빨갱이로 몰아 파멸시키는 인간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데, 일제의 순사보조였다가 미군정에 의해 벌교읍 경찰서장이 된‘남인태’라는 기회주의적 인간이나, 최씨, 윤씨등 9할의 소작료를 물리던 악덕지주 계급들, 개인적 사리사욕을 위해 살인했던 일개 범법자가 독립투사로 변신하여 좌익색출의 전선대가 되는 청년단장으로 행세하는‘염상구’와 같은 파렴치한들이다. 당시 우익이라는 소수의 반민중 세력이란 이러한 천박성과 비루함, 교활함의 덩어리였다고 해도 결코 과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현대사의 환기라는 진중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재미를 잃지 않게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들에 부여된 뚜렷한 개성, 출중한 인간적 묘사이며, 남도 사투리에 실린 남정네와 아낙네의 투박한 듯 감칠맛 나는 해학의 언어와 남녀상열(男女相悅) 등 사실적 표현들일 것이다. 동학혁명에서 시작된 소작쟁의라는 민중적 한(恨), 생존권 박탈에 몰린 민중적 기대를 배신하고 극소수의 반민중이 또다시 다수의 민중을 노예화하려는 데 대한 모순과 불합리가 내재한 태생적 갈등의 소치가 바로 10.1인민항쟁이요, 2.7구국투쟁이며, 제주 4.3사건이자, 여수순천 사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악질적 기득권을 놓치않으려는 지주계급, 그리고 신탁통치라는 새로운 식민지배자인 미군정에 의해 민중의 삶, 민족의 역사는 퇴보하고, 불의와 수치의 역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일제가 만들어내고 이승만이 본격화시킨‘빨갱이’이라는 터무니없는 민중 배반의 언어가 어떻게 이 사회를 잠식하게 되었는가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수구세력이 반대자를 매장시키기위해 사용하는 이 언어, 이 보이지 않는 사상을 구금하려는 악의적 언어가 설치는 것은 거듭 회오(悔悟)로 가득하게 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역사의 오류, 실패, 봉건적 지주계급을 철파(撤罷)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적 무능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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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작은글씨) -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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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프랑스사회는 몽테뉴, 파스칼 등 걸출한 모럴리스트(moralist)들을 배출했다. 특히 인간 심성에 대한 시니컬하기 그지없는 탐구자인‘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를 제외하고 도덕주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미묘한 심층을 꿰뚫는 504개의 잠언과 대화, 거짓, 취향, 사랑과 삶 등에 대한 성찰로 구성된『잠언과 성찰』이란 이 책의 신랄함을 음미하다보면 더더욱 불완전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민낯을 보게 된다.

 

인간의 심성이란 이렇게 얄궂은 것을, 위선, 거짓, 허영, 자존심과 오만의 가면으로 덧 씌워진 실제를 까발린다.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 속 표지를 장식하는 “우리의 미덕은 대개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는 한 구(句)의 잠언이 이 후에 열거될 인간성 탐사의 결과들이 어떠한 것들일지 선명한 예견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저 어두운 밑바닥에 짙게 깔려있는 알 수 없는 마음과 정신, 그것들의 형태가 어떻게 표현되고 행동되는지를 관찰한 그의 시선이 느껴지고, 그 해학과 풍자의 문장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우선 인간의 자기 반영적 심성의 진실을 얘기한 몇 개의 구절들을 보면 이렇다.

“우리는 남의 불행을 보고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우리에게 결점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고 그렇게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만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오만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본성의 그 천박함, 유치찬란함, 불완전함에 대한 이 모지락스러울 정도의 독언(毒言)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지 않은 것은 무의식에서나마 나란 인간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독특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의 문장이 그저 공감의 끄덕임, 혹은 동의의 자조(自嘲)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관찰과 반성에서 자기 발전의 토대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각성에 있을 것이다. “욕심은 못하는 말이 없고 못하는 역할이 없다. 심지어 욕심이 없는 사람의 역할까지 해낸다.”는 이 잠언이 경계하는 욕심의 무한성, 그 절제의 당위성에 대한 경고라든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억력의 부족에 대해서는 투덜대지만 판단력의 부족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는 정작 자기 인식에 대한 이기적 오류에 대한 심리적 작동의 지적은 미소짓는 가운데 엄중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시원시원하게, 또는 자조적이기까지한 이 해학적 성찰을 읽다보면 관통하는 몇 개의 심리적 관념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허영심, 자존심, 그리고 욕심(이기심)이라는 정서와 감정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고 왜 기뻐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오만에 왜 불쾌해 하겠는가?

호기심이라는 감정의 정체를 보자.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가게 만드는 사욕에서 비롯되는 호기심과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교만에서 오는 호기심, 이것들 역시 허영과 자존심, 이기심의 결정체 아니던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재물을 경멸하는 사람은 많지만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라는 이 잠언을 과연 부정하기 수월한가? 그리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흘리는 것은 자신을 한탄하며 우는 것, 그 소중한 사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던 호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라는 슬픔 속에 감추어져 있는 위선의 정체역시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선한 행위에 조차서도 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이럴진대 그렇지 못한 우리들의 많은 행위의 은닉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구차스러움이 될 것이다.

 

한 두 구절의 짧은 이같은 촌철살인(寸鐵殺人) 의 잠언과 달리 각각의 주제마다 수 폐이지에 걸쳐 기술한 성찰편의 사색들은 또 다른 관심을 지펴낸다. 요즘 한창 불통(不通)의 정치를 하는 지배권력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이나 TV 정치토론에서 접하게 되는 대화의 미성숙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대화가 즐겁지 못한 이유”에 대한 성찰에서 모두가“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대화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허식이라는 지적이나, 흉내, 즉 눈에 보이는 남의 것을 따라하는 행위에 내재한 불확실과 불충분성의 한계를 통한 외관 중시로 인한 자기 상실의 폐해에 대한 기술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시사성을 지니고 시대의 윤리방향을 제시해준다.

 

또한 <사랑과 바다에 대하여>와 <사랑과 삶에 대하여>라는 두 편의 사랑에 대한 성찰은 격정과 행복, 고통과 무력감의 양면성의 빼어난 비유의 해석을 비롯해서 매일 조금씩 우리의 젊음과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시간에 대한 통찰을 통한 본질적 유사성의 탐사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단순하면서 긴 이해의 여운을 던져주기도 한다. 가히 시대를 넘어선 인간 심성의 진면목을 키득거리며 읽게 하는 독특한 도덕책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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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정글만리 1 + 태백산맥 핸디북 세트 (전10권) - 전11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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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이 소설은 지금 우리사회를 침식하고있는 이식된 주의(ism)들의 갈등, 그 혐오와 수치의 현대사를 마주하게 한다. 불의한 자와 파렴치한이 지배자가 된 오욕의 사회, 가히 한국의 현대 민중史라 할 수 있는 거장의 대작을 다시금 기념판본으로 접하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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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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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을 마치 고유한 사적 영역으로만 치부하려는 것은 비겁하거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라는 구조물이 뿜어내고 있는 시대정신이나 사물에 대한 현상은 직간접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선택의 결정을 종용한다. 그래서 어떤 개인의 행위는 지극히 사적인 의지이기도 하지만 공적인, 사회적 욕망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무릇 무수히 회자되어 온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르주 뒤루아(애칭‘벨아미’)라는 청년의 혐오스러울 정도의 욕망의 집착을 사회전반의 도덕적 감각의 붕괴를 떠나서는 이해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 인식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욕망의 사적(私的) 이해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즉 삶이 추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신념이 백인백색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사랑이 될 수도, 재화가 될 수도, 명예나 지위, 아니면 삶의 이면인 죽음, 허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의 윤리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이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내면이자 속성일 것이고, 이에따라 개인들은 자신만의 이상적 욕망을 내면화 시킬 것이다. 21세기 오늘 사람들의 최고 가치이자 신앙이 된 돈(Money)에 대한 추구가 바로 이 시대의 윤리 의식을 지배하는 것처럼.

 

제대 군인인 가난한 시골 청년‘조르주 뒤루아’에게 물질과 환락이 넘쳐나는 부와 권력의 중심지인 파리는 욕망 실현의 무대이다. 갈증을 물려 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위해 저녁시간까지 주린 배를 참아야 하는 빈한한 사정은 도심을 방황하게 한다. 그러나 활짝 핀 어깨와 하사관다운 늠름한 청년의 가면을 쓰고서. 세상은 외관을 중시하니까. 기회는 정말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군대의 옛 동료를 만나고 그의 호의에 의해 신문사의 보조 기자 자리를 얻게 된다. 정치부장인 친구의 만찬초대는 상류사회의 대면이 되고, 삶의 지리멸렬함에 몸부림치는 사교계의 귀부인들은 빼어난 미모의 청년에게 은밀한 호감과 유혹의 날개짓을 보낸다.

 

귀족적 고아한 자태와 모호한 관능적 향기를 발산하는 친구 포레스티에의 아내 마들렌, 고매한 귀족 감찰관의 아내인 클로틸드 드 마렐 부인, 신문사의 왈테르 사장 내외, 그리고 신문사의 투자자이자 장관직을 노리는 야심가 라로슈 마티외 등 사교계 상류인사들의 만찬은 은밀하고 음흉한 욕망들의 교환으로 끈적인다. 이것은 청년 뒤루아에게 욕망의 사다리를 올라설 수 있는 기회의 무대가 된다.

청년은 삶의 지루함과 권태에 지쳐 새로운 자극을 위해 눈을 반짝이는 상류사회 여인들의 내밀한 욕구를 이용한다.

 

먼 외지를 떠도는 감찰관의 아내인 클로틸트(드 마렐 부인)는 뒤루아와의 정욕에 빠져들어가고, 남의 이목을 피해 둘 만의 밀회장소를 갖기에 이른다. 가난한 정부(情夫)인 뒤루아의 주머니에는 용돈이 주어지고, 정치와 경제적 야망을 위해 결탁된 신문사의 음험한 욕망에 적응하며 기회주의적 능력을 높이 산 사장은 그를 사회부장에 발탁한다. 폐질환을 앓던 정치부장인 친구 포레스티에는 요양을 위해 휴직하지만 이내 죽음에 이르고 만다. 벨아미는 출세를 위한 내조자로서 더할나위 없는 친구의 부인인 마들렌에 청혼하고, 역시 자유분방한 야심가인 여자는 이를 수락하고 결혼에 이른다.

 

여기서 21세기 여성들의 결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의외의 발언을 접하게 된다. 사적 자유와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하는 마들렌의 혼전 서약조건이다. 상호 존중과 동등함에 대한 선언이다. 단지 가정을 지키며 남편을 보좌하는 전통적 아내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대의 합류적 사랑이라는 친밀감과 호혜성에 의거한 결혼관의 비극이 발견되는 어떤 확신이자 재미가 아닐까? 한편, 도약을 위한 수단으로서 뒤루아에게는 굳이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없다. 여자는 늦게 귀가하여 남자에게 날것의 정치적 정보를 들려주고 기사화하도록 종용한다. 이것은 실로 중층의 의미를 지닌다.

 

여자가 가져오는 발표되지 않은 정부의 정책, 마들렌은 뒤루아를 이용한 일종의 언론 몰이를 하는 것이고, 정보의 발원지는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는 부패한 상류사회의 이해관계자들일 것이다. 그것은 여자의 부정(不貞)을 암시한다. 정책을 조작하고 거짓 정보를 흘려 민중의 희생을 올라타고 부와 권력의 독점적 획득을 위한 음모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뒤루아의 자각은 경찰을 동행한 치밀한 준비에 의해 아내 마들렌과 외무장관 라로슈 마티외의 간통현장을 급습하게 한다. 사회적 동정의 시선을 업고 정치무대에 강력한 인상을 제공하는 신문기자다운 야심적 실천인 것이며, 부와 권력을 위한 정치와 언론의 더러운 유착의 세계를 역이용하는 교활함을 터득한 것이다.

 

이제 벨아미(뒤루아)의 뒤틀린 욕망은 거침없이 질주하고, 그것은 언론을 이용해 식민지 침공정책의 허위정보를 흘림으로서 국공채가격의 조작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재한 신문사 사장인 왈테르가를 향한다. 신문사 사장의 정숙한 부인을 유혹하여 정욕으로 파멸시켜나가고 자신의 지위와 명예, 재산을 축적해가는 수단으로서 그들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부패한 당대 상류사회에 대한 처절한 복수일지도 모른다. 왈테르의 여식 쉬잔과의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정부였던 '드 마렐'부인 에 대한 사랑의 재회를 기대하는 상상은 이것의 암시이지 않겠는가?

 

소설의 가지는 이처럼 정욕에 허우적대는 여인들의 고통스러운 사랑, 부정함이 사회의 저변을 이룬 부르지와 계급의 파렴치한 부의 축적 방식, 식민지 침탈을 통한 국부의 확보와 같은 비열한 정신이 인간정신을 가득채운 시대의 추오라는 세 개의 방향으로 뻗어있다. 그러나 이 가지들은 하나의 뿌리에 연원하는 것 아니던가?

결국 이러한 비열함을 눈뜨게 하는 것 또한 사회 전반을 침식하고 있는 불륜, 부정, 위선, 기만이 토대이다. 여인들의 성적 부정 또한 이러한 사회적 토대에서 자라난 것이며 오직 자신들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조작하는 허구로서의 기만적인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의 밀애는 완전히 동질적인 다른 형상에 불과할 것이다. 사랑, 신뢰, 정의가 붕괴된 시대의 적나라한 현실을 감각적 문장에 지펴낸 걸작 인간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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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그 격렬하고 환상적인 세계, 그리고 심리적 방향 상실과 감정을 마비시키는 너무도 아픈 실연의 시간,  사랑의 고통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며 진정 `사랑 하는` 것으로의 이행,  신뢰와 헌신, 긴 노력, 그리고 기쁨에 다가서는 상처를 허락하는 것, 사랑이란 보답없는 것에 대한 사랑임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장을 통해 독자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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