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3 (반양장) - 제1부 한의 모닥불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은 4부작 10권으로 쓰인 소설 『태백산맥』의 1부인 권1에서 권3에 대한 소회이다. 1부는 1948년 여수순천사건(여순봉기)을 중심으로 남한단독의 정부수립이 있기까지의 미 군정(美 軍政)치하에서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생존권 마저 빼앗기고 피폐해진 농민의 실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정신의 진보에 역행하는, 자유, 평등, 민주 등 시대적, 인간적 자각의 순리를 차단하려는 소수의 반민중(反民衆)에 의한 혐오와 수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 이 소설은 진정 한국의 현대사라 논평하기도 하였다. 문학작품을 역사서로 칭하는 것은 외람된 평가이기도 하지만 가진 자, 지배자의 시점(視點)이 아닌 절대 다수의 민중이라는 실질적 사회적 토대를 굳게 딛고 서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야말로 최적의 시대 현실 성찰 도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그 추오의 원천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 체화되고 반영된 자기 자각과 반성의 기반을 위한 시작이며, 거꾸로 혹은 퇴행적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한 의식의 연대를 위한 수행(修行)이라 할 것이다. 소설의 소감을 이렇게 역사에 대한 인식들로 쏟아놓게 되는 것은 이야기에 그만큼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지극히 자연스레 독자의 정신세계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매혹적 문장들과 서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걸쭉한 남도 사투리에 스민 가난한 소작농들이 뱉어내는 분노와 한의(恨)의 넋두리와 해방 이후 더욱 극렬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주계층과 친일반민족자들의 악질적 폭력 행태에서 절로 역사흐름의 역행과 사회적 기대가 배반되는 참담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서울 토박이인 내게 소설의 현장인 전남 벌교가 그리 가까이 느껴질 수가 없다. 사람다운 삶을 기대하고 그의 도래를 위해 죽음 앞에 당당히 마주 섰던 사람들의 숨결이 되살아나 지금 내 곁에 있는 듯한 생생한 모습 때문이다. 또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견뎌내던 아내와 자식들, 부모들, 연인들, 동료등 친지들의 진정함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의 눈을 피해 인적 없는 산야를 달리는 청년이 있다. 비밀노동당원 신분인‘정하섭’이 투쟁자금의 조달 거점마련을 위한 행보이다. 한편 벌교와 보성지역의 군당위원장인 ‘염상진’은 벌교를 접수하고 읍장, 금융위원장, 악질지주 등 민중을 착취하던 주구들을 처단하지만 미군의 대대적 지원을 받은 군경의 반격에 쫓겨 지리산 기슭으로 내몰린다. 벌교를 수복한 지주 등 군경세력은 다시금 잔인한 보복 살인을 감행한다. 빨갱이들의 소멸, 그 뿌리까지 없애버리겠다는 강박적 폭력성은 부녀자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지주이지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소작인의 삶을 보듬던 김사용과 그의 차남인‘김범모’는 염상진의 후의에 의해 그들의 처단행위를 피한다. 일정(日政)하에서 염상진과 좌익운동을 함께하던 김범모는 학병으로 끌려갔다 해방으로 귀향한 후 미국과 소련등 제국주의 탐욕을 가린 사상에 불과한 이념(사회주의, 자본주의)의 허위성을 깨닫고 해방된 민중들의 민족적 삶을 위한 화합을 우선적 신념으로 삼게 된다. 이와는 달리 학창시절 염상진, 김범모와 함께 뜻을 같이하던 동료‘손승호’는 인간적 삶의 회복이라는 인본주의적 관념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 투쟁을 비판한다. 조국의 독립과 핍박받는 가난한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을 함께 꿈꾸던 동료들은 이렇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인본주의로 삼분된다.

 

자기 방어를 필요로하는 악질 지주계급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집권을 노리는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이들의 처단과 농지개혁을 통한 민중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는 좌익, 이러한 이념적 갈등보다는 민족적 화합을 우선 이루자는 신념과 무엇보다 인간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상의 혼재는 당대의 사람들을 지배하던 인식의 커다란 범주이다. 해방은 당연히 민중을 위한 세상의 열림일 것이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해방이되자 일신의 안위를 위해 비굴하게 피신했던 일인(日人)의 주구들은 미군정에 의해 다시금 일제의 지위를 계승하게되고 민중은 참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소련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적대적 칼을 휘두를 적임자로 일제의 주구들을 선택한다. 권력의 야욕과 더욱 배부르기 위해 지주계급과 권력지향적 세력인 이승만은 미군정에 아부하고 편승하여 일제 식민지하에서보다 더욱 극렬하게 민중을 착취하고 학대하기 시작한다. 인구의 80퍼센트에 이르는 농민, 특히 착취만 당하던 이들의 80퍼센트인 소작농에게 이것은 역사적 배반이요, 삶과 정의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토지개혁을 미루고 오히려 친일 지주계급과 밀착한 3년 남짓의 미군정 기간이 한국사 이래 최대의 민중학살 시대로 일컬어지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주계급의 반동적 탐욕이 얼마나 격렬하고 악랄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반면에 38선 이북은 소련에 의한 공산세력이 정착하고, 대대적인 농지개혁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일거에 처단해 버린다. 그리고 이북의 악질 지주들, 일제주구들은 이남으로 피신해 온다. 이후 이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구성해 소작농들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가장 잔혹하게 학살하는 주도세력이 되어 우익의 절대적 비호를 받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계급 배경을 지닌다. 민족적 반성이 거부되고 차단된 것으로 부족해서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속하는 역사적 모순에 빠진 한국사회의 부정과 불의의 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대표적 인물로 벌교의 대지주이자 가장 파렴치한 일제주구였던‘최익승’이라는 국회의원이 그려지고 있다. 지방의 소소한 행정은 물론 국정에 이르기까지 사적 이익의 실현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인간, 자신의 이익에 거스르는 인간은 권력을 이용하여 빨갱이로 몰아 파멸시키는 인간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데, 일제의 순사보조였다가 미군정에 의해 벌교읍 경찰서장이 된‘남인태’라는 기회주의적 인간이나, 최씨, 윤씨등 9할의 소작료를 물리던 악덕지주 계급들, 개인적 사리사욕을 위해 살인했던 일개 범법자가 독립투사로 변신하여 좌익색출의 전선대가 되는 청년단장으로 행세하는‘염상구’와 같은 파렴치한들이다. 당시 우익이라는 소수의 반민중 세력이란 이러한 천박성과 비루함, 교활함의 덩어리였다고 해도 결코 과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현대사의 환기라는 진중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재미를 잃지 않게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들에 부여된 뚜렷한 개성, 출중한 인간적 묘사이며, 남도 사투리에 실린 남정네와 아낙네의 투박한 듯 감칠맛 나는 해학의 언어와 남녀상열(男女相悅) 등 사실적 표현들일 것이다. 동학혁명에서 시작된 소작쟁의라는 민중적 한(恨), 생존권 박탈에 몰린 민중적 기대를 배신하고 극소수의 반민중이 또다시 다수의 민중을 노예화하려는 데 대한 모순과 불합리가 내재한 태생적 갈등의 소치가 바로 10.1인민항쟁이요, 2.7구국투쟁이며, 제주 4.3사건이자, 여수순천 사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악질적 기득권을 놓치않으려는 지주계급, 그리고 신탁통치라는 새로운 식민지배자인 미군정에 의해 민중의 삶, 민족의 역사는 퇴보하고, 불의와 수치의 역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일제가 만들어내고 이승만이 본격화시킨‘빨갱이’이라는 터무니없는 민중 배반의 언어가 어떻게 이 사회를 잠식하게 되었는가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수구세력이 반대자를 매장시키기위해 사용하는 이 언어, 이 보이지 않는 사상을 구금하려는 악의적 언어가 설치는 것은 거듭 회오(悔悟)로 가득하게 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역사의 오류, 실패, 봉건적 지주계급을 철파(撤罷)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적 무능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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