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장편소설 가면의 고백을 다시금 읽게 된 동기가 있다. 철봉에 매달린 동급생 오미(omi)의 상체에 대한 매혹을 바라보면서 화자인 가 떠 올리는 인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 성 세바스찬(St. Sebastian)으로 비롯된 일종의 모방작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를 피사체로 하여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이 촬영한 동명의 사진에 가해지는 논의들에 대한 어떤 확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분히 키치(kitsch)적인 이 사진작품과 함께 사진작가 호소에 에이코(細江英公)’가 미시마 유키오를 피사체로 촬영, 1963년 간행된 나체 사진집 장미형(薔薇刑)은 여성의 나체와 달리 대상화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주체화되며 우상화되려는 미시마의 의식을 해독하는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사진집의 표지는 피사체를 객체화하려는 사람의 시선을 제압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미시마의 사진으로 꾸며져 있는데, 바로 이 미시마의 시선에 내재된 의미의 독해가 그의 첫 장편소설인 가면의 고백이 진정 무엇을 말하려했는가에 대한 상보적(相補的) 재료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사진: 細江英公(호소에 이이코)撮影三島由紀夫를 피사체로 한 裸体 写真集 表紙

      

미시마 유키오의 반()자전적 작품으로 읽히는 이 소설은 화자인 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 이에 대한 자의식의 끝없는 정상화라는 자기기만과의 투쟁, 그리고 성적 자기실현에 이르는 시련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나의 모든 존재는 모종의 이교도적인 환희로 뒤흔들렸다. 내 피는 끓어오르고 내 육체의 기관은 분노의 빛으로 넘실거렸다. ...(중략)... 나의 내부로부터 어둡고 번쩍거리는 것이 빠른 걸음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중략)... 아득한 도취와 함께 튀어올랐다.” (출처: 문학동네 가면의 고백P 48 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사온 화보집에 실린 귀도 레니의 그림, <성 세바스찬>을 보고 최초의 ejaculatio(射精)를 경험하는 묘사이다. 이것은 탄탄한 근육질의 어깨와 가슴을 지닌, 또한 금지의 반역자이기도 한 동급생 오미의 육체에 대한 성적 갈망과 분출에 연결되어 혼란스러운 그의 성적 정체성을 묘사한다. 자신과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는 다른 자신의 발견인데, 결코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그들의 호기심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남자아이가 혼자일 때 느끼는 것을 추리하기위해 수많은 소설들에 이야기되는 인생의 모습들을 세심하게 읽기까지 한다.

    

 좌측: Guido Reni , St. Sebastian, 우측: 三島由紀夫 St. Sebastian

 

결국 내 관심사는 일견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적 상()이기도 한 소설의 화자가 동성의 남자에게만 육체적 욕망을 지니는 자기이해로부터 시작된 외견적 연기와 내면의 기만과 저항, 그리고 수용의 반복을 거듭하며 세상의 윤리적 시선을 어떻게 포섭해 나가느냐는 문제이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화자의 정체성 성숙의 중간 기착지, 그 경유의 지대로 적절할 것 같다.

 

“....(전략)...남의 눈에 나의 연기로 비치는 것이 나로서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고, 남의 눈에 자연스러운 나로 비치는 것이 곧 나의 연기라는 메커니즘을 그 무렵부터 나는 희미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육체적 감각에 대한 불안, 완벽하게 자신의 천성을 배반하기 위한 의식적인 연기에 돌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거짓된 육감의 인공적인 합금으로만 이루어진 감정으로만 바라보던 여자”, 즉 위장된 연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이 뒤흔들리는 듯한 슬픔의 감정으로 느끼게 됨으로써 전환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남성 고유의 정체성으로 향하려는 의지의 시작이라는 자기의식의 강요에 불과하다. 그의 침잠한 내면의 소리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비열한 욕망이라는 것을 품어 본적 없는 너 자신을 잊어버릴 셈인가? 소노코의 벗은 몸을 상상해 본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하고 묻는다. “애초에 육체적 욕망에 전혀 뿌리를 두지 않는 사랑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명백한 배리(背理)가 아닌가?” 가 답변일 것이다. 이제 소설의 서사적 진전은 잠시 미루고, 욕망과 금욕, 수난과 속죄, 고통과 황홀, 남성의 동일화와 여성의 동일화 사이에 존재하는 귀도 레니<성 세바스찬>이 지닌 성을 넘어선 도상학적 양의성에 반발, 강력하게 반시대적 남성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성 세바스찬>을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가 표현한 이 그림이 페미니즘으로부터의 이의신청을 받아야 하는 그야말로 순전한 마초이즘의 발산에 불과하며, 성적인 시각의 한 가지 편향을 뒷받침하는 그런 것이기만 할까하는 의문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충분한 요소들과 증거가 있다. “성 세바스찬의 그림에 매혹당한 이래로 나는 벌거숭이가 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머리위에서 교차시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중략)... 그러자 내 시선이 겨드랑이로 향했다. 불가해한 정욕이 솟구쳐 올랐다.” 가면의 고백에 등장하는 몽상의 문장이다. 평자들은 이 몽상을 몰래 엮어 넣은 것이 미시마가 표현하고 있는 <성 세바스찬>이며, 이것은 찍히는 대상이 우위를 확보한 대상화의 전도(顚倒)라고까지 한 장미형의 미시마와 함께 남근중심적 성의 문화사회적 왜곡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의 화자가 하는 내적 의식과 행위는 생물학적이 아닌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성()에 순응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노코의 청혼을 비겁하게 거절하고 나서 타인의 아내가 된 소노코와의 재회이후 재개되는 만남의 마지막 장면인 댄스장에서의 한 묘사를 보자. 앞에 앉아있는 소노코를 잊고 울룩불룩한 팔 근육의 젊은 남자에 시선이 빼앗겼던 화자가 마침내 두 사람의 재회가 끝나는 시간, 젊은 남자가 있었던 해가 들이치는 의자 쪽을 훔쳐보는 시선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젠더, 사회적 규정을 배반하는 것이다.

 

성적 시각의 편향을 고착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며, 성의 대상화를 남성인 자신의 나체를 통해 부인하려는 역설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자신의 인공적 정상성이라는 인위적 연출이라는 위험한 작업에 소노코를 끌어들인 것을 자각, 성찰하는 것에서도 화자의 최후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을 무익하고 정교한 하나의 역설이라고 인식했던 미시마의 시적 이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지 않을까? 다름의 자기 인정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타자의 피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낸 배리(背理:역설)의 미학, 혹은 의지의 미학이라 부름이 타당치 않을까? 아니 육체와 인간의지의 치열한 투쟁의 그 공존과 균형을 향한 미학이라 하고 싶다. 오늘 우리들은 이해의 다름에 더욱 넓은 시선을 갖도록 요구되는 환경에 있다. 시간의 변화, 시대의 감각적, 지적 수용의 변화는 인식의 확장을 또한 요구한다동성애등 퀴어가 시대의 어휘가 된 요즘 다시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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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근대 - 소리.신체.표상 감각의 근대 1
쓰보이 히데토 지음, 박광현 외 옮김 / 어문학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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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에서 이 책의 목적은 감각을 통해서 사고나 언어의 의미를 다시 묻고 혹은 사고나 언어가 어떻게 감각이나 감성을 구축해왔는지를 물어, ‘근대화 과정속에서 감각의 문제가 어떤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감각이 표현해내는 현상들과 감각관련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 그것의 현재적인 문제성을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분열된 감각의 균형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오늘 우리네 사회를 소셜 미디어, 인터넷의 가속도적인 보급으로 독서, 문자 문화의 쇠퇴와 감각편중의 세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진단이지만 또 한편으론 옳지 않다. 네트워크 사회가 지니는 확산과 획일성으로 오히려 감각은 균질화되고, 통제되고 있다할 수 있으며, 개인과 개인의 접촉(오감에 의한) 감소로 인해 감각의 현재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감각이 지식과 정보라는 정신세계에 떠밀려 열등한 것으로 폄훼되고 있다고까지 생각된다. 이처럼 실재적 감각의 상실은 혐오, 비혼, 혼밥과 같은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어휘가 상징하는 그것일 것이다. 즉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피곤함, 불안으로 타자성을 잃어버리는 삭막한 세상을 낳고 있지 않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색채와 물질, 정신세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관통하며 일본이 근대화의 세례를 받던 시기이다. 책은 바로 이 시기의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그네들의 삶에 침입, 투영되었던 감각의 수용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래서 오늘 우리네 사회문화적, 정치적 이해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기반으로서의 의미 있는 검토 주제가 되어준다.

 

1. 자의식 없는 관찰자들의 세계

 

책은 <고양이의 관상학>이라는 제목으로 제 1장을 연다. 1905년에 집필되고 1907년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인 고양이가 관찰한 상황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고하는 사생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즉 발화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가 보고, 들은 것을 재현(쓰는)하는, 방관자로서의 고양이 시점으로 인해 지극히 정치적인 논의를 예견케 한다. 자아를 향한 물음, 자기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고양이, 자기 상실과 맞바꿔 타자를 식별하려는 시선과 그 정열에서 근대적 병리의 뿌리를 발견하는 저자의 해독은 오늘 우리네 메마른 지식의 오만함으로 젠체하는 몽매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를 읽는 세련된 기술만 읽힌 자의식이 결락된, 또한 권력장치에 의한 시선 관리에만 능한 현대인의 초상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당대 근대 일본인들은 감시하고 식별하는 관찰자의 시선, 외면이 내면을 규정하는 방관자적 이기주의에 능한 인간의 계발이라는 기술적이고 처세적인 경쟁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또한 관찰이라는 시선의 일방통행성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비평만을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인간을 양산했으니 이 역시 오늘의 우리네 지식인의 모습과 닮아있어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등장인물인 하네다 하나코를 묘사하는 고양이의 주절거림에 얽혀있는 골상학, 황금률, 악명 높았던 롬브로소의 범죄인 식별학과 같은 인종과 계층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서구의 의사 과학이 시선의 계층성, 시각적 권력의 고착화를 자연화하고 갱신하는데 공헌하였음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그야말로 음험한 지식의 기술적 사용의 이기성을 확인하는 수확을 얻게도 된다.

 

이 관찰자적 시선의 성찰은 제2장에서 계속되는데,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의 화자이자 청자로 등장하기도하는 탐정 다가와 게이타로를 통해 범례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이 노골적으로 구상되고있는 그 공허함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자기목적화한 탐정행위의 속성인 훔쳐보기의 증상에서 혐오와 폭력의 역겨움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낯선 해독이 아닐 것이다. 탐정의 숨겨진 욕망에 대상이 되는 여성 지요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소름이 돋는다. 한편 본 장의 <도시의 표정을 읽는다>는 절()에서 고찰하고 있는 이주민이 몰려드는 대도시 도쿄의 담론을 통해 전락하는 당대의 인간군상을 대면하는 것도 또다른 사유의 단초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2. 타자를 상실한 나르시즘, 그리고 키치

 

잘 알려진 소설 묵동기담의 작가 나가이 가후가 도쿄 최대의 사창굴인 다마노이의 골목세계에 대한 추억의 변을 시작으로 하는 3<주니카이의 풍경>에 이르면, 1890년에 세워진 정식명칭 료운카쿠로 불리는 아사쿠사의 12(주니카이)짜리 도쿄내 최고층 건축물()과 그 아래의 난삽한 미궁세계가 어울려 빚어내는 근대 일본의 나르시즘과 거세될 수밖에 없었던 치부를 비춘다. “주니카이는 도쿄 명물인 기묘한 말뚝 버섯, 포경상태의 음경이라고 읊었던 가네코 마쓰하루의 시()처럼 꿈과 환영이 쌓아올린 빈약한 남근으로서의 근대 일본인의 시선, 그 욕망을 엿보게 한다. 자기를 상실한 세계의 음영을 바라보는 오늘의 내 시선이 교차하며, 서울의 저 높은 쾌락의 고도가 떠오른다.

 

, 이 책의 모든 장()을 얘기할 의도는 없다. 감각(感覺)의 표상으로서 내게 어떤 사유의 꿈틀거림을 제공했던 부분을 언급하려는 것뿐이다. 사실 시와 사진예술을 통해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는 4<향수의 시각>이나, 역시 잃어버린 근대 이전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5<산과 시네마>는 내게 동시대성의 담론을 발견해내는데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로소 시각적 표상이 아닌 촉각을 탐색하는 6<손가락 끝의 시학>을 만나게 된다. 1917년 발표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에서 발견되는 초점화된 촉각에 의한 관능과 위로의 모티브로부터 한 개인의 퍼스낼리티로 통합되지 못하고 페티시한 쾌락에 머물러 있는 단편화와 나르시스적 병성(病性)이라는 유동화의 도취감을 당대의 정신으로 읽어내는 부분은 꽤 강한 이미지로 남는다.

 

특히 발생학적으로 아포토시스(apotosis; 計劃細胞死)에 의해 손이 형성되는 생명과학이론으로부터 손가락 끝의 촉각이 자멸, 자기상실이라는 상실된 통증을 댓가로 예민함, 세계와 타자와의 접촉능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발상은 접촉(touch)이라는 촉각이 타자와의 정서교감이라는 타자성의 시작이자 본질이 아닐까하는 심적 믿음까지 가져온다. 인간 피부의 인류학적 권위자인 애슐러 몬터규가 쓴 터칭(Touchng)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초기 발달과정에서 꼭 겪어야 하는 촉각 경험이 떠오른다. 타자와의 소통은 물론, 평화와 화합을 유지하는 데 촉각행위의 경험을 강조하는 이 문장은 오늘 소외와 관계의 피로에 시달리는 우리네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회복되어야 할 촉각의 절대적 배려와 신뢰의 손길, 그 타자성의 지고함을 말이다.

 

가면의 고백을 쓴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피사체가 된 그의 나체 사진집인 장미형의 사진을 중심으로 촉각적 시각사디즘=마조히즘의 자상증후군에 시달리는 근대 일본인의 비틀린 초상을 독해하는 6<세바스찬의 피부>는 후각을 얘기하는 8장과 9장과 함께 이 책의 백미(白眉)중 백미라 하고 싶다. 더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금색의 죽음(金色)과 함께 타자의 시선에 의해 소유, 객체화되지 않으려 하는 자기애적 기호와 마초적 남성성의 모순적 충돌을 통해 근대일본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해독해내는 부분은 교양주의의 노예가 된 일본문화의 추악한 모방성의 질타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모조품의 근대, 키치(kitsch)로서의 근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예술창조 의지조차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 일본에 넘쳐났던 빈 수레와 같은 졸부취미의 요란함은 역시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랜 도상학적 규범이 축적된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찬의 순교를 모방한 미시마 유키오의 남근중심적 일탈의 사진은 새로운 의문을 갖게 한다. 촉각, 통각적 세계가 추방된 일방통행적 섹슈얼리티의 강고한 요구를 보는 세평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와는 달리 1981년에 발표된 페미니스트 작가인 마쓰우라 리에코가 쓴 소설 세바스찬의 여주인공인 마조히스트 마키코를 통해 표현하는 그 거부는 지금의 미투와 더불어 신체에 성이 제한되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네의 타자 접촉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동경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자연법칙을 생각게 한다. 다른 성과 성차이를 배제한 미시마와 다니자키를 일신한 오늘의 믿음과 가치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3. 후각, 계급화, 젠더화 - 그 차별의 감각

 

책의 마지막장을 이루는 8<맡아지는 언어로>9<향기로운 텍스트>는 근대의 신체와 후각표상이라는 부제처럼 시각중심주의에서 주변부위로 밀려난 후각에 내재하는 굴절된 편견과 계층화와 같은 권력 기호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당대의 문화정치적 추이를 따라가며 사회적 시선의 확장을 위한 커다란 논의라 하겠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면서 당대 도쿄의 악취는 사람들의 공통화제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곧 도시민의 감수성 및 모럴로 이전되고, 편견적 담론이 통속적으로 과학화되어 차별화, 계층화라는 후각의 정치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결국 냄새가 위생이나 경제상의 부()의 가치를 짊어지게 됨으로써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폄하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냄새는 악취라는 공공감각이 되어 저급한 계급의 상징이 되고, 에로스적 감각을 일으키는 향수라는 인공적 향기는 개별 감각이 되어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이 냄새가 세기말 퇴폐주의와 함께 낭만화 극화하는 요소로 변질되는 것에서 자연주의와 상징주의가 혼합되어 유입된 일본의 근대 문학과 예술 세계는 근대인의 감수성의 상징으로 반전시키는 퇴화 병리의 증후를 보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냄새가 사적인 관계나 나르시스적인 신체 영역에서 이탈하여 널리 공유되면 즉시 불쾌한 악취로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계급을 분절하는 권력의 기호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간바라 아리아케라는 시인의 1905년에 발표된 자서(自序) 속 한 구절을 보면 당대 후각에 대한 양의성 논란, 즉 감각표상의 악전고취를 보게된다.

 

... (전략) ...

영혼의 향미(香味)를 느끼는 것은 악취를 맡는 관능이다.

후각을 비관(卑官)이라 칭함이란 절실한 관능의 힘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말이리라.

 

더욱 흥미로운 논의는 색, 형태, 소리처럼 재현하거나 재생될 수 있는 감각과 달리 재수용되는 것이 불가능한 냄새를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기록의 영역이 아닌 기억의 영역인 냄새를 도식화려는 것, 냄새의 언어화에 대한 몽상에 짙게 드리운 에로스적 표상에의 편입을 통한 고상화는 꿈틀거리는 남성적 욕망의 굴절된 젠더의식의 비대칭성을 발견케 한다. 다시금 회귀한다. 냄새를 맡아서 구별하는 남자, 여자라는 향기로운 텍스트를 해독하는 남자, 포로노그라피의 무대를 발견한 것이다. 결국 냄새는 계층화, 성차별, 인종의 구별과 같은 위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이 두 개의 장은 후각에 대한 넘칠 듯 풍부한 담론과 문학작품의 인용으로 빼곡하다. 에밀 졸라의 나나,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에서부터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 다무라 도시코의 여작가(女作家선혈(生血),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女學生)에 이르기까지 냄새와 향기에 어린 문화적 해독의 다양함에서 인간과 그 사회의 정치적 욕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책은 감각의 기원을 통한 탐색을 통해 인간과 그 사회가 감각을 어떻게 문화적, 사회정치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인식하고 표출하는 감각의 지형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수하게 인용, 분석되는 소설과 시, 그리고 예술작품과 도시풍경의 산책을 제시하여 근대 문학에 대한 비교문학적 읽기와 문화비평서로서의 탐구 기틀도 마련해주고 있으니 가히 즐겁게 생각하는 독서가 되어줄 터이다. 내겐 읽는 동안 감각과 타자성의 회복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사유가 떠나지 않았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가 감각편중이 아니라 감각 상실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촉각의 고유한 영역인 타자성의 고찰 없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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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일곱 작가의 작품마다 뿜어내는 그 고유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이토록 풍부하게 소설의 맛을 느끼게 해 준적이 언제였던가를 생각게 할 만큼 뿌듯한 읽기였음을 먼저 말하고 싶다. ‘강화길은 화자의 말에 현혹되었다가 그 대립하는 사실의 존재에 화들짝 깨어나게 하는가하면,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은 촘촘히 박혀있는 그 거북한 인간들의 무심함이 정말 무구하게 술회되어 일상의 작은 언행들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언어와 인간행위에 깃든 상징과 의미의 집요한 설명을 통해 인간의 관계적, 사회적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가하면 한강의 작별은 경계적 존재의 시선이라는 차마 정의하고 있지 못했던 지각의 한 부분을 일깨운다.

 

어떤 사건, 대상을 바라보며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 자질, 방법과 같은 시선이란 아마 이처럼 무진장하며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시선은 거북하고 나아가 불쾌감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가하면, 긍정적 교감으로 공감과 반성적 사유 혹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도록 하는 것이 있다. 수상작 및 후보작 등 7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 선집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제아무리 바른 소리를 하고 지식을 풍성히 담아내고 있어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함을 내포하고 있는지, 아니 그 표현된 발언이 타자, 즉 자기 아닌 다른 인간, 이 세계를 향한 체험된 성심의 것인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간접적으로 획득된 이론화된 지식에 의존하여 마치 역사의 시간, 세상을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자기 신념만을 강화한 언설들은 거짓스럽고, 허식(虛飾)으로만 여겨지는 탓이다. 물론 작품을 읽고 느끼는 내 탓이다. 타자성이 멸실된 존재가 타자성을 얘기하는 기묘한 서걱거림, 마치 사람과의 접촉 경험이라고는 일체 없는 존재의 주절거림에 저항을 갖는 내 감정의 문제로 잠시 치워두자. 이 선집 대다수의 작품이 내게 적극적인 교감의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 충만감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강화길의 은 작은 농촌마을 초등학교 교사인 김미영이란 인물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불안과 불온한 무엇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으니 아무튼 내 인식의 편향성이란! 하며 겸연쩍은 내심의 미소를 지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해외파견 근무로 아이를 돌봐줄 시어머니와 함께하기 위해 선택한 시골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생활의 실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다섯 살 어린 딸아이에게서 사투리와 그릇된 언어의 사용을 발견하게 되고, 가르치는 아이들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이장의 손자인 용권의 폭력에 대진이란 아이가 주눅든 것으로 여겨지고, 대진의 할머니인 미자네를 방문하여 진상을 헤아리려 하지만 반감어린 말만 되돌아온다. “선생님, 이상하시네요. 왜 자꾸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그러세요.” 김미영의 시점이 아닌 사실의 시점을 각성하게 하는 소소한 장치들이 흩뿌려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이 뭐에요? 라고 물었을 때, “악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이라는 답변이 그녀에게 되울리기까지. 그녀는 문자 그대로 손, 손님(guest)이었을 뿐,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썩은 내,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리기까지,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고 되뇌기까지.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내부의 심연이 균열되는 걸 최후로 확인하는 눈을 가진 데런의 현실과 기억, 꿈을 오가며 여성, 동성애자가 겪어내야 하는 세상의 무심한 시선이 지닌 야만적 무지, 그 폭력적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모자를 쓰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느냐고 디엔이 물었고 데런은 그렇다고, 거북이처럼 숨을 곳이 생긴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인식에 도사린 타자의 시선은 두려운 무엇이다.

 

또한 밤마다 귀신소리처럼 들리던 소리의 출처를 찾던 수리기사의 여자 혼자 사는데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겠느냐라는 말이 더 무섭다듯이 편협하게 고착된 사람들의 언행은 이미 그자체로 폭력적이다. “만약 꿈에서 깨지 않았다면 그자들에게 죽은 자신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도록 요구 받았을까라는 데런의 한 조각 기억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지니지 못하는 나와 우리들의 외곬을 발견하게 된다. 무릇 우리 인간 개체는 물론 세계는 변화한다. 그것의 물질적, 정신적 진보가 되었든 퇴보가 되었든 말이다. 다른 것, 그 이질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개체와 체제는 무너진다. 그것은 수용과 배려, 이해의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약자, 소수자에 대한 우리네 앎이 더없이 깊고 넓어지기를.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은 다 사라지고 없다. ...(중략)...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김혜진의 단편 동네 사람의 마지막 문장이다. 추측과 오해로 버무려진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야기하는 불쾌감과 두려움이다. 동네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개, 여자는 운전 중 쌓여있는 파지와 부딪는 느낌을 받는다. 황급히 내려 할머니와 개의 상태를 일별한다. 다친데 없다는 반응을 돌려받았으며, 혹시라도 하며 오 만원을 건넸다고 같이 사는 여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편견과 왜곡의 확산과 축적으로 부풀려진다. 할머니는 개가 다쳐 일을 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입막음용으로 푼돈을 건네는 것으로 무마하려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당시 목격자로 파악되는 베이커리 사장, 건너편 부동산 주인, 미용실 아줌마는 사실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여자의 잘못된 처사라고 머리를 돌린다. 그들에게는 두 여자가 함께 살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발산하는 왜곡된 인식이 진실일 뿐이다. 지나친 호기심, 관음증화된 폭력성에 대한 사유가 깃들 여지가 없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폐지 줍는 할머니의 안전을 보살핀다는 미명하에 주민자치회봉사단의 일원이라는 대학생은 말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들어 그녀들에 대해서 알만한 것은 다 안다고 소리친다. 그녀들의 무엇을 모두 안다는 것일까?

 

싸구려 연민에 의탁하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또 다른 약자를 폄훼하고 비난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은 익명성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성 소수자와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그릇된 호기심이라는 편협한 인식의 괴물에 대해서 오늘, 우리네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게 한다.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언어의 향연이다. 소설의 제재(題材)는 널리 잘 알려진 소돔의 멸망과 롯과 그 가족의 구원에 관한 일화이다. 작품은 신의 인간 구원과 같은 종교적, 도덕적 교훈과는 무관하다. 단지 일화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인용될 뿐, 즉 언어가 의미하는 실체를 규명하는 탐사며,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의지와 욕망의 본체를 사유하는 작업일 것이다.

 

소설의 단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도 이 작품이 천착(穿鑿)하고 있는 언어 해석의 집요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돔에 온 두 나그네는 자신의 집에 묵을 것을 제안하는 롯의 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만 마침내 그의 성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이들 이방인에 대해 거친 부정의 의사를 보인다. 소돔의 집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외친다. “오늘밤 너의 집에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재미를 좀 봐야겠다.”

 

여기서 소설은 개인은 없고 무리만 있으며”, “다만 외지인을 욕보이려는 비이성적 열기로 가득 차 있음을 해독해낸다. 그리곤 왜 하려는 지에 대한 아무 말도 없으므로 집단적으로, 관성에 따라, 오랫동안 되풀이된 행동들이기에 동기와 타당성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이것은 의식화된 신념이며, 종종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에 동기를 제공하는 신념체계로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국 이들은 의식 없는, 반성을 모르는 순수한 몸뚱이, 순수한 욕망 기계라는 것이다. 언뜻 태극기를 뒤흔들며 자신들만의 기존 신념을 심화하는 집단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풀어내는 인문학적 성찰은 지성의 만찬, 허겁지겁 맛보기에 급급할 만큼 맛나다.

 

두 나그네는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데, “우리는 이곳을 멸하려고 왔습니다. ...(중략)... 그대의 식구가 여기에 더 있습니까? 그들을 다 성 밖 산으로 데리고 나가십시오.” 그러나 롯은 꾸물거리며 저기 작은 성으로 가면 제가 안전할 것입니다.”라며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갈 것에 저항한다. 도시가 주는 즐거움에 길들여진 자, 20년을 살았어도 그를 완전한 소돔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차별과 악덕과 문란함의 그늘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도시의 풍요로움과 화려함, 도시가 내뿜는 매혹을 버릴 수 없었음을 읽어낸다. ‘흡수되어 있는 자, 악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자에게 냄새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은 자에게는 위협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 농담으로 들릴 뿐이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우리네를 침식시키고 있는 욕망의 얼굴, 균형을 잃어 일그러진 우리네의 모습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로만 보이는 그들의 부패한 욕망과 몽매성이 맴돈다.

 

한강의 작별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전에는 난처하다의 설명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처신하기 곤란한 지경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 인간의 몸이 눈이 뭉쳐진 형체로 바뀌어 있으니 수긍할 수 있는 상황인식이랄 수 있겠다.

 

그런데 단지 처신하기 곤란하기만 한 것인가? 그녀의 심장부근은 녹아 물이 고이기 시작하고, 옆구리는 부서져 한쪽이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인 아이와의 포옹에도, 눈을 감아도 절대 해치지 않을 연인의 입맞춤에 녹아내리는 것임에도? 그래서 이 연약한 표현이 가슴을 울려댄다. 절대적 소멸의 지경에 임박했음에도 난처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녀, 아니 이 세계의 많은 존재자들이 결국 할 수 있는 자기표현이란 것이 이처럼 취약하다는 것이 너무 아프다. 아픔을 전달하려는 언어의 궁핍성이 더욱 인간 존재를 억압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삶이라는 곤궁함을 버텨내야 하는 여자, 그녀의 시선을 채웠던 것, 그녀를 학습시켜온 세상은 가해학생 부모들로부터의 합의금으로 대체되었던 오빠의 죽음, 극소수의 정규직과 대다수의 인턴으로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그녀 직장 사장이 마치 인간을 생명 없는 사물로 인식하는 물질화, 도구화된 무엇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사물화는 오늘 더욱 급진적인 속도로 치닫고 있다.

 

눈사람이 된 여자는 묻는다.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는가?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수상작 심사평은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소설의 서사적 육체를 통해서 아름답게 재현한 작품이라고 쓰고 있다. ‘소설의 서사적 육체눈사람이 된 인간인 여자를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인 존재와 소멸의 소설 속 주인공이 말하는 사이’, 혹은 심사평에서의 경계는 진정 어디일까? 과연 미분화한다고 존재와 소멸이 분별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까, .... 눈과 입술이 녹으면...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다.”

우리가 사물화되는 순간 우리는 그저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그 어느 곳에도 의탁할 수 없는, 이미 의지의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아마 지금 세계의 거의 모든 인간들은 눈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집요하게 요구되는 수단화되고 물질적 대상화에 흡수되어야 그나마 존재의 짧은 형태를 지속할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결국 제아무리 아름답게 그려질지라도 연약하고 취약하며 어쩔 수 없는 난처함만이 남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우화적 아름다움이란 그저 허구이고 환상일 뿐이지 않은가?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그 절대적 신뢰를 사랑이라 말하는 여자는 오히려 타자성을 상실한, 이 세계의 존재들이 거니는 그 회색지대의 곤경에서 회복되어야 할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냥 끝이다.”는 결코 미학적 의도가 아닐 것이다.

 

정이현의 언니는 대학 중어중문학과 조교이자 대학원생이었던 인회라는 여성에 대한 영선의 기억 술회다. 다정다감하고 후배들에 대한 배려와 감사를 잊지 않던 선배언니의 제안으로 담당 교수가 던져놓은 중국어교재를 함께 번역 정리하게 된다. 인회 언니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녀의 열정과 빼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책은 교수에 완성되어 전달된다.

 

영선이 2학년이 되어 학과 교재로 단체 구입된 책은 인회언니와 함께했던 바로 그것이지만, 저자의 감사의 글은 물론 책 어디에도 구인회라는 언니의 이름은 없다. 더구나 언니는 담당 교수로부터 학위논문이 거절되는 것은 물론 여타 교수로부터의 논문심사조차 배제되기에 이르고 학교로부터 내쳐지기까지 한다. 전문대를 나온 독학사 출신이라는 딱지, 독학사 따위가 언감생심 석사학위는, 학력 세탁이구만, 사라지지 않는 연고주의와 구별짓기 의식의 천박성이 아마 가장 극심한 곳 중의 하나가 대학집단 일 것이다. 정말 하찮고 의미를 부여하기조차 역겨운 것에 집착하는 사회. 일인 시위를 하는 인회의 손을 잡는 영선의 따뜻한 온기가 있어 기억하게 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앞서 미루었던 단편,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의 소감으로 7인의 작품선집에 대한 독서 후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60,70년대의 소위 체제 종속적이며 권력 지향적 인간들이 극성을 부리던 개발시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오사카 만국박람회 안내원으로 참가했던 한 여대생의 시선을 통해 조롱하고 폄훼하며 자조하는 비판적 물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선에서 나는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기술과 비판만 경쟁하는 자기상실의 바짝 메마른 지식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떤 방관자적이며 일방통행적 시선 같은것, 그리고 그 시선을 관리하는 권력 지향성까지, 모두(冒頭)에서 말했던 타자성 없음의 서걱거림, 그 불편함의 실체가 이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 작품과 관련한 인터뷰(출처: 문학과지성사 소설보다-,여름’ P162)에서 작가가 말했던 글을 찾아보았다즉각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란 사실 대부분 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있는 반응에 불과하다.” 라는 구절이다. , ‘감정이란 사회체제에 종속 지배되어 있으니 비판적 사유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이므로 이성적 시선만으로 족하다는 믿음일 것이다. 아마 이 감정의 배제가 내겐 타자성, 접촉이라는 시원적 교감의 상실로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감정을 잃어버린 지식이 타자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세계를 읽는 진정 다채로운 시선들을 접할 수 있었던 맛스런 이 작품선집의 즐거운 기억을 위해 천하고 서툰 소회를 서둘러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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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을 읽다 - 빅데이터로 본 우리 마음의 궤적
배영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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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빅데이터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마음과 사회변화를 읽으려는 노력이다. 우리 사회와 구성원 개개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선호하고, 공적 담론이나 여론의 향방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트위터 블로그등 SNS, 언론기사를 통해 의미를 추출해 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소개되고 있는 특정 현상을 상징하는 언어와 빈도높게 출현하는 연관어들 전반에 대한 소감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파편화와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타자성의 상실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으며, 문제를 외부에서 찾으려하는 우리네와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떠나지 않는다.

 

소개되고 있는 대표적인 주제어는 혐오갑질’, ‘비혼’, ‘불안’, ‘혼밥과 같은 어휘들일 것이다. 이들 언어들은 대개 문제의 원인을 타자, 외부를 가리키고 있다. 내겐 아무런 문제가 없어, ‘아닌 쪽에 손가락질 하며 폄훼하고 비난하며 미움과 꺼림, 증오, 분노의 감정을 쏟아낸다.

 

2006년에서 2016년까지 10년간 한 일간지에 혐오관련 기사가 1639건이었다고 한다. 06~11년에는 주로 소각장, 납골당과 같은 혐오시설과 관련하여 등장하던 단어가 11~16년에는 소수자, 개똥녀,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 장애인과 같은 사람 혐오의 감정어로 변화했다고 한다. 혐오란 즐거움, 기쁨, 슬픔, 아픔과 같이 나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타자화된 대상을 필요로 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타자에 대한 부정적 대상화가 급증하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갑질기사가 2013년부터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데, 이러한 행위가 새삼스럽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평등성과 정의감 성숙, SNS와 같은 매체의 다양성 증가가 수면아래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타자성에 묘한 충돌이 엿보인다. 약자, 소수자인 타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정과 타자의 물질화, 대상화라는 감정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부터 백화점 모녀의 주차관리원(경비원) 무릎 꿇린 사건, 공관병 부당노동 강요사건 등 한동안 미디어의 중심을 차지하던 갑질 사건들에서 우리 모두는 공모자라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게 된다. 더구나 핵심 연관어가 부인’ (장성부인, 회장 부인, 국회의원 부인...)이라는 점이나, 피해자가 운전기사, 경비원, 가맹점원(편의점 등)이라는 것도 오늘 우리네의 가치관을 점령하고 있는 의식을 반추해볼 대목이다.

 

    

 

 

비혼은 우리네 사회 전반의 미래를 우울하게 하는 언어다. ‘미혼이 아니고 비혼이란다. 자발적 결혼 포기, 혹은 지향하는 삶의 기준이 변화했음을 알리는 신조어다. 빈도가 높은 주요 연관어가 여성인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행복, 반려동물, 저출산이 뒤를 잇는 언어인 것은 곤혹감을 느끼게 한다. 2014년에서 2017년 사이 산부인과는 3.7% 줄고, 동물병원은 13.8%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10년 만에 년간 혼인건수는 33만 건에서 28만 건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우리의 사회 구조적 - 경제적 여건, 사회적 진출, 임신과 양육의 불안한 환경 등과 같은 - 강압이 작동한다.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시하겠다는 여성의 변화된 가치관이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는 판단에 앞서 타자와 함께하는 그 정서적 교환의 고귀한 가치를 언젠가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되는 것은 왜일까? 인간과의 접촉을 반려동물로 대체하는 우리들과 우리사회에 대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관계에 대한 부담과 그 피로를 크게 느끼고 있다. 어쩌면 타자를 대상화는 학습에 훈련된 우리들이기에 타자에 대한 저항이 더욱 커진 것은 아닐까? 밟고 서야할 대상,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 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상으로만 가르쳐온 기성세대들, 기득권자들이 종용한 결과가 이토록 피폐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듦을 결정하는 것은 지적 능력이나 경제적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관계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란 바로 상실해가는 타자성(otherness)의 증식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밥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의 언어로 보인다. 나홀로족, 혹은 자발적 아웃사이더(아싸)로 불리는 이 조어도 관계의 피로에 연유하는 것일 게다. SNS상에서도 금요일과 토요일, 즉 사회생활의 피로감에서 벗어나는 주말에 빈도 높게 등장한다고 한다. 인간관계, 타자와의 관계가 이토록 고통스런 사회라는 것은 그것이 과연 인간 개인의 내재적 문제인지, 사회적, 외부적 문제인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만 같다. 유아시절부터 습관화시키는 타자에 대한 이해의 바로잡음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정감과 배려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책이 소개하는 주제어가 물론 이들만은 아니다. ‘적폐에서 출산’, ‘추석과 설’, ‘가짜뉴스’, ‘더위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사회의 일상적 모습을 담고 있는 무수한 단어들이 열거, 추적되고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로 활용된 SNS상의 언어, 정보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온라인상의 정보 확산은 시선을 끈다. 그 첫 예는 더위와 관련하여 전기요금 누진제부과에 대한 문제제기와 제도변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인데, 더위가 언급되고 관련 트위터 게시물이 증가한다고 한다. 그리곤 관련 기사량이 증가하고 누진제 관련 언론 기사가 등장하고, 트위터에 리트윗되면 정보 공유가 확산되어 사회적 이슈가 생성되기 시작하며, 이어 근거가 되는 사회적 인물이나 사건을 발판으로 여론 형성의 단계와 공감 채널이 증가한다. 이로인한 학습효과증대로 인해 제도변화 요구가 시작된다고 한다. SNS의 긍정적 정보 확산의 예이다.

 

반면에 이처럼 전파와 확산이 빠르고 쉽다는 SNS의 특성이 악용되는 부정적 파급도 있다. 가짜뉴스가 그것인데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한 기사 형태의 거짓, 왜곡 정보의 생산, 유포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개인과 집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동조현상이랄 수 있는 타인의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려는 사회적 폭포효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더욱 편향된 정보를 심화시켜 자신들만의 기존 신념을 강화시켜 사회갈등을 극단화시킨다는 집단극화현상이 있다. 다수의 무비판적 공유와 소비는 사회적 건강성을 심각하게 파괴한다.

 

빅데이터를 통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현상을 성찰한 이 책이 오늘 우리네의 지금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자각, 숙고하며 변화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우리네의 사유와 행위의 시간은 어디쯤에 있을까라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데 맞춤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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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달아오른 보드라운 피부에
닿지도 않고서 사람의 도리를 설명하는 당신 쓸쓸하지 않나요?”

 

 

 

감각 표상을 통해서
문학 텍스트를 재검토하다.

 

감각(촉각, 시각, 청각, 후각)이 문학과 예술의 창조와 수용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사회권력(제도)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책,『감각의 근대 - 소리, 신체, 표상』은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하여 하기와라 사쿠타로, 미시마 유키오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이르는 일본 근대문학 작품을 통해 서양에서 이식되기 시작했던 감각의 통제와 균질화들을 통찰한다. 

 

오늘, 말(언어)의 협소한 의미로 점점 소통의 단절과 소외가 심화되기만 한다.  구체적이며 체험적인 구심적 감각인 촉각(접촉)이 아닌 고작 시각적, 청각적인 원심적 감각에 전념케하여 사적인 신체조차 조작되고 통제관리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비교문학의 차원에서 이 책은 우리의 근대문학은 물론 작금의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잃어버린 그 풍성한 감각의 세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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