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일곱 작가의 작품마다 뿜어내는 그 고유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이토록 풍부하게 소설의 맛을 느끼게 해 준적이 언제였던가를 생각게 할 만큼 뿌듯한 읽기였음을 먼저 말하고 싶다. ‘강화길은 화자의 말에 현혹되었다가 그 대립하는 사실의 존재에 화들짝 깨어나게 하는가하면,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은 촘촘히 박혀있는 그 거북한 인간들의 무심함이 정말 무구하게 술회되어 일상의 작은 언행들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언어와 인간행위에 깃든 상징과 의미의 집요한 설명을 통해 인간의 관계적, 사회적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가하면 한강의 작별은 경계적 존재의 시선이라는 차마 정의하고 있지 못했던 지각의 한 부분을 일깨운다.

 

어떤 사건, 대상을 바라보며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 자질, 방법과 같은 시선이란 아마 이처럼 무진장하며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시선은 거북하고 나아가 불쾌감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가하면, 긍정적 교감으로 공감과 반성적 사유 혹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도록 하는 것이 있다. 수상작 및 후보작 등 7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 선집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제아무리 바른 소리를 하고 지식을 풍성히 담아내고 있어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함을 내포하고 있는지, 아니 그 표현된 발언이 타자, 즉 자기 아닌 다른 인간, 이 세계를 향한 체험된 성심의 것인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간접적으로 획득된 이론화된 지식에 의존하여 마치 역사의 시간, 세상을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자기 신념만을 강화한 언설들은 거짓스럽고, 허식(虛飾)으로만 여겨지는 탓이다. 물론 작품을 읽고 느끼는 내 탓이다. 타자성이 멸실된 존재가 타자성을 얘기하는 기묘한 서걱거림, 마치 사람과의 접촉 경험이라고는 일체 없는 존재의 주절거림에 저항을 갖는 내 감정의 문제로 잠시 치워두자. 이 선집 대다수의 작품이 내게 적극적인 교감의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 충만감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강화길의 은 작은 농촌마을 초등학교 교사인 김미영이란 인물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불안과 불온한 무엇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으니 아무튼 내 인식의 편향성이란! 하며 겸연쩍은 내심의 미소를 지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해외파견 근무로 아이를 돌봐줄 시어머니와 함께하기 위해 선택한 시골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생활의 실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다섯 살 어린 딸아이에게서 사투리와 그릇된 언어의 사용을 발견하게 되고, 가르치는 아이들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이장의 손자인 용권의 폭력에 대진이란 아이가 주눅든 것으로 여겨지고, 대진의 할머니인 미자네를 방문하여 진상을 헤아리려 하지만 반감어린 말만 되돌아온다. “선생님, 이상하시네요. 왜 자꾸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그러세요.” 김미영의 시점이 아닌 사실의 시점을 각성하게 하는 소소한 장치들이 흩뿌려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이 뭐에요? 라고 물었을 때, “악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이라는 답변이 그녀에게 되울리기까지. 그녀는 문자 그대로 손, 손님(guest)이었을 뿐,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썩은 내,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리기까지,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고 되뇌기까지.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내부의 심연이 균열되는 걸 최후로 확인하는 눈을 가진 데런의 현실과 기억, 꿈을 오가며 여성, 동성애자가 겪어내야 하는 세상의 무심한 시선이 지닌 야만적 무지, 그 폭력적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모자를 쓰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느냐고 디엔이 물었고 데런은 그렇다고, 거북이처럼 숨을 곳이 생긴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인식에 도사린 타자의 시선은 두려운 무엇이다.

 

또한 밤마다 귀신소리처럼 들리던 소리의 출처를 찾던 수리기사의 여자 혼자 사는데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겠느냐라는 말이 더 무섭다듯이 편협하게 고착된 사람들의 언행은 이미 그자체로 폭력적이다. “만약 꿈에서 깨지 않았다면 그자들에게 죽은 자신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도록 요구 받았을까라는 데런의 한 조각 기억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지니지 못하는 나와 우리들의 외곬을 발견하게 된다. 무릇 우리 인간 개체는 물론 세계는 변화한다. 그것의 물질적, 정신적 진보가 되었든 퇴보가 되었든 말이다. 다른 것, 그 이질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개체와 체제는 무너진다. 그것은 수용과 배려, 이해의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약자, 소수자에 대한 우리네 앎이 더없이 깊고 넓어지기를.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은 다 사라지고 없다. ...(중략)...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김혜진의 단편 동네 사람의 마지막 문장이다. 추측과 오해로 버무려진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야기하는 불쾌감과 두려움이다. 동네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개, 여자는 운전 중 쌓여있는 파지와 부딪는 느낌을 받는다. 황급히 내려 할머니와 개의 상태를 일별한다. 다친데 없다는 반응을 돌려받았으며, 혹시라도 하며 오 만원을 건넸다고 같이 사는 여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편견과 왜곡의 확산과 축적으로 부풀려진다. 할머니는 개가 다쳐 일을 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입막음용으로 푼돈을 건네는 것으로 무마하려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당시 목격자로 파악되는 베이커리 사장, 건너편 부동산 주인, 미용실 아줌마는 사실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여자의 잘못된 처사라고 머리를 돌린다. 그들에게는 두 여자가 함께 살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발산하는 왜곡된 인식이 진실일 뿐이다. 지나친 호기심, 관음증화된 폭력성에 대한 사유가 깃들 여지가 없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폐지 줍는 할머니의 안전을 보살핀다는 미명하에 주민자치회봉사단의 일원이라는 대학생은 말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들어 그녀들에 대해서 알만한 것은 다 안다고 소리친다. 그녀들의 무엇을 모두 안다는 것일까?

 

싸구려 연민에 의탁하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또 다른 약자를 폄훼하고 비난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은 익명성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성 소수자와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그릇된 호기심이라는 편협한 인식의 괴물에 대해서 오늘, 우리네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게 한다.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언어의 향연이다. 소설의 제재(題材)는 널리 잘 알려진 소돔의 멸망과 롯과 그 가족의 구원에 관한 일화이다. 작품은 신의 인간 구원과 같은 종교적, 도덕적 교훈과는 무관하다. 단지 일화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인용될 뿐, 즉 언어가 의미하는 실체를 규명하는 탐사며,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의지와 욕망의 본체를 사유하는 작업일 것이다.

 

소설의 단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도 이 작품이 천착(穿鑿)하고 있는 언어 해석의 집요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돔에 온 두 나그네는 자신의 집에 묵을 것을 제안하는 롯의 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만 마침내 그의 성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이들 이방인에 대해 거친 부정의 의사를 보인다. 소돔의 집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외친다. “오늘밤 너의 집에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재미를 좀 봐야겠다.”

 

여기서 소설은 개인은 없고 무리만 있으며”, “다만 외지인을 욕보이려는 비이성적 열기로 가득 차 있음을 해독해낸다. 그리곤 왜 하려는 지에 대한 아무 말도 없으므로 집단적으로, 관성에 따라, 오랫동안 되풀이된 행동들이기에 동기와 타당성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이것은 의식화된 신념이며, 종종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에 동기를 제공하는 신념체계로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국 이들은 의식 없는, 반성을 모르는 순수한 몸뚱이, 순수한 욕망 기계라는 것이다. 언뜻 태극기를 뒤흔들며 자신들만의 기존 신념을 심화하는 집단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풀어내는 인문학적 성찰은 지성의 만찬, 허겁지겁 맛보기에 급급할 만큼 맛나다.

 

두 나그네는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데, “우리는 이곳을 멸하려고 왔습니다. ...(중략)... 그대의 식구가 여기에 더 있습니까? 그들을 다 성 밖 산으로 데리고 나가십시오.” 그러나 롯은 꾸물거리며 저기 작은 성으로 가면 제가 안전할 것입니다.”라며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갈 것에 저항한다. 도시가 주는 즐거움에 길들여진 자, 20년을 살았어도 그를 완전한 소돔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차별과 악덕과 문란함의 그늘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도시의 풍요로움과 화려함, 도시가 내뿜는 매혹을 버릴 수 없었음을 읽어낸다. ‘흡수되어 있는 자, 악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자에게 냄새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은 자에게는 위협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 농담으로 들릴 뿐이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우리네를 침식시키고 있는 욕망의 얼굴, 균형을 잃어 일그러진 우리네의 모습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로만 보이는 그들의 부패한 욕망과 몽매성이 맴돈다.

 

한강의 작별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전에는 난처하다의 설명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처신하기 곤란한 지경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 인간의 몸이 눈이 뭉쳐진 형체로 바뀌어 있으니 수긍할 수 있는 상황인식이랄 수 있겠다.

 

그런데 단지 처신하기 곤란하기만 한 것인가? 그녀의 심장부근은 녹아 물이 고이기 시작하고, 옆구리는 부서져 한쪽이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인 아이와의 포옹에도, 눈을 감아도 절대 해치지 않을 연인의 입맞춤에 녹아내리는 것임에도? 그래서 이 연약한 표현이 가슴을 울려댄다. 절대적 소멸의 지경에 임박했음에도 난처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녀, 아니 이 세계의 많은 존재자들이 결국 할 수 있는 자기표현이란 것이 이처럼 취약하다는 것이 너무 아프다. 아픔을 전달하려는 언어의 궁핍성이 더욱 인간 존재를 억압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삶이라는 곤궁함을 버텨내야 하는 여자, 그녀의 시선을 채웠던 것, 그녀를 학습시켜온 세상은 가해학생 부모들로부터의 합의금으로 대체되었던 오빠의 죽음, 극소수의 정규직과 대다수의 인턴으로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그녀 직장 사장이 마치 인간을 생명 없는 사물로 인식하는 물질화, 도구화된 무엇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사물화는 오늘 더욱 급진적인 속도로 치닫고 있다.

 

눈사람이 된 여자는 묻는다.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는가?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수상작 심사평은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소설의 서사적 육체를 통해서 아름답게 재현한 작품이라고 쓰고 있다. ‘소설의 서사적 육체눈사람이 된 인간인 여자를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인 존재와 소멸의 소설 속 주인공이 말하는 사이’, 혹은 심사평에서의 경계는 진정 어디일까? 과연 미분화한다고 존재와 소멸이 분별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까, .... 눈과 입술이 녹으면...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다.”

우리가 사물화되는 순간 우리는 그저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그 어느 곳에도 의탁할 수 없는, 이미 의지의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아마 지금 세계의 거의 모든 인간들은 눈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집요하게 요구되는 수단화되고 물질적 대상화에 흡수되어야 그나마 존재의 짧은 형태를 지속할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결국 제아무리 아름답게 그려질지라도 연약하고 취약하며 어쩔 수 없는 난처함만이 남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우화적 아름다움이란 그저 허구이고 환상일 뿐이지 않은가?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그 절대적 신뢰를 사랑이라 말하는 여자는 오히려 타자성을 상실한, 이 세계의 존재들이 거니는 그 회색지대의 곤경에서 회복되어야 할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냥 끝이다.”는 결코 미학적 의도가 아닐 것이다.

 

정이현의 언니는 대학 중어중문학과 조교이자 대학원생이었던 인회라는 여성에 대한 영선의 기억 술회다. 다정다감하고 후배들에 대한 배려와 감사를 잊지 않던 선배언니의 제안으로 담당 교수가 던져놓은 중국어교재를 함께 번역 정리하게 된다. 인회 언니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녀의 열정과 빼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책은 교수에 완성되어 전달된다.

 

영선이 2학년이 되어 학과 교재로 단체 구입된 책은 인회언니와 함께했던 바로 그것이지만, 저자의 감사의 글은 물론 책 어디에도 구인회라는 언니의 이름은 없다. 더구나 언니는 담당 교수로부터 학위논문이 거절되는 것은 물론 여타 교수로부터의 논문심사조차 배제되기에 이르고 학교로부터 내쳐지기까지 한다. 전문대를 나온 독학사 출신이라는 딱지, 독학사 따위가 언감생심 석사학위는, 학력 세탁이구만, 사라지지 않는 연고주의와 구별짓기 의식의 천박성이 아마 가장 극심한 곳 중의 하나가 대학집단 일 것이다. 정말 하찮고 의미를 부여하기조차 역겨운 것에 집착하는 사회. 일인 시위를 하는 인회의 손을 잡는 영선의 따뜻한 온기가 있어 기억하게 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앞서 미루었던 단편,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의 소감으로 7인의 작품선집에 대한 독서 후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60,70년대의 소위 체제 종속적이며 권력 지향적 인간들이 극성을 부리던 개발시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오사카 만국박람회 안내원으로 참가했던 한 여대생의 시선을 통해 조롱하고 폄훼하며 자조하는 비판적 물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선에서 나는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기술과 비판만 경쟁하는 자기상실의 바짝 메마른 지식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떤 방관자적이며 일방통행적 시선 같은것, 그리고 그 시선을 관리하는 권력 지향성까지, 모두(冒頭)에서 말했던 타자성 없음의 서걱거림, 그 불편함의 실체가 이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 작품과 관련한 인터뷰(출처: 문학과지성사 소설보다-,여름’ P162)에서 작가가 말했던 글을 찾아보았다즉각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란 사실 대부분 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있는 반응에 불과하다.” 라는 구절이다. , ‘감정이란 사회체제에 종속 지배되어 있으니 비판적 사유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이므로 이성적 시선만으로 족하다는 믿음일 것이다. 아마 이 감정의 배제가 내겐 타자성, 접촉이라는 시원적 교감의 상실로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감정을 잃어버린 지식이 타자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세계를 읽는 진정 다채로운 시선들을 접할 수 있었던 맛스런 이 작품선집의 즐거운 기억을 위해 천하고 서툰 소회를 서둘러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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