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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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자의 일생’이란 ‘모파상’의 그것처럼 매양 신산한 어떤 통증을 준다. 아마 여자의 성적 자유와 삶의 여러 수단들을 선택 할 수 있는 자유가 남자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약자에 대한 연민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지 못한 머리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피부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육신이 못 견디게 느껴지는 어떤 날이 되면 문득 지나버린, 혹은 잃어버린 듯한 젊은 시절의 이루지 못한 욕망들로 몸을 부르르 떨어댈지도 모를 일이다.

일흔다섯 살의 노년에 이른 여자, 아니 여전히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엄마이며 할머니로서 존재하는 자신이 온통 여인으로서의 삶을 빼앗겨온 삶 같다고 여겨지는 것. 그래서 그녀는 일흔다섯의 생일 케익 촛불 앞에서 스물아홉 살 여자이기를 기도한다. 결코 재화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지만 애틋한 사랑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기만 했던 부부생활, 먼저 떠나버린 남편 ‘하워드’가 아닌, 설렘이 그득한 사랑을 꿈꾸면서.

이처럼 여성의 심리적 터치가 돋보이는 이 소설은 일견 발칙함 그것이다. 스물다섯 살 손녀가 누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부럽기만 하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마음껏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자신들만의 세계를 일궈 나가는 그 당당함, 세련되고 화려한 주점들과 식당들, 그 속에 어우러져 발산되는 젊은 남녀의 열기, 자유로운 자기 선택과 책임에서 나오는 현명함 등 이십대 여인의 싱그런 향기에 작은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스물아홉 여인으로서의 단 하루의 삶이라는 환상 같은 소원이 이루어져 매력적인 여체를 다시금 갖게 된다면 여자들이여, 그 귀중한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스물아홉이 된 일흔다섯의‘엘리’는 패션디자이너인 손녀‘루시’의 격려로 멋진 젊은이를 만나게 된다. 소설은 이 격정적인 만남의 전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흔다섯 동년배 친구, 오십대의 딸, 스물다섯 손녀의 에피소드에 렌즈를 들이댐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또한 무엇인지,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라져버린 엄마 엘리를, 잃어버릴 것을 상상치도 못했던 친구인 엘리를 찾아 허둥대는 오십대의 딸 바바라와 일흔다섯 살 친구 프리다는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스스로 얽어맨 삶의 실체를 발견하고, 이처럼 자신을 찾는 두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엘리 또한 엄마로서 딸에 대한 기대라는 속박, 자기 삶을 위해 너그러워질 수 있는 친구에 대한 깨달음의 시간이 된다.

스물아홉 살 처녀로 변해버린 엘리, 죽은 남편 하워드와의 삶이 자신의 인생에서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와의 일생에 과연 사랑이란 것이 존재하긴 한 것인지, 그 주어진 하루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진정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휘몰아쳐대던 열정적 밤과의 작별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짝을 비로소 만났다는 흥분은 해방된 자유로 열정에 몸을 불사른다. 소설의 본질적 주제와는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편으로부터는 받아보지 못했던 애무와 새로이 경험하는 성적 욕망의 분출로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혀 남편을 원망하며 인생을 허비했다고까지 말하는 엘리의 목소리는 발칙하다 못해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의 문장들이나 표현이 이 작품에는 비교적 무성하게 등장하는데 전형적인 ‘여성소설’이라 부르는데 주저치 않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바바라의 순수한 자기 삶에 대한 직시, 나이듦이란 것이 주어진 시간에 대한 온전히 수동적인 삶의 요구인 것은 아니며, 자신을 소중히 끌어안음으로서 더욱 소중하고 풍요로운 삶으로의 전환이 가능한 것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시간의 소중하고 신비로움을 헛되이 보내는 어리석음을 우린 그때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젊음에 미련을 보내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또한 중년이 되었던 노년이 되었건 그 순간을 결코 피동의 시간으로 포기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도 또한 없을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가. 일면 얄궂은 발랄함의 은밀함이 경망스럽기도 하지만 삶의 고귀함에 대한 진중한 성찰이 이 가벼움을 능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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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조짐 패러독스 7
보이지 않는 위원회 지음, 성귀수 옮김 / 여름언덕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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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따라 불온 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철학적 인식을 가미하면 ‘존재’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하는 횡단적인 조치라고도 할 수 있다. 애써 외면하거나 회피해서 보이지 않기도 하며, 그로인해 인식자체에서 지워져버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권력을, 부(富)를 독점적으로 유지하고 지속시키려는 부류에게는 이들의 자기 영역내 침입이 불온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습격해오는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때려잡고 싶은 충동,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진단하고 그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에게는 이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젊은이들의 분노를 포용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조언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가 평온하게 안주하는 영역에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 밀고 들어오면 즉각 방어기제가 살아나 적대로 날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경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논의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발전하고 완전한 진리로 다가설 수 있다. 이 엄연한 삶의 공리를 실천하는 것은 간단하고 수월한 일이다. 허나 기득권자들은 자기의 능력 이상을 가지기 위해 무조건 공격적 모드에 돌입한다. 여기엔 무한한 소모전과 후퇴의 손실만 기다릴 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첫 부분은 오늘의 선진경제 체제를 가진, 아니 지구촌 모두라 해도 별다른 왜곡은 없을 것이다. 세계화를 외친 신자유주의가 어디 휩쓸지 않은 곳이 없는 만큼, 지옥처럼 변해버린 지구촌 전체에 내재된 공통된 현상 - 개인화, 인간관계의 소멸, 노동의 허구성, 도시화의 냉소주의, 경제, 환경, 문명의 쇠퇴 - 을 진단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서는 이처럼 황폐화되고 잔혹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한 실천 매뉴얼로서 그야말로 반란을 위한 행동 단계별 세부 지침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에릭 호퍼’의 대중운동의 시작과 성공을 위한 과정별 가이드를 완결하는 세부 행동요강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나는 나’라는 마치 개성을 추켜세우는 듯한 지금 이 세상을 휩쓰는 표어를 들여다보자. 이 대중의 개인화는 생활, 노동, 불행의 모든 조건이 개별화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개인들의 분열증은 확산되고 편집증적 미세입자로 핵분열한다. 내가 나이고 싶을수록 공허감은 깊어지고 자신을 표현하려면 할수록 고갈되어간다. 결국 세상은 이렇게 분할된 자아를 만들어 낼수록 손쉽게 개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 기획은 실로 오랫동안 축적된 개념의 개가이다. 권력이 이 상황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국민을 조사, 비교, 훈육, 분리하는 교육에 나섬으로써 체제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분쇄하는데 학교 중심의 구조를 통해 유용한 질서를 확보해왔다. 각 개인의 시민권만 남게 만들려는 혹독한 개체화 작업은 성공했다.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은 이를 위해 수백 년이란 노력을 해왔으니, 20세기 들어서야 근대화를 시작하고 그나마 독립국가로서는 수십 년에 불과한 한국의 그 압축적 강도로 인한 민의 시련은 가히 혹독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화와 인간관계 해체 작업은 자본주의 지배질서가 축적한 놀라운 책략이다. 게다가 오늘의 노동현실은 노동의 두 가지 모순인 착취와 참여라는 양면적 감정을 교활하게 사용하는 자본가와 그들의 원숭이들이 제공하는 기만적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 여가활동이란 그럴듯한 언어는 결국 노동력 강화라는 기본전제를 통해 태어났으며, 숭배할 대상으로 노동을 치켜세움으로써 인간들의 고유한 근거인 친숙함, 혈연관계, 동네, 장소와 사람들, 애착 등을 박탈하고 황폐화 시키고 고립시켜왔다.

또한 일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품을 만든다는 경제적 필요성보다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들고, 어떻게든 노동질서를 보존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지워짐에 따라 생산활동이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빚어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나’라는 개성화의 술책에 함몰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고용되려면 고용주가 내세우는 획일적 기준에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 동원 될 수 있으려면 살짝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이탈, 그로 인한 소외상태는 자아가 노동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력이 아닌 자가 자신을 팔아먹어야 생존대열에서 낙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화의 새로운‘매춘적’규범이 고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은 이제 상품 그자체이고 분열되어 권력이 용이하게 종속시킬 수 있는 물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인간적 연민이니 나아가 공동체 정신과 나눔이란 복지가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착취로 쌓은 부로 점령한 언론 재벌들은 미디어를 조작하여 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북과 강남이라는 계층의 대결, 변두리 지역과 국가의 대결이라는 악질적 구조까지 만들어내면서 광분하고 있다. 극렬한 구분짓기, 자기 영역을 철옹성처럼 공고하게 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제 이번 정부가 재벌 컨소시엄들에게 베푼 종편방송의 개국으로 더욱 극성맞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 - 청년, 노동자, 실업자, 소수자, 약자, 장애자, 빈곤층, 이주자... - 을 지워버리고 대중의 개인화에 열을 올릴 것이다. 분열된 개체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 그저 개처럼 끌려가면서 뒤늦게 속았음을 후회할 것이다. 점점 회생의 가망성이 없는 지옥의 나래로 떨어져가는 형국이다.

소상인, 영세기업주, 하급공무원, 중견사원, 교수, 기자 등‘프티부르주아(petit bourgeois:소시민) ’들은 항상 역사의 과정에서 한 발 물러서서 자신들의 개인적 삶에만 연민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계층간의 전쟁에 대해 눈 딱 감고 모른 척 한다. 이들 비계급적 집단만큼 양심을 속이는데 능한 인간들도 없다. 자신들은 매춘 노예가 마치 아니란 듯이.
이와 같이 ‘일곱 개의 동심원’이라는 첫 장은 이 세상을 지옥, 바로 그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지옥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뒤집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두 번 째 장은 그래서‘반란’이다. 이 반란의 장을 일일이 묘파(描破)하는 것은 일종의 게릴라행동 지침요강을 약술하는 우스운 모양이 되지만 일관된 목소리는 하나이다. 내부의 결집력, 그 밀도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코뮌의 구성에 대한 외침이다. 모든 경제적 의존관계와 정치적 예속을 청산하고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영역인 코뮌을 만들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대중운동의 고전적 매뉴얼이라 하는 것들에 무수히 등장하는 내용이기에 그리 참신하고 이해하여야 할 지혜는 아니다. 물론 이것을 써 먹어야 한다거나 실천 기술에 참조해야 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겠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녹색자본주의의 허상, 종교가 된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화 현상 등, 병적 상태에 빠진 현실의 비판이 질주하듯 씌어있다. 공통의 언어를 상실한 세상, 그러하다보니 언어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부와 권력의 비대칭성의 심화, 사회 공감대의 증발을 부채질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보수 언론의 몽매함, 부와 권력을 지배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꼭두각시들에 환멸을 느낀 대중들이 이들보다 훨씬 현명하고 성숙했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야인인 시민을 시장에 당선시키지 않았던가. 다소 급진적이고 단선적인 언어로 거칠게 써진 책이지만 세계의 청년들과 좌절한 자들이 작금의 세상을 얼마나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하기에 충분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 자들에게만 불온할 뿐이다. 결코 대중에게는 불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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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렇게 연애하는 까닭 - 사랑에 대한 낭만적 오해를 뒤엎는 애착의 심리학
아미르 레빈.레이첼 헬러 지음, 이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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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신드롬, 여자는 튕겨야 매력?, 밀당(밀고 당기기)은 연애의 필수 기술?, 이러한 것들은 공통적으로 기만 책략을 근원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진실함이나 배려와 이해와 같은 사랑의 본질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교활한 테크닉이 마치 인간관계나 애정관계를 마치 풍요롭게 하는 것인 양 호도하는 것인데, 인간의 심리적 본성이나 애정의 본질적 요소에서조차 이러한 것들은 인간성을 비루하고 참담하게 하며 고통과 절망이란 손상을 만들어 낼 뿐이며 더구나 사람들과 사회를 불행하게하고 병들게 하는 일종이 병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매스미디어의 연애 지침이라고 소개되는 조잡한 얘기들이나 연예인들의 잡설 속에 분별없이 끼어든 얘기들은 이러한 기만술책을 연애 고수들의 무슨 비법처럼 뿌려댄다. 그러나 이 진정성이라고 는 한 점도 없는 기교로 연결된 결합이 오래갈리 만무한 것이고, 금시 바닥이 드러나 결별하고 완전한 이상적 사랑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망상으로 또 다른 이성을 찾아 헤맨다. 아마 이러한 무모하고 몽매함을 반복하면서 진정한 사랑이 왜 나에겐 오지 않는 것인가 하고 푸념해댈 것이다.

연애는 기교도 기술도 아니다. 진실한 감성의 교환이다. 그리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친밀감을 확대하며 의지할 수 있는 삶의 안전기지(安全基地)를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술수라는 기만이 개입해서 어떤 결합을 이룬다한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자기의 쾌락을 늘리기 위한 획득책, 결국 연애조차 그것이 성적 욕망이던 어떤 재화에 대한 욕구나 지위나 권력, 명예와 같은 과시적 성취가 되었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설혹 그 위선과 기만이 노출되지 않고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친밀감이라는 애정의 본질적 요소가 변형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착 심리의 유형

책은 이성간의 친밀감의 정도에 따른 ‘애착 심리’의 유형을 불안형, 회피형, 안정형,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유형 중 하나의 기질에 속하는데, 자신의 애착 기질을 명확하게 아는 것은 연애 파트너 혹은 배우자의 선택, 기혼자의 경우 배우자와의 관계성을 돈독하게 하는데 유용한 이해를 제공한다.

불안형은 끊임없이 상대로부터 친밀감을 확인하려는 유형이며, 반면에 회피형은 관계가 깊어지면 상대를 밀어내고 자신의 독립성을 우선시하는 기질이다. 그리고 안정형은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평온과 안정감을 지향하는 부류이다. 이러한 세 유형의 애착심리의 매칭관계는 우리들이 목격할 수 있는 애정관계의 모습들이 왜 그러한지를 선명하게 설명해준다. 회피형은 일명‘나쁜 남자’또는 밀당의 고수인 여자들과 흡사하다. 소위 쿨한 멋과 세련된 차림새로 다가와 모호한 뉘앙스의 언어로 자극하는데, 이러한 모습에 관심을 갖는 유형은 바로 불안형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배려하거나 안정감이라는 일견 지루해 보이는 것보다는 손아귀에 넣기 어려워 보이는 것, 왠지 세련되고 멋져보이며 가까이 다가가면 달아나 버리는 회피형에 열정이 솟는 것인데, 비극이자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피형 역시 순간 열정적으로 끓어오르며 친밀감에 적극적인 상대가 눈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상반되는 기질은 친밀감의 지속적 확인을 원하는 불안형과 친밀감이 느껴지면 멀리하려는 회피형은 서로 고통과 좌절을 심화시키고 끝내는 불화로 결별하거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불안형이 대폭 양보함으로써 불행한 결합을 고통스럽게 이어나간다. 회피형은 친밀감이 깊어지면 상대의 단점을 발견하는데 집중하며 자신이 상대를 밀어내는 이유를 합리화한다. 그리곤 헤어지고 다시금 완벽한 이성을 찾아 헤맨다. 이것이 바람둥이는 대부분 회피형인 이유이다.

책이 지향하는 것

이러한 애착 심리의 유형별 기질이나 특성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상대자로 적절한 유형은 어떤 유형인지, 이미 파트너나 배우자가 적절한 유형이 아닐 경우 어떻게 이러한 기질이나 태도를 변화시키고 조절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들을 조언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애착 유형의 소유자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와 유형별 성향에 대한 다채로운 사례와 심리학적 정리를 통해 친밀감을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반자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또한 사랑이란 격정적인 불처럼 오는 것이라는 기대, 즉 애정을 뇌가 폭발하고 심장이 팔딱거려야 한다는 열정적 신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연애의 과학적 심리학은 사랑의 진실, 친밀감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귀중한 조언이 되어 줄 것이다. 더구나 회피형에 유독 집착하는 불안형의 고질적 좌절과 실패의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조치들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이다.

한편 안정형과 같은 이상적인 상대를 선택하기 위해서 상대자의 애착 유형을 파악할 수 있는 지침들 또한 연애하는 모든 연인들에게 소중한 배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역설적 사용도 가능하다. 상대자들의 애착 유형을 파악함으로써 더욱 능수능란한 솜씨로 상대를 유혹하고 유린하는 도구라는 부정적 활용도 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연애과정이나 결혼 생활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들에게 상실되거나 포기한 친밀감이나 갈등의 배후가 되는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고통의 웅덩이에서 헤어나와 안정감과 친밀감을 회복하여 풍요로운 애정을 만끽 할 수 있는 분명한 삶의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애정 관계는 결코 기교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성,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도외시한 애정은 불행을 전제한 것과 다르지 않다. 건강한 연애, 화목한 결혼생 활로 고통과 좌절이 없는 애정 넘치는 연인, 부부, 가족, 사회가 되는데 이 애정 심리학이 기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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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3
다야마 가타이 지음, 오경 옮김 / 소화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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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에 있어 몇 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자연주의의 일본식 수용, 극 사실주의의 리얼리즘, 특히 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소재로 한 사소설(私小說)의 본격화를 알린 작품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적나라한 자기고백의 이야기는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측면에만 몰입하여 자연주의가 지극히 왜곡된 형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따라서 사회와 개인의 유리(遊離)화를 가속시켜 내면에 침잠한 고립된 개인이란 편협성이란 한계를 노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국내에도 잘 알려진‘다자이 오사무’나 올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니시무라 겐타’의 사적경험의 노출인 전형적인 사소설과 이 작품은 한 통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약하긴 하지만 사회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어서 신구의 대립과 같은 근대조건과의 갈등을 하나의 축으로 함으로써 개인의 내부 의식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차이를 발견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사소설은 사생활과 사회와의 적절한 시선의 양립이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사회와는 단절하고 오직 개인의 내적 경험으로 숨어들어간 것은 일본인들 특유의 정신적 구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서평:“일본특유의 문학양식인 사소설(私小說) 로 본 일본인의 문화코드” 참조)

‘이중성’이라는 독특한 구조

사소설이라는 개인의 심경(心境)을 소재로 한다는 특이성 때문에 등장인물에서 타인의 비중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私: 와타구시)’의 이야기이기에‘나’라는 인물을 좇는 것은 불가피하다. 소설은‘다야마 가타이’ 자신인 소설작가‘도키오’이고, 그의 내적 경험의 일기이자 수기로 읽힌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인 외적인 언행과 내적인 심정이 항시 일치할 수 없으며, 그것은 곧 분열된 이중의 인간을 보여 준다. 삼십 육세의 소설가, 아내와 세 명의 자녀를 둔 가장, 그런 그를 숭배하는 문학 지망생인 십 구세 여성을 문하생으로,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부부생활의 건조함으로 신음하던 남성이 깨어난다.

그는 여 제자,‘요시코’의 근엄한 스승으로, 온정어린 보호자이자 분별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선생의 외연을 갖는다. 그러나 구시대의 여성인 아내와는 달리 당대의 신교육을 받은 소위‘하이칼라 여성(신 여성)’인 요시코는 여인으로서의 설렘과 육체적 긴장이라는 신선한 자극으로서‘나’를 이끄는 대상이다. 따라서 도키오의 내연은 온통 여자에 대한 들끓는 애욕과 성적 충동으로 무성하다. 즉 내면의 소용돌이치는 중년 남자의 추악한 성적 욕망과 외면인 사회적 체면과 스승으로서의 관습적 태도라는 이중성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바로‘나’인 도키오의 내면은 독자만 알고 있는 것이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오직 작가는 독자를 위해서만 자신의 내면을 사실 그대로, 완전히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인데, 어쩌면 이러한 요소가 유독 엿보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여 제자 요시코에 대한 육체적 갈망의 실현과 억압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구조를 시종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상황마다에 내심을 위장하고 이기심을 감춘 채 행동하는 위선의 내용들만 변 할 뿐인데, 이것을 보는 독자는 자기 욕구와 지켜야 할 사회적 관습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진실된 면모에 야릇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것과 옛 것의 대결

이처럼 구시대를 상징하는 아내와 신문명을 의미하는 여 제자 사이의 갈등은 문자 그대로 구와 신의 대결이자 전통적 관습과 근대의 신문명과의 갈등이기도 하다. 일견 도키오는 신여성인 요시코의 자유분방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신뢰를 주기위한 기만에 불과하다. 그녀를 온통 자기만의 소유로 하기위한 정치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지만 요시코의 애인이 등장하자 이 책략으로서의 외형은 급격하게 전통적 관습으로 회귀한다. 남자를 그녀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신사상과 구사상의 편의적 이용을 오가는 것이다.

여기서 심리적 배신을 느낀 도키오는 요시코의 낙향을 도모함으로써 구시대의 비판은 실패하고 만다. 1907년에 발표된 작품이니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친 근대화의 조류는 당대인들에게는 혼란스러움,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결국 위축된 개인들은 사회와의 투쟁에서 물러나 신변으로 시야를 좁힌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 폭로라는 위험천만한 작업을 통해 리얼리즘이란 극단적 사실주의의 예술적 집념을 불태웠던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는 문학사(文學史)적 위치만큼이나 이 작품의 문학성도 제법 견고하다. 부분적으로 현대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과장이나 주인공의 비판력 결여와 같은 조잡한 일면이 있으나 그것은 사소설이 지니는 고유의 한계이자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관대함을 갖게 한다. 아무튼 2011년‘니시무라 겐타’의 사소설로 인해 내 독서가 여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문학에 대한 시야 확장인 것은 분명하다. ‘나’의 소설이 지니는 사실성의 득과 실을 이해했다면 그게 답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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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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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에는 19세기 조선사회의 피폐하고 문란해진 삼정(三政)의 비루함이 촘촘히 깔려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신음하는 민초들의 좌절과 서러움이 짙게 배어있다. 지방의 말단 하급관리조차 제멋대로 백성을 수탈하고 저 위로는 계급을 팔아먹고 직위를 팔아먹으며 착취하는 아래위 할 것 없는 총체적인 부패의 난맥상을 보이던 사회였음을 말하기 위해서였음이리라. 저들의 잇속을 차리는데 백성의 삶이야 그들이 헐벗던 굶주리던 무관한 것이었으며, 단지 자신들을 위한 봉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 사건인‘황사영’백서사건은 일백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참형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를 비롯한 무수한 처형과 유배가 자행되던 당대의 사회상은 이처럼 끊임없는 관리들의 횡포와 불합리한 삼정의 운영으로 수탈되어 삶의 토대와 유리되고 방황해야만 했던 백성들의 좌절과 분노의 농도(濃度)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 쫓겨난 백성들이 미래의 삶, 천국을 향한 구원에 목을 매단 것은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기반을 파괴당한 민초들의 죽음이 넘쳐났고 수익원인 유리된 백성들로 인해 남아있는 자들은 더욱 관리들의 폭압적 기승에 절망으로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인 유배지인 섬 흑산(黑山)으로 압송되는 정약전의 신산한 여정에서부터 수탈당하는 백성들의 죽음 같은 삶이 길에 깔려있다. 주막에서부터 배의 사공과 노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착취의 대상이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유랑하는 이들은 걸식자가 되고 그들의 자식들 또한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개보다 못한 주검이 되어 널브러지고 방치되어 부유(浮遊)한다. 설혹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기반을 버리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백성들의 고통을 왕권과 사대부의 기득권에 대한 충효의 논리로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어린 순조임금의 수렴첨정을 하던 정순대비로 추정되는데, 이 이가 내린 자교의 자기중심적 논조는 마치 세상의 어지러움과 백성의 피폐함이 백성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협박으로만 보인다. 고작 궁궐에 앉아서 ‘헤아리고 있다. 부패한 관리가 있음을 안다.’라고 한들 무엇이 변화할 수 있었겠는가.  

           

정약전이 육지로부터 구백여리의 망망대해에 떠있는 유배지 흑산(黑山)의 검을 흑자를 일컬어 “너무도 컴컴하다”하다는 심사로부터 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에 산재한 어둠과 공포의 뿌리 깊은 부정을 읽게 된다. 아마 나라 전체가 흑(黑)의 산(山), 주검의 산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회에 내린 만연한 부패와 부정, 이 썩은 구조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신(神), 왕권을 초월하는 이 알 수 없는 권력인 천주교의 신과의 대결을 선택한 당대 지배 권력의 우매함을 보는 것은 수치스럽고 참담함이다. 무릇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불안한 예감, 그 불온함이란 감정이란 폭력을 낳는다. 당대의 권력들을 그토록 불안하게 했던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좌절과 분노로 몸을 떨어대던 백성들이요, 파렴치한 자신들의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더욱 극악해지는 폭력으로서의 처형은 더욱 은밀한 결집, 권력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소설의 양대 인물 축은 정약전과 약전의 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지만, 오히려 민초들의 삶에 조명을 맞춤으로써 이야기의 구성을 이끌고 있다. 역참 마부인 마노(馬路)리, 매득노예 육손이, 아리, 새우젓 장사 강사녀, 약전의 말벗인 창대와 그 아비, 소작농의 처 오동희,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인 공명첩을 사기위해 허류를 통한 착복을 일삼는 박차돌이란 인물 등등 비루한 삶을 살다간 민초들의 애환을 통해 어쩌지 못하는 그 지독한 세상과의 단절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음을 목격하게 한다.

그럼에도 그 삶에 대한 애착이란 무엇인지, 동료를 배반하고 배격해야 이어갈 수 있는 것이어서 더욱 무참해진다.
자신이 살기위해 조카 황사영을 지목해야하고, 오라비를 지극히 따르던 여동생과 연루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사주해야 하고, 밀정질을 통해서라도 지켜내야 했으니 그 현재의 삶이란 것의 끈질기고 던적스러움이 새삼 몸서리 처진다. 현세의 역겨움, 그래서 그 구역질나는 세계를 떠나 감히 죽음을 불사했던 이들의 구원을 향한 몸부림은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아마 흑산의 아니, 비록 흐리고 어둡지만 가느다란 빛이 있음직한 자산(玆山)을 말하던 약전의 저 너머 세상에 대한 희구는 애처롭고 간절한 무엇이 되어 마음을 두들긴다.

자고로 반란, 대중운동, 혁명은 그 모습이 종교의 형상을 하던, 이념을 앞세우던, 현재에 발을 딛고 설수 없다는 민의 표식이다. 우리의 역사는 이를 해결하거나 청산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반복을 해댄다. 소설 속 박차돌이 죽은 여동생을 묻던 쇠락(衰落)한 절두산 잠두봉 성지는 이처럼 특정 종교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민초들의 고난과 아픔, 그 구원을 외치던 해방의 장소이다. 처형대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던 선조들의 침묵의 언어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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