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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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에는 19세기 조선사회의 피폐하고 문란해진 삼정(三政)의 비루함이 촘촘히 깔려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신음하는 민초들의 좌절과 서러움이 짙게 배어있다. 지방의 말단 하급관리조차 제멋대로 백성을 수탈하고 저 위로는 계급을 팔아먹고 직위를 팔아먹으며 착취하는 아래위 할 것 없는 총체적인 부패의 난맥상을 보이던 사회였음을 말하기 위해서였음이리라. 저들의 잇속을 차리는데 백성의 삶이야 그들이 헐벗던 굶주리던 무관한 것이었으며, 단지 자신들을 위한 봉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 사건인‘황사영’백서사건은 일백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참형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를 비롯한 무수한 처형과 유배가 자행되던 당대의 사회상은 이처럼 끊임없는 관리들의 횡포와 불합리한 삼정의 운영으로 수탈되어 삶의 토대와 유리되고 방황해야만 했던 백성들의 좌절과 분노의 농도(濃度)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 쫓겨난 백성들이 미래의 삶, 천국을 향한 구원에 목을 매단 것은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기반을 파괴당한 민초들의 죽음이 넘쳐났고 수익원인 유리된 백성들로 인해 남아있는 자들은 더욱 관리들의 폭압적 기승에 절망으로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인 유배지인 섬 흑산(黑山)으로 압송되는 정약전의 신산한 여정에서부터 수탈당하는 백성들의 죽음 같은 삶이 길에 깔려있다. 주막에서부터 배의 사공과 노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착취의 대상이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유랑하는 이들은 걸식자가 되고 그들의 자식들 또한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개보다 못한 주검이 되어 널브러지고 방치되어 부유(浮遊)한다. 설혹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기반을 버리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백성들의 고통을 왕권과 사대부의 기득권에 대한 충효의 논리로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어린 순조임금의 수렴첨정을 하던 정순대비로 추정되는데, 이 이가 내린 자교의 자기중심적 논조는 마치 세상의 어지러움과 백성의 피폐함이 백성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협박으로만 보인다. 고작 궁궐에 앉아서 ‘헤아리고 있다. 부패한 관리가 있음을 안다.’라고 한들 무엇이 변화할 수 있었겠는가.  

           

정약전이 육지로부터 구백여리의 망망대해에 떠있는 유배지 흑산(黑山)의 검을 흑자를 일컬어 “너무도 컴컴하다”하다는 심사로부터 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에 산재한 어둠과 공포의 뿌리 깊은 부정을 읽게 된다. 아마 나라 전체가 흑(黑)의 산(山), 주검의 산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회에 내린 만연한 부패와 부정, 이 썩은 구조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신(神), 왕권을 초월하는 이 알 수 없는 권력인 천주교의 신과의 대결을 선택한 당대 지배 권력의 우매함을 보는 것은 수치스럽고 참담함이다. 무릇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불안한 예감, 그 불온함이란 감정이란 폭력을 낳는다. 당대의 권력들을 그토록 불안하게 했던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좌절과 분노로 몸을 떨어대던 백성들이요, 파렴치한 자신들의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더욱 극악해지는 폭력으로서의 처형은 더욱 은밀한 결집, 권력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소설의 양대 인물 축은 정약전과 약전의 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지만, 오히려 민초들의 삶에 조명을 맞춤으로써 이야기의 구성을 이끌고 있다. 역참 마부인 마노(馬路)리, 매득노예 육손이, 아리, 새우젓 장사 강사녀, 약전의 말벗인 창대와 그 아비, 소작농의 처 오동희,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인 공명첩을 사기위해 허류를 통한 착복을 일삼는 박차돌이란 인물 등등 비루한 삶을 살다간 민초들의 애환을 통해 어쩌지 못하는 그 지독한 세상과의 단절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음을 목격하게 한다.

그럼에도 그 삶에 대한 애착이란 무엇인지, 동료를 배반하고 배격해야 이어갈 수 있는 것이어서 더욱 무참해진다.
자신이 살기위해 조카 황사영을 지목해야하고, 오라비를 지극히 따르던 여동생과 연루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사주해야 하고, 밀정질을 통해서라도 지켜내야 했으니 그 현재의 삶이란 것의 끈질기고 던적스러움이 새삼 몸서리 처진다. 현세의 역겨움, 그래서 그 구역질나는 세계를 떠나 감히 죽음을 불사했던 이들의 구원을 향한 몸부림은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아마 흑산의 아니, 비록 흐리고 어둡지만 가느다란 빛이 있음직한 자산(玆山)을 말하던 약전의 저 너머 세상에 대한 희구는 애처롭고 간절한 무엇이 되어 마음을 두들긴다.

자고로 반란, 대중운동, 혁명은 그 모습이 종교의 형상을 하던, 이념을 앞세우던, 현재에 발을 딛고 설수 없다는 민의 표식이다. 우리의 역사는 이를 해결하거나 청산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반복을 해댄다. 소설 속 박차돌이 죽은 여동생을 묻던 쇠락(衰落)한 절두산 잠두봉 성지는 이처럼 특정 종교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민초들의 고난과 아픔, 그 구원을 외치던 해방의 장소이다. 처형대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던 선조들의 침묵의 언어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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