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2 소설 보다
김기태.위수정.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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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록작인 김기태작가의 전조등, 주인공이 운전하는 차량의 전조등은 이 세계에 대한 첫 의심, 아니 자기 삶에 부딪친 최초의 타자에 대한 관심의 사건을 불러오는 지점일 것이다. 제목처럼 소설은 영특함이 빛난다. 문장은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지루함 없이 마지막 문장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있다. 두 번째 작품인 위수정작가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초로(初老)의 여성 원희를 중심으로 그녀의 시모와 시집 간 딸을 통해 여성의 연령에 따라 겪게 되는 삶의 개별성을 원숙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사회의 소음들이 요구하는 어떤 잣대와도 무관한 글쓰기가 매력적이다. 마지막 수록작인 이서수작가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는 왠지 감정의 진솔함 때문인지 내겐 다소 낯선 문장들이지만 새로운 유형의 인간관계를 발견하는 신선함이 있다.

 

이번 가을 선집 수록작 세 편에 대한 이 간략한 개괄적 느낌과 달리 하나의 의문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소설 속 인물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제도적, 구조적, 체제적 한계가 지닌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러한 지배적 힘,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치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심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우정 혹은 사랑의 경계를 지나는 독특한 신유형의 인간애를 그리고 있는 이서수작가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를 지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질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뒤틀린 삶의 왜곡 양상들이 등장인물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듯 그 지배적 힘의 굴레 안에서 그 힘이 제시하는 정형성의 미달에 그저 시름하기만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며 알바로 생계를 빠듯하게 꾸려가는 가진이란 여성이나 응급실 간호사로서 자기 고통이 최우선이라 생각하는 인간 군상들, 그네들의 질병과 죽음에 감정적 육체적 수고를 요구당하는 사영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 안타까움이라 할 수 있다.

 

가진과 사영이 함께 찾아가는 지방도시의 삼천만원 아파트로 상징되는 장소는 갱신되어야 할 세계의 윤리구조에 대한 어떤 창조적 도전이 아니라 다만 현실에서의 도피, 굴종에 대한 소극적 완화의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설혹 그녀들이 함께 대지에 내려 앉아 삶의 평온과 사랑을 존속시킨다 할지언정 이 세상은 한 치도 변화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들의 보신에 눈물겨워하는 인간에 어떤 긍정성을 씌우는 것은 청년들에게 지나치게 무력(無力)과 굴종을 강요하는 것 같기만 하다.

 

단편 전조등은 아예 지배적 힘의 언어를 그대로 자기 삶의 실천적 지표로 삼는 인물을 등장시켜, 시대의 보이지 않는 지배적 힘(제도, 법률, 관습, 상식 등등)에 어떠한 의심도 보이지 않는 길들여진 인간의 전형을 내세우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성장기에 배운 것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대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당하지 않기 위한 지혜를 배웠다고. 세상을 위한 창조나 갱신의 노력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자기보호의 무기만 갈고 닦았다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군청공무원인 그의 아버지는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라며 현실의 물질적 삶이 제공하는 안정성에 만족스러움을 표시하기까지 한다. 배부른 돼지의 삶이면 족하다는 이 말은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가?


 


이 소설을 중산층의 탄생, 혹은 그 무사유의 영원성’, 이라 불러도 어울릴 법 할 듯싶다. 주인공은 이러한 인식을 체화하며 성장한다. 서울의 중상층 대학에 입학하고, 완성차 제조 대기업에 취업하여 고액의 연봉. 직장 인간관계에서도 갈등을 피하는 준수한 삶에 만족한다. 수 차례의 연습같은 연애를 거치고 여기서 얻은 이성관계의 지혜로 결혼에 입성한다. 그리곤 딸 아이를 얻는다. 세상의 말, 그 지배적 힘의 언어를 자기의 말로 착각, 내면화한 맹목적 삶의 전형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에 유일한 균열을 낼 뻔 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운전하던 차에 무언가 부딪친 파열음 소리이다. 차에서 어두운 산길을 둘러보다 군청색 털 고무신 한 짝을 발견한다. 그러나 잠시 어두운 산을 바라보다 이내 한 쪽 신발을 잃어버리고 걷는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하며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지독한 무관심, 혹여 사람을 다치게 했는지도 모를 일에서 조차 의심을 잃어버린 이 무사유(無思惟)의 정신에 왠지 소름마저 끼친다. 산길을 걷던 노파가 차에 부딪쳐 산 속 어딘가로 튕겨 묻혀있는 것은 아닐까? 왜 이런 의심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의 이 시대가 인간들을 이렇게 길들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이러한 수구적 이기심은 이 사회의 윤리적 갱신을 방해한다.

 

작가는 이러한 무의심, 무사유의 전형적 인간의 무난한 중산층 편입의 정형성을 통해 역설적 읽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설에 이르기에는 요구되어야 하는 문장들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윤리적 구조를 향한 외침이 아쉽게만 여겨진다.

 

매끈한 굴곡 없는 삶, 너절하고 하찮은 잡음들이 싹 거두어진, ‘중산층이라는 정형화된 얼굴들, 경제, 사회, 윤리적 전형성을 띤 인물들은 왠지 작가들의 글쓰기 속에 내재된 의지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수구적 이기심의 은폐성. ‘위수정작가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또한 초로의 중산층 여성이 주인공이다. ‘원희라는 인물은 친구 수임과 함께 지방 흡입, 눈매 교정, 성형시술 등의 피부관리를 받으며, 음악연주회를 감상하러 다니는, 경제적 제약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자신의 늙어가는 몸, 그 육신의 욕망에 오로지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시모의 설핏 드러나는 억제된 욕망의 흔적이나, 남편의 노후 징후, 셋 째 아이의 출산을 앞둔 딸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기도 하지만 이를 자기연민과 자기애의 축에서 벗어난 반성적 시선으로 해석하기에는 미흡하기만 하다.

 

수임의 제안으로 젊은 피아니스트의 음악 연주회에 동행하게 되고, 즐기던 음악이 아니었던 기승전결도 없는 불협화음의 음악인 헝가리 작곡가 버르토크를 연주하는 주완에 매료되지만, 원희 자신에겐 이러한 매혹에 대한 적극적 반응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의 연령에 대한 제약의 시선이 있음을 문득 깨닫는 장면 등은 노화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길들여진 이 세계의 습속에 깃든 반()윤리성, 그 억압 윤리들의 시의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듯도 하다.

평온 무탈한 삶의 소소한 행복, 우아한 자기를 위한 항상성의 욕구 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강렬한 의심을 제기케 하는 많은 윤리적 구조의 문제가 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의 조건을 입증하지 못하는 존재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보이지 않게 강제하는 모든 습속과 규율에 굴종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무수한 불의와 부정을 담고 있기에 모든 인간이 이를 모른 체하며 나만 잘 살면 돼라 할 경우 이러한 지배의 힘은 어느 것도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대를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통해 그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욕망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강요된 어머니나 규정화되어 씌워진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한 자연스러움, 해방감을 그려낸 점은 분명 이 작품의 돋보이는 장점이라 할 것이지만, 위수정 작가의 작품에서는 사람들 눈앞에서 지워진 계층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찮은 사태들이 들러붙는 복잡성의 왜곡을 피하는 글쓰기도 중요하겠지만, 사실의 은폐된 문제들은 바로 이 배제된 부분에 더 많은 것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한국 문학도 자기연민을 핥아대는 지점에서 도약해야 되지 않을까? 이 시대, 이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것들의 맹목과 독단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그런 작품들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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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평등 -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 토러스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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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등주의란 단순히 위계의 부재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평등주의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위계, 즉 반()위계적인 태도들에 기초하는 흥미로운 유형의 위계이다." - 32

 

'지배와 종속'이라는 단어가 품은 개념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어떤 불쾌감을 수반한다. '누군가가 ''를 지배하고 종속시키려 한다고? 내 자율을 속박하겠다고? 대체 누가 이런 사악한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인가?' 여기에 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떤 개인의 자율을 타인이 해칠 수 없다는 '평등'에 대한 인식이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생물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보엠'은 바로 이 평등 의식이 과연 인간의 정치적 본성, 다시 말해 자연선택에 의해 오늘의 인류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를 규명하려 한다. 이 물음이 너무도 중대한 것은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새롭게 수립되고 구체화하여야 하는 가치와 제도의 창출에 있어서 토대의 견고성과 관련하기 때문이다.

 

대략 B.C.3000년경부터 강력한 일인(一人) 또는 소수의 지배자에 의한 대다수 인간들의 복속이라는 체제가 시작된 이래, 18C 일부 서구 사회의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라는 인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 도덕적 덕목이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는 인간 세계에 점진적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역사시대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위계(hierarchy)의 사회였으며, 비록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개인의 자율적 사유와 행위에 대한 권리 보장, 인간 개인의 평등성을 신념으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계급적인 지배 권력이 법제도에 의해 승인되어 존립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실체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인간의 평등성'이란 개념은 왠지 불안정하고, 오히려 불평등의 위계가 인간의 본능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만일 위계가 자연선택된 것이라면 인간 사회에서 개개인의 평등을 유지한다는 것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언제고 이 불안한 평등의 개념은 전복되고 지배와 복속이라는 불평등의 정상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 예견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마 이 저술의 탁월성은 평등과 위계의 종잡을 수 없는 이 미심쩍은 인간의 본성에서 '평등주의'를 현생 인류(homo sapiens)의 시작이랄 수 있는 대략 10만년 전후의 먹거리(수렵채집) 무리로부터 길어 올리는 인류학적, 진화론적 추적 연구라 할 것이다.


 


"우리들 중 하나가 타자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기보다는, 우리 모두는 우월자가 될 통계적으로 작은 기회를 포기하기로 동의한다. 우월이나 지배를 추구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자율성에 그저 만족하기로 동의한다." - 210쪽에서

 


침팬지와 보노보, 인간 혈통을 포괄하는 고등 유인원에서 인간 혈통이 분화된 것을 대략 500만년 전으로, 그리고 이 분기에서 엄청난 두뇌와 털 없는 몸뚱이 등 해부학적, 그리고 상징적 문화와 언어를 발달시킨 오늘의 근대적 인간의 출현을 적어도 10만년 전후로 추정하는 데 학계간의 의견 일치가 있는 것 같다. 이 시기의 인간을 수렵채집(먹거리)인이라 부르며, 이들은 무리로 이동하는 군집 생활을 하였으며, 어떤 특정한 지배자 알파가 나머지 무리를 예속시키는 그런 정치 행위가 불가능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 조상들은 타인을 정치적으로 위압하는 행동의 실행을 심각한 도덕적 위반들 중의 하나로 보고 이를 금지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하고 있다.(현생 수렵채집 생활 무리에 대한 민족지학적 보고들 참조)

 

즉 집단이 어떤 잠재적 일탈자도 지배적 알파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지배에 대해 분노에 찬 저항"이 신념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개인들이 연대한 집단이 선제적으로 그 잠재적 일탈자에 재갈을 물리는 반응을 수행함으로써 위계 형성 과정을 저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일례로 큰 사냥감을 잡은 사람이 성과 배분에 참여하거나 노획을 자랑하는 것은 곧 정치적 권력으로 전환을 시도할 위험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겸손한 말과 분배 주체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무리의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양상을 보게 되는데, 자랑스러워하는 사냥꾼은 과도한 부정어법과 완곡어법을 사용함으로써 겸손을 보여 어떠한 권력에의 도전 의도가 없음을 보이는 것과 함께 무리(집단) 구성원들은 그 사냥꾼을 조롱하거나 비난의 표현을 하며 선제적으로 깔아뭉갠다는 점이다.

 

잠재적 알파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의 행동 양식으로 조롱과 무시, 배제, 추방, 살해 등의 통제적 처벌 수단을 통해 집단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탈자를 친사회적 방향으로 되돌리고, 구성원 개개인의 정치적 평등을 강제하는 작은 도덕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결국 이들 수렵채집인 무리가 의도했던 것은 참된 평등과 절대적 평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을 온전하게 내버려두는 상호존중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평등주의 기풍'이라는 의도적인 지도 메커니즘을 통해 집단내의 사회적 삶을 조절했음을 의미한다. 아마 반()경쟁적, 반권위적 삶의 형태가 소위 부족국가의 왕과 같은 전제정이 시작되기까지 오랜 시간 인간 조상들의 삶의 형태였음을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 설계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겠다.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에게는 약자이든 강자이든 지배 욕망이 바닥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개인의 자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권위적인 도덕적, 정치적 청사진을 내면화하고 있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평등주의 청사진이 공동체에 일단 자리하게 되면, 이러한 비전에 반대하는 어떤 존재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그를 지배 또는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처럼 평등주의 사회들은 내구력이 있지만 동시에 공격받기도 쉽다는 점이다. 결국 평등주의 삶의 방식을 유지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등 유인원인 침팬지 등 전제주의적 폭군 알파에 의한 무리의 생활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여기서 분기된 인간이 전제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넌센스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10만년 전 인간 먹거리꾼(수렵채집인)들은 평등주의에 기초한 무리의 삶을 정착 시켰으며, 사회적 지배 위계를 역전시켜 평범한 다수의 집단이 알파를 지배하는 평등한 개인이 가능케 했다. 사실 여기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경쟁과 허세, 싸움이라는 지배의 본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지배 위계의 역전이라는 평등주의적 사회적 행위가 필요할 이유가 없게 된다. 유전적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영장류의 경쟁은 회피할 수 없는 본성이다. 즉 지배와 복종이라는 위계적 경향은 인간 종의 특징이다. 다만 종속에 대한 반감 역시 선천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 본성이 매력적이지 않게 만드는 성향이 있는, 다른 개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 본성이 매력적으로 만드는 성향이 있는, 개인적인 지배 가능성들을 포기한다. 이러한 독특한 '행동적 타협'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삶을 변형시킨다." - 370

 

복종 행위를 잘게 잘라보면 몇 개의 경쟁적 동기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바닥에 숨어 있는 지배 욕망, 그리고 두려움이다. 복종은 '양면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복속이라는 부정적 느낌은 지위 경쟁을 향한 경쟁적 기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속된다는 것에 대한 분개가 평등으로 이끄는 기질이다. 이 책의 파격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의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생태학, 인류학 등에서 집단간 선택이론과 이타주의적 본성의 유전에 대한 논의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이타주의적 유전자가 유전자 공급원에서 유지될 수 있으며, 집단간 선택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고양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등주의가 인간의 정치적 본성으로 오늘의 인류에 내장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위계적(지배와 복종) 본성 또한 유전되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개의 표현형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다면발현(pleiotrophy)의 가능성 또한 수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도덕적 청사진을 꾸려 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 오늘 자본의 거대한 집적과 축적 시스템은 극단적 불평등의 중심적 원인이며, 나아가 제2 기계시대로 불리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기술은 이러한 자본 권력의 첨예한 부상(浮上)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실업자의 점진적 양산과 부의 비대칭적 배분, 민주주의 가치의 지속적 훼손으로 인한 껍데기 민주주의만 잔존하는 형국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율과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건드리며, 궁극적으로 인간 평등주의의 근간을 파괴한다.

 

만일 새로운 인간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면 과연 어떠한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있어 지금까지 진화해 온 인간의 본성을 고려치 않고서는 1871년 파리 코뮌의 좌절이나 1894년 동학농민들의 새로운 삶의 단위로서 집강소의 실현되지 못한 인간 평등의 공동체를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 본성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수렵채집인들의 평등주의 청사진을 통해 인류학적 순진함을 떨치고 새로운 정치적 청사진을 그리는 데 분명 어떤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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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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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편의 단편에는 칼칼한 육개장, 미역국, 방어회, 각종 소박한 전() 등 일상적 음식들이 등장한다. 달밤의 화자(話者)는 생일상을 준비하고, 방어가 제철의 주인공 안라는 반찬가게를 하며, 만화경302호 세입자인 나경101호 할머니 단심의 먹음직스런 주전부리와 함께하며 자신의 곁을 넓혀 나간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쩌면 행복과 설렘의 시간일 것이다. 마련하고 서로 나눌 대상이 있는 이 행위에는 사람에 대한 어떤 진정한 관계, 의미로 채워진 인생살이의 풍성함이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작품 모두가 애틋한 그리움의 언어처럼 다가오고, 왠지 정화된 느낌으로 충만해지게 하는 듯하다.

 

소설 달밤의 첫 문장은 생일상을 차린다고 며칠 전부터 분주했어요.” 라는 이미 고인(故人)이 된 친했던 언니 은주를 향한 일종의 방백(傍白)이다. 이 방백은 은주의 제사상을 앞에 두고 여기 하늘 좀 올려다보고요. 달이 떴네.” 하는 마지막 장면과 조우하며, 새로운 사랑과 떠난 사랑 모두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엮어낸다.

 

가난했던 학창 시절, 그리고 졸업 후에도 ()도 잠도 미래도 오지 않을 거 라며 실의에 잠기곤 하던 화자에게 응원과 격려, 따스한 사랑을 주었던 선배언니 은주,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작은 댓가라도 생기면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삶에 대한 안심을 심어주던 그녀를 향한 애도의 이야기는 음악세계를 위해 전념하는 소애가 자신의 세계로 문득 들어오게 된 사연과 동행하기 시작한다.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화자의 방백은 말하는 여정 자체를 통해 다르지만 닮은 관계의 반복이라는 인간 정신의 새로운 인식 수단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결코 다르지 않은 두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방어는 제철제철에 방점을 두어 읽게 하는, 어떤 반복되는 의례적 행위가 끌어내는 기억, 그 행위에 담긴 해결되지 않았던 응어리이자, 드러남으로써 분명해지고 삶의 정상성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안라는 오빠와 그의 친구인 정오(正吾)가 즐기는 책과 음악과 영화를 함께하며 자신도 모르게 이들을 공유하고 내면화한 채 성장한다. 가계의 경제적 형편은 기울고 있었지만 안라는 이를 체감하지 못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픈 안라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엄마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비싼 미술입시 학원에 등록한다.

 

어느 날, 군 입대 명분으로 휴학한 오빠 재영이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크레인에서 떨어진 철근더미로 사망하게 되고, 이 죽음은 미술하겠다고 설친 자신의 욕심으로 일어났다는 죄책감으로 자리 잡는다. 결국 열아홉 살의 10. 내 인생에 욕심 따윈 내지 않을 거라고결심하곤 어려운 살림살이를 위한 밥벌이에 나선다. 그녀의 이십대가 끝나가고 있을 즈음 엄마는 암 재발로 사망하고, 이모들과 함께 꾸려가던 엄마의 반찬가게를 물려받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물음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정오는 오빠의 죽음에 연락도 되지 않았으며, 장례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 정오로부터 엄마가 떠나간 지 넉 달이 지난 날 연락이 온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이 바로 방어회를 파는 음식점이다. 안라와 정오 두 사람은 극히 상투적인 몇 마디를 나누며 만남을 이어나가고, 매년 12, 방어 철이 되면 방어회집에서 조금은 진전된 자신들의 삶 속 일상을 나누기도 한다. 음식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이라는 제재는 달밤과 흡사하지만 그 관계와 삶의 체험이 다른 사람들이기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은 것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소설을 이끄는 힘이 되어준다. 음식과 인간관계가 지니는 이 흥미로운 조합은 마침내 친밀성의 진전, 억압된 속내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고등학교 시절 부족한 미술학원 수강료로 쓰라며 정오가 주었던 돈, 그것을 봉투에 담아 내민다. 이 뜻밖의 행위는 흐릿해졌던 옛 기억을 촉발한다.

 

안라가 붓글씨 연습을 위해 펼쳐놓은 화선지의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 正吾(정오)를 쓰고, 그 옆에 자신의 것보다 안라의 오빠 재영을 더 신중하게 쓰던 모습,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돌아온 오빠가 그것을 보고 감추지 않던 미소를 띠던 장면은 모든 순간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회피된 애도와 죄의식을 이렇게 마주함으로써 정오와 안라는 기억할 수 있으며 그 기억을 보듬을 수 있는 삶의 정상성을 회복한다.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작정이라 썼던 황석영 선생의 문장이 마침 떠오른다. 누군가와 마주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묻힌 기억들을 마구 꺼내고 싶어진다.

 

어쩌면 인생살이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질이 그 전부를 차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수록작인 만화경은 다섯 가구가 사는 작은 한 채의 빌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낯선 옛 말이 된지 한참이다. 오히려 앞집, 아랫집, 윗집 등 이웃은 경계와 무관심의 대상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경은 이혼 후 혼자 사는 서른다섯 살 아가씨와 아줌마의 경계에 선 여성이다.

 

나경은 4층에 사는 빌라의 주인 숙분이 하는 행동이 불쾌하고 거북하기 그지없다. 출근할 때면 여지없이 4층 창을 열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 계약할 때 출생 시간을 묻던 기묘한 모습 등은 어째 감시의 시선을 받고 있는 듯한 께름직함이다. 두 아이를 양육하느라 바쁜 친구 수진에게 하소연했을 때 답변은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다,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다.”는 것이다. 숙분의 행동이 부당하다는 인식은 반지하층에 가까운 101호에 단심이 이사 오면서, 그녀의 베풂과 나눔이 보여주는 이웃과의 스스럼없는 친교의 모습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단심이 가지고 올라와 맛보라며 내미는 각종의 소박한 부침개 등 음식은 초콜릿 등을 얹어 되돌려진다. 이렇게 단심의 집 방문과 그녀와의 대화가 늘어나며 빌라 내 이웃들은 서로의 곁을 내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어느 날 새벽 5시면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302호 위층인 주인집 4층 숙분의 서성거리는 울림이 들리지 않는다. 101호 단심은 4층 문이 잠겨 열리지 않으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숙분의 신병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한다. 119에 연락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부러진 다리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숙분을 발견한다.

 

숙분의 수술이 진행될 때 단심으로부터 옛 친구였던 숙분과의 사연과 302호 전 입주자가 사망한 후 수일이 경과한 뒤에 발견되었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숙분은 외롭게 죽은 전 입주자 이미리내가 혼자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안타까움이 나경이 숙분의 행위로부터 오해했던 이유였음을 알게 된다. 소설 전면을 흐르는 내용은 이처럼 소소한 나눔과 증여의 장면들로 채워지며, 여성들, 나아가 이웃들의 유대로 확장되고, 오늘의 불의한 핵가족중심 사회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유형의 가족연대를 보여준다. 또한 오늘날 물질화, 쾌락지향의 언어로 전화(轉化)행복의 개념을 다시 복원한다. 기준을 조금 낮추어 살라고, 일상을 뒤흔드는 걱정거리가 없는 상태, 조금은 단조롭게 느껴지는 삶의 일상성, 그것이 행복이라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을 잎이 쓸쓸히 나뒹구는 어느 고적한 길을 홀로 거닐 다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념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친구들, 동료들, 이웃들에 자신의 곁을 내어주고, 그네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소소한 관계의 기쁨이 삶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할 것이다. 삭막하게 닫힌 마음에 서로 다른 모습들의 사랑이 추억처럼 슬며시 스며드는 이 작품집을 읽으며, 떠오르는 그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 잠긴다. 그래 살아있는 나, 아끼지 말고 살 것이다. 어느새 다가 온 가을의 스산한 기운처럼 그렇게 이 소설들은 잊거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들과 함께 마음을 사랑의 기대로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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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9-25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복되는 의례행위가 끌어내는 기억!
알것 같네요

이 책 리뷰 두번째 보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비의식 2022-09-25 09:57   좋아요 1 | URL
안윤의 세 작품에는 유사한 형태가 등장하는데요, ‘달밤‘에는 소애를 위해 매년 생일상을 차려줬다는 얘기가 나오죠. 그 생일은 은주 언니의 기일이기도 해요. 화자에게는 이 행위를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미세한 차이가 자기 회복의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영원회귀의 긍정적 힘의 발견이랄까요. 마찬가지로 ‘방어는 제철‘에서도 안라와 정오는 3년에 걸쳐 12월이면 방어회집 창해에서 만나지요. 이 역시동일한 행위의 반복이지만 차이를 가진 반복이지요. 그것의 집적이 다시금 묻혀있던 응어리의 해결로 안내하죠. 방어는 ‘제철‘이지만 제철은 똑같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억압되었던 기억의 해방으로 드러나게하는 차이의 축적인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님의 정곡을 가리키는 댓글 덕택에 뻔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고 말았네요. 남겨주시는 댓글 진심 감사드립니다. 남은 주말 즐거운 시간되십시요~~
 
지구별 인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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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잠식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진정 인간 개체 하나 하나를 위한 절대적 필요인가? 인간 행위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명령은 항상 올바른가? 소설은 아마 이런 물음을 요청하고 인간 세상의 윤리적 구조에 강렬한 의심을, 그리고 극단적인 실현의 양태(樣態)를 통해 엄청난 충격을 가한다.

 

이 작품 지구별 인간무라타 사야카의 흥행작이었던 편의점 인간을 계승하고 있다는 비평이 있지만, 내게는 인간 행위에 규정된 윤리관을 새롭게 정의한 사회를 배경으로 살의(殺意)가 미래로 생명을 이어가는 사회를 그린 중편소설 살인출산의 또 다른 변형, 아니 도래(到來) 전의 에피소드처럼 여겨진다.

 

나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에 살고 있다. (...) 이곳은 육체로 이어진 인간 공장이다.

나 같은 아이들은 언젠가 이 공장 밖으로 출하된다.” -44

 

중학생 여자 아이 나쓰키에겐 자신이 사는 지구라는 세계가 자신의 별()인 것 같지 않다. 이 세계의 지식과 문화에 어떤 비판도 할 줄 모르고 그저 맹신하고 복종하는, 속물의 화신인 부모에게 고집 센 멍청이로 불리며, 어떠한 이해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아이다.  그녀에겐 이 세계가 번식력 갖춘 인간을 출하하는 인간공장 같기만 하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묘사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삼림으로 한 낮에도 밤의 조각이 사라지지 않는 웅장한 산속 외딴 아키시나의 집은 나쓰키가 유일하게 평온을 느끼는 공간이다.

 

매년 백종절이면 친척들이 모이는 곳, 여기서 만나는 사촌인 유우와의 만남은 나쓰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확인하며,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즐거움의 시간인 까닭이다. 소녀와 소년은 지구별 인간(地球星人)’이 아닌 외계인(포하피핀포보피아 별)으로서 인간 세계를 바라본다. 세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대로 뇌를 발달시키고, 몸을 성장시키도록 강제되는 것에 두 아이는 순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성장해서 독자적으로 온전히 살아남을 때까지 그러한 어른들의 세계에 복종하여야 함을 안다. 이러한 나쓰키에게 학원 선생의 성폭행이 저질러진다. 잘 생긴 낯 덕택에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흠모의 시선을 한껏 받는 남자는 나쓰키를 유인하여 버젓이 악행을 저지른다. 아이는 이를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다.

 


학원 선생의 폭력을 엄마에게 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린 게 벌써 그딴 생각이나 하고라는 말과 함께 슬리퍼로 얼굴, 머리 등을 내리치는 또 다른 폭력이다. 이러한 나쓰키에게 어린 시절을 마감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아키시나에서 재회한 우유와 나쓰키는 최초의 섹스를 하고, 이들의 발가벗은 채 엉킨 모습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에 반응하는 어른들의 난리법석을 나쓰키는 이렇게 대꾸한다.

 

어른은 아이를 성욕 처리에 이용하면서, 아이가 자기 의지로 섹스를 하면 멍청이처럼

난리 법석을 떤다.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다. 세상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109

 

지구별 인간들의 자기기만과 타자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맹목적 윤리관에 대한 냉정한 혐오의 변()일 것이다. 시간은 20년을 훌쩍 건너뛰어 각방 쓰는 건조한 결혼 생활, 성행위 완전 배제, 가사 완전 분담을 계약 내용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 나쓰키와 남편 도모오미의 삶의 방식을 비춘다.

 

두 사람은 이 세계라는 보이지 않는 공장(Factory)’의 일원이 되는 것에 결코 세뇌되지 않는다. 이들은 공장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끝없이 연기를 펼치며, 그들의 부모와 친척, 친구와 이웃이 믿는 공장의 일부가 되리라는 시선에서 도망친다. 여성의 자궁은 공장의 부품이며, 마찬가지로 부품인 누군가의 정소(精巢)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할 것”(126)을 엄중한 규칙이라 압박하고, 공장의 정상적 부품임을 끊임없이 입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공장에 공헌하는 모습의 가장(假裝)된 어필은 그들의 부모에 의해 의심되고, 조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비어 있는 아키시나의 산속 집에 홀로 살고 있는 우유가 있는 곳으로 도피하듯 탈주한다. 우유와 나쓰키가 어린시절 찾던 자신들을 데려가주기 위한 우주선, 즉 인간 굴종의 삶이 강요되는 지구별이라는 공장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으로의 이동 공간인 아키시나에서 외계의 감각을 가진 새로운 종으로서의 삶의 시도에 착수한다.

 

나쓰키를 비롯한 이들 세 사람은 공장의 노예인 삶,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생으로부터의 도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이 말하게 하는 말을 자기 말이라 믿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으리라(234)”는 이들의 생각을 부정하기란 그리 쉬운 명제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나 또한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그저 올바르다는 믿음에 저항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상 내 생각이라는 것이 집단의 지혜가 위임한 판결의 무기력한 집합소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는 것이며, 단지 이것들을 암송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소설의 대단원은 그야말로 당혹과 전복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섭식하는 행위를 통해 공장의 질서에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사회의 윤리의식에 철저한 의심, 강력한 반기를 전시함으로써 세계라는 인간 공장에 대한 종교적 맹신, 그 무사유를 뒤집어엎는다. 폭설과 산사태로 차단되었던 아키시나의 공간에 지구별 인간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의 눈앞에 있는 전경은 벌거벗은 채 배가 산처럼 부은 세 마리의 낯선 종족이다. 그리곤 우주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지구별 인간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채운다.

 

그러나 이들은 지구성인들을 향해 괜찮다고 말한다. 당신들 안에도 우리들의 모습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매일 불어날 것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맹종하는 이 세계의 잔혹한 질서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신()인간이 늘어 날 것임을 선언하는 이 문장은 새로운 정체성의 존재에 대한 어떤 가능성의 희구처럼 보인다. 무라타 사야카는 의심을 잃어버린 사유(思惟)없는 이 세상을 향해 묵시적 외침을 계속 할 모양이다. 공장의 정상적 부품임을 입증하라는 세상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포하피핀포보피아주문, 번식 없는 감염의 확산, 자멸, 종말의 외침이 서늘하게 온 몸을 파고든다. 인간의 세계에는 더 이상 구원 같은 것은 없다는 웅변일까?




註1) 포하피핀포보피아의 의미: 나쓰키의 사촌 우유가 상상한 외계의 별이지만, 이 별은 인간을 도구화한 지구별의 윤리적 의심을 통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존재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나쓰키, 우유, 도모오미 세 사람의 실천적 행위의 변신적 실체이기도 함. 즉 새로운 감각의 신인류의 은유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임.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마법적 존재인 피핀과 공포증을 의미하는 포비아의 조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註2) 村田 沙耶香 (Murata Sayaka) :


무라타 사야카의 글쓰기는 인간을 길들여 온 모든 습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정신을 위해, 


너무 자명해서 증명조차 필요없으리라 여겨지는 이 시대의 보편적 가치들이 실은 아무런 토대도 지니고 있는 것이 없다는 그 맹목과 독단을 깡그리 전복한다. 


그렇게 해서 획득하는 것, 초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신체 상태, 어쩌면 니체의 위버멘쉬가 되기위한 집요한 실천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소설들은 이렇듯 변모의 예술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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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15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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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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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을 일회적으로 자극하는 수많은 미디어의 영상들은 저 먼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소비시키면서 자기들의 체제와 영역의 우월성이라는 안전성과 안도감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순간 연민과 동정, 분노를 느끼지만 이 역시 자기안도의 유희요 공모이며 자기기만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상이 전달하는 비도덕적이고 파괴적인 실제에 분노, 공포, 동정심 등 온갖 감정을 느끼지만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심한다. 감정의 찰나적 소비가 주는 즐거움으로 곧 휘발되고 만다. 더 이상의 감정적, 이성적 진전이 없기가 태반이다.

 

반면 이 문학적 서사는 이러한 기만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를 생생한 현실, 무서운 현실,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파악과 나아가 인간이란 진정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 즉 사유와 실천적 숙고로 이끈다. 할레드 호세이니가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은 액정 화면의 영상처럼 화면 속 현실에 대한 감염의 배척이나 쾌락적 소비가 아니라 소설이 구현하는 현실에 풍덩 빠뜨림으로써 독자가 온 몸으로 체화토록. 대체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를.

 

탈레반의 무차별한 테러를 상징하듯 화염과 울부짖는 여인이 있는 영상, 그 철저히 차단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우리들의 세계로 어느 날 불쑥 더 이상 배제될 수 없는 감염,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특별기여자로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 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극렬한 반감의 소리들이 그치질 않고 있다. 우리는 진정 무엇을 알아야하고, 어떤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 세계에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이라 구분하고 차별하는 그 경계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물음들이 가득한 것이 이 작품일 것이다.

 

현실을 차단하는 액정 화면 가득한 과장된 발악, 공허한 외침이 아닌 언어의 힘’, ‘문학의 힘이 고통과 슬픔이 만연한 불의한 현장에 오랫동안 체류케 하며 를 포함한 인간존재에 대한 생각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한다. 바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수천 킬로미터 먼 이역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은 지하드(이슬람 신앙과 원리를 위하여 벌이는 성전(聖戰))’라는 이름 아래 서로 죽고 죽이는 증오의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일상 속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무고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더 이상 영상 속 비현실적 소비 대상의 존재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앎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시,청각을 일회적으로 자극하는 수많은 미디어의 영상들을 바라보면서 저 먼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소비하며, 자신의 체제와 영역의 우월성이라는 안전성과 안도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연민과 동정, 분노로 내 도덕성에 안심하며, 감염되지 않을 영상의 상징적 메시지에 유희와 공모를, 그리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상이 전달하는 비도덕적이고 파괴적인 실제에 분노, 공포, 동정심 등 온갖 감정을 느끼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심하며, 감정의 찰나적 소비로 곧 휘발되어 더 이상의 감정적, 이성적 진전이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나였을 것이다.

 

소설 속으로

 

소설은 하라미(혼외 자식, 사생아를 비하하여 부르는 말)’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소녀 마리암의 다섯 살 기억으로 시작된다. 이 저열한 비참의 언어는 무슬림의 율법, 그네들이 관습과 상식이라 부르는 것이 편의적이고 기득권 중심에 의해 작동되기에 야기되는 불의한 현실적 산물이다. 시인들의 도시로 불리는 헤라트 지역의 유지인 잘릴의 자식이지만 식모에 불과했던 마리암의 어머니 나나는 헤라트로부터 쫓겨나 버려진 언덕의 오두막에서 마리암을 외로이 키워나간다. 모녀는 이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되고 부정되는 존재이다. 특정된 날에 딸을 찾아와 함께하는 아버지 잘릴에 대한 어린 마리암의 친근감과 존경의 마음은 그네들 사회의 뿌리깊은 차별, 그 위선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어머니 나나에 의해 짓밟힌다.

 

잘릴은 영화와 아이스크림, 시인의 나무 등등을 마리암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지만, 정작 마리암이 그 실체에 대한 경험을 요구하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완곡한 거부의 몸짓이다. 어린 마리암은 이를 해독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말은 잘릴에 대한 증오심으로 왜곡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리암은 아버지가 사는 헤라트로 찾아가면 자신을 환대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아버지와의 만남은 거절된다. 마리암은 닫힌 대문 앞에서 온 밤을 지새우지만 결코 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라미, 적법하게 시작되지 못한 삶은 결코 그 어떤 적법한 권리도 그녀와는 무관한, 단지 그녀의 죽음에만 적용될 터이다.

 

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디에선가 고통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 128

 

쫓기듯 차에 실려 강제로 어머니가 있는 오두막에 돌아왔을 때, 마리암은 어머니 나나의 싸늘한 주검을 만난다. 하라미로 태어난 딸의 보호만이 생의 유일한 이유였던 여인은 딸이 헤라트로 떠나자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의지할 곳 없어진 열다섯 살 마리암은 일시적으로 헤라트 잘릴의 집에 머물게 되지만 이내 쉰 살을 훌쩍 넘은 수도 카불의 구두장이 아내로 떠밀려 떠나가게 된다. 그녀는 구두장이 라시드의 성욕받이요, 음식과 세탁을 하며 집안 청소를 하는 성노예이자 식모의 역할에 종속된다. 마리암은 눈만 드러나는 브루카의 착용과 남편과의 외출이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감금과 억압의 생활에 강제되고, 수차례의 거듭되는 유산과 더불어 허리띠의 버클로 내리치고 주먹과 발길질이 반복되는 폭력으로 부서진 이와 멍든 몸을 헤어나지 못한다.


 



소설은 이렇듯 마리암이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가부장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슬림의 율법 아래에 놓인 여성들의 무참한 고통의 실체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곤 소련의 위성 정권 하에서 교사직업을 잃고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한 가족, 그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하는 금발과 초록색 눈을 한 여자아이 라일라의 시점을 병행한다. ()소련 항전 조직인 무자헤딘, 이슬람 성전(聖戰)의 전사로 참전하는 두 오빠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가족, 특히 라일라의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의 성스러운 전사들의 승리가 기어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무자헤딘의 새로운 이슬람 정권이 수립되지만, 카불은 사분오열된 내분으로 다시금 저마다 지하드를 내걸며 상대를 겨냥한 무차별 전쟁을 벌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지점이 있는데, 라일라의 어머니는 전사한 자식들의 장례를 직접 치러주고 예를 표했다는 한 군벌에 맹목적인 신성을 부여한다. 그녀에게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번영의 영광을 되찾아줄 것이라는 부동의 믿음이다. 그러나 실상은 권력을 향한 이기심을 은폐한 기만적인 지하드의 하나일 뿐임을 우리들은 안다. 인간의 이성이 ()지성화하여 뿌리깊은 갈등과 분열로 자리잡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흔한 보기일 것이다. 이것은 한 가족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기원이 되는 듯하다.

 

이웃집이 로켓탄으로 폭파되고 무고한 몸통이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들이 나뒹구는 무법의 지대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은 이어진다. 다리 하나를 총탄으로 잃어버린 타리크는 라일라의 수호기사다. 라일라와 타리크의 성장기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사랑의 이야기는 온통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한 소설의 배경에 한 줌의 순수하고 밝은 빛으로 어떤 아득한 태곳적 향수,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추는 영화(榮華)와 평화가 만개한 영역을 거니는 듯한 기쁨을 준다. 전쟁의 참화가 직접적 생존의 문제임을 회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사람들은 고향 카불을 뒤로하고 정처없는 난민의 행렬로 뛰어든다. 타리크의 가족도 탈출을 결심하고, 라일라와 함께 갈 것을 제안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는 열네 살 소녀 라일라는 동행을 거절한다. 타리크와의 이별, 라일라는 아름답고 신성하기조차 한, 타리크와의 소중한 첫 경험을 갖는다.


디아스포라의 행렬, 아버지 바비의 설득 끝에 라일라의 가족도 파키스탄으로의 탈출을 준비하고 짐을 차에 옮기던 날, 한 발의 로켓탄은 라일라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빼앗아 간다. 군벌(軍閥)들이 벌이는 기만적인 성전은 카불과 시민들의 삶을 초토화시킨다. 파괴된 벽돌과 유리 덩어리에 깔려 신음하던 라일라는 그녀의 성장을 눈여겨보았던 예순이 넘은 동네 이웃인 구두장이 라시드의 더러운 계산에 의해 구출되어 죽음에서 벗어난다. 총알과 로켓탄은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고...납치, 강간, 살인...길 가의 시궁창에 던져진 주검들..., 열 네 살 여자 아이가 홀로 탈출의 길을 걷는 것은 곧 자살, 자멸의 길(295)”임을 겁박하며, 라시드는 라일라를 두 번째 아내로 취한다. 라일라의 몸속에는 이미 타리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에 이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녀의 불가항력적 최선이었던 까닭이다.

 

라시드의 두 아내로서 마리암과 라일라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다섯에 끌려와 서른다섯이 된 첫째 부인 마리암, 열네 살 둘째 부인 라일라는 서로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딸처럼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라시드가 구둣가게로 출근하면 바쁜 일상 속에서 두 여자는 마당의 거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할와를 먹으며 여인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암에게 이러한 시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기만의 시간, 기쁨이 된다. 라일라는 딸 아이 아지자를 출산하고, 두 여인은 아지자의 재롱과 양육으로 모녀처럼 친밀성이 더욱 깊어진다.

 

오랜 세월 악의와 구타를 감내해 왔던 마리암이 느끼는 새로운 생명의 경이, 그리고 어린 라일라로부터 여성의 유대, 어머니 나나가 들려주었던 고통받는 여자의 한 숨의 이야기들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여인들 삶의 숙연한 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하고, 그녀의 삶을 온통 좌우했던 불의한 세계 너머에 있었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의 고향, 그리고 꿈으로 자리 잡는다. 한편, 죽은 줄 알았던 타리크의 돌연한 방문은 라일라의 체념한 삶을 깨우고, 이는 비열한 성적 이기심에 매몰된 라시드의 잔혹한 폭력을 다시금 깨우는 계기가 된다. 아름다움과 젊음, 지적 교양까지 갖춘 라일라에 대한 절대 소유욕이 금이 가자, 라시드는 마침내 라일라를 죽이려는 살기로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여성을 한낱 물건이상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탈레반의 살인적 규율이 지배하는 시대, 마리암은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탈레반 율법학자들의 구태는 라시드를 죽여야만 했던 상황의 정상을 고려하지 않는다. 재판관인 율법학자는 말한다. 어째서 너는 내 율법에 복종하지 않았느냐? 함시라. ... 신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법을 계속 지키는 길밖에 없소. ... 당신은 사악한 짓을 했소. 당신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하오.(512)”, 신의 명령인 남성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여인은 죽어야 한다는 기만과 위선의 변()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판결문 아래 서명하고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인다.

 

사형장인 가지 경기장에 운집한 수천 개의 눈이 그녀를 응시한다. 나는 이 눈이 천개의 찬란한 태양과 대비되어 인간의 부패한 의식, 그 탐욕과 폭력적 쾌락에 절은 인간들의 추악한 심연을 보는 듯 더없이 역겨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여인의 처형장면을 즐기려는 무슬림 남성들의 이 관음증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신성한 율법이라고, 신앙과 원리를 위해 벌인 성전으로 쟁취한 결과라고? 경기장 한가운데 무릎을 꿀린 채 소련제 칼리시니코프 소총이 그녀를 향했을 때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는 마리암의 마음을 읽으며, 그토록 불친절하기만 했던 그녀의 삶이 이제야 휴식을 취하게 되는구나라는 탄식, 안타까움으로 속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소설의 종장은 타리크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단란한 삶을 꾸리던 라일라가 고국 아프가니스탄, 고향인 카불로 돌아와 고아들을 보듬고 그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지만 라일라는 되뇐다. “고국에서는 다시 폭탄이 떨어지고 이번에는 미국의 폭탄이라고. 그리고 국제평화유지군이 카불에 파견되었다고. 카불의 참회는 너무 늦게 왔다고(437).”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알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도망치듯 카불을 떠났고, 탈레반이 또다시 그 지옥의 언어, 위선의 언어, 악의 언어인 지하드를 내걸고 사람들을 다시금 죽이고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글을 맺으며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의 축은 여성에 대한 악착같은 차별의 인식이다. 그것은 여자들은 양식을 축내는, 재산을 갉아먹는 소비적 존재이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의 절대 권위를 내세우는 탈레반의 무슬림 율법은 여성의 교육, 취업, 사회적 생활을 모두 부정하며, 외출조차 금지한다. 앎과 생업 활동이 차단되어 무력화된 여성은 남성 권력에 의해 무방비적 착취의 대상이 되고 만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남편인 구두장이 라시드가 탈레반을, 무슬림 율법의 권위를, 그칠줄 모르는 기만적 지하드를 반기는 이유이다. 하찮은 인간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무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구속도 없는 여성에 대한 무참한 폭력 행사의 정당화를 낳는다.

 

이들의 권력의 독점을 위한 남성적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곧 아프가니스탄의 지속되는 내전의 실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제멋대로 하고싶은 무한한 권력의 독점을 위한. 이것의 모습은 그 형태를 바꾸어 마치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오늘 한국사회의 검찰 권력의 몽매성과 매우 닮아있다. 사회적 약자의 모습에 낯설어하는 그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악착같은 권력 독점의 욕심까지. 그러나 이러한 악의와 폭력, 무관심의 파렴치, 잔인함이 횡행하는 반지성의 세상 속에서도 인간들은 고귀한 생명성, 사랑과 유대를 통해 인내하며 기어코 세대를 이어간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이러한 약자들의 고통과 슬픔, 인내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은 부르카로 온 몸을 감싸고 그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여인들, 세상의 온갖 악의와 억제가 집약된 그 처참한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여인들의 고고한 인내와 생명성에 대한 이 찬가를 읽으며, 체념과 포기, 좌절과 같은 감상적 환상을 벗어난다. 삶이 제아무리 불친절해도 마지막 걸음을 옮기는 마리암의 마음을 그득 채우는 어머니 나나와 잘릴이 주었던 소소한 사랑의 기억들, 마리암의 오두막에 앉아 그녀의 희생과 사랑을 더듬는 라일라의 삶을 향한 굳센 발걸음은 아마 영원히 내 마음 속에 감동적으로 새겨질 것 같다.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을 소비하며 더 확실한 안도감을 느끼는 기만적 독서를 경계했지만, 그렇다고 동정과 연민, 분노의 감성으로 휘몰아치는 격렬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이산의 슬픔을 안고 한국 땅의 어디에선가 고달픈 적응과 희망,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특별기여자들의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내 생각은 이어진다. 그들에게 겨누어지는 차별과 편견의 잣대가 거두어지길, 환대의 손길이 어루만져 주길, 그들의 조국에 다시금 천개의 태양이 찬란하게 내리 쪼이기를 내 작은 감상과 기도로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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