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2 소설 보다
김기태.위수정.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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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록작인 김기태작가의 전조등, 주인공이 운전하는 차량의 전조등은 이 세계에 대한 첫 의심, 아니 자기 삶에 부딪친 최초의 타자에 대한 관심의 사건을 불러오는 지점일 것이다. 제목처럼 소설은 영특함이 빛난다. 문장은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지루함 없이 마지막 문장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있다. 두 번째 작품인 위수정작가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초로(初老)의 여성 원희를 중심으로 그녀의 시모와 시집 간 딸을 통해 여성의 연령에 따라 겪게 되는 삶의 개별성을 원숙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사회의 소음들이 요구하는 어떤 잣대와도 무관한 글쓰기가 매력적이다. 마지막 수록작인 이서수작가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는 왠지 감정의 진솔함 때문인지 내겐 다소 낯선 문장들이지만 새로운 유형의 인간관계를 발견하는 신선함이 있다.

 

이번 가을 선집 수록작 세 편에 대한 이 간략한 개괄적 느낌과 달리 하나의 의문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소설 속 인물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제도적, 구조적, 체제적 한계가 지닌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러한 지배적 힘,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치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심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우정 혹은 사랑의 경계를 지나는 독특한 신유형의 인간애를 그리고 있는 이서수작가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를 지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질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뒤틀린 삶의 왜곡 양상들이 등장인물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듯 그 지배적 힘의 굴레 안에서 그 힘이 제시하는 정형성의 미달에 그저 시름하기만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며 알바로 생계를 빠듯하게 꾸려가는 가진이란 여성이나 응급실 간호사로서 자기 고통이 최우선이라 생각하는 인간 군상들, 그네들의 질병과 죽음에 감정적 육체적 수고를 요구당하는 사영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 안타까움이라 할 수 있다.

 

가진과 사영이 함께 찾아가는 지방도시의 삼천만원 아파트로 상징되는 장소는 갱신되어야 할 세계의 윤리구조에 대한 어떤 창조적 도전이 아니라 다만 현실에서의 도피, 굴종에 대한 소극적 완화의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설혹 그녀들이 함께 대지에 내려 앉아 삶의 평온과 사랑을 존속시킨다 할지언정 이 세상은 한 치도 변화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들의 보신에 눈물겨워하는 인간에 어떤 긍정성을 씌우는 것은 청년들에게 지나치게 무력(無力)과 굴종을 강요하는 것 같기만 하다.

 

단편 전조등은 아예 지배적 힘의 언어를 그대로 자기 삶의 실천적 지표로 삼는 인물을 등장시켜, 시대의 보이지 않는 지배적 힘(제도, 법률, 관습, 상식 등등)에 어떠한 의심도 보이지 않는 길들여진 인간의 전형을 내세우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성장기에 배운 것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대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당하지 않기 위한 지혜를 배웠다고. 세상을 위한 창조나 갱신의 노력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자기보호의 무기만 갈고 닦았다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군청공무원인 그의 아버지는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라며 현실의 물질적 삶이 제공하는 안정성에 만족스러움을 표시하기까지 한다. 배부른 돼지의 삶이면 족하다는 이 말은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가?


 


이 소설을 중산층의 탄생, 혹은 그 무사유의 영원성’, 이라 불러도 어울릴 법 할 듯싶다. 주인공은 이러한 인식을 체화하며 성장한다. 서울의 중상층 대학에 입학하고, 완성차 제조 대기업에 취업하여 고액의 연봉. 직장 인간관계에서도 갈등을 피하는 준수한 삶에 만족한다. 수 차례의 연습같은 연애를 거치고 여기서 얻은 이성관계의 지혜로 결혼에 입성한다. 그리곤 딸 아이를 얻는다. 세상의 말, 그 지배적 힘의 언어를 자기의 말로 착각, 내면화한 맹목적 삶의 전형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에 유일한 균열을 낼 뻔 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운전하던 차에 무언가 부딪친 파열음 소리이다. 차에서 어두운 산길을 둘러보다 군청색 털 고무신 한 짝을 발견한다. 그러나 잠시 어두운 산을 바라보다 이내 한 쪽 신발을 잃어버리고 걷는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하며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지독한 무관심, 혹여 사람을 다치게 했는지도 모를 일에서 조차 의심을 잃어버린 이 무사유(無思惟)의 정신에 왠지 소름마저 끼친다. 산길을 걷던 노파가 차에 부딪쳐 산 속 어딘가로 튕겨 묻혀있는 것은 아닐까? 왜 이런 의심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의 이 시대가 인간들을 이렇게 길들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이러한 수구적 이기심은 이 사회의 윤리적 갱신을 방해한다.

 

작가는 이러한 무의심, 무사유의 전형적 인간의 무난한 중산층 편입의 정형성을 통해 역설적 읽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설에 이르기에는 요구되어야 하는 문장들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윤리적 구조를 향한 외침이 아쉽게만 여겨진다.

 

매끈한 굴곡 없는 삶, 너절하고 하찮은 잡음들이 싹 거두어진, ‘중산층이라는 정형화된 얼굴들, 경제, 사회, 윤리적 전형성을 띤 인물들은 왠지 작가들의 글쓰기 속에 내재된 의지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수구적 이기심의 은폐성. ‘위수정작가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또한 초로의 중산층 여성이 주인공이다. ‘원희라는 인물은 친구 수임과 함께 지방 흡입, 눈매 교정, 성형시술 등의 피부관리를 받으며, 음악연주회를 감상하러 다니는, 경제적 제약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자신의 늙어가는 몸, 그 육신의 욕망에 오로지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시모의 설핏 드러나는 억제된 욕망의 흔적이나, 남편의 노후 징후, 셋 째 아이의 출산을 앞둔 딸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기도 하지만 이를 자기연민과 자기애의 축에서 벗어난 반성적 시선으로 해석하기에는 미흡하기만 하다.

 

수임의 제안으로 젊은 피아니스트의 음악 연주회에 동행하게 되고, 즐기던 음악이 아니었던 기승전결도 없는 불협화음의 음악인 헝가리 작곡가 버르토크를 연주하는 주완에 매료되지만, 원희 자신에겐 이러한 매혹에 대한 적극적 반응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의 연령에 대한 제약의 시선이 있음을 문득 깨닫는 장면 등은 노화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길들여진 이 세계의 습속에 깃든 반()윤리성, 그 억압 윤리들의 시의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듯도 하다.

평온 무탈한 삶의 소소한 행복, 우아한 자기를 위한 항상성의 욕구 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강렬한 의심을 제기케 하는 많은 윤리적 구조의 문제가 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의 조건을 입증하지 못하는 존재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보이지 않게 강제하는 모든 습속과 규율에 굴종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무수한 불의와 부정을 담고 있기에 모든 인간이 이를 모른 체하며 나만 잘 살면 돼라 할 경우 이러한 지배의 힘은 어느 것도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대를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통해 그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욕망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강요된 어머니나 규정화되어 씌워진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한 자연스러움, 해방감을 그려낸 점은 분명 이 작품의 돋보이는 장점이라 할 것이지만, 위수정 작가의 작품에서는 사람들 눈앞에서 지워진 계층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찮은 사태들이 들러붙는 복잡성의 왜곡을 피하는 글쓰기도 중요하겠지만, 사실의 은폐된 문제들은 바로 이 배제된 부분에 더 많은 것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한국 문학도 자기연민을 핥아대는 지점에서 도약해야 되지 않을까? 이 시대, 이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것들의 맹목과 독단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그런 작품들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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