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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평점 :
시청각을 일회적으로 자극하는 수많은 미디어의 영상들은 저 먼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소비시키면서 자기들의 체제와 영역의 우월성이라는 안전성과 안도감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순간 연민과 동정, 분노를 느끼지만 이 역시 자기안도의 유희요 공모이며 자기기만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상이 전달하는 비도덕적이고 파괴적인 실제에 분노, 공포, 동정심 등 온갖 감정을 느끼지만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심한다. 감정의 찰나적 소비가 주는 즐거움으로 곧 휘발되고 만다. 더 이상의 감정적, 이성적 진전이 없기가 태반이다.
반면 이 문학적 서사는 이러한 기만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를 생생한 현실, 무서운 현실,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파악과 나아가 인간이란 진정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 즉 사유와 실천적 숙고로 이끈다. ‘할레드 호세이니’가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은 액정 화면의 영상처럼 화면 속 현실에 대한 감염의 배척이나 쾌락적 소비가 아니라 소설이 구현하는 현실에 풍덩 빠뜨림으로써 독자가 온 몸으로 체화토록한다. 대체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를.
탈레반의 무차별한 테러를 상징하듯 화염과 울부짖는 여인이 있는 영상, 그 철저히 차단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우리들의 세계로 어느 날 불쑥 더 이상 배제될 수 없는 감염,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특별기여자로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 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극렬한 반감의 소리들이 그치질 않고 있다. 우리는 진정 무엇을 알아야하고, 어떤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 세계에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이라 구분하고 차별하는 그 경계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물음들이 가득한 것이 이 작품일 것이다.
현실을 차단하는 액정 화면 가득한 과장된 발악, 공허한 외침이 아닌 ‘언어의 힘’, ‘문학의 힘’이 고통과 슬픔이 만연한 불의한 현장에 오랫동안 체류케 하며 ‘나’를 포함한 ‘인간’ 존재에 대한 생각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한다. 바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수천 킬로미터 먼 이역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은 ‘지하드(이슬람 신앙과 원리를 위하여 벌이는 성전(聖戰))’라는 이름 아래 서로 죽고 죽이는 증오의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일상 속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무고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더 이상 영상 속 비현실적 소비 대상의 존재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앎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시,청각을 일회적으로 자극하는 수많은 미디어의 영상들을 바라보면서 저 먼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소비하며, 자신의 체제와 영역의 우월성이라는 안전성과 안도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연민과 동정, 분노로 내 도덕성에 안심하며, 감염되지 않을 영상의 상징적 메시지에 유희와 공모를, 그리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상이 전달하는 비도덕적이고 파괴적인 실제에 분노, 공포, 동정심 등 온갖 감정을 느끼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심하며, 감정의 찰나적 소비로 곧 휘발되어 더 이상의 감정적, 이성적 진전이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나였을 것이다.
■ 소설 속으로
소설은 ‘하라미(혼외 자식, 사생아를 비하하여 부르는 말)’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소녀 ‘마리암’의 다섯 살 기억으로 시작된다. 이 저열한 비참의 언어는 무슬림의 율법, 그네들이 관습과 상식이라 부르는 것이 편의적이고 기득권 중심에 의해 작동되기에 야기되는 불의한 현실적 산물이다. 시인들의 도시로 불리는 헤라트 지역의 유지인 ‘잘릴’의 자식이지만 식모에 불과했던 마리암의 어머니 ‘나나’는 헤라트로부터 쫓겨나 버려진 언덕의 오두막에서 마리암을 외로이 키워나간다. 모녀는 이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되고 부정되는 존재이다. 특정된 날에 딸을 찾아와 함께하는 아버지 잘릴에 대한 어린 마리암의 친근감과 존경의 마음은 그네들 사회의 뿌리깊은 차별, 그 위선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어머니 나나에 의해 짓밟힌다.
잘릴은 영화와 아이스크림, 시인의 나무 등등을 마리암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지만, 정작 마리암이 그 실체에 대한 경험을 요구하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완곡한 거부의 몸짓이다. 어린 마리암은 이를 해독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말은 잘릴에 대한 증오심으로 왜곡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리암은 아버지가 사는 헤라트로 찾아가면 자신을 환대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아버지와의 만남은 거절된다. 마리암은 닫힌 대문 앞에서 온 밤을 지새우지만 결코 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라미, 적법하게 시작되지 못한 삶은 결코 그 어떤 적법한 권리도 그녀와는 무관한, 단지 그녀의 죽음에만 적용될 터이다.
“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디에선가 고통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 128쪽
쫓기듯 차에 실려 강제로 어머니가 있는 오두막에 돌아왔을 때, 마리암은 어머니 나나의 싸늘한 주검을 만난다. 하라미로 태어난 딸의 보호만이 생의 유일한 이유였던 여인은 딸이 헤라트로 떠나자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의지할 곳 없어진 열다섯 살 마리암은 일시적으로 헤라트 잘릴의 집에 머물게 되지만 이내 쉰 살을 훌쩍 넘은 수도 카불의 구두장이 아내로 떠밀려 떠나가게 된다. 그녀는 구두장이 라시드의 성욕받이요, 음식과 세탁을 하며 집안 청소를 하는 성노예이자 식모의 역할에 종속된다. 마리암은 눈만 드러나는 브루카의 착용과 남편과의 외출이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감금과 억압의 생활에 강제되고, 수차례의 거듭되는 유산과 더불어 허리띠의 버클로 내리치고 주먹과 발길질이 반복되는 폭력으로 부서진 이와 멍든 몸을 헤어나지 못한다.
소설은 이렇듯 마리암이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가부장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슬림의 율법 아래에 놓인 여성들의 무참한 고통의 실체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곤 소련의 위성 정권 하에서 교사직업을 잃고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한 가족, 그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하는 금발과 초록색 눈을 한 여자아이 ‘라일라’의 시점을 병행한다. 반(反)소련 항전 조직인 무자헤딘, 이슬람 성전(聖戰)의 전사로 참전하는 두 오빠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가족, 특히 라일라의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의 성스러운 전사들의 승리가 기어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무자헤딘의 새로운 이슬람 정권이 수립되지만, 카불은 사분오열된 내분으로 다시금 저마다 지하드를 내걸며 상대를 겨냥한 무차별 전쟁을 벌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지점이 있는데, 라일라의 어머니는 전사한 자식들의 장례를 직접 치러주고 예를 표했다는 한 군벌에 맹목적인 신성을 부여한다. 그녀에게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번영의 영광을 되찾아줄 것이라는 부동의 믿음이다. 그러나 실상은 권력을 향한 이기심을 은폐한 기만적인 지하드의 하나일 뿐임을 우리들은 안다. 인간의 이성이 반(反)지성화하여 뿌리깊은 갈등과 분열로 자리잡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흔한 보기일 것이다. 이것은 한 가족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기원이 되는 듯하다.
이웃집이 로켓탄으로 폭파되고 무고한 몸통이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들이 나뒹구는 무법의 지대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은 이어진다. 다리 하나를 총탄으로 잃어버린 타리크는 라일라의 수호기사다. 라일라와 타리크의 성장기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사랑의 이야기는 온통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한 소설의 배경에 한 줌의 순수하고 밝은 빛으로 어떤 아득한 태곳적 향수,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추는 영화(榮華)와 평화가 만개한 영역을 거니는 듯한 기쁨을 준다. 전쟁의 참화가 직접적 생존의 문제임을 회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사람들은 고향 카불을 뒤로하고 정처없는 난민의 행렬로 뛰어든다. 타리크의 가족도 탈출을 결심하고, 라일라와 함께 갈 것을 제안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는 열네 살 소녀 라일라는 동행을 거절한다. 타리크와의 이별, 라일라는 아름답고 신성하기조차 한, 타리크와의 소중한 첫 경험을 갖는다.
디아스포라의 행렬, 아버지 바비의 설득 끝에 라일라의 가족도 파키스탄으로의 탈출을 준비하고 짐을 차에 옮기던 날, 한 발의 로켓탄은 라일라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빼앗아 간다. 군벌(軍閥)들이 벌이는 기만적인 성전은 카불과 시민들의 삶을 초토화시킨다. 파괴된 벽돌과 유리 덩어리에 깔려 신음하던 라일라는 그녀의 성장을 눈여겨보았던 예순이 넘은 동네 이웃인 구두장이 라시드의 더러운 계산에 의해 구출되어 죽음에서 벗어난다. “총알과 로켓탄은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고...납치, 강간, 살인...길 가의 시궁창에 던져진 주검들..., 열 네 살 여자 아이가 홀로 탈출의 길을 걷는 것은 곧 자살, 자멸의 길(295쪽)”임을 겁박하며, 라시드는 라일라를 두 번째 아내로 취한다. 라일라의 몸속에는 이미 타리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에 이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녀의 불가항력적 최선이었던 까닭이다.
라시드의 두 아내로서 마리암과 라일라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다섯에 끌려와 서른다섯이 된 첫째 부인 마리암, 열네 살 둘째 부인 라일라는 서로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딸처럼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라시드가 구둣가게로 출근하면 바쁜 일상 속에서 두 여자는 마당의 거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할와를 먹으며 여인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암에게 이러한 시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기만의 시간, 기쁨이 된다. 라일라는 딸 아이 아지자를 출산하고, 두 여인은 아지자의 재롱과 양육으로 모녀처럼 친밀성이 더욱 깊어진다.
오랜 세월 악의와 구타를 감내해 왔던 마리암이 느끼는 새로운 생명의 경이, 그리고 어린 라일라로부터 여성의 유대, 어머니 나나가 들려주었던 고통받는 여자의 한 숨의 이야기들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여인들 삶의 숙연한 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하고, 그녀의 삶을 온통 좌우했던 불의한 세계 너머에 있었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의 고향, 그리고 꿈으로 자리 잡는다. 한편, 죽은 줄 알았던 타리크의 돌연한 방문은 라일라의 체념한 삶을 깨우고, 이는 비열한 성적 이기심에 매몰된 라시드의 잔혹한 폭력을 다시금 깨우는 계기가 된다. 아름다움과 젊음, 지적 교양까지 갖춘 라일라에 대한 절대 소유욕이 금이 가자, 라시드는 마침내 라일라를 죽이려는 살기로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여성을 한낱 물건이상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탈레반의 살인적 규율이 지배하는 시대, 마리암은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탈레반 율법학자들의 구태는 라시드를 죽여야만 했던 상황의 정상을 고려하지 않는다. 재판관인 율법학자는 말한다. “어째서 너는 내 율법에 복종하지 않았느냐? 함시라. ... 신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법을 계속 지키는 길밖에 없소. ... 당신은 사악한 짓을 했소. 당신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하오.(512쪽)”, 신의 명령인 남성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여인은 죽어야 한다는 기만과 위선의 변(辯)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판결문 아래 서명하고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인다.
사형장인 가지 경기장에 운집한 ‘수천 개의 눈’이 그녀를 응시한다. 나는 이 눈이 천개의 찬란한 태양과 대비되어 인간의 부패한 의식, 그 탐욕과 폭력적 쾌락에 절은 인간들의 추악한 심연을 보는 듯 더없이 역겨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여인의 처형장면을 즐기려는 무슬림 남성들의 이 관음증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신성한 율법이라고, 신앙과 원리를 위해 벌인 성전으로 쟁취한 결과라고? 경기장 한가운데 무릎을 꿀린 채 소련제 칼리시니코프 소총이 그녀를 향했을 때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는 마리암의 마음을 읽으며, 그토록 불친절하기만 했던 그녀의 삶이 이제야 휴식을 취하게 되는구나라는 탄식, 안타까움으로 속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소설의 종장은 타리크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단란한 삶을 꾸리던 라일라가 고국 아프가니스탄, 고향인 카불로 돌아와 고아들을 보듬고 그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지만 라일라는 되뇐다. “고국에서는 다시 폭탄이 떨어지고 이번에는 미국의 폭탄이라고. 그리고 국제평화유지군이 카불에 파견되었다고. 카불의 참회는 너무 늦게 왔다고(437쪽).”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알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도망치듯 카불을 떠났고, 탈레반이 또다시 그 지옥의 언어, 위선의 언어, 악의 언어인 지하드를 내걸고 사람들을 다시금 죽이고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 글을 맺으며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의 축은 여성에 대한 악착같은 차별의 인식이다. 그것은 여자들은 양식을 축내는, 재산을 갉아먹는 소비적 존재이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의 절대 권위를 내세우는 탈레반의 무슬림 율법은 여성의 교육, 취업, 사회적 생활을 모두 부정하며, 외출조차 금지한다. 앎과 생업 활동이 차단되어 무력화된 여성은 남성 권력에 의해 무방비적 착취의 대상이 되고 만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남편인 구두장이 라시드가 탈레반을, 무슬림 율법의 권위를, 그칠줄 모르는 기만적 지하드를 반기는 이유이다. 하찮은 인간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무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구속도 없는 여성에 대한 무참한 폭력 행사의 정당화를 낳는다.
이들의 권력의 독점을 위한 남성적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곧 아프가니스탄의 지속되는 내전의 실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제멋대로 하고싶은 무한한 권력의 독점을 위한. 이것의 모습은 그 형태를 바꾸어 마치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오늘 한국사회의 검찰 권력의 몽매성과 매우 닮아있다. 사회적 약자의 모습에 낯설어하는 그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악착같은 권력 독점의 욕심까지. 그러나 이러한 악의와 폭력, 무관심의 파렴치, 잔인함이 횡행하는 반지성의 세상 속에서도 인간들은 고귀한 생명성, 사랑과 유대를 통해 인내하며 기어코 세대를 이어간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이러한 약자들의 고통과 슬픔, 인내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은 부르카로 온 몸을 감싸고 그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여인들, 이 세상의 온갖 악의와 억제가 집약된 그 처참한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여인들의 고고한 인내와 생명성에 대한 이 찬가를 읽으며, 체념과 포기, 좌절과 같은 감상적 환상을 벗어난다. 삶이 제아무리 불친절해도 마지막 걸음을 옮기는 마리암의 마음을 그득 채우는 어머니 나나와 잘릴이 주었던 소소한 사랑의 기억들, 마리암의 오두막에 앉아 그녀의 희생과 사랑을 더듬는 라일라의 삶을 향한 굳센 발걸음은 아마 영원히 내 마음 속에 감동적으로 새겨질 것 같다.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을 소비하며 더 확실한 안도감을 느끼는 기만적 독서를 경계했지만, 그렇다고 동정과 연민, 분노의 감성으로 휘몰아치는 격렬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이산의 슬픔을 안고 한국 땅의 어디에선가 고달픈 적응과 희망,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특별기여자들의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내 생각은 이어진다. 그들에게 겨누어지는 차별과 편견의 잣대가 거두어지길, 환대의 손길이 어루만져 주길, 그들의 조국에 다시금 천개의 태양이 찬란하게 내리 쪼이기를 내 작은 감상과 기도로 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