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 달에 주목할 책들은 그 분량에서도 만만찮기에 네 권의 욕심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그 첫 번째인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은 책 좀 읽는다 하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가깝기에 시선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은 이름만으로도 이미 역작의 기대를 하게하는‘리처드 도킨스’의 신간인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과학 전반에 대한 화려한 해설서이다. 끝으로 인류 정치미래에 대한 깊은 사유가인‘자크 아탈리’의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는 점점 혼돈에 빠지는 지구촌 헤게모니 쟁탈의 궁극의 귀결을 제안하고 있어 관심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택광의 문화비평 속으로....

 

1. 비평 이론의 모든 것

 

문학작품이나 문화, 예술작품에 대한 평론들을 보면 가히 낯설기 짝이 없는 용어들로 무장한 채 ‘어디 한번 이해해봐라’하며, 시험을 하고 도발을 해댄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을 이해하는 다양한 해석을 간과할 수만은 없다. 비평이론을 통해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이를 통해 더 생산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1999년 초판에 정신분석비판, 여성주의 비판, 비판적 인종이론 등을 대폭 추가 보완하여 다시 출간된 이 책이 특히 일반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론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거부감을 일소하는 언어와 문장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또한 저자도 본문에서 말하고 있지만 모호하게 생각되던 이론적 개념들을 일상의 경험과 관련지어 파악하고. 이론적 관점들이 문학작품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다양한 비판 이론들이 실재 어떻게 상호 관련하고 차이와 유사성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정신분석비평, 마르크스주의비평, 신비평, 구조주의비평, 신역사주의비평 등 10 여 비평이론들을 이해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어준다. 독서인들이면 필히 읽어보아야 할 매혹적인 개념서가 될 것 같다.

 

2.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과학의 경이를 대중에게 친절하게 전해주던‘칼 세이건’도, ‘스티븐 제이굴드’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리처드 도킨스’가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가슴 설레는 과학의 황홀경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은 그의 과학 전도사로서의 소명의식을 총합한 걸작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다채로운 컬러 화보와 그래픽이 촘촘히 문장의 이해를 보충하며, 소행성 지구의 지각판에서부터 무지개와 빛의 파장, 유전자, 우주의 신비 등 과학의 안목을 갱신시켜줄 천재적 해설서라 할 수 있다. 제목처럼 과학에 대한 새롭고 무진장한 경이로의 안내에 동승하는 것도 괜찮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3.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인간적인 길』,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정치비평가의 미래‘세계정부 체제’의 건설을 위한 전략 연구라 할 수 있다. 신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제국이, 독재자가, 시장경제 등으로 세계 지배자는 변천되어왔다. 이제 미국의 독주는 중국의 등장과, 유럽연합, G20등의 다중심적 지배체제라는 혼돈의 양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과 영역별로 분산된 세계지배체제가 영속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역사나 그 누구도 회의적이다. 결국 분열과 갈등, 혼란을 종식시키는 인류의 공존을 위한 체제는 ‘세계정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정부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축조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제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시아 동쪽의 작은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인지를.

 

4.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이 책 또한 10년 만에 재출간되는 개정판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한국처럼 보수주의가 절대적으로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라면 필연적으로 억압될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한 비평이다. 또한 ‘음란한 판타지’라고 명명한 것은 보수주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이 주요 동력으로 삼는 문화의 음란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주요부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실체, 그 집단적 심리기제를 파헤치는 역작이다.

 

[*다음은 이 책의 본문중 머리말의 일부를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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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5-06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번 기수 파트장이 된 가연입니다. 얼마나 이렇게 댓글을 남기며 체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는데까지 한 번 해보려고..ㅎㅎ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을 한 번 훑어본 적이 있는데..ㅎㅎ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확인했습니다.

비의식 2012-05-07 08:21   좋아요 0 | URL
수고 많으시네요. 어떤 책이 선정될지? 기대되는군요...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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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의 전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러한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 자각(自覺) 하에 지향하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수순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자본주의’사회라는 세계(생태계)의 속성이 무엇인지, 개인이란 존재는 사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요인들이 인간 서로를 좌절케 하고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궁극에 도달해야 할 사회형태와 지향되어야 할 인간의 의식을 탐색한다.

 

1. 물신성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많은 저작들의 개념을 집약하여 오늘의 현실을 설명한 이 책을 몇 글자로 다시 표현 한다는 것은 어쭙잖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사회, 물질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우리가 놓인 생태계의 본질적 특성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물신성’이란 어휘만큼은 정확하게 납득하여야 할 것 같다.

 

'물신=페티쉬(fetish)'이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으로 위안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 나무나 돌을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빈다는 기원에서 시작된다. 결국 신성이 덧씌워진 물질을 숭배하는 역전된 의식의 전형이랄 수 있다. 오늘의 소비주의를 견인하는 힘은 바로 이 물신성이기에 내재된 무모함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 같은 물신성은 종교나 돈, 상품은 물론이고 권력도 지니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지는 권력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자신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서 물신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독재화되고 안하무인으로 변질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신성 때문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물신성을 고착화시켜주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삶의 방식, 생활양식이라 할 것인데,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삶은 물론 사고방식까지도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기에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의 어떤 변화는 인간 개개인이 생각을 고쳐먹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생산양식, 즉 ‘물질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물신성을 우리들이 어떻게 깨뜨리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만족스러운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항상 부딪히는 딜레마 때문이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구조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지라는 수순의 장벽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참여하는 관계의 총합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말로부터 잘못된 의문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개인의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한 단순함의 어리석음 탓일 게다. 전통적인 생각, 행동방식, 관습 등이 하나의 패턴을 이루어 구조화되고 그것이 오늘의 나와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구조라는 무수한 관계들의 총합이 세계임을 생각할 때 개인과 구조의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근거의 토대위에 놓인 물신성이란 사회 조건 의 변화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조건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발견은 내겐 중대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대상의 물질화에 따른 가치의 전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실천의 진리를.

 

2. 경쟁에서 호혜의 원리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시장 경쟁의 논리를 신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상품을 팔기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상품이야 팔고나면 그 후에는 치열한 경쟁의 지위에서 해방되지만 “인간의 노동력이란 것은 판매된 뒤에도 구매자인 자본가의 통제에 놓인 채 일해야 할뿐 아니라 노동자 서로 간에도 경쟁”에 내몰린다. 경쟁을 통해 우수한 것을 얻어낸다는 논리의 미화를 통해 경쟁 뒤에 감춰진 현실의 어둠이 은폐된다. 즉 ‘경쟁’그 자체도 하나의 물신이 되어 숭배된다.

 

그러나 경쟁의 중요한 심리적 기반인 질투, 즉 적극적 욕망은 물론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수동적 욕망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배경으로 인간 상호간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쟁의 속성으로 인해 ‘너’의 기대와, ‘사회’의 기대에 따라 행동할 뿐 정작‘나’는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늘의 개인들은 더욱 외롭고 아프지만 소통할 대상, 서로의 이해가 같은 소통체계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이 물신성에 장악된 자본주의 문제의 본질은 ‘사적소유’이다. 개인이 자기의 물질적 소유를 무한히 늘리려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모두 공공적 소유로 전환하면 해결 될 것인가? 사실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며 불완전한 실험이었지만 일부 국가에서 1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진테제(Synthese)로서 자본주의 특징인 사적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수단은 공공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생산양식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란 물신사회의 속성은 누그러지고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지는 호혜의 시대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활성화되는 공동체의 구성은 그래서 더욱 실현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3.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은『헤겔 법철학 비판』, 『독일 이데올로기』,『경제 철학 수고』등 비교적 감성적인 마르크스 초기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그의 주저인『공산당 선언』,『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자본론』을 망라하여 인간 호혜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일상의 언어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있다.

 

결혼 그리고 육체적 관계가 사랑의 물질적 근거가 되는 일례와 같이 물신성의 이해를 도모하고, ‘목숨을 건 도약’이란 명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혁명의 발생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정상적 교환형태인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교환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것이 바로 자본에 편입된 노동력에 있음을 직시하게도 한다. 그리곤 물신성, 경쟁, 사적소유, 역사 해석의 관점 등을 통해 궁극으로 지향하여야 할 원리로서 인간 상호의 사랑을 발견케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곳에 놓여있는가, 나는 왜 아픈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를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게 하는 사색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생산의 사회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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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세계문학 83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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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원주택 마을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만들고 은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빠져있는 삶의 기쁨과 연민, 그리고 욕망을 되찾아가는. 또한 「창세기」의 <그리고 아담은 자기 여자를 알았다>는 구절처럼 그와 삶의 무대를 함께해온 아내와 딸과 노모와 장모, 그리고 스쳐간 여인들을 이해하려는, 그녀들과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려는 절박한 자기 관찰기이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요원‘요엘’은 아내‘이브리아’의 알 수 없는 죽음과 함께 은퇴한다. 우연한 감전사인지, 혹은 연인과의 동반 자살인지 불분명한 이 죽음은 아내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하지만, 간질 발작의 질환을 지닌 딸, ‘네타’를 보호하려는 책임감과 단짝이 된 어머니와 장모를 위해 텔아비브 근교의 ‘라마트 로탄’이란 전원마을에 은거한다.

 

요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두를 필요 없고, “내일도 또 날이야.”라는 방기 속에서 기억 속 삶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자기의 여자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사라진 시간을 살아간다. 자기 욕망이 배제된 이웃집 여자와의 잠자리,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이고, 열여섯 살 딸아이의 삶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며, 창고에 드나드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건네는 단조로운 일상에 과거 기억의 조각들 - 첩보활동을 벌였던 세계의 도시들과 마주한 사람들, 순간의 상황의 기록들, 그리고 그를 향해 뱉어진 문장들... - 이 더해지며 모호하고 알 수 없었던 비밀의 실체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란 것이 본디 재단하듯 그리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선명하게 다가가 이해하려는 비밀들이 명료한 정의로 나아가기에는 흐릿하기만 하다. 아내의 죽음도, 딸의 질병의 원인도, 방콕에서 순간 사라진 여인의 모습도, 휠체어에 앉았던 남자의 움직임도,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도, 모든 것이 분명치 않다. 이런 남자에게 그가 맡았던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비밀정보원으로서의 임무가 종용되지만 딸의 보호를 위하여 거절한 것이 그를 대신한 동료요원의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여기에 이르러서 이 소설의 뚜렷한 내적 갈등을 포착하게 되는데, 국가를 위한 임무 수행으로 자기 인생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아내를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의 깊이, 그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게 된다. 반면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만 자기 여자인 딸의 보호와 더는 바꿀 수 없다는 사적안위로 인해 동료가 희생되었다는 대칭적 상황으로 인한 또 다른 죄책감이란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탈출하는 가라 할 수 있다. 소위 ‘마이클 샌델’과 같은 다분히 도덕철학적인, 개인이냐 국가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해당 국면에 정당하게 맞서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은 동료의 늙은 아버지를 찾아 비록 혹독한 비난을 받을지언정 스스로는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고, 궁극에는‘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의 불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이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작가에 대한 경외로 머리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이 전환적 사건으로부터 느린 행보를 거듭하던 소설은 조금 속도감을 찾는다. 딸아이의 보호가 오히려 그녀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각성,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욕망을 발견해 나가고, 자신 속에서 동정과 슬픔, 연민의 힘을 조화롭게 뽑아내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토록 풀어보려 했던 비밀들, 즉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 몇 분 후에 절망적인 친지들은 재앙에 대항하여 슬기롭고 영리하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주고 또 쉽게 패배할 것 같지 않은 동맹군이 여기 있다는 신비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고 조용히 독백을 외친다. 어둠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흔치 않고 예상치 않은 순간을 맞이하는 요엘이란 중년 남자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내게도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빛이 다가오기를 희망”해 본다.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지낸 것이 꽤 오랜 시간인 듯하다. 그러니 욕망도, 연민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 할 터. 병원 봉사활동에서 투명한 기쁨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요엘을 통해서 삶의 비밀을 모두 알아 버린 것만 같은 넉넉해진 마음을 갖게 된다. 기억과 현실의 일상이 뒤얽긴 독특한 서술구조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실루엣 뒤의 무언가를 기대케 하여 읽기를 주저치 못하게 하는 기교는 가히 약이 오를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결코 뚜렷한 형상은 그려 내지 않는다.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의 문체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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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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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는가? 나는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의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에 대한 성찰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류의 자기 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한낱 먼 미래의 공상적 이야기의 재미 밖에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이미 인간 종으로서의 자기이해를 상실한, 즉 윤리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1. 이야기 속으로

 

노인과 십대의 어린 소년, 소녀만이 생물학전에서 살아남은 세계가 배경이다. 한 쪽은 사회적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고 한 쪽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러나 여기엔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작동하고, 물질적 부(富)가 역시 지금과 같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는 세계이다. 거리의 부랑자로서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열여섯 살 소녀‘캘리’는 병약한 어린 남동생‘타일러’를 위하여 결단을 내린다.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에게‘스타터스’인 어린 자신의 몸을 대여하면 동생과 안락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부를 거머쥔 소수의 특권계층 노인들이 젊고 생기 넘치는 아이의 몸을 렌탈하는 것이다. 렌탈된 기간동안 아이는 의식을 상실한 채 기간 종료로서만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사물화되어 거래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수정란을‘대리모’에 이식하여 대신 임신토록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대리모는 자신의 신체를 1년 이상 이들에게 렌탈하는 것인데, 이 역겨운 일을 의학적 정당성이란 논리로 항변하는 것을 보면 인간 탐욕의 동력에 혐오스러움으로 치가 떨린다.

 

이 렌탈 행위가 불법인 것은 소설의 세상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돈이 이미 최고선(最高善)의 지위를 가진 세상에서 법과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이란 특권층을 위한 바디뱅크에서 공공연히 십대의 신체 렌탈 행위는 자행되고, 급기야 유력 상원의원과 결탁하여 영구 렌탈은 물론 합법화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부와 권력의 결탁,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위에는 항상 추악한 이것들의 결탁이 있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물론 젊음이라는 추상성의 연장이랄 수 있겠지만 외형, 표피에 대한 숭배에 매몰된 몰가치화된 미의 추구이다. 성형대국인 한국사회처럼 깍고 째고 주입하여 조형된 얼굴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에 몰두하는 정신 실종의 사회상이다. 렌탈되는 소녀는 티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와 성형을 통해 투명할 정도의 미녀가 되어 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뱅크의 성형기술에 현혹된 일부 부유층 아이들이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에 찾아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실종된 손녀를 찾기 위해 캘리를 렌탈한 엔더인 헬레나의 추적 작업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다.

 

이 파렴치한 신체 강탈 행위의 원흉을 찾아 불의를 처단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렌탈당하여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손녀를 찾는 것이다. 프라임데스티네이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 이식된 칩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헬레나는 캘리의 몸을 지배할 수 없게 되고, 캘리는 헬레나를 대신하여 불법적 집단의 괴수인‘올드맨’과 부도덕행위에 협력하는 상원의원을 찾아 진실을 규명하려 한다. 쫓고 쫓기는 긴박감과 사이사이 캘리와 상원의원의 손자인 블레이크와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이 달콤하게 지면을 채워 나간다.

 

2. 제동장치 없는‘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

 

오늘 우리들의 세상은 물질적 소비의 광란과 표피적 향락에 정신이 실종되고, 소수의 특권층은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인간들을 태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게 하여 이러한 광기가 영원히 계속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불어 넣는다. 계속 되려면 끝없이 레일을 깔아야 하는데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조만간 대형 참사가 일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물공학 기술은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과 더불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의 논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을 혼란에 몰아넣고 있다.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변질시키고,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 이해를 붕괴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평등성을 당위시하는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가 있다는 말이다. 근육과 같은 신체 강화, 보톡스와 같은 약물 주입으로 피부의 조절, 집중력 강화제 등 생체공학, 유전공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문제를 우린 회피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임에도 지양(止揚)되어야 할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인 인간의 본성이 아무런 반성도 절제도 없이 극한으로 치닫고만 있다.

 

결국 태아줄기 세포를 얻기 위해 난자가 적출되어 거래되고, 태아가 되려는 수정란을 실험 도구로 사용하다가 폐기하면서 생명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회의조차 하지 않는다. 불치병 환자의 세포를 동의 없이 반복하여 의료용 재료로 활용하는 등 인간의 신체가 한낱 물질적 도구에 불과하며, 대리모란 신체 렌탈을 마치 자애(慈愛)적 의학수단이라고 정당화하는 정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늙어 부패해진 몸뚱어리를 가진 부유한 특권층이 젊은 십대의 신체를 렌탈하여 렌탈된 십대의 소년소녀가 그들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에 어떤 연민과 도덕적 가책을 느끼겠는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생명 윤리에 대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해도 거듭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이 필요한 중대하고 또 중대한 문제이다.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는 오늘과 같은 공리와 경제중심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논리일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은 인류 전체에 적대적 칼을 들이대는 문제이다. 이 비정한 신체 강탈의 가상 세계를 그려낸 SF 소설을 그저 그 소재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달달한 맛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이끄는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바디뱅크'가 미래의 공상이라구? - 사이언스타임즈 2012.4.26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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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빈병 -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100가지 노하우
배상문 지음 / 북포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책 제목이 왠지 낯익다. 「창작과 비평」이란 문예 비평지를 떠 올렸다는 것은 저자도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제목’이 독자에게 주는 호감의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한 수 알려 주려는 이중의 의미였던 듯하다. 이 책을 읽고자 한 이유인 창작, 특히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우고자 한 동기는 이것만으로도 성취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처럼 제목 하나 선정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언젠가는 작가가 되어보겠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을, 그리고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에서 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거의 완전히 기대에 보답한다. 작가 지망생들이 의례히 겪고 있는, 또한 겪게 될 장애에 대한 정곡을 찔러대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체험적 해법을 들려준다.

 

막상 어떤 아이디어나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려다보면 어느 순간 진부하기 그지없는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혹은 더 이상 몇 줄 쓰지 못하고 막혀 버리기가 일쑤이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수 천 권에 이르는 독서의 경험이 절로 묻어나겠거니 하는 자신감을 믿고 이젠 나도 써 낼 수 있겠다는 마음에서인데,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결코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어떤 완결된 글을 쓰는데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 구상만 해대곤 한다. 완벽하게 구상만 해 내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위안하면서 말이다. 문제가 뭘까? 아니,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미 등단한 동료들이나 주변의 글쟁이들로부터 받은 무수한 조언들 때문에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있을 터이다.

 

바로 많이 써 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습작의 누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한 편의 습작도 완결해 보지 못하고서 고작 세상 많이 살았다는 연륜, 책 많이 읽었다는 잡다한 지식의 양이 절로 글이 되겠거니 하는 안일함에 의존했으니 글을 완성시킬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많이 써 본 놈이 결국 작가가 된다.”는 이 말의 무게를 창작 메커니즘의 본질은 “글은‘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새삼 귀중한 가치로 느껴지게 된다.

 

“다독은 작가 지망생의 세련된 인테리어 감각은 길러주지만 건축술까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중략)안목이 높은 것과 손목이 야문 것은 다르다.”

 

그럼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까? 사실 막상 쓰고 싶다는 소망과는 달리 소설 한 줄을 시작하려하면 막연함에 부딪혀 자괴감에 시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도 변변찮고 스토리 구상도 만만치 않다고 고민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우선 인물 몇 명을 만들고 그들의 이력에 대해 써보라는 것이다. 외양, 성격, 신상정보, 버릇 등등을. 처음부터 굉장한 작품을 쓰겠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해보고, 소설들의 인물 묘사만을 정리도 해보고 하면서 자신만의 글을 무던히 쓰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눈, 작가의 본능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의 내용과 포장, 형식미에서부터 모방과 절제의 태도에 이르는 조언들은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글쟁이로서의 중대한 토대가 되어준다.

 

특히 작가라면 빈번하게 마주하게 되는‘상투성’과의 싸움을 이겨나가는 방법, 그리고 언어 예술가로서 단어의 사용과 문장, 문체에 대한 글 다루기에 대한 지식의 전수는 글을 쓴다는 실전(實戰)면에서 작가의 자의식과 관련하여 주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대목도 있다. 언어순결주의와 나쁜 언어를 설명하면서 한글 사용과 개념어의 사용에 대한 다소 편협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여전히 지망생에 불과한 이들로서는 참조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듣기 좋은 글은 읽기도 좋다”는 퇴고의 방법론에 공감하면서 이 책은 그동안 경험과 읽기를 통해 입력된 데이터들이 언제가 있을 수 도 있는 출력의 즐거움을 기대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아주 긴요하고 날카로운 조언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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