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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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의 전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러한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 자각(自覺) 하에 지향하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수순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자본주의’사회라는 세계(생태계)의 속성이 무엇인지, 개인이란 존재는 사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요인들이 인간 서로를 좌절케 하고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궁극에 도달해야 할 사회형태와 지향되어야 할 인간의 의식을 탐색한다.

 

1. 물신성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많은 저작들의 개념을 집약하여 오늘의 현실을 설명한 이 책을 몇 글자로 다시 표현 한다는 것은 어쭙잖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사회, 물질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우리가 놓인 생태계의 본질적 특성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물신성’이란 어휘만큼은 정확하게 납득하여야 할 것 같다.

 

'물신=페티쉬(fetish)'이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으로 위안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 나무나 돌을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빈다는 기원에서 시작된다. 결국 신성이 덧씌워진 물질을 숭배하는 역전된 의식의 전형이랄 수 있다. 오늘의 소비주의를 견인하는 힘은 바로 이 물신성이기에 내재된 무모함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 같은 물신성은 종교나 돈, 상품은 물론이고 권력도 지니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지는 권력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자신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서 물신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독재화되고 안하무인으로 변질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신성 때문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물신성을 고착화시켜주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삶의 방식, 생활양식이라 할 것인데,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삶은 물론 사고방식까지도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기에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의 어떤 변화는 인간 개개인이 생각을 고쳐먹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생산양식, 즉 ‘물질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물신성을 우리들이 어떻게 깨뜨리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만족스러운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항상 부딪히는 딜레마 때문이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구조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지라는 수순의 장벽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참여하는 관계의 총합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말로부터 잘못된 의문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개인의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한 단순함의 어리석음 탓일 게다. 전통적인 생각, 행동방식, 관습 등이 하나의 패턴을 이루어 구조화되고 그것이 오늘의 나와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구조라는 무수한 관계들의 총합이 세계임을 생각할 때 개인과 구조의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근거의 토대위에 놓인 물신성이란 사회 조건 의 변화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조건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발견은 내겐 중대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대상의 물질화에 따른 가치의 전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실천의 진리를.

 

2. 경쟁에서 호혜의 원리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시장 경쟁의 논리를 신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상품을 팔기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상품이야 팔고나면 그 후에는 치열한 경쟁의 지위에서 해방되지만 “인간의 노동력이란 것은 판매된 뒤에도 구매자인 자본가의 통제에 놓인 채 일해야 할뿐 아니라 노동자 서로 간에도 경쟁”에 내몰린다. 경쟁을 통해 우수한 것을 얻어낸다는 논리의 미화를 통해 경쟁 뒤에 감춰진 현실의 어둠이 은폐된다. 즉 ‘경쟁’그 자체도 하나의 물신이 되어 숭배된다.

 

그러나 경쟁의 중요한 심리적 기반인 질투, 즉 적극적 욕망은 물론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수동적 욕망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배경으로 인간 상호간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쟁의 속성으로 인해 ‘너’의 기대와, ‘사회’의 기대에 따라 행동할 뿐 정작‘나’는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늘의 개인들은 더욱 외롭고 아프지만 소통할 대상, 서로의 이해가 같은 소통체계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이 물신성에 장악된 자본주의 문제의 본질은 ‘사적소유’이다. 개인이 자기의 물질적 소유를 무한히 늘리려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모두 공공적 소유로 전환하면 해결 될 것인가? 사실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며 불완전한 실험이었지만 일부 국가에서 1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진테제(Synthese)로서 자본주의 특징인 사적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수단은 공공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생산양식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란 물신사회의 속성은 누그러지고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지는 호혜의 시대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활성화되는 공동체의 구성은 그래서 더욱 실현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3.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은『헤겔 법철학 비판』, 『독일 이데올로기』,『경제 철학 수고』등 비교적 감성적인 마르크스 초기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그의 주저인『공산당 선언』,『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자본론』을 망라하여 인간 호혜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일상의 언어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있다.

 

결혼 그리고 육체적 관계가 사랑의 물질적 근거가 되는 일례와 같이 물신성의 이해를 도모하고, ‘목숨을 건 도약’이란 명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혁명의 발생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정상적 교환형태인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교환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것이 바로 자본에 편입된 노동력에 있음을 직시하게도 한다. 그리곤 물신성, 경쟁, 사적소유, 역사 해석의 관점 등을 통해 궁극으로 지향하여야 할 원리로서 인간 상호의 사랑을 발견케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곳에 놓여있는가, 나는 왜 아픈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를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게 하는 사색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생산의 사회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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