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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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의 글에 앞서, 소설 발 없는 새는 높은 미학(美學)적 문장들과 그 구조적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지닌 지성적 문학 작품이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다만, 제 편협한 감응(affects)의 장벽으로 인해 소설의 내면적 깊이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따라서 부분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견해가 오직 독자의 부족함 임을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란 비극적 존재가 그리는 집단적 궤적이오. (...) 이 비극 앞에서 위로가 되는 몽상이 있소. 장자의 몽상이오.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소.” - 239

 

작품의 핵심 소재는 1937불과 6주 동안 이루어진 살육의 속도와 규모로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30만 명의 학살과 8만 명으로 추정되는 강간 희생자를 발생시킨 난징 대학살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반세기 넘어 인류사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잔혹하고 참담한 제노사이드가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를, 어떻게 사유되고 있는가를 불가능의 언어로 지펴내고 있다.

 

이 소설에는 영화감독 첸카이거, 배우 장궈룽, The rape of Nanking (난징 대능욕)을 쓴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장 아리스등 실존인물이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들을 통해 예술로써 삶의 실체를 증명하겠다는 직설적인 작가의 선언처럼 보인다. 특히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전통 악기인 얼후(二胡)의 연주자이자 재야 역사가인 워이커씽은 이러한 인간의 현실적 비극을 예술적 삶으로 살다 간 존재로 기능하며, 여타의 인물들도 상상의 이미지들을 그리며 표현할 길 없는 악으로서 인간의 구원을 말하려 한다.

 

워이커씽은 난징 대학살이 이뤄지던 순간에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여인이 낳은 자식이다. 워이커씽의 기억은 어머니의 자살을 지워버려 무의식의 저 깊은 심연에 묻어버렸으나 그 고통이 신체를 떠나지 못한다. 이것은 패왕별희의 데이 역()을 했던 장궈룽이 배역의 영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유혹을 저버리지 못했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하며, 죽음을 선택하여야만 했던 어머니에 대한 운명의 몰이해와 자신의 버려짐에 대한 수용할 수 없는 거부의 마음에 깃든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거니는 몽유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의식은 장자(莊子)의 나비 환생 이야기로 이어져 가해자와 희생자의 경계가 사라진 공존으로 나아가는데, 이 지점에서 나의 감응(affects)은 냉정한 이성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고 해야겠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흐려진 몽상적 현실이나, 가해자와 희생자가 동등한 선상에서 손을 맞잡는 상황, 오지 않은 죽음을 선택하는 정신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내 신체에 오롯이 새겨져 새로운 실천을 감행할 수 있는 지혜가 되는데 반항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은 중국계 미국인인 장 아리스가 The rape of Nanking의 집필을 위해 인간의 벼랑 끝, 벼랑의 심연에 놓여있는 학살이라는 역사를 들여다보려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죄의 장소로 다가가 인간에 내재하는 근원적 악을 드러내려는 소명의 걸음이나. 작중 화자인 베이징 특파원인 한국인 상우의 고모할머니가 겪은 난징 위안소에서의 끔찍한 유린의 소슬한 기억들, 첸카이거의 어린시절 홍위병에 끌려가는 아버지를 짓누름으로써 빗나간 이데올로기에 열광했던 패륜의 기억들처럼 인간의 내재된 악에 대해 감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를 예술이라는 미적 언어들을 통해 표현 불가능한 인간의 악, 그리고 삶과 공존하는 죽음을 말하려한다. 그것은 소설이 그리고 있는 일본의 그림자극인 노()나 모래사막 너머의 모래사막이라는 환영이 인간세계 선악의 불가피한 공존으로 나아가지만 나는 이것이 환원되지는 않는 망상으로 여겨진다. 소설 속에는 난징 학살의 근원으로 일본 천황을 놓고, 이 초월적 존재인 신인(神人)에게 인간 세계의 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신민인 일본인, 일본군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을 가해자로, 죄악의 주체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경화된 일본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피 흘림에 대한 기쁨과 감격의 공간이 된, 전쟁의 참혹함이 깨끗이 지워지고 추앙의 장소, 신성한 진실의 장소가 된 이유로 연결된다. 희생자의 고통 앞에서 보이는 이 기이한 희열을 즐기는 일본인들의 희생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까닭일 것이다. 사건의 주체인 학살자들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이처럼 이들의 규명은 분명 중요하다.

 

그런데 난징 능욕의 결과인 태생적 선악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워이커씽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내재적 선악의 공존으로 연결 짓는 데에 나는 환원될 수 없는 모래사막의 환영처럼 저항감을 외면할 수 없다. 내재적 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용서와 화해의 구실로 삼으려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인 워이커씽의 오랜 친구인 일본인 아오키란 인물을 통해 한국의 판소리와 최승희의 춤을 일본문화의 원형과 연결하며 삼국의 불가피한 영혼의 얽힘을 은근히 내비칠 때에는 거북함마저 느끼게 된다.

 

몽상이 실현되려면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오.” -241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란히 세움으로써 용서와 화해의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위 문장처럼 가해자, 가해 집단의 자기 악의 직시와 진정한 사죄가 전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용서가 되는 것인지, 그것이 인간 본질에 대한 동류로서의 겸허한 인정과 비례하는 것인지 나는 이에 공감하지 못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등장하거나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 인물들은 지속하여 자살하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다시 말해 불가피하게 내재된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저버리는 행위로서, 반복되는 인간의 참담한 잔인성이 정화될 수 있는 것인가,에는 회의를 저버릴 수 없다. 문학, 즉 언어의 예술이기에 이러한 묘사가 인간 영혼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수긍할 수 있겠지만. 왠지 의도와 이야기가 서로 흡착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겉돌고 있는 억지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소설은 마치 여느 예술 비평의 한 문장처럼 첸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 왕자웨이의 동사서독을 통해 인간 삶에 고인 비극적 서정과 인간 실존 확인의 불가능성을 역류하려는 의지를 녹여내기도 하고, 군국주의자이자 천황주의자였던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금각사로부터 진실을 분재(盆栽)한 거짓 이미지, 인간 생명의 존엄을 훼손하는 마조히즘적 폭력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읽어내어, 뒤틀린 인간 정신, 내재된 악의 현현을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에 흡수하여 미적 체감의 감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분명 이 소설의 문장 개별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지적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구조적 서걱거림, 파악될 수밖에 없을 만큼 결코 새롭지 않은 주제인 또 하나의 인류 악과 그 동행에 관한 이야기임에 나는 감응의 문장을 써낼 수 없다. 어쩌면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예술과 현실 적 삶의 경계가 지워진 삶을 살다가 간 패왕별희의 배우 장궈룽(張國榮)’의 언뜻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거북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현실의 날것들, 무수한 부정적 현상이 예술인 삶에 틈입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불편함이 내게 어떤 방어기제를 작동케 했던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 개체가 지닌 근원적 악과 집단 악의 실체를, 그리고 그 불가능한 해결의 실마리를 사유 하는 시간이 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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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스탠딩 - 도덕적 허세는 어떻게 올바름을 오용하는가
저스틴 토시.브랜던 웜키 지음, 김미덕 옮김 / 오월의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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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과도한 감정에서만 감명을 받는다. 과장하기, 기존의 것을 무조건 긍정하기, 반복에 기대기, 추론, 입증하지 않고 믿기. (..,) 군중이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가질 때 모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른다.”  - 귀스타브 르봉, 군중 심리에서, 본문 123

 

 

아마 이 순간에도 소셜 미디어의 피드는 물론 정치적 활동을 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도덕적 형상을 한 이야기로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말들과 행동이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다른 인간들보다 더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자기 과신의 현상에 반성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자신감 과잉의 사람들이 넘쳐날 때 의견이 틀렸음을 확신시키는 것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진다. 결국 그 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고스란히 그 사회적 손해가 구성원 개인들이 감수하여야 할 몫이 되어 돌아온다.

 

책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 이야기를 오용, 남발하는 우리 세상에서 이들 무책임한 도덕적 이야기의 가면을 뒤집어 쓴 이야기들을 줄여나가고 개선하려는 모색이다.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이란 이처럼 자기 과시를 위해서, 타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서, 자신이 저지를 나쁜 짓을 덜 의심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현상이나 문제사안을 도덕적 이야기로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포장하여 퍼뜨리는 행위이다.

 

하나의 당파에서 정치적 발언이나 행위가 있고나면 쇠파리처럼 달려들어 그 정치적 발언의 함의보다는 발언자와 행위에 대해 거친 욕설과 조롱의 언어에 도덕성을 입혀 마치 자신만은 높은 도덕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듯 악의적 공격을 해댄다. 왜 이 땅에는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고 만연한 것일까? 더구나 자신의 무례한 폭력적 언행에 일말의 죄책감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럴까? 자신의 도덕적 자질로 다른 사람들 - 자기편(당파), 자신의 내집단, 마음에 맞는 사람 등 - 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원하기 때문(41)”이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인정욕구(recognition desire)의 발현이다. 도덕적 이야기에는 당위(當爲)라는 것이 있다. , 도덕이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을 마땅히 존중으로 대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랜드스탠딩, 도덕적 이야기의 오용은 정작 도덕적으로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훼손한다. 자기 과시와 위선을 가리기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덕적 이야기를 허영 프로젝트로 변질시켜 사회에 해악과 손실을 야기하는 매우 위험한 사회적 양태로 전락시키기에 나쁜 행위이다.

 

더구나 그랜드스탠딩은 정작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의 보호 장치로서 도덕적 이야기가 사용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남용되어 도덕적 이야기들을 더 이상 실천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로 무시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정치 활동자들은 이러한 작태를 멈추지 못한다. 도덕적 이야기를 함으로써 명성과 지배력이라는 사회적 위상의 점유가 이루어지는 탓이다. 이를테면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끌어내 참담한 망언을 내뱉으며 자신은 도덕적 자질이 뛰어난 여성 정치인이라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이다. 자기 당파에서 좋은 위치를 자치하기 위해 당파 내 도덕적 우위를 점하여 지배력을 충족하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꾸며내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인 양 내세우는 것이다. 이때 대중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저급하고 폭력적이며 비열한 언행을 마치 영웅적이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 칭송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 용감하고 존경스럽고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군.(25)”

 

이것은 절대 도덕적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선을 가장한 자기과시의 도덕적 이야기라는 그랜드스탠딩이라는 개념어가 탄생한 것이다. 이들 그랜드스탠더들의 악의적 오용을 비판하는 것에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들먹이며 정당한 언행이라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는 터무니없는 항변이다. 어느 누가 거짓말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자유로운 발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거짓말, 폭력적 언행은 나쁜 것이어서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원하는 무엇이든 다 말하고 아무 방식으로나 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의 폐해는 사회 전반에 대한 퇴행을 야기하며, 어렵게 쌓아 온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치경제적 윤리 토대를 망가뜨린다.

 

저자들은 말한다. 이 사악한 정치적 그랜드스탠딩에는 공통으로 사용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음을.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더욱 분명하게 과시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비단 기성 정치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중 일반의 행위도 여기서 한 치의 다름이 없다. 누군가 최저임금 인상률이 높다고 기업의 경제적 성장을 방해하는 경영간섭 행위라며 비난을 퍼부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의 발언자는 자신의 도덕적 색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여기에 보태기를 한다. 자신의 비난을 덧붙이는 것은 별다른 노력 없이 간단하고도 비용이 적게 드는 자기 과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더욱 비난을 증폭하는 치닫기가 이어진다. 올바른 도덕적 주장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를 능가하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비교 속에서 도덕적 모범의 지위를 지키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만이 넘실댈 뿐이다.


 



여기에 상대에게 거짓 도덕적 혐의를 씌우기 위해 엉뚱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날조하기까지 한다. 날조하기가 그랜드스탠딩의 핵심 요소가 되기 일쑤다. 왜 태연히 이런 짓이 만연되어 행해지는 것일까? 이것은 도덕적 무지렁이인 대중이 대수롭지 않다거나 순수하다거나 심지어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지지하기 때문(97)”이라는 것이다. 날조하기는 도덕적 고려의 불법 사용의 전형이다.

 

이것은 지난 5년간 도덕 경찰로 나선 인간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반대파의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몹시 규정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들은 일거수일투족에 도덕적 비판을 찾아낼 여지를 찾아내 날조한다. 우리는 세상 무엇에서든 도덕적 비판을 찾아낼 수 있는 동물이다. 아마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황색신문의 사설은 지난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도덕적 비난거리를 찾아낼 동기를 찾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합리적 추정이나 증거 없이 일단은 날조하여 도덕적 이야기로 공개적 비난을 가한다. 상대의 신뢰를 추락시키면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저렴하고 용이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당파적 미디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표현한다. 이것은 정치를 게임으로 인식하는 신나는 즐거움이다. 마치 특별한 도덕적 열의와 열정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도록하는 데 강렬한 감정의 투사는 도덕적 신념을 전달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이면은 흉측하기 그지없다. 자신들과 자신들이 지지하는 당파가 도덕적 화신이라는 자아개념을 강화,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는 독특한 특성을 보인다. 그 어느 사회보다 미디어의 이기적 동기가 대중의 신념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결국 대중의 깨어난 의식 정도에 비례하는 이유 때문이다. 대중의 무지를 양식으로 존속하려는 것이 곧 황색 미디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랜드스탠딩의 마지막 방법적 요소인 무시하기는 이를 표현하는 인간들의 본질을 설명해준다. 대체로 이들은 자신만이 부정의에 싸워 온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권위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데 내 세운다. 시민대중을 개, 쓰레기로 표현하며, 자신과 다른 일체의 의견은 조롱의 대상이며 묵살해도 된다고 확신한다. 검찰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검찰개혁을 추진하려는 권력에 맞선 것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권력을 손에 쥔 검찰 권력은 도덕적 이야기로 모든 반대 의견을 무시하는 방편으로 사용한다.

 

공적 정치 담론의 세계에서 그랜드스탠더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오직 시민 대중의 몫이다. 만일 그랜드스탠딩의 이 같은 만연으로 인해 야기되는 정치적 양극화, 냉소주의, 분노 피로를 방치할 경우 그것의 폐해는 오롯이 시민 대중이 치러야 할 대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대가는 사회의 단순한 정서적 분열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서 어떤 인간은 소셜 미디어에서 상대 세력을 지지하는 인간들이 다 죽어야 한다는 끔찍한 생각까지 발언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증오의 심화는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이 분열과 증오는 전체주의 권력 출현의 유용한 토양이 되어준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후퇴, 전체주의 권력의 부상, 정치경제의 도덕성 퇴락으로 인한 경쟁력 훼손, 냉소주의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의 확산으로 치안의 피폐성 초래,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소외와 무시의 확산으로 폭력의 증가 등 이루 열거 할 수 없는 사회 전반적 퇴행을 가속화한다. 아마 어렵게 올라선 선진국이라는 상표는 금세 벗겨질 것이다. 한 사회집단의 선진화는 그 사회의 윤리적 토대를 딛고 서있는 것이지 물질적 토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적 윤리 토대는 곧 정치 사회의 공고한 민주성이다. 이것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침몰하게 되어있다. 우경화된 보수 집단이 주류가 되었을 때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지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은 반면교사일 것이다.

 

자기 과시를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지 말라!” - 도덕적 대화를 위한 격률, 178

 

그랜드스탠딩이 사용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은 넘쳐난다. 왜 상대방을 조롱하고 폭언을 가하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일까?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기에 나쁜 것이다. 인종차별이 왜 나쁜 것일까? 상대를 동등하게 존중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도덕적 이야기를 도구로 하는 그랜드스탠딩이 나쁜 이유는 도구의 오용 때문인 것이다.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이기적 사용이라는 자기 전시 욕구,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전략적 이용으로서 거짓말이라는 기만성, 도덕적 이야기라는 공동 자원의 오용으로 인한 사회적 신뢰의 훼손 및 공론장의 오염으로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이다. 철학자 폴 그라이스가 제시한 대화 일반 원칙이랄 수 있는 대화 격률은 훼손된 이 땅의 공적 담론장을 위해 필히 참조, 도입할 유용한 가치를 제공해준다.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말하지 말라, 연관성을 가져라, 표현의 모호함을 피하라, 질서를 지켜라, 상대를 조롱하는 등 인신공격을 하지 마라....” 우리의 공적 정치 담론장에는 이러한 대화의 원칙이 없다.

 

그랜드스탠딩은 당파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무엇이든 너무 많이 쓰면 그것의 힘은 약화된다. 특히 도덕적 이야기를 자기 편익을 위해 사용하기에 그랜드스탠딩은 특별히 너무도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낳는다. 이제 정의와 공정성과 같은 도덕적 언어는 신랄함이 퇴색되고 진부하여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치배들은 새로운 용어와 극한적 표현으로 치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혐오를 부추기고 냉소와 무감각을 촉진하는 증오의 언어가 온통 정치 담론의 장을 채운다. 철학자 쿠르트 바이어의 도덕적 이야기에 대한 일갈은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요구한다.

 

도덕적 이야기는 보통 혐오스럽다. 도덕적 비난 쏟아내기, 도덕적 분개를 표현하기, 도덕적 판단을 퍼뜨리기, 비난 받을 자를 정하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 누가 이런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겠는가?” - 쿠르트 바이어, 141

 

처절한 사회적 대가를 치루지 않기 위해, 분열된 정서적 분열을 끝내고 연대하기 위해 우리는 공적 도덕 담론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물론 인간의 케케묵은 자기 과신의 본성을 뛰쳐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논쟁이 팽배한 정치 기후에서는 그 어떤 충고나 제안도 정적을 향한 은밀한 공격이라고 보고 다시금 음해와 폭력을 가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뤄내야 한다. 공개적 비난을 할 유혹을 참아내야 한다.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그 어떤 발언에도 우리는 외면해야 한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그랜드스탠더가 원하는 자기 도덕 과시의 욕망을 통한 이기심은 사그라질 것이다.

 

당파적 뉴스를 피하고 그랜드스탠더의 소셜 미디어를 언팔로우하라. 우리의 인정 욕구는 재설정 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가 아닌, 진정한 도덕적 실현의 장은 즐비하다. 정말 선의가 필요한 곳에서 우리의 덕성을 실현하면 아마 삶이 즐거워 질 것이다. 우리는 교육에서 비판적 사고와 자기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제라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스스로의 편견에 맞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죄 추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마 공적 정치 담론의 세계를 정화하고 이 세계에 진정한 믿음과 도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갈등과 혐오로 분열된 세계를 봉합하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다. 정치가 도덕성을 오용하는 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당위의 세계를 생각게 하는 오늘의 정치 윤리 정화를 위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역작(力作)이라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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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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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스마일 카다레는 자신의 소설을 필연적으로 오독하기를 견인하려는 의도로 쓰지 않았을까? 역사(歷史)에서 기억의 문제를 논점화하였던 잘못된 만찬이나, 순환하는 피의 복수라는 관습을 통해 전체주의 권력의 내재화된 공포를 우화적으로 펼쳐냈던 부서진 사월, 그리고 대중의 몽매성과 던적스런 권력지향성을 지펴냈던 아가멤논의 딸, 이들 작품과 같이 피라미드또한 고대 이집트의 대역사(大役事) 과정을 빗대어 인간 사회의 우매성과 권력의 교활성, 폭력성을 우화적으로, 그래서 문자 뒤의 의미를 해석하기를, 다시 말해 독자인 대중의 지성이 생각의 게으름을 떨치고 깨어나기를 촉구하려는 지향으로 말이다.

 

어느 늦가을 아침, 왕위에 오른 지 몇 달밖에 안 된 새 파라오 쿠푸가 어쩌면 자신은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흘리자...” - 7

 

소설은 심리적 복잡성과 은폐된 권력 욕구, 공포를 내재한 위 문장과 같은 파라오의 의미심장한 발설로 시작된다. 피라미드는 으레 왕의 무덤으로 축조되던 이집트의 관례인데 새로운 왕이 이 같은 말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 아니라 넌지시 흘린 것이다. 이는 대신과 제사장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그 저의에 대한 근심을 주입하고, 피라미드 축조에 대한 당위성, 그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일종의 암시이자, 이를 봉합하려는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피라미드 축조라는 고난의 역사(役事)에 대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교활한 언명인 것이다.

 

당연히 파라오의 의중을 간파할 수 없는 대신들은 눈치만을 살피며, 이 재앙적 발설의 의도를 검토하고 분석하며 협의한다. 권력자의 심중이 실행되기 위한 권력집단의 정당화 논리는 이렇게 확립되는 터일 것이다. 피라미드 축조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문서, 증언들, 칙령들, 유적들..,등등을 통해 피라미드의 탄생을 주도한 관념과 존재이유를 추적하지만 실체는커녕 그 그림자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아는 인간들은 기어코 만들어 낼 수 있다.

 

피라미드는 거대한 묘소임에는 틀림없지만 원래의 의도는 무덤이나 죽음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음을, 단지 위기의 시대에 구상된 상징물임을 파라오에 말한다. 피라미드의 높이니 비밀통로니, 화강암 덩이의 크기에 대한 보고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자가 이 윈래 의도에 대한 설명에 반응을 보인다.

 

이 위기란 국가의 대기근이나 나일강의 범람, 흑사병의 창궐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닌 풍요, 안락한 생활이 야기하는 위기이며, 풍요가 인민의 자유로운 정신의 증가, 권위 일반에 대한 반항을 확산시켜 파라오 권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위기보다 권력에 심중한 위협이 되는 인민의 자유와 반()권위주의 정신, 풍요를 고갈시키고 인민의 기를 꺾어버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언젠가는 마무리되는 동시에 절대로 끝나지 않는 무엇으로서의 거대한 피라미드의 필요성이란 합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를 만들겠노라. 가장 높은 피라미드, 더없이 웅대한 피라미드를.” -18

 

피라미드를 만든다는 소식이 눈 깜짝할 사이에 퍼져나가는 것은 인간 세상의 섭리이다. 이 끔찍한 불행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집트 백성들의 반응이란 어떤 것인가? 거룩하고 숭고하며 신성한 축조물의 건설에 환호하는 자들이 있음은 마치 오늘 자신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집단을 향해 태극기를 흔드는 저 우매한 인간들이 존재하듯이 출현하기 마련이다. 피라미드 축조를 불행으로, 인민의 노예화로 직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 것인지, 그 처리 수단과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고대 이집트 역사의 고증이 아니다. 피라미드 축조라는 역사적 실체를 통해 그것에 내재된 본성을 들여다보는 것이기에 문자적 표현은 시대성을 넘나든다. 결국 문자와 분열된 소문의 통제를 위한 비밀경찰의 악마적 행동을 수반한다.

 

소설은 마치 피라미드 축조의 현장에 있듯이 돌의 채석, 운반과정에 개입될 수 있는 각양의 음모, 피라미드 경사로로 엄청난 하나의 돌을 밀어 올리며 발생하는 수없는 죽음, 동원된 인부들과 그를 감독하는 자들과의 갈등과 채찍질, 스멀스멀 피어나는 계획된 소문들이 인민 집단에게 미치는 공포와 침묵의 상관관계, 대역사의 설계자들과 지휘자들의 반복되는 숙청과 축조 행위에 대한 증오와 찬사의 반비례적 역설성을, 그 비이성적 전체권력의 폭력성과 은밀성, 조작적 공작성을 현실적 삶의 공간에 생생하게 풀어 놓는다.

 




불의한 권력, 권력 유지와 보존에 혈안이 된 인간들은 불안을, 언제 뒤엎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인민의 혀를, 증오를 잘라버리기를 원한다. 건축일지의 장에 이르면 돌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몇째 단의 몇 번 돌마다 그 기재된 이력을 보여준다. “193번 째 돌. 카르나크 채석장에서 채취, 관인 하자 없음. 그럼에도 몇 군데 낙서가 발견되어 석축작업 지연. 일각에서는 시시한 낙서로 간주한 반면 정치적 암시가 담긴 낙서라는 견해로 그대로 베껴 상부에 올림....(82)” 아마 권력의 불안이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그 불의성에 대한 주도면밀한 천박성의 은유일 것이다


반면에 인민 대중의 무지는 이러한 전체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절대적 유익이 되어 자신들의 속박과 축적된 고통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빛나는 이집트의 탄생이라는 권력의 선전에 동화되어 칭송하며, 이집트를 통째로 먹어치우는 피라미드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쏟아내는 이웃을 죽음으로 내몬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이처럼 바보들이 현명한 인간들을 잡아먹음으로써 지탱해온 어리석음의 반복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꼭 지금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과 같다. 조중동 황색 미디어를 앞세운 전방위적 소문의 확산을 이용하여 비밀경찰처럼 행동하는 검찰 권력이 벌이는 이 땅의 퇴행적 현상들이 대중의 우매함을 기반으로 활개치는 모양 말이다.

 

이러한 권력의 악의에 감추어진 진실에 직면한 인간은 어떻게 될까? 안티피라미드장에 이르면 피라미드 도굴꾼들이 마주한 파라오의 미라에 남겨진 사인(死因)의 발견이다. 진실의 앎 자체가 유죄가 된다. 이 앎, 지식, 혹은 깨달음은 전체 권력에게 의심과 폭력의 대상이며, 제거할 무엇 이상이 아니다. 인민의 교양 자체가 유죄가 된다. 무지가 세력을 휘두르는 세상, 그것, 인민간의 혐오를 증폭하고 증오를 심어 분열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보수 기득권 집단이 먹고사는 양식이다.

 

피라미드는 수십 년을 소요하는 그야말로 대() 역사(役事). 피라미드의 밑단, 초석을 놓던 인간들은 노쇠하거나 죽고, 우뚝 선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세대는 피라미드가 가시화되기 이전의 끔찍한 시기, 인민들의 정신과 육신을 갈가리 찢어 놓았던 시기의 공포를 이해하려 않는다. 현재의 모습이 너무 자명해 부모 세대들이 느꼈던 공포를 과장된 무언가로 질책(91)”하며, 불의한 권력을 옹호하기까지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지성, 이것이 곧 게으른 지성이다. 한국 사회에 넓게 퍼진 이 무지, 사유하지 못함이 사회의 퇴행을 이끈다.

 

과거의 독재 세력이 피라미드 건설에서 이득을 원했듯이 새 권력 역시 

당연히 이 해체 작업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 터였다.” -151

 

단 하나의 생각으로 모두의 뇌를 연결시키자는 이 오래된 권력의 욕망은 변함없는 생식력을 과시하며 인간 세계 여느 곳에서 그 실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인민들을 양식 삼아 그 생명을 이어간다. 권력의 오용과 남용, 전체주의 사회로의 유혹과 그 악의, 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맹목성과 기만의 대가에 대해서 무언가를 느끼기를 바라는 이 작품은 이들 치밀하고 인상적인 알레고리를 연결하고 해석하는 즐거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전체주의 권력의 기만성과 폭력성의 전시장이라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은 주제는 인민의 이기심과 몽매성이라는 사회적 토양에 대한 각성의 요구이기도 하다. 카다레의 소설은 읽는 재미를 결코 놓지 않으며 관통하는 의식을 기막히게 이면에 박아 놓는다. 아마 읽어나가며 그 신랄한 지성을 외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또 한 편의 걸작일 것이다.

 

 

모래와 풍문, 이것이 이집트다. 아버지 스네프루가 임종 직전 그에게 말했다. 그것들을 지배하면 넌 이 나라를 지배할 거다. 나머지는 모두 허상에 불과해.”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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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겨진 베일 (워터프루프북) 쏜살 문고
조지 엘리엇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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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인 피를 지불해야 하며,

우리 신경의 미세한 조직에까지 아로새겨야 한다.” - 78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속내가 온통 비밀에 싸여 있어서 우리들의 상상력이 그것에 지배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들 마치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알려진 만큼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한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이다. 아마 이 짧은 소설(노벨레)은 갈증을 어느 만큼은 채워 줄 듯 싶다. 벗겨진 베일(The Lifted Veil)은 한 여성의 감추어진 마음의 장막이 벗겨지고 드러나는 내면의 추악함과 경망스러움, 허위를 통해 꽁꽁 감추어진 인간 영혼의 이중성, 그 음울한 심연(深淵) 들여다보기이다.

 

화자인 주인공 래티머는 병약한, 그러나 시적 본성을 지닌 내면적 청년이다. 그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영감이 발작처럼 찾아오고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과 감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비정상적 감각은 그에게 고통이다. 인간들의 표면적 태도와 행위, 말씨의 이면인 조악하고 이기심과 변덕스러움으로 뒤섞여있는 속내를 불가피하게 수용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그에게 인간의 외면이란 서서히 발효되는 커다란 두엄 더미를 뒤덮고 있는 그럴싸한 포장지(34)”로 보일 뿐이다.

 

래티머는 이복형인 앨프리드와 약혼을 염두에 둔 버사 그랜트라는 여성을 보게 되고,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보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기호로 된 거미줄에 차단되고 만다. 결국 이 알 수 없음이라는 무지와 두려움은 흥미를 자아내고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그에게 시적 열정의 우상이 된다. 버사 또한 결혼할 남자의 동생을 자극하여 질투와 욕망으로 들끓게 한다. 어리고 병약해서 마치 애정조차 느낄 수 없다는 듯이 형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를 쓰다듬으며 달콤한 고문을 지속한다.

 

래티머는 혼란스럽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희망과 거절의 두려움 사이의 줄타기는 극대화된 육감의 공포로 달뜨게 한다. 청년은 여자에게 자신을 상징하는, 시적 본능의 상징인 오팔을 선물하고 그녀가 그것을 손에 장식할지 지켜본다. 화려하게 치장된 손가락과 팔과 목과 귀 어디에도 그의 오팔은 보이지 않는다. 래티머는 버사에게 자신이 준 선물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힐난한다. 여자는 자신의 금목걸이 줄을 잡고서 가슴에 품고 있던 오팔을 들어올린다. 버사의 교활한 책략이 베일에 싸인 탓에 래티머는 읽지 못한다.


 

2022 민음북클럽 에디션



형 앨프리드와 버사의 결혼이 예정된 즈음의 어느 날 사냥 중 사고로 앨프리드는 세상을 저버리고 만다. 18개월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병약하고 몽상적인 청년 래티머는 버사와 결혼하게 된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은행가인 래티머의 아버지는 버사가 자식의 부족한 면을 채우며 그를 가꾸어나가리라는 믿음에 이 둘의 결혼에 더할 나위없는 기쁨을 표시한다. 그의 병약함과 유약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버사에 비해 부족한 인간이라 조롱하지만 신혼의 열정에 들뜬 래티머는 이에 무감각 상태로 대응한다.

 

오랜 세월 내내 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결국 인간 영혼은 가시로 가득한 황야를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이며 걸어가야 한다.” -49

 

래티머는 참혹한 불행’, 극단적으로 처참해질 미래를 준비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벗겨진 버사의 베일로 인해 드러난 그녀의 내면, 편협과 옹졸한 책략, 단순한 허위로 뭉쳐진 내면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비밀에 싸여 미지의 관념을 만들어내던 환상은 온전한 거짓, 위선이었음이다. 계획적인 교태와 용의주도한 이기심, 베일을 벗어던진 여자는 감추었던 더러운 영혼을 드러낸다. 래티머는 그녀를 향했던 믿음을 완전히 거두어들인다.

 

그는 비정상적인 통찰력과 예지력이 빚어낸 이 지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마침내 버사와의 참담한 7년의 결혼 생활 끝에 타인의 속마음을 침범하는 대신에 자신의 고독한 미래를 곱씹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면을 꿰뚫어 본들 변함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오래된 이중성이 살아남은 이유를 넘어설 수 없음의 깨달음일 것이다. 사실 타인의 속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저주일지도 모를 일이다.

 

화자의 일방적인 시점으로 이어지던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의심 - 버사의 교활성, 천박성에 대한 래티머의 반감 등 - 은 이윽고 완전히 박살난다. 아내인 버사의 시종 아처 부인의 죽음과 잠깐의 소생을 위한 실험에서 발설되는 악마적 반전은 인간의 심리, 아득하게 은폐된 심연의 그 복잡 미묘한 양식을 줄기차게 묘사해대는 이 작품의 음울하다 못해 불쾌감까지 스며드는 기묘한 이끌림에서 풀려나게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조지 엘리엇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인간 심연의 실재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보았으니 어쩔 겁니까? 인간들의 그 편협한 사고와 미약한 배려, 반쯤 지친 연민에 대해서 잘 알았지요? 너무 깊숙이 타인의 정신을 헤집으려 해도, 그렇다고 신비의 환상에 빠질 것도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인간 영혼의 갈증과 그 충동에 대한 심리 탐사의 이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욕망의 위력과 베일에 싸인 내면을 거닐며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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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세계에서 목적 찾기 - 우주를 이끄는 손길은 없어도 우리는 의미를 찾아 나선다
랠프 루이스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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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느냐는 물음의 틀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 378

 

 

이 문장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어떤 고의적 의도가 있었다고 자기 지시적으로 추론하는 습관을 표상하는 인간의 흔해빠진 자기중심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요구이다. 엿 같은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비일비재하게 늘 일어나는 일의 한 조각일 뿐, 자연 법칙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것이다. 즉 나쁘다고 판단되는 일의 인과관계에 뭔가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목적 또는 미리 착상된 설계가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인과관계가 있음을 부지런히 찾아 나선다. 무작위적이라는 믿음이 불안을 증폭시키기에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 왜곡된 실재, 비합리적 믿음에 매달리게 된다. 인간의 오래되고 가장 흔한 직관적 오류와 무의식적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로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다.

 

무작위적이고 사소한 인자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운명이 결정될 때 사람들은 소원 빌기식 사고,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들에 의존한다.” - 24(서문)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목적론적 사고의 망상에 놓여있는 본질들을 들여다보고 그 믿음의 근원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심오한 척하는 헛소리(pseudo-profound bullshit)’ 대신에 과학-이성에 의한 세속적 휴머니스트의 세계관을 종합하여 일관되고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으로 안내하고자 하는 고뇌어린 비판적, 회의적 사유이다. 저자 랠프 루이스는 유대-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공동체에서 성장하고 그러한 배경에서 살아가는 명망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그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고 힘겨운 삶의 투쟁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신의 이성적 믿음이 흔들리고 소위 소원 빌기식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에 포획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우주의 알지 못하는 초월적 힘에 대한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음이다.

 

저자는 삶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초월적 신이나 우주적 힘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말기 암과 같은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는 사실에 대한 부정과 회피가 필요하며, 이것은 당사자가 삶에 대처하는 인간적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좌절될 때 그 불행을 감당할 수 없는 좌절로 인해 인간을 더욱 피폐하게 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 세계, 이 우주의 무작위성, 무상성이라는 실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이러한 불확실성과 무위의 우주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도덕적 가치를 일궈 낼 수 있는가를 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뇌는 믿음 엔진이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 본능이 앞장서고 지성은 뒤를 따를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들은 지성과 합리성을 허물어뜨리는 수많은 직관적 추리들과 감정적 인자들에 쉽게 흔들린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우리들 자신들은 의식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절로 빠르게 작동하며 자발적 통제 없는 사고인 시스템 1의 직관적이고 의도된 감정 인식을 믿음으로 삼는다고 말했던 것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이렇게 확보된 믿음이 실재를 정확하게 표상한다고 여기며, 설사 그것이 잘못된 표상이어도 결코 이를 인식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과학사학자인 마이클 셔머는 인간은 자연에서 보고 생각하는 패턴들로부터 의미를 만들어낸 진화된 패턴 인식 기계(55)”라 했듯이, 자기가 인식한 패턴이 진짜인지 의심하는 경향보다 어떻게든 패턴을 짚어내는 경향을 진화시킨 것, 목적론적 추리라는 아무 인과관계도 없는 것에 강박적으로 의도된 목적성을 기입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무 목적도 없는 우주에 목적을 부여하거나, 무작위적 DNA 돌연변이의 변칙성으로 발생한 암의 발생에 특별한 목적성을 이유로 대려는 것과 같다.

 

자연의 법칙들에 어떤 지향성이 떠받치고 있다는 끈질긴 믿음은 패턴과 목적을 분간하지 못하는 이 같은 주관적 지각, 사후예지 편향에 기초하고 있다. 어쩌다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면 그 감정적 울림에 경도되어 초자연적 행위자의 목적이 행해졌다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지시적인 느낌에 압도당하곤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무수한 목적론적이고 직관적 인식에 의존함으로써 야기되는 왜곡된 믿음들의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사례들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시 말해 이 목적론적 믿음에 터 잡은 종교의 원동력이 삼고 있는 인간의 편향적 경향성, 이 망상은 이성적으로 논파되지 않기에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믿음에 기초하는 신앙(102)”을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적론적 논증과 설계 논증에 놓인 믿음을 반박하기 위해 양자 물리학, 진화생물학, 행동 심리학적 증거 등을 통해 어떻게 자발적으로 아무 인도함 없이 우주와 우리의 세계가 존재 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혼돈 또는 완전한 무()에서 존재가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 무작위성을 증명한다. 아마 이러한 과학적 입증에 있어서 다중우주나 우주의 총 알짜 에너지가 ‘0’이라든가, 양자 진동뿐 아니라 복잡계 탄생에 대한 떠오름이라는 외부의 원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전체를 이룰 때 새롭게 생성되는 상호에 의한 법칙들로 인한 계의 상승작용을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조직하는 복잡 적응계다. 의식은 세포 개별들의 상호작용과 시공간적 관계가 낳은 떠오름의 한 산물임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우주에는 목적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다.

 

항상 종교는 과학-이성에 목적 없는 우주에서 어떻게 도덕성이 나오는가? 하고 반박하려한다. 책의 중심 주제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자기를 인식하며 강한 목적 감각과 보살피는 능력을 가진 인간 존재는 사실 무심하고 무작위적인 우주에서 자발적이고 인도함 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우주 자체에 정해진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흥미로운 생각거리이거나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관심을 표명한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 전반을 장악하는 인식 시스템에 관한 문제이기에, 나아가 이것이 우리의 도덕성에 관여하여 사회적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폐해를 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불관용, 무자비함, 전쟁의 부추김, 종교적 사회통제, 가부장적 권력 수단화, 부패화와 악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연민이나 인간 조건의 통찰력 제공, 불안에 대한 위로와 안정과 같은 긍정적 유산도 있다. 죽음과 내세에 대한 추상적이고 숭고한 믿음에 뿌리 내린 감각과 개체 감각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인간 뇌의 자기중심적 작동이나 이러한 우주 내재적 목적성이라는 믿음에 깔려있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의 일례를 새삼스레 나열한들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 주관적 편향성의 욕구는 결코 자기 착각을 돌아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의 부정, 즉 사후에도 살아남는 영혼의 영원한 본질성에 대한 믿음은 에 대한 감각을 진화시켜 온 인간의 케케묵은 착각, 진화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는 에너지 절약기이고 복잡한 세상에서의 생존과 번성을 위한 유효한 처리기이기 때문에 믿음 체계가 교란되는 것은 에너지의 배분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복합적 착각에 대한 근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습관의 피조물이며 인간 본성의 많은 측면들이 상당히 굳어져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 왜곡의 상에 기초해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경우 발생하는 것들이 바로 차별과 혐오, 국수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파당적 분리주의이고 공감의 차단이다. 종교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체감을 박탈하고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전략은 곧 무비판적 믿음 체계, 융통성 없는 과도한 믿음 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이다.

 

무작위적 세계성에 기초한다고 해서 도덕성이 부재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세속주의 수준과 평화로움 및 연민 사이에는 상당히 확고한 상관성이 존재하며, 인류는 이렇게 생물학적 진화와 함께 문화적 공진화를 함께 해왔다. 이러한 세속적 휴머니즘을 옹호하지 않으며, 비판적 사고나 회의주의를 방해, 비난해 온 것이 종교이고, 전체주의, 우파의 포퓰리즘(나치즘, 파시즘 등)임을 역사는 증언한다. 극단적 믿음들이 활개 치는 세계는 순응과 위세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곤 한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수구 우파가 즐겨 사용하는 혐오 표현, 표적 위협, 중상모략, 괴롭힘은 이러한 망상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엄격한 비판적 사고를 수용하지 못하는 비합리성과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지적하는 제 1시스템적 사고의 오류에 매몰된 왜곡된 믿음은 그래서 공동체를 파멸로 쉽사리 빠져들게 한다.

 

도덕성은 자연적 도덕 감각이 세월 따라 그냥인간의 문화와 함께 진화해 온 것이다.(334)” 단지 인간인 우리들이 우주에 목적을 지각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그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일 뿐이다. 우주에 대한 가장 끔찍한 사실은 우주가 적대적이어서가 아니라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에 아무리 모순 있음을 지적한들 그들을 자기 통제의 과장된 느낌에서 풀어내지 못할 것임을 인간의 고질적 본성 탓에 불가능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존재로부터 당위가 유래한다. 가치란 여느 행위가 개별 생물의 생존 또는 종 전체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지는 이로움이다.” -292

 

책은 도덕 덕목들 마다 진화 및 심리학, 현대 신경 생리학을 거닐며 그 자연적 형성의 과정들을 목격하게 한다. 협력과 연민의 진화, ‘자기 보호 이타성으로부터 진화한 공감적 괴로움, 죄책감, 수치심, 평판, 혐오감 등 감정적 신경망의 진화로부터 도덕성 판단 가치로 진화하는 여정을 확인할 수도 있다. 특히 '글 눈(literacy)'의 확대처럼 타인이 사는 삶과 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을 넓혀주는 문화적 진보를 통한 내집단 개념의 확장이 꾸준히 공감 범위를 확장시켜주고 있음을 확인 할 수 도 있다.

 

우리는 의미를 찾는 종()이다. 인생의 의미란 우리 스스로 만든 무엇이며 의미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내면에서 부여하는 동기 및 사회적 본능이다. 우리는 불확실성, 복잡성, 무상함, 불완전성, 통제의 한계라는 어쩔 도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378)” 이 광대한 무심하고 무작위적 우주의 한 조각 배에 떼 지어 살고 있는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보살펴주고 타인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통제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으며 수시로 오류와 왜곡을 하기 일쑤인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우리의 세계에 의도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일어나는 무작위적 우주의 불확실성을 우리는 견뎌내야 할 뿐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 후퇴를 경계하며, 비판적 사고와 회의적 사고를 절대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어떤 믿음에 기초할지는 인간 개체 각자의 결정일 뿐이지만 이것은 세계의 도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이 책은 종교와 과학-이성에 대한 믿음의 논증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가, 그 가치에 대한 사고의 제안이랄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취약한 인지 능력의 경향을 파악하여 엄중한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추리를 쫓아 불확실성의 세계를 견뎌내기 위한 인간 본성에 대한 종합 결정판이라 할 수 도 있을 것이며,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둔, 즉 거짓임을 증명할 가능성을 열어 둔 과학-이성의 세속적 휴머니즘 세계관을 하나로 종합해 낸 인간 인식론에 대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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