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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낮, 환한 밤 - 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78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리(名利)가 충분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아무렇게나 땅위에 내버린 낡은 자전거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행위예술의 비륜(飛輪)이자 선구자로 여겨지게 된다.” -9쪽
명리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부와 명예를 갈망하는 자조의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되지만, 사실 이 말은 고상한 허위처럼 보인다. 아니 위의 인용문장은 다분히 반어적으로 읽혀야 하는 문장일 것이다. 50대의 마지막 길목(2017년)에 들어선 옌롄커는 이에 대한 깨달음, 예술이라는 장난을 꿰뚫는 이치를 알았다며, 예술과 명리의 그 직접적이고 상호적 연관성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소설은 이러한 이해에서 비롯된 일종의 실험이자 반증 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시대의 예열 속에서 먼저 뜨거워져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음”을 현실에서 실현, 검증해 보는 것이다. 이 말이 과연 진실인지. 이것은 하나의 원형(原型)을 소설, 인터뷰, 경찰조서, 시나리오 네 가지 각기 다른 형식과 변형된 내용으로 서술하여 읽고 보는 대상의 양적 확보를 통한 달굼과 확산의 드러냄으로 실현된다. 한편으론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창작 또는 진술이 단지 원형보다 못한 예술로 출현하기도 한다는 것에 대한 비하 혹은 조롱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들 속에 일말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을 부정할 수만은 없기도 하다.
‘비허구 한 단락’이라는 부제가 무색하게 허구와 비허구의 경계는 뒤섞여 모호하기 그지없다. 옌롄커 자신의 목소리처럼 보이는 것에도 대상의 시선을 의식한 언어와 행위로 조성되어 있어 마치 창조된 인물 같기 때문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분명 원형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원형을 안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저마다 표현하고 드러내려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소설은 작가의 허난지역 고향 마을 사람 ‘리좡’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원형이라 말하며, 자기 일생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캄캄한 낮, 환한 밤(速求共眠)」을 논픽션이 아닌 픽션으로 발표해 명리를 피해갔던 것으로 상기한다. 이것을 발단으로 명리를 가장 명확하게 가져다 줄 시대의 걸작 영화로 만들 준비에 착수한다. 사실 영화를 위해 모인 인물들이나 시나리오는 이 거대한 실험 속의 허구화된 인물이기도 하면서 검증을 위한 자체 수단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감독 및 제작자 구창웨이, 시나리오작가 양웨이웨이, 신진작가 궈팡팡, 영화감독 장팡저우, 이들은 옌롄커가 “명(名)을 팔아 이(利)를 득할 수단”으로 소집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완성된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보이는 반응은 작가의 예술에 대한 이해의 진실이기도 하며, 뜨거워져야 할 시대의 사람들을 대변한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우매함이든 진실이든. 이미 소설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 일상적이고 사변적이기도 한 배경 같은 이야기도 이 작품의 한 축이다.
이들에게 옌롄커는 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1) 사본을 각기 나누어주고 하루 동안 읽고 난 후 다시 모여 영화를 위한 논의로 들어 갈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허구의 깃발을 달고 써내려간 첫 번째 비허구 작품”, 즉 실화소설이라는 토씨가 붙은 소설이다. 그 내용은 열일곱 살 ‘리좡’이란 사내아이가 마을 이웃의 열네 살 ‘먀오쥐안’을 강간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네들 아버지의 성품과 출신 배경, 상호 겸양과 이해에 의해 두 아이의 결혼에 이르는 사연들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리좡’은 메타 서사라 할 수 있는 이 장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 - 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의 중심인물로 활용되는 소재라 할 수 있다.
네 사람이 밤새 읽은 실화소설은 사실 보잘 것 없는, 시대의 걸작이 될 여지조차 없는 지극히 평범한 에피소드 한 편에 불과하다. 당연히 구창웨이는 이것을 각색하여 영화화 할 거냐며 난색을 표명하지만, 옌롄커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바로 소설 속의 실재하는 인물 ‘리좡’이 베이징에 있으며, 그가 벌인 희대의 극이 세간의 소문으로 떠돌고 있다고. 중국 최고의 명문대인 베이징대(大) 대학원생인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리징’이라는 20대 여성과 빈곤한 북부 허난의 시골 마을 출신인 50대 농민공인 리좡의 사랑 사건이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천풍망정(千風萬情)이 쓴 오리지널 창작인 「벌레와 봉황이 서로 사랑하는 인연은 어디서 온 것인가. 연꽃이 활짝 피면 진흙도 향기롭네」라는 글과 이 글에 달린 신랄한 댓글을 본 네 사람의 반응은 이것이다. “염병할! ...공동으로 소똥 위에 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 같았다.” 농민공 리좡이 감히 엘리트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으며, 리징은 왜 그와의 데이트를 수락했는지, 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가 몰고 올 뜻밖의 복선과 반전에 대한 기대가 그들의 얼굴에 따사로운 햇살 같은 미소가 걸리게 한 것이다.
영화화가 잠정 결정되고 시나리오 각색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실제 사건의 주인공인 리좡, 리징, 그리고 농민공 리좡과 함께 공사 일을 하는 뤄마이쯔, 그리고 리좡의 아들 리서, 리좡의 어린 시절 결혼을 중개한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홍원신과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이 인터뷰를 통해 밝혀지는 것은 발표되었던 실화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의 리좡과 먀오쥐안의 결혼에 이르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당사자의 반론과 함께 모호한 관계자의 진술, 전혀 엉뚱한 상황, 리좡이란 인물에 대한 상반되는 엇갈리는 진술들, 리징과의 뜻밖의 통화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이 인터뷰 내용은 이후 시나리오 창작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텍스트로서 과연 실제로 진행되었다는 당사자들과의 대화가 허구보다 현실적인가? 아니면 현실보다 더 허구적인가?, 대체 무엇이 더 예술 작품 같은가? 의 독자들의 검토 대상이 될 것이다.
리좡이 리징에게 접근하여 식사대접을 제안하고 이를 거절하던 과정 중에 주변 사람들이 농민공 행색의 리좡을 무더기로 두들겨 패는 사건이 발생하는 데, 경찰에 끌려가 구금된 리좡의 사건 심문 조서, 리징의 심문 조서, 증거인 보증서 및 사건 종결서로 이루어진 ‘서류 기록철’의 기록 내용, 즉 가장 실제 사건에 접근한 진실로 여겨지는 기술이다. 이 기록 서사에 나타난 내용은 다시 이미 알고 있는 소설과 인터뷰의 내용이 변질되어 전혀 다르거나 왜곡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또한 현실과 예술에 대한 간극, 무엇이 우리 삶에 더 진실되게 다가오는가의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대체 문학, 예술이란 무엇인가? 거장 옌롄커가 빚어내는 이 모든 ‘비허구의 허구’들은 그대로 하나의 단독적인 예술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여기에 ‘현실보다 못한 예술’이라는 오만한 딱지를 갖다 붙일 그 기준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나의 원형에 세 가지 내용의 기술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시나리오, 시대의 걸작이 되어 명리를 안겨줄 대본 창작 작업이 진행된다. 그러나 시나리오 「캄캄한 낮, 환한 밤」(2)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50대 농민공과 20대 엘리트 여성의 결합에 은닉된 신비로움을 밝혀주리 라는 독자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판본의 내용이 쓰여 있다.
여기에는 수도 베이징에 거주할 특권인 베이징의 호구(戶口)를 얻으려 분투하는 리징의 직장인 연구소로부터 해고 통지에 따른 울분을 담고 있는데, 그 해소책이 성적 분출로 표현되고, 공개적인 잠자리 대상 물색이라는 행위로 표출된다. ‘가까이 오세요. 저랑 같이 자요’라는 문구가 담긴 팻말을 행위예술 하듯 걸고 있는 리징에 다가가는 리좡의 망설임과 거주지 주소의 취득에 의한 인연을 발단으로 하고 있다.
그녀를 급작스레 해고한 연구소장 ‘장화’에 대한 적의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과의 잠자리라는 유혹을 전제로 리좡을 장화의 해코지 청부인으로 종용하며 두 사람의 심리적 변화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옌롄커의 소설 밖 의도를 나는 추측케 되는데, 허난 사람들에 대한 세간의 비하와 조롱과 같은 나쁜 이미지를 씌우지 말고 좋게 써달라고 했던 리좡의 옌롄커를 향한 부탁의 변과 수도와 지역민의 차별적 정책에 대한 느슨한 비판을 아울러 담아내며, 특수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한낱 우연한 사건이 빚어낸 에피소드화 함으로써 대중들이 지닌 호기심에 내재된 그 범주화된 편견에 기초한 의외성을 전복시켜 평범화시켜버리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사람들을 뜨겁게 달구고 시대를 예열하는 예술, 즉 시대의 걸작으로 탄생할 시나리오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음의 항변이라는 무언의 주장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네 사람 중 하나인 양이웨이는 특수한 남녀관계에 대한 상상이 부족하다고, 리좡과 리징이라는 “특수한 남녀 관계에 감춰져 있을 불가능한 비극과 희극, 심지어 익살과 골계(滑稽)의 불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또한 장팡저우는 리징과의 인터뷰 내용을 방패삼아 “옌롄커의 소설은 너무 잔꾀가 많으며, 서사가 선명하지 않고 신기하기만 하다”며, 리징의 인물 성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에둘러 비평하기까지 한다.
이윽고 구창웨이는 옌롄커와 만남에서 리좡과 리징의 사랑 얘기는 쓰지 않은 시나리오에 대해 “두 사람의 왜곡된 사랑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의도적 누락을 묻는다. 이때 옌롄커의 답변은 “안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생활의 진실이 쓰지 못하게 한 겁니다.”이다. 이로서 영화의 제작은 강 건너 가버린 것이다.
구창웨이: 예술이란 생활의 진실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
옌 롄 커: 진정한 예술은 생활을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밑바닥이나 내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 갈 수 있는 것이지요. -379쪽
이렇게 「캄캄한 낮, 환한 밤」(2)의 영화화는 투자자의 철회로 미완에 그치고 만다. 이 최종 대화를 마치고 자신의 차에 탑승한 작가는 다른 차를 들이받고 그는 안면의 상처로 병원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현실 속 실제 사건인지, 허구의 연속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팽창되었던 욕망의 추락이 몰고 온 우울과 낙담으로 흥분성 정신병에 시달렸던 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후기에서 쓰고 있다. 후기의 제목은 「옌롄커: 커튼 콜을 향해 가는 글쓰기」이다. 여기서 그는 한 세대의 커튼콜 시기가 다가온 것 같다며,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호흡의 시도이자 숨을 고르기 위한 작은 호흡이다.”라며, 펜을 던질 준비, 퇴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해 노력할 준비도 되어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결코 명리라는 목적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국가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국가주의 중국에서 그는 그 어떠한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배제된 외딴 섬 같은 작가다.
어쩌면 이 작품은 이러한 환경에 지배된 중국의 문화 예술 현실 전반에 대한 비평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자신이 사는 곳의 역사와 문화, 시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우매함과 상처, 국가 권력이 은폐하려는 것들을 끊임없이 예술적으로 지펴내려는 그의 문학이 새롭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갱신되어 발표되기를 응원하게 된다.
옌롄커의 2017년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과는 그 문제 제기의 지향점이 다른,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커튼콜을 향한 전환적 색채의 소설이라 하겠다. 그간 인간을 압도하는 혁명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나 지식인의 허위의식, 인민들의 현혹된 과잉의 물질적 욕망이 야기하는 고통과 분노와 같이 중국사회를 향한 거대 담론으로서 그 상처를 드러내고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글쓰기였다면, 이 작품은 “고상한 허위의 협로 위에서” 곡예를 하는 작가 자신, 그의 글쓰기에 숨어있는 고백록에 가깝다고 하겠다.
“갈수록 나 자신의 글쓰기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후기의 문장처럼 이제 두루뭉술한 얘기를 지양하고 ‘내 얘기’를 하여야겠다는 것이다. ‘나의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이라는 부제처럼 어쩌면 이 작품을 시작으로 옌롄커의 작품 대전환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묶고 있던 거대 담론의 세계로부터 풀려나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로 내딛는 그의 걸음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