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인간이란 커다란 계통 속에 서로 다른 종(種)이 있다는 듯한 이 분류의 언어는 전혀 생물학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구별하여 차별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어떤 권력에 의한 악의에 찬 근거없는 엉터리 범주화라는 것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한국 사회도 국가적 지위의 향상으로 인한 호감, 분쟁 국가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수용, 국제 결혼 등 더욱 개방화 된  인적교류 등에 따라  점진적으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 뒤에는 해당 당사자는 물론 그네들의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이 케케묵은 인종주의적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며 갈등과 반목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은닉된 인간 심리와 윤리적 문제는 이미 저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나 인류학자  '김현경'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 낙인(烙印 stigma)찍기, 신분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한 상호작용의 비대칭성을 통한 불평등의 심화, 모멸과 굴종을 정상화하는 양상은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우리네 인식은 여전히 20세기 초, 우생학과 서부 유럽 백인 종의 우월성을 주장한 사회진화론의 그 사이비 과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의 발단은 피부색과 얼굴의 이목구비가 한국의 전형적 외형과 다른 아이들이 겪는 시선의 고통, 자신들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그 이질적인 시선, 바로 타자성이라는 배타적 의식이라 하겠다. 이 시선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는 외지인 뿐 아니라, 타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과 그들의 자녀에게도 동일한 형태로 존재한다.  자신의 이해와 주변 사회의 자신에 대한 표상과 기대가 불일치하면서 발생하는 위기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은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그 생각과 역사, 습관이 온 몸에 배어있어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만, 주변 사회의 시선은 그 아이를 혼혈아, 혹은 흑인, 백인 등으로 자신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바라보며, 전혀 낯선 편견을 씌운다.


이 구별과 분류의 시선은 왜곡된 인종적 범주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엄격하게 작동되고 있는 신분주의는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하고 있다. 때문에 경비원 폭행, 백화점 판매 사원을 향한 욕설과 손찌검이 매양 뉴스를 장식하는 이유이다. 수구정당의 국회의원이 국회사무처 여성 직원을 향해 하대하며 큰 소리로 다그치는 영상은 한국사회의 신분제 질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권력이 감추고 사회가 왜곡 은폐하는 것을 꾸준히 문학작품으로 드러내는 작가 '옌롄커'의 장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에는 중국 최고의 대학 베이징대(大) 대학원생인 '리징'이라는 엘리트 여성과 공사장에서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파는 농민공 '리좡'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아상, 타자상, 사회의 표상들이 서로 얽히면서 사회적으로 각인된 집단적 구성물로서의 개인의 몸', 즉 외부 세계에 독립된 주체로 마주 선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타자들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좡은 단지 허름한 농민공의 복장을 하고 세련된 대도시의 엘리트 여성에게 다가갔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두들겨 맞는 것인데, 농민공을 표상하는 리좡의 행색은 곧 그의 인격을 비인격화시키고, 그가 사는 공동체 일원에서 즉시 배제된다는 의미이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리좡의 잘못일까? 그는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몸, 그를 주변 사회에 소속시키지 않고 배제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좌절하고 그런 사회에 대해 적대감만이 자라지 않을까?  결국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남는다.  이러한 21세기 오늘의 물음을 100년 전에 거의 동일하게 한 작가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오늘날 체코로 불리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유대인이다. 1000년 이상을 유대인을 격리시킨 '게토'로부터 풀려나 주류 시민사회에 자유롭게 편입될 수 있었지만, 20세기 전후의 유럽사회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이 창궐하며 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렬하게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유대인에게 씌운 이미지의 전형, 1890년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유대인이 주류 시민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인의 태도와 몸짓, 언어 등 문화적 관습을 모방해서 그들처럼 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산업 사회의 발흥과 함께 중산층으로 성장한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의 시선은 이들 낯선 인간들에 대한  구분 불가능성이라는 두려움에 혐오와 모멸을 내재한 왜곡된 이미지를 씌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낯선 이웃에 대한 불안과 불쾌감, 그 거부감은 유대인의 혈통과 몸에 특정한 전형적 이미지를 덧씌운다. 허약한 신체, 교활한 안색, 흉칙하게 휘어진 메부리 코..., 유대인은 이 왜곡된 맹목적이고 완고하며 말없는 증오에 직면하여야 했는데, 제아무리 유럽 시민사회에 동화하려 할수록 내부의 표상인 자아상과 외부가 바라보는 타자성의 불일치, 그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했다.


급기야  "유대인들은 동종교배와 퇴화 때문에...게토에서 천 년을 살면서 몸이 너무 많이 변형된 채로 유전되어 허약하다"는 퇴화론이 주장되고,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담론으로 이어져 교활한, 음흉한과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특징이 고착화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각성한 유대인에게는 일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좌절이었으며, 카프카의 소설은 이에 대한 자기직시, 내외부의 불일치에 대한 자기 모멸과 유대인의 정체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죽음에 이르기까지하는 참담한 고통의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반복된 실패의 이야기들, 동화될 수 없는 타자성의 실체의 이야기들이며, 주인공들은 '어느 날'  낯선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카프카가 처해있던 당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전통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독일어를 쓰며,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동부 유럽 유대인을 멀리하라는 압박, 마치 주류 시민 사회의 중산층 계급에 어울리는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갈 것과 문인으로서의 글쓰기 사이의 갈등은 결국 당시 유대인들이 겪는 유럽인으로의 동화(同化)의 실패와 그들로부터의 거부에 도사린 통렬한 물음이며, 꽉막힌 출구를 찾는 고난의 여정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같은 시각은 1900년 전후의 서유럽 유대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체험적 이해였기에 오늘날 한국의 독자나 비유대의 서구인의 시선에서 그의 작품들이 낯설고 난해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이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재칼과 아랍인」등등을 읽을 때 당대 서유럽 유대인들은 작품의 함의를 너무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성찰로 수용했다고 한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Samsa)는  Kafka의 K를 S로, f를 m으로 치환하면 Samsa가 되듯이 당시 카프카의 현실과 일치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만은 없다. 다시 말해 유대인을 풍뎅이, 딱정벌레 등 때려잡을 갑충으로 이미지화한 부정적 언어가 횡행하고 있었기에 유대인 자신에게 부여된 그 타자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잠자는 자신이 변했음을 느낀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몸의 변화를 단지 본 것이다. 그리고는 어떠한 불평이나 경악이 아니라 일상화된 삶을 살려는 기계적인 반응만이 보인다. 이것은 유대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함의로서 개인적 열등감과 무력감을 응축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그리 잘못된 해석은 아닐 것이다.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잠자의 행위는 바로 유대인이 겪는 당대 주류사회에서 체감하는 현실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는 성실하고 안정된 외판원으로 주류사회에 편입된 존재로 여기지만 사실 주류사회의 시선은 그가 생각하는 자신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자아상과 타자상의 현격한 간극, 불일치다.


즉, 주류 유럽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동화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체성의 상실과 자기확신과 자존감의 결여일 뿐이다. 잠자를 찾아온 그의 직장 지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는 최근 판매 실적도 별로 신통치 못하고", "자네의 지위는 절대로 안전한 것이 아니라네."라며,  5년 간 한 차례의 지각이나 결근도 없이 성실함과 능력을 발휘한 직원을 향해 비유대인 직원들과는 다른 차별의 언어를 쏟아 놓는다.  


그리고 갑충으로 변한 잠자는 그의 방 문지방을 넘어서는 것이 금지되어 갇히게 된다. 이것이 대상화된 타자성의 존재가 겪는 출구없는 고립의 실체이다. 이렇게 변신, 몸의 퇴화라는 상징어에 시대성 - 퇴화론, 인종주의,사회진화론, 상호의례 질서의 비대칭성 등  타자성 - 을 대입하면 카프카가 말하려했던  '변신'의 의미는 자신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소통 주체인 몸에 씌워진 끈질긴 인간들의 왜곡을 볼 수 있게 된다.  소설 변신」의 해석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나는 100퍼센트 한국인인지 알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은 0퍼센트 한국인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받았을 때 그 혼란과 좌절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일 게다.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져버린 자아상은 곧 비인격화되어 버리고, 모욕받는 존재가 되어 존엄이 무너지고, 자기 이미지를 포기하게 된다. 사회는 굴종을 정상화하고 마치 없는 존재처럼 하나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우리들의 사회는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지만, 정작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린다.  마치 유럽인이 유대인 카프카에게 하듯이. 21세기 오늘 한국의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과 왜곡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우리들의 세계가 여전히 100년 전의 그 어리석고 악의적인 차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자를 배제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역겨움과 공포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이 세계에는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하는 것인 양 이미지화시켜 타자를 배격하는 권력화된 만연한 비대칭의 윤리와 불평등이 산재해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모든 인간에게 '절대 환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인종이란 없다. 더구나 신분이란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종(種)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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