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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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생전의 소설집(1) 말미에서 글을 쓰는 동안만은 언어와 빛이 동일해 진다. 언어로도 삶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붙들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미치도록 나를 매혹한다.”라고 썼다. 그래서인지 태양과 바람이 있는 그곳, 섬의 언덕에 도서관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들이 빚어내는 무언의 행위들에서 작가의 숨결을 읽는다면 혹여 외람된 것일까?

 

이 소설은 내겐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 사랑, 같은 이야기도 매번 새로운 듯이 들어주는 사람, 마주하기 버거울지라도 내 성장의 삶이 배어있는 고향, 그리고 바다와 섬과 바람과 몽돌들의 부딪힘 소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에 들려주는 유한자로서의 마지막 위로의 말들처럼 느껴졌다. 아니, 우리들에게 영원히 드리워질 빛이라는 삶의 언어로 다가왔다.

 

아무런 말()없이 누군가의 옆에 앉아 들어주는 판도처럼, 때론 모른 척 제 혼자 힘으로 이겨나가리라 기다려주는 정모와 같이, 혹은 혼자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겄다. 이거 좀 갖다주고 와라.”라며 반찬을 챙겨주는 이삐 할미처럼, 그리고 죽는다는 건 영혼이 저 멀리로 날아가는것이 아니라 여전히 곁에 나란히 있는 것이라 말하는 이우와 같이 사랑하는 이들의 손바닥에 따뜻한 체온의 글씨를 한 글자씩 써주는 어머니의 사랑의 언어, 그것만 같았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글자글 몽돌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 역시.” (P 58)

 

실명의 두려움과 이후의 불가해함을 잊기 위해 고향 섬을 찾아든 정모의 이 말조차 내겐 혹여 어머니일까 스쳐가는 바람에 애틋한 그리움을 말하던 어느 시인의 문장에 가닿고 말았으니까.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함께 할 것이라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 동굴처럼 커다란 구멍을 가슴에 지닌 열아홉 살 소녀 이우태이를 향해 끝없이 보내는 애절한 사랑의 음성과 사진, 문장들, 그리고 판도에게 스스럼없이 쏟아내는 사랑했던 이에 대한 그 수없는 말들에서 좀처럼 씻기지 않는 그리움이 아릿하게 스며들지만, 그 통렬(痛烈)한 애도 또한 떠나보내야 하는 이삐 할미와의 의식(儀式)으로서 또다른 사랑의 의미로 정화되는 위안을 얻게 된다. 남아 있는 이들의 아픔조차 안쓰러워했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래서였을까? 섬 언덕에 줄지어 서있는 소금창고, 기억보다 약간 더 무겁고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창고의 문을 열고, “시간도 중력도 없는 장소에 서 있는 느낌과 그곳에서 책들이 채우고 있는 풍경의 백일몽을 떠올리곤 그곳을 도서관으로 만드는 정모의 행위는 책들에 깃든 시간, 존재의 무한한 시간성의 축조처럼 다가온다.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도서관이라한 보르헤스의 그것처럼, “백 년 전이 바로 내 발아래 있고 천 년이 산자락에 남아 있는 섬의 자태처럼, 생의 일회성을 비웃는, 유구한 책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공간 만들기는 영원한 교감의 지대, 함께하고 있음의 또 하나의 위무(慰撫)로써.

 

이 마지막 위로 같은 이야기 속에 보이지 않는 듯 드러나는 인물, ‘모래 언덕 배()에 기거하는 판도를 쫓으면서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아주 먼 섬을 발견하게 된다. 옆에 앉아 그 누구든,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말없이 듣는 이, 하지만 에미 가난이 들어서 남의 에미를 훔쳐올 듯이 쳐다보는 그 누구보다 커다란 상실의 구멍을 가슴에 안고 사는 청년에게서.

 

판도 쟤, (태이)하고 닮은 데가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지. 들어준다기보다는 옆에 앉아 있어. .... 그렇게 떠들고 있으면, 잊고 싶은 순간들이 저만치 밀려가.” (P 103)

 

정모이우판도에게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마음껏 발설한다. 그가 말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만 해서일까? 비밀이 없으려면 그 대상에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만 하는 것이지 않은가? 서로 무한히 열린 마음, 아마 사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받아들임, 수용적인 태도가 두 사람에게 투명한 마음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게 하고, 그것은 다시금 판도에게 되먹임 된다. 모든 추오가 사라진 순백의 아름다움이 그득한 소설로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섬이 도서관이야. 시간의 도서관”, ‘아주 먼 섬은 이렇게 모든 것들을 안아주는 시간이자 공간이 되고, 밀물과 썰물을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는, “터무니없는 죽음도, ....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면 곧 일상이되는 순화의 장소가 된다. 어쩌면 바람을 보러 바다로 나가는 정모는 바람의 진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숨결과 손길임을. 결코 곁에 있음을.

 

 

(1)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정미경 2, 006, 생각의 나무) P338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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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 인류 고전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
박병기 지음 / 인간사랑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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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와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할 수 없는

정의(Justice)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 '존 롤스'정의론(P 128)

 

저마다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나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독서를 한다. 그것은 나의 앎이란 것이 지극히 좁고 이 협소한 지식과 체험에 근거한 신념이 내 삶의 선택을 그릇되게 할 수도 있으며, 혹여 타인과의 관계를 훼방하여 공동체에 해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올바르며 가치 있는 삶으로 나를 견인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여기서 획득되는 새로운 앎이라는 수확은 생각하는 삶으로의 안내이다.

 

생각하는 행위는 올바름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이며, 이로 인해 발견되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요인들을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다준다. 그럼에도 이 분별의 규준으로 작용하는 믿음의 인식은 끊임없이 확장될 필요가 있어 책을 읽는 행위를 중단할 수 없다. 내 믿음의 한계라는 외연을 넓히지 않고서는 어느 순간부터 편협과 아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족이 길어졌지만 인류 고전(古典)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삶의 선택에 대한 물음인 이 책이 지금 우리들을 이끄는 믿음에 대한 숙의(熟議)와 성찰의 길을 터주는 작업으로 다가왔기 때문에서이다. 이는 저자의 머리말처럼 삶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전제로 하는 사유와 성찰의 시,공간으로서의 고전 읽기가 지니는 고유한 위상이다. 그래서 책,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는 바로 이 지점을 일깨우는 실천적 모색이 된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가 사유(思惟)라는 행위를 그만두기 시작했는지, 혹은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모든 미디어 매체는 물론 사람들의 대화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좁은 체험에 기반한 위태로운 신념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모습들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 삶을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첫 번째 원인은 이기심이고, 그 다음이 정신교양의 부족이다.” (P 138)라고 쓴 존 스튜어트 밀의 지적은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가리킨다. 정신교양의 부족은 자기 개인을 형성하고 있는 신념, 그것에 대한 인식의 폐쇄성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자신이 아는 것만을 반복하고, 암기한 구호를 거듭 반복하기만 하는 틀에 박힘, 다시 말해 무사고(無思考), 생각 없음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보편적 진리에의 접근을 가로 막는다.

 

아마 획일화된 믿음에 기반 하여야만 지탱되는 전체주의적 사회가 필요한 권력에게는 시민의 무사유가 긴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길, 인간적 삶의 길을 터주는 윤리(倫理)’라는 교과목을 없애버리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으로서 왜곡시키는 것이 이 땅의 불온한 권력들의 방편이었다. 이것은 사라진 윤리를 귀환시키려는 시민적 자각인 촛불혁명에 대해 극단적 반감을 보이는 수구권력의 행태가 반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네들의 행태적 속성인 내 편에 속하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척과 배제는 곧 사유 없음임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3월에는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고전과 윤리라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아쉽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사는 사회와 내 삶의 규준을 바르게 정립 할 수 있는 사유의 길을 터주는 정말 중차대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 시대의 삶을 포섭하는 세계관에 대한 이해로부터, 삶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개념과 특징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시민윤리의 핵심, 사회제도의 덕목, 보편적 진리에 대한 추구 등 시민사회의 개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생각의 초석들을 논어, 격몽요결, 목민심서등 동양의 고전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공리주의, 정의론등 서양의 고전을 종횡하며 생각게 하는 이 책은 바로 지금 맞춤의 지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저자의 지적처럼 오늘의 우리들은 각 개인의 가치지향과 관계 맺기, 사회적 분석 및 미래 모색을 해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엄중한 위험과 불안이 지속적으로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독선과 아집, 편견과 선입관으로 가득한 탐욕과 이기심이 삶을 지탱해 줄 수 있을까? 이러한 믿음이 이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 해 줄 수 있을까? 고전은 인간의 삶에 보편적 공통성이라는 우물을 길어 올릴 수 있게 하여준다. 그래서 가치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끌어갈 수 있을까와 관련된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는 자료이자 대화자인 고전은 그대로 삶의 방향을 숙고하는 등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자신의 유전자와 성장배경, 교육 등을 통해 형성된 도덕에 대해서 어느 시점에서는 한 발 물러서서 성찰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삶을 이끌 수 있다. ... 자신이 포착할 수 있는 진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절대적 한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P 202)라는 저자의 바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이 문장이야말로 고전을 읽으며, 시민윤리를 귀환시켜야하는 우리들의 지향점 제시 일 것이다. 책은 분명, 세상을 바라보는 흠 없는 투명한 창이 되어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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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 - 기술공상가, 억만장자, 괴짜가 만들어낼 테크노퓨처
마크 오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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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을 희구하는 인간種, 인간성에 대한 가치는 진정 공허한 외침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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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 인류 고전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
박병기 지음 / 인간사랑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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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윤리‘, 삶을 사유하는 길을 터주는 작업이 되어줄 지금 필요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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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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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 게다가 행복과 풍요가 넘치는 삶, 이거 어디서 많이 보았던 문장 같지 않은가? 인간의 삶을 구성하던 여타 요소들이 싹 걷어진 새로운 존재들이 생산되고 살아가는 세상,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제거된 세상을 이야기했던 문명비평가이자 소설가였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1932년 발표했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그것 말이다. 나는 소설을 읽고 어떤 소감을 남겼을까? ‘멋진 신세계는 다름 아닌 지옥을 향한 통과세계’, ‘그리곤 무능하고 비참해질 자유, 그 자유를 가진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 했다

 

그런데, 80여 년 전, 기계 산업문명과 인본주의의 이성이 치닫는 기술지상주의가 가져올 이 인류에 대한 위협의 경고 메시지가 21세기 초 바로 지금,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행동을 위한 마지막생각의 기회로서 유발 하라리의 저작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사피엔스가 자연에, ()에 굴복하면서 , 마침내 사피엔스 스스로가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자로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외치기까지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행복불멸이라는 신성(divinity)’을 획득한 새로운 종(), 그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체 호모데우스(Homo Deus)로서의 문턱에 성큼 들어서려 하고 있다.

 

사피엔스가 여기에 도달하게끔 한 동력은 무엇일까? 오늘 사피엔스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인간 개인의 가치와 자유가 최우선시 되는 인본주의(Humanism)라는 인간중심의 사고이다. 따라서 그 동력의 실체인 이러한 인식을 해체하여 그 본질과 속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선행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 위대한 저술의 기본 얼개가 인본주의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 즉 사피엔스가 꿈꾸는, 궁극의 지향들이 지니는 의미를 조사하는 것인 이유는 그러해서이다.

 

1. 상호주관적 실재

 

우리 사피엔스는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가? 국가가 있으며, 사피엔스들의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이 있고, 원활한 사물의 거래를 위해 화폐()란 것도 있다. 또한 물질 및 서비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판매하는 기업이란 것도 있으며, 불안한 삶의 현실과 죽음이라는 부조리를 달래기 위해 신()이란 것에도 매달린다. 어쨌든 오늘 이런 것을 창안한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역사상 가장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국가, , , 기업,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하면 그 의미와 가치가 증발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감정, 욕망, 의식의 흐름과 같은 주관적 실재도 아니요, , , , 원자탄 같은 객관적 실재도 아니다. 개개인의 느낌보다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해서 그 함유가 승인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많은 사람이 공동의 이야기망()을 함께 짤 때 의미가 생겨나는 것”, 바로 허구이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이처럼 허구라는 가상의 질서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럼 이런 강한 허구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존재가 과학이라는 철저한 객관적 실체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허구라는 환상, 즉 상호주관적 신화를 버리고 객관적인 과학 지식의 선택으로 전환 하면 그저 만사 오케이가 되는 건가?

 

2. 포스트 인본주의 기술

 

이미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상상 속 이야기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왔다. 여기서 쉽게 물러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 스스로 잘 알듯이 자신의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환상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새로운 과학기술은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물론, 사피엔스가 신봉해왔던 인본주의의 근간인 자유의지까지 텅 빈 껍데기라고 말한다. 비의식적 알고리즘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과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를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통제하게 할 것이며, 오히려 컴퓨터와 생명공학 덕분에 허구와 실제의 차이가 모호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포스트 인본주의는 이렇게 과학기술을 끌어안는다.

 

이제 실제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섞이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듯하다. “개인이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세계는 더 아름답고 풍요롭고 의미로 충만할 것이라 외치며, 이 무한한 개인들의 욕망추구를 위해 다시한번 생산혁명, 소위 4차 산업혁명의 동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술 들 - 나노기술, 유전공학, 인공지능, 만물(사물)인터넷 등 - 에 길을 열었다.

그리곤 이 기술들이 사피엔스 자신들의 인본주의를 완성시켜줄 바로 그것, 행복하고 영원한 삶의 담지(膽智)적 존재임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구원의 종교가 되었다.

 

새로운 기술들이 자신들의 몸과 마음과 뇌를 업그레이드해주리라는 기대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것들이 물질적 풍요와 불멸의 삶과 가득한 행복의 세계를 펼쳐주리라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으며, 연일 사피엔스의 미디어들은 이렇게 외친다. 11일자 중앙일간지의 헤드라인은 기술진보, 일시적으론 몰라도 영원히 못 막아라며, 삶의 질과 양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편의를 제공할 기술에 대한 강박적 기대감으로 신년을 열어젖혔다.

 

3. 종교가 된 새로운 기술의 의미

 

그러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만물인터넷, 나노기술, 생명공학기술은 오늘의 무수한 직업군을 쓸모없는 것으로 내몰고, 그만큼의 잉여인간을 이미 아주 조용히 점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또한 생물학자들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결론을 내린 순간,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인간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에게로 이동했다.”

 

그런데 사피엔스의 개별성을 더욱 강화해주리라는 바로 그 기대인 이 새로운 기술은 오히려 사생활과 개별성을 포기한 채 온라인에서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아주 짧은 순간조차 네트워크 연결이 끊기면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기술종교들은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한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21세기의 주력 상품은 몸, ,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격차는...(中略)...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리는 21세기의 이 신흥기술을 이해해야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술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고, 뒤쳐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케 하는 그런 압력인 것이다. 사피엔스 모두가 탑승하는 그런 열차가 아니라는 말이며, 설혹 올라타더라도 각 칸이 계급에 따라 차별화된 설국 열차의 그것 이란 말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이성을 도구화 시킨 사피엔스에게 이 열차의 출발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50여 년 전, 1967년 독일의 사상가인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도구적 이성비판에 이렇게 썼다. “모든 삶이 점점 더 합리화와 기획에 복속되는 경향...(中略)...이제 적응의 과정은 고의적인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전면화되었다.” 개인의 자기보존은 체제보존의 요구에 개인이 적응해야만 함을 전제한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속했다. “우리는 자연 지배를 위한 기계적 장치를 더 많이 발명하면 할수록, 살아남기 위해서 그 기계에 점점 더 많이 헌신해야만 한다.” 이제 이 문장은 추상적이고 예측적인 고상한 언어로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제로서 지금 우리 앞에 서있다.

 

4. 21세기에 전개될 상황들

 

21세기 기술,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안달하며 연일 외쳐대는 지금의 과학기술은 우리 인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호모사피엔스를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연 선택된 유기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며, “알고리즘의 계산은 어떤 물질로 만들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알고리즘이 유기적 실체든 비유기적 실체든 무슨 상관인가?”고 반문한다.

 

여기서 다시 과학기술에 대한 사피엔스의 허무맹랑한 믿음에 대한 비판의 말이 떠오른다. “과학의 객관적인 발전과 그것의 적용인 기술은, 과학이 단지 변질될 때만 파괴적이며, 적절하게 이해될 때는 반드시 건설적이라는 통상적인 생각을 정당화해주지 못한다.”라고 호르크하이머는 썼다. 사피엔스에게 신성을 가져다 줄 적절하기 이를 데 없는 바로 그 기술이 절멸을 또한 내재하고 있음을.

 

이렇게 종교화된 된 기술은 인간의 욕망과 경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세계를 예언한다. 이미 우리는 듣고 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지식과 지혜보다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더 신뢰하는 세계임을.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옳고 그름을 이것들에 맡기고 있다. 인간은 그저 만물인터넷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데이터일 뿐이며, 생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고작 정보의 움직임에 불과하기에?

 

! 이제 멋진 신세계를 향한 열차가 출발하려 하고 있다. 거부들과 과학기술자로 이루어진 소수의 기술종교 엘리트들은 자신들을 업그레이드하고 알고리즘의 세계를 리드 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만을 잃은 채 다운그레이드 되어 거대한 시스템의 인간 톱니로 전락하거나, 퇴장하여야만 하는 운명이 될 지도 모른다.

 

올더스 헉슬리로 돌아가보자. ‘인간의 내적 동요가 말살되고, 사회계급별로 차별화된 획일화된 인간들이 생산되는 신세계 말이다. 만일 초지능으로 무장한 이 기술종교라는 시스템이 생화학적 기제들에 불과한 사피엔스들을 세계에서 퇴장시키지 않는다 할지언정, 인간과 여타 동물들의 차이만큼 간극이 벌어진 바로 그 생물공학적인 돌파 불가능한 계급사회가 도래할 가능성만이 남지 않겠는가?

 

인간은 항상 어떤 문제이든지 자기 경험의 앞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결코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아마 대다수의 사피엔스들은 인본주의의 덧에 걸려 자기 개인의 이익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이런 거대한 담론의 세계는 정치 권력자, 자본이 넉넉한 재벌들, 기술권력을 장악한 과학기술자들에게 맡겨두면 그들이 사피엔스를 구원하는 방법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시장의 논리가 어찌 그렇던가? 합리주의에 빠삭하게 물든 이들이 이 도박에 나설 확률은 제로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의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먼저 업그레이드되어 호모데우스가 되어있을 테니.

 

5. 결어(마지막 열차)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 본문 P 378에서

 

이 선언적 문장에 공감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진보의 열차로 불리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을 구성하는 기술들의 탑승에 대한 의제가 오늘 우리들의 주요 논의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런데 한결같이 누가 운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차량이 몇 량으로 되어있는지도 모르고, 더구나 그것이 어디로 가든 관심 없다는 듯이 탑승 그 자체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마치 탑승하기만 하면 풍요롭고 안락한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낙원 어딘가에 도착하리라는.

 

유발 하라리는 바로 이 막차가 지금의 인간 종()호모 사피엔스가 있는 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운전자가 누가 될 것인지, 현 인류 모두를 탑승시킬만큼 충분한 차량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라 제안하는 것이다.

 

문자를 창안하고 이를 통한 거대조직화가 가능한 상호주관적 영역에 접근하여 지구의 지배자가 되게 하였던 사피엔스의 첫 번째 인지혁명은 되돌아 갈 길이 있었다. 이 책은 다시는 돌아 올 일이 없는 사피엔스의 두 번째 인지혁명, 마지막 열차에 대한 이야기다. ‘호모 데우스가 되려는 사피엔스의 길은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시장의 힘에 맡기고 그저 끌려 갈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것은 너무 위험하다. 이 힘들은 언제나 인류나 세계에 유익한 일을 하기보다는 시장에 유익한 일만을 해왔다. 이건 개인 각자의 문제이다. 열차는 출발 할 것이다. 인류의 존재론적 위기를 다층적 시각으로 통찰한 디 엔드(The End)의 저자 필 토레스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간의 육성은 오늘의 우리 세계에 중대한 필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본질을 파악하고 비판하며, 인류 모두를 위한 대안 찾기의 마지막 출발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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