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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 게다가 행복과 풍요가 넘치는 삶, 이거 어디서 많이 보았던 문장 같지 않은가? 인간의 삶을 구성하던 여타 요소들이 싹 걷어진 새로운 존재들이 생산되고 살아가는 세상,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제거된 세상을 이야기했던 문명비평가이자 소설가였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1932년 발표했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의 그것 말이다. 나는 소설을 읽고 어떤 소감을 남겼을까? ‘멋진 신세계는 다름 아닌 지옥을 향한 통과세계’, ‘그리곤 무능하고 비참해질 자유, 그 자유를 가진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 했다.
그런데, 80여 년 전, 기계 산업문명과 인본주의의 이성이 치닫는 기술지상주의가 가져올 이 인류에 대한 위협의 경고 메시지가 21세기 초 바로 지금,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행동을 위한 ‘마지막’ 생각의 기회로서 ‘유발 하라리’의 저작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사피엔스가 자연에, 신(神)에 굴복하면서 , 마침내 사피엔스 스스로가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자로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외치기까지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행복’과 ‘불멸’이라는 ‘신성(divinity)’을 획득한 새로운 종(種), 그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체 호모데우스(Homo Deus)로서의 문턱에 성큼 들어서려 하고 있다.
사피엔스가 여기에 도달하게끔 한 동력은 무엇일까? 오늘 사피엔스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인간 ‘개인의 가치와 자유가 최우선’시 되는 인본주의(Humanism)라는 인간중심의 사고이다. 따라서 그 동력의 실체인 이러한 인식을 해체하여 그 본질과 속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선행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 위대한 저술의 기본 얼개가 ‘인본주의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 즉 사피엔스가 꿈꾸는, 궁극의 지향들이 지니는 의미를 조사하는 것인 이유는 그러해서이다.
1. 상호주관적 실재
우리 사피엔스는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가? 국가가 있으며, 사피엔스들의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이 있고, 원활한 사물의 거래를 위해 화폐(돈)란 것도 있다. 또한 물질 및 서비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판매하는 기업이란 것도 있으며, 불안한 삶의 현실과 죽음이라는 부조리를 달래기 위해 신(神)이란 것에도 매달린다. 어쨌든 오늘 이런 것을 창안한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역사상 가장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국가, 법, 돈, 기업,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하면 그 의미와 가치가 증발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감정, 욕망, 의식의 흐름과 같은 주관적 실재도 아니요, 빵, 물, 책, 원자탄 같은 객관적 실재도 아니다. 개개인의 느낌보다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해서 그 함유가 승인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많은 사람이 공동의 이야기망(網)을 함께 짤 때 의미가 생겨나는 것”, 바로 ‘허구’이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이처럼 허구라는 가상의 질서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럼 이런 강한 허구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존재가 과학이라는 철저한 객관적 실체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허구라는 환상, 즉 상호주관적 신화를 버리고 객관적인 과학 지식의 선택으로 전환 하면 그저 만사 오케이가 되는 건가?
2. 포스트 인본주의 기술
이미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상상 속 이야기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왔다. 여기서 쉽게 물러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 스스로 잘 알듯이 자신의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환상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새로운 과학기술은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물론, 사피엔스가 신봉해왔던 인본주의의 근간인 ‘자유의지’까지 텅 빈 껍데기라고 말한다. 비의식적 알고리즘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과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를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통제하게 할 것”이며, 오히려 “컴퓨터와 생명공학 덕분에 허구와 실제의 차이가 모호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포스트 인본주의는 이렇게 과학기술을 끌어안는다.
이제 실제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섞이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듯하다. “개인이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세계는 더 아름답고 풍요롭고 의미로 충만할 것”이라 외치며, 이 무한한 개인들의 욕망추구를 위해 다시한번 생산혁명, 소위 4차 산업혁명의 동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술 들 - 나노기술, 유전공학, 인공지능, 만물(사물)인터넷 등 - 에 길을 열었다.
그리곤 이 기술들이 사피엔스 자신들의 인본주의를 완성시켜줄 바로 그것, 행복하고 영원한 삶의 담지(膽智)적 존재임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구원의 종교가 되었다.
새로운 기술들이 자신들의 몸과 마음과 뇌를 업그레이드해주리라는 기대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것들이 물질적 풍요와 불멸의 삶과 가득한 행복의 세계를 펼쳐주리라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으며, 연일 사피엔스의 미디어들은 이렇게 외친다. 올 1월1일자 중앙일간지의 헤드라인은 “기술진보, 일시적으론 몰라도 영원히 못 막아”라며, 삶의 질과 양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편의를 제공할 기술에 대한 강박적 기대감으로 신년을 열어젖혔다.
3. 종교가 된 새로운 기술의 의미
그러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만물인터넷, 나노기술, 생명공학기술은 오늘의 무수한 직업군을 쓸모없는 것으로 내몰고, 그만큼의 잉여인간을 이미 아주 조용히 점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또한 “생물학자들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결론을 내린 순간,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인간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에게로 이동했다.”
그런데 사피엔스의 ‘개별성’을 더욱 강화해주리라는 바로 그 기대인 이 새로운 기술은 오히려 “사생활과 개별성을 포기한 채 온라인에서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아주 짧은 순간조차 네트워크 연결이 끊기면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기술종교들은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한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의 주력 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격차는...(中略)...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리는 21세기의 이 신흥기술을 이해해야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술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고, 뒤쳐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케 하는 그런 압력인 것이다. 사피엔스 모두가 탑승하는 그런 열차가 아니라는 말이며, 설혹 올라타더라도 각 칸이 계급에 따라 차별화된 『설국 열차』의 그것 이란 말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이성을 도구화 시킨 사피엔스에게 이 열차의 출발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50여 년 전, 1967년 독일의 사상가인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도구적 이성비판』에 이렇게 썼다. “모든 삶이 점점 더 합리화와 기획에 복속되는 경향...(中略)...이제 적응의 과정은 고의적인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전면화되었다.” 개인의 자기보존은 체제보존의 요구에 개인이 적응해야만 함을 전제한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속했다. “우리는 자연 지배를 위한 기계적 장치를 더 많이 발명하면 할수록, 살아남기 위해서 그 기계에 점점 더 많이 헌신해야만 한다.” 이제 이 문장은 추상적이고 예측적인 고상한 언어로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제로서 지금 우리 앞에 서있다.
4. 21세기에 전개될 상황들
21세기 기술,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안달하며 연일 외쳐대는 지금의 과학기술은 우리 인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호모사피엔스를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연 선택된 유기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며, “알고리즘의 계산은 어떤 물질로 만들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알고리즘이 유기적 실체든 비유기적 실체든 무슨 상관인가?”고 반문한다.
여기서 다시 과학기술에 대한 사피엔스의 허무맹랑한 믿음에 대한 비판의 말이 떠오른다. “과학의 객관적인 발전과 그것의 적용인 기술은, 과학이 단지 변질될 때만 파괴적이며, 적절하게 이해될 때는 반드시 건설적이라는 통상적인 생각을 정당화해주지 못한다.”라고 호르크하이머는 썼다. 사피엔스에게 신성을 가져다 줄 적절하기 이를 데 없는 바로 그 기술이 절멸을 또한 내재하고 있음을.
이렇게 종교화된 된 기술은 인간의 욕망과 경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세계를 예언한다. 이미 우리는 듣고 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지식과 지혜보다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더 신뢰하는 세계임을.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옳고 그름을 이것들에 맡기고 있다. 인간은 그저 만물인터넷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데이터일 뿐이며, 생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고작 정보의 움직임에 불과하기에?
자! 이제 ‘멋진 신세계’를 향한 열차가 출발하려 하고 있다. 거부들과 과학기술자로 이루어진 소수의 기술종교 엘리트들은 자신들을 업그레이드하고 알고리즘의 세계를 리드 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만을 잃은 채 다운그레이드 되어 거대한 시스템의 인간 톱니로 전락하거나, 퇴장하여야만 하는 운명이 될 지도 모른다.
올더스 헉슬리로 돌아가보자. ‘인간의 내적 동요가 말살되고, 사회계급별로 차별화된 획일화된 인간’들이 생산되는 신세계 말이다. 만일 초지능으로 무장한 이 기술종교라는 시스템이 생화학적 기제들에 불과한 사피엔스들을 세계에서 퇴장시키지 않는다 할지언정, 인간과 여타 동물들의 차이만큼 간극이 벌어진 바로 그 생물공학적인 돌파 불가능한 계급사회가 도래할 가능성만이 남지 않겠는가?
인간은 항상 어떤 문제이든지 자기 경험의 앞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결코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아마 대다수의 사피엔스들은 인본주의의 덧에 걸려 자기 개인의 이익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이런 거대한 담론의 세계는 정치 권력자, 자본이 넉넉한 재벌들, 기술권력을 장악한 과학기술자들에게 맡겨두면 그들이 사피엔스를 구원하는 방법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시장의 논리가 어찌 그렇던가? 합리주의에 빠삭하게 물든 이들이 이 도박에 나설 확률은 제로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의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먼저 업그레이드되어 ‘호모데우스’가 되어있을 테니.
5. 결어(마지막 열차)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 본문 P 378中에서
이 선언적 문장에 공감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진보의 열차’로 불리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을 구성하는 기술들의 탑승에 대한 의제가 오늘 우리들의 주요 논의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런데 한결같이 누가 운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차량이 몇 량으로 되어있는지도 모르고, 더구나 그것이 어디로 가든 관심 없다는 듯이 탑승 그 자체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마치 탑승하기만 하면 풍요롭고 안락한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낙원 어딘가에 도착하리라는.
‘유발 하라리’는 바로 이 막차가 지금의 인간 종(種)인 ‘호모 사피엔스’가 있는 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운전자가 누가 될 것인지, 현 인류 모두를 탑승시킬만큼 충분한 차량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라 제안하는 것이다.
문자를 창안하고 이를 통한 거대조직화가 가능한 상호주관적 영역에 접근하여 지구의 지배자가 되게 하였던 사피엔스의 첫 번째 인지혁명은 되돌아 갈 길이 있었다. 이 책은 다시는 돌아 올 일이 없는 사피엔스의 두 번째 인지혁명, 마지막 열차에 대한 이야기다. ‘호모 데우스’가 되려는 사피엔스의 길은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시장의 힘’에 맡기고 그저 끌려 갈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것은 너무 위험하다. 이 힘들은 언제나 인류나 세계에 유익한 일을 하기보다는 시장에 유익한 일만을 해왔다. 이건 개인 각자의 문제이다. 열차는 출발 할 것이다. 인류의 존재론적 위기를 다층적 시각으로 통찰한 『디 엔드(The End)』의 저자 ‘필 토레스’는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간의 육성은 오늘의 우리 세계에 중대한 필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본질을 파악하고 비판하며, 인류 모두를 위한 대안 찾기의 마지막 출발 일지도 모르겠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