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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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을 마치 고유한 사적 영역으로만 치부하려는 것은 비겁하거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라는 구조물이 뿜어내고 있는 시대정신이나 사물에 대한 현상은 직간접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선택의 결정을 종용한다. 그래서 어떤 개인의 행위는 지극히 사적인 의지이기도 하지만 공적인, 사회적 욕망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무릇 무수히 회자되어 온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르주 뒤루아(애칭‘벨아미’)라는 청년의 혐오스러울 정도의 욕망의 집착을 사회전반의 도덕적 감각의 붕괴를 떠나서는 이해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 인식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욕망의 사적(私的) 이해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즉 삶이 추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신념이 백인백색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사랑이 될 수도, 재화가 될 수도, 명예나 지위, 아니면 삶의 이면인 죽음, 허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의 윤리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이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내면이자 속성일 것이고, 이에따라 개인들은 자신만의 이상적 욕망을 내면화 시킬 것이다. 21세기 오늘 사람들의 최고 가치이자 신앙이 된 돈(Money)에 대한 추구가 바로 이 시대의 윤리 의식을 지배하는 것처럼.

 

제대 군인인 가난한 시골 청년‘조르주 뒤루아’에게 물질과 환락이 넘쳐나는 부와 권력의 중심지인 파리는 욕망 실현의 무대이다. 갈증을 물려 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위해 저녁시간까지 주린 배를 참아야 하는 빈한한 사정은 도심을 방황하게 한다. 그러나 활짝 핀 어깨와 하사관다운 늠름한 청년의 가면을 쓰고서. 세상은 외관을 중시하니까. 기회는 정말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군대의 옛 동료를 만나고 그의 호의에 의해 신문사의 보조 기자 자리를 얻게 된다. 정치부장인 친구의 만찬초대는 상류사회의 대면이 되고, 삶의 지리멸렬함에 몸부림치는 사교계의 귀부인들은 빼어난 미모의 청년에게 은밀한 호감과 유혹의 날개짓을 보낸다.

 

귀족적 고아한 자태와 모호한 관능적 향기를 발산하는 친구 포레스티에의 아내 마들렌, 고매한 귀족 감찰관의 아내인 클로틸드 드 마렐 부인, 신문사의 왈테르 사장 내외, 그리고 신문사의 투자자이자 장관직을 노리는 야심가 라로슈 마티외 등 사교계 상류인사들의 만찬은 은밀하고 음흉한 욕망들의 교환으로 끈적인다. 이것은 청년 뒤루아에게 욕망의 사다리를 올라설 수 있는 기회의 무대가 된다.

청년은 삶의 지루함과 권태에 지쳐 새로운 자극을 위해 눈을 반짝이는 상류사회 여인들의 내밀한 욕구를 이용한다.

 

먼 외지를 떠도는 감찰관의 아내인 클로틸트(드 마렐 부인)는 뒤루아와의 정욕에 빠져들어가고, 남의 이목을 피해 둘 만의 밀회장소를 갖기에 이른다. 가난한 정부(情夫)인 뒤루아의 주머니에는 용돈이 주어지고, 정치와 경제적 야망을 위해 결탁된 신문사의 음험한 욕망에 적응하며 기회주의적 능력을 높이 산 사장은 그를 사회부장에 발탁한다. 폐질환을 앓던 정치부장인 친구 포레스티에는 요양을 위해 휴직하지만 이내 죽음에 이르고 만다. 벨아미는 출세를 위한 내조자로서 더할나위 없는 친구의 부인인 마들렌에 청혼하고, 역시 자유분방한 야심가인 여자는 이를 수락하고 결혼에 이른다.

 

여기서 21세기 여성들의 결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의외의 발언을 접하게 된다. 사적 자유와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하는 마들렌의 혼전 서약조건이다. 상호 존중과 동등함에 대한 선언이다. 단지 가정을 지키며 남편을 보좌하는 전통적 아내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대의 합류적 사랑이라는 친밀감과 호혜성에 의거한 결혼관의 비극이 발견되는 어떤 확신이자 재미가 아닐까? 한편, 도약을 위한 수단으로서 뒤루아에게는 굳이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없다. 여자는 늦게 귀가하여 남자에게 날것의 정치적 정보를 들려주고 기사화하도록 종용한다. 이것은 실로 중층의 의미를 지닌다.

 

여자가 가져오는 발표되지 않은 정부의 정책, 마들렌은 뒤루아를 이용한 일종의 언론 몰이를 하는 것이고, 정보의 발원지는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는 부패한 상류사회의 이해관계자들일 것이다. 그것은 여자의 부정(不貞)을 암시한다. 정책을 조작하고 거짓 정보를 흘려 민중의 희생을 올라타고 부와 권력의 독점적 획득을 위한 음모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뒤루아의 자각은 경찰을 동행한 치밀한 준비에 의해 아내 마들렌과 외무장관 라로슈 마티외의 간통현장을 급습하게 한다. 사회적 동정의 시선을 업고 정치무대에 강력한 인상을 제공하는 신문기자다운 야심적 실천인 것이며, 부와 권력을 위한 정치와 언론의 더러운 유착의 세계를 역이용하는 교활함을 터득한 것이다.

 

이제 벨아미(뒤루아)의 뒤틀린 욕망은 거침없이 질주하고, 그것은 언론을 이용해 식민지 침공정책의 허위정보를 흘림으로서 국공채가격의 조작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재한 신문사 사장인 왈테르가를 향한다. 신문사 사장의 정숙한 부인을 유혹하여 정욕으로 파멸시켜나가고 자신의 지위와 명예, 재산을 축적해가는 수단으로서 그들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부패한 당대 상류사회에 대한 처절한 복수일지도 모른다. 왈테르의 여식 쉬잔과의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정부였던 '드 마렐'부인 에 대한 사랑의 재회를 기대하는 상상은 이것의 암시이지 않겠는가?

 

소설의 가지는 이처럼 정욕에 허우적대는 여인들의 고통스러운 사랑, 부정함이 사회의 저변을 이룬 부르지와 계급의 파렴치한 부의 축적 방식, 식민지 침탈을 통한 국부의 확보와 같은 비열한 정신이 인간정신을 가득채운 시대의 추오라는 세 개의 방향으로 뻗어있다. 그러나 이 가지들은 하나의 뿌리에 연원하는 것 아니던가?

결국 이러한 비열함을 눈뜨게 하는 것 또한 사회 전반을 침식하고 있는 불륜, 부정, 위선, 기만이 토대이다. 여인들의 성적 부정 또한 이러한 사회적 토대에서 자라난 것이며 오직 자신들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조작하는 허구로서의 기만적인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의 밀애는 완전히 동질적인 다른 형상에 불과할 것이다. 사랑, 신뢰, 정의가 붕괴된 시대의 적나라한 현실을 감각적 문장에 지펴낸 걸작 인간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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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그 격렬하고 환상적인 세계, 그리고 심리적 방향 상실과 감정을 마비시키는 너무도 아픈 실연의 시간,  사랑의 고통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며 진정 `사랑 하는` 것으로의 이행,  신뢰와 헌신, 긴 노력, 그리고 기쁨에 다가서는 상처를 허락하는 것, 사랑이란 보답없는 것에 대한 사랑임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장을 통해 독자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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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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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을 마모시킨다.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소설은 서른아홉살 신부, 정요한의 젊은 수련 수사시절, 가히 종교적 열의와 경합했던 아모르 파시옹(Amour Passion), 그 강렬했던 매혹의 기억으로부터 우리들의 삶에서 스러지지 않고 멈춘듯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 그 본질로서의 '사랑'의 편린들을 발견케 한다.

그것은 작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타자가 외로워하지 않도록 그냥 같은 편이 되어주는 유대로서의 사랑이기도 하고, 이념의 폭력으로 죽음과 고문의 땅이었던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인간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증거했던 사랑, 포탄과 수많은 기뢰가 놓인 흥남부두에서 피난민을 수송했던 선장의 박애에 이른다.

 

인간의 모든 것을 변질시키고 소멸시키는 세월의 풍화 속에서도 '사랑'의 기억들만은 시간이 멈춘듯 생생하게 영원의 장면들을 펼쳐놓는다. 신부 정요한의 기억은 10년만에 들려온 옛 연인, '소희'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학위논문을 위해 수도원을 방문한 여자, 수도원 아빠스 님의 수행비서인 수련수사 요한은 그녀의 논문을 위한 수사들의 인터뷰를 돕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여인에 대한 사랑은 젊은 수련 수사에게 닥친 최초의 번뇌이다.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신부가 될 것인가는 지나온 시련과 고통의 시간, 성직자로서의 미래라는 삶을 송두리째 포기할 것인가하는 자기 희생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삶의 과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단짝 동료 수사 미카엘과 안젤라의 불의의 죽음이란 슬픔이 다가서고, 세상에서 버려진 어린 임산부의 구원의 호소를 대면한다. 연인에 대한 감정적 연루가 너무도 강렬히 스며들어 세상 어떠한 것들에서도 관심사를 포착할 수 없게된 열정적 사랑에 포획된 청년 수사에게 선택의 순간은 지연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주려는 하늘의 증거처럼. 여기에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에게 아버지 같은 독일인 노수사의 애틋한 한 마디의 단어가 사랑의 의미를 추가한다. "우리 안젤로가....우리 안젤로 수사가..." , '우리'라는 이 따뜻한 유대, 연대의 언어가 그를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스물아홉살  젊은 수련 수사의 온 몸과 정신을 사로잡은 여인의 손길과 입맞춤의 감미로움은 연인을 위한 희생과 미래의 부푼 설계로 가득차오르기만 한다. 그러나 연인은 자신을 오랜시간 기다려준 약혼자를 위해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실연의 쇼크, 심리적 방향 상실과 감정의 마비상태로 방황하던 요한은 자신의 교육과 성장을, 그리고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할머니로부터 헤어지게된 할아버지와의 사랑의 사연을 듣게된다. 기나긴 피난민의 행렬 속에서 가까스로 승선하게 된 배와 선장의 이야기, 어린 쌍둥이와 아이들의 어미를 태우기 위해 자신의 승선을 포기해야 했던 할아버지의 고귀하고 아픈 희생의 이별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는 극동의 조그만 나라에서 죽음을 앞둔 노수사로부터 인간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유일한 것,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듣게된다. 망령된 이데올리기의  잔혹한 맹목적 증오 앞에서 비로소 "사랑안에서 패배" 할 수 있는 것, "사랑만 있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거지"라고 "사랑은 가실 줄 모르는 것"이라고 두 팔벌려 죽음을 맞이했던 요한이라는 동명의 수사에 대한 기억이다. 즉,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가 어떻게 하든 내가 사랑하는 거라는 말, "사랑이란 보답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또 하나의 진실을 얻게되는 것이다.

 

이 보답없는 사랑이란 문장은 앨리스 먼로의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를 위해서, 오직 그녀의 자유와 행복에 기여하는 마음만으로 자기 내려놓기를 하는 남편의 사랑이 떠오른다. 젊은 수사 요한은 그렇게 사랑의 본질을,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의 진실을 가슴에 안는다. 타자와 자아를 병합려는 욕망, 존재론적 안정감을 향한 이 궁극의 욕망은 결국 내려놓기, 돌아올 것을 기대치 않는 무조건의 사랑이 그 완성이지 않을까? 중년의 신부가 된 한 인간의 기억을 통해 삶의 유일한 본질로서의 사랑의 숭고한 가치들을 발견케하는 이 소설은 감전 될 듯한 격렬하고 환상적인 사랑의 선율 속에 매혹되어 있다보면 어느새 고귀한 사랑의 진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마법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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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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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감정’이란‘의식’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이다. 의식은 우리 모두 자기 의지에 따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 만일 여기에 자연발생적인 즉, 무의식적인‘정서(emotion)'라는 관념까지 감정(feeling)에 포함시키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결코 의도에 따라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책은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가 그의 저서 『에티카』3부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에서 정의한 48가지 감정들에 기초하여 당신은“감정의 주인으로 살고 있느냐”고 자극하면서 감정의 지배자, 의도적 조절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강렬한 선언적이고 계도적인 주장은 한 번 믿어보자는 확신을 갖게 한다. 내 감정의 주체자로서 혹 손상되거나 미흡하고 결여된 어떤 유형의 감정을 스스로 회복하고 채워 넣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내 삶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심정에서 말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인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비루함’이라는 감정을 위해 인용된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무무」의 주인공인 농노‘게라심’을 통한 삶의 주체자로서 자기존재의 정당성, 즉 자유와 자긍의 세계로의 전환을 접하게 된다. 걸출한 문학 작품 속에서 숨 쉬는 인간의 심리와 행위 유형으로부터 자기 치유와 구원의 가능성을 연결하는 유려한 사유의 문장이 이렇게 짝을 맞춰 감정의 구체적 기능과 작동을 드러내고 알려 주는 것이다.

 

타율적 노예라는 슬픔의 감정은 비루함으로 인간을 시달리게 하지만 이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은 기쁨이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인 ‘기쁨’을 수반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서구 문명에 경도된 남편을 위해 전족을 벗어던지는 여인 궤이란의 고통스러운 변신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얘기로서‘펄 벅’의 소설『동풍 서풍』으로 전달해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한 성찰 또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 동의하게 된다. 이렇게 48가지의 감정들이 토니 모리슨, 솔 벨로, 존 파울즈, 이언 매큐언, 조르지 아마두에 이르는 48명 대문호의 문학작품들과 어울려 각각의 감정들의 속성과 더욱 충만한 삶의 주체자로서 관철시킬 수 있는 행동기준을 안내한다.

 

그런데 몇 가지 주목되는 감정이 있다. 내가 인식하고 있던 감정의 개념이 불명확하고 그 본질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의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에 등장하는 장애인 여성 에디트에 보인 호프밀러 소위의 ‘연민’이라는 감정의 본질이 그 첫째이다. 연민이란“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란 것이다. 연민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슬픔을 회피하고 기쁨을 쫓는 것이 본연의 욕망이고 인간본질 그 자체라는 스피노자의 공준에서 본다면 유익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정체는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강자로서의 자부심, 약자가 약자로서 계속 되는 순간까지만 유지되는 기만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의 왜곡, 지혜롭지 못한 감정일 수 있다는 새로운 이해라 할 수 있다. 조심스러운 감정이다. 누군가에게‘연민을 느낀다’는 짐짓 공감어린 사랑이라 생각하며 뱉어내는 표현을 하던 자신을 반성케 하는 대목이다.

 

둘째는‘겸손’의 감정이다.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한계에 부딪친다. 사회라는 조직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항상 손위 사람을 피할 길이 없으며, 그들 앞에서 겸손의 미덕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물론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의 무능을 고찰하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 사장 무레의 돈이 여점원 드니즈로부터의 사랑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무력했다는 에밀 졸라의 소설『여인들의 행복백화점』의 연결은 물신주의의 피폐함에 무리하게 조응시키려 했던 어색함 마저 느껴진다. 물론 유사한 감정으로 ‘공손함’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을 공동체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며,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팽배, 공동체 의식의 실종, 이것은 사적 자유와 공동체의 갈등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자기 욕망의 부정으로만 내몰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감정의 획일적인 이해와 치우침이 아닌 균형이 지금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확신’이라는 감정이다. 무언가 의심스러운 관념이 있었지만 그것을 제거할 수 있었기에 드는 기쁨의 감정이다. 즉 의심을 품었던 상처가 내재된 감정이라는 의미이다. 표면적인 감정의 전제가 된 감정인 의심, 그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주변의 일희일비에 그리 내둘릴 일도 아니다. 쿨(cool)한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말이 이것일 게다.

결국 이 모든 감정들의 본질과 작동방식을 욕망의 윤리학자인 스피노자를 되살려내어 문학작품들을 통해 감정의 주체자로서,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랑과 기쁨, 그리고 슬픔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유쾌하게 빚어내고 있다.

 

그러나 모두에서 말했듯이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이 아닌 자연적인, 무의식에 기초한 정서나 직관까지 감정이란 정의에 포함하고 있어 인간의 본질을 의식의 작용으로만 이해하려는 합리론적이고 이성적인, 특히 기계적인 접근처럼만 보여 거부감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더구나 이러한 인식의 토대하에 ‘나’라는 개인의 주체성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갈수록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주의로 인한 분열로 인한 갈등의 심화를 외면한 나르시시즘의 강화로만 보이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저자의 논지가 주류적 담론, 지배적 권력 등의 폭력에서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감각을 일깨우려는 의도임을 읽을 수 있지만 시대정신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과거의 관념적 분류와 정의의 답습으로 야기되는 오류와 편협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비록 ‘직관적 체험’을 중시하고 전체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관찰했다고는 하지만 직관을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무의식’과는 연결짓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의식과는 무관한 자연발생적인 '정서(emotion)'를 다분히 의식적인 차원의 '감정(feeling)'과 혼동하여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직관은 일종의 ‘감’이고, 의도적인 행위의 산물이 아니다. 정서 또한 감정과 같이 무언가를 좋고 나쁘고를 따지거나 선악과 같은 가치판단을 하는 관념이 아닌 내외환경에 의존하여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다.

 

감정과 정서를 이처럼 장황하게 서술하며 구분하고자하는 이유는 ‘나’라는 주체의 의지에 의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의 질문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의도한데로 통제한다는 사람은 한 번도 본적도 만난적도 없거니와 사실 어떻게 그것에 닿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의식에 의존하는 감정과는 달리 무의식에 의존하는 정서는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 구분을 전제하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하는 자칫 오만이자 궤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개된 48가지의 감정을 모두 자기 통제하에 두고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고 낭패해 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저자의 충고(advice)처럼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감정만큼은 스스로 성찰해 볼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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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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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충일함에 대한 욕망, 그래서 꽈악 움켜쥐었던 주먹을 비로소 펼치고, 채움이 아니라 빈 공간을 새겨두게 되는 빈손과 여유의 이해, 삶에 위로의 힘이 되어 주는 시적 정취 물씬한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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