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은 모든 것을 마모시킨다.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소설은 서른아홉살 신부, 정요한의 젊은 수련 수사시절, 가히 종교적 열의와 경합했던 아모르 파시옹(Amour Passion), 그 강렬했던 매혹의 기억으로부터 우리들의 삶에서 스러지지 않고 멈춘듯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 그 본질로서의 '사랑'의 편린들을 발견케 한다.

그것은 작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타자가 외로워하지 않도록 그냥 같은 편이 되어주는 유대로서의 사랑이기도 하고, 이념의 폭력으로 죽음과 고문의 땅이었던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인간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증거했던 사랑, 포탄과 수많은 기뢰가 놓인 흥남부두에서 피난민을 수송했던 선장의 박애에 이른다.

 

인간의 모든 것을 변질시키고 소멸시키는 세월의 풍화 속에서도 '사랑'의 기억들만은 시간이 멈춘듯 생생하게 영원의 장면들을 펼쳐놓는다. 신부 정요한의 기억은 10년만에 들려온 옛 연인, '소희'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학위논문을 위해 수도원을 방문한 여자, 수도원 아빠스 님의 수행비서인 수련수사 요한은 그녀의 논문을 위한 수사들의 인터뷰를 돕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여인에 대한 사랑은 젊은 수련 수사에게 닥친 최초의 번뇌이다.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신부가 될 것인가는 지나온 시련과 고통의 시간, 성직자로서의 미래라는 삶을 송두리째 포기할 것인가하는 자기 희생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삶의 과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단짝 동료 수사 미카엘과 안젤라의 불의의 죽음이란 슬픔이 다가서고, 세상에서 버려진 어린 임산부의 구원의 호소를 대면한다. 연인에 대한 감정적 연루가 너무도 강렬히 스며들어 세상 어떠한 것들에서도 관심사를 포착할 수 없게된 열정적 사랑에 포획된 청년 수사에게 선택의 순간은 지연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주려는 하늘의 증거처럼. 여기에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에게 아버지 같은 독일인 노수사의 애틋한 한 마디의 단어가 사랑의 의미를 추가한다. "우리 안젤로가....우리 안젤로 수사가..." , '우리'라는 이 따뜻한 유대, 연대의 언어가 그를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스물아홉살  젊은 수련 수사의 온 몸과 정신을 사로잡은 여인의 손길과 입맞춤의 감미로움은 연인을 위한 희생과 미래의 부푼 설계로 가득차오르기만 한다. 그러나 연인은 자신을 오랜시간 기다려준 약혼자를 위해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실연의 쇼크, 심리적 방향 상실과 감정의 마비상태로 방황하던 요한은 자신의 교육과 성장을, 그리고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할머니로부터 헤어지게된 할아버지와의 사랑의 사연을 듣게된다. 기나긴 피난민의 행렬 속에서 가까스로 승선하게 된 배와 선장의 이야기, 어린 쌍둥이와 아이들의 어미를 태우기 위해 자신의 승선을 포기해야 했던 할아버지의 고귀하고 아픈 희생의 이별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는 극동의 조그만 나라에서 죽음을 앞둔 노수사로부터 인간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유일한 것,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듣게된다. 망령된 이데올리기의  잔혹한 맹목적 증오 앞에서 비로소 "사랑안에서 패배" 할 수 있는 것, "사랑만 있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거지"라고 "사랑은 가실 줄 모르는 것"이라고 두 팔벌려 죽음을 맞이했던 요한이라는 동명의 수사에 대한 기억이다. 즉,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가 어떻게 하든 내가 사랑하는 거라는 말, "사랑이란 보답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또 하나의 진실을 얻게되는 것이다.

 

이 보답없는 사랑이란 문장은 앨리스 먼로의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를 위해서, 오직 그녀의 자유와 행복에 기여하는 마음만으로 자기 내려놓기를 하는 남편의 사랑이 떠오른다. 젊은 수사 요한은 그렇게 사랑의 본질을,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의 진실을 가슴에 안는다. 타자와 자아를 병합려는 욕망, 존재론적 안정감을 향한 이 궁극의 욕망은 결국 내려놓기, 돌아올 것을 기대치 않는 무조건의 사랑이 그 완성이지 않을까? 중년의 신부가 된 한 인간의 기억을 통해 삶의 유일한 본질로서의 사랑의 숭고한 가치들을 발견케하는 이 소설은 감전 될 듯한 격렬하고 환상적인 사랑의 선율 속에 매혹되어 있다보면 어느새 고귀한 사랑의 진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마법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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