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의 온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4
정다연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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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해 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단 한 줄이라도 그 일에 요긴하게 쓰인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 10, 시작하며 다정의 온도에서

 

정다연 시인의 그림 9쪽책속에는 시인이 그린 10점의 작은 그림이 수록되어있다】 


시인은 위의 인용 문장처럼 스스로에게 다정해 질 수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쓰고 있다. ‘다정이란 단어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의미란 정()의 오고 감에 있어 따뜻하고 애틋한 감정이 전달되는, 해서 어떤 배려가 내재된 평온과 안전의 느낌이다. 물론 이 단어에 대해 느끼는 정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유별나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감정의 언어가 사용될 때는 대개 타자가 내게 주는 정서이지만, 시인은 스스로에게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 스스로에게라는 다정의 어떤 방향성을 지시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동묘시장에서 구입한 원형의 갈색 얼룩을 지닌 가을 외투나,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서 마모된 모서리의 액자를 지닌 그림 한 점을 구입하며 사람과 사물, 시간이 함께 부딪히며 만들어 낸 오묘함을 말하는 첫 번째 에세이 빈티지에서부터, 유년의 장소로 거슬러가 잃어버리기 쉬운 무용한 감각들의 기억들에 작은 불씨를 지펴 사물 자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을 그린 계수나무, 얼굴 생각이나 분갈이등 사물과 식물 등 비인간과 인간의 얽힘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에세이인 같이 살자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나와 너의 어울림이라는 조응(照應), 즉 서로 비춤의 글들과 같이 다정함이란 주의 깊게 듣고 세밀하게 바라보는 그들과의 교감이다. 다정함의 방향성이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 서로 혼효적으로, 얽혀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인은 사람, 사물, 식물, 동물을 막론하여 그들의 시간과 삶의 역사를 세심하게,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충만한 그들 너머의 세계를 읽고 상상해 낸다. 한동안 살았던 곳이 중림동 어느 곳이었던 모양이다. 제법 큰 나무 장이 있어 함께 생활하던 밤이가 좋아하던 공간이기도 했으며, 그녀가 남몰래 울었던 장소이기도 했던 낡은 나무 장에 얽힌 얘기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나무 장과도 이별하게 되었는데, 그 장을 한 번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을 그린다. 시인의 일부, 그 손과 숨결, 그리고 사연을 지켜보았던 사물에 대한 뗄 수 없는 연결을 보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사물을 매개로 하여 가닿는 사람과 장면, 시간과 장소의 연결은 얼굴 생각이라는 에세이에서 책상 위 글이 써지기를 기다리는 백지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백지 위의 써지는 글을 통해 누군가라는 사람, 사연, 장소에 도달한다. 나는 이러한 장면의 글들에 살짝 매료되기 시작했는데, 시인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듣고 보고, 그 무엇의 너머를 상상하고자 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지녔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에세이 분갈이는 작은 화분을 뒤늦게 분갈이 하게 되면서 그 작은 터전에서 부단히 뻗어 갈 곳을 찾았을 식물 뿌리의 어둠속 막막함을 생각하며, 마침내 늦은 분갈이가 식물이 서서히 쇠약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시인의 삶의 현실과 존재자의 가까운 이야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유작용, 바로 그것일 게다. 나와 타자,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의 조건과 섬세하게 조응하며 미래의 가능성에 유연하게 열려 있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세계, 그녀가 만나는 말의 근원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과거의 인식과 현재의 조건들이 조응하는 그 열려진 세계는 사용하지 않는 메일계정 속 옛 편지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 버려야 했던 엄마의 무수한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보석함으로, 시간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질 기억들의 불씨를 되살려 놓는다. 시인에게 이들 물성은 그저 생명 없는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들과 시간을 품고 무언의 대화를 건네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은 내 글은 공룡에 등장하는 설치 미술가 김범의 실제로 나무 위에 돌을 얹어 둔자신을 새라고 배운 돌이라는 작품처럼 돌은 단지 인간에게 도구로서의 돌이 아님을 생각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아마 시인의 삶의 시선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배제한 좁은 인식의 세계를 넘어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몸의 용도는 시인의 무릎을 계단으로 또는 베개로 생각하는 반려견 밤이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얽힘이 주는 세상의 새로운 만남을 생각게 한다. 사랑은 한 존재의 몸을 창의적 뒤바꾸고 기꺼이 사용하게 만들며, 그로 말미암아 세상과 새롭게 만나게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 바로 그것일 게다. 시인이 지금 함께 하는 존재는 비인간 밤이, 그리고 인간 윤주로 여겨진다. 밤이는 시인이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헌정한 존재다. 인간을 사랑해 준 (...) 밤이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그 존재와 함께하는 시인의 일상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시인의 가장 다정한 사람 동료 윤주, 잠깐 함께 살았던 엄마와의 생활 속 갈등과 사랑의 이야기들이 먼 추억처럼 내게도 이입되어 오기도 했다.

 

그래 시인의 글들은 조금 더 껴안아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가장 소홀히 하는 우리들 자신, 가장 안아주기 어려운 자신의 모습부터 껴안아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타자들과 우리는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일 게다. 같이 살자는 마음에서 시인이 하는 말이 이를 정리하는 맞춤의 말이기도 할 것 같다. 한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돌봄이 필요한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타인에게 어떤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절감하면서 말이다.” 다정은 바로 이처럼 타자의 많은 손길과 보이지 않는 숨결이 건네는 사랑의 밀어의 다른 이름인 것만 같다. 따뜻함과 애틋함이 푸근한 정감의 언어들로 채워진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이며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전언이다. 이제 호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는 시인의 조언을 기억하며, 책속 글들을 통한 시인과의 만남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 놓는다.

 

이 시를 읽으면 콩 한 알에서도 자유를 읽어내는 눈을 가질 수 있어요. (...) 마지막 문장까지 따라 읽으면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지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어요.”  - 시 창작 교실, 84쪽에서


 

이 감상글은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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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퀑탱 메이야수 지음, 엄태연 옮김 / 이학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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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술은 소설 속에 묘사되는 상상 또는 가능성의 내용이 과학의 범위 내에 머물러있는지, 즉 과학적 인식에 종속되는 공리를 암묵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소위 과학소설(SF:Science Fiction)’과 메이야수 자신이 명명하고자 하는 과학 밖 소설(FHS : Fiction Hors-Science)’인 과학법칙의 필연성이 수시로 붕괴되는 세계를 상상한 소설을 분류 사고하는 것이 어떤 철학적 실익이 있는 것인지를 논의하는 짧지만 우리네 삶의 전반적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유이다. 왜 구태여 SF가 아닌 FHS를 상상해야 하는가, 대체 이러한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인과의 필연성이 이성의 한계에 봉착하는, 즉 과학의 경험이 항상성이라 주장하는 법칙이 붕괴했을 때에도 삶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지금의 인류가 믿어 의심치 않는 자연과학의 법칙이라는 필연성을 쫓아 맹신적으로 그 대상인 자연 일체에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에 대한 회의이며, 그로부터 이를 탈주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물론 메이야수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 저술의 내용은 이를 입증하는 여정이다. 이 물음은 데이비드 흄의 문제로 알려진 것인데, 칸트의 초월적 연역에 의해 해결된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흄은 인간 오성에 대한 탐구에서 당구 시합에 대한 상상의 서술을 통해 인과 필연성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1. 데이비드 흄의 문제 제기 - 인과(因果) 필연성에 대한 회의(懷疑)

 

그 내용은 경험도 논리도 물리법칙들이 어떤 순간에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이를(확신) 보장하는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법칙들의 항구성에 대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당연히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회의에 기초한 것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옮긴다면 세계가 자연과학의 대상들로 건설될 수 없는 것이 되려면, 이 세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 문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응답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앞서 실험, 즉 경험이란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학은 바로 이 경험에 의존하여 어떤 항구적 필연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후험적인 것이다. 이 말은 경험이란 과거에 대한 것이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때문에 자연이 오늘처럼 이미 파악된 필연성이란 것이 내일도 따르리라는 것을 경험에 정초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과학을 생각해 보자. 과학은 수많은 경험(실험)에 의해 확인된 어떤 필연성에 기초해 미래도 동일한 경험이 반복되리라 확신하는 가설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주관적 확신이 내일도 임의적 움직임이 없으리라 단정하게 하는 것일까? 흄은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그러한 판단에 이성적인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과거의 경험적 항구성에 대한 습관만이 우리에게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뿐이다.”라고. 결국 이 회의론자는 미래의 필연성을 증명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들이 지니는 주관적 확신의 심리적 원천을 폭로하는 데 그쳤다. 이 저술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데, 흄이 해결하지 못했던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이 도전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두 인물, 칸트와 포퍼의 해결책을 검토하는 것이다.

 

2. 흄의 문제에 대한 포퍼와 칸트의 응답, 그리고 비판

 

2-1. 포퍼 인식론적 응답과 그 비판

 

사실 칼 포퍼의 해결책은 이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면서 마치 자신이 최초로 해결했다고 오인한 것임을 메이야수는 간략히 지적한다. 포퍼의 해결은 존재론적인 물음을 인식론적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본질은 건드리지도 못한 것인데, 아마 그는 이 명료한 차이를 애초에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퍼는 정말 뻔한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떤 법칙이 과학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 권리상 경험에 의하여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가설이 나오면 기존 가설을 거부하고, 경합 이론들에 엄격한 시험을 가함으로써 경험적 검증을 증가시켜 법칙의 확정적 진리를 수립할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법칙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될 수 있고, 더 경쟁력 있는 새로운 추론에 의해 추월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확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포퍼의 해결책 원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사건이 아무리 이상해보여도 모든 사건은 과학의 현재 상태, 혹은 미래 상태와 권리상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흄은 법칙 자체의 안정성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을 하고 있는데. 포퍼는 고작 과학적 지식의 본성, 다시 말해 법칙의 안정성이라는 인식론에 매달려 하나마나한 얘기를 거창하게 주장하며,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라면 동일한 경험이 일어날 것임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태양이 중력에서 벗어나 태양계 밖으로 산책하러 가는 것을 목격할 수 없다는 아주 진부한 얘기를 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흄이 제기한 문제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현상들이 완전히 다르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다면 포퍼가 말하는 이론의 검증이라는 관념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과학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미래 세계에 대한 가설이라는 흄의 물음을 포퍼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포퍼는 이로써 기각!

 

여기서 메이야수는 칼 포퍼의 과학적 시각을 정확히 반영한 과학소설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 ()중력 당구공이다. 소설은 프리스와 블룸이라는 두 경쟁관계 과학자의 물밑 대결이라는 배경 하에 모든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대상은 무중력 상태에 있는 대상과 같이 평온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질량 없는 대상의 속도(즉 광속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제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이것이 포퍼적 소설, FHS가 아닌 전형적 SF라는 것인데,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과학적 가설이 옛 가설을 몰아냄으로써 또 다른 필연성을 확보하면 그만이라는 얘기이다. 임의의 것이 임의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물음인 흄의 문제가 아니라 법칙들이 일관적으로 붕괴되지 않는 세계를 그려낼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체제 또는 질서 순응성에 기초한 자연과학적 사고의 연속일 뿐이다. 포퍼의 정말 하찮은 응답의 문제점을 지적하다보니 본래의 취지와 잠시 멀어졌는데, 이 저술의 논의인 FHS의 의미를 환기해야겠다.

 


2-2.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응답과 그 비판

 

FHS란 어떤 유형의 질서도 구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유형의 질서도 구축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는 정돈되지 않은 순수 잡다이기만 한 것일까? 칸트는 그렇다고 했다. 순수이성비판, ‘범주들의 객관적 연역에서 흄의 문제에 응답하고 있는데, 만일 법칙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도 의식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일관성도 잇따름도 없는 순수한 잡다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흄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데, 상상에 제시하는 당구공이 물리법칙의 순수한 불안정성에 따라 공상적 궤적들을 취할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배제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장면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칸트는 법칙들의 우연성이라는 가설을 부당한 것으로 일축하는 것인데, 자연법칙들이 당구공 사례에서 약화되기에 법칙들이 일반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그 세계 자체가 그와 함께 세계에 대한 모든 주관적 표상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령 우리가 여전히 당구공들을 지각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아무 방식으로나 움직이는 대상들, 즉 과학적 법칙들이 접근할 수 없는 대상들이기에 과학 없는 의식은 이성 작용의 붕괴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부재하다면, 과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이성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칸트의 흄에 대한 응답은 자연법칙이 유효하지 못한 세계는 단조로운 무질서로 환원된 세계일뿐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해결책은 옳은 것일까? 결점이 없는 완전한 응답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FHS의 논의는 더 이상 끌어갈 이유가 없어진다. 과거와의 관계를 결여한 카오스의 세계는 영속적으로 망각하는 일시적 직관의 세계로 환원되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어떤 필연적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속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주장이 옳은지 실험 사고를 해보면 그것이 정당한지 판단이 설 것이다.

 

그 전에 칸트의 주장에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중대한 결점을 지적해야 한다.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는 그것이 정돈되어 있는 대신 카오스적이어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필연적 법칙이 없는 세계는 무조건 근본적 카오스 세계와 동일시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아마 그러한 법칙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확률론적 법칙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약점은 FHS에 대한 상상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칸트의 초월적 연역에 대한 비판은 메이야수의 지금까지의 대표저술인 유한성 이후에서 엄격하게 비판되고 있다. 그것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칸트의 증명은 자연의 필연성과 자연의 안정성을 동일시하고, 필연성의 부재를 곧바로 안정성의 부재로 확장하는 무의식적 추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고, 칸트의 믿음이란 확률법칙의 필연적 존속에 토대를 둔, 증명해야 할 바를 미리 전제하는 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메이야수는 우발적 사건이 도래할지라도 안정적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상상인데, 자연법칙이라는 인과적 필연성의 과학이 중심축을 이루는 이 세계를 당연시하는 오늘의 인류에게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3. 과학 밖 세계의 상상 가능성에 대해서

 

이제 메이야수는 포퍼와 칸트를 비판한 이후에 그들의 주장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과학 밖 세계를 꾸며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의 세계를 개념화해 보고 있다. 유형은 너무 미미하게 불규칙적이기에 과학과 의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불규칙 세계이다. 이 세계는 여전히 과학의 세계를 수행하기에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원인 없는 사건들이 간헐적으로 출현하지만 그 간헐적 불규칙 사건의 목격자는 재현 가능성을 보증하라는 과학의 요구에 부응할 수가 없기에 과학은 이러한 카오스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무시해버린다. 유형의 세계는 인과원리가 가볍게 위반되는 세계이지만 과학의 세계가 유지될 것이다.

 

유형의 세계는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하기는 충분히 강하지만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세계이다. 우발적 사고들, 물질적 대상들의 갑작스런 궤도이탈이 존재해서 과학적 실험이 수행되기에는 너무 잦은 비인과적 무질서가 출몰하는 세계이다. 결국 이런 세계는 단지 운동을 기록할 수 있을 뿐,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장소에 대해서만 일시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세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시적 뷸규칙성도 명시적 무질서 밑에 숨겨져 있는 법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충분히 증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FHS의 세계이다.

 

불확실성의 양태위에 세워져 있지만 일반적 통계를 세우고, 거기서 행동하며 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과학 속 세계에 산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과학 밖 세계의 실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교통법규라는 질서의 체제 속에 산다고 여기지만 얼마나 많은 불규칙성, 우발성, 인과성 없는 사건을 수시로 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래서 과학의, 질서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라 간주하면서도 불합리성을 배제할 수 없어 주의(注意)’를 강화할 것을 주문하지 않는가. 이 주의란 것은 불확실성 위에 선 세계에서 요구하는 의식이 할 수 있는 살아가는 방법이다. 칸트가 말하는 과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는 곧 카오스가 지배하는 세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의 확률론에 의지한 충분치 않은 사고는 주사위를 일천 번 던져 앞면만 나오면 곧 사기라고, 도적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틀렸다. 자연의 필연성 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세계는 우리가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정돈된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형의 세계, 칸트가 동일시한 잡다(雜多)만이 존재하는 카오스의 세계도 있다. 이 세계는 온통 뒤죽박죽인 세계여서 그 어떤 법칙도 정돈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아마 이러한 세계는 사실상 하나의 세계라 말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과학의 가능 조건이 들어설 수도, 의식의 가능 조건도 들어설 수 없는 불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곧 사유가 붕괴된 세계이니 여기서는 그 무엇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FHS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사고 실험에서 칸트의 응답을 실패로 돌리는 제유형의 세계를 우리는 발견해낼 수 있다. 이 저술이 매혹적인 것은 이러한 과학 밖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우리 세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사유해 보는 것이다. 아마 이 지적 탐험의 여정은 많은 독자들에게 흥미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해 주리라는 점이다. 지금 과학의 맹목적 속도를 관망하면서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들을 생각해보라. 그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우주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감각에 대해서.

 

메이야수는 FHS의 원형이 될 수 있는 문학작품을 발견해낸다. 과학소설로 잘 못 분류된, 그가 명명한 과학 밖 소설, 원인들과 그 근거들의 논리 속에 결코 다시 포획되지 않는 불규칙과 우발성의 세계를 우리는 그려낼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과학적, -이성적 악몽의 세계, 이러한 재앙 한가운데서도 유지되는 일종의 양식(良識,bon-sens)을 대중적 인기작품으로 상상해 낸 작품이다.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이 그것인데, FHS-2의 가설을 온전히 수용하면서, 즉 과학적 변이, 자연의 변덕이라는 겉보기에 우연적인 것의 세계에서 질서의 존재가 그 세계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은 과학 없이도 스스로 정신적 경험을 행하고 이를 통해 생과 과학사이의 간극 속에서 전대미문의 무언가를 발견 할 수 있음을 메이야수의 이 논의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이상 SF소설로 분류된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FHS 작품을 발견하고 싶은, 그래서 메이야수에게 이를 알려주고픈 심정이 싹튼다. 아마 발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 정합성, 과학적 필연성에 매몰된 현대 인류에게 FHS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낯설고 어려운 작업일테니 말이다. 짧고 간결한 논의 속에서 아주 강렬한 지적 호흡을 한 충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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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 - 주의 기울임, 알아차림, 어우러져 살아감에 관하여
팀 잉골드 지음, 김현우 옮김 / 가망서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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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잉골드는 사회인류학자다. 최근 생태학이나 인간-비인간 동등성의 존재론을 논의하는 많은 저술들에 그 이름이 빈번히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팀 잉골드는 이들 학제적 이론가들의 담론에 섞이기를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연구 대상의 현상적 조건에 동요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세계와 이어진 관계로부터 단절되기를 요구하지만, 진리추구란 세계에 온전히 참여해 서로 조응해야만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구성하는 모든 글들은 학자로서의 페르소나를 내려놓고 그 자신의 목소리와 손과 마음으로 쓴, 그로인해 마구 뒤섞이고 흔들리며 혼란에 빠지는 자유를 만끽한 누구나 감응할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마치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한 발짝 벗어나야 한다며, 일상의 언어를 기피하고 무척이나 깊이 사유한 척하며 배제와 소외를 자부심으로 하는 그 분리와 배척, 스스로 인간-비인간 자신과 타자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모순의 지대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저자는 평평한 운동장, 좀 더 균형잡힌 대칭적 접근 방식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근대성의 강력한 신화중 하나인 자연의 굴레를 벗어나 역사의 길로 들어선 유일한 종으로서 인간이라는 신화에 올라 탄 인간중심주의의 축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최근 주류 철학적 위치를 점하는 존재론으로는 우주만물이 서로 뒤섞여 흐르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말 할 수 없다고, 그것은 고립과 경계를 세운 개념이며, 이 세계의 단일성이 아닌 다중 세계를 상정하기에 서로 열려있으며 단일한 생성의 세계에 함께 참여하는 이 세계를 기술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세계와 조응하려면 아예 무대 뒤로 가서 은밀히 움직이는

존재들에 합류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31

 

존재론적 실재론에 경도되어 있는 내겐 당혹스러운 비판이지만,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활동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단일 세계임을 부정하는 앎이 없는 나로서는 재발생론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한다. 이처럼 이 저술은 삶들의 끊임없는 전개와 생성 속에서 서로 합류하고, 존재 및 생성이 한데 얽힌 흐름의 와중(진행중; in between-ness)으로서 조응을 말한다. 이 조응은 주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뿐 아니라 예민함과 판단력으로 그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응답하는 법을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 세계 만물은 존재하는 상태(being)’가 아니라 생성중인 상태(becoming)’라는 저자의 발생론적 시선, 그 자체를 서술하는 글들이라 할 수 있겠다.

 

카렐리아 북부 숲 어딘가에 높이 4미터, 200톤가량의 거대한 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경사면에 멈춰있는(0 zero의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는)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이 바위를 붙들고 있다. 빙하에 떠밀려 내려오다 그곳에 머물러 있다. 비와 눈, 혹독한 추위와 바람과 햇살의 반복 속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작은 균열이 발생하고 그 틈에 씨앗이 날아들고 파고든 뿌리가 바위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이 위태롭게 균형잡힌 조합은 그 내부의 고요 속에서 영원히 숨을 멈추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 이 고요가 깨지고 바위도 굴러 떨어질 것이다. 이것은 순간에 머무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몽상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광경을 상상하며 나는 하나의 바위, , 나무의 광대한 시간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그 광경 한가운데 뒤섞임으로서 비로소 감응을 교환하고 그 끊임없는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조응할 수 있는 감각을 얻게 된다.

 


여기의 글들은 이처럼 이 세계--존재들에 귀를 기울이고 세심하게 바라보며 그들과 어우러져 그 순환의 흐름에 함께하는 시간을 발견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물질과 함께하며 그들과 조응하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마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하고 이성이 통치하는 질서,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자연에 맞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투쟁의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망각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 기후-세계의 물질적 격동 사이에서 조화를 모색하는 인간은 이성의 규칙에 목을 내놓고 더욱더 공학기술을 미래의 방법이라 여긴다, 그럴수록 인간은 비인간 존재와 투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영역들이 늘어날 뿐임을 보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하나의 일례가 기록되고 있는데. 오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역전적 양상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설정한 통상의 분류된 범주에 맞지 않거나 경계를 넘는 것들은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금기의 관습을 통해 물리적, 상징적으로 배제한다. 오염을 제거하는 것, 즉 오염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개념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화작업이란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지적한다. 물질을 재결합하거나 재방출하기 전에 모재(material matrix)에서 분리해 내는 정화 작업, 자연적으로 섞여있는 상태에서 비교적 무해했던 물질을 순수한 형태로 분리해 낸 후 다시 혼합하거나 결합하는 과정에서 인류를 해악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진정한 오염(핵폭발 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오염에 대한 정화의식이야말로 세계내 존재들을 위협하는 가장 극악한 행위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거나 완벽하게 정지 상태로 보이는 것들은 그 존재를 무시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보이지 않거나 정지해 있어 지각할 수 없다고 그 존재들이나 그 내부에 움직임이 들끓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숨 쉬는 생명체인데, 우리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공기부분(aerial part)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듯,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이 대기의 모든 움직임의 와중에 무수한 존재들이 형성되고 해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심한 주의 기울임, 조응이다. 행위의 주체성과 수용성은 서로 얽혀 순환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 주체의 주관에 의한 일방이란 환상이고 곧 부러질 교만이다.

 

어찌 보면 이 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길을 전복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기술과학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상상이 점점 더 많이 삶을 윤택하게 주리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말조차도 비인간은 물론 같은 인간 종에게조차 상대적 약자와 그들 존재에 비인간화라는 사악함을 뒤집어씌우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람직하지 않은 변종, UDV(undesirable variants)’와 같은 두문자어로 우려되는 문제를 가리키는 동시에 외면할 수 있는 사악한 말을 천연덕스레 내뱉는다. 이 말에 대한 경멸, 지시 대상의 원래 명칭을 말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연루의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여, 숙련된 주의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한 발 물러서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척한다. 이 두문자어로 된 말아닌 파렴치한 기호 뒤에 숨어 세계에 합류할 것을 부정하며 타자를 철저히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 두문자어의 범람은 지시 대상의 실재를 부인하고 관심 밖으로 밀어내며, 그에 얽힌 정서를 지운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못 보면서도 살펴보고,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아주 사악한 효과를 거둔다. 즉 두문자어로 된 말아닌 말은 사물의 진실을 가리고 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은폐하는 언어가 가하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이 세계를 마치 적합한 품종들만의 보호구역으로 만들 것인 양 차이 속에 어울려 살았던 사람들과 비인간 존재들을 폐기하듯 떠밀어 분류하고 쫓아낸다. 아 멋진 신세계여! 실업자, 성소수자, 이주민, 무국적자...들이 떠돈다. 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LGBTQ+’와 같은 두문자어를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두문자어에 그 내부에 담겨있는 무수한 존재들의 연결을 은연히 가리면서 마치 점잖게 객관적 지위를 차지한 듯 문제를 바라보는 그러한 기회주의적 정서를 읽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세대에서 말을 줄여 두문자만으로 된 이상한 조어를 사용하는 언어 혐오적 양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 이 두문자어의 증가는 그만큼 이 세계에 폭력성이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라 여긴다면 지나친 상상인 것일까?

 

영국 국방부가 발표한 두문자어가 2만 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NKZ, 핵살상 지대(nuclear killing zone), HK, 물리적으로 대상을 파괴하는 공격(hard kill) 등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간단한 사안처럼 포장하여 군사화가 땅과 생명에 가하는 폭력을 위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생명살상은 안중에 사라지고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파괴를 계획하는 데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된다. 군 지휘관은 그저 HK를 지시한다. 이처럼 두문자어는 그 언어에 내재된 폭력성을 가리는 효율성에 가려져 손쉽게 세계와의 단절을 도모하고 폭력을 정상화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세계에서의 우리 자신의 존재 조건이란 무엇인지, 이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럼으로써 인간-비인간이 공존하는 이 세계 속 삶의 경험이 얼마나 풍요로워 질 수 있는지를 감각하는 시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행해 온 모든 가정을 뒤집어보는 사고 실험을 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캐럴 보브, 스탠드에 매달린 조개껍데기스탠드에서 떨어진 조개껍데기2011, 거품이 이는 말의 침전시 작품, 오비츠 애밀리 컬렉션 제공, 로렌초 비투리 촬영, 100


사물은 우리의 개념적 서술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에게 굴복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상대적 인간 약자가 강자에게 자율적으로 복종했던 적도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캐럴 보브의 거품이 이는 말의 침이라는 주제의 전시작품들은 세계의 이러한 이치, 세계의 생동과 과잉의 충돌이 빚어내는 상황의 불안한 한 예시일 것이다. 인간이 보지 않는 세계의 역동성은 이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복잡한 얽힘의 세계이다. 무수한 요소들이 뒤섞이는 와중에 그 균형이 평정의 감각을 찾아가는 세계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사고의 대상과 감각의 대상 중 사고의 대상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둘 사이에 흔들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이른 것 같다. 판단을 유예하라.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궁정화가 아펠렉스가 헐떡이는 말의 게거품을 묘사하지 못해 던진 스펀지가 원하던 효과를 그림에 나타내듯, 그러면 개념들이 정리되고 마음의 평화를, 세계의 평온을 되찾는 길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조응이란 여러 참여자 사이에서 그 와중에 이뤄지는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태초에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들이 함께 그 속에서 조응하는 존재임을 아주 느린 속도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속에 침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이 세계의 주체가 아님을,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 조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과 사유, 행위와 방식을 체득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그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우러져야 한다. 그 아주 시원적인 단순한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대체 그것에 이르는 길을 막아서는 장벽들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되어줄 터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사유의 전복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는 필독서라 감히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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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2-0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진작부터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다시금 의욕을 북돋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필리아 2024-12-03 11:55   좋아요 1 | URL
네, 오늘 우리들의 익숙한 사고의 전복을 안내하고 있어요.
함께 어우러져 뒤얽혀 조응하는 세계를 느릿한 오랫적 시선의
사유로 회복하는 초대장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초록비님~ :)
 
오늘날의 애니미즘
오쿠노 카츠미.시미즈 다카시 지음, 차은정.김수경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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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철학은 더 이상 주객(主客)을 논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을 주체로 한,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간 - 사물, 동물, 식물, 화학물질 등등 - 을 대상화한 결과 그 오만이 얼마나 잘못된 지식이었는지 반성적 고찰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 세기의 자기성찰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소외되었던 객체에게 새로운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인식론의 교만을 탈피하여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하려는 객체지향 이론 또는 실재론적 존재론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비롯한 대상 일체 위에 군림하여 인간 자신의 힘, 즉 자력(自力)으로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와 이로 인한 철저한 비인간 일체에 대한 소외와 자원화라는 합리주의와 효율성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 인간은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비인간을 동등한 주체로서 이해하여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전에 이러한 이해가 없거나 시도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인간과 비인간 등과 같은 이항대립이나, 개체를 더하면 전체가 되거나 전체를 미분하면 개체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일원화하여 동등성과 전체성의 시각으로 통합하려는 유장한 사유의 노력이 있어왔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서구철학의 자성(自省)으로 시작된 후설, 메를로 퐁띠로 이어지는 현상학을 비롯하여 미셸 세르나 브뤼노 라투르를 경유하여 작금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이언트, 티모시 머튼 등 존재론적 실재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철학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의존성이나 주객 혼효성(混淆性) 등의 변화된 성찰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구의 사유는 이항 대립의 관계를 통합하려는 노력만큼이나 독립적이면서 관계들을 분리하는 요소들을 내적으로 포섭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서구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지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라는 잊혀진 고대의 원초 신앙을 21세기에 소환한 것처럼 대담한 기획이며, 철학적이고 인류학적 도전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늘날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짐으로써 150년 전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분리한 후 비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정신(영혼)을 비인간에 투사한그런 소박한 애니미즘이 아니다. 다시 말해 풀, 나무, 벌레, 물고기, 돌 등 삼라만상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정령신앙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 너머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그 힘에 이끌린다는 함의(含意)를 지닌, 거대한 타력(他力)을 느끼며 자력을 잊지 않는 자유롭고 활기찬 사상으로서 타력을 상상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이다. 이미 인간이 무시하고 마음대로 남용하던 비인간의 배후에 숨겨진 힘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은 이러한 지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보다 풍부한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힘도 인간의 지혜도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음을, 또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기분을 기억해내는 작업이다. 21세기는 종교가(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는 일신교가 아니다!) 거대한 주제로 등장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오늘의 인류에게 주어진 새롭고 거대한 테마이다. 주객의 대립이나 정신과 물질 구별의 무용함, 무의미함을 전제로 한, 인간과 비인간이 공히 동등한 정서적, 영적 성질을 가진 존재임을 이해하는 신앙과 실천에 관한 종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인류학자와 불교철학자 두 사람이 나뉘어 애니미즘이 왜 오늘의 인류에게 소환되어야 하는 정당성이 있는지를 인류학과 초기 불교와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탐색, 논의한다. 사실 현대인은 인간과 비인간 정령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애초 상실되어 있기에 비인간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어떤 지적 감흥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장벽이 세워져 있어 표층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언어 이전(以前), 반성 이전과 같이 인간 사고를 초월하는 저 너머 세계에 가 닿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어렵게 여겨진다. 바로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인류가 이해하여야 될 애니미즘 사고가 무엇인지를 민족지적 인류학의 현장 조사, 문학과 철학, 위상 기하학과 종교이론을 넘나들며 흥미롭게 요구되는 애니미즘 사고를 탐사해내고 있다.

 

문자 이전의 시대인 고대 원시사회는 동물의 정령을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죽였을 때, 그 동물의 영혼을 위해 제의를 지냈다. 그 때의 인간들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마음 상태였다. 그들은 인간이었다가 곰과 같은 동물이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는 순환하는 세계를 마음속에 지녔다. 이것은 자신의 뿌리가 가 닿는 무시간적(無時間的) 기이한 시공의 경험이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사고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인류학자인 릿교(立敎)대학 오쿠노 교수는 오직 한 면만으로 형성된, 즉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비유해, 면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걷는 존재를 이해토록 돕는다. 인과(因果)로 성립되는 현실 세계에서 인과 없는 세계가 만나는 놀라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세계로 연결되었다는 색다른 시공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인류학을 공부하는 독자들은 오쿠노가 소개하는 아이누족의 곰 의례나 푸난족의 사냥과 같은 사례를 통해 애니미즘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푸난족의 새 사냥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데, 화살이 든 대통을 훅 불어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인데, 어느 순간 숲 속으로 화살이 날아가고 탁 하고 작은 새가 떨어진다. 우리는 이 장면을 사냥꾼이 화살을 쏘아 새를 맞혀 그 새가 떨어졌다고 인과율에 의해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과연 그럴까? 이것을 동시성으로, 무인과적 연결(우연)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작은 새의 죽음 너머 저편에 펼쳐진 어둠이, 죽음의 시계가 화살을 부른 것이라고, 푸난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살을 불고, 죽음이 푸난과 작은 새를 에워싸며 퍼져나갔다고. 이것이 애니미즘의 관점이다.

 

죽음 속에 자연이 있고 인생이 있으며 생명체가 살아가며 무수한 만남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이해이다. 인과로 연결된 표층적 현실 아래 우연의 집적이 사태간의 결합을 통해 상호 연관되는 별개의 존재 영역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애니미즘의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인간 중심적 사고가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고, 비인간 세계의 존재자들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새가 화살을 맞았을까? 맞았을 수도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사건에는 어떤 인과성도 없지만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시간성이다. 이 세계는 수시로 이러한 무시간성, 동시성이 흘러드는 세계이다. 인과성과 무인과성의 세계가 스치듯 마주치는 찰나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수성이고 인간이 관여한 바가 아닌 인간 너머의 거대한 힘의 작용을 상상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한편 불교 철학자인 도요(東洋)대학 교수 시미즈 다카시는 애니미즘을 불교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서구 이원론의 참된 초극을 향한 무수한 노력들이 환원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을 시작으로 인도의 논리학, 대승 불교에 이미 이원론의 초극에 대한 이론이 발전해왔다는 주장에 입각한다. 특히 주체/대상/하나/여럿이라는 이항대립의 통합을 위한 추구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라는 공간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하다며 소위 삼분법을 설명하는데, 이를 서술하기 위해 논리적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논리가 과학적 논변이 아닌 초월적 형이상학, 즉 불교철학자(선승들 포함)들의 증명할 수 없는 사유들에 의존하고 있어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비판승계하려는 야심은 미완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서구 철학의 실패지점에서 인류에게 요청되는 존재론적 접근인 일원론적 통합의 지향을 동양의 불교와 애니미즘을 교차시키며 그 속에서 모든 영역을 포섭 아우르는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는 측면은 그 시도를 존중하고 싶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철학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서구 철학과 긴밀하게 조응함과 동시에 일본의 독자적 철학을 구축해온 그들의 두터운 층에 시기어린 부러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으로 이어지고, 이를 극복하는데 나가르주나와 도겐의 중관주의 불교 철학을 통해 평면적 대립의 통합 너머 삼차원적 이항 대립의 포섭과 통합으로 나아가는 당찬 주장들은 나름 현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을 발견한 것은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과실인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 1932~)’.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비인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지속적 목소리를 낸 보기 드문 애니미스트란 점 때문이다. 그의 중심 사상은 타력(他力)’이라는 언어가 점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류가 오랜 동안 시달려 온 이중성의 문제를 아우르는 혜안처럼 보인다. 지금의 인류는 자기 힘만을 과신하며 못할 것이 없다고 모든 것을 물질화, 도구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신감 넘치는 이면에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16~17세기 에도 시대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숙적 요시오카 가문과의 마지막 결투에 앞서 승리 기원을 하려다 말고 바로 결투장에 임하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무사시는 배례하기에 앞서 배전(拜殿)의 종을 치려다 말고,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자문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인데 뭘 빌고 말고 할 것인가 하고는 승리 기원을 멈추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그는 왜 기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을까.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타력의 바람을 느꼈기에 그러했다고 해석한다. 무사시가 자력,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싸우려 결심한 것에는 이미 자신이 관여한 바가 아닌 타력이라는 기묘한 힘에 이끌려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애니미즘이다.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항상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과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물과 생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작용에 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상상력은 극도로 편협해졌다. 인간의 자력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저편의 세계를 차단함으로써 세계 실재의 참모습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자연의 보복에 속수무책으로 방황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自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는 저절로라는 뜻이며, ()은 관여한 바 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관여나 해석을 통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자체가 저절로 진실의 작용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겸허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61쪽에서 부분발췌


이 저술은 고대의 소박한 정령신앙의 재판이 아니다. 이 세계와 인간 존재의 위치를 깨닫고 잃어버린 상상력, 감수성을 복원코자하는 작업이다, 서구 일변도의 이원론적, 이항 대립적, 주객분리의 근원적 결여의 사유를 넘어서 만물이 공존하는 세계, 인간 사고와 행동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제안적 사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인류학이나 불교철학을 학문적 토대로 지닌 사람들을 비롯해 존재론적 고찰이나 객체지향의 철학, 즉 비인간 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과 식견을 충분히 제공하리라 믿는다.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그의 창작 좌우명으로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워!”라는 로트레아몽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겉으로 보기에 대립적 성질의 둘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을 한층 더 대립적인 성질을 가진 수준에 모아놓은 것으로부터 그는 이 복합적 형상과 그것이 드러내는 배경 사이에서 그 구성 요소들 간의 대립과 상관의 이중적 얽힘이 재편성되고 변형 조정된 의미를 밝히는 것이 바로 예술의 목적이었다고 느낀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이질적 존재자들의 얽힘에 의해, 그 보이지 않고 소외된 의미들의 혼효적 창발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애니미즘을 오늘날이라는 바로 지금으로 호출하는 이 논의는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자세를 위한 너무도 중요한 출발의 사유가 되어 줄 터이며, 아마 이러한 태도를 향한 무수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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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9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력>타력>에니미즘‘ 순으로 저는 이해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필리아님 글을 보고 이 상관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본성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 되어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어지는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해석하다 보니 각각 다르게 이해 되는게 아닐까요? 생각해 볼 만한 좋은 주제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9 12:41   좋아요 1 | URL
애니미즘은 인과성이 없는 저 편의 알 수 없는 힘으로서의 타력을 승인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이 단순한 정의에 동의하는데요, 우리들이 자력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힘에 이미 타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이제 새삼스레 인정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책은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과 민간 신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어쩌면 두 저자의 시도처럼 서구철학이 돌파하지 못하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인용,소개되는 책들을 더 읽어보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힐님~, 벌써 주말이네요, 즐겁고 유쾌한 주말 되시기를요 :)
 
아침 그리고 저녁 (리커버) 문학동네 숏클래식 리커버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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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짧지만 지극히 강렬한 이 이야기를 읽기에 앞서, 안쪽에서 걷다보면 어느새 밖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세계, 그 경계가 바뀌는 신비가 품고 있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질서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게 나의 충동을 그 어느 누구도 강요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는 데도 이어서 이 책을 펼쳐들었던 것은 과연 우연이기만 한 걸까? 책이라는 사물과 나를 구성하는 유기체와 그리고 온갖 물질과 비물질들이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상호 연결로 조정되는 힘이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은 필연(無因果的 連結)처럼 내게 펼쳐졌다.

 

그리곤 바로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는 새 생명을 예감하는 첫 문장을 만났다. 그 어떤 생명이 소중하고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태어날 아기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아버지 올라이의 마음에 가득하다. 자신의 아버지, 태어날 아이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요한네스가 살아가는 동안 겪을 가장 힘 든 싸움 중 하나일 이 험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하기 위해 싸워야 함을 가만히 응원한다.

 

소설은 2부로 구성되어 1부는 요한네스의 출생의 순간, 생명 탄생을 에워싼 감사와 고투, 생의 시작이란 의미가 귀결한 시어(詩語)들이 생과 소멸의 짙은 사유의 강이 되어 흐르고, 2부는 한 생이 이울어가는, 불현듯 다가온 세계의 경계를 넘어선 요한네스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조망하는 관점의 이야기가 마치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통합된 듯 삶과 죽음의 세계의 동시성(同時性)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생명은 생성되었으면 소멸을 향해가기 마련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대단한 모험의 여정이다. 그렇다고 생의 소멸이라는 어떤 부존재의 허무를 향한 길만은 아닐 것이고, 또한 어느 순간 세계 밖이라는 그 경계를 넘어서 다시 뫼비우스의 길 밖에서 안으로 들어설지 알 수도 없는 일일임을 나는 어렴 풋 믿는다.

 

물론 그 순환의 걸음 길을 다시 돌아 나올 때는 또 다른 변화의 존재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이 윤회(輪廻)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우주의 모두가 연결되었음을, 마치 나와 네가 하나이면서 서로 다르고 그 자신임을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떤 존재자를 분리하는 경계가 희미해져 이 세계우주의 거대한 흐름의 근원임을 실감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어느 날 잠자기 위해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간 아내 에르나가 다음날 아침 내려오지 않았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었음을, 요한네스는 마치 생과 멸의 그 이치 그대로의 그러함에 순응하듯, 그래그래, (...)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음을 떠올린다.

 

이른 아침에 깨어나 괜스레 딱히 할 일도 없는 요한네스가 이러저러한 소소한 행위에 앞서 공연히 행동의 순서를 망설이고, 그러다 느닷없이 어떤 동작을 행하게 되고, 이 방 저 방을, 마당과 창고를 기웃거리다 어떤 잡일거리를 발견하고는 하루의 일과가 생겼음에 비로소 평정을 찾는 장면을 읽으며, 공감하게 된 나를 거울처럼 보았다. 늙어간다는 것, 그 시선에는 익숙했던 모든 사물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고요를 내뿜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2부는 이른 아침 이미 사자(死者)가 된 요한네스가 생의 경계를 넘어선 무시간적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연결된 장면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이미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간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 죽은 50년 지기 페테르를 만나 게를 잡고, 그 잡은 게를 시장에서 제일 먼저 사가던 노처녀 페테르센을 함께 기다리며, 젊은 시절 그녀를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걷던 산책길의 어느 날이며, 아내 에르나와 친구 페테르의 아내 마르타와 만나던 한 때, 어느 덧 일곱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절이 무시간(無時間)적으로 흐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빨리 결정을 내리게나.”

 

검은 실루엣으로 흔들리는 페테르의 고깃배는 흰 뱃전부터

교회 묘지 앞 해변으로 들어간다.” - 100

 

항상 반복되던 요한네스의 거동이 보이지 않고 그 어떤 불빛도 비치지 않는 집은 이웃의 전갈로 인근에 살던 요한네스의 막내 딸 싱네의 발걸음을 빠르게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던 길에 딸이 분주하게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곤 싱네를 부르지만 딸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곤 싱네 얼굴에 가벼운 동요가 일어남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정면으로 향해 다가옴을 본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몸을 그저 통과해 버린다. 싱네의 온기가 그를 관통한다. 가벼운 두려움이 떠오른 채 자신을 지나치는 딸아이의 몸을.

 

싱네는 온통 어둠에 잠긴 아버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버지의 담배갑과 성냥이 항상 놓여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집, 싱네는 조심스레 아버지의 침실 방을 열고 등을 킨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꼼짝하지 않는다. 안 돼요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세요. (...)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입술이 떨려온다, 그리고 눈물이 고인다.” 홀로 죽음을 맞고 온종일 침대 누워 계셨던 요한네스, 아버지. 페테르는 요한네스에게 그가 죽었음을,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두었음을 알려준다.

 

친구의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페테르가 온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을 가는 거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내가 너이고 모든 것이 하나이지만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자기 자신인 온 우주세계가 하나인 곳이니, 요한네스와 페테르의 구별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긍정되는 세계,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 인 세계, 작가의 말처럼 끊임없이 생성중인 삶과 죽음의 리듬’, 그 순환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163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하나의 전체가 있어서 거기서 시작이 그대로 끝이기도 하다는 선불교가 떠오른다. 또는 이편과 저편, 나와 너라는 대상이 분화하지 않았다는 요즘의 실재론적 존재론의 세계,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문득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져 서로의 영혼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그 순환의 고리에 순응하는 섭리를 생각게 된다. 작가 욘 포세는 아마 서로 대립하고 분리되어 미분화하는 세계의 추락에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의미한 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인위적 관여를 떠나 자연의 힘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자연법이(自然法爾) , 본원에 의한 것으로부터 저절로 그처럼 있게 한다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가닿게 한다. 미혹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모든 분절의 무화(無化)가 이야기되는 세계 말이다.

 

인간의 힘과 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을 느끼고, 언어와 지식을 넘어서 만물을 있게 한 작용에 마음을 맡기고 열린 기분을 기억해 내는 것, 아마 우리들이 사는 이 세기의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 불안을 탐색하는 작가의 깊고 깊은 사색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주체가 어디 있고 대상화된 객체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주객 분리의 사고가 지금 인간사회를 어떤 지경에 몰아넣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 이러한 목소리들에 대한 한 울림일 것이다. 곰과 나무와 돌의 대화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저 먼 원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알지 못할 향수에 젖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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