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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퀑탱 메이야수 지음, 엄태연 옮김 / 이학사 / 2017년 8월
평점 :
이 저술은 소설 속에 묘사되는 상상 또는 가능성의 내용이 과학의 범위 내에 머물러있는지, 즉 과학적 인식에 종속되는 공리를 암묵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소위 ‘과학소설(SF:Science Fiction)’과 메이야수 자신이 명명하고자 하는 ‘과학 밖 소설(FHS : Fiction Hors-Science)’인 과학법칙의 필연성이 수시로 붕괴되는 세계를 상상한 소설을 분류 사고하는 것이 어떤 철학적 실익이 있는 것인지를 논의하는 짧지만 우리네 삶의 전반적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유이다. 왜 구태여 SF가 아닌 FHS를 상상해야 하는가, 대체 이러한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인과의 필연성이 이성의 한계에 봉착’하는, 즉 과학의 경험이 항상성이라 주장하는 법칙이 붕괴했을 때에도 삶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지금의 인류가 믿어 의심치 않는 자연과학의 법칙이라는 필연성을 쫓아 맹신적으로 그 대상인 자연 일체에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에 대한 회의이며, 그로부터 이를 탈주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물론 메이야수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 저술의 내용은 이를 입증하는 여정이다. 이 물음은 ‘데이비드 흄의 문제’로 알려진 것인데, 칸트의 초월적 연역에 의해 해결된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흄은 『인간 오성에 대한 탐구』에서 ‘당구 시합’에 대한 상상의 서술을 통해 ‘인과 필연성’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1. 데이비드 흄의 문제 제기 - 인과(因果) 필연성에 대한 회의(懷疑)
그 내용은 “경험도 논리도 물리법칙들이 어떤 순간에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이를(확신) 보장하는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법칙들의 항구성에 대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당연히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회의에 기초한 것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옮긴다면 “세계가 자연과학의 대상들로 건설될 수 없는 것이 되려면, 이 세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 문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응답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앞서 실험, 즉 경험이란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학은 바로 이 경험에 의존하여 어떤 항구적 필연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후험적인 것이다. 이 말은 경험이란 과거에 대한 것이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때문에 자연이 오늘처럼 이미 파악된 필연성이란 것이 내일도 따르리라는 것을 경험에 정초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과학을 생각해 보자. 과학은 수많은 경험(실험)에 의해 확인된 어떤 필연성에 기초해 미래도 동일한 경험이 반복되리라 확신하는 가설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주관적 확신이 내일도 임의적 움직임이 없으리라 단정하게 하는 것일까? 흄은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그러한 판단에 이성적인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과거의 경험적 항구성에 대한 습관만이 우리에게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뿐이다.”라고. 결국 이 회의론자는 미래의 필연성을 증명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들이 지니는 주관적 확신의 심리적 원천을 폭로하는 데 그쳤다. 이 저술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데, 흄이 해결하지 못했던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이 도전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두 인물, 칸트와 포퍼의 해결책을 검토하는 것이다.
2. 흄의 문제에 대한 포퍼와 칸트의 응답, 그리고 비판
2-1. 포퍼 인식론적 응답과 그 비판
사실 칼 포퍼의 해결책은 이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면서 마치 자신이 최초로 해결했다고 오인한 것임을 메이야수는 간략히 지적한다. 포퍼의 해결은 존재론적인 물음을 인식론적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본질은 건드리지도 못한 것인데, 아마 그는 이 명료한 차이를 애초에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퍼는 정말 뻔한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떤 법칙이 과학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 권리상 경험에 의하여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가설이 나오면 기존 가설을 거부하고, 경합 이론들에 엄격한 시험을 가함으로써 경험적 검증을 증가시켜 법칙의 확정적 진리를 수립할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법칙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될 수 있고, 더 경쟁력 있는 새로운 추론에 의해 추월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확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포퍼의 해결책 원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사건이 아무리 이상해보여도 모든 사건은 과학의 현재 상태, 혹은 미래 상태와 권리상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흄은 법칙 자체의 안정성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을 하고 있는데. 포퍼는 고작 과학적 지식의 본성, 다시 말해 법칙의 안정성이라는 인식론에 매달려 하나마나한 얘기를 거창하게 주장하며,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라면 동일한 경험이 일어날 것임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태양이 중력에서 벗어나 태양계 밖으로 산책하러 가는 것을 목격할 수 없다는 아주 진부한 얘기를 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흄이 제기한 문제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현상들이 완전히 다르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다면 포퍼가 말하는 이론의 검증이라는 관념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과학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미래 세계에 대한 가설이라는 흄의 물음을 포퍼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포퍼는 이로써 기각!
여기서 메이야수는 칼 포퍼의 과학적 시각을 정확히 반영한 과학소설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 「반(反)중력 당구공」이다. 소설은 프리스와 블룸이라는 두 경쟁관계 과학자의 물밑 대결이라는 배경 하에 “모든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대상은 무중력 상태에 있는 대상과 같이 평온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질량 없는 대상의 속도(즉 광속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제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이것이 포퍼적 소설, 즉 FHS가 아닌 전형적 SF라는 것인데,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과학적 가설이 옛 가설을 몰아냄으로써 또 다른 필연성을 확보하면 그만이라는 얘기이다. 임의의 것이 임의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물음인 흄의 문제가 아니라 법칙들이 일관적으로 붕괴되지 않는 세계를 그려낼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체제 또는 질서 순응성에 기초한 자연과학적 사고의 연속일 뿐이다. 포퍼의 정말 하찮은 응답의 문제점을 지적하다보니 본래의 취지와 잠시 멀어졌는데, 이 저술의 논의인 FHS의 의미를 환기해야겠다.
2-2.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응답과 그 비판
FHS란 어떤 유형의 질서도 구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유형의 질서도 구축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는 정돈되지 않은 순수 잡다이기만 한 것일까? 칸트는 그렇다고 했다. 『순수이성비판』, ‘범주들의 객관적 연역’에서 흄의 문제에 응답하고 있는데, “만일 법칙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도 의식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일관성도 잇따름도 없는 순수한 잡다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흄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데, “상상에 제시하는 당구공이 물리법칙의 순수한 불안정성에 따라 공상적 궤적들을 취할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배제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장면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칸트는 법칙들의 우연성이라는 가설을 부당한 것으로 일축하는 것인데, 자연법칙들이 당구공 사례에서 약화되기에 법칙들이 일반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그 세계 자체가 그와 함께 세계에 대한 모든 주관적 표상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령 우리가 여전히 당구공들을 지각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아무 방식으로나 움직이는 대상들, 즉 과학적 법칙들이 접근할 수 없는 대상들이기에 과학 없는 의식은 이성 작용의 붕괴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부재하다면, 과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이성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칸트의 흄에 대한 응답은 자연법칙이 유효하지 못한 세계는 단조로운 무질서로 환원된 세계일뿐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해결책은 옳은 것일까? 결점이 없는 완전한 응답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FHS의 논의는 더 이상 끌어갈 이유가 없어진다. 과거와의 관계를 결여한 카오스의 세계는 영속적으로 망각하는 일시적 직관의 세계로 환원되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어떤 필연적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속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주장이 옳은지 실험 사고를 해보면 그것이 정당한지 판단이 설 것이다.
그 전에 칸트의 주장에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중대한 결점을 지적해야 한다.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는 그것이 정돈되어 있는 대신 카오스적이어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필연적 법칙이 없는 세계는 무조건 근본적 카오스 세계와 동일시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아마 그러한 법칙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확률론적 법칙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약점은 FHS에 대한 상상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칸트의 초월적 연역에 대한 비판은 메이야수의 지금까지의 대표저술인 『유한성 이후』에서 엄격하게 비판되고 있다. 그것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칸트의 증명은 자연의 필연성과 자연의 안정성을 동일시하고, 필연성의 부재를 곧바로 안정성의 부재로 확장하는 무의식적 추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고, 칸트의 믿음이란 확률법칙의 필연적 존속에 토대를 둔, 증명해야 할 바를 미리 전제하는 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메이야수는 우발적 사건이 도래할지라도 안정적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상상인데, 자연법칙이라는 인과적 필연성의 과학이 중심축을 이루는 이 세계를 당연시하는 오늘의 인류에게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3. 과학 밖 세계의 상상 가능성에 대해서
이제 메이야수는 포퍼와 칸트를 비판한 이후에 그들의 주장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과학 밖 세계를 꾸며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의 세계를 개념화해 보고 있다. 제Ⅰ유형은 너무 미미하게 불규칙적이기에 과학과 의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불규칙 세계이다. 이 세계는 여전히 과학의 세계를 수행하기에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원인 없는 사건들이 간헐적으로 출현하지만 그 간헐적 불규칙 사건의 목격자는 재현 가능성을 보증하라는 과학의 요구에 부응할 수가 없기에 과학은 이러한 카오스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무시해버린다. 제Ⅰ유형의 세계는 인과원리가 가볍게 위반되는 세계이지만 과학의 세계가 유지될 것이다.
제Ⅱ유형의 세계는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하기는 충분히 강하지만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세계이다. 우발적 사고들, 물질적 대상들의 갑작스런 궤도이탈이 존재해서 과학적 실험이 수행되기에는 너무 잦은 비인과적 무질서가 출몰하는 세계이다. 결국 이런 세계는 단지 운동을 기록할 수 있을 뿐,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장소에 대해서만 일시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세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시적 뷸규칙성도 명시적 무질서 밑에 숨겨져 있는 법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충분히 증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FHS의 세계이다.
불확실성의 양태위에 세워져 있지만 일반적 통계를 세우고, 거기서 행동하며 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과학 속 세계에 산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과학 밖 세계의 실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교통법규라는 질서의 체제 속에 산다고 여기지만 얼마나 많은 불규칙성, 우발성, 인과성 없는 사건을 수시로 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래서 과학의, 질서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라 간주하면서도 불합리성을 배제할 수 없어 ‘주의(注意)’를 강화할 것을 주문하지 않는가. 이 주의란 것은 불확실성 위에 선 세계에서 요구하는 의식이 할 수 있는 살아가는 방법이다. 칸트가 말하는 과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는 곧 카오스가 지배하는 세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의 확률론에 의지한 충분치 않은 사고는 주사위를 일천 번 던져 앞면만 나오면 곧 사기라고, 도적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틀렸다. 자연의 필연성 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세계는 우리가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정돈된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제 Ⅲ 유형의 세계, 칸트가 동일시한 잡다(雜多)만이 존재하는 카오스의 세계도 있다. 이 세계는 온통 뒤죽박죽인 세계여서 그 어떤 법칙도 정돈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아마 이러한 세계는 사실상 하나의 세계라 말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과학의 가능 조건이 들어설 수도, 의식의 가능 조건도 들어설 수 없는 불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곧 사유가 붕괴된 세계이니 여기서는 그 무엇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FHS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사고 실험에서 칸트의 응답을 실패로 돌리는 제Ⅱ유형의 세계를 우리는 발견해낼 수 있다. 이 저술이 매혹적인 것은 이러한 과학 밖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우리 세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사유해 보는 것이다. 아마 이 지적 탐험의 여정은 많은 독자들에게 흥미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해 주리라는 점이다. 지금 과학의 맹목적 속도를 관망하면서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들을 생각해보라. 그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우주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감각에 대해서.
메이야수는 FHS의 원형이 될 수 있는 문학작품을 발견해낸다. 과학소설로 잘 못 분류된, 그가 명명한 과학 밖 소설, 원인들과 그 근거들의 논리 속에 결코 다시 포획되지 않는 불규칙과 우발성의 세계를 우리는 그려낼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반-과학적, 반-이성적 악몽의 세계, 이러한 재앙 한가운데서도 유지되는 일종의 양식(良識,bon-sens)을 대중적 인기작품으로 상상해 낸 작품이다.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이 그것인데, FHS-2의 가설을 온전히 수용하면서, 즉 과학적 변이, 자연의 변덕이라는 겉보기에 우연적인 것의 세계에서 질서의 존재가 그 세계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은 과학 없이도 스스로 정신적 경험을 행하고 이를 통해 생과 과학사이의 간극 속에서 전대미문의 무언가를 발견 할 수 있음을 메이야수의 이 논의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이상 SF소설로 분류된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FHS 작품을 발견하고 싶은, 그래서 메이야수에게 이를 알려주고픈 심정이 싹튼다. 아마 발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 정합성, 과학적 필연성에 매몰된 현대 인류에게 FHS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낯설고 어려운 작업일테니 말이다. 짧고 간결한 논의 속에서 아주 강렬한 지적 호흡을 한 충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저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