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리커버) 문학동네 숏클래식 리커버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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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짧지만 지극히 강렬한 이 이야기를 읽기에 앞서, 안쪽에서 걷다보면 어느새 밖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세계, 그 경계가 바뀌는 신비가 품고 있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질서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게 나의 충동을 그 어느 누구도 강요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는 데도 이어서 이 책을 펼쳐들었던 것은 과연 우연이기만 한 걸까? 책이라는 사물과 나를 구성하는 유기체와 그리고 온갖 물질과 비물질들이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상호 연결로 조정되는 힘이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은 필연(無因果的 連結)처럼 내게 펼쳐졌다.

 

그리곤 바로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는 새 생명을 예감하는 첫 문장을 만났다. 그 어떤 생명이 소중하고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태어날 아기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아버지 올라이의 마음에 가득하다. 자신의 아버지, 태어날 아이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요한네스가 살아가는 동안 겪을 가장 힘 든 싸움 중 하나일 이 험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하기 위해 싸워야 함을 가만히 응원한다.

 

소설은 2부로 구성되어 1부는 요한네스의 출생의 순간, 생명 탄생을 에워싼 감사와 고투, 생의 시작이란 의미가 귀결한 시어(詩語)들이 생과 소멸의 짙은 사유의 강이 되어 흐르고, 2부는 한 생이 이울어가는, 불현듯 다가온 세계의 경계를 넘어선 요한네스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조망하는 관점의 이야기가 마치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통합된 듯 삶과 죽음의 세계의 동시성(同時性)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생명은 생성되었으면 소멸을 향해가기 마련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대단한 모험의 여정이다. 그렇다고 생의 소멸이라는 어떤 부존재의 허무를 향한 길만은 아닐 것이고, 또한 어느 순간 세계 밖이라는 그 경계를 넘어서 다시 뫼비우스의 길 밖에서 안으로 들어설지 알 수도 없는 일일임을 나는 어렴 풋 믿는다.

 

물론 그 순환의 걸음 길을 다시 돌아 나올 때는 또 다른 변화의 존재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이 윤회(輪廻)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우주의 모두가 연결되었음을, 마치 나와 네가 하나이면서 서로 다르고 그 자신임을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떤 존재자를 분리하는 경계가 희미해져 이 세계우주의 거대한 흐름의 근원임을 실감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어느 날 잠자기 위해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간 아내 에르나가 다음날 아침 내려오지 않았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었음을, 요한네스는 마치 생과 멸의 그 이치 그대로의 그러함에 순응하듯, 그래그래, (...)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음을 떠올린다.

 

이른 아침에 깨어나 괜스레 딱히 할 일도 없는 요한네스가 이러저러한 소소한 행위에 앞서 공연히 행동의 순서를 망설이고, 그러다 느닷없이 어떤 동작을 행하게 되고, 이 방 저 방을, 마당과 창고를 기웃거리다 어떤 잡일거리를 발견하고는 하루의 일과가 생겼음에 비로소 평정을 찾는 장면을 읽으며, 공감하게 된 나를 거울처럼 보았다. 늙어간다는 것, 그 시선에는 익숙했던 모든 사물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고요를 내뿜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2부는 이른 아침 이미 사자(死者)가 된 요한네스가 생의 경계를 넘어선 무시간적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연결된 장면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이미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간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 죽은 50년 지기 페테르를 만나 게를 잡고, 그 잡은 게를 시장에서 제일 먼저 사가던 노처녀 페테르센을 함께 기다리며, 젊은 시절 그녀를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걷던 산책길의 어느 날이며, 아내 에르나와 친구 페테르의 아내 마르타와 만나던 한 때, 어느 덧 일곱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절이 무시간(無時間)적으로 흐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빨리 결정을 내리게나.”

 

검은 실루엣으로 흔들리는 페테르의 고깃배는 흰 뱃전부터

교회 묘지 앞 해변으로 들어간다.” - 100

 

항상 반복되던 요한네스의 거동이 보이지 않고 그 어떤 불빛도 비치지 않는 집은 이웃의 전갈로 인근에 살던 요한네스의 막내 딸 싱네의 발걸음을 빠르게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던 길에 딸이 분주하게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곤 싱네를 부르지만 딸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곤 싱네 얼굴에 가벼운 동요가 일어남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정면으로 향해 다가옴을 본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몸을 그저 통과해 버린다. 싱네의 온기가 그를 관통한다. 가벼운 두려움이 떠오른 채 자신을 지나치는 딸아이의 몸을.

 

싱네는 온통 어둠에 잠긴 아버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버지의 담배갑과 성냥이 항상 놓여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집, 싱네는 조심스레 아버지의 침실 방을 열고 등을 킨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꼼짝하지 않는다. 안 돼요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세요. (...)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입술이 떨려온다, 그리고 눈물이 고인다.” 홀로 죽음을 맞고 온종일 침대 누워 계셨던 요한네스, 아버지. 페테르는 요한네스에게 그가 죽었음을,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두었음을 알려준다.

 

친구의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페테르가 온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을 가는 거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내가 너이고 모든 것이 하나이지만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자기 자신인 온 우주세계가 하나인 곳이니, 요한네스와 페테르의 구별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긍정되는 세계,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 인 세계, 작가의 말처럼 끊임없이 생성중인 삶과 죽음의 리듬’, 그 순환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163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하나의 전체가 있어서 거기서 시작이 그대로 끝이기도 하다는 선불교가 떠오른다. 또는 이편과 저편, 나와 너라는 대상이 분화하지 않았다는 요즘의 실재론적 존재론의 세계,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문득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져 서로의 영혼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그 순환의 고리에 순응하는 섭리를 생각게 된다. 작가 욘 포세는 아마 서로 대립하고 분리되어 미분화하는 세계의 추락에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의미한 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인위적 관여를 떠나 자연의 힘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자연법이(自然法爾) , 본원에 의한 것으로부터 저절로 그처럼 있게 한다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가닿게 한다. 미혹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모든 분절의 무화(無化)가 이야기되는 세계 말이다.

 

인간의 힘과 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을 느끼고, 언어와 지식을 넘어서 만물을 있게 한 작용에 마음을 맡기고 열린 기분을 기억해 내는 것, 아마 우리들이 사는 이 세기의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 불안을 탐색하는 작가의 깊고 깊은 사색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주체가 어디 있고 대상화된 객체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주객 분리의 사고가 지금 인간사회를 어떤 지경에 몰아넣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 이러한 목소리들에 대한 한 울림일 것이다. 곰과 나무와 돌의 대화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저 먼 원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알지 못할 향수에 젖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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