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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몸의 역사
자크 르 고프 지음, 채계병 옮김 / 이카루스미디어 / 2009년 12월
평점 :
몸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역사
- 인간 몸을 규범화, 억압해온 모욕의 역사를 복원한 걸작
이 책을 다시금 읽고, 감상을 끄적이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21세기 오늘날은 유전학적 창조, 기계화된 신체와 뇌 임플란트, 새로운 형태의 노동 지배, 성의 개념적 변화 등등 인간의 몸에 대한 변화를 숙고하는, 급격한 인류의 신체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적이고 근미래에 대한 정책적 숙의(熟議)와는 달리 중세시대에나 자행되었던 인간의 몸을 권력이 지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러한 역사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발상이 지금 논쟁이 된다는 것, 이미 수세기 전에 종료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자율에 대한 존중, 인간 사생활에 대한 헌법적 보호라는 기본권리로 자리매김한 것들이 단지 소수의 탐욕스러운 권력욕에 의해 파괴되는 이 역사적 시간의 낭비가 너무 안타깝고 분노가 인다. 정말 새삼스런 이야기이지만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앎에의 의지)』를 더 이상은 인용하는 세계가 한국 사회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권력관계는 몸에 직접적인 지배를 수행한다. 몸을 둘러싸고, 몸에 흔적을 남기고, 몸에 고통을 주고, 몸에 노동을 강요하고, 몸에 지나친 예절을 의무 지으며, 몸에 복종의 몸짓을 요구한다.” 라고 썼다. 작금의 정권이 1980년대 이전의 노동착취 시대였던 주 69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며,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를 부활하여 민간사찰에 착수하겠다고 을러대고, 술집 앞 대로에 도열하여 선 인간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과 건들거리며 이 장면을 과시하는 하찮은 하나의 인간을 보는 것은 수많은 인민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인간의 몸, 특히 평민으로 지칭되던 인민 대중은 인류의 오랜 역사 시대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며, 단지 감시와 통제, 억압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어왔던 것이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계의 주체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조차 서구의 역사이지 한국 사회에서 인민의 몸은 그저 무시되고, 비난받고, 모욕당하는 대상에 불과했으며, 20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엄중한 권리로서의 실재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다. 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민적 투쟁의 성취물들이 순식간에 중세의 야만적 폭력의 시대로 회귀하려하고 있다. 한국은 20세기 후반까지 서구의 중세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세의 인간 육체는 권력의 철저한 지배물이었다. 눈물, 피와 같은 체액조차 위계질서의 수단이었으며, 웃음과 꿈조차도 인간 개인에게 권리가 없었다. 눈물은 고귀한 성직자, 군왕, 기사와 귀족만이 흘릴 수 있었으며, 평민이 꿈을 꾸는 것조차 죄악이 되는 세계였다. 하물며 군중 속에서 웃을 경우 매질이 가해지는 것이 입법화되어 있었을 정도이니 인간의 육체성은 깡그리 부정되고 있었다. 몸에 대한 철저한 억압을 도입하고 조장한 권력, 서구의 중세는 이 권력기관이 기독교 교부집단이었으며, 한국 사회는 왕과 권문대신, 그리고 일제의 주구들, 해방 후 오랜 기간 독재자가 대물림하며 인민의 몸을 관리했다.
인간의 몸을 규율하고 통제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그 터무니없는 수사(修辭)들로 이 책은 가득하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 사회는 두 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잘 알려진 기록이며, 또 하나는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진 역사는 문명이란 이름에 의해 억압받고 왜곡된 인간의 본능과 정열의 운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인류의 역사는 서구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도 피지배민의 몸을 은폐하고 지배자 자신들을 과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지배권력 계층의 쾌락과 무위의 게으름을 위해 피지배자의 몸은 도구화되고, 절제와 금욕, 죄악을 씻기 위한 고통의 육신으로만 승인되었다. 이 책에는 권력(기독교 교부들, 귀족 엘리트 들)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각종 굴레를 씌워 통제, 억압했는지 그 기이하고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기술, 관습화의 강요 방식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노동하는 사람들(라보라토르; laboretores)에 가해진 기만들도 무진장하다. 성직과 귀족계급은 피의 금기에 성(性)을 결부시켜 질병화 하는 도식화 과정을 통한 차별에서부터 아담과 이브의 호기심과 오만이라는 앎에의 의지인 원죄를 성적 범죄로 변화시키면서까지 인민의 몸을 악마화하는 이중적이고 교활한 시선들을 볼 수도 있다. 평민은 노동하는 인간들이어야 하며, 그러하기에 육체적 일은 사회적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상스러운 특성으로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아마 이러한 서구 양상의 흔적들이 맹목적으로 수입되어 이 땅에 이식됨으로서 그 추악함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육체의 죄와 입의 죄는 함께한다는 선언으로 색욕과 식탐을 결부하는 것, 금욕과 단식의 강제로 단식기간 9달 후엔 임신곡선이 하강했다고 하니 인간 몸에 대한 처참한 차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위선적 이데올로기, 즉 정치적 기술의 자기 모순적 진실들은 사회적 긴장을 내재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폭발하기 마련이다. 일례로 무소유, 즉 “구걸하며 사는 것이 더 고귀한 신앙심의 표출”이라 선언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말을 들여다보면 이 말이 모순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자신은 창조자지 육체노동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노동자와 농민을 도구와 대지에 결박시키려는 계급적 이익의 표출이상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눈물을 흘리는 것 또한 고귀한 귀족과 성직자만 가능하다고 평민에게 금지되었던 것이 부정한 액체의 사용이라는 충동을 피하는 체액 경제 논리로 둔갑하여 육체의 금욕에 해당한다고 권장하는 것도 인간 세상의 슬픈 코미디라 하겠다. 웃음은 고귀한 머리와 심장이 아닌 비천한 배에서 출발하기에 사탄의 몫이 되어 금지되고, 입(口)은 선악을 구분하는 여과기이자 언동의 흐름을 제어하는 차단기이기에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 되어 발설의 자유, 소위 근대 이후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억압되기도 한다.
이러한 억압과 통제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기장과 공동목욕탕이 폐쇄되어 사라지고 인간의 육체 활동은 전면 금지되기도 하며, 사랑(Amor)은 탐욕스럽고 야만적 정열이라 정의되고, 오직 이웃을 향한 동정심, 연민(Caritas)만을 인정하며 인간의 본능까지 지배한다. 남녀의 애착과 쾌락은 전면 부정되는 사회, 인간의 노동은 오직 도구로서 멸시하면서 “고된 일은 위업을 능가한다”는 헛소리를 통해 평민에게 어떠한 삶의 자유도 부인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을 ‘몸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역사’라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몸을 정치적 관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길들이기와 고문,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의 시대가 열린다. 40여 년 전의 비(非)민주화된 후진적 야만의 시대, 서구의 중세적 양상으로 회귀하려는 야망에 불타는 막되 먹은 정권이 이 책의 길로 안내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마치 이러한 퇴행적 현상에 환호하듯 음식에 지나친 기교를 부착하여 식도락의 강박적 쾌락이 전 매체를 장악하며 사회적 차별을 부추기고, 자기모순의 언어, 무지의 언어를 자랑하고 터무니없이 보편화시키는 모욕의 정상화를 현상화하고 있다.
책은 19세기 역사철학자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의 저술로 시작하여 마르셀 모스, 노베르트 엘리아스, 요한 호이징가, 시오도어 아도르노, 미셸 푸코, 역사학의 역사로 불리는 아날학파의 창설자인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에 이르는 위대한 지성들이 복구해낸 인간 몸의 역사가 어떻게 사회적 규범화로 이어지는 지 그 몸의 기법들을 하나의 가치 있는 역사로 정리해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과 미디어의 양상들, 그리고 공권력의 걸신들린 듯한 탐욕적 이기심과 그 기형성의 정체, 그 은폐된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설쳐대는 혹세무민의 권력도 인간 몸의 자유를 통제할 수 없다. 끊임없는 저항과 통제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사회는 필연코 암흑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사실은 인간 세상의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차별과 모욕이 횡행하는 세계로의 반동적 행태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