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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에디토리얼 / 2022년 7월
평점 :
"문학 작품은 존재가 하나의 형식으로 결정(結晶)화 되는 의미를 획득하는
극소수의 부류들 가운데 하나 이다. 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한정되지 않으며
[...] 유기체처럼 살아있다." -176쪽
책은 20세기 문학의 여정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거장이 새천년(21세기)에 나아가길 기대하는 문학의 길에 대한 탐색으로, 1985~86학년도 하버드대학교 <찰스 엘리엇 노턴(Charles Eliot Norton) 시학 강의>로 ‘다가오는 새 천년기의 문학’이란 주제의 한 학기 강의 내용이다. 총 여섯 번의 강의로 준비되었으나 마지막 여섯 번째 강의를 앞두고 이탈로 칼비노는 뇌출혈로 85년 9월 18일 숨을 거두었다. 강연되지 못하고 준비되었던 이 마지막 원고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있다.
21세기 문학의 기능을 이탈로 칼비노는 여섯 가지로 압축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 그리고 시작과 끝>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문학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문학작품을 왜 읽는가를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이 두 물음은 그리 다른 질문은 아닐 것이다. 내 경험의 다양성이란 사실 좁아터진 것이고, 그 좁은 터전에서의 사유란 것도 볼품없는 것이긴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세계의 표현되지 않거나 표현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예술이 탐색한 표현 가능성은 아무리 치워버리려 해도 눌러 붙는 삶의 무게를 이해하거나 해소할 세계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통의 고전적 과학의 시대는 저물고, 양자이론의 부상(浮上)과 함께 지금까지 무질서와 혼돈의 복잡성으로 이해되던 사물과 현상들에서 질서와 법칙을 발견하며, 마침내 두 모순되는 우주의 질서를 종합하는 최종이론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21세기 오늘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복잡성,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듯 인식되는 세계 속에서 특정한 개별적 현상들이나, 어떤 형식화된 질서나 법칙, 이러한 것들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개체들의 형상에 일어날 법한 가능성이나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칼비노 또한 21세기 문학의 여섯 요소 중 <다양성>의 장에서 “모든 인생은 백과사전이고, 도서관이고, 사물들의 목록이고, 양식들의 견본이다.”라고 말하면서, 문학 작품이란 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계속 뒤섞이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재정리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즉 문학 작품은 우주의 백과사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으로부터 무질서에 자리잡은 인간과 세계의 양태로부터 알지 못했던 어떤 특정한 작용이나 질서, 현상의 발견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다. 이처럼 나는 이 문학강의를 삶의 또 다른 발견을 기대하는 독자의 태도로 읽었다.
첫 번째 문학의 요소로 그는 <가벼움>을 말하고 있다. 아마 모든 작가들의 정언명령이랄 수 있는 ‘시대 표현에 대한 의무’에서 발생하는 무거움과 세계에 대한 불명료함의 발견이 글쓰기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예민하고 민첩한 삶의 발견에 간극을 일으키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칼비노는 이 상황을 벗어나 이런 형벌을 피하는 길은 오직 지성의 생동감과 우연성이라는 가벼움, 가볍게 이동, 도약할 수 있는 정확함과 결단력으로서의 가벼움이었다고.
그래서 삶의 무게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가벼움에 대한 탐색은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함이나 발견의 포기가 아니라 세상의 견고함을 용해하는 지식, 다른 시각과 논리, 인식으로 날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동적이고 가벼운 것을 지각하게 만드는 최초의 위대한 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모든 것(The Nature of things)》을 예시하며, 물질의 진실한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되어있음을, 즉 가벼움에 내재된 진실을 비유한다. 또한 형태에서 형태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추적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도 가벼움의 도약에 내재한 형식의 변화, 새로운 세계의 구현 가능성이었음을 역설한다. 문학이란 존재를 얽어매는 촘촘한 강제성의 그물, 그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드러내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사려깊은 가벼움의 모색이어야 한다는 것일 테다.
두 번째는 이야기의 경제성을 말하는 <신속성>이다. 사실 소설문학은 페이지터너와 같이 이야기의 리듬과 전개되어나가는 본질적 논리가 일치함으로써 재미라는 기쁨을 준다. 만일 지지부진하게 같은 말이나 맥락의 반복, 리듬의 어긋남 등은 읽는 이를 지치게 하고, 주제를 혼탁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한 기사가 귀족 부인에게 즐거운 얘기를 한다고 했으나, 버벅거리고 좀체 지루해 터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참을 수 없게 된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때 부인은 재치있는 말로 기사를 넌지시 비난한다.
“기사님, 당신 말은 너무 힘겹게 총총거리는군요, 걸어갈 수 있게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이야기는 말(馬)이며, 말하는 속도는 정신의 속도라는 것이다. 서투른 이야기는 말의 리듬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속성과 간결함에서 발생할 수많은 생각들의 고양을 차단해버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속도는 그것 자체로 기쁨이고, 문학의 중대한 가치라는 것이다. 더하여 신속성은 시간 절약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느긋하게 벌어주며, 이것은 다양한 리듬, 통사적 전개, 의외의 놀라운 형용사를 수반하여 언어의 독창성과 함께 문학에 차이를 더해준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는 언어와 문장 사용에 있어 <정확성>이다. 대충, 우발적, 경솔한 사용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준다면서 “사전처럼 그리고 생각과 이미지의 풍부한 명암처럼 정확한 언어”의 사용을 말한다. 칼비노는 이처럼 모호하고 흐리멍텅한 언어의 사용을 ‘언어 페스트’라고 언어의 질병, 즉 구체적이고 명료하며 간결한 표현을 개괄적이고 추상적 문구로 평준화해버려 의미를 희석시키고 불꽃을 모두 꺼버리는 폐단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 나 또한 이러한 언어와 문장에 민감하지 못하곤 하는데, 특히 정치나 이데올로기, 관료주의적 획일성과 매스미디어의 천편일률성을 말할 때 진부한 언어들을 대충 사용하는 함정에 빠져,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퇴색시켜버리기 일쑤이다.
정확성과 엄밀성의 사례로서 폴 발레리가 창조한 《테스트 씨(Monsieur Teste)》는 불명확한 것으로부터 조화와 집중으로 이어지는 정확성의 재미있는 읽기를 제공한다. 발레리는 테스트씨를 고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기하학적 추상 개념을 연습시키고 마침내 물리적 고통을 물리치게 하여 정확성을 증명해 보인다. 사물들의 감지할 수 없는 측면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보고할 수 있도록 언어적 노력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즐거운 참조가 된다.
네 번째 요소는 세계정신(世界精神)과의 의사소통 또는 우주의 진리가 보관 된 것으로서의 상상력과 이미지를 말하는 <가시성>이다. 아마 이미지 홍수에 치여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상상해내거나 어떤 논증적 사고를 길어 올리지 못하는 소설가와 현대 독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사실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내적 삶에 투영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언어 표현에 이르는 필수의 경로이다. 이미지들의 자발적 생성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전개 방식은 칼비노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상실하기 십상인 능력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새로움, 독창성, 창의력을 추구하는 시대에 모순되게도 상상력이 쇠퇴하는 세태는 정말 아이러니하다.
<다양성>은 그야말로 문학에서 기대하는, 아니 문학이 갖춰야 할 절대 요소처럼 내겐 여겨진다. 무엇보다 ‘세계를 체계들의 체계’로 인식하게 되는, 즉 세계의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질서나 법칙을 만들어내는 그침없는 상호작용의 세계인 오늘에는 백과사전적으로, 인식의 방법으로, 무엇보다 사건들, 사람들, 세계의 사물들의 관계를 무한히 내포하는 것은 문학의 의무라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고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처럼 전 세계의 도서관 책들을 필사하는 일에 삶을 바치는 두 독학자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망라는 아닐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재능이 결여된 존재들이다. 책으로부터 끌어내고 싶어 하는 무상의 기쁨에 적용하는 능력이 없는, 즉 기본 개념을 자신들이 원하는 실천에 이용하는 능력과 재능이 결핍된 인간들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필사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물론 정신의 질서와 엄밀성에 대한 취향으로서는 비할 데 없지만, 그 방법의 결여는 가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독학자를 쓰기위해서 플로베르는 현실에서 ‘농업, 원예, 화학, 해부학, 의학, 지질학, 교육학, 종교학’ 등 1500권이라는 거대한 독서 모험을 강행했다고 하니, 지식의 허영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으로서는 과연? 하고 머리를 젓게 된다. 실제에 있어 많은 문학작품들은 의미가 풍부한 상징 요소들을 통해 이 다양성을 이미 훌륭히 사용하고 있다.
새천년을 향한 문학 거장의 소설이 담아내야 할 가치를 말하는 이 저술은 단지 문학 작품의 창작이나 독서의 이해를 위한 심층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현대적 삶을 사는 이들의 세계관찰에 대한 의미심장한 시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칼비노의 개별 작품들에 의도나 경향성에 대한 참고적 이해의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나서 문학에 대한 막연함, 그 피상성에 환한 빚이 드리워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단테, 보카치오, 세르반테스로부터 호손과 콘래드, 무질의 작품을 거론하며 소설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진정한 독창성과 기억에 남을 만한 서두와 결말에 대한 강론은 가히 절창인데, 호기심 많은 독자들의 읽기로 남겨둔다.